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19)

아르카디아 1권

<1부>

01.

이례적인 한파가 찾아온 12월의 겨울, 미셸이 사라졌다.

눈에 파묻힌 잔디가 목이 꺾이며 스러졌다. 오래전 떠나 삼 년에 한 번 들를까 말까 한 집은 변함없이 낯설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하얀 눈밭 위로 투박한 발자국이 찍혔다.

넉 달이나 미셸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원체 시시콜콜 근황을 늘어놓는 사이는 아닌지라 연락이 두 달이나 없어서야 이상함을 눈치챘더랬다.

계약이 끝나 갈 시기에 몰아 놓은 일거리가 물밀듯 넘어왔고, 뜨거운 태양 아래 뒹구느라 이곳에 겨울이 온 줄도 몰랐다. 결국 휴가를 틈타 뒤늦게 도착한 고향에서 반은 오랜 기간 사람이 들지 않은 듯, 눈이 한 뼘이나 쌓인 현관으로 향했다.

발목까지 오는 워커 속으로 녹은 눈이 스멀스멀 침범했다. 추위에 익숙하지 않아 얼른 벨을 눌렀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오래된 문이 덜컹거리며 부서질 듯 흔들렸다. 걷어차면 잠금까지 망가질 기세였다. 눈살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반은 불현듯 열쇠 보관 장소를 기억해 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변치 않았던 미셸의 습관을 떠올린 반은 지붕 아래 놓인 화분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큰 호프셀렘은 몇 없는 잎사귀가 꺼멓게 시든 채로 죽어 가고 있었다. 무릎을 굽혀 화분 아래 바닥을 더듬자 작은 열쇠가 손가락에 걸렸다. 여태 열쇠 놔두는 장소조차 바꾸지 않았다니. 미셸은 뜬금없는 부분에서 고집스러웠다.

“…여전하네.”

차갑게 언 열쇠를 손바닥에 쥐었다가 구멍에 맞춰 끼워 넣었다. 손목을 살짝 돌리자마자 잠금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풀렸다. 어깨와 머리에 내려앉은 눈을 털고 집 안으로 들어섰지만 온기는 없었다. 오히려 바깥보다 서늘한 공기가 두꺼운 겉옷을 파고들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몸뚱이만 한 가방을 현관에 떨어뜨린 반은 눈에 젖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걸음을 뗐다.

미셸은 아주 가끔 집에 들렀고, 대개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노인네 혼자 사는 집이 으레 그러하듯 깔끔하지만 어딘가 어수선한 감이 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둔 카디건을 소파에 걸쳐 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개수대는 물기 없이 바싹 말라 있었다. 식기 역시 제자리에 가지런히 정리된 걸 보아하니 어디 긴 외출이라도 한 모양새였다.

그럼 미셸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하나 있는 가족에게 한마디 언급 없이 넉 달이나, 대체 어디로.

오랜 비행으로 건조해진 뺨을 쓸어내렸다. 좁은 좌석에 구겨 넣었던 몸이 찌뿌둥했다.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드러누운 반은 피곤에 찌든 얼굴을 마구 쓸어내렸다. 한탄이 샜다.

“이 인간 어디 간 거야….”

의례적으로 오던 연락이 끊긴 것을 인지하자마자 수첩을 뒤져 미셸의 연구소에 수십 번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꼭 단체로 증발이라도 한 듯이. 연구소 사람들과 여행이라도 갔겠지 하며 자신을 위로하는 것도 두 달이 마지노선이었다. 경찰에 알려야 하나.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고민했다. 할머니가 넉 달째 연락이 되지 않아요. 일하던 곳도 전화를 안 받아요. 이렇게?

벌떡 일어나 거실을 돌아다니며 결론을 내렸다. 섣부르게 굴지 말고 딱 하루만 더 기다려 보자. 집 안을 뒤져 보면 뭐라도 나올 성싶었다. 비행기 티켓이라든지, 기차표라든지. 심하면 유서라도. 마지막은 너무 나간 것 같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수도관까지 얼어서 찬물로 씻어야 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뜨거운 물이 나왔다. 잠이나 깰 겸 씻고 나온 반은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그 옛날 유행했던 영화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방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짧은 한숨을 내쉬고 방을 둘러봤다. 어릴 적에는 그리도 넓어 보였는데, 지금 보니 아늑하다 못해 좁아터져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갈 곳 없는 손이 침대를 쓸었다. 차갑게 식은 이불이 바스락거리며 손아래 뭉그러졌다.

“…….”

문득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 이불로 눈을 돌렸다. 집에 오는 일이 드물어 미셸은 항상 이 방의 이불을 치워 두었다. 그런데 언제 방문한다는 언질도 주지 않았는데 이불을 깔아 뒀다고?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들춰 보았지만 보이는 건 팽팽하게 당겨 고정한 매트리스 시트뿐이었다. 진한 파란빛 시트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었다. 이윽고 베개 아래쪽으로 손을 밀어 넣은 반은 미세한 차이를 잡아냈다.

잽싸게 바닥에 꿇어앉아 베개를 멀리 치우고 매트리스 시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에 종이 끄트머리가 만져졌다. 구겨지지 않게 조심조심 꺼내자 흔하디흔한 편지 봉투가 시트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제 손으로 넣은 기억이 없는 편지 한 통을 얻은 반은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설마. 에이, 설마.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유서를 이렇게 숨겨 둘 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미셸은 유서로 이런 장난을 칠 만큼 정신머리가 나간 인간은 아니었다. 헛된 망상을 날린 반은 망설임 끝에 풀로 봉인된 봉투 입구를 뜯어냈다.

봉투 속에는 고작 두 장짜리 편지지가 세 번 접혀 들어 있었다. 다급히 편지지를 펼치자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반에게. 이 편지를 발견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내가 사라지고 네가 이 집에 돌아왔을 때겠지.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너한테 부탁할 것이 있어서야. 아주 중요한 일이고, 극비로 진행해야 하는 일이지. 네가 하던 돈 받고 사람 패고 다니는 일과는 많이 달라. 네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편지를 봤다면 내 의뢰 우선으로 받아. 돈은 부족하지 않게 줄 거니까.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편지지에 바짝 붙였던 고개를 물린 반은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곁눈질했다. 정장을 차려입고 총을 든 스파이 첩보 영화와 이 편지는 결이 엇비슷했다.

“노망났나….”

혹은 최근 본 영화가 아주 감명 깊었다든가.

매트리스 아래 살펴봐.

장단 맞춰 주고 싶지 않지만 별수 있나. 짜증스러운 한숨을 토한 반은 시트를 벗기고 매트리스를 더듬었다. 아마 안쪽 어딘가를 찢어서 뭘 넣어 뒀겠지. 뻔했다.

매트리스를 반쯤 세우자 이불과 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묵직한 매트리스를 뒤적거리다가 노인네 힘도 좋다는 생각이 슬슬 들 즈음이었다. 매트리스 머리맡 쪽에 손가락이 덜컥 걸렸다. 갈라진 틈 안으로 검지를 집어넣자 딱딱한 물체가 만져졌다. 생각보다 부피가 큰 물체는 틈새에 단단히 박혀 꺼내기 무척 어려웠다.

“이걸 어떻게 넣은 거야….”

안간힘을 써서 손에 넣은 것은 길쭉하게 생긴 나무 상자였다. 상자를 침대에 올려 두고 뚜껑을 열자 살짝 저항감이 느껴지다가 뒤로 훅 젖혀졌다.

상자 안에는 작은 리모컨 하나와 구식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요즘에도 이런 기종이 나오는구나 싶을 정도로 밋밋한 디자인의 폴더 핸드폰을 돌려 보다가 전원을 켰다. 화면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편지의 다음 장을 읽어 내렸다.

리모컨은 거실에서 써 봐. 핸드폰은 항상 가지고 있고.

읽으면 읽을수록 뜻이 오리무중이었다. 할머니와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전혀 아니었던 반은 구겨진 미간을 벅벅 문지르다가 몸을 일으켜 거실로 향했다. 생전 안 그러던 인간이 쓸데없는 짓을 시키는데, 성가신 마음과는 별개로 약간의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 도착한 반은 곧장 리모컨에 달린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라도 꺼지나, 기대했지만 고요한 거실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팔을 쭉 뻗고 거실을 돌아다니며 스위치를 딸깍딸깍 움직였으나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

되는 거 맞나? 입술을 비죽이며 리모컨을 내려다볼 때였다. 나뭇결이 서로 마찰하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미세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반은 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허리까지 오는 장식장이 스르르 움직이고 있었다. 반이 경악하든 말든, 한 부분이 고정된 채로 밀려난 장식장은 벽과 직각을 맞춘 뒤 움직임을 멈췄다.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간 반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밀려난 장식장 아래 네모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이 집에 지하실은 없었다. 사람 하나가 오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멍 안에서 미심쩍은 분위기가 폴폴 피어올랐다.

구멍 주변을 서성거리며 한참 고민하던 반은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헤집은 뒤 손전등을 들고 왔다. 미셸의 편지는 리모컨을 써 보라는 것에서 끝났으니 진짜 목적은 저 아래에 있을 터였다. 손전등을 켜 아래를 비추자 지하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희끗희끗 드러났다.

“정말 들어가기 싫다….”

혀를 찬 반은 손전등 손잡이를 이로 물고 사다리에 발을 디뎠다. 용도 불명의 지하실을 만들어 두었으면 계단도 하나 만들 것이지, 이놈의 부실한 사다리는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음을 토해 반을 불안케 했다.

조심조심 발을 디디며 절반쯤 내려가자 어디선가 냉장고 소음과 유사한 소리가 들려왔다. 손전등을 문 턱이 뻐근해질 즈음 바닥에 발이 닿았다. 손전등을 손으로 옮겨 여기저기 비추어 보다 벽에 있는 스위치를 발견했다.

냉큼 스위치를 올리자 서 있는 곳과 가까운 천장부터 차례로 불이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어둠이 걷혔다. 시린 빛을 피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마침내 지하를 마주한 반은 폐 속 깊이 차오른 웃음을 터트렸다.

“별, 나 참….”

허탈함을 머금은 눈알이 사방으로 굴러갔다. 이딴 곳을 만들었다고? 집 지하에 이런… 80년대 영화에나 나올 법한 구린 비밀의 방을 만들었다고…. 이 구린 공간에서 나는 구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건 장난으로 만들어 볼 수준이 아니었다. 말년에 사이비에 홀려 벙커를 만들었다는 가정이 좀 더 그럴싸했다. 헛헛 웃던 반은 핸드폰 폴더를 엄지로 열었다가 닫으며 지하를 둘러보았다.

양팔을 벌려도 끝이 닿지 않는 거대한 유리 벽이 지하실 공간을 반으로 나누었다. 여섯 대의 모니터에서 늘어진 전선이 유리 벽 안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언뜻 실험실처럼 보였다.

연구소에 사는 것으로도 모자라 집에도 연구실을 만들어 둘 줄이야. 미셸의 집념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대체 지하까지 파면서 뭘 연구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느새 웃음이 메마른 반은 구닥다리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정말 장난을 치는 상황이 아닌 듯했다.

