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마경에 틀어박힌 역천은 많은 시간을 수면으로 할애했다. 깨어 있을 때는 지나가는 악마들을 아무나 붙잡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어 댔다.
역천의 몸은 태산만큼 커다랬다. 평소에는 동굴 전체 면적의 1/5을 차지하며 뒹굴거렸는데, 몸을 전부 펼치면 동굴 전체의 절반만큼 되었다.
악마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는 왕이 아니라 지배자였다. 마경에는 왕은 없고, 오직 지배자만 있을 따름이었다.
한데 문제는 마경의 악마들 역시 하나같이 미치광이인지라 역천을 두려워하면서도 끝없이 싸움을 건다는 점이었다.
‘역천 님은 마경의 지배자이십니다….’
‘우리 마경의 악마들은 모두 역천 님의 뜻을 따릅니다….’
이런 말을 읊조린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날카로운 발톱을 꺼내며 덤비는 미친놈들이었다. 물론 역천의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낸 적도 없지만…. 이러니 찰마 공주도 마경의 하계 통합을 포기한 것이다.
악마들은 절대 멍청하지 않다. 고도의 지능을 지닌 녀석들이 끊임없이 절대자를 건드리는 이유는 당연히 절대자를 마경에서 쫓아내기 위함이었다.
역천은 요근래 고민 중이었다.
아무리 손가락만 튕겨도 죽어 버릴 날파리들일지라도 시도 때도 없이 덤비면 피곤하기 마련이었다.
마경의 미치광이들을 불러 모아 절반 정도 도륙하면 그래도 싸움을 걸어오는 놈들이 줄어들지 않겠나.
아니면… 그냥 마경을 나가는 방법도 있었다.
역시 인간을 잡아 죽이는 게 제일 재미있는데.
그러나 인간계는 갈 수 없다. 역천은 애초부터 이리 선인을 피해 마경으로 들어왔다.
역시 천지천해가 낫지.
깎아지른 듯 높고 험준한 산과 오래된 바위들이 가득한 곳. 사방위신 정도야 쉽게 제압할 수 있다.
아니면 하계도 있다.
찰마 공주, 그 어린 것이 하계를 통치하며 떵떵거리고 있다던데 내가 가서 짓밟아 줄까.
그 외에 율도국과 나림국, 해저 용궁 등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인간이 동굴에 숨어들었다. 정확히는 인간에 빙의한 악신이었다. 악마들에게 끌려온 악신은 자기 이름을 배리모스라고 말했다.
‘나는 배리모스. 마경에는 불광초를 구하러 왔다. 불광초 한 뿌리를 내준다면 얌전히 이곳을 나가겠다.’
‘불광초…. 그것은 왜?’
‘알 필요 없다. 나는 참을성이 없거든. 그러니 시답잖은 대화는 그만두고 불광초나 가져와라.’
‘재미있구나…. 내가 내놓지 않으면 어찌할 셈이냐.’
‘하, 실랑이할 시간 없다니까.’
배리모스의 몸에서 그림자가 뻗어 나왔다. 쿠구궁! 동굴이 흔들린다 싶더니 그림자 촉수가 순식간에 주위 악마들을 관통했다. 역천은 제게 뻗어 오는 그림자 촉수들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환영인가 하고 막지 않으니 팔목과 발목, 어깨, 옆구리 등에 분명히 타격이 있었다. 역천이 그림자를 붙잡을 수 없어서 당황한 것처럼 배리모스 또한 역천의 단단한 몸을 꿰뚫지 못함에 당황했다.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웃었다.
‘지하의 개구리가 제법이로군.’
‘지상의 애송이도 제법이구나.’
역천은 목을 우둑, 두둑 꺾으며 몸을 부풀렸다. 더욱 커지고 단단해진 바위 거인이 그림자 촉수 중 하나를 순식간에 움켜쥐었다. 수십 갈래의 환영 중 단 하나의 실체를 낚아챈 역천은 그대로 짜부라트릴 생각으로 손에 힘을 줬다.
돌연 배리모스가 그전까지 없었던 기운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역천은 그 기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태고의 선인의 기운이었다.
역천의 힘이 빠진 순간 빠져나온 배리모스가 동굴 벽으로 숨어들었다. 역천은 곧장 배리모스가 스며든 벽의 좌우 사방을 무너뜨리고 바윗덩이들로 틀어막았다. 퇴로를 막은 것이다.
‘그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진 못했구나….’
그림자로 변해 동굴 벽에 숨어든 배리모스를 찾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의 몸에 빙의한 상태. 인간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천은 기다렸다.
굶주린 신체의 비명을 이기지 못한 악신이 튀어나오기를….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 때, 마경은 또 다른 방문자를 맞이했다. 역천은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태고의 선인의 힘을 가진 저 배리모스라는 악신이니까.
두 번째 침입자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천이 싸움을 걸어 왔던 이무기 하나를 씹어먹고 있을 때였다.
“역천 님…….”
“마경의 지배자님….”
악마들이 우르르 몰려와 허리를 조아렸다.
“마경의 지배자께 드릴 말이 있어 왔사옵니다.”
“너희가 날 진정 지배자로 생각한 적은 있더냐? 꼴값 떨지 말고 용건이나 얘기해라.”
“마경에 퇴마사와 장사가 들어와 악마들을 쓰러뜨리고 있소. 퇴마사는 별거 아닌 인간 조무래기지만, 장사는 자기 말로는 이리 선인의 제자라고 하더군.”
