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6/19)

02.

디아 몫의 식사 트레이를 든 반은 문 앞을 서성이며 죄 없는 입술만 질근거렸다. 웨인이 전달한 식사를 챙겨 주려면 반드시 철문을 열어야 했다.

반이 이토록 망설이는 이유는 어젯밤 사태 때문이었다. 도저히 디아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장면을 단지 목격한 것뿐이라면 오히려 어깨를 두드려 주며 모두가 겪는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겠지만 반은 지은 죄가 있었다.

한순간 흔들렸을 뿐이건만 그 자체가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식어 가는 수프를 멀거니 내려다보던 반은 철문에 난 눈구멍을 살짝 열었다. 스르륵 드러난 네모난 창에 눈을 가져다 댄 반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녹색 눈이 눈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아 씨….”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자칫하면 엎을 뻔한 트레이를 움켜쥔 반은 언제부터 저 상태였는지 모를 디아와 눈싸움했다. 시선을 교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부담스러운 시선을 주던 디아가 문을 똑똑 노크했다. 열어 달라는 뜻이었다.

트레이를 한 손으로 받쳐 든 반은 내키지 않는 손짓으로 철문을 열었다. 열리는 문 너머로 드러난 디아는 어제 모습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깔끔한 차림이었다. 하얀 셔츠에 주름지지 않은 검은 바지를 잘 차려입은 소년은 흐트러진 구석이 전혀 없었다.

달라진 점은 또 있었다. 며칠간 예민한 고양이처럼 다가가기만 해도 진저리 치며 피하던 놈이 답지 않게 순순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제 일이 민망해서라도 피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불편한 시선만 교환하던 중, 디아는 무언가 부끄러운 듯이 눈을 내리깔며 살짝 웃었다. 홍조가 어린 뺨이 탐스러웠다.

“잘 잤어?”

애교가 듬뿍 담긴 아침 인사가 날아왔다. 한숨도 자지 못한 반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내밀었다. 너는, 하고 물어볼 만도 한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디아는 수프와 빵 반 덩이, 과일 한 주먹이 담긴 트레이를 받아 들더니 문턱을 넘어 반의 방으로 들어섰다.

“같이 먹을래.”

“어, 그럼. 괜찮지. 의자 가져올게.”

식사를 같이하자고 할 줄은 더더욱 예상 못 했던 반은 허둥지둥 디아의 방으로 들어가 의자를 가지고 나왔다. 그사이 탁자에 트레이를 올려 둔 디아는 반이 가져온 의자를 넘겨받아 자리에 앉았다.

마주 앉은 둘은 조용히 식사했다. 웨인이 직접 끓인 수프는 그럭저럭 맛이 좋았지만 반은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 밋밋한 빵을 찢어 수프에 담그고 디아를 흘끔거렸다. 먹는 것에 영 관심이 없는 소년은 수프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과일 몇 개만 집어 먹었다. 알이 큰 포도 한 알을 입술 새로 밀어 넣는 모습이 꼭 새침한 새 같았다.

스푼으로 수프를 휘젓던 반은 어색해서 소름이 돋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색함을 타파하는 데는 뒷담만 한 것이 없었다.

“…밥을 왜 이렇게 부실하게 주냐. 이 새끼 돈 없나 봐.”

“이거 먹어.”

“네 걸 달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만 먹지 말고 이것도 다 먹어.”

그러나 디아는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냉큼 수프를 내밀어 주는 소년을 만류한 반은 혼자서라도 웨인 욕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가둬 두었으면 식사라도 잘 챙겨 줄 것이지 매번 빵으로 때우는 것이 몰염치하기 짝이 없다고 투덜거리자 잠자코 듣던 디아가 어깃장을 놓았다.

“걔 얘기 그만하면 안 돼?”

수프에 젖은 빵을 꿀떡 삼킨 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긴 뒷담화하는 꼴이 보기 좋을 리는 없지 싶어 무안해졌다. 한풀 꺾인 모양새로 ‘알았어’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포도를 씹어 넘긴 디아가 느지막이 ‘나도 걔 싫어’ 하며 동조했다. 작은 탁자 위에 얹은 손가락 끝을 매만지며 말을 고르던 디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우리 얘기 하고 싶어서.”

“아….”

안타까운 일이었다. ‘우리’에 관련된 것은 반이 너무나도 피하고 싶은 화제였다. 미지근한 물을 홀짝이며 표정을 감추려고 했지만 마뜩잖은 티가 났다. 반을 따라 줄어들지 않는 수프에 빵을 찢어 넣은 디아는 어색해하는 남자를 힐긋 보고는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불편해?”

“어?”

고개를 든 반은 수프를 휘젓는 디아를 바라보다가 도리질 쳤다.

“아니, 전혀. 안 불편해.”

“어제 일 때문에?”

디아는 안 불편하다는 것치고 행동이 자연스럽지 않은 반의 정곡을 찔렀다. 그렇게 표가 났나. 까칠한 뺨을 쓸어내린 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 보였다.

“원래 다 그러는 건데, 뭐. 나도 그랬고 웨인도 그랬을걸? 네가 늦은 거지. 부끄러울 일도 아니고…. 괜찮아. 음…. 자연스러운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다 괜찮은 거니까.”

구차한 말이 길어질수록 누가 어제 일을 가장 신경 쓰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베이비시터의 필수 조건인 평정심을 잃은 반은 멋대로 나불거리는 입을 힘겹게 닫고 눈을 굴렸다. 이 정도로 고역이었던 대화가 있었던가. 처음 사귄 여자 친구나 어려운 상사, 까다로운 의뢰인을 대하면서도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막막함이었다.

반이 28년간 쌓아 올린 가치관을 밑동에서부터 흔들어 놓은 디아는 제 눈동자처럼 푸르른 포도를 한 알 더 집어 먹으며 웃었다.

“나 안 부끄러운데.”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반은 입술을 삐죽이며 수프 그릇을 비웠다. 아무리 경험을 이어받느니 뭐니 해도 일반적인 상식이나 문화를 접하지 못한 영향이 있긴 있는지, 디아는 상당히 뻔뻔한 면이 있었다. ‘나라면 고개도 못 들었다’ 하며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포도를 입에 넣었다. 달다기보다 새큼했다.

“반.”

생각보다 신맛에 눈살을 찌푸린 반이 디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반을 부른 디아는 금속 트레이 모서리를 쓰다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계속 피한 거….”

뜻밖의 주제였다. 팔꿈치를 탁자 위에 올린 반은 물 잔을 기울이며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삐졌던 이유를 설명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이미 반은 답을 알고 있지만 궁금한 척 고개를 끄덕이자 불그스름한 입술에서 괴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너만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응?”

설마 본인이 생각하는 그것은 아니겠지 싶어 뒷말을 들어 보려는 찰나 디아가 기대를 깨부쉈다.

“만지고 싶어.”

입 안에 머금은 물이 잘못된 구멍으로 들어갔다. 사레가 들린 반은 콜록거리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숨도 못 쉬고 거듭 기침하는 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디아는 괴로워하는 반의 물 잔에 새 물을 따라 내밀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시는 동안에도 디아는 경악스러운 말을 멈추지 않았다.

“키스하고 싶고 빨고 싶어. 더한 것도 하고 싶고.”

“켁, 흡…!”

또다시 사레가 들려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기침을 멈추려 애쓰던 반은 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어젯밤이 속속들이 떠오름을 느꼈다.

‘반이랑 하고 싶어. 섹스하고 싶어. 너랑.’

특히나 디아가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던 적나라한 욕망은 조금 전 들은 것처럼 귓속에서 생생하게 메아리쳤다. 그 때문에 기침이 멎어도 벌게진 얼굴은 가라앉지 않았다. 입을 틀어막은 채로 머리를 굴리던 반은 서먹하게 웃으며 트레이를 정리했다.

“씁…. 왜 그럴까? 이상하네.”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울려 줄 것이 아니라면 발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머릿속에 새기고 트레이를 문 옆에 가져다 둔 반은 디아가 있는 탁자로 선뜻 돌아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디아는 괜히 꿈쩍도 하지 않는 문고리를 돌려 보며 회피하는 반을 응시하다가 힐난을 툭 던졌다.

“알잖아. 왜 그러는지.”

“몰라. 완전 모르는데.”

“모르는 척하는 티 나는 거 알지.”

아이 씨…. 속내를 들킨 반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뒤로 돌아섰다. 척척 걸어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태어났을 때부터 봤다고 웬만한 거짓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 쭉 뻗은 팔을 괴고 탁자에 엎드린 디아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반이 참 잘생겼다고 생각하면서. 디아는 탁자 밖으로 삐져나가 침대 매트리스에 닿을 듯 말 듯 한 손가락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어제 반도 좋아하던데.”

“착각이야.”

“분명히 섰어.”

“기분 탓이겠지.”

“내 거 만지면서 좋았어?”

말도 안 되는, 아니 어쩌면 말이 되는 억지에 따박따박 대꾸하던 반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디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반과 눈을 맞추며 다시금 물었다.

“나 도와준 것처럼, 반도 그렇게 풀었어? 손에다가….”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혼난다.”

냅다 말을 끊었다. 사상이 바람직하다고는 못 해도 양심에 털이 난 수준은 아니었던 반은 이 끔찍한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 어제 철문을 닫은 후의 일을 알고 저러나 싶어 흘끔거렸지만 디아는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시종 태평한 낯이었다. 눈이 딱 마주친 디아는 탁자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묘하게 들리는 대꾸를 했다.

“혼내도 되는데.”

“말대꾸 그만하고 말 시키지 마. 잘 거야.”

쌩하니 돌아누운 반의 등이 둥글게 굽어졌다. 디아는 척추뼈가 도드라진 등을 쓰다듬을 것처럼 손가락을 곧게 뻗고 손목을 살랑거렸다. 얇은 티셔츠에 감싸인 허리와 탄탄한 엉덩이까지 눈으로 핥은 디아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나 반이 처음이야.”

피할 방법이 없어 자는 척을 택한 반은 활짝 열린 귀로 들어오는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했다. 처음은 무슨 처음. 이상한 뜻이 아니길 바라며 몰래 코웃음을 치던 찰나 디아의 말이 이어졌다.

“따먹으면 반도 좋을 텐데.”

반은 눈을 끔벅였다. 제발 잘못 들었길 바라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디아는 여전히 엎어진 자세로, 무표정한 얼굴로,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맹목적인 시선을 줄 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반은 살짝 쉰 목소리로 물었다.

“…너 뭐라고 했냐?”

“나 어려. 탱탱하고 힘도 좋아. 거기도 크고. 크면 좋다고….”

“미쳤어?”

기다렸다는 듯한 디아의 어필을 듣다 말고 상체를 일으켰다. 웨인을 훌쩍 뛰어넘는 희롱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인 디아를 입 떡 벌린 채로 바라봤다. 스르륵 일어난 디아는 등받이에 기대어서는 제가 무슨 망발을 한 건지 전혀 모르는 얼굴로 맑게 웃었다.

“안 미쳤어. 멀쩡해.”

아니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이마를 짚은 반은 더듬거리며 디아를 저따위로 만든 원인을 찾아내고자 했다.

“너 어디서 그딴, 어디서….”

“책에서.”

“무슨 책.”

디아는 대답이 없었다. 소년을 노려보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반은 옆방으로 넘어갔다. 막막할 정도로 어질러진 방을 뒤지면서 책이란 책은 모조리 뒤집어 표지를 확인했다. 개중 반의 시야에 들어온 책이 한 권 있었다.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 사이에 낀 책이었는데, 표지가 무려 시뻘건 색이었다. 이거다 싶어 집어 든 반은 제목을 확인하자마자 욕을 내뱉었다.

<저돌적인 연하의 101가지 공략법>.

얼마나 들여다봤는지 제법 두꺼운 책이 곧 찢어질 듯 너덜너덜했다. 환장하겠다. 정말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반은 웨인이 들어오자마자 걸레짝이 된 책을 내던졌다.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책을 받아 든 웨인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의 기분이 나쁘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딴 책 주지 마.”

표지를 확인한 책을 트레이 위에 얹은 웨인이 허리를 세우며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여러 방면으로 배우면 좋지.”

“그딴 걸 배워서 어디다 쓰게?”

“다 쓸 일이 있겠지.”

