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9)

02.

반은 정오가 되자마자 제 무릎을 겨우 넘는 아이와 사투를 벌였다.

“아까 말했잖아. 갔다가 다시 온다니까?”

“으아…!”

바짓가랑이를 뜯어낼 기세로 움켜쥐고 있던 디아가 뒤뚱거리며 출입구로 뛰어가 유리 벽 앞에서 양팔을 쫙 펼쳤다. 나가지 못하게 막는 법은 어디서 배웠는지. 반은 짜증과 허기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4시간 동안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말 못 하는 아이와 놀아 준다는 건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끼니를 챙길 겸, 놀 만한 것들도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이놈은 아까 한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 배고파. 나와, 빨리.”

패드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나머지 손을 내저었다. 힘없이 팔랑거리는 손동작에 피로가 배었다. 술래잡기, 비행기 태우기, 공중에 던졌다가 받기…. 그 정도 하면 지칠 줄 알았다. 오히려 한평생 몸 쓰는 걸 직업이자 취미로 삼았던 반이 나가떨어질 정도로 디아의 체력은 바닥이 없었다.

“제발. 배고프다.”

더 이상 딱 버티고 서서 조금도 비키려 하지 않는 아이와 실랑이할 힘도 없었다. 반은 허접한 철옹성 같은 디아를 훌쩍 들어 올려 입구에서 가장 먼 대각선 구석에 내려 두고 재빨리 돌아와 문을 열었다.

또 뛰어올까 싶어 냉큼 몸을 빼내고 안을 들여다본 반은 예상외로 구석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와 마주쳤다. 위에서 내리쬐는 밝은 조명 탓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게 진짜….”

분명히 알고 저러는 게 틀림없다. 저렇게 처량하게 앉아 있으면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게 분명하다.

“똑똑한 새끼.”

들리지 않게 속삭이고는 발을 돌렸다. 딱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데 데리고 나올까 하는 마음도 설핏 들었다. 하지만 방심하고 꺼내 두었다가 돌변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첫날 아이를 유리 벽 안에서 꺼내기는 했지만, 그때는 온몸을 적신 점액을 씻기기 마땅치 않아서였다. 아이를 꺼내 줄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지금은 매정할 때였다.

사다리를 오르자마자 주린 배를 안고 창고로 향한 반은 먼지가 잔뜩 앉은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계기가 없으면 물건을 버리지 않는 미셸의 나쁜 버릇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거실에 상자를 내던져 두고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너른 지하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디아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손이 빨라졌다.

“아, 쟤 밥…!”

간편식을 데워 허겁지겁 해치우던 반이 화들짝 놀라 수저를 내려놓았다. 배고프다고 투정 부리는 일이 없어 놈의 식사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절반도 못 비운 그릇을 그대로 두고 커다란 상자를 든 채로 지하실로 뛰어 내려갔다.

상자를 책상 위에 던져 두고 통로 안으로 들어간 반은 시계를 안고 뒤돌아 있는 디아에게 기어갔다. 아침에 기분 풀어 놨는데 또 토라진 등이 손바닥 두 개로 다 가려질 만큼 작아 보여 절로 죄인의 마음가짐이 되었다.

제 상체만 한 시계를 끌어안은 디아의 울적한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오더니 동그랗게 뜨였다. 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역시 아까 전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자. 봐.”

아이가 안고 있던 시계를 가져와 숫자를 가리켰다.

“아까 이 숫자에서 나갔지? 그럼 1이 되기 전에 돌아올 거야.”

말만으로는 또 알아듣지 못할까 봐 자신과 문, 숫자를 하나씩 짚어 주었다. 이리저리 돌아가는 녹색 눈알이 제대로 알아들은 꼴은 아니었다.

몇 번 반복하면 이해하겠지 싶어 반은 급히 타 온 분유를 앞에 내려 두었다. 적당히 식힌 분유를 스포이트로 빨아들여 입술 사이에 집어넣었다. 상체를 뒤로 빼려는 걸 붙잡아 조금씩 먹여 주었으나 디아는 한두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홰홰 저었다.

“왜 안 먹어? 이러면 나중에 배고프다. 어?”

도통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아 속이 탔다. 징글맞게 빨리 자라면서 먹는 건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애원하고, 간지럼을 태우고, 직접 먹는 척을 해 봐도 디아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억지로 입을 벌려 먹여 보려는 헛된 시도를 마지막으로 반은 차갑게 식은 분유를 실험용 개수대에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소식 좋지, 좋은데…. 넌 좀 심하다.”

“으응.”

“알긴 아냐?”

지하실까지는 괜찮을 것 같아 들고나온 디아가 반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책상 위에 펼쳐 둔 책을 뒤적인 반은 아이를 그 옆에 내려놓고 움직임 따라 커다란 눈을 굴리는 디아의 뺨을 움켜쥐었다.

책에서 본 대로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조그만 입 속을 닦아 냈다. 양치까지 해 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책에 나오는 대로 차근차근 따를 뿐이었다. 디아가 따라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게 흠이었지만.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디아는 얌전히 입을 벌려 주나 싶더니 손수건과 함께 들어온 검지를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조그만 게 무는 힘이 제법 강했다. 반은 한 손으로 작은 턱을 벌리고 마저 양치를 이어 가며 허전한 배를 달랬다.

“내 인생 왜 이렇게 됐냐….”

서툰 손길에 입 안을 맡긴 디아는 반의 한탄을 비웃듯 웃음을 터트렸다.

***

“후….”

담요 한 장 들고 의자에 늘어진 반이 뻑뻑한 눈을 비볐다. 쉬는 시간이랍시고 유리 벽 밖으로 신나게 기어 나오기는 했으나 도저히 어제처럼 인정 없이 자러 갈 수 없었다. 따라 나올까 경계하며 물러나는 와중에 디아가 시계를 불쑥 들이민 탓이 컸다.

아이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는 바늘과 그 옆에 있는 숫자 1을 조막만 한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저녁을 먹으러 나갈 때까지만 해도 울먹거리더니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반짝거리는 눈이 뿌듯함을 머금었다. 그건 낮일 때 이야기고, 지금은 밤이었다. 죄다 틀렸다고 해 주고 싶었지만….

‘1시간만 기다리면 올 거지?’

그리 말하는 것 같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유리 밖 의자에 잠자리를 튼 반은 바닥에 누운 채로 저를 향해 방긋거리는 디아를 보며 투덜거렸다.

“왜 잠도 안 자, 저건….”

어떻게 된 애가 온몸으로 놀아 줘도 낮잠 한 번을 안 잘까. 반이 의자를 떠나지 않자 장난치자는 줄 아는지 데굴데굴 굴러 유리 벽에 바짝 붙은 디아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발을 구르며 뛰어다니는 것이 아닌가.

저 멀리 뛰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내내 반에게 붙은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흩트린 반은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일이 오면 또 얼마나 클지 가늠조차 안 되는 아이를 애써 무시하면서.

불편한 자세로 구겨져 자던 반은 책상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때문에 쪽잠에서 깨어났다. 연락은 일주일에 한 번 한다며 내버려 두는가 싶더니 하루를 못 넘기고 연락을 주시다니, 성질 한번 대단했다. 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책상에 엎드려 핸드폰을 귓가에 얹었다.

- 잘 잤어?

“…여기도 보여?”

곁눈질로 유리 벽 안을 살폈다. 붉은빛이 깜박이는 카메라가 대답 대신 천천히 움직였다. 와, 헛웃음을 터트린 반이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야…. 설마 하루 종일 보고 있는 건 아니지?”

- 그러고 싶긴 해.

소름이 돋아 핸드폰을 살짝 떨어뜨렸다가 유리 너머에서 몸통만 한 시계를 들이미는 디아를 보고 표정을 풀었다. 짧은 바늘이 8에 닿기 직전이었다. 잠기운이 전혀 남지 않은 몸짓이라 의아하게 보던 중, 기계음이 말을 이었다.

- 오늘은 글 좀 알려 줘.

“글? 벌써?”

어제 걷기 시작한 애한테 글을 가르치라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 너보다 똑똑할걸.

순간 들려온 말에 울컥했다. 갑자기 남을 걸고넘어지는데, 심지어 말투도 시비조였다.

“아니, 내가 어떤 줄 알고….”

- 고등학교 성적이 바닥이던데. 중퇴도 하셨고….

입을 쩍 벌린 반이 카메라를 올려다봤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미셸이 말했냐?”

- 다 아는 법이 있지.

중퇴는 그렇다 치고 성적을 이 인간이 어떻게 알아.

반은 미셸이 털어놓은 게 틀림없다고 여기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야. 너 대체 누구냐? 그 무슨, 연구실 사람이야?”

- 곧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일할 때는 행동거지 똑바로 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놈을 추궁하려고 했으나 기계음은 곧바로 말을 돌렸고, 단순한 반은 정확히 걸려들었다. 기계음은 하필 반이 약한 부분만 쏙쏙 골라 건드렸다.

“내 행동거지가 어떤데.”

- 보고 배우기 좀 그렇지 않아? 부모 노릇하려면 조심해야지.

“내가 왜 저 새끼 부모…!”

속상하게도 반의 반박은 먹히지 않았다. 약을 잔뜩 올려놓고 멋대로 통화를 끊은 기계음 탓이었다. 야, 야! 고함을 지르던 반은 화면이 꺼멓게 죽은 핸드폰과 유리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디아를 번갈아 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

오늘도 간편식을 입에 밀어 넣고 출입구로 기어들어 간 반은 시계를 안고 뛰어온 디아를 덥석 받아 냈다. 목 근처에 얼굴을 묻은 디아는 곧 기절할 것처럼 흥분하면서 좋아 죽으려고 하더니 턱에 입술을 마구잡이로 비볐다.

“바!”

“어, 좋은 아침.”

거치적거리는 시계를 벽에 세워 두고 난리가 난 아이를 똑바로 세운 반은 곧장 미간을 구겼다.

“또 컸어?”

어제는 발을 감출 정도로 질질 끌리던 스웨터가 발목 위로 껑충 올라와 있었다. 황당한 심정으로 제 뺨을 쓸어내린 반은 그저 좋은지 발을 구르는 아이의 조그만 코를 검지로 톡 건드렸다.

“이제 놀랍지도 않다.”

막을 수 없는 성장이라면 얼른 자라서 대화라도 통하는 게 나았다.

***

디아는 제 앞에 와르르 쏟아지는 완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맞은편에 앉은 반은 알파벳이 적힌 나뭇조각을 뒤적였다. 창고에 처박아 둔 세월이 얼마인지, 말 그대로 유물 같은 교구였다. 나뭇조각 몇 개가 사라졌지만 교육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 외워야 돼. 넌 할 수 있어.”

조각을 주섬주섬 집어 아이 앞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되는대로 해 보는 수밖에.

“내 이름.”

총 여덟 개의 조각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디아가 고개를 들자마자 반은 한 손으로 교구를 뒤섞었다. 56개 나뭇조각이 제법 길어진 아이의 다리 주변에 흩어졌다.

“자. 내 이름이 뭐야?”

답 없는 교육법에도 디아는 느릿느릿 손을 뻗어 조각을 끌어왔다. 여덟 개 조각이 반의 앞에 주르륵 놓였다. 별 기대 없이 관심이나 끌자 싶어 저지른 짓이었기에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은 반의 한쪽 눈썹이 쑥 올라갔다. 기억력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가 막히는 수준이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너 지금 내 말 알아듣냐?”

