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웨인은 매번 서적 더미를 안고 방문했다. 디아가 그동안 해치운 책이 한 트럭은 되는 듯싶은데 읽을 책이 더 있는 것도 신기했고, 어디서 책을 공수해 오는 건지도 신기했다. 현관에 기대어 선 반은 짜증이 밴 눈으로 웨인을 응시하다가 책을 받아 들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 웨인이 문틈 새에 발을 끼우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이 시간에 찾아와 놓고 또 뭐.”
반이 이토록 신경질적인 까닭은 방문 시간과 그의 태도에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문을 두드린 것은 그렇다고 쳐도, 제 침대로 기어드는 디아를 미셸의 방에 데려다 놓고 안간힘을 써서 재운 후 드디어 눈을 붙이려던 때에 찾아온 것은 용납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놈은 여태 질문에 명확히 대답하지 않았다. 익명의 의뢰인에 대해 아무리 떠보아도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갔다. 너와 뜻은 같다는 말만 반복했고, 수상하되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으니 반도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다. 이번에도 쓸데없는 목적이라면 발이 부서지든 말든 문을 닫을 기세로 묻는 반에게 웨인은 반대쪽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마실까?”
반의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차갑게 식힌 덕에 캔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맥주 번들을 발견하자마자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미리 말을 했어야지.”
무뚝뚝한 태도는 어디로 가고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반을 곁눈질로 훑은 웨인이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반은 맥주만 내놓고 가라고 했다가는 한 방울도 줄 것 같지 않은 남자의 등을 노려보다가 문을 닫았다. 자제해서 마시면 그만이었다.
두 사람은 거실에 자리 잡고 술판을 벌였다. 술판이라고 하기에는 짭짤한 과자를 하나 내놓고 맥주 캔을 깐 것에 불과했지만 반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톡톡 쏘는 탄산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입에 대지도 못했던 술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그거는 어때?”
“디아? 많이 컸지. 저거 봐.”
반은 맥주를 홀짝이며 벽을 향해 고갯짓했다. 벽지에 표시된 디아의 키를 확인한 웨인은 빠르네, 하고 심드렁한 감상을 내뱉었다.
“아까 보니까 키만 큰 게 아니더라. 어깨도 넓어지고 손도 커지고. 아, 근데 진짜 예쁘다? 넌 그렇게 예쁜 사람 본 적 있냐? 난 없어. 쟤는 외계인만 아니었어도 떼돈 벌 상이야. 내일 자세히 봐 봐.”
디아가 주제로 나오자 반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끌어내 조잘거렸다. 디아가 얼마나 예쁜지, 순한지, 똑똑한지, 가끔 아기같이 굴 때도 있지만 어쨌든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고 영리하다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술이 들어간 탓에 헤실거리며 공감을 구하는 반의 곁에서 묵묵히 맥주를 마시던 웨인은 고개를 돌리고 비웃음을 흘렸다.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그러다가 끼고 살겠다?”
“그야 당연히.”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인 반은 아차 하며 공연히 과자를 집어 먹었다.
“…끼고 살 순 없지.”
“알면 너무 정붙이지 마.”
“정이 붙는 걸 어떡하라고.”
장난스럽게 툴툴거렸지만, 지금처럼 끝을 짚어 주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씁쓸해졌다. 이제 대여섯 달 남았으려나. 시간이 참 야속했다. 한 모금 남은 맥주를 털어 넣고 새 캔을 땄다.
구겨진 캔 여섯 개가 굴러다니는 테이블 위에는 세 캔이 남아 있었다. 그새 많이도 마셨다 생각하며 취기가 오른 눈을 깜박인 반은 알코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나한테는 안 붙고?”
탄산이 강한 맥주를 삼키면서 눈가를 찡그린 반이 곁을 돌아봤다. 몽롱한 시야에 시커먼 사내가 보였다. 캔 입구에 입술을 붙인 반은 남자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취향에 부합하는 부분이라고는 연상이라는 점밖에 없는 웨인이 어두운 갈색빛 눈으로 지그시 시선을 맞추었다.
반은 바람 빠지듯 웃었다. 뭐, 구식 핸드폰을 흔들며 대뜸 찾아왔을 때와 비교하자면 경계심이 많이 흐려지긴 했다. 작았던 디아를 물건처럼 잡아끌던 모습을 떠올리면 여전히 열받지만 그 후로 웨인이 디아와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특별히 교류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또 특별히 사이가 나쁜 것 같지도 않아서 트집 잡을 구실도 없고.
딱 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생각보다 거슬리지 않는 정도.
“미안. 잘 안 붙는다.”
씩 웃으며 대답하자마자 멱살이 잡혔다. 상체가 앞으로 휘청였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반은 코앞으로 다가온 웨인의 눈동자를 인지한 순간 입술이 뒤덮이는 것을 느꼈다.
벌어진 입술 새로 물컹한 것이 침범했다. 코가 짓뭉개질 정도로 세게 입술을 맞부딪친 웨인이 눈을 또렷이 쳐다보며 고개를 틀었다. 맥주로 인해 차갑게 식은 살덩이가 입 안을 훑고 반의 혀를 얽었다. 반이 더듬거리며 테이블에 맥주 캔을 내려놓자마자 멱살을 쥔 손이 뒷덜미로 향했다. 가슴을 미는 반의 목을 강하게 감싸 쥔 웨인이 허벅지를 감아 당겼다.
“…읏!”
입술이 달라붙은 채로 가벼운 몸싸움이 일었다. 기어이 반의 다리를 끌어당겨 소파에 눕히는 데 성공한 웨인은 밀어 내는 혀를 감아올려 접합을 더욱 깊이 했다. 코가 웨인의 뺨에 눌리면서 놈의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느릿하게 돌려 가며 잡아먹을 듯이 입 맞추는 웨인을 밀어내던 반이 반쯤 뜬 눈을 찌푸렸다.
“하아….”
약간의 틈이 생기자 숨결을 내뱉은 반은 곧장 입술을 붙이려는 웨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먼저 고개를 틀었다. 술에 전 혀로 치열과 잇몸을 훑고 입천장까지 건드리자 목덜미를 틀어쥔 손이 탁 풀렸다. 웨인의 무릎이 다리 사이로 밀려들면서 낡은 소파가 삐거덕거렸다.
반은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스웨터 안으로 들어오는 손을 내버려 둔 채 입맞춤에만 몰두했다. 거칠기만 했던 웨인의 혀가 부드러운 움직임을 쫓아오기 시작할 즈음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며 입술을 떼어 냈다. 물기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서로의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반은 눈빛이 흐려진 웨인의 뺨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며 속삭였다.
“그 나이 먹고 뭐 했냐? 솜씨가 영 별로야.”
“…야.”
“왜 이 새끼야.”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로 비아냥거리자 웨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손 치워라. 경고하며 웨인을 밀치고 일어나려던 반은 팔꿈치를 세우기도 전에 소파에 도로 처박혔다. 몸을 타고 오른 웨인이 턱 끝에 입을 맞추며 치우라는 손을 오히려 더 집어넣었다.
“술까지 마셨는데 여기서 끝내면 아쉽잖아.”
“맞네. 술 아니면 자신 없는 거.”
“그건 해 보면 알겠지. 애 키우느라 손도 못 댔을 거 아냐.”
“그거야 알아서 잘 처리했지. 그렇게 심심하면 다른 놈이나 찾아보든가.”
“여기는 괜찮은 사람이 딱히 없어서.”
입씨름하는 틈틈이 입술이 맞붙었다. 반은 구태여 웨인을 밀어 내지 않았다. 솜씨를 비웃기는 했으나 웨인은 키스를 못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와 닿는 타인의 체온과 살결이 싫지 않기도 했고, 눈을 감으면 몸을 겹쳐 오는 사람이 웨인이라는 것을 모른 체할 수 있으니 오늘 하루만 넘어가 볼까 잠시 고민하던 찰나였다.
보수를 하지 않은 목조 건물은 복도를 걸을 때마다 미약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지금, 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알코올에 뭉개진 이성이 눈을 뜨는 것보다 발걸음이 계단참에 닿는 것이 순간의 차이로 앞섰다. 웨인과 뒤엉킨 채 놈의 입술을 빨던 반이 슬며시 눈을 떴을 때, 발소리의 주인이 계단을 디뎠다.
반은 눈을 껌벅이며 저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1차로 경악했다. 냅다 웨인을 떠밀고 상체를 세웠다. 가슴 위로 올라갔던 스웨터가 천천히 떨어져 살결을 가리자 2차로 당황했다. 마지막으로 그림자에 파묻힌 소년을 바라보며 어버버, 했다.
“어, 왜 안 자고….”
“…둘이 뭐 해?”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평소보다 가라앉은 그것이 귓속으로 들어오자 술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이에게 야릇한 장면을 들킨 부모의 마음이 이러할까.
발갛게 부푼 입술을 질끈 깨문 반은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웨인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때렸다. 눈치가 있으면 썩 꺼지라는 뜻을 못 알아먹을 놈이 아닌데도 웨인은 언제 푼 건지 모를 바지 버클을 더디게 채우기나 했다.
그 꼴을 본 디아가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온 것은 반이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손에 들린 책으로 웨인의 낯짝을 후려치는 건 더더욱이나 예상 못 했다.
“아….”
무덤덤하게 신음하는 웨인의 목을 한 손으로 틀어쥔 디아의 시선이 찢어진 입술에 닿았다. 붉은 핏방울이 맺힌 입술은 반의 것처럼 살짝 부어올라 있었다. 웨인은 제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디아의 낯을 무심하게 들여다볼 뿐이었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이 바라보는 눈이 소년의 심기를 건드렸다.
인형 같은 무표정에 금이 간 소년은 모서리가 보이도록 고쳐 쥔 책을 치켜들었다. 입술에서 눈으로 방향을 바꾼 디아가 책을 휘두를 때, 황급히 끼어든 손아귀가 손목을 붙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소년의 눈동자에 얼이 반쯤 빠진 반이 비쳤다.
“…디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디아의 폭력적인 모습을 두 번째로 목격한 반은 뻣뻣하게 굳은 입술을 달싹였다. 혼을 내든가 타이르든가, 왜 이러냐고 묻기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애 키우는 솜씨가 영 별로네.”
피가 번진 입술을 핥은 웨인이 모욕을 돌려주었다. 그때야 불청객을 확인할 정신이 든 반은 원흉의 멱살을 낚아챘다.
“일어나, 빨리.”
화를 억누르고 소곤대자 웨인이 빈정거리듯 웃었다. 반은 조금 전까지 과거를 덮어 둔 채 물고 빨던 남자를 질질 끌고 가 현관 밖으로 던졌다. 내던진 외투를 아슬아슬하게 받아 든 웨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날 내쫓아? 저게 아니라?”
그럼 집이 있는 웨인을 내쫓지, 갈 곳 없는 디아를 내쫓을까. 잠시나마 술기운에 넘어가 저런 놈과 또다시 비비적거린 자신이 한심해졌다. 입술을 비튼 반은 현관문을 닫다 말고 고개만 내밀었다. 돌아서 가려다가 눈길을 주는 남자에게 뻔뻔한 낯을 보여 주었다.
“미안. 또 실수했다.”
“…클라크.”
웨인이 더 질척거리기 전에 문을 닫은 반은 넘어야 할 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거실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디아는 웨인과 뒹굴었던 소파 앞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무기로 썼던 책을 움켜쥔 채로 쿠션을 응시하는 소년의 등은 감도는 분위기 탓인지 오늘 아침보다 단단하고 너르게 보였다. 삽시간에 퍼석해진 얼굴을 쓸어내린 반은 머릿속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로 소년을 불렀다.
“디아.”
상념에 빠졌던 것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디아가 곁을 돌아보았다. 적당한 길이로 잘라 주었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어깨에 닿을 정도로 자랐다. 자연스럽게 컬이 잡혀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응시하던 반은 책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내려놔.”
“…왜?”
귀엽게만 들리던 말대답이 속을 긁었다. 토끼 다리를 부러뜨린 것은 몰라서 한 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번 일은 아니다. 아이의 앞에서 웨인과 주먹다짐하는 꼴을 보여 주기는 했으나 멋대로 나가는 손버릇을 배우길 바라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디아가 어떻게 자랄지 모르는 마당에.
반은 엄격한 교육자처럼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에 잔뜩 쌓인 찌그러진 맥주 캔이 민망했지만 이미 가리킨 이상 별도리가 없었다.
“안 내려놔?”
디아는 반의 냉랭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금빛 속눈썹에 둘러싸인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한 번 더 독촉하고 나서야 소년은 책을 떨어뜨렸다. 카펫이 깔린 바닥에다가.
“…와. 성질도 내시고.”
헛웃음이 터졌다. 태어난 이래 어리광은 부렸어도 성질은 부린 적 없는 아이가 처음 보이는 반항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반은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이 팔짱을 끼었다. 몇 마디 충고하고 살살 달래 주려던 마음이 종적을 감추고, 아주 혼쭐을 내 주겠다는 다짐을 할 때였다.
“…둘이 뭐 하려고 했어?”
고개를 푹 숙인 디아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언뜻 괴상하게 들리는 물음에, 하고자 했던 훈계를 잊은 반이 삐딱하게 반문했다.
“하긴 뭘 해?”
“나 재워 두고 뭐 하려고 했는데?”
따지자면 영 괴상한 물음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디아의 태도에 있었다. 마치 연인의 바람 현장을 목격한 것 같은 작태가 어처구니없었다. 어쩐지 거북해져 눈살을 구긴 반은 본의 아니게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뭘 하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탁 떠오르는 생각을 거름망 없이 내뱉고 나서야 실수했다 싶었다. 어린애를 상대로 지나치게 공격적인 말투였다. 더군다나 있는 애정, 없는 애정 모조리 긁어다가 제게 바치길 바라는 디아에게는 특히나. 반은 헛소리를 지껄인 입술을 꾹 깨물고 슬쩍 눈치를 살폈다. 예감은 적중했다.
