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5권) (14/19)

<5부>

01.

디아는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반이 나타나길 바랐다. 밤낮을 구분할 수 없고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새하얀 방에서 무너지는 믿음을 가까스로 붙든 채 오직 한 사람만을 기다렸다. 살점이 짓무르고 폐가 타들어 가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감각이 무뎌졌을 무렵, 디아의 내면에 일어난 파란은 가시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반의 목을 조르는 꿈을 꿨다. 한껏 저항하는 반을 겁탈하는 꿈을 꿨다. 작은 방에 반을 가두고 관찰하는 꿈을 꿨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고 배시시 웃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고, 마침내 충격으로 얼룩지는 광경을 감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가지 말라고, 내게는 너뿐이라고 말할 때까지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가장 밑바닥에 고인 욕망이 투영된 꿈을 꾸고 난 다음 날이면 반에게 하염없이 죄스러웠으나, 나중에는 눈을 감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반을 향한 분노가 치솟았다.

기대가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꺼질 때면 그에 비례하는 원망이 빈 곳을 메웠다. 반을 죽도록 괴롭히고 싶은 욕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자 하는 억지스러운 감정이 거세게 부딪쳐 속을 시시각각 시커멓게 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디아는 불현듯 깨달았다. 누군가 언질을 준 것도, 발뺌 못 할 증거를 찾은 것도 아니었다. 외면해 왔던 진실을 마주한 것뿐이었다.

반은 저를 버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태껏 그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군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을 내뱉은 자는 반 클라크였다.

등 돌리고 있던 진실을 마주하자마자 생전 처음 느끼는 허무가 머릿속을 휩쓸고 갔다. 모든 의지를 앗아 가고 증오의 불씨만을 살려 둔 허무는 신체 곳곳에 고여 이상 증세를 만들어 냈다.

“컥…! 커헉!”

“반은 어디 있어? 나 반 봐야 돼…. 반은?”

구속복을 풀기 위해 들어온 군인의 목을 한 손으로 조르면서 마취총을 겨누는 연구원을 붙잡아 내동댕이쳤다. 근육이 다부지게 들어찬 다리로 버둥거리는 군인을 짓누르는 일도, 무전을 받고 뒤이어 달려든 또 다른 군인을 팔 하나로 내치는 일도… 조금도 버겁지 않았다.

안전핀을 제거한 것처럼 근육이 팽창하고 오감이 날뛰었다. 손가락으로 개미를 짓이겨 죽이는 것처럼 손쉽게 목숨을 거둘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때, 반의 조각을 가진 사람이 등장했다.

노쇠한 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손짓도, 명령도. 그러나 반과 닮은 눈매를 발견한 순간 손아귀에서 절로 힘이 빠졌다. 반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꿈의 잔상에 사로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 뒤통수를 칠 눈매라는 것을 알면서도 꿈에서처럼 무자비한 선택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재워. 한동안 못 일어나게.”

날카로운 촉이 목덜미에 박혔다. 곧이어 시야가 흐려지며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풀리다 만 구속복이 몸을 도로 속박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래로 떨어지는 눈꺼풀을 간신히 붙든 디아는 방 안이 붉게 물드는 것을 목격했다. 제 눈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새하얗기만 했던 방이 껌벅껌벅 붉게 얼룩졌다.

흐릿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연구원들은 당황한 낯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먹먹한 귀에 희미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반과 함께 호수 밑바닥에 잠수했을 때처럼 세상의 소리가 멀어졌다. 눈꺼풀이 완전히 떨어지는 틈을 타 또 한 번 바랐다. 눈을 떴을 때 그가 있었으면. 못 이기는 척 안길 수 있었으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저를 맞이한 것은 반도,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천장도 아니었다. 동족이었다. 반의 보호 아래 있을 무렵 웨인을 만난 순간 알아차린 것과 같이 그들을 알아보는 것은 본능과도 같았다. 신기하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여러 줄기로 나뉘어 흘러간 물줄기가 결국 바다에서 만나듯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이었다.

“동족을 조져 놓고 뻔뻔하기도 하지.”

다만 끈끈한 유대감으로 과오까지 덮어 주는 관계는 아니었다. 공석이 많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한 체마는 쉴 틈 없이 디아에게 빈정거렸다. 불편한 정장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디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응시했다.

연구원들이 03이라고 부르던 행방불명 개체는 저를 향한 적대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의 곁으로는 눈치를 살피며 조용한 미소를 띤 06, 식스가 자리했다. 연구소에서 눈을 뜨고 연구소에서 살아온 그 역시 정장이 낯선지 꽉 조여 맨 넥타이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리고… 웨인. 배를 갈라 놓았음에도 꾸역꾸역 살아남은 놈에게 시선을 보내자 눈이 마주친 웨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거지.”

반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놈이 말은 많았다.

“너는 늙어서 그 모양인 거야?”

“…그 모양?”

건방지기로는 제 숙주를 능가하는 디아를 관찰한 경험이 있는 웨인은 여전한 말버릇에 코웃음 치고 말았지만, 체마는 눈썹을 휘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무관심한 디아와 심드렁한 웨인, 팔짱을 끼고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체마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식스가 상황을 중재하고 나섰다.

“저,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 나는 식스라고….”

“식스 좋아하고 앉아 있네.”

연구소에서 불리던 이름을 꺼낸 식스의 말허리를 썩둑 잘라 낸 체마가 온 짜증을 끌어모아 비아냥거렸다. 천성이 순한지, 식스는 별 대꾸도 못 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한배에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넷이었지만 식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친근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디아는 호박색 보석이 박힌 커프 링크스를 만지작거렸다. 보고 싶었던 눈을 빼닮은 색이었다. …아니다. 이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증오와 그리움의 갈림길에서 허덕이던 디아는 테이블에 고정된 시선을 살짝 들었다. 인테리어에 군더더기가 없어 반과 함께 살았던 가정집과 전혀 다른 인상을 풍기는 방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역시 동족의 기운이었다. 이내 굳게 닫힌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며 새하얀 백발이 눈에 들어왔다.

느긋하면서도 무게가 느껴지는 걸음을 따라 두 명의 직속 고용인이 창이 없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웨인과 체마가 의자에 늘어뜨린 몸을 일으켰다. 눈치를 살피던 식스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으나 디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화려한 노인을 응시할 뿐이었다. 체마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굳이 무례를 꼬집는 자는 없었다.

상석을 차지한 르네는 고갯짓 하나에도 고상함이 뚝뚝 묻어나는 움직임으로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넷이 끝?”

“아쉽게도.”

웨인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답했다. 유명을 달리한 개체를 향한 애도의 시간은 없었다. 고용인이 넘겨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르네가 참담한 실정을 간단명료하게 축약했다.

“때를 맞춘다는 게 이렇게 될 줄이야.”

재킷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 체마가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세월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생긴 주름이 무늬처럼 새겨진 목으로 연기를 담뿍 들이마신 르네는 길디긴 연기를 뿜어냈다.

“그래…. 한번 정리를 해야겠지.”

르네의 폐를 한 바퀴 돌고 나온 담배 연기는 발파된 화약에서 피어오르는 매서운 탄내를 닮아 있었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뚜렷한 형태로 존재했다. 길이길이 남을 획을 긋는 대신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그물로 덫을 치면서.

그들은 원인 불명의 이주 이후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을 따랐다. 비옥한 땅과 패권을 얻기 위해 침략을 스스럼없이 저지르던 시절, 유라시아 대륙에서 눈을 뜬 1대는 그들이 가진 이능을 마음껏 펼쳤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음에도 숙주의 대뇌 피질 속으로 파고들어 뇌를 주무르고 숙주가 가진 지위와 권력을 강탈하는 일은 손 안 대고 코 푸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뭉쳐 있던 그들을 세상 곳곳으로 퍼트린 것은 격동하는 역사였다. 그들에게 세계의 판도를 뒤바꾸는 전쟁은 생존 수단을 늘릴 기회였다. 18세기의 문을 연 왕위 계승 전쟁에서 그들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누군가는 공을 세우고, 누군가는 해로를 틀어쥐고, 누군가는 신대륙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비상한 이능은 그들의 본능이 가리키는 대로 나아가는 길을 탄탄하게 보조했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부가 쌓였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력이 생겼다. 자손의 토대가 될 인간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개체 간, 혹은 개체와 인간 사이에서 교접을 통해 자손을 늘렸다. 널리 퍼뜨린 씨는 머지않아 장성하여 그들의 번성을 돕는 수족이 됐다. 모자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일곱의 개체는 스스로를 시조로 명명하고 머리를 맞대어 후대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그들은 북극해 부근에 눈에 띄지 않는 벙커를 만들어 저들과 함께 떨어진 동족을 숨겼다. 때가 되었을 때 자신들과 동일한 수의 2대를 깨운 그들은 쌓아 올린 작위를 물려주고 노화가 더딘 육체를 그림자 속에 숨겼다.

수년에 걸쳐 장성한 2대는 불필요한 숙주를 제거함과 동시에 시대의 급류를 탔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에서 막대한 군수 물자와 의료 기기, 식량을 팔아 치우며 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린 그들은 각자의 땅에서 권력을 확장하며 마지막 때를 기다렸다. 그들의 피가 섞인 자손이 늘어가고 기반은 더더욱 단단해졌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문제가 닥치기 전까지는.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우리도 슬슬 쉴 때가 됐거든.”

한 세기에 달하는 세월을 살아온 르네는 3대의 마지막 개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디아는 호박색 보석을 검지로 문질렀다. 탁란의 습성을 가진 저들의 역사에 대한 감상은 단조로웠다.

뻐꾸기 같네.

***

영면에 든 개체와 운신이 어려운 개체를 대신해 새로운 세대의 길잡이를 자처한 르네는 그들에게 새 이름과 성, 신분을 부여했다. 식스는 새 이름과 성을 고분고분 부여받았으나 디아는 르네의 압박에도 현재의 이름을 고집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르네는 반항적이기 짝이 없는 어린 개체에게 성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잠시 보류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 디아를 내보내고 웨인을 불러들였다.

디아는 턱을 괴고 창 너머 화려한 정원을 내다보며 배신자를 찾아갈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반을 찾아갈 시기는 르네의 강제에 의해 늦춰졌다. 며칠 후, 디아는 체마가 적대감을 드러내면서도 선을 넘지 않고, 웨인이 보복하려고 들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됐다. 디아는 그들이 세운 가장 강력한 규율을 어겼다.

동족의 번식과 번영을 위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동족의 목숨을 해하지 말 것.