“으, 나아….”

디아는 반의 말끝을 따라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알아듣는 거야, 때려 맞히는 거야. 영 알 수가 없었다. 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똑똑하네. 하나 틀리긴 했지만.”

반의 검지가 가장 앞에 있는 조각을 쭉 밀어냈다.

“P가 아니라 V. 판 아니고 반. 따라 해 봐. 반 클라크.”

“바… 아.”

디아는 반의 입을 뚫어져라 보며 통통한 입술을 달싹였다. 옅은 미성이 애매하게 이름을 뱉었다.

“반.”

“바, 안.”

“잘하네.”

반은 V가 새겨진 나뭇조각을 유심히 바라보는 디아의 고운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만지며 머리를 굴렸다. 오늘 단어 100개를 이 작은 머리통에 쑤셔 박고 문장 구조까지 가르친다. 글이든 뭐든 배우는 건 자고로 스파르타인 법이다. 반은 나뭇조각을 뒤섞으며 씨익 웃었다.

“그럼 넘어가 볼까.”

“야…. 너 진짜 다 외우는 거 맞냐?”

디아가 작은 머리통을 강하게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건 긍정, 젓는 건 부정이라는 걸 먼저 가르친 덕에 의사소통이 비교적 수월했다.

“진짜?”

‘oO’

대문자 옆에 소문자 조각이 꼭 붙었다.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는 디아가 영 못 미더웠던 반은 가져온 동화책을 대뜸 가리켰다.

“이거 뭐야.”

‘BoOk’

“저거는.”

‘TABLE’

“나는?”

‘PAN’

“아니라니까…. 야. 너 지금 장난치는 거지.”

몇 번을 고쳐 줘도 디아는 고집스레 P를 집었다. 창문, 의자, 소파, 심지어 유리 철자도 외워 놓고 남의 이름만 못 외우는 행태가 기가 차 마른세수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름으로 꽤 많은 놀림을 당한 반이라 속이 배배 꼬였다. 이쯤 되면 놀리는 게 맞았다.

“네 이름도 만만치 않다. 이름으로 놀리는 거 아니야.”

단호한 반의 표정을 흘깃 살핀 디아가 조심스럽게 다른 조각 두 개를 끌어왔다. 완성된 문장을 확인한 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mY PAN’

“야. 누가 네 거야?”

딱딱 소리를 내며 다음 나뭇조각이 맞춰졌다. 아이가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들었다.

‘YoU’

“…뭘 알기나 하고 이러냐? 좀 이상하다.”

반은 쓰읍, 숨을 들이켜며 팔짱을 끼었다.

지나치게 빠르게 자라더니, 습득하는 것도 지나치게 빨랐다. 다 때려 맞히는 것 같았지만, 또 상황에 맞게 단어를 조합하기도 하니 절로 고개가 기울었다. 가르침을 습득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뭘 알려 줬고, 어떤 걸 알려 주지 않았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말이 글보다 어설픈 점이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이걸 알려 줬나?”

손가락이 조각 근처를 맴돌았다. 인칭 대명사를 가르쳐 줬던가? 소유격은? 오히려 자신이 헷갈리기 시작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무심결에 하는 말을 듣고 발음으로 얼추 알아챈 걸 수도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집 지하에 괴생명체가 산다는 것보단 세기의 천재 탄생이 그나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래…. 똑똑하면 뭐, 그럴 수도 있지.”

꼬박꼬박 나뭇조각으로 대꾸하던 디아가 딴청을 피웠다. 뼈대가 설핏 드러나는 손가락 사이에서 낡은 조각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섞였다.

“바아….”

“어? 왜.”

상념에 잠겨 있던 반은 연약한 목소리를 듣고 디아를 내려다봤다. 아이는 제 말에 대답을 해 줬다는 것에 감격했는지 조그만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교구를 헤치고 다가와서는 반의 무릎을 답삭 잡고 얼굴을 내밀었다.

“바안!”

“…왜.”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무뚝뚝한 인상을 고수하던 반에게서도 한숨이 스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쩐지 영악한 어린애에게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눈앞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 당긴 반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는 아이의 눈꺼풀 위로 가벼운 입맞춤을 내렸다. 디아의 정체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든,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인이든, 때때로 사랑스럽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

20xx. 12. 9. 공부시키는 중. 난 교육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디아가 똑똑한 게 맞는데(과하게), 그런데 나도 재능이 좀 있는 것 같다.

***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굼뜨게 흘러가던 시곗바늘이 빠르게 돌아갔다. 디아는 모든 걸 흡수하듯 가르침을 빨아들였기에 반은 얼마 가지 못해 밑천을 드러냈다. 아이는 언어를 배운 후로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왜’라는 말을 달고 살았고, 질문마다 말문이 턱턱 막힌 반은 ‘그냥’이라는 답변으로 무책임하게 응수했다. 교육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은 흐지부지 사라졌다.

점심을 먹기 위해, 정확히는 아이의 질문 공세를 피하기 위해 막 지하실에서 올라온 반의 귀로 쩌렁쩌렁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실에 있는 동안에도 계속 울렸던 모양인데, 어찌나 방음이 잘되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

다급히 구멍에서 빠져나와 리모컨을 눌렀다. 장식장이 더딘 속도로 지하를 감추는 새 현관을 거칠게 두드리는 인기척이 이어졌다. 장식장이 제자리로 돌아가자마자 현관으로 뛰어간 반이 문을 살짝 열었다.

문 틈새로 빳빳하게 다린 경찰 제복이 보였다. 꽤 오래 기다린 듯 수첩과 반을 번갈아 보는 눈빛이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뒷덜미가 빳빳하게 땅겼다. 누구나 경찰이 제집에 찾아오면 그러하겠지만, 지하실에 숨기는 게 있는 반은 더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중년의 경찰이 물었다.

“미셸 클라크?”

“예. 가족입니다.”

집 안을 가린 채로 문을 연 반은 펜 끝으로 이마를 긁적거리는 경찰 앞에서 태연한 태도를 고수했다. 경찰의 건조한 눈빛이 문가에 기대선 장신의 남자를 뜯어봤다.

“그… 미셸 클라크는 미시간 출신이라고 나오는데요. 정확히 어떤 사이신지?”

“아. 미셸은 제 할머니고, 어머니가.”

“동양인?”

“네.”

“아하.”

심드렁한 대꾸를 하며 무언가를 적은 경찰이 가슴팍 주머니에 수첩을 넣고는 턱을 들었다.

“신분증 좀 볼 수 있을까요?”

“잠시만요.”

반은 희미하나 무시할 수 없는 의구심을 익숙하게 넘기며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절로 닫히는 문을 발로 받친 경찰이 현관에 삐딱하게 기대섰다. 반은 뒤통수에 따라붙는 시선을 피해 지갑이 있을 부엌으로 향하며 입술을 매만졌다.

문득 잭이 알려 준 살인 사건 소식이 떠올랐다. 이 근처 숲에서 시체가 발견됐으니, 아직 범인을 못 잡았다면 가까운 마을로 시선이 오는 것이 당연하다. 결코 저거 때문은 아니라는 거지. 장식장에 눈길을 준 반은 굳게 닫힌 입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신분증을 찾아낸 반은 아래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현관으로 향했다. 얼마나 기다렸다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지루한 기색을 내비치는 경찰에게 신분증을 건넸다.

“반 클라크?”

“예.”

건성으로 확인한 경찰이 되돌려 준 신분증을 받아 들자 예의상 짓는 감정 없는 미소가 따라왔다.

“의례적인 거니까 기분 상하진 마시고. 사람이 산다는데 올 때마다 아무도 없더라고요.”

슬쩍 집 안을 보려는 경찰의 시야를 자연스럽게 가린 반이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조금 바빠서요. 근처에 무슨 일 있나 봐요?”

“아시겠지만 살인 사건의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아서요. 근처에서 수상한 사람 본 적 없습니까?”

역시나.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워낙 사람이 안 오는 동네라…. 잘 모르겠네요.”

“낯선 사람 보이면 바로 신고하시고요.”

경찰이 문을 받친 발을 물렸다. 집 밖에 나가지도 않으니 수상한 사람 따위 볼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알겠다 답하며 눈인사를 건넸다. 어깨에 달린 무전기로 보고하는 경찰을 흘긋거리며 현관을 닫았다. 창을 가린 커튼 틈새로 주위를 서성거리는 경찰을 훔쳐보던 반은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슬금슬금 지하실로 향했다.

“디아.”

“바안!”

사다리를 내려가며 아이를 부르자 맑은 음성이 지하실을 울렸다.

유리 문이 닫히지 않게 철판을 받쳐 두었지만 디아는 반이 없을 때 굳이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벽에 세워 둔 시계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장난감을 가지고 놀라고 손에 쥐여 주어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계 앞으로 되돌아가길 몇 번이라,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두었다.

“또 시계 봐? 재밌냐, 그게?”

“오늘 빨라.”

12시에서 고작 반절 지난 시곗바늘을 가리킨 디아가 눈을 접어 웃었다. 밥을 못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은 분리된 방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며 소식을 전했다.

“경찰 왔어.”

“왜?”

“경찰이 뭔지는 알아?”

버릇처럼 묻는 아이의 볼을 꼬집었다. 볼이 늘어진 채로 고개를 젓는 아이를 따라 금빛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흐트러졌다. 목을 자유자재로 가눌 수 있게 된 디아가 배시시 웃으며 몸을 기울였다.

뺨을 꼬집은 손을 얼른 풀고 기우뚱 넘어오는 디아를 감쌌다. 아이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비비적거리게 그대로 두고 바닥에 널브러뜨린 교구 중 직업 카드를 골라냈다.

“자. 제대로 앉아 봐.”

양반다리를 하고 앉자 자연스럽게 무릎 위로 올라온 디아가 반의 가슴에 뒤통수를 기댔다. 제복을 입고 경례하는 사람이 그려진 카드를 집어 올려 눈앞에 보여 주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기에 이마를 밀어 멀리 떨어뜨렸다.

“이게 경찰. 나쁜 사람 잡는 게 일이야.”

“일?”

“돈 벌려고 억지로 하는 거.”

“돈?”

“먹고 살려면 필요한 거.”

경찰 카드를 바닥에 내려 둔 반은 나머지 카드도 주르륵 늘어놓았다.

“여기서 뭐 하고 싶어? 골라 봐.”

“하는 거?”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거.”

어차피 직업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아이가 과연 어떤 직업 카드를 고를지 조금쯤은 궁금했다. 따끈따끈한 정수리에 턱을 얹고 기다리자 스무 장 남짓한 그림 카드를 가만 내려다보던 아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의 방향을 본 반이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음….”

군인은 애매했다. 언짢은 기색이 물씬 피어나는 반의 침음을 들은 디아가 슬그머니 방향을 바꾸었다. 금방 보여 준 경찰 카드였다.

“디아.”

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디아를 얼렀다.

“원하는 걸로 골라 봐.”

이것들은 빼고.

위험하고, 박봉이고, 높은 노동 강도로 유명한 직업 카드 몇 개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남은 카드 중에는 뭘 골라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팔랑팔랑 날아가는 카드를 눈으로 좇은 디아가 까르르 웃으며 등을 기대기에 고개를 카드 쪽으로 고정해 주었다. 의사와 과학자 사이를 맴돌던 손이 삐뚜름하게 놓인 카드를 집었다.

