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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193화 (193/203)

193화.

복잡한 마음과는 별개로 2주나 요양했으니 이제 회복할 때였다. 다음 날 아침, 이리가 여느 때처럼 업무를 준비하자 도진이 활짝 웃었다.

“안 그래도 인내심이 동날 뻔했어요. 하루만 늦어졌으면 또 키스해 버렸을지도 몰라요. 고객이 있든 말든 상관없이요.”

“두 번째는 첫 번째처럼 쉽지 않을 거야.”

“저 도발하시는 거예요? 진짜 확 해 버려요? 손은 눈보다 빠른 법입니다.”

“나는 손 없어? 내 손도 제법 빠르단다. 네 손과 입술 정도야 충분히 막을 수 있지.”

“하, 저는 장사라고요. 장사보다 민첩하다고 말씀하시진 않겠… …아니, 잠깐만요. 왜 우리 키스를 무슨 위험한 함정이나 별 다섯 개짜리 퀘스트처럼 말하고 있는데요? 연인 사이에 당연한 애정 확인 절차인데, 왜! 아악!”

도진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리는 옆을 지나 작업대 앞에 앉았다.

“어젯밤에 눈이 많이 내렸던데 청소 좀 해 줘.”

“정원 눈은 스승님 깨시기 전에 다 쓸었어요. 대문 앞도.”

“골목 전체 다. 빙판길 되면 인간도, 위아도 다니기 힘들어.”

“네, 다 쓸고 오면 칭찬해 주세요! 키스 말고 뽀뽀도 괜찮아요!”

도진이 대답을 듣지 않고 헐레벌떡 나갔다. 이리는 웃으며 스케줄표를 확인했다.

업무는 저녁에 끝이 났다. 일만 년간 계속했던 일과를 오늘 하루도 반복하고 나자 이리의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마지막 고객을 보낸 도진이 금광초 차를 타 왔다. 바리공주가 선물해 준 금광초는 정말 너무 잘 애용하고 있어서, 조만간 바리공주에게 답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바리공주를 만날 생각을 하자 이리는 금세 또 착잡해졌다. 대체 얼굴을 어떻게 보지? 날 얼마나 파렴치한으로 생각할까….

“스승님, 대체 무슨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계세요?”

“티가 많이 났어?”

“다른 사람이 보면 모를걸요. 오직 저만이 이 고운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생긴 걸 아주 예민하게 알아챌 수 있죠.”

도진이 이리의 미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바람에 미세했던 주름은 좀 더 진해졌다.

“도진아. 신체 접촉은… 천천히 하자.”

“본래도 이 정도는 했거든요! 억울해요!”

“아니야. 미간은… 만지지 않았어. 손깍지 정도였지….”

“10년 전에는 미간도 만지고, 양 뺨도 주물주물하고, 입술에 뽀뽀도 많이 했었는데.”

“네 어릴 적 이야기는 하지 말자.”

이리가 얌전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끼웅이를 도진 쪽으로 쓰윽 밀었다. 정 만지고 싶으면 끼웅이나 만지라는 뜻이었다.

“스승님.”

도진의 손이 이리의 손등을 덮었다. 워낙 체격 차이가 있다 보니 이리의 손이 모두 가려졌다.

끼우우웅.

암인이 도진과 이리의 꼭 쥔 손 사이로 낑차낑차 들어갔다. 두 사람이 틈을 좀 벌려 주자 편하게 자리 잡고 누운 끼웅이 만족한 듯 끼웅거렸다.

귀여워라. 미소 지으며 보고 있던 이리가 꿰뚫릴 것 같은 뜨거운 시선에 도진을 올려다봤다. 도진은 드물게도 입을 꾹 다문 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이 2주 동안… 저도 생각을 정리했거든요.”

“무슨 생각?”

“제가 스승님을 배신한다는 예언에 대해….”

“뭐?”

