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왔을 때는 해가 바다 너머로 넘어간 때였다. 스탠드가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소등 전인 듯했다. 묵직한 상체를 일으키자 창을 거세게 할퀴는 비바람 소리가 먹먹한 귀로 스며들었다.
앓는 동안 그리운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창문에 멍한 시선을 주던 반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아직 몽롱하기는 해도 몸 상태는 한결 나았다. 근육통이 남은 팔뚝을 주무르며 방을 둘러본 반은 금세 의아한 표정이 됐다.
수건 대여섯 장, 물을 받은 대야, 주전자와 찻잔이 침대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가 시선을 떨어뜨린 반은 가슴팍을 꼭꼭 여민 가운을 들추어 봤다. 식은땀을 꽤 흘렸을 텐데 피부는 보송보송했다. 침대 아래를 힐긋 살피자 누가 갈아입힌 듯 가운 세 장이 카펫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반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아….”
이 난리 통을 벌였을 만한 범인은 한 명뿐인데, 그 인간이 타인을 간호해 주는 광경은 영 연상이 안 될뿐더러 자신은 귀하신 분의 간호를 받을 만한 몸이 아니었다.
반은 말없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입술을 비비고는 있지만 이렇게 진심이라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이마를 긁적이던 반은 침대를 데굴데굴 굴러 바닥에 발을 내려놓았다. 카펫을 딛고 일어서자 무릎에 힘이 잘 안 들어가기는 해도 느리게 걷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시종 덜컹거려 소란스러운 창밖을 힐끔 확인했으나 온통 시커메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더니 미친 듯이 몰아치는 바람이 머리카락과 커튼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헉….”
이 정도로 바람이 셀 줄은 미처 몰랐던지라 허겁지겁 창을 닫았지만 그새 쫄딱 젖어 버렸다. 반은 얼빠진 낯으로 불빛이 희미하게 어룽거리는 정원을 응시했다. 쏟아지는 뇌우의 중심에 자리한 고성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음산했다.
꼭 이런 날에 섬뜩한 사건이 터진다며 오래전 관람한 공포 영화의 서두를 떠올린 반은 앞섶이 폭삭 젖은 가운을 벗었다. 가운을 갈아입혀 준 것뿐 아니라 몸도 닦아 준 모양이었지만 정신이 든 김에 깨끗하게 씻는 편이 좋을 듯했다.
발을 질질 끌며 욕실로 들어간 반은 샤워기 아래 노곤한 몸을 들이밀고 따뜻한 물을 맞았다. 땀에 젖었다가 말라 버석해진 머리카락을 꼼꼼히 감고 온몸에 비누칠을 했다. 이곳에 구비된 샤워 용품들은 하나같이 향이 좋은 덕에 나름대로 기분 전환이 됐다. 나른하게 끔뻑거리며 무념무상에 빠진 반은 타종이 시작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진짜….”
늦장을 부린 것이 실수였다. 머리카락과 몸에 남은 거품을 말끔히 헹구어 내기도 전에 아홉 번의 타종이 매정하게 끝났다. 폭풍우 속에서도 빛을 내던 정원 등과 복도 등, 욕실 등이 차례로 꺼졌다. 또다시 샤워 중에 소등을 맞이한 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남은 거품을 씻었다. 방까지 돌아가는 길이 험난하겠지만 처음만큼 고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위안했다.
이미 소등은 됐고 나가기는 귀찮아서, 어두컴컴한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을 적시던 반은 불현듯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열어 둔 욕실 문을 돌아봤지만 눈에 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공을 더듬어 샤워기를 끄고 귀를 기울였다.
카펫과 실내화 밑창이 스윽스윽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그 익숙한 발소리에 어깨가 편히 늘어졌다. 남의 방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뻔했다.
침실에 멈춰 선 발소리는 소파 앞, 테이블 앞에 다다라 또 멈추더니 점차 가까워졌다. 저는 촛대가 없으면 큰맘 먹고 발을 디뎌야 하는데, 저 인간은 빛 한 점 없는 이 어둠 속에서 잘도 돌아다닌다 싶었다.
곧이어 욕실 문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이 밝은 남자는 촛대를 들고 있지 않아 반은 감으로 그가 있는 곳을 응시했다. 남자도 저를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은 꺼내야 할 것 같아 얼굴의 물기를 훔치며 입을 뗐다.
“도련님이 간호해 주셨습니까?”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람. 도련님이 안 해 줬으면 저 보기를 돌처럼 하는 엠마나 맥이 해 줬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반은 벽을 더듬어 수건을 가져왔다.
“해 주신 거 다 압니다. 감사해서요. 미천한 시종을 위해 이렇게 간호도 해 주시고….”
자기 관리에 소홀했던 것도 있고, 여태 간호를 받아 본 적도 거의 없는 탓에 민망해진 반은 실없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했다. 평소라면 ‘너 때문에 내가 이딴 짓거리까지 해야 한다고 봐?’ 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할 도련님이 고요했다. 기껏 말장난을 던진 반은 더욱 민망해졌다.
머쓱해하며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기고 물기를 대충 훔쳤다. 슬슬 나가고 싶은데 도련님은 가타부타 말없이 물러나지도 않지, 아무것도 안 보이니 눈치를 살필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벽을 짚고 샤워 부스에서 나오며 문가를 향해 말했다.
“도련님. 제가 벗고 있어서, 죄송하지만 잠깐 돌아서 주시든가, 아니면 가운 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웬일로 도련님이 간호를 해 줬다지만 가운까지 달라고 하는 것은 남자를 부려 먹는 느낌이었다. 입꼬리를 늘어뜨린 반은 ‘아닙니다’ 하고 말을 회수한 다음 조심조심 발을 디뎠다. 이렇게 어두우니 나체가 그리 자세히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 온 이후로 야맹증이 생긴 저와 달리 어린 도련님의 시력은 몹시 좋은 듯했지만… 안 보이길 바랐다.
젖은 맨발로 타일을 디딘 반은 지켜보고 있을 도련님이 신경 쓰여 좀처럼 욕실 구조를 떠올리지 못했다. 유리와 도자기로 만들어진 장식품이며 병이 많아 함부로 손을 뻗기도 어려운데, 하필이면 옆구리가 딱딱한 조각에 부딪쳤다.
“윽….”
얼얼한 옆구리를 감싸 쥐자마자 타인의 체온이 팔에 닿았다. 남자는 움칠거린 반의 팔 아래로 손을 밀어 넣고 허리를 끌어안아 당겼다. 주춤주춤 끌려간 반은 다른 손으로 부딪친 옆구리를 쓸어내리는 도련님의 품에 안긴 채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이전부터 찬찬히 스킨십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은 알았으나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저… 벗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지고 있는데 모를까 봐.”
남자의 음성은 조곤조곤했으나 신경질적이었다. 지레 앞서나가 예민한 도련님을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해 입을 꾹 다물자 샤워기 헤드에 맺힌 물방울이 타일로 떨어지는 소리와 비바람이 창을 흔드는 소리만이 욕실을 감돌았다.
입을 다문 것은 반의 불찰이었다. 정적이 주는 은은한 긴장감이 욕실을 가득 메웠다. 남자의 손은 아픔이 가시고도 옆구리를 한참 맴돌았는데, 일부러 간지럽히는 것처럼 손가락을 구부려 스치기도 했다. 분위기는 반이 걱정하던 방향으로 물살을 탔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의 입술 새에서 흘러나온 숨결이 젖은 속눈썹에 닿았다. 눈을 가늘게 좁힌 반은 마른침을 삼키며 남자의 팔뚝을 쥐었다.
“왜 내가 키스하면 안 밀어 내?”
이런 분위기에, 이런 자세에, 이런 질문이라. 눈을 깜빡이던 반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다행히 빈말만큼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술술 나왔기에, 이번에도 장난을 섞은 가벼운 태도로 회피하려고 했다.
“그거야….”
“고용주니까, 그딴 말 하지 마. 싫으면 빠져나가는 거 잘하잖아.”
하지만 어린 도련님은 보기보다 순진하지 않았다. 말문을 틀어막을 정도로 반을 파악하고 있는 남자는 허리를 느릿느릿 지분거리며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내세우고자 했던 변명거리를 속수무책으로 빼앗긴 반은 눈을 내리깔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싫지 않으니까요. 말씀드렸잖습니까. 도련님 좋다고.”
“…내가 좋다고.”
“이상한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도련님 매력적이시잖습니까.”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매력적이면 키스도 받아 주시고….”
또 비아냥이었다. 사사건건 빈정대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상하게 도련님의 비아냥은 토라진 아이처럼 시무룩하게 들려서 어화둥둥 달래 주고 싶은 면이 있었다. 한참 어리다지만 스물다섯이나 먹은 성인 남자가 귀여워 보이다니, 별난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쑥 올라갔다.
“프랑스인들은 개방적인 줄 알았는데요.”
“모두가 개방적인 건 아니야.”
“그렇긴 하죠.”
새로운 시종에게 저돌적으로 키스한 것을 보자면 제법 개방적인 성향 아닌가 싶었지만 굳이 토를 달지는 않았다. 반은 남자의 팔뚝을 슬며시 밀어내며 발길을 틀었다. 따뜻한 물로 데워진 체온이 식으면서 살결에 소름이 돋았다. 농도 짙은 키스를 나누는 사람 앞에서 계속 나체로 있는 것도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이제 놓아주셨으면….”
“내가 매력적이면 이런 것도 괜찮아?”
옆구리에 머물던 손이 살결을 스치며 위로 올라왔다. 목덜미에 닿은 손가락 끝은 다시 아래로 떨어지며 쇄골과 가슴, 배와 배꼽, 골반을 차례로 훑어 내렸다. 쇄골에 맺힌 물방울이 굴러떨어지며 그의 손길이 향하는 길을 따랐다. 반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자 남자도 따라서 발을 옮겼다.
이윽고 딱딱한 물체에 등허리가 닿았다. 손을 뻗어 더듬자 널찍한 세면대였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그를 피할 기회도 사라졌다. 기척과 체온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가 열이 떨어져 미지근해진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 댔다. 체온과 체향이 섞이면서 시각을 제외한 감각이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흉터가 많던데.”
어둠 속의 속삭임이 가느다란 바람을 만들었다. 반은 살갗이 찢겨 희미한 흉터가 남은 갈비뼈 부근을 매만지는 손을 내버려 두었다. 식은땀을 닦아 주다 몸에 스민 흉터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사실을 얘기할 수 없는 반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 왔던 거짓말을 그에게도 반복했다.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오래전에.”
“언제?”
“삼사 년쯤 됐습니다.”
“여기는?”
상체를 맴돌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총상이 선명한 허벅지를 짚은 남자는 신뢰감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이것도 교통사고야?”
반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대답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말씀드리기가 좀… 그래서요.”
“왜?”
“저도 도련님 상처들, 왜 생겼는지 안 묻지 않습니까.”
표정을 보지 못해도 남자가 제 대꾸를 불만스러워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본인의 흉터 이야기가 나오자 입을 다문 남자는 한참이나 말없이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다가 불현듯 허벅지 아래를 그러쥐었다.
엇, 하는 사이 쑥 들린 몸이 높은 세면대 위에 올라앉았다. 멋으로 만든 근육이 아닌지, 6피트에 달하는 성인 남성을 손쉽게 들어 앉힌 도련님은 힘든 내색도 없이 바로 허리를 숙였다.
입술을 스치던 숨결이 허벅지에 닿았다. 흠칫 놀란 반은 아마도 허벅지를 들여다보고 있을 남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 어둠 속에서 보이면 얼마나 보인다고 거길 들여다보는지. 당황스러운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련님, 이 자세는 좀….”
“움직이지 마.”
세면대를 짚은 남자의 손이 나무라듯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무릎을 들어 올리며 이 해괴망측한 자세를 고쳐 보려던 반은 쩍 얼어붙었다가 멈칫멈칫 다리를 늘어뜨렸다. 얼떨결에 그의 명령에 따르기는 했으나 머릿속은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어림잡아 열 살 연하의 남자에게 엉덩이를 얻어맞다니. 더군다나 알몸으로. 엉덩이를 맞으면서 흥분하는 취향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데, 자신만만한 심정과는 반대로 쭉 뻗은 발가락이 안으로 구부러들었다.
허벅지 사이로 쏟아진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심히 자극적이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아문 흉터를 벌리듯 당겨 보고 꾸욱 누르고 그의 숨결이 치부를 스칠 때마다 무릎이 움찔거렸다. 다리를 모으고 싶어 안달 난 무릎을 손바닥으로 내리누른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아파?”
“말씀드렸잖습니까. 가끔 아프기는 해도 이제 괜찮습니다. 승강기도 설치해 주셨고, 덕분에….”
“말고.”
난처한 상황을 무마하고자 떠들어 대는 반을 저지한 남자가 허리를 세웠다. 양 무릎에 손을 얹고 반의 다리를 벌린 남자가 그 사이로 한 발짝 들어왔다. 얼굴을 가까이 한 남자와 코끝이 스쳤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였다.
“너 아직도 아파?”
보이지 않는 불꽃이 어둠 속에서 탁 타올랐다. 호흡을 멈춘 반은 추위가 아닌 다른 연유로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릴 겨를도 없이 어둠을 응시했다. 추후 야기될 문제점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기에 이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편향적인 부분이 있었다. 언제나 이성보다 욕망의 손을 들어 주었던 반은 이번에도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뇨.”
그 답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가 입술을 집어삼켰다. 밀려드는 혀와 제 혀를 얽은 반은 허리를 잡아당기는 도련님의 목을 양팔로 감았다. 서로의 하체가 빈틈없이 밀착됐다.
지난 2년간 정상으로 되돌리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느끼지 못했던 오싹함이 종아리를 타고 올랐다. 자잘한 소름이 돋으며 허벅지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반은 남자의 혀와 입술을 적극적으로 빨아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칫하면 제가 모시는 어린 도련님과 끝까지 갈지도 몰랐다. 신호는 곳곳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목덜미를 만지던 손, 허리를 끌어안던 팔, 날이 갈수록 키스에 허덕이던 것까지. 선만 지키면 된다고 태평하게 지껄였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은 내심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체했을 뿐이지.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거셌다. 비대하게 부풀어 올라 머릿속을 장악한 성욕 틈새로 문득 어떤 기억이 새어 나왔다. 이처럼 거센 폭풍우는 아니었지만, 장대비가 드문 동네에 퍼붓듯이 비가 쏟아지던 날, 덜 여문 정신과 육체로 밀어붙이던 객기투성이의 어린아이가 몸을 섞기 직전인 남자와 겹쳤다.
상황상 소년에게 끌리는 본심을 부정해야 했던 나날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후회로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반은 소년이 보고 싶었다. 아마도 4년 내내. 면접을 망칠 뻔한 망할 놈의 외계인은 4년 내내 반의 어느 한 부분을 주기적으로 망치고 있었다.
고작 몇 개월 같이 산 주제에 죄책감을 심고 사라지질 않나, 자유로웠던 저를 졸지에 성 불구자 신세로 만들질 않나. 서로 갈 길 가기로 했으면 사람을 매어 두지는 말 것이지.
반은 간혹 이기적인 배신감을 느끼고는 했다. 언제는 영원히 함께하자는 둥, 어디에 있어도 찾을 수 있다는 둥 떵떵거리더니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 이유는 제가 소년을 버렸듯, 소년도 저를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어렴풋하지만 근거도 있었다. 2년 전 급속도로 후유증에서 회복된 이유는 아마도 소년과의 링크가 끊어진 덕분일 터다. 제 다리에 총질을 하고 사라진 놈의 말대로 소년은 제게서 완전히 독립한 것이다. 평생 졸졸 따라다닐 것처럼 꼬리를 흔들어 멀쩡한 사람을 꼬드겨 놓고 혼자서 그렇게 매정하게….
“하아….”
맞붙은 입술이 잠시 떨어진 틈을 타 숨을 들이마시자 고개를 반대쪽으로 꺾은 남자가 그새를 못 참고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상념을 이어 갈 여유를 주지 않는 남자에게 밀려 상체가 뒤로 기울었다. 반은 기분 좋은 키스를 만끽하며 눈을 깜박였다.
매번 키스하면서 그런 것처럼, 이번에도 이 남자를 소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이전 사람들과는 달랐다. 얼굴을 마주한 적 없으니 모조리 상상에 맡기면 그만이다. 발기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하아…. 후으….”
입술이 떨어지고 거칠어진 호흡을 다듬는 사이, 남자가 목덜미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반은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로 빨고 깨물어서 자국을 내는 남자의 무례한 짓에 당황했지만 부러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보이는 곳에 자국이 나 봤자 그 자국을 보는 것도 도련님뿐이었으니.
그는 양손으로 세면대에 눌린 엉덩이를 꽉 쥐어 물러날 길을 막고는 제 하체를 묵직한 힘으로 다리 사이에 문질렀다. 찰랑거리며 떨어지는 실크 재질의 파자마 바지가 허벅지 안쪽에 거칠게 비벼졌다.
“하…. 읏….”
“후으….”
성기와 고환이 짓눌리도록 하체를 들이미는 그는 이미 바지 위로 뚜렷한 형태가 드러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여유로움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조급한 허리 짓이 몰아쳤다. 옷감을 사이에 두고 허리를 빠르게 쳐올리면서 쇄골을 깨무는 도련님의 태도는 고상함과 거리가 멀었다.
턱을 젖히고 눈을 감은 반은 성욕에 잠식된 것 같은 몸짓에서 또 한 번 소년을 떠올렸다. 그 순간 눈두덩이부터 시작해 귓바퀴까지 뜨거운 열기가 끼쳤다. 일시적으로 머릿속이 혼탁해지며 타인의 손길에는 죽어도 발기하지 않던 것이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마구 비벼지는 실크의 촉감이 자극을 극대화하자 참지 못할 욕구가 이성을 좀먹었다. 키스와 지분거리는 손길에서 멈추려고 했던 다짐이 모래성처럼 스러졌다.
“하아…. 도련님….”
턱 선을 따라 빼곡히 입을 맞추던 남자가 불현듯 멈칫했다.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더니 드디어 정신을 차린 듯했다. 허리 짓까지 멈춘 남자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새빨간 흔적이 점점이 피어난 어깨에 남자의 이마가 닿았다.
