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01.
플레이오프 진출을 결정짓는 야구 경기가 열리는 금요일 밤, 단골이 줄을 잇는 펍 ‘폭스트롯’은 그 어느 때보다 시끌벅적했다. 바를 중심으로 곳곳에 설치된 TV를 통해 야구 중계가 흘러나왔다. 대화보다 경기에 집중한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고 팔을 흔들어 가며 각자의 팀을 응원했다.
폭스트롯에서부터 네 블록 떨어진 쇼핑몰에 근무 중인 직원은 빽빽한 인파를 헤치고 겨우 바에 도착했다. 퇴근 후 술 한잔할 요량이었건만 이토록 붐빌 줄은 몰랐던 탓에 약간 짜증이 난 상태였다. 직원은 분주한 바 안쪽을 두리번거리다가 근처에 있는 남자 바텐더를 불렀다.
“저기요!”
인파가 대단한 만큼 소음도 심해 목청을 한껏 키워 부르자, 막 데킬라를 건네주고 고개를 돌리는 바텐더와 눈이 마주쳤다. 눈치 빠른 바텐더는 금방 가겠다는 듯이 씩 웃었다. 쇼핑몰 직원은 저도 모르게 오, 하고 감탄했다. 웃는 게 몹시 귀여운 남자였다.
다른 손님의 계산을 끝내고 다가온 남자는 이런 대도시에서도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페일 에일 두 잔을 주문하자 능숙하게 맥주를 뽑아낸 남자가 커다란 잔을 밀어 주었다. 넘겨준 카드로 계산하는 사이 남자는 간단한 대화를 걸어왔다. 목소리도 제법 괜찮았다.
“누구 응원해요?”
“야구는 딱히 안 좋아해서요. 축구면 몰라도.”
그러니 오늘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 알았겠냐며 한탄하자 남자가 바 너머로 상체를 기울이며 카드를 돌려주었다.
“사실 저도 그래요.”
인기 많은 것이 신기하다며 속닥거리고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웃는데, 별 얘기가 아님에도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건 야구를 싫어하는 동지에게 주는 서비스라면서 쿠키를 슬쩍 건넨 남자는 다른 손님의 부름에 눈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이 근처 베이커리에서 파는 쿠키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테이블로 돌아온 쇼핑몰 직원은 친구에게 맥주를 건네며 물었다.
“여기 자주 온다고 했지?”
“가끔. 왜?”
“저 바텐더 알아? 저기 검은 머리에 키 큰 남자.”
홀이 워낙 북적이는 바람에 허리를 휙휙 기울여 가며 쇼핑몰 직원이 가리키는 방향을 살핀 친구가 알은체했다.
“아…. 반?”
“반? 이름이 반이야?”
“응. 반 클라크였나. 귀엽지? 성격도 괜찮아.”
한산한 때 오면 말동무로 삼기도 좋고 얼굴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며 남자를 좋게 평가한 친구가 이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직원의 눈길이 한층 소란스러워진 바로 돌아갔다. 단골인지, 팔을 크게 벌리며 들어온 단체 손님 중 한 명이 바텐더의 목을 휘감고 뺨에 입을 맞췄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골고루 볼 키스를 받은 바텐더는 싫어하는 기색 없이 그들을 맞이했다. 농담을 들었는지 활짝 웃는 남자를 바라보던 친구는 이 펍에 자주 들르는 사람은 모두 아는 바텐더의 장점이자 단점을 알려 주었다.
“가벼워서 탈이지. 감상용이야, 감상용.”
때마침 역전 홈런이 터지며 사방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홀을 뒤흔드는 함성에 눈살을 찌푸린 직원은 그럴 줄 알았다며 감상용 바텐더가 준 쿠키를 까먹었다. 다디단 맛이 났다.
***
취객들이 바닥에 흘린 술을 모두 모아 담으면 오크통 두 개는 나올 것이다. 흠뻑 젖은 대걸레를 짜내느라 다섯 번이나 왕복한 반은 오만상을 쓴 채로 마지막 구역을 깔끔히 닦았다. 축축하게 젖은 대걸레를 널어 두고 의자와 테이블을 정리하자 얼추 퇴근할 시간이었다. 반은 외투를 챙겨 입으며 주방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홀은 끝났는데. 아직 할 거 많아요?”
일손이 필요하다면 조금 돕고 갈 생각이었지만 줄리아도 마침 뒷정리를 끝낸 모양이었다. 됐다며 손을 내저은 줄리아가 재고 목록을 들어 보였다.
“재고 확인하고 들어가게. 가면서 쓰레기 좀 버려 줘.”
“넵. 내일 봐요.”
코에 안경을 걸친 줄리아가 조심히 들어가라며 인사했다. 흔쾌히 물러난 반은 묵직한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두 개씩 들었다. 사장을 제외한 모든 스태프가 퇴근한 가게를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반은 뒷문에 위치한 쓰레기 수거함에 봉투를 내던지고 손을 털었다. 선선한 밤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앗아 갔다.
“윽….”
허리를 숙인 반은 줄곧 욱신거리던 허벅지를 짚었다. 유달리 분주한 날이어서 내도록 서 있다 보니 몇 시간 전부터는 살짝 절기까지 했다. 펍에서부터 아파트로 가는 데도 한참 걸리니 조금 쉬었다가 가는 편이 좋을 듯했다. 쓰레기 수거함 옆에 쌓인 나무 상자에 걸터앉은 반은 저린 다리를 쭉 펴고 한숨 돌렸다.
지저분한 뒷골목, 파리한 빛을 뿜는 가로등, 은은한 쓰레기 냄새. 스물여덟의 반은 창백하고 흐린 하늘과 쥐 죽은 듯 고요한 마을에 익숙했지만, 서른이 넘은 반에게 익숙한 것은 건물 사이로 보이는 빽빽한 빌딩 숲과 잠들지 않는 대도시였다.
