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7/19)

03.

반은 변기를 붙잡고 시종 구역질했다. 얼굴에 피가 몰리고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지만 구역감을 참을 수 없었다. 술과 약을 동시에 밀어 넣은 듯이 속이 거꾸로 뒤집혔다. 누군가 뇌를 마구 주무르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가 도로 집어넣은 기분이었다. 배 속 장기는 빼곡하게 얻어맞아 터져 나가거나 멍이 든 것 같았다.

그 징그러운 살덩이에 내도록 때려 맞았는데 그럴 만도 하다고 푸념하다가도 욕지기가 치밀어 변기에 머리를 박았다.

“우윽! 웩…!”

“괜찮아?”

이틀가량 디아를 괴롭힌 열을 옮겨 받은 반은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질색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팔을 휘저었다. 나가라는 뜻이었지만 디아는 꿋꿋이 좁아터진 욕실 한구석을 지켰다.

더듬거리며 레버를 내린 반은 변기에 울리는 머리를 박은 채 침음했다. 28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 중 가장 경악스럽고 충격적인 아침이 떠올랐다.

단잠을 깨운 것의 정체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음이었다.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키자 보인 광경은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 웨인과 탁자 위에 삐딱하게 놓인 식판이었다. 식판 속의 음식물이 반쯤 쏟아져 있었다. 저것이 소음의 원인인 듯했다.

거 살살 좀 놓지. 반은 이상하게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왜 아침부터 지랄인데’를 짧게 줄여 투덜댔다.

‘왜애….’

반은 제가 말하고도 깜짝 놀랐는데, 웬일인지 목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감기라도 걸린 듯 칼칼한 목을 몇 번 가다듬으며 버티고 선 웨인을 흘겼다. 평소처럼 빈정거릴 거면 빨리 하고 가지, 통 말이 없었다.

‘뭐, 왜.’

불만스럽게 묻자 미간에 깊은 골이 팬 웨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왜 저래, 하며 떨떠름히 그의 시선을 따라간 반은 제 허리를 꽁꽁 감은 새하얗고 길쭉한 팔을 발견했다. 또 침대로 쳐들어왔나 싶어 디아를 깨우려던 때 헐벗은 상체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간 사고가 멈춘 반은 황급히 턱을 당겨 제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물리고 빨리고 쥐어 잡혀 성한 구석이 없는 피부를 샅샅이 살피다가 넋 나간 얼굴로 웨인을 올려다봤다. 웨인은 낯빛이 백지장이 된 반을 응시하다가 혀를 차고 사라졌다. 밤새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을 활짝 열어 둔 채로 말이다.

반은 웨인이 나간 후로도 한참 굳어 있다가 튀어 오르듯 침대에서 벗어났다. 바닥을 어설프게 디뎠다가 발목이 꺾여 꼴사납게 넘어졌고, 작은 소란은 까무룩 잠들었다고 해도 본디 예민한 디아를 깨우기 충분했다. 잠이 덜 깨 부스스한 모습마저 아름다운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앞이 핑 돌더니 머리로 열이 몰렸다. 몸살의 전조였다.

여기까지가 오늘 아침의 전말이다. 어젯밤이 가져다준 충격은 무려 몇 년 만에 찾아온 몸살의 원흉이 됐다. 반은 토기가 가라앉았음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뻔뻔하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하룻밤 가볍게 보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특별한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함께한 후 시시덕거리다가 깔끔하게 헤어졌는데. 그랬는데 디아와는 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웨인이야 이리저리 피하면 그만이었지만 디아는 피할 수도 없다. 차라리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는 편이 나을 듯했다.

평생 변기에 머리 박고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라 비척거리며 일어나 텁텁한 입을 헹궜다. 사지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세면대를 부서져라 붙잡고 버텨야 했다. 내친김에 세수까지 하고 어정쩡한 걸음으로 욕실을 나섰다. 똑바로 걷고 싶었지만 엉덩이 사이가 말 못 하게 따끔거려 어쩔 수 없었다.

“물 마셔.”

곧장 따라붙은 디아가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 곁눈질로 컵을 확인한 반은 고맙다는 말 없이 컵을 빼앗아 냉수를 들이켰다. 디아는 깔끔하게 빈 컵을 거두어 가며 은근슬쩍 손가락을 쓸어내렸다. 은근한 스킨십에 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부드럽게 거둬 간 것과 달리 다소 심드렁한 손길로 컵을 탁자에 밀어 놓은 디아는 시선이 마주치자 즉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만들어 냈다. 창백한 손바닥이 후끈후끈한 이마를 덮었다.

“많이 아프지. 간호해 줄까?”

반은 소년의 걱정 어린 표정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의문스러웠다. 오히려 기뻐 보인다면 너무 꼬인 걸까.

드디어 정면에서 마주한 소년은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앓았던 것이 거짓말처럼 산뜻한 인상을 풍겼다. 윤기가 도는 피부는 뻔드르르했고 붉은 기가 감도는 눈가는 어딘지 모르게 양심의 가책을 일으켰다. 달리 말해 얼굴이 활짝 폈다는 얘기다. 꼭 그딴 짓을 하고자 아픈 척을 한 것처럼. 병색까지 거짓으로 꾸며 낼 수 없음을 아는데도 찝찝함이 남았다.

눈을 가늘게 뜬 반은 ‘내게 필요한 건 간호가 아니라 네가 잠깐 꺼져 주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손을 떼어 내며 돌아섰다.

“…됐다. 간호는 무슨.”

독립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는 행동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싶었지만 반에게 허락된 행동은 침대가 있는 방향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절망스러웠다. 자기 방의 나무 문을 부순 탓에 디아와 방을 합친 것은 물론이고 행동반경이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굳게 닫힌 철문을 힐끗 노려본 반은 시트가 갈린 침대로 파고들었다.

웨인이 내던지다시피 주고 간 새 모포를 목 끝까지 덮고 돌아누웠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두 눈 질끈 감고 무시했다.

