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들이 모두 모인 건 오늘이 딱 두 번째였다. 모임은 이해자와 한영수가 돌아간 뒤에도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신령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이리는 자러 올라가면서 술을 허락했다. 약사와 학문가가 어떻게든 관조자를 취하게 만들 생각으로 퍼 먹였는데 오히려 두 사람이 먼저 떨어져 나갔다.
졸린데도 꿋꿋이 남아 있다가 뒤로 넘어가려던 끼웅이를 이리 옆에 재운 도진이 내려왔을 때, 관조자는 학문가와 약사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다정하여, 마치 이리를 보는 것만 같았다.
관조자가 고개를 들고 도진을 쳐다봤다.
“김도진.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스승님이랑 닮은 외모라서 눈여겨보게 되네요. 관조자 님은 스승님의 어린 시절을 보셨습니까?”
“나는 본 적이 없어…. 다만 내 주인이 좋아하셔서 이 모습을 취했을 뿐.”
“좀 기분 나빠요. 자운이라는 태고의 선인이 내 스승님을 그런 식으로… 좋아했던 건 아니죠?”
“…넌 여전히 솔직하구나.”
“제 매력 포인트입니다.”
“지나친 감이 있어.”
관조자가 밖으로 나가자 도진도 따라 나갔다. 관조자는 마치 수없이 와 본 듯 자연스럽게 정자에 앉았다.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와중에 안개가 다시금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자운이란 선인이 이리를 ‘그런 식으로’ 좋아했는지, 대답을 어떻게든 듣겠다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도진이 미간을 좁혔다.
“돌아가려는 겁니까?”
“그래…. 나는 병이 깊어서 오래 나와 있을 수 없단다.”
“스승님께 인사라도 하고 가시죠.”
“곤히 주무시는데 어떻게 깨우겠어.”
“그럼 대답이나 하고 가세요. 자운 님은 이리 선인을 사랑했습니까?”
“사랑이라…….”
관조자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새까만 눈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김도진.”
“말씀하세요.”
“선인님의 팔찌는 매우 특별한 이물이야.”
갑작스러운 얘기에 도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인간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능력을 봉인하는 이물… 아닙니까?”
“맞아. 잘 생각해 보렴. 봉인이라는 특성을…….”
관조자는 이제 보니 말투도 이리 선인과 비슷했다. 내용이고, 말투고, 스승님을 닮은 얼굴로 짓는 저 허무 가득한 표정이고. 죄다 마음에 안 들었다.
관조자는 그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 저 말을 하기 위해 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겠군.’
이리도, 신령들도 아닌, 나에게 이리 선인의 팔찌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도진은 울컥, 짜증이 솟아 괜히 정자 아래쪽의 바위를 발로 찼다. 바위가 와르르 무너졌다.
‘봉인이라는 특성.’
짜증은 짜증이고, 숙제는 숙제다.
관조자가 남긴 메시지를 해석하기 위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내 스승님은 정말 비밀이 많은 분이야.
어두운 눈빛에 뜨거운 불길이 일렁거렸다.
28. 극락
챙그랑!
대여점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진은 오동 화로의 뚜껑을 닫고 급히 달려갔다. 중문을 열자 보인 것은 울고 있는 끼웅이와 다독이는 이리, 그리고 주변으로 산산조각이 나 있는 찻잔 세트 하나….
현무가 보내 준 극락산 특등품 도자기 찻잔인 ‘천사의 나팔 소리’ 세트였다.
끼우웅. 끼웅….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도진이 이리를 쳐다보자 이리가 말했다.
“다치지는 않았어. 많이 놀랐나 봐.”
다치지 않았다는 얘기에 도진은 잔뜩 긴장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존나 놀랐네, 씨. 뭘 잘했다고 울어. 스승님, 소파에 앉아 계세요. 제가 치울게요.”
“응.”
도진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꼼꼼하게 잔해를 치웠다. 불안한 마음에 걸레질을 하다가 나중에는 주술까지 사용했다. 2층의 방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슬리퍼를 신고 다니지만, 고객 중에는 슬리퍼를 못 신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여점에 도움을 구하러 온 이들은 오히려 다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끼우웅…….
