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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189화 (189/203)

189화.

“하, 진짜….”

분노한 도진의 손아귀에서 의자 등받이가 와자작 부서졌다. 도진은 잔해를 불태워 없애고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차가운 웃음을 내걸자 악신이 따로 없었다.

“야, 김도진. 진정해. 지금 너 얼굴 악신 같아.”

“진정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이 상황에서 진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얼마나 화가 났는지 한 음절, 한 음절마다 분노가 묻어 나왔다.

“배리모스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혼자서?”

“네, 사실 신령님들은 큰 도움이 안 돼요.”

“야….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 안 해도 우리는 우리 수준을 잘 알거든. 너 혼자 싸우게 못 둔다며 질척이는 스타일 아니야.”

“죄송합니다. 지금 좀 머리가 돌 것 같아서. 병원 옥상으로 유인해서 싸우겠습니다. 이해자 님이랑 학문가 님은 병원 결계에 신경 써 주시고, 약사 님은 스승님 몸 부탁드립니다.”

“내 목숨보다 우선해서 지킬 테니 걱정마라.”

끼우웅!

끼웅이는 겁먹어서 눈물을 퐁퐁 흘리면서도, 도진과 함께하겠다는 듯 폴짝폴짝 뛰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도진은 끼웅이를 간단히 집어 들어 이해자에게 던졌다. 이해자가 바동거리는 끼웅이를 다시 이리의 품 안에 넣어 주며 말했다.

“김도진, 우리의 결계가 너와 배리모스의 힘을 견딜지 모르겠는데. 근처에 뭐 공터 없어?”

“다른 곳은….”

도진은 싸움 장소로 적당한 곳이 생각났다. 주위가 파괴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싸울 수 있는 장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도진이 위치를 말하자 신령들은 좋은 생각이라며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용케도 그곳을 생각해 냈구나!”

“그 정도 거리면 공간이동술을 사용해야겠네.”

“저도 거들겠습니다. 얼마 전에 스승님한테 배웠거든요.”

“너는 덕 아껴 놔. 배리모스와 일전을 벌여야 하니.”

쿠구궁…….

미세한 기의 떨림은 이제 못 느끼기도 어려울 정도의 진동이 되었다. 병실 안의 가구와 물건들이 흔들리면서 미끄러지거나 떨어졌다. 만약 결계가 없었다면 인간들은 지진이 일어난 줄 알고 난리가 났을 터였다.

이리 선인의 세 심복은 동요하지 않고 부적 용지를 꺼내 공간이동술을 준비했다. 이리의 ‘통로’처럼 특정 장소로 이동하는 술법인데, 시전하려면 먼저 부적 용지 수백 장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야 했다. 그 다음엔 또 이동진을 그려야 해서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쿵, 쿠구궁!

소리가 점점 커지고, 누워 있는 이석진의 몸에서 스멀스멀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배리모스가 육신을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도진이 마지막으로 이리의 육신을 에워싼 결계를 한 번 더 확인한 후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크흐흐흐흐흐-!

악신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마치 귀에 대고 웃는 것처럼 가까이서 들려왔다. 환하게 켜졌던 조명은 몇 번 깜빡이다가 꺼졌다. 병실이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물론 신령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해자가 바로 손가락을 튕겨 불빛을 비췄다.

“으악, 씨발.”

이해자가 기겁하며 물러나다가 전등을 밟고 넘어졌다. 다른 신령들도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그도 그럴 것이…….

넓은 특실을 가득 메울 정도의 커다란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거대한 노란 눈 한 개가 달린 그림자였다. 손을 가져다 대면 늪에 빠지듯 집어 삼켜질 것 같은 어두운 검은색 그림자. 공간이 비좁아서 얼굴을 가로로 눕히고 있었으며, 하나뿐인 샛노란 눈으로는 일행을 하나하나 훑었다.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김도진이 여전히 분노에 찬 안광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배리모스. 이아진과 한수가 어디 있는지 궁금한가?”

-……네가 김도진이로군.

노란 눈이 스스스 굴렀다.

-이자가 이리 선인이고.

생각해 보니 배리모스와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간접적으로 마주했을 뿐 직접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 그분이 만물의 주인이신 이리 선인이다. 너는 지금 네 꾀가 통해서 스승님을 잡아 뒀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스승님이 널 봐주고 있다. 그러니 너는 수작 부리지 말고 얌전히 처분을 기다려라.”

-알고 있다. 태고의 힘을 지녔어도 상대하기 쉽지 않겠더군.

“그럼 싸울 생각하지 말고 이석진이나 깨워!”

-내가 왜?

그림자가 크크크… 스산하게 웃었다. 그에 따라 병실이 다시 흔들렸다. 신령들은 흔들거렸으나 도진만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굳건했다.

-네 말대로 이리 선인은 금방 빠져나올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얼른 실행해야지…….

배리모스의 그림자가 천장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김도진, 붙잡아!”

이해자가 외치기 전에 도진은 이미 도술로 밧줄을 만들었다. 빠르게 뻗어 나간 금줄로 배리모스의 그림자 일부를 붙잡는 데에 성공했다.

-크흐흐흐…….

배리모스는 한 덩어리나 되는 그림자를 주저하지 않고 버렸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가 금줄에 묶여서 바동거리다가 스스스 차갑게 식었다.

“그림자가 1차 결계를 빠져나갔어! 어디로 이동했지?”

