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당분간 보부상과 여행을 다닐 생각이오.”
“그래. 보부상이 여행 계획을 짜느라 그동안 고생하더라.”
“10년간 세상을 여행하자고 말하던데. 10년은 길지 않소?”
“너는 오천 년을 일했잖아. 그 시간에 비하면 짧지.”
“…그렇다면, 이리 선인.”
하제가 이렇게 말한 순간 이리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아차, 하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힌 이리를 하제는 눈감아 주지 않았다.
“그대는 일만 년을 일했으니 나의 두 배는 쉬어야 하겠군.”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나는 대여점을 닫을 생각 없어. 지금도 만물은 새로운 이물을 탄생시키고 있고, 세상에는 이물이 필요한 위아들이 많아. 당장 이물의 도움 없이는 겨울잠도 들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고 말이야.”
“그 정도는 신령들에게 맡기면 되지 않소.”
“신령들도 바쁜 애들이야. 다 자기 하는 일들이 있어.”
“그대의 충직한 심복들이 아닌가. 이리 선인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 모두 자기 일을 팽개치고 대여점에 모이겠지.”
“말했잖아, 하제. 나는 일단 문 닫을 생각이 없다고. 쉬고 싶은 마음이 들면 나도 쉴 거야. 하지만 지금은 계속 일하고 싶어.”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이 생각날까 봐 두렵기 때문이오?”
나지막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사람이란… 가만히 있으면 과거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추억도, 후회스러운 기억도. 내가 잊고자 하여도 자연히 머릿속을 잠식해 버린다.
이리의 경우에는 아름다운 추억마저도 슬픔과 괴로움으로 변색되어 찾아올 것이다.
이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친구들을 떠올리기가 두렵소?”
“…….”
그렇다, 아니다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자신도 알지 못한 까닭이다.
하제는 이리에게 더 묻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른 무거운 침묵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 * *
한식으로 이루어진 진수성찬 식사를 마치고 하제와 보부상이 여행을 떠났다. 앞으로 10년은 보기 어렵겠지만, 위아의 단위로 보면 찰나나 마찬가지인 시간이었다.
신령들까지 돌아가고 드디어 대여점에 둘만 남나 싶었는데, 마지막 방문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취임식 따위 당연히 관심 없다는 듯 무시했던 관조자가 대여점으로 직접 찾아왔다.
이리도 관조자와는 할 말이 있던 참이었다. 둘은 정자에 올라 마주 앉았다.
“차 드시면서 얘기 나누세요.”
도진이 금광초 차를 내오면서 이리의 옆에 앉았다. 관조자를 쳐다보는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관조자는 여전히 이리의 소년 시절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하제에게도 놀아 달라고 떼쓰던 겁 없는 잔챙이들이 관조자에게는 다가오지 않았다. 끼웅이도 어째서인지 겁을 먹고는 도진의 주머니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선인님… 좋아 보이네요.”
“…….”
관조자의 시선이 이리의 허리에 찰싹 감겨 있는 도진의 손을 응시했다. 도진은 이리가 손 떼라고 할까 봐 걱정됐는지 더욱 힘을 줬다. 이리는 도진의 손을 치울 생각이 없었다.
“관조자.”
“네, 선인님.”
어린 얼굴이 빙긋 미소 지었다. 이리는 순간 가슴에 울컥, 퍼지는 어떤 뜨거운 감정에 입을 다물었다.
이리의 표정을 보던 도진이 관조자에게 물었다.
“관조자 님은 어째서 과거에… 스승님을 말리지 않았습니까? 기억의 봉인 말고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게 선인님을 위한 일이라고….”
“…….”
“자운 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옅은 안개가 퍼졌다.
눈물을 머금은 듯 슬픈 빛깔의 구름 사이로 만물상점이 보였다.
관조자는 이리가 팔찌에 기억을 봉인할 때 옆에 있었다.
‘관조자.’
‘네, 선인님.’
‘나는 내 기억을 봉인할 거야.’
‘…….’
‘네 기억도 함께 봉인해 줄까?’
‘아니요. 저는 봉인하지 않을래요. 제 기억도 사라지면 아무도 이 일을 모르게 되잖아요.’
