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대략 10분간 밥버러지를 지켜보던 아비게일이 입을 열었다.
“상간남.”
낡은 소파에 파묻혀 TV를 보던 남자가 눈을 들었다. 어째 날이 갈수록 시체 꼴이 되어 가는 반은 또 잠을 설쳤는지 눈가가 퀭했다. 기억하는 바로는 추위를 심하게 타는 편이 아니었는데, 추워 죽겠다며 두툼한 카디건과 담요를 뜯어낸 것으로 모자라 두 다리를 꼭 끌어안은 꼬락서니가 역겨울 정도로 볼썽사나웠다.
불쌍한 척을 한다기에는 정말 정신머리가 빠진 모습이었고, 실연의 아픔이라고 하기에는 과했다. 정리하자면 지랄이 심했다. 위로나 공감에는 소질이 없는 아비게일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2주는 좀 오버라고 생각 안 하냐?”
예고 없이 날아온 비아냥에 반은 핏줄 선 눈을 깜박이다가 씩 웃었다.
“2주나 됐어? 난 또 한 사흘 지난 줄 알았지. 오랜만에 너랑 이렇게 있으니까….”
“지랄하지 마라.”
유들유들하게 넘어갈 기회조차 주지 않은 아비게일이 맥주로 짜증을 달랬다. 맥주 캔으로 손을 뻗다가 손등을 얻어맞은 반은 벌게진 살결을 쓰다듬으며 솔직히 답했다.
“나도 나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인생에 모아 둔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또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빌붙어 산 지 2주나 지난 것도 아비게일이 언급한 후 알았다. 잠을 못 자니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모레 같고 지금 당장이 꿈같았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일을 해, 일을. 팀장한테 말해 줘?”
“죽이려고 들걸. 다른 회사 알아봐야지.”
“일할 생각이 있는 건 좋은데….”
말을 흐리는 일이 드문 아비게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러느냐는 눈빛을 보내자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비게일이 몸을 훑어 내렸다.
“거울은 보고 사냐.”
반은 근육을 뭉쳐 인간으로 만든 듯한 아비게일을 마주하다가 누에고치에서 팔만 꺼냈다. 굴러다니는 아비게일의 핸드폰 카메라로 제 얼굴을 비춰 본 반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왜? 똑같은데.”
“진짜? 똑같다고 생각한다고?”
“다이어트 중이야. 요새는 말라야 인기 많아.”
반은 담요 속에 팔을 쏙 집어넣으며 되도 않는 변명을 했다. 생존에 필요한 근육만을 남기고 슬림하게 마른 몸뚱이가 둥글게 말렸다. 기본 골격이 있는 덕에 간신히 초라함을 면한 반에게서 시선을 거둔 아비게일은 빈정거리며 TV 채널을 돌렸다.
“다이어트 같은 소리 하네…. 병자다, 병자.”
축구 중계 채널에 맞춰진 TV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반은 공 하나로 재밌게도 노는 손톱만 한 선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제 손목을 쥐었다.
뼈대가 단단해 딱히 가늘다는 감상은 들지 않았다. 과하게 먹으면 올리기 일쑤라 목숨을 유지할 양만 찔끔찔끔 먹었더니 기껏 부풀려 놓은 근육이 꺼진 것은 알았지만 아비게일이 핀잔을 줄 정도로 살이 빠진 줄은 미처 몰랐다. 이상 반응은 불면증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욱신거리는 머리통을 소파에 파묻은 반은 축구 경기를 뒤로하고 상념에 빠졌다.
불면증, 체중 감소, 두통…. 최근에는 무기력까지 덮쳤다. 큰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 상태가 시시각각 나빠졌다. 그리고 이런 이상 반응은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디아를 빼앗긴 그날. 그날부터였다.
반은 절정으로 치닫는 경기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 제게 반문하면서.
***
시간은 어영부영 흘렀다. 좁은 아파트에 얹혀산 기간이 한 달을 훌쩍 넘겼을 무렵, 투어 중인 가수의 경호에 땜빵으로 들어가게 된 아비게일은 부쩍 바빠졌다. 다음 달 안에 일을 구해 나가라고 엄포를 놓는 아비게일의 기세에 밀려 고개를 끄덕인 반은 누에고치 생활을 강제로 청산해야만 했다.
“윽….”
두통이 불규칙적으로 밀려드는 머리를 부여잡은 반은 통증이 가실 때까지 기다리다가 숨을 내쉬었다. 뒤로 젖힌 고개를 바로 하고 아비게일에게 빌린 랩톱을 들여다봤다.
두 시간 동안 구인 구직 사이트를 뒤적였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힘쓰는 일을 하자니 이런 몸 상태로는 어림도 없었고, 식당 서버나 사무 보조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하기로 마음먹으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요즘과 같은 감정 기복으로는 일주일도 못 버티고 해고당할 미래가 훤히 그려졌다.
짜증 낼 기력도 없어 마른세수로 갑갑한 심정을 대변한 반은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그대로 두고 활자가 떠다니는 사이트를 막연히 응시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자마자 자제하기 어려운 궁금증이 툭 튀어나왔다.
지금쯤 디아는 뭘 하고 있을까. 잘 살고 있는 건 맞을까. 곁에서 지켜보고 하나하나 간섭하지 않으면 끼니를 거르기 일쑨데 밥은 잘 먹고 있을까. 그나저나 웨인은 그 몸으로 어디로 간 것일까. 자신은 앞으로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야 하나.
눈을 뜬 직후부터 감기 직전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상념들이 메스꺼움을 일으켰다. 마른침과 욕지기를 한꺼번에 삼킨 반은 인터넷을 배회하다가 검색창을 켰다. 검색창에 올려 둔 커서가 깜박였다. 손가락을 놀려 검색어를 이것저것 입력했다.
메스꺼움 어떻게
* * *
두통에 좋은 음식
백수
좌르륵 뜨는 검색 결과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던 반은 다음 검색어를 입력하기까지 한참 머뭇거렸다. 호기심조차 품지 말 것을 은근히 강요하던 변호사의 눈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깨문 반은 랩톱을 닫으려다 말고 홀린 듯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르카디아
단어를 입력하자 무수한 정보가 떴다. 그리스의 지명, 신화, 유토피아…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프로젝트의 명칭을 검색하려고 했는데, S까지만 떠오르고 나머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멍청한 머리를 탓하며 기억나는 단어를 모조리 조합했다. 외계인, 괴생명체, 세포, 촉수, 숙주, UFO, 연결, 정신적인. 온갖 단어를 섞어 검색을 돌렸다.
눈알이 바삐 돌아갔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단서를 찾는 동안은 단짝처럼 붙어 있던 두통과 메스꺼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지와 영상을 조잡하게 합성한 유튜브 영상부터 현 대통령은 외계인이라며 열변을 토하는 팟캐스트, 듣도 보도 못한 신문사의 기사까지 빠짐없이 훑었지만, 반이 겪은 것과 동일한 사례는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음모론이 판치는 인터넷에서 진짜를 찾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랩톱을 빌린 의도를 새까맣게 잊은 반은 턱을 괴고 그럴싸해 보이는 제목을 이리저리 클릭했다. 디아를 알기 전에는 한심하다고 여겼던 허황된 음모론을 싹싹 읽어 내리길 한 시간여.
반은 지구상에 있는 파충류 형태의 외계인과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웬 비밀 결사 조직에 대해 알게 됐다. 증거 사진까지 있어 잠시나마 믿을 뻔한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사이트를 닫으려던 때, 링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닫기 버튼과 링크 사이에서 망설이던 반은 반쯤 포기한 채로 링크를 클릭했다.
이제껏 들여다본 사이트와 별 차이가 없는 뻔한 음모론 커뮤니티였다. 다만 외계인만을 주제로 하는 커뮤니티라는 점이 달랐다. UFO를 봤다, 외계인에게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왔다, 외계인이 내 밭에 그림을 그렸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글 중 반의 눈에 띄는 댓글이 하나 있었다.
<댓글>
세포에서 부화시켜. 그런 다음 ‘링크’되는 거야. 인간을 숙주로 삼은 외계인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자라면서…
“어?”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눈이 크게 뜨였다. 모니터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댄 반은 허무맹랑한 외계인 목격담 홍수 속에서 홀로 다른 얘기를 하는 댓글을 몇 번이고 읽었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예 헛소리로 치부했는지, 기다 아니다 토론하는 가운데서 유일하게 답 댓글이 없는 글의 아이디를 클릭했다. 키보드를 대충 두드려 만든 아이디가 여태껏 작성한 글 목록으로 들어갔다.
해당 아이디가 남긴 글은 많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청소부를 구한다는 구인 공고로 웬 실험실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세포를 부화시킨 후 강제로 내쫓겼다는 이야기.
비밀 유지 각서에 도장을 찍었으나 반인륜적인 행위를 묵과할 수 없다는 서론으로 시작된 글은 반이 겪은 경험과 매우 유사한 본론을 털어놓았다. 말미에는 유튜브를 비롯해 다수의 커뮤니티에 올려 보았으나 업로드가 되는 동시에 삭제되었다는 추신을 달았다.
댓글은 아예 없거나 한두 개뿐으로, 커뮤니티 내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반은 양팔을 쳐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거다! 뚝뚝 끊기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 영 믿음직스럽지 않았지만 이만큼 자신이 찾던 정보와 근접한 내용의 글은 처음이었다. 아비게일이 혀를 찼던 죽은 눈에 생기가 돌았다.
반은 일단 정체가 불분명한 작성자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마지막 글이 올라온 시기는 두 달 전이었으나 댓글은 일주일 전까지 꾸준히 달렸다. 비록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개인 정보가 털릴 위험을 무릅쓴 반은 음모론 커뮤니티에 가입한 후, 홀로 연구소를 고발하느라 애쓰는 계정에게 쪽지를 보냈다. 인사말을 제외하고 몇 자도 되지 않는 쪽지를 쓰는 동안 몇 달간 경찰서와 법원과 변호사를 오가며 겪은 고초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온 아비게일은 어두침침한 거실에서 랩톱을 두들기는 반을 떨떠름하게 살폈다. 제정신이 아닌 듯한 반은 뒤늦게 인기척을 눈치채고는 열이 뜨끈뜨끈 오른 랩톱을 내밀었다.
“저번에 나한테 준 목걸이. 그거 어떻게 써?”
“무슨 목걸이? 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랩톱을 받아 든 아비게일이 눈썹을 구겼다. 곁에 찰싹 붙은 반은 손가락을 구부려 작은 로켓 형태를 만들었다.