“이거.”

오래전 교구라 직업 분류가 세세하지 않았다. 반은 깜박하고 저 카드를 안 뺐다 싶어 떨떠름한 낯을 했다.

“…사업가?”

반은 카드에 그려진 묘한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정장을 입고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과 그의 손을 다잡고 원을 그린 사람들은 붙여 넣은 듯 똑같은 얼굴이었다. 사업가라기보다 도리어 불순한 단체장 같은 느낌이라, 제작사에서 어지간히 그리기 귀찮았던 모양이라고 어렴풋이 넘겨짚었다.

“그래. 잘되면 뭐….”

설령 진심으로 사업가가 되고 싶다고 한들 해 줄 말이 없었기에 얼버무리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에 머리를 맡긴 디아는 녹음처럼 푸르른 눈동자로 카드를 빤히 바라봤다. 이내 관심이 식은 듯 밀려난 카드들을 향해 그것을 톡 던져두고는 포근한 온기를 뿜어내는 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머지않아 가르칠 거리가 바닥난 반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 성의 없다. 기본도 없어.

“어쩌라고. 나라고 이러고 싶은 줄 알아? 쟤 이상하게 똑똑한데?”

- 그렇겠지. 슬슬….

한 손에 든 랩톱 때문에 남는 손이 없었다. 반은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사다리를 디뎠다.

“뭐?”

- 이상한 거 보여 주지 말고. 걱정된다.

“별걱정을 다.”

사다리를 내려간 반은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유리 벽으로 향했다. 낙서가 잔뜩 새겨진 동화책을 보던 디아가 책을 내동댕이치고 달려왔다. 아이를 훌쩍 들어 올린 반이 장난스러운 핀잔을 줬다.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본 줄 알겠다.”

“왜?”

“왜긴 왜야.”

식사를 해결하느라 1시간씩 자리를 비우고 돌아올 때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아빠 맞이하듯 환대하는데, 그에 맞춰 주는 재미가 남달랐다. 이제 한 팔로 안으면 제법 묵직하게 느껴지는 디아와 코끝을 비비고 랩톱을 들어 보였다.

“이게 나보다 나을 거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일일이 책을 읽으며 가르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누군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둔 교육 자료가 인터넷에 넘치는 시대에.

식사하는 틈틈이 제 능력 밖의 가르침에 대해 고민하던 반은 인터넷의 힘을 빌리기로 결심했다. 거저먹는 인생을 살아온 자신이 되는대로 가르쳤다가 디아가 엉망으로 자라면 미셸을 볼 면목이 없다는 판단 아래 자신 있게 랩톱을 켜 인터넷에 접속한 반은 이내 당황했다.

“이게 왜 안 돼?”

인터넷이 잡히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 두 대를 꺼내 확인하자 구식 핸드폰은 아예 인터넷 기능이 없었고, 자신의 핸드폰은 랩톱과 마찬가지로 네트워크가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애만 쫓아다니느라 이 사실을 이제야 눈치챘다.

허망해진 반은 쓸모없어진 랩톱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곁에 바짝 붙어 앉은 디아가 심각한 반의 얼굴과 밝은 빛을 뿜어내는 랩톱 화면을 번갈아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미셸이 모아 둔 영화가 하드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태어나서 만난 사람이라고는 반 클라크, 자신밖에 없는 디아에게 가지각색의 인간 군상과 집 밖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는 면에서 영화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나….

“왜 죄다 이상한 영화야?”

제목만 봐도 알 만한 유명작들이었지만 전부 싸우고, 피 튀기고, 썰고… 순 폭력적인 영화뿐이었다. 시간 때우기에는 좋다만 이런 걸 아이에게 보여 주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었다. 쭉쭉 스크롤을 내리는 새 반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 디아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 보여.”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턱에 따라붙는 조그만 머리통을 잡아 품에 가둔 반은 이윽고 이 끔찍한 영화 목록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영화 몇 편을 찾아냈다. 제법 히트한 로맨스 영화였다. 집안의 반대와 기도 안 차는 오해로 서로 엇갈렸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하는 연인의 이야기가 디아에게 큰 가르침을 주길 바라며 영화를 틀고 드러누웠다.

“듣다 보면 알아들을 수 있어.”

가방끈이 짧은 반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교육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서류철을 손끝으로 끌어오는 틈에 제작사 로고가 화면에서 걷히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평소 산만하기 짝이 없는 디아는 의외로 반의 바람처럼 영화에 집중했다. 작은 화면에 담긴 세상과 배우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언어들이 신기한지 꼼지락거리던 손가락도 오래도록 멈춰 있었다. 반은 영화보다 디아를 흘끔거리며 시간이 들쭉날쭉한 기록을 끄적거렸다.

20xx. 12. 21. 이 정도면 4, 5살쯤 같다. 얌전하고 착하다. 오버가 심하지만 귀여운 수준임. 인성 괜찮음.

“어, 이건 안 돼.”

무심결에 화면을 본 반이 급하게 팔을 뻗어 영상을 뒤로 쭉쭉 감았다. 빠르게 돌아가는 화면을 보던 디아가 엎드린 반의 어깨에 기대며 물었다.

“왜?”

“아직 보면 안 돼. …뭐가 이렇게 길어?”

영화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엉겨 붙어 난리였다. 배우들의 나체로 도배된 화면을 휙휙 넘어 드디어 일을 치른 다음 날 아침 장면에 도착한 뒤 손을 거두었다. 화면이 아니라 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디아가 답하기 막막한 물음을 던졌다.

“왜 안 돼?”

“좀 더 크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니야.”

아직도 조그만 코를 잡아 좌우로 흔든 반은 궁금한 게 너무너무 많은 아이의 고개를 화면으로 돌려 주고 기록을 이어 갔다. 아니, 이어 가려고 했으나 생각이 딴 길로 샜다.

미리미리 하는 게 좋다지만 이 나이는 좀…. 근데 내가 성교육까지 시켜야 하나? ???

물음표가 줄지어 늘어졌다. 반은 언제 눈을 돌렸냐는 듯 재생 중인 영상에 시선을 고정한 디아의 옆얼굴을 훔쳐봤다. 젖살이 차오른 볼에 파묻힌 조그마한 코가 귀여웠다. 아래로 쳐진 기다란 속눈썹이 간혹 느리게 깜박였다.

저 통통하고 뽀얀 뺨이 며칠이나 갈까.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들어 검지로 쿡 찔러 보았다.

갑자기 볼을 찌른 손가락에 눈을 동그랗게 뜬 디아가 시선을 맞추더니 금세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벙긋 벌어진 입술이 불시에 검지를 쫓아왔다. 간발의 차로 오밀조밀한 이를 피하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따라붙었다.

조곤조곤한 배우의 대사 위로 웃음소리가 겹쳤다. 아이의 아랫입술을 톡 치고 피하기를 몇 번, 아슬아슬하게 잡히지 않는 손가락에 약이 오른 디아가 두 손으로 반의 손목을 잡았다.

“야. 이거 반칙이야.”

“아니야.”

주먹을 쥐어 손가락을 숨겼더니 아이는 손등에 대고 이를 세웠다. 살살 긁어내리는 단단한 이가 간지러워 엎드린 몸을 돌려 디아를 덥석 들어 올렸다. 끙 소리가 절로 났다.

“어우. 이제 무겁다.”

“무거워?”

허리를 잡고 공중에 띄웠는데, 서서 들어 올리는 것보다 확연히 힘겨웠다. 까르르 웃는 얼굴이 보기 나쁘지 않아 팔을 휘저어 주다 품에 안고 또다시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영화를 뒤로 돌렸다. 분명히 방금 애정신이 끝나지 않았나? 이해할 수 없는 전개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런 건 가르칠 자신 없는데.”

“왜?”

디아가 꼬물꼬물 목 근처까지 기어 와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그냥 내가 별로야.”

“별로야?”

“어.”

일상적인 장면으로 돌아온 영화를 재생시킨 채 아이를 바닥에 내려 두다가 순간 멈칫했다. 어감이 조금 묘했다. 디아가 큰 눈을 깜박이며 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반은 머뭇거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별로는 아닌데. 내가.”

“아니야?”

“아니야. 내가 한번 하면 장난 아닌….”

차마 어린애 앞에서 할 말은 아니라, 죄 없는 디아의 머리통을 잡아 랩톱 쪽으로 돌렸다.

“공부나 해.”

사람도 아닌데 굳이 가르칠 필요가 없는지도 몰랐다. 일은 닥치면 한다는 주의인 반은 노트 위에 늘어진 물음표를 직직 긋고 ‘나중에’라고 짧은 메모를 남겼다. 언제 또 이상한 장면이 불쑥 튀어나올지 몰라 서류철을 치우고 아이 곁에 붙어 앉았다.

아이가 섞여 들 가능성이 희박한 세상이 작은 화면 속에서 흘러갔다.

***

20xx. 12. 24. 드디어 그날이 왔다.

반은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쳐 둔 담요를 정리하고 출입구 앞에서 기다리는 디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하루가 가고 자정이 다가오는 시각, 내내 고민했던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었다.

“반 행복해 보여.”

“노는 날이잖아.”

말이 꽤 는 디아가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반의 목을 감았다. 허리를 세우며 아이를 힘겹게 들어 올린 반이 모서리에 테이프가 붙은 종이를 흔들었다.

“올라가자. 몰래.”

장난스럽게 웃자, 의미도 모르면서 따라 웃은 디아가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구석으로 들어간 반은 발꿈치를 세우고 팔을 쭉 뻗어 볼 때마다 부수고 싶은 카메라에 종이를 철썩 붙였다. 떨어지지 않게 꾹꾹 누르고 재빠르게 출입구를 빠져나왔다.

“이번이 두 번째지?”

막에서 꺼내 씻긴 날을 제외하고 지하실에 갇혀 살았던 디아에게 한 번쯤은 지상을 보여 줄 때였다. 그리고 뜻밖의 선물을 줄 시기로는 크리스마스가 제격이었다.

사다리를 오른 반은 아이를 먼저 위층에 올려 두고 몸을 끌어 올렸다. 거실에 걸터앉자 주변을 둘러보는 동그란 뒤통수가 맨 처음 눈에 들어왔다.

“어때?”

말을 걸자마자 곧장 돌아보는 디아의 창백한 피부가 커튼 틈새로 스며든 가로등 불빛 아래 투명하게 빛났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차분한 태도와 덤덤한 눈빛이 미약한 죄책감을 불러와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왜 그래, 반?”

뺨에 닿은 작은 손이 살결을 쓰다듬었다. 입가에 미소를 건 반은 얼굴을 살살 만지작거리는 손등을 잡아 내렸다.

“집 구경할래?”

말을 돌리며 마저 지하에서 빠져나왔다. 오늘은 더 이상 내려갈 일 없는 지하를 장식장으로 막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엉기는 대로 안아 줬더니 통 제 발로 걸을 생각을 하지 않는 디아를 운동시킬 필요도 있었다. 아쉬운 듯 올려다보는 디아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주고 계단으로 향했다.

처음 오르는 계단인 만큼 주춤거리는 아이의 손을 단단히 쥐고 발을 옮겼다. 느린 걸음에 맞추어 2층에 도착한 반은 어린 시절을 보낸 자신의 방 손잡이를 붙들었다.

“내 방.”

