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62화 (162/203)

이해자와 한영수가 동시에 답했다.

“아니, 나는 완전 자연스러웠지.”

“얘기를 들었는데 아주 막무가내던….”

“…….”

“…….”

“우리 자기가 그렇다면 내가 좀 막무가내였나 보네.”

이해자의 빠른 인정에 결혼을 앞둔 연인이 다투는 일은 없었다.

도진은 자기한테도 차를 달라고 우는 끼웅이에게 성의 없이 차를 따라 주고 이해자를 바라봤다. 이제 이해자가 얘기할 차례였다.

“나는 뭐. 이 녀석들처럼 구구절절한 사연은 없고…. 그냥 저승으로 끌려가기 싫은 인간이었어.”

도진은 ‘이리의 신령들’의 뿌리가 다양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관조자는 구름, 약사는 짐승, 학문가는 사물, 이해자는 인간.

그리고 연인은 장사.

“본래도 무속인이었는데, 나쁜 짓을 하며 살지는 않았지만 저승에 가기는 싫더라고. 윤회도 싫고. 말이 윤회지, 사실 기억은 싹 다 사라지는데 그건 그냥 죽음이나 다름없잖아. 내 꿈은 바로 신령이 되는 것이었지! 그래서 내 수명이 다하는 날 저승사자들을 속이고 명부에서 내 이름을 지웠어.”

“미쳤네. 그래서 강림 도령이 네 얘기만 나오면 인상을 쓰셨던 거구만.”

“저승에서는 내가 동방삭 다음으로 기피 인물로 기록되어 있을걸. 아주 자랑스러워.”

“세상에 얼마나 자랑스러울 게 없으면 그딴 게….”

약사와 학문가가 한마디씩 했지만 이해자는 뻔뻔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니까 그 후부터는 퇴마사들이 나를 쫓아다니더라고. 나는 본래 무속인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퇴마 저항 방법을 알고 있어서 잘 도망 다녔어.”

인간은 죽으면 생전 기억이 희미해지고, 지박령이 되어 근방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자는 죽기 전 준비를 잘해 둔 덕에 다른 혼령들과는 달리 생전 기억도 또렷했고, 자유롭게 각지를 돌아다녔다. 물론 그 와중에 연애도 착실하게 했고.

“그런데 당시 퇴마사들은 정말 얕봐서는 안 될 녀석들이었잖아. 결국 붙잡혀서 저주술 부적에 갇히고 말았어. 십 년 동안 가문 놈들한테서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지. 10년간 탈출할 기회가 두 번 있었어. 신령이나 되는 이들과 두 차례나 접촉했거든. 그런데 둘 다 나를 충분히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되면서도 퇴마사 가문이 두려워서 도와주지 않았어. 그러다가 세 번째로 이리 선인님이 나타난 거야.”

‘그 아이는 산 채로 부적이 갇혀 있구나.’

‘예. 아무리 선인님이라도 저희 일에 개입하셔서는 안 될 텐데요. 진현계 임금께서 규율을 정하지 않으셨습니까?’

‘미안하지만 너희를 위해서라도 개입해야겠어. 이대로면 곧 원혼이 되어 부적에서 튀어나와 너희 가문을 말살할 거거든.’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해자는 그때 정말로 원혼, 나아가 악신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절대로 혼자 죽지는 않겠다고, 악에 가득 차서 다짐하던 참이었다.

“선인님 덕분에 목숨은 구했지만… 차마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어. 그게 대략 천 년 전인데. 그때는 한창 선인님을 두려워했던 시기였으니까.”

‘하루 전쟁’에서 이리의 활약상이 널리 퍼지고 누구나 이리를 경외하던 시기였다. 공경하는 동시에 두려운 존재.

이리는 민망함에 끼웅이만 만지작거렸다. 도진을 포함해 모든 이들은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도 이해했지만, 한영수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해자는 연인에게 전쟁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날 괴롭히던 퇴마사 가문도 없어지고 좀 자유로워지나 싶었지만 이제 포도청이 만들어지더라고? 포졸들을 피할 만한 곳을 찾다가 의원으로 향했는데, 분위기가 어수선했어.”

‘이봐요. 무슨 일 있소? 분위기가 시장통 같군.’

‘아, 환자 하나가 가출해서 말이야. 심지어 이리 선인님의 심복이라 곤란하군. 그런데 댁은 누구요? 딱 보니까 환자네. 어이, 새 환자 왔다!’

“치료받으면서 얘기를 들으니 관조자라는 신령이 말없이 의원을 나갔다더라고. 나는 이 기회에 이리 선인에게 은혜를 갚을 생각으로 관조자를 찾아냈지.”

“혹시 쓰레기통에 숨어 있었습니까?”

“뭐야, 김도진. 어떻게 알았냐?”

도진은 화마가 관조자에게 배웠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선인님이 무척 고마워하셨어. 그때 보니 영락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더라고. 그래서 내 안의 두려움도 사르르 녹아 없어졌어.”

“부럽네요. 고마워하는 스승님….”

“의원에 머무르는 동안 잡신이 되었는데 신령이 되기는 진짜 쉽지 않더라. 하지만 인간이었을 적부터의 목적이라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방법을 찾기 위해 의원을 나와 돌아다니던 중 또 선인님과 마주쳤어.”

‘이리 선인님!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안녕. 새로 만들어진 이물을 찾고 있었어. 나비처럼 생긴 머리 장식인데 혹시 보이면 말해 줘.’