디아를 남의 주머니 털어먹는 제비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쓸 일 따위 조금도 없는 지식이었다. 반은 디아가 있는 방을 흘깃거리고는 재빨리 웨인에게 다가갔다. 문을 막아선 웨인의 앞에 도착한 반은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야. 너 일부러 나 여기 가둔 거지.”

“무슨 말이야?”

“디아, 디아가. 하….”

망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입술을 깨문 반은 한 뼘 열린 문 틈새와 웨인의 어깨 사이를 비집으며 억지를 부렸다.

“나가게 해 줘.”

“안 돼.”

“나간다고!”

“나 총 있어.”

“쏘시든가. 몰라, 나 나가야 돼.”

총에 맞는 것이 디아의 질 낮은 언어에 두들겨 맞는 것보다 훨씬 덜 아플 것 같았다. 그만큼이나 디아의 태도는 시시각각 정신적인 충격을 줬다. 사실 더 무서운 것은 반, 본인이었다.

디아를 바람직하지 않은 눈으로 볼까 봐 겁에 질린 반은 웨인의 팔을 붙잡고 나갈 거라고, 나가고 싶다고 생떼를 부렸다. 소란을 듣고 건너온 디아의 눈빛이 싸늘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디아는 웨인과 힘겨루기하는 반의 상체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화들짝 놀라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반을 질질 끌고 들어간 디아는 불쾌하다는 듯이 웨인을 노려봤다.

“나가.”

걷어차인 문이 거세게 닫혔다. 트레이 두 개와 <저돌적인 연하의 101가지 공략법>을 든 채로 쫓겨난 웨인은 굳게 닫힌 문을 응시하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감금한 놈들에게 문전박대당할 줄이야.

***

반은 웨인과 싸워 얻어 낸 커피를 홀짝이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자 했다. 안타깝게도 잘못된 선택이었다. 오랜만에 들이켠 카페인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수선스러운 심장 부근을 꾹 누른 반은 디아를 훔쳐봤다.

찬바람 쌩쌩 불 때는 언제고 디아는 반의 침대 위로 비집고 올라와 얌전히 소설책을 읽는 중이었다. 무분별한 독서로 인한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반이 미리 검수한 책이었다. 세상은 너의 생각만큼 사랑이 넘쳐 나지 않는다는 뜻을 담아 추리 소설을 골라 주었는데, 제법 재미있는 모양인지 점심부터 푹 빠져 있었다.

벽돌만 한 책을 벌써 반절이나 읽은 디아는 요 며칠 새 꽃이 개화한 것처럼 미모가 폈다. 반은 마냥 뿌듯하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소년의 옆얼굴을 관찰했다.

직모에 가까운 반과 달리 디아의 머리카락은 예쁘게 구불거리는 편이었다. 막 쓸어 넘겨도 손질한 것처럼 멋져 보이는 모질은 예나 지금이나 반의 부러움을 샀다. 짧게 잘라도 예쁘겠지만 반의 취향대로 살짝 길게 손질한 머리칼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집중한 디아가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높은 콧대가 드러났다가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에 가려졌다. 저 금빛 머리칼 탓인지, 어떻게 보면 성에 갇혀 기사님을 기다리는 왕자님 같기도 했다. 머릿속이 온통 음란한 왕자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커피 향이 나는 한숨을 내쉰 반은 딱 붙어 있어도 비좁은 공간임에도 디아와의 틈에 꾸역꾸역 끼워 넣은 베개를 똑바로 세웠다. 디아가 베이비시터에게 욕망을 고백한 날로부터 이틀이 흘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반의 기개 덕분이었다.

실상 반은 기개랄 것도 없는 인간이지만, 부성애라고 해야 할지 양심이라고 해야 할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디아의 저돌적인 공략을 방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약발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반은 긴 다리를 쭉 뻗은 채로 발끝을 제 발끝에 톡톡 부딪치며 페이지를 넘기는 디아를 내버려 두었다. 너무 억압했다가 폭발하는 것보다야 조금쯤은 봐주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리고 당장 코앞에 닥친 문제는 디아의 음험한 머릿속이 아니었다.

“디아.”

“응?”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하는 디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반이 가볍게 물었다.

“내가 좋아, 책이 좋아?”

“반.”

디아는 생각할 거리도 없다는 듯이 즉각 대답했다. 커피 잔을 내려 둔 반은 성의 없는 디아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때리고는 다시 물었다.

“생각해 보고 말해. 자. 다시 말해 봐.”

“반이 좋아.”

역시 비교 대상이 잘못됐다. 반은 반성하며 재차 비교군을 골랐다. 뼈가 있는 물음이었다.

“갑갑한 게 좋아, 아님 아무것도 모르는 게 좋아?”

“반이 좋은 게 좋아.”

“할머니가 좋아, 젊은 남자가 좋아?”

“반이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손등으로 디아의 가슴팍을 툭 건드린 반은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겠냐고 목소리를 깔았다. 이제 목소리를 까는 것으로는 눈도 깜짝 않는 디아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진심이야.”

“네 의견은 없냐?”

“반 의견이 내 의견이야.”

눈을 가늘게 뜬 반은 찌그러진 베개를 툭툭 때렸다. 뜻하지 않게 디아의 세계에서 본인의 위치가 얼마나 공고한지 엿본 것 같았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떨떠름했다. 타인에게 이다지도 큰 의미로 자리 잡은 적이 없었던 반은 다소 부담스러우면서도 미안했다. 미셸과 약속한 날까지 남은 시간은 2주 남짓. 디아의 맹목성은 갈팡질팡하는 반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다. 갈등이 깊어지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용의자가 두 명으로 좁혀지는 흥미로운 지점에서 책을 덮은 디아는 고심하는 반을 돌아봤다.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을 만지작거리자 황금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시선을 맞췄다.

“고민돼?”

“…어?”

“뭘 그렇게 고민해.”

눈을 크게 뜬 반은 설마 디아가 제 고민거리를 알고 있나 싶어 빤히 쳐다봤으나 딱히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또 그놈의 전이인지 숙주인지, 괴상한 능력으로 감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반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힘든 척을 했다.

“네가 말을 안 들어서.”

“이런 거 좋아하면서.”

“안 좋아하는데.”

“좋아해.”

“안 좋아해.”

“그럼 미워?”

“그건 아니고.”

“그럼 좋아?”

의미 없는 입씨름에 대꾸해 주던 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베개를 휙 빼내는 디아의 손을 치우고 구겨진 베개를 반듯하게 세우자 작게 웃은 소년이 검지로 손등을 건드렸다.

“말로 해 줘.”

그걸 또 굳이 굳이 말로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디아가 마냥 밉지는 않았다. 반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두 손 두 발 다 든 반은 디아의 요구 사항을 허탈한 심정으로 들어주었다.

“좋아해. 너어무 좋아하지.”

“나도 사랑해.”

행복하다는 듯이 환히 웃은 디아가 또다시 사랑을 입에 올렸다. 우스운 나머지 너털웃음을 터트린 반은 얼른 책이나 읽으라고 덮은 책을 직접 펴 주었다. 반의 머리에 뺨을 비빈 디아는 금세 소설에 빠져들었다.

반은 페이지를 고정한 소년의 깨끗한 엄지를 바라보며 씁쓸함을 느꼈다. 흉터 하나 없는 새하얀 손등이 무엇보다 큰 악력으로 반을 흔들었다.

***

오늘따라 졸려 하는 디아를 재운 반은 조심스럽게 철문을 닫고 웨인을 기다렸다. 저녁 식사를 치우러 온 웨인에게 이따 한번 들르라고 조용히 전했지만 올지 안 올지는 몰랐다. 한 시간, 두 시간… 모포를 접었다가 폈다가 방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기다린 끝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걸터앉은 반은 들어서는 웨인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여전히 허리춤에 권총을 찬 웨인은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순순히 의자에 기대앉았다. 건방지게 다리를 꼬는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삐뚜름히 노려보던 반은 손바닥을 비비며 할 말을 골랐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입이 벌어졌다.

“그… 디아 말이야. 네가 데려가면 어떻게 되는데?”

“마음은 제대로 정했고? 장난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네 말 들어 보고.”

웨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아쉽다는 태도를 취했다. 우유부단하게 갈등하는 모습이 답답할 테지만, 반은 섣불리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막대한 의뢰금과 양심이 걸린 일이었다. 두 가지가 양립한다면 반은 언제나 막대한 의뢰금의 손을 들어 줬지만 디아가 예상외의 복병이 됐다. 반은 웨인의 답을 기다리며 정리한 궁금증을 한꺼번에 쏟아 냈다.

“너한테 넘기면 디아는 누구랑 사는데? 너랑 살아? 뭐 하고 사는데. 어디서?”

“하나씩 물어.”

“쟤 친구들… 가족인가. 하여튼 게네들 있는 데로 가냐? 뭐 하려고? 왜? 걔네 착해? 뭐 하는 애들인데? 직업은 있냐? 돈은 좀 벌어?”

하나씩 차근차근 물어보라고 했더니 배로 질문을 터트리는 반을 흘끔거린 웨인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가서 네 눈으로 보면 되잖아.”

호구 조사까지 할 기세로 와다다 쏟아 내던 반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입을 다물었다. 턱을 괸 웨인을 멀뚱히 바라보던 반은 이미 결정 내린 결론을 얘기했다.

“안 갈 건데.”

“왜.”

이유를 물어본다고 한들 처음부터 정해 놓은 결론이었다. 미셸에게 보내든, 웨인에게 보내든 반은 디아를 따라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반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돈이었으며, 지향하는 목표는 안락한 삶이었다.

반면 디아는 존재 자체가 불안 덩어리였다. 인간이 아니며 괴상할 정도로 아름답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그럴싸한 직업을 갖지 못할 것이고 자연히 부와 재산과는 멀찍이 떨어진 삶을 살 것이다.

한낱 정에 휘둘려 소년을 따라나선다고 치자. 반은 그들의 삶에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머리 나쁜 싸구려 용병. 게다가 싸움을 기막히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무기에 빠삭한 것도 아니다.

같은 처지인 사람들과 시시덕거리며 얼른 의뢰 기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하루살이 인생과 국가가 쫓는 외계 생명체는 헛웃음 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반은 단지 부유하고 평탄하게 살고 싶었다.

“…그냥. 내가 굳이.”

짧게 축약하자면 이 한 문장이면 될 것이다. 웨인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흠, 하고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반이 두서없이 터트린 질문을 정리해 간단한 답을 달아 줬다.

“무리는 각각 흩어져서 살고 있어. 그중 한 군데에 보낼 거고, 직업은 성향 보고 그때 정할 거야. 안 가져도 딱히 상관은 없고. 신분이야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막 체계적이냐?”

“그러면 어디 땅굴 파 놓고 숨어 살 줄 알았어? 편견이 심하네.”

편견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얘기이지 않냐고 비난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뭘 갖다 대도 우리 집 지하에 외계인이 살았다는 것보다는 믿을 만한 얘기였다. 나이가 들어서 무용담을 늘어놓으면 허풍 떠는 노인네로 찍힐 법한 대화를 곰곰이 되새겨 본 반은 혹시나 해 물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있냐? 디아 말고.”

“있을 수도 있고.”

“목적은, 뭐… 지구 침공?”

“영화 좀 그만 보지.”

무슨 대답이 다 저따위야. 미간을 찌푸린 반은 삐딱하게 구는 웨인을 흘기다가 답을 기대하지 않는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 왜 왔는데?”

대화 시간은 여기서 끝났다는 양 무릎을 짚고 의자에서 일어난 웨인이 슬며시 웃었다.

“몰라. 이유가 있겠지.”

피로한 듯이 목덜미를 주무르며 문으로 향하는 웨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반은 그가 복도로 나서기 직전 불러 세웠다.

“그건 진짜야? 실험실.”

뒤를 돌아본 웨인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놈은 불신이 담뿍 담긴 눈을 한 반에게 어쩐지 비꼬는 듯한 답을 되돌려 주었다.

“그것도 네 눈으로 확인해 보면 참 좋을 텐데.”

문이 닫히자 정적이 방을 채웠다. 찝찝하게 대화를 마무리한 반은 마른세수하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방으로 넘어가자 곤히 잠든 소년의 실루엣이 어슴푸레하게 드러났다. 의자를 가져와 침대 곁에 앉은 반은 램프 빛을 어둡게 낮추고 잠든 디아를 들여다봤다.