씩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소박한 방이 뭐 대단한 거라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디아를 안으로 들여보내자 아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 발짝씩 걸어갔다. 선반에 정렬된 자동차 모형을 툭 건드려 보고, 파란 이불을 손끝으로 스치며 도착한 곳은 폭이 좁은 책장 앞이었다. 책장을 쓸던 디아는 제 눈높이에 있는 액자를 꺼내 빤히 들여다봤다.

반은 디아가 집어 든 액자를 발견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무 프레임으로 된 액자는 반에게 몹시 익숙한 물건이었다. 고향에 올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확인하곤 했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 어릴 때. 귀엽지.”

키득거리며 자화자찬했다. ‘재수 없게 굴지 마라’라는 핀잔을 기대했으나 사회성 없는 디아는 고개를 세 번이나 주억거렸기에 헛웃음을 불러일으켰다. 얘를 어떡하나 싶어 턱을 괴고 감상을 끝내길 기다렸다.

디아의 손가락이 짓궂게 웃고 있는 반의 사진 위를 맴돌다 그의 어깨를 꼭 껴안은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올려다보는 눈빛이 누군지 알려 달라는 것 같아, 반은 이제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엄마, 아빠. 음…. 무슨 말인지 알려나?”

직접 아이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본 반으로서는 디아가 부모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부족한 말솜씨로 더듬더듬 날 세상에 있게 만든 사람들이라고 풀어 설명하자 천천히 침대로 다가온 디아가 액자를 내밀었다.

“지금은 없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사람이 없었던지라 얼떨떨했지만 기분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응. 없어.”

액자를 받아 든 반은 아이의 이마에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별 특별할 것도 없는 과거를 알려 주었다.

“교통사고가 났어. 운 나빴지.”

워낙 옛날 일이라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관이 내려가는 장면과 텅 빈 식탁에 앉아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미셸, 입맞춤과 담소가 사라진 아침…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뿐이었다. 어찌나 만지작거렸는지 테두리가 닳은 낡은 액자를 매만지는 와중에 뒤편에서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액자를 돌려 보자 프레임과 뒤판 사이에 딱지 모양으로 접은 쪽지 하나가 끼어 있었다. 웬 쪽지인가 싶어 펴 보려는데 디아가 무릎에 팔을 겹쳐 올리더니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럼 반은 혼자야?”

펴지 못한 쪽지를 주먹 안에 쥐고 액자를 내려놓은 반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인생은 원래 혼자야.”

잠시 미셸의 꼬장꼬장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따지고 보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다. 아들 내외가 살아 있을 때도 손주를 보듬어 주는 일이 없던 미셸은 장례를 치르자마자 어린 손주를 버리다시피 하고 연구에 몰두했다. 의례적인 연락을 이어 가기는 했으나 그 속에 애정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어릴 적에야 할머니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오늘에 와서는 새삼 서운함을 느끼지도, 애정을 바라지도 않았다. 형식적인 가족. 딱 그뿐이었다.

허벅지에 엎드린 아이는 모르는 놈이 했다면 욕을 뱉고도 남을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럼 외로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어이가 없어진 반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전혀?”

“아니야.”

“그걸 왜 네가 정해?”

양손으로 턱을 괸 디아가 기가 차 웃음을 터트리는 반을 따라 웃었다. 어린애가 하는 말이라 그런지 전혀 밉지 않았다. 반은 디아의 팔을 잡아당겨 침대 위로 끌어 올렸다. 마침 준비한 것도 침대에 있었다.

“선물 준비했는데.”

“선물?”

“크리스마스니까.”

멋진 트리도, 반짝이는 전구도 없는 크리스마스지만 선물이 빠져서야 쓰나. 나름대로 색다른 크리스마스라고 생각하며 베개 아래를 더듬어 무늬가 없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짠.”

프러포즈하듯 상자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뚜껑을 열었다. 디아는 실실 웃는 반의 얼굴과 뚜껑 열린 상자 안을 번갈아 살폈다.

“이거 돈 주고도 못 사는 건데 특별히 너 준다.”

능청스럽게 생색을 낸 반은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을 꺼냈다. 차갑게 식은 금속 목걸이가 손가락에 걸려 아래로 늘어졌다. 디아의 머리칼처럼 맑은 금빛 목걸이에는 사진 따위를 넣을 수 있는 작은 로켓이 달려 있었다. 용도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디아의 목에 목걸이를 두른 반은 줄을 짧게 잡고 고리를 걸었다. 아이의 쇄골에 자리한 로켓이 흔들렸다.

“절대 빼면 안 돼.”

한참을 눈만 깜박이다가 두 손으로 로켓을 받쳐 눈앞에 가져다 댄 디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선물이야?”

“응. 이거 있으면 나 부를 수 있어.”

“진짜?”

눈썹을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사 온 것을 헐값으로 얻어 휴가 때 집에 처박아 뒀는데, 적당한 선물 거리를 찾는 와중에 때마침 나왔더랬다. 성능은 불확실하지만, 외출도 어려운 마당에 선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은 예쁘니 되었다.

“어디든 찾으러 갈 수 있지.”

자신 있게 턱을 들자 지하실에서 나온 뒤로 가장 환한 미소를 머금은 디아가 목걸이를 가장한 위치 추적기를 품에 꼭 껴안았다. 내도록 갇혀 살아 타인에게 자랑할 기회도 없는 목걸이가 그리도 기꺼운지, 디아는 반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고 발을 구르며 보란 듯이 행복감을 드러냈다. 선물 주는 보람이 있는 반응에 취했던 반은 떠오른 것이 있어 로켓을 가리켰다.

“아, 그리고 그거 열어 보면….”

“나도 선물.”

“응?”

말허리가 잘린 반은 입술을 우물거리는 디아에게 귀를 기울였다.

“주고 싶은데.”

아이는 제법 기특한 소리를 했다. 흠, 하고 코웃음을 친 반은 뼈대가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디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곤란한 상황을 능글맞은 태도로 넘기는 것은 반의 주특기였다.

“넌 존재 자체가 선물이지.”

말 잘 들어, 똑똑해, 귀엽고… 백만 달러.

반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 단어를 양심 밑으로 가라앉히기 위해 아이의 목걸이 줄을 매만졌다. 너무 속물 같은 모습을 보여 줬다가 디아가 지레 겁먹고 도망치면 안 될 일이었다.

입을 앙다문 반을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응시하던 디아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미소 지었다.

“그렇구나.”

아주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반은 천연덕스럽게 맞장구쳐 주며 아이를 무릎 위로 끌어 올렸다. 그대로 침대로 벌러덩 넘어가 보드라운 머리칼에 얼굴을 마구 비비자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부작거리며 허리를 끌어안는 디아를 품에 가둔 채 주먹을 펼쳤다.

꼭꼭 접은 쪽지를 펼친 반은 납득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맞닥뜨렸다.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서서히 가셨다.

이 쪽지는 확인 즉시 없앨 것. 위급 시 임시 접선은 매달 마지막 금요일. 비밀 엄수!

급히 써 내린 듯 미셸답지 않게 엉망진창인 필체에, 뭐가 그리 염려되는지 ‘비밀 엄수’라는 글귀 아래에는 줄이 세 개나 쳐져 있었다. 의미는 오리무중이었다. 느낌표를 붙일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면 발견할 가능성이 적은 액자 뒤편보다는 의뢰를 부탁하는 편지에 적어야 할 일 아닌가. 하다못해 기계음에게 당부하도록 하면….

불현듯 프레임이 닳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기계음도 알면 안 되는 내용인가? 도통 미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입술을 삐죽 내민 반은 쪽지를 도로 구기려다가 에이, 하며 찍찍 찢어 내일 비울 예정인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귀신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들짝 놀랐다가 뚱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자 화를 잔뜩 억누른 듯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 뭐 하는 거야, 지금?

“쉬는 날입니다.”

씨알도 안 먹힐 걸 알았지만 대꾸라도 하고 싶었다. 대화 내용이 궁금한지 품에서 얼굴을 내민 디아가 꼬물꼬물 기어올라 핸드폰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딱히 거슬리지 않아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 둔 반은 곧은 등허리를 토닥이며 통화를 이어 갔다.

- 당장 내려와. 카메라 원래대로 돌려.

“그냥 위층에 있는 것도 안 되냐?”

- 안 돼. 함부로 나가지 마. 걔도, 너도.

나가 봤자 사람 그림자도 보기 힘든 동네에서 걱정이 과했다. 반은 질린다는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디아에게 조용히 속닥거렸다.

“이 새끼 성격 별로다, 그치?”

“응.”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디아가 귀여워 볼을 꼬집어 주는 새 기계음이 단호하게 명령했다.

- 다 들려. 내려가.

“옙. 알겠습니다.”

얄밉게 대꾸하며 디아와 눈을 맞췄다. 뒷담화는 눈빛만으로도 가능했다. 디아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미적거리자 다시 한번 내려가라는 독촉이 들려왔다. 빈정거림을 담아 명령 받잡겠다고 대답한 반은 혹여나 잃어버릴세라 작은 손으로 로켓을 꼭 쥐고 있는 디아를 일으키고 빤히 바라봤다.

매일매일 붙어 있다 보니 얼마나 자란 건지 가늠하기 어려운 아이가 내일은 또 어떻게 자라날까. 자정을 넘겨 조명이 닿지 않는 구석이 어둡게 물들어 있는 지겹도록 익숙한 방 안, 이제는 한 사람만 남은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와… 정체 모를 아이.

반은 아이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훅 끌려온 디아의 동그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메리 크리스마스.”

1년이 흘러 남은 보수를 받는 날, 부디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어야 할 텐데.

***

삭막했던 유리 벽 안은 반이 가져다 둔 폭신한 쿠션과 두꺼운 담요, 아무도 가지고 놀지 않지만 기분상 챙긴 낡은 장난감들로 채워졌다. 밤이 오면 유리 밖으로 나와 의자에서 눈을 붙이던 반도 어느새 디아의 곁에서 잠을 자는 날이 많아졌고, 함께 본 영화는 서로의 손가락을 합쳐도 다 못 셀 정도로 늘어났다.

“똑바로 서. 등 딱 대고.”

반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치는 아이의 양팔을 잡아 벽에 고정했다. 이마를 밀어 뒤통수를 고정하고 남은 손에 쥔 색연필을 세웠다. 아이의 머리 위에서 서너 번 좌우로 왕복하자 하얀 벽에 분홍색 선이 남았다. 손을 떼자마자 이제는 어린이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디아가 무너지듯 안겨 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디아를 받아 낸 반은 벽을 꺼림칙한 눈으로 노려봤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벽에 새겨진 수십 개의 선 중 가장 위에 그어진 선은 반의 허리를 넘는 위치였다. 태어난 지 무려 두 달이 되었을 무렵 디아의 키였다.

“생각해애.”

어물거리는 발음이 남아 있는 미성이 끝말을 따라 했다. 말을 못 알아들었거나 못 들은 척하고 싶으면 늘 이런 식으로 말을 따라 하는 디아의 머리카락을 살살 헤집었다. 이렇게 빠르게 크다간 계약 기간이 끝날 때쯤이면 백발의 노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머리를 스쳤다.

“다리는 안 아파?”

“응.”

반은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늘어진 디아의 무릎을 톡톡 건드리다가 힘을 주어 주물렀다. 짧고 통통한 다리를 꼼지락거리던 게 엊그제였건만, 이제는 반바지 아래로 길쭉하게 뻗은 다리가 반의 정강이 위에 턱 얹혔다.

