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9)

03.

어두운 밤이 내려앉은 자정, 몇 년 만에 찾아온 소란이 정적이 감돌던 거실을 요란하게 뒤바꾸었다.

“미친 새끼. 진짜 미친놈….”

탁상 거울에 비추어 본 얼굴이 난장판이었다. 왼쪽 눈두덩은 부풀어 오르고 광대와 관자놀이는 시퍼렇게 물들었으며, 터진 입가는 며칠 내로 딱지가 앉을 듯했다. 목에는 손자국이 남았고 옷에 가려진 몸뚱이는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꼴이 뻔했다.

반은 혀로 입 안을 쓸어 이가 흔들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거울을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이거 자산이야. 어떻게 얼굴만 골라서 패냐?”

“얼굴도 파셨나 봐. 그건 몰랐네.”

트집을 잡고 늘어졌지만 웨인의 얼굴도 만만치 않았다. 티슈를 돌돌 말아 코피를 막는 웨인을 흘겨보던 반은 제 콧대를 만지작거리며 부러진 곳은 없나 확인했다. 코끝을 매만지는 반의 허벅지를 짚은 디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파?”

“죽을 것 같아.”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은 디아가 손가락으로 부어오른 광대를 살살 문질렀다. 손의 온도가 후끈거리는 상처보다 시원해 눈을 감자 촉촉한 감촉이 부은 눈두덩을 꾹 눌렀다. 오른 눈만 떴더니 촘촘한 디아의 속눈썹이 흐릿하게 보였다. 반의 눈두덩이에 입을 맞추고 떨어진 디아는 광대, 볼, 찢어진 입술에도 제 입술을 비볐다.

“이런다고 안 아플 것 같냐?”

반은 애써 미소를 눌렀지만 광대는 이미 숨길 수 없을 만큼 볼록했다. 사실 디아의 입술이 스칠 때마다 눈살이 꿈틀거릴 정도로 따끔거렸지만 그 행동이 사랑스럽고 귀여웠기에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계속 아파?”

목에 남은 손자국을 작은 손으로 살살 문지른 디아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반은 눈을 가늘게 떠 웃음을 감췄다.

“아직도 아픈데… 아!”

“작작 해.”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고개가 앞으로 숙어지자마자 디아가 냉큼 머리를 감싸 안았지만 그런다고 한들 어지러움이 가시지는 않았다.

“윽….”

“반, 괜찮아?”

뺨을 감싸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디아가 이마를 맞댔다. 미간을 찡그린 반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한참 끙끙거렸고, 피딱지가 덕지덕지 앉은 얼굴은 디아를 속상하게 하기 충분했다. 디아는 눈을 뜨지 못하는 반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상에 올라온 후 처음으로 디아와 시선을 마주친 웨인은 눈썹을 쑥 들어 올리다 말고 재빨리 몸을 물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것을 낚아채고 힘을 줘 아이의 손을 멀리 떨어뜨렸다. 조명에 반사되는 것을 확인한 순간 헛숨이 터졌다.

“…하.”

조막만 한 손에 단단히 들린 것은 맥가이버 칼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눈알에 박혔을 날카로운 날붙이를 빼앗아 바닥에 던지자 아이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양 반의 뺨을 쓰다듬는 디아의 대단한 내숭을 목격한 웨인은 혀를 차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갈게. 계속 보고 있을 거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연신 고통을 호소하던 반은 바라 마지않은, 하지만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는 웨인의 인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웨인은 정말 떠날 것처럼 외투를 툭툭 털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간다고?”

“그러면 여기서 살라고?”

아니. 그건 안 될 일이지. 저놈과 동거라도 했다가는 울화통이 터져 죽고야 말 것이다. 질색하는 반을 흘긴 웨인은 신발장 위에 놔뒀던 종이 가방을 뒤적였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와인 한 병이었다. 그는 와인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얻어터져 전혀 멋있지 않은 얼굴로 슬쩍 웃었다.

“옆집으로 이사 왔거든. 이건 이사 선물.”

“…옆집?”

“붉은 벽돌집. 한번 놀러 와. 그건 놔두고.”

정확히 디아를 콕 집은 웨인이 목적을 달성한 듯 걸음을 돌렸다. 대뜸 찾아온 것처럼 대뜸 나가 버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저딴 놈이 다 있나. 언질 없이 찾아와 놓고 이제는 옆집으로 이사 왔다니.

이 종잡을 수 없는 의뢰가 갈수록 마음에 안 들었다. 집 밖으로 나간 웨인은 다시금 문을 벌컥 열더니 머리만 집어넣고 소리쳤다.

“참고로 말하는데, 둘 다 외출 금지야. 집 안에서 돌아다니는 건 허락해 줄게.”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이 매섭게 닫혔다. 분이 풀리지 않아 씨근덕거리던 반은 불안한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디아에게 더는 흉한 꼴을 보이지 않겠다는 다짐 하나로 울분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공표했다.

“이제 위에서 살 거야. 햇빛도 좀 보고, 밝게. 좋지?”

“안 내려가?”

“안 내려가.”

절도 있게 고개를 저은 반은 리모컨을 찾아 지하로 향하는 입구를 가렸다. 정리할 것이 산더미였지만 당장 누워서 쉬지 않는다면 병자 신세를 면치 못할 테다. 어색하다는 듯이 거실을 둘러보는 디아의 손을 맞잡은 반은 크리스마스 이후로 함께 가 본 적 없는 2층을 향해 서둘렀다.

“네 방은 여기.”

시종 주변을 관찰하는 디아에게 미셸이 쓰던 방을 내어 주었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이전 주인의 성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아들 내외가 세상을 뜬 이후로 미셸이 이곳에 들른 날은 손에 꼽으니 새 방이나 다름없었다.

반은 아이를 침대에 앉혀 두고 미셸의 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바닥을 굴러다니느라 먼지가 잔뜩 묻은 스웨터를 벗고 몸을 돌려 보자 아니나 다를까 피부가 엉망진창이었다. 커다란 멍이 한동안 남을 옆구리를 매만지던 반은 바지를 벗다 말고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디아를 내려다봤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시퍼런 옆구리를 훔쳐보는 아이의 뺨을 톡 건드리며 물었다.

“너도 씻을래?”

“응.”

“옷 벗자. 손 들고.”

두 팔을 위로 쭉 뻗은 디아의 스웨터를 한 번에 벗기고 부스스 일어난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매번 지하실 그 좁은 욕실에서 씻기느라 고생 좀 했는데, 이참에 스스로 씻는 법을 가르쳐도 괜찮을 듯했다.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실 안에서 조곤조곤한 뒷담이 오갔다. 오갔다고 하기에는 실상 반의 일방적인 짜증이었다. 다리를 쭉 펴고 앉은 디아의 뒤에 자리 잡은 반은 달콤한 향을 풍기는 샴푸를 손바닥에 짜내며, 조금도 달콤하지 않은 한탄을 늘어놓았다.

“나는 진짜 걔랑 친하지도 않고 그냥 실수였거든. 몇 번 실수한 거 가지고 너무 쪼잔한 거 아니냐? 생각을 해 봐.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안 그래?”

물을 머금은 머리카락을 조물조물 샴푸질하는 동안 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없이 동조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하던 반은 씁, 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근데 또 납득이 가. 내가 좀 남자 여자를 불문하고 이렇게, 또… 알지?”

“‘이렇게, 또’가 뭔데?”

“그런 게 있다.”

능청스럽게 제 자랑으로 빠진 반은 혼자 키득거리다가 아이의 허리를 잡아 일으켰다. 그새 또 자란 디아의 키를 손바닥으로 재 보던 반은 샤워기를 들어 거품을 살살 헹궈 냈다.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광경이 노곤한 조명 아래 선명히 보였다.

몸에는 직접 비누칠하도록 시킨 반은 아이의 가슴팍 부근에서 살랑거리는 목걸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그마한 로켓을 손에 쥔 반은 비누를 만지작거리는 디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이거 웨인한테 들키면 안 돼.”

“왜?”

반은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고 차가운 쇳덩어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늘 스웨터 속에 감추고 있으니 웨인은 아직 이걸 발견하지 못했을 터다. 여차하면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아이의 뺨 대신 목걸이에 입을 맞춘 반은 가볍게 대꾸했다.

