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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192화 (192/203)

192화.

“…그래서 감시 카메라를 달아 확인해 보니까 너굴 양반이 내 택배를 멋대로 열어 보고는…… 이봐, 김도진. 듣고 있는가?”

주전자째로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도진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는 대답했다.

“네, 다 듣고 있습니다.”

“조금도 집중 안 하는 것 같던데.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는가?”

“요즘 들어 집에 군것질거리가 예전에 비해 빠르게 동나서, 군것질거리 택배시키는 주기도 빨라졌는데, 희한하게 택배로 시킨 군것질거리도 빨리 동나길래, CCTV를 달아 확인하니까 너구리 양반이 몰래 군것질거리를 훔쳐 가고 있었다. 이 말이잖아요.”

“크흠. 듣고 있었군.”

요괴가 멋쩍게 헛기침했다. 지금 두 사람이 대화하는 곳은 바로 이리 만물 대여점의 상담실.

귀신 집단 목격 사건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이들은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목격당한 위아들도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인간들이 자기를 보고서는 비명을 지르고, 적대시했으니까. 복지관과 의원은 그들의 심리 상담과 보상 문제로 아직까지도 골치 아파했다.

그러나 대여점은 달랐다. 대여점은 어디까지나 이물 관련 업무를 보는 곳. 도진은 이물 관련이 아니라면 대여점에 방문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사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리가 직접 위아들을 불러 모아 다정하고 따뜻한 말들로 마음을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목격자들은 어찌 처리할지 다른 이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논의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리 선인 본인이 큰 충격을 받은 상태라서….

그리고 다른 이들도 이리 선인의 심적 충격을 이해하는 바라 대여점은 골치 아픈 사후 처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진은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안타깝지만 이 일은 대여점에서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너구리 양반을 고소하려면 포도청에 가시고, 사이에서 누가 중재해 주길 원하면 복지관에 가세요.”

“에잉, 자네는 역시 어리구만. 이건 이물 문제가 맞네. 너구리 양반은 식탐기 시기가 존재한단 말이네. 지금 내 군것질거리들을 죄다 훔쳐 가는 걸 보면 그 녀석이 식탐기에 들어선 모양이야.”

“식탐기….”

“이 시기에는 아무거나 주워 먹어서 몸이 상하는 경우가 많네. 그래서 이리 선인이 이물로 식욕을 억제하는 떡을 만들어 준다네.”

“이제 알겠습니다. ‘진진 연자방아’로 만든 떡 말이군요.”

진진 연자방아는 곽티슈만 한 자그마한 사이즈의 이물로, 고객들이 통밀이나 쌀을 가지고 오면 이리가 연자방아로 떡을 만들어 주고는 했다.

“이리 선인이라면 이 얘기만 듣고도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이물이 필요한지 바로 알았을 텐데. 설명을 해 줘야 한다니, 떼잉.”

“그럼요. 스승님은 대단한 분이죠. 그리고 누가 절 무시하면 바로 꾸중하셨을 걸요. 내 제자에게 혀 차지 말라고. 모르면 알려 주면 된다고.”

“에잉, 떼잉.”

“30분 정도 기다리세요. 만들어 올 테니까.”

“알겠네. 그런데 상담도 자네가 하고, 떡도 자네가 만드는가? 이리 선인은? 오늘 와서 얼굴 한번 못 봤구만.”

“몸져누우셔서요.”

“뭣이?”

고객이 벌떡 일어났다. 코끼리를 닮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리 선인이 아프다고? 왜 말을 안 했는가! 의원에는 가 보았는가?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잠깐 내 집에 좀 다녀오겠네. 바르면 바로 낫는 귀한 약초가 있네.”

“진정하세요. 몸이 아픈 건 절대로 아니니까.”

“몸져누웠다면서!”

“당굼 님, 생각해 보세요. 스승님이 정말 심각하게 아팠다면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었겠습니까? 김도진에 대한 소문 못 들었어요?”

“하긴, 김도진은 이리 선인에게 미쳐 있다고 했지….”

고객이 납득하는 눈치로 다시 앉았다.

도진은 얌전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상담실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진진 연자방아를 꺼내고, 쌀을 한 컵 퍼서 대여점 뒷문으로 나갔다.

“스승니임.”

뒷뜰의 금광초 밭 앞에 이리 선인이 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난로, 어깨에는 코트, 무릎에는 담요, 손에는 핫팩. 완전 무장을 한 이리가 장난감 낚싯대로 끼웅이와 놀아 주다가 고개를 들었다

“도진아.”

이리가 힘없이 도진을 불렀다. 외모 묘사에 청초와 청순을 넘어서 처연과 가련을 넣어도 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심적 충격을 받은 이리는 금광초 향을 맡으며 요양 중이었다. 이해자가 이리를 다독이며 어디 극락이나 하늘꽃밭에 가서 쉬다 오라고 했지만, 이리는 이 와중에도 대여점을 비울 수는 없었다. 요양한다고 택한 곳이 고작 대여점 뒷뜰이었다.

“연자방아 돌려야 하는데 몇 개 만들어야 하는지 몰라서 물어보러 왔어요.”