2년에 걸쳐 일상으로 자리 잡은 환경은 아무렇지 않다가도 때때로 위화감을 일으켰다. 오늘처럼 한창 바쁘다가 썰물이 휩쓸고 나간 것처럼 한가해지는 날에는 특히 더했다. 반은 종종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이렇게 위화감이 드는 날이면 반은 짧은 꿈처럼 느껴지는 과거를 돌아보고는 했다.
***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반은 낯선 병원에서 눈을 떴다. 침대에 고정된 몸은 성한 구석이 없었다. 총알이 허벅지를 관통했고 갈비뼈는 수 대나 골절됐다. 손목과 발목 인대가 늘어나고 뇌진탕으로 인한 어지럼증 때문에 일어나 앉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죽음은 생각보다 시시하다는 감상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는데, 어쩌다가 병원에 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료진들이 보일 때마다 그들을 붙잡고 누가 자신을 입원시켰는지 물어봤으나 아무도 제게 입원까지의 전말을 알려 주지 않았다. 얼른 회복해서 꺼지라는 듯 냉정하게 굴 뿐, 정상적인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TV나 인터넷을 뒤져 보아도 군사 지역에 위치한 연구소가 습격받았다거나 무너졌다는 소식은 한 줄도 없었으며, 미셸에게서 연락이 오지도 않았다. 생사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천문학적인 금액의 병원비를 계산하고 갈 만한 사람은 미셸뿐이었기에, 반은 그 노인네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확신했다.
어떤 각오로 연구소에 잠입했는데 얻은 것 하나 없이 이 꼴이 되다니. 억울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무참히 깨진 반은 원하든, 원치 않든 오래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아직 젊은 덕에 회복은 빨랐으나 허벅지가 말썽이었다. 주요 혈관이 손상되지 않은 덕에 불구 신세는 면했지만 오래 서 있거나 과도한 운동을 하면 총알 자국 남은 다리를 미세하게 절었다.
반년에 달하는 치료와 재활을 마친 반은 버려지다시피 세상으로 나왔다. 수중에 남은 돈은 정말이지 티끌 수준이라 만사태평했던 반을 패닉에 빠트렸다.
퇴원한 반은 1년 반 동안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방황했다.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 탓이 아니었다. 디아를 빼앗긴 후 밤낮없이 반을 괴롭혔던 부작용이 몸을 지배한 탓이었다. 그 지독했던 나날들은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다. 종교를 맹신하는 친구 중 하나는 악령이 들린 게 분명하다며 신부를 찾아가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2년 전, 일시적인 종속이라던 미셸의 말이 증명됐다. 갈수록 쇠약해지고 우울해지던 몸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잠들었던 날 바로 염치없는 생활을 청산한 반은 지인의 지인인 줄리아를 우연히 만나 그의 펍에 취직했다. 지금은 월급을 쪼개 살인적인 집세를 감당하면서, 신세 졌던 지인들에게 밥 한 끼씩 사 주는 소소한 삶을 영위하는 중이다.
대체로 즐거웠고 그런대로 살 만했다. 그러나 오늘이 생애 최고의 날인 것처럼 웃다가도 간혹 비현실적인 소년이 생각나고는 했다. 그럴 때면 무력감과 함께 아득한 그리움이 찾아왔다. 주머니는 가볍고, 사람을 추적하는 특별한 기술도 없는 반은 결국 사라진 소년을 찾지 못했다. 뭐, 찾고자 했던 것도 이제 옛날 일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품으로 돌아간 소년이 건강히, 잘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것은 하루빨리 포기하는 것이 심신에 이롭다는 진리를 몇 번이고 되새기면서 이루어 낸 자기 위안이다.
“…집에나 가자.”
또 쓸데없는 청승이 길어졌다. 통증이 줄어든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탁 내리치고 일어섰다. 가벼운 운동으로 근육을 회복한 양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면서 흐릿한 소년의 형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펍에서 15분쯤 떨어진 블록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는 반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됐다. 치안이 별로고 건물이 낡았으며 좁고 시끄럽다는 단점이 있지만, 비교적 집세가 저렴하다는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 있었다. 승강기처럼 사치스러운 편의 시설이 없는 아파트로 들어간 반은 계단을 느릿느릿 올라 3층에 도착했다.
현관 잠금에 열쇠를 끼워 넣자마자 고래고래 내지르는 고함이 얇은 벽을 뚫고 귀에 꽂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부싸움을 해 대는 옆집은 오늘도 박 터지게 싸우는 중이었다. 저렇게 싸울 거면 결혼을 왜 했을까? 도통 이해할 수 없어 어깨를 으쓱인 반은 방음 따위 되지 않는 방으로 들어섰다.
반쯤 졸면서 샤워를 끝낸 그는 머리카락을 말릴 힘도 없이 침대로 쓰러졌다. 판자인지 벽인지 가끔 구별이 안 되는 벽 너머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넘어왔다. 한바탕 싸우고 섹스로 마무리하는 루틴 역시 여느 때와 같았다. 빙그르르 굴러 저릿한 다리를 위로 쳐든 반은 우중충한 천장을 올려다봤다.
한때 금으로 도배된 수영장과 화려하기 짝이 없는 고급 주택을 꿈꿨는데, 현실은 서 있기도 힘든 부엌과 비좁은 침실이 딸린 아파트라니. 인생 참 제 마음대로 안 된다며 혀를 찰 무렵, 곁에 던져둔 핸드폰이 울렸다. 피곤했던 반은 번호를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예에….”
- 왜 연락이 없어?
“…응?”
생소한 목소리가 대뜸 타박했다. 핸드폰을 떼어 내 화면을 확인하자 저장이 안 된 번호였다. 이 시간에 대체 누가 이렇게 허물없이 전화를 거나 싶어 잠시 망설이는 사이 상대방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 내 연락처 저장 안 했어?