찝찝함이 사고를 흩트렸다. 천천히 유리 벽을 향해 다가가며 전원이 켜진 핸드폰을 뒤적여 봤지만 저장된 연락처도, 사진도 없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얼굴을 쓸어내린 반은 유리 벽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투명한 아크릴 박스가 유리 벽에 붙어있었다. 세 뼘 정도 되는 박스 안, 눈과 비슷한 높이의 실험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실험대 위에는 유리 샬레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유리 벽에 부착된 현미경으로 샬레를 들여다보았지만 과학에 무지한 반으로서는 점점이 뭉친 덩어리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입꼬리를 끌어 내리며 현미경에서 눈을 떼자 모니터 화면에 테이프로 고정된 편지가 보였다. 팔을 뻗어 편지를 떼어 냈더니 가려진 화면이 나타났다. 온도를 나타내는지, ‘-200℃’이라고 적힌 숫자가 깜박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의뢰 내용을 말할게. 선금 십만 달러. 책상 아래에 있어. 의뢰 완수 시 선금의 열 배를 지불하지.

…십만? 반은 잘못 읽은 줄 알고 편지를 코앞까지 끌어왔다. 몇 번을 다시 확인해도 십만이 맞았다. 거기다 열 배. 채용된 것만으로 허리를 굽신거려야 하는 회사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받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계약 기간은 1년. 네가 핸드폰 전원을 켠 시간부터 정확히 1년 뒤에 누군가 찾아올 거야. 그때 그 샬레를 넘겨주면 돼. 당연히 극비고, 이 일은 전부 너 혼자 해야 해.

의뢰 금액에서 정신이 날아간 반은 뒤늦게 다음 문장을 읽었다. 동시에 불안한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오스스 올라왔다.

그리고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뭘 건드리지 말라는 건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은 반의 귀로 삑, 삑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섬뜩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가 삐걱삐걱 돌아갔다. 투명한 박스와 가장 가까운 모니터 속에 표시된 숫자가 눈 깜빡이는 순간마다 훅훅 올라갔다. -100, -50. 0. 분명 –200℃이었던 숫자가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3℃에 맞춰졌다.

뭐, 조금 그럴싸하게….

“…나 아무것도 안 건드렸는데?”

작전명 아르카디아. 차후 네게 찾아올 사람이 이 단어를 말할 거야. 네 임무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뺏기지 않고 지키는 것. 자. 그럼 이제 돈값 해 봐.

***

차갑게 식은 손가락 마디를 긁다시피 만지작거리는 동안 반의 시선은 유리 벽 너머에 철썩 고정된 채였다. 심장이 발바닥을 뚫은 다음 바닥 쳤다가 돌아온 후에 붉은 버튼과 모니터를 되는대로 두드려 봤지만 돌이킬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실은 모니터가 나타내는 수치를 제대로 읽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 백만…. 이게 왜….”

반듯한 이마가 유리에 쿵 처박혔다. 두 손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맹세컨대 자신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눈알을 데구루루 굴린 반은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자동 온도 조절 기능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초장부터 일을 그르칠 리가 없었다. 찝찝한 기분을 어영부영 넘긴 반의 머릿속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돈.

빠르게 편지를 다시 읽고 선금이 있다는 책상으로 향했다. 허리를 숙여 널따란 책상 아래를 살피자, 줄지어 놓인 파란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박스를 꼼꼼히 덮어 둔 천을 치우고 안을 들여다본 반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와, 씨. 와….”

빳빳한 현금이 차곡차곡 들어찬 박스를 맞닥뜨리자 나오는 건 경악과 감탄이요, 뒤따라오는 것은 불안이었다. 현금으로 십만을 한 번에 받게 되면 환호를 지를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건만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졌다.

이 바닥은 뒤 구린 일이 대부분이라 현금 거래가 당연하다만 고작 국가 기관 연구원인 미셸이 이 큰 금액을 어디서 구했을까. 나라에서 현금을 덥석 쥐여 줄 만큼 중요한 연구라면 겁부터 집어먹는 것이 정상이었다.

비교적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진 반이었지만 돈 앞에서는 눈이 회까닥 돌아가는 인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하실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다가 다시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지폐 한 뭉텅이를 집어 들었다. 빳빳한 지폐 한 장만 꺼내고 나머지는 도로 박스에 던져 넣었다. 팔을 쭉 뻗어 100달러 지폐 한 장을 조명에 비추어 위조지폐인지 확인하던 중, 기이한 감각이 뒤통수를 날카롭게 찔렀다. 그것은 어떠한 소리도, 향기도 아니었다. 묘한 감각의 출처를 쫓아간 시선이 투명한 유리 벽에 닿았다.

반은 기묘한 감각의 근원지로 다가가는 도중에도 이 모든 게 노망난 미셸의 치밀한 장난질이라는 은근한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한 겹 유리 너머 실험대를 마주한 순간 손에 쥔 지폐가 바스락 구겨졌다. 처음 봤을 때 너무나도 작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샬레 안에, 무언가가 생겨났다.

“어?”

황급히 허리를 숙여 벽에 얼굴을 가까이 대었더니 형체가 더욱 또렷이 드러났다. 형체는 아주 가늘고 투명한 촉수였다. 샬레 중앙에서 하나하나 세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촉수가 살랑거리며 영역을 넓혀 갔다. 반은 손톱보다 작은 덩어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현미경 렌즈에 더듬더듬 눈을 가져다 댔다.

좁은 시야 속, 샬레 안의 무언가는 분해되고, 뭉쳐지고, 확장하길 반복했다. 도대체 이게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세포벽 없이 울렁거리는 형태로 보아 동물이라는 것과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을 바짝 가져다 댄 채로 샬레를 들여다보던 반은 입술만 달싹여 욕설을 짓씹었다.

“…망할.”

가느다란 촉수가 초 단위로 길이를 늘여 갔다. 어느새 원형 샬레를 가득 채운 하얀 촉수는 낮은 턱을 넘실넘실 넘어 실험대 위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 마치 가닥 가닥에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돌토돌한 소름이 팔뚝을 뒤덮었다. 질겁해서 어깨를 부르르 떤 반은 신음을 흘렸다.

“뭐야, 이게….”

너비를 가늠하듯 제일 긴 촉수가 실험대를 톡톡 건드리며 뻗어 나왔다.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가는 촉수가 하나로 뭉치더니 두툼한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은 반은 점점 크기를 키워 가는 무언가를 말없이 바라봤다.

해파리 같기도 하고, 달팽이 같기도 했지만 둘 전부 아닌 듯싶기도 했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으나 끔찍하게 징그럽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반은 소스라치게 놀라 허벅지를 더듬었다. 바지 주머니 안에 넣어 둔 구식 핸드폰이 웅웅 울렸다.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폴더를 열자 0이 나열된 일반적이지 않은 번호가 액정에 떠올랐다.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다 댔다.

- 반 클라크?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반은 꿋꿋이 부피를 늘려 가는 ‘그것’을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셸?”

- 대충 내용은 들었을 거야. 앞으로 연락은 일주일에 한 번. 핸드폰은 항시 들고 있도록.

변조된 목소리는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주의 사항만 줄줄이 읊었다. 독특한 억양에서 미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반은 상대방이 이 일에 엮인 또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어림짐작했다. 간혹 집에 들르던 미셸의 연구소 동료들을 떠올려 봤지만 워낙 옛날 일이라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전화를 건 놈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목소리를 감출 정도라면 물어봐도 답을 듣긴 어려울 테다.

“…설명 먼저 해. 이거 뭔지, 미셸은 어디 있는지.”

- 궁금하면 거기 뒤져 봐. 남긴 게 있을 거야. 그래서 그건 좀 어때?

미셸이 남긴 것을 찾아 지하실을 둘러보던 반은 예상치 못한 때 치고 들어오는 ‘그것’의 안부에 잠시 굳었다. 한동안 입을 떼지 못하자 건너편에서 웃음을 억누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 건드렸구나.

“뭐? 뭘 건드려. 무슨 소린지….”

- 거짓말할래?

어디서 지켜보고 있는 모양인지, 상대방은 문제가 생겼다는 걸 확신하는 말투였다. 반은 무언가 변한 것은 있지만 자신은 건드린 게 없다, 미덥지 않은 변명을 미적미적 덧붙였다.

- 그럴 리가. 네가 건드렸겠지. 뭐, 상관없어.

상대는 너의 실수라고 단정하더니 끝말을 얼버무렸다. 최악의 상황을 예상한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반응이었다. 변명을 들을 생각도 없으면서 왜 몰아세우고 난리인지. 짜증스러운 마음에 콧잔등을 찡그린 반은 약간의 틈을 타 다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벽에 붙어 깔짝거리던 ‘그것’이 아크릴 박스 천장으로 꾸물꾸물 옮겨 가고 있었다. 움직일 수도 있었던가. 입이 떡 벌어졌다. 어느새 천장과 벽 사이 모서리에 자리 잡은 덩어리는 두 손으로 잡으면 꽉 차는 공 모양으로 말려 얕게 오르내렸다. 징그럽다는 말로 차마 다 표현이 안 되는 형태였다. 치를 떨며 시선을 돌렸다.

- 통화 길게 못 하니까 잘 들어. 네가 벌인 건 네가 해결해야지? 나머지 돈도 받고 싶으면 말이야.

“잠깐만.”

반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이야기를 끊었다. 계약하겠다는 말 한마디를 안 했는데 혼자 너무 앞서 나가고 있었다.

- 왜.

“돈 이거 진짜 맞아? 위조 아니고?”

건너편에선 잠시 말이 없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반은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며 잠자코 기다렸다. 기계음은 한참 침묵하더니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긍정했다.

- 맞아.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든가.

“백만 달러도 사실이고?”

- …그래.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 지폐에 꽂혀 있던 시선이 실험대로 돌아갔다. 줄곧 외면하고 싶은 꼴이었는데 이제 보니 무슨 예술 작품 같았다. 못 배워 먹은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아주 비싼 예술 작품.

- 이제 말 좀 해도 될까?

“그럼. 얼마든지.”

반이 관대한 대답을 뱉자마자 낮게 깔린 기계음이 빠르지만 뭉개지지 않는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

핸드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은 반은 물기가 마른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미셸이 남기고 간 편지 뒷장에 전해 들은 당부를 후루룩 적어 내려갔다.

첫째, 건드리지 말 것. 손대지 말고, 말 걸지 말고, 오래 쳐다보지도 말 것.

둘째, 일정 거리를 유지해 6시간마다 ‘그것’의 모든 걸 기록할 것.

셋째,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것. 그러나 절대 죽이지 말 것.

마침표를 찍은 펜이 문장을 거슬러 가 ‘만일의 상황’ 밑에 줄을 죽죽 그었다. 반은 상대방이 전하는 당부를 얌전히 듣고 있다가 이 부분에서 의문을 표했다. 백만 달러가 물 건너간 게 아니라는 점에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께름칙한 낌새가 물씬 풍기는 구절이었다.

상대방은 사정상 자주 연락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네 판단이 중요하다는 무서운 경고로 물 흐르듯 넘어갔다. 뒤늦게 보수에 정신이 팔려 미셸의 행방을 추궁하지 못한 것이 떠올랐지만 전화는 끊긴 후였다. 펜촉이 지저분한 점을 툭툭 찍어 냈다.

그냥 튈까. 무책임한 본심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무도 없겠다, 데면데면한 가족 등을 쳐 먹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팔짱을 낀 반은 머릿속으로 도주 작전을 그려 보다가 혀를 찼다. 이대로 잠적하자니 선금의 10배에 달하는 보수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거기다 수상하기 짝이 없기는 해도 임무 자체의 난이도는 낮아 보였다.

