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관광도, 숙면도 망친 반은 일어나자마자 공들여 단장했다. 그 망할 놈의 외계인이 제게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는 모르겠다만 일자리까지 앗아 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소년을 회상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불안을 냅다 발로 걷어찬 반은 뽀득뽀득 씻은 후 드라이클리닝이 끝난 슈트를 걸쳤다. 검은 슈트와 검은 넥타이라는 조건을 달성하고, 마구 날아다니는 머리카락은 왁스를 발라 깔끔히 넘겼다. 잔머리 하나가 자꾸 비어져 나와 애먹었지만 고생이 아깝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재킷을 걸치고 거울 앞에 서자 훤칠한 남자가 비쳤다. 준수한 외모를 원하신다고 해서 평소보다 힘을 줬더니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듬직하다기보다 눈요깃거리에 가깝기는 했지만 뭐… 다 제가 잘난 탓이었다.
안경을 썼다면 좀 더 진중해 보였을 텐데, 하며 입맛을 다신 반은 어디 흠 잡힐 만한 구석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캐리어를 챙겼다.
약속 장소는 선착장이었다. 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면접 장소를 알려 주겠다더니, 정오 무렵 낯선 번호로 연락이 왔다. 데리러 갈 테니 20분 후 선착장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그냥 장소를 알려 주면 어련히 알아서 찾아갈 텐데 굳이 데리러 오겠다니. 부자들 생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딱딱한 구두 앞코를 바닥에 부딪치며 기다리길 십여 분, 시곗바늘이 정확히 12시 20분을 가리키자마자 부름이 들려왔다.
“반 클라크 씨.”
놀라 고개를 들자 어느샌가 곁에 다가와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질 좋은 슈트를 차려입고 밝은 갈발을 흐트러짐 없이 고정한 남자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였다. 어떻게 알아봤는지 의아했지만, 이 주변에서 검은 슈트를 빼입고 캐리어를 든 사람은 저 혼자였다.
기척에 둔한 편이 아닌데도 남자가 다가오는 소리를 조금도 듣지 못한 반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 클라크입니다.”
“반갑습니다. 탑승 부탁드리겠습니다.”
악수하고자 내민 손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악수를 무시한 남자가 왼편을 가리켰다. 역시 프랑스인이라 그런지 듣던 대로 싸가지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손을 내린 반은 순간 이상한 점을 깨닫고 되물었다.
“탑승… 이요?”
남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모터보트가 있었다. 당황이 얼굴 위로 떠올랐다. 기껏해야 자동차나 보내 줄 거로 생각했는데 모터보트라니. 설명을 바란다는 듯이 살짝 웃었지만 가면 같은 미소를 건 남자는 손가락을 빈틈없이 붙인 손으로 보트를 가리키기만 했다. 탈 때까지 같은 자세를 유지할 기세라 하는 수 없이 보트에 탑승했다.
캐리어를 가져가 좌석 아래에 넣은 남자는 얌전히 앉은 반을 확인하고는 조타륜을 쥐었다. 몸체가 날렵한 모터보트가 물살을 가르고 나아갔다. 레저용 요트라면 칸쿤에 있을 때 몇 번 타 본 적이 있으나 이만큼 값비싸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을 빛내며 앞 유리와 난간을 매만지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보트가 좁은 물줄기를 지나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입꼬리만 살짝 올린 미소를 띤 남자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며 정작 물음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더 물어봤자 알려 줄 것 같지 않아 입을 꾹 다문 반은 눈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거 불안했다.
바다 한가운데를 떠다니는 크루즈에서 장기를 적출당한 후 팔려 나간다거나 탈출 불가능한 곳에 갇혀 파렴치한 변태 부자의 성 노리개로 전락하는 흉악한 망상이 고개를 들었다.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는 반의 마음도 모르고 속력을 최대치로 올린 모터보트는 길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시원하게 가로질렀다.
바닷길을 따라 움직인 지 30분쯤 지났을 때, 마침내 발을 디딜 수 있는 육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처참한 상상 때문에 없던 뱃멀미까지 생길 지경이었던지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부두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표정이 풀린 반은 보트가 부두에 닿자마자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깔끔한 부두에는 생김새가 다른 모터보트 세 대와 크루즈 요트 한 대가 정박해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장대한 사이즈는 아니어도 저 요트 한 대가 제 몸값의 수십 배에 달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가는 망상은 장기 적출에서 성 노리개 쪽으로 기울었다.
“내리실까요.”
보트를 정박한 남자가 탈 때와 동일한 손짓으로 부두를 가리켰다. 반은 그의 손에 들린 제 캐리어를 흘끔거렸다. 여권이 캐리어 안에 있다는 걸 알고 안 돌려주는 것일까. 사소한 친절에도 산처럼 불어나는 의심을 안고 보트에서 내렸다.
거센 바닷바람 때문에 아침부터 고생시켰던 머리카락 한 가닥이 이마로 흘러내렸다. 몇 번 쓸어 넘기다가 포기한 반은 앞선 남자를 뒤따라갔다.
해안과 연결된 계단을 올라가자 섬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반은 차마 웃지 못하고 멀리서도 제 존재를 과시하는 새로운 일터를 응시했다. 혹시 이 나라에는 아직도 신분 제도가 살아 있나 싶었다.
“…허.”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 양식의 고성은 놀랍기도 했지만 기가 질린다는 느낌을 주었다. 우거진 수풀에 둘러싸여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상이었으나, 공주와 왕자 대신 마녀와 용이 살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음울했다. 이 화창한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저런 분위기를 풍기기 쉽지 않은데, 여러모로 대단한 성이었다.
심부름꾼 면접을 위해 비행깃값을 흔쾌히 내주고 요트를 몇 대나 소유하는 재력을 가지고서 저런 성에 산다니, 반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새로운 고용주의 성정이 상당히 독특할 것임은 자명해 보였다.
“반 클라크 씨.”
“아…. 예.”
황당한 나머지 걸음까지 멈추고 첨탑을 바라보던 반은 황급히 남자의 뒤를 따랐다. 말없이 기다리던 남자는 잘 정돈된 길을 일정한 속도로 나아갔다.
외부인의 기를 또 한 번 죽이는 거대한 정문을 통과한 반은 이질적인 정원을 둘러봤다. 연식이 꽤 된 것 같은 고성과 달리 세련되게 가꾼 드넓은 정원에는 한 군데도 빠짐없이 화사한 꽃이 있었다.
군데군데 자리한 조각상과 어우러진 장미 정원은 예쁘기는 하다만 어딘지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 같았다. 과하다고 해야 할지, 섬뜩하다고 해야 할지. 잘 꾸며 둔 세트장처럼 생기 없는 정원을 가로질러 성 내부로 들어간 반은 부담스러움에 질식할 것 같았다.
무슨 실내가 이토록 호화스럽고 고풍스럽담. 더러운 구둣발을 들여 황송할 지경이었다.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다가 남자를 돌아봤다.
“면접은 어디서….”
가면 같은 미소를 건 남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반은 제 캐리어와 함께 사라진 남자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으나 천장이 까마득하게 높은 홀에는 저 혼자뿐이었다. 화창한 정원과 정반대로 우중충한 성안에 홀로 남은 것을 깨닫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팔을 문지르며 눈을 굴리는 사이, 홀 안쪽 복도에서 남자와 똑같은 차림새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밝은 갈발을 빠짐없이 끌어모아 망에 넣어 고정한 여자는 사라진 남자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가족인지 은은한 미소마저 빼닮은 여자가 복도를 가리켰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예. 근데 아까 그분은 어디 가셨어요? 갑자기 사라지셔서.”
자연스럽게 미소를 띤 반은 친근한 투로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말이 길었네요.”
반은 이 인간들에게서 답을 듣기를 포기했다.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구는데, 친화력을 발휘할 여지도 안 주니 설마 이런 식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건가 싶어 기분이 묘해졌다. 이번에는 여자를 뒤따라가며 몰래 입술을 삐죽거리던 반은 높은 천장을 받치는 아치형 기둥 수 개를 지나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에 도착했다.
여자는 문을 열기 전, 네모난 트레이를 내밀며 물었다.
“휴대 전화나 전자 기기 있으십니까?”
“핸드폰이요. 그런데 왜….”
“잠시 맡겨 주십시오.”
당황스러웠지만 반은 순순히 핸드폰을 꺼내 트레이에 얹었다. 보안이 엄격한 곳이라면 전자 기기를 맡겨 두고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만 이런 성에 살면서 보안이라. 반이 미심쩍게 생각하든 말든, 트레이를 들고 뒤로 물러난 여자는 ‘기다리고 계신다’라며 안으로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의미 모를 문양이 새겨진 문을 열고 들어가자 휘황찬란한 공간이 나타났다. 벽부터 바닥은 물론이고 가구 하나하나마저 장식투성이라 눈이 피로한 한편 자세히 구경하고 싶은 욕망이 들기도 했다.
여기 있는 액자 하나 훔쳐다 팔면 어제 같은 저녁 다섯 번은 사 먹겠다며 속으로 감탄했지만 반은 겉으로만은 면접하러 온 구직자다운 태도를 취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 클라크입니다.”
정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 곁, 보는 것만으로도 무게가 느껴지는 원목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여성이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멋들어지게 굽이치는 갈발을 가진 중년의 여성은 반과 악수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엠마라고 부르세요.”
프랑스 억양이 섞인 영어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악수 후 의자에 앉은 엠마는 예의상의 미소조차 띠지 않았지만 가면 같은 미소로 위화감을 일으켰던 안내인들보다는 인간적으로 느껴져 내심 긴장한 몸이 스르르 풀렸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다, 오는 길에 불편한 점은 없었냐, 따위의 안부 인사로 시작된 대화는 예상외로 평탄하게 흘러갔다. 본격적인 면접에 들어가기에 앞서, 엠마는 책상에 놓인 서류를 뒤적였다.
골동품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책상과 마주 보는 의자에 앉은 반은 그가 넘기는 서류를 힐끗 살폈다. 앞 페이지에 용병 시절 쓰던 제 사진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저 때가 열여덟쯤인가. 10년도 더 된 사진이라 슬쩍 민망해졌다.
말없이 서류를 마지막 장까지 넘겨보던 엠마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작고 귀엽다고 들었는데.”
“…예?”
반은 잘못 들었나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두 가지 수식어 모두 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탓이었다. 짧은 순간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반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고 넌지시 답했다. 제인의 착오라고 해도 거마비를 받은 이상 제게는 이득이었다.
“혹시 다른 사람을 원하시는 거면….”
“아닙니다. 확인은 거쳤어요.”
단칼에 반의 말을 끊은 엠마는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를 서랍에 넣었다. 더 볼 것 없다는 듯한 태도는 ‘작고 귀여운’이라는 수식어를 잠시 잊게 했다. 설마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허리를 곧추세웠을 때, 무미건조한 낯을 한 엠마가 시선을 맞췄다.
“급여는 들으셨을 테고, 짐은 이따 안내해 드리는 방에 푸시면 됩니다.”
“…합격입니까?”
짧다 못해 없는 수준인 면접에 반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잘난 것은 외모밖에 없는 반을 가만 바라보던 엠마는 약간의 텀을 두고 대답했다.
“네.”
뭘 묻느냐는 듯한 뉘앙스가 짙게 밴 대꾸였다. 기뻐해도 좋을 소식이어서, 반은 여타 꺼림칙한 구석을 뒤로하고 환히 웃어 보였다. 반을 따라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린 엠마는 한 장의 계약서를 내밀었다.