연락처를 저장 안 했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반은 상당히 어린 느낌이 묻어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다가 지난주의 참사를 떠올렸다. 느리게 달랑거리던 다리가 뚝 떨어졌다.
“아…. 아, 그.”
- …맥스.
“어, 맞아. 맥스. 이 시간에 웬일이야.”
- 연락한다고 하고 안 했잖아. 그때 그렇게 가 놓고.
어떻게 집까지 왔으면서 그따위로 가 버릴 수가 있냐, 일주일 동안 연락 안 한 이유가 뭐냐, 문자는 왜 무시하냐, 설마 내 이름 잊은 거냐, 그새 다른 사람 생긴 거냐….
속사포처럼 쏘아 대는 맥스의 힐난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반은 시간을 확인했다. 무려 새벽 3시였다. 조금 전까지 이름도 기억 못 한 사람과 정답게 통화할 시간은 아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피곤해지는 목소리는 센치한 밤과 어울리지 않았다. 매너를 집어치운 반은 눈가를 비비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맥스의 말을 막았다.
“미안한데, 내가 좀 피곤하다. 다음에 연락하자, 어?”
- 잠깐만, 반…!
답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자 약간의 틈을 두고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부르르 떨리는 핸드폰을 엎어 베개 밑에 밀어 넣은 반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짜증 가득한 발길질을 쏟아부었다. 그마저도 다리가 아파 격렬하게 하지는 못했다. 잠이 싹 달아난 반은 대자로 뻗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 씨….”
정정해야 할 것이 있다. 소년이 남긴 부작용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딱 한 가지의 부작용. 그것도 아주 성가시고 참담한 부작용이 수년째 반을 괴롭히고 있었다.
***
밤잠을 설친 반은 하품을 쩍 하며 장 본 것을 정리했다. 어젯밤까지 텅텅 비어 있던 냉동고에 레토르트 식품을 빽빽하게 채우고 오늘 밤에 마실 맥주는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가볍게 뛰고 오느라 땀에 젖은 트레이닝복을 세탁기에 던져둔 뒤 깨끗하게 씻고 나오자 벌써 정오였다. 길거리 구경 좀 하면서 천천히 걸어가면 출근 시간과 맞물릴 듯했다.
아파트에서 빠져나온 반은 자주 들르는 서점으로 향했다. 대형 서점이 밀고 들어오는 와중에도 30년째 꿋꿋이 건물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뱃속을 간지럽히는 책 냄새가 풍겼다. 반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정면으로 보이는 카운터를 지키는 노인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점심 먹었어요?”
매주 한 번씩은 들렀으니 친분이 생길 법도 한데, 일보다는 휴식이 필요해 보이는 늙은 서점 주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에 든 샌드위치를 슬쩍 들어 보였다. 물건은 사지 않고 구경만 하는 진상 손님을 향한 불만스러운 눈길을 능청스럽게 넘긴 반은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빼곡하게 꽂힌 책을 쓸어 보다가 손에 잡히는 것을 꺼냈다. 장을 휘리릭 넘기자 불면에 시달리던 무수한 밤을 달래 주던 냄새가 코를 스쳤다.
한평생 활자와 친해 본 적 없는 반은 당연하게도 책을 읽거나 살 목적으로 서점에 들르는 것이 아니었다. 지인의 집에 머물 적, 잠을 자지 못해 정말 죽을 것 같던 날이 있었다. 그때 책 여러 권을 머리맡에 두고 그 냄새에 파묻히면 그나마 잠이 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침대나 카펫에, 또 소파에 늘 책을 널브러뜨려 두던 소년의 나쁜 버릇에 길든 탓이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불면증이 사라진 현재, 반은 동네 서점에 들러 책 냄새를 맡는 취미가 생기고 말았다.
베스트셀러 코너와 신간 코너를 쭉 둘러보는데 문득 새빨간 책등을 가진 책이 눈에 띄었다. 홀린 듯이 책장에서 책을 빼낸 반은 어딘가 익숙한 제목을 읽자마자 입을 벌렸다.
<복수를 꿈꾸는 연하의 101가지 보복법>.
…이게 시리즈였다고?
황급히 책 커버를 확인하자 <저돌적인 공략법>부터 시작해 <다툼>, <이별>, <복수>, <재회>까지 이어지는, 그야말로 연애의 수순을 총망라한 연애 참고서였다.
코웃음도 나오지 않는 연애 참고서를 도로 꽂아 넣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새빨간 책등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에 이는 파문은 강렬해졌다.
반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발길을 돌렸다. 소년을 연상시키는 책이 꽂힌 책장을 지나쳐 신간 매대에 깔린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용도 모르는 소설책을 카운터로 가져가자 안경을 밀어 올린 노인이 의외라는 듯이 쳐다봤다.
“…웬일로?”
“구경값. 이 정도면 되죠?”
반은 농담을 던지며 지갑을 꺼냈다. 어림도 없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찬 주인은 샌드위치 소스가 묻은 손을 닦고 계산을 치렀다. 느릿느릿 잔돈을 꺼내는 노인을 기다리던 반은 미간을 찌푸리며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막 점심을 먹을 시간인지라 길을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주위를 유심히 살폈지만 작은 서점에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선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착각인 듯했다. 이게 다 이상한 연애 참고서 시리즈 때문이라며 책임을 돌린 반은 얼떨결에 구매한 소설책을 옆구리에 끼고 펍으로 향했다.
***
반은 시원시원하게 뻗던 걸음을 뚝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 위치한 뒷골목은 이른 저녁에도 으스스했지만 그렇다고 수상한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발을 뗐지만 개운하지 않은 마음은 여전했다.
