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3권) (8/19)

아르카디아 3권

<3부>

01.

반은 테이블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혹시 미셸이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싶었지만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쓰나미처럼 덮친 탓에 머릿속이 안개 낀 듯 흐렸다. 결전의 날이 내일로 다가왔으나 오늘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고요한 핸드폰을 내려 둔 반은 곁을 돌아봤다. 지은 죄를 아는지 가만 서 있던 디아와 눈이 마주쳤다. 피가 말라붙은 손을 다소곳이 모으는 디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일어섰다. 2층 가는 계단을 디딘 반은 허무맹랑한 이유로 죄를 지은 디아를 돌아봤다.

“그러고 자게?”

반의 창백한 낯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디아가 족쇄에서 풀려난 듯 한 발자국을 뗐다. 보폭을 키워 다가오는 디아를 데리고 미셸의 방으로 들어선 반은 피로 얼룩진 옷가지를 훌러덩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앞에 선 디아의 눈길이 샤워기를 들고 물 온도를 맞추는 반에게 꽂혔다. 바닥을 디딜 때마다 드러나는 허벅지 안쪽 살결이 거뭇거뭇했다. 검붉게 변한 멍과 잇자국이 무늬처럼 수 놓인 나신에서 어렵사리 눈을 뗀 디아가 옷가지를 벗어 내렸다.

따뜻한 물줄기로 피 묻은 손을 씻어 내던 반은 잘난 몸을 드러낸 채로 붙어 서는 디아를 훑어 내렸다.

“누가 들어오래?”

황당해서 묻자 동그랗게 뜬 눈을 두어 번 깜박인 디아가 시무룩하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표정 하나로 사람 마음 흔드는 데는 선수였다.

“안 건드릴게.”

자기가 건드리면 순순히 내어 줄 줄 아나. 반은 소년의 언행에 기가 막혔지만, 굳이 트집 잡지 않기로 했다.

“…씻기나 해.”

같이 씻을 시기는 한참 전에 끝이 나고, 이제는 불편함의 탈을 쓴 야릇함만 남았지만 현재 반에게는 디아를 쫓아낼 여력이 없었다. 반은 닿을 듯 말 듯 등 뒤에 붙어 서는 디아를 의식할 겨를도 없이 온몸을 뽀득뽀득 닦았다.

소년이 팔을 뻗어 샴푸를 가져가고, 워시를 가져갈 때마다 살결이 가볍게 스쳤다. 반은 디아의 눈길이 목덜미에 꽂힌 줄도 모르고 손톱 밑을 물들인 핏자국을 빼는 데 집중했다. 거품과 뒤섞인 웨인의 피가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동안 목은 계속해서 바싹바싹 탔다.

익숙한 장소에 관계가 바뀐 채로 돌아온 반과 디아는 자연스럽게 한 침대에 누웠다. 머리를 말린 반이 방을 나가려고 하자 슬며시 손목을 잡아챈 디아가 만들어 낸 강제적인 동침이었다. 반은 충분히 내치고 나갈 수 있음에도 소년의 곁에 눕는 것을 택했다. 함께할 시간이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억지를 들어줄 사유로 충분했다.

한 사람 눕기도 빠듯했던 철제 침대와 달리 미셸의 침대는 성인 남자 둘이 누워도 여유가 있을 만큼 넉넉했다. 디아는 너른 침대를 마음껏 쓰지 않고 반에게 붙어 그를 살짝 끌어안았다. 꼭 여기가 작은 철제 침대 위라도 되는 양.

어릴 적이라면 모를까, 성체가 된 디아와 맨살을 맞대고 끌어안는 짓은 꺼림칙했다. 그 밤이 없었더라도 그랬을 터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한 품에 쏙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자란 디아를 안고 있으면 몹시 이상하게도 날뛰는 불안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다만 반의 불안은 진폭이 컸다.

“…괜찮을까.”

“응?”

“웨인 말이야.”

놈이 살인범이라는 심증은 차고 넘친다. 집에 찾아온 시기, 사용 흔적이 있던 식기, 핏방울 같은 자국이 남은 테이블보, 거기다가 결정적으로 지하실 풍경까지 종합해 보면 웨인이 미셸의 조력자들을 살해했음이 분명하다. 놀라 뛰쳐나왔지만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곤란했다. 웨인과 디아의 관계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데다가 둘을 연결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

“안 되겠다. 잠깐 보고 올게.”

이불을 걷고 일어나자 날쌔게 뻗어 온 손이 손목을 붙들었다.

“싫어. 가지 마.”

“보고만 온다니까? 걔 죽었으면 큰일 나, 진짜.”

“안 죽었어. 그러니까 큰일 안 나.”

잡힌 손목을 당겼더니 아예 양팔을 벌려 허리를 끌어안았다. 옆구리에 얼굴을 폭 파묻은 디아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웬 고집이야? 네가 어떻게 아는데?”

“그냥 알아. 가지 마.”

그냥 알기는 무슨. 웨인을 죽였다, 살렸다 제멋대로 떠드는 디아의 팔을 풀고자 했지만 어찌나 단단하게 옭아매는지 이러다가는 늑골이 부러질 것 같았다. 이길 수 없는 생떼에 고전하던 반은 안 갈 테니까 팔에 힘이나 풀라며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너 때문에 못살겠다….”

상체를 도로 침대에 쓰러뜨린 반은 새하얀 천장에 어른거리는 웨인의 몰골을 노려보다가 곁으로 돌아누웠다. 베개를 베고 누운 소년의 머리카락을 살살 넘겨 정리해 주었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꼴 보기 싫었던 놈이 지금은 어째 비밀을 공유한 공범자처럼 느껴졌다. 여러모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놀라운 탈바꿈이기는 했다.

디아는 그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과 투박한 손길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눈을 얄따랗게 휘며 웃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머리카락을 만져 주는 것이 특별한 신호라도 되는 양 눈 깜짝할 새 다가와 입을 맞췄다.

이제는 입술만으로 타인의 입을 벌리는 법을 배운 소년은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고 혀를 밀어 넣었다. 부기가 빠지지 않은 입술이 완전히 포개지고 열이 올랐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뜨거운 살덩이가 반의 혀를 짓누르고 감아올렸다. 반은 저돌적으로 입을 맞추는 소년을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소년의 뺨을 가볍게 감싸고 숨결을 교환했다.

베개 하나를 베고 나누는 키스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현실은 살인마와 돈과 비밀들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 선 디아는 동화 속에 사는 것처럼 순수했다. 아무것도 몰라서 누릴 수 있는 안락은 약간의 파동에도 깨는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키스가 끝나고 감은 눈을 뜨자 풀밭이 펼쳐졌다. 가까이서 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이 동네에서 보기 힘든 색을 담고 있었다.

“안 건드린다며.”

“그런 분위기였는데.”

눈을 깜박인 디아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누굴 닮았는지 뻔드르르하게 말하는 솜씨만 늘었다.

“수작이 자꾸 늘어?”

소년의 도발에도 반은 작게 웃고 말았다. 또 종알종알 실없는 소리나 늘어놓으려는 디아의 입을 막고 눈꺼풀을 쓸어내려 주었다. 죄책감, 책임감, 여타 이상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소년의 눈을 가리자 간지러운 분위기도 사그라들었다.

“자라, 자.”

디아의 입매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쌀쌀맞은 태도가 종적을 감추었음을 눈치챈 소년은 영악하게도 어리광 부리듯 안겨 들었다. 반은 반나절간의 섭섭함을 토로하는 디아를 마주 안아 등을 토닥였다.

묘한 기분이다. 식견 좁은 어린애가 하는 말이려니 하고 넘겼던 지난날의 과오가 오늘날 반의 뒤통수를 쳤다. 거구의 살인마 뱃가죽을 찢어 놓은 순수한 소년은 훈련이 잘못된 개처럼 반을 따랐고, 또 엇나갔다.

마냥 소년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점은, 이 집에서 태어나 한 사람만 보고 살아온 디아의 세상이 어쩌면 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착잡한 가정 때문이다. 한없이 좁고 이기적이고 가벼운 세상. 그것이 무거운 짐처럼 다가왔다. 디아가 제 머릿속을 휘저어 가짜 감정을 만들어 냈다고 한들 반은 껍데기만 자란 소년을 미워할 자신이 없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다 죽어 가는 옆집의 옛 동료와 코앞으로 다가온 의뢰 완수 시기가 숙면을 방해했다. 업어 키운 놈과 몸을 섞은 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은 막막한 현실 앞에서 힘을 잃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디아를 두고 제 방으로 건너간 반은 서랍 속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6월쯤에서 중단한 기록을 찬찬히 읽어 봤다. 일기라고 하기는 짧고, 보고서는 더더욱 아닌 기록은 양이 제법 됐지만 내용은 형편없었다. 한참 디아가 키스에 눈뜬 시기에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써 내린 조각은 글씨마저 괴발개발이었다. 키스 얘기를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에두른 탓에 뜻이 두루뭉술해진 문장들을 눈에 담았다.

귀엽지만 건방지다... 결론: 엄격한 교육이 필요하다. 내일부터는 진짜로!

지키지 못할 다짐을 하며 마음 단단히 먹었던 때가 생각났다. 오늘이 지나면 다짐을 할 일도, 어물쩍 넘어갈 일도 없을 것이다. 속이 다 후련해야 하는데 체한 것처럼 갑갑하기만 했다. 눈가를 문지르며 서류철을 덮은 반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차 키를 발견했다.

차가 낡은 만큼 오래된 티가 나는 키를 쥐자 한 번도 디아를 차에 태워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함께 마트에 가 본 적도 없고, 자전거를 타 본 적도 없다. 그뿐이랴. 밤새워 놀아 본 적도 없고 성체가 된 후 술잔을 기울인 적도 없다.

단지 가둬 놓고 안 되는 일만 줄줄 읊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팔아넘기게 생겼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모자란 양육자인지.

“…짜증 나게.”

왜 이제 와서 못해 준 것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서류철을 뒤적이며 우울해하던 반은 줄곧 잊고 살던 디아의 특수성을 상기했다.

디아는 인간이 아니다. 제 눈으로 확인했고, 웨인과 미셸이 증명했다. ‘그들’이라고 지칭하는 놈들의 목적을 모르는 이상, 아무렇지 않게 웨인을 해친 모습을 목격한 이상 반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반은 디아가 얌전히 숨죽이고 살길 바랐다. 그래야 안전할 테니까. 디아에게도 이롭고 타인에게도 이로운 방법은 인내였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때, 구명줄이나 다름없는 구식 핸드폰이 진동했다. 반은 의뢰 이후 처음 제 손으로 미셸의 전화를 받았다. 새벽 두 시. 무작위로 전화가 걸려 오던 지난날에 비추어 보면 특별한 시각도 아니었다.

“나야!”

반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본인임을 알렸다.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큼직한 목소리에, 인사를 생략한 노인의 반응이 짧은 텀을 두고 쏘아졌다.

- 드디어 제대로 전화 받을 형편이 되나 보지.

비꼬듯 말하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웨인을 앞에 두고 긴장 속에서 몇 마디 주고받던 때를 생략하면 까마득한 기간 만에 편히 하는 통화임에도 미셸은 평소처럼 냉랭했다. 갑자기 친근한 척을 하는 것도 우스웠겠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집에 돌아왔어. 오늘… 이 아니라 어제.”

반은 서류철을 치우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쪽이 운신 못 하는 처지가 돼서 굳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았다고 전하자 흠, 하고 알아들었다는 뜻을 내비친 미셸이 계획을 알려 주었다. 역시나 안부 인사 따위는 없었다.

