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 5권
02.
안전벨트와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으로 무장한 반은 조종석에 앉은 디아를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아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되뇌며 묵묵히 헬기 이륙장까지 따라왔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누가 조종해 주는 것도 아니고 디아가 직접 헬기를 몰려고 하고 있었다. 반은 자연스럽게 피치 레버를 조정하는 디아를 곁눈질하다가 언성을 낮추고 물었다.
“…이거 몰 줄 알아? 아니, 아십니까? 헬기를? 우리 지금 어디 가는데요?”
“낭트. 몰 줄 알아.”
설명은 심히 짧고 퉁명스러웠다. 반년도 안 돼서 성체가 된 외계인에게 일반인의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지만 반은 고분고분 그가 모는 헬기를 탈 만큼 위험 인지 능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휙휙 돌아가기 시작하는 로터를 창 너머로 올려다보며 다급히 만류를 쏟아 냈다.
“면허 있으십니까…? 아니, 그… 나이가 되나? 근데 저는 지금 대화를 좀 하고 싶거든요. 저랑 말도 섞기 싫은 거 잘 알지만…. 제가 보트는 몰 줄 아니까 바다 통해서…. 윽!”
헬기가 수직으로 뜨더니 머리가 앞으로 기울었다.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온 손바닥으로 안전벨트를 꽉 움켜쥔 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 헬기를 타 본 경험은 많지만 태어난 지 10년도 안 된 조종사가 모는 헬기는 타 본 적 없다. 그 누가 그런 경험을 가졌겠냐마는.
반은 양손을 모으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었다. 제발 헬기 추락 같은 허무맹랑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게 해 달라고. 불신과 두려움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나는 반을 힐긋 살핀 디아는 엔진 출력을 최대로 높이고 기수를 올렸다. 이륙하며 앞으로 기울었던 헬기가 수평을 맞추어 갔다.
속으로 기도문을 읊다가 스리슬쩍 한쪽 눈을 뜬 반의 시야에 드넓게 펼쳐진 섬의 전경이 밀려들었다. 울창한 숲과 원형 미로가 한눈에 보여 꼭 맞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곁을 돌아보자 헬기를 안정적으로 조종하는 디아가 비쳤다. 조종석보다 상석이 어울릴 것 같은 디아는 정말로 헬기를 몰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잘.
위에서 보니 더더욱 기묘한 인상을 주는 정원과 아름다운 고성을 구경하는 사이 헬기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로 나아갔다. 새파란 바다에 부딪혔다가 산란하는 햇빛이 눈부셨다.
줄곧 창에 고개를 바짝 붙이고 풍경을 감상하던 반은 입술을 꾹 물었다가 뱉었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좋은 때였다. 조종 장치를 독식한 디아의 예민한 심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일단 감정적인 이야기는 잠시 빼기로 했다.
“저… 낭트는 왜 갑니까? 거기 미셸이 있어요?”
겨우 그럴싸한 질문거리를 골라 물었지만 디아는 답이 없었다. 반은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물었다.
“낭트는 왜 갑니까? 거기 미셸이 있어요? 낭트는 왜 갑니까? 거기 미셸이 있어요? 낭트는 왜….”
“반….”
대답할 때까지 질문을 반복하자 디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치한 짓을 중단시킨 디아는 역시나 지나치게 간략한 설명으로 반을 답답하게 했다.
“낭트는 경유지고 니스로 가. 개릿이 기차를 탈 거야. 미셸과 만난다는 얘기가 있어.”
“개릿이 누굽니까?”
이번에도 디아는 묵묵부답이었다.
“개릿이 누굽니까? 개릿이 누구….”
“왜 이렇게 애처럼 굴어?”
예민한 도련님이 드디어 폭발했다. 반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애가 누군데.
“도련님이 대답 안 해 주셨잖습니까. 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네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헬기까지 탔는데 당연히 궁금하죠.”
귀찮게 군 데에는 난데없는 낭트행에 대한 의문도 있지만 디아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다는 이유가 조금 더 컸다. 성체가 되면 낮아질 거라고 알기는 했어도 목소리를 듣고도 못 알아차릴 정도로 바뀌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조는 매섭고 한 마디 한 마디에 칼날을 품고 있지만, 귀를 기울이고 듣다 보면 그 시절 소년의 목소리와 똑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대로 대화가 끊기면 더는 기회가 없을까 봐 내심 겁이 났다. 다행히 디아는 반이 가까스로 낸 용기를 묵살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디아의 설명은 간략했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랜트 개릿은 미셸과 깊이 얽힌 제약 회사 오너로 연구소 폭발 후 잠적했다. 내일, 그는 4년 만에 첫 외출을 한다. 니스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탄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또다시 잠적하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다가 살며시 물었다.
“그런데… 저는 왜 데려가십니까?”
“왜. 내가 성 비우면 도망치려고 했어?”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이야기가 이렇게 튀나. 반은 서둘러 디아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생각은 했어?”