고용주의 이름이 없어서 잠시 의아했지만 그 외 특이한 부분이 없는 깔끔한 계약서여서 이의 없이 사인했다. 복사한 계약서 한 장을 건네준 엠마는 그럼 나가 보라며 문을 눈짓했다. 아직 궁금한 것이 남았던 반은 상체를 숙이며 제인에게서도 듣지 못한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제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거죠? 간단한 업무인 건 아는데 한 번 더 설명을 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글쎄요.”
엠마는 불어로 적힌 서류를 가져와 펜을 들었다. 나가 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바보같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 예?”
“고용주는 제가 아니라서요. 도련님께서 따로 지시할 테니, 지시가 있을 때까지 매뉴얼을 따르시면 됩니다. 오늘은 쉬시고, 내일 대략적인 일과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엠마는 매뉴얼은 배정된 방에 있을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반은 엠마의 이야기 속에서 반길 만한 단어를 찾아냈다. 어리둥절했던 표정이 밝게 개었다.
“아, 도련님이요. 아이 돌보는 거라면 제가 또 베이비시터 일을 해 본 적이 있어서….”
새로운 상사가 늙은 변태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둥글게 말린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소년의 형상 때문에 서서히 아래로 처졌다. 말끝을 흐리는 반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엠마가 느긋한 투로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도련님은 성인이십니다.”
“그… 러시군요.”
제대로 헛발질한 반은 머릿속에서 소년을 재빠르게 지워 냈다. 그 ‘도련님’이 여든 넘은 노인은 아니길 바라며 살그머니 물었다.
“혹시 도련님 연세가아….”
“스물다섯입니다.”
굳은 입매가 사르르 풀렸다. 손수 옷을 입혀 줄 나이도, 어르고 달래서 재워 줄 나이도 아니었다. 반은 방긋 웃으며 답했다.
“창창하시네요.”
성격만 좋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오싹한 복제 로봇 고용인과 고성의 첫인상은 괴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높은 급여만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면접을 끝낸 반은 복도에서 기다리던 여자에게 방을 안내받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꼭대기 층에 다다르자 길쭉하게 뻗은 복도가 나타났다. 어찌나 긴지 복도 끝자락이 컴컴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높은 층고와 아치를 그리는 기둥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스테인드글라스가 한차례 걸러진 햇빛을 뿌렸다. 해가 가장 강한 시간대였지만 내부는 상당히 침침했다.
천장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며 오래된 성당을 연상시키는 성 내부를 나아가던 반은 복도 끝 방에 도착했다.
“여기가… 제 방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여자가 방 안을 가리키기에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들어서기는 했으나 내심 당혹스러웠다. 작은 침대에 옷장 하나 정도 있으려나 했더니, 웬 예스러운 취향을 가진 자산가가 손님에게 내어 줄 법한 방이라니. 반은 팔짱을 끼고 전체적으로 적갈색이 도는 방을 둘러봤다.
방 중앙에는 킹사이즈를 훌쩍 뛰어넘는 침대가 있었고, 일체형인 침대 기둥에는 붉은 캐노피가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태슬 달린 천으로 묶고 풍성하게 모양을 잡은 두꺼운 캐노피를 만져 본 반은 윽, 하며 조용히 질색했다. 붉은빛을 띠는 마호가니 테이블과 의자, 고상한 벽난로에 정신 사나운 패턴의 벽지와 카펫까지….
지독하게 화려하고 전혀 제 취향이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환장하겠지만 반은 100년도 더 된 것 같은 고풍스러운 것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골동품처럼 생겼으면서 낡은 것 같지는 않은 화려한 소파 쿠션을 쿡쿡 찔러 보던 반은 문가에서 기다리는 여자를 발견했다. 아차 하고 허리를 세우자 한결같은 미소를 매단 여자가 입을 열었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여자는 내부로 한 발짝도 들어오지 않은 채 방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붉은빛 벽지와 같은 색상이되 문양이 다른 벽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손잡이가 없는 문이었다.
“도련님 개인실과 연결되는 문입니다. 문은 개인실에서만 열리며, 반 클라크 씨께는 복도를 통한 출입만 허가됩니다.”
“그래요? 도련님께서 갑자기 열고 들어오시는 건 아니죠?”
웃으며 농담을 던졌지만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손잡이가 없는 문과 찍어 낸 듯한 여자의 미소를 말없이 번갈아 보던 반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러실 수도 있죠.”
어느 정도의 사생활 침해는 용인되는 급여였다. 부디 얼굴도 모르는 도련님이 몰상식한 인간이 아니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반이 흔쾌히 수긍하자 여자는 방 안쪽의 화려한 벽을 가리켰다.
“내일부터 착용하실 옷과 구두는 옷장에 있습니다.”
“와, 이게 옷장이었어요?”
벽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장식과 뒤엉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손잡이가 있었다. 옷장 역시 제법 넓었다. 행거에는 서른 벌쯤 되는 옷가지가 걸려 있었는데, 업무용 유니폼으로 보이는 정장과 평상복에 가까운 하얀 셔츠, 검은 슬랙스였다. 색채와 개성을 죄다 빼앗긴 옷가지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여자가 말을 이었다.
“저녁 식사는 5시입니다. 방으로 가져다드릴 테니 쉬고 계시면 됩니다.”
“제가…. 아닙니다.”
직접 가지러 가겠다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 제게 허락된 대답은 ‘예, 알겠습니다’뿐인 듯했다. 여자는 자세한 주의점은 매뉴얼을 통해 숙지하라고 덧붙이고는 문을 닫으려고 했다. 옷장에서 물러난 반은 나가려는 여자를 불렀다.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우리 이제 같이 일하는데 물어도 되죠?”
“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 맥. 반이라고 부르세요. 아시겠지만.”
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알겠다고 답했지만, 곧 죽어도 친근하게 부를 의사는 없어 보였다. 반은 내친김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까 그 남자분은 가족이에요?”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면 무시하라고 했으나 맥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시선을 맞추다가 의외로 간단히 답을 내어 주었다.
“가족입니다. 저녁 식사는 5시입니다.”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 갈 수 없게끔 재차 저녁 식사 시간을 고지한 맥이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반은 뒤늦게 그러시구나,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람 무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남매라며 눈알을 굴리다가 본격적인 방 구경에 나섰다.
캐리어는 옷장 안에 있었고, 빼앗겼던 핸드폰은 테이블 위에 있었다. 여권이 제자리에 있음을 확인한 반은 한숨 돌리며 그것을 캐리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방에 딸린 욕실은 감탄을 자아냈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욕조 하며, 대체 청소는 어떻게 하나 고민스러운 조각이 새겨진 세면대는 취향이 아니라 할지라도 박수를 부르는 매력이 있었다. 수도 공사를 잘했는지 온수도 막힘없이 나왔다.
“장난 아니네….”
손을 털며 욕실을 빠져나온 반은 소파 뒤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자 화사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문부터 성 입구까지 제법 걸어야 하더니 정원 사이즈가 상당했다.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 더더욱 정교한 파르테르를 구경하다가 도로 커튼을 쳤다. 고용주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만 보통 부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겠다.
탐방을 관두고 침대에 드러누운 반은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매트리스 위를 굴러다니다가 매뉴얼을 펼쳤다. 매뉴얼은 총 열다섯 장쯤 됐는데, 깨알 같은 글씨가 콕콕 박혀 있었다. 빙글 돌아누워 베개로 가슴을 받치고 첫 장부터 읽어 내려갔다. 매뉴얼이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늘어뜨렸던 상체가 꼿꼿이 서고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뭐야, 이게….”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학교 기숙사도 이러지는 않겠다 싶은 규칙이 한가득이었다. 유달리 눈에 띄는 부분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첫째, 21시 정각 일괄 소등. 비상시를 제외하면 소등 후 방에서 나오지 말 것.
둘째, 식사는 6시, 12시, 17시에 방 앞으로 전달하며, 식사 후 빈 트레이는 문 앞 트롤리에 올려 둘 것. 식사 장소는 이동 불가.
셋째, 고용인 사이 사적인 대화 불가.
넷째, 지급된 의복 외 사제 의복 착용 불가. 모든 의복은 이틀 이상 착용 금지.
다섯째, 지상 1층과 3층 제외 출입 불가. 고용주 침실 출입 불가. 고용주 개인실의 경우 14시부터 17시까지 출입 가능.
여섯째, 자의로 고용주와 접촉 금지.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금지 사항만 나열해 놓은 매뉴얼은 반을 당혹스럽게 했다. 괴담도 아니고 이 무슨 이상한 규칙이란 말인가. 바보같이 눈만 끔벅거리다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장에는 자신이 해야 할 일 목록이 있었다. 아니, 목록이라기엔 짤막했다.
14시부터 17시까지 고용주의 개인실을 정리하고, 그 외 시간에는 내선 전화를 기다릴 것.
여타 설명이랄 것이 없는 문장을 읽고 또 읽다가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는 고성과 마찬가지로 100년 전에나 썼을 법한 다이얼식 전화기가 있었다. 건드리기도 조심스러운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 보았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묘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 둔 반은 매뉴얼을 다시 한번 읽고는 맥없이 침대로 쓰러졌다.
“별 희한한 놈이 다 있다….”
어지간한 정신머리로는 이딴 규칙 생각해 내지도 못할 텐데, 어쩐지 잘못 걸린 것 같다는 느낌에 던져둔 핸드폰을 가져왔다.
아비게일과 이 황당한 매뉴얼에 관해 토론이나 할까 싶어 전화를 걸었더니 통화권 이탈 지역이라는 표시가 떴다. 냉큼 일어나 핸드폰을 치켜들고 방을 돌아다녔으나 어디에서도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반은 경악한 얼굴로 먹통이 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갇힌 것이다. 전화도 안 되고 탈출도 불가능한 섬에.
총기가 들이밀어졌을 때와는 또 다른 공포가 엄습했다. 발목을 휘감는 찝찝함을 품고 방을 서성거리던 반은 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사적인 대화가 금지된 것은 매뉴얼을 통해 알았지만,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면 하나쯤 얻어걸리는 정보가 있을 터다.
그러나 침대와 마주하는 벽에 자리한 커다란 괘종시계의 짧은 시곗바늘이 5시를 가리키고 10분이 지났음에도 노크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주춤거리며 문을 열어 본 반을 맞이한 것은 삼단 트롤리였다. 너덧 개의 접시를 덮은 둥근 돔을 들어 올리자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곱게 플레이팅 된 식사를 들고 방으로 돌아온 반은 기이한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같이 식사하지는 않아도 노크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황당하기 그지없었으나 하나하나 따지고 들 처지가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배는 고팠기에 툴툴거리면서도 포크를 든 반은 육즙이 배어 나오게 조리한 스테이크를 입에 넣자마자 걱정이 사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먹어 본 스테이크 중 가장 훌륭했다.
잠시 입을 틀어막고 생애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진미에 찬사를 보낸 반은 해명되지 않은 의문을 저 멀리 치워 두었다. 식사가 이토록 맛있다면 그리 나쁜 일자리는 아닐 것이다.
주린 배를 열심히 채운 반은 매뉴얼을 따라 트롤리 위에 빈 트레이를 올려 두고 느긋하게 씻고 나왔다. 오늘은 여독을 풀라고 했으니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셈이다. 구비된 슬립 가운을 대충 여미고 침대로 다이빙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 없이 몸을 편안히 받아 내는 침대가 만족스러워 싱글벙글 웃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슬립 웨어는 물론이고 속옷도 구비되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사이즈가 딱 맞았다. 하체 사이즈를 알려 준 적 없는데도 말이다. 체형이야 거기서 거기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끝내주는 저녁 식사에 누그러졌던 의심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대자로 뻗은 팔다리를 휘적이며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천장을 올려다보던 반은 흔쾌한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죽기야 할까.