-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자정쯤에 도착할 거야. 이번에는 멍청하게 굴지 말고.

“내가 멍청한 게 아니고 상황이 그러니까 그런 거지….”

꿍얼꿍얼 변명했지만 미셸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디아의 안위를 거듭 확인하더니 당장 할 일을 지시했다.

- 부엌으로 가 봐.

반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명령에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미셸은 냄비를 보관하는 하부 장을 열어 보라고 했다. 물이 스며 표면이 까진 목재 장을 열자 가지런히 쌓인 냄비가 보였다. 잘 쓰지 않는 주방 도구를 모조리 몰아 둔 서랍을 샅샅이 뒤진 끝에 반은 미셸이 말한 작은 박스를 찾아냈다. 제법 묵직한 상자를 돌려 보며 물었다.

“이게 뭔데? 무슨 병인데….”

박스 안에는 병원에서나 볼 법한 투명한 약병이 들어 있었다. 미셸은 거리낌 없이 답했다.

- 동물 마취제. 설명서 들었으니 읽어 보고.

박스의 의미를 알아차린 반은 기가 막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애를 재우라고?”

- 그럼 무슨 수로 제 발로 걸어 나오게 할 건데?

미셸은 어디 들어나 보자는 식으로 응? 하고 되물었다. 반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디아는 한 치도 자신과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널 팔아넘길 예정이니 차에 올라타 달라고 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만큼 바보도 아니다.

디아를 보낼 심산이라면 내키지 않아도 재우는 것이 옳았다. 미셸은 반에게 그럴듯한 방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덧붙였다.

- 잘 재워서 넘겨주면 전부 끝나. 보수는 그때.

신경질적으로 박스를 닫은 반은 지금이 바로 고개 드는 궁금증을 꺼내 놓을 시기라고 느꼈다. 웨인과 대화한 후로 늘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던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망설임이 길었다.

“그…. 거기 뭐 하는 덴데?”

- 정확하게 말해.

미셸은 요점을 흐리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반은 당신이 일하는 곳이 극악무도한 실험실이냐고 직설적으로 묻는 대신 해석의 여지가 많은 질문을 던졌다.

“거기 가면 디아 안전하냐고.”

- 중요한 표본이야. 네가 데리고 있는 것보다 안전한 건 확실해.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대답은 질문과 비슷한 모호함을 띠고 있었다. 반은 미간을 찌푸리며 박스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웨인이 거짓말을 했을까. 그럴 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린 눈가를 쓸어내리다가 무심코 통화를 마무리하려는 미셸을 불렀다. 정적이 도는 가운데, 입이 저절로 열리더니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나중에, 그…. 나도 만날 수 있나?”

건너편은 묵묵부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답이 됐다. 제 입에서 나온 질문에 소스라치게 놀란 반은 황급히 주의를 돌렸다.

“아냐. 알았어. 여튼… 내일, 어.”

횡설수설하며 말실수를 무마하던 때, 미셸이 1년, 아니, 몇 년 만에 이름을 불렀다.

- 반.

“왜.”

언뜻 놀란 반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미셸은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어딘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 실수하지 말고.

목적을 달성한 전화는 잡담 없이 끊겼다. 반은 배터리가 달아오른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기묘한 표정이 됐다. 미셸이 하려던 말이 ‘실수하지 마’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외에 제게 할 만한 말이 따로 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반은 찝찝함을 무시하고 폴더를 닫았다.

하부 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다리를 쭉 뻗자 온몸에 깃든 피로가 더욱 무거워졌다. 새벽 세 시가 되기까지 20여 분. 재설정된 카운트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21시간, 20시간, 19시간….

***

9:00.

겉잠에서 깨어난 반은 디아를 해괴한 것 보듯 바라봤다. 일어나자마자 깨끗하게 씻었는지 상쾌한 향을 풍기는 소년이 방싯 웃었다. 부스스한 몰골로 마주 보기 죄스러운 외양이었다. 간밤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새벽녘이 밝아 올 때쯤 기절하듯 눈을 붙였던 반은 소년이 든 트레이를 가리키며 눈빛으로 물었다. 디아는 반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듬어 주며 간결히 대꾸했다.

“편하게 먹어.”

“…너 이거 영화에서 봤지.”

손을 떨어뜨린 디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동해 둔 빵을 데워 만든 토스트, 진하게 내린 커피 한 잔, 통조림에서 건진 파인애플. 집을 비운 한 달간 살아남은 식재료가 없어 메뉴는 평범했지만, 상황이 낯부끄러웠다.

아침 식사는 대령만 해 봤지, 받아 본 적 없는 반은 흔해 빠진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기분을 느끼면서 겸연쩍게 목덜미를 긁었다. 민망함에 눈치를 살피다가 커피 잔에 손을 댔다.

저렇게 쳐다보는데 안 먹기도 그랬다.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고 맛있네, 하자 디아는 자기도 먹여 달라는 듯 입을 예쁘게 벌렸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먹여 주긴 했다. 참고로 침대 위 아침 식사는 끔찍하게 불편했다.

13:00.

“산책 갈래?”

이미 끝까지 읽은 책을 뒤적거리던 디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산책 가자는 말만을 기다려 온 개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토록 반길 줄은 몰랐던지라 반은 멋쩍게 웃었다. 나갈 기회가 많았음에도 가둬 두기만 했던 지난날이 살짝 미안해졌다.

그러나 디아는 기뻐하면서도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들뜬 표정은 순식간에 빈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럴 만도 했다. 비치 타월 두 장을 들어 보인 반은 아쉽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가기 싫음 말고.”

“…나가도 돼?”

“뭐, 감시하던 놈도 처리했고.”

어떻게 할래?

어깨를 으쓱이자 손수 감시자를 처리한 디아가 활짝 웃으며 책을 내던졌다. 기껏 깔끔하게 청소한 바닥에 책이 널브러졌다. 쥐고 있던 걸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는 버릇은 언제 고쳐지려나 모르겠다. 반은 다가오는 디아를 희미한 미소로 반겼다.

처음 산책하러 나갔을 때에 비해 한결 온화해진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정수리를 달구어야 할 뙤약볕은 사시사철 마을을 둘러싼 구름에 막혀 연약한 온기만을 내려보냈다.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바람을 맞던 디아는 느리게 나아가는 반의 곁에 바투 붙어 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로의 손끝이 살짝살짝 스쳤다.

목적지는 호숫가였다. 폴리스 라인이 사라진 숲으로 들어가자 습한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었다. 반은 달라진 시야로 숲을 둘러보는 디아의 팔꿈치를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나무뿌리가 발을 잡아챌 수 있어 헛디디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더는 돌봐 줄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절로 움직였다.

마침내 다다른 호숫가는 여느 때처럼 고요했다. 구름 틈새로 새어 나온 햇볕이 물안개 걷힌 수면에 닿아 반짝반짝 빛났다. 드물게 맑은 호숫가를 둘러보다가 낡은 부두로 향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발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부두를 딛고 신발을 벗자 굳은살 박인 발바닥에 나뭇결이 스쳤다.

반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디아가 그를 따라 했다. 벗은 슬리퍼를 맨발로 밀어 가지런히 두는 디아를 살핀 반은 이어서 티셔츠를 벗었다. 바지까지 벗자 따스한 바람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달라붙는 속옷만 입은 채로 팔을 쭉 뻗어 스트레칭하는데, 곁에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왜?”

“너무 이른데…. 아직 밝고.”

디아가 제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뺨이 발그스레했다.

“뭐래.”

헛웃음을 터트린 반은 팔을 툭 털어 내고는 짧은 부두를 달려 나갔다. 부식된 끄트머리를 밟고 도약했다. 몸뚱이는 빠른 속도로 추락해 수면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물보라가 일며 서늘한 물결이 전신을 휘감았다.

호수 밑바닥까지 내려간 반은 모래밭을 발끝으로 박차고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부두를 짚자 놀란 디아가 눈을 끔벅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가까이 다가와 몸을 낮춘 소년이 젖은 뺨을 매만졌다.

“난 또.”

“또, 뭐?”

“나 보라고 벗는 줄 알았지.”

디아는 종종 할 말과 못 할 말을 구분 못 했다. 반은 소년의 표정에서 고의성을 찾으려다가 포기했다. 디아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매몰차게 굴 때는 눈치 봐서 자중하더니 그새를 못 참고 입을 마음대로 나불대는 디아의 손을 떨어뜨렸다.

“내가 왜 너 보라고 벗냐? 너도 얼른 옷 벗고 들어와. 시원해.”

몸을 일으킨 디아가 셔츠 단추를 풀면서 물었다.

“그럼 누구 보여 줄 건데?”

“뭐…. 너 빼고 다?”

“반은 그 버릇 고치는 게 좋겠다.”

가벼운 대꾸를 건방지게 받아친 디아가 셔츠와 바지를 부두에 떨어뜨렸다. 혈색 없이 창백한 나신은 볼품없기는커녕 완벽한 형태를 햇살 아래 드러냈다. 이상적인 대리석 조각처럼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는 육체에 시선을 꽂은 반은 접은 팔을 쭉 뻗어 목까지 꼬르륵 가라앉았다.

디아의 밭은 호흡과 숨 쉬는 것만으로도 폐에 습기가 차오르던 공기, 흔들리던 로켓이 불시에 떠오르며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 쓸데없는 생각이다.

눈을 내리깐 사이, 늘씬한 자태로 뒤돌아선 디아가 몇 발자국 뒤에서부터 뛰어왔다. 상념에 빠져 있던 반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디아, 잠깐만!”

디아는 반이 그랬던 것처럼 단번에 호수로 뛰어들었다. 거센 물보라가 일어 시야를 가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반은 재빨리 디아가 빠진 곳으로 헤엄쳤다. 수영은 난생처음일 텐데 어쩌자고 냅다 달려든 건지 모르겠다.

바닥에 발이 아슬아슬하게 닿는 수위지만 무릎 높이의 물에서도 빠져 죽는 사고는 빈번했다.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부근에 다다라 잠수하려던 때, 조그마한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젖은 금발을 이마 뒤로 넘긴 디아가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재밌다!”

둥그렇게 휘어지는 눈과 부푼 뺨이 어릴 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놀란 마음을 삼킨 반은 디아의 등짝을 철썩 내리쳤다.

“내가 잠깐이라고 했어, 안 했어? 누가 마음대로 뛰래, 어?”

“반이 이렇게 했으니까 나도 해야지.”

등짝을 맞고도 헤실헤실 웃으며 잘도 둘러대던 디아가 호수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숲과 숲의 경계에 자리한 호수는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드넓었다. 그만큼 깊기도 해서 조금만 멀리 나아가면 삽시간에 머리를 집어삼켰다. 그런고로 반대편 숲까지는 못 가더라도 호수 구경은 제대로 시켜 주고 싶었다. 반은 디아의 새하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 주며 물었다.

“수영할 줄 알아?”

“음…. 아마도.”

“아마도는 뭐야.”

“반이 할 줄 아니까 나도 할 수 있을걸.”

또 그 소리였다. 반은 넘치도록 확인한 디아의 능력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자세를 잡았다.

“네가 수영도 잘하나 보자.”