하루하루 쑥쑥, 말 그대로 쑤욱쑤욱 자라면서 어떻게 생겨 먹은 몸인지 성장통도 없는 듯했다. 손을 거두려 하자 가는 손가락이 엄지를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얹었다.

“아픈 것 같아.”

“안 아프다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것이 우스워 받아치기 무섭게 디아가 반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벼 댔다.

“진짜 아파서 그래. 응?”

어깨에 닿을 만큼 자란 밝은 머리카락이 살결을 간지럽혀 몸을 움츠린 반은 애교 부리는 데 도가 튼 디아의 다리를 끌어왔다.

“어쭈. 애교로 넘어갈 줄 알고.”

나무라는 어투와 달리 손은 이미 아이의 종아리를 살살 주무르는 중이었다. 히죽 웃는 디아와 눈을 한 번 맞춘 반은 아이의 외양에 비해 유치한 감이 있는 방을 둘러봤다.

유행 지난 로봇 장난감과 알록달록한 솜 인형들. 모조리 디아의 관심 밖에 위치한 장난감이었다. 괜스레 텅 빈 내부가 차가워 보였던 반이 가져다 둔 것이었다. 새해로 넘어갈 즈음 연락이 온 기계음이 비웃은 것도 이해가 됐다. 그 뒤로 연락이 뚝 끊긴 점이 이상하긴 했지만 괴상한 요구가 없어 몸 하나는 편했다.

적당히 주무르고 손을 거둔 반은 자신을 가만 바라보는 디아의 시선을 느끼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입 모양으로 ‘왜’ 하고 묻자 디아가 통통한 입술을 벌렸다.

“반.”

이 나이 때 입었던 옷은 죄다 버린 관계로 요즘 제 옷을 입혀 뒀더니 헐렁한 스웨터 소매가 아이의 손을 가렸다. 품에 안은 채로 팔을 뻗어 소매를 몇 번 접어 주었다.

“왜애.”

“반은 날 사랑해?”

다른 쪽 소매를 거머쥔 손이 멈칫했다.

“너 그 말의 뜻은 아냐?”

싱거운 웃음이 샜다. 주야장천 로맨스 영화만 보여 줬더니, 배우의 대사로 어휘력을 키운 디아는 지나치게 감성적인 언어를 구사했다.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앞으로 영화는 미리 선별해야겠다는 작은 다짐을 했다. 액션을 피했더니 이런 곳에서 복병이 생길 줄이야.

비웃음에도 기죽은 기색이 조금도 없는 아이는 다시금 입을 열어 헛소리를 늘어놨다.

“난 반이 필요해.”

“그러시겠죠.”

먹여 줘, 씻겨 줘, 놀아 줘, 온종일 붙어 보살피고 나면 기절하듯 잠이 든다. 늘 먼저 반이 눈을 감은 후 디아가 알아서 품에 파고들어 자는 덕에 재워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베이비시터를 넘어 노예에 가까워지는 요즘이었다.

“나 없으면 어떡할래? 아주 큰일 났다.”

제 처지가 처량해져 괜히 ‘큰일’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생색내자 고개를 숙인 디아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왜 없어?”

이어서 소매를 접어 주던 반은 들판처럼 푸른 눈을 흘끔거리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질 때도 있는 거지. 됐다.”

반듯하게 접은 소매를 정리한 다음 그 아래로 빠져나온 손목을 잡아 흔들었다.

“하여튼 손 많이 가.”

더 이상 안고 다니지 못할 만큼 자란 디아는 반이 예전처럼 안아 주지 않는 상황을 납득했으나 그 대신으로 요구하는 것이 늘었다. 대부분 들어주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기꺼이 수용하고는 있다만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버릇없이 키우기 딱 좋은 반의 훈육은 타인이 봤을 때 한 소리 하고도 남을 정도였지만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다.

“부르면 올 거야? 잠깐 떨어져도.”

이렇게 귀여운데 들어줄 수도 있지.

목걸이 로켓을 두 손으로 감싸 입술 앞에 가져다 댄 디아가 무언가 속삭이는 척을 하더니 금빛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당연히….”

안 되겠지. 디아를 맡긴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미셸에게 넘어가면 두말할 것 없이 연구소행일 테고, 그렇다면 아마…. 밀폐된 장소에서 평생을 살아가리라는 건 무지한 반도 예상할 수 있었다.

“보러 가야지. 누가 부르는 건데.”

계약 기간은 고작 두 달 남짓 줄어들었다. 아직 아이와 함께할 10개월이 남았고, 잠시를 무마하기 위해 빈말을 던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씁쓸함을 숨기고 던진 대답이 원하는 것이었는지 디아는 분홍빛 뺨을 붉히며 웃었다.

“약속 지켜야 해. 안 그러면….”

로켓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던 디아가 품속으로 파고들며 말을 흐렸다.

“어쩌시게요.”

“찾으러 갈 거야.”

“어떻게 찾을 건데.”

아이의 손과 추적기를 함께 감싼 반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진지한 척하고 싶었으나 자꾸만 삐죽삐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지 못했다.

“나 자동차도 몰 줄 알고, 비행기도 탈 줄 아는데. 엄청나게 멀리 가면 어떻게 찾으실까.”

“반.”

어깨에 기댄 디아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난 반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손아귀 안에 들어온 아이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자동차 모형을 건드렸다. 살짝 건드린 힘에도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간 장난감이 분홍색 솜 인형 다리에 걸려 멈춰 섰다. 자동차를 끌어온 반은 비식거리며 웃었다.

“아…. 나 이런 구속 별로 안 좋아하는데.”

실없는 소리는 실없는 소리로 받아치는 법이었다. 목걸이를 도로 놓아주자 디아가 팔을 들어 목을 감아 왔다. 어깨에 온 무게를 실은 아이의 온기가 옮겨붙으며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래서 반은 날 사랑해?”

“네에. 그럼요. 사랑하지요.”

반은 가볍게 대꾸하며 딴생각이나 했다. 그놈의 사랑을 무슨 대단한 운명인 것처럼 포장한 영화들 때문에 디아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그놈의 낭만과 운명은 밥 먹여 주지 않을뿐더러, 사랑은 서로 가볍게 즐기고 적당히 끝내는 편이 인생을 슬기롭게 사는 방법이라고 말이다.

***

“아, 해.”

입을 동그랗게 벌린 디아의 입 속으로 칫솔을 집어넣었다. 갸름한 턱을 잡고 조심조심 이를 닦는데, 집중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거듭 실실거리는 디아 탓에 힘 조절이 어려웠다. 반은 핀잔을 쏟아 내면서도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

“네가 지금 몇 살인데, 어? 양치질을 내가 해 주냐?”

“모라.”

“몰라? 모르긴 뭘 몰라.”

오늘도 사정사정해서 밥을 먹이고 직접 이까지 닦아 주던 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양치질은 디아가 요구하는 수많은 것 중 하나였다. 순 어리광이었다.

“아 사라하다며.”

“이건 사랑을 넘었어.”

디아는 입 안 가득 들어찬 거품을 물고 웅얼대며 다리를 달랑거렸다. 책상 위에 걸터앉은 디아의 발끝이 반의 무릎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성가시게 구는 법도 영화에서 배웠나?

반은 한숨을 참으며 입을 헹구어 주고 물기를 닦아 냈다. 탁탁 턴 칫솔을 컵 안에 넣고 팔짱을 끼자 책상에서 훌쩍 내려온 디아가 열린 출입구를 향해 뒷걸음질 쳤다. 잠시도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는 묘기에 손뼉을 쳐 주고 싶었다.

“한 시간이야, 반.”

디아는 한마디를 남기고 유리 벽 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세워진 시계 곁으로 향했다. 제법 수려한 골격이 드러나기 시작한 뒷모습을 응시하던 반은 뒤늦게 사다리를 올랐다.

거실로 올라오자 싸늘한 공기가 몸을 식혔다. 청소할 시간도 없이 지하실에 사는지라 장식장과 거실 테이블에는 먼지가 소복했다. 한 시간 안에 식사와 청소를 끝낼 수 있을까, 한탄하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지하에서 간식거리를 챙겨 먹어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올라올 때마다 디아에게 허락을 받는 성가신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시간 날 때 조금이라도 배를 채워 놔야 했다.

뭘 먹어야 하나, 조리대를 톡톡 건드리다가 내도록 외부를 가리고 있던 커튼을 살짝 걷었다. 밖을 내다보며 눈이 녹았는지 확인하던 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숲을 향해 달려가는 경찰차 뒤꽁무니가 보였다. 창밖으로 고개를 빼자 붉고 파란 불빛들이 어두운 밤을 요란스럽게 밝히고 있었다. 꺼림칙한 예감이 들었다.

잽싸게 거실로 나온 반은 내내 꺼 두었던 TV를 틀고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는 채널을 뉴스로 돌리며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뉴스 화면은 산만했다. 디아와 비슷한 금발을 가진 앵커 밑으로 ‘속보’라는 단어와 익숙한 지명이 대문짝만하게 떴다. 뉴스에 귀를 기울이려는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

[변사체가 발견되어 수사에 나선….]

앵커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여러 번 울리는 초인종과 엇갈렸다. 무시하면 갈 줄 알았더니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눈을 굴리던 반은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반투명한 현관문 유리 너머로 보이는 인영의 체격이 남달랐다. 또 경찰일까.

[훼손된 시신의 신원 확인이 어려워 정확한 사건 경위를 파악 중….]

현관 앞에 선 반은 잠금장치에 손을 올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장식장이 지하 입구를 보이며 열려 있었고, 문을 닫는 리모컨은 부엌에 있다. 돌아가자니 상대에게도 제 모습이 보일 터고. 정황상 경찰을 무시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냈다.

“누구세요.”

정체 모를 방문객이 고개를 들었다. 문에 가로막혔음에도 낮은 웃음소리는 선명하게 전해졌다.

“나야. 반.”

친근한 부름과 달리 목소리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았다. 반은 얼른 아는 얼굴들을 모조리 떠올려 봤지만 짐작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안면 있는 동네 사람인 듯한데, 적당한 핑계를 대고 쫓아낼 심산으로 굳게 걸어 잠근 잠금을 하나씩 풀어냈다.

아무 생각 없이 마지막 잠금을 푼 반은 얼굴만 확인할 정도로 문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쾅 소리가 귓전을 때릴 정도로 완벽한 문전박대였다. 1초 만에 내쳐진 방문객이 코웃음 섞인 핀잔을 주며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드렸다.

“왜 닫아.”

반은 비명이 나올 뻔한 입을 틀어막고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여기 있을 리가 없는 놈이었다. 집은커녕 고향도 알려 준 적 없을뿐더러 소소한 얘기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닌, 매우, 죽을 만큼 불편한 새끼. 얼굴만 맞대도 그날 하루 일진은 망쳤다고 볼 수 있는 새끼….

잘못 본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이마를 턱턱 때렸지만, 그 망할 놈의 낯짝을 다른 사람과 헷갈리기란 쉽지 않았다.

“미쳤나….”

칸쿤을 떠나오며 두 번 다시 볼 일 없다고 여겼던 놈이 제집 문 앞에 있었다. 외계인인지 괴물인지 모를 존재를 키우는 제집 앞에 말이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현관에서 떠나지도, 문을 열지도 못하고 굳어 있던 반은 순간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주머니를 더듬었다. 오래간 울리지 않던 구식 핸드폰이 정신 사납게 떨렸다. 지긋지긋한 기계음이지만 지금만큼은 이 막막할 상황을 벗어날 타개책으로 보였다.