어느새 고개를 쳐든 디아의 눈은 커다랗게 뜨인 상태였다. 충격을 머금은 눈동자 속에 원망과 배신감, 서러움이 회오리쳤다. 왜 상관이 없느냐고 묻는 눈이었다.
반은 곤혹스러웠다. 따끔하게 혼내야 할 타이밍에 괜한 말실수를 해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나 막막한 고민에 빠질 때쯤 석상처럼 굳어 있던 디아가 떨어뜨린 책을 넘어 다가왔다. 반은 무심결에 뒤로 물러서려던 다리를 제자리에 고정했다.
이윽고 한 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소년은 새하얀 손을 들어 반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느슨한 팔짱이 빗장 열린 마음처럼 풀렸다. 반은 제 양 손목을 감싸 쥐는 손아귀를 흘끔, 소년의 일그러진 미간을 흘끔 훑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디아는 하고픈 말을 고르는지 불그스름한 입술을 느리게 달싹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나랑 해.”
“…뭐?”
반은 소년의 입술 새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를 어렵지 않게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되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걔랑 그러지 말고 나랑 해. 내가 더 기분 좋게 해 줄게.”
디아의 입에서 기함할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턱이 뚝 떨어진 반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를 배은망덕한 말을 지껄이는 소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주절거렸다.
“야…. 너, 갑자기 뭐라는 거야?”
순간 디아가 책으로 후려친 것이 웨인의 머리통이 아니라 제 머리통인가 싶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싶었으나 손목을 내어 준 바람에 허어, 하고 헛숨만 내쉬었다. 웃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못하자 한 발자국 더 다가온 디아가 반의 발 사이에 제 발을 끼우고 바싹 붙었다. 반은 막막한 심정으로 결의에 찬 소년을 응시했다.
“내가 해 줄게.”
대답하지 않자 어리광보다는 막무가내에 가까운 독촉이 이어졌다.
“앞으로도 계속. 네가 죽을 때까지. 응?”
반은 되바라진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디아의 아름다운 낯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기꺼운 일이다. 그러나 그 상대가 자신이 업어 키운 놈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연실색한 반은 잠시나마 제 귀가 잘못돼서 말귀를 잘못 알아들었길 바랐으나 손목을 꽉 움켜쥔 손 하며 어느새 꼭 붙은 몸을 보자면 잘못된 것은 제 귀가 아니라 디아였다.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된 디아와 눈을 맞춘 반은 잡힌 손목을 가볍게 흔들며 애써 자애롭게 웃었다.
“디아. 네가 지금 뭘 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랑만 너무 붙어 있으니까 당연히 의지하고 뭐, 그럴 수도 있어. 그런데….”
“뭘 착각해?”
“네가. 감정을.”
반은 확신할 수 있었다. 따지자면 디아는 한평생 자신만 보고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애착이 로맨스 영화와 유튜브의 악영향을 받아 이상한 방향으로 튄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정말 정말 정말 이래서는 안 됐다.
“그러니까 우리 얘기부터 하자. 대화. 괜찮지?”
살살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는 감미로웠고,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힘이 풀린 눈꼬리는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디아의 표정은 사탕발림이 길어질수록 서늘하게 굳어 갔다. 명백한 애 취급이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반의 미끈한 이마가 슬며시 구겨졌을 때, 디아는 분과 고집이 밴 목소리로 확언했다.
“착각 아니야.”
인간이 아닌 것의 인간 같은 숨결이 입술을 스쳤다. 반은 부은 입술에 스치는 숨결에 두 눈을 부릅떴다. 피할 새도 없이 뒤꿈치를 들어 올린 디아가 방심한 반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꼭 감은 눈을 스르르 뜬 디아는 황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속눈썹이 가닥가닥 보이는 거리에서 까칠하지만 부드러운 살점에 입술을 비비자 화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새어 나왔다.
“진짜… 혼난다, 디아.”
비틀어 빼낸 손목이 얼얼했다. 간발의 차로 얼굴 틈에 끼워 넣은 반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디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순진한 건지, 혹은 아예 영악한 건지 재단할 수 없는 눈빛이 곱게 넘어가려던 다짐을 쿡쿡 들쑤셨다.
“떨어져. 당장.”
반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어르고 달랠 때와 달리 낮게 깔린 목소리에 서늘함이 감돌았다. 그러나 디아는 시선도, 뜨거운 열기를 품은 입술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대치는 길어졌다. 반의 손바닥 깊숙이 얼굴을 파묻은 디아가 기어이 까슬한 살결에 이를 세웠을 때, 서릿발처럼 차가운 한마디가 떨어졌다.
“작작 하라고 했다.”
반 클라크는 웃음 많고 장난 많고 사랑도 많은 남자였다. 애정을 씨 뿌리듯 뿌리고 다녔다. 흠이 있다면 다소 가볍다는 점이었지만 끔찍하게 다정한 면이 있어 그것마저 매력으로 비치고는 했다.
진심으로 화내는 일도 드물었다. 화가 날 일이 딱히 없기도 했거니와 한번 성질을 냈다고 해도 다음 날이면 사르르 풀려서 넌지시 말을 붙이는 것이 다반사였다. 예외라고는 붉은 벽돌 집의 웨인뿐이었다.
말을 짓궂게 할 뿐이지 대체로 모든 사람에게 관대한 반이 화를 냈다. 그것도 반의 다정에 길들여진 디아에게.
생전 처음으로 반에게서 얼음장 같은 냉대를 받은 디아는 우뚝 굳었다. 눈꺼풀도 움직이지 않았다. 짧은 숨 한 번 쉬지 않던 소년은 입김으로 젖은 입술을 천천히 물렸다.
반의 손목에서 툭 떨어져 맥없이 늘어진 새하얀 손끝이 움칠움칠 떨렸다. 이런 상황은 조금도 예상 못 한 눈치였다. 이내 주먹을 꽉 쥔 소년은 마치 배신당한 사람처럼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다가 눈을 돌렸다. 육중한 정적이 고인 바닥을 노려보던 디아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남기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너저분한 거실에 홀로 남은 반은 입술 감촉이 고스란히 밴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적막해진 사위가 머릿속과 비슷했다. 아직도 소년의 손이 들러붙은 것 같은 손목을 매만진 반은 걸음을 옮겨 떨어진 책을 주워 들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책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고 테이블을 치웠다. 남은 맥주를 냉장고에 넣자마자 욕실로 들어갔다.
열정적으로 양치하고 머리털이 죄다 뽑힐 정도로 빡빡 샴푸질했다. 디아의 숨결이 남은 손바닥을 비누로 뽀득뽀득하게 닦고 나자 차갑게 식은 머릿속이 정상적인 온도를 되찾았다. 골반에 수건을 두른 채로 커버 내린 변기 위에 주저앉은 반은 다리를 발발 떨었다.
“하아….”
샤워로 화를 삭이고 되돌아보니 너무 과한 대처가 아니었나 싶었다. 찰나에 판단한 대로, 디아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어울린 적 없었다. 웨인이 있다고는 하지만 둘은 만나도 대화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휙 스쳐 지나갔으니 보편적인 인간관계를 맺었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럼 다양한 경험을 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디아가 가 본 곳은 인적 없는 숲속 호숫가가 전부였다. 놀이공원, 소풍, 페스티벌, 오지, 심지어 마트조차도 가 보지 못했다. 디아에게는 자신밖에 없었다. 반 클라크, 자신밖에는.
“아 씨….”
넓지도 않은 집에 갇혀 랩톱과 책만 들여다보는 소년이 한 번 실수했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못되게 반응할 필요는 결단코 없었다. 물론 디아가 잘못을, 그것도 어마어마한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어른답지 못한 대처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충격에 잠긴 디아의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젖은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반은 오랜 고민 끝에 욕실을 빠져나갔다.
‘내가 해도 되는 게 뭐야?’
디아가 게워 내듯이 남긴 연약한 한마디가 시종일관 귓속을 맴돌았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옷을 꺼내 입은 반은 좁은 방을 서성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복도를 내다보았다. 미셸의 방 문이 닫혀 있었다. 방을 내어 준 보람도 없이 시시때때로 남의 방에 쳐들어오곤 하던 디아가 조용했다. 제발 혼자 좀 있자고 짜증 내는 것이 일과였던 반은 이유 모를 허전함을 느끼며 복도로 나왔다.
머뭇거리다가 문을 두드렸다. 자? 물어도 답이 없다. 재차 노크하며 들어간다는 언질을 준 반은 열린 문 너머로 고개만 빼꼼 들이밀었다. 램프 하나가 힘겹게 비추는 방은 침대 부근만 희미하게 밝았다. 사람이 빠져나온 모양 그대로 헤집어진 이부자리는 예상과 달리 텅 빈 채였다.
“…디아?”
의아해진 반은 조용한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두꺼운 이불을 들춰 보고 침대 밑도 확인했지만 디아는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반은 방에 딸린 작은 욕실로 향했다. 궁상맞게 왜 욕실에 틀어박히나 몰라.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때 반을 맞이한 것은 텅텅 빈 공간이었다. 눈만 끔벅이던 반은 이내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순간 내려앉은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황급히 옷장을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화사한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창을 확인해 보았으나 굳게 잠긴 채였다. 디아가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한 반은 다급하게 방을 빠져나오며 소년을 불렀다.
“디아!”
작은 목소리로 불러도 귀신같이 쪼르르 달려오던 소년은 묵묵부답이었다. 잇새로 욕설이 삐죽 튀어나왔다. 2층에 자리한 방문을 모조리 열어젖히고 빛이 닿지 않는 구석까지 확인한 반은 겉옷을 챙길 정신도 없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이 야밤에 대체 어딜… 아니, 갈 곳이 있기나 한가. 걱정과 불안이 뇌리를 바싹바싹 태웠다.
망설임 없이 현관으로 내달리던 반은 코너를 꺾기 전에 가까스로 멈춰 섰다. 고개가 홱 돌아갔다. 시야 끝에 지하실 입구를 내보인 장식장이 걸렸다. 분명히 닫아 두었던 곳이다. 이내 상황을 파악한 반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지하를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도망치듯 사라졌던 디아는 유리 벽 안에 입구를 등진 채로 앉아 있었다. 인형과 장난감을 정리한 탓에 새파란 빛이 내리쬐는 유리 벽 안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벽시계뿐이었다.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몰라서 선택한 장소가 여기라니. 휑하고 차가운 공간에 덩그러니 앉은 소년의 뒷모습이 유달리 외로워 보였다.
사다리를 밟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디아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정작 잘못한 게 누군지 모르겠다. 마음속으로 잔뜩 한탄하며 유리 벽 안으로 기어들어 간 반은 애정이 뚝뚝 묻어나지만 어딘지 가벼운 애칭으로 소년을 불렀다.
“이쁜아.”
자기 예쁜 것은 잘 알아서 ‘이쁜아’ 하고 부르면 즉각 쳐다보던 디아는 단단히 토라졌는지 미동도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어릴 적과 똑같았다. 겸연쩍어진 반은 엉덩이를 밀어 디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느덧 골격이 눈에 띄게 자란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고 얼굴을 들여다본 반은 깜짝 놀라 말을 잃었다. 반은 말랑한 감촉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년의 어깨를 살살 매만지다가 제게로 돌렸다.
“왜 울고 그러냐….”
그때야 바닥에 처박힌 시선을 들어 올린 디아가 눈을 맞췄다. 날개처럼 길게 돋은 속눈썹 끝에 방울방울 매달린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얼마나 울었는지 흥건한 눈가를 엄지로 닦아 주어도 금세 차오른 눈물이 발그레한 뺨을 함빡 적셨다.
입 안이 버석하게 말랐다. 그러잖아도 눈물에 약한 반은 아기 때도 울지 않던 디아의 소리 없는 울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안절부절못하며 소매로 젖은 얼굴을 닦아 주는 새, 꾹 다물린 입술이 슬쩍 열렸다.
“우리 그냥 여기서 우리 둘만 살면 안 돼? 여기서 살자…. 예전처럼, 응?”
울음기가 흠뻑 스민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반이 걔랑 노는 거 싫어. 얘기하는 것도 싫고 다 싫어. 나 얌전히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둘이서 여기 있자….”
생떼를 부리는 디아는 비로소 제 나이로 보였다. 반이 떠날까 봐 스웨터 자락을 꼭 쥔 손이 애달팠다. 눈물샘이 고장 난 듯 터져 나오는 눈물을 훔치다 훔치다 결국 포기한 반은 양팔을 넓게 벌렸다.
“이리 와.”
디아는 망설임 없이 폭삭 안겨 들었다. 제법 단단하고 길어진 팔로 허리를 끌어안은 디아는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훌쩍 울었다. 뭐가 그리 서러울까. 아무리 몸이 자랐다고 해도 반에게 디아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반은 안쓰럽게도 우는 소년의 등을 쓸어 주며 진정되길 기다렸다. 그러나 디아가 원하는 것은 진정이 아닌 모양이었다.
“왜 나는 안 되는데?”
“아직도 그 얘기야?”
울먹울먹하며 묻는 것이, 어지간히도 포기를 못 한다 싶어 픽 웃음이 났다. 애착을 가질 만한 사람이 하나뿐이라 네가 혼란스러운 거다, 하며 설득하자니 조금도 들어먹을 것 같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그거야 넌 아직 어리고, 난 어른이니까.”