약 올리듯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 반은 신호도 없이 바닥을 박차고 나아갔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었다. 칸쿤을 떠난 이후 접할 일 없던 깊은 물이 갈등을 씻어 냈다. 숨을 참고 갈 수 있는 만큼 깊이 들어갔다. 더는 발이 닿지 않는 자리에 멈춰 부둣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상쾌하게 피어난 미소는 텅 빈 부둣가를 발견하고 스르륵 사라졌다.

“…디아?”

어디 갔지?

설마 빠졌나 싶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단단한 힘이 발목을 잡아챘다. 아차 하는 새 물속으로 끌려들어 간 반은 소리 없는 습격을 받았다. 발장구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게 따라온 디아가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를 부딪쳤다.

반응 속도가 느려진 팔다리가 물을 휘적휘적 내젓다가 엉겨 드는 소년을 마주 안았다. 호수 바닥까지 가라앉은 디아는 반을 안은 채로 이끼 낀 바위를 박찼다.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반은 폭삭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디아는 부둣가를 향해 헤엄치며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아이처럼 웃었다.

“어때. 잘하지?”

“어. 좀 짜증 나게.”

“왜 짜증 나? 네 건데.”

나 참. 물에 둥둥 뜬 채로 끌려가며 반은 코웃음 쳤다. 오늘따라 건방지게 구는데, 당장 매몰차게 대해 볼까 하다가 관뒀다. 풀 죽은 디아의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양심을 쿡쿡 찔러 댔으니까. 반은 슬슬 발뒤꿈치에 닿는 호수 바닥을 느끼며 성의 없이 되받아쳤다.

“너무 적극적이면 매력 없다.”

“매력 없다는 소리 처음 들어 보는데.”

디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반은 디아의 팔에서 벗어나며 장난스럽게 빈정거렸다.

“매력 있다는 소리는 들어 봤고?”

“그건 아니지만….”

부두를 짚고 몸을 끌어 올린 디아가 샐쭉 웃으며 덧붙였다.

“내가 예쁜 건 잘 알지.”

차르르 쏟아진 물보라가 이마로, 눈두덩이로 튀었다. 반은 물 젖은 나신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집어삼켰다. 뻔뻔하기도 해라. 맞는 말이라 반박도 못 하겠다. 자화자찬하는 버릇까지 베이비시터를 쏙 빼닮은 디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반이 나 좋아하는 거고.”

“아…. 그래?”

“그래.”

혼자 소설을 쓰는 디아의 손을 잡고 부두로 올라섰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허리를 받쳐 주는 손을 굳이 떨쳐 내지 않았다. 바싹 말라 바스러질 것 같던 부두가 습기를 머금었다. 반은 디아와 함께 걸음을 옮기며 젖은 머리칼을 털었다.

“어떡하냐. 큰일 났네.”

디아는 큰일이 전혀 없는 목소리로 받아치는 반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출발선에 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두를 딛고 다시 호수로 달려들었다. 웨인을 그따위로 만들어 놓고 이렇게 노는 것도, 웃을 수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수영을 즐겼다. 정수리 위에 떠 있던 해가 숲 저편으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부두에 드러누워 햇살을 받다가도 몸이 뜨끈뜨끈해지면 호수로 뛰어들었다. 도망가고 잡으러 가는 유치하지만 고전적인 게임도 몇 판 했다.

한동안은 뒤처지더니 어느새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앞으로 치고 나가는 디아를 허탈한 눈으로 바라보던 반의 뱃가죽이 등에 붙을 즈음 호수에서 나와 물기를 닦았다. 디아는 활동적인 여가가 더없이 마음에 든다는 듯 내내 햇살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반은 본인이 취하는 태도가 상당히 미적지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냉정하게 선을 긋는 것도, 그렇다고 흔쾌히 받아 주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가 스스로도 부끄러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실타래를 풀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짧았다. 반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옷을 집어 드는 디아를 흘끔거리며 간지러움이 피어나는 팔뚝을 문질렀다. 모르겠다, 정말.

22:00.

플로어 스탠드에서 번지는 빛이 거실을 희미하게 밝혔다. 소파에 기댄 반은 무릎을 베고 누운 디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 시간에 달하는 수영과 통조림으로 이루어진 저녁 식사를 마치자 이제 어리광을 부릴 시간이라도 된 건지, 디아는 남의 무릎이 제 것이라도 되는 양 뻔뻔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반은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늘어진 디아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떠날 거야.”

“어디로?”

“어디든.”

‘언젠가 끝내주게 좋은 차를 살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진지하지 않은 투였다. 반듯하게 돌아누운 디아는 의외로 미소가 없는 반을 올려다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어디든’이 아니지. 성에 살기로 했잖아.”

웬 성, 하고 묻는 듯한 반의 표정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디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기억 안 나는 건 아니지?”

장난스럽지만 뼈가 있는 물음을 받은 반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옛 기억을 찾아냈다. 힌트를 잡았으니 이제 너스레를 떨 차례였다.

“기억 안 날 리가. 성 좋지. 가끔은 고전적으로 살아 보고 싶었어.”

“타히티는? 우리 허니문.”

“앞서가지 말고.”

무표정한 낯으로 헛소리하는 디아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아야, 하며 엄살을 부린 디아가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얄밉기는 해도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쥔 반은 소년의 소망에 적당히 맞장구쳤다.

“뭐. 여권부터 만들어야겠네. 어떻게 만들지? 어떻게 만들어야 이 예쁜 얼굴이 다 담기지?”

키득거리는 디아를 붙잡고 한참이나 칭찬을 쏟아부었다. 달콤한 칭찬에 절여진 디아는 남은 웃음을 툭툭 터트리다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누가 봐도 졸린 얼굴이었다. 호수를 몇 바퀴나 돈 여파가 이제야 덮친 듯했다.

반면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한 반은 작게 하품하는 디아를 얼렀다. 피곤하면 자도 된다고 하자 녹음이 푸르른 눈이 반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런데 반.”

“응?”

“왜 그렇게 불안해?”

“…나? 내가?”

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코 미간을 찌푸린 반은 불안한 기색을 보인 적 있나 고민하다가 답을 찾았다. 그놈의 숙주. 어쩐지 통 잠을 안 자고 버틴다 했다.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반은 긴 숨을 내쉬며 디아의 동글동글한 코끝을 꼬집었다.

“네가 너무 들러붙어서.”

기다려 봐, 하고 일어선 반은 부엌으로 들어가 물 한 잔을 데웠다. 우유면 더 좋으련만 냉장고 속 우유는 유통 기한이 지난 지 오래였다. 차를 내리는 동안 서랍을 열어 챙겨 둔 약병을 쥐었다. 동봉된 매뉴얼을 한 차례 더 읽어 보다가 싱크대를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었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었다. 돈보다 값진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디아의 존재가 몰상식한 가치관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천하의 못된 놈이 되어도 지갑만 두툼해진다면 상관없다고 여겨 왔던 반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다가 머그잔을 들었다.

거실로 나가자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디아가 조용한 미소를 보냈다. 머그잔을 받아 든 디아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들여다보았다. 씁쓰름한 향기를 맡는다기에는 미동이 없었다. 반은 마른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녹색으로 우러난 차를 바라보던 디아가 마침내 컵 모서리에 입술을 댔다.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신 디아는 곁에 앉은 반의 어깨에 기댔다.

“타히티 언제 갈까? 빨리 가고 싶은데.”

“열 밤 자고 그때 가자.”

“와…. 성의 없어.”

반은 토라진 듯 중얼대면서도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는 디아의 손을 꼭 쥐었다. 하나둘 얽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매만지며 디아가 차를 비우길 기다렸다.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며 한 모금, 두 모금 들이켠 디아가 빈 머그잔을 내려 두었다. 눈꺼풀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더뎌졌다. 소년은 이내 미끄러지듯 무너져 무릎을 베고 누웠다.

“조금만 잘게.”

“잘 자.”

“어디 가지 마.”

“갈 데도 없다.”

“눈 떴을 때 바로 보여야 돼….”

디아의 뺨을 쓸어 주던 손길이 잠시 멎었다. 예민한 소년이 감은 눈을 떴다. 반은 목구멍으로 치고 올라오는 이상한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럴게.”

불그스름한 입술로 미소를 지은 디아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이제 깊은 잠이 내릴 차례였다.

까무룩 잠든 디아는 몸을 흔들어도, 이름을 불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시체처럼 늘어져 느린 호흡을 하는 모습은 적잖이 충격적이라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소파 아래에 주저앉은 반은 생기가 사라진 디아를 매만지다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가락 틈새로 끝없는 한숨이 흘렀다. 숨을 한껏 참았다가 깊은숨을 내쉬며 손바닥을 내린 반은 잠든 디아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목덜미에 코를 묻자 쿵쾅대던 심장 박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반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디아는 반쯤 성공했다. 그 얼굴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싶게 홀라당 홀리지는 못했지만, 가끔 입 맞추고픈 충동을 일으킬 만큼은 꾀는 데 성공했다.

호수에서 디아가 은근슬쩍 고개를 기울여 왔을 때, 잠시나마 어울려 줄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디아가 노래 부르는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부성애를 성욕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고, 디아가 제 머릿속을 헤집은 탓일 수도 있었다. 제 손으로 탄생시킨 아이를 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무래도 말이 안 되는 얘기였으니.

만에 하나 호감에 가까운 감정이 가짜가 아니라고 해도… 반은 자신이 없다. 디아의 정체성과 디아가 가져올 예측도 안 되는 변수가 두려웠다. 미셸은 디아의 존재가 대단한 비밀인 양 첩보 작전을 펼쳤고, 지금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웨인은 디아를 가로채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디아를 데리고 도망간다고 치자. 더 크고 위험한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말 못 하게 높았다. 디아는 인간이 아니며,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타인에게 떠넘기는 것이 옳은데….

반은 곤히 잠든 디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

송곳으로 뇌를 들쑤시는 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한순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그악한 고통이었다.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끙끙대던 반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디아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소년을 들여다보자 달군 냄비 안에 들어온 듯 급작스럽게 조급해졌다.

이게 맞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물음표 가득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비틀비틀 일어난 반은 대뜸 창고에서 큼직한 더플백과 백팩을 가지고 나왔다. 그는 이제 까마득한 과거의 한 장소로 느껴지는 지하실을 향해 막힘없이 내려갔다. 가방 입구를 크게 벌리고 먼지 쌓인 선금을 모조리 집어넣었다.

단 한 장도 빠짐없이 챙긴 반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 나갈 채비를 했다. 구석에 내던져 두었던 차 키를 챙기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반. 약속된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소파로 다가간 반은 늘어진 디아를 흔들었다.

“디아. 디아, 일어나 봐. 어?”

뺨을 툭툭 때리고 상체를 강제로 일으켜도 몇 차례 확인한 대로 디아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축 늘어진 디아의 허리를 안은 반은 연달아 덮치는 두통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손바닥 뒤집듯이 훌떡훌떡 바뀌는 감정을 이성적으로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반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사람도 아닌 놈, 기껏 키워 줬더니 음흉한 생각이나 하는 놈은 내다 버려야 마땅한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오기가 샘솟았다. 금으로 도배한 수영장이 없으면 어떠하랴. 이 정도 선금이면 당분간 먹고사는 데 아무런 지장 없다. 디아가 중요한 연구 자료든, 나라에서 쫓는 몸이든, 당장은 넘겨줄 수 없었다.

양심이 있다면 난생처음 수영을 하고 웃던 소년을, 눈떴을 때 제가 바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소년을 어떻게 팔아넘기겠는가. 웨인도 미셸도 믿을 수 없다. 다행히도 반에게는 책임감이고 신의고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두통이 한차례 휩쓸고 간 머릿속에 간단한 결론이 세워졌다. 그냥 튀자.