당장이라도 처박고 싶다는 듯이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사타구니를 짓눌렀지만 남자는 좀처럼 다음 순서로 넘어가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반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이래도 되나, 고민하면서 살짝 토닥이자 목욕 시중을 든 그날과 비슷한 음울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나랑 섹스하고 싶어?”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껏 적극적으로 받아 줬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경험이 적은 사람과 하려면 신경 쓸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일일이 섹스하자느니, 하고 싶다느니 말해 본 적 없던 반은 어깨에 닿은 고불고불한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지며 어린 도련님의 비위를 맞췄다.
“예. 지금은요.”
“내 억지 받아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억지 부리는 건 아셨나 봅니다.”
웃음이 흘러나오면서 어깨가 약하게 들썩였다. 반은 어린애 취급이 짜증스럽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차는 남자의 긴 머리카락을 검지에 걸고 빙글빙글 꼬았다.
“지금은 억지가 아니고….”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말을 골랐다. 소년과 남자는 다른 점투성이였지만 비슷한 구석도 많았다. 머리카락이든 뺨이든, 살살 만지면서 장난스러운 말 몇 마디를 던져 주면 소년은 토라졌다가도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반은 둘은 다른 사람이라고 단정 지으면서도 그가 소년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길 바랐다.
머리카락과 함께 남자의 뺨을 감싸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눈이 밝은 도련님은 아마도 제가 보일 테고. 반은 씩 웃으면서 겸연쩍게 느껴지는 권유를 꺼냈다.
“저랑 섹스하실래요? 이쪽으론 잘할 자신 없지만…. 아주 형편없지도 않을 겁니다.”
대단히 낭만적이거나 유혹적인 말은 아니었다. 그런 건 반과 어울리지 않았으니. 헛웃음이라도 지을 줄 알았던 도련님은 종종 그랬던 것처럼 조용했다. 응? 하며 양손으로 감싼 남자의 뺨을 살짝 흔들자 한풀 꺾인 음성이 입술에 닿았다.
“…네가 이럴 때마다 너무, 너무 싫어.”
입 안으로 혀가 밀려들어 와 반은 웃음을 빼앗겼다. 잠시 멈추었던 손은 엉덩이와 허벅지를 강하게 쓰다듬으며 살결을 멋대로 짓이겼고, 지금껏 부드러운 축에 들었던 키스는 거칠고 진득하게 변했다. 이쯤 되면 도련님의 ‘싫다’는 ‘좋다’의 강한 표현이 아닐까. 제법 그럴싸한 추론이었다.
아랫입술을 세게 빨고 떨어진 입술이 목으로 미끄러졌다. 식은 살결에 축축한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밀려난 상체가 뒤로 비스듬히 젖혀졌다. 등 뒤로 세면대를 짚자 남자가 곧장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피부에서 단맛이 날 리도 없는데 끈질기게 윗가슴을 깨물고 살결 곳곳을 빨아들이는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아…. 도련님, 가까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입술을 비비는 남자의 가운 허리끈을 간신히 거머쥐고 매듭을 풀어냈다. 어깨 너머로 가운을 넘기자 남자가 성급한 손길로 그걸 벗어 던졌다. 허락을 구하지 않고 그의 피부를 매만지기 위해 뻗은 손은 뜨거운 손아귀에 붙잡혔다.
양 손목을 붙든 남자는 반을 밀어뜨리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뒤통수를 거울에 눌린 반은 불편한 자세보다 저만 그를 만질 수 없는 것이 더욱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서늘함에 솟은 유두가 축축한 입 속으로 삼켜지자 불만이 잠시간 흐려졌다.
“읏….”
흠칫 튀어 오른 어깨가 구부러들자 남자가 저지하듯 손목을 당겼다. 그것으로 모자라 가슴을 빼지 못하게 한 손으로 등을 받치고 쭉쭉 소리가 날 정도로 유두와 밑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새로 혀를 집어넣다가도 앞니로 잘근거렸고, 가슴 근육을 따라 혀로 쓸어 올리기도 했다.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움켜쥔 반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감각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가 집요하게 애무할수록 아랫배와 그 아래 성기가 근질거렸다.
도련님은 오래 애무를 퍼부을 여유가 없는지, 젖은 유두를 쪽 빨아올리며 입술을 떼고는 더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이만큼 흥분한 것은 거의 4년 만이었던지라 반은 그의 조급함이 기꺼웠다.
얼른 직접적인 자극을 얻고 싶은 마음에 허리가 들썩일 무렵, 명치와 배꼽에 차례로 입을 맞춘 남자가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타구니에 얼굴을 파묻었다. 습한 숨결이 치부에 닿았다.
넓적한 혀가 아랫배에 올라붙은 성기 기둥을 길게 핥았다.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반은 자연스럽게 오럴 섹스로 넘어가려는 도련님의 어깨를 짚었다.
“도련님, 거기까진 안 하셔도 됩니다….”
“싫어. 명령하지 마.”
호흡이 거칠어진 남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반의 성기를 할짝할짝 핥았다. 뜨끈하고 축축한 혀가 불쾌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은 어려도 한참은 어린 도련님에게 굳이 오럴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억지 부리지 마시고….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헉…!”
사소한 자극에도 터질 듯이 팽창한 성기가 부지불식간에 남자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혀가 선단 아래를 받치고 부드러운 볼 점막이 기둥을 조였다. 부들거리는 발가락 끝으로 겨우 타일을 디딘 반은 세면대를 부서져라 쥐었다.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를 숙이자 귀두를 입 안에서 굴리며 간을 보던 남자가 고개를 앞뒤로 움직여 성기를 빨기 시작했다.
“흐읏, 윽….”
능숙하다고는 못 해도 오래도록 제 손하고만 놀아난 반에게는 과격한 자극이었다. 앙다문 잇새에서 헐떡이는 숨결이 비집고 나왔다. 눈을 질끈 감은 반은 의외로 천박한 취향을 가진 도련님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옮겼다. 그의 귀와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자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그만하라는 소리가 쏙 들어가자 반의 엉덩이를 쥐어 가까이 당긴 도련님이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 귀두를 목구멍까지 집어넣는 만행을 보였다.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오는 작태였지만 정작 목구멍이 귀두를 조이자 허리가 흠칫흠칫 떨렸다.
“후으…. 아…!”
천천히 고개를 물린 남자는 입술을 오므려 성기 끝까지 빠짐없이 조이며 떨어졌다. 뻑,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빨아올린 남자는 참았던 숨을 헐떡이며 침으로 범벅된 선단에 입술을 붙이고 중얼거렸다.
“이러면 좋아? 아니면 많이 빨려 봐서 감흥도 없나.”
“그렇게… 빨리는 걸 좋아하진 않아서요.”
오럴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뭔들 싫을까. 반은 후끈한 눈두덩이를 누르며 짧게 웃었다. 대화하는 것조차 시간 낭비로 느껴질 만큼 흥분한 제가 낯설었다. 남자는 귀두의 갈라진 부분을 혀끝으로 툭툭 건드리면서 반의 엉덩이가 움찔거리는 것을 즐겼다.
“…많이 빨리긴 했나 보네.”
신경질적으로 뇌까린 남자가 다시 입술을 벌렸다. 처음 입에 넣을 때는 가늠하듯 신중한 면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목구멍이 다칠 위험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번에 집어삼켰다. 고집스러운 도련님의 목구멍에 성기를 처박게 된 반은 헉, 숨을 들이켜며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하아, 헉…. 도련님…!”
폭언과 투정을 쏟아붓던 입이 제 성기를 게걸스럽게 빨고 있다는 사실은 직접적인 자극을 차지하고서라도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더군다나 딱히 오럴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았던 그는 고개를 앞뒤로 움직일수록 능숙해져 온 신경이 곤두섰다. 습득이 놀랍게도 빠른 도련님이었다. 반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졌고, 바닥을 디딘 발끝은 미끄러졌다가 휘청거리며 제자리를 찾길 반복했다.
“살살 하세요, 살살…. 응….”
쭉쭉 빠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요란해서,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반은 도련님의 손이 세면대 옆 선반으로 향하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자의 손이 선반을 휘젓자 손가락에 걸린 유리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퍽, 깨지는 파열음은 밭은 숨을 내쉬며 성욕에 휘둘리는 반의 신경을 끌어올 거리가 되지 못했다. 남자 또한 깨진 유리병에 관심을 주지 않고 크림이 담긴 병을 낚아챘다.
“흐윽…!”
남자가 한 손으로 움켜쥔 엉덩이를 끌어당겼다. 세면대에서 살짝 떨어진 반은 당겨진 만큼 좁은 목구멍 속 깊이 귀두가 빨려 들어가자 움찔움찔 떨었다. 오럴에 익숙하지 않은 도련님은 작게 컥컥대면서도 결코 살덩이를 뱉지 않았다. 눈빛이 탁해진 반은 풍성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를 얼렀다.
“도련님, 그만…. 하아, 그만하세요. 힘드시잖습니까….”
“큽, 무슨 상관이야….”
목구멍에서 성기를 뽑아낸 남자는 숨을 고르면서도 사타구니에 코를 처박고 고환을 입술로 물어 당겼다. 남자의 두피 속으로 손을 밀어 넣은 반의 귀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남자가 손바닥 가득 움켜쥔 엉덩이 살을 벌렸다. 다른 손이 성급히 주름을 매만졌다. 꾸덕꾸덕하면서 미끄덩한 질감의 크림이 회음부와 엉덩이골에 덕지덕지 발렸다.
반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부위를 지분거리는 손가락이 거북했지만 이제 와서 못 하겠다며 빼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섹스에 끓어오른 성욕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도련님이 원하는 방향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내어 주는 편이 소년을 상상하기도 편할 것이다.
“흐읏, 읏….”
깨진 유리병은 샤워 콜로뉴 류인 듯했다. 달큼한 향기가 콧속을 파고드는 동시에 오밀조밀한 주름을 힘주어 문지르던 손가락이 안으로 밀려들었다. 반은 손가락이 잘 들어오도록 힘을 빼고자 노력했으나 쉽지만은 않았는데, 보다 조급해진 남자가 중지를 쑤셔 넣으면서 연신 귀두를 빠는 탓이었다.
“아, 헉…. 도련님, 아, 좀….”
“후으…. 힘 풀어, 빨리.”
“하나만. 좀 하나만 하세요….”
길쭉한 중지가 뻑뻑하게 오므라든 구멍 안을 둥글게 휘저었다. 빨든, 쑤셔 박든 하나만 하면 어떻게든 버텨 보겠는데 둘을 동시에 하니 도무지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들은 체도 안 한 남자는 마구잡이로 밀어 넣었다가는 찢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구멍에서 손가락을 확 빼고는 엉덩이에 묻은 크림을 긁어모았다. 크림을 잔뜩 머금고 다리 사이로 들어온 손바닥이 회음부와 주름을 한 번에 뒤덮고 문지르다가 젤을 대신하는 크림을 구멍 안으로 집어넣으려는 듯 아래에서 위로 손바닥을 턱턱 올려 쳤다. 엉덩이 살과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가 출렁거렸다.
밀어 올리는 힘에 발을 헛디딘 반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수많은 섹스를 겪어 봤지만 이렇게 애가 닳아 추잡스러운 짓을 하는 경우는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반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까지 소년과 빼닮은 남자의 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도련님, 제발 좀….”
“너도, 빨리 나랑 섹스하고 싶어?”
성기에도 자국을 남기려는 것처럼 기둥을 쪽쪽 빨던 남자가 웅얼거리며 물었다. 자중하라는 의미였는데 재촉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반은 남의 성기를 사탕처럼 빠는 것도 섹스라면 섹스라고 정정해 주려다가 말을 말았다.
사는 곳이며, 입는 옷이며 인테리어 취향까지 범상치 않은 도련님의 성벽이 얼마나 천박하다 한들 솔직히 싫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남자를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보다 과하게 적극적인 편이 훨씬 편했던 반은 그를 말리길 포기하고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렇게 하면… 안까지 안 들어가지 않습니까.”
남자의 손등을 감싸고 그의 손가락을 눌렀다. 꼭 닫힌 구멍 위를 누르자 검지와 중지 끝이 주름 속으로 파고들었다. 반은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그가 더욱 깊이 밀어 넣을 수 있도록 손목을 당겼다.
“저도 빨리 하고 싶으니까… 빨리 풀어 주세요.”
허벅지 안쪽에 뺨을 기댄 소년이 불만스럽게 올려다보는 모습이 얼핏 상상됐다. 예쁘장한 얼굴을 구기고 질투가 득실득실 끓는 녹안으로 서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 표정이 어둠 위로 그려졌다.
웃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매가 둥글게 휘어지는 얼굴을 그려 보고 있을 때, 두 마디 남짓 들어온 손가락이 경고 없이 끝까지 박혔다. 중심이 흐트러질 만큼 거셌다.
“헉…!”
“다른 놈들한테 부린 수작, 나한테도 똑같이 하지 마.”
“하아, 읏…!”
서릿발 같은 목소리와 질은 크림이 구멍 내에서 뒤섞이는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이따위로 굴면 좋아할 줄 알고….”
짜증을 토한 남자는 손목까지 집어넣을 기세로 구멍 안을 쳐올렸다. 구멍으로 미처 들어가지 못한 크림이 타일로 뚝뚝 떨어지고, 손가락의 빠른 마찰에 녹은 크림이 사방으로 튀었다. 타인의 성기를 넣는 용도로 사용한 적이 드문 안쪽은 썩 친절하지 않은 손길에도 이상하리만치 자극을 느꼈다. 종아리가 바짝 긴장하고 숨결이 거칠어졌다.
“아, 흡…! 제가, 헉, 많이 해 봤으면 도련님도 좋은 거 아닙니까?”
아랫입술에 잇자국이 생길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가 놓은 반은 웃음이 밴 농담을 던졌다.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도련님이 귀엽기는 했으나 마냥 좋아할 일도 아니었다. 그에게 소년을 투영하고 있다면 더더욱이나.
“…안 좋아. 싫어. 죽을 만큼 싫어.”
짧은 침묵을 두고 떨어진 답은 반의 기대와는 어긋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난처함에 빠져 있을 새는 없었다. 입을 벙긋 벌린 남자가 귀두를 집어삼키면서 어느 정도 풀린 구멍 속으로 약지까지 집어넣은 것이다.
“흐읍…!”
반사적으로 숨을 참은 반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하체에 꼭 달라붙은 남자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창이 덜컹거리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반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탱한 남자는 능숙하게 살덩이를 빨며 구부린 손가락으로 내벽을 긁어내렸다.
“아, 도련님…. 아읏, 큭…!”
녹아내린 크림이 손바닥을 타고 손목으로 흘러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내벽을 밀어내듯 큰 원을 그리다가 깊은 곳을 짓누르며 만만치 않은 살덩이가 들어갈 곳을 넓혔다.
반쯤 무너져서는 부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바닥을 디딘 반만 죽을 맛이었다. 찌걱찌걱 소리 내며 들이박히는 구멍 속의 손가락과 귀두를 조이는 남자의 좁은 목구멍이 앞뒤를 괴롭히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후윽, 읏…. 아…! 도련님, 잠깐…!”
슬슬 구멍 안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하며 잇새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꽃향기가 풍기는 남자의 머리를 강하게 안은 반은 내렸던 열이 올라 뜨거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사정할 것 같았다.
“도, 도련님. 진짜 뱉으세요. 흡, 빨리….”
더는 참기 힘들어 남자의 머리를 밀어냈으나 그는 곧 죽어도 반이 좋은 일은 못 해 준다는 양 혀를 써서 귀두를 빨았다. 허리를 뒤로 빼자니 구멍에 남자의 손가락을 더욱 집어넣는 셈이고, 앞으로 미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어서 이도 저도 못 하고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도련님, 좀…!”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남자가 쿠퍼액과 침으로 번들거리는 선단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가까스로 그의 입에 사정하는 참사를 막은 반은 마지막을 제 손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푹 젖어 말랑말랑하게 풀어진 내벽에서 단숨에 손가락을 뺀 남자가 허벅지 뒤로 팔을 두르고 번쩍 들어 올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졸지에 한참이나 어린 남자의 어깨에 둘러메인 반은 엇, 하며 팔을 휘적였지만 당연하게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깨진 유리 조각을 실내화 밑창으로 짓이기고 성급히 욕실을 빠져나온 도련님은 침구가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침대에 반을 내던지고 올라탔다.
살짝만 흔들면 기분 좋은 사정을 맞이할 예정이었던 반은 주기 직전 쾌락을 빼앗은 남자에게 짜증스러워할 틈이 없었다. 체격이 좋고 힘이 센 편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저 정도 되는 체격의 남자를 훌쩍훌쩍 들고 내던질 줄은 몰랐다.
“힘이 참… 세시네요.”
“어리니까.”
어리다는 말에 들떠야 하는지, 자존심 상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반은 덮쳐드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뒤엉켰다. 얼른 몸을 섞고 싶은 사람은 도련님만이 아니었기에, 반은 맞붙은 채로 비벼지는 다리 사이로 손을 내렸다.
실크로 된 파자마 바지 안으로 밀어 넣은 손이 타이트한 속옷 위를 더듬었다. 그의 속옷은 이미 제 사타구니처럼 푹 젖어 있었다.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닐 드로어즈를 끌어 내리자 발기한 성기가 확 튕기어 나왔다. 반은 순간 당황했다. 머뭇거리다가 한 손에 빠듯하게 들이차는 살덩이를 감싸 쥐자 상체를 꽉 끌어안은 채로 귀에 거듭 입을 맞추던 남자가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젤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남자의 성기는 끈적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이토록 끈적한 것도 놀라웠지만 엄지로 성기 겉을 쓸어 본 반은 우둘투둘한 핏줄과 뜨거움에 더욱 놀랐다.
예상했던 사이즈를 한참 뛰어넘은 성기는 입을 마르게 했다. 벌써 배 안쪽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팠다. 여기서 기겁하고 도망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별도리 없이 징그러운 크기의 성기를 힘주어 쓸어 올리면서 조그맣게 물었다.
“…이것도 어려서?”
“누가 날 잘 키웠거든…. 버리기는 했지만.”
귓불을 잘근잘근 씹고 입술로 빨던 남자가 반의 손에 대고 허리 짓 하며 차마 웃을 수 없는 대꾸를 날렸다. 반은 이딴 괴물 같은 성기 때문에 고생깨나 했을 유모 내지 가정 교사가 안쓰러워졌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고, 앞으로도 할 예정이라 남 일 같지 않았다.