이렇게 진부한 얘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사람이 아닌 존재에게 말이다. 우리 나이 차가 얼만지 아느냐며 나름대로 논리적인 변명을 늘어놓던 반은 한층 커진 흐느낌에 당황했다.
“아니, 그…. 내가 아예 안 된다는 게 아니잖아. 어? 크고 오라는 거야. 다 크고.”
세상 서러운 울음이 뚝 멎었다. 가슴팍에 처박은 고개를 빼꼼 쳐든 디아가 젖은 두 눈을 분주히 깜박였다.
“…진짜?”
선이 날렵한 얼굴에 덧씌워졌던 설움이 기대감으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한 반은 내심 감탄했다. 똑똑한 건 진작 알았지만, 눈물을 무기로 쓰는 법까지 배웠을 줄이야. 이때만을 기다린 듯 묻는 아이의 태도가 어이없었지만 여기서 트집을 잡았다가는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울 것 같았다. 빈말을 던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진짜. 다 크고 오세요. 예?”
분홍빛으로 물든 코끝을 톡 건드리자 반사적으로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뜬 디아가 허리를 감은 팔을 풀었다. 다가온 하얀 손이 양 뺨을 감쌌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은 타인보다 뜨거웠다. 불그스름하게 충혈된 눈으로 시선을 맞춘 디아는 조곤조곤하지만 은근히 위압적인 어조로 납득하기 어려운 조건을 달았다.
“그럼 내가 다 클 때까지 아무하고도 만나지 마. 손잡는 거도, 키스도 다 금지야.”
“그건 너무 어려운….”
뺨을 감싼 손이 힘을 머금었다. 볼이 눌린 반은 삐죽 튀어나온 입술로 웅얼거렸다.
“알았어….”
“약속해.”
“네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협박에 버금가는 요구에 응하자 보드라운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래로 뚝 떨어졌던 입꼬리를 아주 살짝 끌어 올린 디아가 도로 품에 안겨 들었다. 어째 얻은 것은 없고 휘둘리기만 한 것 같아 입이 썼다.
어린 날의 치기가 참 대단하기는 하구나, 하며 무심결에 손을 뻗은 반은 탐스럽게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다가 검지에 걸고 돌돌 돌렸다. 이제껏 만지고 쓰다듬은 모든 머리카락 중 가장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감돌았다. 엄지와 검지로 잡은 머리카락을 살짝씩 비벼 보곤 소년을 일으켰다.
“올라가자. 여기 추워서 싫어.”
디아가 사라진 줄 알고 한바탕 헤집은 탓에 방은 평소와 달리 어수선했다. 치울 여력은 없었다. 이불을 들치고 눈짓하자 떨어지기 싫은지 우물쭈물하던 디아가 매트리스에 무릎을 디뎠다.
반은 훌쩍 들어 냅다 던지기에는 상당히 무거워진 소년을 이불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그의 곁을 파고들었다. 저만 두고 떠나는 줄 알고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디아가 조급한 동작으로 반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소년에게 안긴 반은 생각보다 포근하고 너른 품에 언뜻 놀랐다가 얌전히 몸을 맡겼다. 포옹 정도야 뭐.
“오늘만 같이 자. 화해 기념으로.”
꿈지럭거리며 간신히 팔 하나를 꺼내서 램프를 껐다. 희미한 빛마저 사라지며 고요한 밤이 전신을 에워쌌다. 어둡고 따뜻한 품에 갇히자 생각이 많아졌다.
<육아 대백과>를 건성으로 뒤적일 때 비슷한 케이스를 본 것도 같았다. 뭐라고 하더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아빠에게 집착했는지, 엄마에게 집착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자신은 디아의 아빠가 아니고, 아예 아니라고 하기에는 디아의 입장에서 보면 아빠라고 생각할 만도 하고…. 하여튼 복잡했다.
딱히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살아온 타입이 아니었던 반은 복잡한 문제를 저 멀리 미뤄 두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디아가 순순히 그걸 도와주지 않았다. 이마 부근에 조심스럽지만 소극적이지는 않은 목소리가 닿았다.
“반.”
“왜.”
“사랑해.”
망할 놈의 로맨스. 반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디아의 등을 건성건성 두드렸다.
“오냐.”
아까부터 사랑 사랑 노래를 부르는데,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 싶었다. 얼른 자라고 등을 쓰다듬어 주자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디아가 이마에 입술을 비볐다.
“나는 반이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수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년의 목소리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어느새 부쩍 넓어진 품처럼 어느샌가 낮아진 미성이 고막에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반은 타인에게 들었다면 내심 설렐 법한 소리가 불러일으킨 묘한 분위기를 환기했다. 이럴 때는 장난으로 넘기는 게 상책이었다. 키득키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빨리 커라. 기대가 크다.”
또 나 다 컸는데, 하면서 억지를 부릴까 봐 소년의 머리통을 휙 끌어와 품에 안았다. 할 말이 있는 듯 뒤척거리던 디아는 이내 편안하게 늘어졌다.
결국 훈계도 못 해, 사과도 못 받아, 어물쩍 넘어가는 법만 가르쳐 준 반은 피곤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감았다. 디아가 아니라 모르는 소년을 안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
20xx. 3. 15. 이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키부터 잰다. 보고 있으면 아주 웃긴다. 키만 큰다고 다 큰 게 아닐 텐데. 혼자 자는 버릇이나 좀 들였으면 좋겠다.
***
20xx. 3. 27. 오늘은 캐치볼을 했다. 그 새끼가 정원도 나가면 안 된다고 해서 집 안에서 했다. 솔직히 정원 정도는 괜찮지 않나? 집안 살림 깨 먹은 것들은 그 새끼가 보상해야 한다. 아무튼 디아는 운동 신경도 꽤 괜찮은 것 같다. 얼마나 힘이 센지 창문을 깨뜨렸다니까…. 팔씨름 한번 해 보고 싶은데 질까 봐 하자고 못 하겠다. 어른의 권위는 중요하니까.
***
20xx. 4. 3. 요즘 하루는 디아로 시작해 디아로 끝난다. 몇 달 동안 그러기는 했지만. 디아를 키우기 전 일이 기억이 잘 안 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설마 이게 아이 키우는 재미인가. 무섭네….
***
20xx. 4. 18. 격투기를 가르쳐 줬다. 이런 거 가르쳐 주면 안 되나?
***
어떤 것에 유달리 익숙해지면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어느샌가 닳은 액자 모서리나 웃을 때 생기는 눈가의 주름 같은 것들. 남모르게 진행된 변화는 익숙함 속에 숨어 있다가 돌연 눈에 띄어 마음을 어지럽히고는 한다. 마치 지금처럼.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 반은 기지개를 켜다 말고 우뚝 굳었다. 언제나처럼 베개를 베고 잠든 디아를 눈에 담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 새끼는 뭐야?’였다. 다음으로 든 생각은 이것이다.
모르는 척하자.
필사적으로 소년의 모습을 무시한 반은 살금살금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두꺼운 이불을 집게손가락으로 잡아 조심스럽게 내려 두고 뒷걸음질로 침실을 빠져나온 후 발소리를 죽일 여유도 없이 쿵쾅거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소파에 주저앉은 반은 쿠션을 끌어안아 심란한 마음을 감췄다. 넋 놓고 기다린 지 한 시간쯤 되었을까.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2층 난간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낡은 계단이 삐거덕거리는 소음을 터트렸다. 반은 아랫입술을 질근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디아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요 몇 달 동안 단호하게 가르친 대로 일어나자마자 홀로 씻고 나온 디아는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은 채였다. 결을 따라 쓸어 넘긴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여유롭게 다리를 뻗는 소년에게서 계단 한 칸을 오르기 위해 끙끙대던 과거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잠이 덜 깼는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다가온 소년이 반의 턱을 한 손으로 받쳐 올려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인사였다.
“깨우지. 혼자 일어나는 거 싫은데.”
“…잘 자길래.”
반은 평이하게 대꾸하면서 디아의 자태를 낱낱이 뜯어봤다. 분명 낙낙했던 티셔츠가 상체에 딱 맞게 달라붙어 몸 선을 드러냈다. 다만 언제쯤 이 티셔츠가 딱 맞는 사이즈가 된 건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는 새, 디아가 머리카락을 털면서 소파 아래에 앉았다.
“말려 줘.”
디아가 어깨 너머로 넘긴 흰 수건을 저도 모르게 받아 들었다. 혼자 씻더라도 머리카락만은 말려 주길 바라는 어리광은 여전했다. 반은 몸에 밴 버릇대로 소년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 주며 혼돈에 빠졌다.
내려다보이는 어깨가 넓었다. 카펫 위에 편히 늘어뜨린 다리는 길었고, 그 아래 바닥을 디딘 발은 곱상한 생김새와 달리 큼지막했다. 어쩌면 자신의 발보다 클지도 몰랐다. 반은 혀에 고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언제 이렇게 자란 거지? 그동안 얼마나 안일했으면 하루하루 소리 소문 없이 자라난 소년의 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일까. 반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건장한 사내’에 가까워진 디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틈새로 흘려보냈다.
“끝. 넣고 와.”
젖은 수건을 건네주었다. 응. 답을 잊지 않은 디아가 몸을 일으켜 세탁실로 걸음을 돌렸다. 느릿느릿 나아가는 소년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뒤따라간 반은 정수리에 손을 대고 일자로 뻗었다. 디아의 뒤통수에 닿을 듯 말 듯 손을 뻗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시에 뒤를 돌아본 디아는 제 뒤에 쪼그려 앉은 반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반?”
“…어, 왜.”
“왜 그래?”
하하 웃은 반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고 손을 뻗는 디아를 떠밀었다.
“그냥 다리 아파서. 가, 가.”
웃으며 팔에 힘을 주자 한 발자국 밀려난 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행히 고집부리지 않고 멀어지는 디아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반은 그가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입을 쩍 벌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차이가… 차이가 없다. 디아가 아주 조금, 손톱만큼 작기는 했으나 거의 똑같은 셈이었다.
휘청거리며 일어선 반은 비틀비틀 부엌으로 향했다. 말했다시피 반은 남성 평균 키를 훨씬 웃돌았다. 몸 쓰는 업계에 몸담으며 본인보다 큰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났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보다 작았다. 이웃사촌이 된 웨인도 본인보다 컸지만 어쨌든 반은 많은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손수 입히고 씻기고 먹이고 재운 아이가 그새 제 키를 따라잡아 버렸다. 더군다나 가끔 되바라진 소리를 하며 이상한 방면으로 맞먹으려고 드는 소년이 말이다. 반은 충격에 휩싸인 채로 냉장고를 열어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아침 식사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구운 빵에 내용물만 채워 넣으면 완성되기 때문에 반의 형편없는 요리 실력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반은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고기를 굽고 야채를 찢었다. 토스터에서 튀어나온 빵을 접시에 두고 속을 꽉꽉 채우면서도 디아의 뒤통수가 어른거렸다. 정수리가 보이지 않았다. 정수리가 보이지 않았단 말이다.
반은 디아가 외계에서 왔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미셸도 찾지 못한 지구 방문 목적을 알 것 같았다. 지구인의 자존심을 박살 내서 절망에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때 얼른 자라 달라고 빌었지만, 그것이 키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는데….
“나도 할래.”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반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어깨가 묵직해졌다. 코끝이 보드라운 뺨에 스치더니 로션 향기가 풍겼다. 황급히 고개를 제자리로 돌린 반은 옆구리가 터져 나가려는 샌드위치를 누르다가 곁눈질했다. 조리할 공간이 부족한 싱크대를 짚은 큼직한 손이 양옆으로 보이자 지금 취한 자세가 무엇인지 서서히 인식됐다.
반은 디아에게 안겨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겨드랑이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던 그 소년에게 안겨 있었다. 빵을 덮은 손에 힘이 들어가 내용물이 지저분하게 튀어나왔다. 이를 꽉 깨문 반은 역시나 모른 척을 택했다.
“손 씻고 오자.”
“씻었어.”
“그럼 앉아 있어. 다 했으니까.”
“아직 하나밖에 없는데. 여기 터진 거.”
어깨에 턱을 얹은 디아가 말을 건넬 때마다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와 숨결이 자꾸만 귓불을 스쳤다. 무의식적으로 뒤꿈치를 살짝 든 반은 주춤거리다가 디아의 발등을 밟고 말았다. 반이 중심을 잃었다고 생각한 디아가 어깨로 지탱해 주었다. 비틀거림은 멈췄지만 발은 여전히 디아의 발등을 밟은 상태 그대로였다.
반은 불편하고 어색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발을 바닥에 내려놓자니 맞먹는 키를 눈치챌 것 같고, 그대로 내버려 두자니 꼴이 우스웠다. 갑갑해 죽겠는 와중에 눈치 없는 디아가 말을 걸어왔다.
“근데 반.”
“좀 떨어져라. 걸리적거린다.”
일부러 어깨를 비틀어 성가신 티를 내자 조리대에서 떨어진 손이 옆구리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끌어안은 양팔이 아랫배 부근에서 교차했다. 떨어지라고 했더니 도리어 빈틈없이 들러붙은 디아의 가슴이 날개뼈를 짓눌렀다. 기가 막혀 뒤를 돌아보려던 반은 모든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디아가 내뱉은 한마디 말 때문에.
“원래 이렇게 작았어?”
반의 자존심은 산산이 부서졌다. 키 하나, 고작 몇 센티 가지고 침울해질 것까지 있냐고 묻겠다만 반에게는 중요했다. 정확히는 상대가 문제였다.
무슨 정신으로 만든 건지 모를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면서 건너편을 흘끔거렸다. 망발을 퍼부었던 디아는 내용물을 사방팔방 흘려 대며 먹는 반과는 달리 깔끔하게 샌드위치를 먹었다. 입가나 손에 소스를 묻히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어른스러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저와 체격이 비슷하면서 고작 샌드위치 하나로 식사를 끝마친 디아는 소소한 대화를 걸어왔다. 책을 끼고 사는 문학 소년답게 대체로 책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라 반은 그러냐 하고 싱거운 대답만 해 주면 됐다.