지체 없이 전화를 받자 거슬리는 기계음을 깔끔하게 걷어 낸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 문 열어.

고개가 삐거덕삐거덕 돌아갔다. 불투명한 창 너머 불편하다 못해 끔찍한 놈이 핸드폰을 쥔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전 직장 동료와 고향에서 재회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나뿐인 가족이 강제로 넘긴 의뢰에 함께 엮여 있을 확률은? 그리고 그 사실을 당사자가 조금도 몰랐을 확률은?

반은 사지가 경직되는 기분이었다. 얼빠진 얼굴로 눈만 끔벅이다가 숨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핸드폰에 대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너라고? 그 변태 새끼가?”

눈앞이 아득해졌다. 지난 일이 뇌리를 스치자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넋이 나갔다.

난생처음으로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오락가락한 사이, 기계음은 틈틈이 온갖 징그러운 요구를 했다. 가까이 와라, 옷은 파란색으로 입어라, 입 벌려 봐라…. 종국에는 이상한 포즈까지 시키며 추가금을 들먹였고, 반은 대부분의 요구를 곧잘 들어주었다.

돈 앞에서 세울 자존심이 어디 있겠는가. 카메라 앞에서 자위를 하라는 것도 아니었으니 까짓것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그렇게 쌓인 추가금만 오백 달러를 넘었는데, 그 추태를 웃으면서 보던 놈이….

- 고분고분하더라. 나한텐 안 그랬으면서.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려고 발버둥 쳐도 핸드폰 너머에서 건너오는 목소리는 익히 아는 그놈의 것이었다.

괴로워할 틈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튀어 나간 반은 냅다 멱살부터 잡았다.

“야, 이 미친…!”

검은 재킷을 단단히 잡혀 한 걸음 물러난 웨인이 언제 봐도 기분 더러운 눈초리로 얼굴을 훑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눈과 집요한 시선. 깊은 대화 한마디 나눈 적 없는 사이치고는 농도가 진했다.

“힘들었나 봐. 말랐어.”

“네가 어떻게, 아니. 미셸을 네가….”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 엉망으로 섞여 오히려 목구멍을 턱 막았다. 따분한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질 않나, 전 동료가 조력자랍시고 찾아오질 않나. 상황이 의문투성이였다. 깔끔하게 정리하길 포기한 반은 꽉 쥐었던 재킷을 던지다시피 내려 두었다. 주름이 잡힌 겉옷을 탁탁 턴 웨인이 어깨를 밀쳤다.

“들어가.”

제멋대로 현관에 발을 들이려는 웨인을 냅다 막아선 반이 짜증 가득한 낯을 했다.

“어딜 들어와.”

적대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반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웨인이 순간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방심한 반의 멱살을 붙잡고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뭐 하는, 야!”

스웨터를 옭아맨 손아귀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반은 다급히 놈의 손목을 틀어쥐고 떨쳐 내려 했지만 등이 벽에 부딪히면서 수포가 되었다. 빈틈없이 맞붙은 몸이 불쾌하게만 느껴져 미간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기어코 집 안에 발을 들인 웨인의 등 뒤로 현관문이 스르르 닫혔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안부부터 물어보지?”

“오랜만 같은 소리 한다, 미친놈아.”

“좀 반갑게 맞아 줘라.”

반은 코웃음을 쳤다. 놈을 반가이 맞아 줄 마음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것이다.

“손 떼라.”

거칠게 손을 뿌리친 반은 닫히다 만 현관을 제대로 닫았다. 잠금을 건 다음 불투명한 창까지 작은 커튼으로 가리자 거실은 완벽하게 격리된 공간이 되었다. 서로의 얕은 숨소리만 들리는 현관 복도에서 반은 손에 쥔 구식 핸드폰을 내보였다.

“이게 너라고. 계속 연락하던 새끼.”

신발장 위에 종이봉투를 내려 둔 웨인은 대꾸 없이 제 손에 들린 똑같은 기종의 핸드폰을 흔들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났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른 반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한 적 없는 웨인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칸쿤에서와 다를 바 없이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흩트린 남자가 눈을 맞춰 왔다. 길게 찢어져 비열해 보이기까지 하는 입술이 열리고 한숨보다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네가 아는 대로지.”

“내가 아는 거 뭐. 싸구려?”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속 모를 새끼 같으니. 반은 이를 갈며 물러났다. 웨인을 지나쳐 거실로 들어가자 느긋한 발걸음이 뒤따랐다. 소파에 주저앉은 반은 시간을 확인했다. 허락된 시간은 사십 분 남짓이었으며, 이 정도면 저놈과 얘기를 나누는 데에 충분했다.

한 뼘 떨어진 위치에 멋대로 엉덩이를 들이미는 웨인을 피해 거리를 벌렸다. 반이 질색하든 말든 웨인은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찾아 뉴스가 이어지는 TV를 껐다. 소음이 사라지자 꺼림칙한 침묵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반은 말없이 손톱을 매만지며 사이 나쁜 직장 동료를 기억 속에서 불러왔다.

웨인. 브루스 웨인인지, 웨인 루니인지1) 알아보고자 하는 열의도 관심도 없었다. 스스로를 웨인이라고 소개했으니 그는 웨인이었다. 나이도 모르고 소속도 모른다. 경호 임무를 위해 칸쿤에 도착했을 때 저보다 먼저 돼지 새끼 경호원이었던 놈 중 하나였다.

값싸게 굴려지는 용병, 동성이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껍데기, 열정은 사그라들고 권태만 남은 서른 남짓의 남자. 그것이 웨인을 설명하는 수식어였다. 어쩌면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일이 벌어지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반은 강박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눈을 굴렸다. 때마침 반쯤 열려 있는 장식장이 시야에 걸렸다. 웨인의 시선 또한 그곳으로 향했다가 반의 옆얼굴로 돌아왔다.

서양인이라고 하기에는 선이 연하고, 동양인이라고 하자니 색소가 옅어 묘한 인상을 남기는 반의 얼굴에서 불쾌한 기미가 풀풀 피어났다. 높게 솟은 콧대와 찌푸려진 미간을 끈질기게 바라봐도 새카만 머리카락에 비해 확연히 밝은 호박색 눈동자는 고집스레 장식장에 박혀 있었다. 잠자코 집 안을 둘러보던 웨인은 시답잖은 이야기로 정적을 깼다.

“왜 말도 없이 갔어?”

반에게 있어 웨인의 첫 물음은 우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물론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말하고 갈 사이는 아닌데.”

잇자국이 남은 손으로 뺨을 쓸어내린 반은 돈에 홀려 저지른 추태가 불쑥 떠올라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냉정하게 대하면 뭐 하나. 저놈은 그 추한 짓거리를 낄낄대며 봤을 텐데.

“아, 씨이…. 진짜….”

푹 숙인 고개 덕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응시하던 웨인이 눈썹을 비뚤게 들었다.

일순, 반이 흠칫 튀어 올랐다. 간지러운 것이 닿은 목덜미를 보호하듯 물러선 반은 마침내 웨인의 눈을 마주했다. 웨인은 황금빛에 가까운 눈알을 가만 응시하며 집게 모양을 한 손을 흔들었다.

“붙어 있어서.”

웨인의 손가락에 잡힌 금빛 실 한 올이 살랑거렸다.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양 온기가 남은 목덜미를 벅벅 닦아 낸 반은 소파에 등을 파묻고 웨인을 노려보았다. 그에게 보여 준 오만 쪽팔린 행태를 회피하면서 상황을 정리하다 보니 의아한 점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일단 가장 중요한 질문부터 하기로 했다.

“네가 미셸을 어떻게 아냐? 그런 얘기 한 적 없잖아.”

웨인과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후로는 그를 피하는 데 급급했지만, 그전에도 이렇다 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티를 냈는데 신경 쓰지 않았나?

반은 얼마 존재하지도 않는 웨인과의 일화를 회상했다. 곰곰이 과거를 되돌아봐도 그 일이 있기 전에는 가끔 마주칠 때 쓸데없는 잡담을 나눈 것이 전부였다.

웨인은 자그마한 접점이라도 찾기 위해 애쓰는 반에게 한 마디 언질 없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반은 제 앞으로 다가온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빛을 등진 탓에 시꺼멓게 물든 형상은 보다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구도였다. 발 앞에 자리한 정강이를 걷어찰까 고민하는 새 웨인이 등을 돌렸다.

“저기지?”

웨인이 지하실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놈의 어깨를 잡아 돌린 반은 이대로는 못 넘어간다는 의사를 비쳤다.

“설명부터 똑바로 해라.”

“무슨 설명을 더 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손을 뿌리친 웨인이 말릴 틈도 없이 사다리를 밟았다.

“야! 내가 먼저…!”

누군가 찾아왔다는 걸 모르고 있을 디아가 떠올라 다급히 잡으려고 했으나 놈은 사다리 중간에서 훌쩍 뛰어내려 손아귀를 피했다. 낭패였다.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사다리를 내려가던 반은 유리 벽을 마주하고 선 웨인의 너른 등과 시계를 안은 채로 벽에 붙어 선 디아를 발견했다. 웨인은 아름다운 아이를 낱낱이 뜯어보다가 심드렁한 감상을 내뱉었다.

“많이 컸네.”

덩달아 사다리에서 뛰어내린 반은 감정을 실어 웨인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출입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양팔을 벌렸다.

“디아, 이리 와.”

드물게 웃음을 거둔 디아가 시계를 내동댕이치고 냉큼 달려왔다. 작은 입구에서 아이를 꺼낸 반은 작은 몸뚱이를 꼭 껴안고 뒤를 돌았다. 동그란 뒤통수를 눌러 품 안에 감추자 불편함을 느낀 아이가 바르작거렸지만, 묻는 것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 놈에게 디아를 쉬이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졸지에 아이를 빼앗으러 온 무뢰한으로 전락한 웨인은 별꼴 다 본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뭘 그렇게 숨겨?”

“똑바로 대답해. 네가 미셸은 어떻게 알아?”

웨인이 한 발자국씩 다가올수록 반은 아이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깨에 짓눌린 디아가 끙끙거리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 숨 막혀.”

“참아.”

말은 단호하게 했지만 팔심을 조금 풀어 주었다. 보다 편히 오르내리는 흉통을 감싼 반은 눈살을 찌푸리는 웨인을 계속해서 경계했다.

“정들었나 봐? 아주 싸고도네….”

“가까이 오지 마라. 거기서 얘기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인 웨인이 경고를 무시하고 발을 뗐다. 아이를 안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가오는 웨인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스멀스멀 열이 뻗쳤다. 놈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낯짝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나도 의뢰받은 거야. 조금 도와주라고.”

“…네가, 날?”

웨인의 손가락이 앞머리를 건드리고 떨어져 나갔다. 미약한 바람과 함께 낯선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한순간 숨을 참은 반은 디아의 어깨에 코를 문지르며 포근한 향을 듬뿍 들이마셨다. 잠시간 맡은 웨인의 향은 장작처럼 쌓인 의심에 불을 지폈다.

미셸은 본디 이기적이고, 매사를 의심하고, 연구를 위해서는 하나뿐인 피붙이도 내동댕이치는 매정한 인간이다. 내로라하는 회사의 유능한 인재들을 물리고 한량인 자신에게 일을 맡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다.