태평하게 뒹굴뒹굴하며 인터넷 연결이 필요 없는 핸드폰 게임을 붙잡았다. 오랜만에 하니 꽤 재밌는 게임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액정을 들여다볼 무렵, 어깨가 흠칫 튈 만큼 큰 소리가 났다.
상체를 벌떡 세워 머리를 뎅뎅 울리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자 시곗바늘이 9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범인은 시간을 알리는 괘종시계였다.
댕, 댕, 댕….
저 밑바닥에서 끌어 올린 듯 낮고 중후한 종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홉 번의 종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모든 불이 꺼졌다.
“어….”
놀라 천장을 올려다봤으나 희미하게나마 방을 밝히던 샹들리에는 어둠 속에 파묻힌 뒤였다. 정원에 설치된 등까지 까맣게 죽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닥쳤다.
“말도 안 돼….”
일괄 소등이 이런 식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앙 제어 시스템을 갖추기에는 너무 낡은 건물 아니냐고 투덜거린 반은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스위치를 찾으러 다녔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발견하기는 했으나 몇 번이나 올려 봐도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침대로 돌아왔지만 난처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핸드폰 배터리가 바닥을 보였다. 반에게 빛도 없이 충전기와 콘센트를 찾는 재능은 없었다. 애초에 이 방에 콘센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쉽지만 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 두툼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밤 9시 취침이라. 잠이 올 리가 없다. 시차 적응이 덜된 것은 둘째치고, 펍에서 늦게까지 일하며 새벽에 잠드는 것이 습관이 된 반은 시꺼먼 허공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온 사위가 고요했다. 조용한 것을 훌쩍 뛰어넘어 살아 있는 것들의 소리는 무엇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적막이었다. 불을 꺼도 차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리거나 빛이 어룽거리는 도시와는 확연히 달랐다. 제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에 파묻힌 반은 비로소 망망대해의 섬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지나치게 컴컴하면 오히려 불편을 느끼는 반은 배 위에 얹은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눈을 질끈 감고 고르게 호흡하자 잠이 오는 것도 같았으나 자꾸만 눈을 뜨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그렇다. 이 나이 먹고 할 말은 아니지만 반은 살짝 무서웠다. 정말 아주 조금, 살짝.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서울 만도 하지 않나. 복도에서 중세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목격하거나 한밤중에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음산한 고성, 이 넓은 공간에서 마주친 사람은 엠마와 기묘한 남매뿐이고, 규칙들은 수상하고, 심지어 섬 외부와 연락도 할 수 없다니.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을 꽉 움켜쥔 반은 허튼 생각 말고 잠이나 자자고 자신을 나무랐다. 돌아누워 몸을 둥글게 말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을 때였다.
움찔거리던 속눈썹이 스르르 올라갔다. 반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반은 시커먼 색으로 칠해진 문을 바라봤다. 복도였다. 착각이려니, 하고 가만히 기다렸음에도 소리는 멎지 않았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 반은 발뒤꿈치를 세우고 문으로 다가갔다. 돋을새김이 흐릿하게 보이는 문짝에 양손을 얹고 귀를 댔다.
스윽, 탁…. 스윽, 탁….
소리가 가까워졌다. 끌리고 마찰하는 소리는 발걸음 같기도 했으나 그렇다기에는 너무 느렸다. 무엇보다 멀어지지 않았다. 그건 제 방 앞을 맴돌고 있었다.
“…….”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문 반은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을 쥐자 소리가 뚝 멎었다. 눈을 연신 깜박이는 반의 머릿속으로 의문투성이 매뉴얼이 떠올랐다.
비상시를 제외하면 소등 후 방에서 나오지 말 것.
고민할 것도 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뒷걸음질로 침대로 돌아온 반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호승심, 또는 호기심에 규칙을 어긴 사람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반은 무식한 편이었지만 하지 말라는 짓을 사서 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객기로 인생 계획을 대차게 꼬아 본 경험이 있기에 더더욱.
아무것도 안 들린다, 아무것도 안 들린다.
자신에게 세뇌를 걸며 잠을 청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 앞을 서성거리는 소리는 밤새 이어졌다.
***
반은 하품을 쩍 하면서 초췌한 몰골을 다듬었다. 머리카락을 왁스로 고정하고 거울을 들여다보자 다행히 밤잠을 설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첫날부터 오싹한 체험을 했지만 외계인도 못 막은 돈을 향한 욕망을 한낱 귀신 따위가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끈적거리는 손을 씻고 나와 새 구두에 발을 밀어 넣었다. 고풍스러운 성에 사는 새로운 주인님은 인심이 넉넉하시어 일주일간 마음껏 돌려 입을 양의 옷과 신발을 하사하시었다.
시종이 입을 법한 심플한 정장이었지만 저렴한 매장에서 떨이로 구매한 반의 슈트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맞춤 정장처럼 어디 하나 남거나 모자라는 부분 없이 몸에 꼭 맞아 한결 태가 났다. 허벅지 부근을 툭툭 털어 낸 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일을 시작하는 첫 번째 날이니 오늘은 엠마의 지도가 있을 예정이었다. 문 앞 트롤리에 아침 식사와 함께 놓인 쪽지에는 점심 식사 후 1시에 보자는 간단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쪽지로 소통하다니, 꼭 전화기가 발명되기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지만 한 번쯤은 이렇게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밤에 엄청 어둡더라고요.”
살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엠마는 그렇죠, 하고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단 하루 만에 이곳 고용인들의 분위기에 적응한 반은 기분 상하지 않고 엠마의 안내를 받으며 성을 둘러봤다. 총괄 관리자인 엠마는 옛날로 따지면 시종장에 가까운 위치인 듯했다.
반은 식당과 뒤뜰, 창고 등의 위치를 머릿속에 새기면서 어제 일을 말할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첫날부터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해 봐야 이상한 사람 취급밖에 더 받겠나. 뒤뜰에는 장식용 미로와 헬기 이착륙장이 있으므로 출입을 삼가라는 엠마의 안내에 고개를 주억이다가 해도 괜찮을 만한 질문을 던졌다.
“여기 일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상주하는 고용인은 열아홉 명입니다.”
“오…. 꽤 많네요. 인사는 따로 안 하나요? 맥 씨랑은 했는데. 아시죠, 어제 여자분.”
“매뉴얼 읽어 보셨는지요.”
“…옙. 죄송합니다.”
사적인 대화 금지에 인사까지 포함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미소로 실수를 모면한 반은 성으로 돌아가는 엠마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였다.
“전화가 잘 안 되던데…. 이건 물어도 괜찮죠?”
“외부로 연락할 일이 있다면 면접 보신 방으로 오시면 됩니다. 외부와의 연락은 특정 전화기로만 가능합니다.”
“생각해 보니까 어디 연락할 일이 없네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기껏 던진 말은 팅팅 튕기어 나왔다. 납득이 되면서도 안 되는 꺼림칙한 기분을 안고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반의 방문에서부터 큰 보폭으로 열두 걸음 떨어진 문 앞에 선 엠마가 열쇠를 꺼냈다.
“어제 대략적인 설명을 들으셨겠지만, 이곳이 도련님 개인실입니다. 들어갔다가 나올 때 항상 잠그세요.”
금색 길쭉한 열쇠를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자 잠금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은 넌지시 물었다.
“도련님은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 원하실 때 뵐 수 있을 겁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신께서 응답하리라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한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듣는다면 신을 만날 수 있는지 물어본 줄 알 테다. 그만큼 고귀하신 분이겠거니, 하며 엠마의 뒤를 따라 개인실로 들어간 반은 과분하다고 여겼던 제 방이 단지 하인 방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인실을 가로지른 엠마가 창을 가리는 커튼을 차례로 걷었다. 커튼을 떼어 내려면 사다리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긴 창문으로 햇빛이 빗발치며 내부가 드러났다.
“와….”
삼키지 못한 탄성이 입술을 가르고 터져 나왔다. 사치스러운 대부호의 방이 이러할까. 반은 질린 표정으로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방을 쭉 훑었다.
홀에 버금가는 넓은 공간에 아치형으로 조각된 기둥이 높은 천장을 받치고 있고, 세로로 긴 형태의 창 다섯 개를 통해 정원이 내다보였다. 벽을 따라 놓인 책장은 또 어떻고. 높은 곳에 꽂힌 책을 빼낼 때 쓰는 이동식 사다리는 영화에서나 봤던 반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느 정도 부자여야 질투가 나지, 이래서야 현실감이 없다고 생각하다가 발치에 무언가 툭 걸려 시선을 떨어뜨렸다. 책 한 권이 내던진 것처럼 떨어져 있었다.
“서재와 응접실입니다.”
“음…. 상당히… 복잡하네요.”
무난한 단어를 고르고 싶었지만 좀처럼 이 방의 상태를 설명할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탄성의 원인은 호화스러움만이 아니었다. 끔찍할 정도로 화려한 방은 끔찍하게 어수선했다. 냄새가 난다거나 구두 밑창에 무언가 쩍쩍 들러붙는 부류의 더러움은 아니었으나 확실히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귀한 도련님은 물건을 제자리에 놓아두는 법을 모르는 모양인지 사방에, 정말 사방에 물건을 흩뿌려 두셨다. 나이트가운으로 보이는 천과 책이 뒤엉켜 있었고, 잉크로 추정되는 액체는 척 봐도 값비싼 카펫에 쏟아진 채로 메말랐으며, 구겨지고 찢긴 종잇조각이 먼지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종이 뭉치 사이로 깨진 찻잔도 얼핏 보였다.
엠마는 태연하게 쓰레기장을 가로질러 반을 옆으로 끌고 갔다. 문 없이 이어진 공간은 아마도 응접실일 것이다. 하도 너저분해서 헌 옷 처리장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카펫 위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용케 건드리지 않고 빠져나간 엠마는 커다란 여닫이문 앞에 멈춰 섰다. 두 쪽짜리 문으로, 화려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문양이 덕지덕지 새겨져 있었다.
“이쪽은 도련님 침실이며 출입 불가 구역입니다. 유의하세요.”
“지금 계십니까?”
“외출하셨습니다.”
이따위로 어질러 놓고 잘도 외출하는구먼.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씩 웃은 반은 소매를 걷어붙였다.
“정리하면 될까요?”
그러라고 지시한 엠마가 걸음을 돌렸다. 반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졸졸 따라가다가 문득 벽에 걸린 그림을 눈에 담았다. 서재와 응접실에는 꽤 여러 점의 그림이 걸렸는데, 유독 비슷한 화풍의 그림이 많았다.
강렬한 색채로 그려진 이국적인 풍경과 인물들은 예스러운 개인실과 동떨어진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이거 화가가 누굽니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복도에 발을 디딘 엠마는 반이 가리키는 그림을 흘긋 보더니 짧게 답했다.
“고갱.”
“아, 알아요. <별이 빛나는 밤>.”
“…….”
잘생긴 얼굴로 명랑하게 웃는 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엠마는 별말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다섯 시까지 끝내야 합니다. 유의하세요.”
“맡겨 주십쇼.”
문이 닫히면서 마침내 새로운 직장에서의 근무가 시작됐다. 기지개를 쭉 켠 반은 청소용 트롤리를 끌고 와 폭탄이 투하된 방을 둘러봤다. 개인실을 정리하라기에 간단한 서류 정리나 할 줄 알았는데 대청소일 줄이야.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쓰레기를 훌쩍 뛰어넘은 반은 다섯 개에 달하는 창부터 모조리 열어젖혔다.
