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2/19)

아르카디아 5권

03.

도련님이 솜씨 좋게 난장판을 쳐 놓은 개인실로 들어간 반은 문 근처에 널브러진 주전자 조각을 발로 쓱쓱 끌어모았다. 어제 내던진 것이 도자기 주전자인 모양이다. 이게 하나에 얼마야, 하며 온 마음으로 안타까워한 반은 쓰레받기로 조각을 모아 버리고 본격적인 청소에 나섰다.

보통 때보다 패악질의 수위가 높은 덕택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기계적으로 먼지를 털고 바닥에 나뒹구는 종이들을 한 장씩 주워 드는데, 어깨 너머에서 손이 뻗어 왔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반은 흠칫 놀랐다가 입술을 벌렸다.

“어….”

검은 레이스 천이 눈을 가리면서 한순간 사위가 어두워졌다. 갑갑해진 눈가를 더듬어 본 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 이 꼴로 어떻게 청소합니까.”

“못 할 거 없잖아.”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멀어졌다. 뒤를 반쯤 돌자 바닥을 딛고 선 길쭉한 다리의 형체가 언뜻 보였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기 싫다는 듯이 굴 때는 언제고, 한두 번 마주쳤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낸 남자에게서 대놓고 괴롭히겠다는 속셈이 엿보였다. 단단히 묶은 매듭 아래로 늘어진 천을 쓸어내린 반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들어가 계시죠. 금방 치우겠습니다.”

“싫어. 내 방인데 내 마음이지.”

“전에는 나오시지도 않더니….”

왜 굳이 나와서 눈을 가리는 수고를 얹어 주느냐는 뜻을 담아 중얼거리자 카펫을 짓이긴 남자가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시야의 높낮이와 큼직한 구둣발 때문에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불만스러운가 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시키면 잔말 말고 따라야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토라진 아이처럼 유치하게 구는 도련님에게 넙죽 숙이고 들어간 반은 잠자코 나부끼는 종이를 줍기로 했다. 시야가 흐릿흐릿했지만, 아예 안 보이는 것은 아니라 무릎을 굽히고 손을 뻗었을 때였다.

구겨진 종이 뭉치에 손이 닿기 직전, 윤이 나는 구두코가 그것을 툭 걷어찼다. 휙 날아간 종이가 소파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 목표를 잃은 손을 꾹 말아 주먹을 쥐었다가 푼 반은 꾸물꾸물 이동해 다른 종이를 잡으려고 했다. 그리고 또다시 툭. 구두 앞코에 차여 구겨진 종이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도련님?”

“왜.”

“발로 차시면 제가 못 치우죠.”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쏴붙이고 싶은 것을 꾹꾹 누르고 자상하게 말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삐딱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네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냐.”

반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누가 키웠길래 한마디를 해도 저렇게 싸가지가 없을까. 남자를 이따위로 키운 얼굴 모를 인간들을 잔뜩 헐뜯은 반은 지나가듯 구시렁거렸다.

“성격 진짜….”

“진짜, 뭐?”

“아닙니다. 다 제가 할 일이죠.”

하는 수 없이 남자에게서 무릎걸음으로 멀어진 반은 부러진 만년필을 줍고자 했고, 그새 다가온 남자에게 또 한 번 방해를 받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손을 뻗으려는 시늉만 해도 구둣발을 들이미는 도련님의 행패를 몇 번 겪은 반은 쓰레기를 줍는 척하다가 늘씬한 발목을 확 낚아챘다.

한 손으로 남자의 발목을 쥐고 남은 손으로 멀리 떨어진 쓰레기까지 싹싹 긁어모았다. 몸에 손을 댈 줄은 몰랐던지, 당황하여 잠시 머뭇거린 남자가 손아귀에서 발목을 휙 빼냈다.

반은 그 틈을 타 긴 팔을 뻗어 망가진 스탠드 조명을 가져왔다. 목이 꺾여 더는 사용할 수 없는 조명을 눈 가까이 가져와 살펴보는 사이, 침묵을 유지하던 남자가 가시 돋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따위로 청소를 해?”

“제가 어떻게 청소하는데요.”

“네가 하라는 청소는 똑바로 안 하고 나 보라고 엉덩이 내밀었잖아. 만져 달라는 것처럼.”

반은 제가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설마 스탠드를 잡는다고 잠깐 허리를 숙인 것 가지고 이러는 건가? 휙 고개를 쳐들자 발만큼이나 큼직한 손바닥이 어제와 같이 머리를 내리눌렀다. 그를 보지 말라는 의미였다. 강제로 고개가 숙어진 반은 여러모로 기가 차서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 성희롱하신 겁니까?”

“본 대로 말한 건데.”

어떤 눈으로 사람을 봐야 쓰레기를 줍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유혹으로 보이려나. 망가진 스탠드를 잘 정리해 트롤리 아래 칸에 넣은 반은 머릿속이 음란한 도련님에게 따끔히 경고했다.

“어른한테 그러시면 안 됩니다. 혼나요, 예?”

“혼내지도 못할 거면서.”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남자는 제 위치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혼낼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며 어깨를 들썩인 반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도련님을 뒤꽁무니에 매달고 평소보다 배는 힘겨운 청소를 겨우겨우 끝마쳤다. 앞은 잘 보이지 않지, 청소기를 돌리려고 하면 물건을 카펫에 툭툭 떨구지, 가구를 닦으려고 하면 화병에 담긴 물을 흘리지….

신종 괴롭힘에 잔뜩 시달린 반은 피로한 낯으로 트롤리를 밀었다. 지옥 같은 방에서 벗어나기 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이쯤 되니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런데요, 도련님. 왜 얼굴을 안 보여 주십니까?”

“그게 중요해?”

“그냥… 궁금하잖습니까.”

남자는 말이 없었다. 무시할 모양이라고 생각한 반이 발을 뗐을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랑 눈 마주치기 싫어.”

표정을 볼 수 없어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려웠지만, 그의 미묘한 목소리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이고 굳어진 적대감, 슬픔, 원망 따위의 질척한 감정이 묻어났다.

반은 그러시냐는 대답 없이 방을 나섰다. 엉덩이는 만져 보고 싶고 눈은 보기 싫은가 보지. 성 노리개에 관한 가설을 재고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왜 만난 지 한 달이 조금 넘는 저에게 그런 감정을 쏟아붓는지 모를 일이었다.

***

반은 제 직무를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는 청소부 겸 심부름꾼일까, 폭언과 희롱을 받아 주는 무력한 시종일까. 며칠 밤 심사숙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시종이다. 무력하고 가련한 시종이 분명했다.

눈가리개가 등장한 이후로 도련님의 행패는 더더욱 심해졌다. 개인실을 청소하러 가면 거리낌 없이 모습을 드러냈고, 반은 매번 레이스로 된 안대를 착용해야 했다.

하루는 눈이 너무 침침해서 못 쓰겠다고 했다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폭언을 들어야 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걸려 오는 무의미한 전화는 덤이었다. 결국 도련님의 다소 변태 같은 취향에 맞추기로 한 반은 개인실로 들어가기 전 스스로 눈을 가렸다.

얼굴에 두르고 남은 면이 길어 간혹 어깨에 닿는 레이스를 등 뒤로 넘기고 문을 열었다. 남자는 오늘도 개인실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장식이 돋보이는 소파에 길게 누워 채 수납되지 않는 길쭉한 다리를 팔걸이 너머로 뻗은 자세는 귀티가 난다기보다 상당히 방만해 보였다.

“좋은 오후입니다.”

“좋기는.”

“좀 좋아해 보시죠. 오늘 화창하던데.”

남자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방을 가로지른 반은 꼭꼭 닫은 커튼을 활짝 열었다. 온종일 빛을 안 보면 성격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창을 전부 열어젖히자 남자는 짜증이라도 나는지 가슴에 얹은 책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반은 남자가 빛을 마주하면 죽는 흡혈귀 행세를 하든 말든 청소에 매진했다. 잠시 후부터 시작될 방해 작전을 염두에 둔다면 한시바삐 일거리를 줄여 두는 편이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큰 쓰레기를 처리하고 나자 책장이 찢기는 소리가 났다.

책 페이지를 찢어 뭉친 종잇조각이 허공을 가르고 휙 날아왔다. 발치에 안착한 종이 뭉치를 주워 들자 북북 찢기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휙휙 날아오는 종이 뭉치가 반이 가려는 방향마다 떨어졌다.

“책 아깝게 왜 그러십니까.”

“머리는 왜 그 모양이야? 한 가닥 내려온 거.”

훈계를 보기 좋게 무시한 남자가 트집을 잡았다. 발로 종이 뭉치를 밀어 내던 반은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한 가닥을 쓸어 올렸다. 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은 고정되는가 싶더니 도로 픽 떨어져 깔끔한 인상을 흩트렸다. 한동안 잘 손질되더니 오늘따라 말썽이었다. 포물선을 그리도록 종이 뭉치를 내던진 남자가 뻔뻔스러운 투로 물었다.

“야해 보이려고 그런 거야?”

도련님의 괴롭힘은 이전보다 세분화됐는데, 그중에는 당당한 희롱도 있었다. 한평생 누군가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기는커녕 신발 밑창에 들러붙어 근근이 살아온 반은 이 정도 희롱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운 수준이었다. 도통 정리가 되지 않고 도리어 흐트러지기만 하는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며 덤덤하게 받아쳤다.

“고정이 잘 안 돼서 이런 겁니다. 야해 보였으면 죄송합니다.”

어제와는 또 다른 디자인의 구두를 신은 발을 느리게 까딱거리는 남자가 자리한 소파로 향했다. 의식적으로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하며 소파 아래를 치웠다.

“바지는 왜 그렇게 딱 달라붙어. 누구 보라고?”

“준비된 옷 입은 겁니다. 도련님 취향 아닙니까? 도련님 보시라고 입었겠죠.”

한 장 한 장 줍다가는 세월이 다 갈 것 같아 빗자루로 한 번에 쓸어 내자 불만스러운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비닐 안에 싹 다 몰아넣고 몸을 일으킨 반은 비뚤어진 액자를 바로 세웠다.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첫 며칠은 사물 분간이 어려워 여기저기 부딪치며 멍을 만들었지만, 방 구조가 몸에 새겨지자 일도 한결 수월해졌다.

책장 찢기를 그만둔 도련님은 분주히 돌아다니는 반을 눈으로 좇다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다른 놈들은 네가 그러면 좋아 죽나 보지.”

“대체로는요.”

“…부정도 안 해?”

“부정할 것 없지 않습니까. 사실인데.”

그러니까 맥스 같은 미친놈도 달라붙지 않겠는가. 반은 외모에 관해서는 겸손을 떠는 성격이 아니었다. 종종 피곤한 일이 많다며 일부러 짓는 것이 분명한 한숨을 지은 반은 도련님은 잘생긴 남자의 인생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라고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괜히 사랑받지 못하는 남자를 자극했다가는 큰일 나는 수가 있었다.

도련님은 또 무엇이 불만인지 세게 덮은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일어나 앉았다. 발 받침대에 얹은 발목에 다른 쪽 발목을 교차한 남자는 하도 많이 들어 감흥도 없는 한마디를 짓씹듯 내뱉었다.

“난 네가 진짜 싫어.”

저토록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당신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던지라, 반은 슬며시 웃으며 반박했다.

“전 도련님 좋은데요.”

다가오면 도망가고 싶고, 달아나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살짝 비뚤어진 애정관 때문이었다. 오래전, 잠깐 만났던 사람은 제게 이렇게 말했다. 가정에서 사랑을 못 받고 자라 마음껏 사랑하는 법도 모르며, 버림받을까 무서워서 매사 가볍게 구는데 아주 꼴사나워서 못 봐주겠다고.

대단히 충격적인 비난이라 십 년이 넘었음에도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아마 그 비뚤어진 애정관이 네가 싫어 죽겠다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툭툭 건드리며 관심을 갈구하는 도련님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물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얘기인 데다가 그의 행동이 기꺼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극히 일부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는 것뿐이다.