‘아무도 이 일을 알 필요 없어. 내 슬픔을 알았으면 하는 이들은 모두 떠났는걸.’
‘누군가 한 명은 기억하고 있어야 해요. 선인님. 제가 기억하고 있을게요. 영원히 기억할게요.’
그런 대화가 오갔던 걸 이리는 이제 기억해 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관조자가 어째서 기억을 봉인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안개는 더욱 진해졌고, 또 다른 풍경이 떠올랐다.
깎아지른 벼랑,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골짜기.
자줏빛 머리의 남자가 어린 이리의 모습을 한 구름에게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우리가 모두 떠나면 언젠가는 무너질 거야. 그때 이리를 잘 부탁해. 이리의 곁에는 너밖에 없으니까. 네가 우리를 대신해서….’
친애하는 이의 부탁에 구름 신령은 끄덕였다. 그리고 그 말을 따랐다. 일만 년이란 긴 시간이 흐르도록… 구름처럼 관조하면서.
이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왜 이제 와서 관조를 멈췄어?”
“…….”
“도진이에게 팔찌에 대해 조언했잖아. 왜 그랬어?”
관조자의 눈길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도진에게 닿았다.
“김도진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어요.”
그 잔잔한 목소리에는 홀가분함이 담겨 있었다.
“저는 이렇게 오래 살았지만, 과거와 마주하라는 말은 처음 들었거든요.”
의원에서 도진의 윽박에 끌려 나올 때, 그때도 이와 같은 말을 하며 미소 지었다. 관조자는 그때부터 팔찌의 봉인 해방을 생각했던 것이다.
“다행이에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아서.”
“그럼요. 잘 판단하셨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 이리 선인은 제게 맡기세요!”
도진의 우렁찬 목소리에 관조자가 작게 웃었다. 물기에 젖은 안개가 사라지자 끼웅이가 주머니에서 기지개를 켰다. 끼웅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관조자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옷깃을 잡아당겼다. 관조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끼우웅.
10분 전만 해도 관조자를 피하던 어린 잡귀가 관조자의 옷 소매를 잡아당기며 놀기 시작했다.
셋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한참 후 관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야겠어요. 저는 이 어린 것만 봐도 자운 님과 함께했던 날이 떠오르거든요. 그때 저희는 이 아이처럼 작았죠…. 이렇게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겁 없이 자줏빛깔의 머리칼을 잡아당겼고. 그러면 자운 님은 손가락으로 우리를 데구르르 굴리며 놀아 주고는 했어요.”
관조자의 목소리가 잠겨 들어갔다. 흰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관조자는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물기 젖은 목소리만이 남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저는 할 일을 마쳤으니 당분간은 쉴게요. 다음에 봐요, 선인님.”
“고마워. …나중에 보자.”
‘당분간’은 얼마나 길어질까.
그러나 영원히 못 만나는 것만 아니라면 괜찮다. 이리는 손을 흔들었다. 한순간 진해졌던 안개가 서서히 흩어졌다.
관조자가 떠나고도 도진과 이리는 정자에 남아 있었다.
취임식 당일과 오늘까지 휴일로 잡아 놓았기 때문에 가끔 걸려 오는 예약 전화만 빼면 일이 없었다.
끼우웅, 끼웅. 끼웅웅. 끼우우웅.
이제 완전히 잠에서 깬 끼웅이가 손짓·발짓을 섞어 가며 열변을 토했다. 주로 어제 있던 광란의 술자리에 대한 얘기로, 끝까지 자기한테 술을 한 모금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울분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스승님, 앞으로 끼웅이 앞에서는 술 마시면 안 되겠어요. 애들은 어른이 하려는 건 다 따라 하려고 해서.”
“…….”
“…….”
상념에 빠진 이리가 말이 없자 도진은 힐끔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이리는 아픈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지만 조금 멍해 보였다. 도진이 어깨로 이리를 툭 건드렸다. 이리가 왜? 하며 쳐다봤다.
“고민이 있다면 연인에게 털어놓으심이 어떠십니까.”