구토하느라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면서 끔찍한 근육통과 두통이 덮쳤다. 차갑게 식었던 뺨이 삽시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섹스하고 앓아눕다니. 헛웃음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모포를 뻥뻥 차고 싶었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때, 의자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슬랙스에 감싸인 허벅지가 시야로 들어왔다. 주름 한 줄 없이 반듯한 옷감이 접히며 디아가 침대 곁에 앉았다. 이윽고 찬기가 도는 젖은 수건이 식은땀 맺힌 이마를 쓸었다.

디아는 반이 해 줬던 대로 똑같이 따라 하듯 뜨끈한 귀와 목덜미를 수건으로 꼼꼼히 닦았다. 막무가내로 달려들던 모습을 감히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헌신적인 손길이었다.

이것저것 다 내어 주다가 엉덩이까지 내어 주게 된 반에게는 성직자처럼 고고한 디아의 낯짝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안다. 속이 꼬여서 다 비뚤게 보이는 거. 배배 꼬인 반은 쇄골을 넘어 슬쩍 티셔츠 안으로 침범하려는 손길을 내치며 삐딱하게 쏘아붙였다.

“하지 말라고 했다.”

매정한 반응에 소년은 흐트러진 수건을 접다 말고 상체를 숙였다. 막을 새도 없이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며 쪽 소리가 났다.

“왜 하지 마? 우리 이제 이래도 되는 사인데.”

순식간에 입술을 빼앗긴 반은 디아의 도발 아닌 도발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단한 착각을 하고 계셨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멍청히 바라보고 있자 곱게 접힌 수건이 이마에 얹혔다. 양팔을 포개어 침대에 엎드린 디아는 황당하다는 반의 눈빛에도 개의치 않고 치근거렸다.

“좀 잘래? 아님 물 줄까? 손잡아 줘? 안아 줄까?”

심지어는 제멋대로 연인 행세를 하려고 들었다. 능구렁이처럼 받아치자니 마음이 동하지 않았고, 화를 내자니 골이 징징 울려 대꾸 없이 소년을 등졌다. 툭 떨어진 수건을 침대 밖으로 밀어내고 모포를 뒤집어썼다.

공벌레처럼 웅크리자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팠다. 군데군데 물어뜯긴 뒷덜미는 따갑고 척추는 부러진 것 같았다. 무언가를 넣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던 엉덩이 사이는 진즉 망가진 듯해 들여다볼 자신이 없었다. 깔때기 꽂고 쏟아부은 것처럼 배 속을 가득 채웠던 정액을 어떻게 뺐는지 몰랐으나 알고 싶지도 않았다.

속으로 연신 투덜거리고 있을 때 어깻죽지에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어깨를 충분히 감쌀 만큼 널찍한 손이 규칙적으로 등을 토닥이더니 조곤조곤한 음성이 뒤이어 들려왔다.

“자장자장….”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반은 디아가 아기일 적 해 주었던 토닥임을 돌려받으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무례한 토닥임은 구석으로 밀어 두었던 어젯밤 기억을 강제로 되살렸다.

땀에 푹 절은 머리카락이 나신에 닿던 느낌이 생생했다. 빨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기어코 온몸을 쭉쭉 빨던 입술이 여태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뜨거운 숨을 토하며 몰아붙이던 디아가 떠오르자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양심이 없어도 유분수지. 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토닥임이 반복될수록 기묘하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처럼 수마가 몰려왔다. 끝끝내 혼자 놔두질 않는 디아의 손길을 받으며 반은 까무룩 잠들었다.

***

한숨 자고 일어나자 두통이 한결 가셨다. 장점이라고는 몸이 튼튼한 것뿐인 반은 약한 근육통이 느껴지는 팔을 쭉 뻗다 말고 미간을 구겼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찌푸리자 의자를 차지한 놈이 선명하게 보였다. 멀뚱멀뚱 보고만 있자 냉담한 명령이 떨어졌다.

“깼으면 일어나지?”

평소 같았으면 들은 척도 안 했겠지만 지은 죄가 있는 탓에 꾸물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침대 헤드에 기댄 반은 몸소 찾아와 놓고는 못마땅한 눈으로 빤히 응시하는 웨인의 기미를 슬쩍 살폈다. 불편한 침묵이 오갔다. 반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억지 기침을 콜록콜록 뱉었다.

“약 없냐? 아파 죽겠는데 약 하나를 안 주고…. 아, 진짜 아프다….”

혼신의 힘을 다한 약한 척에 웨인의 표정은 한층 더 냉랭해졌다. 겸연쩍어진 반이 손을 내리자 헐렁한 티셔츠 목깃 새로 얼룩덜룩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웨인은 물고 빤 흔적이 역력한 피부를 관찰하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턱을 괸 남자에게서 피로감이 극에 달한 어조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문은 부수고, 집은 엉망으로 해 두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거야 네가 자리 비웠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지. 내가 몇 번 말했냐? 디아 아프다고. 네가 애초에 안 가뒀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내 말이 틀리냐?”

반이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약한 척은 집어치우고 다다다 쏘아붙였으나 웨인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 권태로운 남자는 반의 모순을 꼬집었다.

“결국에는 버릴 거라며. 왜 그렇게 신경을 써?”

“…내가 언제 버린다고 했냐. 그냥, 뭐…. 헤어지는 거지.”

반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버리다니. 어감이 이상하지 않나. 혹여나 디아에게 입 벙긋할 생각은 추호도 말라고 경고하려는 찰나, 웨인이 ‘거기다’ 하며 말을 이었다.

“헤픈 줄은 알았어도… 정말 저지를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거절하는 게 어렵다고 해도 말이지.”

맞는 말이긴 하다만 직접적으로 들었을 때 마냥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다. 발끈한 반은 동정 운운하며 몰상식한 바람을 불어넣을 때는 언제고 발을 빼려는 웨인을 비웃으며 빈정거렸다.

“언제는 네가 자라며. 나도 잘한 건 없는데 너 말하는 게 웃긴다?”