반의 무심한 반격에 도련님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조막만 한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반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얌전해진 틈을 타 세탁실에 맡길 가운을 재빨리 트롤리 손잡이에 걸고 청소를 말끔히 끝냈다. 폭언 폭격이 쏟아지기 전에 얼른 나가려는데, 소파에 늘어져 있던 남자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는 싫다며.”

“농담이라고 말했잖습니까.”

다 끝난 얘기를 물고 늘어지던 남자는 반이 문 앞에 다다를 즈음 웃음을 자아내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왜 좋은데.”

문을 연 반은 트롤리를 내보내며 가볍게 답했다.

“예민해서요.”

개인실 문을 잠그고, 이곳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묵직해지는 트롤리를 끌고 나아갔다. 성경의 한 장면이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는 붉은 햇빛을 오만 빛깔로 바꾸어 복도에 흩뿌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괴팍하고 고집스러우며 상처를 주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똘똘 뭉친 남자를 대할 때면 간혹 사랑스러운 소년이 떠올랐다. 남자에게서 소년을 연상시킬 만한 부분은 조금도 없는데도 말이다.

소년은 남자만큼 키가 크지 않았으며, 남자보다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손발이 큰 편이기는 했으나 성인 남성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가볍게 쥘 만큼 크지는 않았으며, 이제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남자만큼 나지막하면서 감미로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쓰는 단어, 억양, 말씨도 달랐다. 성정은 말할 것도 없다. 소년은 종종 믿기지 않을 정도의 사고를 치기는 했어도 입버릇처럼 폭언을 퍼붓지는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배경이 달랐다. 소년에게 고성과 요트를 소유할 재력이 있을 리가 없다.

모든 조건이 엇나가는 와중에, 다만 어느 한 지점, 아주 좁고 작은 부분이 남자를 대할 때마다 소년을 떠올리게 했다.

둘은 저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순간에 팩 토라져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예민함을 품고 있었다. 왜 이런 걸 들어줘야 하나 싶다가도 무심결에 달래 주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눈가리개를 풀어낸 반은 쓰레기봉투를 들어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그저 누구에게서든 소년의 모습을 끄집어내려고 애쓰는 걸지도 모르고.

***

예민한 도련님이 사라졌다. 벌써 나흘째다.

개인실로 들어간 반은 사흘 전 정리한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는 방을 둘러봤다. 글을 적을 수 있는 지류도 그 자리 그대로, 만년필도 그대로, 소파의 쿠션도 그대로였다.

깔끔한 풍경이 낯설어질 때가 오다니.

눈살을 찌푸린 반은 일거리가 없어졌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며 카펫을 밟았다. 청소할 때마다 도련님이 지정석으로 삼는 소파에 그와 비슷한 자세로 늘어져 팔걸이 밖으로 튀어 나간 다리를 달랑거렸다.

짧은 외출도 아니고 며칠씩이나 고성을 비우면서 언질 한번 안 준 것은 다소 섭섭했다. 일개 시종에게 행방을 전할 필요는 없지만 제법 친해진 줄 알았는데…. 보이는 대로 벽이 두꺼운 도련님이었다.

시시때때로 시비를 거는 남자가 사라지자 한없이 평화로운 개인실에 널브러져 빈둥거리던 반은 네 시쯤 빠져나와 엠마에게로 향했다. 면접을 봤던 으리으리한 응접실을 지키는 엠마는 반을 반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치지도 않았다. 밝게 인사한 후 은근슬쩍 책상 앞 의자를 차지한 반은 시시한 안부 인사로 그의 시간을 빼앗다가 넌지시 물었다.

“도련님은 언제쯤 오실까요?”

“오실 때가 되면 오실 겁니다.”

육지에서 공수해 올 생필품 목록을 정리하던 엠마가 당연한 대답으로 다채롭게 이어질 가능성을 가진 질문을 차단했다. 그러시겠지, 오실 때가 되면 당연히 오시겠지. 속으로 툴툴거린 반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걱정 안 되십니까? 아직 어린아이 같으시던데.”

“그런 면이 없진 않죠. 한참 어리신 건 맞으니까요.”

‘도련님은 성인이십니다’ 하며 한심한 눈빛을 보낼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운 반응이었다. 반은 제가 먼저 떠보고도 눈썹을 쑥 들어 올렸다. 스물다섯 살을 보통 한참 어리다고 하던가. 의아해하다가도 엠마 정도의 연배라면 도련님이 한참 어려 보이겠거니 싶었다.

그리고 도련님이 어리고 자시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반은 엠마에게로 상체를 기울이며 슬며시 본론을 꺼냈다.

“제가 차 내려 오면 같이 마셔 주실 수 있습니까? 커피도 좋은데요.”

“보다시피 바쁘네요.”

“그러시군요….”

유일하게 대화할 사람이 나흘째 부재중이다 보니 심심해 죽을 것 같았던 반은 성가시니 그만 나가 달라는 엠마의 눈빛에 더는 뻔뻔하게 버티지 못했다.

엠마에게는 티타임 거절을, 그림자만 언뜻언뜻 보이는 고용인들에게는 마주치면 안 되는 괴물 취급을 받은 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끔찍하게 심심한 것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좋은 일자리인데, 역시 완벽한 직장은 없는 모양이다.

무료한 나날이 이어지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이불을 덮은 반은 새벽 3시까지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짜증스럽게 눈을 눌러 감고 양을 세고 있을 무렵이었다.

스윽…. 스윽…. 스윽….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문밖 복도에서 나는 소리였다. 눈을 번쩍 뜬 반은 서둘러 일어나 던져둔 가운을 걸치고 촛대를 꺼냈다. 성냥을 켜면서 소리가 사라지지 않길 바랐고, 바람은 이루어졌다.

작은 불꽃을 틔운 촛대를 들고 냉큼 문으로 다가간 반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열린 문틈 새로 시꺼멓게 죽은 복도가 나타났다. 낮게 든 초에서 번지는 연약한 불빛이 제 방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남자의 형상을 비추었다. 바닥에 스윽스윽 마찰하던 실내화가 탁,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그 귀신이 도련님이었나 봅니다.”

반은 씩 웃었다. 고작 나흘이었다. 내일부터는 피 말리는 괴롭힘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이토록 반가울 수 있을까. 모든 건 외로움을 느끼도록 설계된 고성의 분위기 탓이라고 책임을 회피한 반은 일렁이는 촛불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남자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가슴께까지만 희미하게 드러난 남자는 반이 깨어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 짧게 침묵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이 시간에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직 안 나갔습니다. 문만 열었지.”

반은 실내화를 걸친 발로 방과 복도를 가르는 부분을 툭 짓밟았다. 남자의 얼굴은 어둠에 파묻혔지만, 발끝에 시선이 와 닿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만 잘해. 매번….”

불만이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남자의 음성은 느릿하기는 해도 또렷한 평소에 비해 상당히 피로하게 들렸다. 날카로운 면이 피로로 인해 무뎌진 듯했다. 눈을 가늘게 뜬 반은 문득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깨끗했던 복도에 얼룩 같은 것이 있었다.

무슨 얼룩이지 싶어 촛대를 내려 복도를 비추어 본 반은 흠칫 놀라, 똑바로 응시하는 것을 혐오하는 도련님의 성향도 잊고 고개를 들 뻔했다. 목에 힘을 주어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진 복도에 시선을 고정하고 물었다.

“다치셨습니까?”

“…아니.”

“다치신 것 같은데요. 핏방울 보여요.”

“나는 안 보여.”

뻔히 보이는 것을 안 보인다고 우기는 남자가 갑갑했다. 반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그가 방으로 들어올 틈을 만들어 주었다.

“고집부리지 마시고요. 들어오세요.”

남자는 꿋꿋이 버텼다. 정 들어오기 싫으면 제 방으로 가면 될 걸, 또 걸음을 돌리지는 않았다. 긴 한숨을 내쉰 반은 촛대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상처 확인만 하겠습니다. 저는 못 나가니까 도련님이 들어오세요. 눈은 가리겠습니다. 이러면 들어오실 수 있죠?”

침대 테이블에 촛대를 내려 두고 그 옆에 가지런히 접어 둔 레이스 천을 들었다. 스스로 묶는 것에도 제법 익숙해진 반은 검은 천으로 눈가를 가리고 머리 뒤에서 매듭지었다. 남자는 반이 눈가리개를 착용하고도 한참이나 복도에 붙박여 있다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손을 뒤로 해 열린 문을 닫은 남자는 깊이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머물렀다. 성희롱은 잘도 지껄이면서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방 안으로 못 들어오는지 모르겠다며 도련님의 그림자를 멀뚱히 바라보던 반이 먼저 다가갔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말해 주지 않는 고집스러운 도련님 때문에 촛대를 들어 그의 몸을 일일이 비추었다.

남자는 평상시 즐겨 입는 비숍 블라우스 대신 상체에 꼭 달라붙어 살결을 모조리 감추는 검은 폴라 티를 입고 있었다. 홀로 시간을 되돌린 듯 늘 고전적인 모습에 익숙했던 반은 평범한 차림의 그에게서 낯섦을 느꼈지만 얼른 눈을 내리깔아 제 역할로 돌아갔다.

“어디 다치셨는지도 제가 맞혀야 합니까?”

수수께끼라도 하듯 남자를 가운데 두고 돌며 손과 팔을 비추어 보던 반은 그의 상체에서 유독 색이 짙은 부분을 발견했다. 손을 들어 등 부근을 살짝 매만지자 찢어진 천이 벌어지며 시뻘건 피가 묻어났다.

“무슨….”

기껏해야 손가락이나 크게 베였겠거니 했지, 피가 흥건히 묻어날 정도로 큰 상처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반은 상처 부위를 만져도 반응이 없는 남자의 뒤통수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뭐… 어디서 칼 맞으셨습니까?”

남자는 불리할 때마다 입을 꾹 다물었는데, 지금이 그러했다. 까칠한 남자의 성격을 보면 어디서 칼 맞아도 이상하진 않다고 생각한 반은 천이 찢긴 부근을 막막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아무래도 귀하신 몸이니 병원으로 가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러나 이 야밤에 섬을 빠져나갈 방법이란 요원했다. 헬기장이 있지만, 헬기 운용은 제 권한을 훌쩍 벗어났다. 별수 없이 가장 합리적인 답을 내놓았다.

“엠마 불러오겠습니다.”

“됐어.”

문을 향해 몸을 돌리자마자 팔이 붙잡혔다. 예민한 도련님은 제가 잡아 놓고도 접촉에 놀랐는지 움찔하며 손을 물렸다.

“됐기는 뭐가 됐습니까. 상처 심한데….”

“싫어.”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부리는 남자를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침대를 가리켰다.

“…예. 그럼 좀 앉으세요. 옷 벗고.”

“왜 벗기려고 해?”

“이상한 생각 하지 마시고요. 치료는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음탕한 생각만 하는 남자를 등지고 서랍장으로 향했다. 가장 아래 칸에 비상용 구급상자가 있는 것을 미리 확인했던 반은 상자를 꺼내 내용물을 뒤적였다. 구비된 약이며 도구는 제법 본격적이었다. 과장하자면 이곳에서 수술까지 집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부디 연고와 밴드로 끝나는 상처이기를 바라며 적신 수건을 들고 침대로 다가갔다.

마네킹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줄 알았더니, 남자는 얌전히 상의를 벗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반은 침대 중앙에 구급상자를 얹고 너른 매트리스 위로 기어올랐다.

“가리개 잠깐 풉니다. 저랑 눈 마주치기 싫으시면 고개 돌리지 마시고요.”

무덤덤하게 빈정거린 반은 눈가리개를 슬쩍 올리고 도련님의 등을 마주한 상태로 촛대를 가져왔다. 젖은 수건을 펼치며 고개를 든 반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탄성을 흘렸다.

“어….”