변연계가 어쩌고저쩌고, 내분비계가 어쩌고저쩌고.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끼어들 정신도 없었다. 웃음을 잃고 샌드위치를 세 개째 해치우던 반은 말끔한 디아의 접시와 지저분한 제 접시를 번갈아 봤다.
왠지 민망한 기분이라 얼른 한 조각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때 샌드위치 사이에서 빠져나온 소스가 손가락을 적셨다.
“…아.”
씨이…. 기분 나쁜 촉감에 미간을 찌푸린 반은 식탁 모서리에서 티슈를 뽑으려고 했다. 손목이 잡혀 저지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소스가 흘러내린 손바닥에 혀가 닿았다. 손끝이 움찔거렸다.
반이 눈만 껌벅이는 사이 다른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혀가 손금이 새겨진 부분을 넓게 핥았다가 뾰족하게 세운 끝으로 파고들었다. 촉촉하고 뜨거운 감촉을 전하며 손바닥에 묻은 소스를 핥은 혀는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졌다.
손을 가져다 대면 폭신할 것 같은 입술을 벌린 디아는 기어이 검지와 중지를 집어삼켰다. 입술을 모은 미인이 손가락을 느리게 빨아올리자 춥춥거리는 소리가 낡은 부엌에 울려 퍼졌다. 관절이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 마디를 핥던 디아가 눈을 들어 올렸다. 푸른 숲이 담긴 눈동자와 손가락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반은 그때야 제자리를 이탈한 넋을 가까스로 되찾았다. 붙잡힌 손을 확 빼내자 소년은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담백하게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편도체를 건드리면 고양이도 쥐를 보고 놀란대.”
그러고는 태연히 하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무어라 훈수를 둘 수도 없이 말문을 제대로 막아 버리는 반응이었다. 반은 마디를 감싼 혀의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능구렁이 같던 혀가 제 기능을 잃었다.
“내 얘기 듣고 있어?”
“어? 어….”
얼떨결에 답하자 샐쭉 웃은 디아가 관심도 없는 과학 얘기를 이어 갔다.
감정을 담당하는 것이 변연계고, 공포와 흥분을 담당하는 것이 편도체면 지금 디아가 건드린 것은 무엇일까. 반은 젖은 손가락을 티슈로 닦으며 입 모양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망할 망할 망할….
***
그로부터 일주일 후. 반은 옆집 문을 때려 부술 듯 두드렸다.
마침 점심을 준비하던 웨인은 무슨 소란인가 싶어 문을 열었다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맞닥뜨렸다. 반은 웨인이 반기든 말든 막무가내로 쳐들어갔다. 오만상을 쓰고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옛 동료를 훑어 내리며 문을 닫은 웨인은 하는 수 없이 커피를 한 잔 더 내렸다.
반은 커피가 차갑게 식고 웨인이 식사를 끝낼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웨인이 자신 몫의 커피를 새로 내려 올 때쯤 팔짱을 단단히 낀 반이 입술을 달싹였다.
“디아가 좀 이상해.”
“네가 더 이상한 것 같지는 않고?”
“걔가 나를…. 날….”
진하게 내린 커피를 홀짝인 웨인은 뜨거운 돌멩이를 삼킨 듯 괴로워하는 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반은 숨을 내쉬었다가 도로 들이마셨다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린 끝에 넌지시 중얼거렸다.
“좋아하나 봐.”
어렵게 말을 꺼낸 반은 웨인이 무슨 반응이라도 보일 줄 알았지만, 놈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실 뿐 묵묵부답이었다. 얼른 대답하라고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자 한숨을 푹 내쉰 웨인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퇴짜 맞은 사람한테 이래도 돼?”
“다른 사람한텐 안 이러지. 너는 뭐…. 그냥 협조 좀 해 봐.”
반이라고 웨인이 대단히 믿음직스럽고 편안해서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어디 터놓고 상담하고 싶은데 이런 얘기를 할 만한 상대가 달리 없는 탓에 이곳을 찾았을 뿐이다. 말하자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양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버티자 미간을 문지른 웨인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는데? 그건 원래 졸졸 쫓아다녔잖아.”
용케 하소연을 허락받은 반은 냉큼 상체를 기울였다. 가뜩이나 쓰레기 버린다는 핑계로 잠시 빠져나온 참이라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디아가 요즘 나한테 먹여 달라고 안 해. 혼자 먹는다니까? 씻겨 달라고도 안 해. 요즘에는 혼자 씻긴 하는데 그래도 가끔 졸랐거든. 아, 머리는 내가 말려 주기는 한다. 그리고 같이 자지도 않아. 이제 혼자 자겠대. 이상하지 않냐? 계속 쫓아내도 내 방에 들어왔거든.”
“…여태까지 그랬다고?”
웨인이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고개를 마구 주억거리자 커피 잔을 내려 둔 놈이 계속 얘기하라는 듯이 턱짓했다.
“문제가 뭔데?”
“갑자기 다 컸어. 키도 크고…. 솔직히 이제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어. 머리가 굵어져서 그런가.”
“그래서.”
“근데 좀 오해하게 굴어.”
눈썹을 구긴 반은 지난 일주일간 디아의 작태를 떠올려 봤다.
반은 어려서부터 순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모로 눈에 띄는 외모 덕에 항상 인간 틈바구니에 끼어 지냈고, 개중에는 남다른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온갖 종류의 호감 표시를 받다 보니 수작질에는 이골이 났다. 그런 반이 봤을 때, 요즈음 디아가 보내는 어떠한 시그널은 과거 연인들이 건네던 수작질과 결이 비슷했다.
뒤에서 슬쩍 끌어안질 않나, 손가락을 핥질 않나, 아침을 차려 주겠다고 나대질 않나. 한마디로 은근슬쩍 추파를 던졌다. 그놈의 은근슬쩍이 문제였다. 키스하려고 들었던 날처럼 냅다 몸뚱이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서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기도 애매했다.
거기다 수작질처럼 느껴져도 수작질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영화나 유튜브에서 본 장면을 따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다만 디아가 본 동영상 기록을 뒤져 봐도 죄다 무슨 강연이니, 여행지니 하는 것뿐이라 원흉일 만한 것은 없었지만 아무튼 쉽게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설마 진심으로 ‘그런’ 감정을 품을 리가 없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웨인은 반이 주절주절 털어놓는 고민거리를 귀찮은 듯, 성가신 듯 듣고 있다가 간략히 정리했다.
“그러니까 그게 너랑 섹스하고 싶어 한다는 거네.”
“미쳤냐? 아직 애한테 뭐라는 거야?”
천인공노할 소리에 기겁한 반이 진저리를 쳤다.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천하의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흘기자 헛웃음을 지은 웨인이 반박했다.
“애? 그건 이제 확실한 성체야.”
“아니거든.”
“맞아. 다 컸어.”
“내가 아니라면 아니야.”
아침저녁으로 들러 디아를 확인하는 웨인이 하는 말은 사실에 가까웠지만 반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크고 와라, 다 크면 생각해 보겠다, 크고 나서 말해라…. 이러쿵저러쿵 되는대로 날린 공수표가 몇 장인지도 모르는 반의 입장에서 웨인의 발언은 다분히 위험한 것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집부리던 반은 피로한 낯으로 커피를 마시는 웨인을 멀뚱히 보다가 그럴싸한 답을 찾아냈다.
“생각해 보니까 너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빼앗기는 기분이 드니까 전부 따라 해 보고 싶은 거지.”
“이제 내 탓으로 돌려?”
“부모 노릇이 이렇게나 힘들다….”
웨인의 핀잔을 못 들은 체한 반이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거리 따위 없어 보이던 호방한 미남의 낯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웨인은 시커먼 커피가 담긴 잔을 내려다보다가 반의 말에 섞인 어폐를 꼬집었다.
“네가 왜 걔 부모야?”
“내가 키웠으니까 지분이라도….”
“그래서 어떻게 보내려고. 한 반년 남았나?”
반은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낮은 탄식을 흘렸다. 또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머리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닌데 한정된 시간만큼은 잊는 일이 잦았다. 디아가 무슨 의도로 낯 뜨거운 짓을 하는지 몰라도, 그는 업어 키운 소년이기 이전에 백만 달러짜리 실험체였다.
갑작스럽게 주제를 파악한 반의 어깨가 축 처졌다. 드물게 시무룩한 반의 정수리를 흘긋거린 웨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개의 커피 잔을 정리했다. 입도 대지 않은 반의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부은 웨인이 가벼운 투로 내뱉었다.
“해.”
“…뭘.”
“섹스.”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컸다. 잘생긴 얼굴은 이내 종잇장보다 더욱 구겨졌다.
“진짜 미쳤냐?”
물에 헹군 커피 잔을 건조대에 엎어 둔 웨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질 낮은 소리를 이었다.
“어차피 다 컸는데 뭘. 키웠으면 동정은 떼 줘야 할 거 아냐.”
“무슨 개소리야!”
고함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난 반은 도덕적이지 못한 소리를 지껄인 웨인을 맹렬히 노려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칸쿤에 머물 때보다 감정 조절이 서툴러진 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웨인은 젖은 손을 닦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물기 젖은 커피 잔에 한 번 닿았다가 반이 앉아 있던 의자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옆집에서 뛰쳐나온 반은 씨근덕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다가 실수를 알아차렸다. 디아가 자신만 보고 살아 이상해진 걸 수도 있으니 둘이 한번 친해져 보지 않겠느냐고 권하는 것이 본 목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헛소리만 듣고 나왔다. 아, 짜증 나.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반은 잠그지 않고 나간 현관문을 열어젖혔다가 흠칫 놀랐다.
“왔어?”
문을 열자마자 디아가 나타난 탓이었다. 잠시 전까지 디아를 주제로 입에 담기 어려운 대화를 나눈 반은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뭐 하냐, 여기서.”
“쓰레기 잘 버렸어?”
“깨끗하게 버렸지요.”
신발을 갈아 신으며 눈길을 주자 디아가 양손에 쥔 것을 들어 보였다.
“안 들고 나갔길래.”
쓰레기봉투였다. 아주 크고 울룩불룩한. 얼어붙은 반은 활짝 웃는 디아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신발을 신었다.
“그게 왜 거기 있지…. 고맙다.”
쓰레기봉투를 빼앗아 황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후다닥 뛰어가 쓰레기를 내다 버린 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디아가 반겨 주는 집으로 들어섰다.
손을 박박 씻으며 소년의 질문 폭격에 대비했지만 정작 디아는 별말이 없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얌전히 책을 읽다가 눈이 마주치자 한 번 웃어 준 것이 다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곁에 앉은 반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못내 섭섭했다. 아빠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던 아이가 어느새 다 커서는 무관심해진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다가오는 것은 부담스럽고 무관심한 것은 섭섭하다니.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은 본인도 이해가 되지 않아 공연히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반이 빈손으로 집을 나갔을 때부터 한 장도 넘기지 못한 책을 들여다보던 디아가 시선을 들었다. 소년은 쿠션에 기대어 핸드폰을 두드리는 반의 옆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상체를 무너뜨렸다. 허벅지를 베고 눕자 핸드폰을 불쑥 들어 올린 반이 눈을 끔벅이더니 픽 웃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손이 기분 좋았다. 덮은 책을 카펫에 떨어뜨린 디아는 반의 허벅지와 소파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움찔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한 손에 들어오는 허벅지를 잡고 주무르자 힘이 바짝 들어간 근육이 만져졌다.
“반.”
“…왜, 인마.”
“그냥 불러 봤어.”
눈을 감은 채로 웃은 디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두 손으로 반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흠칫하여 허리를 바로 세운 반이 허벅지를 슬쩍 치우려고 했다. 디아는 손아귀에 아주 살짝 힘을 줬다. 삐질삐질 빠져나가던 다리가 속수무책으로 끌려왔다. 다시는 못 빼내도록 양 허벅지를 베고 누운 디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굴리는 반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몸과 정신이 부쩍 성장한 디아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그토록 커다랗고 강인해 보였던 반은 사실 작고 약했구나. 너무너무 약해서 어디 내놓기 무서울 정도로.
***
20xx. 6. 12. 세포부터 키운 놈이 나를 노린다.
한 줄 끄적인 반은 답 없는 문장을 들여다보다가 펜으로 찍찍 그었다. 글씨가 보이지 않도록 몇 번이나 덧칠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페이지를 넘기자 드문드문 남긴 한 줄짜리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SUC-07을 감시하고 기록하기 위해 몇 날 며칠 펜을 들었지만 몇 달 동안 남긴 것이라고는 합해서 스무 장이 될까 말까 한 감상문이 전부였다. 게으른 인간에게 일을 맡기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당장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데 지금 와서 방학 숙제 하듯 몰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다. 6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불어오는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졌으나 그래 봤자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하고 공기는 변함없이 시린 동네였다.
오늘도 적막한 거리를 구경하던 반은 음산한 분위기에 한몫하는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간간이 경찰차가 돌아다니기는 하는데 살인마를 잡았다는 소식이 없다. 돈을 날로 먹어도 유분수지.
혀를 찬 반은 책상에 엎어져 핸드폰을 켰다. 자연스럽게 사진 앱으로 들어가 망막에 새겨질 정도로 들여다본 사진을 또다시 감상했다. 뺨이 발그스름해서는 비행기 모형 장난감을 들고 환히 웃는 디아의 사진이었다. 새끼손톱만 한 앞니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어찌나 귀여운지. 반은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이렇게 사랑스러웠던 아이가 어쩌다가….