“원래 소중한 건 안 보여 주는 거야. 내가 준 건데 당연히 소중하겠지?”

이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머리를 토닥이고 샤워기를 틀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서도 사랑스러운 디아의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준 반은 찝찝한 기분을 묻어 두었다.

물기를 꼼꼼히 닦는 법까지 배운 아이는 좀체 혼자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이 조금 더 적절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아이를 침대에 눕힌 반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고 손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같이 잔 것은 지하라는 특수성이 있어서였지, 원래라면 태어나자마자 따로 자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자신도 그랬고, 잭도 그랬을 테고, 이 나라에서 자라는 모든 아이들이 그러듯이 말이다. 얻어맞은 사지가 저릿저릿해 디아를 달랠 힘도 없던 반은 혼자 자는 연습을 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미셸의 방을 떠났다.

캄캄한 복도로 나온 반은 사뭇 낯설게 느껴지는 사위를 둘러보았다.

미셸의 방, 부모님이 머물던 방, 그리고 복도 끝에 자리한 가장 작은 자신의 방. 주인이 있던 시절보다 없던 시간이 긴 집에 온기가 피어났다. 반은 문득 까마득한 과거가 떠올라 미셸의 방을 돌아봤다. 매정한 미셸이 그나마 자주 웃던 시절, 얌전히 걷는 법을 몰랐던 어리숙한 자신과 시끄러운 복도. 외로움을 몰랐던 나날들.

‘외로워?’

아이의 미성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래서야 그딴 허무맹랑한 소리에 반박할 처지가 못 되지 않나.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나약한 마음을 감춘 반은 자신의 작은 방으로 향했다. 몸을 똑바로 누이면 꽉 차는 작은 침대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밤이었다.

***

커튼을 걷은 창 너머에서 새벽빛이 쏟아졌다. 잠자리가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곁으로 돌아누운 반은 지척에 고인 온기를 감지했다. 잠이 깬 것도, 든 것도 아닌 오묘한 상태로 뒤척이며 온기를 찾아 팔을 둘렀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디아가 기어코 침대로 기어들어 왔다는 것쯤은 정신을 차리지 않고서도 추측할 수 있었다. 반은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시금 잠에 빠져들려고 했다. 아이의 너른 등은… 잠깐, 너른 등?

눈이 반만 뜨였다. 한쪽 눈두덩이가 팅팅 부어올라 절반 뜨는 것조차 고역이지 않았다면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을 것이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반은 한 사람 눕기도 비좁은 침대에 꾸역꾸역 기어들어 와 잠든 아이를 내려다봤다.

푸르스름한 새벽녘이 침범하지 못하는 깨끗한 금발을 베개에 흩트린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는 디아가 맞았다. 다만 아이가 아니었다. 소년이었다.

비명을 내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은 반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살짝 뒤척이다가 반듯하게 누운 디아가 감은 눈을 살그머니 떴다. 머리카락처럼 밝은색의 속눈썹이 날갯짓하더니 녹음이 드리운 눈이 완전히 드러났다. 잠에서 깨어난 디아는 벽에 바투 붙은 채로 저를 내려다보는 반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반은 잘 잤다, 혹은 못 잤다 중에 답을 고르면 되는 상황임에도 소년을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두 달간 믿기지 않을 속도로 자라기는 했지만, 그래서 믿기지 않아도 믿게 됐지만, 잠깐 잠든 사이 다른 애를 대신 가져다 놓았나 싶은 수준으로 자란 것은 도가 지나쳤다. 그만큼 디아의 성장은 반이 감당할 수 있는 상식선을 훌쩍 뛰어넘었다. 입에서 손을 떨어뜨린 반은 어떻게든 태연한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했다.

“야, 너…. 너, 그. 너무 자란…. 뭐야 이거. 뭐야…!”

무용지물이었지만 말이다.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발뒤꿈치를 세우고 침대에서 후다닥 튀어나온 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디아를 멍하니 바라봤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린 디아는 가뿐히 바닥에 닿은 발을 한 번 구르더니 반이 입혀 준 스웨터 소매를 당겨 보았다. 아직도 손바닥 절반이 가려지기는 했지만 소매를 돌돌 말아야 손이 빼꼼 드러났던 어제보다는 한결 편했다.

무럭무럭 자란 몸을 확인한 디아는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나 얼빠진 반을 마주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목이 꺾일 정도로 고개를 젖혀야 간신히 시선이 맞던 황금빛 눈이 상당히 가까이 자리했다. 두 뼘. 단 두 뼘만 더 자라면 반과 정면에서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단 하루 만에 열세 살 남짓의 소년이 된 디아는 몸이 굳어서 툭 떨어져 있던 반의 손을 가져왔다.

손바닥을 마주 대고 손가락을 곧게 펼치자, 키가 두 뼘이나 작음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크지 않았다. 디아는 배시시 웃었고, 반은 경악했다.

충격으로 다리가 풀린 반이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자 곧장 바닥에 주저앉은 디아가 손을 뻗었다. 소년은 반의 손바닥에 다시 제 손바닥을 맞추며 봇물 터진 것처럼 쉼 없이 종알거렸다.

“나 엄청 컸어! 금방 자랄 것 같아. 그치?”

“아냐…. 크지 마….”

“반은 손이 작은 편인가 봐. 이거 봐. 키는 내가 훨씬 작은데 크기는 비슷해.”

“아니, 나는….”

“반이 나보다 작아지면 너무 신기할 것 같아. 그럼 나도 반 안고 다닐 수 있겠지? 빨리 더 크고 싶어.

“뭐라는 거야….”

답지 않게 말이 많아진 소년에게 넋 나간 채로 대꾸하던 반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을 벅벅 헤집는 동안에도 디아는 고속 성장에 대한 감상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한껏 들뜬 목소리가 고막을 두들겼으나 맞장구쳐 줄 정신이 없었다.

디아가 얼른 자라기를 바랐지만 이토록 빠르게 자라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무언가 아쉽고 섭섭하고 서운하고 미치도록 속상했다.

***

밤새 기상천외한 성장을 보여 준 디아는 반을 긴장케 했다.

소년이 된 디아는 체격만 커진 것이 아니었다. 유소년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또랑또랑하던 미성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젖살이 올라 통통했던 뺨과 턱 선은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육체에 걸맞게 정신까지 불쑥 성장하여 디아는 간혹 얼버무리거나 웅얼대던 말씨를 싹 지워 내고는 곧잘 반에게 말을 걸어왔다. ‘왜, 왜, 왜’ 하고 시시때때로 묻는 행태도 부쩍 줄었다.

반은 못내 섭섭했지만 디아의 아기 티가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눈떠 보니 소년이 되어 있던 아침 이후로 몇 날 며칠을 집요하게 감시했지만 디아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물론 보통 사람의 하루가 디아에게는 한 시간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근래는 눈에 띄게 성장하지는 않았다. 디아는 아직 의존적이었고, 반은 그것이 기꺼웠다. 본인조차 모르는 속내였지만 말이다.

“거기 있는 거 다 먹어. 그 전에 못 일어나.”

“반.”

“빨리 먹자, 이쁜아.”

“바안.”

“어어. 왜.”

디아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며 성의 없이 대꾸하는 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각기 다른 음식을 한 곳에 몽땅 때려 박은 접시는 겉보기에는 푸짐했다. 대충 익힌 베이컨과 대충 구운 계란프라이, 대충 해동한 냉동 피자 한 조각, 대충 썬 사과, 대충 부은 우유 한 컵.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반의 기준으로는 굉장히 영양가 잡힌 식사였다. 그렇지만 디아의 불만은 반이 내놓은 메뉴 탓이 아니었다.

길쭉길쭉하게 뻗은 팔로 식탁을 짚은 디아가 상체를 일으켰다. 식탁을 가로지른 손이 반이 내도록 들고 있던 핸드폰을 휙 빼앗았다. 여섯 번째 답장을 보내기 직전에 핸드폰을 빼앗겨 고개를 쳐든 반은 가까이 다가온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디아는 부루퉁한 낯으로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한테 관심 좀 줘.”

핸드폰을 돌려주지 않고 의자에 기댄 디아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년을 마주 보고 앉았지만, 속으로는 관심을 갈구하는 디아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관심이야 줄 수 있지. 먹어, 얼른.”