“나도 얘기하는 거 들었어. 다섯 개 만들어 주고 하루에 한 알씩 먹으라고 하면 돼.”

“네!”

도진은 작업 공간으로 가지 않고 이리 옆에 판을 깔았다. 이리는 도진이 있는 왼편 신체에서 솜털이 오소소 솟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기의 흐름이 왼편에 앉은 이에게로 쏠리는 기분. 낯선 감각이었다.

끼우웅, 끼웅.

이리가 낚싯대를 멈추자 끼웅이가 담요를 흔들며 재촉했다. 이리가 애써 낚싯대를 흔들었다.

“여기에 쌀을 붓고, 손잡이가, 아, 이거였죠. 손잡이를 돌리고…. 가루가 아니라 떡이 바로 완성되어 나오는 게 참 신기하단 말이에요. 스승님, 하나 드실래요? 스승님? 스승님, 듣고 계시죠?”

“…듣고 있어.”

도진이 눈을 깜빡이더니 씨익 웃었다.

“지금 제 입술 힐끔거렸죠?”

“…….”

이리의 손이 다시 멈췄다. 끼웅이가 움직이지 않는 장난감을 건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끼웅이는 이리를 재촉하는 대신 이번엔 연자방아에 흥미를 보였다. 그러건 말건 도진은 입가가 귀에 걸려서 히죽히죽 웃었다.

“선인은 거짓말을 못 한다는 게 진짜 좋네요. 어떡해요, 스승님? 자꾸 이렇게 제 입술만 보이셔서. 2주나 지났는데도 이러시니 뭐 어떻게 일상생활 가능하시겠어요?”

“도진아. 네가 원인 제공자잖아.”

이리가 요양하는 이유이자 원인 제공자인 도진은 아주 뻔뻔하게 굴었다. 2주 내내 이런 식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체 왜 그랬어.”

“무엇을 왜 그랬냐는 건지 고유 명사로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 신령들이랑 보부상 얼굴을 어떻게 보란 말이야….”

“얼굴을 대체 왜 못 봐요? 스승님. 사람은 다 키스라는 걸 하면서 살아간답니다. 키스가 뭔 중죄도 아니고. 스승님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가슴 벅차서 입술 좀 부볐다는데 뭐라 할 사람 없어요.”

“너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행각을 싫어하는 사람 아니었어?”

“…그게 우리 얘기면 달라지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키스 좀 할 수 있죠, 뭐.”

이리가 이마를 짚었다.

“네 말대로 연인끼리는 입 맞출 수 있다 쳐도 우리는-”

“연인이 된다는 예언이 있었으니까 연인이나 마찬가지죠.”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잖아. 정말 놀랐을 거야. 다들 날 얼마나 파렴치하다고 생각할까. 기저귀 갈아 주며 키운 아이와 정인이 되다니.”

“그 정도로 사랑하는구나, 하겠죠. 그리고 스승님, 장담하는데 스승님이 제일 놀랐어요.”

다들 혼비백산하기는 했다. 관조자는 고개를 돌리고 웃었고, 신령들은 입을 쩍 벌렸고, 인간 셋은 새빨개졌고, 전우치는 표정이 굳었고….

하지만 처음만 경악했지 나중에는 ‘놀랐지만 납득은 한다’라는 분위기였다.

도진과 이리를 잘 아는 이들이라면, 그동안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말투나 시선에서 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들 은연중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스승님도 이제 충격에서 빠져나오세요. 고작 키스 가지고 2주나 요양을 하면 나중엔 어쩌시려고….”

언젠가 나중에 하게 될… 고작 키스가 아닌 어떤 일을 떠올린 이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귓가는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천천히 하자. 천천히. 나는 아직 너와 내가 연인이 된다는 사실도… 어색해.”

“‘연인이 된다는 사실’ 아니고,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 이에요. 저는 이미 달력에 2주 전의 그날을 우리의 1일로 적어 놓았어요. 번복은 없습니다.”

“내 마음의 준비는?”

“2주 시간 드렸잖아요. 아, 떡 다 됐다. 전 다시 일하러 가요. 스승님, 날이 추우니 얼른 들어오세요. 끼웅이도 감기 걸려요.”

자기 안의 뜨거운 울분을 표출하듯 대화하는 내내 연자방아를 가열차게 돌린 도진이었다. 도진이 떡을 완성해서 가지고 들어갔다.

끼우웅….

두 번째 장난감을 잃어버린 끼웅이가 축 쳐졌다. 이리가 손을 내리자 끼웅이가 엉금엉금 올라탔다. 이리는 끼웅이를 핫팩 위에 올렸다. 끼웅이가 핫팩 위에서 노곤노곤 녹아 갔다. 이리는 암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연인,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두 사람.

나는 도진을 사랑한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 사랑은 도진의 열렬하고 격렬한 사랑에 화답할 정도의 사랑인가?

나는 제자가 원하는 만큼의 농도 짙은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살아 넘치는 격정적인 감정을….

이리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자연스럽게 팔찌에 손이 갔다. 검은 실의 결을 따라 만지작거렸다.

이리는 제자의 열렬한 감정에 화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정도가 좋았다. 너무 휘몰아치지 않는… 항상 평정심을 유지할 정도의 감정. 단지 도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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