이걸 넣어도 제 장기가 과연 무사할까, 걱정하던 반은 귀밑 턱에 숨 가쁘게 키스하던 남자가 무릎을 잡아 벌리는 것을 차마 막지 못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도련님은 한순간도 여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오래도록 묵힌 욕구를 분출하듯 그의 허리는 쉼 없이 움직이며 반을 재촉했다.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아랫배와 고환을 찌르는 귀두가 걱정을 기대로 뒤바꾸었다. 반은 발정 난 듯 구는 남자를 따라 허리를 은근히 밀어 올리며 다리를 벌려 주었다.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두꺼운 귀두가 주름을 짓누르면서 파고들었다. 녹은 크림을 머금은 주름이 크게 벌어지자 반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손가락 세 개로 지겹게 풀어 준 덕분에 빠듯할지언정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하아, 후….”
가장 두꺼운 부분이 어렵사리 진입했다. 남자의 목을 다부지게 끌어안은 반은 느리게 밀려들어 올 살덩이의 길이를 예상하며 한숨 돌렸으나 이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성마른 도련님은 반의 기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허억…!”
더디게 들어와도 버거울 두께와 길이를 가진 성기가 큰 허리 짓 한 번 만에 준비가 되지 않은 배 속에 쾅 들이박혔다. 눈을 홉뜬 반은 발끝까지 굳은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힘을 주어 신음을 참는 남자의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귓바퀴를 맴돌고 고막을 쿡쿡 때리는데, 좀처럼 오감이 돌아오지 않았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허리를 뒤로 뺀 남자가 재차 뿌리 끝까지 쳐올린 후에야 반은 움찔움찔 떨면서 맥없는 신음을 흘렸다.
“아, 흐…. 하아….”
고작 두 번의 허리 짓 만에 사정한 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징그러운 성기를 쥐어짜 낼 듯 조이는 내벽과 온 무게를 실어 저를 누르는 압박감, 한계까지 벌어진 주름의 아릿함이 연달아 머리를 강타했다.
남자의 사이즈라면 장기가 무사할 리가 없는데, 아픔은 느껴지지 않고 약이라도 한 듯 몽롱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손가락 하나 꿈쩍하기 싫은 절정은 거의 처음이었다.
“아, 읏…. 큭….”
내벽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간 남자의 형편도 다르지는 않았으나 그는 아직 제 욕심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성기를 끊어 먹을 듯 조이는 반의 구멍과 질은 정액으로 범벅된 아랫배가 야트막한 이성을 갉아먹었다. 힘이 빠져나가 부들거리기만 하는 반의 양 무릎을 움켜쥔 도련님은 강약 조절 따위 내팽개치고 미친 듯이 허리 짓 했다.
“아, 아…! 흡…!”
샅이 철썩철썩 부딪히며 고환이 짓눌리고 비집어 넣은 크림이 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반은 멍하니 벌린 입에서 단발적인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방금 사정하며 한껏 민감해진 오감은 과도한 쾌감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여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황급히 너른 어깨를 더듬더듬 짚어 밀어냈으나 남자는 드러난 턱에 이를 세우며 연거푸 몰아세울 뿐이었다.
“으흑, 큽…! 도, 도련님. 잠깐, 쉬었다가…!”
“싫어…. 진짜 싫어….”
제가 싫다는 건지, 멈추기 싫다는 건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남자가 거세게 허리를 쳐올리자 결국 끄트머리로 밀려나던 침구가 떨어졌다. 강한 자극이 연이어 덮쳐들며 눈앞이 흐려졌다. 밭은 숨만 터트리면서 사지가 다 녹아내리는 쾌감에 휘둘리던 때, 묵직한 둔통이 쾌감을 앞질렀다.
“윽!”
비명을 삼키며 손안의 살점을 움켜쥐자 곧 죽어도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남자가 멈칫했다. 구멍에다가 성기를 처박는 것에 온 정신이 팔린 줄 알았더니 즉각 반응하는 도련님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잠시나마 고통을 잊었다.
“…내가 아프게 했어?”
조그맣게 흘러나온 물음은 당혹한 기운이 너무나 짙게 묻어나서 오히려 제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실없이 웃은 반은 생리적인 눈물이 솟아난 눈가를 문지르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거기, 허벅지요. 너무 세게 누르시면 아픕니다….”
남자는 벌어진 양 무릎을 침대에 닿을 정도로 강하게 누르던 손을 오므리더니 빠르게 거두어들였다. 그것으로 모자라 아예 몸 위에서 물러날 기세였다. 잽싸게 팔을 쭉 뻗은 반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근육이 경련하는 두 다리로 남자의 허리를 감았다.
“하아…. 이러면… 좀 나아요.”
발꿈치로 그의 허리를 누르자 절반쯤 빠져나갔던 성기가 천천히 밀려들었다. 낮은 신음을 흘린 반은 이제 됐다는 의미로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는 도련님의 등을 툭툭 토닥였다.
재활할 때도 다리를 크게 벌리는 동작마다 애를 먹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엿을 먹일 줄이야. 그간 다리 찢을 일이 없어 깜박했던 반은 손수 자세를 고정해 줬음에도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남자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비볐다.
“그만하실 거예요?”
압박감이 대단한 상태를 생각할 때 그만해선 안 될 것 같은데. 하여간 도움 안 되는 허벅지 때문에 기어이 섹스까지 망쳤다며 입꼬리를 비틀 때쯤 놀라 기세가 확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사과할 줄도 아셨습니까?”
“잘못했어. 나는….”
눈을 크게 뜬 반은 치렁치렁한 캐노피로 장식된 침대 천장을 올려다봤다. ‘주제넘지 말라’라며 빈정거려야 할 도련님이 이번에는 시무룩한 태도로 나왔다. 또 예상을 빗나갔다. 어째 알면 알수록 사랑스러운 면모가 있어 사람을 당황케 했다.
혀를 내어 입술을 적신 반은 무겁기는 해도 아예 꿈쩍 못 할 정도는 아닌 남자의 목을 지지대 삼아 허리를 슬쩍 움직였다. 역시 이런 자세로는 움직임이 수월하지 않아서, 남자의 허리에서 다리를 풀고 침대를 디뎠다. 아직 욱신거리는 다리에는 힘을 빼고 반대쪽 허벅지에 힘을 주며 허리를 들썩였다.
“읏, 흐읏….”
조금씩 빠져나왔다가 박히기만 하는 성기는 아쉬움을 부풀렸다. 한쪽 다리로만 밀어 올려야 하는 탓에 고되기도 했다. 반은 이런 미미한 움직임만으로도 숨을 헐떡이면서 여전히 망설이는 귀여운 도련님의 반응을 즐기다가 베개에 뒤통수를 푹 파묻었다. 역시 힘들었다.
“잘못한 거 아시면 빨리 아까처럼 박아 주세요. 저 힘듭니다.”
“…매번 이런 식으로 사람 꼬셔?”
“도련님한테만 이러는데요.”
“말만….”
시무룩할 때는 언제고 그새 토라진 모양인지 말씨가 뾰족해진 남자가 총상 흉터가 남은 허벅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다시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감싸자 조금 전의 실수가 마음에 걸리는지 느릿하게 허리 짓 했다. 사그라든 불씨를 되살리듯 은근한 자극에 눈이 가늘게 뜨였다.
“아, 키스도 같이.”
실실 웃으며 요구하자 ‘짜증 나…’ 하며 좋아 죽겠다는 속내를 티 나게 드러낸 도련님이 곧장 입을 맞춰 왔다. 혀가 얽히고 질척이는 소리가 서로의 귀로 흘러 들어가면서 느긋했던 허리 짓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응…. 흣, 으음….”
단단하면서 미끄러운 귀두가 쉴 새 없이 내벽을 쾅쾅 쳐올렸다. 절로 호흡이 거칠어지는 흥분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키스로 숨이 부족해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반은 산소가 살짝 부족할 때 찾아오는 아득한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상대를 무게로 내리누르고 하체만 빠르게 쳐올리는 도련님의 섹스 방식도 마음에 들었고, 사정하고서도 구멍에서 빼지 않고 느리게 넣었다가 빼길 반복하는 버릇도 몹시 마음에 들었다.
“허윽…. 하아, 후으….”
“하아, 아흐….”
서로의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비비며 거칠어진 숨결을 교환했다.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도련님의 성기와 꽉 맞물린 구멍 새로 질은 액체가 꿀렁거리며 흘러나왔다. 시각이 차단되며 다른 감각이 예민해져서 그런가, 양이 상당히 많은 느낌이었지만 아마도 기분 탓일 것이다.
반은 은근하지만 꺼지지는 않는 성감을 이어 가는 몸짓에 연거푸 신음했다. 정도가 지나친 쾌감은 오랜만이기 때문일까, 도련님이 어린… 아니지.
눈살을 찌푸린 반은 어리면서 힘도 세고, 심지어 자지까지 훌륭한 도련님에게 떨떠름한 눈빛을 보냈다. 코앞의 남자가 여러모로 궁금해졌지만 정반대로 여기까지만 알고 싶기도 했다. 소년과 멀찍이 동떨어진 어느 한 부분을 목격한다면 지금 같은 섹스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반은 눈을 감고 제 이마와 뺨에 쏟아지는 머리칼과 완전히 녹아내린 내벽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성기에 신경을 집중했다. 슬슬 강하게 박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남자가 머리맡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내도록 짓눌린 가슴을 부풀리며 양껏 공기를 들이마신 반은 가볍게 흔들리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툭, 툭….
그때, 딱딱한 것이 턱을 툭툭 건드렸다. 남자가 하체를 밀어붙일 때마다 그것은 느릿느릿 흔들리며 턱과 뺨을 스쳤다. 베개를 움켜쥔 손가락을 푼 반은 규칙적으로 턱에 닿는 딱딱한 물건으로 손을 뻗었다.
허공을 더듬어 거슬리는 것을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턱을 건드리던 것의 정체는 동그란 형태의 펜던트였다. 반은 몽롱한 정신으로 금속 로켓 위를 가볍게 쓸었다. 양각된 무늬가 살결에 새겨지기 직전, 손목을 틀어 잡혔다.
폭풍이 싣고 온 비바람에 길쭉한 창이 흔들렸다. 창 틈새와 벽을 통해 스며든 눅눅한 습기가 발끝을 타고 올랐다.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에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어둠 속을 응시하는 반의 손아귀로 파고든 손가락이 로켓을 가져갔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지 반으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남자의 희미한 형체가 비칠 뿐이었다.
“…….”
입술을 달싹인 순간 녹진녹진 풀린 구멍에서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내벽이 모조리 딸려 나가는 감각에 불쾌감을 느낄 새도 없이 손목을 당긴 남자에 의해 엎어졌다. 엎드린 반의 허리를 움켜쥔 남자는 예고 없이 성기를 끝까지 처박았다.
“후윽…!”
“큭….”
그새 부드러운 자극에 길든 내벽이 꿈틀거리며 두꺼운 살덩이를 밀어내고자 꽉 조였다. 순간적으로 욕지기가 치밀 만큼 부담스러우면서 버거운 크기였다. 배 속 장기를 밀어 낸 남자는 생각을 이어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팔심과 허리 반동을 이용해 내벽을 짓이겼다. 엉덩이가 그의 사타구니에 퍽퍽 부딪히며 살결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읏, 큽…!”
침대를 짚은 손이 오므라들면서 시트에 깊은 주름이 졌다. 뇌까지 뒤흔들려 손가락 끝에 남은 펜던트 무늬가 어렴풋하게 흩어졌다.
흔한 디자인에, 흔한 로켓 목걸이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소년에게 선물한 목걸이와 비슷한 디자인의 목걸이를 수백 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와 두근거림은 그럴 리가 없다는 실망감과 허탈함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그럴 리가 없다. 흔해 빠진 목걸이는 반을 감상에 젖게 할 뿐 결코 증거가 되지 못하므로….
“흡! 으읏….”
엉덩이 살에 철썩 부딪힌 남자의 하체가 물러나기는커녕 더욱 힘을 줘 비비듯 짓뭉개자 뺨부터 시작해 관자놀이와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련님이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목걸이에 대한 의심은 열기 앞에서 잿더미가 됐다. 눈에 힘이 탁 풀린 반은 거칠게 헐떡이며 짐승 같은 허리 짓에 어울렸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허리를 꽉 거머쥔 남자의 손이 아랫배로 향했다. 그는 어느새 단단히 발기한 채로 흔들리는 반의 성기를 거머쥐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선단을 비비고 기둥을 빠르게 쓸어 올리자 어떠한 생각도 못 하고 섹스에만 집중하게 했다.
“아…! 흐읍, 도련님….”
“나는 이러면, 좋던데…. 너도 그래?”
“네, 그렇게…. 읏! 하아, 으흑…!”
하나에 집중해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 앞뒤로 괴롭히는 데 재능이 있는 도련님은 세운 허벅지를 바르르 떨며 느끼는 반의 귀두를 거머쥐고 엄지로 문지르며 남은 손을 뻗었다. 도톰한 근육이 보기 좋게 오른 가슴을 큼직한 손바닥으로 쥐어짜듯 주물럭거린 남자는 이로 깨물리고 강하게 빨린 탓에 붉게 부푼 유두를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흐윽! 으읏….”
둥글게 말린 허리가 호선을 그리며 아래로 휘었다. 남자는 도드라진 날개뼈를 이로 질근거리면서도 손과 허리를 쉬지 않았다. 작은 자극에도 금세 단단해진 유두를 손가락 안에서 굴리며 미끈거리는 귀두를 손바닥으로 마구 비볐다. 안을 쳐올리는 살덩이는 그러잖아도 과도한 쾌감을 배로 부풀렸다.
뱃가죽이 밀려날 정도로 깊이 박은 채로 짧게 짧게 올려붙이는 짓거리에 반은 헐떡이며 몸을 떠는 것이 전부였다.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로켓이 척추를 스쳐도 신경을 기울일 틈이 없었다.
엎드린 채로 어린 고용주에게 엉덩이를 내어 주는 현실이 수치스럽다기보다 흥분을 끌어올리는 상황으로 다가왔을 때, 입 밖으로 연신 터져 나오는 신음도 낯부끄럽지 않아졌다.
“하으, 흣…. 도련님, 손. 손 좀…!”
팔꿈치가 기운 없이 꺾였다. 한 팔로 간신히 상체를 지탱한 반은 조절을 모르고 몰아붙이면서 점점 강하게 귀두를 문지르는 도련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그의 손을 정액으로 더럽히는 실례를 저지르기 전에 떼어 내려고 했지만, 체중을 실어 치받는 허리 짓에 도리어 무릎까지 꺾이고 말았다.
“흡…!”
몸이 엎어지며 사정을 앞둔 성기가 시트와 아랫배 사이에 끼었고, 그 위로 남자의 무게가 온전히 실렸다. 종이 한 장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엉덩이와 사타구니가 빈틈없이 맞물렸다. 밀려 나온 정액은 남자가 세게 박았다가 물러날 때마다 서로의 살결에 들러붙어 쩍쩍 늘어났다. 베갯잇이 숨을 막아 오는 동시에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흐읍, 웃…! 우으….”
“안에… 다 녹았나 봐. 흐물거려….”
쾌감에 잠식된 도련님은 혀까지 풀려서 반의 손목을 더듬었다. 시트를 뜯어낼 듯 부여잡은 손등을 덮고 미끈거리는 액이 잔뜩 묻은 손가락을 반의 손가락에 억지로 얽었다. 반의 양손을 침대에 고정한 남자는 더욱 강하고 빠르게 허리 짓 했다.
징그러운 살덩이가 얻어맞은 것처럼 구석구석 새붉어진 반의 엉덩이를 가르고 연거푸 들이박혔다. 반이 뛰어들어도 흔들리지 않던 거대한 침대가 미세하게 삐걱거리며 캐노피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하아…. 좋아. 좋아, 반….”
“헉, 흡…! 도련님, 아…!”
“너도, 좋은 거지? 나처럼 좋은 거, 맞지.”
등을 감싸고 완전히 엎드린 남자는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로 신음하는 반의 뒷덜미에 연신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의 섹스 스타일처럼 집요하기까지 한 질문에 대한 답은 가식을 섞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조, 좋아요…. 흣, 좋아….”
그의 말대로 녹아내린 내벽이 온통 성감대로 뒤바뀐 듯했다. 어느 부분을 어떻게 찔러도 발가락 끝이 오므라들고 종아리가 경련했다. 살짝 휘어져 내벽 위를 찌르던 성기가 더는 길이 없는 곳까지 진입했다.
미끈한 귀두 끄트머리가 작은 틈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을 때, 반은 숨도 쉬지 못하고 경련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시트에 여러 차례 비벼지던 성기에서 정액이 물처럼 흘러나왔다.
“흐윽…! 흐으….”
구겨진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초점이 부옇게 흐려진 눈동자가 눈꺼풀에 스르륵 가려졌다. 두어 번 더 허리를 쳐올려 가장 깊숙한 곳에 사정한 남자가 밭은 숨을 터트리며 어깨에 쪼듯이 입을 맞출 때까지도 경련은 멎지 않았다.
마침내 숨통이 트여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반은 남자만큼이나 거칠게 호흡하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사위가 여전히 어두운 탓에 초점이 제대로 돌아온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헉…. 하아, 읏….”
“좋아서 떠는 거야? 손가락도, 구멍도 계속 움찔거려….”
손깍지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가 푼 남자가 어깨에 입술을 비비며 물었다. 반은 떨림이 가시지 않는 손가락을 살짝 펴 보았다. 살덩이가 깊이 박힌 구멍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성기를 움찔움찔 조였다가 푸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곁으로 돌린 반은 허공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진짜 좋았어요….”
오래도록 묵혔다가 한 번에 터트린 탓일까. 아니면 해묵은 성욕을 달랠 상대로 나쁘지 않은 수준이라 평가했던 도련님이 실은 눈 돌아가게 만드는 섹스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일까.
반은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던 눈꺼풀을 매만지고 싶었으나 남자가 손을 놓아줄 생각을 안 해서 관뒀다. 어깨에서 목덜미로 입술을 미끄러뜨린 남자가 쪽쪽거리며 키스를 퍼부었다.
“나랑 하는 섹스 엄청 좋아하네….”
남자는 은근히 들뜬 음성으로 ‘엄청’을 한 번 더 덧붙이며 강조했다. ‘엄청’을 넘어 미칠 듯이 좋았던 반은 베개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뭐라고 하고 싶은데… 못 하겠네요.”
사지와 뇌가 녹아내리고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도련님과의 섹스는 성욕을 해소하기는커녕 더 돋운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은 나른하게 늘어진 몸을 묵직하게 누르는 압박감이 달가웠다. 가능하다면 잠도, 밥도 거르고 그와 매일매일 하고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기절하듯 잠들 것 같았다.