동족은 세 가지 계급으로 나뉘었다. 인간을 숙주로 삼아 새로운 땅에서 눈을 뜬 시조, 순수한 피를 가진 개체 간 교접을 통해 태어난 직계 비속, 마지막으로 인간의 피가 섞인 동족. 동족의 범위는 세 가지 계급을 포괄했으나 위계질서는 확고했다. 인간의 피가 짙을수록 동족 의식이 옅어지므로, 그들은 강력한 규율이 지칭하는 동족을 시조와 직계 비속까지로 구분 지었다. 안타깝게도 웨인은 3대의 첫 번째 개체였다.

웨인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끼친 디아는 신분을 얻기 전 근신 처분을 받았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교육과 적응 과정을 거친 후 3년간 근신할 것.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는 그들에게 과한 처사는 아니었으나 디아에게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징계 내용이 정해진 날,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디아를 붙든 것은 웨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배신자의 이름이었다.

‘반 클라크 말이야. 어떻게 지내는지 안 궁금해?’

디아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낯에 금이 갔다. 웨인은 제 손으로 처리한 남자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하며 쓸모없는 숙주에게 푹 빠진 동족을 회유했다.

‘널 팔아넘긴 돈으로 어떻게 사는지, 나라면 궁금할 것 같은데.’

‘…거짓말하지 마.’

강탈한 은신처에서 나누었던 대화의 반복이었으나, 디아의 조그마한 혼잣말에는 그날과 같은 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숙주를 향한 도를 넘은 집착은 한결같았다. 웨인은 디아가 줄곧 무시해 왔던 진실을 들이밀어 반을 믿기 위해 갖은 이유와 서사를 만들어 부여했던 허상을 깨뜨렸다. 이미 금이 쩍쩍 간 허상은 가벼운 발길질 한 방에도 사정없이 깨져 나갔다.

‘지금 거짓말에 속은 놈이 누구지? 배 가른 것도 이 정도로 넘어가 주는데 자꾸 의심하니까 섭섭하네.’

르네의 관망하에 근신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방도를 궁리하던 웨인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반은 제거 대상이야. 얌전히 지내면 네 손으로 처리하게 해 줄 수도 있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질적인 단어가 디아를 완전히 돌려세웠다. 유달리 고운 외양을 타고 난 개체는 웨인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아득한 음성을 흘렸다.

‘반을… 죽인다고?’

‘숙주 제거는 원칙이야. 시기의 문제지.’

웨인은 무너지는 연구소의 잔해 속에 버려두고 온 반을 회상하며 이따금 쓸모 있는 이름을 이용했다. 허벅지를 부여잡고 비명을 토해 내는 남자를 떠올리자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던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웨인의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파였다.

이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미동하지 않던 디아가 불그스름한 입술을 달싹였다. 새빨간 혀가 문장을 만들어 냈으나 입 속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

근신 장소는 그린란드 인근에 위치한 작은 섬이었다.

대대로 규율을 어긴 개체의 손발을 묶는 용도로 사용된 섬은 혹독한 추위와 접근이 어려운 위치로 무장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쇄빙선이 아니고서야 험난한 바닷길을 뚫을 수 없었으며, 직통 전화를 사용할 권리는 총책임자인 사용인이 가지고 갔다.

외부 정보에 접근 불가능한 것은 물론, 사용인들과의 대화도 금지됐다. 석재로 지어진 을씨년스러운 저택은 시조가 머무는 공간과 사용인이 머무는 공간을 철저히 분리해, 죄를 지은 자를 완전히 고립시켰다.

디아는 숙주 따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동족을 해한 벌로 얼어붙은 땅에 고립됐다. 방마다 벽난로를 갖추고 짐승의 가죽과 털로 단장한 저택은 감옥보다 별장에 가까웠다. 그러나 얼음 결정이 섞인 칼바람과 음산한 적요가 징계에 걸맞은 환경을 만들었다.

선대가 두고 간, 50년도 더 된 책 더미만이 무료한 시간의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고, 어떤 정보에도 접근할 수 없는 디아는 어릴 적처럼 책에 파묻혀 지내거나 눈보라가 휘날리는 풍경을 응시하며 시간을 죽였다.

섬에 도착한 지 이 주쯤 됐을 무렵이었다. 디아는 불현듯 어둠을 밝히는 빛이 심히 거슬렸다. 유령 같은 사용인이 교체한 전구에서 환한 빛이 퍼졌다. 망막을 찌르는 빛을 노려보던 디아는 성큼성큼 걸어가 크리스털 스탠드를 내던졌다.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어둠이 닥쳤다.

“하아, 하….”

빛이 사라지자마자 숨통이 트였다. 민감한 시력은 어둠 속에서도 사물 분간을 수월케 했다. 밝으면 밝을수록 피로도가 높아져서 디아는 시야에 어른거리는 새하얀 방을 잊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넓은 방의 아주 협소한 공간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 이상은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강제적으로 재우는 가스도, 더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실험도 사라졌다. 그러나 디아는 새하얀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 것처럼 지칠 때까지 방을 맴돌았다. 이윽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디아는 지나치게 넓은 잠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언젠가부터 반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 없는 호수에 빠진 듯이 그의 존재, 그의 감정이 수면 저 너머로 사라졌다. 닿을 것 같다가도 아득하게 멀어져 영영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현상인 줄 알았다. 하얀 가운을 걸친 사람들이 제게 무슨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숙주에게서 독립할 때가 가까워졌다는 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디아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손을 움켜쥐었다가 풀었다. 차라리 자라지 않았다면, 영원히 어렸다면 그가 저를 버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리운 시절을 회상하며 몽롱한 빛을 띤 눈은 머지않아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니 본때를 보여 줄 것이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해 놓고 제게 독이 든 차를 내민 위선적인 반에게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복수는 제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자에게 넘기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반의 새카만 머리카락 한 올도 타인에게 넘겨줄 수 없다.

근신이 끝나는 날 반의 행복한 인생을 망가뜨리겠다는 다짐을 하며 눈을 감은 디아는 움찔거리다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청각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이내 아주 먼 곳에서 그리운 음성이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디아!

칼바람이 창을 뒤흔들었다. 그가 저를 부르고 있었다. 차가운 숨을 집어삼킨 디아는 황급히 방을 벗어나, 부르짖는 목소리를 쫓아 쥐 죽은 듯 고요한 저택을 달려 나갔다.

거슬리는 불빛이 어룽거리는 복도에도, 어둠이 내려앉은 계단에도, 구색만 갖춘 수많은 방에도 그는 없었다. 디아는 저택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살을 에는 눈보라가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몰아쳤다. 추위와 더위에 무딘 육체는 자신을 부르는 반을 위한 것이었다. 언제가 됐든, 어디에 있든 그를 찾기 위함이었다.

침대에 엎어져 쏟아부은 저주를 새카맣게 잊은 디아는 발목까지 쌓인 눈을 짓밟고 황폐한 정원을 가로질렀다. 실내화가 벗겨지고 두꺼운 로브가 휘날렸다. 괴로움을 토하는 반의 음성이 더뎌지는 걸음을 재촉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뚫고 달려 나간 디아는 반의 심중만큼이나 새카만 바다를 맞닥뜨렸다. 공기를 찢는 바람 소리가 고막을 가득 채우고 반의 부름을 지워 냈다. 디아는 해빙이 떠다니는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부르튼 입술을 달싹였다.

“…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부르짖는 음성도 자취를 감췄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으나 광활한 자연에 가로막힌 디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정말로 반이 저를 간절히 부른 것인지, 그리움에 미친 머리가 기어이 환청을 만들어 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디아는 해가 지면 한 곳도 빠짐없이 소등할 것을 명령했다. 대화는 불가하지만 명령은 가능했기에, 유령 같은 사용인들은 독선적인 시조의 명령을 군말 없이 따라 어둠이 내리는 즉시 저택의 모든 조명을 껐다. 어둠과 눈보라에 파묻힌 섬은 점차 음울한 빛을 띠어 갔다.

달력을 넘기며 해방까지 남은 날짜를 세는 작업을 관둔 디아는 생각마저 관뒀다. 반을 향한 증오도, 사랑도, 여타 쓸모없는 상념까지도 내려놓자 공백에 가까운 감정이 찾아왔다. 행복이나 불행이 사라진 나날은 들쑥날쑥한 감정에 휘둘리던 때보다 한결 편안했다.

욕조 깊이 잠긴 디아는 희부연 김을 피워 올리는 목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어넣고 숨을 참았다. 타고나길 예민한 성정이 폐쇄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아 근육과 살갗은 물론이고 알맹이까지 바짝 곤두선 느낌이었다.

평정을 유지하는 척하지만 누가 손가락 하나만 건드려도 폭발할 폭탄을 품은 디아는 숨 한 번 헐떡이지 않고 스르륵 일어나 욕조 밖으로 나섰다. 젖은 몸을 닦고 가운을 여미는 차에 문득 수증기가 낀 거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허리끈에서 손을 떨어뜨린 디아는 회색으로 물든 거울에 다가갔다. 차가운 표면에 손바닥을 얹고 길게 닦아 내자 앳된 티가 희미해진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에서부터 대각선으로 손바닥을 움직인 디아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거울에 비친 제 피부를 바라봤다.

“어….”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 새로 푹 잠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디아는 다급히 거울을 닦았다. 손바닥이 중구난방으로 길을 낼수록 몸의 면면이 하나둘 드러났다.

사라질 거라고 여겼고, 종국에는 새겨지는 줄도 몰랐던 흉측한 흉이 피부를 뒤덮었다. 사입구가 너덜너덜한 총상은 불규칙한 성상 흉을 남겼고, 약품이 닿은 허리 부근은 검푸르게 변색하였으며, 주삿바늘 자국이 수놓아진 팔목은, 화상 자국인 듯한 붉은 흉이 점점이 남은 등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취미가 없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결함이 확장된 녹안에 빼곡히 담겼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식은 물방울은 비상한 머릿속에 새겨진 기억에 파문을 일으켰다.

‘예쁜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냐? 다 좋아하지.’

‘예뻐서 좋아. 예뻐서.’

‘이쁜아!’

심드렁한 대꾸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연달아 기억 속에서 튀어나왔다. 누가 봐도 끔찍한 외양과 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흥미로워하던 반의 눈빛이 거울 속에서 엇갈렸다. 저를 끔찍한 것 보듯 하는 반의 표정이 제멋대로 그려지며 순간적으로 눈이 돌았다.

힘껏 내던진 유리병이 거울을 깨뜨렸다. 쩍 갈라진 거울 조각이 떨어지며 흉측한 모습이 조각조각에 비쳤다. 조각을 짓밟은 디아는 제 모습을 비추는 유리며 거울을 모조리 던지고 깨뜨렸다. 달빛마저 싫어 두꺼운 커튼을 치고 손에 잡히는, 발에 차이는 모든 것을 부수고 던졌다.