“위치 추적기.”
“위치 추적기? …아.”
이윽고 필요가 없어 헐값에 넘겼던 목걸이를 떠올린 아비게일은 초조한 듯이 손톱을 물어뜯는 반을 흘끔거렸다. 이가 손톱을 스칠 때마다 또각또각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농담 삼아서라도 ‘너 제정신 아닌 것 같아’라고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하는 수 없이 태산같이 쌓인 메일을 뒤져 위치 추적기 앱을 찾던 아비게일이 지나가듯 물었다.
“목걸이는 왜? 전에 기능은 관심 없다며.”
“그때는 그랬고. 이제 관심 생겼어.”
손가락에서 이를 떨어뜨린 반이 미소 지었다. 엉망이 된 손톱을 감춘 반은 습관적으로 지은 미소를 금세 거두고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사용법을 모른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기절할 것처럼 날이 선 옆모습을 살핀 아비게일은 판매자가 보낸 앱을 핸드폰에 설치하며 중얼거렸다.
“대략적인 위치는 나온다고 했는데 얼마나 자세한지는 모르겠다.”
간략한 기능만 있는 앱에 목걸이 속 위치 추적기의 일련번호를 입력한 아비게일은 로딩이 끝난 후 액정에 떠오른 이미지를 살펴보다가 눈썹을 쑥 들어 올렸다.
“여기 네 고향 아냐?”
“그러게….”
아비게일과 머리를 맞댄 반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의 핸드폰을 가져왔다. 확대와 축소를 반복한 결과, 느리게 깜박이는 붉은 점이 가리키는 위치는 미셸의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터였다. 심지어 현 위치가 아닌, 몇 달 전에 잡힌 마지막 위치였다.
반은 침음을 흘리며 턱을 괴었다. 하긴 총까지 들이대며 쳐들어와 놓고 타깃의 몸수색을 안 했을 리가 없다. 공터에서 사라졌으니 헬기 따위로 운송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다. 이걸 어쩐다.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반은 불타 버린 집과 멀지 않은 거리에서 깜박이는 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디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난데없이 목걸이의 행방은 왜 궁금해하느냐는 아비게일에게 대답을 얼버무린 다음 날, 반은 몇 푼 남지 않은 잔고로 핸드폰을 구매했다. 아비게일에게 받은 앱을 깔았지만 당연하게도 붉은 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점만 바라보길 열흘째. 저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아이디에게서 연락이 왔다.
***
반은 아비게일에게 빌린, 정확히는 갈취한 가방에 얼마 없는 짐을 쑤셔 넣었다. 하루 뒤면 비행기를 타야 하는 아비게일은 쫓기듯 짐을 꾸리는 반을 꺼림칙하게 응시했으나 더부살이가 떨어져 나가는 만큼 후련하기도 한 표정이었다.
짐이 없어 별반 무겁지도 않은 백팩을 어깨에 둘러멘 반은 고맙게도 현관까지 따라 나와 준 아비게일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 은혜 꼭 갚겠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아비게일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세상 모든 한심함을 끌어모은 듯한 시선을 보내는 친구의 눈을 스르르 피하자 고까운 티를 풀풀 풍기는 물음이 날아왔다.
“어디 가냐?”
가방을 추어올린 반은 이 빌어먹을 상간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의 아비게일에게 멀뚱한 미소로 답했다. 이미 머릿속으로 화끈한 불륜 소설을 써 내리는 중인 아비게일에게 변명해 봤자 말 그대로 변명밖에 더 될까.
“미안. 잘되면 말해 줄게.”
‘잘된다’의 의미가 모호하긴 했지만 반은 정답게 손을 흔들며 긴 시간 신세 진 친구의 집을 등졌다. 등 뒤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깔끔하게 손질한 머리카락이 냉랭한 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흔들렸다.
빈털터리 반은 차를 렌트하는 대신 장거리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이디가 제시한 장소는 이곳에서부터 휴식 없이 달린다면 이틀 안에 도착하는 지역이었다. 느긋하게 간다면 사나흘쯤. 반은 정체 모를 아이디와 잡은 약속을 떠올리며 불편한 좌석에 기대었다.
손수 사인한 각서를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버스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입단속, 행동거지 단속 똑바로 못 하면 남은 평생 감방에서 썩는 수가 있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던 변호사 얼굴이 흐릿했다. 뚱한 낯으로 창밖을 노려보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버스를 타고 생전 발도 들여 보지 않은 지역으로 향하고 있지만 이것은 계약 위반이 아니라 연락 끊긴 할머니를 찾아가는 효심이 지극한 행위일 뿐이다. 겸사겸사 궁금한 것도 해결하고 말이다. 당위성이 충분하다는 말씀이다. 반은 꽤 그럴싸한 합리화에 감탄하며 어느덧 두통이 사라진 머리를 등받이에 묻었다.
“아으, 허리야….”
양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반은 뼈가 엇나간 듯 뻐근한 허리를 툭툭 때렸다. 운동을 게을리한 여파를 온몸으로 받아 내며 황량한 정류장을 둘러봤다. 버스를 갈아탈 때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한겨울 진눈깨비를 흩뿌렸다. 뺨을 스치자마자 녹아내리는 눈발을 손으로 움켜쥐는 시늉을 하며 걸음을 뗐다.
날이 넘어간 시각 변두리 모텔에 도착한 반은 그곳에 딸린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싸구려 패티 맛이 나는 햄버거를 욱여넣으며 하나 있는 스케줄을 확인했다. 아이디 주인과 직접 만나기로 한 날은 내일. 시간은 넉넉했다.
***
그쳤다가 휘날리기를 반복하는 눈발을 헤치고 도착한 카페는 한산했다. 점심때가 지난 평일 낮의 애매한 시간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머리카락에 묻은 눈을 털면서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 반은 메일로 전달받은 인상착의를 찾았다.
때마침 낡고 파란 모자를 눌러쓴 왜소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금방 나온 커피 잔을 들고 카페 구석으로 다가갔다. 작은 테이블에 잔을 내려 두자 모자챙 아래로 분주히 주변을 살피던 남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톰슨 씨?”
“…예. 맞습니다.”
과민한 인상의 남자는 나이를 짐작기 힘들었다. 모자 새로 새치가 삐죽삐죽 튀어나왔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것치고 주름이 깊지 않았다. 젊게 보면 마흔, 넉넉하게 잡으면 쉰쯤 되려나. 거뭇거뭇한 눈 밑과 초췌한 눈빛이 거울 속에서 본 제 모습과 엇비슷했다.
본인을 톰슨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시종일관 주위를 곁눈질하며 정신 사납게 굴었다. 악수를 건넸으나 다른 곳에 신경이 팔린 톰슨 덕에 무참히 무시당한 반은 적당히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잭 스미스입니다.”
친구의 이름을 팔아넘긴 반은 품을 뒤적이다가 이런, 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명함을 안 가져왔네요.”
사방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던 시선을 제자리에 맞춘 톰슨이 신음했다. 잿빛으로 물든 눈썹을 세게 긁적인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정말 기자 맞아요?”
“그럼요. 못 믿으시겠으면 회사와 통화 시켜 드릴 수도 있고요.”
반은 새로 구매한 핸드폰으로 녹음 앱을 켠 뒤 보란 듯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적을 만한 것이 있나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기에 양팔을 겹쳐 올리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빙긋 웃으며 쳐다보았으나 톰슨은 허접한 위장 신분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밝은 빛깔을 띠는 눈알을 굴린 반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의심과 불안이 한데 섞인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하얀 막에서 나오죠? 신생아 형태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톰슨의 게시글에는 빠진 현상이 몇 개 있었다. 그가 의도해서 생략한 것인지는 몰라도. 반이 그중 한 가지를 짚어 내자 흐리멍덩한 눈이 슬쩍 크게 뜨였다. 반은 번드르르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사하고 있었거든요.”
“이 실험에 참가한 다른 사람도 있나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피해 상체를 뒤로 물렸다. 기대감이 차오른 톰슨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잡지사로 비슷한 사례를 얘기하는 제보가 들어왔고, 그와는 톰슨 씨 이전부터 연락을 나눠 왔다며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처진 눈덩이를 찌푸린 톰슨은 처음에 비해 의심이 많이 걷힌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은 몇 번짼데요?”
반은 ‘예?’ 하고 되물을 뻔한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팽팽 돌렸다. 짧은 순간 언뜻 떠오른 것은 미셸이 남긴 기록지였다. 흑백 사진과 짤막한 설명을 나열한 서류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벌어진 입술 새에서 답이 흘러나왔다.
“일곱 번째요.”
톰슨의 주름진 얼굴에서 의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답인 모양이었다. 임기응변으로 그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반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커피를 홀짝였다.
톰슨은 차갑게 식은 제 커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숨을 쉬었다가, 파란 모자를 벗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가, 다시 반을 바라보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마침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나이 든 남자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로 누가 계속 지켜보는 것 같아서요. 그쪽을 완전히 믿기도 어렵고요.”
반은 푹 수그러든 남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아마도 저와 비슷한 계약서를 썼을 톰슨은 기묘한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이 무딘 걸지도 모르지만.
괜히 고개를 든 반은 별다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카페를 둘러본 뒤 남자를 달랬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거, 이해합니다. 저는 그저 톰슨 씨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을 뿐이에요. 정 말씀하시기 어려우면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톰슨을 탈탈 털어 내 정보를 얻을 요량이었지만 겉으로는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다. 의심이 되살아난 눈초리로 흘끔거리는 톰슨을 세 치 혀만 가지고 달래길 십여 분, 차갑게 식은 커피가 술이라도 되는 양 벌컥벌컥 들이켠 톰슨은 그러고도 한참을 뜸 들인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청소부를 구한다는 공고를 봤어요. 아, 정확히는… 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한테서 소개받았어요. 페이가 괜찮았어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거절하기 힘들었죠. 그때 상황이 좀 힘들었거든요. 이력서를 요구하더군요. 그 후에 따로 연락이 왔어요.
첫 감상은… 보안이 정말 엄격하다, 그런 느낌이었어요. 건물 내에서는 ID카드가 없으면 꼼짝도 못 하는 수준이었죠. 저와 함께 고용된 청소부는 다섯 명이었는데, 서로 대화는 금지됐어요. 어딘가 이상해서 그만둘까 생각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수상하지만 페이는 셌고 이 사람들, 그러니까 공부깨나 한 사람들이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하여튼… 저는 두 달 동안 아무것도 없는 방을 청소했어요. 모든 청소부가요. 네. 두 달 동안, 고용된 모든 청소부가 아무것도 없는 방을 일정 시간마다 청소했어요. 사방에 조명이 달렸고, 아. 유리 칸막이가 있는 방이었어요. 다른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어…. 청소를 시켰다고요? 여러 명이서 번갈아서? 대화는 불가고.”