반은 너스레를 떨며 턱을 괴었다. 밥상 앞에서 문자질한 거야 육아하느라 본의 아니게 연락을 무시해 왔으니 지금이라도 답장을 해 두려던 것이었다. 어차피 저를 찾는 문자 한 통 당 이모티콘 하나씩만 보내는 중이었으니 굳이 더 이어 갈 필요가 없기도 했다.

“아.”

디아가 건넨 피자 조각이 입술에 닿았다. 자연스럽게 한 입 베어 문 반은 피자를 우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먹기 싫어서 주는 거 다 티 난다.”

“반이 준 건데 내가 어떻게 그래.”

“망할 놈이 빠져나가는 재주만 늘었어.”

“내가 망할 놈이야?”

번드르르한 말솜씨가 생긴 디아는 베어 문 자국이 선명한 피자를 고른 이로 깨물었다. 반은 알면서 묻는 것이 뻔한 디아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며 소년의 접시에 있는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시기만 하고 달지 않은 사과를 으적으적 씹으며 답했다.

“네가 망하면 내가 너무 슬프지. 그 개고생을 해서 키웠는데.”

웨인에게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이라는 충고를 들은 후로 소년은 계속해서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몸집에 비해 식욕이 영 부진하다는 점이었다. 도구를 사용해 음식을 집는 법은 금세 익힌 반면 매번 찔끔 먹다 마니까 볼 때마다 속이 탔다.

하긴 분유도 먹기 싫다고 난리 피운 놈이 조금 컸다고 해서 올바른 식습관을 가질 리가 없었다. 저것 봐라. 또 포크 내려놓는 거.

“그만 먹을래.”

“좀 컸다고 내 말은 말 같지도 않으시다?”

“먹여 주면.”

디아는 반도 비우지 못한 그릇을 훑고는 포크 손잡이를 돌려서 내밀었다.

“그러면 먹을게.”

반은 소년의 수작에 코웃음을 쳤다. 며칠 새 말이 부쩍 늘더니 이제 협상까지 하려고 들었다.

“건방지네, 디아.”

깍둑깍둑 썰은 사과 조각을 하나 더 집어 먹으며 중얼거리자 소년의 손이 멈칫 굳었다. 포크를 되돌린 디아는 미적미적 베이컨을 뒤적이다가 바짝 탄 표면을 쿡쿡 찔러 댔다. 녹색 눈알이 슬쩍슬쩍 눈치를 살폈다.

“나 아직 이거 짚는 게 어려워서… 안 될까? 안 되면 그냥….”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군더더기 없는 손짓으로 식사하던 소년이 갑자기 헛손질을 시작했다. 무딘 포크 날에 살짝 걸린 베이컨이 툭 떨어지고, 사과 조각은 어설프게 들어 올리다가 떨어졌다. 디아는 다시금 눈치를 살피고는 서운한 척을 했다.

“사랑하면 이런 거 다 해 주는 줄 알았어.”

제법 진심처럼 보였다. 아니다. 진심으로 서운해하는지도 몰랐다. 반은 제대로 된 훈육을 하고자 하면 언제나 그놈의 사랑을 들먹이는 소년을 못마땅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디아의 뻔뻔한 태도가 그리 미운 것도 아니었다.

“아 해 봐, 아. 내가 이것도 못 해 주겠냐. 쯧, 그냥 빨리 크자. 이런 짓 좀 그만하게.”

디아의 손에서 냉큼 포크를 빼앗아 든 반은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접시를 쿡쿡 내리찍었다. 사과와 베이컨을 한 번에 찍어 디아의 입에 손수 집어넣어 주었다.

아이는 상큼하고 기름진 음식물을 오물오물 씹으며 샐쭉 웃었다. 별의별 방법으로 사랑을 확인받으려고 하는 소년의 모습이 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

‘무슨 짓 한 거야?’

아이가 소년이 된 날 아침, 집에 들른 웨인이 내뱉은 비난이다.

반이라고 알겠는가. 자고 일어나니 커져 있었을 뿐인데. 반은 마치 자신이 대단한 잘못을 해서 아이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것처럼 매도하는 웨인의 말투에 어이없어했고, 덕분에 현관에서 한바탕 입씨름했다.

이마를 짚으며 곤란한 기색을 보이던 웨인은 반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쳐다보는 디아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사 한마디 없이 옆집으로 향한 웨인은 금세 되돌아왔다. 보기만 해도 고리타분한 서적들과 함께.

‘읽으라고 해. 어차피 심심할 텐데.’

‘유튜브 보면 되는데. 순수 이성… 뭐? 이런 걸 왜 읽어?’

‘네가 왜 그 모양인지 알겠다.’

‘그거 내 욕이지? 뒤질래?’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린 반에게 서적을 떠넘긴 웨인은 혀를 차며 집으로 돌아갔다. 품 한가득 안은 서적을 추어올린 반은 놈의 등짝을 노려보다가 부서져라 문을 닫았다.

인터넷이 되는 지상으로 올라온 만큼 유튜브로 세상을 가르치던, 정확히는 동영상을 틀어 주고 딴짓했던 반은 디아에게 책 무더기를 떠넘겼다. 흥미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으나 표지를 하나씩 살펴본 디아는 곧 한 권을 골라잡아 빽빽한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반은 별 희한한 것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디아를 흘끔거리다가 바닥에 늘어진 책 표지를 훑었다.

<유토피아>, <오만과 편견>, <신곡>, <그 남자의 촉수>, <자유론>, <발달 심리학>, <바이오 사이언스>, <헨젤과 그레텔> 등등등….

중구난방이었다. 어디선가 제목을 들어 본 책도 있었지만 땔감으로 쓰는 편이 더욱 이로울 듯한 책도 있었다. 두께가 벽돌만 한 책을 들어 첫 장을 넘겨다본 반은 순간 눈앞이 아찔해져 표지를 덮었다. 활자에 알레르기가 있는 탓이었다.

책 더미를 디아에게 밀어 준 반은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뭐, 책에 관심을 보이는 건 좋은 징조였다. 쉴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 아니겠는가.

전쟁 같은 아침 식사를 끝낸 후, 디아는 며칠 사이 새로 생긴 일과를 따라 또다시 책 삼매경에 빠졌다. 읽는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는지 디아는 어제와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 휙휙 넘어가는 책장과 소년의 번듯한 옆얼굴, 핸드폰을 번갈아 보던 반은 슬슬 지루해졌다. 곁눈질로 빽빽한 글자를 노려보다가 슬쩍 말을 걸었다.

“재밌냐?”

활자에서 시선을 떨어뜨린 소년은 반을 물끄러미 보더니 미련 없이 책을 덮었다.

“왜. 안 읽고.”

“반이랑 얘기하는 게 더 재밌어.”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반은 짓궂게 웃으며 디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쓸어 넘기는 손길이 좋았다. 따사롭고 평온했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언제 가져 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반은 저의 코끝을 만지고 입술을 쓰다듬는 손을 내버려 두다가 별안간 상체를 세웠다. 공중에 뜬 디아의 손을 맞잡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얼떨떨한 낯으로 같이 일어선 소년을 마주 보고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법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도망갈까?”

“…사랑의 도피?”

“뭐, 그런 셈이지.”

로맨스 영화의 찌든 때가 빠지지 않은 디아의 어김없는 물음에 마지못해 수긍하자 활짝 핀 웃음이 되돌아왔다.

반은 황급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 외투를 걸치고 소년이 입을 외투를 챙겨 내려왔다. 시키는 대로 펑퍼짐한 외투를 걸친 디아에게 생전 처음으로 신발을 신겨 주었다. 손이 큰 만큼 발도 큰 덕에 제 운동화가 남는 부분 없이 꼭 맞아서 수치스럽기는 했지만.

디아와 손깍지를 낀 반은 현관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옆집 동태를 살폈다. 붉은 벽돌집이 보였다. 웨인이 오기 전까지 오래도록 비어 있던 곳이다. 웨인은 하루에 두 번, 아침저녁으로 꼴 같지 않은 조깅을 한 뒤 이곳에 들렀기에 잠시 나갔다가 오려면 지금이 제격이었다.

여전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 집을 노려보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정원으로 빠져나온 반은 머뭇거리는 디아를 돌아보았다.

“나와 봐.”

