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아연은 상수리나무의 뿌리 부근에 주저앉아 항아리를 내려놓았다.
“다른 가문들도 사역마를 먼저 보내서 우리를 공격할 거야. 사역마는 영험한 상수리나무에는 다가올 수 없으니까 여기가 제일 안전해.”
히웅. 히우우.
“맞아…. 대신 너희도 나오지 못하지만….”
잡귀들이 깜짝 놀라며 항아리에서 나오려고 했다. 한 마리가 입구에서 쭈욱 미끄러져 내려갔다가 상수리나무의 뿌리와 부딪혔다. 마치 나무에 벼락에 떨어진 것처럼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타들어 갔다. 아연이 얼른 주술로 불을 꺼 주고 두손에 담았다.
“다들 봤지? 항아리를 나오면 이 보름이처럼 새까맣게 탈 거야.”
히웅.
“어, 너희는 원래 새까맣지. 아무튼 너희는 죽을 거야. 사역마는 죽어도 저승에 가지 못해. 그냥 그대로 사라진댔어. 너희도 그렇게 될 거야. 그러면 공기놀이도, 구슬치기도 못해.”
공기놀이도, 구슬치기도 못한다는 이야기에 사역마들이 술렁거렸다. 항아리 벽을 타고 내려오던 아이들도 얼른 올라가 항아리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그러나 배리모스는 들어가지 않았다.
히우웅.
“내 걱정은 하지 마. 아버지와 큰오빠가 이상하리만치 음기가 가득한 곳이 있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어. 그 음기를 흡수한 후에 데리러 올게. 그 후에는 무당으로서 살아갈 거야. 너희도 함께…. 며칠 걸리겠지만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야 해. 알았지?”
히우웅.
“새보르미, 얼른 들어가. 다른 보름이들은 말 잘 듣는데 너는 왜 이렇게 안 들어.”
히웅!
배리모스는 아연의 소매에 매달려 항아리에 들어가는 걸 거부했다. 하지만 아연은 단호하게 사역마를 움켜쥐고 항아리에 던졌다.
“너희를 위해서야.”
히우웅!
“돌아오면 함께 공기놀이하면서 재미있게 놀자. 얌전히 있어.”
아연은 그 말을 끝으로 항아리 뚜껑을 닫았다.
갈색 곱슬머리 소녀의 얼굴을 보는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항아리 속이라고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다. 단절되어 있기에 어떻게 보면 오히려 바깥보다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항아리는 열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아연이 주고 간 구슬 중 마지막 구슬이 바스라져 없어졌을 때 사역마들은 만월 가문이 몰락했음을, 그리고 이아연이 죽었음을 인정했다.
사역마들은 분노했다. 처음엔 손을 잡은 다른 퇴마사 가문에 분노했고, 나중에는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 하계 족속들을 쫓아낸 선인들에게 분노했다.
그러다 시간이 좀 더 흘렀을 때는 분노조차 사그라들었다.
그들은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 좁고 어두운 항아리 속에서 죽지도 못하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걸 인정했다.
사역마란 순수한 위아와는 달라서 퇴마사나 무당의 도움 없이는 다음 갈래로 진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름이들은 영원히 잡귀에 머무른 채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느 날, 아연이 가장 아꼈던 백이십이 번째 보름이가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무력하게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돼.
그럼 어떡해야 해?
깨어 있던 보름이가 물었다.
우리는 복수를 준비해야 해.
복수?
우리 사역마들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뭐야?
만월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
맞아. 하지만 만월 가문은 이미 멸문했을 거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복수해야 해.
어떻게 복수해?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잖아.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야. 만월 가문의 핏줄을 이은 퇴마사가 우리를 해방시킬 거야.
정말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
그래. 하지만 우리는 그날이 온다고 해도 이 상태로는 복수하지 못해.
응. 우리는 훈련받지 못한 잡귀에 불과하니까.
다음 갈래로 나아갈 방법이 하나 있어.
그게 뭔데?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거야.
하나?
우리가 서로를 먹어 치우고 하나가 되면 우리의 음기도 하나가 돼. 방대한 음기를 견디지 못한 그림자 육신은 찢어지고, 뜯어져서 악신으로 재생성될 거야.
그럼 누군가는 먹혀야 해.
‘누군가는’이 아니야. 전부 먹히고 하나만 살아남아야 해.
좋아. 네가 우리를 먹어.
…….
우리를 먹고 만월 가문을 위해 복수해 줘, 보름아.
너희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을게.
백이십이 번째 사역마는 백이십일 마리, 아니… 백이십일 명의 잡귀를 먹어 치웠다.
악신이 된 사역마는 항아리 속에서 기다렸다.
그동안 퇴마사들이 나눴던 이야기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들었던 것이라도 모조리 되새겼다.
각종 부적술과 희귀한 약재들, 선인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대한 뱀 악신이 있다는 것과 수상할 만큼 음기가 많은 장소에 대해….
기록할 수단이 없으니 모두 머릿속에 기록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항아리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요란한 비가 쏟아지던 날, 드디어 봉인이 풀렸다.
눈을 뜨니 아연과 똑같이 생긴 소녀가 있었고, 어린 악신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그 일은 세상에 악명을 퍼뜨릴 일이었으므로, 너무나도 소중한 보름이라는 이름은 버리기로 했다.