“후으…. 윽….”

엉망이 된 방 한가운데, 부서지지 않은 소파에 주저앉은 디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절망에 잠식된 숨을 내뱉었다.

반이 아름다운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익히 알고 있다. 반이 제 몸을 어떤 눈으로 봤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 이런 몸뚱이를 한, 이런 몰골이 된 저를 그가 계속 예뻐해 줄까? 그럴 리가. 영원하지 않은 것은 그와 함께한 시간만이 아니었다. 이 얼마나 허상 같은 자만심이었는지.

디아는 이를 갈았다. 그 엉덩이 가벼운 인간이 칠렐레팔렐레 나돌아다니는 꼴이 눈앞을 물들였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을 툭툭 내뱉으면서 온 사람들을 꼬드긴대도 이런 몰골을 한 제게는 애정 한 톨 베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그의 시선조차 잡아 둘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저보다 번드르르한 놈과 이를테면 웨인 같은 놈과 소파든 침대든 바닥이든 가리지 않고 뒹구는 비참한 상상이 머리를 지배했다.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디아는 황급히 목걸이를 풀었다. 이제 들여다보지 않기로 다짐해 놓고 몸에서 떨어뜨리지 못한 로켓을 열자 지금의 자신보다 어린 반이 나타났다. 근심 따위 없이 해맑게 웃는 남자가 웨인과 뒤엉켜 신음하던 과거의 편린이 실낱같은 이성을 질투로 활활 태웠다.

그 자리는 제 것이었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언제나.

디아는 그와 뒤섞였던 단 하루를 상기했다. 상상보다 더욱 좁고 뜨거웠던 속, 손아귀에 잡히고 직접적으로 부딪치던 탄탄한 살결, 양육자에게 마음껏 퍼부은 못된 감정들이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의 허벅지 안쪽을 엉망으로 물들인 입술 자국까지 생각이 뻗어 나가며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먹이를 노리듯 부풀어 오른 허벅지에 닿는 가운 자락마저 자극으로 느껴졌을 때, 디아는 반이 가르쳐 준 대로 다리 사이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를 그러쥐자 회상만으로도 귀두에 맺힌 액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디아는 자그마한 로켓 속 남자를 노려보며 끈적해진 손바닥으로 연거푸 기둥을 쓸어 올렸다. 반이 굳은살 박인 손으로 만져 주었을 때는 스치기만 해도 사정감이 몰려들었는데, 제 손으로는 아무리 세게 움켜쥐고 흔들어도 좀처럼 사정할 수 없었다.

“흐읏…. 큭….”

눈을 가늘게 휘고 웃던 반이 제 몰골을 맞닥뜨리자마자 표정을 굳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디아는 기겁하는 반을 흉측한 몸으로 덮어 누르고 억지로 취하는 상상에 매몰됐다.

욕설을 내뱉는 입을 틀어막고 허벅지를 가르고 들어가 뻑뻑한 구멍에 성기를 밀어 넣으면 반은 사지를 버둥대며 저항할 것이다. 둥근 눈썹이 일그러지고 느슨한 눈매에 눈물이 맺힐 것이다. 덜컥 이는 죄책감은 제 몸뚱이에 닿기도 싫어 하는 반을 보고는 증오에 파묻힐 것이다.

“바안, 반….”

안광이 혼탁해진 녹안이 뺨에 페인트를 묻히고 웃는 반을 발라낼 듯 응시했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다. 제 몸을 보고 기겁하든, 뻔뻔하게 비난을 퍼붓든. 반은 끝끝내 제 손에 죽을 테니까.

숙주의 몸을 꿰뚫고 싶어 발기한 성기를 마구잡이로 쓸어 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련이 사라질 때까지 구멍을 탐하다가 죽여 버리겠다는 다짐과 제 어깨를 끌어안은 반이 다정하게 키스를 퍼부어 주는 상상이 거세게 부딪쳤다.

“흣, 반…. 하아….”

애정과 증오가 뒤엉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빠르게 놀리는 팔목에 핏줄이 섰다.

죽여 버릴 것이다. 이곳에서 벗어나는 날, 저를 버리고 떵떵거리며 사는 반을 찾아갈 것이다. 제게 독이 든 차를 건넨 대가로 받은 집과 차, 사랑하는 친구와 연인을 불태울 것이다. 자신이 겪은 실의를 반도 똑같이 겪게 해 줄 것이다. 충격으로 얼룩진 낯짝을 구경하며 소리 높여 웃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얼굴에 총구를 들이밀고 목숨을 가지고 놀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그 후에는….

“큭…!”

턱이 뻐근할 정도로 이를 악문 디아는 언제나, 언제나 웃고 있는 반의 얼굴에 사정했다. 희뿌연 정액이 로켓을 담뿍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해소되지 않는 허무가 밀려들어 속눈썹을 적셨다.

…그런 다음에는, 한순간이나마 널 사랑했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

발포음을 내며 날아간 총알이 과녁을 꿰뚫었다. 총구를 좌우로 흔든 디아는 연이어 방아쇠를 당겼다. 첫 사격 때만 해도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가던 총알이 연달아 정중앙을 뚫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다를 가린 저택 뒤뜰은 사격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이를 알아챈 선대가 지하에 과녁과 총기류를 무더기로 두고 간 덕분에 디아에게는 시간을 죽일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반에게서 전이된 경험은 써 본 적 없는 총기를 손에 익은 물건으로 만들어 주었다.

오래도록 쓰지 않은 총을 하나씩 손질하고, 탄약을 집어넣고, 발포하고. 내일이 오면 또다시 손질하고, 넣고, 쏘고. 읽었던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다가 욕조에 깊게 잠겼다가 가구를 부수고 로켓 속 반을 더럽혔다가. 시간이 흘러갈수록 손가락 뼈마디는 굵어졌고, 앙금 같은 증오는 무럭무럭 자랐다.

디아는 탄창에 든 마지막 한 발을 쏘고 쭉 뻗은 팔을 내렸다. 아래로 가볍게 묶은 황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머리카락은 어느덧 어깨를 넘길 만큼 자라 뺨을 간지럽혔다.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디아는 고개를 들지 않고 탄창을 갈았다.

“그건 버릇이야?”

“…….”

배가 들어오는 것은 알았지만 저것이 올 줄은 몰랐던 디아는 다가오지 않고 멈춰 선 남자에게로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무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웨인이 손에 쥔 권총을 가리켰다.

“총구 흔드는 거.”

디아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웨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알 만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놈 버릇인가 보네. 가끔 나쁜 버릇도 옮으니까.”

황폐한 땅에서 유일하게 푸른 녹안이 총구로 돌아갔다. 그제야 한 발 쏠 때마다 총구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디아는 반의 버릇이 새겨진 손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눈에 띄게 성장한 제게 아직 반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묘한 기분을 선사했다.

두꺼운 외투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 낸 웨인은 디아가 또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기 전에 외진 곳까지 친히 걸음 한 목적을 꺼냈다.

“일단 들어가지. 전할 소식이 있어서.”

많은 것을 공유한 사이임에도 널찍한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둘 사이에는 버석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벽난로 속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며 내는 소리가 침묵과 어우러졌다.

사용인이 내어 온 차를 반쯤 비운 웨인은 이마를 짚은 손으로 난처한 표정을 감췄다. 변수가 될지도 모르는 정보를 얻은 지 석 달째.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이곳으로 오게 됐다.

반 클라크가 살아 있다.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생존을 의심한 적 있었으나 그의 발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연구소 폭발 후 1년간 의료 기록은 물론이고 입출국 기록도 없기에 완전히 증발했거나 곤죽이 된 사체 중 하나가 됐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이 실수였다.

행방이 묘연한 미셸이 실종 직전 수를 썼다고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개체 구출과 함께 주요 인사 제거를 맡은 웨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클라크 둘이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고 있다니.

손을 떨어뜨린 웨인은 건너편을 흘끔 살폈다. 못 본 새 부쩍 성장한 디아는 더는 풋내나는 어린애로 보이지 않았다. 반이 보았다면 펄쩍펄쩍 뛰며 환장할 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피다 못해 만개한 미모는 불쾌감을 자극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결 차분해졌다고 넘겨짚을 수 있겠지만 디아의 성장을 관찰한 웨인에게는 보였다. 가뜩이나 비협조적인 놈의 눈알이 제대로 돌았다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는 했다. 그러니 요양이 아니라 징계였다. 사용인에게 전해 듣기로 디아의 상태는 상상 이상이었다.

해가 떨어진 후 조명만 켰다 하면 난리를 피웠고, 밤마다 불 꺼진 저택을 헤매는 것은 물론 시시때때로 방을 뒤집어엎는 탓에 남아나는 가구가 없다고 했다. 예민하기는 또 어찌나 예민한지 밤중에 작은 소리라도 내면 귀신같이 알아차린다며 나이 든 사용인은 자신이 보필한 개체 중 가장 까다롭다고 평가했다.

다만 웨인은 디아의 눈알이 고립된 생활 탓에 돌아 버린 게 아닐 것 같다는 달갑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줄곧 성에가 낀 창을 바라보는 디아를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하다가 한숨 지었다.

성장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겠다만, 디아는 아직도 숙주에게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었다. 반이 살아 있음에 안도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배를 가로지른 흉터가 쿡쿡 쑤셨다. 입꼬리를 비튼 웨인은 디아를 이곳에 처박아 둔 후 르네를 비롯한 2대와 결정한 사항을 통보했다. 디아에게 성을 주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근신을 중단할까 해. 너한테 맞는 일이 있거든.”

하얗게 피어난 성에에 꽂혀 있던 시선이 웨인에게로 돌아갔다. 웨인은 가방에서 두꺼운 리스트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상황상 내가 우선으로 맡았는데 적성에 영 안 맞더라고. 오늘부터 내 권한은 전부 너에게 위임된다.”

한 뭉텅이나 되는 리스트를 가져간 디아가 첫 장을 넘겼다. 웨인은 그만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이 역할에 관한 설명을 요약했다.

인간이 각기 타고난 재능이 다르듯, 그들 또한 내재된 재능이 달랐다. 숙주의 성향에 따라 희석되거나 증폭될 수는 있지만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개중 육체적으로 뛰어나고 타인과 어울리기 어려운 성향을 타고난 개체를 선별해 중차대한 일을 맡겼다. 한량이나 다름없지만 몸 쓰는 것에 특화된 숙주에게서 경험을 전이받은 데다가 완력과 편집적인 성향을 타고난 디아는 이 일에 적격이었다.