반은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잠시 말을 끊었다. 톰슨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눈이 빛났다.
“사실은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그 방을 청소할 때는 꼭 한 명씩 들어갔어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요. 심지어 방은 언제나 깨끗했어요. 언제나.”
이상한 방을 청소한 지… 두 달쯤 됐나. 유리 칸막이에 뭔가 붙어 있었어요. 칸막이 안쪽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하필 안쪽에 붙어서 닦을 수도 없었죠. 그날부터였어요. 다른 청소부들이 사라졌죠.
거기 있는 선생들에게, 그러니까 하얀 가운 입은 연구원들이요. 예. 선생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는데 조건이 안 맞아서 그만뒀다고만 하더라고요. 그 페이를 저버리고 그만뒀다는 게 이상하긴 했어도 대신 제 페이를 올려 준다고 했으니까요. 저야 당연히 좋았죠.
그때는 몰랐어요. ‘그것’이 절 선택했다는 걸요. 그들은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어요. 부끄럽지만 전 학교를 제대로 다닌 적이 없어요. 그 사람들이 뭐라 뭐라… 얘기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연구를 돕게 될 건데, 할 일은 딱히 없지만, 돈을 지금보다도 더 많이 받게 될 거라고 했죠. 거절할 이유가 없었어요.
당연히 사인했죠. 실수였어요. 그날부터… ‘그것’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아. 전 여섯 번째예요. 우리는 ‘그것’을 편의상 식스라고 불렀죠.
“식스…. 그래서요?”
게시글에는 생략되어 있던 톰슨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몇 번이고 되새겨 본 듯 막힘이 없었다. 톰슨은 어제 겪은 일처럼 확실하게 그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디아에 비하면 현저히 더디지만, 일반적인 사람에 비하면 기함할 속도로 성장하는 06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기고, 걷고, 종국에는 언어를 내뱉는 06을 설명하면서 톰슨은 당연한 두려움보다는 고양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제 피를 이어받은 아이의 칭찬을 늘어놓듯 06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얘기하던 톰슨은 점차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타인이 엿들었다면 소설 얘기를 하는 줄 알았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본론에 가까워질수록 반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갔다. 톰슨이 내뱉은 단어를 곱씹던 반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뇌까렸다.
“…생체 실험이요.”
“예. 저는 아무 권한이 없어서, 식스와 만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마저도 감시하에서 만났지만 흉터를 봤어요. 며칠씩 못 만날 때도 있었고요. 확실해요. 그 사람들이 식스에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어요.”
톰슨은 실험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고 했다. 흉터를 보고 만들어 낸 망상일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반은 톰슨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지만 웨인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기에 마냥 망상으로 치부하지 못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구구절절 생체 실험에 관한 제 추측을 늘어놓던 톰슨은 다 소용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는지 목소리에서 힘을 뺐다.
“식스가 청소년쯤 됐을 때 제게 내일부터 나올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그럼 인사라도 하게 해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죠. 각서를 쓰고 돈을 받았지만….”
“아하.”
막판에 삐끗하는 바람에 돈은 구경도 못 해 본 반은 티슈를 쫙쫙 찢으면서 귀를 기울였다. 머뭇거리던 톰슨은 흐트러진 반의 주의를 한 번에 끌어당기는 이야기를 꺼냈다.
“병원비로 다 나갔죠. 정말 이상한 건 식스와 헤어진 다음 날부터였어요. 몸이 끔찍하게 아파요. 지금도요. 병원에 가도 눈에 띄는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 저는 계속 아프고….”
“아프세요?”
놀라 쏘아붙이자 당황한 톰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톰슨의 증상은 저와 비슷했다. 역시 억측이 아니었다. 열렬한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던 톰슨은 이내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혹시, 제 생기와 맞바꾸어 식스를 키워 낸 게 아닐까 하는….”
입을 떡 벌린 반은 웨인이 언급한 부작용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 동시에 미셸에게 말로 다 못 할 배신감을 느꼈다.
“말도 안 돼….”
해도 해도 너무했다. 하나뿐인 가족을 제물로 바친 미셸의 숭고한 목적의식이 몹시, 미치도록 감탄스러웠다. 톰슨은 반의 탄식을 달리 받아들였는지 침울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말도 안 되죠…. 이런 얘기를 해 봤자 다들 절 음모론자나 정신병자 취급해요. 저도 가끔은 헷갈립니다. 애초에 식스는 없었고, 이 모든 걸 제가 상상해 낸 게 아닐까…. 음…. 바람이 있다면 저는 식스가 잘 있는지, 그거라도 알고 싶어요.”
날로 쇠약해지는 몸 상태를 얘기할 무렵 톰슨의 눈 속에서 번뜩였던 의혹은 어느새 식스에 대한 미련으로 바뀌었다. 반은 저와 비슷한 남자의 반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목이 탄다. 슬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이만하면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판단한 반은 갈기갈기 찢은 티슈를 갈무리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됐어요.”
“저 기사는 언제쯤…?”
“아, 기사.”
새카맣게 잊고 있던 제 직업을 떠올린 반은 씩 웃으며 움켜쥔 주먹을 흔들었다.
“취재부터 해야죠. 열심히, 열정적으로.”
톰슨은 기자보다는 에스코트에 어울리는 잘생긴 남자를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갑갑한 마음에 실컷 진실을 털어놓았지만, 저 뺀들뺀들한 미소는 썩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연구원이 내민 계약서에 사인할 수밖에 없었듯이 톰슨에게는 이번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 반을 붙잡았다.
“참. 연구소에는 접근 금지 구역이 있었어요. 제 ID 카드로는 출입이 불가능했는데, 아마 거기 생체 실험 증거가 있을 겁니다.”
***
모텔로 귀가한 반은 타오르는 노을이 푸르스름하게 죽을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허벅지 근육이 저리도록 다리를 덜덜 떨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굳이 톰슨을 만난 이유는 복합적이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망에 불이 붙었고,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충동이 기름을 부었다. 불투명한 디아의 안위, 미셸에 대한 분노, 약간의 죄책감이 한데 섞여 발길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문제는 막상 마주한 현실이 예상보다 훨씬 참담하다는 데 있었다. 경험한 대로, 자칫 그릇된 선택을 했다가는 무난한 삶에 안녕을 고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런 무모함, 노력해 봤자 돈 한 푼 받지 못할 헛짓거리는 제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다.
“아, 좆됐네….”
고개를 뒤로 홱 젖힌 반은 허공을 퍽퍽 차며 괴로워했다. 헛짓거리고 자시고 자신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한심하고 징글맞았다. 아주 무모하고 그릇된 선택을 할 자신이.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자정이 되기 30분 전.
노점상에서 산 캡 모자를 눌러쓴 반은 구시가지와 동떨어진 도로변에 몸을 숨긴 채였다. 상점이 즐비한 구역에서 몇 블록 떨어진 2차선 도로에는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적은 가로등 수가 한몫할 것이고, 이는 몸을 숨기기 적절한 환경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덜덜 떨던 반은 대기한 지 한 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목표물을 발견하자마자 상체를 낮게 숙였다.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메마른 나뭇가지가 뺨을 스쳤다.
상향등을 켠 탑차는 코너를 꺾기 직전 속도를 낮추었다. 커다란 몸체를 좁은 도로에 맞춰 돌리느라 거북이가 기는 거나 다름없었다. 적기였다. 반은 재빨리 탑차 뒤꽁무니에 붙었다. 컨테이너에 붙은 핸들을 붙잡고 발판을 디디자 코너를 벗어난 탑차가 서서히 속력을 올렸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결이 날카롭다. 이제부터가 관건이었다.
반은 속도가 더 오르기 전에 팔에 힘을 바짝 주고 오른쪽 도어를 고정한 걸쇠를 풀었다. 모든 과정은 운전자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고 조심스러워야 했다. 다행히 손잡이를 눌러서 당기면 열리고,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는 시스템이어서 수고를 덜어 주었다. 캠핑카 문과 흡사한, 작은 창이 있는 도어를 힘겹게 연 반은 틈새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윽….”
매서운 바람이 얇은 옷감에 감싸인 몸을 할퀴고 갔다. 식은땀이 이마를 적셨다.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 미끄러지고도 남았으리라. 반은 컨테이너 안에 상체를 구겨 넣고 남은 다리까지 천천히 집어넣었다.
속도가 붙음에 따라 바깥쪽으로 확 열리려는 무거운 도어를 끙끙거리며 당겼다. 소음이 최소화되도록 주의를 기울인 끝에 도어를 닫는 데 성공한 반은 그대로 쓰러져 대자로 뻗었다.
“진짜 내가 이러다 죽지….”
손아귀는 저릿저릿하고 잇새에서는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달리는 차를 잡아탄다거나 악력만으로 매달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는데 정말 체력이 많이 떨어지긴 한 모양이었다. 반은 추위와 긴장으로 깡깡 언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아닌 밤중에 좀도둑처럼 지나가던 트럭에 숨어든 까닭이 무엇이냐. 톰슨이 말하기로, 연구소가 위치한 군사 지역은 경계가 삼엄해 허가된 차량만 진입이 가능했기에 본인도 연구소에서 보내 주는 차량만 이용했다고 한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연구소로 들어가는 물품 호송 트럭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물품 호송 트럭을 미행하길 바라는 듯했지만 반은 조금 더 대책 없는 짓을 저질렀다.
시가지에서 연구소가 있는 군사 지역으로 빠지는 길목은 하나였고, 반은 그곳을 지키고 있다가 의심스러운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올라탔다. 트럭이 오가는 정확한 시간대를 몰랐으니 모조리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택배 트럭에, 또 한 번은 마트 납품 트럭에 올라타는 바람에 난처한 상황을 겪었지만, 이번만큼은 예감이 좋았다.
쉴 만큼 쉰 반은 점퍼 안주머니를 뒤져 손전등을 꺼냈다. 캡 모자와 함께 구매한 손전등은 싼 값을 했지만, 사물 분간만 가능하다면 상관없었다.