이해자는 눈에 불을 켜고 온 동네를 뒤졌고, 어떤 고양이가 품고 있던 머리 장식을 찾아냈다. 이리에게 전하자 무척 고마워하며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이해자는 신령이 되는 쉬운 방법이 있냐고 물었다. 이리는 묘향산 동굴로 가 보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곳에서 이해자는 죽어 가는 호랑이를 만나 도와주고 호랑이 눈썹 털 두 가닥 얻었다. 내려오는 길에 뱀에게 먹힐 뻔한 새 가족을 발견했다. 뱀을 쫓아낸 후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호랑이 눈썹 털을 건네자 새 가족은 고마워하며 둥지에 모아 둔 것 중 하나인 은장도를 선물했다.

또 내려오다 보니 사냥꾼의 그물에 걸려 죽어 가는 구렁이가 있었다. 은장도로 그물을 벗겨 주자 구렁이가 고마움의 표시로 허물을 주었다. 구렁이의 허물을 들고 내려가는 길에 나무꾼을 만났다. 눈이 먼 노모를 위해 구렁이 허물을 찾는다고 하여서 허물을 건넸다. 나무꾼은 허물의 대가로 천 년 묵은 산삼을 줬다. 이해자는 산삼을 들고 가던 중 냇가에서 바짝 마른 토끼를 발견했다.

토끼에게 산삼 뿌리를 먹이자 기운을 차린 토끼가 말했다.

‘나는 십이신장 묘월. 현무 가주님의 명으로 중간계에 왔다가 악신의 습격을 받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으니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

이해자는 신령이 되고 싶다고 말했고, 묘월신장은 이해자에게 신령이 될 만한 충분한 덕을 안겨 줬다.

신령이 된 이해자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것은 모두 이리 선인 덕분이었다. 처음부터, 퇴마사 가문의 부적에서 풀려났을 때부터 이리 선인의 안배였다.

깨달음을 얻은 신령은 바로 만물상점으로 달려가 그의 심복이 되기를 청했다. 물론 이리는 난색을 표했지만 이해자는 만물상점 앞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받아 주지 않으면 이대로 굶어 죽겠다고 땡깡을 피웠고… 결국 수하가 되는 데에 성공했다.

“어때? 완전 자연스럽지. 이 녀석들이랑 다르게 막무가내 아니지?”

“너무나 막무가내….”

“대놓고 막무가내.”

“신령님이 제일 막무가내인데요.”

남이 뭐라든 이리만 아니면 된다. 이해자가 눈을 반짝이며 이리를 바라봤으나 이리는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제일 막무가내였어.”

“……!”

충격받는 이해자를 한영수가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들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과거를 알게 된 신령들은 지금까지 중 가장 화기애애했다. 분위기도 무르익고, 우정도 무르익어 갈 때쯤 도진이 분란의 황금 사과를 던졌다.

“그럼 세 분 중에 가장 오래 산 약사 신령님이 가장 강하겠네요?”

“…….”

“…….”

“…….”

그렇게 그들은 정원으로 나와 도술 대결을 시작했다.

도진의 결계 안에서─‘받아라. 공기 중에 극독을 뿌리는 내 필살기. 자이언트 토네이도!’, ‘우습군. 붓은 글자로 말한다. 해독풍!’, ‘지랄들을 떨고 있네. 전직 무당의 부적술 맛이나 봐라!’─신나게 떠들고 있는 신령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도진은 마치 대여섯 살 난 어린애들을 보는 기분에 휩싸였다.

실제로 이리는 이미 어린애들 싸움 장난을 보는 듯한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끼웅, 끼웅!

공중에 주먹질, 발길질하는 끼웅이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이는 한영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 실제로 다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해자는 강한 신령이란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걱정하게 되는군요…….”

도진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렇지. 사랑이란 감정은 상대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걸 알면서도 걱정하게 만들어 버린다.

도진 또한 이 결계가 갑자기 깨져서 스승님이 화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집중했다. 신령들은 애들이 아니다. 강하다. 그러니까 방심하지 말자….

미간을 구기며 결계에 집중하다가 문득 주위에 안개가 자욱하게 차오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구름이 내려앉은 것처럼…….

잠깐, 구름? 설마 관조자?

쿠구궁!

“으아악!”

도진이 잠깐 집중력을 잃자 결계가 흐트러졌고, 하필 학문가가 지진을 일으키던 중이라 바깥쪽에도 영향이 있었다. 그냥 땅만 좀 흔들리는 것뿐인데 한영수가 비명을 질렀고, 이에 놀란 이해자가 결계를 깨뜨리고 급히 다가왔다. 결계가 깨지니 지진의 여파가 더 심해졌다. 도진이 결계부터 다시 세우려는데, 이리가 중심을 잃고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도진보다 더 빠르게 이리를 부축하는 사람이 있었다.

“조심하세요, 선인님.”

“아…….”

이리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은 소년은 바로 관조자였다.

도진은 결계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콧김을 뿜으며 달려들었다.

“그 손 놔요! 당장 놓으라고요! 스승님이랑 닮았다고 봐줄 줄 압니까? 빨리 안 놔? 으아아악!”

그 뒤로는 이리에게 꼭 붙은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소년과, 그 소년을 후려 패려는 도진과, 도진을 말리는 세 신령의 난장판이 이어졌다.

끼우웅…….

한영수는 오들오들 떠는 잡귀를 감싸 안으며 상수리나무 쪽으로 슬금슬금 피했다. 이해자가 말한 바 있었다. 김도진이 날뛰면 일단 도망치라고. 역시 제 연인의 선견지명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한영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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