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98화 (198/203)

198화.

33. 감정

도진은 고민이 많았다.

진현계 4대 왕 후보 셋 중 두 명이 사퇴하고, 남은 한 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식이 열리는 날은 개천일, 음력 12월 15일. 양력으로는 1월 6일 금요일. 말 그대로 하늘이 열린… 진현계가 처음으로 생긴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오천 년 만에 임금님이 바뀌는 날이니만큼 외부 방문인도 대거 초청하여 아주 크고 성대한 연회를 연다고 한다.

도진은 이 개천일 행사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팔찌의 봉인을 해방하느라 가진 덕을 모두 소진해 버렸고, 진현계 입장료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잃었던 기억을 되찾은 이리 선인은 어딘가 나사 빠진 듯 멍해졌다. 여전히 다정하지만, 상념에 젖는 일이 많아지고 말을 걸면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는 했다.

이런 스승님을 혼자 진현계에 올려 보내는 것은 무리였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충직한 심복들이 옆에 있겠지만, 너무 불안한 나머지 고객들 덕을 강탈해 진현계에 올라가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결국… 도진의 고민은 개천일이니 뭐니 다 필요 없고, 이리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리가 걱정스러워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배신’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만약 지금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후회스러웠다. 스승님이 눈치채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멀리 보지 못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어이, 김도진. 차가 넘치는데.… 야.”

도진은 바람이 뺨을 후려치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이리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매일같이 대여점에 출석하는 이해자가 한심하단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도진은 흘러넘친 물을 닦고 찻잔도 새로 바꿨다. 이해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인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큰일이다. 보부상 님 말대로 대여점 문을 잠시 닫는 게 어때? 이물은 넋 나간 채로 다뤄도 되는 물건이 아니잖아.”

“그건 스승님께서 결정하실 일이죠.”

“선인님은 감정을 봉인하면서까지 대여점을 유지하려고 했던 분인데 휴업을 하시겠냐. 네가 설득해야지.”

“제가 봉인을 풀었으니까 휴업 설득은 신령님들이 하세요. 왜 곤란한 일은 다 저한테 떠넘기려고 합니까?”

“야. 기억 봉인은 나는 눈치채지도 못했어. 전혀 몰랐는데 뭘 떠넘겼다는 거야.”

“관조자 님이 저한테 떠넘겼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지금 아슬아슬한 상황이고요. 같은 신령이니 연좌제 적용이에요.”

“하지만 선인님은 네가 말해야 들을 텐데.”

“저는 스승님을 한 번 배신했다고요. 더는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거든요. 대여점 휴무는 신령님들한테 맡깁니다.”

단호하게 말한 도진이 쟁반을 들고 일어났다. 상담실 앞에서 잠깐 심호흡한 후 노크를 두 번 하고 문을 열었다. 상담 중인 염소 머리 요괴 앞에 찻잔과 주전부리를 놓았다.

그다음 이리 앞에도 놓으려고 하자 이리가 도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됐어. 끼웅이나 줘.”

“…….”

끼우웅.

얘기 못 들었어? 얼른 차 내놔. 하는 끼웅이를 당장 쥐고 흔들고 싶지만 참았다.

다소곳하게 끼웅이에게 차를 따라 주고 상담실을 나왔다. 작업대 앞의 이해자가 고개를 쭉 빼고 물었다.

“어땠어?”

“똑같아요. 거절이에요.”

“아이고, 맙소사…. 정말 유감이다.”

털썩, 소파에 앉은 도진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등받이에 목을 걸치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언뜻 보기에는 도진이 상처받은 것 같다. 그야 물론 아주 미약하게 상처받긴 했다. 그러나 도진의 입매는 올라가 있었다.

이리 선인의 사소한 거절이 시작된 지 벌써 닷새째.

이리 선인은 명백하게 화가 났다.

만약 맹렬한 ‘분노’였다면 도진도 무릎 꿇고 사죄했겠지만, 그게 아니라 서운한 것에 가까운 화라서 이렇게 화가 풀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스승님이 단 한 번이라도 화냈던 일이 있었던가?

진정한 서운함이 섞인 화 말이다.

뭘 해도 음, 그렇구나. 응, 알았어. 그래, 그렇게 하렴.

복지관에 가서 행패를 부리고 왔을 때도 부드러운 말로 넘어갔던 사람이었다.

이제 이리는 화를 낸다. 삐지고, 서운해한다. 뾰로통하게 차를 거절한다. 봉인 해제되고 가장 먼저 겪은 감정이 배신감이라는 점은 아쉬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배신감 또한 살아감에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란 점이다.

배신감, 서운함, 분노.

그야 물론 자주 느끼면 건강을 해치겠지만, 기나긴 삶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겪고 넘어가야 하는 감정이다.

도진의 생각에는 그러했다.

다채로운 감정은 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거라고.

그만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이렇기에 도진은 배신을 후회하고 싶어도 후회하지 못했다.

‘스트레스와 희열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는 거구나.’

도진이 또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 그때였다.

끼웅. 끼우웅.

놓고 간 과자가 부족했던지 끼웅이가 상담실을 나와 도진을 보챘다. 과자를 더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잡귀를 보며 도진이 씨익 웃었다.

“마침 잘 나왔다, 이 자식.”

끼… 끼웅!

불길함을 감지한 끼웅이가 도망치려고 했으나 도진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주욱 늘였다가 납작 눌렀다가 하며 끼웅이를 가지고 노는 도진에 이해자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다가 문득 섬뜩한 느낌에 오른편을 쳐다보고는 그대로 굳었다.

도진 또한 뒤늦게야 한기를 느끼고 상담실 쪽을 쳐다봤다. 이리와 염소 요괴가 서 있었다. 이리는 도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고군한테 우운 사전 가져다줘.”

“아, 네. 네! 스승님.”

“그리고 끼웅이 괴롭히지 마.”

“네….”

이리가 앞을 지나갔다. 찬바람이 쌩하니 불었다. 끼웅이는 이리에게 좋다고 날아갔고, 이해자는 눈치를 보다가 이물 작업에 집중하는 척했다.

배신감… 반드시 필요한 감정… 맞지?

도진의 확고한 생각에 살짝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 * *

끼익, 문 열리는 소리에 오동 화로를 말리고 있던 도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리가 중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스승님! 밖이 추운데 왜 나오셨어요. 옷도 그렇게 얇게 입으시고.”

“너한테 편지가 왔어.”

“저요? 저한테요?”

도진이 헐레벌떡 달려가 편지를 건네받았다.

[즉위식 초대장

수령자 : 김도진

김도진은 내 즉위식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길 바란다!

100년 어치의 덕을 동봉함.

from 홍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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