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2권) (5/19)

아르카디아 2권

<2부>

01.

감옥 같은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당연하게도 웨인이었다. 머리통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덤벼들려던 반은 놈의 몰골을 보자마자 사기가 꺾였다. 비틀거리다가 침대에 주저앉자 문을 닫은 웨인이 의자로 다가왔다.

“날뛸 줄 알았는데.”

웨인은 의자에 걸터앉으며 반을 향해 겨눈 권총을 흔들었다. 여차하면 겁박하려는 심산이었나 보다. 반은 놈을 훑어 내리면서 빈정댔다.

“네 꼬라지나 보고 와.”

“…버르장머리가 없더라고.”

웨인은 웃으며 대꾸했으나 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봐줄 만하던 얼굴은 쥐어 터졌고, 팔 한쪽은 부목으로 고정한 채였다. 전체적으로 처참하게 깨졌다.

반은 설마 디아가 그랬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답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애를 잘못 키웠다는 자괴감과 만족스러운 복수에 대한 쾌감이 번갈아 느껴졌지만 당장은 쾌감이 앞섰다. 반은 어느새 웨인을 흠씬 패 줄 수 있을 만큼 자란 디아를 찾았다.

“디아는.”

총구가 철문을 가리켰다. 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철문을 흘끔거렸다. 꼬박꼬박 소년의 상태를 확인하며 서적을 떠안긴 지난날을 보자면 웨인이 디아를 해칠 가능성은 없었다. 다행히 빼앗긴 것도 아니어서, 디아에 관한 걱정은 일단 내려놓기로 한 반은 거즈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여기 어디냐?”

놈은 침묵을 고수하며 권총 손잡이 부분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대답해 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거세게 갖다 박은 머리통이 지끈거렸다.

이마를 짚은 반은 의자를 차지한 웨인까지의 거리와 그가 들고 있는 권총을 곁눈질했다. 제 몸 상태를 보면 아무리 웨인이 한쪽 팔을 못 쓴다고 한들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지금은 고분고분하게 굴 때였다.

“…이유가 뭔데. 들어나 보자.”

순순한 말투와 달리 노려보는 눈 속에 적대감이 득시글거렸다. 반을 바라보던 웨인은 한참 뜸 들이다가 애매모호한 대꾸를 했다.

“네가 아직 필요해서.”

“필요 없어지는 날도 오나 보네?”

“그렇지. 지금은 디아… 가 덜 컸으니까.”

웨인은 반이 손수 지어 준 이름이 못마땅한 듯이 ‘디아’라고 발음할 때마다 미간을 구겼다. 떨떠름한 반응은 둘째 치고, 반은 그의 말속에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짚어 냈다. 다 컸다며? 날카롭게 묻자 웨인이 비웃음을 띠었다.

“육체는 성체이긴 하지. 그런데 아직도 네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데, 네 눈에는 그게 멀쩡해 보여?”

비꼬는 것에는 일가견 있는 웨인이 허점을 찔렀다. 반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였지만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지. 소심하게 항변하자 못 들은 체한 웨인이 품속에 권총을 집어넣고는 이마를 긁적였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에 반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사기, 폭행, 납치, 감금까지 했으면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냐고 빈정거리자 마침내 꾹 다물린 입술이 벌어졌다. 이내 그의 입에서 반은 모르는 정보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저것들에게는 정신적인 숙주가 필요해. 말 그대로 기생하는 거지. 네 경험에.”

“…내 경험?”

디아가 있을 철문 건너편을 눈짓한 웨인이 황당하다는 낯을 한 반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비현실적이고 황당무계했다. 하지만 촉수가 막으로 바뀌고, 막 안에서 아기가 생기는 현상을 목격한 적 있는 반은 그의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각 개체는 무의식중에 선택한 인간을 숙주로 삼아 빠른 속도로 육체적 성장을 이루어 낸다. 시간을 건너뛰는 만큼 정신적 성장은 더딜 수밖에 없는데, 이는 숙주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이룩한다. 숙주가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까지 모조리 빌려 쓴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식기를 잡는 법, 글을 읽는 법, 타인과 교류하는 법, 아울러 공연을 관람하고 즐거워한 경험, 누군가를 사랑한 경험, 기쁘고 슬펐던 경험을 속속들이 가져가 개체 각각의 본성으로 재해석해 받아들인다. 달리 말해 기억의 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숙주가 중요한데…. 어쩌다 보니 네가 돼서 나도 마음이 아프다.”

반의 조막만 한 두뇌 용량에 알맞게 설명을 끝낸 웨인이 안타까운 눈빛을 했다. 또 한 번 무시당한 반은 울컥하기는커녕 얼이 빠졌다. 아무렴 우리 집 지하실에서 외계인이 태어났다는 것보다야 훨씬 그럴싸한 이야기였지만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반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겨 농담을 들은 것처럼 굴었다.

“참 나…. 내가 속을 줄 알고.”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돼. 그냥 그렇다는 거니까.”

웨인의 무신경한 태도는 농담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표정이 굳은 반은 진심으로 아니길 바라며 되물었다.

“…기생이 뭔데?”

얼굴 근육에서 힘을 탁 푼 웨인이 믿을 수 없다는 눈길을 보냈다. 반은 다급히 손을 내젓다가 쿡쿡 쑤시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뜻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이게…. 뭐, 내 과거를 디아가 다 안다고? 나 그런 얘기 들은 적 없는데….”

“그렇게 자세한 과거는 몰라. 테이블 매너나 기계를 쓰는 법이나… 그런 걸 어렴풋하게 아는 정도지. 얘기 들은 적 없는 건… 안타깝네.”

긴 한숨을 내쉰 웨인이 설명을 덧붙이나 싶더니 비아냥으로 마무리했다. 그런대로 이해는 갔지만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는 없었다. 기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섬뜩함이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내 몸에 문제는 없고?”

“피해가 없진 않지.”

이상한 소리를 들은 반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호박색 홍채가 짙은 인상을 남기는 눈이 바보같이 끔벅였다. 웨인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장은 아냐.”

“아니, 잠깐만. 문제가 생기는 걸, 그걸 지금….”

당장이고 자시고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을 새카맣게 몰랐던 반은 당혹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미셸이 남기고 간 서류에 부작용에 관한 설명은 단 한 줄도 없었기 때문이다.

횡설수설하던 반은 금세 입을 딱 다물고 웨인을 노려봤다. 미셸은 이러나저러나 하나뿐인 피붙이였다. 냉혈한이기는 해도 하나 있는 손주에게 피해가 생길 만한 일을 넘길 리가 없었다. …아마도.

“못 믿겠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반을 응시하던 웨인이 미심쩍게 웃었다. 웨인은 침대 가까이로 의자를 끌어왔다.

“생각해 봐. 미셸이 왜 너한테 디아를 맡겼을까? 내가 말했지. 이 실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몇 없다고. 그런데 머리 나쁘고 가벼운 너한테 중요한 실험체를 왜 넘겼냔 말이야.”

“그거야…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그랬겠지.”

무릎이 닿을 정도로 다가온 웨인을 노려보던 반은 본인의 짐작을 댔으나 어쩐지 손끝이 차가워졌다. 저릿저릿한 손을 쥐었다가 풀어도 불안한 예감이 가시지 않았다. 웨인은 반이 무심결에 짚어 냈다가 애써 회피한 가정을 입 밖으로 냈다.

“그렇지.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맡겼겠지. 쉽게 처리할 수 있고 없어져도 큰 문제가 안 생기는 사람한테.”

헛웃음을 터트린 반은 곧장 웨인의 멱살을 틀어쥐려고 했다. 때마침 가까이 와 있으니 놈을 제압할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그리 거창하지 못한 계획은 시도도 못 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눈 깜짝할 새 품에서 권총을 꺼낸 웨인이 반의 가슴팍에 총구를 겨눴던 것이다. 옷깃을 잡아챘던 반은 손을 스르르 풀고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불편하면 디아 얘기나 해 볼까.”

총구로 가슴팍을 꾸욱 짓누른 웨인이 뱀 같은 혀를 느긋하게 놀렸다.

“네가 몇 개월 뒤에 디아를 넘기면 어떻게 될까. 네가 그렇게 예뻐하던 놈은 작은 방에 갇혀서 햇빛 한 점 못 보고 살겠지. 지금이랑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네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저놈 피를 뽑거나 감시하는 건 아니니까. 너도 가끔은 궁금하지 않아? 저놈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인간이랑 어떤 부분이 달라서 그렇게 빨리 클 수 있는지. 며칠을 굶어야 허기를 느끼는지, 어떤 환경에서도 신체를 유지할 수 있는지, 번식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한 적 없어?”

웨인이 쏟아 내는 질문이 늘어 갈수록 반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됐다.

미셸의 실험을 극악무도한 고문으로 묘사하는 웨인의 말을 믿어야 할지, 개소리로 치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말문이 막혔다.

의뢰금을 받기 위해서는 디아를 실험실로 보내야 하고, 그곳이 마냥 편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소년이 어떤 실험을 당할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반. 날 믿어.”

가슴께에서 총구를 치운 웨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회유했다. 혼란스러움이 담긴 눈을 들어 올린 반은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를 바라봤다. 웨인은 비밀스러운 거래를 건네듯 조용히 속삭였다.

“디아를 넘기면 넌 바로 처리당해. 네 하나뿐인 가족한테. 돈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받고 죽겠지. 그런데 나한테 붙으면 살 수 있어.”

웨인이 퍼부은 폭격에 나동그라지기 직전이지만 반은 코웃음을 치며 부정하고 나섰다. 아무리 미셸이 가족을 내버리고 밖으로 도는 인간이라고 해도 스스럼없이 손주를 죽일 막돼먹은 인성은 아니었다.

“지랄하네. 넌 누구한테 붙었길래….”

씹어뱉듯 비난을 토하려던 반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묻자마자 저녁 식사 때 나눈 대화가 떠오른 탓이었다. 미셸이 황급히 연구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웨인의 뒷배는 그럼….

‘말했잖아. 이미 지구에 와 있다고.’

눈을 굴리며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던 반은 웨인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손쓸 도리 없이 멍청하지는 않은 반을 마주 보던 웨인은 잘생긴 남자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불쾌하다는 듯이 상체를 뒤로 빼는 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담담히 웃었다.

“사실 지금 널 죽여도 큰 문제는 없어.”

“그러면 왜 안 죽이는데.”

눈살을 찌푸리는 반을 관찰하던 웨인은 피식 웃으며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

허벅지에 총구가 닿았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미끄러진 권총 끝이 사타구니와 가까워졌다. 더 일그러질 수 없을 만큼 미간을 구긴 반은 깊이 들어온 권총을 손으로 쳐 냈다. 웨인은 품에 총을 집어넣으며 모두 장난이었다는 양, 손을 떼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잘 생각해 봐. 잘못하면 디아가 많이 불쌍해질 수 있다는 것도 좀 알아주고.”

여유만만하게 등을 보인 웨인이 문을 닫자마자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가 났다. 철저하기도 했다. 혼자 남은 반은 열릴 기미가 없는 문을 노려보며 통증이 여전한 머리로 미셸을 떠올렸다.

깐깐한 인상의 노인네는 상상 속에서도 웃지 않았다. 정말 미셸이 손주를 장기 말로 쓰다 버릴 심산으로 실험체를 맡겼을까. 약속한 돈은 전부 거짓말이고? 잘 모를 일이었다. 그럴 만한 인간 같기도 하고 순전히 웨인의 이간질 같기도 했다.

