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68화 (168/203)

“무엇을 말이냐?”

“이리 선인이 극락에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면서요. 제 스승님께 전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도진의 말대로 이화는 이리에게 얘기해 두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

눈 밑으로 베일을 쓴 이화가 이리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선인님, 최근 옥경을 사용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 맞아. 나림국에까지 소문이 퍼졌어? 칠성신은 모르는 것 같던데.”

“나림국에는 지난날 만물상점에서 산 이물인 천리안이 있으니까요. 선인님, 저희가 은둔 중이긴 하지만 인간 사회에 위험이 닥치면 언제든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니 혹시 위험한 일이 있으면 저희에게 말씀하십시오.”

“고마워. 나림국은 인간들의 든든한 수호자라는 걸 나도 항상 잊지 않고 있어. 다만 옥경이 대재앙은 없다고 말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할 말은 이거였어? 아니면 다른 고민이 있어?”

“예, 끝입니다. 고민은 따로 없….”

“…….”

“…….”

이리의 새까만 눈과 마주친 이화는 차마 거짓말을 내뱉지 못했다. 두 눈동자가 요동쳤다.

이화는 정말로 옥경에 관한 말만 하려고 했다.

인간계에 간섭하지 못하는 진현계의 선인들과 달리 우리 나림국의 선인들과 군사들은 당신의 부름에 언제든 인간계로 달려오겠다고.

그러나…….

진실만을 말하게 하는 이리 선인과 시선을 마주하자 자신도 몰랐던 고민이 떠올랐다.

“사실은… 월백 대장군의 생일이 바로 내일입니다.”

“생일?”

“생일?”

보리 음료나 다름없는 맥주를 마시며 듣던 도진이 반응했다.

“설마 생일 선물 고민입니까?”

이화가 눈살을 지긋이 구겼다.

“그런 것 같다.”

“그런 것 같다니요? 본인 고민이잖아요.”

“…….”

나도 이게 고민인 줄 방금 알았으니까.

라는 대답은 속으로 삼키는 이화였다.

“생일 선물이라면 제가 아주 현명하게 골라드리죠. 후보는 몇 개입니까?”

“후보… 없다.”

“네? 생각해 둔 게 하나도 없다고요?”

“없다.”

칠성신 때처럼 그냥 전부 다 사라고 깔끔하게 해결책을 제시해 줄 생각이었던 도진이 이화와 비슷하게 미간을 구겼다.

“작년에는 생일 선물 뭐 드렸습니까?”

“주지 않았다.”

“재작년은?”

“역시 주지 않았다.”

“…혹시 지금까지 생일 선물을 준 적 없습니까?”

“없다.”

“아니, 그런데 왜 오늘. 왜 하필 오늘! 스승님 얼굴 보니까 갑자기 생일 선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냐고요. 환장하겠네. 진짜 온 세상이 우리 데이트를 방해하지 못해서 안달인데, 두고 봐요. 나는 언젠가 아무런 방해 없이 스승님과 둘만의 끝내 주는 데이트를 하고 말 테니까!”

이리가 이마를 짚었다. 주위 테이블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어이, 이리 선인님을 연모한다는 소문이 진짜였군. 응원한다구!”

“이런 사람 많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하다니. 역시 장사는 화끈해. 나도 응원하리다!”

극락인들의 응원을 받은 도진이 가슴을 새처럼 부풀렸다. 이리는 이제 이 소문은 어디까지 퍼질까 생각하니 잠깐 암담해졌다.

잠시 후 흥분을 가라앉힌 도진이 이화에게 물었다.

“그럼 월백 대장군도 선배에게 생일 선물을 주신 적 없습니까?”

“월백은… 내 생일마다 항상 선물을 줬다.”

“오, 그렇습니까? 어떤 거?”

“배나무 꽃이 그려진 도자기와 배나무 꽃이 그려진 검, 배나무 꽃이 그려진 화병, 배나무 꽃이 그려진 옷….”

이리가 짧게 웃었다.

“네 이름이 ‘이화’라서 배나무 꽃 관련된 물건을 선물해 주나 보네.”

“저는 나림국에서 주로 야간 정찰을 맡고 있는데, 밤에 보는 배나무 꽃이 꼭 불을 켜둔 것처럼 환하길래 나림국 결계 부근에 배나무 몇 그루를 심었습니다. 그 후로 배나무 꽃과 관련된 선물만 해 주더군요.”

“월백 장군에게도 다정한 면이 있었구나.”