민망함을 감추려 너스레까지 떨었다.

“아, 그래. 좋더라고. 넌 잘 기억 안 나는데 디아는 제대로 기억나겠다. 어리니까 뭐가 달라도 달라?”

어떤 의미로는 기억이 안 나려야 안 날 수 없는 섹스이긴 했다. 뜬금없이 공격당한 웨인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무어라 반박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인 남자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실컷 비아냥을 쏟아 내자 속이 다 후련해진 반은 아차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디아가 보이지 않았다. 다급히 모포를 걷어 내며 물었다.

“디아는?”

“왜? 배 좀 맞췄다고 벌써 그리워?”

“지랄하지 말고. 어디 있어?”

조금 움직였다고 뻐근한 허리를 짚은 채로 닦달했다. 끙끙대는 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일어난 웨인은 의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답했다.

“잠깐 집 구경 중.”

“…뭐?”

감금 생활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들렸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어느새 철문 앞에 도착한 웨인이 빙긋 웃었다.

“어차피 도망가는 법도 모르니까.”

탈출 시도는 한 번 더 수포로 돌아갔다. 삐거덕거리는 몸을 잽싸게 일으켜 달려갔지만 디아는 돼도 너는 안 된다는 양 코앞에서 철문이 쾅 닫혔다. 이미 이곳이 어딘지 알고, 심지어 희희낙락 저녁 식사까지 해 본 적 있는 반은 웨인의 횡포에 넌덜머리가 났다.

팔짱을 단단히 끼고 문을 노려보길 삼십여 분. 사라졌던 디아가 돌아왔다. 반은 침대를 짚고 일어나며 황급히 물었다.

“나갔다가 왔어?”

“아니.”

디아는 들고 온 것을 가슴 부근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거 반이랑 닮았길래.”

반은 소년이 손에 쥐여 준 들꽃을 내려다봤다. 노랗고 작은 꽃잎이 앙증맞은 작은 꽃다발은 어딜 어떻게 봐도 본인과 닮은 구석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더군다나 생기라고는 없는 조악한 조화였다. 탈출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조화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웨인이 한차례 긁고 간 평정심이 흔들렸다.

“무기… 가 아니라 이딴 걸 가져왔다고?”

“무기가 왜 필요한데? 봐. 귀여워.”

디아는 조화 한 줄기를 반의 귓바퀴에 꽂아 주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노란빛의 꽃은 절묘하게 어울리는 부분이 있어, 매끈한 입매에 미소가 걸렸다. 반면 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약속한 날까지 며칠의 여유가 있는지 헷갈렸다. 확실한 것은 한 달이나 더 이따위 생활을 하면 신경 줄이 닳아 죽을 거라는 확신이다.

“여기서 나가야지. 그러니까 무기가 필요한 거고….”

“좋은데 왜. 아까 뭔가 좋았어. 반이 여기서 나만 기다리는 것 같고. 전에는 반이 이렇게 들렀는데.”

이 갑갑한 감금 생활에 대한 디아의 견해는 처음부터 일관적이었다. 반 혼자 의견이 달랐을 뿐이다. 반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손길을 받으며 장성한 소년을 올려다봤다.

머리카락을 툭툭 매만지는 손길은 제가 소년에게 해 주던 손길과 닮아 있었다. 폐쇄된 공간, 한 명에게만 자유로운 출입, 돌봄 흉내. 반은 순간 섬뜩해졌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쌓인 스트레스가 예민한 반응을 일으켰다.

“한 번 잤다고… 뭐라도 된 것 같아서 이러냐?”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이 멈칫 굳었다. 반은 귀를 간지럽히는 조화를 성가시다는 듯이 떼어 냈다. ‘내가 언제 좋다고 했어? 네가 억지로 했지’라며 책임을 전가하는 망발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안간힘을 써 가라앉혔다. 시작이 어떠하든 완력으로 저지할 수 있었던 디아를 내버려 두다가 끝내 어울려 준 것은 자신이었으니.

“없던 일로 하자. 어? 제발. 내가 미쳤었나 보다.”

짜증스러운 한탄에도 디아는 묵묵부답이었다. 사람 속 뒤집을 때는 잘도 놀리던 입을 꾹 다문 채로 지켜보기만 했다. 누구라도 상처받을 만한 말이었기에, 반은 조화 줄기보다 산뜻한 색을 띠는 눈동자를 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실수야, 실수. 웨인, 그 새끼랑도 그 개같은 실수 때문에….”

가시 돋친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어리숙한 나머지 때때로 못된 말을 뱉고 마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디아는 놀라 휘둥그레 뜨인 반의 눈을 본 적 없는 냉랭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그 얘기 그만해.”

반은 바보같이 눈만 껌벅였다. 홧김에 저지른 모양인지, 디아는 일순 곤란한 낯을 하더니 손바닥을 거두어들였다. 입을 틀어막은 것은 사라졌으나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와 표정이 남긴 감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반은 자유를 얻고서도 말을 잇는 대신 디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호박색 눈에 모순된 배신감이 일렁였다. 굳게 다물린 아랫입술이 아주 미미하게 튀어나왔다. 소년은 ‘네가 어떻게 나한테’라는 비난 어린 눈빛에 당혹스러워하더니 기껏 가져온 조화를 바닥으로 떨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미안해, 반. 내가 잘못했어. 기분 풀어, 응?”

디아는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반의 팔뚝을 거머쥐었다. 응? 하며 팔을 흔들어도 반응하지 않자 손바닥을 가져가더니 자기 뺨을 얹고 비비적거렸다. 아직 말랑한 구석이 있는 뺨이 살결에 착 감겨들었다. 그러나 소년이 귀여운 응석을 부리면 대책 없이 받아 주던 반은 이번에도 무반응이었다. 늘 토라지는 역할이었던 디아가 조급한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뭐가 필요해? 내가 다 들어줄게.”