가족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기에 마지못해 반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큰 마당에 따로 용병을 고용했다고.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반은 웨인이 이름난 회사 소속이라는 얘기를 들어 본 적 없다. 인맥이 대단하다는 소문조차 없었다. 그는 자신처럼 그저 그런, 머릿수나 채우는 싸구려 용병에 불과했다. 그런데 미셸 쪽의 의뢰를 받았다고? 반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더러운 작당이 오갔다는 불쾌함을 예감했다.

“그거 놔. 확인할 거 있어.”

아직 조력자로 받아들일 수 없는 웨인이 손짓했다. 반은 입술을 비스듬하게 비틀며 놈을 떠보았다.

“아는 게 좀 많아 보인다? 같은 입장치고.”

“글쎄. 비슷할걸.”

반의 노고를 물거품으로 만든 웨인은 예고도 없이 아이를 끌어당겼다. 힘을 덜 준 양팔에서 작은 몸뚱이가 속절없이 끌려 나갔다.

“디아!”

재빨리 멀어지는 디아를 향해 팔을 뻗었지만, 억센 손아귀가 목을 잡아채는 것이 더욱 빨랐다. 웨인은 일어서려는 반의 무릎을 걷어차 꿇린 다음, 남은 손으로 버둥거리는 디아를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뜨렸다.

“얌전히 있어.”

“미친놈이….”

호흡이 턱 막힐 정도의 아귀힘이 목을 졸라 왔다.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 반은 이번에야말로 망할 놈의 손목을 부수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바람에 그쳤다. 체급 차가 상당한 데다가 놈의 다리 부근에 디아가 있어 걷어찰 수도 없었다.

관자놀이에 푸른 핏줄을 세운 채로 찢어 죽일 듯 노려보길 잠시, 웨인이 힘을 탁 풀었다. 허리를 숙이고 터져 나오는 기침을 내뱉는 동안 디아의 어깨를 쥔 웨인이 작은 몸을 이리저리 돌려 보기 시작했다.

“벌써 이 정도면 금방 크겠네.”

배려 따위 없는 손길에 연약한 몸체가 휘청휘청 나부꼈다. 갓 태어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구겨진 적 없는 미간을 일그러뜨린 디아가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잔기침을 토한 반은 지체 없이 일어서 웨인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등에 뼈가 도드라질 만큼 힘을 주자 아이의 어깨를 잡은 손이 서서히 풀렸다.

“이거 안 놓… 야!”

풀리나 싶던 손이 디아의 어깨를 세게 밀어 냈다. 왜소한 몸이 날아가다시피 밀쳐졌다. 웨인의 손목을 내던지고 튀어 나간 반이 감싸지 않았다면 뒤통수가 깨지고도 남을 힘이었다.

“진짜 이 새끼가….”

책상 모서리에 대차게 부딪혀 욱신욱신한 손을 움켜쥐고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불시에 왼뺨을 얻어맞은 웨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멱살을 잡은 반은 얼얼한 손을 한 번 털고 재차 뺨을 날렸다.

“뒤지고 싶어? 어디서 애를 밀어.”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피가 섞인 침을 탁 뱉은 웨인이 파렴치한 대꾸로 응수했다. 역시 두 대로는 모자란 모양이었다. 몇 대만 더 때려 주기 위해 주먹을 치켜든 그때, 디아가 허리를 꼭 껴안고 매달렸다.

“바안….”

살결이 까져 피가 방울방울 맺힌 손등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은 디아가 하얀 이마를 구겨 뜨렸다. 꼭 자신이 다친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 낯이었다. 별것 아니라고 얼러 주고 싶었으나 때가 나빴다. 반은 붙들린 손을 비틀어 빼내며 유리 벽을 가리켰다.

“너 들어가.”

“피 나. 이거 아파?”

“들어가.”

단호하게 고갯짓했으나 오냐오냐 자란 디아는 통 말을 듣질 않았다. 아예 허리를 양팔로 감싸고는 등허리에 얼굴을 묻었다.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통에, 반은 하는 수 없이 웨인을 옴팡지게 두들겨 주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쪽으로 어렵사리 노선을 틀었다.

“아는 거 전부 다 말해. 말하고 나가.”

“왜 말해야 하지?”

아니꼬운 태도로 일관하는 웨인이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는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놓인 파우더 통을 열어 보더니 혀를 찼다.

“이제 이거 안 먹여도 되는데.”

“말 돌리냐, 지금?”

뚜껑을 닫은 웨인은 반의 등 뒤에 숨었으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디아를 보고 비웃음을 지었다. 경계심을 품은 커다란 눈이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언뜻 시건방지게 느껴지는 눈빛을 받아친 웨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할 이유가 없지. 내 일인데.”

“일? 그딴 짓 시키는 것도 일이냐?”

“에이. 좋다고 한 게 누군데.”

돈 몇 푼에 자존심을 팔던 반이 떠올라 남자의 입술에 웃음이 걸렸다. 멀끔한 웨인의 얼굴에서 권태가 걷히자 반은 더욱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럼 계속 저걸로 보든지, 왜 왔냐?”

“그냥 뭐…. 보고 싶어서.”

아래를 향해 있던 시선이 얼굴에 닿자마자 반은 부러 헛구역질했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저딴 소름 돋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한시도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다.

격렬하게 싫어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린 웨인이 흘러가듯 중얼거렸다.

“워낙… 네가 가볍기도 하고. 걱정되더라.”

연신 구역질하는 척하던 반이 눈살을 구겼다. 무언가 이상한 문장이 들린 탓이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반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헛웃음과 함께 되물었다.

“지금 뭐라 했냐?”

“또 술 처마시고 집에 아무나 끌어들일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가뜩이나 어린애도 있는데.

뒷말을 툭 던지며 반의 허리에 매달린 디아를 흘긋거린 웨인이 파우더 통 곁에 자리한 서류철을 뒤적였다. 반은 일기나 다름없는 기록을 읽는 웨인을 말리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난데없이 뺨따귀를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제발 입을 다물어 주었으면 했으나 웨인은 거듭 반을 긁는 언행을 선보였다.

“계속 궁금했던 게 있는데….”

반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디아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주먹을 쥔 반의 손등에서 흐른 피가 지하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원래 술만 마시면 그런 식으로 굴어?”

어두컴컴한 바닥에 떨어진 피 한 방울에 고정되어 있던 디아의 시선이 서서히 올라갔다. 서류철을 살피던 웨인의 짙은 눈동자가 입을 꾹 다문 디아에게 닿더니, 차츰 비아냥 담긴 웃음을 머금었다.

반은 정말이지 참을 만큼 참았다. 초대한 적도 없는데 집에 멋대로 쳐들어온 무례도, 질문을 하면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태도도, 어화둥둥 곱게만 키운 디아를 밀친 몰상식함까지도. 티끌만 한 인내심을 끌어올려 꾹꾹 참아 주었다는 말이다.

어금니를 힘주어 사리문 반은 허리를 단단히 감은 디아의 팔을 풀어냈다. 웨인은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면서도 느긋한 손길로 얼마 남지 않은 일기를 넘겼다.

“다음 날에는 모른 척하고. 그렇게….”

“야.”

책상을 짚은 반은 허리를 숙여 웨인과 눈을 맞췄다.

“그 몇 번 실수한 거, 지금 와서 어쩌자고. 왜, 그립냐?”

한껏 비웃는 낯을 만들어 냈으나 책상을 짚은 손에는 핏줄이 섰다. 잊다 못해 불태우고 싶은 과거는 칸쿤에 버려둔 지 오래였다. 더군다나 오가며 마주치는 숱한 시간 동안 웨인은 그날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입에 올릴 거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물끄러미 눈을 맞추던 웨인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철을 덮었다.

“실수가 잦네.”

가볍게 내려앉은 코웃음이 성질머리를 자극했다. 반은 화를 억누르며 뒤를 돌아봤다. 기어코 다가온 디아가 머뭇머뭇 소매를 끌어당겼다. 반은 작은 등을 떠밀며 유리 벽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지만 고개를 휙휙 내저은 디아는 허벅지를 끌어안더니 골반에 턱을 기댔다.

웨인은 그의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은 디아에게 미묘한 눈빛을 건네며 반이 끔찍하게 경멸하는 옛이야기를 줄줄이 끄집어냈다.

“한 번이면 실수지. 하도 무시해서 헷갈리기는 하는데, 아마….”

“입 다물어라….”

기겁한 반은 얼른 아이의 귀를 손바닥으로 덮었고, 그 꼴을 목격한 웨인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못 할 얘기도 아니고.”

“못 할 얘기다, 개새끼야.”

반은 피가 몰릴 만큼 세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실수였다. 원체 술만 들어갔다 하면 과할 정도로 관대해지는데, 하필 그랬을 때 주위에 저놈이 있었을 뿐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름만 아는 동료가 알몸으로 곁에 누워 있는 데다가 엉덩이 사이에 조악한 통증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정신적인 충격을 안 받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 뒤로 술을 마신 날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지만 어쨌든 정말 실수였다. 기껏해야 세 번쯤. 그 이상은 절대, 결코 아니었다. 반은 거듭 부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없던 일로 해.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나? 그럼 왜 피했어?”

맹견처럼 물고 늘어지는 웨인의 목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 반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미셸 연락처나 내놔. 급하니까.”

이 좆같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미셸뿐이었다. 드러눕든가 떼를 써서라도 웨인을 쫓아내야 했다. 그와 함께 일하다 보면 머지않아 부모님 곁으로 갈지도 모른다. 원인은 아마도 화병일 테고.

“왜 피했는지 묻는데 말은 왜 돌려?”

웨인은 여러모로 반의 꼼수가 통하지 않는 남자였다. 반은 악, 소리 지르고 싶었으나 남은 이성을 모조리 긁어 와 감정을 억눌렀다. 그 여파로 목소리가 만신창이로 갈라졌다.

“진짜 뒤질래?”

“이길 수나 있고?”

울컥한 반이 한 발자국 떼려 했지만, 허벅지에 매달린 디아 탓에 멱살을 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시 멱살이 잡힌 웨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빈정거렸다.

“그때 보니까 힘도 제대로 못 쓰던데.”

“와, 와하…. 이 개새끼가….”

반은 헛웃음을 터트렸으나 금세 귓바퀴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문득 창고 안에 고이 잠든 산탄총이 떠올랐다. 주변이 흉흉한 것 같아 꺼내 두려다가 여태 잊고 있었는데, 지금이 찾아올 때인 듯했다.

그냥 지금 이 새끼 죽이고 숲에 갖다 버리면 누군지 모를 살인마가 죄도 덮어쓸 거고, 쪽팔린 과거도 청산하고….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헛된 상상을 하느라 힘이 빠진 틈을 타 손을 뿌리친 웨인이 걸음을 옮겼다. 유리 벽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인형을 발로 툭툭 차 댔다. 인간이 저토록 경멸스럽고 무례할 수가 있을까. 사람 속을 있는 대로 긁어 놓고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는 뒤통수를 연타하고 싶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고깝게 보이던 때, 귀를 간지럽히는 미성이 들려왔다.

“…반.”