“대체 그 배신이 어떤 배신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거든요. 완전 까맣게 잊고 있기도 했고. 그런데 요 며칠 생각하다 보니까-”

“잠깐, 도진아. 배신이라니? 예언? 설마 백지 때를 말하는 거야?”

이리가 당황한 나머지 도진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도진은 동그랗게 뜬 까만 눈을 보며 아, 했다.

“제가 말 안 했었나요? 이물의 예언.”

“우리가 연인이 된다고 했잖아.”

“그건 두 번째 줄이고, 첫 번째 줄이 있었거든요.”

“…….”

“‘너는 언젠가 네 스승을 배신한다. 그럼으로써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

이리의 입이 벌어졌다.

“너, 그걸… 왜 지금에야… 아니… 대체, 배신이라니…. 잠깐만….”

이리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서 뭐라 제대로 문장이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도진은 이 와중에도 이리가 귀여워서 입꼬리가 씰룩씰룩거렸다.

“일부러 얘기 안 하지는 않았어요. 저도 얼마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어쨌든 제가 스승님의 사랑을 쟁취한다는데 첫 번째 줄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중요하지, 그럼 뭐가 중요…. 하, 세상에….”

이리가 손을 빼려 하자 도진이 힘주어 움켜쥐었다. 이리는 힘없이 다른 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꾸욱 꾹 눌렀다.

끼우웅.

납작해진 끼웅이가 손깍지를 빠져나왔다. 성질을 내려던 끼웅이는 이리의 이상 상태를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 아프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스승님? 저 보세요. 제 눈을 보세요.”

도진이 손가락을 딱, 딱 튕겼다. 이리가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들었는데, 조약돌처럼 까만 눈에 약간의 원망이 담겨 있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을 생략하다니.”

“죄송해요.”

“더 숨기고 있는 건 없어?”

“없어요. 일부러 숨긴 것도 아니라니까요. 진심 까먹었어요.”

“그래, 알았어. 그래서 요 며칠 ‘배신’에 대해 생각해 봤고 그게 어떤 배신인지 알았다는 거지?”

“확실하진 않은데, 알 것 같아요. 그런데 진짜 확신은 없고. 으음….”

이리가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

방금 전만 해도 술술 말하려 했으면서 도진은 이제와 망설여졌다. 이리는 독촉하지 않고 기다렸는데, 그건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리 또한 머릿속으로 어떠한 배신일지 생각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이잉-

생각 가득한 침묵이 흐르는 그때 도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해자]

“아, 이해자 님은 진짜 눈치도 없이 지금 전화를 하시나.”

“웬만해서는 메시지 보낼 텐데, 받아 봐.”

도진이 통화를 수락하고 스피커폰 설정을 했다. 이해자가 바쁘게 말을 이어갔다.

-야, 김도진. 대여점 일 끝났냐? 내가 지금 정보 하나를 입수했는데 시간 되면 지금 당장 여기 가 보면 좋겠는데.

“어디?”

이리의 목소리에 이해자가 “선인님?” 하며 놀랐다.

-선인님? 선인님이세요?

“응. 얘기 계속해. 배리모스 사건 관련이야?”

-목격자들 관련 일입니다. 그런데 완전 멘탈 깨져서 금광초 힐링만 하고 계신다더니, 이제 좀 멘탈 회복 좀 하셨나 봐요?

“회복했다가 다시 엉망이 된 참이지….”

-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야, 김도진. 너 선인님한테 또 뭔 짓 했어! 우리가 키스 다음 단계는 적어도 천 년은 지나서 하랬지! 선인님은 수만 년 어쩌면 수십만 년 순결하셨던 분이었으니 진도 천천히 나가랬잖아!

이해자가 이리의 정신력을 더더욱 나락으로 보내고 있었다. 도진이 은근슬쩍 이리의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그만 놀리세요. 내 스승님은 나만 놀릴 수 있거든요.”

