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선인님… 그럼 이 사역마도 끼웅이처럼 살아서 움직일 수 있나요? 나중에… 언젠가요.”
아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리가 빙긋 미소 지었다.
“언젠가, 라고 아득해질 필요도 없이 이번 일이 끝나고 얼마 후면 의식이 생길 거야. 내 능력의 일부를 일정 시간 품었으니까.”
“아, 도희가 완전 좋아하겠는데. 말하는 슬라임. 완전 도희 취향인데.”
“끼웅이처럼 귀여운 잡귀라면 저희가 보살피고 싶은데, 배리모스 때문에 괜찮을지….”
그 와중에 이해자가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무시당하는 도진이 고소해서였다.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배리모스가 살았든, 죽었든… 너희는 이제 배리모스에게서 해방이란다.”
“…….”
아진과 한수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정확히는 걱정스러움에 가까웠다. 과거에도 서양의 엑소시스트가 해방시켜 주겠다고 해 놓고서는 처참하게 당했던 경험이 있는 탓이었다.
둘은 아직도 이리와 도진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걱정했다. 두 사제가 배리모스에게 당할까 봐. 잠적한 지 며칠이나 지나서 대여점에 연락한 것도 그 이유였다. 둘을 걱정했기 때문에.
“스승님, 이 녀석들은 배리모스에게 세뇌당해서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 직접 보여 줘야 알죠.”
사역마를 도희에게 주고자 했던 은근한 어필이 무시당한 도진이 입술을 삐죽였다. 이리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통로를 열게.”
한수가 잡귀를 부적과 방울, 부채 등 주술 도구가 들어 있는 크로스백 안에 넣었다. 도진은 황용검의 검자루를 허리춤에 매달았다.
이리는 모두에게 은신술을 사용한 후 고인돌로 향하는 통로를 열었다.
태양이 가장 높이 뜬 시간, 허허벌판에 고인돌이 서 있었다. 관광객이라고는 박물관 쪽에 몇몇뿐이었고, 이런 곳에 흔히 존재하는 잔챙이 위아들도 없었다.
이리가 고인돌의 중앙에 손을 가져가자 지붕 아래의 그늘진 땅이 일렁거리더니 구멍이 만들어졌다. 지름 1m 남짓한 구멍은 어두워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고인돌로 눌러 놓은 지하 동굴. 바로 마경이었다.
“으…!”
끼우웅.
구멍 안에서 흘러나오는 축축하고 어두운 마기와 음기에 아진과 끼웅이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이해자가 한번 손을 휘젓는 것으로 음기를 방어했다.
“다녀올게요, 스승님.”
“응.”
“이해자 님, 스승님 잘 부탁합니다.”
“무사히 돌아오기나 해. 네가 다치면 선인님이 규율이고 뭐고 마경에 처들어 가실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진짜 전쟁이야.”
“맞아요. 스승님은 저를 너무 사랑하셔서 제가 다치면 이성을 잃으실지도 모르죠. 그런 모습도 보고 싶긴 하지만, 스승님 마음고생하면 안 되니까 다치지 않고 오겠습니다.”
이해자와 인사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이리를 향했다. 이리 또한 도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인은 부정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위기에 처하면… 빨간 주머니야. 알지?”
“네. 그럼요. 이별 포옹 한 번만 해 주세요.”
이리는 포옹 정도는 허락했다. 도진이 이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지금껏 둘을 사제지간으로만 알고 있던 아진과 한수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곧 ‘아,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더니….’라는 표정으로 변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잠시간의 작별 인사도 마친 도진과 한수가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리는 곧장 마경의 문을 닫았고, 이해자와 함께 빠르게 퍼져 버린 마경의 음기를 열심히 정화하며 돌아다녔다.
그 후에는 대여점으로 돌아와 평소와 같은 업무를 시작했다.
대여점 고객은 많았고, 아진은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씻고 침대에 누운 후에야 아진은 알 수 있었다. 이리가 자신에게 대여점 일을 시킨 이유를.
바쁘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분명히 한수와 석진에 대한 걱정으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을 테니까.
이리의 예상대로라면 도진과 한수는 사흘 후 오후에 나올 것이다.
구출 작전이 끝난 후 배리모스에 대한 걱정은 여전히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래도 일단 중요한 건 한수와 석진의 안전이었다.
‘나한테는 오빠들뿐이야. 제발 무사히 돌아와 줘.’
아진은 두 눈을 감고 천지신명께 기도했다.
* * *
오랜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한 나무꾼이 있었다.
나무꾼은 유독 힘이 강해 마을에서 누구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어느 날, 아녀자를 괴롭히는 선비를 목격한 나무꾼은 선비를 단숨에 죽여 버렸다. 얼마 후 한 남자가 찾아와 물었다.
‘얼마 전 선비를 죽인 장사가 어디 있소? 그 선비는 내 제자라오. 복수를 해야겠소.’
‘그자는 힘이 아주 센데 무슨 수로 복수하시겠소?’
‘나는 장사라오.’