서점에 들른 후로 사흘째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이 일상을 따라다녔다.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외출할 때도 집요하게 들러붙는 시선은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대번에 알아차릴 정도로 조심성 없었다. 알아 달라는 건지, 모르는 줄 알고 저러는 건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펍 뒷문에 도착한 반은 불시에 발을 휙 돌려 지나온 골목으로 돌아갔다. 뒤를 밟던 기척이 샛길로 후다닥 몸을 숨겼다. 재빠르게 쫓아가 들여다보자 벽에 등을 붙인 남자가 깜짝 놀란 듯 펄쩍 튀어 올랐다. 반은 두 눈을 부릅뜬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눈썹을 구겼다.
“…맥스?”
새벽에 전화를 걸더니 며칠 내내 전화와 문자 폭탄을 보내 결국 연락처를 차단하게 한 그 남자였다. 이제까지의 수상쩍은 시선에 확신이 생긴 반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계속 훔쳐보던 게 너였냐?”
“내가 언제…!”
놀란 것도 잠시, 발끈한 맥스가 한 발짝 가까이 왔다. 누르스름한 가로등 빛에 남자의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지저분한 금발에 갈색에 가까운 녹안을 가진 스물셋 남짓의 남자는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다가 대뜸 불만을 터트렸다.
“네가 전화도 안 받고 답장도 안 하잖아. 딴 새끼 생긴 거면 말이나 해 주든가….”
“뭐라는 거야…. 작작 해라. 연락도 그만하고.”
더 들을 가치가 없었다. 반은 손을 내저으며 온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나 뒷문에 닫기도 전에 맥스가 팔뚝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창피도 모르고 버럭버럭 소리 지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가는 게 어딨는데! 네가 먼저 꼬셔 놓고!”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지. 반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 남자 새끼들은 얽혀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펍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데이트 한번 하자고 끈질기게 조르기에 몇 번 만나 줬더니 제멋대로 선을 넘는다. 반은 붙잡힌 팔을 털어 내며 한참 어린 남자를 대강 달랬다.
“내가 그때 술이 좀 취해서. 미안하다. 어? 깔끔하게 끝내자. 나이도 어린 놈이…. 그냥 또래 만나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사리 분별 못 하고 이런 놈을 골라잡은 제 잘못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반은 미인보다는 미남 범주에 속하는 맥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돌아섰다. 그러나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악에 받친 고함이 발목을 잡았다.
“네가 발기 부전인 게 왜 내 탓인데! 한 번만 더 해 보자고!”
어찌나 목청이 큰지 좁은 골목길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때마침 뒷문을 열고 나오려던 줄리아의 둥그레진 눈과 마주친 반은 이를 악물었다.
“아, 진짜….”
당황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자리를 지키는 줄리아를 등진 반은 울분에 차 씩씩거리는 맥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지르기는 질렀는데 막상 그가 되돌아오자 겁이 나는지 움칠거리는 남자 앞에 선 반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기분 상하지 않게 살살 달래서 돌려보내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네 얼굴 때문에 안 서는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야…. 진짜 내가 어떡해야 되냐?”
“…뭐라고?”
“네 머리 색도, 눈알 색도 전부 다 좆같아서 안 서. 됐냐?”
난생처음 외모를 비난당한 맥스는 적잖이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맥스에게 한 번만 더 연락하면 죽는다고 덧붙이고 문 틈새로 구경하는 줄리아에게로 향했다. 맥스는 충격이 가시자마자 바락바락 소리 질렀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고 펍 안으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았다.
“구경 재밌었어요?”
줄리아는 흥미롭다는 미소를 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쓰레기 버리러 나왔다가 직원의 치정 싸움을 목격한 줄리아는 장사치답게 펍에 자주 드나드는 손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쟤 맨날 쫓아다니던 걔 맞지? 잤어?”
“자기는…. 그냥 밥만 몇 번 먹었어요.”
“너 발기 부전이었어?”
“설마요. 건강합니다. 아-주.”
줄리아의 공격에 열심히 방어하며 탈의실 겸 창고로 들어간 반은 외투를 캐비닛에 넣어 두고 허리 앞치마를 둘렀다. 끈을 매듭짓는 사이 지저분한 것들을 정리하던 줄리아가 물었다.
“드류가 그러던데, 원래 여자만 만났다고. 여기 와서 바뀐 거야? 보니까 다들 왠지 비슷비슷한 것 같고.”
대부분의 만남이 펍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줄리아는 알고 싶지 않아도 반의 데이트 상대를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금발 녹안의 어린 남자.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 상대도 있었지만 대체로 비슷한 색채와 분위기를 가진 남자들이었다. 사장님에게 은밀한 취향을 들킨 반은 겸연쩍은 마음에 짧게 웃고 말았다.
“뭐… 어쩌다 보니까요.”
정말 ‘어쩌다 보니까’였다. 언젠가부터 뒤집힌 취향은 저로서도 당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건강을 회복한 후, 죄책감과 위화감을 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람을 만나던 시기가 있었다. 놀던 가락은 어디 안 가는지라 상대를 만나기까지는 수월했다.
다만 정말 이상하게도 예전에는 없던 취향이 생겼다.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특정 요건이 들어맞아야 눈길이 갔고, 그 요건은 여자에서 남자로, 연상에서 연하로, 심플한 성격에서 예민한 성격으로 서서히 변해 갔다. 변화를 알아차렸을 때는 크나큰 문제가 생긴 뒤였다.
서지 않았다. 상대가 얼마나 매력적이든, 성별이 무엇이든. 심지어는 한때 즐겁게 어울렸던 파트너 앞에서마저도 좆이 서지 않았다. 아, 이렇게 남자로서의 생이 끝나는구나 싶어 절망했지만, 또 자위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하여 쉴 새 없이 파트너를 갈아 치우고 갈아 치워지던 반은 졸지에 양손과 단란한 섹스 라이프를 즐기는 중이었다.