잭을 통해 메시지가 온 것으로 보아 미셸도 웨인의 존재를 눈치챈 듯한데…. 머리가 아프다. 제대로 얻어맞은 덕에 생각과 생각 사이의 연결 고리가 자꾸만 끊겼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 반은 몇 걸음 걸으며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방을 뒤졌다. 역시나 나무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핸드폰이나 지갑은커녕 무기가 될 만한 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디아가 있다는 철문 너머였다.

걷어차도 열릴 리 없는 두꺼운 철문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쇳덩어리가 덜컹거렸다. 쾅쾅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다가간 반은 철문 형태를 살폈다. 첫 느낌 그대로 교도소 문짝을 떼어 온 것처럼 생긴 철문은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창이 있었다.

눈만 드러내는 작은 창의 마개를 옆으로 밀어 내자 녹음이 푸르른 눈이 나타났다.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던 반이 내심 놀라 흠칫거리자 문에 찰싹 달라붙은 디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반!”

반년을 넘는 시간 동안 늘 곁에 머물렀던 목소리가 반의 귀를 사로잡았다. 반은 머뭇거림 없이 빗장을 빼서 문을 열었다. 묵직한 문짝이 스르르 열리자마자 바닥을 박차고 튀어나온 디아가 온몸을 끌어안았다.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단단함만 남은 가슴에 부딪힌 반은 휘청거리다가 뒤로 넘어갔다. 중심을 잃고 디아와 바닥으로 쓰러졌으나 아슬아슬하게 침대 프레임에 뒤통수를 박는 불상사를 피한 반은 코끝과 입술을 마구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는 디아를 안아 주었다.

“반…. 반. 걱정했어.”

“너 괜찮아? 눈이 왜 이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디아의 뺨을 잡아 올린 반이 걱정을 쏟아부었다. 축축 늘어지면서도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는 소년은 동공이 크게 확장된 상태였다. 눈꺼풀을 똑바로 들어 올리는 것이 힘든지 감을 듯 말 듯 뜬 눈이 몽롱한 빛을 띠었다. 기가 막혔다. 디아를 세상 소중한 것처럼 말해 놓고는 약을 쓴 모양이었다.

다행히 다친 구석은 없어 보여, 반은 목덜미에 간지러운 숨결을 토하며 비비적거리는 디아가 진정될 때까지 수십 번 등을 쓸어 주고 머리카락을 만져 주었다. 이런 식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디아는 큼직한 손으로 반의 몸을 더듬으며 반이 이곳에 있음을 확인했다.

마침내 디아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을 때, 반은 소년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고 가만 들여다봤다. 얄미운 구석은 있어도 사랑스럽다는 것만큼은 부정 못 할 소년이 저에게 피해를 줄 골칫덩어리라는 이야기는 반을 혼란스럽게 했다. 뭐 얼마나 오래 보고, 얼마나 정이 든 사이라고 웨인의 말을 믿기 싫었다.

“너 뭐야?”

“응?”

눈을 깜박인 디아가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자못 날카롭게 들리는 물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반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그러니까… 네가 뭐냐고. 뭐라도 느끼는 게 있을 거 아냐. 네가 누구야?”

살짝 구겨진 미간을 편 디아가 제 뺨을 붙잡은 반의 손등을 감쌌다.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은 손바닥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디아.”

“그리고?”

“반의 애인.”

기도 안 찬다. 짧은 웃음을 터트리자 눈을 가늘게 뜬 디아가 넌지시 덧붙였다.

“…어린 애인?”

“누구 마음대로 애인이래.”

두 손 안에 들어온 얼굴을 휙휙 흔들자 아직 몽롱함이 가시지 않은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디아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소년은 손날을 중심으로 도톰한 살점을 앞니로 살짝씩 깨물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잇자국은 남지만 그렇다고 아프지는 않은 힘으로 깨무는 디아를 쭉 밀어 낸 반은 간지러운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 와서는 써먹는 솜씨도 점점 늘어났다. 반은 이제는 하도 높아 건드리는 맛이 없는 코끝을 검지로 튕겼다.

“이런 거 하지 마.”

“반은 하지 말라는 말만 하네….”

“싫으면 나 포기하든가. 그나저나 넌 뭐 본 거나 아는 거….”

허리를 짚으며 일어난 반은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한 디아와 시선을 맞추다가 물러섰다.

“됐다.”

난데없이 납치당한 것이 반과 매한가지인 소년은 웨인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애초에 사이가 좋아 보이지도 않았으니 짜고 친 것도 아닐 테고….

고민하던 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디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고 미끈한 몸을 일으킨 디아와 발끝을 맞춘 반은 조심스럽지만 진지하게 물었다.

“넌 내 편이지?”

디아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려는 듯이 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은 소년을 의심하는 티를 숨기며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손을 다부지게 잡았다. 짓이겨진 손가락을 꿈질거리던 디아는 손가락을 엮어 손깍지를 끼더니 나지막하게 답했다.

“당연히.”

거즈가 붙은 이마 근처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불순한 의도가 엿보이지 않는 키스를 받은 반은 무심결에 소년을 끌어안았다. 타인을 품어 줄 만큼 넓어진 어깨에 이마를 묻자 디아는 이유를 묻지 않고 안아 주었다.

숨 막힐 정도로 세게 옥죄이는 양팔 안에 갇히자 애써 외면했던 우울한 감정이 의식 위로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본 미셸의 매정한 뒷모습과 인사치레에 그치지 않는 오래전의 통화가 웨인의 말에 힘을 실어 줬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단 한 번도 웃질 않던 노인의 차가운 눈동자를 디아의 품에 안김으로써 떨쳐 낸 반은 숨을 크게 내쉬고는 뒤로 물러섰다.

“이제 나갈 방법이나 찾자.”

무안한 마음에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디아가 나온 방으로 향했다. 바깥쪽에서만 열리는 철문과 어수선하게 쌓인 엄청난 양의 서적을 제외하고는 제 방과 비슷한 디아의 방을 훑어보는 동안 소년은 얌전히 침대에 앉아 있다가 양팔을 벌렸다.

반은 괜히 놀림받는 기분이 들면서도 주춤주춤 다가가 따스한 품에 얼굴을 묻었다. 단지 상체를 꼭 붙이는 것뿐인데 희한하게도 위로가 됐다. 조그만 놈한테 안겨 위로받는다는 것이 겸연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세 번쯤 그러다 말았다.

벌린 팔을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치자 디아는 아예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반이 가는 대로 기우뚱기우뚱 따라다녔다.

“그만 좀 해라….”

“작아서 들고 다녀도 될 것 같아.”

“야. 키가 똑같은데 무슨…. 어휴, 됐다.”

조금 컸다고 사람을 난쟁이 취급하고 있었다. 건방진 놈을 떨쳐 내길 포기한 반은 몽롱한 디아를 등에 매달고 각방에 하나씩 딸린 욕실까지 뒤졌다. 무기로 삼을 만한 것이 전혀 없자 탈력감이 밀려들었다. 휴식을 취해도 모자랄 판에 질질 끌고 다닌 몸 상태가 바닥을 기었다.

소득 없는 탐색을 그만두고 침대에 쓰러지자 줄곧 따라다니던 디아가 굳이 굳이 비좁은 매트리스 한쪽을 차지했다. 하는 수 없이 디아에게 침대 절반을 내어 준 반은 모로 누워 머리를 괴다가 문득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그…. 디아.”

내도록 시선을 주고 있던 디아가 눈을 빛냈다. 반은 머뭇거리다가 마음에 걸리는 것을 살며시 입 밖으로 꺼내 놓았다.

“내가 열일곱 살 겨울에 뭐 했게?”

“겨울에? 뭐 했는데?”

“맞혀 봐.”

당당하게 맞춰 보라고 했지만 속은 조마조마했다. 기억의 전이라. 수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과거들을 디아가 알고 있을까 봐 애간장이 탔다. 누군가는 까짓 과거라고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다지 들키고 싶지 않은 일화가 있기 마련이다.

음… 하고 뜸 들이던 디아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반은 혹시나 싶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작년 일까지 물어봤지만 디아는 하나같이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는 척을 하는 걸 수도 있고 웨인이 생거짓말을 한 걸 수도 있었다. 반은 후자이길 바라며 얼른 말을 돌렸다.

“아냐. 못 들은 걸로 해.”

“그럴게.”

답지 않게 순순히 물러나는 디아의 태도가 미심쩍었지만 캐묻기는 어려웠다. 반은 그새 또 자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걸고 돌돌 돌리면서 소년을 내려다봤다.

반은 디아가 지나치게 태연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 편이라는 확답을 받고도 은근한 의심이 들었다.

“넌 왜 아무렇지도 않아? 갑자기 잡혀 왔는데.”

웨인과 대화를 나누며 당장 해칠 생각이 없다고 듣긴 했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권총까지 들이댔으니 자칫하다가는 백만 달러를 코앞에 두고 머리통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걱정 그득한 반과 달리 약 기운으로 인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 듯한 디아가 손을 뻗었다. 심란한 반의 얼굴을 감싼 디아가 엄지로 살결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무서워?”

“…전혀?”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걱정하지 마라느니, 지켜 준다느니 거창한 소리를 하는 것치고 퍽 순한 얼굴로 웃는 디아가 우스웠다. 무슨 상황인지 알기나 하고 이러나 모르겠다.

“퍽이나. 창문 저거 열리는지만 보고….”

판자로 막힌 창을 확인하기 위해 상체를 일으키다가 디아에게 붙잡혔다. 양팔로 허리를 끌어안긴 탓에 황급히 매트리스를 짚지 않았더라면 얼굴을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 디아는 놀란 반의 입술과 코끝에 쪽쪽거리며 뽀뽀했다.

“아, 진짜 디아….”

한순간 꺾인 허리가 욱신욱신해서 입술을 피할 겨를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작만 느는 게 아니라 힘도 세지는 것이 틀림없었다. 날갯죽지 사이에 손바닥을 대고 내리누르는 디아 때문에 힘이 잔뜩 들어간 팔뚝이 부들거렸다.

앙다문 잇새로 놓으라고 중얼거려도 디아는 힘을 빼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저놈의 고집을 못 이겨 안겨 다니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근데 반. 여기서 나가고 싶어?”

놓으라고 했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소년의 얼굴에는 언제부턴가 웃음기가 없었다. 늘 생각했지만, 소년의 무표정한 얼굴은 제법 싸늘했다. 버거운 자세로 버티며 디아를 내려다보던 반은 멀뚱히 대꾸했다.

“당연하지.”

“왜?”

“그거야….”

눈알이 도르르 굴러갔다.

그러게. 왜 나가고 싶을까.

이유를 꼽자면 웨인의 모호함 탓이었다. 미셸과 웨인을 두고 고르라면, 둘 다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나마 가족인 미셸을 택하는 편이 옳다. 하지만 웨인과의 대화를 웃어넘기지 못하는 제 태도로 보아 미셸에게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음은 확실하다.

디아의 질문 때문에 괜스레 복잡해졌다. 혹시나, 만약 웨인의 말이 옳다면 디아는 이곳에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웨인이 사실만을 얘기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아. 모르겠다.

“왜 나가고 싶어?”

디아가 재차 허리를 당겼다. 팔이 꺾이기 직전이었다. 디아는 복잡한 반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턱을 들어 올렸다.