반은 사지가 늘어져 더욱 무거워진 디아를 안고 허리를 세웠다.

“흡…!”

호흡이 턱 막힐 정도로 묵직한 몸을 들자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어깨에 돈 가방을 주렁주렁 둘러매고 디아를 안아 든 반은 얼빠진 얼굴로 현관을 돌아봤다. 예정된 시각보다 훨씬 빠른 방문이었다.

“반 클라크 씨.”

쿵쿵쿵,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생소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연구소 쪽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답하지 않자 초인종을 한 번 더 누른 상대가 기대를 무너뜨렸다.

“아르카디아를 찾으러 왔습니다.”

“씨….”

반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없는 척은 불가능했다. 아래로 처지는 디아를 추어올린 반은 급히 창고 방으로 들어갔다. 베란다에서 차고로 향하는 길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며 디아를 조심스럽게 내려 두었다.

뻐근한 허리를 두드릴 새도 없이 창을 살짝 열고 동태를 확인했다. 어둠이 내린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은 초인종을 연달아 누르고 문을 두들기는 인기척에 쫓기면서 돈 가방을 정원에 내던지고 디아를 다시 안아 들었다.

이를 악물고 디아를 정원에 떨어뜨린 반은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펜스를 짚고 뛰어넘었다. 소리 없이 착지한 후 떨어진 가방을 챙기며 이런 소동에도 눈 한 번 뜨지 않는 디아를 흘끔거렸다. 이렇게 빨리 바뀔 결심이었으면 재우지 말걸. 뒤늦게 후회해도 방도가 없었다.

잠자는 왕자님이 된 디아를 재차 안아 올리려던 때, 눈을 멀게 하는 플래시가 쏘아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가린 반은 풀밭을 사박사박 밟는 발소리가 한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조용히 끝내겠다는 듯 낮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손 들고 물러나.”

총구 끝에 달린 전술 조명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눈을 채 뜨지도 못한 반은 언뜻 봐도 잘 훈련된 군인 다섯을 맞닥뜨렸다. 사고 회로가 멈췄다. 반은 천천히 디아에게서 손을 거두고 양 손바닥을 펴 들었다.

신호를 주고받은 군인 둘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디아 쪽으로 손이 갔다. 총구 안전장치가 풀리는 철커덕 소리가 들려와도 반은 디아의 어깨를 끌어안고 놓지 못했다. 놓아야 함에도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반은 점차 거리를 좁혀 오는 군인들을 휘휘 둘러보며 의식 없는 디아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디아…. 일어나 봐. 디아.”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 무엇일까. 아니, 빠져나갈 수 있기는 한가? 오늘 아침, 혹은 어제 당장 도망쳤다면 지금쯤 빠져나갔을까. 순순히 넘겨주고 돈만 받아 챙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다짐은 종적을 감추고, 디아에게 던진 지키지 못할 공수표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뒹구는 돈 가방은 안중에도 없이 디아를 품 안에 감추려던 반은 당연한 수순으로 끌려갔다. 뒷덜미를 잡혀 바닥에 메다 꽂히고 두 손이 허리 뒤에 묶였음에도 저항은 계속됐다.

“디아! 아, 좀…! 잠시만…. 야, 디아!”

목이 터져라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압당한 반은 디아의 곁에 놓이는 큼직한 운송 상자를 두 눈 뻔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직사각형 나무 상자는 얼핏 관처럼 보였다. 이런 일을 여러 번 해 본 듯 군인 둘이 순식간에 디아를 상자 속으로 옮겼다. 잠에서 깨어난다 한들 꼼짝할 수 없도록 사지를 구속하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이내 세상모르고 잠든 소년의 조각 같은 얼굴 위로 천이 덮이고, 사이사이로 충전재가 들어갔다. 꼼꼼하게 디아를 포장한 군인은 상자를 닫아 걸쇠를 채웠다.

가죽으로 된 벨트 세 개로 나무 상자를 단단히 조이는 모습까지 목격한 반은 손목을 비틀어 제압하던 군인 밑에서 빠져나왔다. 뼈가 엇나가는 느낌이 났다. 미친 짓이라는 걸 분명 아는데, 이랬다가는 돈이고 뭐고 무용지물이 되는 걸 알고 있는데, 후들거리는 사지가 그를 디아에게 향하게 했다.

그러나 짧은 바람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손이 입을 틀어막고, 발버둥 칠 틈도 없이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목덜미를 꿰뚫었다.

“읍…!”

어깨를 들썩이며 사지를 비틀었으나 돌아온 것은 어찔한 현기증이었다.

머리가 핑 돌더니 곧장 귀가 먹었다. 의식은 그대로였으나 온 근육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사이 빠르게 옮겨지는 상자가 감기는 눈꺼풀 너머로 설핏설핏 보였다.

디아. 반은 근육이 풀려 제멋대로 벌어지는 입술 안으로 소리가 되지 못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소년을 빼앗아 가는 장면을 코앞에서 똑똑히 목격한 두 눈에 핏발이 섰다. 포박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추를 단 듯 무거운 눈꺼풀이 굳게 내리 감겼다.

***

더웠다. 아니, 뜨거웠다. 사방이 지글지글 끓었다. 공기가 끓고, 살갗이 끓었다. 폐가 데다 못해 타 버릴 것 같은 뜨거움 속에서 반은 눈을 떴다. 망막에 비닐이 한 겹 덮인 듯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시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새빨갛고 한들한들한 어떠한… 불길이었다. 피부가 시시각각 뜨거워졌다. 움직여야 했다.

“으윽…. 큭….”

그러나 손은, 팔은 반의 의지를 배반하고 끈 떨어진 인형 팔처럼 휘적휘적 나부꼈다. 제 수족이 쓸모없는 살덩어리처럼 느껴졌다. 근육이 죄 녹아내린 듯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은 성대도 마찬가지였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짐승이 앓는 듯한 소리만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뺨에 짓눌린 잔디가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손가락 끝을 꿈질거리자 몽롱하게 녹은 근육이 한발 늦게 의지를 따라왔다. 반은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였다. 눈알에 씐 흐린 껍질이 서서히 걷힌 순간, 눈이 크게 뜨였다. 집이 불타고 있었다.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반의 일부분임은 분명한 유년기가 오롯이 담긴 집이 새빨간 불길에 휩싸였다.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깨져 나간 창문으로 시꺼먼 연기와 뱀의 혀 같은 불꽃이 치솟았다.

정원 끝자락에 널브러진 반은 활활 불타오르는 집을 허망하게 지켜보다가 현관 근처에 떨어진 가방을 발견했다. 화분과 덩굴을 타고 온 불길이 가방에 옮겨붙었다. 그 순간 몇 시간 전의 기억이 반의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한 뼘도 나아가지 못하고 엎어졌다. 주사된 약이 여전히 혈관에 고여 있었다.

“흐읍….”

감당키 힘든 중력을 짊어진 반은 생리적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앞으로 기었다. 마침내 뜨거운 열기가 맴도는 현관 앞에 다다라 가방끈을 잡아당겼으나 달라붙은 불길은 쉽게 꺼뜨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떨리는 손으로 지퍼를 찢듯이 열어 남은 지폐를 황급히 꺼내자 피부가 불그스름하게 익었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정신없이 불길 속에 손을 집어넣었지만 건져 낼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지폐를 가득가득 채운 가방 하나는 이미 불쏘시개가 되어 현관을 불태우는 중이었고, 남은 것마저 재가 되어 스러졌다.

피부가 모조리 익을 것 같은 열기를 피할 기력은 사라지고, 허망하게 사라진 선금만이 눈앞을 물들였다. 반은 붉어진 두 손에 몇 장 남지 않은 지폐 다발을 움켜쥔 채로 생각하기를 멈추었다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디아. 디아는 어디 있지?

가장 중요한 것을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시선이 절로 옆집으로 향했다. 기름으로 길을 내어 둔 듯, 정원을 가로지른 불길이 옆집에 옮겨붙는 중이었다. 반은 철옹성 같은 벽돌집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응시하며 웨인을 떠올렸다. 웨인이라면 디아가 끌려가기 전에 막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운신 못 할 정도로 다쳤다는 사실을 잊은 반은 기다시피 옆집으로 향했다. 무릎이 몇 번이고 꺾여 나동그라지면서도 휘청휘청 옆집에 도착한 반은 현관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멀찍이 날아갔다.

귀가 멀 듯한 폭발음이 연이어 공기를 찢고 사방의 창이 깨져 나갔다. 폭발하듯 터져 나온 화염에 떠밀려 메마른 정원을 데굴데굴 구른 반은 덮쳐 온 이명 속에서 사지를 꿈틀거렸다.

“허윽…. 큭…!”

일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줄기가 눈꺼풀을 적셨다. 떨어져 나간 듯한 귀와 이마를 더듬더듬 만지는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황폐한 정원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눈을 들어 올린 반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집 두 채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봤다. 거센 불길에서 흔적도 없이 뭉개 버리겠다는 집요한 의지가 드러났다.

폭발이 만들어 낸 뜨거운 바람결에 타다 만 지폐가 휘날렸다. 잠시간의 욕심으로 모든 것을 빼앗긴 반은 어떤 계획도, 생각도 없이 스러지는 디아의 흔적을 응시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검은 연기 가득한 밤하늘을 찢어발길 듯 울려 퍼졌다.

***

눈을 뜬 디아가 처음 맞닥뜨린 것은 새파랗게까지 느껴지는 빛이었다. 내리쬐는 빛이 일시적으로 시각을 앗아 갔다. 지하실에서 보던 천장과 비슷했지만, 범위가 좁고 보다 강렬했다.

반쯤 뜬 눈을 느리게 끔벅인 디아는 점차 희미하게 나타나는 형상을 가만 바라봤다. 호수 깊이 잠겼을 때처럼 먹먹해진 귓구멍으로 삑, 삑, 삑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 틈으로 생소한 목소리가 뜨문뜨문 뒤섞였다.

“…상, 다음…. 정상. 차이는….”

눈을 몇 번 깜박이자 덩어리로 보이던 것이 형체를 잡아 갔다. 희뿌연 사람의 형상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흐릿한 실루엣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으나 무언가 코와 입을 한데 덮고 있었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풍성한 속눈썹을 다시 한번 내려 앉혔다가 들어 올린 디아는 눈꼬리가 처져 유순한 인상을 주는 눈과 마주쳤다. 반의 것과 선이 흡사했으나 그 속에 든 눈동자는 딴판이었다. 따스하지도, 장난기가 묻어나지도 않았다. 푸르스름한 마스크로 얼굴 절반을 가린 노인은 반과 닮은 눈매를 찌푸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똑바로 재워.”

몽롱한 감각이 짙어졌다. 속눈썹이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며 새하얀 빛이 저물었다. 의식 저편으로 가라앉는 디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 의문뿐이었다. 눈떴을 때 바로 보이겠다고 약속한 반은 어디 갔느냐고.

눈을 뜬 디아가 두 번째로 맞닥뜨린 것은 새하얗고 네모난 방이었다. 막힌 부분 없이 뻥 뚫린 정사각형 공간에 자리한 1인용 철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세우자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잠들 때까지만 해도 귓불을 간지럽혔던 머리카락 끝이 쇄골 부근에서 살랑거렸다.

급작스럽게 자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디아는 팔목에 점점이 남은 주사 자국을 발견했다. 아물어 가는 흉터가 낯설었다. 단계를 뛰어넘는 성장이 아니라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였다.