손전등을 입에 물고 트럭 내부에 차곡차곡 쌓인 물품을 하나씩 확인했다. 세 개의 냉동 박스에는 식료품과 레토르트 식품이 있었고, 휴지, 수건, 옷가지, 영양제며 안경 따위의 필수품과 개인용품이 각각의 박스에 분류되어 있었다. 마트 납품 트럭치고는 양이 적었기에 반은 이 트럭이 정답임을 확신했다.
트럭은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던 트럭이 어느덧 느려지기 시작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자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다. 조심스럽게 일어난 반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창으로 다가갔다.
손자국을 남길 수는 없어 눈을 가깝게 대고 내다보자 브레이크등의 붉은 불빛으로 물든 외부가 언뜻 드러났다. 트럭이 느리게 나아가자 뒤편으로 출입 제한이라고 적힌 바리케이드가 비쳤다.
트럭이 완전히 멈춤과 동시에 반은 냉동 박스 뒤편의 좁은 틈으로 뛰어들었다. 길쭉한 몸을 꾸역꾸역 구겨 넣고 적재물을 덮는 낡은 천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바람에 얼굴만 슬쩍 내놓은 찰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수고 많으십니다. 여기 ID 카드요.”
운전사의 목소리일 것이다. 반은 무사히 통과되길 바라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트럭은 좀체 출발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규칙적인 발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제대로 안 잠그셨습니까?”
모르길 바랐는데 딱 걸리고 말았다. 도어를 열고 숨어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안에서 바깥 걸쇠를 잠글 능력은 없었다. 이를 어쩐다, 하며 눈을 굴리던 반은 저를 바라보는 샛노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비명이 튀어나올 뻔한 입을 간신히 틀어막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남은 걸쇠가 덜커덩 풀리고 묵직한 도어가 양쪽으로 열렸다. 손전등으로 내부를 비추던 군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있는 곳으로 빛을 돌렸을 때 새카만 물체가 확 튀어나왔다. 어깨에 메고 있던 소총을 겨눈 군인은 풀숲 사이로 사라지는 고양이를 말없이 응시하다가 경계를 풀었다. 운전석에서 빠져나온 운전사가 변명을 얹었다.
“몰래 들어갔나 봅니다. 요즘 통 정신이 없어서.”
“…예. 알겠습니다.”
활짝 열린 도어가 닫혔다. 반은 트럭이 도로 출발하자마자 쿵쿵 뛰는 심장 부근을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저를 도와준 사랑스러운 고양이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반은 검문소와 거리가 벌어질 때까지 냄새나는 천을 걷지 않았다.
트럭은 비포장도로를 느리게 달렸다. 반은 덜컹거리는 바닥을 짚고 기다시피 창으로 다가갔다. 빼꼼 내다보자 저 멀리 조명을 밝힌 검문소가 보였다. 검문소를 중앙에 두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구역을 두른 살벌한 철조망에는 ‘군사 구역’, ‘통행 불가’ 따위의 섬뜩한 경고 팻말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언제나 호선을 그리는 반의 입꼬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일 줄이야. 냅다 저질렀지만 슬그머니 후회됐다. 지금이라도 술 취해서 잘못 올라탔다고 싹싹 빈 다음 도망갈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줏대 없는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잠든 디아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반은 물기라고는 없이 바싹 마른 나무와 무성하게 자란 잔디가 삭막한 수풀처럼 우거진 땅을 둘러봤다. 수영을 좋아하고 로맨스 영화를 숭배하는 디아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무릎을 안은 반은 함께한 시간만큼 긴 헤어짐에도 한 군데도 퇴색되지 않은 디아를 떠올리다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큰일이다, 정말.
황무지를 달리던 트럭은 이내 콘크리트 벽돌을 줄지어 둔 것 같은 건물의 지하로 들어섰다. ID 카드 없이는 꼼짝도 못 한다는 톰슨의 이야기대로 운전사는 트럭을 중간중간 멈추고 인식기에 카드를 가져다 댔다.
인식기가 초록색으로 물든 뒤에야 바닥까지 내려온 철문이 위쪽으로 스르르 열렸고, 트럭이 지나가면 곧장 내려와 퇴로를 막았다. 반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하는 창밖을 흘깃흘깃 살피며 꼼꼼히 포장된 물품을 뒤졌다. 원하는 것을 얻은 뒤 뒤적거린 흔적은 깔끔하게 지웠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운전사는 트럭에서 내려 가져온 물품을 카트에 나눠 실었다. 창고용 회색 공간에 바퀴가 돌돌 굴러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냉동 박스 뒤에서 몸을 일으킨 반은 벽에 납작하게 붙은 채로 그의 동향을 살폈다.
거대한 파렛트랙이 열을 맞춰 늘어진 공간은 대형 마트나 인테리어 매장의 물품 보관 창고를 연상시켰다.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는 널찍한 공간에 다른 인기척은 없었지만, 입구 부근에 CCTV가 달려 있었다.
멋대로 나갔다가는 한밤중 도로에서 곡예를 펼친 보람도 없이 감옥행일 터다. 반은 카트를 밀고 가 선반 위에 박스를 통째로 올려 두는 운전사의 행동을 눈여겨보다가 잽싸게 냉동 박스 속으로 돌아갔다.
“엇….”
트럭과 선반을 왕복하여 대부분의 박스를 제자리에 둔 운전사는 마지막 냉동 박스를 들어 올리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이렇게 무거웠나, 하며 뚜껑을 살짝 열어 보자 다소 흐트러진 레토르트 식품 박스가 보였다.
검문소를 통과할 때 트럭에서 뛰쳐나온 고양이를 떠올린 운전사는 ‘이번 목록에 고기가 많긴 했지’ 하고 납득하며 묵직한 박스를 카트로 옮겼다. 그는 선반을 지나쳐 냉동 창고 안에 박스를 집어넣고 트럭으로 돌아갔다.
트럭이 지하에서 빠져나가고, 웬만한 충격으로는 금도 가지 않을 두께의 철문이 외부로 향하는 길을 막았다. 냉동 박스가 들썩인 때는 그로부터 5분 뒤였다.
“악, 추워…!”
반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레토르트 식품 박스를 헤집고 나왔다. 얼음을 얼마나 깔아 놨는지 조금만 더 있었다가는 동상에 걸리고도 남았을 거라며 욕을 짓씹었다. 작지도 않은 몸을 접고 또 접느라 삐끗한 것 같은 허리를 두드리며 팔뚝에 코를 묻었다. 생고기 냄새가 은은하게 밴 탓에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냉동 박스 밑에 잔뜩 깔려 있던 고깃덩이는 지금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천에 감싸여 트럭 짐칸에서 숙성되고 있을 것이다. 운전사에게는 여러모로 미안한 일이었다.
양손으로 옷을 턴 반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손전등으로 밝혔다. 이곳저곳을 비추어 보며 이곳이 식료품을 보관하는 냉동 창고임을 알아차렸다. 냉동 창고 안쪽까지 CCTV를 달아 둘 리는 없으므로, 반은 편히 훔쳐 온 것을 꺼냈다.
실험용 가운을 걸치고 개인 물품일 안경은 알을 빼고 안경테만 썼다. 안경을 부탁한 연구원에게 미안하게 됐다만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다. 여럿에게 미안할 일을 만들면서 제법 그럴싸한 변장을 마친 반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냉동 창고를 빠져나갔다.
냉동 창고 문을 닫고 금속으로 된 프레임에 제 모습을 비춰 보던 반이 문득 미간을 구겼다. 안경까지 썼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원치고는 지나치게 잘생겼다.
“큰일이다, 큰일이야….”
더벅머리가 되도록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한탄했다. 이래서야 변장이 들켜도 어쩔 수 없다고 한숨지으며 탐색에 나섰다.
실온 창고 선반을 듬성듬성 채운 박스를 무작위로 열어 봤지만 쓸 만하거나 수상한 물건은 없었다. 죄 과학실에서나 보았던 알 수 없는 기계나 도구뿐이었다. 반은 혹여나 제 모습이 CCTV에 찍히더라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게끔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파렛트랙 미로를 빠져나와 창고와 연결된 복도로 발길을 돌렸다.
폭은 좁고 천장은 높은 복도 역시 새벽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새파란 형광등 빛이 그득했다. 기묘할 정도로 아무도 없는 길을 쭉 걸어 나가자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상승 버튼만 있는 엘리베이터는 2층에 멈춘 상태였다. 다른 길은 없었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짚어 보자. 반은 작은 용병 회사 출신으로, 잘 훈련된 군인이나 스파이가 아니다. 머리는 나빴지만 힘은 조금 썼는데, 그마저도 운동을 게을리한 지 오래였다. 달리 말해 상당히 위험하며 막막한 상황이었다. 짧은 고민을 끝낸 반은 버튼을 꾹 누르고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었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천천히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꽤 넓은 엘리베이터 안에 냉큼 올라탄 반은 1층과 2층 중 1층을 골랐다.
연구소는 A, B, C동으로 나뉘어 있으며 동마다 ID 카드의 허가 레벨에 따라 출입 가능 인원이 제한되었다. A동은 창고와 식당이 있어 운전사나 용역, 군인이 자유로이 출입했지만, 그들조차 검문소에서 한번 걸러진 필요 인원들이다. B동은 연구원의 숙소와 연구실 따위가 있으며 톰슨에게 허락되었던 구역이다. 이곳에서 톰슨은 식스를 키웠다.
마지막으로 C동. 접근 금지 구역이며 소수의 인원만 출입할 수 있다. 일을 그만두기 전, 톰슨은 식스를 C동으로 옮긴다는 연구원들의 대화를 엿들었다고 한다. 생체 실험에 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확신한 그 구역이기도 하다. 구름다리로 이어진 각 동을 돌아다니려면 제한 레벨에 맞는 출입용 ID 카드가 필요했다.
현재 연구원으로 변장한 반에게는 어떠한 카드도 없었다. 고로 반에게 부여된 첫 번째 미션은 ‘ID 카드 훔치기’였다. 그러나 수월하게 건물로 숨어드는 데 오늘 치 운을 다 썼는지 통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 2시에 가까워진 시간 탓도 있을 것이다.
반은 외부가 보이지 않게 설계된 새하얗고 길쭉한 건물을 요리조리 돌아다녔다. 로비와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너른 공간에는 제 발소리와 공기 정화용 팬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과도하게 밝고 깔끔한 건물은 도리어 오싹하게 느껴졌다. 손에 적외선 촬영이 되는 캠코더가, 주머니에 여분의 배터리가 있다면 딱 공포 게임 체험이겠다며 혀를 찬 반은 지하와 마찬가지로 천장이 까마득하게 높은 로비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대강당과 소규모의 강의실, 피트니스 센터가 있었다. 물론 이곳들 또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증발하고 저 홀로 남은 듯한 기분에 휩싸인 반은 코너 끝에서 사라지는 가운 자락을 보자마자 속으로 환호했다.