상처는 상당히 깊었다. 날개뼈 아래, 날카로운 것에 찢긴 피부는 피로 범벅되어 보기만 해도 제 등이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혼자서는 치료하기 힘든 위치기도 했다. 상처에 익숙한 반이 바보 같은 신음을 흘린 이유는 단지 찢어진 상처의 깊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슨 흉터가 이렇게 많지?

요트를 몇 대나 소유하고, 가구와 장식품 하나하나에서 고상한 내를 폴폴 풍기는 고성에서 유유자적 사는 자산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등이었다.

근육이 예쁘게 잡혀 보기 좋은 형태를 띤 등은 무수한 상처로 더럽혀져 있었다. 화상으로 보이는 상처, 베였다가 아문 상처, 반점 같은 흐릿한 상처…. 심지어 너른 어깨 한쪽에는 제 허벅지에 있는 것과 비슷한 관통상 흉터까지 있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우스갯소리나 나불대려던 혀가 뻣뻣하게 굳었다. 반의 상상 공장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설마 가족인가? 가족 말고 이런 상처를 만들 수 있는 상대가 있나. 입술을 질근거리면서 제멋대로 상상을 부풀리던 반은 등의 흉터는 물론이고 새로 생긴 상처에 대해서도 일절 묻지 않고 말없이 치료를 시작했다.

환부를 수건으로 닦아 내고 자세히 들여다보자 꼭 병원에 갈 필요는 없어도 꿰매기는 해야 할 듯했다.

“이거 살짝 꿰매야 할 것 같습니다. 아플 텐데 베개라도 드릴까요? 이렇게 뜯으시면….”

“필요 없어.”

“오…. 어른스러우시네요.”

“애 취급하지 마.”

베개를 가져와 손으로 쥐어뜯는 시늉을 보여 주던 반은 굳은 입매를 풀며 조그맣게 웃었다. ‘그럼 잘 참아 보세요’ 하며 손을 소독하고 바늘과 집게를 들었다. 병원에 갈 돈이 없던 시절 동료들의 피부를 꿰매 준 경험이 더러 있었지만, 그때보다 배로 긴장됐다. 귀한… 지는 모르겠지만 값비싼 몸에 흉을 낼까 봐 입맛을 다시다가 이미 엉망진창인 등판을 눈에 담고 마음 편히 손을 놀렸다.

실이 살가죽을 당길 때마다 꽤 고통스러울 텐데, 엄살쟁이일 것 같았던 도련님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고통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무던한 그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언짢고 불편해서 반의 표정은 영 나빠졌다. 입술을 꾹 깨물고 상처를 한 땀 한 땀 꿰매는 와중에 입을 접합한 줄 알았던 남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원래 이렇게 아무에게나 친절해?”

“사람 안 만나 보셨습니까? 저보다 착한 사람 널렸는데요.”

반은 침침한 눈을 찌푸리며 그의 등에 조금 더 붙었다. 가부좌를 튼 상태로는 아무래도 비좁아서 다리 한쪽을 편히 뻗고 엉덩이를 당겨 앉았다.

“지금 다른 사람들 얘기 하는 거 아니잖아.”

“예에. 제가 원래 좀 친절합니다.”

도련님과의 입씨름은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다지 그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반은 상처를 꿰매는 것에 집중했다.

촛불에 의지해 살갗을 바느질하고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예쁘게 매듭짓고 싶은데 좀처럼 고운 모양이 나오지 않아 애먹을 무렵, 불현듯 사위가 고요해졌다.

아니, 방은 애초에 고요했고, 뒤늦게 적막을 눈치챈 것뿐이었다. 시선은 남자의 곧은 척추뼈에 머물렀다가 넓은 세모꼴을 그리는 견갑골과 둔중하지 않은 허리선으로 흘러갔다. 흉측한 흉터로 뒤덮여 있음에도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 등이었다.

반은 손가락에 살짝씩 스치는 따스한 체온을 모르는 체했고, 가느다란 숨결이 살갗에 닿을 때면 남자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야릇한 긴장감으로 인해 입 안이 말랐다. 반은 봉합을 마무리하며 눈알을 굴렸다.

이런 분위기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것은… 그런 분위기였다. 눈이 마주친다거나 단 한 번의 신호만 주어도 선을 넘게 되는,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같은 분위기. 떨떠름한 낯을 한 반은 마지막 매듭을 짓고 서둘러 손을 물렸다.

“다 끝났습니다. 일단 반창고 붙여 드릴 테니까 아침에 엠마한테 말씀하세요.”

알코올 솜으로 깨끗하게 닦은 바늘을 한 번 더 소독하려다가 손이 미끄러졌다. 날카로운 바늘 첨단이 중지를 찔렀다.

“아….”

따끔함을 느낀 반은 반사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상처가 났나 싶어 손을 눈 가까이 끌어오려던 때, 큼지막한 손아귀에 손목이 덥석 잡혔다. 물결치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시야 속으로 스르륵 쏟아져 내렸다. 그답지 않게 놀란 기색이 스민 목소리가 귀로 파고들었다.

“다쳤어, 반?”

등과 마찬가지로 자잘한 흉이 많은 손이 손등을 감쌌다. 반은 살짝 찔렸을 뿐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남자의 옆얼굴은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호기심보다 의무감이 큰 반은 그의 얼굴을 힐끔힐끔 보는 무례를 저지르는 대신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 살짝 찔린 것도 다친 거라면 다친 거겠죠.”

“…아.”

남자는 아무 상처도 없는 손가락을 보자마자 정신이 든 듯 붙잡은 손을 홱 내팽개쳤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까다로운 도련님을 흘긋거린 반은 눈썹 뼈에 걸쳐 둔 눈가리개를 끌어 내렸다. 상처를 덮을 만한 사이즈의 반창고 포장을 뜯으면서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제 이름 아셨네요.”

“그럼 몰랐겠어?”

“한 번도 안 불러 주시지 않았습니까. 전 또 모르시는 줄 알았죠.”

바늘보다 더 날카롭게 대꾸하는 남자의 날개뼈 아래에 반창고를 붙인 반은 이제 다 됐다고 말하며 활짝 펼쳐 둔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진통제를 건네줄까 하다가 알아서 챙기겠거니 싶어 뚜껑을 닫았을 때, 남자의 곁으로 쭉 펴 둔 다리에 손이 얹혔다. 잘 때는 바지를 입지 않아 드로어즈 아래로 드러난 살결에 손바닥의 촉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묵직하면서 뜨거운 손길에, 반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음성은 유혹적이라기보다 공격적이었다.

“여긴 왜 이래?”

“예?”

남의 다리를 대뜸 가져가 무릎 위에 비스듬히 얹은 남자가 검지로 총상이 남은 부위를 쓸었다. 마치 가짜인지 확인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반은 그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뒤늦게 알아듣고는 피가 드문드문 묻은 수건을 정리하며 무던히 답했다.

“안 믿기시겠지만 제가 또 한때 거의 제임스 본드를 능가하는….”

“헛소리하지 말고, 뭐냐고 묻잖아. 왜 이런 건데? 언제.”

농담 던질 틈도 주지 않고 말허리를 끊어 낸 남자가 쏘아붙였다. 제 물건에 흠집이라도 난 것처럼 구는 태도가 얼떨떨했다. 반은 실없이 웃으며 어린 도련님의 과민한 반응을 가볍게 넘겼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사고였어요.”

총상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너무나 길었다.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가장 친한 아비게일에게도 총상을 입은 자세한 내막을 알려 주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입원까지도 대충 교통사고로 얼버무려서 옷을 벗겨 보지 않는 이상 총상이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미덥지 않다는 듯이 천천히 손아귀에서 힘을 푼 남자는 손가락 끝으로 동그란 모양의 흉터를 쓸어내렸다. 간지러웠지만 참을 만했다. 어슴푸레한 촛불이 허벅지를 매만지는 남자의 손을 따스하게 감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침묵하던 남자가 연약하게 들리는 물음을 흘렸다.

“…아파?”

“가끔은요. 저번에 커피 타오라고 계단 왕복시키실 때는 좀 아팠습니다.”

일상을 해칠 수준의 후유증은 아니었지만 반은 일부러 뼈가 있는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그러니 앞으로 똥개 훈련은 그만 시키라고 슬쩍 요구하려다가 남자의 손길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탓에 겸연쩍게 입을 다물었다. 본인도 상처를 입은 적 있으니 동질감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반은 축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울 요량으로 남자의 어깨를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

“그나저나 커플이네요. 총알 자국.”

허벅지에 시선을 고정한 남자가 눈에 띄게 몸을 굳혔다. 장난삼아 건드린 것이 신호탄이 된 듯, 우울한 빛을 띠었던 분위기가 미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상대가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반도 덩달아 당혹스러웠다. 남자의 상처를 꿰매며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자세부터가 달랐다.

남자는 상의를 탈의한 상태였으며, 반은 얇고 헐거운 가운을 걸친 채 그의 무릎에 다리를 얹고 있었다. 깊은 접촉은 결코 아니었으나 긴장감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일렁이는 촛불과 시야를 어지럽게 가리는 레이스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찰나, 허벅지에 얹힌 남자의 손이 미끄러졌다.

손은 느리게 움직여 허벅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탄탄한 근육이 잡힌 앞쪽에 비해 부드러운 속살이 널찍한 손바닥 안에 가볍게 쥐였다. 살점을 꽉 쥐었다가 놓은 손은 홀리기라도 한 듯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말려 올라간 드로어즈에 손톱 끝이 닿은 순간.

레이스 아래 감춰진 눈을 깜박이자마자 사타구니로 향하던 손이 우뚝 굳었다. 중지 한 마디가 드로어즈 안으로 들어온 상태로, 서로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

이윽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린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침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 둔 촛대가 기우뚱하더니 이불로 넘어갔다. 반은 어어, 하며 잽싸게 몸을 던져 불이 이불에 닿기 전에 촛대를 바로 세웠다.

불꽃을 손으로 가리자마자 쾅! 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촛대를 그러쥔 채로 매섭게 닫힌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린 반은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촛대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반은 구급상자와 반창고 포장지가 지저분하게 널브러진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남자의 손길이 닿은 허벅지 안쪽이 불에 덴 듯 후끈거렸다.

여러모로 난처했다. 어림잡아 열 살은 어린 도련님에게 몹쓸 짓을 한 기분이었다. 정작 남의 허벅지를 주물럭거린 놈은 도련님이었지만 나이는 허투루 먹는 게 아니지 않나. 당혹스럽기는 해도 경험 많은 연장자로서 부드럽게 넘어갈 방법은 수두룩했는데 어째 제대로 된 대처를 못 했다.

왜일까,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이유가 불분명했다. 마침내 반은 요즘 그럴싸한 상대를 못 만난 여파라고 결론 내렸다. 서지 않는다고 해도 삽입은 사실상 부가적인 요소라, 상대와 성향만 맞는다면 어느 정도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적당한 상대를 만나야 할 시기에 하필 맥스 같은 놈에게 걸린 탓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도련님은 타인에게 얼굴을 감추고 싶을 만큼 못생겼을지언정 몸과 분위기는 좋았으니 휘말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키와 체격이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체형은 취향 범주에 들어올 텐데, 아쉬웠다.

아니지. 아쉬울 일이 아니었다. 고용주에게 끈적한 시선을 받아 본 적은 있어도 고용주를 끈적한 눈으로 바라본 적은 없는 반은 잠시간 이성이 날아갔음을 인정했다. 도련님이야 한창 성에 관심이 많을 창창한 시기이니 내도록 붙어 있는 고용인에게 눈길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주어서는 안 됐다.

“하아….”

소개받은 일자리인 만큼 사고는 치지 말자고 다짐한 반은 실수를 반성하며 눈을 감았다. 동성에게도 먹히는 외모를 가진 남자의 삶은 너무도 피곤했다.

