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61화 (161/203)

시간이 다시 흘렀다. 정연이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이 붓을 잡을 때 붓은 소영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붓은 말할 수 있었고, 인간 둔갑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붓은 계속해서 붓으로서 살았다. 이유는 이제 막 귀물이 된 벼루 때문이었다. 혼자 사고할 때는 심심하고 지루했는데 사고하는 자가 하나 늘어나자, 생각하고 말하는 게 아주 재미있었다.

붓도, 벼루도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나 잘 쓰이지 않았기에 둘은 좁은 서랍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보게, 풍연. 조심하게나. 정연의 둘째가 이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네.”

“이보게, 정필. 조심하라고 해 봤자 어떻게 조심하란 말인가. 나는 발이 없어서 아이의 손길을 피하지 못하네.”

“하긴 그렇군. 내가 지켜 주겠네.”

“아이가 자네를 똑 부러뜨리면?”

“나는 인간 둔갑도 할 수 있네.”

“침입자라고 오해받고 쫓겨나겠군.”

“그렇다면 내가 바로 당신이 정필이라고 이름 붙인 붓임을 밝히면 되지 않겠나.”

“그렇다면 정연은 자네를 더 이상 붓으로 사용하지 않을 걸세.”

“어째서?”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형체를 보고 나면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니까 말일세. 자네가 다시 붓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한 번 의사소통을 한 사람임을 알고 나면 자네를 다시 물건으로 취급하지 못하네.”

“상관없네. 그러면 나는 인간 둔갑을 하고 자네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겠네.”

“정필, 이 친구야. 우리 뿌리가 무엇인가?”

“사물일세.”

“그래. 많이 쓰여야 덕이 빨리 쌓이고 빨리 성장하는 사물이란 말이네. 자네야 인간 둔갑이 가능하니 더는 덕을 쌓을 필요가 없지만 나는 아직 귀물로 한참 쌓아야 하네.”

“자네는 다음 갈래로 나아가고 싶은가 보군.”

“적어도 자네만큼의 소영물 정도는 되어야지. 내 인간 모습이 궁금하지 않은가?”

“하긴 궁금하긴 하네. 그렇다면 내가 자네를 사용해도 덕이 쌓이는가?”

“쌓이지.”

“그렇다면 내가 자네를 주머니에 넣고 여행 다니면서 종종 사용하면 되지 않은가.”

“이보게. 우리는 정연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네. 정연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태어나지 못했을 걸세.”

“음. 맞는 말이로군. 은혜를 갚아야지.”

그 후로 시간이 흘렀다.

당시 한반도는 호환(虎患)이 끊이지 않았다. 위아보다 호랑이가 더 문제였다. 사실 당시가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는 호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산에 먹을 게 없으면 호랑이는 민가까지 내려와 사람을 물어가고는 했다. 그 시기가 되면 평소엔 열어 두는 대문도 모두 걸어 잠갔다.

어느 날, 붓이 인간 모습을 하고 마을을 거닐 때였다. 모퉁이를 걸어오던 누군가와 마주쳤는데 그 사람은 바로 둔갑한 이리 선인이었다. 어째서인지 노인으로 둔갑하고 있었고 정말 훌륭한 둔갑술이었다. 하지만 모든 위아는 이리 선인이 어떤 모습을 취하든 알아본다.

“이런. 여기서 날 봤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답례를 할게.”

“말하지 않겠소. 답례는 필요 없소.”

붓은 하루종일 입을 닫고 지냈다. 혹시라도 실수로 발언할까 봐.

그다음 날 이리 선인이 붓에게 찾아와 말했다.

“비밀을 지켜 줘서 고마워. 나도 답례로 이 부적을 줄게. 쓸모가 있을 테니 가지고 있어.”

붓은 어떤 부적인지도 모르는 채로 품속에 소중히 간직했다.

며칠 후 정연은 밤늦게까지 의뢰받은 필감을 쓰다가 호롱불을 켜 두고 잠이 들었다. 그 불에 끌려 거대한 호랑이가 안마당까지 들어왔다. 정연의 배우자는 계속해서 무사 일을 하고 있었다. 호랑이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설 용기 있고 강한 자였는데 하필 이날은 깊게 잠이 들었다.

‘호랑이는 짐승. 짐승도 생물이다. 생물이 살아가려면 무언가를 섭취해야 한다. 그게 인간은 쌀이고, 호랑이에겐 인간인 것뿐이다. 그러나 정연에게 대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 옳지 않다. 싸우다 패배하고 먹히는 게 아니라 싸워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건 옳지 못하다. 그리고 나는 주인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

크르르….

마루까지 올라온 호랑이에 붓은 결단을 내렸다.

“네 이노오오옴!”

웬 천둥 같은 고함에 가족이 혼비백산하며 일어났다. 정연 일가족은 거대한 호랑이가 앞발로 검은색 긴 머리에 고운 자태를 지닌 여인의 머리통을 후려치려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러나 곧이어 여인의 품에 있던 부적이 눈부신 하얀 빛을 내며 번뜩였고, 호랑이는 그 빛에 깜짝 놀라서 달아났다.