발소리를 죽인 채로 광활한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코너를 꺾자 키가 멀대같이 큰 연구원의 뒤태가 보였다. 머리와 발을 잡고 쭉 늘려 놓은 듯 호리호리한 남자는 거미 다리 같은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걸어갔다.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따라붙은 반은 바닥만 내려다보는 연구원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클라크 박사님은 어디 계시나요?”
“C동에 계시겠죠.”
연구원은 피로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미셸이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있다는 힌트를 얻은 반은 이죽거리듯 웃다가 대화를 이어 갔다.
“아하. 뭐, 식사하고 오시는 길?”
“아뇨, 오늘 안경이 온다고….”
그때야 고개를 들어 곁을 돌아본 연구원이 걸음을 늦추었다. 졸린 눈을 한 남자는 멀끔한 낯짝을 멀뚱멀뚱 응시했다. 시선은 안경원에 특별히 주문하여 그 모양을 똑똑히 기억하는 안경테에 꽂혔다가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이 건물에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걸어야 하는 ID 카드가 없는 가슴팍과 익숙한 안경테, 생전 처음 보는 낯짝을 번갈아 보던 연구원이 걸음을 완전히 멈추었다.
반은 차차 바뀌는 남자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역시 이런 얼굴로 연구원 행세는 무리였나 보다.
“읍, 으븝!”
“이따가 풀어 드릴게요, 예?”
반은 손을 탁탁 털며 인자하게 웃었다. 입에 장갑을 물고 양손은 넥타이로 꽁꽁 묶인 채로 캐비닛에 처박힌 연구원이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창백한 얼굴에 비뚤게 얹힌 안경이 안쓰러움을 불러일으켰지만 반은 동성에게는 유달리 냉정해지는 부류였다.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닙니다. 이따가 봐요?”
“읍…! 으읍!”
캐비닛 문을 쾅 닫고 남은 장갑 한 짝으로 손잡이와 걸쇠를 한데 묶었다. 충분히 탈출 가능한 수준으로 묶어 둔 것은 최소한의 배려였다.
반은 미션을 클리어하여 얻은 ID 카드를 목에 걸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공부만 한 놈들 제압하는 것은 골골거리는 몸 상태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두 번째 미션을 받은 반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B동으로 향했다.
확실히 ID 카드 없이는 전진이 어려웠다. 구름다리를 건너기 전 두 번, 건넌 후 한 번 인식기에 카드를 가져다 대야만 굳게 닫힌 철문이 좌우든, 상하든 활짝 열렸다. 알이 없는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B동에 도착한 반은 보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탐방을 시작했다. A동과 달리 새벽임에도 좀비처럼 돌아다니는 사람이 몇 있었기에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B동은 복도를 양쪽으로 나누어 연구원들의 개인 방을 늘어놓았다. 모든 방은 문에 난 작은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작은 침대에 웅크리고 잠든 연구원들을 흘긋흘긋 확인한 반은 실험실이 자리한 공간까지 거침없이 진입했다.
탁자 수 대가 놓인 실험실 중앙에는 글씨와 그림이 빼곡한 칠판이 여럿 있었는데, 불행히도 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201호, 202호, 203호라고 팻말이 붙은 모든 실험실을 돌아다녀도 마찬가지였다. 용을 써서 들어오긴 했는데 뭐 알아볼 수 있는 게 있어야지. 입술을 삐죽인 반은 실험실에서 빠져나와 텅 빈 복도를 걷다가 한 곳에서 멈추어 섰다.
큼지막한 유리창을 통해 내부가 훤히 보이는 방이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팻말이 붙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선 반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여기는….”
미셸의 집 지하실이었다. 아니, 미셸의 지하실과 흡사한 구조를 가진 투명한 방이었다. 새하얀 방을 가로지른 유리 벽과 유리 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 아마도 톰슨이 식스를 만났을 그 방.
반은 상당히 넓음에도 불구하고 가구랄 것이 없는 방을 찬찬히 둘러봤다. 분명 복도에서는 내부가 보였는데, 방 안에서 바라본 복도 쪽 유리창은 시커멓게 죽어 반을 거울처럼 비추었다.
유리 벽을 마주하자 무사히 잠입하고 ID 카드를 얻음으로써 차오른 자신감이나 들뜬 마음가짐 따위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풀 한 포기 없고 하늘 한 점 보이지 않는 백색의 방은 세상과 완벽하게 격리된 공간이었다.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고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반은 보았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하실에서 웃고 떠들고 칭얼거리던 디아의 잔상이 백색의 공간에 덧씌워졌다.
연구소에 화재가 나 연구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더라면 만날 일도, 서로의 존재를 알 일도 없었을, 타인 중의 타인인 디아가 유리 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채근했다. 얼른 이곳으로 돌아오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조르던 아이는 눈을 깜박이자마자 사라졌다.
반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렸다. 식은땀이 이마를 적셨다. 이유 모를 불안이 엄습하며 토기가 치밀었다. 입을 틀어막으며 돌아서자 새카만 창에 제 모습이 비쳤다. 꼴 보기 싫을 만큼 심각한 표정을 한 남자의 낯에 혼란은 없었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 대뇌를 부유하던 목적의식이 한 지점을 명확히 가리켰다.
디아를 찾아야 한다.
반은 뒷걸음질 쳤다. 도망치다시피 방을 벗어나 C동으로 향하는 복도를 질주했다. 드디어 디아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충돌했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고 숨은 가빠졌다. 이 모든 반응이 영악한 디아가 제게 심어 놓은 거짓된 감정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는 안일한 마음이 들었다.
디아의 안위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코너를 꺾는 연구원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정면으로 부딪친 반은 살짝 비틀거리고 말았으나 체구가 작은 연구원은 악, 비명을 지르며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네, 네. 괜찮아요.”
반은 허둥지둥하다가 습관적으로 연구원을 일으켰다. 주저앉아 사방으로 흩어진 서류를 한 장씩 모으자 덩달아 쪼그려 앉은 연구원도 서류를 주워 들었다. 얼추 모은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해 넘긴 반은 고개를 든 연구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급하게 어딜….”
미미한 미소가 감돌던 연구원의 입매가 직선을 그렸다. 눈치 빠른 연구원은 대번에 반이 이곳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위기를 인식하고 스르르 일어난 반은 연구원이 벨트에 매달린 수신기로 손을 뻗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부리나케 뛰었다.
연구원은 소리를 지르거나 쫓아오지 않았다. 반은 A동보다 복잡하게 얽힌 복도를 뛰어가며 수시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해물은 두 번째 코너를 도는 즉시 나타났다. 반은 복도 끝에서 다가오는 군복 차림의 두 사람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C동은 군인이 가로막고 선 복도 방향에 있었다. 돌아갈 길이 없다는 의미다.
“선생님. 잠시 ID 카드 확인이 있겠습니다.”
“…예. 여기요.”
쿵쾅거리는 심장을 감춘 반은 가슴팍에서 달랑거리는 ID 카드를 내보였다. 미끄러진 안경을 추어올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거미 같은 남자를 흉내 냈다. 카드 모서리를 잡은 군인은 태블릿으로 연구원의 이름을 입력하고 등록된 사진과 반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살폈다.
아주 짧은 순간이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태블릿을 보던 군인이 곁의 군인에게 눈짓했다. 변장이 탄로 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반은 군인의 어깨를 밀치고 내달렸다.
“잡아.”
뜀박질만큼은 자신 있었지만 한창 운동할 때의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복도와 방이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층에서 도주하는 것은 난이도가 상당했다. 달리는 속도를 못 이기고 넘어지다시피 마지막 코너를 돈 반은 길쭉한 복도를 맞닥뜨렸다. 구름다리가 보였다.
흰 가운을 휘날리며 길쭉한 복도를 달려 나가는 반의 뒤로 군인 둘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그들은 그를 잡으려고만 할 뿐 허리춤에 찬 권총을 꺼내 들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딱딱하되 예의 차린 어투로 반을 만류하고 나섰다.
“잠시 멈추세요!”
하지만 반은 그런 것들을 일일이 깨달을 만큼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기능이 떨어진 폐가 고통을 토했다. 마침내 구름다리에 발을 디디자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반을 끌어안았다. 돔 형태로 하늘을 인 불투명한 지붕과 기둥 사이로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옷감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C동 입구 앞에 도착한 반은 뒷덜미를 잡히기 전에 인식기에 ID 카드를 가져다 댔다. 문이 열리기만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때, 반을 반긴 것은 붉은색으로 물든 인식기와 무미건조한 기계음이었다.
[출입 권한이 없습니다.]
한시가 급해 죽겠는데 인식기가 말썽이었다. 반은 카드를 연이어 인식기에 가져다 대며 당장 튀어 나갈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인식기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출입 권한이 없습니다.]
“…뭐?”
핏기가 싹 빠져나가면서 사색이 됐다. 연구원 하나를 잡아 획득한 ID 카드와 C동을 가로막은 철문을 멍청한 얼굴로 번갈아 보던 반은 제가 적절하지 않은 연구원을 사냥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실수도 이런 실수가 없었다.
욕이 혀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필 골라도 자질구레한 연구원을 고를 건 또 뭐람. 억울해하며 철문을 걷어찰 즈음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 군인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잠깐 진정하시죠. 모시겠습니다.”
“뭘 모셔요! 잡아갈 거면서!”
철문에 등을 딱 붙이고 선 반이 짜증스럽게 반박했다. ‘어떻게든 되겠지’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목적을 바로 앞에 두고 감옥행이라니. 이럴 수는 없었다.
곧 죽어도 못 간다는 양 거머리처럼 매달려 버티는 반을 기다리던 군인은 하는 수 없이 구름다리로 올라서며 말을 이었다.
“로비에서 기다리시면 박사님께서….”
박사님께서…, 그다음 말은 귀를 찢는 폭발음에 파묻혔다. 꽝! 굉음 속에 연이은 충격이 쏟아졌다. 공중에 붕 떴다가 내동댕이쳐진 반은 본능적으로 귀를 꽉 틀어막고 웅크렸다.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센 진동이 전신을 집어삼켰고, 사방에서 빗발친 크고 작은 파편이 온 피부를 할퀴었다.