-놀리다니? 내가 감히 선인님을? 놀린 적 없거든? 너나 잘해! 수만 년간 순결하셨던 분의 입술을 훔쳐 놓고서!

“지금 충분히 놀리고 있습니다. 본론이나 얘기하세요. 목격자들이 왜요?”

-하아.

이해자는 어지간하면 이리 선인에 대한 걱정을 계속 털어놓았을 텐데, 대단히 급한 사안이긴 한 모양인지 바로 용건을 꺼냈다.

-목격자들이 동호회를 만든 건 아시죠?

이리가 정신적 충격으로 금광초 밭만 바라보며 요양하는 동안 이리의 신령들은 사태 수습에 나섰다.

진현계, 포도청, 저승, 하늘꽃밭, 나림국에 율도국까지 온갖 세력이 총집합했으나 보부상만 제외하면 다들 제 소관이 아니라며 떠났고─얼른 이리 선인과 김도진의 소식을 주위에 퍼뜨리기 위해 급히 돌아간 듯했다─ 신령들은 보부상과 머리를 맞대서 처리 방안을 모색했다.

기억을 없애자는 게 가장 처음 대두된 의견이었다.

이 술법은 오직 선인들만 가능하기 때문에 진현계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보부상을 통해 진현계에 연락을 넣었고, 마고할미로부터 곧장 답이 왔다. 천 명이 넘는 인간의 기억을 삭제하는 건 그 어떤 수단도 없을 때, 최후에 행하도록 할 테니 다른 방법을 생각하라….

즉, 거절이었다.

신령들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만델라 효과처럼 집단 왜곡 기억 사건으로 퍼뜨릴까? 하지만 이 경우 명백한 피해자인 1011명의 인간들만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다.

아니면 미친놈이 환각 물질을 뿌렸다고 할까? 이 경우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환각 물질 때문에 인간 사회에 불안이 싹틀 염려가 있다.

고민하는 신령들에게 보부상이 말했다.

‘그냥 이대로 흘러가게 놔두는 게 어때?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이게 평소 왕의 지론이었거든.’

‘하지만 이번 일은 악신이 일으킨 일이잖아요. 예를 들어 인간이 펭귄의 영역에 침범해서 새끼 펭귄들이 다쳤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연히 인간이 책임져야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왜냐하면 그건 펭귄이니까.’

‘…….’

‘하지만 인간은 펭귄이 아니야. 인간은 그 어떤 생명보다 자아가 뚜렷하고 아주 복잡한 감정 체계를 지닌 특별한 존재란 말이야. 인간의 일은 알아서 흘러가게 둬야 해. 위아가 개입하면 오히려 나비 효과처럼 더욱 큰 재난으로 굴러갈 수도 있어.’

‘…….’

‘봐라, 이해자. 지금 진현계의 선인들은 전혀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 이리가 제자와의 접문에 충격을 받아 넋을 놓았다고 해도, 정말로 책임질 필요를 느꼈다면 이 자리에 그 녀석도 함께 있겠지. 하지만 이리는 아예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있어. 자연의 이치를 득도한 선인들은 알고 있는 거야.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하게 놔둬야 세상이 평화롭다는 것을.’

선인은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있는 존재들이다.

손가락 한 번 튕겨서 한 도시를 멸절시킬 수 있는 강한 존재들, 너무 강해서 스스로 고립된 세상에 틀어박혀 자연의 흐름이 정한 단 하나의 왕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들.

이리의 신령들은 고민 끝에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인간들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그러나 완전히 손을 떼지는 않았다. 괴기한 존재를 목격했다는 심적 충격은 저절로 나아지는 데에 한참 걸릴 터이므로 인간들이 잠든 틈을 타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향을 솔솔 피웠다.

그 덕분에 목격자들은 대부분 ‘신기한 경험을 했네’ 수준으로 회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강렬했던 한순간의 경험에 사로잡힌 이들도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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