“나는 재미없어? 맨날 외출하고, 핸드폰 보고.”

입술에 가느다란 숨결이 닿았다. 디아는 담담하게 속삭이며 벌어진 입술을 살짝 빨았다. 누가 맨날 외출했냐고 쏘아붙이려던 아랫입술이 빨려 들어가며 축축한 감촉이 신경을 타고 아래로 흘러갔다.

반은 디아와 엉켜 있는 하체를 인식함과 동시에 야릇한 위기감을 느꼈다. 냅다 디아의 입술을 손으로 덮은 것은 동물 같은 반사 신경 덕이었다.

타액이 묻어 축축해진 입술이 지잉지잉 울리는 것 듯했다. 고작 한 번 빨렸을 뿐인데도 여느 때와 달랐다. 빗속에서 홀린 듯이 키스한 순간을 기점으로 디아와의 키스는 더 이상 인사 따위가 아니었다. 반은 손바닥에 입술을 뒤덮인 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 디아를 고요히 내려다보며 경고했다.

“그만.”

예쁘게 말린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눈이 깜박였다.

“힘 풀고.”

허리를 안은 팔이 스르륵 풀렸다. 드디어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것 같았다. 반은 얌전하게 구는 디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소년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찌뿌드드한 어깨를 주무르면서 디아를 등졌다.

“이쁘게 굴어.”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빠져나왔지만 입매는 어색하게 굳었다. 반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으며 한숨을 삼켰다. 디아가 점점 선을 넘고 있었다.

아니, 선을 넘으려는 것은 디아만이 아니라….

참았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반은 벌써 오래전 일 같은 잭과의 대화를 되새김질하며 디아가 보내는 눈길을 무시했다. 도망칠 곳 없는 공간이 불현듯 섬뜩하게 다가왔다.

***

정확한 시간은 몰라도 어림잡아 일주일은 넘게 흘렀을 터다. 약까지 써서 납치한 것치고 웨인의 요구 사항은 몇 없었다. 사실 거의 없었다. 때가 되면 총을 들이밀며 식사를 가져다줬고,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총을 들이밀며 빈 그릇을 치웠다. 식사 때가 아니면 얼씬도 하지 않았다. 카메라가 있나 싶어 방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수상쩍은 물건은 일절 없었다.

물론 이곳에서 나가려는 시도는 해 봤다. 몇 번은 식사를 주기 위해 들어오는 웨인을 덮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둘이 달려들어도 이길까 말까 한 상황에서 디아가 비협조적으로 나온 탓이 컸다. 솜씨 좋게 패 줬길래 웨인을 상당히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 있으면 반 어디 안 가잖아. 옛날처럼 방도 같이 쓰고. 난 마음에 들어.’

아니다. 디아는 웨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조차 없었다. 단지 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그냥 만족도가 하늘을 뚫었다.

그럴 만도 했다. 방과 방을 가르는 철문은 자동 잠금 장치가 달려 있기에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어 두었고, 따라서 같은 방을 쓰는 거나 매한가지였다. 수시로 방에 쳐들어오는 것이 취미였던 디아는 이런 생활이 매우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오늘부로 날을 세는 것을 관둔 반은 카펫에 2,000 피스 퍼즐을 흩뿌려 놓고 하나씩 맞추는 디아를 관찰하다가 조각을 휙 던졌다. 단단한 무릎을 치고 데구루루 굴러가는 조각을 집어 든 디아는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명화를 완성하는 데 신경을 기울였다. 슬쩍 들여다보자 십 분 전에 첫 피스를 맞춘 퍼즐이 벌써 절반이나 완성됐다. 놀라운 속도였다.

“디아.”

사람을 감금한 주제에 심심하지 말라고 이것저것 놀거리를 집어넣어 준 웨인의 배려 혹은 농락은 아쉽게도 반의 취향과 극심히 거리가 멀었다. 단둘이 있는데 퍼즐과 보드게임을 무슨 재미로 하라는 건지. 반면 디아는 시시한 퍼즐을 어찌나 즐기는지 이쪽으로 시선 한 번을 주지 않았다. 언제는 관심 좀 달라고 칭얼거리더니, 이런 식이면 서운했다.

“디아아.”

반쯤 드러누워 있던 반은 데굴데굴 굴러 디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어릴 때처럼 말랑말랑하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건강용 베개같이 딱딱한 것도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퍼즐에서 시선을 거둔 디아는 가까이 가면 멀어지고, 관심을 떼면 다가오는 반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반은 아래에서 올려다봐도 아름답기만 한 소년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많이 심심해?”

“죽을 것 같아. 넌 안 답답하냐?”

“전이랑 똑같아서 딱히.”

내려다보는 눈 속에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뭐…. 그렇지.”

별생각 없이 물었다가 양심을 후드려 맞았다. 외출이라고 해 봐야 호수 한 번 가 본 것이 다인 놈을 두고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디아를 한평생 갇혀 살게 한 벌을 요즘에서야 받는 기분이었다.

근래 반이 하는 일이라고는 디아와 하염없이 노닥거리는 것뿐이었다. 반은 현대인에게 전자 기기와 햇빛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갔다. TV 없지, 핸드폰 없지, 태블릿 없지, 창은 막혀서 램프 빛을 해 대용으로 삼아야 하지. 까무러칠 정도로 심심하고 답답했다.

“놀아 줄까?”

디아가 상념을 깨뜨리고 들어왔다. 퍼즐에 흥미가 떨어졌는지 조각을 우수수 떨어뜨린 소년이 턱을 괸 채로 상체를 숙였다. 금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이 되물었다.

“어떻게 놀아 줄 건데?”

“반이 좋아하는 거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거?”

자신이 뭘 좋아하더라. 급작스럽게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 반은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집어넣은 디아에 의해 불쑥 일으켜졌다. 놀랄 틈도 없이 소년과 마주 본 반은 쏟아지는 키스 세례를 받았다.

뺨과 콧잔등,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은 우중충한 기분을 환기하는 힘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순전히 본인의 착각일 가능성도 있고, 아마도 그럴 테지만 한번 이상한 감정이 들었던 만큼 조심하고 싶었다. 반은 디아의 이마를 턱 짚고 입술을 피했다.

“어쭈. 어딜 마음대로.”

“반은 나한테 많이 했잖아. 나는 마음대로 하면 안 돼?”

밀려난 디아가 입술에 삐뚜름한 미소를 건 채로 반박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한창 귀여운 시기에 볼을 빨아 먹다시피 뽀뽀를 마구 퍼붓기는 했지만 그건 옛날 일이었다.

“그거야 어릴 때고. 지금은 안 그러는데?”

“지금은 징그러워서 싫어?”

“네가? 징그럽냐고?”

디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고의가 틀림없는 서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럴 거면 다시 어려지고 싶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으나 반은 헛웃음을 지으며 디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징그럽기는커녕….

“예뻐서 탈이다. 예뻐서.”

“반 예쁜 거 좋아하지?”

“예쁜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냐. 다 좋아하지.”

만고불변의 진리를 굳이 묻기까지 하는 소년에게 무덤덤하게 대꾸하자 슬쩍 웃는다. 역시 본인이 예쁜 걸 아주 잘 아는 듯했다. 무기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외모를 빛내며 손바닥에 뺨을 비비던 소년은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침대로 손을 뻗었다. 모포 위에 마구잡이로 흩어진 책 중 한 권을 가져온 소년이 모서리를 접어 둔 페이지를 펼쳤다.

잡지처럼 큼지막한 책 속에는 컬러 사진이 페이지 양쪽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이 그림 같은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디아가 연이어 표시해 둔 페이지를 보여 주었다. 아이슬란드, 마다가스카르, 타히티의 풍경이 차례로 나타났다.

“나랑 같이 가자.”

왜 사진을 보여 주나 했더니 가고 싶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반은 설레하는 디아에게 못 할 것도 없는 약속을 해 주었다. 그러지 뭐. 디아의 미래를 생각하면 막연히 우울해질 것 같아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자연 광경이 주를 이루는 책을 휙휙 넘겨보았다. 뉴욕의 고층 빌딩이 빼곡히 자리한 사진을 짚으며 여기 좋았는데, 하고 운을 뗐다.

“여기도 갈까? 엄청 맛있는 쿠키 파는데.”

어깨를 마주 대고 사진을 바라보던 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거긴 반이 가 봤잖아. 안 가 본 데 같이 가고 싶어.”

“옛날에 가 보긴 했지.”

가볍게 대꾸하며 페이지를 넘기던 반의 손이 멈칫 굳었다. 반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곁을 돌아봤다. 뉴욕에 간 이야기는 일절 꺼낸 적이 없었다.

“네가 어떻게 알아?”

기억의 전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반의 낯빛은 서서히 창백해졌다. 웨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자기를 위로했는데, 정작 디아가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응시하는 반을 흘깃거리던 디아는 페이지에서 손을 떼서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자세히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는 있어.”

손가락을 타고 내려간 손이 반의 손목을 쥐었다가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꼭 맞물리도록 손깍지를 낀 디아는 곱지도 않은 손이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 반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까지?”

“반이 본 거, 생각하는 거, 어디 있는지.”

“…진짜? 거짓말 아니고?”

디아는 그저 어렴풋하게 웃을 뿐이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하고 다시금 강조한 소년은 잠시 뜸 들이며 반의 엄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있잖아, 나는.”

램프가 뿜어낸 누르스름한 빛이 디아의 콧잔등에 고였다. 앳된 얼굴이 저 나름의 진지함을 머금는 동안 반은 부글부글 샘솟던 불신과 수치가 맥없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공연히 소년의 시선을 피해 타히티의 전경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던 반의 귀로 무미건조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홀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반이 슬프면 바로 가서 안아 줄 수 있어. 외로우면 같이 있어 줄 수 있고, 다른 생각이 안 나게 해 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디아는 말을 고르는 것처럼 일순 침묵하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예쁜 나랑 결혼할래?”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린 반은 감동하기 직전에 산통을 깨 버린 디아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폭소하느라 상체가 뒤로 기우뚱 넘어갔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봤냐?”

엉킨 손가락 덕분에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반은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 젖히면서 디아의 어깨를 두드리듯 내리쳤다. 프러포즈를 받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저토록 뻔뻔한 표정으로 자신을 예쁘다고 칭하는 놈도 처음 봤다.

앞엣것만 얘기했더라면 내심 뭉클해져서 뽀뽀 한 번쯤은 적선해 줬을 테지만 뒷말이 참 기가 막혔다. 반은 디아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는 줄도 모르고 실없이 웃으며 재밌는 농담을 들은 양 굴었다.

당연지사 속이 뒤틀린 디아의 역습이 발생했다. 최근 얌전히 굴던 태도가 거짓말처럼 덤벼든 디아가 반의 팔뚝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웃지 말고 빨리 대답해. 나랑 결혼한다고.”

머리가 홱홱 기울어져도 웃음을 그치지 못하던 반은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억울한 것 같기도 한 디아의 표정을 보고 또 한 번 터졌다. 조르듯 몸을 붙여 오는 소년의 힘을 감당 못 하고 뒤로 홀라당 넘어간 반은 감정이 전이된 듯 슬며시 웃는 디아를 바라보며 연신 키득댔다.