이리는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잠시 동안… 대여점 문을 닫을지 말지 생각했어. 하제가 대여점 문을 닫으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난… 대여점 문을 닫으면.”
“친구들 생각에 괴로울 것 같아서 걱정되는 거죠?”
“응. 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렸어. 예전에 들었던 조언이 생각났거든. 잠시 대여점을 쉴 거야.”
“네, 스승님이 원하신다면. 그런데 무슨 조언이요? 누구?”
“김도진.”
“김도진이란 새끼는… 저요?”
도진은 자기가 무슨 조언을 했는지 떠올렸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여점 임시 휴업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차분히 생각했다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 단계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부딪쳐야 해요. 외면하거나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요!’
그렇게 외쳤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겠지만. 도진이 기억을 더듬지 못하게 하는 큰 방해가 있었다.
이리가 도진에게 몸을 기댔다. 무게 중심을 완전히 도진 쪽으로 기울였다. 도진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짧게 기대고는 했지만, 이렇게 온전히 몸을 기대 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도진은 이리의 등을 가로질러 단단히 받쳤다.
심장 소리에 스승님이 시끄럽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스승님이 이 심장 소리를 좀 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더불어…….
이리 선인이 또 어떤 슬픈 기억에 잠겨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괜히 이리의 머리칼만 매만지는데 문득 이리가 말했다.
“도진아.”
“네, 스승님.”
“그리워.”
“…….”
“내 친구들이 그립구나….”
이리는 그동안 오래전 소멸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며 너무 평온했다.
골짜기의 어린 구름에 대해 얘기할 때도.
태고의 무덤에서도.
도진이 걱정되어 살피면 이리는 늘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리의 목소리는 사무치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짙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까만 눈은 어딘가 아득히 먼 곳을 더듬는 듯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그래. 이게 옳은 것이다.
이렇게 그립다고 슬픔에 잠겨 읊조리는 게 옳다.
함께하는 도진의 가슴도 미어졌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때 내가 한 번이라도 붙잡았다면. 달라졌을까….”
“…….”
도진은 지금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잘 알았다. 그러므로 입을 닫고, 대신 이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이리의 몸은 따끈따끈했다. 도진은 이리가 감기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자 주변의 온도를 높였다.
“너는 절대로 떠나지 마.”
“네. 저는 절대 스승님 옆을 떠나지 않아요.”
“언젠가는-”
“말했잖아요. 제 옆에 스승님이 있다면, 그리고 당신 옆에 내가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함께입니다.”
확신에 찬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리의 떨림이 점차 멎었다.
도진은 앞으로 더 강인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승님의 슬픔과 그리움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더 믿음직스러워져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이리는….
도진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사방의 풍경은 다시 선명해졌다. 상수리나무에 내려앉은 새들은 지저귀고, 잔챙이들이 눈송이 속에 돋아난 새순을 하나 두고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녹아 가는 하얀 눈에서 축축한 냄새가 났다.
도진의 손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누군가에게 온몸을 기대는 것, 누군가가 온 힘을 다해 안아 주는 것은 실로 뿌듯한 감정을 자아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푸른 하늘에는 과거와 같은 구름이 떠 있었다. 지상의 많은 것이 달라져도 저 구름은 일만 년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아…….
이리는 암담해졌다. 이제 저 구름만 봐도 친구들이 생각날 것 같아서. 어린 잡귀에게서 제 과거를 떠올리고 그리움에 잠겼던 관조자처럼.
그러나 이러한 암담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움과 마주하는 것부터.
혹시 극복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사라졌다.
왜냐하면 아무리 오래 걸려도 그의 옆엔 사랑하는 제자가 있을 테니까. 강인하고 믿음직스러운 제자가….
이리가 문득 고개를 돌리자, 제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엉엉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꾹 다문 입매에 아랫입술은 조금 뒤집어져 있었다. 턱에는 커다란 호두가 박혔고, 콧잔등은 울음을 참느라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믿음직스러워 보이려고 노력 중이지만 조금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얼굴에 이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도진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따라 웃었다. 끼웅이가 뭐가 그리 즐겁냐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리 만물 대여점의 새로운 풍경이었다.
<이리 만물 대여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