반은 시각과 청각을 잃었다. 두통이 일 정도로 귀를 세게 틀어막은 손을 떼어 냈지만 들리는 것은 이명뿐이요,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보이는 것은 시꺼먼 어둠뿐이었다.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마신 반은 곧장 기침을 토해 냈다. 매캐한 연기의 맛이 입과 코에서 느껴졌다.
“컥! 켁…!”
엎드린 채로 밭은기침을 토하던 반은 겪어 본 적 있는 화기를 느꼈다. 피부를 지글지글 익히는 공기와 폐를 시커멓게 태우는 잿더미의 냄새. 강렬한 감각이 꾹 눌러 감은 눈꺼풀 위로 치솟는 불길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기억 속 화마는 감히 막을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거센 강도와 속도로 디아가 존재했던 흔적을 깡그리 말소시켰다. 몸을 옹송그린 반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맸다.
“아…. 으윽….”
먹은 귀로 삐이, 하는 잡음이 섞여 들었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을 말아 주먹을 움켜쥐자 손톱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을 시작으로 손끝부터 감각이 되살아나며 활활 치솟는 눈앞의 불길이 점차 흐려졌다.
잡음이 와글와글 굴러다니는 귓구멍으로 날카로운 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득하고 조그맣던 소음은 시시각각 커지더니 이내 귀청을 때리는 사이렌 소리로 바뀌었다. 시야를 덧칠하듯 메운 것이 어둠이 아니라 새카만 연기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불타오르는 2층 주택의 환영이 완전히 깨졌다.
그을음을 뒤집어쓴 반은 엎어진 상체를 주춤주춤 일으켰다. 무언가에 부딪히고 두들겨 맞은 듯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뺨과 손등에 마구잡이로 생긴 생채기에서도 따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부릅뜬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비쳤다.
“무슨….”
밤하늘보다 더욱 짙은 빛깔의 검은 연기가 구름다리를 뒤덮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받치고 있던 지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타닥타닥 튀는 불꽃과 함께 피어오른 연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광활한 들판을 돌아 불어오는 바람이 연기를 흩트려 놓자 너울너울 흩어지는 검은 장막 너머로 끔찍한 현장이 엿보였다.
군인이 있었을 구름다리가 사라졌다. 거대한 발톱으로 할퀸 듯 다리 절반과 B동 입구는 한쪽 난간만 아슬아슬하게 남기고 뜯겨 나갔다. 가장자리로 나동그라지면서 폭발 중심지에서 간신히 비껴 난 반은 골조가 노출되어 끄트머리부터 바스러지는 다리를 곁눈질했다.
건물 층고가 높은 데다가 폭발로 인해 움푹 팬 탓에 바닥이 어디쯤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검은 연기는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고 고여 군인의 생사마저 확인할 수 없었다.
당최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넋이 나간 채로 경광등이 번쩍이는 B동을 바라보던 반은 또 한 번 이어지는 폭발에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정확히 B동을 노린 폭발이었다.
“악, 진짜…!”
강한 바람에 부서진 건물 파편이 날아왔다. 날을 잘못 잡아도 단단히 잘못 잡은 반은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다리를 황급히 둘러봤다. B동으로 돌아가는 것은 죽겠다는 의미고,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했다.
남은 것은 C동으로 넘어가는 것뿐인데, 반에게는 C동에 출입할 ID 카드가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신은 반을 저버리지 않았다.
“저거….”
C동 입구를 막은 철문이 폭발에 휩쓸리며 우그러져 있었다. 잘만하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반은 깊은 강이나 다름없는 장애물도 발견했다. B동과 C동을 잇는 다리가 반파된 탓에 철문이 우그러진 부분 아래로는 발 디딜 곳이 없었다. 폭발로 인해 다리 중앙까지 튕겨 나온 반이 개구멍까지 가려면 공중을 날거나 망가진 수수 빗자루처럼 튀어나온 철근에 몸을 의지해야 했다. 둘 다 여러 방면으로 문제가 많은 선택지였다.
“아, 진짜…. 아 씨, 내가 왜….”
반은 울기 직전인 표정으로 경보음이 울리는 B동과 철근을 빠르게 살피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디아. 디아만 생각하자. 현재 목표는 하나였다. 디아를 찾는 것.
눈을 번쩍 뜬 반은 까진 살갗에 스며든 피와 먼지로 더러운 손바닥을 가운에 문질러 닦았다. 비정상적으로 샘솟은 용기와 다짐이 꺼지기 전에 부서져 내리는 다리 부근으로 기어갔다. 1년 전이었다면, 하다못해 제정신이었다면 죽어도 고르지 않을 선택지를 고른 반은 걸리적거리는 가운과 안경을 벗었다.
뼈대만 남은 다리 철근을 타고 가다가 C동에서 튀어나온 철근으로 갈아타야 했다. 오로지 팔심과 운에 목숨을 맡기는 짓이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철근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발을 미끄러뜨렸다.
“윽…!”
철근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난간에 붙어 있었지만 이미 살짝 기울어진 상태였다. 철근에 비스듬히 누인 몸이 언제 콘크리트 덩어리와 함께 아래로 추락할지 몰랐다. 반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로 조금씩 목표 지점으로 다가갔다.
마침내 철근이 끝나는 곳까지 왔으나 그럼에도 우그러진 입구와는 거리가 꽤 됐다. 이제 죽든 살든 한 가지 결론만 남을 순간이 왔다. 반은 철근 다발을 딛고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았다. 그런 다음, 두려움이 결단을 망치기 전에 손을 뻗으며 뛰어올랐다.
“흡…!”
잠시간 공중에 뜬 반은 C동에서 튀어나온 철근을 꽉 붙잡는 데 성공했다. 남은 손으로 다른 철근을 붙잡는 것까지도 성공했으나 사방에서 불어오는 재가 섞인 바람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이토록 고생스러운 경험은 앞으로 결코 없으리라. 입술을 질끈 깨물고 부실해진 팔뚝에 힘을 주자 절로 괴로운 신음이 튀어나왔다.
허공에 뜬 전신을 끌어 올려 우그러진 철문의 안쪽을 움켜쥔 반은 한평생 써 본 적이 없을 만한 힘을 내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다.
“크윽…!”
얼기설기 튀어나온 철근이 허벅지를 긁었다. 악문 어금니와 턱이 뻐근하게 아팠고, 핏대가 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어깨를 비틀어 작은 구멍에 상체를 집어넣자 드디어 후들거리는 무릎이 골조에 닿았다. 바닥을 짚고 허리부터 발끝까지 통과하는 것은 까다롭지 않았다. 그야말로 녹초가 된 반은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아, 후우…. 와아….”
이런… 미친 짓을 해내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며 스스로에게 감탄한 반은 C동 안에 울리는 어마어마한 사이렌 소리를 잠시 잊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대로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디아가 악몽을 꿨냐며 땀을 닦아 줄 것 같았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모두 말도 안 되는 꿈이기를. 그러나 천장에 달린 경광등이 시뻘건 조명을 쏘아 대며 현실 도피하는 반을 일깨웠다. 요란스러운 사이렌이 다시 달팽이관을 공격했다.
“아야….”
욱신거리는 상체를 일으킨 반은 찢어진 바지의 천을 살짝 들치고 상처를 확인했다. 철근 모서리에 길게 그인 상처는 얕지 않았지만 못 움직일 정도로 깊지도 않았다.
짧은 휴식을 끝내고 일어서자 번쩍번쩍거리는 빨간 조명에 휩싸인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뒤 구린 건물에 침입자가 발생하자 이런 식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영화를 디아와 함께 본 기억이 있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사이렌까지 합쳐지자 왜 영화 속 주인공이 그토록 겁을 집어먹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따위 분위기를 만들어 낸 침입자의 정체는 자신이 아닐 것이다. 폭발물 같은 건 소지하지도 않았고 만들어 낼 능력도 없었으니까. 반은 눈을 내리깔았다. 짚이는 구석이 있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추리 능력이 아니라 ID 카드였다.
“하아….”
긴 한숨이 샜지만 오갈 길 없이 갇혔기 때문에 쉬는 한숨은 아니다. 허리에 손을 얹은 반은 통제 기계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빠른 속도로 개폐를 반복하는 복도의 철문들을 노려봤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열렸다 닫혔다… 난리도 저런 난리가 없었다.
공포 게임에서 목숨을 건 탈출 게임으로 장르가 바뀌었다. ID 카드가 없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안도감이 떠오르다가도 닫히는 속도와 철문의 두께를 보면 희한한 자살 시도 방법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치솟았다.
만약 죽는다고 하더라도 철문에 끼어 죽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쾅쾅 닫히는 문으로 뛰어갔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철문을 간신히 통과하고 좌우로 닫히는 문도 아슬아슬하게 돌파했다.
나머지 철문 역시 미끄러지듯 통과했으나 조금만 덜 미끄러졌다가는 머리통이 부서질 뻔한 위기가 있었다. 상처가 벌어진 허벅지를 짓누르다가 벌떡 일어난 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달려 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C동 실험 구역은 B동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폭발 탓인지 새벽임에도 대낮같이 형형하던 형광등은 모조리 꺼진 상태였고 천장에 달린 경광등만이 정신 사납게 번쩍였다. 형광색으로 빛나는 비상구 표시등과 새빨간 조명이 뒤섞여 암울하고 황폐한 인상이었다.
그곳에는 이제껏 드문드문 보이던 연구원들이 죄 모여 있었다. 정확히는 유리로 구역을 나눈 사무실 안에서 각기 다른 일을 빠른 속도로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험한 꼴로 나타난 반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로 무언가를 소각하고, 무언가를 상자에 담고, 무언가를 지웠다.
반은 숫제 사명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연구원들 사이를 절뚝이며 지나갔다. 기관총을 들이밀고 쏘는 시늉을 해도 본체만체할 분위기였다. 기묘한 광경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예상과 달라도 한참은 다른 상황을 불안하게 둘러보던 반의 발치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든 반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진을 들여다봤다. 사진 속에는 헐벗은 소년이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부터 허리까지 나온 소년은 흐릿한 금발만 아니었다면 흑백 사진이라고 착각할 만큼 푸르스름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입술, 얇은 눈꺼풀, 어깨까지 전부 푸르뎅뎅했다. 마치 얼린 다음 찍은 것처럼 말이다. 반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몰래 안도했다. 이 소년은 디아가 아니었다.
손에서 사진이 떨어졌다. 고개를 든 반은 수십 장의 사진이 핀으로 고정된 벽을 발견했다. 연구원이 없는 구역이었다. 유리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정렬된 사진을 눈에 담았다.