***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단장을 끝낼 즈음이었다.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쥐도 새도 모르게 정원을 손질하고 사라지는 정원사가 이토록 시끄러운 소리를 낼 리는 없었다. 의아한 낯으로 정원을 내다본 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황급히 구두로 갈아 신고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성을 빠져나온 반은 이 섬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인파를 맞닥뜨렸다. 인원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차림새는 반가움에도 불구하고 선뜻 말을 걸 수 없게끔 했다. 북적이는 정원을 둘러보던 반은 때마침 안면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거침없이 발을 뻗었다.

“오랜만이에요, 맥.”

“안녕하십니까. 반 클라크 씨.”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맥은 늘 그렇듯 가면 같은 미소로 맞아 주었다. 대략 한 달 만에 만나는데도 감정의 동요가 없는 맥에게 다가간 반은 고개를 돌려 안전모를 착용한 인부들을 바라봤다. 성 외곽에 골조가 세워지고 있었다. 반은 인부를 감독 중인 맥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승강기 공사 중입니다.”

“…승강기요?”

관광지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고아한 고성과 승강기는 그리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반은 한마디 말이나 눈인사도 건네지 않고 작업에 착수하는 인부들을 얼빠진 표정으로 보다가 불시에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냈다.

“안 무너지나요?”

“내부 설치는 불가능하여 외부에 설치 중입니다. 건물과 연결할 예정입니다.”

“그렇, 군요….”

반은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입만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주억이는 것으로 그쳤다.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대답을 얻기에 더욱 적절한 상대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반은 기함할 속도로 작업을 이어 가는 인부들을 감탄 어린 눈으로 응시하다가 어렵사리 발길을 돌렸다.

여느 때처럼 눈을 가리고 개인실로 들어간 반은 대청소에서 해방됐던 지난 나흘간의 대가를 배로 돌려받았다. 물론 나쁜 쪽이다.

책장의 책이 절반 가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며 군데군데 찢긴 종잇조각과 구겨진 종이 뭉치가 굴러다녔다. 유리나 도자기를 깨뜨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저 자신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비좁은 공간에 트롤리를 밀어 넣은 반은 늘씬한 몸뚱이를 지정석에 늘어뜨린 남자를 흘깃거렸다.

어제 일 때문에 오늘은 침실에 콕 박혀 두문불출할 거라고 예상했건만 뜻밖이었다. 혹시나 해 눈을 가리고 들어오길 잘했다. 반은 책 무덤을 껑충껑충 뛰어 넘어가 우중충한 커튼을 걷으며 인사했다.

“좋은 오후입니다.”

남자는 뭐가 또 불만인지 대꾸하지 않았다. 굳이 어제 일을 들추어 분위기를 망칠 만큼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닌 반은 묵묵히 청소를 시작했다. 무 뽑듯 뽑혀 나온 책을 제자리에 꽂고 읽을 수 없는 불어와 낙서로 가득한 종이는 쓰레기 봉지로 직행했다.

어수선할 뿐, 손 못 쓰게 더럽지는 않은 방을 치우면서 반은 어렴풋이 감을 잡은 도련님의 패턴을 되짚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고 갑갑한 날이면 다음 날 방을 평소보다 훨씬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화가 나면 깨지는 물건을 던졌고, 그 정도가 아니라면 책이나 물건을 툭툭 던지는 것으로 끝났다. 개인실은 그의 마음을 투영했다. 참고로 그가 이 성에 머무는 동안 단 하루도 깨끗한 적이 없었다.

책과 종이만으로 방을 어지른 도련님은 오늘따라 조용했다. 방해도, 희롱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침실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발 디딜 틈 없는 바닥 정리를 빠르게 끝낸 반은 잉크가 떨어진 책상을 닦으며 그를 흘끔 살폈다.

그는 소파에 나른하게 드러누워 책을 읽는 중이었는데, 복잡한 레이스 사이로 벌꿀에 버금가는 금빛이 얼핏 스쳤다. 매번 어두운 곳에서 보거나 황급히 시선을 돌리느라 밝은 갈발인 줄 알았던 도련님은 눈이 부신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반은 입꼬리를 비틀며 눈을 내리깔았다. 하필 금발이라니. 곤란했다.

모든 청소를 끝낸 반은 개인실을 떠나지 않고 책장 앞을 서성거렸다. 책이 목적은 아니었다. 개인실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끝나 갈 때까지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승강기 설치하는 거 봤습니다, 도련님.”

“그래서.”

줄곧 침묵을 고수하던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었지만 그래 봤자 한참은 어린 아이였던지라,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반은 맥에게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을 꺼내 놓았다.

“혹시 저 때문에 설치하시는 겁니까?”

책장을 넘기는 손짓을 멈춘 남자가 읽던 책을 탁 덮었다.

“너는 그 착각하는 버릇 고치는 게 좋겠다.”

툭 내던지듯이 흘러나온 핀잔을 들은 반은 의미 없이 책등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슬그머니 떼어 냈다.

어디선가 저런 투를 들어 본 적이 있는데…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엠마보다 프랑스 억양이 덜하지만 약간은 있는 남자의 발음은 제법 독특한 면이 있어서, 제 지인 중에는 비교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펍에서 일하는 동안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을 한둘 만난 것도 아니고, 비슷한 말씨를 가진 사람이 하나쯤은 있었을 거라며 복잡한 상념을 떨친 반은 트롤리로 향하며 능청스럽게 답했다.

“좋을 대로 믿는 게 사람 아니겠습니까.”

개인실에서 나가기 전, 반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등은 괜찮으세요?”

“내가 알아서 해. 신경 꺼.”

오늘따라 조용하더니 퉁명스러움도 어마어마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대꾸에도 반은 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섰다. 누가 보면 제가 더러운 손으로 고귀한 허벅지를 더듬은 줄 알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

그날 밤, 내내 차가운 태도를 보이던 도련님에게서 소등 즉시 전화가 왔다.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며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 짜증스러운 건지, 아닌지 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 여기로 와. 지금 당장.

바구니가 있는 방향으로 수건을 던진 반은 제멋대로인 도련님이 깜박한 매뉴얼을 상기시켜 주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출입 금지 시간입니다.”

- 네가 언제 그런 걸 지켰어?

그건 그랬다. 하필이면 매뉴얼을 어길 때마다 남자에게 들킨 탓에 발뺌할 수도 없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하는 시종에 불과한 반은 알았다고 답하고는 수화기를 내려 두었다.

실크로 된 잠옷 바지와 가운을 걸쳐 봤으나 이 차림으로 가기에는 어제 일이 걸렸다. 별수 없이 가운을 벗고 셔츠와 검은 정장 바지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손질할 여유는 없어서, 대충 손으로 쓸어 넘긴 후 눈을 가리고 개인실로 향했다.

촛대에 끼운 초로 앞을 밝히며 개인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밤에 마주한 남자의 개인실은 그저 새카만 암흑이었다. 달빛은 두꺼운 커튼을 뚫지 못했고, 위아래와 앞뒤가 분간 가지 않는 어둠만 펼쳐져 있었다. 눈가리개를 엄지로 들어 올린 반은 어둠 속으로 신중하게 발을 디뎠다.

도련님의 지정석은 비어 있었다. 설마 때아닌 공포 체험을 시키려고 부른 것은 아니길 바라며 음산하게까지 느껴지는 서재 깊숙이 들어갔다.

“도련님? 저 왔습니다.”

대체 어디에 숨었나 싶어 손톱만 한 촛불로 이곳저곳을 비추어 보던 반은 침실로 향하는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들어오라는 듯이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너비로 열려 있기는 했으나 섣불리 발을 들이밀자니 침실은 출입 불가라던 엠마의 당부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침실이라…. 뜻이 너무 노골적이라 도리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구둣발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던 반은 문틈 새로 촛대를 집어넣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자 예상과는 다른 광경이 보였다. 문 너머에는 침실이 아니라 긴 복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와….”

어쩐지 도련님의 개인실과 침실만 있다기에는 꼭대기 층의 통로 길이가 상당하더니 내부에 또 다른 복도가 있을 줄이야. 몰래 숨어들어 살아도 안 들키겠다고 확신하며 복도로 들어섰다.

길게 뻗은 복도는 침실로 향하는 길인 듯했는데, 복도 한쪽에 굳게 닫힌 문이 늘어서 있었다.

화려한 장식으로 둘러싸인 액자와 그림이 규칙적으로 걸린 반대쪽 벽과 폭이 좁은 복도는 은근한 압박감을 주었다. 밝을 때 보면 다른 감상이 들지도 모르겠으나, 촛대 하나만 들고 주변을 비추며 걸어가자니 갑자기 그림 속 인물의 눈알이 움직인다거나 모퉁이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는 무서운 상상이 스멀스멀 샘솟았다.

발소리를 집어삼키는 두꺼운 카펫을 디디며 차라리 눈을 완전히 가리면 무서움이 덜할까 생각할 즈음이었다. 얼마나 들어온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비추어 본 반은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들이켰다.

“헉…!”

어둠뿐이던 복도에 새하얀 옷가지를 걸친 두 다리가 있었다. 곤두박질친 심장 부근을 손바닥으로 내리누른 반은 발이 달린 사람 형상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기척 좀 내고 다니시죠. 귀신도 아니고….”

“내 성에서 내가 왜.”

하늘하늘한 나이트가운을 걸친 남자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눈을 내리깐 반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반사적으로 얼굴로 올린 손이 남자의 손가락과 살짝 스쳤다. 예고도 없이 손을 뻗은 남자는 험한 입과 달리 상냥하게 느껴지는 손길로 눈썹 뼈에 걸린 레이스를 내려 주었다. 단정한 손톱이 광대 부근을 스치고 떨어졌다.

어두운 시야에 어지러운 레이스 무늬를 더하게 된 반은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건 그렇지만…. 놀라지 않습니까.”

“놀랐어?”

“예. 심하게요.”

“더 해야겠네.”

곁을 스쳐 간 남자가 복도 끝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저 인성을 어찌해야 하나. 반은 삐딱한 도련님의 가운 자락을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다가 안 따라오고 뭐 하냐는 핀잔을 듣고 발을 놀렸다.

남자가 안내한 복도 끝자락에는 욕실이 있었다. 큼직한 창을 커튼으로 모조리 가린 그곳은 제 방 욕실보다 두 배쯤 넓었는데, 세면대와 샤워 부스, 욕조가 널찍한 거리를 두고 놓여 있었다. 희미한 세면대의 장식만 보아도 이곳이 얼마나 화려한지 짐작 갔다.

유려한 곡선이 두드러지는 욕조 근처 선반에서 두 개의 촛대가 가냘픈 불꽃으로 협소한 범위를 비추었다. 남자를 쫓아 욕조로 다가가자 향긋한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찌푸린 눈으로 물이 가득 차오른 욕조를 힐끔거린 반은 가운을 벗는 남자에게 훈수를 뒀다.

“목욕하시려고요? 상처에 물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널 불렀겠지. 시중이나 들어.”

“시중든다고 물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죠.”

얇은 가운을 받아 든 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도련님을 일단 말리고 봤다. 그러나 남자는 애초에 들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아냐?”

비아냥거리는 솜씨가 수준급인 도련님을 이기지 못하는 반은 선반 위에 누군가 미리 준비해 둔 방수 반창고를 발견했다. 곧 죽어도 목욕을 하고야 말겠다는 남자의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반은 반창고 포장을 뜯으며 중얼거렸다.

“도련님은 고집이 너무 세십니다.”

“싫다는 거야?”

“아닙니다. 애도 아닌데 참 까다롭고 손도 많이 가지만….”

흘러가는 대로 내뱉다 보니 상대를 앞에 두고 뒷담화 하는 형국이 됐다. 그와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어서, 반은 진심이 티끌만큼 섞인 아부를 떨었다.

“그래서 좋다고요. 제가 또 도련님 같은 분을 좋아합니다.”

날개뼈 아래 상처에 방수 밴드를 꼼꼼히 붙이고 ‘됐습니다’ 하며 껄끄러운 대화를 마무리했다.