반은 참 미덥지 않은 소년을 퉁명스럽게 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붙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고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웠다.

“웨인이나 죽여 주든가.”

또다시 디아를 등지며 빈말을 던졌다. 어른답지 않은 대처라는 것은 알지만 울컥 튀어나오는 울분을 누르기 어려웠다. 반은 지지부진한 말싸움을 이어 가는 것보다 지긋지긋한 잠을 택했다. 채 떨어지지 않은 몸살기가 웨인과 디아에게 연달아 화를 내면서 도로 불이 붙은 듯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머릿속 정리를 미뤄 두고 눈을 붙이자 부실한 침대가 삐걱거렸다. 좁은 싱글 침대에 올라온 디아가 길쭉한 팔로 상체를 감싸 안았다. 뜻밖의 접촉에 움찔거린 반은 무심코 숨을 죽였다가 일부러 헛기침했다. 디아의 이마가 날개뼈 사이에 닿았다.

“알았어.”

디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가느다란 숨결이 천을 넘어 살결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머리에 피가 몰리고 손끝이 굳었다. 디아가 팔에 힘을 조금 더 주어 허리를 세게 끌어안자 몸이 꼭 붙었다. 어젯밤을 연상시키는 자세였다.

“내가 다… 들어줄게.”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며 숨이 막혀 왔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소년의 품에 안긴 반은 감은 눈을 스르르 떴다. 갈라진 흔적이 곳곳에 남은 시멘트벽이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 수십 번 되새김질했으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던 의문을 혼란을 틈타 꺼내 보았다.

웨인의 말에 따르면 숙주는 피해를 받는다. 어떤 피해인지 정확히 들은 적은 없었지만, 지금에야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하지 않나. 디아만 엮이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굴지 못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천천히 되짚어 보면 뇌가 디아의 안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무기를 찾아 웨인을 제압할 준비를 하기는커녕 약이나 찾고 앉아 있던 것도 이상했고,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짓을 하는데 다리를 벌려 줄 결심이 선 것도 이상했다. 같은 곳에 한 달만 머물러도 좀이 쑤셨는데 무려 반년을 고리타분한 동네에 처박혀 있으면서 지루한 줄을 몰랐던 것도 이상했다.

디아, 이깟 게 뭐라고 백만 달러를 저버릴 생각을 했다. 모든 상황이 웨인의 경고를 뒷받침했다. 뜨거운 숨을 내뱉고 들이마시던 반은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디아를 사랑스럽게 여기고 위하는 마음은 가짜다.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이 든다. 디아를 사랑스럽게 여기고 위하는 마음이 가짜라면 지금 손가락 끝에서 혈관이 펄떡펄떡 뛰는 감각도 가짜일까.

***

밤이 내린 후, 디아는 감은 눈을 떴다. 잠 못 이루던 반은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허리를 동여맨 손을 풀고 반의 이마를 짚어 봤다. 아침보다 열이 떨어져 뜨뜻미지근했다. 남자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흐트러진 모포를 곱게 덮어 주었다. 의자로 되돌아간 소년은 침대에 엎드려 반을 빤히 응시했다.

회피가 버릇인 미성숙한 남자에게서 복잡다단한 감정이 느껴졌다. 강력하게 연결된 고리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감정은 표면적이고 두루뭉술해서 낱낱이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디아는 일자로 다물린 입매를 쓸어 보다가 입술을 겹쳤다.

포근한 체온과 규칙적인 숨결이 닿자 손가락 관절이 저릿저릿해지고 허벅지 근육이 긴장했다. 언젠가부터 반과 손끝이 스치기라도 하면 찾아오던 몸의 변화였다. 이제는 왜 목이 바짝바짝 타고 아랫배가 욱신거렸는지 안다.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입술을 떼어 낸 디아는 건조한 뺨과 오뚝한 콧날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꿈같은 어젯밤을 복기했다.

처음에는 꿈이나 망상 따위의 헛것인 줄 알았다. 시야는 희부옇고 몸은 자글자글 끓어서, 흐르는 시간이나 반의 목소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열기가 사지를 돌아 아랫배에 고였을 때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당황은 없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빨리 하나, 늦게 하나 결과는 똑같지 않은가. 어차피 반은 제 것이었으니.

“나 다녀올게.”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지만 허술한 구석이 많아 결국엔 넘어오고 마는 반에게 작게 속삭였다.

철문 앞에 선 디아는 바지 주머니에서 두꺼운 열쇠를 꺼냈다. 집을 둘러보며 조화만 챙긴 것은 아니었다. 굳이 반에게 보여 주지 않았을 뿐이지.

반이 고전했던 철문은 열쇠 하나로 쉽게도 열렸다. 부서져서 굳이 잠그지 않은 나무 문까지 통과하자 습한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디아는 아래층에서 번지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타인의 것을 강탈한 듯 이질감이 느껴지는 집 안을 제집처럼 가로질러 빛이 새어 나오는 서재로 들어섰다. 벨벳으로 된 길쭉한 소파에 늘어진 웨인이 보였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웨인은 얇은 요를 치우며 비좁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을 의문스럽게 바라보던 웨인이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늘 소지하고 다니는 열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벽에 걸어 둔 여분 열쇠가 없었다. 하, 숨을 내쉬자 어느새 다가온 소년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직접 다 오시고. 그것도 혼자.”

비아냥에도 디아는 반응이 없었다. 디아와 독대한 적은 손에 꼽았으나 이런 반응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어깨를 으쓱인 웨인은 친히 행차까지 해 주신 소년에게 계획의 일부를 알려 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협조해 주면 일이 보다 수월할 테지만 영 기대가 안 됐다. 피로한 눈가를 문지른 웨인은 반을 납치하기 전 소년과 나누던 대화를 마저 이었다. 따르든 말든 알고는 있으라는 뜻이었다.

“저번에 말했지. 그쪽에서 날짜를 당기든, 계획을 변경하든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전화로는 별 얘기 안 했다고 해도 둘만 아는 신호가 있을지도 모르고. 반이 이상한 짓 하면 곧장 말해.”