귀에서 피가 흐르는 사진과 짤막한 메모, 떨어진 손톱 사진과 짤막한 메모,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등 사진과 짤막한 메모, 관통당한 피투성이 어깨와 회복하는 과정이 담긴 사진, 부러진 다리, 잘린 머리카락, 떨어져 나온 치아….
사이렌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반은 숨도 쉬지 못하고 붙박인 채로 참혹한 사진들을 뜯어봤다. 혹여라도 이 속에 디아가 있을까 봐 기억하는 소년의 특징을 끄집어냈지만 좀처럼 맞춰지지 않았다. 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손톱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 어깨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것처럼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반은 뒤로 물러나며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고, 때마침 분주한 걸음으로 구역에 들어온 연구원은 넋이 나간 반을 흘긋 살피더니 벽에 꽂힌 사진을 몽땅 떼어 내 파쇄기에 밀어 넣었다. 갈기갈기 찢긴 사진 조각을 모아 홀에 있는 소각기로 가져가는 연구원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반은 불에 덴 듯 정신을 되찾았다.
“…디아.”
톰슨은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한 것이 아니었다. 고로 반은 제 손으로 연구소에 팔아넘긴 디아를 찾아야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온 이유, 죽을 각오를 하고 C동으로 넘어온 이유는 전부 디아 때문이었다. 누군가 귀에 대고 스타트 건을 발사했다. 반은 단번에 바닥을 박차고 혼잡한 홀로 튀어 나갔다. 허벅지에서 흐른 피가 바지를 적셨다.
은폐를 끝마친 연구원들은 복도 구석구석 설치된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벽인 줄 알고 지나쳤던 승강기를 돌아봤으나 이미 문은 닫힌 후였다. 버튼과 층수를 표시하는 계기판조차 없는 승강기는 반이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했다.
“하아….”
옷이 땀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로 범벅됐다. 살갗에 쩍쩍 달라붙는 옷감이 거슬렸다. 들이마시는 공기와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눅눅한 옷감처럼 깊은 불쾌감을 유발했다. 그 어디에도 디아는 없었다.
살아 숨 쉬듯 일렁거리는 복도를 달리고 또 달려 나간 반은 마침내 막다른 곳에 도착했다. 여태껏 지나쳐온 철문 중 가장 견고하고 너비가 대단한 철문이 길을 가로막았다.
C-12라고 적힌 봉쇄 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ID 카드가 필요했고, 아까처럼 문이 고장 나는 요행은 없었다. 모든 신경 회로가 이곳에 디아가 있음을 가리켰다.
“진짜, 씨…! 미셸! 이거 안 열어?”
돌벽 같은 철문을 쾅쾅 걷어찼다. 몰래 잠입해서 디아를 찾겠다는 태초의 취지는 물 건너가고 반에게 남은 것은 악다구니와 뻔뻔함뿐이었다. 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이 발목을 덮쳤지만 문은 꿈쩍도 안 했다.
제 발길질을 못 이기고 나동그라진 반은 씨근덕거리며 봉쇄 구역을 노려봤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딴 문에 가로막히다니.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이렇게 된 이상 대피하는 연구원 하나를 붙잡고 카드를 갈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끙끙거리며 바닥을 짚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미동도 없을 것 같던 철문이 열렸다. 뚝 쪼개지듯 양옆으로 열린 문 너머로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그래서 고향에 발을 딛게 하고 우습지도 않은 의뢰를 받아들이게 한 하나뿐인 가족이 장장 2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반과 닮은 부분이라고는 처진 눈매가 고작인 노인은 두꺼운 파일을 옆구리에 끼우고 발을 뗐다. 미셸은 대뜸 직장에 나타난 손주를 보고도 놀란 기색 없이 재게 걸어 나왔다. 그는 얼어붙은 반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벙커로 가야 해. 따라와. 놀고 있을 때 아니야.”
연구소에 기어들어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반응에, 반은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나 노인의 뒤를 따랐다. 정말로 시급한 모양인지 노인의 걸음은 빨랐다. 혈관에 흐르는 피도 새파랄 것 같은 미셸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반은 극적인 해후를 반길 상황도, 그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안 건드린다며.”
달싹이던 입술 새로 으르렁거리는 힐난이 터져 나왔다. 반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승강기로 향하는 미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전할 거라고 했잖아!”
주름진 눈꺼풀을 들어 올려 반과 시선을 맞춘 미셸은 여상한 표정이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따위의 냉정한 대답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걸리적거리는 반을 밀어낸 미셸은 앞서 연구원들이 잡아탄 승강기를 지나쳐 복도를 빠져나갔다.
“무슨 상관이야? 돈 받고 계약 이행했으면 끝난 거지. 그것도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다른 승강기 앞에 도착한 미셸은 인식기에 카드를 대며 별 의도 없이, 늘 그랬던 것처럼 반을 대했다. 말문이 막힌 반은 열린 승강기에 올라타는 노인을 응시하다가 물었다.
“…디아 어디 있어?”
“차라리 직장 동료인지, 그 친구 집에 계속 얹혀살지 그랬어.”
미셸은 질문을 무시했고, 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주친 군인과 연구원의 요란하지 않은 태도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톰슨의 과대망상은 전부 진실로 밝혀졌다.
경찰서에서 고초를 겪을 때, 아비게일의 아파트에 얹혀살 때, 톰슨과 접선할 때, 트럭에 숨어들어 우습지도 않은 변장을 할 때까지도 미셸은 타인의 눈을 통해 지켜보고, 이를 보고받았을 것이다. 배신감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인간이었으니. 안일한 이는 자신이었다.
승강기 문이 닫히지 않도록 발을 끼워 넣은 반이 빈정거리며 쏘아붙였다.
“그럼 내가 왜 왔는지도 알겠네.”
노인은 한시가 급한 상황에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탐탁지 않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시적인 종속이야. 몇 달만 지나면 기억도 안 날 거다. 어차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빨리 타기나 해. 지금쯤 들어갔어야 했어.”
“걔 어디 있냐고!”
“객기 부리지 마. 편의 봐줄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야.”
반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미셸을 노려봤다. 이게 다 누구 탓인지 도통 자각이 없는 듯했다. 저답지 않은 객기를 부리도록 만든 디아를 떠넘긴 당사자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다시 제게 쏘아지는 눈빛 속에 조급함이 떠올랐고, 반은 손을 휙 뻗어 미셸의 목에 걸린 ID 카드를 낚아챘다. 누구는 이기적으로 못 굴 줄 아나.
“내가 뒤지면 할머니 책임인 건 알아 둬.”
디아를 제게 맡긴 책임은 미셸이 져야 할 것이다. 승강기 문을 받치던 발을 쏙 빼자 문이 저절로 닫히며 줄만 남은 목걸이를 건 미셸의 황당한 낯이 가려졌다. 반, 하고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한 반은 통제 구역으로 달음박질쳤다.
반에게는 디아가 아직 이곳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서로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면, 그것이 마냥 일방향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뛰어 들어간 통제 구역 안에는 보다 넓고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얼룩지는 경광등 불빛이 아니었다면 눈부시도록 새하얀 색을 띠었을 복도를 가로질러 도착한 홀은 수많은 모니터로 가득했다.
한꺼번에 전원을 내린 듯 새카맣게 죽은 모니터 너머로 격리된 방의 일부분이 보였다. 복도를 따라 늘어진 방은 문과 벽의 경계가 흐릿해 대체 몇 개나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숨을 헐떡이며 방을 비추는 유리창에 붙은 반은 텅 빈 공간을 샅샅이 훑다가 한 칸 떨어진 방에서 나오는 군인을 발견했다. 방독 마스크를 쓴 두 명의 군인은 시체용 가방 손잡이를 쥔 채로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반은 조심스럽게 살핀다거나 인기척을 없애는 여유를 부릴 겨를도 없이 시체용 가방을 향해 돌진했다.
벙커와 직결되는 승강기로 서둘러 이동하던 군인은 달려드는 반을 가까스로 막아 냈다. 마스크에 막혀 더욱 음산해진 음성이 경고를 날렸다.
“물러서십시오.”
“아, 확인만 할게요! 예?”
소년의 신장과 비슷한 길이의 가방에 시선을 고정한 반은 잡힌 팔목을 비틀며 실랑이했다. 군인은 반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팔뚝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빨리 떼어 내.”
“아니, 잠깐! 잠깐만!”
가방 손잡이를 한 명에게 넘긴 군인이 양손으로 어깨를 쥐고 그를 저지했다. 반은 멀어지는 검은 가방을 애타게 바라보다가 군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기습 공격에 당황한 군인이 움찔하자마자 그를 밀치고 가방에 들러붙었다.
갑작스럽게 매달린 무게에 군인이 손잡이를 놓쳤고, 반은 바닥에 떨어진 시체용 가방의 지퍼를 쥐는 데 성공했다. 뒤에서 자신을 붙잡은 군인이 목을 압박해도 팔에 힘을 주어 끝까지 채운 지퍼를 내렸다. 반쯤 열린 지퍼 틈새로 섬뜩할 정도로 창백한 피부를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어….”
“시간 없다. 빨리!”
힘이 빠진 손에서 지퍼가 빠져나갔다. 군인은 당혹스러운 낯을 한 반을 내팽개치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군홧발이 바닥을 척척척 딛고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반은 쫓아가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저것은 디아가 아니었다.
어느새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에 익숙해진 귀에 이명이 번졌다. 물속에 처박힌 듯 모든 소리가 힘을 잃고 가라앉았다. 붉은색으로 번쩍이는 바닥을 내려다보던 반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똑같은 색, 똑같은 형태, 똑같은 크기의 방들 위를 느리게 나아가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온종일 긴장 상태를 유지한 근육과 관절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나아가는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내부를 투명하게 보여 주는 유리창 앞에 도착한 반은 방독면을 쓴 채로 시체용 가방에 무언가를 분주히 집어넣는 군인 둘을 발견했다. 건장한 체격에 가려져 내용물은 일부만 엿보였다.
힘없이 늘어진 다리가 검은 천 안으로 옮겨졌고,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매끄러운 생김새의 발이 반의 눈동자에 담겼다. 가지고 있는 신발은 아무것도 맞지 않아 슬리퍼를 건네주어야 했던, 그 발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반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곧장 돌아보는 군인에게로 몸을 던진 반은 함께 쓰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킨 순간 거센 기침이 터져 나왔다.
“큽…!”