고민의 기로에서 서성이던 반은 훌쩍 일어나 벽 한편에 세워진 철제 책장 앞에 섰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제목을 가진 책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책장을 살폈다. 남긴 물건이 있을 거라더니, 단서는 김샐 정도로 쉽게 발견됐다.

“허술하기는.”

반은 보란 듯이 꽂혀 있는 단단한 서류철을 뽑아냈다. 검은 매직으로 ‘SUC-PROJECT’라고 휘갈겨 놓은 표지를 넘기자 누런 종이에 새겨진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책장에 기대었던 반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쳐 의자에 걸터앉았다. 부실한 바퀴가 달린 의자를 쭉 밀어내며 이어 읽기 시작했다. 미셸의 글씨는 괴발개발 기어가는 제 글씨와 영 딴판으로 수려했지만, 담긴 내용은 글씨체가 아까울 만큼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1977년, 북극해 부근 폐쇄된 연구소 발견. 보관 중인 7개의 생물 세포 확보. 기밀하에 이곳 델타 연구소에서 연구 진행. 미확인 생명체를 격리, 이들이 만들어진, 혹은 이곳에 온 목적을 밝힌다.

코웃음이 픽 터졌다. 이상한 영화를 본 게 아닌가 싶은 정도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 다음 장을 넘기자 검은 잉크가 거뭇거뭇 묻은 하얀 종이 위로 짤막하게 ‘원본 파쇄. 일부 복사본’이라고 적혀 있었다.

SUC-PROJECT

볼드체로 된 제목을 보아 연구 일지를 복사한 듯한데, 군데군데 날아가고 번진 잉크 탓에 제대로 읽기 어려웠다. 간신히 읽을 만하다 싶으면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소한 단어가 한 줄에 세 개 넘게 나타났다.

읽으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자괴감만 들었다. 냉큼 다음 장으로 넘어간 반은 화질이 나쁜 흑백 사진 속,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고 서류철을 고쳐 잡았다.

‘SUC-01’이라고 적힌 소제목 아래 나열된 사진들은 반이 목격한 것과 흡사했다. 샬레를 넘어 바닥까지 침범한 촉수, 연구실 천장에 붙은 덩어리. 실물을 먼저 접한 덕에 충격은 덜했다.

그러나 세 번째 사진부터 괴상한 물체가 찍혀 있었다. 유리로 둘러싸인 실험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그것’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작은 몸을 웅크린…. 아기?

노이즈가 심했지만 형체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눈을 찌푸리고 사진을 멀리 떨어뜨려서 다시 확인해도 이건 태아였다. 장을 넘기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반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 입술을 달싹이며 수많은 사진에 담긴 정보를 읽어 내렸다.

장을 넘길수록 SUC-01은 성장했다. 두꺼운 장갑을 낀 손이 실험관을 열고 안에서 아기를 꺼내는 사진과 머리통만 한 손에 의지해 걷다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완구를 집어 바닥에 놓는 사진,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에게서 조그마한 토끼를 받아서 드는 사진…. 이것은 누가 봐도 인간의 성장 기록이었다.

몇 장이 누락된 건지 금세 SUC-01 단락의 마지막 사진이 나타났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연구원의 곁에서 긴 팔다리를 쭉 뻗고 있는 SUC-01. 13살쯤 되어 보이는 사진 아래 휘갈긴 글씨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행방불명

SUC-01의 기록은 여기서 끝이었다. 그다음으로 SUC-02의 사진이 01과 동일하게 나열되었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 주듯 사진에 나오는 주변 사물과 연구원들이 처음과 달랐다. 그리고 03부터는 이곳 지하실처럼 커다란 유리 벽 안에서 성장이 진행되었다.

01과 비슷한 사진 끝, SUC-02 사살. SUC-03 행방불명. SUC-04 사망. SUC-05 사살. SUC-06 진행 중.

그리고 서류철의 마지막, SUC-07이라고 적힌 장은 텅 비어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멎었다. 급작스럽게 몰아치는 상황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기에 반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온갖 어려운 단어로 점철된 서류를 요약하자면 저 징그럽게 생긴 덩어리가 사람처럼 생긴 괴물이든지 어디 우주에서 날아온 외계인이라는 소린데, 그저 웃음만 나오는 이야기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어 볼 마음이라도 생기지. 헛웃음을 픽픽 흘리며 서류철에 끼워진 다른 서류를 넘겨봤지만 너에게 줄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라는 양 더는 읽을 만한 내용이 없었다. 파일을 처음부터 다시 정독하던 반은 SUC-06 페이지에서 미셸의 짤막한 메모를 발견했다.

숙주 T, SUC-06 부화를 진행한다. 성체까지 예상 1년.

책상 위로 서류를 내던지고 마른세수했다. 졸도 직전까지 숨을 참은 반은 얼굴을 덮은 손을 떼어 내며 건조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미셸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더니 괴물인지 외계인인지를 보호하라신다. 에스 어쩌고 프로젝트는 웬 말이고 숙주는 웬 말이고 백만 달러는 또 웬 말인가. 사고력과는 담쌓은 머리가 펑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할 무렵 주머니에 넣어 둔 구식 핸드폰이 허벅지를 찔렀다. 백만 달러 가지고 싶지 않니, 하고 유혹한다.

“…1년이면.”

무더운 곳에 처박혀 옷깃 사이를 흘깃흘깃 훔쳐보는 돼지 새끼를 경호하는 것과 조용한 마을에서 괴물인지 외계인인지를 감시하는 선택지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 고르기란 쉽지 않았다.

후자의 보수가 압도적으로 좋다는 걸 염두에 두어도 찜찜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은근히 짐을 지우는 익명의 상대방도, 편지에 그대로 드러나는 미셸의 애매한 태도도 모두 도망갈 것을 종용했으나 이대로 튀자니 영 아쉬웠다.

배고픔도 잊고 의자에 기대어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명쾌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새 방전된 제 핸드폰을 충전해 와 의미 없이 안을 뒤적였다.

쌓여 있는 연락은 모조리 넘기고 사진 앱을 열었다. 이번에도 냄새나는 놈들과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을 줄 알았더니, 고향에서 의문의 덩어리와 새해를 보내게 생겼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더니 별 희한한 일도 다 겪는다 싶었다. 아직 다 믿기지도 않고, 어쩌면 개꿈일지도 모르지만.

사진첩의 상단은 알록달록한 칸쿤의 풍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돼지 경호를 맡은 반년간을 담은 사진들을 넘기다, 사진 끄트머리에 걸린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미간을 팍 찌푸렸다.

“으.”

매끈하게 탄 피부와 높은 콧대가 눈에 띄는 남자가 찍힌 사진을 당장 삭제한 반은 카메라를 켜고 렌즈를 유리 벽을 향해 돌렸다. 너른 지하실에 셔터 음이 울렸다. 창백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기이한 실험실이 에메랄드빛 바다 사진 옆에 자리했다. 반은 찍은 사진을 한참 내려다보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을 내렸다.

20xx. 12. 1. (앞으로 간단하게 07로 적음) 실험대 천장에 붙어 있는데, 주먹만 한 크기다. 아직은 움직이지 않는다.

서류철의 마지막 장, ‘SUC-07’ 아래 짤막한 기록이 시작되었다.

고작 한 줄 적었을 뿐인데 쓸 말이 떨어졌다. 건성건성 휘갈긴 첫 번째 기록을 읽고 또 읽다가 빈 구석에 그림을 끄적거리던 중, 또다시 구식 핸드폰이 울렸다. 전과 동일한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마음 정했어?

“바쁘다더니 전화가 너무 잦으신데?”

펜을 기울여 동그란 형태에 음영을 넣었다. 옆구리가 찌그러지기는 했지만 07과 꽤 비슷한 모양새였다.

- 확답은 받아야지. 이번 통화는 녹음할 거야.

“그러시든가. 돈이나 잘 준비해 놔.”

- 건방은…. 주의 사항 명심해.

이게 뭐든 간에 1년 내내 저 상태라면 남는 장사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남는. 반은 그림을 마저 완성했다. 제법 그럴듯한 07의 초상화, 혹은 정물화를 완성하고 서류철을 멀리 떨어뜨려 확인을 거쳤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아, 그런데 미셸은….”

통화가 뚝 끊겼다. 얼빠진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지만 전화는 다시 걸려 오지 않았다. 반은 구식 핸드폰에 대고 중지를 들어 올렸다. 예의 없는 상대방에게 엿이 닿길 바라며.

***

떳떳한 용병 회사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시시한 의뢰만 들어오는 회사에 일을 잠시 쉰다고 연락을 넣은 반은 쏟아지는 욕설을 한 귀로 흘렸다. 사비를 털어 산 장비를 칸쿤에 죄다 두고 온 게 걸리기는 했지만, 설마 버리기야 하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뭐, 이번 의뢰가 끝나면 그딴 싸구려 총과 장비 따위 쓸모도 없어질 테다.

“자. 오늘이….”

계속해서 걸려 오는 팀장의 연락을 무시하며 날짜를 확인했다. 12월 6일.

의뢰를 받아들인 지 5일 차. 07은 조금씩 커지더니 이제 농구공 크기가 됐다. 뒷면이 뚫린 아크릴 박스는 하얀 방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07은 조그만 실험대가 있는 박스 안에 철썩 붙어 크기를 키워 갔다. 처음에야 징그러웠지 이제 덤덤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의뢰비의 힘이 컸다. 물론 오래 쳐다보지 말라는 경고를 잊진 않았다. 한 번 볼 때마다 5초 안에 눈을 돌렸으므로 거의 안 본 셈이었다.

“어?”

오늘도 책상에 두 다리를 얹고 삐딱한 자세로 앉은 채 가끔 안을 들여다보던 반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투명한 막 너머로 어제는 없던 물체가 희끗희끗하게 비쳤다. 벌떡 일어나 유리 벽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미세하게 꾸물거리는 막 속에 물방울 형태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이미 저게 어떻게 될지 알고 있어 충격은 덜했지만, 속도가 예상보다 심각하게 빨랐다.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조금씩 크기가 커졌다.

원래 이렇게 빨랐던가? 07을 힐끗힐끗 훔쳐보며 서류를 뒤적였다. SUC-01의 사진부터 차례로 훑어 기재된 기간을 살폈다. 01은 샬레 사진과 태아의 형태가 담긴 사진까지 2년 이상의 텀이 있었고, 동시에 부화를 진행한 02와 03은 2년을 꼬박 채웠다.

다음 개체로 넘어갈수록 부화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현재 진행 중이라는 06의 자료가 없어 부화에 걸리는 기간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초조하게 검지 끝을 씹은 반이 토악질 나는 표정을 지었다.

“…기분 나쁘네.”

저 안에 든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본능적인 거부감이 스르르 피어났다. 남겨진 사진을 보면 인간과 생김새가 똑같았지만, 차라리 괴상하게 생긴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람이 아닌 게 사람 행세하면 아무래도 섬뜩하지 않나.

07이 매달린 유리 벽 부근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등을 돌렸다. 집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먹을거리가 바닥을 보였다. 오늘 마트에 들르지 않으면 이 괴물을 두고 굶어 죽을 판이었다. 마트에 다녀오는 동안 제발 별일 없어라. 짧은 기도를 올리고 사다리를 밟았다.