태어난 후로 단 한 번도 집을 벗어난 적 없는 디아는 낯선 바람을 맞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푸른 필터를 덧씌운 듯 언제나 흐리멍덩한 하늘과 손질하지 않은 정원을 녹색 눈동자에 담은 소년은 마침내 반을 마주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잘생긴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뭐야. 배신하게?”

디아는 배신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것. 뜻은 알지만 정확한 의미는 몰랐다. 단지 좋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은 알았다.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사랑스러운 인간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발을 디뎠다.

도망이니 사랑의 도피니, 말은 거창하게 했다만 실상은 산책이었다. 우중충한 날씨를 못 이겨서, 지루함에 염증을 느껴서, 일자리가 없어서, 그냥 떠나고 싶어서, 수많은 이유를 대고 주민들이 떠난 마을은 버려진 폐허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그 덕분에 반은 오지랖 넓은 이웃 주민들에게 디아의 존재를 설명할 필요 없이 순탄하게 숲으로 향했다.

“반은 어떤 곳에서 살고 싶어?”

허물어진 담장, 말라 죽은 가로수, 펑크 난 타이어, 시들기 직전의 풀꽃에 하나하나 관심을 주며 반의 이야기를 듣던 디아가 물었다. 눈을 깜박인 반은 본인이 원하는 주거 환경을 막힘없이 읊었다.

“당연히 도시지. 맨날 불꽃놀이 하고 집 앞에 나가면 죄다 비싼 차에 번쩍번쩍하고. 거기에 엄청 좋은 집. 수영장까지 딸렸으면 좋겠다. 타일은 다 금칠을 하는 거지. 뭐 사고 싶은 거 있으면 타일 떼다 바꿔 먹고.”

황금만능주의에 전 머리가 가장 이상적인 집을 그려 냈다. 반은 이미 백만 달러를 받은 후의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 놓았다. 끝내주는 집. 끝내주는 차. 끝내주는 시계. 반이 최고로 치는 가치였다. 경박한 관념을 술술 읊던 반은 문득 입을 다물고 골몰했다.

디아에게 이런 사상을 심어 주는 것은 옳지 않은… 건가? 끙끙거리며 고심한 반은 순식간에 말을 바꿨다.

“아니다. 앞에 거 다 취소. 나는 말이야. 아주 조용한 곳에서, 약간 섬 같은 곳 있지? 조용한 데 있는 오래된 성에서 느긋하게 살고 싶어. 내가 또 동화를 좋아하니까 그런 느낌으로.”

동화는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교통이 박살 난 섬은 거들떠보기도 싫지만 거짓말을 섞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낭만적이지 않나. 유심히 듣던 디아가 청청한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좋아.”

“응?”

“동화 같고 조용한 거. 방은 같이 쓰고 싶어.”

디아는 순식간에 저 자신과 반이 동화 속에 나오는 고성에서 오순도순 사는 몽상에 젖었다. 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현실이 부닥쳐 오며 짧은 꿈이 깨어졌다.

의뢰가 시작된 지 넉 달에 가까워지는 현재, 디아와 함께 지낼 시간은 어림잡아 여덟 달쯤 남아 있었다. 여덟 달이 지나면 디아는 연구소행이고, 반은 백만 달러를 받고, 임무는 끝이 난다. 고성은 고사하고 디아는 반과 함께 이 마을을 떠날 수도 없을 것이다.

반은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땅으로 시선을 내렸다. 멀기만 했던 약속의 날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온 듯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워낙 디아가 사랑스러워서 잠시나마 본분을 망각했다. 반은 서늘한 가슴 부근을 문지르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방은 따로 써야지. 어디서 아기 행세야.”

별수 있나. 순간을 모면해야지.

마을을 둘러싼 숲에 도착하니 사위가 한층 어두워졌다. 구름 틈으로 개미 오줌만큼 스며들던 햇빛이 나무 이파리에 차단되자 숲의 스산한 매력이 빛을 발했다. 폴리스 라인이 쳐진 구역을 에둘러 간 반은 어릴 적에 자주 드나들던 오솔길로 디아를 이끌었다.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축축하게 젖은 흙길을 딛고 숲 깊숙이 들어가자 어디선가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이끄는 지저귐을 들으며 나아간 끝에 목적지가 나타났다. 반은 얌전히 따라오던 소년을 내려다봤다. 입술을 살짝 벌린 디아는 물안개가 낀 호수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동네는 호수가 많거든. 구경해 봐. 물에 들어가지는 말고.”

사시사철 날이 흐려 맑은 호수 정경을 볼 수 있는 날은 기적과도 같았지만, 안개가 낀 호수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꼼지락거리는 소년의 손을 놓아준 반은 큼직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는 디아에게 마음껏 놀라고 한 반은 핸드폰을 꺼냈다.

전파가 아슬아슬하게 잡히는 핸드폰을 하늘 높이 쳐들고 연락을 확인했다. 오늘도 미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백만 달러짜리를 맡겼으면 한 번 확인이라도 할 것이지, 전부 웨인을 통해 보고받고 있는지 무심함의 극치를 달리는 인간이었다.

“매정하기는.”

입을 삐죽인 반은 디아에게 핸드폰을 빼앗기는 바람에 끝내지 못했던 답장을 연달아 처리한 다음 사진 앱으로 들어갔다. 가장 최근 사진은 책에 푹 빠진 금발 소년의 옆얼굴이었다.

반은 사진을 확대해서 들여다보다가 아쉬움이 듬뿍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빨리 클 줄 알았다면 아기 시절 많이 찍어 둘걸. 간혹 기록용으로 한 장씩 찍은 게 전부인 탓에 아기 디아의 사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한 마흔 장 정도.

오동통한 뺨을 부풀린 채로 퍼즐을 맞추는 디아의 어린 시절 사진을 한참 감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것 좀 보라고 소년을 부르려던 반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요한 호수를 둘러보았다.

“디아?”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디아!”

바위에서 일어난 반은 목청을 키워 소년을 불렀다. 디아의 그림자를 찾기 위해 빙글빙글 돌자 빽빽하게 자란 나무 그림자가 쏟아질 것처럼 드리워졌다. 호수는 잔잔했고 바람은 서늘했다. 그럼에도 소년이 보이지 않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망할. 욕을 잇새로 내뱉으며 오솔길을 밟았다. 자리에 가만히 있기는커녕 대뜸 걸음부터 옮기려던 반은 숲속에서 나는 가냘픈 신음을 들었다.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두둑, 무언가 어긋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자리에 멈추어 귀를 기울이던 반의 귓등에 축축한 땅을 밟는 소리가 맺혔다. 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빼곡히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 디아가 나타났다. 반과 마주치자마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예쁜 소년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랐던 만큼 달갑게 반겨 주어야 했으나 소년의 손에 들린 것이 반을 주저하게 했다.

“너 그거….”

“선물이야, 반.”

디아는 프러포즈하듯 싱그럽게 웃으며 다리가 부러진 토끼 한 마리를 내밀었다. 석고상처럼 새하얀 손아귀에 귀를 틀어 잡힌 토끼가 격렬하게 발버둥 쳤다. 겁에 질린 검은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굳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네가 이런 거야?”

“뭐를?”

“다리.”

디아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버둥거리는 토끼와 반을 찬찬히 살폈다. 분위기를 읽는 듯 굴러가던 눈동자에 당혹스러운 빛이 어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할 말을 고르던 소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날 배신했어.”

“배신?”

“내가 잡으려고 했는데 도망가서, 그래서….”

디아가 더듬더듬 변명했다. 잘못을 알아차린 얼굴은 아니었다. 단지 본인이 생각한 상황과 다르게 굴러간다는 점을 기민하게 눈치챈 것뿐이었다. 곧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시무룩해진 디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그냥 반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반은 골이 울리는 기분에 이마를 짚었다.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토끼와 천사의 외양을 한 소년을 번갈아 보다가 마른세수했다. 올바른 교육자의 부재가 어떤 식으로 아이를 망치는지 이런 식으로 확인할 줄은 몰랐던 반은 넌지시 생각했다.

이거, 진짜 큰일 났는데…?

***

사랑의 도피를 표방한 산책은 그것으로 끝났다. 집으로 되돌아가며 반은 참담한 심정으로 소년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일러 주었다. 명확히 설명하는 법을 알지 못해 ‘동물은 우리의 친구다. 고로 해쳐서는 안 된다’ 같은 유치찬란한 구실을 대자 우울한 낯을 한 디아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아. 그렇지만….”