서랍 안에 든 것을 제외하면 전부 쓰레기니 버리라는 엠마의 조언을 따라 종잇조각은 비닐에 모으고, 구겨진 옷가지는 세탁용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읽다 만 것인지, 취미 삼아 던진 건지 응접실과 서재에 과자 부스러기처럼 흩어진 책도 잘 모아 책장에 꽂아 두었다. 카펫을 교체하고 하나같이 무거운 가구를 옮기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와…. 죽겠네….”
다른 청소라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카펫 교체는 부디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라며 책상을 짚고 헉헉거렸다. 땀을 식힌 뒤, 제가 드러누워도 좋을 사이즈의 묵직한 책상 위도 정리한 반은 묘한 기분으로 깔끔해진 실내를 돌아봤다.
서재와 응접실에는 장식용 가구며 액자가 상당히 많았는데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이 정도 재력에, 이런 취향이라면 대대로 자산가라는 소리인데 가족사진조차도 없고 죄 풍경 사진이나 그림뿐이었다.
상대를 추측할 만한 정보가 극히 적다 보니 도리어 그 도련님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방 꼬락서니를 보니까 고상하다기보다는 괴팍한 성정 같은데….
“궁금하네.”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이 굳게 닫힌 침실 문에 시선을 준 반은 트롤리를 밀며 방을 빠져나왔다. 엠마가 제게 넘긴 열쇠로 문을 잠갔을 때는 다섯 시를 10분 앞둔 시각이었다.
황홀한 저녁 식사를 끝마친 반은 소파에 기대앉아 전화기만 하염없이 노려봤다. 어느덧 시곗바늘이 여덟 시를 가리켰다. 오늘 새로운 노예가 생겼음을 알고 있을 터인데 전화는 도통 울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시킬 일이 없나?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언제 전화가 올지 몰라 엠마에게 물어보러 가기도 여의찮았다. 턱을 괴고 온갖 고민을 하는 사이 소등 시간이 다가왔다.
서둘러 씻고 나온 반은 정장과 슬립 웨어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나체로 소등을 맞이했다. 섬의 모든 조명이 일괄적으로 꺼지며 캄캄한 어둠에 잠기자 반은 더듬더듬 가운을 챙겨 입고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이게 맞나.
염려스러웠다. 청소가 고되기는 했지만 그건 무거운 가구를 옮긴 탓이 컸고, 그마저도 두 시간 남짓 걸렸을 뿐이라 때맞추어 밥만 처먹는 밥버러지가 된 기분이었다. 몸은 편한 반면 마음은 불편했다. 눈만 끔벅이던 반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긴장을 풀었다. 오늘은 시킬 일이 없는 모양이지.
베개에 뺨을 파묻자 사지가 노곤노곤하게 풀렸다. 며칠 잠을 설쳤으니 오늘은 일찍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척거리며 몽롱해질 틈 없이 곧장 잠에 빠져들던 반의 귓가로 거슬리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스윽, 탁…. 스윽, 탁….
음산한 소리가 눈꺼풀을 강제로 밀어 올렸다. 반은 어제보다 가까워진 듯한 소리를 유심히 듣다가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무리 겁줘 봐라, 고수입 직장을 버리고 제 발로 나가나.
***
쏠쏠한 급여는 무료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값일지도 모른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넘은 지금, 반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곳 고용인들은 바퀴벌레 같았다. 분명히 존재하는데 눈에 띄지 않았다. 혹여라도 가까워지면 사사삭 흩어져 성 어딘가로 사라졌다. 사적인 대화를 금한다는 매뉴얼이 있다고 한들 맥 남매를 제외하고 얼굴을 마주한 적마저 없다는 게 말이 되기나 하나.
아니다. 이쯤 되면 자신이 바퀴벌레인 것은 아닐까? 얼굴 하나는 봐줄 만하다고 믿고 살아왔으나 사실 자신이 바퀴벌레처럼 생겨서 말도 섞기 싫은 거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반은 살아온 생을 의심하면서 잘 가꾸어진 정원을 거닐었다. 막연히 전화를 기다리다가 저녁 식사 후 정원으로 산책하러 나가는 시간은 성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귀한 순간으로 자리 잡았다.
나뭇가지 하나, 꽃봉오리 하나까지도 정원사의 강박적인 손길이 느껴지는 정원도 슬슬 괴이쩍었다. 분수대 앞 벤치에 앉은 반은 졸졸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도련님이라는 사람이 실재하긴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본 적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드나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매일매일 청소하는 보람도 없이 다음 날이면 엉망진창이 되는 개인실만이 누군가 옆방에 산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그것이 도련님이 실재한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반이 적성에도 맞지 않는 추리에 몰두하는 이유는… 심심해서였다. 오죽하면 몸뚱이를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 귀신을 만나는 밤이 그리울까. 밤새 복도를 서성거리는 귀신마저 없었다면 나흘째에 엠마를 붙잡고 제발 대화 좀 하자고 빌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반은 사람이 그리웠다.
다리를 쭉 뻗고 늘어진 반은 주황빛으로 물드는 하늘과 멀찍이 떨어진 정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허리를 세웠다.
“…어.”
열린 정문 너머에서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고용인에게 지급되는 정장을 입은 사람은 정문에서부터 고성까지 깔린 길을 조용한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맥도 아니고 그의 형제도 아니었다. 기회를 포착한 반은 냉큼 일어나 그가 걸어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멀리서 반을 발견한 남자가 먼저 눈인사를 건넸다. 얼마 만의 사람이야. 반은 활짝 웃으며 남자가 다가오길 기다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입매가 굳었고, 의아함을 품은 눈썹이 살포시 일그러졌다. 큼직한 가방을 든 남자는 한 번의 눈인사가 끝이라는 양 표정이 굳은 반을 휙 지나쳐 갔다.
“저기요.”
반은 남자를 불렀다. 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아가던 남자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린 남자의 낯을 샅샅이 뜯어보던 반은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우리 만난 적 있죠. 역 앞에서.”
갈색에 가까운 금발, 단정한 옷차림. 이곳 고용인들은 단체로 교육이라도 받는지 남자 역시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반은 저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차역에서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남자였다.
가까이서 마주한 남자는 이상하게도… 맥과 그 형제를 닮아 있었다. 위화감에 눈살을 찌푸리자 완전히 제게로 돌아선 남자가 매끄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반 클라크 씨.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본다고요?”
“처음 뵙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펍에서 일하며 손님 이름은 몰라도 얼굴 외우는 일에는 도가 튼 반은 하늘에 맹세코 이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아니라는데 박박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 남자가 성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또다시 홀로 남은 반은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무거운 걸음을 뗐다. 싸늘한 바닷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갔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방으로 돌아온 반에게는 찝찝한 요소를 곰곰이 되짚어 볼 시간이 없었다. 일주일간 단 한 번도 울리지 않던 전화기가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크고 까랑까랑한 전화벨 소리에 기겁한 반은 헐레벌떡 뛰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예. 반 클라크입니다.”
- 커피 가져와.
반은 순간적으로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고용주와 고용인으로서 처음 나누는 대화가 통성명도, 인사도 아닌 명령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예? 하고 되물어볼 틈 없이 전화가 끊겼다. 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수화기를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황급히 방을 나섰다. 고용주의 싸가지고 자시고 마침내 첫 번째 소통이었다.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꼬인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도착했지만 이미 저녁 식사가 끝난 지 오래라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기 한 방울 없이 깔끔히 정리된 주방으로 들어간 반은 저를 피하는 데 급급한 고용인들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계십니까? 도련님이 커피 부탁하셔서요.”
화덕과 아궁이 대신 신식 조리 기구가 들어선 주방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고용인들이 머무는 휴게실이나 숙소를 모르니 데려오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주방 중앙에 선 반은 머쓱해져 자문자답했다.
“아무도 없으시구나….”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내려야 했다. 조리대와 수납장을 뒤져 핸드 드립용 도구와 원두를 찾아내기는 했으나 예의 없는 도련님의 커피 취향을 몰랐다. 고민할 바에 되든 안 되든 해 보는 편이 나았다. 반은 고심해서 고른 원두를 그라인더로 갈고 커피를 내린 다음, 번쩍거리는 찻잔이 늘어선 진열장에서 가장 예쁜 잔을 골라 트레이에 얹고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트롤리 위에 커피 트레이를 얹어 두고 개인실 문을 두드렸다.
“부탁하신 커피 문 앞에 뒀습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부까지 들리도록 보고하고는 제 방으로 쏙 돌아왔다. 여섯 번째 매뉴얼, ‘자의로 고용주와 접촉 금지’를 착실히 지킨 반은 문을 꼭 닫고 귀를 가져다 댔다. 정말 사람이 있긴 할까? 두근거리며 기다리자 묵직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미미하게 들려왔다.
“오….”
우습게도 그 자그마한 소리를 듣자마자 반을 숨 막히게 하던 무료함과 외로움이 사그라들었다. 씩 웃으며 문에서 떨어지려던 찰나, 도자기가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석상처럼 굳어 문을 바라보던 반이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문 틈새로 내다본 복도에는 개중 가장 예뻐서 선택한 찻잔이 박살 난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 기둥과 바닥에는 커피가 튄 흔적이 완연했다.
“무슨….”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움직일 생각도 못 했다. 제 방 앞까지 날아온 찻잔 손잡이를 내려다보는데, 까랑까랑한 전화벨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복도를 치울 새도 없이 테이블로 되돌아가 전화를 받자 느릿하지만 짜증이 짙게 밴 음성이 흘러나왔다.
- 걸레 빤 물 같아.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면 안 되지? 다시 가져와.
전화는 조금 전처럼 뚝 끊겼다. 잡음이 섞여 남성인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목소리가 휘몰아치고 가자, 남은 것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황당함이었다. 반은 수화기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을 나섰다. 예상은 했다만 이거 보통 도련님이 아니었다.
털레털레 주방으로 돌아가 새 찻잔과 새 커피를 준비해 트롤리 위에 올려 두었다. 까다로운 의뢰인을 한두 번 겪어 본 것도 아니고, 반은 성격 더럽다는 얘기를 예민하다는 말로 예쁘게 포장한 제인을 특별히 원망하지는 않았다.
돌아가면 얘기할 것이 늘었다며 침대에 걸터앉을 때는 몰랐다. 막돼먹은 고용주와 연결해 준 제인을 한 시간 내로 원망하게 될 줄은.
- 하수구에서 떠 왔어? 다시.
- 너는 커피를 십 분이나 기다리나 보지? 다시.
- 내가 무슨 말 할지 알겠네. 다시 가져와.
와장창, 와장창, 쨍그랑, 쿠당탕….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닐 찻잔은 반이 예쁘다고 생각한 순서대로 사정없이 박살 났다. 꼭대기 층과 지상 1층을 네 번이나 왕복한 반은 다섯 번째 전화가 끊긴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성격이 유별난 것도 정도가 있지, 오냐오냐 자란 도련님은 그 정도를 가뿐하게 뛰어넘었다.
“후우….”
끊긴 전화에 대고 쏘아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심호흡을 한 반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 두었다. 아침마다 공들여 손질하는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편의보다는 아름다움에 치우친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땀에 푹 절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반은 숨을 길게 내쉬고 주방으로 향했다. 돈 받는 입장에서 까라면 까야지, 뭐 어떡하겠는가.
“하아, 허억….”
계단을 뛰어 올라온 반은 네 종류의 원두와 드립 포트를 가지고 와 트롤리에 콱콱 내려 두었다. 예쁜 찻잔을 가져와 봤자 싹 다 깨뜨리니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온 찻잔에 원두 종류별로 커피를 내려 담은 뒤 멀뚱히 내려다봤다. 침이라도 뱉고 싶은데. 안 되겠지? 눈알을 굴리며 짜증을 표한 반은 벌써 다섯 번째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꼭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도련님.”