“월백은 원래 다정합니다. 사람들이 어째서 그 녀석을 무서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혈례는 월백이 표정도 싸늘하고 말투도 무뚝뚝하다는데, 대체 어디가 싸늘하고 무뚝뚝하다는 건지. 항상 웃고 있고 말투와 목소리도 상냥한데 말입니다.”

“월백 장군이… 웃기도 해?”

“선인님께서도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제법 자주 웃습니다. 어제도 저와 밤 산책을 하는 내내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리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이화는 오해받는 친구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얼굴이었다.

도진은 그 대화에서 어떤 번뜩이는 직감이 들었다.

20년 짝사랑 경력이 아니면 눈치챌 수 없는 어떤 신호였다.

“이화 선배, 혹시 월백 장군과 배나무 꽃에 대해 나눈 대화가 있습니까?”

“음. 사소한 내용인데.”

“사소한 거라도 선물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거든요.”

“으음…. 언젠가 함께 밤을 거닐던 중 월백이 묻더군. ‘나는 배나무 꽃이 좋다. 그대는?’ 그래서 ‘나도 좋아하오.’라고 대답했지. 한데 이상하게도 월백은 무언가 몇 마디를 더 기다리는 듯하다가 떠난 적이 있다.”

“혹시 그 질문하기 직전에 달에 대한 대화도 나눴습니까?”

“그날따라 하얀 달이 휘영청 하게 떠올라서 그 얘기를 조금 했던 것 같군. 내가 먼저 달을 발견하고는 참으로 아름다운 달이로다, 하였다.”

“그랬더니 월백 장군님은요?”

“묘하게 붉어진 얼굴로 걸음을 멈추고선 정말 달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고 물었지.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배나무 꽃 이야기를 했다.”

“크흡.”

도진이 돌연 더는 들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이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느냐.”

“월백 장군님이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이 다 나옵니다. 세상에 이렇게 눈치 없는…. 흐읍.”

이화와 월백, 하면 당연히 연상되는 시구가 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바로 고려 문인 이조년의 시. 월백은 달, 이화는 배나무 꽃을 상징한다. 배나무 꽃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이 난다. 얼마나 낭만적인 묘사인가.

월백 대장군은 정말 로맨틱한 고백을 했는데 상대가 너무 눈치가 없었다.

“그 녀석이 왜 안타깝다는 거지? 그동안 내가 선물 하나도 안 해 줘서?”

“네. 정답입니다! 그리고 내일 선물은 뭐가 됐든 반드시 하얀 달과 관련된 선물로 하세요! 이왕이면 손 편지도 좀 적어 주시고요!”

그렇다고 남의 짝사랑을 까발릴 수도 없는 일이라 도진이 신경질을 냈다. 이화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이제 알겠다. 그 녀석이 지금까지 내게 배나무 꽃 선물을 준 것은 자기에게도 이름과 관련된 선물을 달라는 뜻이었군. 과연 내가 눈치가 없었다. 당장 하얀 달이 그려진 도자기 술잔을 사야겠군.”

“크흑…!”

절찬리 짝사랑 중인 도진은 같은 짝사랑 동지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괴로워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제정신으로는 못 듣겠어요. 술 더 가지고 올게요!”

성난 멧돼지처럼 쿵쿵거리며 뛰어가는 도진을 보고 이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선인님. 김도진이 왜 저러는 겁니까? 음주 중독증이라면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지금까지는 선물을 받으면서도 줘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어째서 이번엔 선물 고민을 했어?”

이리가 상냥히 묻자 이화는 눈살을 더욱더 찌푸렸다.

“으음. 그간 너무 받기만 해서 민망한 것도 있고…. 이번에 새로 뽑은 죽엽군 별장 녀석이 자꾸만 월백에게 뭔가를 주더군요. 월백이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한다든가, 진귀한 물건을 준다든가 하는데 그걸 또 월백은 다 받아 주고. 최근에는 선물 준다는 핑계로 자꾸 제집에 월백을 부르더군요. 감히 나림국을 다스리는 대장군을….”

“…….”

“저는 그 녀석을 용서할 수 없…. 아,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만 월백은 대장군이니까… 일개 별장과 사사로운 관계를 유지해서는 안 되는 위치입니다.”

“그러니까 질투했던 거구나.”

“질…?”

“질투.”

“질투…….”

이화가 처음 듣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생각에 잠긴 이화를 보며 이리가 빙긋 웃었다. 월백 대장군의 기나긴 짝사랑에 봄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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