이토록 천사같이 생긴 생명체가 또 있을까. 점차 삐딱선을 타는 성격을 저 멀리 치워 둔다면 외모로 대적할 것은 이 땅에 없지 싶었다. 제 손으로 키웠지만 새삼 신기했다. 반은 디아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살금살금 쓸어 주면서 웨인과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되풀이했다.

신뢰할 수 없는 남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미셸의 속내. 디아의 생.

단순한 의뢰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복잡해졌는지 모르겠다. 반은 지하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선금과 디아를 넘겼을 시 받을 어마어마한 잔액을 곱씹고, 본인밖에 모르는 디아를 곱씹었다. 각각의 장점을 정리하다가 궁금한 것이 생겼다. 백만 달러가 디아만큼이나 가치 있을까.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아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백만 달러에 비견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을 것이다. 그 돈이면 차와 시계뿐이랴. 사람도 살 수 있고 사랑도 살 수 있다.

반은 백만 달러를 받아 끝내주는 저택을 짓고 매일매일 파티를 열어 사람들 틈에 파묻혀 살고 싶었다. 비싼 옷, 비싼 차, 비싼 시계를 마구 사들여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뿌리면서 살 예정이었다. 그랬는데. 그래야 하는데….

반은 요즘 들어 발랑 까진 말만 하는 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리 내서 불러 봤다.

“디아.”

단지 불러 본 것뿐이었다. 깨어날 것이란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반의 부름이 신의 부름이라도 되는 양, 까무룩 잠들었던 디아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다가 스르르 올라갔다. 디아는 잠에 취해 있으면서도 반을 발견하자마자 희미하게 웃었다.

“…반.”

돌아누운 디아는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반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입술을 비볐다. 높은 체온이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반은 불현듯 궁금해지는 마음에, 이제껏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를 꺼냈다.

“내가 왜 좋냐?”

디아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렇게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반은 턱을 들어 올리며 뻔뻔하게 자화자찬했다.

“물론, 잘생기고 키 크고 성격 좋고 매력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왜 좋아?”

이유를 묻는 것에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디아가 감동적인 연설로 눈에서 눈물을 뽑아낸다고 해도 반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다. 곧 죽어도 답을 들을 기세로 맞잡은 손을 흔드는 반을 애정 스민 눈으로 바라보던 디아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내가 선택했으니까.”

“무슨 선택? 왜?”

“…그냥.”

“그냥이라고 하지 말고. 이유 같은 거 없어?”

싱거운 대답을 하고 씩 웃는 디아가 얄미워진 반은 침대에 엎드려 질척거렸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뺨을 쓰다듬어 주자 손길을 느끼던 디아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자고 있는데 어떤 느낌이 들었어. 지금 나가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깼지.”

디아는 옛일을 되짚듯이 느지막이 말을 이었다.

“눈을 떴는데 몸이 안 움직이는 거야. 너무 힘들었는데 반이 거기서 꺼내 줬어.”

“그게 기억나?”

“다 기억해. 반이 안아 준 거, 씻겨 준 거. 다.”

반은 소년의 뺨과 이마를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고작 반년밖에 안 된 일이긴 하지만 빠르게 성장한 만큼 금세 잊을 줄 알았더니. 어쩐지 뭉클해졌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디아는 자장가처럼 고요한 목소리로 반이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다른 이유를 속삭였다.

“반을 보는데… 깨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는 다 그렇다지만 난 다르다고 생각해. 달랐어. 반도 다르고.”

잠시 말을 멈춘 디아가 확신을 담아 중얼거렸다.

“우린 다를 거야.”

반은 웃지 못했다. 디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누구고,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자란 머리로는 추측하기 힘들었다. 제 존재만큼이나 평범하지 않은 고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의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

꼭 누군가에게 단 하나뿐인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어서, 반은 잠시나마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볼 수 있었다. 그 짧은 시간만은 으리으리한 저택이나 막대한 재산에 대한 욕망도 자취를 감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

반은 정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남은 2주간만 잘해 주기로. 민망하기로는 어떤 과거와도 견줄 수 없는 그날 일은 깔끔하게 잊고 남은 날만이라도 디아를 행복하게 해 주기로 다짐했다. 성심성의껏, 아주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이랬다저랬다 흔들리는 마음가짐이 부끄러웠지만 반은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아.”

“반….”

“나 팔 떨어진다.”

팔이 아픈 척을 하자 마지못해 입을 벌리는 디아에게 잘게 썬 고기 한 점을 먹인 반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술을 닦아 주었다. 곧장 물 잔을 대어 주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 모금 마신 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바라보는 소년에게 고기 한 점을 더 집어 내밀자 포크를 잡은 손이 감싸였다.

“오늘 왜 이래?”

“왜? 싫어?”

“좋은데…. 나 그렇게 어린애 아냐.”

포크와 반의 손을 한데 잡고 고기를 빼먹은 디아가 눈썹을 까딱였다. 언제는 손수 먹여 주지 않으면 입에도 안 대더니, 머리가 컸다고 민망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스포이트로 분유를 먹인 기억이 생생한 반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서러운 척을 했다.

“크면 먹여 주면 안 되나? 섭섭하다…. 우리 사이가 그 정도야?”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디아는 바라는 답이 있는 티를 내며 맞받아쳤다. 마냥 귀여웠던 소년은 가끔 말문을 턱턱 막히게 할 만큼 제법 능글맞은 구석이 생겼다. 코웃음을 친 반은 디아가 바라는 답을 곧이곧대로 해 주는 대신 에둘러 표현했다.

“소중한 사이지. 특별하고.”

“소중하고 특별한… 애인?”

“내가 그렇게 쉽진 않아서.”

아직 애인 자리를 내어 줄 수 없다고 선을 긋자 퉁명스러운 표정을 한 디아가 제 고기를 집어 내밀었다. 아, 하며 입을 열길 독촉하는 소년의 속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훤히 보였다. 반은 못 이기는 척 디아가 건네주는 고기를 받아먹었다.

자신이 받은 것과 똑같이 엄지로 입술을 뭉개듯이 닦아 준 디아가 손가락에 묻은 육즙을 혀로 핥았다. 빼꼼 나왔다가 들어가는 혀가 붉었다.

남들 보기 창피한 식사를 끝낸 후에도 반의 친절은 계속됐다. 이 닦아 줄게, 하고 칫솔을 들자 미묘한 눈빛을 보낸 디아가 얌전히 양변기 뚜껑 위에 앉았다. 싱크대에 앉혀 이를 닦아 주던 것처럼 반은 다 큰 소년의 이를 꼼꼼히 닦았다.

조그맣던 입 속이 언제 이렇게 넓어졌는지 신기해하면서 본인 양치하랴, 디아의 이를 닦아 주랴 분주히 움직였다. 매운 거품을 뱉고 다시 디아의 칫솔을 붙잡았을 때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가 입을 오물거렸다.

“애 이어케 자해져?”

“좋아서 그런다, 왜.”

칫솔질을 얼추 끝내고 손을 물리자 디아가 양 손목을 살포시 잡고는 눈을 감았다. 거품 묻은 입술을 살짝 내밀며 의도가 명확한 미소를 짓는 소년은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발산했다.

어이없긴 했으나 키스도 아니고 뽀뽀라면 기꺼이 해 줄 수 있었다. 반은 허리를 숙여 치약 향이 폴폴 풍기는 입술에 쪽 뽀뽀했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은 디아는 거품을 뱉자마자 반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턱을 기댄 채로 올려다봤다.

“우리 진짜 결혼한 것 같아.”

“자꾸 결혼 결혼 하는데, 결혼이 뭔지는 알고 그러냐?”

“영화에서 봤어. 죽을 때까지 서로만 보는 거야.”

질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반이 하얀 턱시도를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던 디아는 장난스러운 애칭으로 그를 불렀다.

“여보.”

반은 난생처음 들어 보는 애칭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입은 웃는데 눈썹은 잔뜩 찌푸려진 이상한 표정으로 디아를 바라보다가 웃어 버렸다. 많이 변했다 싶으면서도 하는 짓이 귀여운 것은 여전했다.

뽀얀 뺨을 한가득 잡아 꼬집고 짧게 뽀뽀해 주자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 세면대에 오순도순 붙어 입을 헹구고 나자 망상에 푹 빠진 디아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신혼여행지로는 어디가 좋아?”

“오…. 나 진짜 너랑 결혼하는 거야?”

“약속했잖아. 배신하지 마.”

약속을 어기는 것이 배신까지나 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반은 떨떠름하게 웃고는 이전에 디아가 가고 싶다던 여행지 중 한 곳을 대강 골랐다.

“타히티. 어때.”

타히티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언어를 쓰는지, 화폐 단위는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때마침 생각난 곳이 그곳이라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그럼 신혼여행지는 정했으니 어떤 결혼식을 할지 고민해야겠다는 디아가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차마 빈말이라는 기미를 흘리지 못했다.

디아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아붓는 것은 반이 해 본 일 중 매우 쉬운 축에 속했다. 농도에 대한 차이는 존재하나, 반 또한 디아를 사랑했으니 친절을 베푸는 데 거리낌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가볍게 뽀뽀해 주고 안아 주고 대화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디아는 녹아내린 젤리처럼 숨 막히게 달콤한 분위기를 풍겼다. 환상을 품고, 미래를 기대하고, 더한 애정을 바랐다. 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이었다.

반은 디아의 감정을 모르는 체 소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온 힘을 기울였다. 가령 보드게임용 나뭇조각 뒤에 알파벳을 쓰고 놀면서 어릴 적을 복기한다거나 개미 새끼만 한 활자가 끝도 없이 적힌 책을 읽어 준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혹여나 디아가 파렴치한 짓을 시도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디아는 반이 그어 놓은 선을 실수로라도 침범하지 않았다. 간혹 목에 있는 점에 뽀뽀해도 되냐느니, 손가락을 빨아 봐도 되냐느니 따위의 이상야릇한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단호히 거절하면 농담을 던진 것처럼 웃고 넘어갔다.

반은 손을 잡는 것으로 만족하는 디아를 바라보다가 그날 일이 떠오르면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겉보기로는 평화로웠으나 물밑에서는 발을 버둥거리는 나날들이 살짝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디아가 잠든 후 날짜를 체크하고 상념에 빠진 반은 고개를 들어 쇠창살이 쳐진 창을 응시했다.

“…비 오네.”

어디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 가까이 다가간 반은 의아한 눈으로 밖을 내다봤다. 빗줄기가 상당히 굵었다. 이렇게 거센 비가 내리는 일은 매우 드문 지역인데 별난 일이었다.

세찬 빗소리를 듣다가 디아의 방으로 건너갔다. 며칠 새 잠이 늘어난 디아는 해가 떨어지자마자 침대로 기어들어 가고는 했다. 어떨 때는 흔들어 깨워도 좀처럼 깨지 못할 때도 있었다. 어릴 때 안 자던 잠을 이제 와서 몰아 자는 건지도 몰랐다.

침대 모퉁이에 걸터앉은 반은 죽은 듯이 자는 디아의 뺨을 쓸어내리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원체 체온이 높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살결이 뜨거웠다.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기울여 소년의 이마와 목덜미를 만져 봤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 뜨거웠다.

“열나나….”

외계인도 아플 때가 있나? 아는 게 있어야 뭘 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무식한 반이 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의 모포를 가져와 디아에게 덮어 주는 것뿐이었다.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고 의자에 주저앉은 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이나 디아를 내려다봤다. 뺨이 살짝 발그스름한 것을 빼면 아파하는 기색은 없었다.

“야. 아프지 마. 속상하게.”

헛기침 소리만 내도 벌떡 일어나던 디아는 꼭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어딜 가도 따라다니는 녹색 눈이 눈꺼풀에 가려 보이지 않자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다. 침대에 엎드린 반은 손부채질로 열을 식혀 주며 디아가 얼른 깨어나길 바랐다. 아프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으로 가득 찬 머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으로 뒤덮였다. 이내 눈꺼풀이 떨어지며 수마가 덮쳐 왔다.

***

비는 다음 날까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디아도 일어나지 않았다.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웨인을 기다리던 반은 문이 열리자마자 놈의 다리를 낚아챘다. 사실 일어날 생각이었지만 오래 구겨져 있던 다리가 저려 어찌할 수가 없었다. 트레이를 든 웨인은 잠깐 놀라더니 곧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해?”

“디아가 아파.”