“아는데 이랬다고? 진짜로?”

“…화 안 낼 거야?”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러냐? 재미로 동물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는 거지.”

“재미로 그런 거 아니야. 걔가 먼저 배신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반 화났어.”

“…진짜 내가 화가 나려고 한다. 그러니까 잘못된 걸 알면서 왜 얘 다리를 부러뜨렸냐고 묻잖아.”

디아는 할 말이 많은 것처럼 통통한 입술을 수차례 달싹였다. 본인이 꺼낸 ‘배신’이라는 이유가 변명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반은 이해해 줄 줄 알았어. 반은 날 사랑하니까….”

“아, 이해….”

반은 디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를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라. 디아의 두서없는 말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디아는 숲을 걷다 발견한 귀여운 토끼를 제게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야생 토끼가 그리 쉽게 잡힐 리가 있나. 소년은 다가오다 말고 도망간 토끼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디아의 머릿속에서 ‘배신’이라는 큰 잘못은 사회적 규율 따위보다 강력해서 다리쯤은 부러뜨려도 괜찮다고 판단했고, 반이 이 모든 참사를 이해하고 기쁘게 선물을 받아 주리라고 멋대로 단정 지은 것이다. 그놈의 사랑을 앞세워서 말이다.

반은 얼결에 데리고 온 토끼를 찝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후 관계는 얼추 파악했으나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얼어붙어서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작은 짐승에게 동정심을 품기에는 반 역시 숱한 살생을 저지르며 살아온 인간이었다. 어디서 다친 토끼를 발견한다면 안타까워하겠지만 나서서 치료를 해 줄 만큼 자애로운 성정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정신머리가 살짝 이상한 디아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제 손으로 다치게 한 토끼가 소중한 생명이라는 것을 인지시켜 주려면 이 조그마한 생물을 어떻게든 치료해야 했다. 문제는 마트 오가는 데도 한 시간이 걸리는 외딴 마을에 수의사가 있을 리 만무하다는 점이지만.

“일단 들어가 있어. 얘는 치료하러 갈 거고 나중에 미안하다고 사과해.”

“…응.”

반은 어깨가 축 처진 소년을 집 안에 밀어 넣고 현관문을 굳게 닫았다. 기분 전환할 겸 나왔다가 소년이 사이코패스가 될 가능성을 목도하다니, 기분 참 묘했다. 일찍이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키운 아이에게 범죄자의 자질이 있다는 것에 슬퍼해야 할지.

질색하는 표정을 지은 반은 옆집으로 넘어갔다. 목재로 지어진 주택이 주를 이루는 동네에서 붉은 벽돌집은 꽤 이질적이었다. 현관 앞에 선 반은 코를 훌쩍이고는 손을 들었다.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당장 도움을 구할 사람이 이놈밖에 없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대략 3초 정도 기다렸지만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열 번쯤 연달아 누르자 드디어 문이 열렸다.

아직 날이 쌀쌀함에도 검은 반소매 티셔츠를 걸친 남자가 보기 싫은 낯짝을 드러냈다. 팔짱을 끼고 비뚤게 선 웨인은 성대한 환영 인사 대신 반의 무례를 짚어 주었다.

“기다릴 줄 몰라?”

“몰라. 이것 좀 치료해 봐.”

반은 대뜸 다리 다친 토끼를 내밀었다. 집들이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당혹스러운 것을 내려다보던 웨인이 미간을 구겼다.

“그게 이랬어?”

“‘그게’ 아니라 디아.”

“그래. 디아 그게 이랬나 봐? 내가 나가지 말라고 안 했나?”

눈치 한번 더럽게 빨랐다. 반은 할 말이 없는 나머지 웨인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디아가 사고 칠 줄 알았나 뭐. 말다툼은 됐으니 치료나 해 보라고 떠넘기려던 참에 웨인이 기함할 소리를 했다.

“그냥 죽이지? 버려두든가.”

“미쳤냐?”

“그놈이 안 그랬어도 다리쯤이야 언제든 다칠 수 있어. 다른 짐승이 그랬을 수도 있고 우연히 다쳤을 수도 있고. 굳이 고쳐 줄 필요까지 있어? 그냥 운이 나빴던 건데.”

웨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디아는 악의가 없었고, 토끼는 운이 나빴다. 하지만 얼떨결에 베이비시터 역할을 맡은 반은 소년의 순수한 악의를 정당화해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공포에 질려 발버둥마저 멈춘 토끼를 웨인의 품에 억지로 안겨 주었다.

“안 돼. 디아한테 낫는 모습 보여 줄 거야. 그러니까 뭐 좀 어떻게 해 봐. 부목이나 그런 거.”

“왜?”

살결에 닿은 토끼의 체온이 불쾌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린 웨인이 꼭 어린 디아처럼 물어 댔다. 손바닥을 맞부딪쳐 털을 털어 내던 반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왜긴. 동물 죽이다가 사람 죽이고, 사람 죽이다가 연쇄 살인 하는 거지. 그러다 잡혀가면 난 무급 노동 한 거고.”

“돈 걸렸으니까 고쳐 달라?”

“당연하지.”

뻔뻔하게 답한 반은 두 시간 뒤에 들르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발을 옮겼다. 잔디가 말라 죽은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돌아보자 토끼 뒷덜미를 붙든 웨인이 슬며시 웃었다.

“식사나 하자. 저거는 떼어 놓고.”

“싫은데.”

“궁금하다며. 연구.”

이제야? 기가 막혀 몸을 완전히 돌리자 덥석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진 웨인이 저녁 식사 시간을 알려 주고 집 안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현관 앞에 침이라도 뱉어 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집으로 미적미적 돌아온 반은 외투를 벗으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소파에 책 몇 권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지만 디아는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지만, 머릿속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디아는 토끼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상식적으로는 당장 아동 심리 상담사를 찾아가야 할 일이지만 그들의 상황은 막막했다. 만에 하나, 상담사를 찾아갔다고 가정해 보자.

아이를 입양하셨나요?

아니요. 집 지하실에서 혼자 태어났는데요.

아이를 지하실에서 키우셨나요?

나가면 안 된다고 해서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아이가 홈스쿨링을 했나요?

네. 유튜브로요.

아이에게 뭘 보여 주셨나요?

로맨스 영화요. 가끔 액션이 섞여 있긴 했는데 뭐… 어차피 크면 다 보는 거잖아요?

성심성의껏 답하는 동안 따스한 미소를 띤 상담사는 책상 밑에 감춘 핸드폰을 분주히 두드려 경찰에 신고할 것이다. 반은 본인이 낳지도 않은 아이 때문에 쇠고랑을 차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본인과 웨인 선에서 최대한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하는데….

문가에 기대어선 반은 둥글게 만 등에서 우울함이 묻어나는 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카펫에 시선을 고정한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디아는 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외운 것처럼 번드르르한 말을 쏟아 냈다.

“내가 잘못했어, 반.”

“뭘 잘못했는데.”

“다치게 한 거.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반이 좋아할 줄 알았어.”

성급히 잘못을 고해하는 디아는 반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스를까 봐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반은 소년을 미심쩍다는 듯이 관찰하다가 긴 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잘못을 인정하고, 저렇게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더 무게 잡을 필요가 있나. 방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간 반은 아직 외투도 벗지 않은 디아의 곁에 앉았다.

“사람이 실수하면서 사는 거지. 넌 사람이 아니지만… 앞으로 안 그러면 돼.”

오랜만에 어른답게 위로를 전한 반은 조심스럽게 어깨에 머리를 기대 오는 소년을 한쪽 팔로 안아 주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디아의 몸이 풀어지며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피로한 귀를 맴돌았다.

“반.”

“왜.”

“나는 반이 나 때문에 화나서 안 돌아올 줄 알았어.”

“화 안 났다니까.”

“아직 나 사랑해?”

“당연하지. 누가 널 안 좋아해?”

“나 배신 안 할 거지.”

“절대 안 하지.”

반은 소년의 어깨를 토닥이며 언제나 그랬듯이 알맹이가 텅텅 빈 빈말로 대답해 주었다. 아니, 정정한다. 조금쯤은, 티끌만큼은 진심이었다.