새파랗게 어린 놈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심정이 마냥 흔쾌하지만은 않았다. 고용인다운 억지웃음을 지은 반은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턱을 휙 젖혀 등받이에 머리를 얹고 삐딱한 자세로 전화기를 노려봤다.
커피를 대령하면 5분 안에 찻잔을 깨뜨리는 소리가 났는데, 지금은 조용했다. 찌푸린 눈썹을 둥글게 바꾼 반은 기울인 상체를 바로 했다.
드디어 통과했나?
기대가 스르르 피어날 찰나 전화가 울렸다. 몇 번이나 들어도 불쾌한 벨 소리에 어깨를 움칠거린 반은 연결음이 두 번을 넘어가기 전에 냉큼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선수를 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더 부탁하실 일이라도?”
- 너는 그냥… 커피를 타지 마.
“…예?”
이게 무슨 말인가.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와장창, 네 개의 찻잔이 차례로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연달아 터졌다. 입을 열었다가는 감히 해서는 안 되는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아 꿈틀거리는 혀를 깨물었다. 이어 문을 쾅 닫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뒤 고압적인 명령이 날아왔다.
- 복도 치워.
전화는 미련 없이 끊어졌다. 반은 차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풀길 반복했다. 이윽고 헛웃음이 터졌다. 수화기를 내던지듯 내려놓은 반은 후끈한 열이 올라오는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보자 보자 하니까….”
도련님의 첫인상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고작 심부름꾼이 될지도 모르는 구직자에게 일등석을 하사하기에 훌륭한 성품을 가진 줄 알았더니 미리 겁먹고 도망가지 않도록 연막작전을 펼친 것이었다. 개자식 같으니라고.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었지만 정작 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복도로 향하는 것이었다. 깨진 조각을 모아 담고 흩뿌려진 커피까지 닦은 후 방에 돌아오자 괘종시계가 9시를 가리켰다. 아직 씻지도 못한 상태였다.
황급히 욕실로 뛰어 들어갔지만 옷을 벗기도 전에 아홉 번의 종소리가 끝났다. 허탈하게 웃은 반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몸을 씻어야 했다. 물까지 끊기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힘없는 노동자로서의 삶에 회의감이 드는 밤이었다.
그날 밤은 다리가 아팠다. 높고 긴 계단을 수 번 왕복했으니 성치 않은 허벅지가 말썽을 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반은 저린 다리를 주무르다가 까무룩 잠들어서, 그날 밤 복도를 오가는 귀신이 오랫동안 제 방 앞에 머물러 있었다는 걸 알 수 없었다.
***
시끄러운 전화벨이 깊은 잠을 깨웠다. 움찔거린 반은 비몽사몽 중에 손을 뻗어 수화기를 가져왔다.
“여보세요….”
- 내 만년필 어디 있어?
“만년… 필이요?”
- 내 만년필. 책상 위에 뒀는데 없어.
야밤에 웬 장난 전화야….
눈도 뜨지 못하고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파고들던 반은 불현듯 상체를 벌떡 세웠다.
이곳은 낡고 방음이 안 되는 아파트가 아니라 섬에 있는 고성이며, 제 고용주는 자비로운 줄리아가 아니라 인성에 결함이 있는 도련님이었다. 잠이 확 달아난 반은 눈을 비비며 까다로운 도련님에게 답을 주었다.
“필기구는 함에 넣어 뒀습니다. 책상 오른편 장미색 함을 보시면….”
- 안 보이니까 연락했겠지.
“음…. 정확히 어떤 만년필입니까? 떨어져 있는 게 많았거든요. 검은색인지, 은색인지….”
- 됐어.
사방에 나뒹굴던 만년필 중 어떤 만년필을 원하는 건지 추측하던 중에 전화가 끊겼다. 간밤 한번 겪어 봤다고, 놀랍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꺼운 것도 아니었다. 고성을 개조할 돈이 있으면 자식새끼 인성이나 개조할 것이지.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 둔 반은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이불을 퍽 걷어차고 쓰러졌다.
“미쳤나….”
새벽 4시였다. 고작 만년필 행방 따위로 단잠을 깨우다니. 이불을 뒤집어쓴 반은 귀한 도련님이 일찍 일어나서 무지하게 심심했던 모양이라고 툴툴거리며 넘겼으나, 이는 불행의 전조였다.
그로부터 엿새 뒤, 반은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보지 않고 사인한 과거를 죽도록 후회하게 됐다. 커피와 만년필은 사람을 살살 간 보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가상 인물이라는 의심이 들 만큼 고요했던 일주일의 평화는 거짓말처럼 깨지고, 반은 새벽부터 밤까지 미치도록 울리는 전화벨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업무를 지시하느냐? 전혀. 식사하는데 포크가 더럽다느니, 커튼 색이 마음에 안 든다느니, 셔츠 실밥이 튀어나왔다느니, 장식장 위치가 불만족스러우니 바꾸라느니…. 도련님은 개인실 출입 시간이 정해진 탓에 당장 해결해 줄 수도 없는 시답잖은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그것도 30분 간격으로 귀가 따가운 전화벨을 울려가면서 말이다.
반은 오늘 하루에만 여섯 번째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도련님. 벽지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제가 어떻게 못 하지 않을까요?”
-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못 하면 넌 할 줄 아는 게 뭔데?
“세 시간 안에 벽지 바꾸는 것 말고는 대체로 할 줄 압니다.”
- 장식장도 못 옮기면서 뭘 할 줄 알아. 거짓말은 잘하네.
“도련님도 어제는 그 방에서 벽지밖에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벽에 고정된 장식장을 제가 무슨 수로 옮깁니까?”
반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다른 고용인들처럼 오냐오냐해 줄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비위 잘 맞춰서 팁을 두둑하게 뜯어내는 것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어야 가능하지, 안하무인 도련님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포크를 교환하기 위해 막막한 계단을 세 번쯤 왕복하는 것은 받아 줄 수 있어도 경우 없는 명령은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버르장머리 없는 도련님도 만만치는 않았다.
- 뭐야. 또박또박 말대꾸나 하라고 내가 널 여기까지 데려온 줄 알아?
하, 조소를 터트린 도련님이 따끔따끔한 가시가 돋은 말로 쏘아붙였다.
- 돈 좋아하잖아. 혹시 모르지. 너 하는 꼴 보고 내가 더 얹어 줄지.
돈을 좋아하는 것도 맞고, 더 얹어 주길 바라는 것도 맞는데 타인이 저를 조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말이 좋게 들릴 리는 없었다. 전화는 그 길로 끊겼고, 반은 옷장 문을 벌컥 열어 구석에 잘 보관해 둔 캐리어에서 엠마가 복사해 준 계약서를 찾아냈다.
한 장짜리 계약서를 쫙 펼쳐 고용주가 인격 모독을 행했을 시 고용인이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샅샅이 뒤졌다. 부릅뜬 눈으로 몇 되지 않는 항목을 읽어 내린 반은 옷장 문짝에 이마를 쿵쿵 부딪쳤다.
“미친놈, 미친놈….”
‘을은 갑의 모든 요구에 성실히 임할 것’을 모든 항목에 고상한 문장으로 녹여 내린 계약서에는 근무 시간조차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급여와 낯선 환경에 들떠 제 손으로 6개월짜리 노예 계약서에 사인하고 만 것이다. 평소 계약서를 꼼꼼히 읽지 않는 반의 업보였다.
도련님의 행패는 행패고 일은 일이라, 2시 정각에 트롤리를 끌고 개인실로 들어간 반은 방의 전경을 맞닥뜨리고는 입을 떡 벌렸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벽면, 차분하게 가라앉은 붉은색의 벽지에 대문짝만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거짓말쟁이!
덜 마른 잉크가 줄줄 흘러내리다 못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나이트가운 위로 떨어졌다. 벽지를 갈지 않고는 감출 수 없는 괴악한 낙서를 멍하니 응시하던 반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돈으로 사람을 좌지우지하려는 자는 숱하게 만나 왔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이지 난생처음이었다.
“진짜 미친 새끼….”
보통 도련님이 아니라는 건 진작 눈치챘으나 이건 그냥… 미친놈이었다.
그날 반은 벽지를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대략 2주 만에 만난 엠마는 종종 겪는 일인지 놀라지도 않고 여분의 벽지가 있는 장소를 알려 주었고, 반은 남은 2시간 반 만에 뭣 같은 낙서가 그려진 벽지를 갈아 치워야 했다.
기존 벽지를 뜯어내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이 훌쩍 넘게 걸려서, 하는 수 없이 새 벽지를 대강 테이프로 고정해 뒀더니 쉬지 않고 전화가 걸려 와서 밤새 시달렸다.
작업 가능한 시간은 하루에 고작 세 시간이었고, 나흘간 고군분투한 반은 마침내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새 벽면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패턴만 미묘하게 다르지, 전체적인 색상은 전과 동일했다. 늘 닫혀 있는 침실 문을 돌아본 반은 어린아이에게 경고하듯 단호하되 어르는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벽지 다 바꿨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예?”
침실에 있는지, 외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속 시원히 할 말을 한 반은 돌아서서 엉망인 방을 훑어봤다. 오늘따라 바닥에 굴러다니는 종이 쪼가리가 상당했다. 소매 단추를 풀어 걷어붙이고 청소를 시작하면서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가정 교육 못 받은 도련님을 헐뜯었다. 물론 입 밖으로는 내지 않고 속으로만.
새벽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전화선을 뽑고 싶을 정도로 시시콜콜 전화를 걸어와 은근한 친근감까지 품게 만든 도련님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매일 동일한 시간에 개인실로 들어서면 패악을 부린 듯한 광경으로 존재감을 과시할 뿐이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추측할 수 있는 도련님의 특성은 딱 하나다.
옆방을 내어 줄 정도로 고용인을 가까이 두면서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 이유가 뭐겠는가. 외모다. 외모에 열등감이 있으니 잘난 고용인을 뽑아 사사건건 트집 잡고 새벽이고 밤이고 가릴 것 없이 괴롭히는 것이다.
키도 틀림없이 작달막할 테다. 막대한 자산으로도 바꿀 수 없는 외모로 인해 핍박받은 결과, 성격이 저 지랄이 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연고 없는 사람을 들들 볶을 리가 없었다.
“내가 이해해야지, 가난한 내가 이해를….”
반은 치워도, 치워도 하루 뒤에는 지저분해져 새로운 일거리를 던져 주는 개인실을 정리하며 연거푸 한탄했다. 이게 다 잘생기게 태어난 제 죄라며 애써 자기 위로를 하던 반은 구겨진 종이를 쫙쫙 펴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부피를 줄이기 위해 반듯하게 편 종이 한 장을 든 채로 곁에 쌓아 둔 종이 뭉치를 다시금 확인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날카로운 만년필 촉에 갈기갈기 찢겨 나간 종이를 바닥에 펼쳐 두고, 굴러다니는 종이 하나를 펴 그 옆에 두었다. 카펫에 주저앉아 턱을 괸 반은 두 종이를 비교했다. 번진 잉크와 마구잡이로 그어 댄 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장의 종이, 아니, 거의 모든 종이에 동일한 단어가 반복적으로 쓰여 있었다.