희미한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 시릴 정도로 새하얀 벽을 타고 올라가자 코너마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침대와 마주 보는 커다란 벽에 널찍한 창이 트여 있었으나 유리 표면에 반사되는 것은 침대에 앉아 있는 디아 자신뿐이었다.

촬영 중이라는 것을 알리듯 깜박이는 불빛과 거울 같은 창을 번갈아 응시하던 디아가 캄캄하게 잠긴 목소리를 냈다.

“…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인기척은커녕 일상적인 소음조차 없는 완전한 적막이 방을 휘감았다. 디아는 목청을 키워 다시 불렀다.

“반?”

고운 미간에 금이 갔다. 늘 주변을 맴돌던 반의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각이 무뎌진 발바닥으로 미지근한 바닥을 툭툭 짓밟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냅다 몰려든 어지럼은 금방 가셨다.

버석거리는 천으로 만들어진 밋밋한 상의와 하의를 내려다본 디아는 언젠가 반이 넌 어떻게 여기도 예쁘게 생겼냐며 칭찬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얀 발가락에 감각이 어느 정도 돌아왔을 즈음 걸음을 뗐다.

벽을 손가락 끝으로 쓸며 태어난 유리 벽 안쪽과 비슷한 크기의 방을 둘러보았다. 미세한 틈이 그어진 곳을 확인하자 벽과 분간키 힘든 문이 하나 있었다. 다만 손잡이가 없고 아랫부분에 직사각형의 홈이 있었다. 디아는 천천히 걸어 유리창을 쓸어 보았다. 비치는 것은 무표정한 자신뿐이었지만 이 너머에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길쭉한 손가락을 모아 주먹을 쥔 디아는 유리창을 세게 내리쳤다. 텅, 소리가 났지만 갈라지진 않았다. 두께가 상당한 유리창을 몇 번 더 두드려 보다가 손을 떨어뜨렸다. 그 외에 따로 특별한 구석이 없는 방을 둥글게 돌아본 디아는 깨어났을 때처럼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때야 목이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이 선물한 목걸이가 없었다. 씻을 때도, 잘 때도, 모든 생활 속에서 함께했던 목걸이가 사라진 목을 매만지다가 목 뒤에 붙은 반창고를 발견했다. 피부에 착 달라붙은 반창고를 떼어 보이지 않는 곳을 만지자 살을 봉합해 놓은 감촉이 느껴졌다.

아직 실밥을 풀지 않은 상처를 만지작거리다가 검지를 밀어 넣었다. 손톱이 덜 아문 상처를 파고들자 뒷덜미가 오싹해지는 통증이 덮쳤다. 한 겹 피부 아래 뜨끈하고 눅눅한 살점이 손톱에 눌리면서 실밥이 뜯어졌다. 흘러내린 핏줄기가 하얀 옷을 적셨으나 디아의 낯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마침내 손톱이 딱딱한 것에 닿고 흘러내린 피가 등 부근을 적실 무렵, 침대 밑에서부터 새하얀 가스가 흘러나왔다. 쉬이익 새어 나오는 연기가 발목을 집어삼켰지만 디아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근육에 박힌 딱딱한 것을 꺼내려는 찰나 상체가 무너져내렸다. 맥없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디아는 피 칠갑이 된 오른손이 까맣게 점멸하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가스를 들이마시며 든 생각은 하나였다.

아. 반이 목걸이 떨어뜨리지 말라고 했는데.

***

모든 로맨스에는 시련이 필요하다. 보편적으로 가문의 반대, 신분 차이, 부의 격차 등이 있으며 가볍게는 오해와 착각에서 벌어지는 시련이 있다. 반이 보여 준 수많은 로맨스 영화를 데이터 삼아 디아는 골똘히 생각했다. 이 상황은 반이 자신을 시험하려고 내어 준 시련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상처를 헤집은 날 이후 목을 꽁꽁 싸맨 가죽 초커를 매만지며 내린 결론이다. 허점투성이였지만 디아는 다른 경우를 가정하고 싶지 않았다.

24시간 내내 불이 환히 켜진 새하얀 방은 시간의 흐름을 추측하지 못하게 했다. 디아는 그림자가 지는 부분 없이 새하얗기만 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소박한 소망을 품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벽시계가 갖고 싶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안다면 반이 올 시간을 기다리며 설렐 수 있을 텐데.

하루 세 번 문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식사가 들어왔다. 손바닥만 한 팩에 든 액체형 식량이었다. 최소한의 영양분을 갖춘 질퍽한 식량은 제법 먹을 만한 맛이었으나 디아는 맛을 알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먹지 않았으니 알 턱이 있나.

인간이 아닌 덕분에 몇 날 며칠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버틸 수 있었으나 마치 동면에 들듯 행동반경이 좁아졌다. 디아는 일반적인 사이즈이나 제 체격에는 아슬아슬하게 맞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스가 흘러나오면 강제적인 수면에 들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눈만 깜박이며 새하얀 천장을 올려다봤다. 몇 시간, 혹은 며칠을 그러고 있었을까. 내도록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디아는 눈알만 굴려 들어오는 사람을 살폈다. 하얀 가운을 걸친 예순 언저리의 노인은 손도 대지 않은 팩을 흘깃 살피더니 침대 앞에 접이식 의자를 펼쳤다. 마스크를 쓰고 있던, 반과 눈매가 닮은 노인이었다.

시선이 노인의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흰 가운 주머니 위쪽에 노인의 이름이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미셸’. 반이 종종 입에 올리고는 했던 이름이다. 백발의 노인이 입을 열자 세월의 상흔이 고스란히 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굶으면 힘이 없을 텐데.”

디아는 노쇠한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미셸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디아에게 덤덤히 말을 붙였다. 따지자면 대화라기보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협조적으로 나오면 우리도 그만한 대우를 할 거야. 네 형제를 만나게 해 줄 수도 있고.”

흥미로울 조건을 걸었으나 상대는 무반응이었다. 미셸은 밀랍 인형 같은 SUC-07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무언가를 하고픈 충동이나 이정표가 보이느냐고 묻기도 했다.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느냐고, 의미가 있느냐고,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기계처럼 물었다. SUC-07, 즉 디아는 해괴한 질문을 잠자코 듣다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반은.”

연신 질문을 쏟아 내던 미셸이 침묵했다. 디아는 재차 물었다.

“반은?”

역시나 묵묵부답이었다. 디아는 눈만 치떠 노인과 시선을 맞추었다.

“내 목걸이 내놔.”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는 반과 달리 감정의 조각 따위 없는 낯으로 내려다보던 미셸이 수첩을 덮고 일어섰다. 몇 날 며칠을 굶었다고 해도 비리비리한 노인을 잡아채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나 디아는 의자가 사라진 방구석을 응시하다가 천장으로 눈을 돌릴 뿐이었다.

다음 날, 유리창과 침대 사이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생겨났다. 하얀 테이블 위에는 무기로 삼을 수 없는 플라스틱 식판 하나, 스푼과 포크를 합친 모양새의 커트러리 하나가 있었다. 식판 안에는 살진 과일과 묽은 수프, 갓 구운 듯 따끈한 빵 몇 점이 담겨 있었다.

의자에 기대어 앉은 디아는 반이 내어 주던 형편없는 식사와 비교되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유리창을 마주 봤다. 오늘도 시커먼 유리창에 반사되는 것은 자신뿐이었지만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디아는 들어 올린 식판을 그대로 유리창에 내던졌다. 수프가 사방으로 튀며 유리창에 얼룩을 남기고, 쏟아진 과일들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바라는 것은 이딴 식사가 아니라-.

“반이 보고 싶어.”

저 인간들이 반을 억류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여태 만나러 오지도 않고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는 것이다. 디아는 데굴데굴 굴러온 포도를 맨발로 짓밟았다. 과즙이 팍 터지며 짜증이 샘솟았다. 반이 없는 이상 그 무엇도 흥미롭지 않았다.

***

아마도 밤일 것이다. 아니, 아침이려나. 가스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디아는 호흡을 멈췄다.

가스가 방을 채우고 나서도 한참 뒤, 공기 정화용 팬이 윙윙 돌아갔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한 연구원 셋이 철제 카트를 끌며 들어섰다. 침대 곁에 카트를 세운 연구원들은 늘어진 사지를 능숙하게 고정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한 업무인 데다가 변수가 없었던 탓에 침대에 고정된 매듭이 꼼꼼하지 않았다.

헐겁게 고정된 버클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신입 연구원이 알코올 솜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다른 개체도 이렇게 의존성이 강한가요? 06은 딱히 그런 면이 없던데….”

“보통 성체가 되면 링크가 끊어지지. 이건 환경이 달라서 그런가, 쯧. 아예 얼려 뒀어야 했는데 말이야.”

“시기가 시기다 보니 어쩔 수 없었지. 하필이면 그런….”

속에 맴도는 말을 내뱉는 대신 한숨을 내쉰 연구원이 라벨을 확인한 후 주사기를 들었다. 채혈을 진행하는 동안 어제와 차이가 없는 신장을 잰 신입이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반 클라크를 데려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이 정도면….”

흐릿한 끝맺음 속에는 함축된 뜻이 많았다. 화재 이후 인원이 반의반 토막 난 연구소에 충원된 신입은 죽은 듯이 잠든 07을 내려다보았다.

핏기 없는 피부를 가진 개체는 아름다운 외양과 달리 어찌나 배타적인지 재우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시도할 수가 없었다. 잠든 사이 허겁지겁 영양분을 공급하고 기록을 끝마치길 한 달여. 얻어 낸 것은 인간과 흡사한 신체 정보가 전부였다.

신입의 진심 섞인 우스갯소리에 보틀에 혈액을 주입하던 연구원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숙주가 있어 봤자 빼돌리기나 하고 도움이 안 돼.”

“아…. 03이었던가요? 그때까지는 직원이 숙주였다고 들었어요.”

“그래. 대체 무슨 수를 쓰는지는 몰라도 하나같이 이상해져서는…. 그럴 놈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옛날을 회상하는 듯 침대 모서리에 시선을 둔 연구원의 늘어진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세월에 퇴색된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반 클라크는 미셸 손주치고는 영…!”

유전자 배합에 장렬히 실패한 미셸의 손주를 떠올리던 연구원의 상체가 휙 꺾였다. 단단한 손아귀에 목덜미가 붙잡힌 연구원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테두리가 진한 녹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던 목소리가 코앞에서 울렸다.

“반 클라크는.”

홉뜬 눈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침대 프레임에 매달린 구속용 수갑이 풀려 있었다.

“어디 있어?”

늘씬한 상체를 세운 디아가 묶인 팔을 세게 당겼다.

“허억…!”

헐겁게 맨 버클이 뜯겨 나간 순간 벌떡 일어난 신입의 등에 부딪힌 카트가 넘어갔다. 오른 발목에 묶인 매듭마저 무릎을 바짝 당겼다가 뻗는 것으로 끊어 버린 디아는 달아날 기회를 놓친 연구원의 가운을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니 직접 캐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디아의 의도 따위 헤아려 줄 심산이 아니었다.

“반은….”

“뭐 해! 빨리 떨어뜨려!”

“예, 예!”

비쩍 마른 신입 연구원이 달려들었다. 신입의 손이 어깨에 닿자마자 표정을 굳힌 디아가 마른 몸을 냅다 떠밀었다.

“억…!”