잠자코 듣는 디아의 녹색 눈알 속에 불꽃이 타올랐다. 램프의 조도를 낮추자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그때와 같이 침묵으로 일관하던 디아가 무표정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반이 네가 마음에 안 든대.”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코웃음을 친 웨인이 되물었다.

“그래서?”

“친한 척하지 말라고.”

“친한 척이라니. 너보다 내가 먼저 반을 알았는데 섭섭하게.”

무심결에 웃으며 대꾸한 웨인은 유치한 입씨름에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본론으로 돌아갈 때였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반이 아니라 연구소 위치야. 네가 믿고 의지할 것은 반 클라크가 아니라 동족이고. 누구처럼 배신은 안 하거든.”

“겪어 봤나 봐?”

디아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언뜻 보면 순진하게까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닌 척 살살 긁는 의도를 못 알아차릴 웨인이 아니었다.

팔짱을 끼며 물러난 웨인은 눈 뜬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새파랗게 어린 개체를 가만 바라봤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집을 비운 동안 저지른 일만 생각하면 두통이 일었다.

차가 퍼지는 바람에 아침 해가 뜨고서야 귀가했더니 둘이 홀라당 일을 치른 후였다. 공기 중을 떠다니는 진득진득한 냄새며 습기가 계획 밖의 일이 펼쳐졌음을 시사했다. 기껏 만들어 온 아침 식사를 요란스럽게 내려놓은 것은 불쾌감에서 기인했다.

설마설마했다. 반을 놀리고자 동정 운운하며 농담을 던진 적 있지만 결코 진심은 아니었다. 디아가 반을 바라보는 눈빛이 통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진작 알았다. 그러나 개체가 숙주에게 성욕을 품는 사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저 지나가는 바람인 줄 알고 둘을 방관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상황이 희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숙주에게서 정신적인 독립을 해야 했다. 단물 빨아먹은 뒤에는 숙주가 망가지든 말든 버리고 제 갈 길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태도였다. 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다. 협조는 못할망정 혹이나 달 생각을 한다니. 그것도 쓸모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커다란 혹을.

웨인은 손안에 감춘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과 좋다고 뒹굴어 놓고는 멍청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반이 떠오르자 절로 짜증이 샘솟았다. 의미 모를 감정이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던 손을 떼어 내며 시선을 들었다. 곱상한 외모를 가진 소년은 어느새 손잡이가 장식된 페이퍼 나이프를 쥐고 있었다. 눈길이 낮은 탁자로 향했다. 필기구를 담는 함이 반듯하게 놓여 있다. 어느 틈에 가져갔는지 눈치도 못 챘다. 웨인은 나이프를 만지작대는 디아를 흘긋거리며 마르는 입술을 뗐다.

“느껴질 거 아냐. 반이 널 팔아 버리려는 거.”

“네 망상이겠지.”

“그놈은 애초에 돈 때문에 떠맡은 거야.”

“아닌데….”

나이프에 시선을 고정한 디아는 연거푸 무신경한 말투로 부정했다. 반의 앞에서와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웨인은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디아를 바라보며 눈초리를 가늘게 좁혔다.

“지금도 그래. 그 가벼운 놈은 널 팔아넘길 생각밖에 없을걸. 돈만 챙기면 여기저기서 뒹굴고 다니겠지. 너한테 한 것처럼….”

늘씬한 다리가 낮은 탁자를 걷어찼다. 웨인의 무릎을 때려 말허리를 끊고 넘어진 탁자가 바닥을 굴렀다. 함과 필기구, 종이 따위가 카펫 위로 흩어졌다. 탁자를 걷어찬 발을 카펫 위에 얌전히 내려 둔 디아가 양손으로 페이퍼 나이프 끝과 끝을 쥐었다.

“그따위로 말하지 마. 너랑도 가족이 될 텐데.”

엉망이 된 잠자리를 둘러본 웨인의 눈이 천천히 디아의 다리를 타고 올랐다. 얼굴을 마주했을 때, 불현듯 상체를 기울인 디아가 샐쭉 웃었다. 비밀을 알려 주듯 들려오는 음성은 낮고 고요했다.

“있잖아. 우리 사랑하고 있어.”

웨인은 디아에 관한 평가에 한 줄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나갔군. 반이 들었다면 팔짝 뛰다 못해 바닥을 구르며 억울해할 소리를 대담하게 내뱉은 디아가 나이프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쓰러진 램프에서 퍼진 빛이 날카로운 금속에 닿아 반짝거렸다.

***

복잡한 상념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진 반은 귀찮게 하는 것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힘없이 팔랑팔랑 흔들리던 손이 따뜻한 손아귀에 붙잡혔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윙윙대는 것이 벌레 같기도 하고 수군수군거리는 것이 TV 소리 같기도 했다. 잠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든 지금은 계속 자고 싶었다.

“…반. 반, 일어나 봐.”

“으…. 좀….”

저리 가.

손을 휘적휘적 흔들면서 돌아누우려고 했지만 속삭임은 가시지 않았다. 자게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았다.

“왜, 또….”

짜증스럽게 눈을 뜬 반은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디아를 향해 끔벅거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은 녹음을 담은 눈뿐이었다.

별로 말을 섞고 싶은 기분도 아닌데 이제는 잠까지 깨우는 디아가 못 견디게 얄미웠다. 한숨을 내쉰 반은 머리맡에 놓아둔 램프를 더듬어 불을 켰다. 눈을 비비며 깨운 이유를 물어보려다가 멈칫했다.

이게 뭐지. 눈가를 좁힌 반은 하얀 이불에 남은 붉은 손자국을 발견했다. 심지어 눈을 비볐던 손에도 붉은 액체가 묻어 있었다. 손톱 사이를 물들이는 빨간색을 응시하던 반의 잠기운이 화드득 달아났다. 다급히 상체를 일으키자 침대 곁에 서 있던 디아가 슬며시 웃었다.