독선적인 도련님은 반의 세 번째 만류에도 불구하고 욕조에 몸을 푹 담갔다. 방수 밴드의 기능을 시험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이런 상처는 익숙해서 별일도 아니라는 건지. 물어도 괜찮은 질문과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을 구분하는 지능은 가진 반은 낮은 보조 의자에 앉은 채 그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쓸어 올렸다.

힘을 뺀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남자의 머리칼은 비단결 같은 촉감을 자랑했다. 거칠거나 갈라진 부분이 전혀 없었다. 얼마나 돈을 처발라야 이런 머릿결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부러운 마음에 속으로 감탄하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머리카락을 끌어 올리던 반의 손끝에 차가운 것이 걸렸다. 이게 뭐지, 싶어 남자의 목 부근을 다시금 쓸었을 때였다.

“건드리지 마.”

경계심을 담고 툭 튀어나온 남자의 음성은 전에 없이 서늘했다. 예에, 하며 순순히 손을 물린 반은 묵직한 샤워기를 고쳐 들었다.

얇은 체인의 촉감이 손끝에 감돌았다. 건드리지조차 못하게 하는 걸로 보아 어지간히 아끼는 목걸이인 모양이다. 반은 목걸이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부드러운 머리칼을 천천히 적셨다.

참방거리는 소리와 물 흘러가는 소리만이 욕실에 감돌았다. 적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반은 적당한 잡담거리를 골라냈다.

“결이 좋으시네요. 만나는 분이 좋아하시겠습니다.”

“만나는 사람 없어.”

“그러십니까?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요.”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진심 없는 빈말은 반의 특기였다. 남자의 몸매와 배경을 보고 관심이 생겼더라도 까다로운 성격을 겪어 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학을 뗄 것이다. 장담할 수 있다.

빈말임을 알아차렸는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남자는 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반은 적신 머리카락을 조물조물 만지면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설마 아무도 안 만나신 건 아니죠?”

발끈해서 부정할 줄 알았는데 남자는 이번 질문에도 고요했다. 미소를 띤 표정 그대로 굳은 반은 슬며시 눈치를 살폈다. 설마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 한 번 못 해 본 것은 아니겠지. 제가 역린을 건드리지 않았길 빌던 찰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

“있어.”

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선반을 더듬었다. 제품을 하나하나 눈 가까이 가져와 걸리적거리는 레이스 틈새로 용도를 확인하면서 물었다.

“그래요? 언제 만났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어렸을 때.”

“어렸을 때요? 지금도 어리신데, 언제요?”

“기어 다닐 때쯤.”

“아. 친구셨나 보다.”

마침내 발견한 샴푸를 적당히 짜내고 늘어뜨려 둔 남자의 머리카락을 거머쥐었다. 거품을 내고는 두피와 머리카락을 감으로 마사지했다. 아무래도 촛불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할 즈음, 남자가 황당한 소리를 했다.

“날 키워 준 사람.”

두피가 당기지 않도록 힘을 빼고 마사지하던 손이 멈추었다.

“…그거 범죄 아닙니까?”

“내가 빨리 컸으니까.”

남자를 키운 사람이라고 하면 유모나 가정 교사쯤일 텐데, 아무리 자란 후에 연애했다고 한들 어울릴 만한 나이대인가 싶었다. 물론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다소 박색이고 가족에게 학대당하지만 재력만큼은 출중한 도련님과 상처 많은 도련님을 품어 주는 따스한 유모 내지 가정 교사를 떠올리자 제법 그럴싸한 연애 이야기로 다가왔다. 반은 마사지를 다시 이어 가며 은근슬쩍 잡담을 길게 늘이고자 했다.

“더 얘기해 주시면 안 됩니까? 제가 목욕 시중까지 들어 드리는데.”

“이게 네 일인데 내가 즐겁게까지 해 줘야 해?”

“듣고 싶어서 그럽니다. 도련님한테 관심이 많아요, 제가.”

거품을 덜어 내고 샤워기를 들며 웃었다.

“날 가지고 놀다가 버렸어. 돈 때문에.”

하지만 한마디 만에 배드 엔딩으로 처박힌 결말은 웃음을 잃게 했다. 도련님과 유모 내지 가정 교사의 애달픈 동화는 돈이라는 속물적 요소가 끼어들며 통속 소설로 전락했다.

대화를 이어 가려다가 상처 가득한 도련님의 치부만 건드린 반은 샴푸를 헹구어 내고 달콤한 향이 나는 헤어 제품을 치덕치덕 바르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펍에 들르는 손님이나 친구라면 공감은 못 해도 위로쯤은 해 줄 테지만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도련님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그러나 절로 벌어진 입에서 계획과 어긋나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 가족의 반대 같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내가 알 바는 아니야.”

“그건 그렇죠. 꼭 버린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해서 그럽니다.”

반은 가볍게 대꾸했으나 이 역시 원래 하려던 말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기분 상할 수 있는 답변에도 도련님은 웬일로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욕조 턱에 걸쳐 둔 발을 까딱거리던 남자는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생김새를 모르는 입술에서 느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모르겠어. 멀어졌으니까. 내가 간과했던 거야. 나는 너무 자랐고 정해진 시간은 끝나 가고 있었어. 상황은 복잡했고… 나중에는 느껴지지도 않았지.”

반은 잠자코 머리카락을 조물조물 매만졌다. 남자는 분명 영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가 됐든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은데, 대체 어떤 답을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적당한 답변을 내놓았다.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사실 그분도 도련님을 그리워했다든가.”

“그리워했으면 한 달에 애인을 몇 명씩 갈아 치우면서 살지는 않겠지.”

“와아….”

이건 또 예상 밖이었다. 단아하고 청순한 유모 내지 가정 교사의 이미지가 색다르게 바뀌는 사이, 남자가 물 표면을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미약했던 손길이 신경질적으로 변하면서 파문이 강렬해졌다.

“날 찾을 노력도 안 했고.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힘들었는데, 그런데 걔는….”

느릿했던 음성은 점차 사나워졌다. 종국에는 마치 씹어뱉듯이 뇌까리는데, 목소리에 듬뿍 밴 울분은 사정을 모르는 반의 간담까지도 서늘하게 했다. 감정의 골이 몹시 깊다는 것을 알게 된 반은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이 시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무지 나쁜 분이시네요.”

“그렇게 생각해?”

“예,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공감을 원하는 것이라면 한결 편했다. 소탈한 웃음을 터트린 반은 내친김에 귀한 도련님의 여린 마음에 상처를 낸 첫사랑을 한껏 헐뜯어 줄 생각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남자가 한발 빨랐다.

“그래서 죽여 버릴 생각이야. 그래야 하고.”

“…예?”

“날 배신했어. 배신하면 안 돼.”

말문이 막히는 결론을 낸 남자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렸다.

배신하면 안 돼. 배신하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누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도, 저를 겁주려고 하는 소리도 아니었다. 자신을 세뇌하듯 수십 번 되뇌는 소리였다.

입꼬리가 굳으면서 덩달아 손까지 얼어붙은 반은 어딘지 제정신이 아닌 듯한 남자의 중얼거림을 태연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종종 미친놈처럼 굴기는 했지만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남자를 맞닥뜨리자 잦은 대화를 통해 가까워졌다 여겼던 그와의 거리가 훌쩍 벌어졌다.

반은 레이스에 가려진 눈을 굴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섬뜩한 상황을 무사히 넘길 방도를 고심했다.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호화스럽기만 했던 욕실이 살해 도구 널린 공간으로 보이기 전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꼭… 복수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 꽉 쥔 주먹을 내밀며 응원한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멀어졌다는 얘기로 보아 대화도 제대로 못 해 본 것 같은데, 한번 대화의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하려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얼굴도 모르는 도련님의 첫사랑 목숨보다는 제 목숨이 소중했던 반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 짓는 남자에게 의례적인 웃음으로 화답하고는 샤워기를 들었다.

미지근한 온수로 꽃향기가 폴폴 풍기는 헤어 제품을 헹궈 내면서, 반은 건조한 입술을 혀로 적셨다. 섬찟한 분위기는 사라졌지만 떨떠름한 인상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입을 마르게 했다. 정신 나간 도련님의 해괴한 다짐 탓이 아니었다. 정신 나간 도련님의 통속적인 첫사랑 이야기에 관한 감상 때문이었다.

감탄사와 맞장구로 대응했지만 짧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무언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았다. 미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는 경험이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남자의 이야기는 지은 죄가 있는 반을 조마조마하게 했다.

안면도 없는 유모 내지 가정 교사를 변호한 것은 아마도 머릿속을 장악한 가책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속에서 곪은 감정은 소년이 떠오르는 순간마다 찾아와 숨 막히는 가책을 던져두고 갔다. 소년도 그와 같은 심정으로 저를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혹시….

물에 젖어 늘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던 반은 도련님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도 그의 얼굴은 모른다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반은 멋대로 명령을 어길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제가 모시는 도련님과 소년은 닮은 구석이 있을지언정 같은 사람은 결코 아니라고 자신을 다잡았다. 섬뜩한 다짐을 듣고서도 은근히 피어나는 동정심을 억누르기는 어려웠다.

오랜 시간을 투자해 남자가 탐스러운 머릿결을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탠 반은 물기를 닦던 와중에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너는.”

“저요? 아, 첫사랑 얘기하는 겁니까?”

반은 복잡한 상념에 빠지기 전 때마침 던져진 도련님의 소박한 관심이 달가웠다. 음, 하고 뜸 들이며 고민하다가 그 옛날 간질간질한 이야기를 즐겁게 꺼내 놓았다.

“저는… 열다섯 살 때였나요. 친구 누나였는데….”

말을 잇기도 전에 와장창! 하는 파열음이 터졌다. 촛대 하나가 선반에서 떨어져 불을 꺼트리자 욕실이 한층 어두워졌다. 덩달아 굴러떨어져 산산이 깨진 유리병 안에서 짙은 향기가 피어올랐다. 말이 끊긴 반은 레이스 속에 감춰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리를 욕조 턱에 느슨하게 걸쳐 두었던 도련님이 냅다 선반을 걷어찬 것이다. 단언하건대 이는 실수가 아니었다.

반은 하도 기가 막힌 나머지 이게 무슨 짓이냐고 타박할 타이밍을 놓쳤다. 애초에 혼낼 권리도 없긴 했지만. 한숨을 쉬며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마저 닦고 욕조 곁으로 의자를 움직였다.

“물건 깨뜨리는 게 취미신가 봅니다.”

“짜증 나게 굴지 마.”

먼저 물어봐 놓고 왜 또 난리인지. 그 속을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고 빈정거린 반은 욕조에 등을 기댄 남자의 어깨를 더듬어 물에 잠긴 팔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물에서 건진 팔은 길고 묵직했다.

눈을 감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촉감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남자가 얌전히 내어 준 팔을 욕조 턱에 얹고 부드러운 샤워 타월로 닦아 내자 단단하되 투박하지 않은 형태의 근육이 느껴졌다.

“그럼 그 후로는 아무도 안 만나셨습니까?”

대화는 다시 도련님의 연애사로 돌아갔다. 침묵을 없애기 위해 꺼낸 질문이었지만 반은 답을 알 것 같았다. 길쭉한 손가락 끝까지 꼼꼼히 닦아 내던 중, 문득 어젯밤 이 손가락이 파고들었던 허벅지 안쪽이 불편해졌다. 몸을 고쳐 앉은 반은 손목으로 타월을 미끄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참견할 부분은 아니지만 다른 분도 만나 보세요. 좋은 사람 많으니까….”

“내가 다른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

퉁명스러운 대꾸가 튀어나왔다. 반은 그걸 왜 제게 묻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무심하게 답했다.

“예. 그럼 물건 깨트리는 일도 줄 거고, 서재 어지럽히는 일도 줄겠죠.”

손에서 남자의 팔이 빠져나갔다. 욕조 물이 출렁거리며 넘쳐흐른 물줄기가 반의 무릎을 적셨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물은 구두 안쪽까지 스며들었다. 폭삭 젖은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가 들어 올린 반은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그의 형체와 마주했다.