종이 넉 장을 바닥에 펼쳐 두고 고민하던 반은 침실을 흘깃 살피고는 스르륵 일어나 캐리어 구석에 처박아 둔 기본 프랑스어 책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었지만, 울분을 담아 꾹꾹 눌러쓴 단어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고작 단어를 줄줄이 쓰느라 낭비하는 종이도 제가 다 처리해 주는데 이 정도쯤은 알아봐도 되지 않겠냐며 책자를 펼치고 종이에 적힌 단어를 찾아 헤맸다.
머지않아 해당하는 단어를 발견한 반은 잠시간 말을 잃고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싫어, 좋아, 싫어, 좋아, 싫어, 좋아, 싫어, 좋아, 싫어, 좋아….
‘싫다’와 ‘좋다’로 상반되는 단어가 수십 장에 걸쳐 수놓아져 있었다. 중간중간 해석할 수 없는 문장이 섞여 있기는 했으나 종이가 찢길 만큼 힘주어 쓴 것으로 보아 좋은 뜻은 아닐 것 같았다. 카펫 위에 펼쳐 둔 수십 장의 종이를 검지로 툭툭 건드리던 반은 떨떠름한 눈빛으로 깨끗해진 벽을 응시했다.
정말…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걸까.
이제껏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껏 비난했는데 정말 상대가 제정신이 아닌 상황을 맞이한 반은 얼떨떨했다. 말실수를 한 기분이다. 양손으로 턱을 괸 반은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상상을 부러 막지 않았다.
제가 모시는 도련님은 의학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며, 돈만 많은 가족들에게 버려진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런 섬에, 이런 고성에 갇혀 고용인에게 패악질하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정도를 모르는 소설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상야릇한 설득력이 있는 가설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에이, 하며 허황한 상상을 털어 낸 반은 종이를 한데 모아 트롤리에 실었다.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치우고 방을 나서다가 의미 없이 뒤를 돌아봤다.
자신은 이래서 문제였다. 만약 가설이 맞는다면 마음 놓고 미워하기도 곤란하지 않나. 반은 툭하면 물러지는 제 성정에 치를 떨며 트롤리를 밀었다.
***
반이 주제넘은 동정을 품든 말든, 도련님의 해괴한 요구는 계속됐다. 오늘은 정문에서부터 세 번째 블록 파르테르에 피어난 꽃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며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하여 반은 오후의 뙤약볕 아래 쪼그리고 앉아 새빨간 장미를 꺾는 중이었다. 꽃잎이 망가지지 않도록 하얀 종이에 장미를 가지런히 놓으면서 반은 시종 꿍얼거렸다.
붉은 장미는 고성과 근접한 블록에도 피어 있었다. 굳이 정문 근처까지 힘든 걸음을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똥개 훈련 시키는 데 재미 붙였는지는 몰라도, 직접 나와서 산책도 좀 하고 꽃도 피어 있는 그대로 감상하면 비뚤어진 성정에도 도움이 될 텐데. 아무리 외모에 흠이 있다고 한들 이 섬에서 누가 뭐라고 한다고 방 밖으로 고개도 안 내미는지.
“못생긴 게 뭐 대수라고….”
숨을 푹 내쉬며 종이로 싼 장미 다발을 안고 일어난 반은 턱을 젖혀 고성을 바라봤다. 도련님의 개인실과 침실에는 길쭉한 창이 여럿 있었으나 전부 스테인드글라스로, 정교하게 그려진 문양 탓에 외부에서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땡볕에서 개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히죽거리는 못생긴 남자를 상상하던 반은 중지를 세우고 싶은 욕구를 힘겹게 눌러 앉혔다.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화를 내려다가도 한발 물러서게 됐다.
시선을 거둔 반은 서둘러 발을 놀렸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꽃을 직접 재배해서 왔냐, 너 산책이나 하라고 보낸 줄 아느냐’ 하며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릴 것이다. 아무리 미친놈의 헛소리라고 해도 언성 한번 안 높이고 폭언을 쏟아붓는데, 늘 태연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는 힘들었다.
화사한 장미 꽃다발에 코를 묻고 향기를 맡으며 나아가던 반은 고성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분명 역 앞에서 만났으면서 시치미를 떼는 그 남자였다. 보폭을 키운 반은 남자의 앞을 막아서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반 클라크 씨. 두 번째로 뵙습니다.”
남자는 놀라지도 않고 가면 같은 미소로 맞아 주었으나 반가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 남자에게서 진실을 듣길 포기한 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수긍했다.
“…예. 두 번째네요.”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데, 의구심을 해소하자고 들러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은 품에 안은 장미 다발을 살짝 들어 보이며 가벼운 대화를 시도했다.
“도련님이 꽃 보고 싶다고 하셔서 좀 꺾었습니다. 어디 가세요?”
“영어에 능숙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다고? 기가 막혔지만 반은 빙긋 웃었다.
“아…. 잘하시는 것 같은데. 그럼… [어디까지 갑니까?]”
한번 써먹어 본 기본 회화를 기억하고 있길 다행이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기대감은 금세 섭섭함으로 바뀌었다.
“부탁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럼.”
발음이 좋다, 불어를 할 줄 알았느냐 따위의 살가운 반응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냉정한 반응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반은 예의 바른 것인지, 무례한 것인지 모를 남자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떨어뜨렸다. 서럽다, 서러워.
방으로 돌아온 반은 테이블 위에 장미 다발을 펼쳐 두고 한 송이씩 손질했다. 이따 개인실을 청소할 때 화병에 꽂을 계획이었다. 장갑을 끼고 날카로운 가시를 하나씩 제거하는 와중에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으려나. 뚱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귀에 댄 반은 말꼬리를 휙 빼앗겼다.
“예, 도련….”
- 리암이 마음에 드나 보지?
“…예?”
- 왜 자꾸 치근덕거리냐고. 이름 때문에?
전화를 잘못 걸었나 싶어질 정도로 뜬금없는 소리였다. 입을 꾹 다물고 이 도련님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가늠해 보던 반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과 인사 나눈 적이 없어서요. 리암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 …그래?
골동품 같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잡음 섞인 음성이 한결 누그러졌다. 제 대답 중 어느 부분이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기분이 좋아졌다면 다행이다. 이제 장미 손질하러 가봐도 되겠냐고 물으려던 반은 말을 꺼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불쾌한 기색을 폴폴 드러내며 쏴붙이는 도련님 탓이었다.
- 리암이 마음에 들어? 리암이라?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무슨 얘기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니까요….”
이마를 턱 짚은 반은 숫제 짜증을 내며 집요한 도련님이 있을 방향을 노려봤다. 이상한 곳에서 트집 잡는 취미를 가진 놈이라지만 이건 너무 밑도 끝도 없지 않나. 눈을 가늘게 뜨고 답을 기다리는데, 트집 잡는 취미에 더해 사람 굴리는 재능도 있는 도련님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 꽃 버려. 보기 싫어.
“아니, 그럼 이건….”
반은 전화가 끊긴 수화기를 들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다가 침대로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를 주먹으로 팡팡 내려치며 울분을 토했다. 언젠가부터 예민한 사람에게 끌리는 경향이 생겼으나 이 도련님은 예민한 정도가 아니었다. 선을 넘어도 한참은 넘었다.
제인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을 또 한 번 후회한 반은 단정히 정리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때까지 침대를 굴러다니다가 축 늘어졌다. 도련님의 닦달로 추측해 보자면 아까 마주친 남자의 이름이 리암인 모양이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반은 문득 탄성을 내뱉었다.
“…아.”
리암이라고 하면 저도 아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했다. 이번만큼은 잘될 줄 알았던 금발 녹안의 남자가 뇌리를 스쳤다.
쫓기듯 고향으로 돌아가더니 잘 살고 있으려나.
머리를 괴고 비스듬히 누워 개중 그나마 괜찮았던 남자를 회상하다가 기억 저편으로 날려 버렸다. 작은 자극에도 미친 듯이 날뛰는 도련님 비위 맞추는 데 필요한 경험은 아니었다.
***
누가 깨운 것도 아니건만 눈이 번쩍 뜨였다. 한밤중에 단잠에서 깬 반은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낮에는 넓디넓은 정원을 헤집고, 저녁에는 갑작스럽게 짜증을 부리는 도련님을 받아 주느라 고된 하루를 보냈더니 기절하듯 잠든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푹 잤는지 어깨를 몇 번 주무르자 정신이 말짱해졌다. 잠기운이 달아난 반은 목을 매만졌다. 목이 심히 말랐다.
침대에서 벗어나 어둠에 파묻힌 가구를 더듬어 테이블로 향했다. 손을 휘적여 물 주전자를 찾긴 했으나 소등 전에 채우는 것을 깜박한 탓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에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주전자를 내려 두고 침대로 복귀했다. 얼른 자고 일어나서 목을 축이자 싶어 눈을 감았는데,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시원한 물 한 잔만 거듭 떠올랐다. 상상하면 할수록 바싹 마른 목구멍이 쩍쩍 들러붙었다.
세면대 물이라도 받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막상 그러자니 제가 조난당한 것도 아닌데 그래야 하나 싶고, 욕실에서 나오는 물을 마셔도 되는지 의심스럽기도 해서 갈팡질팡했다.
고민 끝에 벌떡 일어난 반은 침대 모서리에 걸쳐 둔 얇은 가운을 걸치고 허리끈을 둘러 묶었다.
서랍을 더듬더듬 뒤지자 충전하지 않아 전원이 꺼진 핸드폰이 손가락에 걸렸다. 차갑게 식은 쇳덩어리를 밀어 둔 반은 조그만 손잡이가 달린 촛대와 초를 꺼냈다. 샤워하는 도중에 불이 꺼지는 참사를 몇 차례 겪은 후 창고에서 슬쩍한 것들이었다.
이곳에서 와서 참 별의별 짓을 다 해 본다며 성냥을 켰다. 치익, 타오른 불꽃을 초에 옮기고 성냥개비는 흔들어 껐다. 불꽃이 밝히는 범위는 현저히 좁았지만 발치를 확인할 수 있으니 없는 것보다 나았다.
촛대와 주전자를 들고 꼭 닫힌 문 앞에 선 반은 괘종시계를 돌아봤다. 막 새벽 2시를 넘겼다. 소등 후 복도로 나서도 되는 시각은 아침 식사가 도착하는 6시다. 고로 지금은 나가서는 안 되는 시각이지만 반의 정신을 독차지한 것은 금지 사항만 줄줄이 늘어놓은 매뉴얼이 아니라 시원한 물 한 잔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반은 이제껏 9시 이후로 열어 본 적 없는 문을 노려봤다. 당장 주방에 다녀오지 않으면 목이 타 죽을 것 같았지만 생각 없이 뛰쳐나갈 만큼 이성이 죽은 건 아니었다. 반은 제가 주방에 다녀와도 괜찮을 이유를 하나하나 짚어 보며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한 달이나 이곳에 머물면서 고용인들을 마주친 적 있느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심지어 제 그림자만 보여도 스르륵 사라지니, 밤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자고 있다면 더 좋고.
다음으로, 반은 소등 후 외출을 삼가라는 항목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도련님 성미를 보아 괜히 겁을 줄 목적으로 이상한 항목을 몇 개 추가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샘솟았기 때문이다. 고작 복도를 서성거리는 귀신 때문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거라면 우스울 따름이다.
별일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후다닥 다녀오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합리화를 끝마친 반은 자신이 어리석은 영화 주인공 꼴이 됐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열린 문 너머는 초라한 촛불로 밝히기 힘들 만큼 드넓고 스산했다. 반은 발치만 간신히 확인하며 방에서 빠져나왔다.
“…….”
문을 닫자 싸늘한 공기가 가운의 여밈을 파고들었다. 문제는 나가지 말라는 규칙이 아니었다.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한 복도는 겁이 별로 없는 반에게도 섬뜩하게 다가왔다. 무언가 빠른 속도로 기어 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것이 없는 복도를 차마 대놓고 둘러보지 못하고 서둘러 걸음을 뗐다.