“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현실의 디아가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있었다. 분명 문을 닫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인기척 없이 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반은 핸드폰을 감추며 가볍게 꾸짖었다.
“노크하자, 디아.”
“했는데 답이 없길래.”
제 잘못이었구먼. 입을 비죽인 반이 바르게 돌아앉자 나무 의자의 등받이를 가볍게 짚은 디아가 등에 무게를 실으며 상체를 숙였다. 덩달아 허리를 구부린 반은 책상에 놓이는 오렌지 주스를 발견했다. 얼굴 옆에 위치했던 팔은 금세 거둬졌지만, 등에 남은 온기는 곧장 사라지지 않았다.
방을 나가는 대신 침대에 걸터앉은 디아는 유치찬란한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은 벽에 기대서 가져온 책을 폈다. 때마침 목이 탔던 반은 주스를 홀짝홀짝 마시며 턱을 괴었다. 할 일이 없으니 자꾸만 디아를 관찰하게 됐다.
세운 무릎에 책등을 얹은 디아는 속독을 계속했다. 페이지가 워낙 빠르게 넘어가 저래서 활자가 읽히긴 하나 궁금했지만 식사 시간 동안 오가는 대화를 곱씹어 보면 읽긴 읽는 모양이었다. 짧은 것도, 긴 것도 아닌 길이로 다듬어 준 머리카락이 거슬리는지 때때로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는 디아를 바라보다가 넌지시 불렀다.
“이쁜아.”
디아는 대답 없이 눈만 살짝 들었다. 싱그러운 풀밭이 담긴 눈동자와 마주친 반은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웨인이 성체라고 단정 지은 대로 디아의 외형은 확실히 스무 살을 넘긴, 어엿한 성인으로 보였다. 거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소년은 하루하루 날이 지날수록 놀랍도록 아름다워졌다. ‘이쁜이’라는 애칭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디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환상적인 외모를 꽃피우는 중이었다.
그뿐이랴. 제대로 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체격도 날로 좋아졌다. 반은 같은 성별의 입장에서 지극히 주관적이고 아니꼬운 눈으로 디아의 몸뚱이를 훑었다. 죽어라 운동을 해야 간신히 근육이 붙는 자신과 달리 디아는 숨만 쉬어도 자잘한 근육이 꼼꼼하게 붙었다. 외계인은 뭐, 대충 먹고 대충 움직여도 다 근육이 되나? 참 세상은 불공평하고 디아는 이기적이었다.
“왜 그렇게 봐?”
길쭉하게 뻗은 다리와 너른 어깨, 그 외의 부위에서 단점을 찾으려고 애쓰던 반은 디아의 물음에 미끄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냥 예뻐서. 대강 둘러대며 눈에서 힘을 풀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잘 먹이고 잘 키워서 이렇게 예뻐진 거지, 하는 뿌듯함도 있었다. 뜬금없는 칭찬에도 당황하지 않고 씩 웃은 디아가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들겼다.
“어디서 오라 가라야?”
“와 주세요.”
“나 참.”
건방지다 싶으면 납작 숙이고 들어오는 얌체 같은 디아를 못 이기고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기가 도는 벽에 뒤통수를 대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의 허리를 끌어안은 디아가 어깨에 얼굴을 기대 왔다. 들러붙는 건 어릴 때와 다름없었지만 몸집이 서로 비등비등해진 탓에 꼴사납게 안긴 자세가 됐다. 처음에나 민망하고 낯 뜨거웠지, 지금은 그럭저럭 적응된 반은 남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는 디아를 퉁명스럽게 바라보았다.
무럭무럭 자라는 만큼 수작질의 농도도 짙어졌다. 하지만 반은 소년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디아는 기어 다니던 시절부터 스킨십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만지고, 입 맞추고, 안는 걸 좋아했다.
딱 한 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그건 웨인을 향한 질투로 퉁치고, 여타 스킨십은 소년의 성향이라고 치면 꺼림칙할 거리가 딱히 없었다.
문란하게 살아오며 습득한 경험이 디아의 태도를 음흉하게 해석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느새 반의 머릿속에 틀어박혔다. 찝찝한 요소를 애써 무시하며 합리화하는 동안 때때로 웨인과 나눈 대화가 불현듯 떠오르고는 했다.
‘키웠으면 동정은 떼 줘야 할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개소리. 대가리에 똥만 찬 놈.
안 그래도 바닥을 치는 웨인의 이미지에 변태라는 키워드를 더한 반은 놈이 찾아올 때마다 문전 박대했다. 아쉽게도 웨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하여튼 반은 괜찮았다. 설마 자길 그런 식으로 보겠어? 안일하게 넘겨짚으며 간혹 건방진 소리를 하는 디아를 봐줬다. 그러다 보니 디아의 스킨십도 점차 짙어졌는데, 바로 지금처럼 허리를 은근하게 매만지는 것이었다.
“어쭈.”
팔꿈치로 손을 쳐 낸 반은 불쑥 치밀어 오르는 찝찝함을 견디지 못하고 핸드폰을 켰다. 혹시 모르니까 최소한의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다.
“이거 봐. 디아.”
“응?”
“예쁘지?”
반은 세기의 미인으로 손꼽히는 배우의 사진을 찾아 화면에 띄웠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배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디아가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깨를 으쓱인 반은 근래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금발 배우를 화면에 띄웠다. 그러나 이번에도 디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상하다 싶었던 반은 이상형을 말하라면 무조건 오르내리는 배우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 주며 물었다.
“막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 떨리거나 계속 보고 싶거나.”
“딱히….”
“네 이상형이 뭔데? 좋아하는 외모.”
이상형의 의미를 모를까 봐 부연 설명을 달려고 했지만 디아는 대번에 답했다.
“남자.”
“…남자?”
사진을 찾던 반의 손이 멈칫 굳었다. 외계인도 성적 지향이 있나? 이상형을 물어본 마당에 편협한 호기심이 들었다. 반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외모로 이름 날리는 남자 배우를 검색했다. 수십 년째 미남 수식어를 유지하는 배우를 들이밀자 디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별로야?”
“응.”
눈 한번 더럽게 높은 디아를 흘끔거리다가 고전적인 미남 배우를 모조리 끄집어냈지만, 소년은 한결같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체 기준이 뭔데? 외모 특성 같은 거. 머리 색, 이런 거.”
“검은 머리.”
어깨에 뺨을 폭 기댄 디아가 마침내 기준을 하나 내놓았다. 반은 드디어 안도하며 흑발 배우를 골랐다. 배우의 사진을 내려다보던 디아는 또 다른 조건을 꺼냈다.
“눈은 밝은 갈색.”
“이 사람 어때. 갈색인데.”
“더 밝아야 돼.”
“…더? 흠, 이 남자는? 잘생겼네.”
“눈이 너무 올라갔어.”
내내 입 다물고 있던 디아가 조건을 우르르 쏟아 냈다. 키는 180 언저리, 눈은 아주 밝은 갈색에 눈꼬리는 처져야 하고, 턱은 너무 각지면 안 되고 코는 적당히 높아야 하며 웃는 모습이 귀여워야 한다는 아주 세세한 조건이었다. 더해서 무릎이 동그래야 한다거나 목과 발가락에 점이 있어야 한다는 희한한 부분도 붙었다.
어느덧 디아의 이상형 찾기 미션을 포기한 반은 쭉 뻗은 발끝, 작은 점이 콕 찍힌 제 발가락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내가 웃는 게 귀엽냐?”
명화에서 갓 빠져나온 듯 화려한 얼굴을 어깨에 비비적거린 디아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엄청.”
“우웩.”
낯간지러운 칭찬에 질색하듯 미간을 일그러뜨린 반은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을 부모처럼 키워 준 베이비시터에게 하기에는 도를 넘는 헛소리였다. 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러다가 설마가 사람 잡는 날이 올 것 같은데 도통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이것이 지나가는 감정이라고 잘 알려 줄 수 있을까….
한 뼘 열어 둔 창 너머에서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짧은 커튼을 휘날리며 들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렸을 때 입술에 따뜻한 촉감이 얹혔다. 코앞으로 다가온 디아를 초점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반은 이제 이런 뽀뽀도 그만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오해하고도 남을 스킨십이었다.
그때, 인사와 같은 키스를 남기고 고개를 떨어뜨리던 디아가 돌연 입술을 붙였다. 그러고는 붙은 입술을 벌렸다. 습한 숨결이 다물린 입술을 스치면서 반은 당황했다.
“디아….”
뭐 하는 거냐고 묻기 위해 달싹이는 아랫입술을 앞니로 가볍게 문 디아가 턱을 들었다. 머리가 뒤로 젖혀지며 입술이 벌어지자 말캉한 혀가 윗니를 핥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반은 언제부턴가 몸을 덮치듯이 다가와 있던 디아의 어깨를 밀어 냈다.
“…뭐 하냐?”
“키스.”
디아는 뻔뻔하게도 대꾸했다. 젖은 입술을 닦아 낸 반은 나무라듯 주먹으로 소년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했지.”
이런 상황이 영 달갑지 않다는 반의 분위기에도 디아는 깔끔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서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리에서 입씨름이 오갔다.
“이런 게 뭔데?”
“이런 거. 키스.”
“왜 하면 안 되는데.”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거듭 캐묻는 것도 마냥 달갑지는 않았다. 반은 상처 주지 않고 키스를 거절할 만한 그럴싸한 이유를 떠올려 보다가 교회에서도 가르치지 않을 보수적인 이유를 댔다.
“이런 건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야.”
“반은 웨인이랑 사랑해서 했어?”
급성장의 부작용이 이런 데서 발휘됐다. 반은 이따금 말문이 막히게 하는 디아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요즘 애들은 눈치도 속도도 빨랐다. 그렇다면 남은 핑곗거리는 하나였다.
“…그건 아니지만. 일단 넌 애야. 다 크지도 않은 게 이상한 것만 배워서는.”
어린아이, 소년, 미성년자라는 단어를 갖다 대기에 디아는 지나치게 성숙했지만, 상황을 면피하려면 이만한 핑계가 없었다. 반에게는 영락없는 보호할 존재로 느껴졌으니 못 갖다 댈 이유도 아니었다. 그러나 디아는 손쉽게 반의 주장에서 오류를 잡아냈다.
“알잖아. 나 다 큰 거.”
키가 비슷해진 순간부터 반은 물론이고, 디아조차도 꺼내지 않았던 얘기가 툭 튀어나왔다. 갖은 힘을 다해 디아의 성장을 모른 체해 왔던 반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셈이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눈을 돌리자 팔뚝을 타고 움직인 새하얀 손이 제 어깨를 짚은 반의 손을 움켜쥐었다. 제 손에 비해 작지만 딱딱하고 상처가 많은 손을 만지작거리던 디아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확인해 봐도 되는데.”
순진함을 가장한 유혹은 도리어 자극적으로 들렸다. 반은 황당해져 디아를 삐뚜름하게 쳐다봤다. 뭘 확인해야 자랐다는 게 증명되는지 묻고 싶었지만 감당 못 할 소리가 튀어나올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확인은 무슨….”
그럴듯한 핑계가 다 떨어진 반이 침대에서 일어날 듯 뒤척이자 디아가 꽤 조급하게 손을 부여잡았다. 소년은 유달리 긴 속눈썹이 매력적인 눈을 내리깔며 속살댔다.
“그리고 우리 사랑하잖아.”
“아…. 우리가…?”
한순간 얼빠진 반응이 입 밖으로 터졌다. 미묘한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구기는 디아를 발견한 반은 황급히 실수를 포장했다.
“그렇지. 사랑은, 사랑은 맞는데. 이런 건 그런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는 거지. 음, 좀….”
“그럼 가르쳐 줘.”
“어?”
마디마디에 분홍빛이 도는 엄지가 반의 손등을 매만졌다. 디아는 손바닥을 핥았을 때처럼 손을 간지럽혔으나 이번에는 혀가 아닌 엄지였다.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고 손바닥을 긁으면서 내놓는 말은 듣는 사람의 음심을 건드리는 힘이 있었다.
“글 가르쳐 준 것처럼, 키스도 가르쳐 줘.”
새파랗게 어린 놈이 내던진 직구에 얻어맞은 반은 발 빠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서, 뭘, 어떻게 배웠으면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반반하게 생긴 연하가 눈치를 살피며 이런 말을 한다면 아무리 연상이 취향이라고 한들 그깟 키스쯤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디아였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갓 성인에 도달한 애새끼에다가 직접 키운 소중한 아이. 궁지에 몰린 반은 딱 잘라서 거절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건 누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아. 네가 다른 사람이 없구나….”
골이 울렸다. 디아에게 미안하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반은 제 손등을 뒤덮기 충분할 정도로 커진 디아의 손을 내려다보며 할 말을 골랐다. 어떤 핑계를 대야 소년이 상처받지 않을까. 어설픈 교육자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다. 디아는 잔뜩 혼란스러워하는 반을 흘긋 살피고는 목소리 톤을 바꾸었다.
“난 반 말고는 아무도 없고, 집 밖에도 못 나가니까….”
소년은 반이 품고 있는 이유 모를 죄책감과 동정심을 사정없이 찔렀다.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한평생 갇혀 살 운명을 들먹였다. 디아는 미래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의뢰의 목적을 아는 반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끝으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떨어뜨리면서 홈런을 쳤다.
“궁금해서 그랬어.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얽힌 손가락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갈등을 끝내지 못한 반은 반사적으로 디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이 붙들린 디아는 덤덤하나 침울한 낯으로 반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어디서 수작질이냐고 웃으며 나무랐을 테지만,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함함하다면 좋아하듯이 반은 디아가 얼마나 영악한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알 의지도 없었다. 반은 단단한 손목뼈를 만지작거리다가 결심한 듯 숨을 들이켰다.