반은 어슴푸레한 그림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은 드는데, 그의 눈매가 어떤 선을 가졌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서로의 숨결이 엉키는 거리에서 남자가 입술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보통 연애하면 사람이 순해지잖습니까. 기분도 좋아지고.”

반은 당황한 티를 내는 대신 작게 웃었는데, 웃음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남자가 욕조에 걸친 손을 뻗었다. 물을 머금은 손이 눈가리개에 닿자 얇은 천이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레이스를 쓰다듬은 손은 아래로 떨어지더니 뺨에 닿기 전 멈추었다.

눈가리개 안으로 검지가 천천히 밀려들었다. 눈 밑까지 침범한 손가락이 눈가리개를 벗길 듯 구부러졌으나 그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을 시도한 남자가 더디게 물러나자 긴장으로 굳은 어깨가 풀렸다. 마른침을 삼킨 반은 상체를 뒤로 물리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 냈다.

“내가 순해지길 바라나 봐.”

간지러운 눈가를 벅벅 긁고 싶었지만 남자는 아직 가까운 거리에 머물러 있었다. 반은 몹시 난처했지만, 겉으로만은 덤덤한 태도를 취했다.

“글쎄요. 지금도 괜찮기는 하지만…. 좀 순해지시면 둘 다 좋지 않겠습니까.”

도련님은 마음의 안정을 찾아서 좋고, 저는 받아 낼 패악질이 줄어드니까 좋고.

진심에 우스갯소리를 섞어 전하자 남자는 욕조 턱에 얹은 팔 위로 뺨을 기댔다. 앞을 흐릿하게 막은 어둠을 가르고 비스듬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를 보는 것만은 확실했다. 직접적으로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니건만 반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젖은 레이스에 속눈썹 스치는 감각이 유달리 생생했다.

욕실은 습했고 공기 중을 떠다니는 향은 지독하게 향기로웠다. 어린 고용주와 선을 넘을 작정이 아니라면 슬슬 이 분위기를 잘라 낼 필요가 있었다. 이제 그만 다른 팔을 내놓으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그럼 네가 상대해 줄래?”

“…예?”

물살을 헤치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자마자 가는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이윽고 푹신한 것이 입술을 짓눌렀다. 살짝 벌어진 입술과 맞물린 도련님의 입술은 볼품없이 얇지도,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폭언처럼 까칠하지도 않았다. 반은 레이스 아래 감춰진 눈을 짧게 깜빡였다.

계약서에도, 매뉴얼에도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의 대처법은 없었다. 애초에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지금부터는 어떤 선택을 하든 순전히 제 의지에 달린 것이다.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 몰상식한 짓을 시도한 도련님을 혼쭐내고 사무적인 태도로 선을 지키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반은 저도 모르게, 정말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벌리고 말았다. 모호한 허락을 받은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젖은 손으로 뺨을 감싸 왔다.

“하아….”

참았다가 내뱉은 숨을 몽땅 집어삼킨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아랫입술을 빨아 보다가 이로 질근거렸다. 남자의 가지런한 앞니에 짓눌린 무른 살점으로 피가 몰렸다.

새빨개진 입술을 다시금 빨아올린 남자는 양손으로 얼굴을 모자람 없이 감쌌다.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린 반은 두 손으로 욕조를 짚고 밀려드는 혀를 제 혀로 감았다. 키스는 점차 깊어졌다.

“으음….”

도톰한 혀가 입천장을 핥은 순간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반이 선호하는 타입의 키스를 퍼부으며 젖은 손가락으로 귀를 매만졌다. 동그란 귓바퀴를 엄지와 검지로 문지르기도 하고, 도드라진 귓바퀴를 훑어 내리기도 했다. 능숙한 남자의 손길과 키스를 받아 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욕조를 짚은 팔이 흐물흐물 풀렸다.

멋모를 것 같았던 도련님과의 키스는 지난 몇 년간 나눈 수두룩한 키스와 달랐다. 반의 취향과 약점을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만들어진 듯한 키스였다.

혀가 약한 구석을 휘저을 때마다 위기의식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밀어 올린 반은 욕조를 짚은 손에 힘을 주고 턱을 당겼다. 그에게 빨리던 입술이 촉,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직 만족하지 못한 도련님은 떨어진 입술을 쫓아 고개를 들었고, 깊지는 않아도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입맞춤을 짧게 짧게 이어 갔다.

남자의 손은 어느새 미끄러져 귀 뒤와 셔츠 깃 속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위험했다. 반은 제 종잇장 같은 이성이 파렴치한 성욕에 굴복하기 전에 본심을 감춘 미소를 지었다.

“제가… 몸은 안 파는데요.”

“팔았으면 넌 죽었어.”

연인에게 전하는 것처럼 상냥하면서 질척거리는 키스를 퍼부은 남자치고는 싸늘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반의 발언이 심히 못마땅한 듯했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던 입술을 스르륵 물린 남자는 말없이 뺨을 엄지로 쓰다듬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눈가리개 위로 남자의 눈 부근이 닿았다. 그는 어린 강아지처럼 이마와 눈가를 느릿하게 비볐다. 코가 스치고 입술이 스쳤지만 당장이라도 침대로 가야 할 것 같던 조금 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연유를 모름에도 절로 애달파지는 몸짓이어서, 젖은 입술을 달싹이던 반은 잠자코 그를 받아 주었다. 남자는 망설이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고요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해?”

“무슨 말씀이신지….”

“가까이 있어도 네 생각을 모르겠어. 그래서 불안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감추어지지 않는 우울을 품고 있었다. 반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깊은 감정이었다. 뜻 모를 질문에 위화감을 느낄 즈음, 빈틈없이 붙어 있던 남자가 훌쩍 물러났다. 그는 누구도 마주하기 싫은 것처럼 반을 등졌다. 이내 짜증이 담뿍 담긴 목소리가 당장 물러날 것을 명령했다.

“나가.”

“…시중은요.”

“다른 쪽으로 시중들고 싶으면 남아 있든가.”

그렇다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반은 잽싸게 샤워기를 제자리에 돌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발은 마음과 달리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흐리멍덩한 형체뿐이었지만 욕조에 몸을 담근 도련님은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제 엄지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욕실의 어느 한구석을 맹렬하게 노려보는 남자의 모습은 스물다섯 먹은 성인이라기보다 열여섯의 어린아이처럼 다가왔다. 그를 잘 아는 것이 아닌 이상 자리를 피해 주는 편이 낫다는 걸 알면서도 머뭇거리던 반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뒤돌았다.

“상처 조심하시고요.”

남자는 묵묵했다. 반은 주변을 더듬거리며 걸어가 세면대에 올려 두었던 촛대를 챙겼다. 초가 거의 닳아 빨리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욕실 문을 열고 나온 반은 건조한 공기를 폐 깊이 집어넣었다. 문을 닫자 갑갑한 습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흠뻑 젖은 바짓단과 소매가 살결에 불쾌하게 들러붙었다. 반은 남자에게 빨리고 깨물린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속물적인 유모 내지 가정 교사가 키스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가르친 모양이라고 가볍게 넘기고 싶었지만, 가슴은 초조한 방향으로 두근거렸다.

고용된 입장으로서, 계약이 몇 개월이나 남은 상황에서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저 남자에게 약해질까.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지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 속절없이 넘어갈까. 이유는 어렴풋이 감이 잡혔으나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도련님은 그 아이를 닮았다. 소년의 사근사근한 태도, 애교 있는 말씨, 아름다운 얼굴 중 무엇 하나 가지지 않았지만, 여태껏 소년을 닮은 사람을 자각 없이 찾아 헤매며 만난 수많은 사람 중 가장 그 아이와 흡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의심이 돋힌 눈으로 바닥을 노려보던 반은 황급히 음산한 복도를 되돌아가며 자칫하면 제인이 소개해 준 일을 형편없이 망칠 수도 있는 추측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그럴 리가 없다. 절대,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럴 리는 없다.

자꾸만 타인에게서 소년의 조각을 찾으려는 지저분한 집착이 지긋지긋했다.

***

다음 날, 도련님의 개인실은 반의 마음처럼 어수선했다. 트롤리를 밀어 넣은 반은 지정석을 차지한 남자에게 언제나처럼 ‘좋은 오후입니다’라고 인사했지만, 평소처럼 사람 좋게 웃지는 못했다. 눈가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책 더미를 지나쳐 창가로 다가갔다.

제멋대로 남자에게 소년을 대입한 탓에 그를 마주 보기가 다소 죄스러웠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를 고수하는 도련님이 오늘따라 어색한 것은 그 때문이리라.

“좋다고 생각해?”

남자는 반의 불편한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양껏 빈정거렸다. 커튼을 걷은 반은 흐린 하늘을 확인했다. 좋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날씨였다. 창을 열자 이곳에 처음 왔을 때보다 한층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뭐… 이 정도면 좋은 거죠.”

제법 거센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커튼을 묶고 돌아선 반은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하며 소파와 동일한 디자인의 스툴에 턱 하니 얹힌 남자의 긴 다리를 흘긋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침실에 처박혀 안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약무인한 도련님은 늘 예상을 비껴가는 매력이 있었다. 허벅지를 만진 다음 날도 그렇고, 키스한 다음 날도 그렇고.

“안 계실 줄 알았습니다.”

두께가 상당한 책에 시선을 고정한 남자가 무던한 투로 되받아쳤다.

“내가 피해야 할 이유라도 있어?”

“…없죠.”

반은 희미하게 웃으며 실언을 인정했다. 피해야 하는 쪽은 세상 물정 몰라서 고용인에게 손대는 어린 도련님이 아니라 좋다고 어울려 주면서 다른 사람을 떠올린 자신이었다. 그러나 보기 민망하다고 무단으로 결근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파렴치한 어른이 된 반은 말없이 개인실을 치웠고, 그가 들어온 이후로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책으로 얼굴을 감추고 눈만 내놓은 도련님은 바지런히 돌아다니는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새로 들인 시종은 보란 듯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책을 집어 들었다. 적당히 타이트한 슬랙스가 예쁘게 올라붙은 엉덩이와 탄탄한 허벅지 선을 드러내며 팽팽하게 당겨졌다. 살짝 드러난 발목은 양말에 덮여 매끈한 살결을 꼭꼭 숨겼다.

곧이어 허리를 세운 시종이 책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면서 곧은 어깨와 늘씬한 허리가 강조됐다.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허리선을 잡아 주는 베스트를 갖춘 차림새는 노출이 일절 없어 도리어 상상력을 자극했다.

음란한 자세로 몇 번 더 책을 주워 든 시종이 책장으로 걸음을 틀며 옆얼굴을 드러냈다.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빗어 넘겨 예쁜 이마를 드러냈는데, 높은 콧대와 입술로 떨어지는 부드러운 선을 강조하여 섹시하게 보이고자 하는 의도가 눈에 훤했다. 검은 레이스로 된 눈가리개는 시종의 음란함을 부가시키는 도구가 됐다.

짜증이 치밀어 올라 발을 얹어 둔 스툴을 걷어차자 시종의 시선이 돌아왔다. 바닥을 스치며 다가온 시선은 얼굴을 보지 말라는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드러냈지만, 정작 도련님의 눈초리는 곱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시선을 거둔 반이 책장에 책을 차곡차곡 꽂았다. 정원도 내다보고 의자에도 앉아 가며 쉬엄쉬엄할 것이지, 얼른 나가고 싶다는 양 순식간에 어질러진 방을 치우는 반을 맹렬히 노려보던 도련님은 불그스름한 입술을 마구 짓씹다가 대뜸 물었다.

“지금은 무슨 생각 해?”

“글쎄요. 오늘도 치울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겠죠.”

반은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음성에도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도련님은 카펫 청소기를 돌리는 반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또다시 물었다.

“어젯밤에는?”

반은 눈썹을 까딱이며 청소기 전원을 껐다. 얼추 청소가 끝나 가는 방을 둘러보면서 까슬까슬한 레이스가 닿아 간지러운 눈가를 긁적였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하십니까?”