투박한 손가락에 얽힌 도련님의 고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반은 지나가듯 물었다.
“…목걸이요. 소중한 건가 봅니다.”
남자가 입을 맞출 때마다 가벼운 체인이 제 어깨의 살결을 간지럽혔다. 먼젓번, 건드리지 말라던 예민한 반응이 워낙 강렬해서 아예 무시할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남자는 짧게 중얼거렸다.
“응. 소중해.”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은 도련님은 또다시 ‘소중해’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애달프게까지 들리는 속삭임은 평소에도 어린애 같은 도련님을 보다 미성숙한 존재로 보이게 했다.
타인을 위로할 때 말보다 몸을 이용하는 편이 익숙한 반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손깍지를 풀었다. 빠져나간 손가락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쫓아오는 남자의 손을 꽉 잡아 주고는 몸을 굴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
성기가 뽑혀 나간 구멍이 오므라들며 정액이 질질 흘러나왔다. 후들거리는 사지를 어렵지 않게 지탱한 반은 어둠 속에서 뻗어 오는 손을 마주 잡고 다시 손가락을 얽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손깍지를 살살 흔들며 팔 하나를 뒤로 해 꼿꼿하게 선 남자의 성기를 쓸어 올렸다.
“여기서 그만두진 않으실 것 같은데.”
“네가 기절해도 계속할 거야.”
도련님은 황당한 소리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던지는 말로 들리지 않았을뿐더러 안 된다는 말을 꺼내 봤자 듣는 척도 안 할 기세였다.
“…제가 그렇게 약하진 않아서요.”
헛웃음을 터트린 반은 무릎을 세워 남자의 귀두에 구멍 입구를 맞췄다. 허벅지 사이와 사타구니에 흥건히 묻은 정액을 윤활제 삼아 무리 없이 성기를 받아들이는 구멍에 귀두를 밀어 넣었다. 역시나 처음 주름이 벌어지는 느낌은 불쾌함에 가까웠다. 천천히 내려앉자 녹은 내벽이 부드럽게 벌어지며 두꺼운 살덩이를 집어삼켰다.
“후으…. 아….”
손깍지를 꽉 그러쥔 남자는 다른 손으로 반의 허벅지를 쓸어 올리다가 못 참겠다는 듯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는 반의 허리를 감싸 안고 완전히 내려 앉혔다. 채 삼키지 못한 성기가 모조리 들어와 숨을 들이켠 반이 목을 끌어안자마자 느긋함이라고는 없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저를 품에 가두고도 어떻게든 더 깊이 닿고 싶어 안달 난 남자의 머리를 끌어안은 반은 부드러운 머리칼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허리 짓을 도왔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이지가 모습을 감추었다.
“하아, 아…! 읏, 좋아….”
오싹오싹한 감각이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남자의 입술이 목울대를 빨았다. 반은 엉덩이를 꽉 움켜쥔 두 손에 의해 흔들리면서 입술을 벙긋거렸다. 목구멍에 걸려 메아리치던 누군가의 이름은 결국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잇새로 흘러나왔다.
“디아….”
목울대에 잇자국을 내던 남자가 숨을 멈추었다. 반은 자신이 누구의 이름을 입에 담았는지도 모르고 침대 헤드를 짚은 채 허리를 들썩였다. 한 손을 거두어들인 남자가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듯이, 혹은 잘못 들은 것이라고 의심하는 듯이.
남자의 허리 짓이 멈춘 것을 알아차린 반은 젖은 목소리로 그를 재촉했다.
“도련님, 빨리….”
손톱자국이 깊게 남을 정도로 귀를 괴롭히던 남자는 어딘지 실망한 듯한 서글픈 목소리로 대답하며 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응.”
침대로 쓰러진 반은 보다 거칠게 부딪쳐 오는 하체에 밀려나며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남자의 허리 짓은 이상할 정도로 과격했으나 버거울 뿐이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떨리는 눈꺼풀을 꾹 감고 그에게 휩쓸리던 반은 상체를 숙이는 남자를 끌어안았다.
목걸이 체인이 턱 위로 늘어졌다. 일순 가슴이 무겁게 두근거렸다. 반은 잿더미에서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럴 리 없다고 몇 번이고 부정하면서 의심을 떨쳐 내려고 해도 맞닿은 서로의 가슴에 끼어 마찰하는 로켓이 위화감을 일으켰다.
쾌감이 강해질수록 본능적으로 변하면서 정신을 앗아 가는 섹스 또한 의심을 부추겼다. 반은 입을 맞추려는 도련님에게 입 안을 허락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소년의 그림자가 발치까지 드리워졌다.
***
이틀간 섬을 휩쓴 폭풍우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가느다란 빗줄기는 그치지 않고 창을 두드렸다.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침침한 방 안, 테이블과 카펫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트레이 위의 식사가 몇 입 손대지 않은 상태로 차갑게 식어 갔다. 널브러진 식기와 엎어진 대야, 간호의 흔적들 사이에서 소파 다리가 끽끽 긁히는 소리가 튀어 올랐다.
“하아…. 흣….”
“더 세게….”
눈을 가리고 머리 뒤에서 묶인 캐노피 끈이 흔들렸다. 끄트머리에 달린 태슬이 팔꿈치까지 흘러내린 가운 안의 드러난 등을 간지럽혔다. 밭은 숨을 터트리며 바닥을 디딘 발과 등받이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준 반은 보채는 도련님의 요구에 따라 엉덩이를 강하게 내렸다.
숱한 파정으로 인해 뿌옇게 물든 성기가 쑥쑥 들어왔다가 나가며 소파 다리가 더욱 심한 소음을 냈다. 소파에 길게 드러누운 남자는 제 위에 올라타 고개를 뒤로 젖히는 반의 허리를 쥐었다.
“더, 더 세게 해.”
“으흑…. 아…!”
남자가 허리 짓을 거들자 등에서 살랑거리던 테슬이 툭툭 튀어 올랐다. 새빨갛게 부어오른 입술을 벌린 반은 다 쉰 목소리로 신음을 토하면서 등받이를 세게 붙잡았다.
“도련님, 하아…. 읏, 일은….”
“나중에…. 나중에 생각해. 여기 좋아….”
“저도, 흣… 좋은데…! 이건 너무….”
힘없는 웃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목덜미를 감싸 쥔 남자가 팔을 당겨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그와 가슴을 바짝 맞대자 마찬가지로 잔뜩 빨려 부은 남자의 입술이 아랫입술을 쪽 빨아들였다.
“너는 일 안 하고 놀아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빨리….”
“되게 설레기는 하는데…. 으음….”
밀려들어 온 두툼한 혀가 입을 막았다. 반의 허리를 끌어안은 남자가 몸을 굴리면서 엉킨 몸뚱이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반의 뒤통수를 감싸고 몸을 깔아뭉갠 남자는 벌어진 다리 사이로 연신 허리를 쳐올렸다.
찌걱거리다 못해 질퍽거리는 구멍을 제 것처럼 쓰는 도련님의 팔뚝을 움켜쥔 반은 소파에 걸친 다리를 파르르 떨며 카펫에 뒤통수를 비볐다.
밤낮없이 이어지는 섹스에 힘겨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소리는 힘들다는 투정이 아니라 호흡이 턱턱 막혀 숨넘어가는 소리뿐이었다. 발정제 맞은 말처럼 달려드는 도련님이 얼굴 곳곳에 키스를 퍼부었다.
“반, 반…. 읏, 기분 좋아…. 계속하고 싶어….”
레이스 대신 눈을 가린 캐노피 끈 위에 입을 맞춘 남자는 곧 죽어도 부르지 않던 이름을 거푸 속삭였다.
“흐으…! 으으….”
반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절정을 맞으며 쭉 뻗은 정강이를 경련했다. 남자의 소중한 목걸이가 거세게 흔들리며 작은 로켓이 턱과 뺨을 때렸다. 이러다가 죽을 것만 같은 쾌감이 몰아쳤다. 허리를 휜 채로 움찔거리던 반은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는 양손을 뻗었다. 손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엄지로 매만졌다.
“저도요….”
그의 머리칼만큼이나 부드러운 살결이 만져졌다. 그러나 곱디고운 피부 가운데 눈가에는 균열이 있었다. 반은 변함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관자놀이부터 시작해 눈 밑을 지나 광대까지 이어진 흉터를 쓰다듬었다. 길쭉한 초승달 형태를 그린 균열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도련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침음을 삼킨 반은 얼굴을 허락한 줄도 모르고 애달프게 매달리는 남자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코를 묻자 뒤섞인 체향이 흘러 들어왔다.
살결에서 풍기는 향기도, 팔 안에 안긴 체구도 달랐지만 반은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문장이 뱃속에서 뒤엉켰다.
…너구나.
***
며칠 헐벗고 지냈다고 살결에 닿는 옷의 촉감이 낯설었다. 날이 쌀쌀해져 기본 정장 위에 재킷을 걸친 반은 전신 거울에 몸을 비추어 봤다.
노출되는 부위는 목 일부분과 손이 고작이지만 그 협소한 부위에도 남자의 흔적이 빼곡하게 남았다. 살갗을 빨아들인 흔적으로 얼룩덜룩한 목덜미를 쓸어내린 반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눈가리개를 내려다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줄곧 뒤엉켜 있던 도련님은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은 시각을 차단했던 캐노피 끈과 난장판이 된 방, 근육에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후들후들 떨리는 사지였다.
섬을 휩쓴 폭풍우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까지 사흘간 반과 남자가 한 짓이라고는 방을 헤집으며 먹고 자고 섹스하는 것뿐이었다. 식사와 샤워는 내킬 때만 했는데, 그마저도 느긋하게 즐기지 못했다.
레이스와 달리 캐노피 끈은 조금의 시야도 허락하지 않아서 내도록 눈을 가렸던 반은 식사와 샤워가 필요할 때마다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배가 고파서, 땀을 비롯한 액체로 푹 젖은 몸이 찝찝해서 잠시 떨어졌다가도 금세 서로에게로 돌아갔다.
발정기 짐승도 안 이러겠다 싶을 정도로 본능에 사로잡힌 사흘을 보냈지만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도련님과 보낸 밤은 어떤 밤보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반은 까슬까슬한 눈가리개를 만지작거렸다. 의심에서 비롯된 기시감은 그와 몸을 맞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집을 불렸다. 반은 초승달 모양 흉터의 감촉이 남은 엄지로 레이스를 쓸어 보다가 눈에 둘렀다.
남자의 개인실 앞에 서자 불쾌한 두근거림이 가슴을 메웠다. 확인해야 할까, 아니면 전부 과민한 억측이라고 단정 짓고 미련을 버려야 할까. 이해하거나 확신할 수 있는 구석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잠금을 풀고 손잡이를 돌렸다. 열쇠를 품에 집어넣으며 트롤리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살짝 열린 문 너머에서 뻗어 온 손이 불식간에 팔뚝을 움켜쥐었다. 방심한 사이 개인실로 끌려들어 간 반은 쾅 닫힌 문에 떠밀려 쏟아지는 키스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읏, 도련님….”
양손으로 뺨을 감싼 남자가 몇 날 며칠 못 본 연인에게 반가움을 표현하듯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길 반복했다. 섹스를 했다고 해서 연인이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반은 좋아 죽겠다는 듯이 달려드는 남자가 싫지 않았지만 혼란스러운 상태로 어울려 주고 싶지도 않았다. 여차하면 문 앞에서 오늘 새벽까지 했던 짓을 이어 갈 기세인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아무렇지 않은 투로 상황을 저지했다.
“일해야 합니다.”
“오늘은 일할 거 없어.”
“무슨 소리십니까. 치워야 할 게 산더미….”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반은 드러난 방 풍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눈가리개를 살짝 올려 재차 확인해 봤지만 작정하고 뒤엎은 듯이 어수선했던 평소와 달리 개인실은 깔끔했다.
“…깨끗하네요.”
하긴, 줄곧 제 방에 함께 있었으니 어지럽힐 시간이 없긴 했을 테다. 대신 제 방이 폭탄 맞은 꼴이 되었지만.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청소기라도 돌릴까 했지만 이래서야 시늉만 하는 셈이었다.
“그럼 전 뭘 해야 할까요….”
망연히 중얼거리자 뒤로 다가온 남자가 눈썹 뼈에 걸친 눈가리개를 내려 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거.”
“…아.”
난처하게도, 지금은 그와 섹스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마른걸레 쥐어짜듯 온 체력을 짜내어 뒹군 덕분에 마음이 있더라도 더는 무리였다. 이를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하는 틈을 타 손을 감싸 쥔 남자가 들뜬 발걸음으로 침실 문을 향해 다가갔다. 뛰다시피 그를 따라간 반은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간 적 있는 복도로 빨려 들어갔다.
폭풍우가 물러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창이 없는 복도는 한밤중처럼 컴컴했다. 눈가리개까지 착용한 반에게는 더욱 어두웠다. 남자가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가며 입술을 깨물었다가 툭 놓았다.
예민한 성정이 사흘간 조금씩 갈려 나간 것처럼 둥글어진 남자의 태도는 반을 더욱 곤란하게 했다. 거절하자니 들뜬 어린아이 같은 남자가 안쓰러웠고, 받아 주자니 그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감출 자신이 없었다. 고민하는 와중에 욕실 반대편 복도 깊숙한 곳까지 끌고 온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반이 달아나지 못하게 손을 꼭 움켜쥔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자주 드나드는 곳은 아닌지 열쇠 구멍에 끼워 넣은 열쇠가 뻑뻑하게 돌아갔다. 맞잡은 손을 당겨 반을 안으로 들여보낸 남자가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여기는 뭐 하는….”
새카만 암흑 속에 던져진 반이 떨떠름한 물음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천장의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머금었다. 단번에 켜져 눈을 시리게 하지 않고 서서히 밝기를 올리는 조명이 사위를 밝혔다. 그물에 걸린 것처럼 잘게 쪼개진 시야로 방을 유심히 바라보자 뒤통수에 손이 닿았다. 길게 늘어진 레이스 천을 그러쥔 남자가 매듭을 풀어냈다.
“풀어 줄 테니까 뒤돌아보지 마.”
“…뭔데 그러십니까?”
“말했잖아. 네가 좋아하는 거.”
가벼운 레이스가 콧대를 스치며 거두어지자 ‘섹스를 어떻게 거절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허무하게 스러졌다. 입술을 벌린 반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쓸데없는 것에도 오밀조밀 장식이 들어간 고성에 꽤 오래 머무는 사이 화려함에는 면역이 생겼다고 여겼으나 이곳이 뿜어내는 호화스러움에는 기가 질렸다.
층고가 높은 방 벽 전체를 따라 선 적갈색 장식장과 정면에 자리한 거대한 액세서리 장으로 보아 사치스러운 드레스룸인 듯했는데, 사방에 굴러다니는 쇼핑백과 박스, 옷 커버로 인해 사실상 아름다운 창고로 보였다. 심지어 포장도 뜯지 않고 쌓아 둔 것이 태반이었다.
양 입꼬리를 내린 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의 의사를 오해한 것은 내심 미안했지만,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의미도 모호했다.
“제가 좋아… 하는 거요?”
“응.”
남자의 음성은 그의 발걸음만큼이나 들떠 있었다. 그의 의사를 파악할 수 없어 멀뚱히 서 있기만 하자 따뜻한 손바닥이 등을 살짝 밀었다. 앞으로 두 발짝 밀려난 반의 구두 앞코에 검은 박스가 툭 차였다.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찰나 경악할 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지고 싶은 거 가져.”
무심결에 뒤를 돌아볼 뻔한 반은 움찔했던 고개를 똑바로 고정했다. 그와 몸을 섞으며 든 의구심 때문에 작동을 멈췄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굳이 그의 언행을 하나하나 분석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봐도 의미가 분명했으니. 한순간 얼이 빠져 입술만 벙긋거리던 반은 잘못 들었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거짓말 같아?”
“…아뇨.”
조롱의 의미로 비싼 물건을 쥐여 주고 우월감을 즐길 사람이 아닌 것쯤은 알았다. 고작 잠자리를 가졌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을 하사할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였다. 상대에게 무엇 하나라도 안겨 주고 싶어 안달 난 태도가 문제였다.
들뜬 걸음과 음성이 가리키던 것을 알아차리자 힘이 쭉 빠져나갔다. 머뭇거리던 반은 무언의 재촉을 못 이기고 액세서리 장으로 다가갔다. 드러누워도 될 만큼 거대한 장은 시계와 넥타이 따위를 보관하는 칸으로 질서 정연하게 나뉘었는데, 정작 칸에 들어가야 할 내용물들은 포장에서 풀려나지도 못하고 유리판 위에 쌓여 있었다.
반은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 중 제일 위에 있는 것을 가져왔다. 제법 묵직한 박스를 내려놓은 순간 눈이 크게 뜨였다. 능력은 없지만 물욕 강하기로는 어디 가서 뒤처지지 않는 반이 모를 수 없는 로고가 눈가리개를 걷어 낸 눈에 콕 박혔다.
설마설마하며 박스를 열자 손도 대지 않은 보증서와 묵직한 우드 박스가 나왔다. 여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우드 박스 속에는 한정된 수량만 판매된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이 시계의 소식을 확인하며 군침만 흘렸던 반은 식은땀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꼭 사고야 말겠다고 줄리아와 드류에게 떵떵거리기는 했어도 정말 말뿐이었다. 반은 사치를 사랑하고 바라 마지않았지만 제 6개월 치 급여보다 비싼 손목시계를 턱턱 구매할 만큼 현실 파악을 못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별로면 버리고 다른 거 풀어 봐.”
당황한 나머지 시계를 쳐다보고만 있자 남자가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아닙… 니다. 마음에 들어서요.”
반은 정신 나간 남자가 혹여라도 시계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처박을까 봐 4만 달러짜리 시계를 순순히 손목에 걸었다. 고작 섹스 한 번에 콩고물이 우수수 떨어지는 상황인데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의 독촉은 마음에 든다는 말 뒤로 점차 심해졌다. 그의 손짓에 따라 반은 눈에 익은 브랜드 로고와 낯선 로고가 뒤죽박죽 섞인 쇼핑백을 연거푸 개봉했다. 드레스룸을 창고로 만든 박스 더미 안에서 시계뿐만 아니라 팔찌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 구두와 운동화, 가방과 모자, 옷가지가 줄줄이 튀어나왔다.