작은 불꽃에 의지해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간 반은 예상대로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목을 축이고 주전자에 물을 한가득 채웠다. 당연하게도 저를 찍는 CCTV도 없었고, 방 밖으로 나왔다고 비상 사이렌이 울리지도 않았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고 내심 뿌듯해하며 내려올 때에 비해 가벼워진 걸음을 옮겼다.
복도나 홀에는 불을 켜 둘 법한데도 이 고성에서 어둠은 모든 곳에 평등했다. 자칫하면 방향 감각을 잃을 만한 어둠을 디디고 나아가 계단에 도착한 반은 어지럽게 꼬인 계단을 타고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마지막 계단을 지르밟으며 오싹하기는 해도 못 할 짓은 아니라고 슬며시 웃은 순간 방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발이 걸렸다.
“읏…!”
잘못 디딘 발이 미끄러지며 앞으로 고꾸라진 반은 도자기로 된 주전자는 간신히 지켰으나 눈이 되는 촛대를 맥없이 놓치고 말았다. 딱딱한 바닥과 정면으로 부딪친 무릎을 감싸고 끙끙거리는 사이, 깡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촛대가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작은 불꽃이 픽 죽었다.
칠흑 같은 암흑이 삽시간에 반을 덮쳤다. 반은 바닥인지 계단인지 모를 공간을 짚은 제 손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입만 벙긋거리다가 울컥 치미는 욕설을 삼켰다.
“아, 씨….”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고 했다. 막판에 와서 이딴 실수를 저지를 줄 누가 알았을까. 어린애도 아니고 느닷없이 엎어진 자신이 한심해 통증도 가실 지경이었다. 쓰라린 무릎을 벅벅 문지른 반은 마지막으로 불꽃이 피었던 위치를 더듬어 나동그라진 촛대를 주워 들었다. 다행히 초는 무사했다.
“하….”
그러나 반이 처한 상황은 다행이라고 할 수 없었다. 촛대를 찾으면 뭐 하나. 발을 딛는 쪽이 앞인지 뒤인지 분간 가지 않는 어둠에 갇혔는데.
하필이면 주전자를 들고 있어 양손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기어가기도 여의찮았다. 주춤거리며 한 발짝 뗀 반은 조심조심 나아갔다. 해가 뜰 때까지 복도에 머물 수는 없으니 복도 끝까지 간 다음 제 방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지금 가는 방향이 왼쪽이던가, 오른쪽이던가….
왼쪽 끝에는 제 방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도련님의 개인실이 있다. 도련님의 개인실은 애당초 잠가 둔다지만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는 사람 앞에서 변명할 말 없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계단 끝에서 넘어지며 방향 감각을 상실한 반은 머뭇거리다가 발길을 돌렸다.
제발 이 방향이 맞길 바라며 아슬아슬한 걸음을 떼려던 찰나. 무언가가 등 뒤에서 뻗어 왔다.
쩍 굳은 반은 숨도 쉬지 못하고 새카만 암흑만 응시했다. 얇은 천에 감싸인 팔뚝을 스치고 다가온 무언가가 반의 등을 감싸듯이 붙어 섰다. 이윽고 팅, 맑은 금속성이 울리더니 휠이 돌아가는 소리가 뒤이었다.
지포 라이터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면서 그림자가 선명한 새하얀 손이 나타났다. 궂은일 한번 해 보지 않은 듯 형태가 고운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흉터가 많았다. 날개뼈와 척추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존재감에 굳어 있는 새, 지포 라이터에서 일어난 불꽃이 초 심지로 옮겨붙었다. 흐릿하게나마 시야가 밝아졌을 때 낮은 목소리가 귀로 파고들었다. 지척이었다.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온 음성은 오묘했다. 지나치게 낮지도, 높지도 않아 듣기 편한 것을 넘어 감미롭게까지 들렸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허공에서 튀어나온 손에 놀란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축축하게 적신 목이 또다시 바싹바싹 타는 듯했다. 마른침을 삼킨 반은 자꾸만 마르는 입술을 열었다.
“…도련님?”
뻔한 질문이다. 대화가 통하는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 외의 사람이 이곳에 있을 리 없었다. 대답 없이 라이터를 거둔 남자가 곁을 스쳐 지나갔다. 반이 가려고 했던 방향이었다.
촛대를 든 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작고 연약한 불꽃이 느리게 나아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밝혔다. 길게 뻗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나이트가운이 걸음마다 느릿느릿 흔들렸다.
반이 2주간 공고히 쌓아 올린 이미지는 사정없이 깨졌다. 키가 작고 왜소하며 볼품없는 모습일 줄 알았던 예민한 남자의 뒷모습은 반의 입을 틀어막고도 남았다. 보기 드물게 완벽한 체형이었다.
그는 키도 컸다. 턱을 들어도 정수리가 보이지 않았다. 제법 체격이 좋은 제 등을 넉넉하게 감싼 것으로 보아 체구가 작지도 않았다. 정확한 색은 모르겠지만 밝은 머리카락은 엠마와 비슷하게 부드러운 물결을 그리며 너른 어깨로 흘러내렸다. 살짝 긴 듯한 머리카락 사이로 매끈한 뒷덜미가 엿보였다. 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에는 흉이 있었다. 칼로 도려낸 듯 꽤 큰 흉이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꾹 감았다가 뜨자마자 이질적인 흉터가 어둠 속에 묻혔다. 작은 촛불은 개인실 앞 복도까지 비추지 못했다.
스윽…. 스윽….
어둠 속에서 실내화 밑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반은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딘지 익숙한 소리가 들려오는 어둠을 응시했다.
스윽…. 스윽, 탁….
한곳에 멈추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반은 복도에 붙박인 발을 겨우 떼어 낼 수 있었다.
***
걸핏하면 사람을 괴롭히는 도련님이 사실은 환상적인 몸매를 가진 놈이었다라. 반은 떨떠름했다. 얼굴을 보지는 못했으나 퍼진 불빛에 얼핏 드러난 분위기는 고상하고 고전적이었다. 성당 같은 고성의 주인다웠다. 물론 어둡고 스산한 복도와 주황빛 불빛이 만들어 낸 허상뿐일 가능성도 없진 않았지만.
왜 얼굴을 안 보이는지 더더욱 궁금해졌으나,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고 일은 일이었다. 오늘도 단정한 정장을 구김 없이 차려입은 반은 소파에 기대앉아 다리를 꼬았다.
정오를 넘긴 오후 1시. 하루를 빼놓지 않고 새벽부터 줄기차게 전화해 대던 도련님은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는지 오늘 단 한 통의 연락도 주지 않았다. 반은 꼰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며 전화를 기다렸다. 그딴 일로 부르지 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막상 들들 볶는 전화가 뚝 끊기자 그렇게 심심할 수가 없었다.
사실 저는 변태였던가….
눈을 굴리며 몰상식한 도련님에게 길든 이상 현상에 대해 고민했다. 일방적인 명령과 패악질도 대화라면 대화라고, 사람 보기 힘든 일터에서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라 알게 모르게 정이 든 모양이었다.
단 한 달 만에 구박받고 싶어 하는 변태가 된 반은 하품하며 소파에 기댔다. 새벽에 깬 이후로 눈을 붙이지 못했더니 뒤늦은 졸음이 밀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졸음을 버티다가 방을 나섰다.
“그러면 그렇지….”
전화가 오지 않아서 내심 기대했건만 개인실은 언제나처럼 폭탄 맞은 꼴이었다. 사방에 내던져진 물건을 어디에 놓을지 헤매고, 이걸 버려도 되는지 갈등하던 것도 2주 전 일이다. 적응을 끝낸 반은 부지런히 움직여 한 시간 내로 청소를 끝마쳤다.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깔끔해진 실내를 돌아본 반은 방을 나가는 대신 한 번쯤 앉아 보고 싶게 생긴 의자에 폭 기댔다.
“와, 편하다….”
생긴 것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있을 법해서 기대가 없었는데, 몸을 감싸는 쿠션이 예상외로 몹시 편안했다. 책상에 팔을 얹고 진지하게 일하는 시늉을 하다가 창가로 몸을 틀었다.
활짝 열어 둔 창 너머로 정원이 내다보였다. 이 자리에서는 정문에서 세 블록 떨어진 파르테르가 유독 잘 보였다. 엊그제 장미를 꺾어 휑한 몰골이 보기 좋진 않았다. 싱싱한 장미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화병에 꽂아 제 방 창가에 둔 반은 혀를 차며 편히 늘어졌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뺨을 간지럽히고 발치에 닿는 볕은 따스했다. 잠이 안 올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시간도 넉넉하고, 그사이에 누가 들어오는 일도 없으니 잠시만 눈을 감기로 했다. 결코 고용주의 개인실에서 건방지게 잠이나 잘 생각은 없었다. 잠깐 햇볕을 좀 쬐다가 바로 일어나서 트롤리를 끌고….
배에 얹은 손이 미끄러졌다. 고개가 비스듬히 꺾인 반은 열 번의 호흡을 끝마치기도 전에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또렷하고 한순간 목덜미가 싸해지는 것으로 보아 자못 깊게 잠들었던 모양이다.
“헉….”
해가 쨍쨍했던 정원에 노을빛이 감돌았다. 개인실에서 나가야 하는 다섯 시를 넘겼음은 자명했다. 숨을 들이켠 반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허리 숙이고 죄송하다고 사과하면 될 걸 도대체 숨긴 왜 숨냐고, 어이없는 짓을 저지른 저를 탓했지만, 물은 엎질러졌다. 상황은 골이 아픈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반은 이미 오늘 새벽 매뉴얼을 어겼다. 특별한 경고가 없어 안일하게 넘겼는데, 또 한 번 매뉴얼을 어긴 것을 들키면 당장 잘려도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반은 짧은 순간 치열하게 갈등했다.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 책상 밑에서 나가 사과하느냐, 수치를 무릅쓰고 얌전히 숨어 있다가 몰래 개인실을 빠져나가느냐.
용적량이 적은 두뇌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카펫을 딛는 구둣발 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발소리는 하필이면 책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반은 나가기 위해 바닥을 짚은 손을 다급히 물렸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어정쩡하게 쭈그린 다리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책상이 넓어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책상 뒤판에 착 달라붙은 반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죽였다.
이내 미끈하게 빠진 검은 구두가 시야로 들어왔다. 스치듯 목격한 발은 사이즈가 상당히 컸다. 도련님으로 추정되는 구둣발의 남자는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걸음을 옮겨 활짝 열린 창을 하나씩 닫고 커튼을 쳤다. 두꺼운 커튼이 하나씩 창을 가리며 노을빛이 들이치던 실내가 단계적으로 어두워졌다.
커튼으로 모든 창을 가린 남자는 책상으로 걸어와 반이 졸았던 의자에 앉았다. 의자를 당겨 가까이 붙는 탓에 기겁한 반이 힘겹게 책상 모퉁이로 물러났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성인 남성이 숨을 수 있을 만큼 깊은 책상 밑 공간을 빠듯하게 차지한 남자는 미끈한 구두 앞코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듯 움직임은 느릿했다.
타인의 존재를 알아챈 눈치는 아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부근을 누른 반은 남자의 무릎에서부터 시선을 떨어뜨렸다. 주름 한 줄 없는 검은 슬랙스 아래로 드러난 발목이 늘씬했다. 양말에 감춰진 채로 톡 불거진 복사뼈는 단지 동그란 뼈일 뿐인데도 형태가 고왔다.