부작용. 딱 한 가지의 부작용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해진 모델을 중앙에 두고 일정 범주 안에서 빙글빙글 도는 삶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줄리아는 우울해진 반을 눈치채지 못하고 연거푸 옛 파트너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에 걔는 괜찮았는데. 누구더라…. 리암? 연락 안 해?”
“아…. 고향 돌아갔대요. 집에 일이 생겼다나.”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지만 그마저도 가물가물했던 맥스와 달리 리암의 얼굴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수두룩한 데이트 중 딱 한 번, 그냥저냥 마음에 들었던 놈이었다. 깨끗한 금발에 환한 녹안을 가진 남자였는데, 예쁘장한 외모와 예민한 성격에 끌려 꽤 오래 데이트했던 기억이 있다.
다만 사고가 났다고 했나, 병에 걸렸다고 했나, 갑자기 고향에 돌아가 봐야 한다며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져서 황당하게 관계가 파투 났더랬다.
잘못 밟은 지뢰 때문에 옛 데이트 상대를 줄줄이 끄집어낸 반은 옅게 웃으며 줄리아의 등을 밀었다.
“제 얘기 그만하고 돈 법시다.”
줄리아는 더 캐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타이밍 좋게도 탈의실로 들어선 스태프가 인사를 건넸다. 반은 아직은 고요한 홀로 빠져나가며 몰래 한숨지었다.
***
맥스는 예상보다 끈질겼다. 아니. 찌질했다. 그런 폭언을 들었으면 포기할 법도 한데, 놈은 아파트와 자주 가는 식당까지 찾아오는 기행을 벌였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두들겨 패서 쫓아내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자비를 베풀어 몇 번 봐준 것이 화근이었다.
“왜 나는 안 되는데…. 나는! 나도 인기 많고…! 어디 가서 꿀린 적 없고…! 그런데 너는 왜 나한테 이러는데!”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펍에 왔기에 술 주문을 거절했더니 바를 짚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펍이 가장 붐비는 토요일 저녁에 말이다. 당황한 반은 맥주 글라스를 어정쩡하게 안고 눈만 끔벅였다.
반응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주문을 넣은 손님과 단골과 스태프와 소란에 주방 밖으로 고개를 내민 줄리아까지, 모든 사람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맥스의 추태를 지켜봤다.
“걸레 같은…. 내가 너, 너 가만 안 둬. 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발악하던 맥스는 결국 가드에게 끌려 나갔다. 바텐더와 가드를 겸하는 반은 꼼짝도 못 하고 굳어 있다가 맥스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저 새끼를 죽이지 못한 것이 이토록 한이 될 줄 진작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날, ‘쟤가 걔야?’와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라는 뜻을 내포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반은 허울뿐인 위로를 마다하고 아파트로 귀가했다. 일주일간 마실 맥주를 두 시간 만에 동내고서도 정신은 말짱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다음으로는 쪽팔렸으며, 마지막으로는 허탈해졌다. 무음으로 돌려 둔 핸드폰에 쌓이는 지인들, 직장 동료들의 연락을 무시하고 홧김에 사 들고 온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개망신은 오랜만인 탓에 좀처럼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 가죽 두껍기로 소문난 반에게 이 정도 망신은 망신도 아니었지만 시기의 문제였다.
하필 불현듯 떠오른 소년 때문에 심란한 때였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들른 서점에서 또다시 소년을 연상시키는 책을 발견하고, 변화한 취향을 되짚어 보다가 다시 한번 소년을 떠올리는 바람에 마음이 통 어수선했단 말이다. 맥스의 발악이야 별것도 아닌데, 이 별것 아닌 놈이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반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2년이면 꽤 오래 머물렀으니 슬슬 떠날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을 얻고자 했던 이사 초반의 다짐이 스리슬쩍 사그라들었다.
다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할 즈음, 겹친 팔에 고개를 기댄 반은 손을 뻗어 엎어 둔 핸드폰을 뒤집었다. 펍 스태프와 단골들이 보낸 연락을 확인이나 해 두려고 했는데 친숙한 이름이 액정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전화를 받기 싫은 마음과 오늘 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부딪혔다. 반은 고민 끝에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웃기냐? 짜증 나 죽겠는데….”
맥스의 난동을 전해 들은 아비게일은 꺽꺽거리며 숨넘어갈 듯 웃어 댔다. 공감과 위로는커녕 비웃음만 잔뜩 얻은 반은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며 툴툴거렸다. 친구의 불행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 아비게일은 지조 없이 몸 함부로 굴린 업보니 겸허히 받아들이되 한 번 더 찾아오면 두들겨 패라는 충고로 상당히 깔끔한 결론을 내려 주었다.
참 별일 아닌 것처럼 상담해 주던 아비게일은 깜박 잊고 있던 전화의 목적이 떠올랐는지 시무룩한 반을 불렀다.
- 이러려고 연락한 게 아닌데. 야. 은혜 좀 갚아라.
“응?”
- 제인이 사람 중개하는 거 알지. 이번에 어디서 사람 하나 구하는데 그게 딱 네 얘기라서.
제인은 아비게일의 오랜 파트너였다. 주로 그들과 같은 용병과 용병을 필요로 하는 기업을 주 고객으로 삼는 헤드헌터인데, 군인을 빼돌려 용병으로 만들거나 적당한 용병을 회사 혹은 개인에게 소개해 주는 일을 했다. 전 회사와 계약했던 것도 제인의 덕이 컸다.
제인과 아비게일, 두 사람에게 진 빚을 생각하면 넙죽 엎드려야 했지만, 눈을 내리깐 반은 제 결함을 바라봤다. 드로어즈가 끝나는 부위부터 한 뼘 아래, 총알 자국이 남은 허벅지를 매만지며 싱거운 투로 거절했다.
“나 다리 안 좋은 거 알잖아. 이제 힘쓰는 일 못 해. 다른 사람 알아봐야겠는데.”