“잘 잤어?”

반은 소년을 멍하니 바라봤다. 구겨진 흰 셔츠에 점점이 튄 것이 붉은 물감일 리는 없었다. 침대를 양손으로 짚은 디아는 길쭉하고 날카로운 쇠붙이를 들고 있었다.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쇳덩이의 본래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반은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는 것을 알아차렸다. 쿵덕쿵덕,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속도를 올리는 가운데 허리를 세운 디아가 피범벅이 된 쇳덩이, 페이퍼 나이프를 이불 위에 올려 두었다.

“다 들어준다고 했지?”

반은 작은 칼날과 디아를 번갈아 봤다. 천천히 벌어진 입에서 형편없는 목소리가 샜다.

“너 대체 뭐 한…. 뭐 했어? 뭐야?”

“반이 아까….”

“잠깐만. 잠깐.”

디아의 말을 자르고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와 소년을 살폈다. 새하얀 셔츠 군데군데 피를 묻힌 소년의 손은 새빨갰다. 장기 속을 헤집은 것처럼 하얀 구석이 없었다.

“이거 뭔데? 왜 이래? 다쳤어? 어디!”

옷을 들치고 곳곳을 매만지며 바르게 선 몸을 이리저리 돌려 봤지만 이만한 피가 나올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얼떨결에 양손을 들어 올린 디아는 쌀쌀맞게 대할 때는 언제고 안달복달하는 반을 빤히 바라보다가 태평하게 답했다.

“나 안 다쳤어.”

“그럼, 그럼 이거는 다….”

디아의 시선이 이동했다. 눈동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반은 활짝 열린 철문을 발견했다. 저게 언제 열렸지, 하는 얼빠진 생각이 먼저 들었다가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숨을 들이켠 반은 더 생각할 겨를 없이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반!”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계단을 세 칸씩 뛰어 내려간 반은 아수라장이 된 집 안을 아연실색한 낯으로 둘러봤다. 몇 없는 가구가 몽땅 쓰러지고 넘어지고 산산이 조각났다. 반은 아직 굳지 않은 핏방울이 흩뿌려진 가구를 뛰어넘으며 바닥에 그어진 핏줄기를 따라갔다. 부엌에 가까워질수록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페이퍼 나이프를 쥔 반은 손잡이의 장식이 손바닥에 새겨질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부엌도 거실과 비슷한 몰골이었다. 식기와 주방 도구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쓰러진 램프 덕에 사물을 분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집기를 피해 조심히 다가간 반은 지하실 문 앞에서 핏자국의 주인을 찾아냈다.

널브러진 웨인의 복부는 붉은 페인트를 쏟아부은 것처럼 온통 축축했다. 주황빛 불빛에 얼룩진 다리가 미동도 없음을 눈치챈 순간 심장이 발끝까지 추락했다. 도무지 그의 얼굴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웨인을 등진 반은 뒤쫓아온 디아의 손목을 낚아채 싱크대 쪽으로 끌고 갔다.

“저거 뭐야, 네가 그런 거야?”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묻자 소년의 표정이 묘하게 뒤바뀌었다. 약간의 침묵 동안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반은 얼른 대답하라며 적절한 답안을 고르는 디아의 손목을 흔들었다.

“대체 왜? 둘이 싸웠어? 이거 실수…. 실수 맞지?”

무슨 실수를 저질러야 사람 뱃가죽을 찢어 놓을지는 모르겠지만 고의로 이런 짓을 하는 이는 자신이 아는 디아와 괴리가 심했다. 웨인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이 지경이 됐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칼에 찔릴 정도의 큰 잘못이 뭘지 저로서는 전혀 모르겠다만.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모를 디아는 작은 희망마저 박살 냈다.

“실수 아니야.”

“일부러 이랬다고? 왜?”

디아는 줄곧 맞추던 시선을 스르르 돌렸다. 답답해서 돌아가실 지경이 되어서야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반… 기분 풀어 주고 싶어서.”

반은 일순 얼이 빠져 디아를 멍하니 바라봤다. 과부하가 걸린 머릿속에서 토막난 단어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들썩였다.

“이런 걸로… 내 기분이 풀린다고?”

저를 어떻게 봤길래 사람 배를 가른 모습을 보고 기분을 풀 거라 생각했을까. 진심으로 의문이었다. 디아가 입을 열면 열수록 원인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졌다. 변명 하나 하지 않는 소년을 바라보며 입을 벙긋대던 반의 뇌리에 짧은 대화가 스쳤다.

‘뭐가 필요해? 내가 다 들어줄게.’

‘웨인이나 죽여 주든가.’

성가시고 짜증이 나 더 이상 말 걸지 말라고 던진 한마디가 번뜩 떠올랐다. 불안이 엄습했다. 반은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설마 내가 그랬다고….”

디아는 지금 떠올린 그 이유가 맞는다는 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설마 아니지? 잡은 손목을 쭉쭉 당기자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버티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건…! 그건 그냥 말만 그런 거지!”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한평생 몸 쓰는 일을 하며 살아왔지만 반은 살인과 거리가 멀었다. 전쟁터에 끌려가는 용병도 있다지만 매사 편한 길을 추구하는 반은 기껏해야 정신 차리라고 몇 대 때려 본 게 전부였다. 당연히 살인 현장을 목격한 것도 처음이었다.

돌연 다리가 부러진 토끼가 떠올랐다. 겁에 질린 토끼를 선물이랍시고 내밀던 소년의 웃는 얼굴이 저 무표정한 얼굴에 겹쳤다. 그놈의 사랑을 들먹이며 반이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렇게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되었을까. 그때 따끔하게 혼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반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를 후회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꽉 사리문 아랫입술에 앞니 자국이 났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은 끔찍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대로 디아와 웨인을 내버리고 도망칠까? 고민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웨인의 사체가 발견된다면 용의자 일 순위는 반 클라크 본인이었다. 게이 커플로 위장한 전적이 있으니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까지 덮어쓸 소지가 다분했다. 그리고 디아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다.