뭐, 나갈 구석 없이 갇힌 와중인데 소꿉장난에 못 어울려 줄 이유는 없었다. 반은 웃음을 거두지 못한 채로 흔쾌히 프러포즈를 승낙했다.

“그래. 결혼하자.”

“약속할 수 있어?”

“그럼. 자, 손가락.”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눈을 맞춘 디아가 냉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창백한 손가락을 응시하던 반은 눈을 접어 웃으며 탐욕적인 면모를 장난스럽게 드러냈다.

“나 반지는 5캐럿 이상만 받는다.”

소년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자 5캐럿 다이아 반지의 값어치도 모르는 디아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환히 웃었다. 5캐럿 다이아 반지를 다발로 갖다 바쳐도 아쉽지 않을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디아는 물질주의적인 성향에 걸맞은 말을 쏙쏙 골라 했다.

“차랑 시계도. 그거 좋아하잖아.”

“어떻게 알았대. 나야 주면 좋지.”

씩 웃는 반의 입술에 곧장 입을 맞추려던 디아는 잠시 멈칫하고는 고개를 틀어 매끄러운 뺨에 입술을 눌렀다. 이 정도 키스는 용인해 주기로 한 반은 이유 모를 행복감을 느끼느라 또 다른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놀고들 있네….”

머리 위에서 웨인의 목소리가 떨어진 후에야 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도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들어온 웨인은 바닥에서 뒹구는 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입매를 비틀었다.

“꼭 강아지 짝짓기시킨 것 같아.”

꼭 붙은 디아를 밀어 내며 벌떡 일어난 반은 저도 모르게 베개를 웨인에게 냅다 던졌다. 날아드는 베개를 수월하게 받아 낸 웨인은 엉망진창인 침대로 베개를 던지면서 디아를 살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성장이 더뎌진 소년은 반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코를 묻었다. 표정은 없었지만 눈빛만은 제법 시건방졌다. 가볍게 코웃음 친 웨인은 불쾌함이 어린 얼굴을 하는 반에게 눈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앉아. 오늘은 일 좀 해 줘야겠다.”

“내보내 주기나 하지?”

“자.”

말을 홀라당 무시한 웨인이 흔드는 물건을 발견한 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의뢰가 시작되며 받은 구식 핸드폰이었다. 웨인을 만난 후로 쓸모없어진 줄 알았더니 여기서 다시 나올 줄이야.

반은 눈치를 살피다가 디아에게 옆방으로 가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순순히 갈 놈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양 고개를 젓는 디아에게 그럼 좀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어르고 달랜 반은 간신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뒤를 돌아보자 철문 쪽에 비스듬히 선 디아와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무표정했다. 어쩔 수 없이 따르기는 하나 불만스러운 기미가 가득했다.

디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반의 코앞에서 손가락을 튕긴 웨인이 시선을 끌어왔다. 그는 핸드폰을 내밀면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 시간쯤에 전화가 오더라고.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는 잘 알지?”

“전화가 온다고?”

눈살을 찌푸린 반이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의뢰를 받아들인 후 구식 핸드폰으로 연락한 사람은 가짜 조력자 행세를 한 웨인뿐이었다. 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줄 만한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 아마도 미셸일 터다. 하지만 의아했다. 직접 연락하지 않고 잭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던 미셸이 지금 와서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했다라.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음을 직감한 듯했다.

“협박하려면 네가 받는 게 나을 텐데.”

시선을 들어 올린 반이 쏘아붙이자 남자가 비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디아를 인질로 삼지, 네가 그 정도로 가치 있을 것 같아?”

말 한마디로 반을 쓸모없는 목숨으로 전락시킨 웨인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빼앗듯 가져온 순간 타이밍 좋게 진동이 울렸다. 오후 여섯 시 정각이었다.

“평소처럼 해. 티 내지 말고.”

반은 웨인을 곁눈질하며 전화를 받아 귀로 가져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 핸드폰에는 스피커 기능이 없었다.

“…예.”

기다려 보았으나 상대편은 말이 없었다. 반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을 밝혔다.

“반 클라크입니다.”

- 연락이 왜 안 됐지?

전파를 타고 넘어온 목소리는 반이 익히 아는 것이었다. 허리를 곧추세운 반은 웨인이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침대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무릎에 힘을 주는 것과 동시에 차가운 총구가 이마에 닿았고, 문가에 선 디아가 한 발을 뗐다.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은 반은 디아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손짓하고 오랜만의 통화에 집중했다.

“그쪽은 왜 연락을 이제야 하는데?”

- ‘그것’은?

“잘 있어.”

반은 총을 겨눈 채로 엿듣는 웨인을 의식하며 답했다. 통화만으로 미셸에게 이 상황을 알릴 방법은 요원했다.

- 어디까지 성장했지?

“아마도 다 큰 것 같아.”

- 문제는.

잠시 망설이자 총구가 이마를 툭 밀었다. 반은 약간의 침묵을 두고 ‘없다’라고 대답했다. 다행히 미셸은 디아의 생사를 확인하고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디아의 성별, 신장, 몸무게, 성격 따위를 물어봤고 반은 고분고분 답했다. 이야깃거리가 확장되자 상황을 넌지시 전달할 기회도 생겼다. 반은 웨인을 흘끔 살피고는 제 딴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 액자 말인데. 디아가 깨트렸어.”

- 디아.

“애 이름. 그래서 뒤판이 날아가서….”

반은 디아의 예민한 성격을 설명한다는 핑계로 주절주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문에 기대어 선 디아가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으나 그를 등진 반은 소년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했다. 당장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 알겠어.

이번에는 미셸 쪽에서 짧은 침묵이 이어지더니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머리 굴리는 데 소질 없는 저와 달리 똑똑한 인간이니 적당히 알아들었겠지 싶었다.

그 후로 미셸은 시시한 질문 몇 가지를 던졌고, 반은 무던히 대꾸했다. 길지 않은 통화는 미셸이 마무리했다.

- 그럼 얼마 안 남았네. 수고해.

인사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미셸은 고압적으로 질문을 던지던 태도처럼 통화 역시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혀 차는 소리에 머쓱해진 반은 그새 열이 오른 핸드폰을 닫았다. 곧바로 핸드폰을 회수한 웨인은 반의 이마를 총구로 밀었다.

“뭐라든.”

“그냥 디아 얘기.”

반은 다소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넣은 웨인이 총을 쥔 손으로 뺨을 툭툭 건드렸다.

“거짓말.”

“앞에서 다 들었으면서 왜 지랄이야.”

“그게 다가 아닐 것 같아서.”

“다가 아니면 뭐가 있는데? 넌 왜 맨날 트집만 잡냐?”

권총을 허리춤에 끼운 웨인은 억울하다는 듯이 투덜거리는 반을 뚫어져라 보다가 한 걸음 물러났다. 철썩 들러붙는 불평불만 가득한 눈빛을 무시한 채 문밖으로 나선 웨인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하나가 더 있거든.”

놈이 얼른 꺼져 주길 바라던 반은 뜬금없는 이야기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웨인은 벽에 붙은 잠금쇠를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돌려받아야 해.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거고.”

덜 아문 생채기로 뒤덮인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권태만 남은 눈으로 반을 훑어 내린 웨인은 대답을 듣지 않고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반은 남자가 흘린 말을 곱씹었다. 낡은 나무 문짝 위로 미셸이 남기고 간 서류철에 적혀 있던 문장 한 줄이 떠올랐다.

숙주 T, SUC-06 부화를 진행한다. 성체까지 예상 1년.

미셸이 있는 곳에도 디아와 비슷한 외계인이 있는 걸까. 지금에야 궁금해지다니 어지간히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무관심한 쪽은 본인이 아니라 미셸이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느라 긴장 속에서 통화를 끝내자 뒤늦은 섭섭함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1년 만에 연락이 된 손주인데. 밥은 잘 먹고 있냐, 몸은 괜찮냐 따위의 의례적으로 할 법한 걱정이 차고 넘치건만 혀나 차고 전화를 끊다니. 어떻게 이러나 모르겠다.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는데 문득 등이 따뜻한 온기로 뒤덮였다. 어깨에 팔이 묵직하게 얹히는 감각과 귓가에 닿는 간지러운 머리카락이 반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돌아앉은 반은 말없이 안아 주는 디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가족의 품이 기억나지 않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소년의 품은 제법 따뜻했다.

반은 눈을 감고 디아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감정을 공유한다는 허황된 소리가 마냥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존재 자체가 믿기지 않는 소년이 허무맹랑한 초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들 저를 위로해 주는 데 쓴다면 딱히 나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고맙고 좋았다.

디아에게 안긴 채로 침대에 드러누운 반은 등에 배기는 책을 굳이 치우지 않고 눈을 깜박였다.

이 쪽지는 확인 즉시 없앨 것. 위급 시 임시 접선은 매달 마지막 금요일.

액자 뒤편에 끼어 있던 쪽지가 순간 떠오른 것은 천운이었다. 변수를 고려해 쪽지까지 남긴 미셸의 주도면밀함을 생각하자면 소름 끼치지만.

반은 핸드폰을 닫으며 곁눈질로 확인한 날짜를 되짚어 봤다. 오늘은 6월 26일. 6월의 마지막 금요일은 벌써 지났으니 다음 접선까지 한 달여가 남았다. 웨인이 눈치 못 챘길 바라며 반은 디아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7월 말에는 이 말도 안 되는 임무가 끝날 것이다. 어떤 방면으로든.

***

그날 밤, 반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싱글 침대에 둘이 자는 게 말이 되냐고 매번 쓴소리했지만 오늘은 먼저 모포를 걷어 보였다. 여느 때처럼 베개를 들고 빤히 응시하던 소년은 반이 허락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반은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안겨드는 디아의 뒤통수를 쓸어 주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반은 디아와의 끝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끝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12월은 그런 시기였다. 막연히 멀게 느껴져서 막상 닥치기 전까지는 새카맣게 잊고 사는. 12월 끝자락으로 밀어 두었던 끝이 한 달 뒤로 다가오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반은 고민했다. 미셸을 믿어야 하나, 웨인을 믿어야 하나. 디아에게는 미셸이 나을까, 웨인이 나을까. 아니지, 아니다. 돈을 생각해야지. 백만 달러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아등바등 돈 벌 필요 없이 유유자적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웨인의 말이 진실이라는 증거도 없으니까 미셸을 믿는다면 어쩌면 디아와 본인에게 모두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물론… 디아는 조금 갑갑하게 살아가겠지만 말이다.

양심을 챙기면서 살아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디아가 엮이자 이상하게도 찝찝하고 불편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뒤척이던 그때, 미동 없이 잠들어 있던 디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

“안 잤어?”

놀라서 묻자 꿈질거리며 올라온 소년이 베개를 벴다. 창을 막은 판자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디아의 이마에 쏟아졌다. 오묘한 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가슴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반은 소년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얼른 자라고 속삭였다. 잠기운이 없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인 디아는 뺨을 매만지는 반의 손길을 받으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

“…어?”

“그냥. 느낌이.”

귓불을 만지던 손이 굳었다. 디아는 난처한 빛이 언뜻 스쳐 지나간 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나도 같이 가는 거지?”

“어, 응. 당연하지.”

반은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미셸에게 보내든 웨인에게 보내든 반은 그 시점에 발을 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디아에게 일일이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어쩔 수 있나, 처음부터 끝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관계였으니. 아무 일 없는 척 웃으면서 디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얼른 자라. 눈 감고.”