지금부터 디아가 해야 할 일은 과거를 날조하고 친인척으로 위장해 각각의 가업을 물려받는 일이 아니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동족을 보호하고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다. 반드시 시조를 필두로 하며 직계가 보조하고, 양지로 나올 수 없다는 단점을 고려하여 축적한 재산을 분배할 때 우선순위를 가진다.

생존한 모든 동족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 간섭까지 가능한 권한은 제법 탐낼 만했으나 그만큼 성가신 일이 많았기에 대부분의 개체가 기피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그러나 디아는 이것저것 재고 따질 여력이 없었다. 예상보다 더 빨리 이곳에서 나갈 기회를 얻은 디아는 증오가 쌓이고 쌓여 단단하게 굳어진 녹안으로 리스트 중간쯤을 훑었다.

조이스 톰슨, 45세, 무직. 평범하기 짝이 없는 중년 남성의 사진과 거주지, 가족 관계 및 생활 패턴이 10장에 걸쳐 꼼꼼히 나열되어 있었다. 그의 페이지를 가로지른 엑스 표시는 웨인이 떠넘기려는 역할의 본질을 명확히 가르쳐 주었다. 조이스 톰슨의 페이지 가장 아래 적힌 ‘처리’라는 단어를 확인한 디아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거절할 수도 있지만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어. 지금은 적임자가 없거든.”

눈이 마주친 웨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절하면 여기서 더 버텨야 하겠지만. 참. 반은 요즘 연애질에 맛 들였던데.”

“…연애?”

“봐.”

웨인이 눈짓으로 리스트를 가리켰다.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일그러뜨린 디아는 리스트의 끝자락에서 미셸과 반을 발견했다.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미셸의 인적 사항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반의 페이지로 넘어갔다. 이내 관절이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이 움찔거리더니 클립으로 고정된 사진을 조심스럽게 빼 들었다.

“특별히 사진도 몇 장 넣었어. 궁금해할 것 같아서.”

몸 사려야 한다고 판단할 지능이 없는 반은 지인들의 SNS 단골이었다. 함께 찍거나 끄트머리에 걸린 사진이 하도 많아 2장을 추리고 추렸다. 그것과 멀찍이서 찍은 사진을 빤히 들여다보는 디아는 말 그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배신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오해가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과거를 묻기 유리하니, 웨인은 새파랗게 어린 개체가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내버려 두었다.

상대와 부둥켜안거나 뺨에 키스하고, 허리를 한 팔로 감싼 채 웃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디아를 잠자코 기다리던 웨인은 문가에서 대기 중인 인물을 불렀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도톰한 스웨이드 코트를 걸친 중년의 여성이 테이블로 다가와 가벼운 묵례를 했다. 2대 이사벨의 직계 비속인 엠마였다. 그에게 자리와 설명을 양보한 웨인은 벗어 둔 겉옷을 챙겼다.

“여긴 엠마. 잘 배워 둬. 말도 좀 잘 듣고.”

인사 배치는 앞으로 디아의 수족이 될 엠마가 알아서 잘할 것이다. 웨인은 무표정하나 눈알이 돌아간 낯으로 사진을 구기는 디아를 등지고 황량한 저택을 빠져나왔다.

배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서 쏟아진 눈발이 칼바람과 섞여 눈보라를 만들어 냈다. 오는 길도 고됐지만 가는 길도 만만치 않을 듯해 절로 한숨이 샜다. 그래도 드디어 부담스러운 직무를 떠넘긴 덕에 걸음은 홀가분했다.

옷깃을 여민 웨인은 외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손님을 문전박대한 디아 덕분에 이륙 시간을 앞당겨야 했다. 수행인에게 연락을 넣으려던 손가락은 마음과 달리 삐끗 미끄러져 애먼 사진 앱을 눌렀다. 미간을 찌푸리고 앱을 종료하려고 했으나 불현듯 가장 최근 저장한 사진에 시선이 꽂혔다.

웨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작은 이미지를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눌렀다. 바텐더로 일하는 펍에서 이벤트를 했는지, 뺨과 이마에 아기자기한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인 반의 얼굴이 액정 가득 차올랐다.

간간이 일상을 보고 받던 중에 저도 모르게 저장한 사진이었다. 맥주병을 든 채로 행복하다는 듯이 웃는 얼굴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놈을 처음으로 마주쳤을 무렵이 떠오르는 미소였다.

미셸 클라크와의 고리를 낚기 위해 도착한 칸쿤, 덫을 치기도 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가벼운 남자, 몇 번의 하룻밤, 마지막 개체의 숙주….

웨인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왜 그날 밤 반의 머리가 아닌 허벅지에 총을 쏘았는지 답을 찾지 못했다. 빠르고 간편한 길을 두고 쓸데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한탄을 몇 번이고 하면서도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쯧.”

혀를 찬 웨인은 손가락을 놀려 사진을 삭제했다. 눈보라 속으로 발을 내디디며 알록달록한 셔츠를 걸치고 실실거리던 남자를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동족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도 없어야만 했다.

***

이마로 떨어진 머리카락이 눈 앞머리를 간지럽혔다. 그러쥐기 힘들 만큼 짧았던 시기를 제외하면 항상 길게 유지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반이 그것을 좋아했으니까. 때때로 불편했지만, 막상 머리카락을 단정히 자른 후 목덜미를 간질이는 촉감이 사라지자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허전한 목덜미를 매만진 디아는 고개를 들어 차창 너머를 응시했다.

트럭에서 내린 남자가 재킷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집과 집 사이의 거리가 듬성듬성한 주택가 끝자락으로 들어갔다. 펍에서부터 조용히 그의 뒤를 밟은 디아는 머릿속에 새긴 첫 번째 타깃의 인적 사항을 되짚었다.

이안 밀러. 육군 대위 출신으로, 연구소 소속으로 근무했으며 제 어깨에 흉측한 총상을 남긴 군인이었다. 폭발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안은 고향으로 돌아와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칩거하는 중이며, 금요일 밤에 장을 보고 펍에 들르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동거인은 없고 교류하는 이웃도 없었다.

디아는 불이 들어온 창문을 바라보며 이제는 일라이라고 부르는 식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일라이는 근신을 채 끝내지 않고 돌아온 디아에게 관대했다. 고작 몇 개월 일찍 깨어났다고 연장자 행세를 하려고 드는 일라이가 성가셨던 디아는 그가 건네는 대부분의 대화를 초장부터 차단하고는 했다.

첫 번째 타깃 제거 날짜가 다가올 무렵, 디아는 처음으로 일라이에게 말을 건넸다. 제거된 숙주에 관한 질문이었다.

‘톰슨? 나한테 잘해 줬지. 언제는 밖에서 몰래 장난감을 가지고 왔는데 걸려서 혼난 적도 있어. 아, 뭔가 그립다.’

일라이는 숙주가 죽었다는 소식에도 과거를 회상하며 태연하게 웃었다. 디아는 물었다.

‘사랑하지 않아?’

‘음? 글쎄…. 숙주를?’

비꼴 의도 없이 순수한 궁금증만을 품은 눈은 디아에게 혼란을 줬다.

자신이 반에게 품는 감정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진작 알았다. 숙주의 양분을 쭉쭉 빨아들인 후 때가 되면 버리는 본능을 거스르게 하는 감각이 그와 함께하는 내내 존재했다. 웨인과 체마는 숙주를 이용하고 손수 살해했으며, 일라이는 제 숙주가 제거당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한때 즐거웠다 따위의 감상을 남겼다.

디아는 달랐다. 우리의 결말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만은 특별할 것이라고 여겼다. 단꿈에서 깨어나 보니 우리 역시 그들과 하등 다르지 않았고, 특별하지도 않았다. 결말마저 같을 것이라고 예상하자 현기증이 닥쳤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뜬 디아는 어느새 실험을 방관하고 보조한 군인의 집 앞에 서 있었다. 2층으로 된 낡은 주택 내부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 탁 꺼졌다. 현관 손잡이를 잡고, 숨을 죽였다.

이안 밀러는 심혈을 기울여 추적하거나, 제거 혹은 사후 처리에 공들일 필요가 없는 타깃이었다. 엠마는 그가 특수 부대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해, 디아의 첫 번째 타깃으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요즘 들어 디아의 횡포가 심해지니 하루빨리 내돌리고 싶은 마음도 있긴 있었을 것이다.

근래 디아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눈치가 상당한 웨인은 그린란드를 벗어나기 전, 반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6개월간 엠마가 독점하게 했다. 웨인은 섣부른 접근을 저지하여 미셸의 경계를 낮추기 위함이라고 번드르르한 명목을 갖다 붙였지만, 질투가 섞였다는 것을 못 알아차릴 디아가 아니었다.

그러나 디아는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았음에도 웨인의 결정을 철회하지 못했다. 근신은 끝났으나 징계 기간이 1년 남은 탓이었다. 그리하여 디아는 반이 다른 인간과 살을 비비는 사진을 3개월간 붙들고 살았고, 앞으로 3개월을 더 붙들고 살아야 했다.

잠금을 풀고 소리 소문 없이 집 안으로 들어온 디아는 모포 한 장만 덮고 잠든 남자를 내려다봤다. 한 번은 말로, 또 한 번은 총알로 제 희망을 통째로 빼앗아 간 남자에게 특별한 원한은 없었다. 디아의 감정은 한 사람에게 온통 쏠려 있기에 또 다른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할 만큼 남지 않았다.

디아는 오늘 일을 예행연습으로 여기기로 했다. 리스트의 가장 마지막에 이름을 올린 반을 마주하기 전 거치는 예행연습.

디아는 몸을 모로 말고 잠든 남자를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이 들 때마다, 눈을 뜰 때마다 늘 같은 사람을 떠올리는 나날을 수백 번 반복한 디아는 모든 기준을 한 사람에게 두고 타인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아쉽게도 이안은 제 남자와 손톱 하나, 머리카락 한 올도 닮지 않았다. 반은 이렇게 울퉁불퉁하고 험상궂게 생기지 않았다. 조금 더 작고 귀여운 편이었다. 툭 건드렸다가 죽을까 봐 걱정될 정도로….

망상에 빠져 있던 디아는 일순 몸을 뒤로 물리며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느샌가 상체를 세운 이안의 손목을 비틀어 권총을 떨어뜨렸다.

“큭…!”