“네 생각이 궁금해.”

도련님의 때아닌 호기심은 반을 난처하게 했다. 누군가의 생각을 궁금해한다는 것은 관계 진전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고로 도련님이 그것을 궁금해하는 건 큰일이었다. 망설이던 반은 야속한 소리를 하는 도련님에게 질문으로 되받아쳤다.

“도련님은 무슨 생각 하시는데요?”

남자는 말이 없더니 차라리 안 하는 쪽이 나은 대답을 했다.

“눈가리개 너무 야해.”

“…도련님이 주신 거잖습니까.”

방심하자마자 그만둔 줄로만 알았던 희롱이 고막을 강타했다. 어제의 불안한 기색은 욕조 물과 함께 하수구 속으로 흘려보낸 남자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고 탐색하듯 반을 훑어 내렸다.

강렬하고 진득한 시선은 몸을 마구잡이로 지분거리는 것 같아서, 반은 그러지 좀 말라고 해야 할지, 마음껏 보라고 허리에 손을 얹어야 할지 잠시간 갈등했다. 대체 어디서 희롱하는 법을 배웠는지 오늘은 눈가리개를 걸고넘어진 도련님이 발끝을 까딱거렸다.

“흰색으로 바꿀까.”

“그러면 더 야하지 않을까요?”

까딱이던 구둣발이 멈추었다. 흰 레이스를 눈에 두른 모습을 상상해 보는 듯했다. 꾹 다물린 도톰한 입술에서 이내 한풀 꺾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것 같네.”

머릿속이 음탕하기 짝이 없는 도련님은 또 심통이 나서는 느닷없이 시비를 걸어왔다.

“너는 왜 그래? 왜 그 모양이야?”

눈가리개에 이어 제게로 화살을 돌리는 도련님을 등진 반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책장을 닦으며 능청스럽게 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합니까. 도련님 같은 분들 때문에 가끔 피곤해서….”

“나 같은 분들?”

“뭐… 이러시는 분이 도련님 한 분은 아니었으니까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뾰족하게 되묻는 어린 남자는 마음이 불편한 와중에도 슬쩍 놀리고 싶은 구석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종 귀엽게 느껴지는 그가 골이 난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가 봐? 몸 안 판다며.”

“익숙하진 않습니다. 전 상사들은 도련님처럼 젊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몸도 안 팔았고요.”

“젊었으면 키스쯤은 해 줬겠네. 여차하면 몸도 팔았겠고.”

“저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기준 까다로워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대꾸하자 툭툭 쏴붙이던 남자가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해졌다. 청소를 끝낸 반은 청소 도구가 어수선하게 놓인 트롤리를 정리하며 물러날 채비를 했다. 언제 한번 창문도 닦아 볼까 고민하며 트롤리 손잡이를 붙드는 찰나, 남자가 묘하게 스스러운 질문으로 발목을 묶었다.

“내가 네 기준에 들어?”

말실수를 했나. 눈가리개에 감춰진 눈을 살짝 찌푸린 반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빈말을 술술 내뱉는 제 나쁜 버릇을 짧게 반성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과민한 도련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그렇다고 확신을 주지도 않으면서 순간을 모면할 수 있는 답이라면 하나였다.

“어느 정도는요.”

가능성만 던져 주고 모르는 체하는 것은 반의 두 번째 나쁜 버릇이었다. 그렇게 모호한 답을 남긴 채로 트롤리를 밀어 방문 앞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의아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어디 가? 청소 안 끝내 놓고.”

“예? 다 치웠는데… 요.”

의아한 낯으로 뒤를 돌아본 반은 책장을 찢어 구긴 다음 바닥에 툭 떨어뜨리는 도련님을 발견했다. 고의성이 뚜렷한 행동이었다. 어깨에 들어간 힘이 쭉 빠졌다. 역시 키스 한 번 나누었다고 의미 없는 괴롭힘이 사라지진 않았다. 하여튼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었다.

“심술 좀 그만 부리세요, 도련님….”

터덜터덜 걸어가 남자의 발치에 떨어진 종이 뭉치를 잡기 위해 상체를 숙였을 때였다. 뜨거운 손아귀가 팔뚝을 그러쥐었다. 아차 하는 사이 중심이 소파로 기울었다.

“눈 감아.”

당황으로 크게 뜨였던 눈은 남자의 나지막한 명령 아래 스르르 닫혔다. 반은 초인적인 반사 신경으로 소파에 무릎을 대서 무너지는 몸을 간신히 지탱했지만 남자는 그러도록 내버려 둘 의사가 없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뻗어 온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거리낌 없는 접촉에 움칠한 틈을 타 강한 힘이 들어간 팔이 반의 무릎을 무너뜨렸다. 무릎이 구부러지며 남자의 허벅지에 올라앉게 된 반은 당혹스러운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살결에 손끝만 닿아도 흠칫거리던 도련님이 대범한 것을 넘어 뻔뻔하기까지 한 짓거리를 할 줄이야.

“이건 좀… 그렇습니다.”

“너 이런 거 좋아하지 않아?”

남자의 숨결이 턱 부근을 간지럽혔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싶어 입꼬리를 비튼 반은 소파 등받이를 쥔 손을 떼어 부드러운 셔츠에 감싸인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그대로 살짝 밀어 내자 맞붙을 뻔한 상체가 떨어지기는 했으나 허리를 붙들린 이상 벗어나려면 그가 힘을 풀어 줘야만 했다. 입매를 굳힌 반은 나름대로 단호하게 경고했다.

“도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말하고서도 참 삼류 에로 영화 같다고 생각할 무렵, 발칙한 도련님은 한술 더 떴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누가 본다고.”

그러면서 허리를 당겨 안은 탓에 무릎이 벌어지며 더더욱 심기 불편한 자세가 됐다. 허리를 들썩이며 일어나려고 했다가 도로 주저앉혀진 반은 되레 민망해진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귀하신 몸을 잘못 건드려 상해라도 입히면 누가 손해인지는 자명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자 손을 뻗은 남자가 어제처럼 눈가리개를 쓸어내렸다. 그의 체온이 얇은 레이스 사이로 미미하게 전해졌다.

“…도련님.”

“키스는 되고 무릎에 앉는 건 안 되나 봐. 대단하신 정조 관념이네.”

입으로는 삐뚤어진 말밖에 못 하는 것처럼 비아냥댔지만 손길은 상반된 조심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반은 이 남자를 어떤 인간 유형에 넣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가 싶으면 허락이라도 기다리듯 머뭇거리고, 싫어 죽겠다는 듯이 굴다가도 먼저 다가가면 결코 밀어내지 않았다. 어떤 면은 소년과 전혀 비슷하지 않았고, 또 어떤 면은 소년과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고용주와 고용인으로서, 그리고 그에게 다른 사람을 투영하는 경우 없는 태도를 그만두자는 의미에서 먼저 선을 긋고자 다짐했던 어젯밤의 각오가 물러지기 시작했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도련님이 멀쩡한 사람을 꼬드기는 마력이라도 가진 건지, 반은 어젯밤 그토록 고민해 놓고도 다가오는 남자를 거부하지 못했다.

손이 거두어진 눈가에 다시 그림자가 졌다. 이마를 맞댄 남자의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히고, 이어지는 속삭임은 애당초 심지가 곧지 않은 반을 뿌리부터 흔들고도 남았다. 입술이 닿기 직전 들려온 남자의 음성은 묘하게 음울한 구석이 있었다.

“인사라고 생각해. 그러면 편할 거야, 우리 둘 다….”

의미 모를 말을 던진 남자는 반이 입을 열기 전에 입술을 맞붙였다. 욕실에서처럼 간을 보는 순간은 없었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축축한 혀가 볼 점막과 혀를 훑고 문질렀다. 밤새 이 순간만을 고대해 온 사람처럼 조급한 입맞춤이었다.

“흣, 음….”

밀어붙이는 힘에 고개가 뒤로 젖혀지자 허리를 잡은 손이 등을 가로지르며 올라와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혀가 엉키고 미끄덩한 타액이 서로의 입술을 적셨다.

반은 눈을 뜨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얇은 눈꺼풀 아래, 새카만 빈 곳에 도련님의 외양이 제멋대로 그려졌다.

뺨을 매만지다가 귀 뒤로 손을 밀어 넣으면 손가락에 부드럽게 얽히는 물결치는 금빛 머리칼, 우중충한 잿빛 마을에서 유일한 녹음을 품고 있는 녹안, 본디 조각상같이 창백하지만 불그스름한 혈기를 머금은 뺨과 입술, 환히 웃으면 뺨이 봉긋하게 올라오고 빽빽한 속눈썹이 돋보이는 눈이 가느스름하게 휘어지는 소년을 얼굴 모르는 그에게 덧씌웠다. 그러자 입 안을 휘젓는 혀와 허리를 안은 팔까지 새로이 정의되며 한순간 이성이 모습을 감추었다.

반은 괜히 어울려 줬다가 참담한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걱정을 남자가 버리는 종잇장처럼 구겨 내던졌다. 탄탄한 팔뚝을 움켜쥔 손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 도련님의 목을 감았다. 소년의 가죽을 뒤집어쓴 남자는 반을 녹진녹진하게 녹이고도 남을 깊은 키스를 마음껏 쏟아부었다.

반은 몇 년간 쌓인 욕망을 모조리 분출하듯 상체를 빈틈없이 붙이고 몰아붙이는 도련님의 키스에 화답하며 이 관계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임을 예감했다.

***

밤낮 휴일 없이 속행된 승강기 공사는 한 달을 넘기지 않고 끝났다. 인부들이 떠난 섬은 보다 고요해져 가을의 쓸쓸한 정취를 자아냈다. 공사 내내 현장을 알짱거리던 반에게 첫 번째로 승강기를 시승할 기회가 왔다. 사실 줄을 서거나 호시탐탐 기회를 엿볼 필요는 없었다. 이 성에서 승강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뿐이었으니.

“사고는 안 나겠지….”

공사 완료까지 지나치게 빠른 감이 적잖이 있었다. 고성의 인테리어에 해를 끼치지 않는 무난한 외양의 승강기 문을 노려보다가 버튼을 눌렀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조심스럽게 승강기에 올라탄 반은 공사가 빨리 끝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꼭대기 층과 지상 1층만 왕복하며 비상벨이나 조명 따위의 부가 기능 없는 나무 상자 같은 승강기였다.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최소한의 기능만 담고 완성된 승강기는 덜컹거리거나 바닥이 무너지는 일 없이 무사히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오….”

해당 층에 도착해도 아무 소리 없는 승강기에서 빠져나온 반은 스르륵 닫히는 문을 돌아보며 흐흐 웃었다. 지상을 오가기 딱 적당한 승강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정말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구나, 감탄하며 승강기를 하사하신 도련님의 개인실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승강기 설치 끝났습니다. 보셨어요?”

“들었어.”

도련님은 제 성에 귀여운 승강기를 설치하고서도 무관심해 보였다. 머리 뒤로 늘어진 레이스를 쓸어내린 반은 남자가 차지한 소파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작태였지만 정작 도련님은 무례를 꼬집지 않았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반은 제법 넓어진 ‘누울 자리’를 태연하게 만끽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남자와 같은 방향을 응시하다 천연덕스럽게 아부를 떨었다.

“앞으로 도련님 심부름 하기 편해지겠습니다.”

“지금도 편한 것 같은데.”

“자상하신 도련님의 배려 덕분이죠. 늘 감사합니다.”

자상이나 배려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남자였지만 계단을 오르내릴 수고를 던 마당에 못 할 말이 어디 있나 싶었다. 여기서 생색내지 않고 넘어가 주면 참 멋있으련만, 도련님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사치였다.

“그럼 그 자상한 도련님한테 키스해 봐.”