웨인이 다리를 털어 내며 내쳐진 반은 저린 허벅지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또 수작이냐는 표정으로 트레이를 떠넘기는 웨인에게 디아가 열이 펄펄 나고 불러도 깨질 않는다고,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속상한 마음을 토로했다.

잠자코 듣던 웨인은 거짓말 아니라고 왁왁 소리치는 반의 등을 밀어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남자가 못마땅했으나 신경전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 탁자에 트레이를 던지다시피 올려 둔 반은 금방이라도 권총을 빼 들 준비를 마친 웨인을 뒤에 달고 디아의 방으로 건너갔다.

“디아.”

잰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간 반은 오르내리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고 나왔음에도 그새 자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디아는 뜨거운 숨을 밭게 터트리며 괴로워했다. 온몸이 불덩이라 이불을 덮어 줘야 할지, 시원하게 해 줘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반은 소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훔쳐 주며 웨인을 돌아봤다.

“열이 좀 심하게 나.”

“언제부터?”

“어젯밤부터.”

뜨문뜨문 잠에서 깨어 확인한 바로는 새벽부터 상태가 서서히 나빠지다가 아침쯤 되자 신음까지 내며 끙끙거렸다. 디아를 깨워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비몽사몽 대답도 못 하지, 약도 없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손등으로 디아의 열을 재는 웨인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데, 놈은 별반 걱정되지도 않는 낯으로 손을 거뒀다. 그러고는 조언도 못 되는 말 한마디를 툭 던졌다.

“괜찮아. 내버려 둬.”

“…괜찮다고? 이게?”

땀을 뻘뻘 흘리고 의식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하는데 괜찮다니. 헛웃음을 터트린 반은 볼일 끝난 듯 홀연히 방을 나서는 웨인을 뒤따라가며 쏘아붙였다.

“약은? 괜찮다고 하면 그만이냐? 약이라도 내놔.”

“안 먹여도 돼. 이때쯤엔 한 번씩 아파.”

“한 번씩 아프면 내버려 둬도 되냐? 그냥 가면 어떡하라고!”

목청을 높이자 앞서 가던 웨인이 뒤를 돌았다. 웨인은 조급한 심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는 반을 냉정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반은 파리한 몰골이었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나 제법 두툼했던 근육을 칸쿤에 버려두고 온 듯이, 혹은 기생체에 양분을 빼앗긴 듯이, 반은 숙주라고 부르기 적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또한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순전히 반반한 얼굴과 기죽지 않는 성질 덕이었다.

웨인은 창백한 남자를 천천히 훑어 내리며 가늠해 봤다. 하고픈 말이 입 속을 맴돌았지만 구태여 알려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해 문밖으로 나섰다. 디아에 대한 걱정으로 애를 태우는 반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지만 기계적으로 문을 잠갔다. 자물쇠를 당겨 제대로 잠긴 것을 확인한 웨인은 주제 파악 못 하는 남자가 서 있을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발길을 돌렸다.

웨인이 허무하게 떠나가고 난 후 홀로 남은 반은 굳게 닫힌 문을 발로 걷어차고는 하는 수 없이 디아에게로 되돌아갔다.

“디아. 뭐라도 먹자. 일어나 봐.”

베개를 겹쳐 이제 묵직해진 소년을 비스듬히 앉힌 반은 트레이를 가져와 메뉴를 확인했다. 여느 때와 같이 꾸덕꾸덕한 수프와 빵, 과일이었다. 빵이나 수프는 평소에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디아라, 하는 수 없이 무딘 나이프로 과일을 잘게 토막 내서 입에 밀어 넣어 주었다. 손가락에 살짝 닿는 숨결마저 뜨거웠다.

과일 조각을 뱉으려고 하는 디아를 어르고 달래 가며 고작 한 움큼을 먹였다. 더는 먹지 못할 것 같아 다시 누여 주자 눈을 게슴츠레 뜬 디아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반, 반, 하고 부르는데 목소리 대신 목을 긁는 듯 그르렁대는 소리만 나왔다. 계속 곁에 있을 테니까 걱정 말라고 위로해 준 반은 침대를 더듬는 손을 꼭 맞잡아 주었다. 디아는 마주 잡은 손을 툭툭 당기며 침대 끝으로 물러났다.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손에 이끌려 디아의 곁에 누운 반은 품으로 파고드는 소년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벌겋게 익은 귀의 열을 식혀 주는 손길이 달가운 모양인지 빗장뼈에 가느다란 숨결이 닿았다.

“아프지 마라, 제발….”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왜 이토록 속이 상하는지. 반은 차라리 대신 아파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헐떡이는 소년을 끌어안았다. 제발 내일은 괜찮아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디아는 하루를 꼬박 앓았다. 종국에는 물도 마시지 못했다. 눈도 뜨지 못하고, 열도 내리지 않는데 웨인은 점심쯤 평소보다 많은 양의 식사를 던져 주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입맛을 잃은 반은 그가 가져다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비가 끊임없이 쏟아지던 다음 날 아침, 반은 한계에 다다랐다.

허기를 분노로 채운 반은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웨인! 야, 문 열어!”

괜찮다더니. 약 안 먹여도 된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언제는 디아를 가치 있는 것, 중요한 것 취급하더니 애가 숨이 넘어가게 생긴 와중에 방치하고 있었다. 애가 타는 건 반 혼자뿐이었다.

반은 웨인이 처치를 해 주지 않는다면 디아를 병원에 데려갈 심산으로 놈을 불러 젖혔다. 그러나 놈은 손날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결국 손이 퉁퉁 부을 지경에 다다라도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저린 손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난 반은 연신 씨근덕거리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냥 기다리기에는 디아의 상태가 심각했다.

물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아 줘도 삼십 분만 지나면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하도 더워해서 모포를 걷어 주면 오한이 드는지 어깨를 떨었다. 저러는 와중에 정말 큰일 날 것처럼 아파해서, 아이를 돌봐 본 적이 없는 반은 디아가 잘못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침착하게 생각해 본다거나 웨인을 기다린다는 선택지가 머릿속에서 증발했다. 참다못한 반은 의자를 머리 위로 들어 문을 향해 내리찍었다. 손끝부터 어깨까지 찌르르한 통증이 번졌지만 당장 저 문을 부수고 말겠다는 집념이 진통제 역할을 했다.

두어 번 내려찍자 나무 의자 다리가 부서졌다. 세 번 더 내려찍자 등받이와 앉는 부분이 분리됐다. 더는 쓸모없는 나뭇조각을 내던지고 살펴보니 나무로 된 문 중앙이 쩍 갈라져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내리쳤는데 단지 길쭉한 금이 갔을 뿐이라, 반은 인상을 쓰고 문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숨을 짧게 들이마시고 어깨로 들이받았다. 쾅, 쾅, 쾅. 서너 번쯤 몸을 갖다 박자 어깨뼈가 빠진 것처럼 감각이 둔해졌다. 불현듯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성적인 의문은 어깨를 다섯 번째 갖다 박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씨….”

뒤늦게 찌릿찌릿한 어깨를 감싸 쥔 반은 갈라진 틈을 중심으로 부서진 문을 노려봤다. 온 무게를 실어 치받았지만 부서진 부위는 손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작았다. 틈새로 눈을 가져다 댄 반은 바깥을 확인했다. 어두웠다. 대낮임에도 어두운 것은 폭우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는 듯했다. 조그마한 틈으로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한 반은 다시금 문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반대쪽 어깨와 발, 주먹으로 수십 차례 문을 두들긴 반은 마침내 몸을 간신히 비집어 넣을 만한 구멍을 만들었다. 팔만 빼내어 문고리를 더듬어 보자 역시나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나뭇조각이 묻은 어깨를 툭툭 턴 반은 구멍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상체를 빼내다 날카로운 판자 끝에 팔목이 그였다. 길게 난 붉은 실선 위로 몽글몽글 맺히는 피를 바지에 문질러 닦고 복도로 빠져나온 반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맨발로 나무 틈을 걷어차느라 발바닥과 발목에는 긁힌 상처가 한가득하였고, 손등은 살결이 까져 피가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따끔거리고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어 절뚝절뚝 나아간 반은 어둠에 잠긴 내부를 크게 둘러보았다.

우중충한 분위기가 어딘지 눈에 익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걸음을 빨리하며 고민하던 반은 계단에 발을 디딘 찰나 웨인과의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이 미친놈이….”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어디 폐건물에 가둬 둔 줄 알았더니 웨인이 이사 왔다던 옆집이었다. 한마디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로 납치한 셈이었다. 판자를 떼어 낸 창 너머로는 하늘밖에 보이지 않아서 미처 몰랐다. 제대로 속은 기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놈을 원망할 때가 아니었다.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뽑은 반은 직선으로 뻗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여태 전구를 갈지 않았는지 사위는 온통 어둡고 침침했다. 폐가 같은 분위기 또한 여전했다. 때마침 하늘이 꾸르릉거리더니 번개가 쳤다. 번쩍 밝아진 집 안은 적막했다. 고개를 꺾어야 보일 만큼 높은 위치에 자리한 창을 거센 빗줄기가 쉼 없이 두드렸다. 반은 유령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집 안을 정신없이 둘러봤다.

부엌에는 쓰다 남은 식자재가 있었지만 물기가 바짝 마른 상태였다. 방은 무려 네 개나 되었지만 사람이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거실도 비어 있고, 서재도 비어 있었다. 웨인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야….”

황급히 현관문 손잡이를 당겨 봤지만 바깥에서 잠근 듯 열리지 않았다. 나무 문이 아니라 부술 수도 없었다. 욕을 짓씹은 반은 손에 닿는 창을 가린 커튼을 모조리 걷어 보았다.

“…하.”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창이라고 생각했던 커튼 뒤는 단단한 벽이었다. 건물 밖에서 볼 때는 분명 창이 있었는데, 이게 무슨 장난질인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 반은 조급해졌다.

디아는 점차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 그런데 나갈 수도 없고 웨인도 없다. 의료 지식이라고 해 봐야 살을 꿰매거나 소독하는 것이 전부인 반은 되는대로 집 안을 뒤졌다. 약이라도 먹여서 열을 떨어뜨려야 했다.

그나마 가구가 있어 보였던 서재로 들어간 반은 시야를 환하게 만들어 주는 번개에 의지해 서랍을 뒤집어엎었다. 대부분이 비어 있었고, 한두 군데에서는 서류 뭉텅이가 나왔다. 구급상자가 나왔지만 해열제는 없었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반은 낡은 책상 위에 떡하니 놓인 핸드폰도 못 보고 지나쳤다.

디아가 아프다. 열을 떨어뜨려야 한다.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

딱 그 세 가지 목적이 전부였다.

상처 난 발바닥으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간 반은 부엌에서 다용도실로 빠지는 모퉁이에서 문 하나를 발견했다. 문을 열자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하로 향하는 통로 같았다.

한 발 내디뎌 계단을 밟자 아래서부터 불어온 찬 바람이 뺨을 할퀴었다. 어쩐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던 반은 발을 물렸다.

결국 문까지 부수고 튀어 나간 반이 가져온 것은 찬물 한 통이었다. 딛는 자리마다 희미한 핏자국을 새기며 디아에게로 간 반은 나갈 때와 변함없이 침대에 널브러진 소년의 곁에 앉았다. 무게가 만만치 않은 디아를 힘겹게 일으켜 가슴에 기대게 했다.

“이거 마셔. 응?”

물병을 까서 입술에 대어 줬지만, 의식이 없는 디아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들거리던 손이 미끄러져 소년의 앞섶을 적시고 말았다. 망할. 눈을 찌푸린 반은 디아를 조심히 눕혀 두고 욕실로 향했다.

새 수건을 찬물로 적시면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떠올려 봤다. 만약 이곳을 탈출해서 디아를 병원에 데려간다고 치자. 디아의 몸 구조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반은 전혀 몰랐다. 자칫 잘못해서 인간과 다른 구석이 발견된다면 해명할 길이 없다.

혼자 탈출해서 약을 사 온다고 치자. 약국은 차로 2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에 있다. 왕복 한 시간쯤 걸리는데, 그사이에 디아가 자신을 찾을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사람에게 쓰는 약이 디아에게 효과를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그럼 계속 이렇게 땀이나 닦아 주고 기다려야 하나. 나을지 안 나을지도 모르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지.