바닥으로 떨어진 권총을 뒤꿈치로 차서 멀리 떨어뜨린 디아는 팔이 꺾인 남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그의 몸뚱이를 깔고 앉았다. 틈을 내어 주지 않는 동작이었다. 이안은 위를 점한 새카만 그림자를 노려보며 몸을 격렬하게 버둥거렸다. 발에 차인 담요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웁! 으븝…!”

디아는 이안의 코와 입을 막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눈을 깜박였다. 아차. 총을 차에 두고 내렸다. 곁눈질하자 저 멀리 굴러간 총은 소음기가 없었다. 총을 쓰지 못해도 곤란하진 않았다. 언젠가 새하얀 방에 있는 사람을 모두 죽이고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낀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별반 수고롭지 않았다.

납덩이처럼 내리누르는 힘에 당황한 이안이 눈을 홉뜨는 것이 보였다. 체구는 오랜 군 생활을 한 이안이 앞섰음에도 그는 위아래를 뒤바꾸지 못하고 버둥거릴 뿐이었다.

디아는 한층 두꺼워진 허벅지로 이안의 팔과 상체를 조였다. 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간신히 팔 하나를 빼낸 이안은 옷자락을 잡아 디아를 넘어뜨리려고 했다. 공교롭게도 헛수고였다.

가능한 청소할 거리가 없는 편이 좋으니, 디아는 이대로 그를 질식시켜 죽이기로 했다. 곧장 목을 한 손으로 틀어쥐었다. 장갑 너머로 닿는 타인의 감촉이 불쾌했다.

“큽, 컥!”

살짝 힘을 주자 호흡이 턱 막힌 이안이 무릎을 쳐올렸다. 거센 반항에도 미동 없이 매트리스 모서리 어딘가를 응시하며 무료하게 남자의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던 디아의 귓가에 교활한 반이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든 사람은 건드리지 마.’

디아는 매트리스가 푹 꺼질 정도로 이안의 얼굴을 짓이기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상관이야, 이제 와서….”

“크윽! 우웁…!”

“말 잘 들어도 안 왔으면서. 그때는 안 죽였는데.”

죽일 수 있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인간들 전부 죽이고 나갈 수 있었는데.

혼잣말을 내뱉을수록 손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반의 한마디, 그게 뭐라고 개미 목숨 하나 빼앗는 것조차 방해할까. 디아는 더는 지킬 필요 없는 약속을 떨쳐 내기 위해 눈을 수차례 깜박였다. 여기서 디아는 과실을 범했다.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도리어 반의 참담한 표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안은 압박이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쪼그라든 기도로 조금의 숨을 들이마신 그는 부들거리는 손을 뻗었다. 이안의 머리맡에는 항상 총과 잭나이프 한 자루가 있었다. 디아는 제 눈으로 날아드는 칼끝을 발견한 순간 실책을 알아차렸다.

“이, 개애…! 커헉!”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디아의 관자놀이에 날카로운 칼끝이 박혔다. 뛰어난 반사 신경이 아니었다면 정확히 눈을 찔렀을 칼날은 도로 뽑히지 않았다. 얇은 피부와 녹안 주위의 근육을 찢어발기며 자신의 마지막 발악을 침입자의 얼굴에 깊이 새겼다. 이안은 칼로 침입자의 눈구멍을 파내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의 칼날이 콧대에 닿기 전, 뼈가 우두둑 분질러지는 소리가 어두컴컴한 침실에 울렸다. 근육 안으로 움푹 들어간 칼날을 뽑아내자 이안의 팔이 맥없이 떨어졌다.

“아….”

우발적으로 연약한 목뼈를 분지르고 만 디아는 손을 더듬더듬 거두어 제 눈을 감쌌다. 무언가 질질 흘렀다.

뜨끈하고 끈적한 액체가 뺨을 적시고 목을 감싼 상의로 스며들었다. 고통은 한발 늦게 따라붙었다. 얼굴 가죽이 통째로 찢겨 나간 듯한 통증이 예민한 신경을 타고 번졌다. 귓바퀴가 화끈한 통증에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디아는 왼눈을 가린 채로 군인을 내려다봤다.

목이 꺾인 타깃의 모습이 오른눈에 맺혔다. 그의 가슴팍과 턱은 검붉은 피로 흥건했다. 목을 골절시킨다고 피가 나올 리가 없는데 말이다. 일시적으로 판단력을 상실한 디아는 이안에게서 물러나 바닥에 내려섰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짓밟은 디아는 황망히 주변을 둘러봤다. 시야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쿵쿵 내려온 디아는 마침내 복도 한구석에서 상반신을 비출 거울을 발견했다. 서둘러 거울 앞으로 다가가 왼눈을 가린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살점이 너덜너덜하게 찢긴 얼굴을 마주한 디아는 피가 방울방울 고인 아랫입술을 벌렸다.

“…어.”

턱 막힌 탄성이 터졌다. 굳은 손으로 뺨을 닦았다. 검은 가죽 장갑은 얼굴을 흥건하게 적신 액체를 흡수하지 못했다. 디아는 다시금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흉측한 몰골이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쉽게 분간할 수 있는 뛰어난 눈에 정면으로 담겼다.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황급히 장갑을 벗어 던지고 맨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피는 멎질 않고 금빛 속눈썹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새하얀 손등과 손바닥에 찐득한 피가 묻어나고, 거울에 핏방울이 튀고, 얼굴 절반을 덮은 상처는 더더욱 벌어져 새빨간 근육을 드러냈다.

아무리 피를 닦아 내고 찢긴 부위를 문질러도 거울 속에 보이는 흉측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더 흉해지기만 했다.

양손을 새빨갛게 물들인 디아는 망연히 거울만 바라보다가 뒷걸음질 쳤다. 확장된 동공에 얼굴이 끔찍하게 망가진 남자가 담겼다.

이로써 두 가지를 동시에 잃었다. 반이 사랑했던 얼굴과 그와 한 약속.

기대는 다 버렸다고 여겼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거울 속 괴물 같은 남자가 입꼬리를 움찔거리다가 이상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디아는 그를 마주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문득 궁금해졌다.

반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가 지금 제 꼴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

눈을 뜨고 반년 만에 완전한 성장을 이룬 디아에게 3년은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반과 함께한 시간보다 떨어져 보낸 시간이 길어졌고, 그동안 디아는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엠마가 임의로 맡은 권한을 모조리 돌려받았으며 굼뜬 웨인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리스트를 지워 나갔다.

연구에 대해 아는 인물의 추적과 제거가 주가 됐지만 닥치는 대로 머리통을 날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단기간에 연구소와 관련된 인물이 줄줄이 죽어 나간다면 의심을 살 테니까. 장기적인 제거 계획을 구축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지루했다.

최초로 연구소를 설립한 후 자금을 끌어온 정부 산하 과학 재단의 주요 인사 넷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둘은 지병이었으나 둘은 아니었다. 남은 사람 중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추리자면 하나뿐이었다. 연구소가 폭파된 후 흔적도 없이 증발한 총책임 연구원.

디아는 반과 똑같은 눈매를 가진 노인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 벤치에 기대앉았다. 한낮의 평화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새카만 선글라스 렌즈에 비쳤다.

밝은 곳은 싫었다. 사람이 많은 곳도 싫었다. 어수선한 소음과 예측하기 힘든 상황은 예민한 성정을 바늘 끝으로 들쑤셨다. 귀를 닫은 디아는 일반인의 육안이라면 보지 못할 만큼 남자와 멀찍이 떨어진 분수대 부근을 가만 응시했다. 월등한 시력이 익숙한 얼굴을 포착했다.

언젠가 제 팔목에 주삿바늘을 박아 넣었던 연구원은 아들이 던진 야구공을 글러브로 움켜쥐고는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였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은 연구원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아마도 부고일 것이다.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아들을 끌어안고 통화를 나누는 연구원은 자상한 아버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연구소 소속으로 근무했던 동료의 부고를 한 달 사이 두 번이나 받은 이상 더는 자상한 아버지의 표정은 유지할 수 없을 터다.

디아는 연구원이 딱딱한 표정으로 아들을 품에 안고 공원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한 달 새 둘을 제거하는 것은 타깃의 경계심을 높일 위험성이 높았으나 여태껏 미셸의 꼬리가 잡히지 않았으니 혼란을 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혼란 틈새로 흘러나올 단서를 기다릴 시간이었다.

몸을 일으킨 디아는 호텔로 돌아가다가 한 가게 앞에 멈추어 섰다. 비좁은 골목과 붙어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작은 액세서리 가게였다.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유리창 너머 진열대에 장식된 목걸이였다. 은색 체인에 이어진 작은 펜던트 목걸이는 제 것과 비슷하지만 보다 아기자기한 형태였다.

홀린 듯이 가게로 들어가 목걸이를 구매한 디아는 구깃구깃한 포장지 속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하트 모양 로켓이 빛에 반사되어 시린 빛을 퍼뜨렸다. 색이 바랜 듯한 금속의 색감은 볕에 그을린 피부와 잘 어울릴 것이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귀엽겠다.”

들어 주는 사람 없는 혼잣말이 스러졌다. 디아는 목걸이를 포장지 속에 집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포근한 바람이 뺨을 간지럽혔다.

반과의 약속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밟혔다. 이따금 디아는 악행을 쌓으면 쌓을수록, 리스트의 마지막 장에 다다를수록 그에게 복수하는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반이 바라던 모습과 정반대로 나아가면 일종의 쾌감까지 느껴졌다.

네가 만든 꼬락서니를 보라고 빈정거리고 싶었다. 네가 버리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될 일은 없었다고 쏘아붙이며 그에게 가책을 얹어 주고 싶었다. 반은 분명 상처를 받을 사람이었다. 그의 지인들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잘 알았다. 그에게 있어 죄책감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에게 복수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서도 길을 걷다가,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다가 그와 어울릴 것 같은 잡화를 무분별하게 사들이는 것은… 사실상 이유가 없었다.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성을 내면서 산처럼 쌓인 선물을 싹 다 버려도 다음 날이면 또 사들이고 있는, 도통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오늘도 줄 수 없는 선물을 사 들고 호텔 방으로 돌아온 디아는 욕실로 들어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작은 얼굴 절반을 가린 선글라스가 벗겨지며 흉측한 몰골이 드러났다. 우둘투둘한 흉터가 눈 둘레를 장식한 얼굴을 단 한 번도 비추어 보지 않고 씻은 디아는 곧장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쯤 연락이 왔을 것이다.

두 달간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지만, 디아는 선뜻 핸드폰을 켜지 못하고 손안에서 굴렸다.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확인하면 반드시 화가 나고 우울했다.

