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72화 (172/203)

‘며칠간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

‘어, 어, 어디 가?’

‘불광초 찾으러.’

‘거, 거기가 어딘데?’

‘말하면 뭐. 따라오게?’

‘장난해? 우리 오빠 몸으로 가니까 걱정돼서 묻는 거잖아! 어딜 가는지는 몰라도 오빠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내 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가만두지 않으면 뭘 어쩔 건데? 씨발, 봐주니까 점점 더 건방지게 굴고 있어…. 하여튼 사흘 후까지 부적지나 방 한가득 채울 정도로 만들어 놔!’

“분명 사흘 후라고 했는데… 나흘이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일단 경찰 신고는 해 뒀지만… 경찰이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을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한수 오빠가 말하더라고요. 금제가 풀렸다고.”

배리모스가 걸어 놓은 금제. 악신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게 하는 금제가 풀렸다. 그 말은 배리모스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즉, 이석진의 신변에.

그 사실을 알자마자 한수는 이리 선인을 떠올렸다. 일전에 끼웅이가 데리고 왔던 이상한 사람들이 바로 만인사와 배리모스가 종종 얘기하던 이리 선인과 제자였다는 걸 아진에게 알려 주고, 곧장 명함을 찾아 대여점에 전화한 것이다.

“명함 잘 찾았구나. 다행이야.”

“…….”

“일단 도진아, 연고 좀 가지고 와.”

“네.”

갑자기 웬 연고?

아진과 한수는 의문을 참고 기다렸다. 이곳은 신묘한 물건을 취급하는 대여점이니 ‘연고’라는 게 그들이 아는 것과 다른 어떤 기이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도진이 가지고 온 것은 평범한 연고가 맞았다. 한수도 늘 챙겨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정신없이 나오느라 갖고 오지 못했다.

도진은 연고와 함께 면봉과 물티슈를 한수와 아진에게 건넸다.

“둘 다 입술을 얼마나 잘근잘근 씹어 댄 거냐? 아파 보이니까 좀 발라. 내 스승님 신경 쓰시게 만들지 말고.”

“아….”

“고, 고맙습니다.”

둘은 손을 닦고 입술에 연고를 발랐다. 아진은 한수의 입술이 부르터져 피가 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 자책했다.

상처 치료 후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리 선인… 께서는 배리모스가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이리가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어 번 두드렸다.

“불광초를 찾는다고 했으니 마경에 간 모양이야.”

“마경…?”

둘은 그런 이름의 지명이 있는지 머릿속을 더듬었다. 둘보다는 위아 세계에 지식이 많은 도진이 말했다.

“악신 중에서도 미치광이 악신들이 모여 사는 곳을 말씀하시는 거다. 악마들의 세계, 마경. 강화도 부근리에 있는데 출입구를 굄돌 두 개와 커다란 덮개로 눌러놓았다고 해. 들어가기는 쉬우나 나오기는 어려운 곳이니 배리모스도 무작정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질 못했나 보군. 아니면 이석진의 몸만 두고 다른 악마한테 빙의했거나.”

굄돌 두 개와 커다란 덮개로 눌러놓은, 강화도 부근리에 있는 곳이라면…….

“…혹시 고인돌을 말하는 건가?”

“맞아. 고인돌 아래에 마경이 있어. 너희는 모르겠지만, 태고의 선인들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존재했을 때부터 있었던 오래된 세상이다. 그곳의 악마들은 도술 저항력이 높아서 선인은 출입 불가 지역이지.”

도진이 한껏 아는 척했다. 사실 그가 마경에 대해 아는 건 이걸로 끝이었다.

“위, 위험한 곳 같은데. 서, 석진이가, 거, 거기에….”

“선인이 출입 불가라면, 이리 선인. 당신도… 못 가나요?”

“응. 나도 못 들어가.”

“그럼….”

아진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기껏 연고를 발라 놓은 입술을 다시 깨물더니, 곧 작심한 어조로 말했다.

“출입 방법을 알려 주세요.”

“…….”

“저를 들여보내 주세요. 제가 직접 오빠를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주술을 사용하는 퇴마사라면 모를까. 이아진, 너는 주술을 사용하지 못하잖아.”

“저도 만인사에게서 무구 사용 방법쯤은 배웠습니다.”

“네 영능력은 악신에겐 통하지 않아. 네가 마경에 들어가면 오히려 그들이 더 좋아하겠구나. 깨끗한 빈 몸이 들어왔다고….”

“선인님, 저는 악마에게 몸을 빼앗길 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알겠지만 너는 안 돼.”