반사적으로 입과 코를 가렸으나 손가락 틈새로 스며드는 매캐한 가스는 막을 수 없었다. 일순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겨우 세운 상체가 크게 흔들렸다. 독한 가스를 들이마신 반이 엎어지자 그 틈을 타 지퍼를 채운 군인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황급히 방을 나서던 군인은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발목이 붙잡혔다.
“크윽….”
군인의 발목을 붙든 반은 남은 손을 가방으로 뻗었다. 손끝을 스친 거칠거칠한 촉감은 손아귀로 들어오지 않고 빠져나갔다. 반은 따끔거리는 눈을 치켜뜨고 군인의 종아리를 잡아당겼다. 성가시다는 듯이 혀를 찬 군인은 방해꾼을 걷어차려는지 무릎을 당겼다.
“방해 그만하고….”
그때, 압축된 공기가 빠르게 쏘아지는 소리가 나더니 군인이 휘청거렸다.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
탕! 날카로운 총성이 다시 한번 울렸다. 오염되지 않은 하얀 벽에 피가 후드득 튀었다. 굳건했던 군인의 무릎이 맥없이 꺾였다. 벽에 뒤통수를 박고 쓰러진 군인의 머리 부근에서 번진 핏줄기가 새하얀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어질어질 흩어지는 정신을 겨우 유지하던 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총성 탓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동료를 잃은 군인이 경계 태세를 갖추는 대신 느닷없이 권총을 빼 들어 시체용 가방을 겨눈 탓이었다. 반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군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넘어졌고, 발포된 총알은 천장으로 날아갔다.
“뭐 하는 짓이야, 미친놈아!”
넘어진 군인의 허리에 올라탄 반은 권총을 쥔 손을 강하게 움켜쥐고 소리 질렀다. 놀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소란스럽게 뛰었다. 군인은 격렬하게 버둥거리며 이를 갈았다.
“놔! 위급 시 사살하라는 명령이다!”
“그게 뭔 개같은…!”
억지로 내리누른 군인의 팔이 점차 위로 올라왔다. 이곳에 당도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져 있던 반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을 줬지만 역부족이었다. 더는 버틸 여력이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적과 코앞에 있는 적. 마침내 찾아냈으나 상태를 확인할 수 없는 디아가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한데 뭉쳐 빙글빙글 돌아갔다. 군인의 매서운 주먹이 옆구리에 꽂히며 상체가 옆으로 무너졌다. 팔이 자유로워진 군인은 지체할 것 없이 검은 가방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고, 경악한 반이 손을 뻗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단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반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얇은 눈꺼풀이 눈알을 가리자마자 뜨끈한 액체가 얼굴로 쏟아졌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자비한 힘으로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했던 군인이 소리 없이 쓰러져 내렸다. 피를 뒤집어쓴 반은 눈을 뜨지 못한 채로 제 위로 엎어지는 군인의 몸뚱이를 받아 내야 했다.
박동을 멈춘, 단번에 숨이 멎은 사람의 무게는 한순간 호흡이 턱 막힐 만큼 육중했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과 딱딱하게 굳어 가는 가슴이 맞닿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실을 맞닥뜨리기 두려워 눈을 뜨지 못하는 반의 귓가로 매우, 몹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언제쯤 오나 했어.”
느릿한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머리맡까지 다가온 기척은 잠시 멈췄다가 끼익, 하고 바닥을 세게 짓이기며 방향을 틀었다.
“한 번에 처리하는 게 편한데 빈둥거리기나 하고.”
반은 갑갑할 정도로 눌러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시야는 희뿌옇게 물들어 사물만 간신히 분간됐다.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손을 끌어와 액체가 엉겨 붙은 속눈썹을 닦았다. 아무렇게나 눈꺼풀을 문지른 손바닥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아비게일… 이었던가? 늘 붙어 다니던. 그쪽이 성격은 좋았는데.”
이 일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프라이버시는 아예 없는 모양이었다. 웃고 싶었지만 웃을 힘이 없었다. 익숙한 목소리를 가진 놈은 발끝으로 군인의 어깨를 들어 시체를 치워 주었다. 생명이 꺼진 육신이 널브러지며 내는 소리는 의외로 무미건조했다.
시린 눈을 수차례 깜박여 눈앞을 감싼 막을 없앤 반은 우뚝 선 장신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새카만 차림새, 단단한 방탄모를 착용한 남자가 눈 밑까지 덮은 복면에 검지를 걸고 아래로 내렸다. 훤히 드러난 얼굴을 마주한 반은 피 맛이 감도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놈이었다.
“…살아 있었냐?”
“지겹게도.”
수개월 만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난 웨인이 씨익 웃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치고는 제법 멀쩡한 남자의 뒤로 그와 똑같은 차림의 사람 서넛이 들어왔다. 살갗 한 점 노출되지 않도록 온몸을 꽁꽁 감춘 그들은 살벌하게 무장한 채였다. 체격이나 서 있는 자세만 봐도 훈련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복면을 끌어 올려 얼굴을 덮은 웨인이 눈짓하자 무장한 무리가 다가와 널브러진 가방을 쑥 들어 올렸다. 그러나 가방은 쉽게 들리지 않았다. 선두를 차지한 복면 중 하나가 아래를 흘깃 내려다봤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선 손이 가방끈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
악착같이 가방끈을 놓지 않는 손과 호박색 눈동자 속에 활활 타오르는 적개심을 무감하게 훑은 웨인이 군홧발을 뒤로 당겼다. 다음 순간 묵직한 힘으로 뻗어 온 다리가 반의 배를 걷어찼다.
“컥! 커흑…. 우윽….”
가방끈을 놓친 것은 물론이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간 반은 헛구역질에 가까운 기침을 토해 냈다. 명치를 제대로 맞는 바람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고통에 바닥을 헤집는 사이 디아는 사라지고 새하얀 방 안에 웨인과 단둘이 남게 됐다. 그는 느긋하게 걸어왔다.
“나는 분명 기회를 줬어. 기회가 있을 때 선택을 잘했어야지. 너도 그렇고… 디아도 그렇고. 그럼 이런 고생도 없었을 텐데.”
“이, 개새끼가 진짜….”
식은땀이 흥건하게 맺힌 반은 핏발 선 눈으로 웨인을 노려봤다. 앙금이 있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사람 배를 걷어찰 건 뭐란 말인가. 똑같이 갚아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반이 바닥을 짚자마자 어깨를 걷어차였다. 훌떡 떠밀려 날아간 몸이 침대 프레임에 부딪혔다. 튕겨 나오다시피 쓰러진 순간 의식이 살짝 흐려졌다.
“아…. 큭…!”
내도록 달리고 뛰어넘고 넘어지고 구른 육체가 한계에 도달했다. 이렇게 누워 있을 게 아니라 웨인을 때려눕히고 디아를 되돌려받아야 한다는 의욕은 변함없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질 않았다.
“클라크.”
권태로운 음성이 먹먹해진 귀로 파고들었다. 반은 바닥을 굳게 디디고 선 웨인을 멍하니 응시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뻔뻔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든 고분고분 따를 테니 디아를 만나게 해 달라고, 남은 자존심을 전부 내려놓고 빈다면 놈은 들어줄까.
그래도 몇 번 몸 섞은 사이인데 그 정도 부탁쯤이야 들어줄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할 무렵 벨트를 매만지던 웨인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 시커먼 총구가 겨누어졌다. 방아쇠에 검지를 얹은 채로 잠시 침묵한 웨인이 말을 이었다.
“네가 나름대로 매력적이긴 하지만… 일을 그르칠 정도는 아니라서.”
반은 힘없이 눈을 깜박였다. 미쳤냐고 묻고 싶은데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하물며 늘어진 사지는 또 어떻고. 피할 수도 없고 대들 수도 없었다.
목덜미를 내놓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꼴을 한 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웨인은 넌지시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즐거웠어.”
총성은 고통과 같은 속도로 반을 덮쳤다.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다고 생각했는데 고통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목구멍에서 피를 토하는 비명이 터졌다. 발포된 총알이 찢어진 허벅지 살을 가르고 근육을 완전히 관통했다. 아프다는 말로는 차마 다 설명이 되지 않는 괴로움이 전신을 에워쌌다.
“헉, 후윽…!”
권총을 수납하고 소총으로 바꿔 든 웨인은 피가 둥글게 퍼지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반을 내려다보다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걸음을 돌려 시체 두 구와 곧 시체가 될 반이 널브러진 방을 빠져나가던 웨인은 복도를 밟기 직전 뒤를 돌아봤다.
더는 발악할 힘도 없는지 축 늘어진 남자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탄약 냄새가 감도는 복도로 뛰어나가는 웨인의 발걸음에 미련은 없었다.
“하아, 후윽…. 큭….”
새하얀 방에 홀로 남은 반은 경광등 빛이 번쩍이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간당간당한 의식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삶에 대한 의지가 허벅지에 난 구멍을 통해 모조리 빠져나갔다.
괴로운 고통은 점차 사라지고 입술이 달달 떨릴 정도의 추위가 닥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감각해졌다. 편안하다고 해야 할지, 피곤하다고 해야 할지. 저를 두들겨 패는 것으로 모자라 총까지 쏘고 사라진 웨인에게 화가 나지도 않았다. 할 만큼 했으니 좀 쉬고 싶을 뿐이었다.
곧이어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려왔다. 멀지 않은 위치에서 터졌는지 바닥에 딱 달라붙은 몸으로 강한 진동이 전해졌다. 또 한 번 쾅! 하고 폭발이 일면서 높은 천장과 벽에 금이 쩍 갔다.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졌지만 손을 들어 가리거나 몸을 굴릴 수 없었다. 반은 천장 한 면이 무너지는 광경을 두 손 놓고 바라보았다.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오면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던데, 반에게는 별달리 보이는 것이 없었다. 단지 마지막으로 디아를 보지 못했다는 것, 결국 새침한 소년의 뺨을 다시 한번 만져 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만 남았다.
이따위로 죽을 줄 알았다면 소년이 간질간질하게 굴 때 못 이기는 척 진짜로 넘어가 주는 거였는데. 양심 같은 건 집어치우고 파렴치한 속내를 인정하자 비로소 한결 가뿐해졌다.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의식까지 흐려지기 시작했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나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마저 자취를 감출 무렵, 게슴츠레 뜬 눈에 지저분한 가운 자락이 스쳤다. 죽기 전에 보는 환각치고는 영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관심도 없고, 이제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반은 아래로, 아래로 밀려 내려오는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겪어 본 적 없는 고요가 찾아왔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