장난스럽게 엄한 목소리를 내자 배시시 웃은 디아가 눈을 감았다. 반은 잠든 디아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밤을 꼴딱 새웠다.

***

반은 다시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은 흘러가는데 여전히 그는 갈팡질팡했다. 오랜만의 통화 이후 미셸은 무작위로 전화를 걸었다. 웨인이 핸드폰을 건네주는 시간은 매번 달라서 일련의 규칙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늘 디아의 상태 보고로 끝나는 통화는 반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초조함을 주입했다.

보드게임에 어울려 주다가 랜드마크를 잔뜩 지은 디아의 승리감에 도취한 웃음을 보고 있자면 그냥 품에 끼고 어디로든 도망갈까 싶었지만 디아가 잠든 밤이면 백만 달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탐욕적인 상상으로 뒤척이던 밤이 지나 아침이 오면 쭐레쭐레 따라다니는 디아를 상대로 뜻 모를 죄책감이 들어 물러지고는 했다. 어차피 한 달 뒤면 헤어질 텐데 못 해 줄 게 뭐가 있나 싶어 디아의 요구를 줏대 없이 들어주기도 했다.

“키스해도 돼?”

조용히 책을 읽는가 싶더니 쳐다보지도 않고 묻는 디아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그래, 하고 대답했다. 몇 주간 철저히 금지됐던 키스를 예상치 못한 때에 허락받은 디아가 고개를 휙 쳐들었다. 그냥 던져 본 말이었는지 휘둥그레 커진 눈이 우스워서 웃음이 났다.

“하기 싫음 말고.”

“하고 싶어. 할래.”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내던진 디아가 발목을 잡아끌었다. 침대 프레임에 기대어 있던 반은 주르륵 미끄러져 디아의 밑에 깔렸다. 이런 자세를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말릴 필요성을 찾지 못했다. 바르게 누운 반은 귀한 것을 만지듯 뺨을 쓰다듬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추는 디아를 마주 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는 이전보다 농밀했다. 첫 키스에 비하자면 숨을 내쉬는 타이밍이나 빨아들이는 강도를 조절하는 데 훨씬 능숙해져서 방심한 순간마다 신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밀려든 혀가 입천창을 건드리고 목구멍으로 넘어올 듯 깊게 얽힐 때마다 반은 시트를 부여잡으며 지금 키스하는 상대가 디아라는 것을 잊고자 했다. 가급적 모든 부탁을 들어주고 싶기는 했지만 키스 이상은 무리였다. 양심상, 도의상, 윤리상… 허술한 가치관이 반의 욕구에 제동을 걸어 줬다.

“하아….”

이윽고 입술이 떨어지며 디아의 속눈썹이 눈두덩이를 스쳤다. 반은 숨을 밭게 내쉬며 소년의 어깨를 쥐었다. 슬슬 그만하고 책이나 보라고 말하려던 순간 입술이 재차 맞붙었다. 고개가 꺾일 정도로 거세게 밀어붙인 디아의 혀가 깊이 파고들며 침대가 삐거덕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치 허리 짓 하듯 디아가 다리 사이에 하체를 부딪친 탓이었다.

“야…!”

기겁하며 침대를 박차고 일어선 반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입술을 가렸다. 붉은 입술을 번들번들하게 적신 디아는 살짝 흐려진 눈을 들어 반을 바라보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갸우뚱거렸다.

“왜?”

“왜 그러기는…!”

반은 조금 전 디아의 행동에서 잘못된 점을 짚어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을뿐더러 입 밖으로 냈다가 디아가 키스 이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까 봐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주야장천 로맨스 영화를 본 데다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어 댔으니 아예 모르지는 않겠지만 인식한 것과 인식 못 한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키스 안 해. 끝이야, 끝.”

유치하게 대화를 회피한 반은 잽싸게 침대 아래로 내려가더니 욕실로 대피했다. 잠기지 않는 문을 닫자마자 주르륵 미끄러졌다. 무릎을 끌어안은 반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이런 상황은 수십 번, 수백 번 겪어서 감흥도 없었지만… 그렇지만, 꼭 난생처음 야릇한 분위기를 겪은 사춘기 소년처럼 손가락 끝에서 맥박이 뛰었다.

“망했다….”

머리를 감싼 반은 반응이 온 제 하체를 내려다보고 침음을 삼켰다.

나는 어린애한테 관심이 없다, 나는 어린애한테 관심이 없다, 난 정상이다, 완전 정상이다. 이건 단지 너무 오래 수절해서 생긴 참사일 뿐이다….

구구절절 되뇌며 울렁이는 속을 다스렸다.

입을 헹구며 아랫도리를 진정시킨 후 당당하게 욕실을 나온 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디아를 대했다. 쌓인 내공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디아는 아쉬운 듯이 반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정신머리를 똑바로 붙들어 맨 반은 디아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몰두할 것을 찾던 반은 이 방을 빠져나갈 방법을 고안하기로 했다. 권총을 든 웨인과 정면 승부를 하는 건 대단히 무모한 짓이었다. 어떻게든 총을 빼앗아야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디아가… 아니, 아니다.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일어난 반은 창을 막은 판자를 떼기로 했다. 지렛대로 삼을 만한 것이 없어 손에 수건을 둘둘 말고 한 번 내리쳐 보았다.

“아 씨….”

덜컹거리기만 하고 갈라질 기미는 없었다. 걷어찰 만한 높이는 아니라 열심히 주먹질만 하는데 침대에 가만 앉아 있던 디아가 천천히 다가왔다.

“내가 할까?”

“어? 아냐, 아냐. 그냥 살짝 해 본 거야. 앉아 있어.”

반은 괜한 허세를 부리며 디아를 밀어냈다. 디아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써먹어 주겠지만 지금 얼굴을 마주하기에는 민망함이 상당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판자 부수기에 매달리는 반을 멀뚱히 바라보던 디아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파였다.

하아. 작게 한숨을 쉰 디아는 반의 허리를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당황해서 밀어 낼 생각을 못 하는 반을 지나쳐 맨손으로 판자를 붙든 디아는 몇 번 그걸 흔들어 보다가 팔꿈치를 들었다.

쾅쾅 소리가 서너 번 나더니 제법 두꺼운 판자가 쩍 갈라졌다. 판자를 걷어 내자 머리도 들이밀지 못할 정도로 촘촘한 쇠창살이 나타났다. 넋을 놓은 반은 판자 조각을 마저 떼어 내는 디아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힘이 센 줄은 알았지만 저 외모로 저만큼의 힘이라니.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못내 부끄러워졌다.

뒤를 돈 디아가 판자 조각을 내밀었다. 낡은 나뭇조각을 받아들자 하얀 손가락이 손등을 스치며 거두어졌다.

“화 풀렸어?”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화난 것으로 보였다면 미안한 일이었다. 딱히 디아에게 감정이 상한 게 아니라 본인에게 실망했을 뿐이다. 무안한 낯으로 고개를 돌리는 남자를 빤히 응시하던 디아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반을 불렀다.

“나랑 키스하는 거… 싫으면 억지로 안 해 줘도 돼.”

미안해.

입술을 깨물었다가 짧은 사과를 남긴 디아가 걸음을 돌렸다. 반은 본인의 잘못을 시인하지도, 그렇다고 단단히 오해한 채로 제 방으로 건너가는 디아를 잡지도 못했다.

***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키스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법을 알려 주었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잠깐 멀리했다가 불쌍하니까 딱 한 번 허락해 준 것뿐이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사과할 일이었다. 디아가 조른다고 해서 넘어간 것은 제 잘못이었고 그 과정에서 잠깐이나마 성욕을 느낀 것은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실책이었다.

하지만 웨인의 말을 빌리자면 디아는 명백한 성체였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 맞… 긴 한데.

“미치겠네….”

침대에 엎어진 반은 반쯤 열린 철문을 흘끔거렸다. 창문으로 탈출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했으나 별달리 기쁘지 않은 이유가 문 너머에 있었다.

한때는 인사처럼 나누던 키스가 엉망으로 끝난 날 이후 디아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중이었다. 반은 확신했다. 저거 백 퍼센트 삐졌다. 식사를 전해 줄 때마다 그늘진 낯으로 서운하고 섭섭하고 원망스럽다는 눈빛을 받은 지 이틀째였다. 반은 디아의 눈치를 살피면서 꽤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웃을 때는 세상이 다 환해지는 것 같더니, 침울할 때는 동정심을 흔드는 매력이 있었다. 역시 얼굴이 예쁘고 볼 일이라고 혀를 찬 반은 우울한 미인이 책 무덤에 파묻혀 있을 방을 곁눈질했다.

반쯤 열린 문은 디아의 마음을 대변했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각도는 토라진 마음을, 그럼에도 들어갈 만큼 열린 틈은 어서 제 마음을 풀어 달라는 속내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고민스러웠다. 결정의 날은 다가오는데 선택은 내리지 못했고, 디아에게 잘해 주고 싶다가도 선을 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정을 붙이지 않았다면 선택이 쉬웠을까. 자가당착에 빠진 반은 머리를 싸매고 침대를 굴러다니면서 반나절을 날렸다.

태평하게 깜박 잠이 들었다가 일어났을 때는 쇠창살이 쳐진 창 너머가 껌껌해진 뒤였다. 반은 어렴풋이나마 시간을 알 수 있다는 점에 떨떠름하게 만족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슬쩍 디아의 방을 들여다보자 침대 위 모포가 불룩했다. 자는 모양이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발을 돌린 반은 옷을 벗어 두고 욕실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콧수염 난 교도관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오게 생긴 방이었지만 욕실만은 나쁘지 않았다. 어두침침한 것은 어쩔 수 없어도 따뜻한 물은 원 없이 나왔다. 불 밝힌 램프를 문밖에 놔둔 반은 연약한 불빛에 의지해 몸을 씻어 냈다.

거품 낸 비누로 몸을 박박 문지른 다음 샤워기를 고정해 두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을 참은 채로 거센 물줄기를 맞았다.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거품을 씻어 내고 바닥에 고였다가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희미한 비누 향이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퍼지자 걱정이 모락모락 샘솟았다.

디아를 어떡하지. 평생 갇혀 산다니까 안쓰럽고 불쌍하고. 그렇지만 미셸을 배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같이 달아난다고 해도 땡전 한 푼 없는 도피가 뭐 얼마나 행복할까. 보내 주는 게 맞는데 과연 디아가 얌전히 헤어지려고 할까. 울고불고 떼쓰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디아, 디아, 디아, 디아. 머릿속을 디아로 빼곡히 채우며 돌아선 반은 머리카락과 등을 적시다가 눈을 떴다. 시선이 닿는 곳, 그곳에 디아가 있었다.

“어….”

얼빠진 탄성을 뱉은 반은 바닥에 둔 램프 곁에 선 디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룩진 그림자와의 경계가 모호한 탓에 체격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는 디아는 책 한 권을 손에 쥔 채였다.

타일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물소리와 등을 타고 엉덩이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감촉이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한발 늦게 흠칫 놀란 반은 무심결에 뒤로 돌았다.

“구경할 거면 돈 내고 해라.”

뻔뻔하게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웃음은 나지 않았다. 서성거리다가 황급히 돌아가는 디아의 발소리가 예민한 귀로 흘러 들어왔다. 물 젖은 얼굴을 훔쳐 낸 반은 샤워기를 끄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목덜미에서 펄떡펄떡 뛰는 맥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알몸을 보여 준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어릴 적에는 같은 욕조에서 씻은 적도 있으면서 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했다. 요즘 들어 너무 의식한 탓일지도 몰랐다. 바닥을 때리는 물줄기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샤워기를 껐다.