얼음장처럼 식은 손에 얼굴을 파묻은 반은 이상하다 싶은 정도로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는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더 중요한 것, 큼직한 목적을 잊은 기분이다. 디아의 안위. 온 신경이 오로지 그것에만 몰두했다. 기묘함을 느낀 순간은 찰나였다. 젖은 수건을 비틀어 짜내자마자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과 함께 찝찝한 상념이 사라졌다.

차가운 수건을 반듯하게 펴면서 욕실에서 나온 반은 흠칫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이 없던 디아가 다리를 바닥에 내리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램프 불빛을 등진 소년은 두 손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숨이 가쁜지 크게 오르내리는 어깨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놀란 가슴을 겨우 가라앉힌 반은 다급히 디아에게 다가갔다.

“디아, 괜찮아? 정신이 좀 들어?”

이마를 짚어 봤으나 뜨거운 체온은 변함이 없었다. 식은땀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답도 하지 않는 디아를 들여다보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일어났는지 몰라도 제정신은 아닌 듯했다. 반은 물을 쏟은 탓에 푹 젖은 셔츠 단추를 풀어 주며 부드럽게 채근했다.

“몸 닦고 새 옷 입자. 밥 먹을 수 있겠어? 야, 너 너무 안 먹어서 뭐라도 먹어야 돼.”

단추를 푼 셔츠를 젖히자 새하얀 상체가 드러났다. 운동을 하지 않는 건 똑같은데도 근육이 도드라지는 몸에 차가운 수건을 가져다 댔다. 미약하게나마 정신이 든 김에 깔끔히 닦고 뭐라도 먹일 심산이었다. 로켓이 달린 목걸이를 들어 올린 반은 목덜미부터 꼼꼼하게 닦아 주며 잔소리를 빙자한 안도를 투명하게 내비쳤다.

“얼마나 걱정했는데. 어디가 아픈 거야? 말 좀 하고 아파라. 안 아프면 더 좋고.”

의식이 없는 디아에게 말을 건네며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른다. 반은 깨어난 것을 차도로 여기며 빗장뼈와 가슴을 문지르고 아래로 내려갔다. 옆구리 부분을 닦아 내며 셔츠를 마저 벗기려는데 손목이 붙들렸다.

허리를 숙인 채 눈만 들어 올리자 허공을 보던 녹색 눈이 서서히 시선을 맞췄다. 초점이 없었다. 반면 손목을 죄는 악력은 남달랐다. 반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소년을 넌지시 불렀다.

“너 괜찮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시야가 뒤집혔다. 그대로 침대로 풀썩 넘어간 반은 당황할 겨를도 없이 저를 타고 오르는 디아를 반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물에 젖은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디아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몸을 내리눌렀다.

상처 난 팔목으로 디아의 가슴을 밀어 내며 상체를 세우려던 반은 어깨를 붙잡혀 도로 침대에 처박혔다. 베개에 뒤통수가 파묻힌 반은 어안이 벙벙해서 소년을 불렀다.

“디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년은 답이 없었다. 대신 다급한 움직임으로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뜨겁고 습한 숨결이 살갗에 닿는가 싶더니 축축한 혀가 목빗근을 핥아 올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들짝 놀란 반은 고개를 휙 젖히면서 혀를 피했다.

“야, 너 지금…!”

“하아….”

디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반의 목과 귀를 앞니로 잘근거렸다. 질근질근 물린 곳에서부터 소름이 번졌다. 짓눌린 허벅지를 들썩이며 엉겨 붙는 디아를 떨쳐 내려고 했으나 힘이 현저히 모자랐다.

며칠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소년을 간호했던 여파라고 해도 완력에서 이토록 차이 날 리가 없는데, 디아는 꿈적도 하지 않고 어깨를 떠미는 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목이 틀어 잡힌 반은 어렴풋이 이 힘겨루기의 결과를 예상했다. 무슨 수를 써도 못 이긴다.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잠깐만. 이러지 말고….”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목울대로 입술을 미끄러뜨린 디아가 촉촉거리며 키스를 남겼다. 귀 뒤에 입술이 닿았을 때는 손목을 비트는 데 심혈을 기울이던 반마저 움찔했다. 솜털이 바짝 서며 분위기가 난처한 방향으로 급류를 탔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목을 움츠리자 디아는 귀로 목표를 바꾸었다. 귓바퀴를 핥고 귓불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피하려고 했으나 디아는 집요하게 따라붙었고, 반의 얼굴은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그…. 재워 줄게. 그니까 똑바로 눕자. 어?”

“싫어….”

디아는 뭉개진 발음으로 연신 중얼거리며 고개를 홰홰 저었다. 뺨에 스치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간지러움을 더했으나 정확히 무엇이 싫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바윗덩이처럼 무거워진 소년에게 깔린 반은 붙잡힌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어떻게든 벗어나야 할지, 디아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고심했다.

“…반.”

이쪽이나 저쪽이나 문젯거리가 하나씩은 있는 보기를 앞두고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반의 귀로 나지막한 부름이 파고들었다. 이미 달구어진 귀를 건드리는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자극적인 감이 있었다.

“나 아파. 몸이 뜨거워….”

귀와 목덜미에 닿던 숨결이 입술로 옮겨 왔다. 쏟아진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에 늘어졌다. 얼굴을 마주한 디아가 색색 숨을 내쉴 때마다 긴장한 입술에 뜨거운 숨결이 스쳤다. 마른침을 삼킨 반은 평이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소년을 살살 달랬다.

“알아. 그러니까 똑바로 누우라고.”

“나 아프니까….”

노력에도 불구하고 디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헛소리만 중얼거렸다. 오락가락한 정신으로 꿈이라도 꾸는 걸까.

“디아. 힘들면….”

입술을 스치던 뜨끈한 숨이 입 안으로 쏟아졌다. 맞닿은 입술이 뭉개지며 잇지 못한 말을 빼앗겼다. 디아는 혀를 집어넣지 않고 몇 번이고 어설픈 키스를 전했다. 살짝 벌린 입술을 붙였다가 도로 떼길 반복하자 촉촉한 소리가 빗소리와 어우러졌다. 혀가 오가지 않음에도 담백하다고 하기 어려운 키스가 이어질수록 반의 사지는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심장 박동이 박차를 가했다. 불안이 불러일으킨 반응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웠다. 온통 축축했다. 느릿느릿하게 닿는 입술도, 손목을 죈 손아귀도,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까지도. 한순간 경계가 흐려진다. 제 위에 올라탄 남자가 업어 키운 아이로 다가오지 않았다.

살며시 손목을 놓은 디아가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턱이 당겨지고 감질나게 스치던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동시에 다리가 얽혔다. 무릎 사이로 허벅지를 집어넣은 디아가 하체를 약하게 쳐올렸다.

“반….”

상의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손바닥이 허리선을 훑었다.

“시원해…. 기분 좋아….”

물러나되 떨어지지는 않는 입술 새로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무심결에 눈을 감았던 반은 동난 이성을 끌어모아 디아의 가슴을 짚었다. 떠밀다시피 밀어내자 약간의 틈이 생겼다. 또다시 잡아채기 전에 황급히 침대에서 빠져나온 반은 디아를 쳐다보지 못하고 문을 가리켰다.

“그, 일단… 음. 물 좀 가지고 올게.”

볼썽사납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멋쩍게 헛기침을 하며 발을 돌렸다. 몇 걸음 내에 있는 문이 유독 멀다. 보폭을 더욱 키우며 입술을 질근거렸다. 망할, 망할, 망할. 뭐가 됐든 이건 아니었다. 방 밖으로 나가 철문을 닫기만 하면 피할 수 있다. 안에서는 열리지 않으니까 어지간해서는 나오지 못할 터다. 그러니까 빨리….

“가지 마…. 나랑 있어.”

반은 일순 숨을 참았다. 문까지 단 한 발자국을 남기고 발이 묶였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은 디아가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목덜미부터 허벅지까지 끼쳐 오는 열기가 섬뜩했다.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간신히 뗐다.

“헛소리하지 말고.”

기꺼운 고집이 있고 받아 줄 수 없는 고집이 있다. 억지로라도 허리를 감은 팔을 풀고자 손목을 쥐자 느슨한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미간을 찌푸린 찰나 등 뒤에서 손이 뻗어 왔다. 틈을 두고 열린 문의 손잡이를 붙든 손등 위로 돋은 푸르스름한 핏줄에 시선을 뺏긴 반은 한발 늦게 반응했다.

다급히 손을 뻗었으나 손잡이를 거머쥐기도 전에 묵직한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헛소리 아닌데.”

철커덕, 문이 자동으로 잠기며 반은 사방이 막힌 방에 디아와 단둘이 남겨지고 말았다.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당황한 반은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손잡이를 당겼다. 당연지사 열리지 않았다. 덜컹거림 없이 굳게 닫힌 문을 망연자실 보고 있을 때, 목덜미에 이가 스쳤다. 흐린 잇자국이 남은 피부에 이가 닿자마자 크게 움찔거린 반은 제가 느끼는 위기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빳빳한 혀를 놀렸다.

“이걸, 닫으면 어떡하라고. 지금 웨인도 없는데 나갈 일 생기면….”

“걔 얘기 하지 마. 듣기 싫어.”

반이 지껄이는 쓸데없는 말을 툭 끊어 낸 디아가 투정 부리듯 뜨거운 이마를 어깨에 비볐다. 여전히 문손잡이에서 떨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끌어와 남은 팔과 함께 품에 가둔 소년은 평소보다 고집스러웠다. 졸지에 상체를 온통 끌어안긴 반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흉통을 옥죄는 팔 안에서 꿈지럭거렸다.

“잠깐. 잠깐만.”

올가미 같은 팔을 풀어내는 것은 포기하고 끙끙거리며 품속에서 뒤로 돌았다. 간신히 디아와 마주한 반은 딱딱한 철문에 뒤통수를 기댔다. 진이 다 빠진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날씨와 꿉꿉한 분위기 속, 아픈 나머지 제정신이 아닌 디아는 다분히 위험했다. 반은 자꾸만 비비적거리는 디아의 가슴을 밀어 내며 한 소리 하고자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이러지 말고, 읍…!”

그러나 시작도 못 한 훈계는 언제나처럼 실패했다. 몸을 돌린 것은 악수였다. 살짝 떨어진 뒤통수가 철문에 부딪히며 입 안으로 미끄덩한 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설프고 조심스러운 키스가 아니었다. 뒷덜미를 붙든 손과 허리를 감은 팔이 몸과 몸 사이의 빈틈을 없앴다.

“음…! 읏.”

떠밀어도 도로 상체가 붙고 다시 밀어내도 곧장 하체가 엉켰다. 어찌나 달려드는지 날렵한 날개뼈가 철문에 쿵쿵 부딪혔다. 키스하다가도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 미적미적 떨어져 나갔던 지난날과 달랐다. 하지 말란 말을 꺼낼 잠시간의 여유도 없었다.

입술 형태가 뭉개지고 혀는 목구멍까지 침범할 기세로 밀려들었다. 밀어내되 적극적이지는 않은 반은 디아에 의해 뒷걸음질 쳤다. 주춤주춤 밀려난 끝에 안간힘을 써서 벗어났던 침대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읏, 하아…. 야, 디아!”

매트리스 위로 풀썩 쓰러진 반은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입술이 사라진 틈을 타 발버둥을 쳤다. 발길질에 구겨진 모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시트에 비벼진 머리카락은 엉망이 됐다. 걷어차고 주먹을 휘두르면 못 떨구어 낼 것도 없었지만 차마 손을 올리지는 못하는 관계로 무의미한 저항이 되고 말았다.

하도 빨려 얼얼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비껴간 디아는 빨아들인 흔적이 점점이 남은 목으로 타깃을 바꾸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옷감 아래 허벅지를 쓸어 올리듯이 만지더니 상의 안으로 고운 손을 집어넣었다. 살을 밀다시피 내리누르며 들어오는 손길에 헛발질과 몇 번의 욕설을 지껄인 반은 이내 양팔을 축 늘어뜨렸다.

“해라, 해. 마음대로 해라, 그냥.”

대자로 뻗었다. 두들겨 패서 정신머리를 단단히 고쳐 놓을 각오도,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갈 여력도 없다면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정확히는 잠시 견디는 것이다. 머리에 열이 올라 사고가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인데, 몇 분 기다리다 보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리라. 그 이상은 가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참으면….