저항 없이 훌쩍 날아간 몸이 카트 위를 뒹굴면서 귀 아픈 쇳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달아나려는 연구원의 가운을 당긴 것과 동시에 소란을 포착한 유리창 너머의 사람이 문을 개방했다. 들어온 사람은 제압을 위해 최소한으로 배치된 건장한 군인이었다.

“놓고 물러나, 당장!”

테이저건을 빼 든 군인이 한 걸음 다가왔다. 디아는 낯선 형태의 무기를 살피고는 기력이 달리는 노인을 밀어 내고 남은 연구원을 끌어안았다. 둘이나 잡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침대맡에 떨어진 메스를 낚아채 목덜미에 날을 가져다 대자 긴장한 군인이 허리춤에 찬 권총을 꺼냈다.

제게 겨누어진 총구를 확인한 디아는 저것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 수많은 영상물로 학습했다.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

“말해 주면. 그러면 놓을게.”

“거기 총은 내려 두고…!”

“손 물려, 당장.”

열린 문 너머에서 웅성대는 소음이 스며들었다. 발포하지 말라는 소리와 가스를 주입하라는 소리가 뒤엉켜 새하얀 방 내부에 안개처럼 깔렸다. 뒤죽박죽인 명령에 당황하는 군인이 녹안에 비쳤다.

“잠깐, 총은 쓰지 말고….”

붙잡힌 연구원이 난색을 보였다. 경동맥에 들이밀어진 칼날보다 마지막 개체 보존에 대한 의무를 중시하던 연구원은 디아의 심기를 거슬렸다. 디아는 아주 조금만 힘을 주기로 했다. 당황하되 한편으로는 태평한 연구원의 살결에 대고 날을 세웠을 때, 문득 머릿속에서 떠오른 반의 한마디가 디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앞으로는 이러지 마.’

본능을 따르려던 두 손이 굳었다.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반이 연이어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든 사람은 건드리지 마.’

멈칫한 디아는 밭은 숨을 내쉬는 연구원을 곁눈질로 살폈다. 손가락 끝에 짓눌린 맥박이 빠르게 뛰어 댔다. 마냥 두렵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디아는 고민했다. 뒤집어엎으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한번 소동을 일으킨 이상 지금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만 반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기도 했다. 날렵한 반의 턱과 달리 무딘 선으로 이루어진 연구원의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결론을 내렸다.

핏줄이 선 손을 물리려던 찰나. 디아의 손짓을 오인한 군인이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

총성이 울렸다. 반동으로 넘어간 디아는 손아귀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연구원을 잡지 못했다.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끼쳤다. 관통당한 구멍에서 피가 걷잡을 수 없이 뿜어져 나오자 경악한 연구원이 지혈을 시도했다.

새하얀 상의가 붉게 젖어 들고 주름진 손도 붉게 물들었다. 누군가 주삿바늘을 박아 넣고, 누군가 목청을 키웠다. 침대에 널브러진 디아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쏘지 말라고 했잖아!”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먼젓번에도….”

“마지막 표본이야. 최대한 온전히….”

수런거리는 목소리들이 멀어져 간다. 이명에 파묻힌 디아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덩어리로 뭉쳐지는 장면을 가만 들여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저는 그저 반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

디아는 벨트로 꽁꽁 묶여 꿈질거리는 것이 고작인 팔을 들썩이다가 관뒀다. 구속복을 입고 지낸 지도 꽤 오래되었으나 한결같이 불편했다. 총상 때문에 상체를 동여맨 붕대도 한몫할 것이다. 갑갑한 숨을 길게 내쉰 디아는 통째로 친친 묶인 의자에 뒤통수를 기댔다.

오늘은 방이 어두웠다. 그림자조차도 형형하게 밝히던 빛 대신 다채로운 색상이 심드렁한 얼굴을 물들였다. 매끈한 벽에 설치된 스크린 속에서 짧은 영상과 이미지가 번갈아 나왔다.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정원을 뛰노는 영상이 이어지다가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는 영상으로 바뀌었다. 사람의 신체가 동강동강 잘려 나가다가 꽃잎이 흩날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상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몸 곳곳에 부착되어 구속복 밖으로 늘어진 선을 따라가자 반과 눈이 닮은 노인, 미셸이 보였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뚝 떨어진 자리에 앉은 미셸에게 시선을 고정한 디아는 지겨울 법한데도 매번 매번 묻는 말을 던졌다.

“반은?”

단체로 무시하자고 단합이라도 했는지 미셸은 한마디 말도 없이 태블릿을 들여다봤다. 답을 들으리라는 기대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지만 가족 얘기쯤은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입꼬리를 늘어뜨린 디아는 꽉 막힌 노인네를 향해 우울한 혼잣말을 던졌다.

“우리 타히티 가기로 했는데.”

태블릿을 토독토독 건드리는 손가락의 속도는 일정했다. 눈을 굴린 디아는 케이크를 자르는 영상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미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있잖아. 나 반이랑 섹스했어.”

훨훨 날아가던 손가락이 허공에 멈추었다. 미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를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반이 책임져 주기로 했는데.”

그런 약속은 한 적 없었다. 그러나 반이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뛰든 말든 디아가 알 바는 아니었다. 문득 떠오른 물음에 대해 고민하던 디아는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그럼 우리도 가족인가?”

경우 없는 소리를 하고는 가만 바라보는 디아와 눈을 맞춘 미셸이 태블릿에서 손을 물렸다. 디아는 노인의 얼음장 같은 눈빛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받아들였다.

맹랑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디아에게서 시선을 거둔 미셸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름진 손이 가운 안주머니로 들어갔다. 디아는 노인의 손가락에 걸려 나오는 쇳덩이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미셸은 디아가 그토록 부르짖던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식사 똑바로 하고 얌전히 굴면 줄 수 있어.”

“얌전히 굴게.”

재고 따질 것 없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미셸은 그런 디아를 냉정한 눈으로 한참 응시하다가 영상이나 똑바로 보라고 했다. 디아는 가운 주머니 안으로 사라진 목걸이를 아쉬워하며 고개를 바로 했다. 못 이기는 척 원하는 대로 따라와 주는 반과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는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날 이후 대략 열흘 정도 얌전히 굴었던 것 같다. 영상을 보라면 봤고, 감상을 적으라고 하면 적었다. 반이 차려 주는 식사보다는 먹을 만한 액체를 억지로 마셨다. 갑갑한 구속복이 제 몸의 한 부분으로 인식될 무렵, 자고 일어나자 테이블 위에 목걸이가 있었다.

뻐근한 어깨는 안중에도 없이 냉큼 그것을 집어 든 디아는 목걸이 줄에 남은 흠집, 로켓의 문양을 확인했다. 목걸이는 제 것이 맞았지만 뜯었다가 다시 붙인 듯 마감이 허접했다.

남의 것에는 손대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눈썹을 구긴 디아는 캄캄한 유리창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되돌아온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경첩이 헐거워진 펜던트를 매만지는데, 딸깍 소리가 나더니 로켓이 열렸다.

로켓의 용도도 사용법도 모르는 디아는 목걸이가 망가졌나 싶어 미간을 더더욱 찌푸렸다. 그러나 반으로 쪼개진 로켓 속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있었다. 디아는 말없이 로켓을 내려다보다가 눈 가까이 가져다 댔다.

콧잔등을 잔뜩 찌푸린 반이 짓궂게 웃으며 눈을 맞췄다. 열일고여덟쯤 됐을까. 단체 사진에서 뚝 떨어져 나온 반은 녹색 페인트를 뺨에 묻히고, 엉망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린 채였다. 자신과 엇비슷한 나이대의 반은 엄지보다 작아서 마음껏 만졌다가는 망가질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전날, 반이 키들키들 웃으며 준비한 선물을 뒤늦게 발견한 디아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사랑스러운 웃음을 들여다보다가 사진 위로 입을 맞췄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이 정도면 기다릴 힘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가스에 내성이 생겼다. 가스 농도가 올라갔다. 가끔은 깨어나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몸은 늘 청결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긴 머리카락이 짧게 잘렸다. 주삿바늘 자국이 양팔을 뒤덮었다.

때때로 구속복을 입었다. 구속복을 입는다는 것은 누군가 이 방에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새하얀 방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의 수는 적었다. 미셸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화를 거부했다. 얼마나 쓸데없는 말이든 받아쳐 주는 반이 그리웠다.

어깨가 나을 즈음 주사를 맞았다. 물을 넣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주사가 있는가 하면 팔 근육이 떨어져 나갈 듯 아픈 주사가 있었다. 어떨 때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할 때도 있었다.

종종 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톡 쏘는 냄새가 불쾌했다. 하루는 숨을 쉬기 힘겨웠다. 산소 농도가 떨어졌다. 주사도 맞지 않았는데 정신이 몽롱해졌다. 하루는 공기가 뜨거워졌다. 하루는 차가워졌고, 기침이 나올 정도로 건조해졌다가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습해지기도 했다.

방에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 대기질을 바꾸었다. 어느 환경까지 버티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쓰러진 채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면 침대 밑에서 팬이 돌아가고 쾌적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언젠가부터 디아는 새하얀, 무음의 공간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읽을거리도, 볼거리도, 말거리도 없는 완벽한 밀실에서 디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제자리를 빙빙 돌거나 눕거나 혼잣말을 하는 것뿐이었다. 작은 변화는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 정신을 잠식해 갔다.

간혹 뜻 모를 불안이 목전까지 차오르면 로켓을 열어 반을 들여다봤다. 로켓 속의 반은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해맑고 귀여운 모습을 유지했다. 꼬리가 느슨하게 처진 눈은 웃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웃는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목소리는 가물가물했다.

디아는 거울이나 다를 바 없는 유리창을 넘어다봤다. 보이는 것은 새하얀 벽을 배경으로 한 자신이 전부였지만 그 너머에는 의자에 불편하게 기대어 꾸벅꾸벅 조는 반이 있을 것만 같았다.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면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는 또 왜 난리냐며 장난스럽게 눈살을 구기는 반. 이마를 쾅쾅 갖다 박으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그러지 말라고 손을 내젓는다.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입구가 있는 방향으로 발을 튼다.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달래 주러 오는 남자가 패드를 누르면….

시린 눈을 한 번 깜박이자 짜증을 내던 반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유리로 된 액자 속에는 다시 혼자가 된 자신뿐이었다.

***

“06은 어때.”

“똑같아요. 식사도 잘하고 잠도 잘 자고. 07에 비하면 순순해요. 07에게 흥미를 보이기도 하고요.”

“이래서야 붙여 놓기가 힘들겠어. 저건 갈수록 반응도 떨어지고, 이상 행동도 심하고.”

“우울증인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여러모로 실험 환경이 달랐으니까.”

“신기하네요.”

침대에 가만히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07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신입 연구원이 서류철을 뒤적였다. 오로지 수기로 작성하여 복사본은 세 부밖에 되지 않는 실험 기록지는 그 두께가 상당해 백과사전처럼 보였다.

07의 숙주에게 제공한 얄팍한 정보가 담긴 복사본 하나가 화재로 소실됐으므로 남은 복사본은 둘뿐이었다. 연구원은 수백 번 읽어 머릿속에 기록된 정보를 눈으로 훑었다.

01은 숙주인 연구원을 살해하고 탈출, 행방불명 처리됐다. 02는 실험 과정 중 폭력성을 보여 사살. 03은 당시 숙주였던 연구원과 함께 행방불명. 04는 실험 도중 쇼크로 인해 사망. 05는 전 연구소 화재 시 사살. 현재 생존한 개체는 06과 07뿐이며, 프로젝트 진행 중 사망한 관계자는 정확히 36명.