웨인에게는 모조리 돈 때문이라고 얼버무렸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잘 모를 일이었다. 단지 돈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디아에게 산책을 권할 필요가 있었을까. 내도록 책만 들여다본다고 서운해할 필요는? 잘 먹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하지만, 반은 제 줏대 없는 마음이 디아에게 살짝 기울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무섭다더니. 남은 시간이 느릿느릿하게 흘러가길 바라는 속내가 겸연쩍게 느껴졌다.

일과로 돌아간 반은 디아에게 이른 저녁을 먹인 후 배터리를 가득 충전한 랩톱을 내밀었다. 귀엽게 생긴 동물 친구들이 모험을 떠나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틀자 소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반은 빙글빙글 웃으며 새하얀 뺨을 꼬집었다.

“다 커서 이런 건 보기 싫으신가 봐?”

“…아냐. 그런데 같이 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토끼 사건이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지 눈치를 살핀 디아가 은근슬쩍 애교를 부렸다. 반은 모르는 척 넘어가 주고 싶었지만 오늘은 망할 놈과의 선약이 있었다. 바쁜 몸이라 그건 좀 어렵겠다고 너스레를 떨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헤집은 반은 잠시 고민하다가 욕실로 향했다. 씻지도 않고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

외출을 알리자마자 충격을 제대로 받은 디아를 어르고 달래고 사정사정해서 저녁 식사 참석을 허가받은 반은 지친 몰골로 붉은 벽돌집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 준 웨인은 저녁 식사를 하러 온 사람치고 허물없는 꼬락서니를 훑어 내렸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쓸어 넘긴 반은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차림으로, 이사 올 때 그가 선물한 와인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손에 닿은 시선을 눈치챈 반은 씩 웃으며 와인을 들어 올렸다.

“선물.”

검붉은 병을 살랑살랑 흔든 반이 와인을 떠넘겼다. 토끼에 이어 와인 병을 떠안은 웨인은 어깨를 치고 안으로 들어서는 반의 뒤통수에 대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문을 닫았다.

“집이 뭐 이래.”

반은 집 내부를 휘둘러보며 혀를 찼다. 비어 있던 집이라는 것만 알았지, 안에 들어와 본 적은 없었던지라 신기한 한편 얼떨떨했다.

부정적인 감상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모든 창문에서 시작됐다. 높은 위치에 작은 창문이 줄을 지었지만 커튼 탓에 빛이 잘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조명이랍시고 설치된 샹들리에는 조도가 하도 연약해 실시간으로 시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가구도 몇 없었다. 거실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 널따란 공간에는 낡은 식탁이 하나 있었는데 저녁 식사를 하자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식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좋게 평가하자면 분위기가 묘하네, 정도고 솔직히 말하자면 폐가 같았다. 혹은 귀신이 출몰하는 고스트 하우스 정도.

으스스한 인테리어는 그렇다 치자. 식탁 중앙에 우뚝 솟아오른, 작은 불꽃이 일렁이는 촛대를 발견한 반이 코웃음을 쳤다. 촛대라. 인터넷만 켜면 조명을 종류별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참 고전적이었다.

“꼴값 떤다고 해도 되냐?”

촛대를 가리키며 묻자 웨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어두컴컴한 부엌으로 향했다.

“전구 바꿀 시간이 없어서. 앉아 있어.”

“하는 일도 없으면서 바쁜 척은.”

의자 하나를 빼서 앉은 반은 식탁을 마주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대단한 식사를 준비했기에 식기류가 이토록 많은 건지. 크기가 다른 포크 두 개를 잡아 돌려 보면서 의자를 가까이 당기자 체크무늬가 프린팅된 테이블보가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반은 테이블보를 접으려다가 멈칫했다.

눈가를 찌푸리고 살짝 접힌 테이블보를 다시 펼쳤다. 끝자락을 들어 촛대 가까이 가져가자 짙은 얼룩이 눈에 띄었다. 마냥 묽지만은 않은 액체를 흩뿌린 듯한 갈색 얼룩은 딱딱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꼭 핏자국 같았다.

테이블보를 내려 둔 반은 식탁에 놓인 식기를 들어 빛에 비추었다. 떠돌이 용병이 식기를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닐 리 없으니 이사 오며 새로 구매했을 텐데 포크와 나이프, 스푼을 비롯해 접시까지 사용감이 있었다.

미셸 쪽에서 처음부터 옆집을 준비해 둔 것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해 보겠다만 혼자 살면서, 그것도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의 사용감이 나려나.

맞은편에 있는 식기까지 빛에 비춰 보다가 음식을 들고나오는 웨인을 발견하고는 깔끔히 손을 뗐다. 팔짱을 끼며 의자에 기댄 반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사람 죽였냐?”

“뭐?”

“분위기 더럽게 침침해. 기분 나빠.”

웨인은 시답잖은 소리를 들은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반의 앞에 접시 하나를 내려놓았다. 의심인지 트집인지 애매한 질문을 한 번 던져 보았던 반은 접시에 담긴 음식을 확인하고는 짜증스럽게 웃었다.

“이게 저녁이냐?”

“애피타이저.”

한 주먹도 아니고 손가락 두 마디가 될까 말까 한 덩어리를 내놓은 웨인이 천연덕스럽게 미소 지었다. 코스 요리를 접해 본 적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닌 반은 말을 돌리지 않고 직접적인 감상을 내뱉었다.

“데이트하자고?”

“분위기 좀 잡아 보려고 했지.”

지지 않고 비아냥을 받아친 웨인은 선물로 줬다가 선물로 돌아온 와인을 유리잔에 따랐다. 병만큼이나 검붉은 빛의 와인이 투명한 잔에 고이는 것을 보면서 반은 포크로 정체 모를 덩어리를 쿡쿡 찔렀다.

“자신 없으니까 술 먹이겠다?”

“자신 없지는 않은데.”

“수작 부리지 말고. 안 마셔.”

맥주라면 모를까 와인은 썩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와인이 든 유리잔을 손등으로 밀어 내고 한가득 뜬 덩어리를 입에 넣었다. 새우 맛이 났다. 의외로 먹을 만했지만, 그래 봐야 한 입 거리였다. 와인 병을 내린 웨인은 그럴 줄 알았다고 하더니 부엌으로 향했다.

이미 모든 요리를 만들어 두었는지 놈은 솜씨 좋은 웨이터처럼 양팔에 접시를 끼고 나왔다. 수프와 빵부터 메인 요리에 디저트까지 한 식탁에 빼곡히 놓이자 이제야 만족스러운 만찬 자리처럼 보였다. 겸상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 손수 요리했다고 한들 허기를 이기는 자존심은 없었다.

반은 고향에 돌아온 후로 먹지 못한 흰살생선을 발라 맛있게 먹었다. 매번 인스턴트만 먹었더니 정성을 들여 요리한 음식이 혀를 즐겁게 했다. 웨인은 테이블 매너 따위 내팽개치고 티스푼으로 생선 살을 모아 먹는 반을 응시하다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메인 요리를 반쯤 비웠을 때 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셸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인데?”

디아의 형편없는 식습관과 마찬가지로 몇 입 먹다가 만 웨인이 샐러드를 뒤적이며 물었다.

“미셸이 무슨 일 하는지는 알아?”

“연구하지. 과학자. 연구….”

당당하게 대꾸한 반은 이내 얼버무리며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미셸이 과학자라는 것만 알고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참 서로 간 관심이 전무한 집안이었다. 눈을 굴리며 먼 데를 보는 반을 한심하다는 듯이 힐끔거린 웨인은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샐러드를 조져 놓았다. 그는 무딘 포크 날로 채소를 찢으며 황당한 질문을 던졌다.

“지구 밖에도 생명체가 산다고 생각해?”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 케이크를 퍼먹던 반은 포크를 문 채로 픽 웃었다. 서른 넘은 남자가 외계인 타령이라니. 지나가는 개도 안 웃을 이야기였다.

“외계인? 너 그런 거 믿냐? 애처럼?”

“그럼 네가 키운 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그저 트집 잡고픈 욕구에 휩쓸려 냅다 쏘아붙였던 반의 말문이 턱 막혔다. 머뭇거리다가 보기보다 맛이 좋은 케이크를 한 입 더 먹으며 웅얼거렸다.