“읏…!”

자기 합리화를 끝내려던 찰나, 질끈 감은 눈을 부릅떴다. 튀어 오른 반은 침대를 짚고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디아의 손가락이 스친 부위에서 한순간 느껴진 감각은 말 못 할 정도로 괴상망측해서,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검은 그림자로 보이는 디아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벼락이 내리꽂혔다. 일순간 번쩍 밝아진 사위로 디아가 보였다. 눈가가 불그스름하고 입술이 얼핏 부어오른 소년은 꿈을 꾸는 듯 몽롱한 표정이었으나 유순하다고 할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조명을 끈 듯 방은 도로 어두워졌다. 아주 짧은 순간 언뜻 드러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새파란 눈빛이 심장을 난폭하게 주물렀다.

찰나에 느낀 감정은 우습게도 공포였다. 제 손으로 입히고, 먹이고, 키운 소년을 보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생물을 마주한 듯한 공포를 느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고 싶었다. …아니, 심장이 곤두박질친 까닭은 공포가 아닐 수도 있다. 위기의 순간은 수차례 찾아왔지만, 지금만큼 육중한 무게는 아니었다.

“…그만해라.”

반은 꿈지럭거리는 것이 고작인 손을 들어 소년의 얼굴을 턱 짚고 밀어 냈다. 그러나 바람을 무시한 미끄덩한 혀가 손가락 틈새로 파고들었다.

디아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마디를 이로 물고 입술로 빨아들였다. 이어 반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밀어 다리를 벌리더니 서로의 하체를 뭉개듯이 비볐다. 모르는 척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의사 표현이 반을 얼어붙게 했다.

앞서 손으로 만져 본 적이 있는 탓에 그 크기와 모양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성기가 사타구니에 부딪쳤다. 둘 다 옷을 입은 채였지만 발기한 기색을 감출 만큼 두꺼운 옷감은 아니었다. 소년은 반의 양손에 대고 했던 것처럼 느리고 둔중하게 허리 짓 했다.

긴장한 몸이 위로 덜컥 흔들릴 정도로 세게 부딪쳤다가, 꾸욱 내리누르며 서로의 하체를 짓이기듯 비비적거렸다. 꼭 들어가고 싶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후으….”

손바닥에 입술을 파묻은 디아가 살점을 잘근거리며 신음했다. 단지 비비는 것만으로도 바지 앞섶이 불룩 솟아오른 소년은 여실히 흥분한 모습이었다. 목이 탔다. 자위를 도와줬을 때 느꼈던 안쓰러움이라거나 귀여움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눈빛도, 밀어붙이는 힘도, 체온마저도 그때와 딴판이었다.

비가 내리는 테라스에서 느꼈던 이상야릇한 감각이 또 한 번 피어났다. 그렇게 조그맣더니 언제 이렇게 컸지, 하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게 되는 순간. 익숙해야 할 것들이 하나같이 낯설게 다가와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

반은 어둠에 잠긴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디아. 정신 차리자. 이러면 안 돼, 어?”

짐짓 단호하게 얼렀지만 디아는 손바닥에 묻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반은 다급히 다음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별반 설득력은 없었다.

“우리 이러면 안 되는 사이인 거는 알지? 나이 차도 심하고…. 하여튼 그러니까 그만하자.”

“응…. 나도 좋아해.”

망상에 빠져 대화가 통하지 않는 디아가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에 대고 웅얼거렸다. 간지러운 촉감에 신경이 쏠려 뒤늦게 대응하려던 반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 흣!”

반을 긴장케 했던 괴상망측한 감각이 불시에 찾아왔다.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안으로 침범한 손이 또 한 번 손가락을 움직였다. 궂은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유륜을 스치고 유두를 쓸어내렸다.

살결을 만지고 싶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모조리 손을 미끄러뜨리던 디아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티셔츠 안에서 배회하던 손가락은 반이 반응하자마자 의도가 다분한 손길로 변모했다.

디아는 근육이 꺼졌음에도 단단한 형태를 유지하는 가슴을 꽈악 움켜쥐었다가 정중앙의 유두를 검지로 꾹 눌렀다. 연분홍빛의 유두는 간지럽히듯 매만지는 손길 아래 금세 부풀어 올랐다. 디아는 손가락으로 잡기 좋은 크기가 된 유두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두고 굴렸다.

“읏….”

앙다문 잇새에서 낮은 신음이 샜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불길처럼 번져 머리끝까지 오른 미열이 반의 사고 회로를 마비시켰다. 힘이 탁 풀린 손바닥에 입술을 깊이 묻은 디아는 혼란이 떠다니는 밝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느릿느릿 손가락을 놀렸다. 마치 반의 반응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행위를 연습하려는 듯이.

디아는 딱딱해진 돌기를 엄지로 누르고, 잡아당기고, 살살 간지럽혔다. 손가락이 예민한 부위를 스칠수록 까마득히 잊고 살던 감각이 서서히 피어났다. 반은 당혹스러웠고, 당황했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반의 손목을 약하지 않은 힘으로 움켜쥔 디아가 굳은 손을 아래로 이끌었다.

“아까부터… 계속 이랬어, 반.”

축축하게 젖은 곳에 반의 손을 가져다 댄 디아는 곧 터질 것처럼 부푼 하체를 비비며 몇 번 헛손질한 끝에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불투명한 액으로 끈적끈적하게 적셔진 성기가 튕겨 나와 반의 손가락을 짓눌렀다. 액을 뚝뚝 흘리며 꺼떡거리는 성기가 갈피 잃은 손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아….”

뜨거운 숨이 손바닥에 쏟아지자 목덜미에서 맥박이 쿵쿵 뛰었다. 반은 입술을 벙긋벙긋 벌리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또 자위를 도와 달라는 것일까. 이번에도 만져 주면 끝나려나. 과연 그것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저는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가. 이런 경험을 한두 번 한 것도 아니면서.

반이 온통 복잡하고 답이 없는 의문 속에서 허덕일 때, 디아가 막무가내로 갈 길을 정의했다.

“나도 반 기분 좋게 해 줄게.”

“어, 야…!”

유두를 훑은 손이 삽시간에 아래로 미끄러졌다. 헐렁한 바지 허리춤을 잡은 디아가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 내렸다. 기겁한 반이 발버둥을 쳤지만 부드러운 손이 들썩이는 골반을 눌러 고정했다. 거센 아귀힘에 늘어난 바지와 속옷이 발목까지 떨어지자 노출된 하반신에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마침내 반은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인지했다.

“자, 잠깐만. 디아!”

간신히 가슴을 가리던 티셔츠를 대번에 끌어 올린 디아가 바로 고개를 내렸다. 연이은 자극으로 봉긋하게 솟은 유두가 섬뜩할 만큼 축축한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등허리가 경련했다.

“거기, 거길 왜 빨고…. 아!”

다급하게 상체를 뒤틀자 단단한 앞니가 유두를 끊어 낼 듯 세게 깨물었다. 놀라 허리를 띄웠더니 상앗빛 팔이 허리 밑으로 들어와 상체를 끌어안았다. 본능적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법을 아는 디아는 잇자국이 난 유두를 혀로 핥아 올리며 뭉개진 발음으로 반의 실언을 꼬집었다.

“아까는 마음대로 하라며.”

“그거는…!”

“마음대로 할래.”

반은 숨을 들이켜며 고집스러운 소년의 정수리를 망연히 응시했다. 욕이 혀끝에 맺혔다. 달콤한 외모에 걸맞지 않게 흉측한 성기가 허벅지를 스치자 질은 액이 묻어났다. 벌떡 솟아오른 성기가 옷감이 사라진 허벅지 살점에 재차 뭉개졌다.

“디아….”

이를 악물고 불렀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은 디아는 허리를 끌어안은 쪽 손으로 반의 팔뚝을 붙잡아 가슴에 붙은 머리를 밀어내지 못하도록 했다. 다른 손은 엉덩이와 허벅지 중간을 움켜쥐어 다리마저 멋대로 버둥거릴 수 없게끔 했다.

“이게 진짜…. 내가 미치겠, 읏!”

허리가 들리고 머리가 뒤로 젖혀진 반은 딱 죽을 맛이었다. 커다란 뱀에게 포박당한 것 같았다. 이렇게 제압당해서야 정신 차리라고 머리통을 때려 줄 수도 없고, 완력으로 뒤집을 수도 없었다.

입을 크게 벌린 디아가 밑가슴을 깨물고 발개진 유두를 쪽쪽 빨아들여도 손쓸 도리가 없었다. 더욱이 절망스러운 것은 뜨거운 혀가 유두를 덮듯이 핥아 올릴 때마다 과민한 반응이 뒤따른다는 것이었다. 오랜 수절의 결과가 나쁜 방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디아, 좀…! 흣….”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팔뚝을 움켜쥐었지만 디아는 물러나기는커녕 한쪽 유두만 집요하게 괴롭혔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살점을 깨물고 핥고 또 빨았다. 진저리 나게 소름 끼치는 감촉이었다.

“후윽….”

허벅지에 비벼지던 성기가 사타구니를 스쳤다. 흠칫한 반을 다부지게 끌어안은 디아가 크게 허리 짓 하자 젖은 귀두가 음낭을 찌르고 미끄러지듯 반의 성기에 비벼졌다. 다급히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으나 본능에 휘둘리는 디아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오금을 잡아 다리를 활짝 벌린 디아는 반의 사타구니에 대고 느릿느릿 허리 짓 하기 시작했다.

“디아, 조옴….”

“흐읏, 읏…. 반….”

디아가 질질 흘려 대는 액이 사타구니에 떨어져 성기를 적셨다. 투박하던 허리 짓은 점점 능숙해졌고,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치받을 때마다 서로의 치골이 턱턱 부딪쳤다.

“아, 큭…. 디아, 그만… 읍….”

디아가 마찰열이 생길 정도로 빠르게 허리를 치대자 반의 성기도 불가항력적으로 발기했다. 그 움직임은 저돌적이고 규칙이 없었으나 그래서 더욱 자극적이기도 했다. 자극당하는 음낭과 기둥이 액에 젖어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흣, 읍…!”

반은 일그러진 입술을 짓씹었다. 오랜만에 성기에 직접 닿는 타인의 체온이 미치도록 달가운 한편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머리꼭지까지 치밀었다.

디아는 반의 갈등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허리 짓에 박차를 가했다. 미끄덩, 끈적한 액에 탄력받아 비벼지는 뜨거운 살덩이가 반의 것과 마찰하며 아랫배를 찔렀다. 매끈한 근육이 붙은 반의 아랫배를 쓸어내린 디아는 단단하게 발기한 두 개의 성기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양손으로 좁은 공간을 만든 디아가 본능을 좇아 허리를 쳐올렸다.

“윽….”

“하아, 읏.”

배운 것을 착실히 써먹는 디아에게 사로잡힌 반의 성기에도 덩달아 자극이 전해졌다. 감질나는 쾌감이 자괴감을 흩트리자 온 신경이 육체적인 쾌락에 집중됐다.

“으흣…. 으….”

가슴에 얼굴을 묻은 디아가 호흡할 때마다 흠뻑 젖은 유두에 닿는 숨결이 오싹했다. 움찔움찔 떨리는 손이 소년의 어깨를 짚었다가 밀어내지 못하고 눈가로 향했다. 눈을 손등으로 가린 반은 밭은 숨을 터트리며 주어지는 쾌감에 휩쓸렸다.

살결에 닿는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좋았다. 성기를 쥐어짜 내듯 강하게 쥔 손아귀도 좋았고, 어지럽게 흔들리는 느낌도 달가웠다. 머릿속이 탁해지고 허벅지가 긴장하는 순간에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잊게 됐다.

“읏, 잠깐….”

기둥을 옥죄던 손바닥이 귀두를 덮고 비비듯 문질렀다. 온종일 디아를 쫓아다니느라 본의 아니게 들끓는 성욕을 뒤로 미루어 둔 반에게는 과한 자극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핏줄이 불거진 디아의 성기가 곧게 뻗은 반의 성기와 뒤엉키는 동시에 보드라운 엄지가 귀두를 짓이겼다.

“헉…!”

발등이 둥글게 구부러들더니 종아리가 경련했다. 거듭 허리를 쳐올리며 서로의 샅을 비비는 짓에 빠져든 디아의 거친 숨소리가 먹먹한 귀로 스며들었다. 반은 저도 모르게 소년의 팔뚝을 부여잡고 허리를 밀어 올렸다. 엇나가듯 비벼지는 살덩이를 꽉 쥔 손가락 틈새로 점성 있는 액이 뚝뚝 떨어졌다.