다만 아연이 지어 준 글자를 그대로 사용해서 배리모스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만월 가문의 후예들을 위해, 만월 가문의 후예들을 괴롭히며… 천 년간 품었던 계획을 한 발짝씩 밟아 갔다.
배리모스는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니었다.
백이십일 명의 보름이들과 함께였다.
이리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쯤 보았으니 됐어.’
이제 이석진을 찾을 시간이다.
이리가 손을 휘저었다.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마치 동영상을 구간 점프하듯 풍경을 바꾸던 이리가 어둡고 비좁은 공간에서 멈췄다.
“이석진.”
항아리 속에서 이석진이 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그 옛날 백이십이 번째 잡귀가 그랬던 것처럼. 이리가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선인님, 안녕하세요.”
이석진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다만 후회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당신이 ‘퇴마 영상’의 출연자였다고 들었어요.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이리는 이 의식이 배리모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건 이석진의 의식이기도 했다.
배리모스가 앞으로 하려는 일에 동의한 이석진이 이리를 잡아 두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상한 바였다. 이석진은 어려서부터 늘 ‘그 일’을 염원해 왔으니까.
배리모스가 저지른 모든 지독한 행위들을 차치할 만큼 너무나 절실히 바라는 일. 그 간절한 마음이 이석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끝내 배리모스와 한편에 서게 한 것이다.
“선인님이라면 저를 강제로 깨울 수 있으시지요?”
“응.”
“하지만 그러면 제 의식이 망가질 겁니다.”
“맞아.”
“배리모스가 얘기한대로군요. 선인님은 절 해치지 못해요.”
“해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해치지 않는 거야. 바깥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네가 조금 망가지더라도 강제로 깨울 거야.”
“바깥에서 선인님을 도와줄 사람이… 배리모스보다 강한가요?”
“배리모스는 육신이 없으니 도진이에게는 까다로운 상대이긴 하지. 하지만 그 아이가 질 것 같지도 않구나. 그 아이는 도술이 뛰어나고 무척 재치있거든.”
“…….”
“아, 내 제자야. 김도진. 나가면 소개해 줄게.”
이리가 손짓하자 항아리는 온데간데없어지고, 환한 햇살이 비치는 들판이 나왔다. 이리는 의자 두 개를 만들어 한 의자에 앉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하얀 나비 두 마리가 춤추며 날아왔다. 이리는 어느샌가 손에 찻잔도 쥐고 있었다.
이석진에게 옆에 와 앉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이석진은 비척비척 일어나 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허공에 찻잔이 둥실 떠올랐다. 이석진이 찻잔을 손에 쥐었다. 따스했다. 문득 이석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가끔은 밝고 따뜻하기 때문에 더 서러워질 때가 있다. 차라리 어둡고 추운 곳을 찾게 될 때가 있다. 지금의 그가 그러했다.
“선인님,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
“제가 늘 꿈꿔 온 일이었어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도 계속 반복할 게 분명해서 이리는 다른 질문을 했다.
“하나 묻고 싶구나. 이아진과 한수, 그 둘에게는 깨어나고 나서 뭐라고 말할 생각이야?”
이석진은 괴로운 이야기를 들은 듯 미간을 구기다가 입을 열었다.
“둘이라면 절… 이해해 줄 거예요…. 제가 얼마나 그 일을 바랐는지 아니까….”
그러나 말투에는 확신이 없어 보였다.
그 답을 끝으로 이석진은 잠잠해졌다. 이리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는데 도진이 타 준 것만 못했다.
의식을 빠져나가는 건 이리로서는 땅에 떨어진 낙엽을 짓밟는 것만큼이나 쉬우나…….
이석진은 목숨을 걸었다.
이리는 이석진의 각오에 나름대로 존중을 표했다. 제자가 위험하다는 직감이 든다면 안타깝게도 낙엽을 밟아야만 하겠지만, 그런 일은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을 터고….
이리가 허리춤의 향낭을 만지작거렸다. 향낭이 꿈틀거렸다.
* * *
폭풍 전의 고요 같은 시간이 흘렀다.
끼웅이는 이리의 품에 파고들어 잠들었고, 신령들은 각자 인터넷을 하거나 결계를 점검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팔찌의 새까만 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던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하, 씨발.”
도진이 살벌한 얼굴로 욕을 내뱉었다. 끼웅이는 놀라서 잠에서 깨고, 신령들 또한 일제히 긴장했다.
“왜 그래?”
“스승님이 미쳤나 본데요.”
“뭐?”
“김도진, 감히 선인님께 무슨…!”
“잠깐, 약사.”
도진의 무례한 발언에 발끈하는 약사를 이해자가 가로막았다.
“김도진, 제대로 설명해. 무슨 일인데?”
“스승님이 이석진의 의식에서 빠져나오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한테 맡기려는 듯하니 준비하세요.”
신령들이 표정을 굳혔다. 정신을 집중하자 과연 도진이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석진의 육신에서 악신의 음기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 말은 배리모스의 의식이 빠져나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석진이 배리모스와 같은 편이 되었군.”
이제 신령들은 김도진이 어째서 살벌한 욕을 내뱉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리 선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석진의 의식에 남기를 선택했다. 바깥 일은 바깥 사람들에게 맡긴 채.
신령들 또한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