물기를 닦고 옷을 껴입은 반은 심호흡을 한 뒤 욕실을 나섰다. 그러나 디아는 이미 방으로 되돌아간 후였다. 침대에 앉아 기다려도, 문 너머를 흘깃흘깃 살펴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디아의 방으로 건너갔다.

“…디아.”

디아는 씻기 전에 들여다본 모습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책과 종잇조각, 퍼즐 따위가 너저분하게 흩어진 침대에 걸터앉은 반은 디아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 화난 거 아니야. 그때는 그냥….”

어떻게 말하지.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그럴싸한 변명을 내놓았다.

“갑갑해서 그랬어. 알잖아. 나 원래 막 싸돌아다니는 거.”

하도 오래 갇혀 있다 보니 예민해졌다고, 착한 네가 이해하라고 농담을 던졌지만 디아는 꿈쩍도 안 했다. 아마도 먼저 사과하러 온 듯했는데,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이러는지. 겸연쩍은 마음에 입술을 깨문 반은 애교 있게 칭얼거렸다.

“이쁜아. 나 얼굴 좀 보여 주라. 보고 싶어. 응?”

손을 뻗어 디아의 어깨를 쥐었다. 모로 누운 상체를 돌리려는 순간 손이 내쳐졌다.

반은 상체를 벌떡 세운 디아와 얼얼한 손목을 번갈아 보았다. 쥐어 잡혔다가 내던져진 손목은 붉었고, 경계하는 소년의 눈빛은 형형했다. 단 한 번도 디아에게 거부당한 적 없는 반은 내쳐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물러나야 할 때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 그…. 미안.”

말을 더듬으며 침대에서 일어난 반은 황급히 방을 떠났다.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한 탓에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디아의 얼굴을 목격하지 못했다.

싸늘한 침대에 주저앉은 반은 한 번 잡혔다고 희미하게 붉어진 손목을 매만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큰 잘못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디아는 아니었던 걸까. 반은 능구렁이처럼 사과하는 법을 알았고, 종종 잘 써먹기도 했지만 디아의 앞에서만큼은 어떤 묘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울함에 예민함까지 추가된 미인이 있는 방을 흘끔거리다가 모포 속으로 파고들었다. 변함없이 좁은 침대가 어딘지 허전하게 느껴졌다.

***

디아는 보다 노골적으로 반을 피하기 시작했다. 뒤늦은 사춘기인가 싶어 날이 밝으면 풀리겠지, 반나절 후에는 풀리겠지, 한 시간 뒤에는 쭈뼛쭈뼛 다가오겠지 하며 무려 이틀이나 버틴 반은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은근슬쩍 말을 붙여 보려고 해도 눈길 한번 안 주지, 냅다 방으로 쳐들어가도 흘긋 보고는 책에 시선을 고정하며 벽을 치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치댈 때는 그렇게 귀찮다가 관심이 홀라당 사라지자 반은 디아의 관심이 받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웃음을 보고 싶었고 어깨에 슬그머니 기대어 오는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입꼬리에 미동도 없는 소년이 두려워 망설이게 됐다. 무표정이 어찌나 냉랭한지 장난을 치려야 칠 수가 없었다. 디아가 생각보다 따스한 인상은 아니구나 하며 하등 쓸모없는 생각을 하다가 무반응에 무안해져 발을 돌리는 일이 세 번쯤 반복되었다.

침대 위에 웅크린 반은 베개를 쥐어뜯으며 디아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혹은 어떻게 이 분위기를 벗어날지에 대해 유심히 고민했다. 때마침 부목을 푼 웨인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매일 얼굴을 맞대면서 꼴같잖은 친근감이 드는 웨인은 빈 그릇을 확인하더니 디아가 있는 방 쪽을 흘깃거렸다.

“식사량이 좀 줄었다?”

“뭐, 좀.”

“똑바로 먹여. 혼자 먹지 말고.”

“아니, 자기가 안 먹는데 내가 뭐라고 하냐…. 쟤도 어른인데….”

풀이 한껏 죽은 반은 웅얼거리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얼굴에 드리운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갈수록 먹는 둥 마는 둥 수저질한 흔적이 없는 그릇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아무리 소식이 건강에 좋다지만 한두 숟갈 먹어서야 저 몸뚱이를 움직일 힘이나 있나 모르겠다. 웨인은 반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원래 적게 먹는 편이긴 해도 너무 굶으면 안 좋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모르는 것 같아서.”

트레이 두 개를 겹쳐 든 웨인이 그대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황급히 뛰어가 잡아채자 놈의 손이 허리춤의 권총으로 향했다. 반은 그새 권총 손잡이를 붙든 손을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린 철문 너머는 고요했다. 웨인을 향해 돌아선 반은 문가를 짚으면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여기서 내보내 주라.”

“갑자기 왜?”

반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망설이다가 때려죽여도 시원찮은 놈에게 숙이고 들어갔다.

“그… 네 편 할게. 너한테 붙을 테니까 나가게 해 주면… 안 될까?”

웨인에게 붙을 생각은 아직 없다만 이곳에 있다가는 숨 막혀 돌아가실 것 같았다. 잠깐 디아와 멀어져 바깥 공기 좀 쐬고 머리를 식힌 다음에 화해하든, 제대로 싸우든 이런저런 것들을 시도할 요량이었다. 나가는 김에 탈출할 만한 구석을 찾을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러나 반의 머리 위에서 뛰노는 웨인은 수가 뻔히 보이는 바람을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잘 생각했어. 그런데 나가는 건 안 돼.”

“왜? 나가고 싶다고. 같은 편 한다니까?”

처연한 표정을 금세 뒤바꾼 반이 작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웨인은 불신이 짙게 감도는 웃음을 지으며 반의 신경을 긁었다.

“나한테 붙겠다며. 그럼 내 말 들어야지?”

문이 매정하게 닫혔다. 완전히 닫히기 전에 틈새에 얼른 발을 끼워 넣은 반은 맨발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웨인은 간간이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반의 정수리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문틈 새에 끼인 발을 두 손으로 감싼 반은 치켜뜬 눈으로 웨인을 노려보며 성질냈다.

“아 씨, 살살 좀 닫지…!”

“거기다 발은 왜 끼워?”

“내보내 줘. 보내 주라.”

웨인은 퉁명스럽게 조르는 반을 가만 내려다봤다. 눈을 굴리며 짜증스러운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반은 억지로 짓는 것이 분명한 미소를 띠더니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반은 입술 앞에서 주먹을 앞뒤로 움직이며 혀로 볼 점막을 밀어 냈다. 올록볼록 올라오는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잘생긴 입술이 시원하게 찢어졌다.

“꺼내 주면 빨아 줄 수 있는데.”

눈을 접어 웃으면 귀여운 인상이 되는 남자가 능청스럽게 꼬리 쳤다. 웨인은 자존심도, 정조 관념도 없는 반에게 제법 편안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역시 통하나 싶어 슬그머니 일어난 반은 일순 어깨가 떠밀려 방 안으로 밀쳐졌다.

어리벙벙한 낯으로 웨인을 바라보자 다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놈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좁아지는 문틈 새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지금은 아니야.”

“…왜? 왜 아닌데? 내가 빨아 준다니까?”

“기대되네.”

문이 닫히면서 곧바로 자물쇠가 채워졌다. 멍하니 서 있던 반은 기가 막혀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체면 버리고 쪽팔린 짓까지 했는데 거절당하다니. 이런 일은 겪어 본 적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와, 씨….”

허리춤에 손을 얹고 괴로워하던 반은 침대를 걷어차려다가 발이 너무 아파 그만뒀다. 여기서 나가면 웨인이 기억을 잊도록 머리통을 세게 내리쳐 줄 것이다. 침대로 뛰어든 반은 모포를 뻥뻥 걷어차며 열불을 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일. 내일은 디아에게 어떻게든 말을 걸어 봐야겠다.

눈을 감자마자 까무룩 잠든 반은 불현듯 깨어났다. 누가 건드린 것도, 큰 소리가 난 것도 아닌데 절로 눈이 떠졌다. 비몽사몽 한 채로 허리를 세운 반은 깜깜하게 물든 방을 둘러보다가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문 근처에 놓아둔 물병을 찾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려던 때, 나지막한 신음이 귓가에 닿았다.

소리의 출처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어둠에 파묻힌 철문과 시커먼 틈이 보였다. 쌀쌀맞게 굴면서도 단 한 번도 닫지 않은 문틈 새로 미약한 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살짝 잠이 깬 반은 설마 디아가 아픈가 싶어 발소리를 죽이고 문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헐떡이는 소리가 커졌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틀간 애매하게 벌어져 있던 문 너머로 발을 들인 반은 디아, 하고 부르려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밝기를 낮춘 램프 빛이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어수선한 침대에 엎드린 디아를 비추었다.

방은 엉망진창이었다. 글자를 외우고, 셈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는 빠른 디아지만 정리 정돈만큼은 서툴렀기 때문이다. 이 정도 흠은 있어 줘야 사람답다고 혼내지 않은 탓에 디아는 여전히 방을 깨끗이 쓰는 법을 몰랐다. 하지만 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너저분한 방이 아니었다.

“하아…. 윽….”

고통을 참는 것처럼 억눌린 신음을 뱉은 디아가 허리 짓을 하자 철제 침대가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소년의 배 아래에 깔린 베개가 뭉개지며 미끈한 허벅지가 부풀어 올랐다. 팔꿈치로 침대를 짚은 디아는 천천히, 욕망하는 것이 두드러지는 몸짓으로 베개에 하체를 치댔다. 그럴 때마다 침대가 삐걱, 삐걱 소름 돋는 쇳소리를 토했다.

“하아, 읏….”

하얀 뒷덜미에 맺힌 땀이 시트로 뚝 떨어졌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디아는 열기를 주체할 수 없는지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베개에 대고 허리 짓을 했다.

침대가 흔들리면서 모퉁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디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연신 뜨거운 숨을 뱉느라 촉촉해진 입술이 시트에 닿으면서 단어를 만들어 냈다.

“반…, 읏, 바안….”

문가에 붙박인 반은 그 꼴을 멍하니 바라보다 말고 숨을 들이켰다. 시트에 이마를 묻으며 거듭 허리 짓 하는 소년의 입에서 들려서는 안 될 이름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마침내 디아가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달은 반은 귓불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디아에게 있어 저 베개는 자신과 다름없었다.

머리가 혼잡스러웠다. 친자식은 아니지만, 자식처럼 키운 아이가 자위하며 제 이름을 부르다니. 반은 무심코 뒤로 물러났다. 못 본 체하고 얼른 자리를 뜨자, 그 생각밖에 없어서 문이 그다지 넓지 않은 너비로 열려 있다는 것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다.

끼익.

어깨에 닿은 철문이 날카로운 금속성을 터트렸다. 반은 중요한 순간에 나뭇가지를 밟는다든가 물건을 떨어뜨려 위치를 노출하는 영화 속 주인공을 아둔하다고 여겨 왔다. 거 조심 좀 할 것이지, 하며 비웃음을 지었던 반은 중대한 순간에 위기에 처한 주인공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자마자 자위에 열중하던 디아의 시선이 꽂혔다.