미셸이 두고 간 차에 올라탄 반은 사지에서 후끈하게 올라오는 열기에 쓰고 있던 모자를 뒷좌석으로 내던졌다. 눈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정원 가득 쌓여 얼어붙은 눈을 삽으로 퍼내고 나서야 차에 탔다. 일주일 내내 폭설이 쏟아지다니. 날씨가 어지간히 미친 모양이다. 집에 차가 있어서 이 날씨에 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다행이었지만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가까운 마트도 삼십 분 남짓 달려야 하는 동네에서 차도 없이 어딜 갔는지. 망할 노인네 때문에 제명에 못 죽지 싶다. 어깨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녹은 눈을 대충 훔치고 시동을 걸었지만 우르릉 기동되던 엔진이 허탈하게 꺼졌다.

“진짜 구질구질하다, 구질구질해….”

몇 번이나 키를 돌려 봤지만 오래도록 방치된 고물 자동차는 쉬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방전된 배터리를 교체하는 수고까지 하고서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 반은 내부가 보이지 않게 커튼을 쳐 둔 집을 확인하고 차고를 빠져나갔다.

***

“반!”

“오랜만이다.”

묵직한 장바구니를 느릿느릿 흔들며 다가가자 노란 유니폼을 입은 잭이 만면에 반가움을 띠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라진 구석이 없는 잭은 계산대에 올려 둔 맥주의 바코드를 찍으며 붙임성 좋게 물어 왔다.

“몇 년 만이야, 이게. 이번에는 얼마나 있냐?”

“글쎄다. 꽤 오래 있을 것 같아.”

“양 보니까 그렇겠네.”

안부를 물어보면서도 쉼 없이 바코드를 찍던 잭이 어깨를 으쓱였다. 시답잖은 안부 인사를 이어 가며 봉지 네 개에 구매한 식료품을 나눠 담던 잭이 ‘아, 참’ 하며 시선을 들었다.

“할머니는 오셨어? 저번에 어디에 여행 간다고 한동안 안 보일 거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미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반은 손을 거들어 주며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답했다.

“어디 갔는지도 몰라. 나한테는 안 알려 주던데.”

“요즘도 연락 제대로 안 하냐?”

“뭐, 언제는 사이좋았나.”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은 잭이 빵빵하게 부푼 봉지들을 넘겨주며 눈을 굴렸다. 어디였더라, 고민하던 그가 이윽고 뜬금없는 지명을 뱉었다.

“알래스카. 알래스카였어.”

내심 귀를 기울이던 반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알… 래스카? 빙하? 그 알래스카?”

“응. 연구 겸 가시는가 했지.”

잭은 틀림없다, 하도 특이한 곳이어서 기억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영수증을 내밀었다. 얼마나 많이 샀는지, 세 번이나 접어도 손바닥만 한 긴 영수증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반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연구… 겠지.”

“연락 한번 해 봐. 그래도 하나 있는 손준데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게 말이 되냐.”

“그러게 말이다. 나도 무슨 일인가 싶다.”

미셸의 행방에 대한 어렴풋한 단서나마 얻고 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잭이 다급하게 손짓했다. 왜 그러나 했더니 그는 카운터 근처 매대에 쌓여 있던 초코 바를 한 움큼 쥐어 봉지 안에 쑤셔 넣었다. 손놀림이 워낙 자연스러워 헛웃음이 터졌다.

“이래도 돼?”

“몇 년 일했는데 이 정도쯤이야. 아! 그리고 몸조심해. 이 조그만 데서 무섭게….”

치를 떤 잭은 영문 모르는 표정인 반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몰라? 어제 사람 죽은 거. 너희 집 쪽 숲에서 발견됐는데.”

“우리 동네에서?”

“뉴스 좀 보고 살아라. 뭐, 넌 걱정할 필요 없겠다. 일반인인 내가 걱정이지….”

잭은 용병인 반에게는 문제없지만 자신은 믿을 게 총밖에 없다며 한탄했다.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이야기를 시작으로 대화가 지인들의 근황으로 번지는 건 금방이었다.

반은 더 얘기가 길어지기 전에 잭의 말을 끊었다. 특별히 하는 일이 없긴 해도 집을 오래 비울 수는 없었다. 가스 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 두고 온 기분이라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는 잭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고 서둘러 마트를 벗어났다.

뒷좌석을 식료품으로 가득 채우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작은 마을을 에두른 나무숲이 보였다. 하얀 눈에 파묻혀 빽빽한 설산처럼 보이는 숲은 조금 전에 들은 섬뜩한 이야기에 힘입어 서늘하게 느껴졌다.

‘얼굴도 엉망이고 지문도 없더래.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건 죄다 훼손돼서 뭐, 다들 갱 소행이라고 보는데 또 모르지.’

뒤숭숭한 일은 꼭 한 번에 닥친다며 혀를 찼다.

오랜 기간 사람이 든 적 없는 옆집을 지나쳐 차고에 도착한 반은 봉지를 바리바리 끌어안고 집 안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현관 문을 열어 둔 채로 들어가려다 마을 분위기가 험악하다는 잭의 말이 걸려 잠금을 걸었다. 가까운 시일 내로 창고를 뒤져 볼 심산이었다. 미셸은 혼자 살았으니 산탄총 한두 자루쯤은 구비해 뒀을 터다.

냉장고와 찬장을 식료품으로 꽉꽉 채우고 잭이 끼워 준 초코 바 포장을 뜯으며 사다리를 내려갔다. 반은 마트에 다녀오기 전과 똑같은 페이지를 보이는 서류철을 한 번 뒤적이고 실험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잇새에 문 초코 바가 비좁은 책상 위로 툭 떨어졌다.

“…뭐야.”

유리 벽에 코가 눌릴 정도로 얼굴을 가져다 댔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농구공 형체는 온데간데없었다. 실험대 위 박스 천장에는 투명한 막이 허물만 남은 채로 덜렁덜렁 붙어 있었다. 겉이 마른 허물은 끄트머리부터 서서히 부서져 내렸다.

나가기 전만 해도 그저 어떤 형태일 뿐이었던지라 눈앞의 광경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부화한다 해도 어림잡아 5개월쯤 걸릴 줄 알았지, 5일은 아니었다.

다급히 유리 벽과 가까운 책상을 치운 반은 사라진 내용물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서 무릎이 점점 구부러졌다. 이윽고 바닥에 꿇어앉은 반은 식은땀을 흘리며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어디 갔어…. 이거 어디 간….”

색이 밝은 호박빛 눈동자가 왼편으로 돌아갔다. 유리 벽 바로 앞 왼편 구석, 무언가가 미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과 마주한 몸이 흠칫 굳었다. 곧이어 오돌토돌한 소름이 팔을 타고 올랐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인간의 형상은 아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덩어리였다. 박스 천장에 붙어 있는 허물보다 얇은 막에 감싸인 덩어리가 격렬하게 꾸물거렸다. 막을 밀어 내고 있는지 조그만 손바닥과 발바닥 모양이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입을 떡 벌린 반은 마트에 다녀올 동안 만들어진 신체를 경악한 눈으로 응시했다. 눈 깜짝할 새 자란다는 말이 저런 뜻은 아닐 텐데.

한참 굳어 있던 반은 정신을 차린 뒤 유리 벽에 가까이 붙어 덩어리를 주시했다. 허물이 찢어지면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모양인데 높이가 상당한데도 멀쩡해 보여 어이없게도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힘이 부족한지, 07의 손은 좀처럼 막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저대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반, 저러다 죽으면 보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싶은 걱정이 반이었다.

“돌겠네….”

그렇게 반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때, 닷새간 책상 위에 내던져 두었던 구식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혔다. 반은 망설일 틈 없이 전화를 받고는 일단 변명부터 깔았다.

“야…. 이거 너무 빠르잖아. 나 아무것도 손 안 댔어.”

- 어디 갔었어?

고저 없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혼란한 반에게는 질문이 들리지 않았다. 유리에 손을 얹고 살살 두드려 봤지만, 07은 여전히 막과 치열한 싸움 중이었다.

“저거 지금 못 나오고 있는데, 그냥 두냐? 저대로?”

- 왜 전화 안 받았냐고 물었어.

“그게 중요하냐, 지금?”

- 돈 받기 싫어?

반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입 모양만으로 욕설을 뱉었다. 돈 가지고 협박하는 인간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었다.

“굶어 뒤지라고? 마트 갔다 왔다, 왜.”

- 핸드폰 계속 들고 다녀. 이제 메스 찾아.

“메스?”

- 작은 칼. 수술용. 빨리.

왜 찾으라는 건지 이해하기에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우고서 서랍을 모조리 뒤졌다. 펜을 포함한 잡동사니가 다급한 움직임에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굴러다녔다.

- 빨리.

“아, 좀 기다려 봐.”

독촉하는 목소리에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몸을 숙여 맨 아래 서랍을 연 반은 칼 하나를 찾아냈다. 메스는 아니었다. 이것도 괜찮으려나. 떨떠름한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칼도 괜찮냐?”

- 괜찮긴 하지.

겨우 발견한 건 손톱 깎기와 네일 버퍼가 포함된 작은 맥가이버 칼이었다. 반은 칼을 쥔 채로 유리 벽 안을 훑었다.

“이제 어떡하면 되는데.”

- 들어가.

“…안에? 내가?”

- 유리 오른쪽에, 아니 그 반대.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반은 다시 왼편을 돌아봤다.

- 문이 있어. 여는 비밀번호는….

“돌았어? 싫어.”

반대편은 잠시 말이 없더니 기가 찬다는 듯 웃음 섞인 비꼼을 던졌다.

- 밖에서 일기나 쓰면서 그 돈을 받아먹겠다고? 양심이 있긴 해? 1225. 당장 들어가.

“양심이 있으면 이런 일 하겠냐.”

반은 꿍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왼편으로 향했다. 유리 벽을 가린 모니터를 밀어 내자 비밀번호를 치는 패드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아래 직사각형 홈이 나 있었다.

“이게 문이냐? 창문이지.”

납작 엎드려 기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아터진 크기를 보고 혀를 찼다. 온갖 불평불만을 내뱉으면서도 반은 검은 패드 위에 오밀조밀 붙은 숫자 버튼을 엇나가지 않게 차례로 눌렀다. 쉬운 숫자라 다행이지, 여섯 자리 넘어갔으면 진작 잊고도 남았다.

네 자리 숫자를 모두 입력하자 유리 벽 틈이 소리 없이 스르르 열렸다. 떨떠름한 기분을 안고 무릎을 꿇은 반은 조심스럽게 구멍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지하실의 퀴퀴한 공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문득 목이 마르는 듯한 느낌은 벽 안 공기가 건조하기 때문이라 넘겨짚었다. 남은 발을 통로에서 끌어당기기 무섭게 유리가 빠른 속도로 닫혔다. 내부에도 도어 록 패드가 있는 걸 확인하는 찰나에 고요하던 건너편에서 충고가 넘어왔다.

- 수건도 챙기는 게 좋을걸.

“그런 건 미리….”

기껏 기어들어 왔더니 이제야 수건 얘기를 하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욕을 퍼부어 주려던 반의 입이 딱 다물렸다. 조금 이상했다.

“…근데 내가 보여?”

- 위에.