호랑이가 떠나고 붓은 정연의 앞에 무릎 꿇었다.

“나는 그대의 어머니가 만들어 준 붓이오. 사실 얼마 전 소영물이 되었으나 은혜를 갚기 위해 계속 붓으로 머무르고 있었소. 이제 은혜를 갚았으니 나는 친구와 함께 떠날까 하오.”

“그렇게 하시오. 한데 친구라면?”

“풍연자를 데리고 가겠소.”

붓은 벼루를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

둘은 오랫동안 떠돌아다녔다.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갔을 때는 정연의 자녀의 자녀의 자녀의 자녀가 살고 있었다. 붓은 이제 영물 갈래도 지나 신물이 될 만한 덕까지 모았으나 벼루는 여전히 귀물에 머물러 있었다.

하루는 벼루가 말했다.

“이보게, 붓. 나는 이제 죽을 날이 되었네. 산속의 바위틈에서 죽고 싶으니 데려가 주게.”

“자네는 나보다 생각이 깊은데 왜 아직까지 귀물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인정할 수 없네.”

“인정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나는 곧 죽는 것을.”

“나는 이대로 자네를 보낼 수 없네.”

붓도 울고, 벼루도 울었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나는 유랑 중인 진현계 선인인데 우연히 자네들의 대화를 들었네. 자네의 덕을 그 벼루 친구에게 주면 되는 문제인데 어째서 고민하는가?”

“그런 방법이 있소? 자세히 알려 주시오.”

“천기누설이라 자세히는 알려 줄 수 없고. 앞으로 열흘 밤낮을 이 병에 덕을 쏟아부으면 내가 이 덕을 벼루에게 주겠네.”

“고맙소, 선인!”

붓은 목소리 선인이 내어 준 커다란 병에 덕을 담았다. 벼루도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위태로운 목숨을 부여잡고 끈기 있게 버텼다. 열흘 후 오색 빛깔로 빛나는 유리병을 목소리가 들린 썩어 가는 나무 기둥 앞에 뒀다.

“선인. 유리병을 모두 채웠소.”

“크하하하. 너처럼 어리석은 영물은 처음 본다! 나는 선인이 아니라 악신. 네 덕은 잘 가지고 가겠다!”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흉측하게 생긴 악신이 유리병을 가지고 크게 도약하며 떠나갔다.

“아아, 이럴 수가…. 그 말만을 믿었는데. 나는 죽으면 된다지만 자네는 신물이 될 덕까지 잃어서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야말로 신물이 안 되면 그만이네! 자네는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정녕 이대로 헤어져야만 하는가…!”

귀물과 영물이 통곡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벼루는 이제 정말 눈을 감을 때가 되었고, 붓도 그 사실을 알아서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네가 이 덕의 주인인가 보구나.”

청아한 목소리에 붓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예쁘장한 청년은 바로 이리 선인이었다.

“지나가다가 마주친 악신이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기에 캐물었더니 영물을 속여서 덕을 훔쳤다고 실토했어. 여기, 돌려줄게.”

“그건… 벼, 벼루의 것이오. 이리 선인.”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구나.”

이리 선인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풍연에게 부었다.

벼루는 명줄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영물로 진화했다. 검은 머리의 여성으로 둔갑한 벼루와 붓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울었다. 그사이 이리 선인은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고, 벼루는 다시 죽을 때가 되었다. 영물로서의 죽음이었다. 붓은 이번에는 친우를 억지로 살리지 않았다. 둘은 이미 오랫동안 행복했고, 벼루는 이제 윤회에 들어가고 싶어 했으니까.

벼루를 떠나보낸 붓은 이리 선인을 떠올렸다. 이리 선인은 세 번이나 나를 도와줬는데 한 번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게 가슴에 남았다.

붓이 이리 선인에게 찾아왔을 때, 만물상점의 마당을 쓸고 있는 신령 하나와 마주쳤다. 그자는 바로 약사였다. 때마침 이리가 마당에 나와 한숨을 내쉬었다.

“약사. 계속 여기 머무를 생각은 아니지? 의원에서 널 찾아.”

“저는 선인님의 수하입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의원으로 가겠습니다.”

이리 선인의 수하라니!

“선인님!”

“어? 너는 그때 그…. 신령이 되었구나. 축하해. 여긴 무슨 일이야?”

“수하가 되기 위해 왔습니다.”

“뭐?”

“선인님의 수하가 되어 세 번의 은혜를 갚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저를 수하로 받으세요.”

* * *

“그렇게 선인님께 학문가라는 이름을 얻고, 세 번째 심복이 되었지.”

학문가가 긴 회상을 끝냈다.

“약사 님이나 학문가 님이나 엄청 막무가내였군요.”

“너만 할까.”

“스승님, 막무가내인 사람한테 은근히, 아니, 대놓고 약하시네요.”

도진이 이리의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이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듣고 보니 그러네.”

“이해자 신령님도 두 분처럼 막무가내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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