“옥상으로 가는군요. 얼른 이동진 완성시켜서 옥상으로 가지고 오세요. 한 분은 꼭 스승님 지키고요!”

말을 끝낸 도진이 바로 창문으로 달렸다. 창문을 통과한 후 그대로 비상하여 옥상으로 향했다. 올라가면서 왼손에는 금검, 오른손에는 피웅도를 들었다. 총 721개의 이물 중 무기류는 단 여섯 개. 그중 하나는 마경의 악마와 싸우면서 파괴되었고, 나머지 다섯 개 중 두 개를 들고 왔다.

‘배리모스가 어째서 옥상으로 갔지?’

안 그래도 옥상으로 유인하려고 했다. 이리의 육신이 있는 병실에서의 전투는 위험하므로. 배리모스가 스스로 움직여 주니 이쪽으로서는 다행이지만… 이유가 뭘까.

옥상에 도착한 도진은 부러 찾지 않아도 바로 배리모스를 발견했다. 마치 밤하늘의 어둠을 하나로 모아서 아무렇게나 반죽해 놓은 듯한 그림자 덩어리가 옥상 면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결계를 찢고 나갈 듯 거센 기운에 옥상정원의 화초는 전부 시들어 버렸다.

“배리모스, 뭘 하려는 거냐?”

-네 스승은 내 목적을 알고 있던데 너는 아직 모르는군….

그림자가 크게 넘실거리더니 사방에 부적이 떠올랐다. 족히 수천 장은 될 것 같았다.

오로석영지로 만든 듯했는데 색상이 새카맸다. 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기 때문에 새카매 보인 것이었다. 도진이 갈고리를 만들어 한 장을 낚아채 왔다. 처음 보는 문자가 적혀 있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태워 없애고, 다른 부적들도 없애기 위해 조그만 푸른 불꽃을 수백 개 만들어 냈다.

화르륵! 부적들 몇 장이 타오르자 배리모스가 그림자를 여러 갈래로 뻗어 도진을 공격했다. 피웅도와 금검을 휘둘러 대부분 잘라 냈으나 아래에서 뻗어 오는 그림자 촉수에 오른쪽 손목이 잡혔다. 이 그림자는 영능력과 덕을 흡수한다. 바티칸의 사제도 그래서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그림자는 금세 오른쪽 손목에 스며들었다. 도진은 그림자가 더 뻗지 못하도록 팔목 부근에 검지와 중지를 갖다대 결계를 만들고, 검지 끝에 상처를 냈다. 붉은 피와 함께 어두운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오른손이 저릿저릿했다.

그사이 배리모스가 공중에 떠오른 부적을 널리 퍼뜨렸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고층 병원 옥상에 수천 장의 부적이 떠올랐다. 그러나 신령들의 결계에 가로막혀 더 멀리 퍼지지 못하자 배리모스가 그림자 덩어리들을 토해 내 결계를 공격했다.

“용마, 지금이야!”

푸히잉!

혹시 이런 일이 있을까봐 용마를 미리 옥상에 풀어 두었다. 검은 비늘로 이루어진 길쭉한 날개를 단 용마가 덩어리들을 물어서 와그작 씹어 없앴다.

-방해하지 마라!

배리모스가 그림자 촉수를 뻗자 도진이 얼른 그 촉수를 타고 건너가 나머지 촉수를 자른 뒤 용마의 등 위에 탔다.

-으으으으…!

분노한 배리모스가 몸을 크게 부풀렸다. 큰 덩어리를 내뱉을 기세에 도진이 피웅도와 금검을 교차해 붙잡았다.

푸우우웃! 배리모스는 큰 덩어리가 아닌 작은 덩어리들을 수백 개 뿜어 댔다. 치이익, 검은 연기가 타오르는 새카만 불덩어리들이었다. 도진이 수십 개는 쳐 냈으나 나머지는 모두 결계에 박혀서 결계를 녹여 버렸다. 그 녹은 구멍으로 부적이 날아갔다.

“젠장!”

-크크크크크크…….

저녁 시간, 도시의 하늘에 떠오른 부적이 부풀어 오르더니 풍선 터지듯 터졌다. 노란 가루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금가루?

눈송이?

도진이 얼른 구멍을 나뭇잎으로 틀어막고 바람에 날려온 가루를 확인했다.

이것은…….

-이제 과거의 영광이 재현될 것이다…….

배리모스의 음산한 목소리에 이어 지상이 혼란으로 가득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가, 갑자기… 으아악!”

“으, 으악. 귀, 귀신이야!”

“아아아악! 이것들 뭐야!”

도진이 지상을 내려다보니 시민들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퇴근하던 중년인이 엉덩방아를 찧은 채 지나가던 혼령을 손가락질했다. 옆에서는 한 여자가 무릎까지 오는 잡귀를 보고 비명을 질렀고, 그 뒤쪽에서 남자 두 명이 잔챙이 요괴들에게 돌멩이를 던졌다.

노란 가루가 뿌려진 구역의 인간들이… 위아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도진은 부적의 정체를 깨달았다.

영안이 없는 이에게 영안을 일시적으로 트이게 하는 부적을, 효과가 영구적으로 유지되도록 변형해서 퍼뜨리고 있었다.

주술을 통한 일시적인 목격이 아니었다.

영원히 이 신비로운 존재들을 보고 느끼게 했다.

이석진의 염원대로.

-이제 세상은 다시 퇴마사를 필요로 하겠지…….

“미친….”

과거를 되찾겠다 했던 것은 바로 이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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