“…아.”

반은 멍청하게도 아, 그 한 음절을 뱉었다. 땀구멍을 비집고 식은땀이 새어 나왔다. 조용히 사라져주는 배려는 물 건너갔다. 경직된 얼굴을 쓸어내리며 어색하게 손을 내저었다.

“못 본 걸로 할게. 계속… 해, 어.”

조금 더 그럴싸한 대응이 있을 테지만 반의 최선은 여기까지였다. 침대에 시선을 주지 않으며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이려던 찰나, 흥분이 스민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반.”

몽롱하나 어리숙한 낌새를 찾을 수 없는 부름이었다.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깜박 잊을 정도로 강력했다.

“반…. 나 힘들어….”

디아는 수치를 배우지 못한 것처럼 젖은 눈으로 반을 바라보며 허리를 쳐올렸다. 주름 잡힌 베개가 뭉개지며 시트가 밀려났다. 여태껏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던 지난날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제게 시선을 고정한 디아가 미간을 좁힌 채로 달뜬 숨을 토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물기가 가득한 눈에 연약한 빛이 어룽졌다.

“읏, 반…. 도와줘, 응?”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붙었다가 떨어졌다. 뺨을 붉게 물들인 디아는 해소되지 않는 성욕이 고통스러운지 연거푸 베개에 하체를 비비며 반을 불렀다. 사람을 잡아끄는 애달픈 부름이 바닥에 철썩 달라붙은 발바닥을 떨어뜨렸다.

다리가 절로 움직여 침대로 다가가긴 했지만 반의 머릿속에서는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디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자위는 도와 달라고 해서 도와줄 수 있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울먹이다시피 도움을 요청하는 디아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더딘 속도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흥분한 디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전혀 보지 못한 모습을 한 소년이 성욕에 잠식된 눈을 들어 올렸다. 시트에 이마를 기댄 디아는 땀범벅이었다. 웨인이 건네준 얇은 셔츠가 상체에 들러붙어 성장한 몸의 굴곡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풋내 날 정도로 싱그럽지만 성인 남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단단한 골격이 두드러졌다. 솟은 날개뼈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굴곡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반은 한순간 손목을 틀어 잡혔다. 깜짝 놀라 디아를 바라보자 흐리멍덩한 눈을 깜박인 소년이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반…. 하아….”

하얀 엄지가 손목 안쪽을 문질렀다. 손끝을 움찔거린 반은 스르르 손깍지를 낀 손을 당겨 손등에 입술을 파묻는 디아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젖은 입술이 손등에 짓이겨지며 뜨거운 숨결이 솜털을 간지럽혔다.

“힘들어, 반…. 어떻게든, 해 줘….”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발언이었다. 얼떨결에 침대로 다가온 반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였다. 끙끙거리며 하체를 비비적대는 디아를 어떻게 해야 하나 미친듯이 고민하던 차에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방심한 새 침대로 엎어진 반은 기겁하여 헤드 쪽으로 물러났으나 덮쳐드는 디아를 막지는 못했다. 소름이 돋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디아가 가쁜 숨을 터트렸다.

“반, 반…. 힘들어, 더워….”

“디아, 야. 잠깐만.”

소년의 어깨를 쥔 반은 뜨거운 체온에 놀라고, 밀리지 않는 디아의 힘에 두 번 놀랐다. 은근한 몸싸움이 일며 베개와 모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곧 죽어도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엉겨 붙은 디아가 반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헐떡이는 호흡을 터트렸다.

“흐읏, 읏….”

그때였다. 허벅지에 묵직한 살덩이가 문질러졌다. 낯선 감각에 흠칫한 반은 베개 대신 제 허벅지에 하체를 비비는 디아를 경악한 눈으로 응시했다.

팔 아래로 양손을 밀어 넣어 반의 어깨를 부여잡은 디아는 발정 난 개처럼 길쭉한 다리에 제 성기를 뭉그러뜨렸다. 검은 면바지에 감싸여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옷감이 얇은 탓에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사고 회로가 멈춘 반은 허벅지에 스윽스윽 스치는 디아의 아랫도리를 인식한 즉시 다급하게 소년을 밀어냈다.

“디아, 이러면 안 돼. 그만해. 어?”

일부러 엄하게 말하면서도 목소리가 살짝씩 떨렸다. 힘으로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숫제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싸늘해지기 전까지는 조금만 엄한 태도를 취해도 곧장 물러나던 디아가 고집을 부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턱 밑에 입술을 붙인 디아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 참겠어. 몸이 이상해….”

“아, 진짜….”

반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뭘 보고 들었기에 낯부끄러운 말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하는 건지. 교육자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디아를 불안한 눈빛으로 흘끔거리던 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혼자 하는 법… 알 거 아냐.”

“…응?”

“자위.”

“몰라….”

디아는 반의 허벅지에 샅을 비비는 배은망덕한 짓을 멈추지 않은 채 도리질 쳤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전자의 확률이 아무래도 높았으나 막다른 길에 몰린 반은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붙잡힌 몸을 마구 뒤척이다가 이내 포기한 반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깨를 뒤틀었다.

“이거 놔 봐.”

“갈 거잖아. 싫어, 가지 마.”

“만져 줄게. 얼른.”

디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찡그린 눈으로 반을 응시하다가 슬그머니 팔을 풀었다. 다만 아예 놓아주지는 않았다. 상체를 끌어안는 대신 뒷덜미를 손으로 받치고는 뺨을 비볐다. 반은 지독하게도 들러붙는 디아를 밀어 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미끄러뜨렸다.

“진짜 미치겠다….”

디아의 어깨에 턱을 얹은 반은 신세 한탄을 하며 바지 버클을 풀었다. 웨인이 가져다준 속옷은 이미 푹 젖어 있었다. 사정해도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은 그 사실이 어딘지 인간과는 다른 듯하다고 생각하면서 피부에 달라붙은 속옷을 살짝 내려 주었다.

아래가 보이지 않아 감으로 성기를 찾아야 했는데 굳이 헤맬 필요가 없었다. 속옷을 내리자마자 불뚝 솟아오른 성기가 손가락을 스쳤다. 델 듯 뜨거운 체온이었다.

“하….”

막상 디아의 성기를 만지려니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혀로 입술을 적신 반은 여러 번 되뇌었다. 딱 한 번만 도와주는 거다. 자상한 아버지처럼, 아니, 아버지가 자위를 도와주지는 않지만… 아무튼. 딱 한 번은 괜찮을 것이다.

“…다음에는 네가 알아서 해.”

어쩐지 지켜지지 않을 것 같은 조건을 내걸고 성기가 있을 부분을 더듬었다. 배까지 올라붙은 살덩이를 마지못해 거머쥔 반의 입이 합 다물렸다.

“흐읏….”

디아의 신음이 귀에 직격으로 꽂히면서 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염병할. 입 속에서 욕지거리가 맴돌았다.

디아가 스스로 씻을 줄 아는 나이가 된 이후 같이 욕실에 들어간 적은 전혀 없었다. 고로 디아의 ‘그곳’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할 길도 없었고, 확인하고픈 마음도 없었던 반에게 현 상황은 충격을 넘어 경이로운 성장의 신비와 다름없었다.

제 손이 작은 편도 아니건만 손바닥에 빠듯하게 들어오는 성기는 어떤 면으로는 징그럽고 무서웠다. 심지어 쿠퍼액인지, 정액인지 모를 액체가 덕지덕지 묻어 있어 끈적거리기까지 했다.

“왜 이렇게….”

도를 지나치면 질투도 안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은 반은 이토록 성장한 이유를 물으려다가 말았다.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은 그깟 호기심이 아니었다. 이를 악문 반은 가볍게 디아의 성기를 쓸어 올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액이 밀려 올라가며 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읏, 반….”

“이렇게 하면 돼.”

반은 빠른 속도로 성기를 흔들면서 디아의 어깨에 눈가를 비볐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반도 간혹 자위를 했지만 남의 자위를 도와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맨정신으로 남자의 성기를 만지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정숙한 생을 살아온 것 같아 겸연쩍어지면서도 귓바퀴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디아의 나지막한 신음이 목덜미에 쏟아지자 몹쓸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하아, 흣…. 반, 더….”

끈적한 액체가 티셔츠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팔은 뻐근해졌고 늘어진 셔츠 자락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반은 이렇게 된 이상 얼른 끝내자 싶어 디아의 셔츠 자락을 끌어 올린 다음 남은 손까지 맞붙은 몸 사이로 밀어 넣었다. 한 손으로 기둥을 쓸어 올리면서 다른 손바닥으로 귀두를 문질러 주자 디아의 허리가 움찔움찔 튀었다.

“반, 반….”

“…내 이름 부르지 마.”

미간을 찌푸린 반은 누가 들을까 무서울 정도로 계속 이름을 부르는 디아를 책망하며 자위를 도와주었다. 분명 한 번 쓸어 올릴 때마다 정액을 싸는 것 같은데 딱딱한 성기는 도통 가라앉질 않았다.

왜 이러지, 왜 이러지…. 빨리 끝내고 이 일을 잊고자 했던 반의 계획은 점점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디아는 빨리 쓸어 올리는 손길조차 모자란지 스스로 허리 짓을 했다.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었다.

“반….”

“디아 잠깐….”

목덜미에 쪽쪽대는 디아를 어깨로 밀어 낸 반은 아래를 흘끔 내려다봤다. 셔츠 자락을 헤치고 스며든 램프 빛이 무섭도록 발기한 성기를 비추었다. 맨눈으로 확인하자 징그러울 정도로 두껍고 긴 성기가 희뿌연 액으로 범벅된 채 꺼떡거렸다.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다문 반은 제 뒷덜미를 꼭 붙든 디아를 곁눈질했다. 여전히 뜨거운 숨을 내뱉는 디아는 발정 난 것처럼 반의 손바닥에 귀두를 비볐다.

“만져 줘, 반…. 계속….”

큰일 났다. 진짜 큰일 났다. 반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소리 지르고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꾹꾹 억눌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마지막 날까지 디아와 영영 화해하지 못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숨을 살짝 들이켠 반은 애매하게 떠 있는 양손을 모으고 디아를 올려다봤다. 녹색 눈동자에 누런 램프 빛이 섞여 오묘한 색이 도는 눈과 마주쳤다. 젖은 성기처럼 질척질척한 눈빛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반은 디아와 넘어오지 못할 강을 건너기 전에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아주 조심스럽고 넌지시.

“그, 여기 넣어 볼래?”

한 손으로는 모자랄 것 같아 두 손을 살짝 깍지를 껴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적당한 크기의 굴 모양이 된 손바닥을 내밀자 디아의 시선이 천천히 떨어져 손에 도달했다.

디아는 손의 의도를 가늠하며 거듭 허리를 쳐올렸다. 몸이 자연히 들썩이며 핏줄 불거진 살덩이가 손등에 문질러졌다. 반은 소년이 흉측한 성기를 집어넣을 수 있는 또 다른 구멍을 눈치채기 전에 먼저 손을 뻗었다.

“이렇게.”

손날을 스친 귀두가 조그만 공간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정액이 묻어 반들반들한 기둥을 감싸며 내려가자 귀두가 엄지를 누르며 밖으로 쑥 튀어나왔다. 손목에 힘을 줘 공간을 빡빡하게 만든 후 한 번 더 훑어 주자 디아의 눈이 가느다랗게 찌푸려졌다.