- 몸 쓰는 거 아니라던데? 그냥 비서 비슷한데, 비서까지도 아니고 심부름만 좀 하면 된대. 페이도 괜찮더라. 지역이 좀 멀어서 그렇지.
다리를 다쳤다고 했을 때도 ‘아, 그러냐. 남편이 분질렀냐?’라던 아비게일은 반의 우울을 가뿐하게 누르고는 제 할 말만 했다. 괴상한 무관심은 어떤 면에서는 어정쩡한 동정보다 나았다. 어쩐지 기분이 나아져 픽 웃은 반은 특별히 갈 마음이 없으면서도 아비게일의 정성을 봐서 한번 물어는 봤다.
“어딘데?”
핸드폰을 어깨에 끼우고 맥주 캔을 쓸어 비닐에 담았다. 제인에게 물어보는 듯 아비게일의 목소리가 잠시 작아졌다. 이내 익히 아는 나라의 낯선 지명이 핸드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 프랑스 반(Vannes).
***
휴일을 보내고 출근한 반은 단골들이 걱정 반, 흥미 반으로 던지는 농담을 물 흐르듯 넘겼다. 다 때려치우고 싶었던 회의감은 아비게일과의 통화가 끝난 후 훌훌 털어버렸다. 토요일 밤과 전혀 다른 고민을 떠안은 반은 턱을 괴고 홀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했다. 월요일의 펍은 대체로 한산해서 마음 놓고 빈둥거릴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가한 스태프와 몇 마디 주고받을 무렵 가게로 들어온 손님이 알은체했다.
“반!”
“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줄리아의 친구이자 한때 신세 졌던 드류는 바 앞에 자리 잡으며 한 달에 달하는 출장 기간 동안 본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시시콜콜 털어놓았다. 데킬라 한 잔을 내놓자 단숨에 들이켠 드류가 엇, 하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스토커 생겼다며. 남자한테도 인기 많은 줄은 몰랐다.”
이틀 만에 소문이 대체 어디까지 퍼진 건지. 짧게 한숨을 내쉰 반은 빈 잔을 가져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또 그런 쪽으로는 성별을 넘나듭니다…. 한 잔 더 줘?”
“부탁할게. 줄리아는?”
마침 손님도 없겠다, 주방에서 쉬던 줄리아를 불러 셋이 잡담으로 시간을 때웠다. 가게와 직장에서 얻은 이야깃거리를 죄다 털어놓고 나자 대화의 주제는 다시금 맥스의 난동 사건으로 돌아갔다. 이 주변에서는 제법 발이 넓은 놈이었는지 입 털고 다니는 솜씨가 수준급이라며 줄리아가 혀를 내둘렀다.
“걔 웃기더라. 여기저기 네 욕 하고 다니던데? 금발에 어린애만 밝힌다고.”
“틀린 말은 아니라서 할 말이 없네….”
반은 뽑아 온 맥주를 홀짝이며 맥스가 퍼트린 추문을 인정했다. 양다리를 걸쳤다는 헛소문은 어처구니없었지만 반박할 만큼 화가 나지는 않았다. 줄리아의 얘기를 잠자코 듣던 드류가 어깨를 으쓱였다.
“취향 많이 바뀌었다. 완전 반대 아냐? 연하의 남자?”
“모르겠다. 나이 들었나 봐.”
킥킥 웃으며 대꾸한 반은 서로 자신의 취향을 언급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주말부터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고민을 꺼내 놨다.
“저 조금 쉬어도 괜찮아요?”
“왜? 맥스 때문에?”
매우 놀란 줄리아가 물었다. 반은 줄리아의 잔을 채워 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이유도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친구가 일 좀 도와 달라고 해서요. 근데 가게 일도 그렇고, 지역이 멀어서 고민이에요.”
“멀어? 어디?”
“프랑스.”
“와. 나 이번 휴가에 가려고 했는데! 환전도 미리 해 놨다니까.”
드류는 프랑스라는 지명이 나오자마자 눈을 번쩍였다. 엊그제 반이 보인 반응과는 확연히 달랐다. 반은 알고는 있지만 가 본 적 없는 나라를 떠올리며 아비게일에게 의아한 투로 되물었다.
‘웬 프랑스?’
- 내가 아냐. 칸쿤이나 프랑스나. 아. 그리고 면접 비행깃값도 주고 숙식도 제공해 준대. 거저먹는 거 아냐? 조건만 맞으면 내가 하고 싶은데.
‘네가 하지 그래? 제인한테 조율해 달라고 해서.’
- 조건이 안 된다니까, 조건이. 페이도 괜찮아. 기다려 봐.’
제인에게 또다시 묻는 듯 웅얼거림이 들리더니 급여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멈칫한 반은 늘어뜨려 둔 자세를 바로잡았다. 수상할 만큼 많지는 않으면서, 혹할 정도로 괜찮은 수준이었다.
간혹 계산서에 잘못 기재한 것이 아닐까 싶어 다시 물어볼 정도로 상당한 팁을 찔러주는 손님들이 있는데, 그 팁을 매일매일 받는다면 아비게일이 제시한 급여와 얼추 비슷할 것이다.
급여를 듣자마자 반쯤 넘어간 반은 이어지는 조건을 군말 없이 경청했다.
- 딱 6개월짜리 계약. 그쪽에서 괜찮으면 연장하고, 아님 말고.
‘…나 불어 못 하는데.’
- 상관없대.
‘…이상한 데는 아니지?’
- 그럴 조건은 아니지 않냐?
그건 그랬다. 이보다 급여가 셌다면 수상하기 짝이 없었을 텐데, 의아하기는 해도 아예 말이 안 되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비게일은 제인의 지인이 중개를 부탁한 것이며, 지인의 신원은 제인이 보장한다며 의구심을 잠재웠다.