“그냥, 뭐어…. 내가 아나? 모르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딴청을 피웠다. 돌연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디아와의 첫 만남, 촉수가 마구잡이로 뻗어 나오던 작은 샬레와 그 속의 세포가 떠올랐다. 포크질이 더뎌졌다. 디아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잊지 않았으나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물로 입을 헹군 반은 계속 말하라는 듯이 턱짓했다. 일단 웨인의 개소리를 잠자코 들어 볼 심산이었다. 기어코 샐러드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웨인은 포크 날로 접시를 툭툭 두드리며 입을 뗐다.

“그러면 그것들이 이미 지구에 와 있다면….”

그건 어떻게 생각해?

질문을 끝맺으며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웨인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였다. 애당초 웃는 상이 아니다 보니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생각을 담아 어깨를 으쓱이자 웨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오래전… 북극해 부근에서 폐쇄된 연구소가 발견됐어. 우연에, 행운이 없었다면 발견하지도 못할 위치였지. 그리고 훔쳤어. 세포를.”

웨인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더니 ‘아. 가져온 거지’ 하며 한 군데를 정정했다.

“정부 지원하에 극비리로 연구를 시작했어. 처음 5년간은 소식이 없었지. 너도나도 우주선을 쏘아 올리면서 돈은 돈대로 들고 사람들 관심은 떨어지는 시기에 말이야. 이게 아무것도 아닐까 봐 모두 겁을 집어먹었을 때 첫 번째 개체가 태어났어.”

샐러드에서 생선으로 목표를 바꾼 웨인이 생선 살을 난도질하며 허무맹랑한 진실을 털어놓았다. 웨인의 말을 따르자면 그간의 사정은 이러했다.

이 넓은 미국 땅덩어리에 그 연구의 실체를 아는 상급자는 다섯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중 셋은 사망한 관계로 현재 비밀을 공유하는 자는 극도로 적었다.

정부 주도하에 미디어에 한 올의 실마리도 노출시키지 않고 소수로 꾸린 연구실은 첫 번째 개체가 부화하자마자 막대한 자금을 끌어왔다. 위성의 감시를 벗어난 지역에 자리 잡은 연구원들은 인간을 본뜬 그것들에게 지구의 상식과 문화, 언어를 가르쳤으며 이곳에 온 이유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섯 번째 개체를 부화시키기 직전 연구소 일부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서류가 보관된 자료실이. 극비 연구인 만큼 모든 기록을 수기로 작성했던 연구원들의 절망은 둘째 치고 당장 대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몸값을 수치화한다면 나라를 거뜬히 사들이고도 남을 두 개의 세포를 들고.

“테러야, 뭐야? 누가? 왜.”

어느새 웨인을 향해 상체를 기울인 반은 흥미를 드러내며 되물었다. 하도 허황된 이야기다 보니 영화 줄거리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생판 남 일 같았던지라 반은 범인을 추측하며 유력한 후보를 추렸다. KGB 따위를 상상하는 것이 눈에 훤한 반을 흘긋 살핀 웨인은 이제야 장난스럽게 웃으며 범인을 알려 주었다.

“말했잖아. 이미 지구에 와 있다고.”

반은 웨인의 답변을 곰곰이 해석해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희한한 가정이 나왔다.

“그러니까 네 말은… 디아 발견 전에, 뭐. 외계인 무리가 이미 와 있었다? 그래서 연구소를 폭파했다?”

“이해하네? 못 할 줄 알았는데.”

“나 그렇게 안 멍청해.”

누굴 돌덩어리로 아나. 신경질적인 눈빛을 보낸 반은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웨인에게서 얻은 정보를 정리해 보았다.

디아는 외계인이다. 나라를 사들이고도 남을 만큼 몸값이 높은 귀한 외계인. 디아의 존재 가치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미셸이 떠맡긴 의뢰에 얽힌 집단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은 예상 밖이었다. 웨인이 넘긴 정보를 곱씹어 보자 덜컥 겁이 날 정도로 위험한 요소가 산재했다. 정부에, 다른 외계인에, 폭파 작전에…. 남은 물을 쭉 들이켜 버석하게 마른 입안을 적신 반이 젖은 입술을 훔쳤다.

복잡한 정보는 차치하자. 겁먹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미 발을 깊이 담근 이상 골몰해 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외계인이고 자시고 임무를 끝마친 뒤 돈만 챙기면 그만이다.

경쾌하게 결론을 내린 반은 빈 접시를 정리하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그 누구도 아닌 웨인의 집인데 정리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웨인은 손을 닦으며 나갈 기미를 보이는 반을 훑었다. 놀라거나 고심하는 기색 따위 없었으나 그것이 그다웠다. 식사하는 동안 건조하게 마른 머리카락을 이마에 가닥가닥 떨어뜨린 남자의 인상은 첫인상과 엇비슷했다.

제법 매력적으로 생긴 남자. 적당한 근육이 붙어 보기 좋은 골격은 웨인의 기준으로는 비쩍 마른 것과 다름없었지만 묘한 인상과 잘 어우러졌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이목구비는 그의 가볍기 짝이 없는 연애관을 닮아 은근히 외설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웨인은 살짝 처진 반의 눈가를 바라보다가 평이한 투로 물었다.

“자고 갈래?”

구겨진 냅킨을 식탁에 내려 둔 반은 식기를 정리하는 웨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뭘 굳이 돌려 말하나 모르겠다.

“그냥 대놓고 말하지?”

“섹스할까?”

“그쪽은 제 취향이 아니라.”

안됐다는 듯이 웃은 반은 금세 표정을 굳히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대 없이 한번 던져 봤을 뿐인 웨인은 그를 따라 일어나 굳이, 정말 굳이 배웅을 해 주었다. 심지어는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댄 토끼까지 건네주었다.

“집에 철창이 있어?”

“있더라고.”

토끼를 새까맣게 잊고 있던 반은 반색하며 철창을 받아 들었다. 낮보다 한결 얌전해진 토끼가 코를 찡긋거리며 구석으로 물러났다. 혹시나 해서 맡긴 것인데, 웨인은 생각보다 잔재주가 많은 모양이었다. 거하게 얻어먹고, 괜찮은 정보를 얻고, 맡겼던 토끼까지 돌려받은 반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어둠이 짙게 깔린 정원으로 나왔다.

현관으로 배웅 나온 웨인이 손을 흔들었다. 철창을 추어올린 반은 놈을 가만 바라보다가 줄곧 궁금했던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런데 왜 미셸이 우리한테 그런 일을 맡긴 거지? 너는 뭔데 그렇게 많이 알고.”

저녁 식사를 수락하기 전까지 일말의 힌트도 주지 않았던 웨인은 별것을 다 묻는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반의 뒤통수를 때렸다.

“난 미셸한테 받은 게 아닌데.”

“…뭐?”

어이가 없어 돌아서자 문이 서서히 닫혔다. 좁아지는 문틈 새로 웨인의 모습이 검은 그림자에 파묻혀 갔다. 그는 한마디를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

“내 의뢰인은 미셸보다 다정하거든.”

을씨년스러운 정원에 덩그러니 남겨진 반은 놈의 마지막 마디를 되새기다가 순간 울컥했다. 그렇게 미셸과 뭔가 있는 것처럼 굴더니! 반은 본인 입으로 본인 패를 모조리 까발렸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로 현관문을 노려보다가 발을 돌렸다. 한 대 걷어차 주고 싶었지만 불쌍한 토끼가 놀라 기절하면 그만한 불상사가 없었다.

반은 부른 배와 소년의 실책을 안고 몸값 높은 외계인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향했다.

***

다음 날부터 디아는 동물을 해친 것에 대한 벌로 다친 토끼를 간호해야 했다. 영상과 활자로 토끼에 대해 학습한 소년은 성심성의껏 다친 짐승을 돌봤다. 건초와 채소를 먹이로 주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다리뼈가 제대로 붙었는지 유심히 확인했다.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디아의 사이코패스설을 지워 낸 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그날도 턱을 괸 디아는 수건이 겹겹이 깔린 철창 안에서 건초를 오물거리는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뇌었다.

동물을 해치면 반이 싫어해. 반이 다른 데 관심 주는 게 싫어. 빨리 나아서 빨리 사라졌으면.