“와아….”
이건 뭐 빠져나올 수가 없는 트집의 수렁이었다. 집요한 도련님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전에 코트 안주머니를 가리켰다. 딱 지갑과 여권만 간신히 챙겨 넣은 주머니는 얄팍했다.
“여권 가져가세요. 저 얘기 다 끝내기 전에는 어디 안 갈 겁니다.”
“얘기 다 끝내도 어디 못 가. 착각하는 것 같아서.”
“…예. 제가 잘못 말했네요. 저 어디 안 갑니다. 죽을 때까지.”
반은 순간적으로 디아의 입꼬리가 아주 미미하게 올라간 것을 발견했다. 눈을 한 번 깜박이자마자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지으며 청명한 바다를 내려다봤다. 상황이 안 따라 준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싶었다. 개릿이 내일 외출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눈물의 화해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당장 출발해야 하는 촉박한 일정과 가라앉지 않은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도망가지 못하도록 동행을 택한 디아의 심리가 어느 정도는 이해됐다.
조급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근차근 되짚어 보자 재회의 충격에 파묻힌 궁금증이 하나둘 떠올랐다. 제게 총을 겨누었던 체마를 포함한 세 명은 인간이 아닐 터였다. 미셸이 지하실에 두고 간 실험 일지에 나온 다른 실험체들일 가능성이 컸다.
웨인에게 들은 바로는 그들 이전에 자리를 잡은 개체가 있는 모양인데…. 대체 어디까지 퍼져 있고, 그 수가 정확히 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부를 쌓았기에 4년 만에 만난 소년이 개인 섬에, 입 떡 벌어지는 고성에, 요트까지 소유한 부자가 되어 있는 걸까.
속물적인 부분 말고도 궁금한 점은 또 하나 있었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저 멀리 밀어 두었던 문제였다. 디아는 거의 다 끝나 간다고, 미셸과 자신을 죽이겠다고 했다. 그 말로도 디아가 연구에 관련된 사람을 처리하고 있음을 유추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마치 웨인이 옆집 사람을 처치하고 그 집에서 조력자 행세를 한 것처럼, 디아 역시 사람을 죽였고 앞으로도 죽일 계획이라는 것인데…. 입 안이 썼다.
반은 곁눈질로 디아를 살폈다. 어렸을 때부터 기미가 보이기는 했다. 아주 나쁜 사이는 아니었던 웨인의 뱃가죽을 난도질한 것만 봐도 솔직히 뇌 한 부분에 오류가 있긴 했다.
가끔 비정상적으로 굴기는 했지만 제 눈에는 마냥 귀여운 아이였다. 혹시 이것도 자신이 잘못 키운 탓일까. 제가 디아를 팔아넘기지 않고 함께 도망갔다면, 확실하게 혼내며 끝까지 가르쳤다면 어떻게 자랐을까.
어깨가 축 가라앉은 반은 바지 주름을 만지작거리다가 담담하게 물었다.
“사람 죽여 본 적 있으십니까?”
분명 들었을 텐데 디아는 답이 없었다. 반은 주름을 엄지로 꾹꾹 누르며 나무라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였다.
“4년 동안 계속 그런 일 했어요?”
“실망했어?”
비웃음을 싣고 돌아온 답이 양심에 콕 박혔다.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 남 일 같았다. 디아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디아가, 혹은 그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가장 쉽고 확실한 입막음은 죽음이니까.
정체가 새어 나가지 않아야 하는 건 둘째 치고, 그들 입장에서 연구소 직원들은 오래도록 동족을 해치고 고문한 놈들이었다. 설령 그들이 사실은 외계인이 아니더라도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은 당연했다. 복수 목록에 할머니와 자신이 포함된다는 사실이 난처할 뿐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반은 머뭇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행복하세요?”
끔찍한 침묵이 좁은 공간을 휘감았다. 반은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했다. 애 상태를 봐라. 행복 같은 소리가 나오나. 이마를 퍽퍽 치고 싶었지만, 냅다 자해한다고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반은 애먼 벨트를 손톱으로 긁으며 바다를 바라봤다. 항상 후회했다. 같이 장을 보러 가지 못한 것, 축제에 가지 못한 것, 바다를 보여 주지 못한 것. 대지를 뒤덮은 바다를 모니터가 아닌 실제로 봤을 때, 디아가 혼자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디아에 한해서는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반은 조종간을 잡은 새하얀 손, 살결을 뒤덮은 흉터를 응시하다가 숨을 들이마셨다. 말을 꺼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상처가 많던데 아프지는 않은지….”
“무슨 상관이야. 관심도 없으면서.”
관심이 넘쳐흘러 저 바다를 메울 정도였건만 디아는 높은 벽을 세워 모든 대화를 차단했다.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빈정거리고 날카롭게 반응하면서도 제 목소리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이런 방면으로 눈치가 빠른 반에게는 훤히 보였다. 검지로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다가 입술을 뗐다.
