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양옆에서 이석진을 부축하는 한수와 아진을 보고 배리모스가 긴 신음을 내뱉었다.
-어떻게…….
“간단해. 이아진과 한수가 이석진을 직접 설득했지.”
정확히는 아진과 한수의 ‘기억’이 이석진을 설득했다.
이리는 의식제인 전, 아진과 한수에게 도움을 구했다.
기억의 일부를 빌릴 수 있느냐고.
아진과 한수는 당연히 수락했고, 둘의 기억을 향낭에 담아 가지고 들어갔다.
이리가 빌린 기억은 두 사람의 어릴 적 기억이었다. 배리모스를 만나기 전,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어린 날의 아진과 한수가 담겨 있었다. 향낭에서 튀어나온 어린 둘의 모습이 이석진의 마음을 바꾼 것이다.
-…인간은 변덕스럽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군.
배리모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리 선인과 일행의 뒤쪽으로 여럿이 더 넘어왔으나, 배리모스는 관심을 거두었다.
몰아치던 벼락이 사라진 대지에 침묵만이 남듯, 폐허가 된 복지관도 이제는 고요해졌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포도청에서 옥살이를 해야지. 저 사람들이 바로 포도대장과 포졸들이다. 네놈이 일으킨 소란을 듣고 왔나 보네.”
-…….
“차라리 소멸시켜라, 이런 말은 안 하냐? 자존심도 없어?”
-없다.
악신의 노란 눈이 아진에게 머물렀다.
-나는 살고 싶다.
도진이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다가 금검을 뽑았다. 크윽, 악신이 음기를 토해 냈다. 태고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인지 바로 쓰러지지는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악신이 언뜻 주위를 둘러본 바, 그사이 수십 명이나 되는 인원이 모여 있었고 하나 같이 김도진만큼이나 강한 기운이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은 저항할 때가 아니었다.
악신은 겸허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포도대장의 호리병에 구속되는 순간을.
치욕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김도진의 도술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괜찮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 살아남기만 하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살아남기만 하면….
“새보르미.”
-…….
악신이 눈을 떴다.
다가온 이는 포도대장이 아니라 이아진이었다.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 아연이 순조롭게 성장했다면 딱 이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은 쏙 빼닮은 얼굴.
아진은 뚱한 얼굴로 쭈그려 앉았다.
“네 이름, 새보르미였다면서.”
-…….
“나는 이아연이 아니야. 이아진이야.”
-알아. 내 꼴을 비웃으러 왔나?
“나중에 네 꼬라지가 어떤 모습일지 미리 알려 주러 왔어.”
-뭐? 나중에… 꼬라지?
“그래!”
아진이 손에 쥔 것을 배리모스에게 척하니 보여줬다.
바로 찹쌀떡처럼 생긴 까만 반죽이었다.
“옥살이하고 나면 여기에 처넣을 거야. 네 잘난 힘도 다 빼앗은 다음 이 찹쌀떡 슬라임 속에서 살게 할 거라고. 평생 우리 심부름을 하면서 지내야 해. 어때, 끔찍하지?”
-…….
배리모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검은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날 증오했던 게 아니었나?
아진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진은 이리 선인 앞에서 배리모스를 소멸시키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분명 진심이었다. 그때는 분명 배리모스를 소멸시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왜 잠깐 초라해진 모습을 봤다고 연민이 싹터 버리는 걸까?
대체 나는 왜.
아진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배리모스를 용서하고 싶었다.
“…착각하지 마. 너와 같은 편이 된 우리 오빠를 용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너도 용서해 주는 거니까.”
-…….
노란 눈을 천천히 깜빡이던 배리모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무당은 화합하는 자라는 건가….
“뭐라고?”
-…….
“에이, 재수 없어. 포도대장님, 이제 잡아가세요!”
아진이 일어섰다. 배리모스는 아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퇴마사는 말살을 추구하고 무당은 조화를 추구한다. 그 진리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과거의 것은 모두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구나.
배리모스는 눈을 감았다. 곧 악신은 포도대장 전우치의 호리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죄지은 자는 이제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할 시간이었다.
전우치가 배리모스를 호리병에 집어넣고 포졸들과 논의하는 그때 소 장군은 엉망진창이 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폐허였다. 왜 이곳에 와서 싸웠냐 따져 묻고 싶었으나, 지금 여기 모인 이들의 면면과 명성이 하나같이 대단하여 아무리 소 장군이라도 입술을 떼지 못했다.
게다가 분위기도 아주 이상했다.
비단 소 장군뿐만 아니라 저 대단한 명성을 지닌 이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이유는 바로 폐허 한가운데 서 있는 김도진 때문이었다.
선인의 길을 걷고 있는 장사는 아주 서늘하면서도 어두운 기운을 내뿜었다.
소 장군은 꿀꺽 침을 삼키곤, 김도진을 멀찍이 피해 직원들에게 향했다.
그렇다.
장군신마저 피할 정도로…….
김도진은 분노했다.
그 이유는 물론 이리 선인에 있었다.