그러나 반은 선뜻 선택하지 못했다. 막 바텐더 일에 익숙해진 참이고, 막상 해 보니 적성에 맞아 아예 눌러앉을 생각도 조금 있는 상태였다. 아비게일은 망설이는 반에게 심드렁한 한마디를 던졌다.
- 면접 보고 아니다 싶으면 관광이나 하고 오든지. 야. 이거 잘하면 공짜 여행이야.
아비게일은 반을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줄리아와 드류에게 전하자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당연히 가야지! 좋은 기회 아니야?”
“맞아. 괜찮은데? 어려운 일 아니면 쉬는 셈 치고 다녀오면 좋지.”
“…진짜? 설마 지금 저 자르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죠?”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서운한 척하자, 줄리아는 그럼 우리가 평생 함께할 줄 알았냐며 장난으로 받아쳤다. 이어 그는 그러잖아도 새 바텐더를 뽑을 예정이었으니 가게 걱정은 말고 편히 생각해 보라며 너른 아량을 베풀었다. 반은 자애로운 줄리아에게 팔짱을 끼고 애교스럽게 물었다.
“저 면접 떨어지고 돌아와도 받아 줄 거죠?”
“당연하지.”
못 해 먹겠으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끝까지 자비를 베푼 줄리아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맥스 그놈, 뒷소문을 들어 보니 여간 추잡스러운 게 아니어서 당분간 고생할 것 같았는데 차라리 잘됐다며 잠시 떠나있길 권유했다.
이참에 유럽 구경 한번 하고 오라는 두 사람의 응원에 힘입어 얼떨결에 결정을 내린 반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씩 웃었다. 일이 너무 잘 풀린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거다.
***
짧은 회동을 마친 그날 밤, 반은 아비게일에게 전화를 걸어 준비되는 대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후 면접까지 주어진 한 달여의 시간 동안 펍과 아파트를 정리했다.
줄리아의 걱정대로 맥스는 수시로 찾아와 반을 괴롭혀 댔다. 펍이야 입구에서 가드가 막았기에 큰 문제 없었지만, 다른 곳이 문제였다.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경찰서까지 갈 것 없이 제 손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아파트에는 발길을 끊었지만, 이번에는 서점에 죽치고 있었다. 결국 반은 두 번 다시 서점에 들르지 않았다.
살인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넌덜머리 나는 집착도 마침내 내일로 끝이다. 침대에 걸터앉은 반은 팔짱을 끼고 새로 산 슈트를 바라봤다.
“진짜 오랜만이네….”
면접을 위해 구매한 슈트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이십 대 초반이 지나고는 입을 일이 없기도 했거니와 불편했기에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여윳돈이 없어 기성품을 구매했지만, 옷걸이가 좋은데 뭔들 안 어울릴까. 자기애에 심취해 실실 웃던 반은 천이 구겨지지 않도록 잘 개어 캐리어 안에 넣고 지퍼를 채웠다.
이른 아침 출발을 위해 침대로 기어 올라가 새로 발급한 여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무표정한 남자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캐리어 위로 툭 던져 놓고 대자로 뻗었다.
막상 출발이 코앞으로 닥치자 괜히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불현듯 아비게일이 딱 네 얘기라고 확언할 만큼 새로운 고용주가 요구한 독특한 자격 요건들이 떠올랐다.
35살 이하의 미혼 남성, 키는 대략 6피트, 미국 서부 출신, 학력 무관, 외모 준수, 어두운색의 헤어 컬러, 활달한 성격, 문맹이 아닐 것, 유사시 경호 임무 수행 가능할 것….
그 외로도 수영과 사격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벽안은 안 된다, 외동이길 바란다는 둥 희한한 요구 사항이 꽤 많았는데, 그게 또 기적처럼 반과 들어맞았다.
아무래도 찝찝해서 의문을 표하자, 제인은 눈 색, 피부 색, 부모의 출신지를 포함한 별의별 조건을 다 보는 곳이 수두룩하다며 이 정도는 까다롭기는 해도 이상한 조건은 아니라고 했다. 전문가가 그렇다니 수상해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흔쾌히 받아들인 반에게 제인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덧붙였다.
- 근데. 의뢰인이 좀 예민하다는 얘기가 있어요. 주의하시라고.
예민한 사람 한두 번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착하다는 것보다야 믿을 만하다며 웃음을 터트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사태평했는데, 역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 전에는 불안한 법이라며 한숨을 지은 반은 마지막 동침이 될 이불을 둘둘 말아 끌어안았다.
***
그로부터 이틀 뒤, 끝내주는 비행을 마친 반은 수하물을 찾으며 아비게일에게 제가 겪은 것들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가 없는 경험인 탓이었다.
“내리기가 싫더라…. 살다 살다 일등석을 다 타 보네. 비즈니스도 감지덕진데. 왜 잘해 주지? 수상하게.”
- 부자들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아냐. 불쌍했나 보지.
“그렇지? 막 이상한 변태는 아니겠지?”
- 야. 그 정도 쓰는 변태면 그냥 어울려 줘라.
“진짜 그럴까 봐….”
제인 편으로 예약된 티켓이 날아왔을 때 확인하지 않고 던져두었다가 출발 직전 일등석임을 알게 된 반은 이륙부터 착륙까지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매번 좌석 사이에 구겨 넣어야 했던 다리를 쭉 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새로운 고용주에게 뽀뽀를 퍼부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며 자랑하던 반은 짜증이 난 아비게일이 일언반구 없이 전화를 끊은 후에야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도착지인 반까지는 직항이 없어 파리에서부터 고속 열차를 타고 세 시간가량 이동해야 했다. 공항에서 기차역까지 가는 시간을 포함한다면 네 시간쯤. 참 번거로운 곳에 산다고 투덜거렸던 과거를 싹 잊은 반은 내일 오후 면접에 늦지 않도록 걸음을 서둘렀다.