“이리 선인? 그 이리 선인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소. 그 이리 선인이 최근에 제자를 받았다던데,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
바깥소문에 어두운 마경의 악마들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리의 기도식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게냐.”
“얼마 전 마경에 들어온 인간을 놔주면 얌전히 데리고 나가겠다 하더군.”
“이미 악마들을 죽였다면서 뭐가 얌전이지?”
“죽이지 않았소.”
“…….”
“쓰러뜨려 도술 저항력을 떨어뜨린 후 동굴 벽에 구속했을 뿐 죽이지 않았소. 적덕 중이라 임금의 규율을 어기지 않는 것 같소.”
“이리 선인의 제자면서 도술을 사용하고, 임금의 규율을 지키는 장사라. 그 녀석은 선인이 되려는 모양이군.”
역천은 이무기를 마저 뜯었다. 와그작, 와그작. 이무기의 누런 체액이 뚝뚝 떨어졌다. 바위 거인에게 기생해 사는 조무래기 악마들이 눈치를 보다가 체액을 핥아먹었다.
뼈까지 남김없이 꿀꺽 삼킨 역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구구궁- 거대한 바위 거인이 몸을 일으키는 딱 그만큼 동굴의 높이도 높아졌다.
악마들은 눈치를 살피다 각자 기둥 뒤로 숨었다.
역천이 주먹을 가볍게 쥐고 동굴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벽과 땅이 접히고 두 남자가 나타났다.
“……?”
“무슨…!”
한창 싸우던 중이었는지 피칠갑을 한 채로 헐떡거리고 있었다. 퇴마사는 어리벙벙한 채로 주변을 둘러봤고, 장사임이 분명한 사내는 당황하는가 싶더니 곧장 역천과 눈을 마주쳤다.
“당신이 역천의 악신이군요.”
비릿하게 올라가는 입매를 보는 순간, 역천의 안에 지금껏 잠자고 있던 전투 욕구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건 도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진과 한수가 마경에 들어온 지 하루가 지났다. 마경의 악마들은 분명 강했다. 스승님 말씀처럼 하계 조무래기들과는 차원이 달라서 적당히 스릴 있게 싸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악마들을 제압하며 마음껏 날뛰던 중 갑작스러운 진동을 느꼈고, 몸이 갸우뚱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곳이었다.
거대한 바위 거인의 노란 눈과 마주하는 순간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네가 이리 선인의 제자인가.”
역천의 음성은 마치 동굴 전체가 말하는 듯했다. 도진조차 머리가 저릿저릿할 정도이니 한수는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만 데려가면 됩니다.”
“꽤 많이 다쳤구나.”
“아, 내 피가 아니라서.”
도진이 도술로 온갖 악마들의 피와 체액을 증발시켰다.
“스승님의 말씀으로는 죽이지 않았을 거라던데. 어디 숨겨 놨습니까?”
“네가 말하는 스승이 정녕 이리 선인이더냐. 그자가 제자를 들였다고?”
“맞습니다. 소문이 어둡군요.”
“이리 선인…….”
크크크크…. 역천이 낮게 웃었다. 한수가 진저리치며 부적을 꺼냈다. 이리가 알려 준 두 가지 주술 중 하나인 그것은 바로 보호 주술이었다.
역천은 한수가 무엇을 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도진만을 응시했다.
“그자는 저 벽에 있다.”
“틀어막고 있는 건 당신이 만든 바위인가 본데. 제 도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바윗덩이를 치워 주시죠.”
끄거극, 끄걱, 끼기긱. 역천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 목을 오른쪽, 왼쪽으로 꺾었다. 마치 곧 있을 전투를 준비하는 것처럼.
“나와 싸워서 이기면 순순히 보내 주마. 그러나 네가 지면 너는 내 일부가 되어야겠다.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씹어먹어 주지….”
“제가 원했던 말이군요.”
도진이 차가운 웃음을 내걸고 한수에게 눈짓했다. 한수가 끄덕했다. 그는 이리가 알려 준 두 번째 주술로 도진과 역천이 싸우는 동안 다른 악마들을 견제할 계획이었다.
“장사에게는 본능이라는 게 있다지…. 그 본능은 어떠하냐…. 네가 나보다 강하다고 말하느냐?”
“당연히 당신이 나보다 강합니다. 내가 본 이 중 세 번째로 강하군요.”
세 번째라는 말에 온몸의 뼈를 들이맞추듯이 끄더덕, 끼드득 하던 움직임이 멈췄다.
“첫째는 이리 선인이겠고. 두 번째는?”
도진은 ‘나다, 이 새끼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찰마 공주입니다.”
크크크. 하하하하하!
역천이 웃음을 터뜨렸다.
“찰마 공주! 찰마, 그 어린 것이 나보다 강하다고?”
“…….”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크크큭…. 크하하하하…. 하계와 마경을 이간질해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속셈이냐?”
사실 찰마 공주와 역천의 악신은 비등비등했다. 그러나 역천이 이 좁은 마경에 틀어박혀 지낸다면 언젠간 찰마 공주가 명확하게 우위에 설 것이다. 도진의 생각엔 그러했다.
“나는 선인의 제자로 적덕 중인 신분.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네가 말한 결투가 말싸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면 이제 대화는 그만하지.”
크하하하하! 도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역천이 크게 웃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마치 포효와도 같은 웃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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