협소한 범위를 빙글빙글 돌며 갈등했다. 1초에 한 번씩 보고하라고 닦달하고 싶다가도 막상 그의 소식을 확인할 때마다 주변을 뒤집어엎고도 풀리지 않는 울분을 끌어안은 채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은 괴로웠다. 그래서 두 달간 임의로 그의 소식을 차단했다. 보지 않으면 불안할지언정 속이 뒤집어지는 일은 없으니까.

불안이 발밑까지 바짝 쫓아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한계였다. 이럴 때면 속이 뒤집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다음 1시간 전에 전달된 반의 근황을 확인했다. 새파란 녹색 눈이 무려 열 장에 달하는, 활자와 사진으로 가득한 보고서를 꼼꼼히 훑어 내렸다.

곧 미간이 찌푸려졌다. 늑골을 부수고 튀어나올 듯 두근거리던 심장 박동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순간적으로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뭐야?”

벌어진 입에서 의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액정만 뚫어져라 응시하던 디아는 두 달 전에 받은 근황과 그 전 달에 받은 근황을 차례로 대조했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주 이상한 점이….

디아는 석 달 전 받은 보고서에서 반이 최근 만난다던 남자의 인적 사항을 불러왔다.

리암 앤더슨. 올해 25세로 미대 졸업 후 변변한 직업 없이 파트타임을 전전하는 중이며, 벌이의 12배에 달하는 대출금을 조금씩 상환하는 중. 거주지는 메인 거리에서 훌쩍 떨어진 다 쓰러져 가는 아파트. 동거하던 형제가 결혼해서 현재는 혼자 살고, 퇴근 후 들른 펍에서 반 클라크를 만났으며….

디아는 따끔거리는 눈가의 흉터를 손톱으로 긁으면서 리암의 사진을 바라봤다. 흐리멍덩해서 흰머리처럼 보이는 금발과 다 죽어 가는 이끼 색을 띤 녹안,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 푸르죽죽한 피부를 가진 예민한 인상의 남자는 어디를 어떻게 봐도 예쁜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속물적인 반에게 선물을 떠안길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도 않았다.

반은 이 보잘것없는 남자를 무려 석 달이나 만나고 있었다. 매번 일주일에서 한 달이면 파트너를 갈아 치우는 헤프기 짝이 없는 반이, 무려 석 달이나, 리암 앤더슨을. 당연히 새로운 파트너와 놀아나겠거니 했지, 여태껏 리암을 만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 못 했다.

디아는 방을 빙글빙글 돌며 리암의 정보를 읽고 또 읽었다. 잘못 보낸 것은 아니었다. 반과 리암이 함께 길을 걷는 사진이 찍힌 날짜는 사흘 전이었다. 손톱에 긁힌 흉터와 그 주변이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놈은 왜 이렇게 오래가지? 왜지? 뭐지? 예쁘지도 않고 돈도 없고 성격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이유가 뭐지?

반이 머무는 아파트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사진을 다시 한번 눈에 담은 순간 머리꼭지가 완벽하게 돌았다. 디아는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엠마에게 연락을 넣으며 옷장을 열어젖혔다.

“나 갈 곳 있어. 지금 당장.”

완전히 이성을 잃은 디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리암의 집 안에 있었다.

***

퇴근 후 가볍게 술을 한잔 걸친 리암은 삐걱거리는 아파트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섰다. 신발장에 가방을 내려 두면서 불을 켠 리암은 의아한 표정으로 거실을 둘러봤다. 외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깔끔했던 실내가 어수선했다.

테이블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던 잡지와 소파 쿠션이 카펫에 떨어졌고, 커피를 마시고 싱크대에 두었던 머그잔은 산산이 깨져 주방 바닥을 굴러다녔다. 누군가 마음껏 헤집은 모양새였다.

겉옷을 벗어 소파에 걸쳐 둔 리암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최근 만나는 남자를 불렀다.

“…반?”

겉보기에는 자상하나 어딘가 무신경한 면이 있는 남자의 대답 대신 냉장고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적막한 거실을 울렸다. 고요한 실내를 다시금 둘러본 리암은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 커튼이 꼼꼼히 쳐진 침실 안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탁상 스탠드 불빛이었다. 목에 가시처럼 걸리는 일이 있었으나 설령 들켰다고 해도 반은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이 아니었다. 건조한 입술을 적신 리암은 한 사람이 드나들 만큼 열린 문 너머로 들어서며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반, 너야? 오늘 바쁘다고….”

리암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섰다. 서늘한 쇳덩이가 뒤통수에 닿았다. 제 머리를 겨누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리암은 어리석지 않았다. 자동으로 양손을 들어 올리자 옆구리에 끼고 있던 쿠션이 툭 떨어졌다.

“소리 지르거나 움직이면 쏜다.”

섬뜩한 상황과 낯선 목소리에 얼어붙은 리암이 침묵하자, 침입자가 총구로 뒤통수를 툭 건드렸다.

“응?”

“예, 예….”

더듬거리며 대답한 리암은 눈을 질끈 감고 지금 해야 할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지갑 주머니에 있습니다. 다, 다 가져가셔도 되고요. 신고 안 할 테니까….”

“내가 좀도둑 같아?”

대뜸 말을 끊은 침입자가 물었다. 기분이 나쁜 건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든 단조로운 음성이었다. 리암은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만한 답을 내놓았다.

“아, 아니요….”

“맞는데.”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지갑을 쏙 빼 간 디아는 총구를 겨눈 채로 시선을 내렸다. 낡은 가죽 지갑을 열자 현금 조금과 면허증, 쓸 일 없는 명함, 할인 카드 따위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지갑 한쪽에는 가족사진이 있었다. 만약 반의 사진을 넣어 두었다면 방아쇠에 얹은 검지에 무의식중 힘이 들어갔을 것이다.

총을 겨눈 손을 잠시 내려 가족사진을 빼내는데, 이때다 싶었던 리암이 몸을 확 돌리며 반격에 나섰다. 당황한 기색 없이 딱딱한 권총 손잡이로 머리통을 후려친 디아는 신음하는 리암의 오금을 걷어차 무릎 꿇렸다. ‘머리 손’ 하며 뒤통수를 툭 건드리자 화들짝 놀란 리암이 양손을 뒤통수에 붙였다.

“미주리 출신에 파크 주립대 졸업, 지금은 델카 카센터 카운터에서 일하고 형인 밴저민은 웨스트 인쇄소에서 일하고. 맞지, 리암?”

한 대 얻어맞은 것으로도 혼이 빠져나갈 정도였던 리암이 어물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어떻게….”

“어머니는 학교에서 카운셀러로 일하고, 조카는 이제 네 살이고, 지금 일하는 카센터는 전 애인 소유고. 오늘 저녁 그놈이랑 먹었고. 어젯밤에는 그놈 집에서 뒹굴었고.”

디아는 지갑을 뒤로 던지며 하나부터 열까지 꿰고 있는 인적 사항을 줄줄이 읊었다. 볼품없는 피부가 더더욱 창백해지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보였다. 그러잖아도 머리끝까지 열이 차오른 디아의 눈을 완전히 돌게 만든 것은 이것이었다. 디아는 리암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이 어디가 모자라서 바람을 피우지? 그 헤픈 반도 파트너가 생기면 나름대로 헌신하는데 이딴 게 뭐라고 반을 두고 딴짓을 하는 거지? 그 심정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디아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경멸이 어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난 네가 싫어. 내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어. 내 귀에 네 소식이 제발 좀 안 들렸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정신이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중얼거림은 가뜩이나 심약한 리암을 더더욱 겁에 질리게 했다. 냅다 총을 갈겨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리암은 정체 모를 침입자가 도대체 왜 제집에 쳐들어와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친구도 모르는 신변을 사정없이 까발리는지, 그 이유를 가늠조차 못 했다. 확실한 것은 자신이 수시로 뉴스를 장식하는 총격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지가 벌벌 떨리고 절로 눈물이 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돈은, 그거는 얼마든지….”

“사흘 줄게. 이 도시에서 떠나. 내 귀에 네 소식 들어오는 날이면 네 주위 사람부터 하나씩 조질 거야. 카센터는 불탈 거고, 네 조카는 아빠 없이 살게 될 거고, 네 부모는 아들을 둘 다 잃을 거고.”

디아는 눈여겨보던 가족사진을 그의 허벅지 곁에 떨어뜨렸다. 환히 웃는 가족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이 모든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리암은 가쁜 숨을 내쉬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허억…. 저한테 왜, 왜 이러시는, 흡….”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리면 신고해도 돼. 네가 신고하자마자 오늘 저녁 같이 먹은 오웬부터 죽일 거야.”

반 몰래 잦은 만남을 가지는 전 애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리암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입자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든, 개인적인 원한으로 왔든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알겠, 알겠습니다. 바로 떠나고, 그럴 테니까…. 제발요….”

디아는 발을 돌리면서 가족사진에 세 발의 총알을 박아 넣었다. 귀 바로 옆에서 터진 총성에 식겁한 리암이 목이 졸린 듯한 비명을 흘리다가 기어이 오줌을 지렸다. 디아는 가지가지로 보잘것없는 남자를 노려보다가 다 쓰러져 가는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당장이야 고분고분하지만,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가는 길에 카센터를 불태워야겠다.

***

뉴욕에서 내슈빌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 디아는 시종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건너편 좌석에 앉은 엠마는 단단히 토라진 남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사고를 제대로 치고 온 디아는 고운 미간을 구긴 채 적반하장으로 굴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너도 내가 못생겨서 그래?”

엠마는 아직 어린 탓에 감정을 주체 못 하는 상전을 눈빛으로 나무랐다.

“조용히 처리하는 법 아실 텐데요.”

느닷없이 주를 건너가야 한다며 비행기를 준비시키더니 수고로운 일을 벌인 귀한 도련님은 짜증이 나 죽겠는지 성치 않은 손톱을 이로 질근거렸다.

디아도 제 실책을 알았다. 피투성이가 된 집을 통째로 처리해야 했던 첫 번째 임무 이후로 그는 리스트를 지워 가면서 이성을 잃은 적 없었다. 다만 반 클라크만 연관되면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람을 붙여 반의 근황을 속속들이 보고받다가 치졸한 결정을 내린 적도 여럿이었다.

보통은 만남이 2주를 넘어간다 싶으면 파트너를 다른 지역으로 전근 보내는 방법으로 비교적 원만하게 갈라놓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지는 반의 특성상 파트너를 떨어뜨려 두면 대부분 관계가 말끔히 정리되고는 했다.

리암도 굳이 직접 찾아가 행패를 부릴 것 없이 비슷하게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오늘 대낮부터 미친 짓을 저지른 이유는 놈이 반을 농락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 달도 아니고 석 달이야. 석 달.”