“아…. 반….”

반은 손바닥에 담긴 성기를 빠르고 강하게 훑었다. 양손으로 쥐자 드디어 넉넉하게 감싸이는 살덩이는 소년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듯 흉측하고 뜨거웠다. 반은 미끈한 귀두를 엄지로 문지르며 디아를 흘끔거렸다.

마냥 비비는 것보다 꽉 조이는 손길이 마음에 드는지 눈초리가 느슨하게 풀렸다. 반은 차라리 아래를 볼 것이지 제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디아의 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지겨울 정도로 많이 겪어 본 분위기였음에도 낯이 뜨거워졌다.

꼿꼿하게 올라붙어 명치를 찌를 듯한 성기를 세게 쓸어 올리자 정액이 비누 거품처럼 흘렀다. 크기가 만만치 않다 보니 온 팔을 다 써야 하는 탓에 근육이 뻐근했다. 이것도 운동이라고 피부 속에서부터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뺨이 발개진 반은 헐떡이는 디아를 흘깃거리며 물었다.

“기분 좋아?”

“너무….”

“그럼 빨리 싸. 나 힘들다….”

장난스럽게 넘어가고 싶어도 자꾸만 디아의 시선을 피하게 됐다.

민망해하는 것이 역력한 반을 줄곧 내려다보던 디아는 이를 악물고는 베개에 대고 했던 짓을 반의 손바닥에 해 대기 시작했다. 반의 뒷덜미를 움켜쥔 소년이 본능을 좇아 허리를 쳐올리자 낡은 침대가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또 책이 떨어지고 연필이 굴러떨어졌다.

“하아, 하….”

“읏….”

눈을 살짝 찌푸린 반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디아를 받아 내며 손에 힘을 주었다. 맞붙은 손 틈새로 빠끔빠끔 튀어나오는 귀두를 바라보며 슬슬 한계에 다다른 팔근육을 쥐어짜 냈다.

“반…. 읏, 하아….”

사실 반이 원했던 것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살짝 만져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게 두려고 했는데 어쩌다 디아의 밑에 깔려서 이딴 유사 성행위를 하고 있는 걸까. 끼익끼익 흔들리는 침대의 소음이 커질수록,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의 양이 많아질수록, 디아의 숨소리가 커질수록 못 견디게 불편해졌다.

넘어가면 안 되는 선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딱 한 발만 뻗으면 기분 좋은 일이 펼쳐질 미래가 명백했으나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선이기도 했다. 죽을힘을 다해 다른 생각을 하려는 순간, 영악한 디아가 혼란을 틈타 고개를 꺾었다.

“음…!”

입술이 부딪치며 달뜬 숨결이 혀를 감쌌다. 턱이 젖혀진 반은 허리 짓과 동시에 혀를 밀어 넣는 디아에게 완전히 뒤덮였다. 우스웠던 일이나 슬펐던 일을 떠올리려던 머리가 삽시간에 야릇한 쾌감으로 물들었다.

반의 혀는 거부하듯 디아의 혀를 밀어 내다가 뱀처럼 엉켜 드는 그것에 감싸였다. 넘어오는 타액을 꼴깍 삼킨 반은 잠시간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처럼 디아의 혀를 감아올렸다.

“흐읍, 읏….”

디아는 반을 뭉개 버릴 듯이 힘을 줘 입술을 누르면서 허리 짓도 멈추지 않았다. 부실한 침대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끽끽 밀려났다. 손바닥 살결이 다 짓무를 정도로 하체를 치받던 디아는 반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면서 허리를 움찔움찔 떨었다. 뒷덜미를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하아….”

반은 티셔츠를 적시고 아랫배에 고인 정액을 아연하게 내려다봤다. 일반적인 남자보다 양이 배로 많아 시트까지 적실 정도였다. 급한 불이 꺼진 듯 눈을 깜박인 디아가 뺨을 맞비비면서 시야가 가려졌다.

피가 몰려 입술이 새빨개진 반은 천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처음보다는 낫지만 아직 강직이 풀리지 않은 성기가 허벅지에 스쳤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 딱딱해, 반.”

숨을 몰아쉬던 디아가 슬쩍슬쩍 허리를 움직였다. 이마를 맞댄 소년은 우울한 미인에서 음란한 미인이 되어 입술을 살짝씩 빨았다. 집 나간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반은 속수무책으로 입술을 빨리다가 디아의 성기가 사타구니에 닿자마자 어깨를 떨었다.

“반도 이러면 기분 좋아?”

미묘한 어조로 묻는 디아를 바라보던 반은 자신의 상태를 한참 늦게 깨달았다. 디아의 자위를 도와주며, 소년과 입을 맞추며 발기한 성기가 짓눌렸다. 도대체 왜, 언제 발기했는지 모를 제 성기 위로 팔뚝만 한 살덩이가 문질러졌다.

드디어 꿈에서 깨어난 듯 유혹에서 빠져나온 반은 질겁하며 디아의 가슴을 밀었다. 그러나 체격으로는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디아가 자세히 보면 앳된 얼굴을 가까이 하며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반이랑 하고 싶어.”

“…뭐?”

“섹스하고 싶어. 너랑.”

키스에 이어 자위까지 배운 소년은 반의 예상대로 더한 것을 요구했다. 속삭이며 말하는 디아는 마치 사람을 홀리는 괴물 같았다. 망측한 부탁에 도로 넋이 나간 반은 저를 꿰뚫듯이 응시하는 두 눈과 마주쳤다. 인간과 흡사한 동공이 최면을 걸듯이 반의 시선을 옭아맸다.

“너한테 넣고 싶어. 넣게 해 줘.”

안쓰러움을 유발하는 표정이 미미하게 뒤바뀌었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길쭉하게 뻗은 눈꼬리가 아래로 휘어지자 아름다운 얼굴이 오싹한 분위기를 머금었다. 입술을 꿰맨 것처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디아의 눈을 바라보던 반은 석상처럼 굳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입을 맞추려고 다가오는 디아를 황급히 밀어 낸 반은 도망치듯이 방을 벗어났다. 첫날을 제외하고 한 번도 닫히지 않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자 휘청이던 다리가 무너졌다.

철문에 등을 대고 주르륵 미끄러진 반은 뚜껑이 열린 채로 덩그러니 놓인 물통을 망연자실하게 응시하다가 고개를 내렸다. 양 손바닥을 펼치자 끈적거리는 액체로 흥건한 살결이 드러났다.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정액이 스며 번들거렸다. 정액이 뜨거울 리도 없는데 손바닥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외계인의 정액은 뜨거울지도 모르지.

열기가 고인 눈을 깜박이던 반은 시선을 더 내려 하체를 내려다보았다. 불룩한 앞섶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입 안에 곳곳에 고여 있는 디아의 침을 꿀꺽 삼킨 반은 볼 점막을 세게 깨물었다. 만지고 싶었다. 좁은 곳에 넣어 흔들고 싶었다. 어떻게든 욕구를 해소하고 싶었다.

정액으로 흥건한 손이 바지 버클을 향해 스르르 내려갔다. 쿠퍼액이 새어 나와 축축하게 젖은 속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던 반은 소스라치게 놀라 팔을 들어 올렸다. 도둑질하다 걸린 듯한 자세로 한참을 얼어붙어 있었다. 지금 뭘 하려던 거지. 생각하기를 멈춘 머리가 삐걱삐걱 돌아가기 시작했다. 입을 쩍 벌린 반은 허망한 표정으로 양팔을 겹치고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두 손을 꽉 쥔 채로 땅이 꺼져라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수 분 후 고개를 휙 들어 올린 반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아, 진짜….”

거세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피나도록 손을 씻었지만 뜨끈한 살덩이가 남긴 감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타듯이 붉어진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졌다가 다시 빨개지길 반복했다. 디아의 입술과 혀가 닿았던 입 안을 연거푸 헹구다가 양치까지 했지만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좁은 욕실을 빙글빙글 돌던 반은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왜 한밤중에 잠이 깨서는. 디아의 신음을 무시했더라면. 아니, 도와줘야겠다는 이상한 책임감에 사로잡히지 않았더라면. 다른 건 다 했어도 흔들리지만 않았다면. 애초에 성욕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을 공격하는 지경까지 이른 반은 미칠 것 같은 나머지 눈물을 찔끔 흘렸다. 대체 거기서 손은 왜 모아서, 키스는 또 왜 해서, 그걸 왜 또 받아 주고 앉아서 발기까지 했는지.

습한 눈가를 벅벅 문지른 반은 무릎을 안고 뼈저리게 후회했다. 물질적인 것에 약한 만큼 성욕에도 약한 자신이 이토록 끔찍한 적은 처음이었다.

좋게 봐줘서, 디아가 길 가다가 만난 낯선 이거나 옆집 살던 짓궂은 꼬맹이쯤 됐으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연하는 취향이 아니지만 디아는 이제껏 만나 온 그 누구보다도 예뻤으니 특별한 경험으로 치고 유혹에 넘어갈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반을 죄책감 속에서 허덕이게 하는 것은 이러나저러나 직접 키운 아이라는 점이었다.

“미친, 진짜…. 내가 미쳐서….”

디아가 있을 방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재활용 안 되고 타지도 않는 쓰레기가 바로 자신이었다. 망할 놈이라는 악담도 모자랄 갱생 불가 쓰레기.

반은 연신 자학하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양팔을 넓게 벌리면 손끝이 벽에 닿을 정도로 좁은 욕실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와 의자, 탁자가 전부인 작은 방과 자동으로 닫히는 철문, 막힌 탈출구와 디아.

뜬금없게도 왜 이렇게 좁은 방에 디아와 단둘이 가두었는지 상대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다음으로 뒤통수를 치고 들어온 것은 몇 달 전 저녁 식사에서 웨인이 농담처럼 던진 말 한마디였다.

‘키웠으면 동정은 떼 줘야 할 거 아냐.’

애를 두고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윽박질렀던 기억이 생생했다. 불현듯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침대가 부서져라 허리를 쳐올리던 디아가 줄곧 쥐고 있던 뒷덜미에서부터 한기가 들불처럼 번졌다. 미래를 예고하듯 번져 나가는 한기에 팔뚝을 잡은 반은 불안이 감도는 눈을 들어 디아의 방을 응시했다.

디아가 언제부터 달라졌더라. 워낙 빨리 자라서 시기를 특정할 수가 없었다. 다만 언뜻 성인 티가 나던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엉겨 붙은 듯하다. 아기 때도 그랬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웨인과 뒹구는 모습을 들킨 날부터 태도가 미묘해진 것만은 확실했다. 고심하는 반의 귓가에 뜻 모를 짓만 골라서 하는 웨인이 또다시 속삭였다.

‘그러니까 그게 너랑 섹스하고 싶어 한다는 거네.’

반은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과도한 걱정은 정신 건강을 망치는 지름길이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도 버거운데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오랜 자책을 마치고 욕실 밖으로 나온 반은 철문을 흘끔거리다가 싸늘하게 식은 침대로 파고들었다.

단잠은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헐떡이던 디아가 떠올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디아의 목소리가 거듭 들려오는 기분에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틀어 잡혔던 목덜미가 연신 화끈거렸다.

하염없이 뒤척거리던 반은 눈 밑이 검게 물들어 판자를 떼어 낸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이 터 오는 하늘은 여느 때처럼 흐리멍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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