이렇게 빠져나올 수 있었으면서, 결국 나왔을 거면서 잠깐이라도 위험한 순간에 육신을 방치했다는 게 화가 났다.
분명 이석진을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더욱 화가 났다. 당신이 깨어나지 않아 미치도록 불안할 제자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던 건지.
도진은 어두운 기운이 퍼뜨리며 이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 집중되었다.
“스승님.”
용마를 어루만지고 있던 이리가 고개를 들었다. 이리의 시선이 빠르게 제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작은 생채기를 발견한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도진아. 수고했어.”
“그 말 말고요.”
“잘했어. 잘 해낼 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위험했습니다. 제가 아니라 스승님이요.”
“돌아가면 쓰다듬어 줄게.”
“빡치네요.”
“…….”
이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 말이 아닌가?’라는 표정으로 생각하던 이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 많이 걱정했구나.”
“…….”
도진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은 얼굴로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리의 상체에 커다란 장사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도진이 손을 뻗어 이리의 얼굴을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안았는데 마치 옭아매는 듯 단단한 손길이었다.
당황한 이리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갔다.
“도진아?”
“거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이리가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막혔다.
제자의 입술로 인해.
따끈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눈만 깜빡이던 이리가 한 박자 늦게 도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밀어내기 위함이었으나 도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부하지 말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더욱 깊은 입맞춤을 선사했다.
끼웅.
끼웅이의 한 마디가 여기 모인 모두를 대변했다.
폐허가 되어 버린 복지관에는 아주 많은 이가 있었다.
분노로 눈에 뵈는 게 없는 도진의 생각보다 더 많았다.
인원은 다음과 같다.
관조자를 포함한 이리의 신령들.
이석진과 한수, 이아진.
악신을 붙잡으러 온 포도대장 전우치와 포졸들.
소 장군과 함께 술을 마시던 변성대왕과 보좌관, 보좌관의 연인 22호.
22호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 일호와 홍연.
일호의 연락을 받은 강림도령과 일직차사, 월직차사.
강림의 연락을 받은 염라대왕.
염라대왕의 연락을 받고 급히 내려온 박씨부인.
박씨부인의 연락을 받은 바리공주.
인간 사회에 재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행차한 나림국 월백 장군과 이화 선인, 휘하의 죽엽군 정예 이십 명.
서울에 난리가 일어났다는 이야기에 달려온 율도국 국왕 홍길동, 휘하의 남사당패 십삼 명.
이제 막 도착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보부상까지.
물론 도진은 이 사실을 알았어도 이리 선인에게 키스하고야 말았을 터였다.
32. 배신
배리모스 사건이 있고 2주가 지났다.
이석진은 악신 배리모스와 결탁했다는 죄로 포도청에서 닷새간 봉사 활동 후 풀려났다. 대중에 근황을 전하며 실종이 아니라 휴가라고 해명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사망설까지 돌던 참이라 먼저 소속사를 통해 손편지와 사진부터 공개했다. 정신적 안정을 위해 연락이 닿지 않는 곳에서 쉬고 있었으며, 당분간 휴식 후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대중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에는 한없이 부실한 편지였으나, 사람들은 더는 이석진에게 불타오르지 않았다.
이석진에게는 다행히, 대중의 이목은 다른 일에 더 쏠려 있었다.
바로 12월 14일 오후 6시 32분에 일어난 ‘귀신 집단 목격 사건’
특정 시간, 특정 구역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괴이한 존재를 목격한 사건.
병원은 도심 한가운데에 있었고, 근처에는 지하철역도 있었으며, 시간대는 퇴근 시간이었다. 배리모스가 만들어 낸 술법에 당한 사람만 천 명이 넘었다. 정확히는 1011명이나 되는 인간들이 동시에 위아를 목격해 버렸으니, 이야기가 퍼져 나가는 걸 막기는 쉽지 않았다.
진현계에서 대리청정 중인 마고할미는 이 사안을 심각하게 여기고, 급히 진현계 선인 스무 명을 파견했다.
도진이 배리모스와 일전을 벌이던 그때, 진현계의 선인들은 1,011명의 영안을 닫으러 다녔다.
영안이 열리고 대략 20분이 지나서 모두의 시각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20분의 여파는 상당히 컸다. 일단 기억도 없애지 않았으니까….
대한민국은 2년 전 ‘퇴마 영상’에 이어 바로 지금, 2차 샤머니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승님, 옥경의 예지가 맞네요. 다친 사람은 있지만 경상으로 그쳤고, 아무도 안 죽었고. 확실히 대재난이 아니에요. 앞으로 좀 소란스럽기는 하겠지만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에요.’
‘…….’
‘스승님?’
‘옥경이… 왜… 붉은빛이었지? 이렇게… 대재난이 일어났는데… 왜….’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던 이리를 떠올리자 도진은 목이 타서 차를 들이켰다.
냅다 입 맞춰 버린 후부터 도진은 이리만 보면 입맛이 돌고 괜히 목이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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