“알았어. 해 줄게.”
“…진심이야?”
“그래, 뭐. 키스야 인사로도 하는 거니까 못 해 줄 것도 없지. 인사야 인사.”
어느 문화권에도 혀를 쓰는 키스를 인사로 받아 주는 곳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상황을 가볍게 만들어야 했다. 디아의 말대로 글을 가르쳐 주거나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키스 또한 교육의 일환으로… 는 말이 안 됐지만. 그렇지만 지금 뾰족한 수가 있나? 없다.
디아를 마주하고 똑바로 앉은 반은 차차 표정이 밝아지는 디아를 가만 바라봤다. 누가 키웠는지 참 예쁘기도 했다. 그러나 예쁨과 별개로 성적으로 끌리느냐 물으면 ‘아니’였다. 유년기를 지켜본 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감정이다. 마치 성인이니까 다 되지 않냐고 떼쓰는 애새끼에게 손대는 쓰레기가 된 느낌이 들어 선뜻 행동할 수가 없었다.
반은 호쾌하게 그러자고 해 놓고는 한없이 머뭇거렸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디아가 포기하고 나가 주길 바라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건 아닌데, 정말 아닌데 디아가 너무 불쌍하기도 하고, 평생 키스 한번 못 해 보고 생을 마감하면, 그러면 얼마나 슬플까 싶기도 하고….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망연히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하는 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잡아당긴 것은 디아였다. 뺨을 양손으로 감싼 디아가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벌려 줘.”
반은 짧은 순간 아둔한 선택을 후회했다. 역시 아니다 싶어 디아를 밀어 내려던 순간 입술이 맞닿았다. 소년의 팔뚝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디아는 처음부터 혀를 집어넣었다. 조급하게 입 안으로 파고드는 혀는 괴상하게 길거나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지 않았다. 사람의 것과 동일해서, 반은 우습게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뜨듯하고 촉촉한 혀가 입 안을 건드려도 반응하지 않던 반은 손에 힘을 주고 디아를 밀어 냈다. 입술이 슬쩍 떨어지는 즉시 고개가 따라왔다. 다시금 입술을 붙이려는 디아를 막아 낸 반은 아름다운 소년이 슬퍼하기 전에 해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파, 인마.”
이번에도 거절당할까 봐 긴장한 디아의 얼굴을 감싸 쥐자 어깨에 얹힌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반은 고개를 틀어 디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담백하게, 최대한 담백하게. 딱 한 번만 희생하자.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면서 아랫입술을 살짝 벌리고 들어갔다.
얌전히 입술을 벌려 주는 디아의 혀를 건드리다가 부드럽게 감싸 올리자 목을 울리는 듯한 신음이 들렸다. 눈을 감은 반은 키스를 가르쳐 준다는 명목대로 순한 입맞춤을 전했다.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빨고 혀를 얽기도 하자 허리를 끌어안은 디아가 보다 깊이 입술을 맞물렸다.
“흐읏….”
코가 뭉개지며 살갗 향기가 났다. 반은 몸에 새겨진 버릇을 따라 디아의 귓바퀴와 귓불을 매만지며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혀를 받아 냈다. 혀가 엉키며 나는 질척거리는 소리 사이로 가쁜 숨소리가 섞였다.
디아가 무릎에 중심을 실으면서 싱글침대가 삐걱거렸다. 상체가 젖혀지다가, 밀려나다가 결국 눕게 된 반은 무의식적으로 디아의 목에 양팔을 두르고 풋내 나는 키스를 이어 갔다.
“하아…. 흡.”
잠시라도 쉬려고 하면 디아가 곧장 입술을 붙이는 바람에 연신 혀를 섞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따라오고, 밀어 내려고 하면 붙잡고.
디아는 반의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릴 때까지 배운 것을 응용하듯 아랫입술을 물고 빨았다. 혀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살짝 빨아 주었더니 혀뿌리가 뽑힐 때까지 빨아 대는 것이 아니겠는가. 열어 둔 창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디아의 열의를 식힐 수 없었다.
“하아, 디아. 그만….”
“아직 잘 모르겠어.”
“잘 아는 것 같은데…?”
반은 예쁘게 포장된 덫을 보기 좋게 밟은 기분이 들었지만 디아의 힘과 억지를 이기지 못했다. 양 손목이 베개 옆에 눌린 반은 팔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또 한 번 디아에게 입 속을 빼앗겼다. 글자를 배우고 식기를 사용하는 법을 배울 때처럼 디아는 몇 분의 경험만으로 반의 키스를 수월히 따라 했다. 조금 더 깊고 짙게 응용하기까지 했다.
그가 입천장을 핥자 미미한 신음이 흘렀다. 디아가 무심코 건드린 역린에 눈을 질끈 감은 반은 귓바퀴가 살짝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치 않는 육아를 하며 장장 반년을 수절했는데, 웨인과의 키스 한 번으로 펄펄 날뛰는 욕구가 충족될 리가 없었다. 상대가 남자라든가, 업어 키운 자식 같은 놈이라든가, 정신을 잡고 있던 요소가 딱 1초. 1초간 사라졌다.
아주 잠시 열정적으로 키스를 받아 준 반은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서늘함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반은 사라진 이성을 되찾자마자 손깍지를 끼고 덮쳐드는 디아와 힘겨루기했다.
어떻게든 우위를 점해야 하는데 무슨 힘이 이토록 센지, 뒤집어질 것 같다 싶으면 도로 밑에 깔리고 그러다가 허리와 뒷덜미가 붙잡히기도 했다. 소년의 어깨를 움켜쥔 반은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워 몸을 바투 붙이는 디아와 침대 위에서 바르작거렸다. 머리카락과 옷가지는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오래된 침대에서는 시종 삐걱거리는 소리가 터졌다.
“흐읍, 읍…!”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하는 것처럼 키스해 오는 디아를 떨구어 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반은 온 힘을 다해 침대 밑으로 굴렀다. 덩달아 휘말린 디아가 먼저 카펫으로 떨어지며 그 위로 덮치듯 올라타게 된 반은 헉헉거리며 목소리를 깔았다.
“죽을래? 어디서 힘자랑이야.”
“좋아서.”
디아는 애교로 넘어가겠다는 양 배시시 웃었다. 분홍빛으로 물든 뺨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침에 젖어 반짝이는 입술이 뒤섞이자 상당히 자극적인 외양이었다. 으휴. 짜증을 낸 반은 소원은 다 들어줬으니 이제 떨어지라는 듯 디아의 입술을 거친 손놀림으로 닦아 주고 일어서려고 했다. 당연히도 실패했다.
“조금만 더 해 줘.”
양 팔뚝을 잡아챈 디아가 벗어나려는 반을 가까이 당겼다. 졸지에 소년의 허벅지에 걸터앉은 반은 고개를 뒤로 쭉 빼며 질색했다.
“미쳤냐? 한 번 했으면 됐지. 안 해, 못 해. 너도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어?”
반은 고개까지 휙휙 내저으며 거부하다가 애먼 디아를 책망했다. 잠깐 머리가 어떻게 돼서 일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저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디아를 목격하자 양심이 걸레짝이 됐다. 아무리 욕구를 누르고 살았기로서니 디아와… 디아와 그딴 짓을 하다니. 반은 할 수만 있다면 열린 창문 너머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어차피 2층이라 별반 다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상체를 벌떡 세운 디아는 고집스럽게 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민망한 자세였지만 디아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반의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했다.
“반이랑 혀 비비는 거 기분 좋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진짜….”
“사랑해서 그런가 봐.”
“내 말 듣기는 하냐?”
정말 화를 내야 말을 들을는지. 반은 한번 꽂히면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디아를 부루퉁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포기했다. 쉽게 놓아줄 놈이 아니었다.
“…딱 한 번만 하는 거다. 두 번은 안 돼.”
디아는 신의 계시를 들은 것처럼 눈부시게 웃었다. 살을 내어 주고 뼈를 취하는 것도 아니고, 살과 뼈를 모조리 빼앗긴 반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를 내버려 두었다.
난생처음 한 키스에 매료된 건 디아의 잘못이 아니었다. 디아를 상대로 단 1초라도 성욕을 느낀 본인이 쓰레기이자 문제 덩어리였다.
진짜 망했다….
반은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
키스를 네 시간 동안 한 적이 있었던가. 어릴 적으로 거슬러 가면 뗐다 붙였다 제법 오래 키스한 경험이 있지만 그래 봤자 삼십 분 남짓이었다. 섹스도 네 시간을 하면 지루 소리 듣고 욕 처먹을 판에 키스만 네 시간? 말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도 되지 않는 짓을 디아는 해냈다.
“예열을 좀 높게 했나 봐. 다음에는 더 잘할게.”
반은 디아가 직접 만든 미트파이를 멀뚱히 내려다봤다. 웨인이 새로 가져다준 서적 중에 요리책이 한 권 끼어 있던 덕에 요즘 식사 준비는 디아가 도맡았다. 겉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미트파이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요리에도 소질이 있는 모양이다. 키스에는 더한 소질이 있었지만 말이다.
“내가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여?”
반은 제 입술을 가리키며 빈정거렸다. 퉁퉁 부어올라 두 배로 두꺼워진 입술은 말을 하거나 입을 벌릴 때마다 아릿아릿했다. 혀는 또 어떻고. 하도 빨려 혀뿌리가 얼얼한 데다가 발음도 엉망으로 뭉개졌다.
수분이란 수분은 죄다 빨린 통에 건조해진 입술에 립밤을 바르며 그만하자고 해도 번들거리는 립밤마저 핥아 먹은 디아는 마찬가지로 통통하게 부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빙긋 웃었다.
“먹여 줄까?”
“싫어, 미친놈아.”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진저리를 친 반은 제 손으로 미트파이를 잘라 먹었다. 때마침 허기가 지지 않았다면 아직도 붙잡힌 채 혀나 쪽쪽 빨리고 있었을 것이다. 반은 그나마 이번 한 번으로 이 상황이 끝난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꾸역꾸역 고통스러운 식사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은 몰랐다.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고, 세 번이 수십 번이 된다는 것을.
그날부로 디아의 정신머리는 급격히 썩어 들어갔다. 반의 견해로는 그랬다. 굿나잇 키스를 빙자한 뽀뽀를 키스로 변질시키질 않나, 아침에 일어나 양치하자마자 모닝 키스라며 은근슬쩍 입을 맞추지를 않나, 책을 읽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으며 반을 소파에 넘어뜨렸다.
반은 악악 소리 지르고 발버둥 치고 후다닥 도망 다니다가 결국 입술을 갖다 바치곤 했는데, 가슴에 손을 얹고 더러운 의도는 없었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단지 디아가 너무나 힘이 세고 배우도 울고 갈 정도로 불쌍한 연기를 잘하는 탓이라고 책임을 회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침저녁으로 들르는 웨인의 눈을 슬쩍 피하며 부은 입술을 감추는 날이 일곱 번쯤 됐을 때, 반은 키스쯤은 해 주는 몰상식한 베이비시터가 되어 있었다.
***
손가락질당해도 싼 베이비시터는 오랜만에 집 안을 환기했다. 웬일로 웨인이 들르지 않아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했는데 복병이 나타났다. 한 주의 끝에 안개 같은 비가 내린 것이다. 속 시원히 쏟아지면 차라리 좋으련만 빗줄기는 분무기로 뿌리듯이 흩날리며 찝찝함과 답답함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약간은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바깥을 구경하던 중에 뒤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창밖으로 향했다. 창백한 손이 희미한 빗줄기에 젖어 들었다.
“차가워, 반.”
곁을 돌아보자 설레하는 소년의 옆얼굴이 보였다. 반은 얘가 왜 이렇게 신났나 의문을 가졌다가 아차 싶었다. 주민이 몇 없는 동네이기는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항상 커튼을 치고 생활했다. 그러니 디아가 여태 비를 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토록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또 주제 모르는 동정심이 일렁였다. 갈등하던 반은 디아의 손목을 잡고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비 보러.”
씩 웃은 반은 현관 대신 창고 방으로 들어갔다. 걷는 일이 드문 커튼을 젖히자 작은 테라스가 나타났다. 나무를 심어 둔 정원 방향으로 설치된 테라스라 지나다니는 행인에게 들킬 위험이 없었다. 오래도록 열지 않아 녹슨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나와. 괜찮으니까.”
호수를 보러 갔을 때를 제외하면 외부로 나간 적 없는 디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반을 따라 테라스에 발을 들였다.
시커먼 구름에서 부스스 떨어지는 빗방울이 머리카락과 뺨에 달라붙었다. 반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디아를 응시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질투 날 정도로 체격이 좋아졌고 간간이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하기는 했지만, 이러나저러나 어리숙한 아이였다. 사랑스럽고 안타까웠다.
“여기는 비가 맨날 이렇게 와서. 다른 데로 가면 엄청 쏟아져.”
반은 디아가 영상으로만 봤을 폭우를 설명해 주었다. 밖에 나가자마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서 우산이 소용없고, 전에는 술 먹고 뛰어다니다가 감기 걸려서 꽤 고생했다고. 웃으며 얘기하던 반은 저를 돌아보는 디아와 눈이 마주쳤다. 가느다란 빗줄기도 비라고, 촉촉하게 젖은 디아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같이 비 맞을래.”
웃던 얼굴을 애매하게 굳힌 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공수표를 날렸다.
“…그럼. 시간 날 때 가자.”