발목에 빼앗겼던 시선을 돌린 반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잘릴 위기인데 도련님 발목이 예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어서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길 바라 마지않던 때, 바닥을 툭툭 짓밟던 발이 멈췄다.
도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반은 긴장한 채로 남자의 다리를 응시했다. 이윽고 다리만큼이나 길고 단단한 팔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마른침을 삼켰으나 다행히 팔은 책상 밑으로 들어오지 않고 늘 잠겨 있는 책상 서랍으로 향했다. 남자가 열쇠로 잠금을 푸는 동안 늘어진 비숍 블라우스 소매가 살랑거렸다.
손을 가져다 대면 차르르 흘러내릴 듯한 옷감이었다. 아래로 떨어질수록 풍성해졌다가 손목에서 폭이 좁아지는 고전적인 블라우스는 ‘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영락없이 들어맞았다.
제 옷장에 들어 있던 평상복 블라우스도 저런 소매를 가졌다. 고상한 척하는 블라우스를 보고 학을 뗀 반은 가운을 겹겹이 입을지언정 구비된 평상복은 입지 않았다.
반은 옷 취향까지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남자가 한시바삐 침실로 돌아가길 바라며 그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봤다. 서랍을 연 남자가 안을 뒤적거리다가 손을 물렸다. 어울리지 않게 흉터가 많은 손가락에 검은 천이 딸려 나왔다.
저게 뭐지, 하며 눈을 찌푸린 찰나. 순식간에 뻗어 온 무릎이 책상 모서리에 붙은 어깨를 밀쳤다.
“억…!”
딱딱한 무릎에 치여 바닥에 엎어진 반은 양손으로 카펫을 짚은 채 잠시간 굳었다. 마치 발끝으로 정리라도 하듯이 카펫을 밀며 다가온 구둣발이 빠져나갈 길을 차단했다.
남자의 다리 사이에 갇힌 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좆됐다.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지러운 카펫 무늬만 바라보며 변명을 입에 올렸다.
“이거는…. 그러니까, 제가 시간을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이렇게 꼴사납게 들킬 줄 알았다면 애초에 숨지도 않는 건데. 한참은 어린 놈에게 추태를 보인 것 같아 귓불이 화끈거렸다.
묵직한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려는 반의 머리에 손이 얹혔다. 힘이 들어간 손이 고개를 아래로 눌렀다. 머리 위에서 새벽에 들었던 묘한 음성이 떨어졌다.
“넌…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네.”
굴욕적이라고 생각할 틈은 없었다. 눈 깜짝할 새 다가온 검은 천이 눈두덩이를 감쌌다. 갑갑할 만큼 꽉 죄지 않지만 흘러내릴 만큼 느슨하지도 않게 눈을 가린 레이스 천이 머리 뒤에서 매듭지어졌다. 사람을 깔보는 말투와 달리 천을 묶는 손길은 조심스러운 기미가 있었다. 이윽고 매듭을 단단히 묶은 손이 뜨끈한 귓불을 스치며 더디게 거두어졌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반은 손을 들어 낯선 천이 둘린 눈가를 더듬었다. 거친 재질의 검은 레이스 천은 사물을 분간만 할 수 있는 수준의 시야를 허락했다. 해고당할까 봐 조마조마한 것은 둘째치고 다소 황당한 처사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일도 못하면서 말대답만 잘해.”
“…죄송하게 됐습니다.”
도련님의 언행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매뉴얼을 두 번이나 어긴 처지였기에 순순히 물러났다. 책상 밑에서 수치스럽게 기어 나온 반은 무릎을 털며 상체를 세웠다. 내부가 어두운 데다가 눈을 가린 짙은 레이스 때문에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짓을 하면서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유는 역시… 외모겠지. 그 정도 재력에 그 정도 몸매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말이 혀끝까지 치밀었지만 ‘고용주의 모든 요구에 성실히 임할 것’이라는 계약서 조항을 되새기며 참았다. 괴상한 콤플렉스를 가진 남자를 직접적으로 봤다가는 또 예민을 떨 것 같아 멀리, 아마도 이국적인 그림이 걸려 있을 벽을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잘못한 건 맞는데… 왜 제가 눈을 가립니까?”
의자를 끌어 책상에 붙은 도련님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내가 가릴까? 멍청하면 누가 고용주인지도 못 알아보나 봐.”
“말씀을 하셔도 참….”
“‘참’?”
“똑똑하십니다. 그렇죠. 제가 가리는 게 맞습니다.”
제가 못 배워 먹어서 가끔 멍청한 짓을 한다며, 천연덕스럽게 숙이고 들어간 반은 그만 나가 보겠다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고용된 후 첫 대면이지 않나. 따지자면 첫 대면은 새벽에 끝냈지만 그때는 말을 나눌 형편이 아니었으니 얼굴은 못 보더라도 간단한 인사를 하기에는 지금이 적기였다. 반은 여전히 남자가 있는 방향을 외면한 채로 물었다.
“저희 악수나 할까요? 첫 만남이잖습니까.”
“나가.”
도련님은 예민한 만큼 앙칼지기도 했다. 그간 괴롭힘을 받으며 나름대로 그와의 대화에 적응한 반은 한참은 어린 남자에게 슬며시 친화력을 발휘했다.
“제 실수는 사과드립니다. 그러니까….”
“나가라고.”
다만 도련님은 친해지고 싶은 의향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 반은 더 질척이지 않고 발을 뺐다. 그럼 가 보겠다고 했으나 역시나 답이 없었다. 반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오밀조밀한 레이스 사이로 어렴풋이 문이 보였다.
가구에 부딪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문으로 향하던 반은 방 입구에 떡하니 자리한 트롤리를 보고 아차 했다. 청소가 끝나면 치워야 할 트롤리를 내버려 두고 숨었으니 남자가 못 알아차릴 리가 있나. 멍청하다는 소리가 꼭 들어맞는 허술함을 한탄하며 트롤리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을 때, 침묵을 고수하던 도련님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싫어.”
마치 새로운 언어를 연습하듯 어설프고 경직된 문장이 귀를 사로잡았다. 문장이 주는 미묘한 감상에 잠시 멈춰 선 반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저도 좋지만은 않습니다.”
고용인 주제에 건방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구하면서 ‘순종적’, ‘사무적’이라는 조건을 달지 않은 도련님의 잘못도 일부분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개인실을 나섰다. 소지한 열쇠로 밖에서 문을 잠그고 눈을 가린 천을 풀어 내리자마자 개인실 안에서 무언가 산산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레이스 천을 움켜쥔 반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터져 나오는 문을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정말이지 지랄 맞은 도련님이 아닐 수 없다.
***
지난밤을 교훈 삼아 물을 가득 채운 주전자를 테이블에 두고 침대로 파고든 반은 또다시 새벽에 깨어났다. 목이 마른다거나 귀신이 문을 긁는다거나 하는 이유면 차라리 낫지, 사람 정신을 갉아먹는 요란한 전화벨이 울린 탓이었다. 우렁찬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난 반은 전화라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욕을 짓씹었다. 안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미간을 팍 찌푸리고 수화기를 귀에 댔다.
아무리 정해진 근무 시간이 없다지만 새벽에 연락하는 것은 자제해 달라고 요구하려던 때, 낮은 음성이 선수를 쳤다.
- 내가 왜 싫은데.
“…예?”
- 내가 왜 싫냐고.
막 잠에서 깨어난 터라 도련님의 앞뒤 다 잘라먹은 질문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을 끔벅이던 반은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을 뒤늦게 상기하고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거 물으려고 이 시간에 전화하셨습니까?”
건너편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렇다는 뜻으로 읽혔다. 어이없는 나머지 헛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작게 헛기침해서 참아 냈다. 대놓고 웃었다가는 앙칼진 도련님의 화를 피하지 못하리라. 대신 조곤조곤 그를 달랬다.
“그건…. 도련님이 싫다고 하시니까 그냥 나온 말입니다. 농담이에요. 장난.”
- 그딴 장난 치지 마.
날이 선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운데, 그 속에 담긴 뜻은 모순되게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잠기운이 묻어 무거운 눈꺼풀을 느슨하게 뜬 반은 살며시 물었다.
“서운하셨습니까?”
- 그런 걸로 전혀 안 서운해해. 멋대로 생각하지 마.
“안 서운하셔서 이 시간에 전화하셨고.”
또 한 번의 정적이 찾아왔다. 숨 막히기보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정적이었다. 세운 상체를 무너뜨린 반은 편히 누워 수화기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들러붙은 잠기운이 살짝 달아나며 조금 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침묵에 귀를 기울이던 반의 고막으로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음성이 스며들었다.
- 넌 그러면 안 되지. 너는….
잡음으로 본래의 듣기 좋은 목소리를 한 겹 감춘 음성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누르듯이 억눌려 있었다. 반은 더는 이어지지 않는 말을 기다리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어떻게 하면 기분 푸시겠습니까?”
- 어린애 달래듯이 말하지 마.
“저보다 어리신 건 맞지 않습니까? 마음에 안 드시면 자르셔도 됩니다.”
고상한 성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고 해도, 반은 움직이는 가구 흉내는 낼 수 없는 인간이었다. 용병으로 일할 때도 고용주에게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지고는 했던 반은 시건방지게 들릴 만한 대꾸를 하고는 실없이 웃었다.
그만 우울해하고 웃길 바라며 던진 농담이었는데, 건너편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내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을 때, 반은 장난을 쳐도 되는 상대와 치면 안 될 상대가 있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 그만두고 싶어?
“아니요.”
- 그런데 왜 자르라고 해?
“그건 그냥 농담….”
일일이 농담이라고 덧붙이길 포기한 반은 이 사회성 없는 도련님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심하다가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런 놈들에게는 돌려 말하는 것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편이 나았다.
“얼굴도 안 보여 주시고, 인사도 안 해 주시고…. 그래서 저는 도련님이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줄 알았죠. 저는 이 일 마음에 듭니다. 자르시기 전까지 제 발로 안 나갈 생각이고요.”
- …정말?
“정말.”
- 그 말 지켜.
“그럼요.”
- 믿음이 안 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의향이 조금도 없는 도련님이었지만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로 했다. 소리 없이 하품을 한 반은 별다른 요구가 없다면 전화를 끊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래서, 이제 궁금한 건 해결하셨습니까? 저 자러 가도 될까요?”
- 안 돼.
“…안 돼요?”
대체 고용인의 숙면을 방해하면서까지 바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기대 이상으로 뻔뻔하고 당혹스러운 요구였다.
- 잠이 안 와. 자장가 불러 줘.
“…자장가요?”
- 그래. 자장가.
“아까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 이 일 마음에 든다며. 제 발로 안 나갈 거라면서 자장가도 못 불러 줘?
말꼬리 잡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이 인간이 잠시라도 귀엽게 느껴졌다니. 사람을 하도 못 봐서 잠시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반은 말없이 이불을 뻥 걷어차고는 수화기를 고쳐 들었다. 그토록 자장가를 원하신다면 못 불러 줄 것도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자장가는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이제 그만할까 싶으면 아직 잠이 안 온다며 계속 부르길 요구했고, 종국에는 졸려서 느릿해진 것이 다 느껴지는데도 끊임없이 노래시켰다. 연인에게도 이토록 오랜 시간 자장가를 불러 준 적이 없던 반은 목이 다 쉴 때쯤에야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수화기를 노려보다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게 무슨 개고생이래….”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어도 억울함이 가시지 않았다. 고약한 어린아이를 떠맡은 듯한 기분에, 반은 따가운 목을 매만지며 도련님 머리를 쥐어박는 상상으로 울분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