연구원은 05를 사살하기 전의 기록을 찬찬히 읽었다.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 연구소 화재 사건의 범인은 찾아내지 못했다. 화재로 무너진 연구소에서 거둔 시신 열두 구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총알이 박혀 있었고, 대부분의 연구 자료를 강탈당했다. 그로 인해 이 프로젝트를 반기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정체불명인 상대는 위협적이기 마련이다. 연구원은 기록의 처음으로 돌아와 무뚝뚝한 인상을 가진 01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사라진 개체는 어디로 갔을까요.”

나이가 지긋하게 든 선배 연구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전 연구소를 습격하고도 꼬리가 잡히지 않는 무력 단체와 머리칼 한 올 발견되지 않는 행방불명 개체들은 때때로 공포감을 일으켰다. 프로젝트에 관한 일말의 정보도 듣지 못한 채 연행되다시피 끌려온 신입 연구원은 넌지시 불안감을 드러냈다.

“여기도 찾아낸 건 아니겠죠?”

“글쎄.”

“박사님.”

대답은 오른편에서 들려왔다. 신입이 내어 준 의자에 앉은 미셸은 진하게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신입 연구원이 쭈뼛쭈뼛 제자리로 돌아가기 직전, 얇은 입술이 열렸다.

“뺏기느니 죽이는 게 낫다는 건 알아 둬.”

미셸의 탁한 눈동자에 07이 비쳤다. 마네킹처럼 앉아 있더니 이번에는 목걸이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늙은 연구원은 미셸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반 클라크는?”

“처리 중이지.”

“청소부 꼴은 안 나야 할 텐데.”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던 연구원들이 한마디씩 얹었다.

“아직도 그런단 말이야? 별 지긋지긋한 인간 다 보겠군.”

“그런 음모론자가 인터넷에 한둘인가. 떠들게 내버려 둬.”

“차라리 없애면 편할 텐데. 이래서 외부인은 번거로워.”

“시간 됐다. 오늘은 암모니아. 정화 준비하고.”

시간을 기록하고, 계산된 수치를 입력하고, 버튼을 누르고, 공기 주입 시스템을 통해 또 다른 환경이 조성되는 새하얀 방은 연구원들에게 있어 지루한 TV 프로그램이나 다름없었다.

***

요 며칠 화상을 입은 것처럼 피부가 따끔따끔 아렸다.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피부는 반이 보여 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도롱뇽을 연상케 했다. 디아는 간만에 눈살을 찌푸렸다. 반이 이런 무늬를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주삿바늘 자국처럼 이 또한 사라지길 바라며 어느샌가 무뎌진 감각을 되살려 봤다.

한 시간이 지났는지, 하루가 갔는지, 기어이 달이 훌쩍 넘어갔는지. 어쩌면 반과 함께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백치처럼 묻고 또 묻지만, 사실은 알았다. 반이 약속했던 열 밤은 지나간 지 오래고, 그 남자가 이곳에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을.

그렇지만 신뢰를 버리지는 않았다. 반이 수없이 보여 준 영화도, 서적 사이에 하나둘 섞여 있던 로맨스 소설도 결말이 불행한 경우는 결단코, 절대 없었기에.

목걸이를 되찾았으니 얌전히 기다리면 구해 주러 올 것이다. 얌전히 견디다 보면 왕자님처럼 등장할 것이고,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으며 행복한 엔딩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기분 나쁜 목소리가 믿음을 들쑤셨다.

‘느껴질 거 아냐. 반이 널 팔아 버리려는 거.’

당시 반은 혼란을 느꼈다.

‘그놈은 애초에 돈 때문에 떠맡은 거야.’

계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래. 그 가벼운 놈은 지금도 널 팔아넘길 생각밖에 없을걸.’

지금은 아닐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조금만 솔직해져 본다면, 단 한 톨의 의심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넘겼던 웨인과의 대화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무도 반을 억류하지 않았고, 반이 정말로 자신을 버린 것이라면, 반이 배신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팔짱 낀 자세로 고정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를 꿰뚫었던 군인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구속복을 풀어 줄 때는 매번 무장한 군인이 홀로 들어왔다. 자유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라고 할 수 있다.

웃는 법을 배우지 못한 듯 딱딱한 얼굴의 군인이 의자에 고정된 벨트를 풀었다. 디아는 팔과 다리 부근에 주르륵 달린 벨트를 하나씩 푸는 군인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로 입을 뗐다.

“있잖아.”

군인은 주어진 임무를 실행하는 것 외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연구원과 마찬가지로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늘 그랬듯이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왜 반이 안 올까?”

오래오래 기다렸는데.

덧붙인 한마디에 군인이 순간적으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딱 맞는 고리 탓에 잘 풀리지 않는 벨트를 흔들던 군인은 생김새만은 앳된 07의 어깨를 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제한된 공간에서 숨만 쉬는 것이 고작인 존재에 대한 동정심 때문인지, 현재 아무도 없을 유리창 너머를 흘긋 살피고는 허락되지 않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잘 살고 있으니까.”

뻑뻑한 구멍에서 고리를 빼낸 군인이 마지막 벨트로 손을 옮겼다. 천장을 향해 있던 텅 빈 눈동자가 군인에게 꽂혔다.

“잘 살고 있어?”

“돈을 얼마나 받았는데…. 떵떵거리면서 살 거다.”

흐리멍덩한 녹색빛 눈알이 느리게 굴러갔다. 디아는 ‘잘 살고 있다’와 ‘돈’, ‘떵떵거리다’의 연관 관계를 고심했다. 물 흐르듯 이을 수 있는 것들이었으나 머리가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평소 차를 마시지도 않던 반이 건네준 차 한 잔이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도 디아는 남자의 감정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반은 따뜻한 차가 한가득 든 컵을 넘겨주고서 불안해했다. 차를 마시지 않자 불안해했고, 마시자 불안해했다.

반의 불안은 경고였다. 그러나 머리카락과 뺨을 쓸어 주는 손길이 지나치게 따스해서 흘러 들어오는 감정을 무시하고 말았다. 노곤노곤하게 풀리는 몸은 행복에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말았다. 당연히 반이 보일 줄 알고 눈을 뜨니 이곳이었고,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고, 반이 올 거라고 믿었는데 정작 반은….

“잘 살고 있다고.”

“그래. 그러니까….”

구속복을 완전히 벗기고 허리를 세우던 군인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굳은 채로 벨트에서 떨어진 손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향했다. 항시 두툼했던 권총집이 비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디아는 제 손에 들린 권총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들었다. 군인의 눈길은 권총을 쥔 창백한 손에 박혀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 잠기지 않은 문을 바라보던 디아는 또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짓말하지 마.”

디아는 경직된 군인에게 권총을 돌려주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 거짓말하지 마. 총을 빼앗아 든 군인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소년을 노려보다가 문으로 향했다. 디아는 문틈 새로 사라지는 군인의 뒤통수에 대고 재차 경고했다. 거짓말하면 안 돼.

***

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방. 디아는 유일한 제 것인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숱하게 매만진 나머지 양각으로 새겨진 문양이 반질거렸다. 닳아 없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하다가 고개를 바짝 젖혔다. 한시도 어두워지지 않는 눈부신 천장은 골방에 틀어박힌 디아를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데리고 갔다.

반은 저 비슷한 빛과 함께 나타났다.

이름이 존재하지 않고 사고하는 법을 몰랐을 때, 어느 날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최초로 느낀 감각이었다. 때로는 오래, 때로는 짙게 느껴지는 시선이 사고를 일깨웠다. 무시할 수도 있었고, 더 긴 시간을 잘 수도 있었지만 나가기를 선택한 계기는 특별하지 않다. 간질간질한 시선을 보내는 ‘그것’을 만나고 싶었다.

그때부터 저를 감싸고 있는 작디작은 세계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생애 첫 욕망을 품은 세포가 빠른 속도로 분열하고 증식했다. 마침내 작은 세계를 가르고 나왔을 때, 줄곧 닿아 오던 시선의 주인을 만났다.

‘아르카디아. 그걸로 할래. 야, 이거 울 거 같은데?’

달팽이관을 툭 치고 울리는 중저음의 음성이 자극적인 감각을 퍼부었다. 새하얀 빛 무더기에 파묻혔음에도 선명하게 드러난 당황한 표정이 깨끗하게 만들어진 눈을 자극했고, 몸을 감싼 손바닥이 촉각을 자극했다. 확장된 세계는 어마어마하게 자극적이었다.

반 클라크. 최초로 느낀 감각이자 최초로 선택한 또 다른 세계였다.

‘제대로 먹어라, 제발 좀.’

‘내가 뭘 잘못했냐? 뭘 잘못해서 네가 잠을 안 자지?’

‘…알았어. 같이 자. 한 번만이다?’

‘이거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 재밌겠지?’

‘야. 이리 와 봐. 머리 한 번만 묶어 보자.’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비겁하고 저열하고 경솔하며 외로운 껍데기 속에 끔찍한 다정함을 감춘 반은 작은 모니터로 들여다본 세상보다 복잡하고 유기적이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 주고는 킬킬 웃는 반을 본 순간 불현듯 만나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하지만 다정한 손길로 삐져나온 잔머리를 정리해 준 순간에는 유리 벽 안에서 영원히 반과 단둘이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한 내 것. 반은 그런 의미였다.

디아는 침대에 반듯하게 누웠다. 여전히 반이 보고 싶었다. 동시에 그만큼 미워지기도 했다. 유리창을 깨트리고 문을 박차고 나가 왜 아직도 오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한번 떠오른 의심은 맹목적인 믿음에 파란을 일으켰다. 만약 반이 배신했다면. 저를 버렸다면…. 얼룩덜룩한 피부를 무의식적으로 세게 긁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디아는 배신자를 곱게 내버려 둘 의향 따위 없었다. 그러니 반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더 서운해지기 전에 말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새하얗기만 한 조명. 변함없이 고요한 사위. 그러나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는 디아의 마음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

쌀쌀한 바람이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거슬릴 정도로 자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 반은 오래전 끊었던 담배를 뻑뻑 피우며 양복쟁이를 노려봤다. 몇 달 전 이름을 들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고리타분한 이름일 터다.

정확히 다섯 걸음 거리를 유지한 채로 소매를 걷어 손목시계를 확인한 양복쟁이는 주차장 구석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반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새카만 세단에 올라탔다.

반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끝내주는 차 뒤꽁무니에 대고 엿을 날려 주고 싶은 유치한 욕망을 누르며 양복쟁이 돈으로 산 담배를 지져 껐다. 속이 뻥 뚫리기는커녕 씁쓸하기만 한 담배를 갑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가지를 여미며 서류 봉투와 함께 내동댕이쳐 두었던 신문을 주워 들었다. 11월 28일. 어느새 연말에 가까워진 날짜를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뭣 같은 날 이후로 어떻게 되었느냐. 싹 다 날아갔다. 티끌도 남기지 않고 싹 다.