고개를 들고 새하얗기만 한 천장을 돌아보는데 구석에 떡하니 설치된 카메라 렌즈가 눈에 띄었다. 촬영 중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 붉은빛이 규칙적으로 깜박였다.

- 인사해. 안녕?

“안녕은….”

뭘 믿고 맡기나 했더니 실시간으로 내부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제때 연락이 오지. 손이라도 흔들어 줄 거라 생각했는지, 홱 하니 뒤를 돌아 비밀번호를 치자 핸드폰 너머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가 수건 한 장을 가져온 반이 파리한 조명 아래서 깊이 심호흡했다. 여전히 핸드폰을 귀에 댄 채였다.

“진짜 뭐 옮는 거 아니지? 감염된다든가.”

- 아니니까 좀 시키는 대로 해.

지지부진한 언쟁이 슬슬 지겨워지는지 기계음의 말이 느릿느릿 늘어졌다. 반에게도 할 말은 많았다. 사다리를 기어올라 수건을 가져왔더니, 저 괴물을 가둔 막을 갈라 꺼내 주란다. 그냥 구멍 살짝 내서 숨만 쉬게 해 두면 안 되냐 했더니 또 답이 없었다.

결국 반은 서랍을 뒤져 발견한 니트릴 장갑을 단단히 끼고 07 앞에 꿇어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보다 힘이 빠졌는지 얇은 막을 밀어 내는 손길이 처음처럼 거세지 않았다. 불투명한 막 덕에 자세한 형태는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와…. 내가 살다 살다….”

반은 천천히 07에게 손을 뻗었다. 두 손으로 받으면 꽉 찰 크기였다. 핸드폰을 끼고 있는 목과 어깨가 벌써 뻐근하게 결렸다. 고심하다가 검지로 막을 꾹 눌렀다. 탄력 있는 겉은 보기보다 질긴 듯 손톱을 세워도 쉬이 뚫리지 않았다.

“이제 자른다. 진짜 자를 거야.”

날카로운 칼끝을 막 끄트머리에 댄 순간, 고요하던 핸드폰 너머에서 웃음기 담긴 목소리가 나직하게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단음이라 독특한 억양을 집을 만한 구석도 없지만 어딘지 모를 기시감이 들어 반은 칼을 살짝 거두었다.

저렇게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던 것 같다. 방랑하는 인생, 워낙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많아 누구였는지 번뜩 떠오르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중 이어진 말 탓에 생각이 끊겼다.

- 재밌는 거 할래?

“나 지금 하나도 재미없는데.”

- 지금 그걸 죽이면 보수 반은 그냥 줄게.

“죽이라고?”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잘 알아들었다는 양 기계음은 느긋하게 다음 말을 꺼냈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헷갈리는 가벼운 어조였다.

- 살리면 백만 달러. 죽이면 오십만 달러. 어떻게 할래?

“장난치냐? 죽이지 말라며.”

기가 막혀서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노려봤다.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는 쳐다보지 말라더니 도와주라 했다가, 이제는 죽일지 살릴지 정하라고.

- 기회를 주는 거지. 참고로 그건 지금이 제일 약할 때야.

“딱 봐도 약해 보여, 개새끼야.”

안에 든 게 뭐든, 제 손으로 막 하나 못 뚫고 나오는 걸 세상을 멸망시킬 괴물로 봐 주기는 어려웠다. 갈피를 잡은 반은 카메라를 빤히 올려다보며 비웃음을 삼켰다. 꼭 이딴 식으로 충성을 의심하는 놈들이 있다. 그리고 대개 그 의심들은 반을 시험에 들게끔 했다.

- 뭐…. 선택은 네 몫이고. 그래서 죽일래, 살릴래?

“당연히….”

칼날을 세웠다. 보조용으로 들어 있는 칼 치고 상당히 날카로운 날이 질긴 막 위에 얹혔다.

“여기서 죽이면 오십만이라고? 1년 기다릴 필요 없이?”

- 응. 바로.

날을 눕혀 막 중앙을 눌렀다. 손가락 끝부터 팔꿈치까지의 길이보다 작은 덩어리 속 희뿌연 물체가 보였다. 힘을 조금 더 준 순간, 두 손바닥이 막을 밀며 다가왔다. 07의 손은 반의 손가락보다 작았고, 칼날은 정확히 07의 두 손바닥 사이에 위치했다. 그대로 누르면 심장에 닿을 것이다.

- 빨리.

오십만. 오십만 달러로 뭘 할 수 있더라? 집을 살 수도 있고, 끝장나는 스포츠카를 사도 괜찮겠지. 아니다. 쌓아 놓고 설렁설렁 일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도 나름대로 재밌을 것 같다.

“음….”

- 정해.

막을 더듬으며 나갈 틈을 찾아 밀어 내는 작은 손이 칼날 근처로 다가왔다. 딱 달라붙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덩어리를 누른 반이 순식간에 막을 그어 내렸다. 제 할 일을 다 한 칼을 옆으로 떨어뜨리자 끈적끈적한 액체가 하얀 바닥 위로 퍼져 나갔다.

- …축하해.

기계로 변조한 목소리가 의미 모를 축하를 건넸다. 반은 벌어진 막 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장갑이 척척하게 젖어 갔다. 감히 만지기도 겁날 정도로 작은 07을 불투명한 액체 사이에서 건져 올려 수건으로 감쌌다.

- 그런데 왜?

07은 울지 않았다. 수건 자락으로 투명한 액체가 묻은 얼굴을 살살 닦아 내자 커다란 눈이 움찔거리며 천천히 뜨였다. 사진으로 봤던 갓 태어난 아기들은 온통 쭈글쭈글하고 불그스름했는데 07은 달랐다. 크기만 작지, 뭘 모르는 반이 봐도 몇 개월을 훌쩍 건너뛴 모습이었다. 몇 번 어색하게 눈을 깜박거린 07이 자신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반과 시선을 맞췄다.

“좋은 집 사게.”

수영장 만들고, 금으로 도배하기에 오십만 달러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 아기라서 못 죽인 건 아니고?

평소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끊던 놈이 오늘따라 긴 통화를 이어 갔다. 반은 대꾸하지 않았다.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투명한 막 너머로 보이는 07의 손이 너무 작았고, 희미하게 버둥거리는 다리는 너무 짧았다. 너무나 인간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의 말을 믿기 어려웠던 것도 한몫했지만 만약 오십만을 그대로 준다는 게 사실이더라도….

입술을 깨무는 사이 07의 또렷한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이게 아기라면 언제 울음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07은 조그만 입을 벌리더니 통통한 볼을 한껏 부풀렸다. 커다란 눈이 휘어지며 아기 특유의 맑은 웃음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갑작스러운 웃음에 놀라 아이를 떨어뜨릴 뻔한 반은 쿵덕쿵덕 뛰어 대는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징징거리는 반을 무시한 기계음이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 그래서…. 이름은?

“이름?”

몸이 뻣뻣하게 굳은 반은 멍하니 되물었다.

- 네가 깨웠는데 이름은 줘야지.

“내 애도 아닌데 내가 왜.”

연신 꼼지락거리던 07이 수건으로 대강 싸인 양팔을 쑥 빼냈다. 쭉 뻗은 손의 목적지는 반의 얼굴이었다.

- 중요한 거니까. 아무거나.

“개소리를 하고 있어.”

‘중요하다’와 ‘아무거나’가 같이 쓰일 수가 있나.

최대한 07을 멀리 떨어뜨려 접촉을 피하는 와중에도 그놈의 이름을 지어 주지 않으면 기계음이 전처럼 사람 짜증 나게 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07은 자꾸만 손을 뻗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작은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걷히는데, 조만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딱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아르카디아. 그걸로 할래. 야, 이거 울 거 같은데? 어떡해?”

- 뜻은?

“몰라, 새끼야! 이거 진짜 감염 안 되지? 병 걸리는 거 아니지?”

무성의한 이름을 얻은 07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반의 얼굴 역시 울상으로 변했다. 아기를 감싼 수건이 발버둥에 의해 스르르 미끄러졌다. 얼떨결에 드러난 나신을 확인한 반이 입을 벌렸다.

“야…. 얘 남자야.”

반은 꼴에 성별까지 있는 괴물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 좋은 이름이네.

“이거 남자라고….”

세게 쥐면 부러질 것 같고, 바닥에 두면 다가올 것 같아 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팔을 추어올렸다.

12월 6일, 겨울의 시작점에서 SUC 프로젝트의 마지막 개체가 눈을 떴다.

***

아무리 자그마한 몸이라지만 줄곧 안아 들고 있자니 기울인 목과 팔이 서서히 찌뿌둥해졌다. 어쩐지 심드렁해진 듯한 기계음이 빠른 속도로 할 일을 알려 주었다. 받아 적을 도구도 없어 벌써 헷갈리고 가물가물했다.

“야, 잠깐. 뭐라고? 다시….”

- 기록은 계속해.

통화가 뚝 끊겼다.

“매정한 새끼….”

기계음이 사라진 공간에는 반과 울먹거리기 시작한 아기만 어색한 기류 속에 덩그러니 남았다. 끈적거리는 액체에 폭 젖은 아이는 지치지도 않고 손을 뻗었다. 몸짓만으로도 안아 달라는 뜻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반은 상체를 뒤로 쭉 빼며 거부했다.

“우리가 아직 그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해 봤지만 역시나 알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반은 칭얼칭얼 제 의사를 전달하는 07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기계음은 빨리 이것저것 결정하라고 닦달하지, 정체 모를 생물은 연신 꿈지럭대지, 마음 편히 상황을 파악할 겨를이 없었던 나머지 조용해진 지금에서야 아이의 형태를 한 07을 들여다볼 여유가 생겼다.

옹기종기 붙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07은 어느 모로 보나 인간 아이를 본뜬 생김새였다. 위험성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집 나갔던 정신머리가 돌아온 덕에 치솟은 경계심이 누그러지기 충분한 외형이었다.

반은 고민 끝에 마음을 다잡고 저릿저릿한 팔을 당겼다. 허공을 휘젓던 작은 손이 턱에 닿았다. 어설픈 자세로 아기를 품에 안자 얼굴에 닿은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윽….”

턱에 묻은 끈적끈적한 액체를 어깨에 대강 닦아 내고 몸을 일으켰다. 한 팔에 안긴 아기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찡그린 얼굴을 활짝 폈다. 곧이어 짤막한 사지를 마구 버둥거리며 까르르 웃어 젖혔다.

“가만히 있어라, 좀…!”

꺅꺅 비명을 지르면서 손발로 저를 때리는데, 반으로서는 아기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놓칠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아도 뻐근한 어깨가 바짝 긴장했다. 한참 허둥지둥하던 반은 아이를 고쳐 안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야. 가만히 있어.”

얇은 장갑을 낀 손으로 손톱보다 작은 코끝을 톡 건드렸다. 아이는 간지러운 듯 손톱만 한 콧잔등을 찌푸렸다. 마구 뒤채던 사지가 뚝 멎고 몇 번 헛손질을 하던 아이가 반의 손등 위로 제 손을 올렸다. 손가락보다 작은 손에서 살짝 높은 체온이 손등으로 전해졌다. 반은 얌전해진 아이를 내려다보다 픽 웃었다.

“좀 씻자, 이제.”