“선인님…!”

“아, 아진아. 나, 날 믿어. 내, 내가 데리고, 올게.”

한수가 아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아진은 세차게 팔을 빼냈다.

“오빠를 못 믿는 건 아니야. 하지만 오빠마저 나오지 못하면 난….”

“거, 걱정, 하지 마. 나, 나는 강해. 서, 석진이도, 너, 네가 오는 건, 원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둘이 나오기만을 나는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이야?”

“으, 으응.”

아니, 거기서 응이라고 대답하면 어떡해. 뭔가 쿠션을 깔아야지, 쿠션을. 저러면 더 기분 나쁘지!

도진의 예상대로 아진의 눈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는 인형이 아니야. 나도 싸울 수 있어!”

“네가, 이, 있으면, 부, 불안해서, 우, 우리가 제, 제대로 싸울 수 없어.”

아이고, 인간아.

“내가 짐 덩어리라는 뜻이야?”

“지, 짐 덩어리, 까지는 아, 아니고.”

“뭐야?”

“야! 동생한테 말 그따구로 할래?”

도진이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한수가 깜짝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놀란 끼웅이도 얼른 이리의 손안으로 도도도 달려왔다.

“오해하지 않게, 네가 다치는 게 싫다고 살살 달래면서 완곡하게 말해도 부족할 판에 뭘 다 솔직하게 말하고 있어. 너는 사람이랑 대화하는 법도 모르냐?”

“김도진! 너 뭔데 우리 오빠한테 뭐라고 해?”

“아니, 이 새끼가 답답하게 굴잖아.”

“한수 오빠도 완곡하게 표현할 줄 알아. 지금은 강하게 말해야 내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일부러 이러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왜 끼어들어?”

“아, 그래. 잘나셨네. 씨발…. 아무튼 너희 둘 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서 의견 합치하고 와. 정신 사나우니까.”

도진이 창밖을 가리켰다.

찬 바람 쐬며 환기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진과 한수는 외투를 챙겨입고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고 도진의 철없는 소년 같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저 어리숙한 퇴마사 한 명만 보낼 순 없습니다.”

“그렇지….”

“도술이 아예 통하지 않아요? 저번에 소 장군도 도술 저항력 높다고 뻐겨 댔는데 스승님한테 쨉도 안 됐잖아요.”

“물론 내 능력은 통해. 하지만 문제는 내가 거기 들어갈 수 없다는 거야.”

선인은 마경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규율은 진현계 초대 왕이 만들었다. 양쪽이 싸웠을 경우 서로 출혈이 크기 때문에 둘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 규율은 만 년이 넘도록 깨어진 적 없으므로 이리가 들어가는 순간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오늘 밤에 임금님께 여쭤봐야겠어. 허가를 내려 줄 지는 모르겠지만….”

왕은 인간을 아끼고 사랑했다. 약하디약한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규율을 만들 정도로.

그러나 지금은 그 마음조차 잃어버릴 만큼 진득한 우울증에 잠겨 있었다. 저번에도 배리모스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귀 기울이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악신들에게 제 도술도 통하지 않을까요? 소 장군에게는 아예 안 먹히진 않았거든요.”

이리가 도진의 눈을 들여다봤다. 잠재력을 가늠해 본 이리가 고개를 저었다.

“네 도술은 무척 뛰어나지만 마경의 악마들에겐 안 통해.”

“아… 자존심 상하네요.”

“나비쯤 되는 선인도 통하지 않을 테니까 자존심 상할 필요 없어.”

“나비 선인님이랑 비교해도 별로 자존심 회복되지는 않는데. 전우치는 어때요?”

“으음. 확실히 전우치가 동행하면 든든하겠구나. 하지만 바쁜 포도대장에게 세외 악신의 일까지 부탁할 수는 없고….”

도진의 입이 댓발 튀어나왔다. 단번에 뾰족해진 눈으로 제자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도술 능력만 있는 게 아니라고요. 뭐니뭐니해도 저는 장사입니다! 도술도 잘하지만 육체 능력이 바로 제 특기거든요. 가서 이석진 대가리 잘 붙은 채로 구출해 올게요.”

확실히 마경의 악마들은 도술에 면역일뿐,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는 이들이었다.

이리는 생각에 잠겼다.

제자 혼자만 보낸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다. 장군신 몇을 붙여 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세 명 이상….

그리고 도술이 아닌 주술을 사용하는 만월 가문의 퇴마사 후손, 한수가 동행해도 좋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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