“하아, 읏. 큭….”

두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연약한 철제 침대가 부서질 듯 삐거덕거렸다. 쾌락에만 몰두해 자괴감을 저버린 반은 디아의 셔츠를 쥐어뜯다시피 당기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흐읍…!”

힘이 잔뜩 들어간 엉덩이 근육이 조여들며 허리가 떴다.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절정이 뇌를 흐물흐물하게 녹였다. 농도가 짙은 정액이 손바닥 사이로 줄줄 흘러나와 음모를 적셨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괴팍한 감각에 숨을 참고 있던 반은 이내 쓰러지듯 몸을 늘어뜨렸다. 탈력감이 사지로 퍼져 나갔다.

“하아, 후으….”

거칠어진 호흡 탓에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꿉꿉한 공기가 폐를 여러 차례 돌고 나가자 안개 낀 머릿속이 가볍게 환기됐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반은 늦어도 한참은 늦은 후회를 했다.

사고 쳤다. 살점을 뜯어내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나. 베개에 늘어진 반은 이제 만족하느냐는 듯한 피로한 눈빛으로 디아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디아는 아직 사정하지 않았다. 허리를 뒤로 뺀 디아가 지체 없이 연달아 하체를 밀어붙였다. 몸이 크게 흔들리며 위로 밀려난 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회음부를 짓이기고 미끄러진 성기 끝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쿡 찌른 탓이었다.

뻑뻑하게 다물린 주름이 억지로 벌어졌다. 고통보다 앞선 경악으로 낯빛이 새파래진 반은 살짝 들어왔던 귀두가 실수인 양 구멍에서 빠져나가자마자 안도했고, 안도한 것에 아연했다. 소년은 이제 막무가내로 반의 사타구니에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읏, 흐으…. 반….”

자위인지, 유사 섹스인지 헷갈리는 행위가 이어졌다. 반은 예민하게 달아오른 성기에 자꾸만 스치는 살덩이를 모른 체하며 머리 옆을 양손으로 짚은 디아를 힐끔거렸다. 입 다물고 딱 사정할 때까지만 기다리자. 그것이 최후의 선을 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반은 디아를 얕잡아 봤다. 디아가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전까지는.

“…들어가고 싶어.”

낮은 중얼거림은 야릇하다기보다 섬뜩했다. 뱃가죽을 가르고 들어가겠다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잠시간 전신의 피가 싹 빠져나갔다.

잘못 들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입 안은 바짝바짝 마르고 난데없이 얻어맞은 뒤통수는 얼얼해서, 절로 오므라드는 무릎을 내리누른 디아가 다리 사이를 완전히 가르고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소년은 반이 넋을 빼놓은 사이 늘 부드러운 천에 감싸여 있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탄탄한 살성이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보기와 달리 말캉한 살점을 주무르자마자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던 몸이 펄쩍 뛰었다.

“야, 어딜…!”

디아는 반의 무릎을 짚고 욱신거리는 성기를 그 사이로 들이밀었다. 자꾸만 미끈한 액이 떨어지는 귀두 끝에 오밀조밀한 주름이 닿았다. 본능적으로 들어가는 구멍을 찾아낸 디아는 굳게 다물린 구멍에 귀두를 밀어 넣었다.

그러나 남자를 받아들인 경험이 적은 구멍은 두꺼운 귀두의 침입을 쉽게 허하지 않았다. 조급해진 디아는 막무가내로 허리를 밀어붙였으나 그때마다 허무하게 미끄러질 뿐이었다.

“지금 뭐 하는…! 그만 안 해?”

판판한 회음부를 귀두가 연거푸 찌르자 반이 목청을 키웠다. 다리를 뒤채고 소년의 어깨를 떠밀었으나 몰상식하게 달려드는 소년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엉망이 되어 가는 사태에서 당장 반이 할 수 있는 일은 몇 없었다. 철문이 닫힌 이상 웨인이 열어 주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잠깐 도망간다고 해도 문짝이 허술한 욕실뿐이었고, 디아는 어떻게든 달려들 것이다. 이렇게 고전해서야 욕실까지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막다른 길에 몰린 반은 고뇌 끝에 주먹을 들기로 다짐했다. 일단 머리부터 떼어 놓기 위해 소년의 뒤통수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좋아해, 반. 너무 좋아. 사랑해.”

절절하다 못해 애가 닳아 죽겠다는 듯한 음성이 가슴팍에 들러붙었다. 가슴에 이마를 파묻은 디아는 정제되지 않은 호흡을 헐떡이며 어깨를 밀어 내는 반의 손을 거머쥐었다.

“나 밀어 내지 마.”

아프지 않으나 뿌리치기 힘든 아귀힘이었다. 반은 손을 내어 준 채로 컴컴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 사위가 어둡다. 시각이 차단되자 다른 감각들이 일사불란하게 날뛰었다. 옷감이 사라진 나신에 단단히 엉킨 소년의 육체와 피부로 전해지는 습하고 뜨거운 촉감들.

좋다고 할 수도 없고, 싫다고 할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감정까지도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당사자도 어느 정도 납득하는 단점이 틈새를 비집고 쳐들어오기 좋은 환경이었다.

“…반.”

디아의 생떼를 받아 주는 건 일종의 나쁜 버릇이라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또 넘어가고 만다.

“큽…!”

이마에 핏대가 섰다. 수월히 들어갈 리가 없는 귀두가 비좁기 그지없는 구멍을 억지로 확장했다. 반은 정신을 잃을 듯한 고통 속에서 오므라들지 않는 다리를 뒤틀었다. 붉게 달아오른 무릎은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디아의 허리를 조였고, 다시 활짝 벌어졌다가 침대로 떨어졌다. 경직된 발끝이 이불을 밀어 냈다. 헛발질이었다.

디아는 버둥거리는 반을 강하게 안고 엉덩이 사이에 핏줄이 우둘투둘 선 성기를 조금씩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읏, 반…. 너무… 좁아.”

손과의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조임이 강한 주름이 귀두를 강하게 압박했다. 디아는 성기를 끊어먹을 듯 조이는 내벽을 찢어발겨서라도 끝까지 처넣고 싶은 충동을 인내해 가며 반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물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곧장 찢어질 것 같이 팽팽한 주름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성기를 집어넣은 끝에, 마침내 기둥의 반절이 반의 안으로 들어갔다. 달뜬 숨이 터졌다.

“하아….”

“허윽, 끅….”

허리를 들린 반은 숨도 못 쉬고 부들부들 떨었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보이는 것은 그렁그렁 고인 눈물에 반사된 희뿌연 전경이었다.

반은 억울했다. 그렇게 제가 좋으면 한 번쯤 대 주겠다고 호탕하게 허락한 적 따위 없다. 다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다. 눈 깜짝할 새 장성한 디아를 의식한 때가 몇 번 있었을 뿐이고, 맹종에 가까운 고백이 아주 살짝 마음을 흔들었을 뿐이다. 결단코 허락은 아니었다.

이러나저러나 일은 벌어졌다. 반은 무언가를 집어넣은 경험이 손에 꼽는 구멍에 징그러운 성기가 들이박힌 현실을 부정하다가 받아들이다가, 또 부정하고 받아들였다. 장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디아의 성기가 대체한 기분이었다. 양심의 가책은 둘째 치고 불쾌하고 아팠다.

“허윽, 악! 움직이지 좀…!”

가슴을 부풀리고 꺼트리며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던 반이 디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디아가 허리를 천천히 물리자 배 속에 있는 것이 죄다 딸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두 다리로 디아를 끌어당기자 빠져나가던 성기가 깊숙이 처박혔다. 흡, 호흡을 참은 반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큭….”

소년의 상체가 무너지며 몸이 빈틈없이 밀착했다. 찢기기 직전까지 벌어진 구멍에서 질은 정액이 꿈질꿈질 새어 나와 엉덩이를 적셨다. 가히 끔찍한 감각이었다. 감히 미성숙하다고 칭할 수 없는 나신에 깔린 반은 이제 다 망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빗속에서 키스한 후 찬물을 끼얹으며, 잭과 대화를 나누며, 소년과 함께한 시간 사이사이에 가졌던 후회와 다짐이 무용지물이 됐다. 삽입 시간이 짧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자책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기어이 말도 안 되는 합리화에 빠진 반의 귀로 어딘지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반. 힘 풀어.”

토끼 눈처럼 충혈된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린 반은 사정의 여운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엿보이지 않는 소년을 발견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디아는 전에 없이 투박한 손길로 흥건한 눈가를 닦아 주었다.

“울지 마. 속상하게.”

그때야 알았다. 배 속에 처박힌 성기는 사정했음에도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는 것을. 놈에게 홀라당 속아 넘어간 것 같다는 감상을 수용하기도 전에 이를 사리문 디아의 턱에 핏줄이 돋았다. 눈알이 돌기 직전이었다.

반은 문득 겁이 난 나머지 디아를 놓고 흐트러진 모포를 움켜쥐었다. 장기가 다 딸려 나간다고 해도 일단 도망갈 심산이었다. 반의 위기의식이 그러기를 가리켰다. 디아의 팔 안에서 허리를 비틀며 벗어날 길을 찾았다.

“쌌으니까 이제, 이제 그만… 악!”

그러나 막 삽입이 주는 쾌감을 맛본 디아의 앞에서 도망치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뒤채는 반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든 디아가 한순간 허리를 쳐올렸다. 상체가 크게 흔들리면서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굳은 반을 도로 끌어 내린 디아는 한 번의 완전한 삽입으로도 사정을 이끌어 낸 구멍에 젖은 성기를 밀어 넣었다.

“후으, 읏…. 끊어질, 것 같아.”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반의 안에 때려 박히는 살덩이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근육과 살점이 퍽퍽 부딪칠 때마다 탄탄한 엉덩이가 짓눌리고 구멍 속에 싸지른 정액이 밀려 나왔다. 디아는 열기를 식혔다가 재점화시키기를 반복하는 반에게 성기를 처박으며 처음 느끼는 쾌락에 사로잡혀 그를 탐닉했다.

“반. 좋아해…. 좋아….”

더욱 깊게 넣고, 더 많이 싸고, 더 세게 박아서 반을 망가뜨리고 싶었다. 기묘한 성욕과 파괴 욕구로 이성을 덮은 디아는 맥없이 흔들리는 반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상체를 숙였다.

“윽, 흡…! 큽, 망할…. 디아!”

단발적인 신음을 터트리는 반의 입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소년은 계속해서 사정감이 드는 성기를 장기 깊숙이 처박았다.

머릿속이 타들어 가고 피부를 타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간지러움이 연거푸 디아를 독촉했다. 반이 괴로워한다는 걸 오롯이 느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허벅지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무게를 받아 내는 반의 허리가 둥글게 휘기 시작할 때 갑자기 고개가 뒤로 휙 젖혀졌다.

“하아, 하아….”

빨 것을 빼앗긴 디아는 초점이 뭉개진 눈으로 반을 내려다봤다. 디아의 머리채를 잡아 떼어 낸 반의 잘생긴 얼굴 곳곳이 울긋불긋했다. 수차례 빨리고 깨물려 부어오른 입술은 개중에서도 유독 붉었다. 반은 디아의 눈길이 꽂힌 입술을 막연히 달싹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강간이지 섹스냐?”

입을 꾹 다물었다가 무력하게 중얼거렸다.

“천천히 해. 막 때려 박지 말고.”

코를 훌쩍인 반은 디아가 알아듣고 반응할 때까지 머리채를 놓아주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틀어 잡힌 와중에도 집요하게 허리를 툭툭 쳐올리던 디아는 신음을 꾹 참는 반을 멀거니 응시하다가 눈을 깜박였다.

“…응. 천천히.”

미동도 없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반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나, 한탄하면서도 서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머리채를 놓아줬음에도 디아는 앞뒤 없이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반의 머리 옆을 양손으로 짚고 상체를 숙였다. 미심쩍은 눈으로 소년을 지켜보던 반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윽!”

디아는 반의 명령 아닌 명령에 따라 천천히 허리를 물렸다가 대번에 쳐올렸다.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강했다. 무심결에 디아의 허리를 쥔 반은 고개를 저으며 더 살살, 이라고 속삭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흣, 살살 해.”