수건으로 대강 닦았다지만 끈적한 액체로 범벅된 아기를 안은 탓에 상의를 버린 반은 벗은 장갑을 무심결에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가 아차 했다. 이로써 바지까지 버리고 말았다. 졸지에 함께 씻어야 할 판이었다.

일단 씻겨라. 기계음이 첫 번째로 던진 미션이었다.

겨우겨우 한 손으로 아기를 품에 안은 반은 드디어 유리 벽 안을 둘러보았다. 유리 벽 밖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욕실이 딸려 있었지만 아기를 씻기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벽 안에서 기어 나와 끙끙대며 사다리를 오른 반은 곧장 1층의 넓은 욕실로 향했다.

진정되었는지 얌전히 몸을 맡긴 아이가 제 가슴 앞에 가지런히 얹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반의 턱을 향해 뻗었다. 짧은 팔은 턱까지 닿지 못했고, 대신 조그만 손가락이 쇄골을 톡톡 건드렸다. 얼떨결에 접촉을 허락한 반은 매우 난처했다.

“진짜 뭐 옮는 거 아니겠지….”

뭘 자꾸 만져 대는지, 아이의 손이 지나다닌 쇄골 주변이 미지근한 액체로 흠뻑 젖어 번들거렸다. 최대한 고개를 뒤로 빼 손길이 얼굴까지 오지 않게끔 기를 썼다.

좌충우돌 끝에 욕조 안에 아이를 눕힌 반은 더러워진 옷을 벗고 샤워기를 들었다. 욕조 턱에 걸터앉아 온도를 맞추는 사이 몸을 뒤집은 아이가 꾸물꾸물 기어 와 발등 위에 머리를 얹고 드러누웠다.

“왜 이렇게 들러붙어.”

아직 차가운 물줄기를 허벅지에 대고 흘려보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놈은 눈을 뜬 후부터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불쾌할 정도였다. 원래 막 태어나면 저러나?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어 이게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뭘 봐.”

발을 옮기지도 못하게 만든 아이를 향해 물방울을 튕겼다. 갑자기 얼굴에 튄 물방울에 놀란 듯 눈을 꼭 감았다 뜬 아이가 꺅꺅거리며 웃어 댔다. 그러고는 욕조에 고이기 시작한 물을 손바닥으로 찰팍찰팍 내려쳤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좋냐….”

때마침 따뜻한 물을 뿜는 샤워기를 고쳐 잡고 허리를 숙였다. 조막만 한 머리통을 들어 올려 앉히고 욕조 안으로 미끄러져 내려가자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반은 수압이 약한 샤워기를 내려 두고 아이를 허벅지 위에 앉혔다. 오므린 손에 물을 담아 끈끈한 얼굴부터 씻어 내자 보들보들한 촉감이 손에 닿았다. 인간 아기처럼 연한 살성이 섬뜩하고도 낯설었다. 오묘한 감정을 느끼는 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큼직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릴 때마다 꺄륵꺄륵 웃었다.

“왜 웃어, 자꾸.”

가느다란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막까지 꼼꼼히 떼어 내자 통통한 뺨을 씰룩거린 아이가 입을 벙긋거렸다. 높은 톤의 미성이 툭 튀어나왔다.

“아!”

이어 입술 사이에서 ‘으’와 ‘에’ 따위의 옹알이가 흘러나왔다. 그전까지 칭얼거림도 없이 조용하더니 목구멍이 트인 듯이 까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알아듣기 힘든 말을 건네 왔다. 머리카락을 마저 씻기던 반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갑자기 말 안 해서 다행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했다면 놀라 내던졌을지도 몰랐다. 반은 쓸데없는 공상에 빠진 채로 짧고 작은 몸을 씻기는 데 집중했다. 몇 번이고 물을 끼얹은 끝에 짧은 머리카락이 점점 제 색을 드러냈다.

뿌리를 헤집어 봐도 검은빛 없이 깨끗한 금발이 물에 젖어 늘어졌다. 머리카락을 대강 쓸어 올려 깔끔히 넘겨 주고 볼을 잡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욕실 조명에 비친 아이의 동공이 줄어들면서 홍채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선명한 녹안이 한 번 깜박였다.

어느새 양손으로 아이의 볼을 감싸고 유심히 얼굴을 뜯어보던 반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이….”

아르카디아. 미셸이 남기고 간 편지에 적힌 이 괴상한 작전의 이름. 너무 성의 없이 지었나 싶었지만 달리 떠오르는 이름도 없었다.

“아르카디아.”

얼굴을 마주하고 이름을 부르자 아기가 방긋방긋 웃었다. 꼭 제 이름을 알아들은 듯한 반응이었다. 입 안에서 몇 번 이름을 굴린 반은 고개를 기울였다. 뜻도 모를뿐더러, 부르기 귀찮을 만큼 길었다.

“아르카, 알…. 카디아. 음….”

긴 단어를 이리저리 잘라 보다가 마침내 부르기 쉬운 애칭을 찾았다.

“그냥 디아라고 부르자. 알아서 알아들어.”

손바닥 안에 담긴 아이의 작은 얼굴을 살짝 흔들자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토해 냈다. 반의 귀찮음 덕에 이름이 확 줄어든 디아가 입을 벌렸다. 손바닥에 눌려 톡 튀어나온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순간 작은 입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반이 다리를 당겨 디아에게 가까이 붙었다.

“잠깐만.”

엄지를 입 속에 넣고 확인하려고 했더니, 디아는 작은 입을 얌전히 벌리기는커녕 입술을 모아 손가락을 쭉쭉 빨아들였다.

“더럽게…. 야. 뱉어.”

아예 반의 손을 양손으로 붙든 디아가 엄지를 넘어 검지까지 빨기 시작했다. 손끝에 느껴지는 축축함이 불쾌했고, 이대로 집어삼켜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서둘러 디아의 입 속으로 중지를 집어넣은 반이 양옆으로 손가락을 벌렸다.

이, 하는 것처럼 벌어진 디아의 입 안을 훑은 반은 저가 잘못 본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아랫니 두 개가 분홍빛 잇몸 위로 쏙 올라와 있었다. 엄지로 아랫니를 공연히 만지작거리는데, 텅텅 빈 잇몸에 윗니 두 개가 슬금슬금 자라났다. 그래 봐야 티끌만 했지만 반의 표정은 뻣뻣하게 굳었다.

“…이가 원래 이렇게 빨리 자라나?”

디아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입 안을 들여다봤지만, 아기라고는 스쳐 지나가며 손 한 번 흔들어 준 것이 유일한 접점이었던 반은 이가 나는 올바른 시기를 알지 못했다. 그저 의문투성이였다. 이마를 긁적이다가 재차 입 안을 헤집는 반을 물끄럼물끄럼 바라보던 디아가 톡톡 튀는 웃음을 터트렸다.

따뜻한 김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사지가 덜덜 떨렸다. 옷을 벗은 겸 샤워까지 할 계획이었건만 어디에 둬도 악착같이 기어 와 달싹 달라붙는 아이 탓에 끈적끈적한 액을 씻어 내는 게 고작이었다. 검은색 속옷만 걸친 반은 수건으로 둘둘 감은 디아를 안고 재빨리 2층에서 스웨터 하나만 챙긴 뒤 지하실로 내려갔다.

“으, 추워….”

아이를 냉큼 유리 벽 안에 넣은 후 품이 큰 스웨터를 껴입었다. 드러난 다리가 서늘하긴 해도 그런대로 온기가 돌았다.

수건으로 꽁꽁 싸인 디아는 팔다리를 놀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유리 가까이 다가왔다. 상황에 대한 인지가 보통 수준이 아닌 아이는 유리 밖에 서 있는 반을 빤히 바라봤다.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아 또 쫑알쫑알 말하는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얄미운 표정을 지은 반은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대충 훔치고 뒤돌았다.

두 번째 미션, ‘밥 먹이기’를 실행하기 위해 기계음이 알려 준 곳으로 향했다. 책장 앞에 선 반은 가장 아래 칸에서 검은 박스를 끌어냈다. 꽤 묵직한 박스에는 단백질 파우더 통과 비슷하게 생긴 밀폐 용기, 커피포트, 그리고 두꺼운 책 한 권이 함께 들어 있었다.

주저앉아 책부터 꺼낸 반은 표지를 확인하자마자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육아 대백과>. 제목 한번 거창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유리 너머를 노려보았다.

“지금…. 나더러 저걸 키우라고….”

미셸은 이미 저게 깨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벽돌 같은 책을 바닥에 던진 반은 파우더 통을 꺼냈다. 겉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통을 열자 입자가 고운 가루가 수북했다. 기계음은 박스의 위치만 알려 주었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유추해 보자면 이걸 먹이라는 것 같은데….

반은 던진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두꺼운 책을 빠르게 훑어보는데 예상외로 그림 자료가 많았다. 마침 분유 타는 법에 대해 적힌 페이지에 책갈피가 하나 끼어 있었다. 책의 중심부를 꾹꾹 눌러 페이지를 고정한 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잠긴 도중 미세하게 쿵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벽으로 고개를 돌린 반이 미간을 구겼다. 가만히 있으라고 수건으로 몸을 싸매 뒀더니 어느새 유리에 바짝 붙은 디아가 딱딱한 표면에다가 이마를 쿵쿵 부딪치고 있었다. 시선이 닿은 걸 알아챈 디아는 조그만 얼굴을 마구 찌푸리며 꿈틀거렸다. 이쯤 되면 저 맹목적인 눈빛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진짜 왜 저래….”

정신 사납게 구는 디아 덕에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끝낸 반은 어설프게 분유를 타기 시작했다. 부엌 찬장을 뒤져 찾아온 오목한 그릇으로 젖병을 대체하고, 소독이 필요하다는 문구는 자체적으로 생략한 뒤 미리 끓여 둔 물을 부었다. 김이 펄펄 나는 물에 가루를 가득 쏟아 넣고 티스푼으로 대충 휘저었다. 녹다 만 뭉친 가루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그릇을 들고 유리 벽 안으로 들어섰다.

“으아…!”

“가만히를 못 있어?”

유리 벽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디아가 데굴데굴 굴러 반의 발치까지 다가왔다. 그릇을 바닥에 내리고 꽉 묶어 둔 수건을 풀어 주자 뿅 하고 튀어나온 팔다리를 꼼지락거린 아이가 냉큼 몸을 뒤집었다.

“먹어.”

한마디 던지고 돌아선 반은 디아가 빠져나온 허물과 끈적끈적한 액체로 범벅된 바닥을 정리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기 시작한 디아가 눈앞에 놓인 분유를 한참 보더니, 그릇을 피해 반의 무릎을 잡았다. 진저리치며 너덜너덜한 허물을 집어 들어 봉지 안에 넣던 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통통한 허리를 잡아 그릇 쪽으로 돌렸지만 아이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기껏 타 왔더니 태도가 영 시건방졌다.

“야, 너 까다롭게 군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피자 먹었다, 이렇게 나약하게 굴면 우린 함께할 수 없다. 기어 다니는 아기에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던 반이 스포이트를 가지러 나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포이트로 분유를 찔끔찔끔 빨아들인 반이 디아의 뒷덜미를 잡아 고정했다. 아이는 자세가 불편한지 다리를 버둥거렸다.

“와아. 내가 어쩌다가….”

한평생 아이를 안을 일이 없었으므로 어디서 본 대로 아이를 품에 안자 반의 어깨가 하늘로 바짝 솟았다. 한탄, 한탄, 한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내가 뭐 하고 있냐, 진짜.”