함박웃음을 지어야 했다. 폴짝폴짝 뛰어가며 잡히는 대로 몸에 걸쳐 보고 뻔뻔하게 감사 인사를 해야 했다. 자존심 따위 없는 반은 고가의 선물을 마다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은 좀처럼 웃지도, 물건을 마구잡이로 착용하지도 못했다. 반이 당혹스러운 듯 망설이기만 하자 뒤편의 소파에 걸터앉은 남자가 다리를 꼰 채로 이것저것 지시했다.
“마음에 드는 걸로 입고 와.”
“아, 옷이요….”
눈을 여러 번 깜박인 반은 코앞 행거에 걸린 슈트 케이스를 집어 들고 드레스룸 안쪽에 자리한 탈의실로 향했다. 두꺼운 커튼을 치고 기계적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양 손목에 찬 시계만큼이나 값비싼 정장을 걸치면서도 설렘보다는 불안이,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저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발볼과 뒤꿈치가 꼭 맞는 새 구두를 신고 나와 거울 앞에 섰다.
목 아래부터 비추는 전신 거울 너머 남자의 다리가 보였다. 절묘하게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를 곁눈질한 반은 거울을 들여다봤다. 캐주얼한 느낌의 정장은 구비된 유니폼처럼 전신에 착 달라붙어 어디 하나 어색한 구석이 없었다.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로 한 반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 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저 잘 어울립니까?”
“…응.”
남자는 한참 말이 없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은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정장 소매를 매만졌다.
“진짜 잘 어울리나 보네요. 도련님이 칭찬을 다 해 주시고.”
“마음에 들어?”
“그럼요. 이런 선물 처음 받아 봅니다. 제가 이런 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 그냥 여기 눌러살고 싶습니다.”
소매는 제 팔 길이에 딱 맞았다. 재킷의 품도, 바지의 기장도, 하물며 구두까지도 모조리 제 사이즈에 맞춰 산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사치스러운 방 안에 무더기로 쌓인 모든 잡화와 의류가 그러했다.
손대는 것도 겁나는 명품부터 반이 애용하는 브랜드,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충동적으로 구매한 듯한 물건들까지…. 잡화에서 슬며시 피어난 의심은 옷을 입어 보자 정점에 다다랐다. 이 잡다한 물건 중 도련님의 사이즈는 하나도 없었다.
거울 속 남자는 경쾌하게 발끝을 까딱이며 즐거운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발짓은 충동에 불을 붙였다.
“도련님.”
“응?”
마치 오늘을 위해 틈틈이 사들인 것처럼 작년에 유행했던 옷과 올해 유행한 잡화가 뒤섞여 있는 광경은 적잖이 기묘했고, 이러한 기묘함은 반에게서 신중함을 앗아 갔다.
“도련님 키워 주신 분.”
남자의 발끝이 멈췄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반은 달랐다. 사흘간 짐승처럼 굴었다고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는지, 고용인이라는 입장을 염두에 둔다면 못 꺼낼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아직 기다리십니까?”
혀를 놀려 단어 하나하나를 만들어 내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주체할 수 있는 것이 조금도 없었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혀가 마르는 와중에도 누구를 공격하는지 모를 말들이 절로 흘러나왔다.
“저라면… 그렇게 버리고 간 사람 안 기다릴 것 같아서요. 그런데 도련님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말을 끝맺기도 전에 치고 들어온 음성은 평정심을 잃은 듯 싸늘했다.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지라며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달콤한 목소리가 종적을 감췄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 하는 거냐고 묻잖아.”
잘 벼린 칼날처럼 섬뜩한 음성은 침묵할 것을 경고했으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반은 남자가 그어 놓은 선을 예고 없이 짓밟았다.
“혹시 그 목걸이….”
“…나가.”
“로켓 열어 보셨어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남자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구두 밑창이 카펫을 짓이기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돌아보기 직전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팔뚝을 붙잡았다.
등 뒤를 가로막은 남자는 반의 팔을 붙들고 방 입구로 밀어 냈다. 반은 허벅지에 힘을 바짝 주고 버티려고 했지만, 이성을 잃은 듯한 남자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걸었다.
들어올 때와 정반대로 뒤집힌 분위기 속에 문 앞에 다다르자 뒤에서 뻗어 온 손이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반은 문을 열지 못하도록 서둘러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쭤본 것뿐입니다.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질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푸른 핏줄이 툭툭 불거진 새하얀 손등이 밝은 빛 아래 드러났다. 조각상처럼 핏기 없는 피부를 할퀴고 간 흉터에 시선을 고정한 반은 피가 몰릴 만큼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때때의 위화감에서 시작된 의심은 마침내 확신으로 기울었다. 일부러 철저히 숨기지 않은 건지, 숨기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인지 반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제 눈으로 확인할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예감뿐이었다.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여지는 남아 있었으나 반은 제가 어느 쪽을 원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도련님.”
반은 만약 제 판단이 틀렸을 경우 일자리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제인의 평판에 먹칠을 할 수도 있는 결정을 내렸다. 붙들린 팔을 비틀고 뒤로 돌아섰다. 문에 어깨가 짓눌리고 팔꿈치가 손잡이를 스쳤다. 가슴을 마주하고, 고개를 들어 올려 저를 낯선 섬까지 불러들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던 때였다.
어느새 팔에서 떨어져 나간 손이 눈가를 뒤덮었다. 관자놀이에 닿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팔을 낚아챘을 때와 달리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안 물어보면 안 돼?”
남자가 만들어 낸 어둠 속에서 거칠지 않은 손길처럼 여린 부탁이 들려왔다. 목이 메는 듯 숨을 들이켠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더듬더듬 늘어놨다.
“그냥 이대로…. 이런 관계면, 그러면 나도….”
반은 불안정한 남자의 결론을 기다렸다. 당장 눈을 가린 손을 치워 버리고 그의 낯을 확인하고픈 욕구가 치밀었지만, 남자가 손수 골랐을지도 모르는 넥타이가 목을 조르고, 묵직한 시계가 손목에 매달려 그에게 시간을 주길 강요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반은 말을 잇지 못하는 남자의 팔을 더듬어 잡았다. 부드러운 셔츠의 감촉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
답을 달라는 듯이 셔츠를 살짝 당기자 눈을 덮은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가 뒤로 밀려나며 뒤통수가 문에 닿았다. 침묵을 고수하던 남자는 넋두리에 가까운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원래 이러려던 것도 아니었어.”
그는 갈피를 잃고 혼란스러워했다. 무어라 말을 얹을 수 없는 부정적인 단어들이 툭툭 튀어나와 반의 입을 틀어막았다.
“난 네가 싫어. 싫어야 해…. 그러니까….”
낮잠처럼 짧은 단꿈에서 깨어난 듯 남자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반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복도로 내쳐졌다. 닫히는 문틈 새로 악에 받친 거부가 흘러나왔다.
“내 눈에 띄지 마.”
문은 그의 소란스러운 감정만큼이나 거세게 닫혔다. 어두컴컴한 복도에 덩그러니 남은 반은 차마 문을 박차고 도련님을 끌어내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사람은 남자 혼자만이 아니었다.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온 반은 어제까지만 해도 남자와 헐떡이는 숨결을 교환하느라 바빴던 소파에 주저앉았다.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인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어 댔다. 양손을 모아 입가를 가린 반은 어지러운 카펫 무늬를 멍하니 응시했다.
단서는 곳곳에 있었다. 누구처럼 예민한 성정이라면 단박에 의심하고도 남았겠지만, 반은 그럴 리가 없다는 명제 하나로 애써 단서를 무시해 왔다. 아마도 두려웠으리라. 제가 소년을 그리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소년이 저를 그리워할지는 미지수였으니까.
밤새 소년을 그리워하다가도 매정하게 버린 거나 매한가지인 자신을 소년이 보고 싶어 할까, 하며 우울하게 마무리 지었던 수두룩한 밤들이 자책에 힘을 실었다.
반은 짧게 다듬은 엄지손톱을 질근거리면서 시린 눈을 깜박였다. 소년이 기억할 저의 마지막 모습이 무엇이던가. 손수 약이 든 차를 건네고, 오늘같이 즐거운 내일을 약속하는 거짓말을 속삭이지 않았나. 소년이 기억하는 순간은 거기까지다. 소년을 되찾기 위해 제가 무슨 짓까지 저질렀는지, 아마도 그는 모를 것이다. 혹은, 알면서도….
‘날 가지고 놀다가 버렸어. 돈 때문에.’
증오와 울분이 펄펄 끓는 음성이 뇌리를 스쳤다.
‘날 찾을 노력도 안 했고.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힘들었는데.’
단단한 이가 손톱을 깨고 여린 살결을 짓씹었다.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듯 갑갑하고 팔다리를 가만둘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방을 빙글빙글 돌아 봤지만, 엉망으로 뒤엉킨 머릿속은 이 상황을 타개할 획기적인 방법을 내놓지 못했다. 도리어 불안이 피어나 이성을 좀먹어 갔다.
만약 저를 이곳으로 부른 남자가 그가 사랑한 소년이 맞는다면, 오해가 있었다면, 혹은 진실을 알면서도 증오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을 파헤치고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정리할 의지보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아직 제 눈으로 얼굴을 확인한 것도 아니니, 덮어놓고 도망가면 모두 없던 일이 될 것이다. 급여는 엠마를 통해 해결하고 지금이라도 캐리어를 챙겨서….
“아, 왜 자꾸….”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닥치면 무책임하게 회피하는 버릇이 도지고야 말았다. 제 한심함에 치를 떤 반은 일그러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주저앉았다.
힘이 쭉 빠져나간 다리를 늘어뜨리고 소파에 머리를 기댄 반은 남자가 아무렇게나 벗어 두고 간 나이트가운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토록 복잡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는데. 인생이 왜 이렇게 됐을까.
***
쉴 틈 없이 울리던 전화기는 며칠째 고요했다. 오후 2시 정각에 머뭇머뭇 트롤리를 끌고 갔으나 그의 개인실은 열리지 않았다. 열쇠가 잘못됐나 싶어 엠마를 찾아갔지만, 내부에서 잠금을 걸면 열리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정보만 획득했다.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이제 모든 것은 그의 선택에 달렸다. 그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몇 날 며칠을 기다려야 했고,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거는 것조차 허락을 구해야 했다. 유리 벽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언제 울릴지 모르는 전화벨만 기다리며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혼란이 무뎌진 틈으로 불만이 염치없이 비집고 나왔다. 눈에 띌 기회를 줘야 눈에 안 띄도록 피해 다닐 것 아닌가. 기껏 안 달아나고 버텼더니 제가 침실로 쏙 들어가 숨으면 어쩌자는 건지….
툴툴거리면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정원을 내다보던 반의 귓가로 낯선 소음이 들려왔다. 저 먼 곳의 소음에 귀를 기울이던 반은 머지않아 그것이 헬기 로터 소리임을 알아차렸다.
정원의 이착륙장에서 일어난 소음은 이내 잠잠해졌다. 누군가 이 섬에 온 모양이었다. 남자가 나가는 기색은 없었으나 이전에도 소리 소문 없이 성을 비웠다가 돌아온 적이 있으니 남자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반은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흘끔거리며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해 보는 편이 낫지 않겠나.
반은 승강기를 타고 지상 1층으로 향했다. 건물 외곽과 꼭대기 층을 연결한 승강기는 넓디넓은 고성 구석빼기에 자리해 입구가 있는 홀까지 가려면 제법 걸어야 했다.
열심히 발을 놀려 오를 엄두가 나지 않는 중앙 계단 뒤편에서 빠져나온 반은 눈앞에 펼쳐진 홀의 광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앞을 딛으려 뻗었던 다리가 움찔거리며 땅에 박혔다.
제 그림자를 보기만 해도 바퀴벌레처럼 피하던 고용인들이 입구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엠마에게 듣기로 상주하는 고용인은 19명이었는데, 굳이 머릿수를 세 보지 않아도 그보다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반이 계단 근처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왔음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누군가를 환대하기 위해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줄 끝자락에 서야 할지, 인기척을 죽이고 물러나야 할지 망설일 무렵 반대편에 선 엠마와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상당했기에 대화는 불가능했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엠마는 무표정한 낯으로 계단 뒤편을 눈짓했다. 마치 피하라는 듯이.
그의 시선에서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챈 반이 줄 끝자락에서 물러나려던 때였다. 고성 정문이 서서히 열리며 미동 없이 서 있던 고용인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낯선 풍경에 몸을 숨겨야 함을 잊은 반은 길쭉한 홀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발목까지 떨어지는 코트를 허리끈으로 조인 나이 든 여성과 그의 뒤를 따르는 젊은 남자 둘이 경직된 환대를 받으며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반은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세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람을 옷차림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은 갖고 있으나 탐욕적인 면모가 있는 반은 그들이 걸친 옷, 걸음걸이, 깔끔하게 관리된 외양에서 저와 다른 계층의 사람임을 눈치챘다.
풍성한 백발을 근사하게 손질한 여성은 엠마보다 연배가 높았고, 캐주얼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둘은 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도련님의 가족일까. 그렇다면 추측은 어긋난 셈이다.
당혹스러워 뒤로 한 발짝 물러난 찰나, 정면에 꽂혀 있던 여성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온화한 눈매와 달리 창백할 정도로 푸른 눈알 속에는 몸을 얼어붙게 하는 위압감이 감돌았다.
눈이 마주친 여성이 그 자리에 멈춰 서자, 그와 동시에 홀에 도열한 모든 고용인의 시선이 제게 쏟아졌다. 갑작스럽게 주목받은 반은 놀라 눈을 깜박였지만 이내 안면 근육을 뻣뻣하게 굳혔다. 절로 벌어진 입에서 꺼림칙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고용인들의 면면을 오가는 시선이 분주했다. 스무 명이 넘는 고용인들 사이에서 맥과 그의 형제, 리암을 발견한 탓에 혼란은 가중됐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들은 모두 닮아 있었다. 머리칼과 눈 색에 미묘한 차이만 있을 뿐, 같은 틀에서 뽑아낸 것처럼 얼굴을 이루는 선이 지나치게 흡사했다. 똑같은 얼굴을 한 수많은 사람의 무감정한 시선에 숨을 들이켠 반은 엉겁결에 뒤로 물러났다. 괴상한 악몽이라기에는 등에 닿은 계단 난간의 감촉과 간담이 서늘한 침묵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여성이 반을 향해 몸을 살짝 틀자 고용인들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순간에 걷혔다. 도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들의 옆모습은 앞모습만큼이나 닮아 있어 반은 좀처럼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도망갈 수도, 설명을 바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혼란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반을 응시하던 여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름?”
중후한 음성이 침묵을 갈랐다. 소스라치게 놀라 여성에게로 고개를 돌린 반은 가능하다면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푸른 눈과 시선을 맞췄다. 파충류 같은 눈이었다.
내려오지 말걸, 잠자코 방에 처박혀 있을걸. 땅을 치며 후회해도 한참은 늦었다. 말라 가는 입술을 살며시 벌린 반은 긴장이 서린 목소리로 답했다.
“반 클라크입니다.”
“반 클라크. 클라크….”
여성은 반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뚝뚝 끊어지는 딱딱하고 고지식한 억양은 제 이름을 생소하게 만들었다. 어느덧 달싹이던 입술을 가볍게 다문 여성은 손을 감싼 얇은 장갑을 벗는 동안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중압감과 기묘함이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의 시선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눈을 내리깐 반의 귓가에 고상하게까지 들리는 음성이 파고들었다.
“클라크가 왜 아직도 내 눈앞에 있지, 엠마?”
단 한마디에 담긴 무례와 하대에 당황한 반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성은 여전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으나 제게 던진 말은 아니었다. 밀랍 인형처럼 줄곧 같은 자세와 표정을 유지하던 엠마가 즉각 답했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곧 도련님께서….”
“하.”
짙은 갈색 머리를 깔끔하게 고정한 남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조용히 산다고 했다.”
반은 마침내 여성이 뿜어내는 위압감에 잊혔던 남자 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 또한 외모가 출중했으나 반의 시선은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우울한 낯의 남자에게 꽂혔다. 바랜 듯한 금발과 창백한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 뇌 한구석에 자리한 기억이 튀어나와 뒤통수를 힘껏 갈기고 갔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좀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눈살을 찌푸린 반은 성큼 다가온 다른 남자가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손바닥이 밝은 눈동자에 비치고, 피하기도 전에 뺨을 얻어맞았다.
“처리하라고 했더니 이걸 여기다가 숨겨 놓고 있었어?”
매섭게 내려친 것은 아니었기에 아픔은 없었다. 그러나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건드리는 손길은 강한 불쾌함을 일으켰다. 신경질적인 인상을 가진 갈발의 남자는 약 올리듯 연신 뺨을 탁탁 때렸다.
희롱은 물론이고 조롱에도 내성이 있는 반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패악질을 무표정한 낯으로 받아 냈다. 안하무인으로 자란 티가 줄줄 흐르는 남자를 바라보고자 했으나 신경은 계속 창백한 남자에게로 흘러갔다.
충동에 이끌려 창백한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직전,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셔츠 깃을 잡아챘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가 뜯겨 나가며 깃이 활짝 벌어졌다. 숨길 것이 있어 단추를 꼭 채웠던 반은 도를 넘은 무례에 참지 못하고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난 이 집안 인간들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
섹스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은 목덜미를 혐오감 그득한 눈으로 훑은 남자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반은 놈의 손목을 비틀어 떼어 내려다가 멈칫했다. 분노보다 의아함이 차올랐다. 집안이라니?
“아직도 붙어먹을 생각을 하는 게 신기하다니까…. 엠마!”
“윽…!”
신경질적인 남자가 불시에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찬 탓에 상념이 끊겼다. 힘 조절 없이 날아온 발길질에 허리가 꺾이자마자 어깨를 부여잡은 손이 그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중심이 무너지며 양 무릎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혔다.
이유 없는 폭력 앞에서 고용인들은 놀라지도,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당황한 사람은 반과 창백한 남자뿐이었다. 반은 상황 파악을 위해 머리를 굴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이유가 없었다.
조롱은 참아도 폭력까지 참을 생각은 없는 반이 강제로 꿇은 무릎을 일으키려고 할 때, 딱딱한 것이 이마에 닿았다. 허벅지를 짚은 손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반은 돌아가는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홉떴다.
“막내한테 전해. 내가 잘 처리했다고.”
총구였다. 허리춤에서 빼 든 소형 리볼버를 반의 머리에 겨눈 남자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딱딱하게 얼어붙은 반의 관자놀이에서 미끄러진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빈 실린더가 딸깍,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차는 것과 동시에 창백한 남자가 나섰다.