‘나는 그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으나 당신과 한번 대결을 해 보고 싶구려.’
둘은 낭떠러지에서 힘을 겨뤘는데, 나무꾼이 아무리 발로 차도 장사는 꼼짝하지 않았다. 장사는 하품을 하다가 근처에 있던 바위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바위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고, 나무꾼은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범인을 찾아야 하니 이만 떠나겠소.’
장사가 길을 떠났다. 나무꾼은 장사에게 경외심을 품고 몰래 뒤를 따랐다.
길을 떠난 장사는 외나무다리에서 말을 타고 오는 승려와 마주쳤다.
‘감히 승려 따위가 내 앞을 가로막느냐!’
장사가 괜히 성질을 부리며 말을 발로 찼다. 말이 넘어지며 강물에 빠졌다.
‘성질이 고약한 인간이로구나.’
승려는 장사의 어깨를 양 손바닥으로 눌렀다. 장사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하반신이 땅에 박힌 채 죽었다.
저 강한 장사를 단번에 죽이다니!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무꾼은 세상에는 기인이 많구나, 나는 앞으로 절대로 힘 자랑을 하지 않아야겠다 다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금계필담> (서유영, 1873)
그 승려는 바로 대요괴 이무기였다. 거슬리는 벌레를 눌러 죽이듯 장사를 죽인 이무기는 타고 다닐 말을 찾기 위해 근처 마을에 들렀다. 이무기는 늘 그렇듯 금액을 지불하지 않고 명마를 훔쳐 달아났다. 그러던 중 한 노인과 마주쳤다.
‘자네는 도둑질을 했으니 말을 내놓고 자진해서 관아로 들어가시게.’
‘어디 한번 내게서 빼앗아 가 보아라!’
‘살생은 하고 싶지 않았거늘.’
노인은 땅을 박차고 솟아올라 이무기의 머리를 톡, 건드리고 착지했다. 이무기는 머리가 터져서 죽었다.
이무기를 벌한 산신령은 관아에 말을 돌려주고 산으로 돌아와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벼락이 그의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앞으로 이 산은 내가 차지하겠다!’
산신령을 불태워 죽인 것은 악신이었다. 악신은 금오산을 넘어 팔공산과 비슬산, 가야산까지 차지했다. 점점 세력을 키워 가는 악신을 누구도 막지 못했다. 수많은 퇴마사와 산신령이 흔적도 없이 불타 죽었다. 악신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어느 날 악신은 음기가 가장 강한 밤에 인간들을 괴롭히러 마을로 내려왔다. 겁에 질려 덜덜 떠는 인간들 중 누구를 골라 죽일까 고민하던 그에게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네 악행을 더는 두고 볼 수 없구나.’
‘뭐라고?’
그게 악신의 유언이었다. 노인이 허공에 부채질하자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은 악신에게 다가올수록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악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아이고, 어르신. 저 악신은 오랫동안 저희를 괴롭히던 놈입니다. 어르신께서 저희를 살렸습니다. 당최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선인이라네. 왕께 허락을 받아 진현계를 유람 중이지.’
악신에게 고통받던 이들을 구한 선인은 그 후로도 악신들을 찾아 죽여 없앴다.
선인은 아주 강했으며, 인간들은 그를 존경했다.
하루는 선인이 한 마을에서 이름 높은 퇴마사 가문과 어울려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환한 대낮, 다음 마을로 넘어가려는 선인에게 퇴마사가 말했다.
‘선인님, 앞산 동굴에는 극악무도한 악신이 살고 있으니 오른쪽 강을 건너서 가세요.’
‘하하하. 선인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구나. 나는 악신 따위 두렵지 않다.’
‘정 산을 넘으시려면 조용히 지나가세요. 그 악신은 시끄러운 걸 싫어합니다.’
선인은 환한 햇살을 받으며 산을 타다가 기분이 좋아서 한 곡조를 시원하게 뽑았다. 그때 어떤 중얼거림이 들렸다.
‘시끄럽군….’
고요한 한마디 후 선인의 몸 위로 바윗덩이가 쏟아졌다. 선인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채 죽었다.
걷는 이 위에는 뛰는 이가 존재하고 뛰는 이 위에는 나는 이가 존재한다. 그렇게 가장 위에 있다고 생각된 자의 위에도 또한 위가 존재하는 법.
세상에는 천외천이란 게 있다.
선인을 참혹하게 죽인 악신은 한동안 그 산에서 머무르다가 터를 옮겼다.
옮긴 곳에는 그에게 덤비는 조무래기들이 많았다. 덤벼 오는 족족 짓뭉개며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곳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름은 아주 오래전에 잊었고, 대신 위아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역천의 악신.
그렇게 이름 붙여진 이유는 한때 그가 갈래를 역행하여 신령이 되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목표는 진현계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덕을 쌓아도 진현계는 자신에게 문을 열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악신으로 돌아왔다.
한 번 역행하기도 힘든 갈래를 두 번이나 거스른 존재.
역천은 그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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