미셸의 집과 붉은 벽돌집은 폐허가 됐고, 옮겨붙은 불길이 가로수 몇 그루와 빈집 하나를 가루로 만들었다. 폭발물을 설치해 둔 것이 틀림없었다. 불행은 집이 날아간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폭발에 휩쓸린 몸은 제 역할을 못 하지, 디아와 함께 사라진 정신머리는 돌아올 생각을 안 하지, 때문에 반은 제 손목에 채워지는 수갑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날벼락이 떨어졌을 때는 치료를 끝마친 후였다. 반은 살인 사건 및 방화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미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반은 해괴하고 억울한 석 달을 보냈다. 말도 안 되는 누명이었지만 마냥 저와 상관없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반은 살인 사건의 범인을 확신하고 있었고, 범인의 목적인 생명체를 키웠으며, 그 생명체의 존재를 숨기려는 무리에 의해 방화를 당했다.

따지자면 피해자였으나 피해 사실을 털어놓아야 피해자 노릇을 할 텐데, 반은 억울해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가 기밀이니 외계인이니, 한번 얘기를 꺼내 봐라. 정신병자 취급받고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몽땅 뒤집어쓴 채로 정신 병원에 감금될 소지가 다분했다.

여기서 웨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경찰의 증언이 범인설에 힘을 실었다. 동거하던 애인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데 반이라고 알 리가 있나. 반이 아는 것이라고는 불타 스러진 붉은 벽돌집에 사람으로 추정되는 잔해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뿐이다. 그때까지도 미셸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정말 결백하고,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눈물까지 찔끔 짤 무렵, 본인을 변호사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나타났다. 듣도 보도 못한 이는 난데없이 변호를 하겠다고 나섰고, 근처 모텔로 귀가한 반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서류를 읽은 반은 시린 눈을 문질렀다. 비밀 유지 각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변호사는 디아와 얽힌 인간이었다. 몇 주 새 눈 밑이 거뭇거뭇해진 반은 글자가 뭉텅이로 쪼개지는 각서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디아는요.’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괜찮은지, 그것만 말해 달라는 건데 그게 어렵습니까?’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변호사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적나라하게 요약하자면 ‘함구하지 않을 시 당신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이라고 적힌 무자비한 각서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던 반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 와중에 떠오르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한심하게도.

‘…잔금은?’

‘잔금이라니요.’

변호사는 눈을 깜박이며 모르는 체했다. 허. 코웃음을 친 반은 미셸이 편지로 남긴 계약 조건을 읊었다. 선금의 열 배를 받는다면 고작 십만 달러쯤 불에 타든 말든. 그러나 입을 꿰맨 줄로만 알았던 변호사는 반의 마지막 결정을 들먹였다. ‘그것’을 빼돌리려고 한 순간부터 계약 불이행으로 간주되어 잔금을 지불할 이유는 없다고 조곤조곤하게 연타를 날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반은 계약서도 쓰지 않았다. 썼다고 하더라도 불길에 모조리 타 버렸을 테고. 이마를 짚은 반은 기껏 받은 선금은 홀라당 타 버리고, 가장 중요한 디아까지 빼앗긴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변호사는 각서를 작성하지 않는 반을 두고 일어섰다.

반의 각오는 두 달 하고 15일 만에 꺾였다. 얼마나 들여다보았는지 구깃구깃한 각서에 사인한 순간 사방이 꽉 막힌 상황은 빠르게 풀렸다. 자칫 재판에 설 뻔한 반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지금. 미셸은 여전히,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담뱃갑을 버린 쓰레기통에 신문까지 내던진 반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어지간히 멍청하지 않은 이상 변호사가 가지고 온 그들의 뜻이 일종의 경고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입 잘못 놀리면 적당한 죄를 뒤집어씌워 감옥에 처넣겠다는 경고. 정부는 악독했고, 미셸은 더더욱 악독했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주저앉은 반은 구겨진 다리를 쭉 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용의자 신세에서 벗어났더니 이제는 갈 곳이 없었다. 돌아갈 집은 잿더미가 됐고 하나뿐인 가족은 여전히, 여전히,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고 오는 연락을 모조리 무시했던 회사 팀장에게는 감히 아쉬운 소리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모아 둔 돈도 없으면서 선금 믿고 설치다가 빈털터리가 된 반은 막다른 길에 몰렸다.

반은 배터리가 반절 남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가장 일찍 도착한 버스를 잡아탔다. 텅텅 빈 좌석 중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지저분한 차창에 가족 잃고, 돈 잃고, 설명할 수 없는 관계의 소년마저 잃은 남자가 비쳤다. 보기 싫은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

흠집 많은 워커가 웅덩이를 짓밟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랑비를 후드 모자로 막은 아비게일은 두 손 가득 든 짐을 추어올렸다. 일거리가 없거나 휴가 때마다 요긴하게 쓰는 낡은 아파트에 도착해 주머니를 뒤졌다.

한 팔에 장 본 것을 안은 탓에 열쇠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현관 계단을 뒤뚱뒤뚱 오르며 마침내 열쇠를 찾아낸 아비게일의 눈에 웬 덩어리가 걸렸다.

난간 지지대를 베개 삼고 가로등 불빛을 이불 삼은 시커먼 형체가 아파트 계단 구석에 구겨져 있었다. 치안이 좋지 않은 외곽에서는 노숙자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기에, 아비게일은 검은 덩어리를 에둘러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현관에 들어서기 직전 눈살을 찌푸렸다. 딱 한 대만 때리고 싶게 생긴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몹시 낯익었다. 홱 돌아선 아비게일은 꼬질꼬질한 운동화를 구겨 신고 얇은 점퍼를 걸친 남자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구부려 어깨를 툭 치자 휘청인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막 잠에서 깬 듯 어리벙벙한 낯짝은 아비게일에게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발견한 듯 턱을 잔뜩 당긴 아비게일은 오랜 친구이자 전 직장 동료를 불렀다.

“반?”

별안간 회사와의 계약을 해지하더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언제부턴가 연락이 없던 반이 가랑비에 흠뻑 젖어 새파래진 입술을 벌리고 웃었다.

“…나 며칠만 재워 주라.”

말도 없이 관둔 주제에 어디 와서 친한 척이냐고 엉덩이를 걷어차 주려던 아비게일은 다리를 뻗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손을 붙잡고 일어난 반은 딱 죽기 직전의 몰골이었다.

뜨끈한 물로 샤워하고 나온 반은 아비게일이 골목에서 주워 왔다던 소파에 깊이 파묻혔다. 맛이 간 스프링이 삐거덕거리며 엉덩이를 찔렀으나 냄새 고약한 장거리 버스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다 죽어 가는 신음을 흘리며 늘어지는 반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아비게일이 맥주 캔을 던졌다. 차가운 맥주를 받아 든 반은 숨도 쉬지 않고 술을 비워 냈다. 오랜만에 들어온 알코올이 차게 식은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맞은편 소파를 차지한 아비게일은 맥주를 들이켜는 반을 뚫어져라 보다가 물었다.

“진짜 어디 사모님 첩으로 들어갔었냐? 지금은 쫓겨났고?”

“무슨 소리야? 웬 첩.”

“팀장한테 그렇게 뻗댔다며. 소문 다 났어, 새꺄. 진짜냐?”

농담인 줄 알았더니 아비게일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술의 힘으로 그럭저럭 살 만해진 반은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며 코웃음 쳤다.

“어떻게 알았냐? 첩살이하다가 개털로 쫓겨났다.”

“이 걸레 새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나는 알았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아비게일이 삿대질했다. 소문의 진위로 내기라도 했는지 핸드폰을 꺼내 분주히 두드리는 아비게일의 만면에 야비한 미소가 그득했다. 대체 본인 이미지가 어땠길래 저딴 터무니없는 소문이 났나 싶으면서도 털어놓을 수 없는 진실을 거짓으로 꾸며 낼 필요가 없음에 감사했다.

텅 빈 맥주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반은 아비게일 몫의 맥주를 빼앗았다. 돈을 제법 딴 듯, 날뛰어야 할 아비게일은 별말 없이 새 맥주를 가져오더니 흥미로 번쩍이는 눈을 들이댔다.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왜 쫓겨났는데?”

“남편한테 들켜서.”

“그걸 진짜 들켰냐? 뭐 받은 거는? 차는? 시계는?”

“있어 보여?”

아무것도 없는 양손을 펼치자 아비게일의 새파란 눈알이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었다. 벙커에 처박혀 산 것처럼 창백한 피부, 거뭇거뭇한 눈 밑, 비리비리하게 마른 몸뚱이는 행실은 차치하고 외양만은 볼만하던 반 클라크의 고된 시간을 증명했다. 옷은 길바닥에서 주워 입은 꼴에 짐이라고 부를 것도 없었다.

불쌍한 놈. 쯧쯧 혀를 찬 아비게일이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맥주 캔으로 감추는 것을 본 반은 소파 등받이에 뒤통수를 푹 기대었다. 제 입으로 이미지 실추를 거들었지만,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비운 두 번째 맥주 캔을 쓰레기통에 골인시킨 반은 긴 한숨을 내쉬며 주어를 생략한 속내를 내비쳤다.

“그냥…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예쁘냐?”

“뭐….”

끝내주게 예뻤어.

솔직하게 덧붙이자 사진 없냐며 손을 까닥이는 아비게일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비밀 유지 각서를 작성하며 디아의 사진이 담긴 핸드폰을 빼앗긴 탓에 소년을 추억할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 집에 한번 놀러 와 본 경험이 있길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지인에게 도움을 청할 새도 없이 길바닥에서 얼어 죽을 처지였다.

“왜 그랬는데? 맨날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더니.”

몇 입 만에 맥주를 비운 아비게일이 얄미운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상태가 좋지 않은 몸에 술을 들이부어 취기가 빠르게 올라온 반이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그러게. 왜 거기서 디아를 빼돌릴 결심이 섰을까.

신문에 시달리던 어느 날, 의문이 들었다. 순순히 넘겨줬으면 경찰서를 들락날락할 일도,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일도 없었을 텐데. 논리가 없다 못해 뇌 기능이 정지된 수준의 판단이었다. 자신은 단순할지언정 그딴 선택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왜 그때는 그 선택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까.

반은 다리를 달달 떨고 까칠한 입술을 매만지면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정말 모를 일이었다. 디아를 재운 것까지는 계획과 동일했으나 귀신에 홀린 것처럼 불시에 그릇된 선택을 했다. 이것조차 디아가 가진 능력 때문이라면 제 진짜 감정은 어디로 갔는지. 피가 스미는 입술을 감쳐문 반은 답도 없는 쓰레기를 보는 듯한 아비게일을 향해 최고로 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위로받지는 못했다.

아비게일은 창고로 쓰는 작은 방을 반에게 내어 줬다. 소파와 함께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스프링이 꺼진 싱글 매트리스에 드러눕자 쇠가 튀는 소리가 났다. 불을 끄면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는 미셸의 집과 달리 밤이 와도 사그라지지 않는 도심의 불빛이 창가에 어른거렸다. 반은 빗방울이 톡톡 두드리는 창문을 올려다봤다.

빗줄기가 긴 궤적을 남기고 사라진 순간 온몸으로 비를 맞던 소년이 떠올랐다. 생애 처음 비를 목격한 디아의 눈에서 반짝이던 이채가 돌덩이가 되어 가슴에 얹혔다. 숨이 턱 막혔다. 반은 다른 기억들까지 무작위로 떠오르기 전에 황급히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근 석 달간 반을 괴롭히는 짙은 불면증이 눈꺼풀을 도로 밀어 올렸다.

하루 세 시간도 채 자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중요한 것을 뚝 떼 놓고 온 듯한 느낌이 지쳐 쓰러지려는 정신을 불쑥불쑥 일깨웠다. 충혈된 눈을 깜박인 반은 창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하….”

뭐가 뭔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유 모를 후회와 갑갑함이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이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