그쯤에야 정신이 번쩍 든 반은 얼른 디아의 옷을 들치어 아이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백만 달러짜리, 아니, 연약한 아이의 피부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근심을 내려놓은 반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뜻을 담아 디아의 하늘하늘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흩트리며 처참한 상황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말은 죽인다고 했고, 마음 역시 동일했으나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전후 사정은 조금도 모르겠다만 만약 미셸이 웨인을 고용한 것이 사실이라면 곁에 두는 편이 이로웠다. 어찌 된 일인지 저놈에게는 정보가 자신보다 훨씬 많은 듯했으니. 살살 구슬려 정보를 얻는 게 올바름을 알지만…. 알지만.

“나 저 새끼 너무 싫은데….”

디아를 덥석 껴안은 반은 좁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우는소리를 냈다.

기억 안 나기는 개뿔이. 카메라에 대고 한 재롱은 갖다 대지도 못할 만큼 온갖 추태를 보였던 기억이 생생했다. 아프다고 징징 울고, 웃으라 해서 울다가 처웃었던 기억이 몰아치듯 떠올라 콱 죽어 버리고 싶었다.

위로하듯 등을 토닥이는 디아의 손길을 받으며 충동을 가라앉히는 와중에 귓바퀴에 가는 숨결이 닿았다.

“왜 그랬어.”

“뭐?”

묻었던 고개를 들자 서럽게 일그러진 낯이 보였다. 등을 토닥이던 손을 거두어들인 디아가 코끝을 살짝 꼬집었다.

“이제 그러지 마. 속상해.”

아이를 키우는 사이 버릇이 된 손장난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반은 조금 컸다고 잔소리하려고 드는 디아를 멀뚱멀뚱 쳐다보며 물었다.

“너 무슨 말인지는 알고 이러냐?”

귀를 막아 주기는 했지만, 곧이곧대로 들었대도 디아는 어른들의 대화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렸다. 아니나 다를까 대답하지 못한다. 디아는 초록빛이 감도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붉은 입술을 빼꼼 열었다.

“나도 알 건 알아.”

“알기는…. 지금은 그냥 위로나 해. 내 편 들라고.”

투덜대며 디아를 숨 막힐 정도로 껴안자 나직한 위로가 흘러나왔다.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반.”

허울뿐인 말 한마디라지만 제법 든든했다. 예쁘기만 한 작고 여린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 수모를 갚아 줄 수 있는 근육 덩어리의 발언이었다면 더욱 든든했겠지만 말이다.

한 줌짜리 이성으로 분노를 누르는 반의 머리를 꼭 껴안은 디아는 유리 벽 너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녹색 눈동자가 정수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이 위치한 웨인의 머리에서부터 두꺼운 팔, 기다란 다리까지 쭉 훑어 내렸다. 흘러내린 시선은 반의 머리를 토닥이는 자기 손바닥에 도착했다.

“작아.”

앞으로 웨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도를 찾던 반이 고개를 들었다. 영문을 모르고 깜빡이는 밝은색 눈동자 속에 한없이 어린 얼굴이 비쳤다. 뭐가, 하고 묻는 반에게 디아는 활짝 펼친 양손을 내밀었다.

“손이.”

“보자.”

손바닥 안에 디아의 손이 내려앉았다. 디아와 손바닥을 맞춘 반은 손끝이 제 손가락 첫 마디에 간신히 스치는 짤막한 손을 진지하게 내려다봤다.

“작긴 하다.”

불만스럽다는 듯이 콧잔등을 구긴 디아는 반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깍지를 끼었다. 얽힌 손가락에 점점 힘을 주는 것 같아 의아해진 반이 디아를 부르려는 찰나, 폭신폭신한 분홍색 솜 인형이 날아와 머리통을 탁 때렸다.

“지금이 시시덕댈 때야?”

말을 곱게 하는 법이 없는 웨인의 핀잔이 들리자 바로잡은 마음가짐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디아와 맞잡은 손을 인형으로 내리쳐 떨어뜨린 웨인이 품 한가득 안고 나온 장난감을 책상 위로 쏟아 냈다.

“애 키워? 이게 다 뭐야?”

“그럼 얘가 애지, 노인으로 보이냐? 던지지 마라.”

굴러떨어질 뻔한 자동차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반은 웨인을 째려보다가 유리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줄곧 디아를, 정확히는 디아를 돌보는 자신을 감시하던 놈이 웨인이었다는 사실은 치가 떨리고도 남았으나 그의 방문에 마냥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디아를 밝은 곳에서 키울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하의 침침한 분위기가 아이 정서에 좋을 리가 없었다. 웨인이 말린다고 한들 이것만은 반도 제멋대로 할 심산이었다. 디아에게 위험성이 없다는 걸 확신한 순간부터 호시탐탐 노렸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지하실을 비우기 위해 굴러다니는 장난감들을 박스에 쓸어 넣는 반의 옆태를 흘긋거린 웨인이 들고 있던 인형으로 바쁜 손을 건드렸다.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이거 사람 아냐.”

“내가 꺼냈는데 모르겠냐?”

“모르는 것 같은데.”

“네 일에나 신경 쓰세요.”

반은 웨인의 손에 들린 인형을 얄밉게 뺏어 들었다. 각자 할 일이나 하면 되지, 참견도 가지가지였다. 마저 장난감을 정리하며 분주히 움직이던 순간,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온기가 거칠게 떨어져 나갔다.

“반…!”

느닷없이 디아의 뒷덜미를 잡아챈 웨인이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작은 몸이 그 뒤로 질질 끌려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반이 빠르게 따라붙으며 언성을 높였다.

“손 놔, 미친놈아!”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옷깃을 쥐기도 전에 웨인이 유리 벽 출입구 너머로 디아를 던져 넣었다. 문이 자동으로 닫히지 않도록 받쳐 둔 철판을 빼내자 몇 주간 활짝 열려 있던 문이 스르르 닫혔다.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진 디아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는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새끼…!”

문을 막고 서 있는 웨인을 밀어 낸 반이 다급히 비밀번호 패드를 눌렀다. 일단 디아부터 챙긴 후 제대로 두들겨 팰 거라 다짐하며 마지막 번호를 눌렀으나 삑삑거리는 소리만 날 뿐 열리지 않았다. 용케 일어난 디아가 다가와 유리를 두드렸다. 아이를 살피며 비밀번호를 다시금 눌렀다. 1225. 똑같았다. 열리지 않았다.

“뭐야, 이거.”

“바꿨지. 방금.”

세상만사에 염세를 품은 듯 단조로운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이서 들린다 싶더니 닿아서는 안 될 묵직한 부위가 엉덩이에 비벼졌다. 상황 파악이 더뎠다. 창백하게 질린 반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뒤에서 뻗어 온 팔이 몸을 감싸 안고 붙어 섰다. 어깨 위에 턱을 얹은 웨인의 낯선 체온이 등을 덮었다.

“애도 없는데 우리끼리 회포 좀 풀까?”

만고 끝에 아이를 재운 부부가 할 법한 언사였다. 반은 두 눈 또렷이 뜨고 있는 디아를 내려다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분을 잠재우려고 갖은 힘을 썼다. 부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다시금 아는 비밀번호를 눌렀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 이를 갈며 낮게 중얼거렸다.

“좆대가리 치우고 비밀번호 불러.”

“보는 앞에서 할까? 성교육도 미리미리 해 줘야지.”

부끄러운 얘기지만 반은 지조나 절개, 금욕과는 거리가 있는 인간이었다. 남들이 보는 앞이라고 그 짓을 못 할 것도 없는 관대한 남자였다. 다만 어린아이 앞에서 추태를 보일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았으며, 웨인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주제를 넘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반은 팔꿈치를 쳐들어 웨인의 옆구리를 내려찍었다. 팔꿈치에 후려 맞은 단단한 근육이 훅 수축하며 웨인이 신음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그대로 발을 들어 걷어차려고 했으나 삽시간에 뻗어 온 손이 발목을 잡아당겼다.

“윽!”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유리에 뒤통수를 박은 반은 배 위로 타고 오른 웨인이 내지르는 주먹을 간신히 막아 냈다.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은 머리가 뎅뎅 울렸지만 그만큼 약이 올랐다.

웨인의 어깨를 잡은 반은 허리에 힘을 주고 몸을 굴렸다. 순식간에 위아래가 바뀌었다. 반은 어질어질한 시야를 뒤로하고 팔을 치켜들었다. 막아 낼 틈을 주지 않고 날카로운 각이 잡힌 웨인의 턱을 날렸다. 손등에서 흐른 피가 웨인의 턱 아래에 지저분한 흔적을 남겼다.

“내가 그렇게 그리웠냐? 못 잊을 만큼?”

반은 굳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무릎 꿇고 빌면 내가 한 번은 넣어 줄 수 있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로 재차 터진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은 웨인이 픽 웃었다.

“자신 있으면 해 보든가.”

“당연히 자신 있지.”

따라 웃은 반은 웨인을 만족시킬 만한 힘으로 주먹을 메다꽂았다. 반의 주먹질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 싸우기 시작했다. 악바리처럼 달려들어 우위를 차지한 반이 양손으로 웨인의 목을 잡고 무게를 실어 눌렀다.

가쁜 숨과 들썩이는 가슴은 무시할 수 있었으나, 어지러운 머리 탓에 상체가 휘청거렸다. 뺨은 곧 있으면 시퍼런 멍이 올라올 만큼 붉었고, 터진 입술은 벌릴 때마다 피 맛이 감돌았다.

“비밀번호.”

반 못지않게 거친 숨을 내쉬는 웨인의 얼굴도 엉망이었다.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는지 대자로 뻗은 웨인은 찢어진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승리감에 도취하여 뜻 모를 미소를 해석하지 못한 반이 화드득 튀어 올랐다.

“악!”

웨인의 커다란 손이 그의 배 위에 올라탄 반의 엉덩이를 세게 쥐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기겁한 반은 다급히 몸을 굴려 웨인과 거리를 벌렸다. 경악과 수치에 물들어 가는 반의 표정을 흘긋 살핀 웨인이 피에 젖은 입술로 피식피식 웃었다.

“0 네 개. 기본 아니야?”

“이 미친, 개새끼가….”

반은 생각지도 못한 비밀번호를 듣고 입술을 들썩였다. 얼른 눌러 보라는 듯이 턱짓하는 웨인의 작태는 넋을 앗아 가기 충분했다.

“너 진짜 왜 이러냐…?”

이렇게 하라고 했다가, 저렇게 하라고 했다가, 다 취소하고 물러나 버리지를 않나. 반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그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정신이 온전한 것은 맞나 의심이 갈 정도라 꺼림칙하기 그지없었다.

놈을 절절하게 노려보던 반은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간만에 드잡이질을 한 몸이 말 못 하게 욱신거렸다. 뻐근한 허리를 겨우겨우 세우자 웨인의 입에서 늦은 답이 흘러나왔다.

“심심해서.”

“지랄한다, 진짜….”

0000.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허탈하게 열렸다. 튀어나온 디아를 받아 낸 반이 다 죽어 가는 소리를 냈다. 아이의 따뜻한 가슴에 이마를 기대자 짧은 이명과 함께 안도감이 몰려왔다.

디아는 여전히 드러누워 있는 웨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반의 머리를 품 안에 껴안았다.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몸짓을 관찰하던 웨인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이야 좋아 죽겠지만 저 짓도 오래가지는 않을 테다. 디아의 성장은 어떠한 개체보다 빨랐고, 그러므로 어떠한 개체보다 더 빨리 숙주를 버리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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