끼웅이는 이리의 손가락을 꼬옥 붙잡은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얼굴이 서러움과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을 씻고 온 도진이 이리의 맞은편에 앉으며 끼웅이를 타박했다.
“야, 내가 조심하랬지. 어쩐지 요즘 계속 우리 거 넘본다 했어. 미니어처 찻잔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리 찻잔에 눈독 들여서 이 사달을 만들어?”
끼우웅…….
“시무룩한 척하지 마. 저게 얼마짜리인데. 극락의 도자기 찻잔은 덕으로도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끼웅… 끼잉….
“이 자식이 자꾸… 스승님 손가락 그만 주물러!”
끼웅이가 화들짝 놀라며 이리의 손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옷에 얼굴을 파묻었는데, 그게 딱 이리의 아랫배 부근이라 도진은 또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이 자식이 나 보란 듯이 스승님의 말랑 아랫배에 얼굴을 묻어?”
“말랑이라니….”
“아, 스승님. 혹시 탄탄하세요? 죄송해요. 만져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어서.”
“…….”
물론 이리는 근육질까지는 아니지만 군살 따위 존재하지 않은 복부를 가졌다. 그러나 말해 주지는 않았다.
“김끼웅! 당장 그 얼굴 못 떼?”
도진이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끼웅이가 오히려 허겁지겁 이리의 품에 파고들었다.
“도진아, 그만해. 끼웅이가 우리한테 차 타 주려다가 무거워서 깨뜨린 거야.”
“이 꼴을 보면서 어떻게 그만…. 우리한테 차를 타 주려 했다고요?”
“깨진 찻잔이 우리 거 두 개에 미니어처 하나였잖아. 우리가 아침부터 바쁘게 일하고 있으니까 다과 시간을 갖게 해 주고 싶었나 봐. 혼자서 어떻게든 따라 보려다가 실패한 거야.”
생각해 보니 이리의 말대로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 잔해 속에 미니어처 찻잔 하나가 깨져 있었다.
끼웅이가 삐웅이 일 이후로 두 사람을 돕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고객에게 접대할 때 도진이 물을 끓이면 끼웅이는 찬장에서 다식을 끙차끙차 꺼내 접시에 담고는 했다. 결국엔 도진의 손길에 한 번 더 가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일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얇은 천 하나만 사이에 두고 스승님의 배에 얼굴 처박고 있는 꼴은 못 보겠어요. 나도 못 하는데. 아니면 저도 스승님 배에 얼굴 묻게 해 주시든가요.”
“내 배에 얼굴을 묻고 싶어? 대체 왜?”
“사랑하면 그런 감정이 드는 법입니다.”
“희한하구나.”
이리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끼우웅!
도진은 순수해서 매정한 스승님에게 뭐라 할 수는 없으니 바둥거리는 끼웅이를 붙잡았다. 셔츠 앞주머니에 넣자 끼웅이가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며 자리를 잡았다. 앞주머니를 쓰다듬듯 가볍게 두드린 도진이 말했다.
“스승님, 우리 백화점 가요. 찻주전자까지 몽땅 깨졌으니 고객 접대하려면 또 사 놔야 해요. 겸사겸사 끼웅이용 찻잔도 사고요. 잘 안 깨지는 재질로. 좀 더 가벼운 걸로.”
“도진아, 우리 케이스 안 버렸지?”
“천사의 나팔 소리 케이스요?”
“응.”
“네. 어디 있을 거예요.”
천사의 나팔 소리 세트가 담겨 있던 케이스는 일반 박스가 아니라 나전칠기 보석함이었다. 죽어서 극락에 올라간 나전칠기 명장이 제작한 작품이라 인간 사회에서는 수천만 원도 훌쩍 넘을 만한 가치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버리지 않고 소중한 곳에 모셔 두었다.
도진이 물건을 가지고 왔다. 이리는 나전칠기함의 뚜껑을 열고 붉은 비단 끄트머리를 접었다. 그러자 작은 종이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뭐예요?”
“상품 설명서. 여기에 AS 기간이 나와 있을 거야.”
“호오. 설명서가 있었군요. 근데 왜 숨겨 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