디아는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그러다가 곧 결혼도 하시겠어. 살림도 합치고 둘이서 반지도 맞추고… 신혼여행도 가겠지.”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디아를 가만 바라보던 엠마는 태블릿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3개월은 결혼을 결정할 정도로 긴 시간이 아니며, 둘 사이는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타깃이 결혼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해 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다.

엠마는 따로 손쓸 일이 없길 바라며 주시할 인물 목록 끝자락에 리암 앤더슨을 추가했다.

내내 신경질적으로 굴다가 제풀에 지친 디아는 창에 이마를 기대고 진회색을 띤 구름을 응시했다. 반의 행적에는 저 구름처럼 캄캄한 공백이 존재했다.

저를 팔아넘긴 그날, 일생을 보낸 집에 불이 났다. 당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웨인은 지원 요청을 해 둔 덕에 가까스로 피해를 당하지 않고 도주했다고 주장했다. 증거는 확실했다.

이후 반은 방화 및 살인 혐의로 경찰서를 들락거렸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고, 버스를 타고 지역을 떠난 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누가 지운 것처럼 아무리 파고들어도 이상하리만큼 행적이 나오지 않았다.

미심쩍은 1년의 공백 뒤에 나타난 반은 전 재산을 탕진하고 폐인 같은 몰골로 지인의 집을 전전했다. 그사이 반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은 1년간의 공백에 관해, 모은 돈을 도박으로 죄다 날려 먹고 얼떨결에 교통사고까지 당했다고 지인들이 모인 파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우스갯소리였을 것이다. 그의 의료 기록은 깨끗했으니까. 사람을 좋아하고 타인에게 사랑받는 반이었으니 그를 따라다니는 소문도 많았다.

반은 충분히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릴 놈이다. 아니다, 내가 들은 것은 다르다. 갱 애인과 놀아나다가 총 맞았는데, 감금을 풀어 주는 조건으로 전 재산을 내놓았다더라, 교통사고가 아니라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더라, 치정 싸움에 휘말렸다더라, 자산가 내연남으로 살았다더라….

무성한 소문을 빠짐없이 보고받으며 알아낸 점은 반의 평판이 처참하다는 것과 전부 말뿐이라는 것이었다.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찝찝함투성이였다. 증거 은폐를 위해 자기 집을 방화한 것까지는 이해 가나 살인 혐의로 몇 달을 고생했다는 지점에서는 의문이 생겼다. 1년의 공백도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디아는 그것을 곱씹으며 슬며시 기대를 품기도 했다. 혹시 저를 찾으러 왔던 것은 아닐까? 팔아 치워 놓고 덜컥 후회하여 저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 돌아다닌 것은 아닐까? 잠깐의 실수라면 기꺼이 용서할 의향이 있던 디아의 기대는 이내 반의 어마어마한 행적을 보고받고 박살 났다. 일주일 걸러 파트너를 갈아 치우고 볼 키스쯤은 인사처럼 하고 다니는 남자에게서 그리움이나 후회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배신자. 반 클라크는 배신자였다.

구름 사이로 도시의 야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디아는 반짝이는 빌딩 불빛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나랑 결혼하기로 했으면서.

***

리암이 꽁지 빠져라 뉴욕을 떠났다는 소식에 온종일 실실 웃던 디아는 연이어 희소식을 받았다. 미셸 클라크의 꼬리를 잡았다. 차례로 열린 연구소 소속 연구원의 장례식에 중복으로 참석한 인원을 추려 파고든 끝에 눈여겨볼 만한 기록을 포착했다.

연구소에 막대한 자금을 대던 제약 회사 직원은 장례식 전후로 이메일 한 통과 두 통의 국제 전화를 수신했다. 전화의 발신지는 이메일을 열람한 지역과 동일했다. 프랑스.

제약 회사 오너는 미셸 클라크와 대학 동문으로 오랜 세월 두터운 친분을 쌓아 왔다. 연구소 폭발 후 며칠의 틈을 두고 잠적한 그가 미셸에게로 가는 사다리임은 자명했다. 실험에 필요한 자금 조달과 더불어 임상 시험용 약물을 유통한 오너 또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인간 중 하나였다.

디아는 명단을 뒤져 프랑스에 뿌리내린 동족을 찾았다. 1대 시조의 직계손으로, 피는 상당히 옅지만 르네와 친분이 있는 동족이 하나 있었다. 오너의 소재지와 그와 미셸의 연결 고리를 파헤쳐야 했으니 넉넉히 머무르는 편이 좋을 듯했다. 거주를 위해 갈취할 동족의 재산 목록을 뒤지던 중 디아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화려한 건물도, 널찍한 정원을 가진 저택도 아니었다.

동족의 소유물 중 하나인 작은 섬과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선 고성이 태블릿 화면을 빼곡히 채웠다. 우거진 수풀에 파묻힌 성은 어렸을 때 반이 보여 준 동화책 속 고성을 빼닮은 형태였다. 한참이나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지역의 이름을 본 순간 디아는 홀린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반(Vannes).”

다른 선택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도와 멀찍이 떨어진 데다가 섬이라 교통 사정까지 나쁨에도 디아는 이 섬을 통째로 넘겨받기로 했다. 석 달이라는 촉박한 시간 안에 그럴싸한 정원을 만들고, 사용인들의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된 방을 만들어 모든 물건을 채울 것을 명령받은 엠마는 군말 없이 따랐다.

디아는 섬과 성이 새 주인을 맞을 단장을 끝낼 때까지 리스트를 지우며 억겁 같은 시간을 보냈다. 반의 문란한 사생활이 달에 한 번꼴로 예민한 속을 뒤집어 놓고, 섬으로 향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집기며 가구가 남아나지 않았지만 꿋꿋이 버텼다. 이를 갈며 버텼다.

반 클라크를 불러들일 셈이었다. 섬과 성은 반을 위한 무대였다. 오너와 반을 이용해서 미셸을 잡을 것이다. 오너와 미셸은 그 자리에서 제거하고 반은, 반은… 글쎄.

디아는 자신이 반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감정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재회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차피 결말은 하나였다. 결말까지 가는 길이 다를 뿐이지.

마침내 정원을 가로질러 성으로 들어오는 반을 꼭대기 층에서 발견했을 때, 디아는 살의에 가까운 그리움을 느꼈다.

***

반은 한숨도 자지 못해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비비적거렸다. 모든 것이 예고도 없이 한꺼번에 몰아친 새벽의 여파가 좀체 가시지 않았다.

지난 새벽, 손을 놓으면 죽기라도 할 듯 매달렸던 디아는 곧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차마 쫓아갈 수 없었던 반은 해가 뜰 때까지 미로를 헤매다가 오전이 되어서야 간신히 출구를 찾아냈다. 디아와 격렬한 밤을 보낸 흔적이 완연한 방에 도착한 후로는 내도록 이 상태였다.

오해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이걸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디아는 잠자코 들어 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고, 자신은 원인을 충분하고도 넘치게 제공했다.

오해를 푸는 것도 주어진 과제지만, 반은 그보다 그의 몸을 수놓은 흉터가 몹시 신경 쓰였다. 등을 덮은 흉터는 피부에 자리 잡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보였다. 궁금해도 물어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반은 손톱 끝을 초조하게 매만지며 연구소에서 보았던 사진 속 끔찍한 일들이 디아에게 닥친 것은 아니길 바랐다. 참 위선적이게도.

“망할 놈의….”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미셸은 대체 왜! 까짓 지구 좀 나누어 쓸 수도 있지 왜 애먼 외계인을 건드려서 손주를 이런 참담한 상황 속에 빠트린 것인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발길질하던 반은 억울한 표정을 지은 채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이불 속에 틀어박혀 죄다 회피하고 싶었지만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정장을 차려입고 개인실과 연결된 문 앞에 섰다. 샤워하며 디아가 중얼거렸던 이야기를 정리해 봤다. 디아는 연구와 관련된 자들을 죽… 아니,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체마의 반응을 보면 그들 무리는 미셸에게 상당한 원한을 가진 듯했고, 미셸의 핏줄이자 디아의 존재를 아는 자신 또한 곱게 내버려 둘 의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디아가 저를 죽일 것 같진 않단 말이지.

구두 앞코로 카펫을 툭툭 두드리며 불안정한 디아의 모습을 회상했다. 디아가 제게 품은 감정은 애증 그 자체였다. 그것도 아주 비대한.

마음을 굳게 먹은 반은 손잡이가 없는 문을 밀어 봤다.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예상한 바다. 성큼성큼 발을 내디뎌 복도로 향했다. 개인실 문을 앞두고 잠시 망설이다가 늘 해 왔던 대로 눈가리개를 둘렀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디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열쇠를 끼워 넣었다. 휙 돌아가던 열쇠가 잠금장치에 덜컥 걸렸다.

“이게 진짜….”

반은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짜증을 내뱉었다가 심호흡했다. 저는 지금 화를 낼 처지가 아니었다.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열쇠를 도로 집어넣고 노크했다. 문 두께가 상당해 들리지 않을까 봐 문틈에 바짝 붙어 디아를 불렀다.

“저기…. 난데. 우리 앉아서 대화 좀 하자. 어제 제대로 말을 못 한 것 같아서. 우리 뭔가 오해도 있는 것 같고.”

반은 가볍거나 퉁명스럽게 들리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소보다 높고 다정한 투로 어렸을 적부터 심히 예민한 구석이 있는 남자를 살살 달랬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 그래. 나도 너무 보고 싶었거든. 어…. 안 믿기겠지만 진짜로. 그러니까 문 좀 열자.”

그렇게 무려 30분이 넘도록 문을 노크하고 빌다시피 애원했으나 디아는 무응답으로 응수했다. 10분을 넘어선 순간부터 발끝에서부터 차오른 열이 머리꼭지에 닿았다. 숨이 턱 막힐 만큼 갑갑해진 반은 소리 없는 탄식을 내지르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디아는 분명 제가 애걸복걸하는 소리를 듣고 있을 터다. 확신할 수 있다.

허리에 손을 얹은 반은 디아의 마음만큼이나 굳게 닫힌 문을 노려봤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오해를 풀든, 대판 싸우든 할 것 아닌가. 물론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이해는 한다.

제가 얼마나 원망스러울지, 어떤 심정으로 4년을 버텼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묵은 감정이 터져 버린 새벽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디아에게도 괴로운 시간이었을 테다. 어쩌면 훨씬 더.

“디아, 제발. 내가 진짜 두 손 모으고 빌게. 나 지금 손 모았어. 미안해. 내가 다, 전부 미안해. 그러니까 나랑 얘기 한 번만 해 주라. 응?”