“그만해, 체마….”
체마라고 불린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약실을 확인했다. 단 한 발의 총알을 확인한 후 실린더를 돌린 체마가 반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에도 불발이었다. 사고 회로를 멈춘 채로 움찔거린 반의 머리 위에서 체마의 비웃음이 떨어졌다. 언제 실탄이 발포될지 모르는 긴장된 상황 속에 엠마의 무신경한 말씨가 끼어들었다.
“그쯤 하셨으면 합니다. 도련님께서 불쾌해하실 겁니다.”
“엠마.”
잠자코 사태를 관망하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참견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가 뚜렷했음에도 엠마는 물러나지 않고 뜻을 전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도 않았다.
“저는 이곳 소속입니다, 르네 님. 도련님께서 분명 불쾌해하실 겁니다.”
눈을 가늘게 뜬 르네가 엠마에게로 반 바퀴 돌아섰다. 팽팽한 대립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계급의 경계가 확실했으나 반은 그를 알아차릴 정신이 없었다.
뼈마디가 굳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실린더 돌아가는 섬뜩한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이 눈썹 뼈로 흘러내렸다.
꿋꿋한 엠마를 응시하던 체마가 검지에 다시금 힘을 주었을 때, 새카만 슬랙스에 감싸인 늘씬한 다리가 중앙 계단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계단을 짓이기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노여움이 실렸다. 부푼 팔 근육에 들러붙은 하늘하늘한 셔츠 소매가 흔들리며 산탄총의 장전음이 잇따랐다.
“전부 물러가.”
잇새로 흘러나온 나지막한 음성은 그의 발걸음만큼이나 서늘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석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동 없던 고용인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발소리를 죽이고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엠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은 가까워지는 기척을 향해 고개를 들고자 했다. 기름칠 덜 된 고물 덩이처럼 삐거덕거리는 목을 바로 세우고 남자의 구둣발에 시선을 붙인 찰나, 휘둘러진 리볼버가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읏…!”
휘청이며 앞으로 숙어진 반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자마자 산탄총 끄트머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홀을 뒤흔드는 강렬한 총성이 귀청을 때렸다.
정확히 체마의 발치에 박힌 총알이 산산이 조각난 석재 바닥에서 희미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패닉에 빠진 반은 탄환이 할퀴고 간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 나라도 총기 소지가 자유였던가, 따위의 쓸모없는 고민이나 했다. 연달아 총기가 등장하여 도무지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자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고통이 무뎌졌다.
“허….”
반 못지않게 굳어 있던 체마가 헛웃음을 흘렸다. 금이 간 바닥을 짓밟고 계단 방향으로 빙글 돌아선 체마는 초연 사이로 살랑거리는 황금빛 머리칼을 노려봤다.
“네가 감히 르네 앞에서도 건방을 떨어?”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뗀 남자는 품에 안은 산탄총 총구를 살짝 흔들어 연기를 날렸다. 곧이어 덮개를 당겼다가 놓아 탄환을 재장전했다. 탄창에서 떨어진 탄피가 데구루루 굴러 바닥을 짚은 반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지금 고개를 든다면 도련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리볼버의 총구가 여전히 이마를 겨누고 있었다.
“다음에는 머리통이야. 손 떼.”
“이번에는 날 죽여 보시겠다? 징계가 모자랐던 모양이지?”
“아, 징계….”
우스운 소리를 들은 양 이죽거린 남자가 소란의 근원지로 다가왔다. 남자는 길쭉한 총구로 체마의 가슴팍을 눌러 뒤로 물러나게끔 했다. 이마에 닿은 총구가 사라지자마자 참았던 숨을 토해 낸 반은 어느새 제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다리를 응시했다. 남자는 상념에 잠긴 듯 구둣발로 느리게 바닥을 두드리더니 간단명료한 결론을 내렸다.
“그럼 르네를 죽이자.”
타깃을 바꾼 남자가 곁에 선 여성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도 고상함을 잃지 않은 르네는 별난 것을 보듯 얇게 손질한 눈썹을 살짝 까딱거릴 뿐이었다.
“기왕 징계받을 거면 그게 낫겠지? 슬슬 죽을 때도 됐으니까.”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르네를 대신해 발끈한 체마가 남자에게 리볼버를 겨누었다. 주춤주춤 시선을 들어 올린 반은 남자의 다리 옆으로 보이는 살풍경한 광경에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가 총기 난사가 일어나기 직전의 살벌한 현장에 휩쓸렸을까. 무심결에 동아줄이나 다름없는 남자의 바짓단을 꼭 그러쥔 반의 무릎에 구두 뒤축이 툭 닿았다.
“올라가, 당장.”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반은 망설일 것 없이 바닥을 짚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빠르게 튀었다. 달아나는 반의 뒤꽁무니에 짜증스러운 시선을 던진 체마가 이를 갈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여긴 내 관할이야. 클라크 처우도 당연히 내 권한이고.”
엠마가 건넨 눈짓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못 볼 꼴을 당한 반은 두 번은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았다. 그들을 훔쳐볼 새 없이 황급히 승강기가 있는 건물 모퉁이로 향하는 반의 귓가에 들려오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종국에는 모두 사라졌다.
정신없이 방으로 돌아온 반은 문을 닫자마자 등을 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후들거리던 다리가 기어이 풀리면서 쭈그러든 폐에서 가쁜 호흡이 터졌다.
“헉…. 하아….”
죽을 뻔했다. 탄창이 가득 차 있었더라면, 체마가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더라면 실린더 속 총알이 제 머리통을 꿰뚫었으리라. 정말 죽을 뻔한 것이다. 죽음을 불사한 경험이 있긴 했으나 그때는 반쯤 미친 시기였고, 너무나도 제정신인 상태에서 머리통이 날아갈 위기를 겪은 반은 떨리는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주로 맡은 것이 경호 임무였다고 한들 전쟁터에 나간 적도 없고, 설렁설렁 폼만 잡으며 고용주의 짐을 들어 주고 기분 맞춰 주는 것이 맡은 일이었던 반에게 있어 오늘 경험은 정도가 지나쳐도 한참은 지나쳤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심장 박동이 기겁한 심정을 대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반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카펫 무늬를 바라봤다.
르네의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 반은 창백한 피부와 백색에 가까운 금발을 가진 남자를 본 적 있다. 찰나의 순간, 새빨간 불빛에 시야가 얼룩진 상태로 만났기에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스쳤다면 못 알아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모든 정황이 짜 맞춰지며 조금씩 모아 온 심증들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식스. 식스였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죽음의 목전까지 갔다 온 공포를 눌렀다. 거친 호흡과 떨림이 바닥까지 가라앉고 발밑이 꺼지는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창을 통과해 발치까지 늘어진 노을이 붉게 타올랐으나 그에 반비례해 몸은 차갑게 식어 갔다. 귓속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뒤섞인 채로 메아리쳤다.
‘그래서 죽여 버릴 생각이야. 그래야 하고.’
‘처리하라고 했더니 이걸 여기다가 숨겨 놓고 있었어?’
‘난 네가 싫어. 싫어야 해….’
싫어 죽겠다고, 죽일 생각이라던 불안정한 속삭임과 적대감을 넘어 혐오에 가깝던 체마의 눈빛, 사람 같지 않던 르네의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몰아치자 이마가 깨질 듯이 지끈거렸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후 두 번 다시 찾지 못한, 미련을 버리고자 억지로라도 잊으려던 과거의 편린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되풀이되었다.
고막을 찢는 사이렌 소리와 번쩍거리며 위험을 경고하는 시뻘건 불빛으로 가득 찬 연구소.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정보를 파기하던 연구원들과 사진으로 남은 끔찍한 실험의 증거, 장난감 같던 신체 표본, 실험용 쥐를 가두는 우리 용도의 하얀 방들….
4년 전, 반은 미셸과 연구소가 그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복수심에 불타던 체마의 반응은 정당했다. 그렇다면 소년은… 아니, 도련님은 동족의 복수를 위해 저를 죽이고자 이곳까지 불러들인 것일까.
땅거미가 지며 고성과 한 몸 같은 어둠이 몰려들어도 반은 무엇도 하지 못했다. 감당할 시간을 주지 않고 해일처럼 밀고 들어온 정보들이 무기력과 죄책감을 선사했다.
능력이라고는 뭣도 없이 욕심만 많아서 소년을 빼앗기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의 무력함과 제 핏줄이 저지른 악행을 보고도 묵과했던 과거에 대한 죄책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지만… 반은 죽고 싶지 않았다.
제 잘못이 무엇인지 잘 안다. 웨인의 경고를 믿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해하던 소년에게 약이 든 차를 건넸다. 그러고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찾으러 갔으며, 소년을 과거에 버려두고 홀로 살아남고자 했다. 그러나 잘못은 소년에게 저지른 것이지 다른 개체들에게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영문 모른 채로 미셸의 죄를 몽땅 뒤집어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반은 오래도록 구부리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사위는 어두웠다. 때마침 9시를 가리키는 중후한 타종 소리가 울려 퍼지며 심박수를 높였다.
그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눈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성은 고요했다. 대화로 해결 중인지, 저를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일 계획을 토론하는 중인지 알 바 아니었다. 반은 황급히 촛대와 초를 찾았다.
타종이 끝나기 전 초에 불을 붙이는 것에 성공한 반은 옷장을 열어 구석에 넣어 둔 캐리어를 꺼냈다. 캐리어를 펼쳐 남자에게 받은 값비싼 정장과 손목시계 두 개를 서둘러 집어넣었다.
자리가 모자라 새 구두는 넣지 못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6개월 치 급여를 푼돈으로 만드는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여권을 확인하던 반은 입술을 질근거리며 손을 툭 내려 두었다.
이성을 잃고 도망갈 생각부터 하기는 했으나 사실상 이곳에서 나갈 방법이 없었다. 모터보트는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지만 한밤중에 길도 모르는 바다를 건너갈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는 않았다. 당장 머리통에 총알구멍이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표류를 각오하고 바다로 도망가겠지만 반의 발목을 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움찔거린 손가락이 구부러들며 여권을 구겼다. 손가락 끝에 깊은 흉터의 감촉이 맴돌았다. 성한 구석 없이 엉망진창이던 너른 등이 흔들리는 촛불을 따라 일렁거렸다. 싫다고, 밉다고 연신 부정하면서, 살결이 떨어지면 숨이 멎기라도 할 것처럼 굴던 남자의 애처로운 몸짓이 회피가 버릇인 반을 단단히 붙들었다.
이렇게 도망갈 수는 없었다. 못된 말을 일삼으면서 애정을 갈구하던 도련님이 소년이라면 이대로 사라져서는 안 됐다. 두렵고 수고스럽더라도 과오를 똑바로 마주해야 함을 머리로는 아는데, 분명 아는데, 매번 분란을 피해 왔던 반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울어서 해결될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얼굴을 감싸 쥐고 자기 비하에 빠져 허덕일 무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깨를 움칠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으나 들어오자마자 쾅 닫은 제 방 문은 닫힌 상태 그대로였다. 경직된 시선이 천천히 곁으로 돌아갔다. 도련님의 개인실과 연결된,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 열려 있었다.
촛불이 비추지 못하는 범위에 발을 딛고 선 남자의 그림자는 여느 때보다 거대하고 음산해 보였다. 눈 깜박이는 것도 잊고 바라보던 반의 눈알이 빠르게 굴러갔다.
활짝 열려 짐이 차곡차곡 쌓인 캐리어, 손에 그러쥔 여권. 남자의 시선이 그것들에 닿은 것을 눈치채자마자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여권을 캐리어 속에 집어넣기 무섭게 충격과 분노로 얼룩진 음성이 방을 가로질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이건…. 잠깐 정리를 좀.”
평소에는 잘만 굴러가던 혀가 돌덩이처럼 굳었다. 오해하는 것이 당연한 광경이었다. 더군다나 도망갈 생각을 아예 안 한 것도 아니었기에 반은 손을 내젓다가 화근이 된 캐리어를 얼른 닫았다. 남자의 눈에 띄지 않게 멀리 치운다고 휙 밀쳤지만, 옷장 문에 걸린 캐리어는 항의라도 하듯 대충 쑤셔 넣은 여권을 퉤 뱉어 냈다.
“…안 떠날 거라며.”
도망의 증거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권이 예민한 남자를 들쑤시고 말았다. 반은 다 망했다는 심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떠나긴 뭘 떠납니까…. 이거는 정말 정리를 좀 하려고, 예….”
서둘러 나동그라진 여권을 도로 캐리어에 집어넣는 사이 남자가 발을 뗐다. 중앙 계단을 내려오던 걸음보다 카펫을 짓밟는 지금의 걸음이 더욱 노여워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닐 터다.
점차 가까워지는 다리와 캐리어를 번갈아 살피며 허둥지둥하던 반은 지퍼를 채 닫기 전에 팔꿈치를 붙잡혀 일으켜 세워졌다. 양 팔뚝을 억센 손아귀로 붙든 남자가 밀어붙이듯 다가섰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힘이 잔뜩 들어간 턱 선을 곁눈질한 반은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은 마주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변명거리, 해명할 거리를 정리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도리어 화를 키울 바에야 대화를 나누지 않는 편을 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사정을 봐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듯했다.
“안 떠날 거라고 했잖아. 안 버린다고, 나랑 있을 거라고 네가 네 입으로 그랬어. 그런데 또…. 너는 왜, 왜 계속….”
어느새 어둠에 파묻힌 그의 잇새에서 두서없는 원망이 연거푸 흘러나왔다. 물러나고 물러나던 반은 다리에 힘을 주어 그를 막아섰다.
“잠시만요, 도련님. 가려고 한 적 없고, 그냥 저는 잠깐 정리를….”
“또 거짓말이야?”
“정말인데….”
“매번 정말이라고 해 놓고 진짜 정말이었던 적이 있기나 해?”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기세에 기가 죽은 반은 말끝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웃어넘길 여유를 빼앗기자 남은 것은 부딪치길 극도로 기피하는 소극적인 알맹이였다. 포장 안 한 진심을 내뱉어야 하는 지금 같은 순간은 싫었다. 반면 남자는 이런 순간을 기다려 오기라도 한 듯 악에 받친 속내를 모조리 털어놓았다.
“늘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지. 이번에는 안 속아. 네 말 하나도 안 믿어.”
“그,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좀….”
“시간 주면?”
어둠 속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질타나 다름없는 웃음소리에 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또 나 버리려고? 이번에는 어떻게 버릴 거야?”
과거를 들추어낸 남자는 더 이상 제 정체를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의도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애써 아닐 거라고 부정하는 반에게 단서를 쥐여 주었던 수많은 날처럼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하는 모양새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막다른 길에 몰린 반은 그저 막막했다. 그의 말을 반박하고 오해를 풀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딱 달라붙은 입술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죄인의 심정이었다. 무슨 말이든 변명처럼 들릴까 봐 두려워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기다리지 못하고 ‘응?’ 하며 팔뚝을 흔들어 대답을 종용하던 남자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꽉 조여드는 아귀힘이 불편하게 느껴질 즈음, 답을 얻길 포기한 남자가 샐쭉 웃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나머지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완전히 드러낸 남자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반의 팔을 따라 쭉 미끄러진 양손이 차가운 손을 살포시 잡았다. 남자는 붙잡은 양손을 위아래로 느릿느릿 흔들었다.
“하나 알려 줄까, 반? 너 죽을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가. 이제 네가 갇히는 거야. 여기서 나랑 영원히 같이 살 거야. 결혼식도 하고. 응? 여보.”
모양새는 장난이나 다름없었으나 정작 양손을 내어 준 반은 차마 웃지 못했다. 사소한 부분을 흘려듣는다면 낭만적이라고 할 속삭임이었다.
다짐하듯 되뇌는 문장은 섬뜩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반은 그를 두려워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말로 다리가 아프다고 하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승강기를 설치하고, 짧은 신음만 흘려도 지레 놀라 안절부절못하는 남자가 무섭고 소름 끼칠 리가. 설령 입 밖에 낸 말 그대로 실행한다고 하더라도 한동안은 안쓰러움이 앞설 것이다.
반은 해내지도 못할 말을 내뱉는 남자가 가여웠다. 몸만 자란 어린아이 같은 태도가 동정심을 일으켰다. 불안정한 남자를 달래 주고 싶은 마음이 망설임을 앞지르고, 불안정한 그를 달래려 손을 뻗으려던 때였다.
움켜잡힌 손목을 빼내는 행동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남자의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벌어진 거리를 단번에 좁힌 남자가 막을 새도 없이 베스트를 벗겼다. 발치로 떨어진 검은 베스트가 구두 밑창에 짓밟혔다.
“뭐 하시는….”
당황한 반이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었지만 흥분한 남자는 단추를 하나씩 푸는 작업도 지겨운지 뜯어내다시피 셔츠를 벗겼다. 그는 허리를 비트는 반의 상체를 조급하게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어깨에 축축한 입술이 수차례 닿았다가 떨어지는 동안 바지 버클이 풀렸다.
“나랑 섹스하는 거 좋다고 그랬어, 반. 나 이제 잘하니까…. 응? 너 이거 좋아하잖아. 내가 잘할게.”
“이러지 말고 잠깐만….”
팔과 상체를 한꺼번에 둘러 안은 두꺼운 팔뚝 탓에 반은 어깨를 뒤틀며 고개를 젖히는 것이 최선이었다. 남자의 미는 힘에 비틀거리던 다리가 꺾였다. 침대로 쓰러진 반이 허리를 세우기도 전에 온몸으로 짓누른 남자는 말을 잇기 위해 벙긋 벌어진 입술 새에 혀를 밀어 넣었다.
“으음…! 읏!”
고개를 돌려 피해도 끈질기게 쫓아와 혀를 섞으면서 정장 바지를 끌어 내렸다. 바지에 걸린 구두 한 짝과 함께 벗겨진 옷가지를 침대 밖에 내동댕이친 남자는 어깨를 밀어내는 반의 만류도 개의치 않고 드로어즈를 무릎까지 잡아당겼다.
말려 내려간 속옷이 양다리를 묶으면서 딱 달라붙은 허벅지 사이로 뜨거운 살덩이가 쑤욱 밀려들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용케 발기한 성기가 말랑한 고환과 회음부를 짓이기며 앞뒤로 왕복했다. 끈적한 쿠퍼액이 사타구니를 더럽히고, 입 안으로 미처 들어가지 못한 타액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스듬히 누운 채로 남자의 강압적인 키스와 허리 짓을 받아 내던 반은 젖 먹던 힘을 짜내 어깨를 뒤틀었다. 남자가 작정하고 덤볐다면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하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반사적으로 힘을 뺐다. 반은 모자란 호흡을 다급히 들이켜며 남자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진정… 좀 하세요.”