시간이 언제 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종종 찾아오는 죄책감에서 등을 돌린 반은 이쯤이면 됐다 싶어 테라스를 벗어나고자 했다. 젖은 속눈썹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한 걸음 뗐을 때 목덜미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푸르른 눈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순간 약한 빗줄기가 테라스 난간에 부딪히는 소리가 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요 며칠 그랬던 것처럼, 디아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맞물었다. 축축하지만 서늘하게 식은 입술이 닿으며 정반대로 뜨거운 숨이 입 속으로 밀려들었다. 장난처럼, 못 이기는 척 혀와 숨결을 교환하던 키스와 사뭇 달랐다. 반은 이전과는 다른 위기감을 느꼈다. 이번 키스만큼은 거절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했으나… 이상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밀려나던 반은 나무로 된 테라스 문에 등이 닿았다. 지붕이 없어 내리는 부슬비를 모조리 맞았지만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디아와 입술의 위치가 정확히 맞아 들었으나 반은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윤리적으로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본능에 충실한 몸뚱이 탓일 수도 있다. 혹은 동정심 탓이거나.
디아는 조심스러웠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어 반을 잡아먹을 것처럼 몰아세웠다. 뜨끈한 혀가 점막을 핥았다. 디아는 늘어진 반의 손목을 잡아 제 어깨 뒤로 넘겼다. 머뭇거리다가 소년의 목에 팔을 두른 반은 진득한 키스를 내치지 않고 받아 주었다.
“하아, 음….”
등이 자꾸만 문에 부딪히자 허리를 끌어안은 디아가 팔에 힘을 줘 당겼다. 윗배부터 아랫배까지 빈틈없이 맞붙으며 다리 사이로 허벅지가 들어왔다. 뒤로 넘어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한 자세였으나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이기에는 디아가 퍼붓는 키스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반은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않은 입 속에서 넘어오는 침을 삼키며 입 안을 헤집는 혀를 받아 주다가 흠칫 떨었다. 디아와 비비고 있는 부위는 단지 입술만이 아니었다. 디아의 허리가 움직였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던 반은 이내 불에 덴 듯이 물러났다.
“하아, 어. 잠깐만. 잠깐.”
“아직….”
“아니, 아직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디아의 얼굴을 턱 쥐고 뒤로 밀어 내자 손가락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입 속에서 뒤엉키던 혀가 손가락 마디를 핥자 더욱 난처해진 반은 허리를 안은 팔을 억지로 떼어 내려고 했다.
총명한 눈빛은 사라지고 무언가를 원하는 열망만이 담긴 녹색빛 눈동자가 오싹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하던 반은 엉덩이에서 딱딱한 것이 잘게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나 전화. 전화 왔다, 디아.”
당분간 연락이 안 될 거라고 지인들에게 전했으니 광고 전화일 테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깟 광고 전화, 백 통도 받겠다. 손을 떼어 내면 달려들까 봐 디아의 돌진을 막아 내는 데 급급했던 반은 엉덩이를 쑥 매만지는 손길을 느끼고 기겁했다.
“미쳤…!”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자 어느새 혀와 손을 깔끔하게 물린 디아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자.”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준 디아는 흑심 따위 없는 얼굴로 슬며시 웃었다. 입술을 새빨갛게 물들인 것으로 모자라 비에 흠뻑 젖기까지 한 모습은 상대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여서 은근한 경계심이 돋았다. 냉큼 핸드폰을 빼앗아 든 반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마트 캐셔이자 친구인 잭이었다.
전화가 끊기기 전에 잽싸게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반은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가며 부은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 반! 뭐 하고 있어?
“그냥 쉬고 있지. 일하는 중?”
- 막 교대했어. 저, 오늘 시간 좀 돼?
“오늘?”
-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고. 온 지 반년이나 됐는데 식사 한 번을 못 했잖아.
반은 뒤를 힐끗 돌아봤다. 얌전히 안으로 들어온 디아가 테라스 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중이었다. 식량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빈집에 디아를 혼자 두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반은 거절하지 않고 금방 가겠다고 답했다. 잭은 어딘지 모르게 들뜬 목소리로 조심해서 오라는 인사를 전했다. 순식간에 약속을 잡고 통화를 끝낸 반은 젖은 머리카락을 터는 디아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창고를 나섰다.
“씻어라. 옷은 따뜻하게 입고.”
“반은 안 씻어?”
“씻어야지. 아. 나 잠깐 마트 좀 다녀올게.”
모퉁이를 돌아가며 평소와 같이 말했으나 디아에게 보이지 않는 표정은 엉망진창이었다. 열이 몰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욕실로 들어간 반은 디아가 뒤따라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갔다.
거울을 들여다보자 이상한 짓은 혼자 다 한 것처럼 뺨과 입술이 울긋불긋한 남자가 비쳤다. 꼴사나운 모습에 질겁한 반은 얼른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아직도 혀가 돌아다니는 감각이 남은 입 안을 헹구면서 디아와 키스한 순간을 되짚어 봤다.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동정심에 그랬을 뿐이라는 핑계가 낯부끄러워질 정도로. 단지 1초, 딱 1초 욕구를 느낀 것이 아니라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정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홀린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까딱했다가는 디아를, 어르고 달래고 재우고 먹이며 키운 디아와….
몹쓸 상상이 뻗어 나가면서 낯빛이 새하얗게 바뀐 반은 묘한 감정으로 뒤덮인 잠시간의 순간을 어떻게든 포장하려고 애썼다. 디아가 그런 쪽으로 엄청난 어필이 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본능을 따라, 오랜 경험 탓에 버릇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홧김에, 실수를 저지른 것뿐이라고. 본능에 충실한 몸뚱이가 개탄스럽다.
애초에 키스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강렬히 후회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반의 머릿속에 문득 옆집 남자가 떠올랐다. 급한 대로 그놈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몇 발 빼고 나면 불순한 생각이 더는 안 들지도 몰랐다.
그래. 웨인을 잠깐 빌려 쓰자. 그래야겠다. 잭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눈 딱 감고 딱 한 번만 자자. 시원하게 결론 내린 반은 찬물로 머리를 식히고 미리 가져다 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입장 정리를 대충 끝내자 욕실을 빠져나와 디아를 마주하는 것이 대단히 곤혹스럽지는 않았다.
“안 씻었어?”
디아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 그대로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 키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묻자 젖은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가 생뚱맞게 되물었다.
“마트 가는 거 맞아?”
“뭐?”
“옆집 가는 건 아니고?”
반은 한순간 말을 잃었다. 무슨 눈치가 저토록 빠른지. 놀랍기도 하고 기도 막혀서 헛웃음을 지으며 시치미 뗐다.
“내가 옆집엘 왜 가냐? 마트 가는 거 맞아. 뭐 사 올까?”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 되뇌며 디아에게 다가간 반은 옷소매로 젖은 뺨을 닦아 주었다. 의부증 걸린 것처럼 꼬치꼬치 물어 대던 디아가 긴 속눈썹을 늘어뜨렸다. 속눈썹에 맺힌 빗방울을 엄지로 훔친 반은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 어르는 듯이 흔들었다.
“뭐 사다 줄까, 우리 이쁜이.”
불편하다고 해도 이 정도 너스레는 떨 수 있는 반은 웃음을 잃은 디아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렸다. 말없이 눈만 깜박이던 디아가 손바닥에 입술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딸기.”
“얌전히 기다리면 잔뜩 사다 줄게.”
“얼마나 기다려?”
옆집에 들르는 계획을 없애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오가는 데 한 시간을 잡고 한 시간 정도 식사한다고 치면 두세 시간쯤 걸릴 듯했다. 반은 지하에서 꺼내 와 도로 벽에 걸어 둔 시계를 바라보며 적당한 숫자를 골랐다.
“숫자 8. 그 전에 들어올게.”
큼직한 시계를 끌어안은 채로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작은 디아가 떠올라 느슨한 미소가 피었다. 옛날처럼 안고 다녔다가는 허리가 나갈 정도로 성장한 디아는 경계심이 사라진 반을 바라보다가 옅은 웃음을 되찾았다.
“빨리 와. 기다릴게.”
“당연하지. 씻고 따뜻하게 있어. 감기 걸린다.”
소년을 일으켜 위층으로 올려보낸 반은 끈적한 감촉이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 입술을 깨물면서 차고로 향했다.
차를 몰고 나올 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추적추적하게 젖은 거리로 빠져나온 반은 교도소나 폐공장 일부분을 뚝 떼어 온 것 같은 옆집을 흘끔거렸다. 아프기라도 한 건지, 하루도 안 거르고 찾아와 속을 뒤집어 놓곤 했던 웨인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디아와 그런 짓을 하고서 얼굴을 마주했다면 분명 티가 났을 터다. 디아의 귀신같은 감보다는 덜하지만 눈치가 빠른 웨인이 어떤 망발을 지껄일지 안 봐도 비디오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 디아 때문에 웨인의 몸을 빌리지도 못하고 수절하게 생긴 반은 양심의 가책을 안고 액셀을 밟았다.
텅텅 빈 마트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반은 잭을 만나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우산을 쓸 정도로 내리는 폭우가 아닌 부슬비를 그냥 맞으며 도착한 식당은 어쩌다 가끔 고향에 오면 매번 찾는 곳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잭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반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몇 달 전에 비해 야위었다나 뭐라나. 그간의 생활을 되짚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햇볕을 쬐지 못해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는 창백해졌고, 운동을 게을리했으니 어렵사리 붙인 근육도 푸시시 꺼졌다.
건조한 뺨을 매만지며 씁쓸하게 웃은 반은 때마침 나온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며 잭과 담소를 나눴다. 여태 잡히지 않은 살인범과 게으른 경찰에 대한 욕으로 십 분가량을 허비한 반은 망설이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내가 드라마를 봤는데.”
“어떤 거?”
“그냥 옛날 거. 거기서 주인공이 어린애를 하나 키우거든.”
반은 제 고민을 드라마로 둔갑해 숨길 것은 숨기고, 드러낼 것만 쏙쏙 골라 잭에게 전달했다. 어릴 때부터 키워 온 아이가 성인이 되자마자 주인공에게 육체적인 접근을 시도했고, 주인공은 줄곧 거절했으나 딱 한 번의 끌림을 느끼고 괴로워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본인 얘기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표정 관리를 한 반은 잭이 내놓을 의견을 기다렸다. 반이 거절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잭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몇 살 차인데?”
“어? 음….”
제법 어려운 질문이었다. 디아의 겉모습을 염두에 두자면 여덟 살 정도 차이가 나겠지만, 막상 태어난 순간부터 카운트한다면 디아는 기껏해야 생후 7개월이었다. 반은 떠올리기만 해도 식은땀이 다 나는 개월 수에 섬뜩해졌다가 진실에 가까운 답을 했다.
“…스물여덟 살 정도?”
“미쳤다….”
흥미롭게 듣던 잭이 진저리치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상상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 친구의 반응이 양심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진짜 별로다. 난 또 열 살 정돈 줄 알았지. 어리니까 멋모르고 그러는 걸 어른이 받아 주면 안 되지.”
“…그렇지. 쓰레기지.”
“그렇게 어린애들 좋아하는 거, 난 좀 이해가 안 되더라. 비정상이야, 그거.”
삽시간에 쓰레기, 범죄자, 사회 부적응자가 된 반은 맞장구를 치면서 바짝 타는 목을 물로 적셨다. 여기서 그 아이가 실은 더럽게 힘이 센 외계인이라고 해 봤자 범죄자를 옹호하는 그림밖에 더 될까 싶어 주제를 바꿨다.
이번에는 잭이 꽂힌 드라마에 관해 열띤 토론을 하면서 접시를 비웠다. 마침내 음식이 바닥을 보일 즈음, 냅킨으로 입을 닦은 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셸 말이야. 연락돼?”
“미셸? 왜?”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반은 의문 어린 눈으로 잭을 응시했다. 냅킨을 반으로 접어 접시 밑에 끼운 잭은 지난 일을 떠올려 보듯 이맛살을 구겼다.
“얼마 전에 전화가 왔거든. 모르는 번호로 와서 안 받다가 한 번 받았는데 할머니더라고.”
“…둘이 그렇게 친했어?”
“단골이시잖아. 우리 친해.”
간혹 저녁 식사도 함께했다는 소리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피붙이 손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데 마트 캐셔와는 시시덕대는 미셸의 무관심함이 언짢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잭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마트 오면 전해 달라고 하셨는데 조금 이상해서.”
잭은 정말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녁값을 확인한 반은 지갑을 꺼내며 대충 둘러댔다.
“요새 좀 오락가락해. 노망날 때 됐잖아.”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냐.”
“그래서 미셸이 뭐라고 하든?”
우스갯소리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상황이 다소 이상했다. 핸드폰도 멀쩡하고, 여차하면 웨인을 통해 전달하면 될 텐데 왜 하필 잭에게 전화했을까.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중한 실험체를 무식한 제게 맡긴 것처럼 느닷없이 잭에게 연락한 이유가.
“그때 혹시나 해서 적어 놨거든. 잠깐만.”
잭은 의자에 걸어 둔 외투를 껴입고 주머니를 뒤졌다. 두 번 접은 쪽지를 건네받은 반은 또박또박 적힌 두 문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뭐라는 거야.”
“왜?”
“진짜 노망났다니까. 이상한 장난을 치고 있어.”
손가락 두 개로 잡은 쪽지를 팔랑팔랑 보여 주고 주머니에 쑤셔 넣은 반은 다가온 직원에게 밥값을 치렀다. 팁을 넘겨주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식당에서 나와 마트 반대 방향에 사는 잭과 인사를 나눴다. 잭은 그를 배웅하며 쓸데없는 조언을 덧붙였다.
“미셸, 알고 보면 좋은 분이셔. 너무 미워하지 마.”
“알고 봐도 안 착해. 못돼 처먹었어.”
주차장 방향으로 발을 돌린 반은 마침 등을 돌린 잭을 불러 세웠다.