자신이 죄인임을 온전히 받아들인 반은 다시 문에 찰싹 달라붙어 애걸했다. 달아나고 싶던 마음은 디아의 눈을 마주한 후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여보 자기야 이쁜아…. 내가 무릎 꿇고 빌게. 한 번만 나랑 얘기해 주라, 제발….”

반은 문 앞에서 손을 싹싹 비비다가 손잡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것보다는 진중하게 굴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본디 타고난 성격이 따라 주질 않았다. 반은 부끄럼도 없이 떼쓰는 아이처럼 매달렸는데, 창피한 짓거리가 한 시간을 넘자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한 시간이나 무시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나. 반은 기어이 쉰 목소리를 가다듬고 몸을 바로 세웠다. 주먹을 꽉 쥐고 문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이러면 너 후회한다? 진짜 후회해? 도련님 후회하실 겁니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나고 협박조가 튀어나왔다. 격렬한 섹스 후 밤새 미로를 헤집고 돌아다닌 탓에 당장이라도 두 동강 날 것 같은 허리를 짚었다.

“아, 허리야….”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이렇게나 비는데, 당장 용서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문 정도는 열어 줄 수 있지 않나. 뻐근한 허리를 툭툭 두드린 반은 손잡이를 붙잡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안 열어 준다면 쳐들어가야지. 허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갈 기세로 어깨를 갖다 박을 때, 열릴 기미가 없던 문이 벌컥 열렸다.

“어…!”

부딪칠 곳을 잃은 몸이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문 너머에 버티고 선 남자와 충돌했지만 휘청인 것은 반 혼자였다. 비틀거리면서 딱딱한 어깨에 부딪친 턱을 감싸 쥐는데, 눈가리개 아래로 검지가 불쑥 밀려들어 왔다. 턱을 감싼 손끝이 움찔 떨렸다. 속눈썹을 스친 길쭉한 손가락이 레이스를 바깥 방향으로 당기더니 위로 휙 끌어 올렸다.

“다 봐 놓고 이런 건 왜 써. 못생긴 얼굴은 보기도 싫은가 보지?”

레이스 무늬가 수놓아졌던 시야가 깨끗하게 갰다. 반은 당황이 어린 눈을 깜박였다.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으나 신경은 햇살 아래서 마주한 남자에게로 휩쓸렸다. 반은 햇볕을 머금어 더욱 반짝거리는 디아의 변화를 금세 알아차렸다. 새벽까지만 해도 귀 뒤로 넘길 만큼 길었던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머리… 잘랐네.”

적반하장으로 버럭버럭 성질을 내던 반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마를 살짝 가리며 흐트러진 황금빛 머리카락이 고전적인 분위기를 누르고 부쩍 단단해진 턱 선을 드러냈다. 사심을 담아 소년의 머리를 늘 길게 다듬어 주었던 반은 낯선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리칼이 짧아지며 화려한 이목구비가 한층 살아났다. 이목구비를 이루는 선의 변화는 헤어져 있던 시간 동안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한눈에 보여 주었다.

얼굴 구석구석을 살피던 시선은 우둘투둘한 흉터에 꽂혔다. 어떤 시간을 살아온 건지 당장은 알 수 없었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감이 코끝을 시리게 했다. 이내 입꼬리를 뚝 떨어뜨린 반은 눈앞의 디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디아….”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한 디아가 몸을 굳혔지만 반은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널찍해진 품속으로 꾸역꾸역 파고들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코를 묻었다.

아이에게서는 늘 달큼한 향기가 났었는데, 그에게서는 어떠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어디에도 자취를 남기기 싫다는 듯이 완벽한 무취였다. 반은 많은 것이 달라진 디아에게 지난 새벽 목이 메어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와르르 쏟아 냈다.

“나 진짜 너 보고 싶었어. 도망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불이 나서, 경찰서 가는 바람에…. 그리고 진짜 찾으러 갔는데, 갔다가 개고생하고 총도 맞고 막 무너지고…. 디아, 나는 진짜로….”

서른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도 목덜미에 코를 박고 두서없이 웅얼거렸다. 전하고픈 이야기가 너무 많은 나머지 말이 횡설수설 꼬여 하소연하는 꼴이었다. 그런 반을 무심결에 끌어안으려던 디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고작 포옹 한 번에 줏대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디아는 징징거리는 반의 팔뚝을 붙잡아 품에서 떼어 냈다.

뒤로 휙 떠밀린 반은 서릿발 같은 녹안을 맞닥뜨렸다. 벙긋거리던 입술을 합 다물자마자 그의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핀잔이 날아들었다.

“어디서 디아, 디아…. 내가 아직도 네 애로 보여?”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대로 아름다운 눈물의 화해를 하리라고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예상보다 날카로운 반응이 기껏 낸 용기를 매섭게 걷어찼다. 움츠러든 반은 조그맣게 반박했다.

“내 애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주제 파악 똑바로 해. 섹스 좀 했다고 기어오르지도 말고.”

듣기도 싫다는 듯이 팔뚝을 툭 놓은 디아가 뒤돌아섰다. 반은 어느 때보다 난장판인 방을 가로지르는 디아의 뒤태를 바라보며 무안한 사과를 전했다.

“미안… 합니다. 도련님.”

“말만 죄송하다, 미안하다. 행동은 딴판이고. 그렇게 살기도 힘들겠어.”

손을 놓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처럼 매달리던 새벽의 디아는 온데간데없었다. 디아는 알맹이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은 듯 쉼 없이 비아냥거리며 손에 딱 맞는 가죽 장갑을 꼈다. 반은 뾰족한 비수를 콱콱 박아 넣는 남자에게 제대로 된 변명을 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기도 했거니와 디아의 행색이 평소 보던 것과 매우 다른 탓이었다.

새카만 무스탕 재킷과 늘씬한 다리에 적당히 달라붙는 바지를 걸치고 광이 없는 워커를 신은 디아는 완벽한 몸 선을 보란 듯이 드러냈다. 걷지도 못하던 시절부터 될성부른 싹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토록 잘 자라 줄 거라고는….

반은 저도 모르게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와 두꺼운 허벅지에 시선을 주다가 눈을 들어 올렸다. 짧아진 머리카락 덕에 훤히 드러난 뒷덜미에서 눈에 띄는 흉터를 발견했다. 그를 고성에서 처음 만난 날 보았던 흉이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뀐 디아의 심정을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은 잠깐 몸을 사릴 때였다. 그걸 모르지 않음에도 흉터를 발견한 순간 입이 절로 벌어졌다.

“목에 그거….”

“칩이야.”

말허리를 뚝 잘라 낸 디아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덧붙였다.

“내가 어디 있는지, 몸 상태는 어떤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돌아선 그가 고요하지만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속도를 줄이지 않는 디아를 응시하던 반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디아는 서로의 발끝이 닿는 거리에서 멈추어 섰다.

“네 할머니가 직접 심었어. 내가 두 번이나 뽑았고.”

반은 욕설이 튀어나올 뻔한 입을 다물고 턱이 아릴 정도로 이를 사리물었다. 아주 가지가지로 가시밭길을 깔아 둔 미셸을 향한 원망이 치솟았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가 서둘러 변명했다.

“나는, 저는 미셸이 그런… 일을 하는 줄 몰랐습니다. 정말로.”

“알아. 네가 미셸에 대해 알았으면 그때 나도 알았겠지. 우린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과거를 잠시 들먹인 디아는 죄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반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개를 가까이 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디아가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빽빽한 속눈썹에서 사박사박 소리가 나는 듯했다. 아름다운 눈보다 얼기설기 붙은 살갗에 먼저 시선을 주는 반의 귓가로 증오심이 넘쳐흘러 도리어 가볍게 들리는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반. 너도 잘못은 있는 거야.”

물러나고 물러나다가 닫힌 문에 등을 꼭 붙인 반은 꼼짝할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디아를 흘끔 살폈다. 제 손으로 키운 아이에게서 숨이 막히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죄책감 탓일까. 다른 이유 탓일까. 눈을 내리깔았다가 들어 올린 반은 코앞까지 다가온 녹안을 마주했다.

마른침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적막했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몸을 섞었던 남자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뺨이 뻣뻣하게 굳고 손바닥에 땀이 찼다. 때아닌 흐름은 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짙푸른 녹안에 담긴 살의와 욕망이 한 끗 차이로 일렁거렸다. 벼려진 칼날로 목덜미를 베어 내거나, 입술이 뭉개지는 키스를 퍼붓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일어날 분위기였다.

서로의 코끝이 살짝 스쳤다. 체향만큼이나 존재감이 없는 가느다란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혔다. 디아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래로 내리깔린 금빛 속눈썹을 바라보던 반이 스르륵 눈을 감았을 때였다.

“코트 입어.”

훌쩍 물러난 디아가 반의 방과 연결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슬아슬했던 분위기는 사정없이 깨졌다.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뜬 반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 디아의 뒤를 따랐다. 거기서 눈은 또 왜 감았는지.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처지에 이상한 생각만 몽실몽실 떠오르는 제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었다. 디아의 말마따나 주제 파악이 필요했다.

“코트는 왜…?”

“할머니 잡으러 가야지.”

“저도 그, 할머니가 어디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거짓말 아니고….”

제 방인 것처럼 남의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디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며 성냥갑 따위를 툭툭 걷어차면서 옷장으로 향했다. 그는 행거에 가지런히 걸린 옷가지를 마구잡이로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미셸 잡아서 죽인 다음에…. 그다음이 너야. 가만히 안 둘 거야. 가둬서… 가둔 다음에….”

날아오는 코트를 받아 든 반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같은 구간을 빙빙 맴도는 디아가, 또 디아의 모든 상황이 안타깝고 답답했다. 오해만 해결하면 될 줄 알았더니 쌓인 문제가 산더미였다.

제 손으로 키운 아이가 미셸을 잡아 죽이는 걸 방관해야 하나. 앞으로는 어떡해야 하나. 이제 무슨 일이 닥칠 것인가. 키스는 안 해 주는 건가…. 머릿속이 온통 복잡했다.

반은 기다리지 않고 복도로 빠져나가는 디아를 쫓아 헐레벌떡 뛰었다. 이럴 때일수록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차근차근 해내는 것이 상책이다. 반은 계단으로 내려가도 될 걸, 굳이 승강기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쓰게 웃었다.

결국 돌고 돌아 원점으로 왔다.

사라진 미셸을 찾아라.

거기에 복잡한 조건이 덕지덕지 붙었다. 무거운 걸음을 이끄는 힘은 단지 죄책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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