거칠어진 서로의 숨결이 따가운 입술을 스쳤다. 눈을 질끈 감은 반은 이마를 꼭 맞댄 남자의 뺨을 엄지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결론을 내렸다. 이제 마주할 때였다. 변명거리도, 해명거리도 전혀 준비하지 못했지만 지금 대화의 물꼬를 트지 않는다면 유혹에 약한 자신은 그의 분위기에 삽시간에 휩쓸려 갈 것이다.
움찔움찔 떨리는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불빛은 옅었지만 얼굴을 이루는 선을 확인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반의 눈이 완전히 뜨이기 직전, 유달리 체온이 높은 손바닥이 눈두덩이를 덮었다.
“보지 마. 이제 안 예쁘니까.”
단호한 음성은 설움과 참담함을 한데 담고 있었다. 황당해서 입만 벙긋거리는 반의 귀로 실크 천이 스르륵 풀리는 소리가 스며들었다. 사흘간 시각을 차단했던 그 캐노피 끈이 또다시 눈을 가렸다. 버둥거리며 눈가리개를 끌러 내려다가 저지당한 반은 울컥해서 제 처지도 생각 못 하고 내질렀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우리, 그…! 대화는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도련….”
“입도 막아 줄까?”
무릎에 걸린 드로어즈를 발목까지 떨어뜨린 남자가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멀고 혀도 잘려서, 그렇게 살래? 난 그것도 괜찮은데….”
“자, 잠깐…!”
줄줄 흘러나온 쿠퍼액으로 찐득찐득해진 성기가 회음부를 스치고 주름을 짓눌렀다. 익숙지 않은 삽입에 바짝 굳은 반을 끌어안은 남자는 주름을 밀고 구멍 안으로 귀두를 비집어 넣었다.
오밀조밀한 주름은 억지로 밀려들어 오는 성기를 끊어 먹을 듯 조였으나 삽입을 막지는 못했다. 밭은 숨을 터트리는 반의 눈가에 제 눈가를 맞댄 남자는 귀두가 무난히 들어가자마자 허리를 확 쳐올렸다.
“흡…!”
남은 기둥이 내벽을 벌리며 틀어박혔다. 손에 닿는 셔츠를 쥐어뜯을 듯 움켜쥔 반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무릎으로 남자의 허리를 조였다. 삽입과 동시에 사정한 남자의 정액이 엉덩이 사이에서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반은 그때야 며칠 전 속을 더부룩하게 했던 것의 정체가 녹은 크림이 아니라 순전히 남자의 정액임을 알게 되었다. 인간보다 양이 월등히 많은 정액은 크림 대신 오므라든 내벽을 흠뻑 적시고 삽입을 수월케 했다.
“흣, 으흡…. 도, 도련님…!”
그와 횟수를 셀 수도 없이 몸을 섞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아픔은 덜했다. 그러나 버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사정을 했음에도 발기가 풀리지 않은 성기가 뒤로 쭉 물러났다가 내벽 깊은 곳을 쳐올렸다. 눈을 가리자 더욱 감각이 날뛰는 지금은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쾌감이 고통을 헤집고 피어났다.
끙끙거리던 반은 얼굴을 가까이 한 남자의 눈가에 제 눈두덩이를 비볐다. 콧대가 스치고 눈썹 뼈가 스쳤다. 기억 속 소년의 선이라기에는 역시 딱딱하고 곧았다. 반은 어린 그에게 처음 섹스를 알려 주었을 때처럼 허락이라고 할 수 있는 명령을 내렸다.
“천천히….”
고작 한마디 말에, 난폭하기만 했던 허리 짓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릿한 고통이 사그라지자 아랫배가 기대감으로 욱신거렸다. 헤픈 몸뚱이는 지금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이성적인 생각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뜨겁게 달아올라 사고 회로를 마비시켰다. 커다란 침대가 느슨하게 흔들리며 너무나도 자란 소년의 몸이 부딪혀 왔다.
“읏…! 아….”
“묶어 둘 수도 있어. 이 방에서, 나만 기다리게 할 수도 있어, 반….”
남자는 욕구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서 신음과 숨결을 뱉느라 바쁜 반의 입술을 쪽쪽 빨아들이며 시종 섬뜩한 협박을 중얼거렸다.
“어디 가지도 못하고 나한테 다리나 벌리면서, 너 그렇게 살게 만들 거야….”
“무슨, 아! 천천히, 흐읏…! 처, 천천히…!”
어디서 저런 천박한 언사를 배워 왔는지, 소름 끼치는 소리를 혼잣말처럼 되뇌는 남자의 어깨를 쥐자마자 허리 짓이 강해졌다. 엉덩이가 짓눌리다 못해 남자에게 깔린 몸이 침대 헤드로 점차 밀려났다.
정수리가 부딪히기 직전에 헤드를 손바닥으로 짚은 반은 아랫배를 꺼트리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귀두가 쉼 없이 안을 쾅쾅 치받을 때마다 뱃가죽 위로 두꺼운 모양이 선명히 잡혔다.
“아흑! 흡, 후으….”
양말을 신은 발목을 그러쥐어 제 어깨에 걸친 남자가 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였다. 철벅거리며 튄 정액이 엉덩이와 허벅지에 잔뜩 묻었지만 찝찝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반은 자칫하면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은 입술을 앞니로 꾹 깨물고 허리를 들썩였다. 매번 다툼으로 시작해 섹스로 끝내던 짐승 같은 아파트 이웃들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좋아, 반? 안 만져 줬는데 섰어. 여기.”
“으, 응…. 아, 좋아…. 읏!”
어느새 발기한 파렴치한 살덩이가 남자의 성기 윤곽이 드러나는 아랫배에 투명한 액을 흘렸다. 기어이 욕망에 휩쓸린 반은 남자의 집요한 질문을 부정하지 않고 캐노피 끈을 축축하게 적셨다.
열이 오른 얼굴부터 가슴까지 새빨갛게 물든 것이 느껴졌다. 남자의 성기가 드나드는 구멍에서부터 시작된 열감이 뇌를 모조리 태워 버릴 것 같았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를 멀리 치워 두고 코앞에 닥친 성욕을 해소하는 짓은 걱정을 안겨 주었으나 동시에 보다 자극적이었다.
“하아…. 아…!”
“…나도 좋아. 너무, 너무 좋아.”
양말 안으로 검지를 밀어 넣은 남자가 복사뼈를 매만지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갗이 거세게 부딪치는 소리에 묻혀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이내 자꾸만 모으려던 무릎이 확 벌어지며 묵직한 무게가 덮쳐들었다. 침대 헤드로 가로막힌 좁은 공간과 남자 사이에 끼인 반은 몸이 구겨진 불편한 자세로 흔들리며 헐떡였다.
초조하고 조급한 심정을 대변하듯 빠르고 강한 허리 짓이 기꺼웠다. 상처 주고 상처받는 대화보다 자극적이고 본능에 의지하는 섹스는 여러모로 참 간편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됐다.
절정은 절정인지도 모르게 찾아왔다. 남자는 조금도 허리 짓을 쉬지 않았고, 배 속을 때리는 쾌감은 당최 끊기지 않아서 괴로운 눈물이 샜다.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던 것도 같다. 사타구니와 침대 시트만큼이나 젖은 눈가리개에 입술을 붙인 남자는 거친 숨결 속에 단어를 이어 붙여 조심스러운 질문을 만들어 냈다.
“그때… 왜 내 이름 불렀어?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남자의 목을 꽉 끌어안고 매달린 반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언제 제가 소년의 이름을 불렀던가. 기억은 희미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해야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기도 했다. 부어오른 입술이 절로 달싹거리며 남자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툭툭 끊기는 답이 튀어나왔다.
“계속, 네 생각… 했으니까.”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남자는 말없이 더 깊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넣고 싶은 것처럼, 그러다가 아예 하나가 되고 싶은 것처럼 반을 짓이겨 왔다.
입을 크게 벌린 반은 턱을 덜덜 떨면서 목 끝까지 차올라 듣기 괴로운 숨소리를 냈다. 밀어 내지도, 당기지도 못하고 나무토막처럼 굳은 반을 옭아맨 남자는 가장 깊은 곳에 사정하며 핏대가 선 목을 깨물었다. 선명하게 남은 잇자국에 입술을 붙인 남자가 속삭였다.
“…거짓말.”
불신으로 가득한 음성 내면에는 옅은 기대가 꺼지기 직전의 불꽃처럼 살아 있었다.
***
손가락 끝이 움찔 떨렸다. 손끝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어깨를 타고 잠들었던 감각이 차차 돌아왔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했으나 젖은 속눈썹이 실크에 엉켜 눈을 뜰 수 없었다.
반은 시간이 짐작되지 않는 어둠에 잠긴 채로 주먹을 움켜쥐어 봤다. 손아귀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파르르 떨렸다. 사지가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다.
10살 연하쯤이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자만했는데, 역시 체력 차이는 별도리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에서야 알겠다. 먼젓번 섹스는 도련님 딴에 나름대로 배려했다는 걸. 그리고… 정확히 따진다면 10살 연하도 아니다.
손을 툭 떨어뜨린 반은 숨 막힐 정도로 허리를 껴안은 팔과 목덜미에 닿는 규칙적인 숨결에 감각을 곤두세웠다. 등을 감싼 가슴에서 남자의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돌연히 성장해 돌아온 남자의 체온과 박동은 기진맥진한 와중에도 머리 한구석이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반은 힘이 쭉 빠져나가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남자가 꽁꽁 묶어 둔 눈가리개를 조심히 풀어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스르륵 미끄러진 팔이 순간적으로 허리를 껴안았다. 흠칫 놀라 숨을 죽였지만, 반사적인 행동이었는지 죽은 듯이 잠든 남자는 그다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많이 피곤했던 걸까. 반은 눈가리개를 풀어도 형태조차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보지 마.’
고막에 스민 음울한 음성은 반을 주저하게 했지만 도리어 느린 심박수를 올리기도 했다.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때때로 그의 외모가 궁금하기는 했어도 이토록 강렬한 호기심이 든 적은 없었다. 어떻게든 얼굴을 못 보게 하던 그의 태도가 호기심을 막아섰으나 손끝에 남은 초승달 모양 흉터의 감촉이 충동에 불을 붙였다.
팅팅 부어 따가운 입술을 짓씹는다고 해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애먼 아랫입술을 괴롭히던 반은 결국 손을 뻗었다.
반은 소년이 보고 싶었다. 불타오르는 집 앞에서도, 무너지는 천장 아래서도, 무료한 병실에서도,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도, 웃고 떠들고 즐겼던 모든 날에도… 언제나 아이가 보고 싶었다.
남자는 곧 죽어도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을 기세였으니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충동이 죄책감을 누르자마자 황급히 침대 곁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허리를 감은 팔을 풀자니 그가 깰 것 같아 끙끙거리며 손가락 끝으로 서랍을 열고 초와 성냥을 꺼냈다. 옷장 근처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을 촛대까지 찾을 여유는 없었다.
성냥갑을 더듬어 성냥 한 개비를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성냥을 긋자 작은 불꽃이 튀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자는 마음 반, 확인하고 못 본 체하면 그만이라는 마음 반으로 심지에 불꽃을 옮겨 붙였다.
성냥이 꺼지고 초 끄트머리가 타올랐다. 반은 작은 불꽃을 바라보며 뻑뻑한 눈을 수차례 깜박였다. 긴장에 어깨가 뻐근하게 저렸다. 기척을 내지 않도록 유의하며 잠든 남자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일렁이는 촛불이 남자에게 드리운 짙은 어둠을 몰아내자 베개 위에 흐트러진 황금빛 머리칼이 서서히 드러났다.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던 풍성하고 윤기 나는 곱슬머리에 이어 짙은 눈썹과 눈썹 뼈에서 콧대로 이어지는 선이 눈에 들어왔다.
반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기억 속에 남은 소년의 인상은 마냥 예쁘장해서 중성적인 면이 있었는데, 성장으로 인해 뚜렷해진 이마와 콧대가 중심을 잡으면서 완연한 남성의 얼굴을 만들었다.
그러나 예쁘장한 인상을 주는 요소들이 군데군데 남아 묘한 분위기를 피웠다. 정성 들여 빚은 듯 부드러운 콧날과 불그스름하면서 도톰한 입술,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워 보이는 빽빽한 속눈썹이 그것들이었다.
반은 신의 형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자의 화려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죽은 듯이 자는 잠버릇을 가져서, 도통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미간이 구겨졌다.
이제 안 예쁘다더니. 보지 말라더니. 이건 기만이다….
어느새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남자를 들여다보던 반은 천천히 눈살을 찌푸렸다. 한순간 넋을 놓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의 이목구비 중 유달리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손끝으로만 느꼈던 초승달 모양 흉이 남자의 왼쪽 눈 둘레를 장식했다. 광대뼈 정중앙에서부터 눈꼬리와 이어지는 관자놀이까지 둥근 형태로 자리한 흉터는 날카로운 칼끝으로 살과 근육을 통째로 찢어 낸 듯 깊고 진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눈을 잃었을 상처가 망막에 콕 박혔다.
이렇게 흉이 깊을 줄은 미처 몰랐던 반은 안절부절못하다가 조심조심 손을 뻗었다. 새근새근 잠든 남자의 눈가에 손가락 끝이 닿기 직전, 흘러내린 촛농이 검지에 떨어졌다. 화끈한 통증에 소스라치게 놀라 상체를 세웠으나 조급하게 움직인 것이 탈이었을까. 이번에는 촛농이 남자에게로 떨어졌다. 기겁한 반은 황급히 손을 뻗었다.
“큽….”
묘기에 가까운 반사 신경으로 떨어지는 촛농을 손바닥으로 받아 냈으나 잇새를 비집고 나온 신음은 어찌하지 못했다. 살갗에 닿자마자 뜨거운 열을 퍼트리고 딱딱하게 굳은 촛농을 억지로 그러쥔 반은 미처 몰랐다. 남자가 특정 소리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반의 필사적인 노력을 배반하고 얇은 눈꺼풀이 스르륵 말려 올라갔다. 남자의 짙푸른 녹색 눈동자가 나타나는 순간 호흡이 멎었다.
금빛 속눈썹이 두어 번 팔랑거렸다. 이어 길디긴 속눈썹에 감싸인 녹안은 헤매지 않고 반에게 고정됐다. 정확히는 녹아내리는 초를 든 손과 말아 쥔 주먹에.
지체 없이 상체를 일으킨 남자가 반의 손목을 쥐고 주먹을 펴게 했다. 굳은 촛농을 떼어 낸 남자는 빨갛게 달아오른 살점 주위를 엄지로 살짝씩 매만지며 속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너는 그걸 왜 손으로….”
어슴푸레 드러난 손금을 쓸어내리던 남자의 엄지가 우뚝 멈추었다. 신경질적인 혼잣말도 끝을 맺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반의 손바닥과 침구 위에 얼룩진 노르스름한 불빛이 녹안에 고였다. 침대 위를 비추는 촛불로 시선을 옮긴 남자는 크게 뜨인 황금빛 눈을 맞닥뜨린 순간 모든 움직임을 그만두었다.
반은 호흡조차 불가능한 적막 속에서 그를 마주 보았다. 불꽃이 타오르는 녹안은 수많은 사람을 거치며 찾아 헤매던 이상 그 자체였다. 비슷할지언정 동일한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새파란 녹음을 가진 눈동자가 지리멸렬한 시간을 달려 제 앞에 나타났다.
예나 지금이나 저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을 즐기는 소년의 이름이 혀끝에 맺혔다. 반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려 4년 만에, 그리운 소년의 이름으로 남자를 불렀다.
“…디아.”
아름다운 남자가 되어 돌아온 소년은 이름이 불리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손바닥을 붙잡고 있던 손이 휙 떨어져 나가며 밤새 닿아 오던 온기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침내 마주한 얼굴을 그림자 속에 숨긴 디아는 소파에 내던져 둔 나이트가운을 걸치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밀었는지, 양옆으로 활짝 열린 문이 벽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디아!”
반은 다급히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가 초라한 모양새로 무너졌다. 비명도 시원하게 나오지 않았다.
“악…!”
팔뚝만큼이나 후들후들 떨리는 허벅지에 힘을 주고 촛농을 사방팔방 흘리며 데구루루 굴러가는 초를 가까스로 낚아챘다.
“와아….”
때아닌 헛웃음이 터졌다. 척추뼈가 엇나간 듯 허리가 말 못 하게 지끈거렸다. 빼곡하게 들이찼던 정액을 처리해 준 모양인지 엉덩이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려도 한참은 어린 성인 남성의 성욕을 고스란히 받아 낸 몸의 관절 곳곳이 목구멍을 대신해 비명을 내질렀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마냥 쉴 때가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바닥을 기어간 반은 촛대에 초를 끼우고 서둘러 가운을 걸쳤다. 신발을 신을 정신도 없이 방 밖으로 튀어 나가자 공허한 어둠이 냅다 덮쳐들었다. 어디가 끝인지 파악할 수 없는 복도를 휙휙 둘러보다가 승강기로 향했다. 개인실 문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분명 아래로 향했을 것이다.
혹여 엇갈린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섬 안이었다. 제가 이곳에서 못 벗어난다면 디아도 마찬가지였다. 헬기를 타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하에 말이다. 더는 더러운 본능에 휘둘릴 일도 없겠다, 반은 지금 그를 놓치면 후회할 것이라는 예감을 안고 지상 1층으로 내려갔다.
승강기에서 내린 반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을 맨발로 짓밟으며 중앙 홀로 달려갔다. 순전히 감을 믿고. 한때 연결되었었다면 까마득하게 넓은 성에서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이상야릇한 믿음이 녹초가 된 몸에 힘을 실었다.
홀과 복도를 장식한 조각상과 장식품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주방을 지나친 반은 꼭대기 층과 이어진 계단 부근에서 가운 자락 비슷한 것이 언뜻 스쳐 지나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저기였다.
“디아! 잠깐만, 윽….”
차갑게 식은 발로 복도를 디디는 찰나 혹사당한 허벅지에서 통증이 끼쳤지만, 이 정도 고통쯤이야 잠시간은 무시할 수 있었다. 반은 따라오지 말라는 듯 사라지는 기척을 절뚝이는 다리로 집요하게 쫓았다.