젖병을 대신한 스포이트가 디아의 입술 사이로 들어갔다. 스포이트 끝에 달린 주머니를 눌러 분유를 넘겨주자 볼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디아가 조그만 입 안에 가득 들어찬 분유를 죽죽 흘리기 시작했다.

“왜. 왜 그러는데. 삼켜, 얼른.”

헤벌어진 입가에서 스포이트로 건넨 분유가 질질 흘러나왔다. 고개를 젖혀 줘도, 볼을 잡고 흔들어도 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먹이려고 애를 쓰는 반을 빤히 바라보던 디아는 분유를 주룩주룩 흘리다 못해 뱉어 냈다.

“…너 지금 뱉었냐?”

디아는 어이없다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반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홱홱 돌리며 꺅꺅 웃었다. 먹이려는 반과 죄다 뱉어 내는 아이의 싸움은 상당히 오래 이어졌다. 마침내 분유를 조금이라도 먹이는 데 성공한 반은 넋이 나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와…. 나 못 하겠는데?”

한 거라곤 씻기고 밥 먹이고 청소한 것밖에 없건만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들 정도로 지쳤다. 줄곧 해 온 경호 임무인 줄 알았더니, 괴물의 베이비시터로 고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람을 패는 게 쉽지, 무언가를 키우는 건 해 본 적도, 하고 싶었던 적도 없던 반은 단 하루 만에 양육의 고통을 절감했다.

진이 다 빠진 탓에 붉은빛이 깜박이는 카메라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디아가 슬금슬금 반의 배 위로 기어올랐다. 가슴팍을 짚는 손에서 깃털 같은 무게가 전해지더니 시야로 작은 얼굴이 쏙 나타났다. 초록빛이 또렷하게 도는 눈동자가 집요하게 시선을 맞췄다.

“뭘 봐.”

모가지라고 부를 만한 부위가 없는 디아는 제 머리가 무거운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반의 콧대 위에 둥그런 이마를 기대자 눈을 깜박일 때마다 서로의 속눈썹이 엇갈리며 부딪쳤다. 간지럼을 견디다 못한 반이 팔을 뻗어 아이를 훌쩍 들어 올렸다. 공중에 뜬 디아가 얌전하게 몸을 맡겼다.

“또 큰 거 같은데.”

처음 막을 찢고 꺼냈을 때보다 무게가 늘었다. 아래위로 천천히 팔을 움직이며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숨 가쁘게 바쁜 상황 탓에 잠시 뒤로 미뤄 두었던 관찰을 시작했다. 아이를 유심히 뜯어보며 기함할 정도로 빠른 성장 외에도 이상했던 점을 두엇 꼽았다.

빽빽 울기는커녕 실실 처웃질 않나,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질 않나. 순간 소름 돋는 결론에 도달한 반이 표정을 굳혔다.

“…나 네 아빠 아니다.”

확실히 경고했으나 디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뜻 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머리맡으로 기어 내려가 남의 머리카락을 쭉쭉 당기고 이마에 입술을 비비는 디아를 내버려 둔 채로 늘어진 반은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오늘 뭘 했더라. 갖은 호들갑을 떨었더니 이렇게 쉬고 있기 전에 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마트에서 잭을 만난 것이 어제 일인지, 오늘 일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피곤했다. 졸음이 밀려오자 밝은 조명 아래여도 눈이 슬슬 감겼다.

불행히도, 막 몽롱해진 참에 바닥을 타고 진동이 전해졌다. 짜증스럽게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내던져 두고 나간 핸드폰이 바들바들 울리고 있었다.

“쉬는 시간도 없냐? 좀 쉬자.”

전화를 받자마자 욕만 겨우 건져 낸 투덜거림이 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기어이 눈썹까지 내려온 디아가 내쉬는 연약한 숨결 때문에 눈가를 살포시 찌푸렸다. 연락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제법 친숙하게 느껴지는 기계음이 불쑥 말을 꺼냈다.

- 다리 들어 봐.

“다리?”

반은 늘어뜨려 둔 다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뭐가 묻었나 싶어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별달리 눈에 띄는 부분은 없었다. 유리 벽 내부에 들어오기 전에 실내화를 벗어 드러난 맨발이 푸른 조명 아래 흔들렸다. 반대쪽 다리까지 바꿔 들며 확인했지만 멀끔했다.

- 바지는 왜 안 입었어?

“…뭐?”

훤히 드러난 살결 아래로 딱 달라붙은 검은 드로어즈를 내려다본 반이 천천히 다리를 내렸다. 순간 진득한 불쾌감이 뒤통수를 치고 지나갔다. 이거 지금, 이 새끼가 지금….

- 보기 좋네. 그러고 다녀.

“뒈지고 싶어? 미친 새끼가.”

카메라를 향해 중지를 들어 보였다. 한 손으로 모자라 두 손으로 쌍욕을 날리자 귓가 근처에 내려 둔 핸드폰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일어나 볼래?

“싫어.”

- 추가금 줄 수 있는데….

추가금이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탓에 이마에 기대고 있던 디아가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놀랐는지 칭얼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며 카메라를 올려다봤다.

“싸게 해 준다. 10달러. 달아 놔.”

카메라까지 달아 두는데 녹음이라고 안 할까. 구두 계약으로 돈을 약속받자 피로가 다소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뒤로 넘어가려는 찰나, 귀에 댄 핸드폰에서 상당히 당황스러운 제안이 들려왔다.

- 웃어 봐.

“…지금 장난치냐?”

- 100달러.

핸드폰을 떨어뜨린 반이 화면과 카메라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사람을 뭐로 보고….

허벅지 위로 타고 오른 디아를 품에 안은 반이 카메라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살짝 처진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가며 입매가 시원하게 찢어졌다. 저놈의 성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만났던 여자들이 끔찍하게 좋아하던 표정이었다. 드물게는 남자들도 좋아했기에 여차하면 써먹을 구석이 많은 미소이기도 했다.

“됐냐?”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적 달성 후 삽시간에 미소를 거둔 반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돈 몇 푼에 웃음 파는 일이야 어렵지 않았지만 불현듯 전화를 거는 놈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아마 미셸의 지인일 테고, 그렇다면 나이가….

“웩.”

카메라 너머의 노인네가 제 재롱에 값을 매기는 상상을 하자 살짝 구역질이 일었다. 그다지 즐거운 상상은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계음의 말투에는 그다지 늙수그레한 느낌이 없었다. 또래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노인만 아니길 바라던 때, 한참 웃음을 이어 가던 기계음이 느릿하게 물었다.

- 돈이 그렇게 좋아?

“환장하지.”

그러니까 이런 것도 덥석 맡는 거 아냐. 가슴팍을 힐긋 내려다보자 허리에 올라탄 디아가 새로운 놀이라고 생각한 듯 반의 윗배를 양손으로 내리치며 즐거워했다. 아이를 들어 바닥으로 옮기고 스웨터를 훌떡 벗었다. 체온을 회복한 덕에 추위는 덜했다.

- 지금 뭐 하는 거야?

웃음기가 잔잔하게 밴 기계음이 슬슬 거슬렸다. 확실히 노인네는 아니었다.

“좋으면 보너스 달아 두든가.”

그대로 폴더를 닫아 통화를 끊은 반은 온기를 머금은 스웨터로 디아를 감쌌다. 소매를 둘둘 둘러 헐겁게 매듭을 매고 몸을 일으켰다. 재빨리 따라오려던 디아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소매에 파묻힌 채로 짧은 다리를 버둥거린다.

“오늘 인사까지 했으니까….”

반은 천장 구석에 달린 카메라를 곁눈질하고 걸음을 뗐다.

“내일 보자.”

낑낑대며 일어나 앉는 디아를 훌쩍 뛰어넘어 출입구로 향했다. 반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으아…!”

팔이 묶인 채로는 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다시 몸을 굴려 다가오기 시작했다. 뒤를 흘끗흘끗 돌아보며 비밀번호를 입력한 반은 스르르 열리는 유리 너머로 잽싸게 빠져나왔다. 인식 장치가 따로 있는 듯 문은 곧바로 닫혔고, 한발 늦은 디아만 반대편 공간에 덩그러니 남았다. 닫힌 문 앞에 다다른 07이 이마로 유리를 콩콩 두드렸지만 열릴 리가 없었다.

“이제 나 쉬는 시간이야.”

반은 열 수 있으면 열어 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다가, 금세 싸늘하게 식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등을 돌렸다. 비밀번호 칠 만큼 크면 알아서 나오든가. 태평하게 약 올리고는 사다리를 밟았다.

제 방으로 돌아온 반은 곧장 새 스웨터와 바지를 꺼내 입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비현실적인 일이 와르르 몰려들어서 그런지 온몸이 녹아내릴 듯하다고 느낄 정도로 피곤했다. 껌껌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기는 했는데, 미치게 피곤한 몸과 달리 약불에 데워지듯 서서히 몸집을 키우는 불안이 잠에 빠지려는 순간마다 찾아왔다.

저거 혼자 둬도 되나?

유리를 이마로 콩콩 찧던 마지막 장면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뒤척여 문을 등지고 누운 반은 억지로 눈을 꾹 감았다. 자고로 애는 혼자 자야 독립심도 기르고 주체적으로 자라는 법이다. 이 땅의 수많은 아이가 그렇게 자라는 중이고, 자신도 그렇게 자랐고, 더군다나 그놈은 사람도 아니니까 괜찮았다. 아무렴 괜찮고말고.

아무리 자신을 합리화해 봐도 미미한 죄책감이 편안한 수면을 방해했다. 결국 커튼 새로 새벽빛이 스밀 즈음에야 눈을 붙일 수 있었으나 그마저도 얕은 선잠이었다.

***

20xx. 12. 7. 저거 삐졌다.

기록보다 뒷담에 가까운 글을 남긴 반은 서류철을 책상 위로 던져 놓고 유리 벽 너머를 삐딱하게 응시했다. 디아는 벽을 등진 채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출입구에 찰싹 붙어 있더니, 반을 발견하곤 데굴데굴 멀리 굴러가 시위하듯 저러고 있는 게 무려 이십 분째였다. 아주 세상을 등질 기세였다.

오른손에 쥔 시계를 한 번 들여다본 반이 발을 질질 끌어 출입구로 향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이 열리는 동안에도 디아는 구석에 처박은 머리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새 컸냐?”

힘겹게 안으로 기어들어 가 껄렁껄렁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어제보다도 길게 자란 밝은 머리카락이 아이의 뒤통수를 덮고 푸른 스웨터 주변에 흐트러졌다. 간밤에 성장해 있으리라고 예상은 했다만 실제로 보자 어디 제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천천히 한 발씩 내딛자 디아가 꼼질꼼질 움직여 더 들어갈 곳도 없는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손바닥만 한 등으로 토라진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모습에, 저것의 정체고 자시고 못된 장난기가 샘솟았다.

“아. 이제 관심이 식었다?”

어제는 떨어뜨려 두면 기를 쓰고 기어 오더니 오늘은 발을 끌며 다가가도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값어치를 가진 몸이셨다.