“참. 나 인제 간다. 복귀해야 돼.”
“그래? 오늘 만나길 잘했네.”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잭에게 맞인사를 해 준 반은 뒤돌자마자 부리나케 달렸다. 흩날리듯 내리는 비가 머리카락과 옷가지를 기분 나쁘게 적셨다. 애써 평온하게 유지하던 표정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마지막 날까지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
“이 개새끼….”
주차장에 도착한 반은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고물 차를 걷어차 가며 키를 돌렸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들렸다. 하늘에서 울리는 것인지, 굴러가는 것이 용한 자동차에서 나는 소리인지 분간 가지 않았다. 반은 시동이 걸리자마자 액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 시꺼먼 구름이 낀 하늘 아래 멀리 보이는 나무숲이 스산하게 가지를 흔들었다.
‘내 의뢰인은 미셸보다 다정하거든.’
언젠가 웨인이 던진 한마디가 귓가를 빙빙 맴돌았다. 어물쩍 미셸과 관련된 대화를 피하던 웨인과 기다리겠다고 순하게 답하던 디아의 모습이 어질어질한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만났다면 ‘그것’을 반드시 지킬 것.
핸들을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뜬금없게도 디아가 부탁한 딸기를 사 오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엄청 서운해하겠지. 아니, 의심할지도 몰랐다. 옆집에 간 게 아니라 친구 좀 만나고 왔다고 변명하면 되려나. 그런데 굳이 디아에게 일일이 변명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아니, 중요한 건 변명 따위가 아니었다.
막막한 상황이 닥치면 회피하고 외면하는 버릇이 있는 반은 줄어들지 않는 거리와 시간을 곁눈질하다가 욕설을 뱉었다. 웨인, 망할, 그 개새끼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몇 달간 지켜보기만 한 걸까. 하필 웨인이 자취를 감춘 날 받은 메시지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삼십 분이 걸리는 거리를 이십 분 만에 주파한 반은 차고까지 가지 못하고 길가에 차를 댔다. 운전석에서 뛰쳐나와 엽총이 있는 창고로 발을 틀었다가 작은 틈을 발견했다. 커튼이 꼼꼼히 쳐진 창문 중 부엌 쪽에 틈이 있었다. 불을 밝힌 덕에 살짝 벌어진 커튼 사이로 식탁이 언뜻 보였다.
하얀 스웨터를 걸친 디아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불안이 가라앉으며 안도감이 물 밀듯 몰려왔다. 그러나 반은 곧장 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디아의 어깨 너머로 있어서는 안 될 인영이 일렁거렸기 때문이다.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그놈이라는 것만큼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난 반의 뺨 위로 붉고 푸른 불빛이 어른거렸다. 어둠 속에서 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반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뭐 하십니까?”
순간 눈이 멀 정도로 환한 손전등 빛이 쏘아졌다. 손바닥으로 빛을 가리며 눈을 찌푸린 반은 몇 달 전 집으로 찾아온 경찰을 간신히 알아봤다. 울타리 너머에서 손전등을 비춘 경찰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반을 훑어 내리다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반은 그의 허리춤에 달린 권총을 흘긋하고 순순히 답했다.
“여기 삽니다. 들어가려고요.”
“아, 여기 사는 그….”
“클라크.”
“예. 클라크 씨.”
신원은 확인했지만, 의심을 거두지는 못한 듯 떠나지 않는 경찰에게서 미제 사건에 대한 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밤중에 집 앞을 서성거리는 남자를 탐문하려는 정의감 정도는 있는 모양인지 손전등으로 집을 비췄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망했다.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집 안까지 둘러보겠다고 하면 디아의 존재를 설명해야 했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신원을 증명하는 것은 능력 밖이었다. 이걸 어떻게 둘러댄다…. 뒷짐 진 채로 손바닥을 긁던 반은 창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머리통을 끌어안긴 반의 관자놀이에 촉촉한 촉감이 닿았다.
“자기, 다녀왔어?”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뻣뻣하게 굳은 반은 눈알을 굴려 괴상망측한 애칭을 내뱉은 사람을 찾아냈다. 당장이라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배신자가 보였다. 창밖으로 상체를 빼낸 웨인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더니 입술 위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이제 막 경찰을 발견한 것처럼 능청스럽게 놀란 척을 했다.
“무슨 일이신지….”
반은 웨인이 이토록 순종적인 어투를 구사할 수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놈과 닿은 피부 위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으나 못 볼 꼴을 목격한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찰을 돌려 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반은 연기하는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뺨을 더듬는 웨인의 손을 잡았다. 아주 세게, 으스러질 듯이.
“큼, 뭐…. 같이 사시나 봐요?”
“네. 얼마 전부터요.”
입이 떨어지지 않는 반을 대신해 웨인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놨다. 보수적인 동네의 보수적인 경찰은 미끈한 남자 둘이 서로를 만지작거리는 꼴을 차마 보기 힘들었는지 수첩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주위에서 뭐 수상한 사람 본 적 없습니까? 요즈음.”
“아뇨. 없습니다.”
“그쪽은?”
경찰의 시선을 받은 웨인은 반의 날렵한 턱을 살살 쓰다듬으면서 대꾸했다.
“집에서 할 게 많아서…. 본 적 없는 것 같네요.”
미묘한 어감 덕분에 확신을 얻은 경찰이 티 나게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수상한 사람이 보이거나 의심 가는 것이 있으면 바로 연락 달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병이 옮기라도 하는 양 황급히 차에 올라탄 경찰이 집 앞을 떠났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차 뒤꽁무니를 지켜보던 반은 경찰이 떠났음에도 목울대를 은근슬쩍 만지는 손을 거칠게 내쳤다. 이제 고향에 얼씬도 못 하게 생겼다. 좆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네가 왜 거기 있냐?”
구린 임기응변으로 남의 이미지를 박살 낸 웨인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대답 없이 창을 닫았다. 쌩하니 집 안으로 들어간 웨인은 틈 하나 보이지 않게 커튼을 쳤다. 주먹을 세게 움켜쥔 반은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지키라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저 새끼는 대체 뭐고.
어떻게 된 인간들이 제대로 된 설명 한번 안 해 주고 이래라저래라 시키기만 하냐.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잘 다녀왔어?”
“네가 들였어?”
한껏 예민해진 반은 현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반겨 주는 디아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황한 듯이 눈을 느리게 깜박인 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2층에서 책을 읽는데 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나가 보니 웨인이 있었다고 실토한 소년이 굳은 뺨을 매만졌다. 애먼 사람에게 성질부린 것을 깨달은 반은 사과의 표시로 소년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놔주었다.
“올라가 있어. 금방 갈게.”
“…왜?”
“얼른.”
속삭이며 등을 떠밀었지만 디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반에게 바싹 들러붙어 머리카락과 외투에 묻혀 온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숙인 디아의 코끝이 차갑게 식은 귓불을 스쳤다.
“마트 다녀온 거 맞아?”
“…아니. 그건 미안. 나 쟤랑 얘기해야 하니까 잠깐 올라가 있어.”
“쟤랑 얘기하는데 왜 내가 올라가는데.”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디아의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혔다. 유독 웨인이 엮이면 집요해지는 탓에 위층으로 올려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머리가 컸다고 기 싸움을 하려고 드는 디아를 못마땅하게 노려보길 잠시, 기다리다 못해 현관으로 나온 웨인이 팽팽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둘이서 뭘 그렇게 속닥거려?”
반사적으로 디아를 등 뒤로 숨기는 반을 쭉 훑어 내린 웨인이 식탁으로 향했다. 올라갈 것이 아니라면 소파에 앉아 있으라고 손짓한 반은 남자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섰다. 의자에 걸터앉은 웨인은 하얀 손수건을 손바닥에 얹으며 잔소리를 늘어놨다.
“저거 놔두고 어디 다녀왔어?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왜 왔어?”
“매일 들렀는데 새삼. 앉지?”
싱크대에 기댄 반은 제가 어리석었음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터트리며 여전히 낯선 단어를 내뱉었다.
“아르카디아.”
“뭐?”
“아르카디아가 뭐냐고.”
웨인은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거실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디아는 그릇 장식장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저거 이름.”
“말고.”
“…낙원?”
까맣게 잊고 있던 미셸의 메모가 멍청하게도 지금에 와서 떠올랐다.
작전명 아르카디아. 찾아올 사람이 이 단어를 말할 거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웨인은 단 한 번도 ‘아르카디아’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팔을 뒤로 돌린 반은 싱크대 위를 더듬으며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엿 같게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맨손으로 웨인을 제압하기는 힘들었다. 가뜩이나 운동을 게을리한 요즘, 무기 없이 저놈을 상대하는 만용은 부리지 않는 편이 나았다.
“분위기가 왜 이래. 내가 온 게 그렇게 불편해?”
주머니에서 꺼낸 갈색 병을 손수건을 향해 기울이던 웨인이 눈길을 보냈다.
“우리 그동안 꽤 친해지지 않았나? 앉아서 얘기해.”
“친해지기는 무슨.”
코웃음을 친 반은 곁눈질로 식칼 보관함이 위치한 곳을 살폈다.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였다. 긴장감이 차올랐다. 웨인과의 거리를 계산하기 위해 눈알을 돌린 순간 시선이 맞물렸다.
반은 지체할 것 없이 등을 돌려 칼 손잡이를 잡으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웨인이 손수건으로 반의 입과 코를 틀어막으면서 뒤로 당겼다.
“읍…!”
칼을 거머쥐기도 전에 끌려간 반은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추고 사력을 다해 몸을 뒤틀었다. 팔꿈치로 웨인의 옆구리를 후려쳤으나 팔과 상체가 한데 옭아매여 가슴이 압박됐다. 점점 숨이 막혀 왔지만 그렇다고 들이마실 수도 없었다. 힘겹게 치켜뜬 눈에 핏발이 섰다.
“쯧. 잘 안 드네….”
“으, 읍…!”
웨인은 반의 발버둥을 어렵사리 막아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 딴엔 한평생 몸을 쓰고 살아왔다고, 온몸으로 저항하자 제법 벅찼다. 이마에 핏대를 세운 웨인은 가슴을 더욱 압박하며 반이 숨을 들이마시도록 유도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반은 명치를 짓이기듯 누르는 힘에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묘한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취제니까 덜 아플 거야.”
귓가에 대고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인 웨인은 다리가 풀린 반이 휘청거리기 무섭게 머리채를 잡아 싱크대 모서리에 갖다 박았다.
“흐윽….”
아프다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반은 싱크대 위에 세워진 접시 거치대를 쓸어내리며 주르륵 미끄러졌다. 떨어진 그릇이 깨져 사방으로 흩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바닥에 쓰러진 반은 소란을 들은 디아가 거실에서 내달려 오는 소리를 들었다. 너라도 튀라든가, 하다못해 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잠그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다 죽어 가는 신음뿐이었다. 눈꺼풀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닫혀 가는 시야로 디아가 보였다. 언제 저렇게 자랐는지, 장성한 디아는 엉망이 된 부엌과 쓰러진 반을 새파랗게 얼어붙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순간 웨인에게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새였다.
방심하고 있다가 시원하게 얻어맞은 웨인이 나동그라졌다. 그를 타고 올라 양손으로 목을 조르는 디아의 뒷모습이 어른어른 흐려졌다. 귓가에 으르렁거리는 디아의 목소리가 닿았지만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반은 잠시나마 우스운 생각을 했다. 저 폭력적인 놈이 설마 제 손으로 키운 제 새끼는 아니겠지…. 아니어야 할 텐데. 웃고 싶었으나 입꼬리는 미동도 없었다. 마침내 시야가 까맣게 점멸하며 디아와 웨인이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
***
반의 정신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무의식 속을 이리저리 부유했다. 부슬비를 맞으며 긴 속눈썹을 들어 올리는 디아의 곱디고운 얼굴이 빠른 속도로 어려졌다. 시계태엽을 되감은 듯이 청초한 소년이 되었다가 사랑스러운 어린아이가 되었다.
형광색 불빛이 여기저기 튀고,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시야에 온갖 색이 뒤섞였다. 폭발의 중앙에 있는 아이는 점점 어려지더니 아랫니밖에 없던 시절을 거쳐 막에 감싸인 모습으로, 종국엔 가느다랗고 징그러운 촉수로 돌아갔다. 번쩍번쩍 튀는 불빛과 원색으로 얼룩진 유리 샬레가 하얗게 뒤덮였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무의식을 헤맸을까.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끌어 올린 반은 두개골을 강타하는 통증에 끙끙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저릿저릿한 손을 들어 이마를 더듬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디아와 키스한 후 도피하다시피 잭을 만나 미셸이 남긴 메시지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웨인의 습격을 받은 것이 차례로 떠올랐다.
“이 개새끼가 진짜….”
분노에 치를 떨던 반은 비로소 주변을 둘러볼 정신을 챙겼다. 몽둥이로 후려친 것처럼 뇌가 울리는 머리통을 힘겹게 들어 올린 반은 자신이 있는 곳을 천천히 살폈다. 시선을 돌릴수록 의문은 배가 됐다. 기억을 되짚어 볼 필요도 없이 낯선 곳이었다.
창문에 나무판자를 못질한 작은 방. 가구라고는 몸뚱이를 간신히 누일 수 있는 낡은 철제 침대와 나무 의자, 작은 탁자가 전부였다. 깔끔하게 개어진 모포와 베개, 덜렁 하나 있는 램프를 확인하고 눈을 돌리자 문 두 개가 보였다. 한쪽 벽에는 나무 문이, 다른 쪽 벽에는 교도소에서나 볼 법한 철문이 있었다.
침대를 짚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반이 철문을 향해 걸음을 떼려던 순간 나무 문이 열렸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