허리에 손을 올렸다가 이마를 짚으며 난장판이 된 상황을 타개하려고 애쓰던 반은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밀었다.

“이걸로 찔렀어?”

디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은 봉투를 뜯는 용도인 작고 무딘 나이프를 내려다봤다. 흉기가 이거라면 온전히 힘으로 찢어발긴 것이었다. 망할. 욕을 삼킨 반은 살해 도구가 된 나이프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디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새빨간 손을 티셔츠로 문질렀으나 깊이 스며든 피가 쉽게 지워질 리 없었다. 물 튼 개수대에 디아의 손을 밀어 넣고 박박 문질렀지만 붉은 피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미치겠다, 진짜…. 이걸, 씨….”

손을 흠뻑 적신 반은 갇혀 살아 적정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는 디아의 뺨을 강하게 문질렀다. 호선으로 튄 핏자국을 닦으며 왜 이렇게 안 지워지냐고 연신 중얼거렸다. 뜻밖의 반응에 기가 팍 죽은 디아가 반을 물끄러미 살폈다.

“나 잘못했어?”

“그럼 잘했겠냐?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저걸 어떻게든….”

“안 죽었어.”

낯빛이 파리하게 질린 반을 내려다보던 디아는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었다. 거짓말이라는 양, 혹은 들리지도 않는 양 목덜미에 묻은 혈흔을 닦아 주느라 정신없는 반의 팔을 쥐어 아래로 내렸다. 디아는 패닉에 빠진 반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시무룩하고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살아 있어.”

“…뭐?”

“이대로 놔두면 죽겠지만….”

“그걸 왜 이제 말해!”

잘게 토막 낸 웨인을 유기하는 데까지 상상이 뻗어 가다가 벼락 맞은 듯 정신이 돌아왔다. 반은 버럭 소리를 지르다 말고 서둘러 웨인에게 다가갔다. 죽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처참한 현장이었지만 용기 내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시체로 보였던 웨인의 가슴팍이 미약하게 오르내렸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과 잇새로 튀어나오는 작은 신음은 아직 살아 있다는 디아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한시름 덜었다고 하기에는 몇 시간 내로 골로 갈 듯한 몰골이었다. 반은 떨리는 손으로 웨인의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시체 같았던 웨인이 신음했다. 안도감보다는 막막함이 앞섰다.

“디아, 빨리! 다리 잡아 봐.”

반은 내키지 않는 듯 퉁명스러운 낯을 한 디아와 함께 웨인을 서재로 옮겼다. 벨벳 소파에 웨인을 누이고 집 안을 뒤지며 발견했던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해열제는 없었지만 살을 꿰매거나 상처 소독에 필요한 도구는 있었다.

아무리 도구가 있다고 한들 이 정도 상처면 병원에 가는 편이 나았다. 그나마 가까운 병원이 차로 2시간 거리이고, 상해가 확실해 보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응급실에 들어가면 몇 분 내로 경찰이 들이닥칠 것은 자명했다. 반은 마른 수건으로 웨인의 복부를 덮어 누르며 디아와 설전했다.

“이 새끼 죽으면 우리 끝장이야. 알긴 하냐?”

“잘 모르겠지만 내 잘못이니까 내가 끝장날게.”

구급상자를 뒤적이던 디아가 담담하게 반박했다. 걱정하지 말라며 덧붙이기까지 해서 반의 화를 불렀다.

“네 잘못이 내 잘못이지! 걱정을 안 하기는….”

출생 신고도 안 된 데다가 몸값까지 높은 놈이 감옥에 들어갈 가능성보다 얼결에 목격한 제가 범인으로 몰릴 가능성이 수배는 높았다. 세상의 불합리와 비열함을 모르는 디아는 꿍얼대는 반을 묘한 눈초리로 봤다. 반은 머릿속이 훤한 소년을 향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좋아하지 마라….”

저 좋을 대로만 판단하는 소년을 노려보며 새빨갛게 물든 흰 수건을 걷어 냈지만, 피가 멎은 건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램프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다른 수건을 덮자 새 수건마저 금세 붉게 물들었다.

“도대체 왜 이런 건데? 진짜 내가 말 한 마디 했다고 이딴 짓을 했다고?”

반은 힘을 주어 웨인의 배를 압박하며 괴상한 짓을 벌인 디아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새 수건을 건네준 디아는 시선을 돌리더니 반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꺼내 놓았다.

“그냥… 불안했어.”

“뭐가.”

“반이 요즘 계속 불안해했으니까. 반이 원하는 걸 들어주면 화도 풀리고 불안해하지도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 나가고 싶다고 했잖아. 나는 이러면 반도 좋아할 줄 알고….”

말끝을 얼버무린 디아가 구급상자를 뒤적거렸다. 소년의 사고방식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던 반은 눈을 감고 갑갑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걸 장하다고 칭찬해 줘야 하는지, 미쳤냐고 등짝을 때려줘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복부의 상처를 들여다봤다.

하나 다행인 것은 나이프 길이가 짧아 복부 깊은 곳에는 닿지 않았다는 점이다. 땀이 뻘뻘 나도록 지혈에 힘쓰는 동안 디아가 봉합용 스테이플러를 꺼냈다. 반은 그것을 빼앗아 들며 전에 없이 단호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앞으로는 이러지 마. 무슨 일이 있든 사람은 건드리지 마. 알겠어?”

반은 디아를 다른 존재로 구분 짓고 인간과 선을 그었다. 무의식적인 발언이었다. 답 없이 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는 디아를 재촉했다.

“알았냐고. 대답해.”

“…알았어.”

디아는 반의 눈동자에 얼핏 떠오른 적개감을 본능적으로 알아챘지만 토 달지 않았다. 대신 떨리는 손을 응시했다.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디아는 반에게서 스테이플러를 빼앗았다.

“내가 할게. 책에서 봐서 알아.”