“이렇게?”

“그래, 좀 더….”

디아는 중간중간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이를 갈았지만, 반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왔다. 반은 느려진 허리 짓 때문에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성기 모양새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며 억울한 울음을 삼켰다. 기어코 성교육까지 제 몸뚱이로 시켜 주다니.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발을 동동 굴러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반의 마지못한 선택에 따라 유순해진 디아가 허리를 느슨하게 쳐올렸다. 내벽에 스며들다 못해 주름을 비집고 넘치는 정액이 윤활유를 대신했다. 진입할 때마다 척추를 관통하는 아픔은 여전했으나 막힌 길을 억지로 튼다는 느낌은 덜했다.

반은 작작 하라고 밀어 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더딘 허리 짓이 여러 번 반복되자 뜻 모를 소름이 허벅지 안쪽을 뒤덮었다. 맨 정신으로는 이런 식의 섹스를 해 본 적 없었기에 이 느낌이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정의하기 어려웠다.

어느새 침대를 팔꿈치로 짚은 디아가 제 뒤통수를 감싸고 이마를 마주 댄 채 들여다보는 것도 달갑지는 않았다. 한 걸음만 옮겨도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던 옛날과 똑같았다. 성기가 뿌리 끝까지 쳐들어오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찌푸려지는 콧대, 입술 새로 튀어나오는 가빠진 숨결을 숨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내보여야 했다. 수치스러웠다. 그리도 어렸던 디아에게 깔려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디아는 눈을 내리깔고 고집스럽게 시선을 피하는 반에게 키스했다. 꾹 눌렀다가 떼는 짧은 입맞춤을 쉼 없이 반복하며 남은 손으로 반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깍지 끼며 하체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귀두 끝이 뭉툭한 부분을 짓이겼다.

“흐읏…!”

별안간 흠칫 떤 반이 받아 주지 않던 손깍지를 세게 쥐었다. 손이 꽉 맞물리는 것과 동시에 디아는 짧고 강하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길게 들어왔다가 쭉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강한 움직임으로 한 곳만 집중적으로 찔렀다.

“하아, 하아…. 잠, 읏….”

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뒤틀었다. 소년이 연신 찔러 올릴 때마다 허벅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한 차례 사정한 성기가 금세 다시 발기하고 말았다.

미지근하게 시작되어 서서히 몸을 달구는 쾌감은 반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은 도리어 거부감을 일으켰다. 이를 악물고, 풀리지 않는 손깍지를 흔들고, 턱을 뒤로 젖혀 가며 괴상한 쾌감을 떨쳐 내려고 애쓰던 반은 무심결에 착 달라붙은 디아의 아랫배를 밀어 냈다. 한계였다.

“으…. 야, 잠깐… 읏!”

“기분 좋은 거지?”

밀려나는가 싶던 성기가 곧장 정액으로 가득 찬 내벽을 벌리고 들어와 같은 지점을 찔렀다. 생경한 쾌감에 탁한 신음이 흘렀다. 고통을 못 이겨 나오는 신음이 아니라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디아는 반의 뒷덜미와 허리를 동시에 부여잡고 연신 허리를 쳐올렸다.

“흐읏, 읍…!”

“반…. 기분 좋은 거 맞지?”

시뻘겋게 물든 반의 귀에 입술을 딱 붙인 디아가 헐떡이며 어리광을 부렸다.

“응? 반….”

술기운 없이 처음 삽입당한 곳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정신이 팔린 반은 소년의 음성마저 자극으로 받아들였다. 괴로운 기미가 흔적 없이 사라진 신음이 튀어나오고, 미는 건지 끌어당기는 건지 모를 손길이 디아의 어깨와 팔뚝을 오갔다. 끙끙거리다가 새하얀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반은 무심코 솔직한 답을 내놓고 말았다.

“좋아….”

욕구에 잠식된 반이 제 실수를 알아차리기 전에 허벅지를 쓸어 올린 디아가 엉덩이를 쥔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구멍이 찢어질 만큼 거세지는 않지만 부딪히는 살갗에서 철썩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응, 나도 좋아. 반….”

“아, 읏! 흐윽…!”

디아가 점차 속도와 강도를 높여 갈수록 짓눌리는 부위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거세게 흔들리면서 기다란 목에 걸린 목걸이가 턱을 툭툭 때렸다. 혼탁한 눈에 제 손으로 선물해 준 목걸이가 흔들리는 모습이 담겼다.

작은 사진을 넣을 수 있는 로켓은 소년의 목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선물해 줄 때만 해도 길이를 줄이지 않으면 명치에서 달랑거리던 로켓이, 디아의 쇄골 부근에서 흔들렸다. 차가운 금속이 입술을 스쳤다.

가치관이고 잭의 비난이고, 쓸모없는 것들은 모조리 사라진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됐다. 억지로 비집어 넣은 후유증으로 발갛게 물든 주름에서 느껴지는 홧홧함까지 쾌감으로 직결됐다. 양심을 배반한 소름이 두피를 뒤덮었다.

낮은 신음을 흘리는 반의 티셔츠를 벗겨 낸 디아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의 가슴팍에 엎어졌다. 도드라진 쇄골과 가슴에 새빨간 순흔이 점점이 남았다. 소년은 어깨에서 배회하는 손을 붙잡아 시트에 고정하고 빨지 못한 반대쪽 유두를 집어삼켰다. 솟은 유두를 이로 잘근거리고 빨아들이는 동안에도 허리 짓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아, 아…! 흡!”

반은 제게 쾌감을 가져다주는 상대가 디아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가슴에 들러붙은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설령 웨인이 들이닥친다고 해도 이 짓을 계속하고 싶을 만큼 당장 주어지는 쾌락이 어마어마했다. 벌어졌다가 오므라드는 다리 사이에 빈틈없이 맞물린 디아의 성기가 뭉툭한 부위를 넘어 보다 좁은 길로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흐윽!”

아랫배 사이에 끼어 수없이 마찰하던 성기가 정액을 토해 냈다. 뻣뻣하게 굳은 다리가 발끝까지 쭉 펴지며 성욕에 소홀했던 시간만큼 농축된 쾌감이 몰아쳤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파르르 떠는 반의 두 다리를 잡아 어깨에 걸친 디아가 연거푸 몰아붙였다. 반은 이미 절정에 다다랐음에도 가라앉을 시간을 주지 않는 디아에게 잡혀 거세게 흔들렸다.

“읏! 큽…! 디아…! 잠깐….”

“하아…. 아, 좋아….”

이를 악물어도, 발가락에 힘을 바짝 줘도 참기 힘든 감각이 아랫배를 쾅쾅 때렸다. 욕이 나올 정도로 기분 좋았다. 숱한 섹스를 해 봤지만 이런 쾌감은 처음이었다. 마치 디아와 무언가로 연결된 것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과 고양감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었다. 꼭 육체를 넘어 정신까지 연결된 것처럼.

“우윽!”

몸이 반으로 접힐 만큼 밀어붙인 디아가 하체를 강하게 짓눌렀다. 곧이어 질은 액체가 장내에 울컥울컥 쏟아졌다. 종아리를 깨무는 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랫배가 부푸는 감각은 남달랐다. 진한 탈력감에 취해 축 늘어진 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혼탁했다. 뭔가 떠오를 듯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뭐가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고, 정신을 차리고 싶은데 지금 이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 뇌를 주무르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초점이 흐려졌다. 비척거리며 팔꿈치를 세우자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외설스러운 미인이 입을 맞춰 왔다. 고개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저돌적인 키스였다. 반은 진득한 키스를 적극적으로 받아 주었다. 몰래 금기를 깼을 때처럼 가슴이 야릇하게 두근거렸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지른 데서 오는 죄책감은 흥분보다 힘이 약했다.

숨 막히게 들러붙는 디아를 슬며시 밀어 낸 반은 상체를 모로 누이며 쪼그라든 폐에 공기를 집어넣었다. 사정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짐승 같다고 해야 할지, 한순간 달아오른 열기 역시 가시지 않았다. 디아도 마찬가지였다.

허리가 잡혔다. 몸이 뒤로 돌아가며 내내 장기를 혹사시키던 살덩이가 쑥 빠져나가자 꽉 차 있던 정액이 흘러나왔다. 사람의 것이 아닌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두 갈래, 세 갈래로 흘러내려 침대 시트가 순식간에 흥건해졌다.

엎드린 반이 혹여나 피할까 재빨리 깔아뭉갠 디아는 빠끔거리는 구멍에 그대로 귀두를 맞춰 넣었다. 벗어나기는커녕 앞으로 고꾸라진 반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입을 벙긋거렸다. 몸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 배은망덕한 짓거리가 조금 더 이어지길 바라는 본심이 뇌를 집어삼켰다.

“흡, 윽…! 후으….”

등을 덮친 디아는 가르쳐 준 대로 천천히 허리 짓 하다가 갑갑하다는 듯 급하게 속도를 올렸다. 베개를 그러쥔 반은 절로 튀어나오는 신음을 까슬까슬한 천에 대고 내지를 뿐이었다. 엉덩이로 하는 성교는 익숙하지 않은데도 디아가 성기를 처박을 때마다 시트에 짓이겨지는 성기에서 미끈미끈한 액이 새어 나왔다. 반의 등에 체중을 실은 디아가 아랫배와 침대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짓눌린 성기를 움켜쥐었다.

“흣! 아…!”

“이러면, 더 기분 좋아? 여기, 자꾸 나와….”

귓바퀴를 깨문 디아가 반의 성기를 짜내듯이 흔들었다. 새하얀 손이 제법 큰 성기를 뽑을 것처럼 거칠게 주무르자 손바닥이 금세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앞뒤로 자극당한 반은 허리를 떨면서 흐느꼈다. 질질 싼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온몸의 구멍에서 액체가 스며 나왔다.

“아, 허윽…!”

반은 이성이 정신에서 분리되는 감각을 느끼며 디아의 손바닥에 사정했다. 베갯잇을 이로 물어뜯으며 허리를 휘자 엉덩이에 붙은 디아가 뇌가 흔들릴 정도로 빠르게 허리를 쳐올렸다. 정신이 조각조각 나는 것 같았다. 섬찟한 감각이었다.

“반, 하아…. 이런 거, 나랑만 하자. 응? 제발.”

열기에 취한 디아는 애절한 어조와 달리 무례한 손길로 반의 엉덩이를 좌우로 벌렸다. 반의 정액이 묻은 엄지를 빡빡한 구멍 속에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연신 사정했다. 반이 쇳소리 섞인 신음을 내지르며 괴로워했지만 디아에게 전해져 오는 감정은 고통이나 괴로움이 아니었다. 반은 좋아하고 있었다.

디아는 작고 좁은 구멍에 곱지 않은 성기를 박아 넣은 상태로 반을 끌어안았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탄탄한 허벅지만 부르르 떨며 엎어진 반의 뒷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한때 아득하게 커 보였던 보호자를 마침내 깔아뭉갠 소년은 반듯한 어깨에도 순흔을 남기며 입술을 길게 찢었다.

“사랑해. 좋아해. 우리 같이 살자. 영원히 같이 살아.”

영악한 미소가 떠오른 입술 새에서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은 고백이 흘러나왔다.

“아읏, 후으…. 읏…!”

베개를 온 힘으로 끌어안은 반은 디아의 속삭임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정확히는 인식하지 못했다. 뒷일은 새카맣게 잊고 저지른 못된 짓에 푹 빠져 제정신을 유지할 여유가 없었다.

불시에 아주 작은 디아, 키가 작아서 싱크대에 손이 닿지도 않던, 그래서 안아 올려야만 했던 작은 아기가 떠오르면 팔뚝만 한 성기가 내장에 틀어박히며 암담한 기분을 지워 냈다.

글을 배우고 키스를 배웠듯 반에게 섹스까지 배운 디아는 주체되지 않는 성욕에 간혹 거칠게 움직이면서도 점차 능숙해졌다. 반이 벌어진 일을 순차적으로 나열할 수 있는 것도 딱 그때까지였다. 술을 잔뜩 마시고 필름이 끊긴 날처럼 반의 기억은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반은 그즈음에서야 인정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회피하고 거부했으나, 디아는 더 이상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년이 아니었다. 진실을 받아들인 순간 몇 번째인지도 모를 절정이 찾아들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는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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