앞서 달려가는 발소리가 깊은 어둠이 내린 성내에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디아는 이곳에 온 둘째 날 엠마에게 안내받은 후로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방향으로 향했다. 한밤중의 뜀박질에 숨을 헐떡이며 쫓아간 반은 막다른 길에 위치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하아, 하아….”
벅찬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으슴푸레한 달빛이 사위를 희미하게 밝혔다. 성까지 침범한 해무가 자욱하게 깔린 뒤뜰은 늪지대를 연상시켰다. 조경용 정원수를 다듬어 만든 드넓은 미로는 안개에 반쯤 잠겨, 발을 들인 순간 미아가 될 거라고 경고했다. 원한다면 구경은 하되 들어가지 말라던 엠마의 안내가 문득 떠올랐지만… 경고를 어긴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반은 미로로 내려가는 계단 난간에 촛대를 내려 두었다. 이 정도 달빛이라면 사위 분간은 가능했고, 디아는 미로 안에 있다. 이 역시 근거 따위 없는 감이다.
나선형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 반은 대책 없이 미로 안에 발을 디뎠다. 시작은 직진이었다. 날이 화창할 때는 감탄을 부르던 미로 정원은 안개에 휩싸이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앞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가늠조차 가지 않는 짙은 안개가 살갗에 스며들었다.
입구와 이어진 직로는 둥근 벽이 나타나며 끝났다. 갈림길을 앞두고 뜀박질을 멈춘 반은 고요한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청을 키웠다.
“디아! 얘기 좀 해!”
제법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반은 무턱대고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를 설득하고자 했다.
“디아. 내가, 나는….”
그러나 서두를 어떻게 던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얘기를 꺼내든 변명으로 들릴까 봐 섣불리 혀를 놀리기 어려웠다. 반은 단지 조형물이라기에는 괴상쩍을 만치 복잡한 미로를 뛰다시피 나아갔다. 일단 디아를 만나는 것이 먼저였다.
수분을 머금은 얇은 슬립 가운이 허벅지와 팔목에 들러붙고 정원을 짓밟는 발바닥에 풀물이 들었다. 냉기 어린 바람이 목덜미와 다리를 할퀴고 가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가운 한 장 걸치고 정원을 헤집고 다닐 날씨가 아니었다. 반은 미로 군데군데 설치된 오싹한 조각상들을 발견할 때마다 흠칫 놀라며 남자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디아! 대답 좀 해 봐, 제발….”
돌아가고 싶어도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미로 깊숙이 들어온 반은 머뭇거리다가 초라하게 쉰 목소리를 입술 새로 흘려보냈다.
“미안해. 다 내가 잘못했어….”
원한다면 무릎 꿇고 엎드려 빌겠다고 애원하려던 찰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맥없이 떨구었던 고개를 쳐든 반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보다 높은 정원수는 벽과 마찬가지라 시야를 차단했지만 저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인기척이 확실했다. 하지만 이 정원수 너머로 갈 방법이 요원했다.
싸늘하게 식은 팔뚝을 쓸어내린 반은 정수리보다 높이 자리한 정원수 꼭대기를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렵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는 지금, 꼭,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디아를 만나야 했다.
까짓것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뒤로 물러난 반은 허벅지에 힘을 주고 벽으로 달려들었다. 높이 뛰어 네모나게 손질한 정원수 꼭대기를 짚었으나 여린 나뭇가지와 이파리로 이루어진 벽은 당연하게도 성인 남성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어…!”
손이 푹 빠지며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팔부터 온몸을 할퀴었다. 높이 뛴 만큼 속절없는 추락을 맞이한 반은 고통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이파리 스치는 소리가 사그락사그락 울렸다. 이대로 나뒹굴겠구나, 예상하자마자 순식간에 뻗어 온 팔이 추락하는 몸을 아슬아슬하게 받아 들었다.
남자의 품에 풀썩 안긴 반은 휘둥그레 뜬 눈을 끔벅이다가 천천히 위를 올려다봤다. 온 사방에서 푸르스름한 나뭇잎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투명한 눈동자에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가 한가득 차올랐다. 쉴 새 없이 뛰느라 잔뜩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에 엉킨 나뭇잎이 스르르 떨어지고, 품에 안긴 남자가 당혹스러움이 감도는 눈을 깜박였다.
눈가리개를 둘러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정확히는 그를 마주하지 못하도록 애를 썼던 그 눈이 디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일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아래로 느슨하게 처져 웃을 때 유달리 귀여운 인상을 풍기는 눈매 속, 타오르는 황금빛 눈동자에 끔찍한 모습이 비친 순간 황급히 팔을 물렸다.
“잠깐…!”
휘청거리며 땅을 딛고 선 반은 홱 돌아서 성큼성큼 멀어지는 디아를 쫓았다. 냉큼 앞을 막아서고 팔을 움켜쥐자 디아는 얼굴을 감추려는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머리카락에 가려 높은 콧대와 꾹 사리문 입술만 보였다. 반은 고개를 기울여 그와 시선을 맞추려고 했다.
“나 좀 봐 봐. 어? 얼굴 보고 얘기하자.”
“…돌아가.”
대화하기 싫다는 양 반의 어깨를 밀어 낸 디아가 곁을 스쳐 갔다. 반은 서둘러 그를 뒤쫓았다. 어떻게 찾았는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디아의 보폭은 따라잡기 힘들 만큼 넓었고, 혹사한 관절과 근육은 한 발짝 뗄 때마다 저릿저릿한 통증을 호소했다.
반은 안개 속에 파묻히는 뒷모습을 초조한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결심했다. 이런 치사한 수까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예민한 남자의 발을 묶을 수 있다면야.
“아!”
반은 우렁찬 비명을 내지르며 엎어졌다. 살짝 넘어지는 척만 하려고 했으나 순간 허벅지에서 힘이 쭈욱 빠져 계획과 달리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무릎을 갖다 박은 반은 진심으로 끙끙거리며 졸지에 무게를 지탱한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프기는 해도 못 일어날 만한 통증은 결코 아니었지만, 눈치를 슬쩍슬쩍 살피며 들으라는 듯이 엄살을 부렸다.
“아, 진짜 아프다…. 나 손목, 손목 부러진 것 같아….”
잔디를 가차 없이 짓밟으며 나아가던 걸음이 뚝 멎었다. 수작이 짜증 난다는 듯이, 혹은 이런 수작에 넘어가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쉰 디아는 곧장 걸음을 돌렸다.
주저앉아 아픈 체를 하던 반은 남자의 손목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잽싸게 움켜쥐었다. 잡힐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움찔거리는 손가락 끝을 응시하며 어렵게 입을 뗐다.
“화난 거 아는데, 나 보기 싫은 것도 잘 아는데.”
안개에 젖어 물기를 머금은 잔디가 어서 말하라는 듯이 정강이를 간지럽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반은 디아를 마주한 후로 제가 느껴 온 감정을 어리숙하게 털어놓았다.
“웃으면서 말해 주라…. 무서워서 그래. 나이 먹고 이러는 거 꼴 보기 싫겠지만… 난 이런 게 안 익숙해.”
반은 제 성격의 문제점을 잘 알았다. 평소라면 자신의 평온을 유지하는 데 급급해 상대가 상처받든 말든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리자마자 부리나케 도망갔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처량한 부탁을 꺼내 가며 매달리는 이유는 상대에게 있었다.
4년간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감정을 쥐락펴락했던 남자는 염치 따위 없는 반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대번에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고 선 반의 양 팔뚝을 억세게 움켜쥔 디아가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흘러나온 노기 서린 음성은 섬뜩한 비아냥을 품고 있었다.
“왜 네가 버려진 것처럼 굴어?”
마침내 마주한 낯 위로 흐릿한 달빛이 어리었다. 곤히 잠들어 있을 때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던 낯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분노로 얼룩졌다. 일그러진 눈썹, 쏘아보는 눈빛, 힘을 준 턱까지.
엉망진창으로 이지러진 표정은 그의 어릴 적을 연상시키며 육중한 죄책감을 끼얹었다. 반은 말문을 막는 것이 아름다운 얼굴인지, 남자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 탓인지 헷갈렸다.
“널 버린 게 아니라….”
“안 버렸다고. 그럼 어디 갔었는데? 내가 눈떴을 때, 넌 아무 데도 없었어. 기다려도 안 왔잖아.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기는 하고?”
맥없이 어물거리는 반의 말허리를 매섭게 끊은 디아가 한 마디, 한 마디에 원망을 담아 쏘아붙였다. 반박할 구석을 찾지 못한 반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시선을 피하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디아는 제 불안정한 감정을 고스란히 터트렸다.
“다 싫어. 싫어서 죽을 것 같아. 날 못 알아보는 것도 싫었고, 네가 나한테 넘어온 것도 싫어. 원래의 나는? 벌써 잊었어? 아무 생각이 없어? 우리 사랑하고 있었잖아. 내가 그립지도 않았나 봐?”
지난 4년간, 그리고 다시 함께한 기간 동안 새로이 만들어진 원망과 불안이 도톰한 입술 새에서 날카롭게 벼린 칼이 되어 쏘아졌다. 생각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남자의 기세에 움츠러든 반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나도…. 나도 너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럴 리가 없으니까. 이상하잖아.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너랑 잔 것도….”
“이제 와서.”
말을 마저 잇기도 전에 헛웃음을 터트린 디아가 빈정거렸다.
“지금 와서 이러면 내가 믿을 줄 알고.”
짙은 불신이 감도는 음성이 고막에 달라붙어 관계 개선에 대한 희망을 앗아 갔다. 갑갑한 심정과는 반대로 반은 디아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의 입장에서 제 이야기는 못 믿을 것투성이였다. 한순간이나마 소년을 버린 것도, 예민한 도련님에게 넘어간 것도 맞다. 저를 몇 달 만에 고용주에게 홀라당 넘어가 섹스까지 속전속결로 처리한 무뢰한으로 봐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년과 도련님이 동일인임에도 디아가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못 믿겠지만 난 계속, 계속 네 생각 했어. 어떻게 사는지, 잘은 지내는지. 그런데 알 방법도 없고…!”
“내가 아직도 네 말이면 다 믿는 어린애로 보여?”
“…디아.”
“나오미, 폴, 리암… 취향이 한결같으시던데. 허구한 날 애인 갈아 치우면서 살아 놓고 날 생각했다고?”
비꼬는 솜씨가 부쩍 는 디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반의 입은 점차 벌어졌다. 대략 1년 전쯤 데이트한 수두룩한 상대 중 그나마 이름을 기억하는 셋이었다. 얼이 빠져 입만 벙긋거리다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마지막은 맥스였던가. 스물하나, 대학생.”
“그 새끼가 스물한 살이었어?”
셋인 줄 알았는데….
기가 막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얘기를 중얼거리고 나서야 디아의 매서운 눈초리를 눈치챈 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뒷조사하지 않은 이상 모를 면면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디아가 낯설었지만 억울한 점도 분명 존재했다. 죄인의 위치에서 억울해하면 안 될 일이지만, 염치없는 반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게네랑 안 잤어. 진짜로.”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한 후 곧장 후회했다.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이게 무슨 경우 없는 변명인가 싶었다. 자려고 노력한 것은 맞으나 서지 않았다는 얘기를 꺼내 봤자 화만 돋울 것이다. 궁지에 몰린 나머지 한심한 소리를 지껄인 제 입을 마구 후려치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렸을 때부터 웃지 않을 때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싸늘한 인상의 미인이 비웃음에 가까운 한숨을 흘렸다. 그가 일으킨 작은 바람이 폭풍이라도 되는 양 어깨를 굳힌 반의 귓가로 뾰족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나 팔아넘긴 돈으로 헤프게 사니까 좋았어?”
“…뭐?”
불현듯 눈살을 찌푸린 반이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한 디아는 상대를 상처 주고 싶어 안달 났으면서도 막상 그가 상처를 입을까 봐 겁을 집어먹은 모순적인 눈빛으로 반을 바라보았다.
“한 번은 찾을 줄 알았어. 너도 결국엔 날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뭐야? 얌전히 기다렸더니 넌 다른 인간들이랑 뒹굴고 있었잖아. 아니야?”
반은 못 본 새 심각하게 삐뚤어진 디아의 언행보다 다른 것에 꽂혔다. 정면으로 마주 보던 소년을 이제는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며 더듬더듬 물었다.
“잠깐만, 너…. 너 내가 너 찾으러 갔던 거 몰라?”
비스듬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얼음장 같은 녹안은 그의 속내를 훤히 드러냈다. 순간적으로 한기가 등허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반은 성급해졌다. 디아의 팔꿈치를 답삭 붙들고 고개를 홱홱 내저었다.
“아냐! 거짓말 아니고, 나 진짜…. 이거, 이것도…!”
총상을 입은 허벅지를 보여 주고자 했으나 팔뚝이 단단히 붙들린 채로는 여의찮았다. 이것 좀 놓아 보라고 어깨를 뒤로 뺐으나 그 행위 자체를 거부로 받아들인 듯 손아귀 힘이 더욱 강해졌다.
디아는 버둥거리는 반을 손쉽게 제압했다. 힘을 주어 끌어당긴 디아와 가까이 붙자 어릴 때부터 유독 뜨겁던 그의 체온이 식은 살결을 감쌌다. 반은 신뢰라고는 한 톨도 보이지 않는 녹안을 마주한 순간 무언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것을 직감했다. 핏발이 섰음에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거짓말하지 마. 나한테는 그러지 좀 마.”
반은 거짓을 내뱉은 적 없음에도 그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디아는 욕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하지 마.
항변 한마디에 넘어가려는 자신을 붙드는 주문 같은 중얼거림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섬뜩하게 들렸다.
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풀어내며 좀체 안정을 찾지 못하는 디아를 참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년은 가끔 이상한 면모를 보였지만 예전에는 이토록 불안정하게 군 적이 없었다.
“나한테 이러지 마….”
풀물이 든 발을 휘감은 안개가 족쇄와 같이 발목을 옭아맸을 때, 어둠이 내려앉은 녹안이 물기를 머금었다.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음성은 단조로웠으나 오랜 시간을 걸쳐 축적된 감정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았다.
“네가 나한테 한 것처럼 여기저기 아양 떨었을 거 생각하면 짜증 나서 죽고 싶어. 그 인간들한테도 예쁘다고 하고 좋아한다고 했을까 봐, 너랑 그 짓 한 놈들 다 죽이고 싶어. 너도 죽이고, 다 죽고 싶어.”
주체하지 못하고 모진 말을 쏟아 내는 남자의 빽빽한 속눈썹이 서서히 젖어 들었다. 경악한 반이 입을 벙긋 벌리자마자 두서없이 이어지던 비난은 이내 서러운 원망으로 뒤바뀌었다.
“차라리 모르는 척하지 그랬어. 아무것도 보지 말지 그랬어. 그러면 나도 이럴 필요 없었는데.”
“…디아.”
정원보다 더 푸른 빛을 띠는 눈동자에 한가득 차오른 눈물이 뺨으로 뚝 떨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소년의 눈물에 하염없이 약한 반은 허둥지둥하다가 손을 뻗었다.
통통하게 살이 올라 만지작거리는 재미가 있던 뺨 대신 갸름한 골격을 드러낸 뺨이 손끝에 닿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엄지로 눈물을 훔쳤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터진 눈물은 손가락을 흠뻑 적시고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은 선명한 흉터를 적시는 물기를 황급히 손등으로 닦아 냈다.
“왜 울고 그러냐…. 울지 마, 어? 뚝.”
물기를 머금어 끔찍하게 아름다워진 얼굴은 도리어 오싹하게 다가왔다. 정작 울면서 빌어야 할 사람인 반은 남자의 눈물을 멈출 수만 있다면 당장 손목이 부러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황당한 생각까지 할 정도로 안절부절못했다.
“아, 진짜…. 울지 좀 마….”
죄책감에 질식하기 직전, 반은 흐느낌 없이 눈물만 후드득 떨어뜨리는 디아를 끌어안았다. 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성장한 소년의 너른 등을 껴안자 도리어 그에게 안긴 형상이 됐다.
저항 없이 안긴 디아는 반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고 얇은 가운을 눈물로 적셨다. 팔뚝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진 양팔이 반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일그러진 입술이 벌어지며 다짐에 가까운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얼마 안 남았어. 미셸 다음은 너야. 거의 다 끝나 가…. 너희만 죽이면 끝이야.”
“윽….”
반은 숨을 집어삼켰다.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며 상체가 종이 한 장 끼울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됐다. 허리를 부러뜨릴 심산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힘을 풀어야 하건만, 디아는 더더욱 강하게 허리를 조이며 소름 돋는 속삭임을 이어 갔다.
“진짜 죽여 버릴 거야.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게, 그렇게 만들 거야.”
간신히 숨을 토해 낸 반은 저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디아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죽이겠다는 건지, 죽을 때까지 데리고 살겠다는 건지,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쪽은 저뿐만이 아닌 듯했다.
“알았어…. 그래도 되니까 울지 마, 어?”
비뚤어진 소년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기에는 가진 바 역량이 너무나도 모자란 반은 그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협박의 탈을 쓴 투정을 거듭 쏟아 내던 디아가 반의 어깨에 젖은 눈가를 비볐다. 뾰족하게 날 선 가시가 제풀에 지쳐 누그러진 음성은 고요하고 느릿했다.
“…왜 아직도 나는 안 되는데?”
지친 것처럼 들리는 물음에, 반은 열렬히 부정하고 싶었으나 또다시 거짓으로 치부될까 두려워 본심을 꺼내지 못했다. 디아의 상처가 무뎌지길 바라며 등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울지 마, 제발.”
“네 감정이 안 읽혀. 네가 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좋아하지…. 계속 좋아했지. 내가 왜 널 싫어해.”
“못 믿겠어, 하나도.”
물기가 남은 음성으로 연신 반을 거부하면서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절대 풀지 않는 남자의 행동은 몸만 자랐지, 정신은 헤어진 날로부터 한 발짝도 성장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기대와 실망, 사랑과 원망을 반복하며 속에서부터 곪아 간 디아는 매일 밤 잠들며 꿈에서라도 만나길 바랐던 반의 품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한테는 몇 개월이었겠지. 나한테는 전부였어.”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저로 인한 것이길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반의 위선에 치를 떨면서, 그럼에도 수많은 날을 인내하고 기다려 온 저 자신에게 혐오를 느끼면서 디아는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속내를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반….”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