파리 관광은 나중 일이다. 돈을 물 쓰듯 쓰는 상사라면 콩고물을 얻어먹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첫인상을 좋게 남겨야 했다.
내일 출발이던 기차표를 당일 출발로 바꾼 반은 달랑 옷 몇 벌과 슈트 한 벌이 든 캐리어를 매달고 역에 도착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창에 딱 달라붙어 짧은 파리 구경을 마쳤다. 눈여겨볼 틈도 없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이국적인 풍경에 아쉬움이 모락모락 샘솟았지만 6개월 뒤를 기약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안내판을 착착 따라가 기차에 몸을 실은 반은 옆자리의 동승객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나이가 제법 든 여성은 인자한 인상으로, 웃는 법을 모르는 미셸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눈인사를 받아 준 동승객은 무어라 말을 걸어왔는데, 불어를 하지 못하는 반은 당연하게도 알아듣지 못했다. 씩 웃으며 공항에서 산 기본 회화 책자를 보여 주자 작은 탄성을 토한 동승객이 익숙한 언어로 물었다.
“여행?”
[아니요. 일.]
동승객은 어설픈 영어로, 반은 어설픈 불어로 짤막한 대화를 이어 갔다. 책자를 뒤져 가며 단어를 이어 붙이는 번거로운 작업은 새삼스러운 재미가 있었다.
[어디…. 음, 어디까지 갑니까?]
기차가 경유하는 역을 손가락으로 짚은 동승객은 동일한 질문을 돌려주었다. 반은 밝게 웃으며 목적지를 알려 주었다.
[제 이름이랑 비슷해요. 반.]
“음?”
동승객은 못 알아들은 눈치로 다시 말해 달라고 했다. 눈을 가늘게 뜬 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듬더듬 발음했다.
“밴스, 반스으…. 반느?”
“브르타뉴.”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주름진 입매에 미소가 떠올랐다. 잘은 모르겠지만 웃어야 할 타이밍 같아 반도 열심히 고개를 주억이며 미소 지었다.
경유지에서 그와 헤어진 반은 오래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무더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인지라 불어오는 바람은 무난하게 산뜻했다. 작은 도시는 파리에 비해 소박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신기한 건 매한가지였다.
가벼운 캐리어를 끌고 가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반은 일순 기이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홱 돌렸다. 역을 둘러싼 유리창에 우뚝 멈추어 선 제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제 뒤로 건너편 버스 정류장이 보였는데, 그곳에 웬 남자 한 명이 가지런한 자세로 서 있었다.
갈색에 가까운 금발을 가진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빤히 응시했다. 대뜸 돌아서 눈을 마주하기에는 상당히 꺼림칙한 분위기였다.
착각인가 싶어 주위를 휙휙 둘러봤지만 한산한 역 앞을 서성거리는 사람은 저뿐이었다. 다시 흘긋 유리창을 확인해도 남자는 그 자리 그대로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서서 저를 보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이상한 사람은 있다지만 단정한 차림새를 한 남자는 보다 섬뜩한 면이 있었다. 입꼬리를 늘어뜨린 반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저런 놈은 상대를 안 하는 게 상책이었다.
보폭을 키워 성큼성큼 나아가던 반은 이 정도면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 싶었을 즈음 불시에 뒤를 돌아봤다. 버스 정류장을 확인하자마자 구겨진 미간이 더욱 일그러졌다.
“뭐야….”
정류장은 텅 비어 있었다.
설렘 대신 찜찜함을 안고 시가지에 도착한 반은 작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선착장 부근에 숙소를 잡았다. 필요하다면 숙박비 역시 지불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가격을 신경 쓰지 않고 고른 호텔은 호화롭지는 않아도 깔끔했다. 캐리어를 내던진 반은 샤워하고 나와 시간을 확인했다.
면접 시간은 내일 오후 1시. 고로 지금부터는 자유 시간이다. 반은 역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이상한 인간을 머릿속에서 툭툭 털어 내고 호텔을 나섰다.
해가 지자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도시 중앙에 흐르는 강 표면에 은은한 조명이 반사됐다. 관광지 특유의 수선스러운 분위기가 덜해 휴식을 위해 새로운 땅으로 온 느낌이 물씬 났다. 실상은 면접을 앞둔 무직자 신세인 반은 선착장을 따라 걷다가 눈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메뉴판이 온통 불어로 적혀 있는 탓에 손짓 발짓, 책자의 도움에 힘입어 가장 인기 있는 메뉴를 주문했다. 바다 냄새가 나는 밤바람을 맡으며 테라스에서 즐기는 저녁 식사는 잠시간 넋을 앗아 갈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훈제한 참치를 우물거린 반은 목구멍에서 울컥 올라오는 것을 음식물과 함께 삼켰다. 혀에서 녹아내리는 음식을 맛보면 맛볼수록, 산뜻한 밤바람이 뺨을 스치면 스칠수록 수백에 달하는 밤을 괴롭히던 감정이 스멀스멀 치밀었다.
‘나랑 같이 가자.’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소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포크를 세워 겉면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참치를 툭툭 건드렸다. 그 애는 아마 이 맛있는 것도 새 모이만큼 먹고 말 것이다.
‘거긴 반이 가 봤잖아. 안 가 본 데 같이 가고 싶어.’
“아, 진짜아….”
결국 접시를 비우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 둔 반은 턱을 괴고 반짝거리는 선착장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이 들이닥치자 단짝인 우울함이 뒤를 따랐다. 하나같이 저와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이다.
급격하게 피로해진 반은 건조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누가 보면 10년은 붙어 있다가 헤어진 줄 알겠다며, 틈날 때마다 한심한 생각이나 하는 저를 나무랐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그리움은 어찌하지 못했다.
…이곳도 처음 와 보는 곳인데, 함께 왔다면 좋아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