제법 솜씨 좋게 상처를 지혈한 디아는 갈라진 살가죽에 철심을 박았다. 반은 디아가 헛짓거리 할까 봐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바닥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소파 등받이를 붙잡고 중심을 세웠다. 웨인이 골로 갈 때를 대비해 현장 수습은 해 놔야 했다.

부엌 구석에서 먼지 쌓인 대걸레를 찾았다. 바싹 말라 바스러질 것 같은 걸레가 물을 머금는 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얼추 정신을 차리고 재차 확인하자 피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가 섬뜩하긴 했지만 범위는 좁았다. 얼마나 혼이 빠졌으면 이걸 피바다로 봤는지. 반은 연신 한숨을 쉬며 젖은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지익지익 밀려나는 자국을 지우다가 핏방울이 튄 문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실로 향하는 문이었다. 디아가 아프던 날 미처 살피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던 그곳이었다.

대걸레 손잡이를 옆구리에 끼운 반은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문틈으로 스민 피가 계단에 고여 있었다. 청소할 거리가 늘자 급격히 피곤해졌다. 그래도 별수 있나.

피를 닦기 위해 대걸레를 안으로 끌어당기다가 그만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주르륵 쓰러진 대걸레가 계단 아래로 낙하했다.

“아, 진짜….”

일이 꼬이려니 만사가 엉망으로 돌아갔다. 혀를 찬 반은 앞서간 대걸레를 따라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어디에도 스위치가 없어서 부엌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계단을 반쯤 내려오자 한 치 앞도 분간되지 않았다. 어딘지 오싹했으나 이만큼 내려온 이상 안 가는 것도 이상했다. 반은 벽을 짚고 어둠 속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쭉 뻗은 발끝으로 바닥을 확인했다. 계단은 끝나고 판판한 땅이 밟혔다. 팔을 허우적거려 어둠 속에서 대걸레를 건져 내자 어렴풋이 사물을 분간해 내는 눈에 웬 문 하나가 비쳤다.

반은 무심결에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소리 없이 열린 문 너머의 허공을 헤집었더니 길쭉한 줄이 잡혔다. 한 번 툭 당기자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천장에 달린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반은 지하 창고보다 통제실로 불러야 마땅할 공간을 둘러봤다.

“…하.”

길쭉한 책상과 의자 두 개, 낡은 소파로 이루어진 작은 방이었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세 대 있었는데, 두 대는 꺼졌고 한 대는 어두컴컴한 공간을 비추었다.

반은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화면 속을 한눈에 알아봤다. 미셸의 집 지하실이었다. 웨인은 이곳에서 카메라로 자신을 지켜보며 이상한 요구를 했으리라. 이토록 가까이서 감시할 요량이었으면 제게 디아를 맡길 필요도 없지 않나. 이해할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질적인 흔적을 발견했다.

대걸레를 두고 책상 앞으로 다가간 반은 검게 말라붙은 흔적을 손톱으로 긁었다. 바스스 떨어지는 검붉은 가루를 두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검붉은 자국은 책상 중간부터 모니터와 그 너머 벽까지 흩뿌려져 있었다.

앉아 있던 사람을 둔기로 후려쳐 생긴 흔적으로 보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비슷한 흔적은 책상 앞과 통제실 문 쪽에 하나씩 있었다.

반은 고약한 함정에 빠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머릿속이 뒤엉키며 배 속이 울렁거렸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두 구의 시체, 갑자기 나타난 웨인, 미셸의 메시지. 웨인이 단지 그들에게 붙은 돈 따라기 용병이 아닐 것만 같다는 확신.

반은 정신없이 통제실을 뒤졌다. 무언가를 필기할 펜은 있었으나 책상 서랍은 텅 비었고, 신분증이고 옷가지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단서의 전부였다.

반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지하실에서 튀어나왔다. 부엌에 당도하자마자 오븐을 열어 보았지만 이상하리만큼 깔끔했다. 먼지도 없고 재도 없었다. 증거를 인멸하기에 웨인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망할….”

뒷덜미 솜털이 쭈뼛 섰다. 그다음은 본능을 따랐다. 서재로 성큼성큼 들어간 반은 정신을 잃은 웨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디아를 발견했다. 배는 이미 치료가 끝난 상황이었다.

디아는 그 앞에 앉아 자신이 치료한 상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반은 곧장 다가가 디아의 팔뚝을 낚아챘다. 올려다보는 눈에는 여느 때처럼 순수한 믿음이 어렸다.

“나와, 빨리.”

설명을 해 주지 않았음에도 디아는 선뜻 몸을 일으켰다. 반은 서재 문을 닫는 틈을 타 웨인을 흘깃 돌아봤다. 시체를 유기한 장소에서 매일 아침 잘도 러닝하던 살인마의 낯짝을 확인했다. 안색이 창백했으나 숨은 붙어 있었다. 신고해야 할까. 아니다.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공범으로 몰렸다가는 끝이다. 반은 수상하고 위험한 남자를 미련 없이 등졌다.

***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현관은 열려 있었고 내부는 싸움이 벌어진 흔적 없이 깔끔했다. 옆집으로 납치된 지 한 달 만에 익숙한 소파에 주저앉은 반은 풀물이 든 맨발을 내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목격한 것은 많은데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웨인을 저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지, 혹은 디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

“여기.”

문득 디아가 손을 내밀었다. 반은 반사적으로 디아가 내미는 것을 받아 들었다. 웨인에게 감금당하며 빼앗겼던 지갑과 핸드폰 두 대였다. 언제 챙겼는지 모를 정도로 반은 어질어질한 상태였다.

배터리가 완충된 구식 핸드폰을 열어 본 반은 작은 화면에 뜬 날짜를 확인했다. 보고 싶어서 본 것은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눈에 박혔다.

7월 26일.

11시 59분에 멈추었던 시곗바늘이 돌아가며 날짜가 넘어갔다. 7월 27일. 약속한 날까지 하루, 정확히 24시간이 남아 있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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