작은 등 뒤에 주저앉은 반은 인간 아이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디아를 가만 바라보았다. 프로젝트니, 기밀이니, 위험성이 어쩌니 하며 겁을 잔뜩 준 것치고 이 괴생명체는 전혀, 티끌만큼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가리가 네 갈래로 찢기며 우둘투둘한 이빨과 징그러운 혓바닥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독성 있는 점액질을 사방에 토하지도 않았다. 가진 것은 말랑말랑한 몸뚱이와 집요하다 싶은 눈빛뿐이라 반은 한 톨 남은 경계마저도 풀리는 것을 느꼈다.

물론 돌변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기에 짧은 한숨을 내쉬며 화해를 시도했다. 좋으나 싫으나 1년을 함께할 텐데 사이가 냉랭한 편보다는 친밀한 쪽이 낫지 않겠나. 망설일 것 없이 한 손바닥 안에 들어오고도 남는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요.”

기다란 손가락이 좁은 어깨 위를 피아노 건반 누르듯 가볍게 돌아다녔다.

“얼굴 한번 봐도 될까요?”

어깨를 토독토독 두드리다가 보드라운 뺨을 감싸 들어 올렸다. 고개가 저항 없이 뒤로 젖혀지며 금빛 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눈을 끔벅인 반은 저도 모르는 새 탄성을 뱉었다.

“…허.”

밤새 몇 개월이나 자란 건지 모르겠지만, 억울함이 담겨 일그러진 얼굴은 어제보다 젖살이 내리고 미약하게나마 선이 드러나는 중이었다. 반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한참이나 아이의 얼굴을 뜯어보다 중얼거렸다.

“얼굴이 참….”

조막만 한 얼굴을 마구잡이로 더듬었다. 가짜 가죽이면 벗겨 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이 담긴 무자비한 손길이었다.

말랑한 볼을 쭈욱 늘려도 보고, 아기 주제에 오뚝한 코끝을 위로 밀어도 보고, 눈 아래 도톰한 애교살을 엄지로 내려도 봤지만 무엇 하나 이질적으로 망가지지 않았다. 반은 심각한 낯으로 디아를 훌쩍 돌려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괴물 혹은 외계인의 외모 수준이 이렇게나 뛰어나다니. 심지어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 주제에 말이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뺨을 놓아주자 천사 같은 얼굴이 점점 풀어졌다. 허공에 뜬 팔 사이로 작은 몸이 꼬물꼬물 다가와 가슴팍에 안겨 들었다. 딱히 사과의 의미로 조몰락거린 건 아니었는데,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마음이 풀린 모양이었다.

“으… 에!”

“뭐래.”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옹알이를 내뱉기에 묶인 스웨터 소매를 풀어 주었다. 디아는 드디어 자유를 찾은 팔을 확인하자마자 불식간에 반의 목을 감싸 안았다. 목깃을 작은 주먹으로 꽉 쥐어 오는 탓에 반은 약간의 죄책감과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며 등을 쓸어 주었다.

“뭐, 이때는 다 예쁘지.”

지금은 흔한 평범함으로 무장한 잭도 어릴 적에는 그렇게 예뻤다는데, 얘라고 다를까. 반은 잠시 바닥에 놓았던 시계를 벽에 기대어 세워 두고 디아를 살짝 밀어 냈다. 아이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어린아이의 악력이라고 해 봐야 반에게는 코웃음 나는 힘이었다.

“이거.”

부루퉁한 빛을 담은 눈알이 반의 손가락을 따라 시계로 향했다. 벽에 있는 걸 떼어 왔더니 크기가 꽤 컸다. 막 8을 지난 기다란 시곗바늘이 오른쪽 방향으로 소리 없이 돌아갔다.

“짧은 바늘이 이거랑 이거 가리키면 난 나갔다가 올 거야.”

검지로 12와 7을 짚었다.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대강 말은 해 놔야 나갈 때의 죄책감이 덜할 것 같았다. 밤새 고민해 나온 결과였다.

아이는 숫자와 출입구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눈으로 좇았다. 식사 시간을 알린 다음, 검지가 시계 반 바퀴를 훅 돌았다.

“그리고 이건 내 쉬는 시간. 방해하면 혼나.”

대답 없이 눈만 깜박이는 디아의 정수리를 잡아 위아래로 끄덕이게 했다.

“좋아. 개인 시간은 있어야지.”

아기를 돌본다는 정신적 고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나절을 투자해도 모자란 감이 있었지만 양심상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했다. 고로 이놈은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그나저나.

반은 허리를 숙여 오동통한 뺨을 밀어 올렸다. 비틀린 입술 새로 좁은 입 안이 드러났다.

“어금니 났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으나 내일이면 얼추 다 자랄 듯했다. 얌전히 입을 벌려 준 디아가 손이 떨어지자마자 슬그머니 웃었다. ‘이’ 하는 입 모양을 따라 가지런히 난 치아가 귀엽기도 했다. 칭찬을 바라는 것 같아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자 까르르 웃는다.

빨리 커라. 하루에 5살씩 커서 손 좀 덜 가게 해 줘라.

반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디아에게 별일이 없다는 걸 확인하니 잠을 설친 여파가 몸을 덮쳤다. <육아 대백과>를 베고 눕자 배 위로 기어 올라온 디아가 반의 쇄골 부근을 두 손바닥으로 누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휘청거리는 머리가 곧 고꾸라질 것 같아 동그란 이마를 검지로 받쳐 밀어 올렸다.

“네 옷 가져왔는데.”

옆구리에 끼고 있던 폭신폭신한 스웨터를 들어 두어 번 털었다. 다행히도 옷장 속에 4살 때쯤에 입었던 옷이 남아 있었다. 아빠가 놀린답시고 선물한 촌스러운 크리스마스 스웨터였다. 빨간 리본과 루돌프가 수놓아진 옷을 돌돌 말아 아이의 머리에 끼워 넣었다.

“야. 너 무슨 선물 같다.”

반은 큭큭 웃으며 앞으로 묶은 스웨터 소매를 예쁘게 다듬었다. 크다 못해 포댓자루 같았던 파란 스웨터에 비하면 훨씬 나았으나 아직도 큰 옷에 잡아먹힌 모양새였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반은 불편한지 뒤척거리는 아이를 벽에 기대어 앉혔다.

“자. 조사를 시작해 볼까.”

촌스러운 스웨터를 구속복처럼 껴입은 디아가 통통한 볼을 일그러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당장 얼러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저게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반은 대수롭지 않게 할 일을 시작했다.

첫 단계로 스웨터 아래로 빼꼼 튀어나온 디아의 발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을 구부려 조그만 발바닥을 살살 긁자 손톱만 한 발가락이 움찔거리며 오므라들었다. 양발을 잡고 간지럼을 태우자 디아가 히힛거리며 다리를 버둥대기 시작했다.

“간지럼은 타네.”

발을 놓아준 반은 다음 목표로 손을 옮겨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옆으로 당기자 말랑한 살이 쭉 늘어나더니 더 이상 당겨지지 않았다. 살성에는 특별한 구석이 없는 듯하다.

“으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티끌만 한 이가 보였다. 입 안 역시 걱정과 달리 촉수 비스름한 것도 없었다.

“흠….”

때마침 <육아 대백과>가 떠올랐다. 인간이 아니라지만 똑같이 생겼으니 성장의 대략적인 순서는 파악할 수 있을 테다. 냉큼 책을 끌어와 성장 과정이 적힌 페이지를 읽어 내렸다.

생후 6개월부터 아랫니 두 개가 나기 시작한다.

“6개월? 장난치나.”

반은 개별 차가 있다는 문장에서 위안을 얻었다.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를 후루룩 넘기며 아기의 성장을 감상하는데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그림 속 아기는 죄다 디아보다 훨씬 작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여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던 반은 끄트머리에 적혀 있는 문장을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8개월부터 길 수 있으며….”

이미 확인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디아의 소매를 풀어 주고 곧장 출입구로 뛰어갔다. 유리 벽에 붙어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자신을 향해 열심히 기어 오고 있었다.

스웨터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디아를 피해 내부를 크게 한 바퀴 도는 동안 죽어라 쫓아오면서 지치지 않는 것으로 모자라 빠르기까지 했다. 아무리 열심히 기어도 가까워지지 않자 칭얼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가오기에 적당히 잡혀 주었다.

발목을 야무지게 쥐고는 발등에 머리를 기댄 디아가 이겼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웃음소리는 분명 귀여운 면이 있었으나 괴상망측할 정도로 빠른 성장은 놈의 사랑스러움을 묻을 만큼 섬뜩했다. 미간에 새겨진 주름을 문지르던 반은 길게 늘어진 디아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클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꿇어앉은 반은 바닥을 짚은 디아의 두 손을 잡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중심을 잡아 주고 똑바로 세우자 작은 발이 어설프게 바닥을 디뎠다.

“될 것 같다. 이제 걷자.”

손을 꼭 잡고 앞으로 살짝 당겼다. 주춤거린 디아가 한 발을 내디뎠다. 그다음 발, 다음 발도 내딛자 어느새 걸음걸이가 안정적으로 변했다.

“잘하네.”

가벼운 칭찬을 던진 반은 조심스레 손을 놓았다. 넘어지면 받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디아는 휘청거림 한번 없이 똑바로 서서 반을 바라보았다. 스웨터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발가락이 꼼질거리다가 무릎걸음으로 물러선 반에게로 움직였다. 발에 무게를 실을 때마다 아슬아슬한 중심 잡기가 이어졌다. 이윽고 반의 무릎과 꼭 붙은 위치에서 어색한 걸음이 멎었다.

“…진짜 빠르네.”

디아가 쭉 내민 손을 붙잡고 의미 없이 위아래로 흔들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머릿속은 이미 복작복작했다.

어제 태어났는데 오늘 걷는다라. 1년 뒤, 계약이 끝나는 시기에는 대체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카메라를 흘긋 올려다봤지만 사사건건 간섭하길 좋아하던 기계음은 고요했다.

“그냥 다시 기자.”

아이를 잡아 다시 엎드리게 했다. 혹시나 빨리 크는 이유가 불순한 의도라면 조금이라도 성장을 늦추는 편이 나았다. 기는 거나 연습시킬 생각으로 멀리 뛰어가자 동그랗게 뜨인 녹색 눈이 왜 도망가냐는 듯 배신감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기어 와. 서지 말고.”

반은 무릎을 굽혀 앉아 양팔을 벌렸다. 바람과 달리, 한 손을 뻗어 바닥을 짚은 디아가 서서히 일어섰고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서지 말라고!”

팔로 엑스를 그렸지만 디아는 재미난 것을 본 꼬마처럼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기나 했다. 유리 벽을 짚고 살금살금 걷더니, 이윽고 허탈하게 주저앉아 있는 반에게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품으로 폭삭 엎어진 디아가 위를 올려다보며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얼른 칭찬해 달라는 듯이. 하지만 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네가 지금…. 지금 뛰면 안 돼.”

반은 아이를 들어 올려 다시 엎드리게 했다.

“아직 기어야 돼. 기는 것도 이상하긴 한데, 그래야 해.”

디아는 납득한 듯 조금 기어가는가 싶더니 도로 벌떡 일어나 반의 주위를 돌며 뛰어다녔다. 발을 콩콩 구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를 붙잡아 엎드리게끔 하고, 아이가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짓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고서야 반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 뛰어라, 뛰어. 아주 날아다녀라, 미친놈아.”

반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마는 건지 디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반의 주위를 뛰다 품에 안기길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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