반이 공들여 소년의 속내를 파 보았다면 본인이 원하는 바에서 시원하게 엇나간 사고 회로를 눈치챘겠지만, 불행히도 반은 전문적인 교육자가 아니었다. 하루빨리 토끼가 사라지길 바라는 디아의 뒤통수를 훔쳐보며 뿌듯해하는 허술한 베이비시터일 뿐이었다.

속이 검은 디아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마침내 다리뼈가 붙은 토끼를 숲에 풀어 주었을 때는 무려 3주가 흐른 후였다.

“똑바로 서. 등 딱 대고.”

“반이 자꾸 누르는 것 같아.”

“내가 언제? 웃긴다.”

헛웃음을 터트린 반은 디아의 정수리를 짓누르며 분홍색 색연필을 세웠다. 만세 하듯 든 팔꿈치가 디아의 뺨 부근에 자리하자 소년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결이 턱을 간지럽혔다.

반은 소년의 기다란 속눈썹을 바라보며 벽에 선을 그었다. 머리에서 손을 떨어뜨려도 얌전한 디아를 끌어당기자 타일 무늬 벽지를 가로지른 분홍색 선이 나타났다. 반은 말을 잃고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한 선을 뚫어져라 보았다.

아이가 소년이 된 날 이후로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쇄골쯤에 닿던 소년이 부쩍 자라 반의 키를 반 뼘 차이로 따라붙는 데 무리 없는 시간이었다. 머리통을 꾹꾹 눌러 최대한 압축시켰는데도 말이다. 남성 평균을 상회하는 반은 슬그머니 식은땀이 났다. 정말 제 키를 따라잡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언제 이렇게 컸지?”

“계속 계속 컸지. 나한테 관심 없어서 몰랐나 봐.”

“관심이 너무 많아서 미칠 지경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말자.”

반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라난 키만큼 뼈 있는 말을 던지는 솜씨가 늘어난 소년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뺨을 움켜쥔 채 좌우로 휙휙 돌리자 달콤한 금발이 흩날렸다.

반은 한참이나 디아를 관찰하고 자신의 예상이 완벽히 빗나갔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얼추 십 대 중반에 도달한 디아는 아기 시절의 천사 같은 미모를 조금도 잃지 않았다. 도리어 성인에 가까워질수록 섬뜩할 정도로 외모에 빛을 발했다. 반은 오묘한 빛을 띠는 눈을 들여다보다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난 네가 변할 줄 알았어.”

“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뜨는 소년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떼돈을 벌 수 있는 얼굴이다. 만약 디아가 제 아이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할리우드로 보냈을 것이다. 외모로 이름 날린 스타들과 디아를 비교해 흠을 잡아 보려고 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카메라에 대고 대사만 줄줄 읊어도 매력으로 포장해 줄 대중이 줄을 서리라.

반은 디아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상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외계인이면 외계인답게 생길 것이지 소름 돋게 예쁠 필요는 뭐람.

“아쉽다. 자신 있는데.”

“무슨 말이야?”

“몰라도 돼.”

얼굴을 놓아준 반은 책이나 마저 읽으라고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더는 가벼운 손길에는 밀려나지 않는 디아가 별안간 팔뚝을 감싸더니 피할 새 없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쪽. 쪼듯이 가뿐한 키스가 민망한 소리를 냈다. 난데없는 키스를 받은 반은 피식 웃으며 디아의 얼굴을 양손으로 다시 붙잡았다.

“어쭈. 이게 아주 지 마음대로네.”

“내 거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거지.”

입술이 툭 튀어나온 디아가 되바라진 소리를 지껄였다. 어딘지 웨인을 닮은 듯한 말투에 기가 막혀 웃자 팔을 뻗은 디아가 허리를 꼭 감싸 왔다. 얼결에 소년과 얼싸안은 반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누구 맘대로 내가 네 거야?”

“그렇게 정해졌어.”

“언제 정해졌대. 난 몰랐는데.”

“네가 나 깨웠을 때부터.”

어깨에 턱을 얹은 디아가 속삭였다. 반은 소년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손가락 발가락을 다 내놓아도 셀 수 없는 경험을 토대로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반은 디아를 밀어 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나 너무 좋아하지 마라.”

“왜?”

“네가 상처받는 거 보기 싫다, 나는.”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거실로 걸음을 틀었다. 뒤를 흘긋 돌아보자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소년이 보였다.

“표정 왜 그러냐?”

“나 사랑한다고 했잖아.”

“사랑하지.”

책이 굴러다니는 소파에 널브러진 반은 테이블에 다리를 얹으며 그게 뭐 별거냐는 투로 중얼거렸다.

“너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고, 이거도 사랑해.”

엊그제 마트에서 사 온 초코 칩 과자 통을 발로 건드렸다. 제 위치가 초코 칩과 동급이라는 망발을 들은 디아의 낯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저런 식으로 굴면 더 놀리고 싶은 사람 마음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반은 피식피식 웃으며 소년의 동심을 긁어내렸다.

“더 말해 줘? 내가 사랑하는 거.”

반은 여차하면 좋아하는 색깔과 브랜드까지 꺼낼 요량으로 디아의 반응을 기다렸다. 멀리서 보니 성장한 것이 두드러지는 소년이 소리 없이 달싹이던 입술을 뗐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으면서.”

확신하는 듯한 내용과 달리 늘 잔잔한 미소가 감돌던 입술은 일자를 그리고 있었다. 발끝으로 쿠키 통을 툭툭 건드리던 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적지근하게 긍정했다.

“그래? 그럼 그런가 보지 뭐.”

이런 반응이 더욱 불을 지필 걸 알고서 실없이 웃던 반은 방심한 사이에 뒤로 홀라당 넘어갔다. 불시에 반의 허벅지를 타고 오른 디아가 휘젓는 그의 양손을 움켜쥐었다. 당황해서 발버둥 치다가 웃음을 터트린 반은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소년을 간신히 막아 냈다. 디아는 덩달아 장난스럽게 웃으며 반을 뒤흔들었다.

“야, 야!”

“나만 사랑한다고 말해, 빨리.”

“아, 좀…. 디아!”

“나 말고 다른 건 필요 없다고 해.”

붙잡은 손목을 마구 흔드는 소년 때문에 상체가 흔들렸다. 싫어! 웃음이 밴 고함을 지르며 몸을 뒤집으려던 반의 얼굴이 언뜻 굳었다.

분명 적당히 힘을 줬는데 소년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목을 뒤틀어도, 상체를 세우려고 해도 바위산에 깔린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물론 제대로 겨룬다면 어렵지 않게 벗어나겠으나 당혹스러움이 컸다.

한 팔로도 수월히 들어 올리던 아이에게서 놀라운 면모를 발견한 반이 어색하게 웃었다. 힘이 언제 이렇게 세졌나, 싶을 즈음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은 디아가 상체를 숙였다.

“빨리 말해. 이제 정숙하게 살겠다고.”

“…너 그런 말은 어디서, 아! 아야, 잠깐만. 나 등. 등.”

소년의 무게가 실리면서 책 모서리가 척추를 찔렀다. 반은 괴상망측한 단어 선택을 지적할 새도 없이 허리를 띄웠다. 그러자 손목을 부여잡았던 손이 떨어져 나가더니 소파와 등 틈으로 밀려들었다.

반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은 디아가 아래 깔린 책을 손등으로 쳐 바닥에 떨어뜨렸다. 한참을 웃은 데다가 발버둥을 친 탓에 숨이 가빴던 반은 작게 헐떡이며 디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대답은?”

고개를 비튼 디아가 이마를 맞대 왔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생긴 소년의 몸뚱이에서 뜨거운 열기가 끼쳤다. 삐뚜름하게 웃은 반은 한숨을 내쉬며 디아의 품을 벗어났다. 허전한 품을 쓸어내리면서 가죽 소파에 머리를 기댄 디아가 집요한 시선을 던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나는 네가 하기 나름이지.”

“그렇게 빠져나가지 마.”

“빠져나가기는. 난 항상 진심이야.”

반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한 디아의 뺨을 꼬집고 계단으로 향했다. 소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도착한 반은 애꿎은 목덜미를 긁으며 찜찜한 마음을 달랬다. 한순간 위기감이 들었는데 어디서 비롯된 감정인지 모호했다.

골똘히 생각하던 반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추측이 지저분한 상상으로 뻗어 간 탓이었다. 도리질 치며 추잡한 상념을 물리친 반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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