반은 못 들은 체하며 딴청을 부렸다. 반질반질한 팔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슬슬 일어나려고 하자 읽던 책을 탁 덮은 남자가 손을 뻗더니 팔꿈치를 쥐고 끌어당겨 벌어진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반은 키스에 한이라도 맺힌 듯이 수시로 덮치려고 드는 남자를 턱 막았다. 입술로만 느껴 봤던 그의 입술이 손바닥에 깊숙이 파묻혔다.

“갈수록 수작이 느십니다.”

“안 돼?”

손바닥에 파묻힌 입술이 달싹이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작만 느는 것이 아니라 애교까지 늘어나는 도련님을 쭈욱 밀어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일이 많아서요. 이따가.”

“자꾸 빠져나가네. 짜증 나게.”

부루퉁한 음성을 등지고 트롤리를 끌어왔다. 최근 들어 방이 덜 어수선한 덕에 청소할 거리는 많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도 돈값은 해야죠.”

“돈값 같은 소리 하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투덜거린 남자가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책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팔걸이에 걸친 구둣발을 시종 까딱거렸다. 값비쌀 것이 분명한 구두에서 시선을 거둔 반은 여느 때처럼 청소를 시작했다.

그날 물꼬를 튼 것이 잘못이었는지, 도련님의 머릿속은 손쓸 도리 없이 음탕해졌다. 반의 견해로는 그랬다.

발치의 쓰레기를 주우려고 하면 돌연 목덜미를 끌어당겨 키스하질 않나, 책장을 정리하고 있으면 기척 없이 다가와 귀부터 입술을 미끄러뜨리질 않나, 얌전히 책을 읽다가도 마음이 동한다 싶으면 개 부르듯이 불러 무릎 위에 앉히고 입술을 붙였다.

반은 삼류 에로 영화에 나올 법한 힘없는 시종의 대사를 몇 번 읊다가 결국 입술을 갖다 바쳤는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면 고용주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강제로 끌려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나누는 키스는 이제껏 해 본 모든 키스 중에서 가장 기분 좋았으며, 그는 이제껏 입을 맞춘 사람 중 가장 돈이 많았다. 도련님의 첫사랑처럼 가족의 반대에 부닥치기 전 발을 뺀다면 주워 먹을 콩고물이 제법 쏠쏠할지도 몰랐다.

돈도 받고, 기분 좋은 키스도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석이조였다. 허리를 안는다든가 쇄골을 만지작거린다든가 하체를 가까이 붙인다든가…. 점차 도련님의 접촉이 진해지고는 있었지만 그야 제 선에서 잘 조절하면 될 일이었다. 딱히 싫지도 않았고.

문제는 눈을 감고, 혹은 가리고 키스하며 떠올리는 사람이 도련님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반은 그와 키스하며 늘 사랑스러운 소년을 떠올렸다. 키스에 집착하는 모습까지 닮은 남자에게 가끔은 미안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이야기인데.

그리하여 부은 입술을 훔치며 개인실에서 나오는 날이 수십 일 지났을 때, 반은 키스쯤은 해 주는 몰상식한 시종이 되어 있었다. 귀하신 도련님과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 나가면서도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는 ‘고용인과 사적인 대화 금지’라는 매뉴얼이 크게 작용했다.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이 도련님뿐이었던 반은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그와 만날 오후 2시를 은근히 기다렸다. 낯선 변화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일어났다.

부나방 기질이 있는 반은 개인실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바지런히 청소하다가 으슬으슬한 감각에 어깨를 떨었다. 아침부터 몸이 무겁더니 한차례 앓아누울 듯했다. 반은 조금씩 저리기 시작하는 팔을 주무르며 창밖을 내다봤다. 눈가리개를 들어 올려 확인하자 하늘을 뒤덮은 회색 구름 떼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부을 듯 부풀어 있었다.

“날이 흐립니다, 도련님.”

“폭풍이 올 거야.”

얼굴에 책을 덮고 늘어진 도련님이 지루함이 뚝뚝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눈가리개를 도로 내린 반은 바람이 심해지기 전에 창을 닫으며 멀리 보이는 바다를 응시했다. 오늘따라 파도가 거셌다.

“그렇습니까? 섬이라 바람이 세겠네요.”

“한동안 나가지 마.”

“폭풍 온다고 휩쓸려 갈 무게는 아닙니다.”

웃으며 답하자 남자가 코웃음 쳤다. 청소를 마친 반은 도련님의 어두침침한 취향대로 두꺼운 커튼을 쳤다. 흐린 하늘이 사라지며 방이 어둠에 잠겼다.

“다 했으면 이리 와.”

남자가 소파 쿠션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레이스 틈새로 주어지던 시야까지 빼앗긴 반은 몸에 익어 눈을 감고도 거닐 수 있는 방을 가로질렀다. 소파 앞에 당도하자 손을 뻗은 남자가 허벅지 뒤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자 상체를 일으킨 남자가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굉장히… 개처럼 부르십니다.”

“싫어?”

“싫을 건 없죠.”

미천한 놈이라고 부르지 않는 게 어딘가. 어깨를 으쓱이자 양손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남자는 엄지로 귀를 만지작거리며 코끝을 가까이 했다. 코끝이 살짝 눌렸다가 좌우로 스쳤다. 모양이 예쁠 것 같은 입술이 뺨에 눌렸다.

광대뼈와 코끝에 입을 맞춘 남자는 눈가리개 위에도 입술을 눌렀다. 반은 눈두덩이를 누르는 레이스의 촉감이 간지럽다고 생각하면서 기꺼이 키스를 받아들였으나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그와 키스할 때는 항상 의문이 따랐다.

도련님은 이상했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키스할 때의 도련님은 유독 이상했다. 연인도 아니면서 연인에게 할 법한 짓을 스스럼없이 하는데, 그가 애정 표현하는 고양이처럼 비비적거릴 때면 사랑받고 싶어 안달 난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스킨십이 늘었다고 한들 아직 키스에서 그치는 것도 이상했다. 원한다면 돈과 직장을 볼모로 몸뚱이를 요구한다고 해도 희한할 것이 없는 상황이어서, 반은 조금 지분거리기는 해도 파렴치한 짓을 하지는 않는 도련님이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아직도 제가 싫으십니까?”

입술을 살짝씩 붙였다가 떼며 온기를 느끼는 남자에게 속삭이자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뺨에 코끝을 비비던 그는 손가락으로 반의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조용한 음성을 냈다.

“…너무.”

숱이 많은 속눈썹이 눈가리개를 스쳤다.

“네가 너무 싫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남자가 벌어진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반은 입 안에 담으면 꽉 차는 느낌이 드는 도톰한 혀를 받아 주며 비웃음을 삼켰다. 싫은 사람에게 하는 키스치고는 너무나 부드럽다는 걸, 어린 도련님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

미열은 저녁 식사 때쯤 찾아왔다. 나왔다 하면 접시를 싹싹 비우게 되는 생선 요리도 입맛을 돋우지 못했다. 절반도 채 먹지 못한 식사 트레이를 트롤리에 돌려놓은 반은 대강 씻자마자 침대에 엎어졌다. 승강기가 생긴 덕에 계단을 오르내릴 일도 없는데 삭신이 콱콱 쑤셨다. 특히나 허벅지는 더욱 아팠다.

“으으….”

4년 전, 몸이 골고루 박살 난 후로 가끔 죽도록 아픈 날이 있었다. 부러진 팔다리는 물론이고 발목과 머리도 지끈지끈 아팠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만만히 볼 것이 아니라더니, 교통사고에 버금가는 사고를 당한 반도 후유증을 피해 가지 못했다.

베개에 묻은 얼굴을 들어 올려 숨을 파하, 내쉰 반은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나이가 든 탓도 있으려나.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는 걸 보니 아예 연관이 없진 않은 듯했다.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돌아누운 반은 욱신대는 몸에서 힘을 쭉 뺐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날 요량이었다. 까탈스러운 도련님이 언제 부를지 모르니 소등 전까지 전화를 기다리다가 약을 먹고 푹 자면 내일은 좀 나을 것이다. 이렇게 후유증이 덮쳐 오면 며칠은 기본으로 앓았지만, 도련님은 줄리아처럼 자비롭지 않았다. 키스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고 해서 요행을 기대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사람 고생시키는 똥개 훈련도 안 시키고, 방도 전에 비해 깨끗한 편이니까… 그러니까….

까랑까랑한 벨 소리가 목적 없이 부유하던 정신에 찬물을 부었다. 화들짝 놀란 반은 곧장 일어나려고 했으나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팔이 제 노릇을 안 했다. 끙끙거리며 손을 뻗어 수화기를 가져왔다.

“예, 큼, 도련….”

- 예뻐해 주니까 이제 출근도 안 하시고.

“…예?”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번쩍 뜬 반은 그때야 사위가 밝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날이 흐려 새벽 어스름처럼 느껴져서 그렇지, 괘종시계는 오후 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식겁한 반은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발목을 접질렸다.

반사적으로 침대를 붙잡아 엉덩방아 찧는 참사는 막았으나 갑작스럽게 무게를 지탱한 어깨가 빠질 듯 욱신거렸다. 터질 뻔한 신음을 참아 낸 반은 바닥에 주르륵 미끄러져 침대에 뒤통수를 기댔다. 푹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련님, 그…. 병가 됩니까?”

- 아파? 어디.

막상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니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고 괜히 이깟 몸살로 엄살 부리는 기분이었다. 그냥 갈까. 청소야 손에 익어 금방 끝나니까 얼른 다녀오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반은 짧은 고민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늦잠을 자서…. 죄송합니다.”

- 됐어. 쉬어.

순간 머리를 강타하는 현기증에 휘청이다가 침대를 짚어 앉은 반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웃었다. 이렇게 흔쾌히 쉬라는 말을 해 줄 도련님이 아닌데.

“에이, 제가 어떻게….”

- 그럼 올래?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만 좀 쉬겠습니다, 도련님.”

잠시나마 객기를 부렸지만, 솔직히 한 발짝 떼는 것도 고역이었다. 반은 그가 흔치 않은 호의를 보일 때 넙죽 받았다. 죄송하다는 사과를 덧붙이고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기절하듯 넘어갔다.

아침과 점심을 통째로 걸렀는데도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약을 먹을 여력도 없었다. 그대로 눈을 감은 반은 얕게 잠들었다가 깨길 반복하며 고열을 앓았다. 고통 속에서 수마를 헤매는 사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잠결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반.

그리운 목소리가 그리운 억양으로 저를 불렀는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앓는 내내 누군가 곁에 머무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마를 쓸어 보는 손길이 꿈처럼 사라지는가 하면 뺨을 닦아 내는 차가운 촉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꿈결 같은 손길은 목덜미를 받치고 상체를 일으켜 식은땀으로 흥건한 등을 닦아 주었다.

팔과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열을 앗아 가서, 계속해서 매만져 주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아쉬움을 남기고 거둬졌다. 그 아쉬움이 어찌나 컸는지 반은 묵직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열에 달떠 흐릿흐릿한 시야로 그리운 소년이 보였다. 열다섯은 되었을까 싶은 외양의 소년은 침대에 엎드려서는 서늘한 녹안으로 저를 들여다봤다. 무표정한 소년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건드리다가 뺨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아프지 마, 반.’

다정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정한 목소리는 정신이 깜빡깜빡 흐려졌다가 돌아올 때마다 고막 근처에서 맴돌았다.

‘네가 미워. 그런데 아프니까 속상해.’

토라진 아이 같은 혼잣말에는 서글픈 원망이 서려 있었다. 소년에게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적대감은 이 상황이 꿈임을 알려 주는 동시에, 반의 마음에 짐처럼 얹힌 죄책감에 무게를 더했다. 소년은 검지를 세워 뺨에 의미 없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열이 올라 뜨거운 뺨에 닿은 서늘한 체온이 기분 좋아 고개를 기울이자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널 죽여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네가….’

눈이 시려 눈꺼풀을 내리감았다가 다시 뜨자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플 때는 꿈도 참 현실같이 느껴진다며 눈을 감은 반은 다시금 지독한 수마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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