“저도 죽이실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이 말 못 하고 죽으면 정말 억울할 것 같아서요….”
서두를 꺼내자, 아니나 다를까 디아가 눈을 내리깔며 귀를 기울였다.
“그때…. 우리 헤어지기 전에 못 한 말이 있어서요. 제가 그때는 잘 몰랐거든요. 지나고 나니까 자꾸 생각나서.”
이번에는 그러잖아도 무표정한 낯이 더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반은 푸른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딱 달라붙은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도련님, 사랑해요.”
한마디를 툭 내뱉자마자 헬기가 불시에 오른쪽으로 확 기울었다. 몸체가 거의 눕다시피 기울면서 창으로 밀려간 반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디아가 레버를 당겨 헬기를 정상적인 각도로 되돌려 놓는 동안 반은 벌렁거리는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목청을 높였다.
“미쳐, 미쳤어? 방금 진짜…! 와, 너 면허 없지? 아직 애잖아! 없지? 맞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덩달아 언성을 높인 디아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크게 휘청인 헬기가 서서히 중심을 잡으며 고도를 높였다. 반은 날뛰는 것을 넘어 저릿하기까지 한 가슴을 꾹 누르며 자칫 빠질 뻔한 망망대해를 눈물 고인 눈으로 흘겼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반박하는 목소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진짜 진심인데….”
“넌 지금 네 말투가 네 귀로 안 들려? 그게 진심이라고?”
애절하다고는 차마 말 못 해도 나름대로 진심을 열심히 욱여 담은 고백이었다. 장난삼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은 해 본 적 없는 반의 최선이기도 했다. 반은 가시 돋친 투로 비난하는 디아를 살짝 등진 채로 꿍얼거렸다.
“그럼 뭐 무릎 꿇고 사랑한다고 빌어야 사랑입니까? 이것도 사랑이고 고백이지….”
“다른 놈들은 그러면 다 좋아했나 봐?”
또 또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말꼬리를 하나하나 잡고 집착하는 사람을 겪다 보면 넌덜머리가 나고는 했는데, 희한하게도 디아의 트집은 밉지 않았다. 저를 독차지하고 싶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던 어린 시절이 연상되는 탓도 없진 않을 것이다.
슬그머니 돌아앉은 반은 예나 지금이나 골려 주고 싶은 디아를 살짝 긁어 보았다. 보통 예민한 게 아닌 남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지만 제멋대로 나불거리는 혀를 제지할 수 없었다.
“뭐…. 본인은 남들이랑 다르다, 그런 뜻입니까?”
“장난치지 마. 이제 그런 거 안 통해….”
조금 더 활기찬 반응을 보여 주길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래도 유심히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음성에 스민 은근한 서러움이 옅은 미소를 불러들였다. 디아의 옆얼굴에 눈길을 고정한 반은 연거푸 거짓으로 매도당하나 조금도 거짓 없는 답을 돌려주었다.
“맞아요. 도련님은 다릅니다.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디아가 아니었더라면 높은 벽에 부딪혀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뒤돌아섰을 것이다. 반은 연신 부정하면서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초조한 심정을 드러내는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디아가 타인과 전혀 다른 의미로 제 삶에 자리 잡으리라는 것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약을 탄 머그잔을 건네지 않았더라면, 함께 도망쳤더라면….
제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된 디아는 반을 자신답지 않게 만들었다. 복잡하고 우울하게. 반은 자꾸만 깊어지고 우중충해지는 기분을 한숨에 실어 내보냈다. 복잡하고 우울한 것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고생깨나 하겠지만 도전할 수밖에.
***
반은 낭트에서 니스로 날아가는 2시간 남짓의 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난생처음 탑승한 전용기는 일등석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기장과 승무원은 새파랗게 어린 헬기 조종사로 인해 고통받은 반의 심신을 달래 주었다.
조종사에서 승객이 된 디아는 반이 신기한 마음에 승무원을 붙잡고 이것저것 말을 걸 때마다 툭툭 쏴붙여 대화를 단절시켰다. 심지어 비행기에서 내릴 때 인사조차 못 하게 했다. 기가 막힐 따름이었지만 지은 죄가 있는 반은 고분고분 도련님의 지시를 따랐다.
니스 공항에 도착하자 차 한 대가 기다리는 중이었다. 디아는 이번에도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하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탄 반은 안전벨트를 꼼꼼하게 매면서 넌지시 물었다.
“면허… 진짜로 있으십니까?”
“그럼 없겠어?”
“당연히 있으시겠지만….”
누구는 영화에서나 구경하는 전용기를 택시처럼 부리니, 면허쯤이야 돈으로 만들고도 남을 것이다. 디아의 신경을 긁지 않도록 말을 줄인 반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차창 너머로 눈을 돌렸다.
지중해와 맞닿은 니스는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인 만큼 겨울이 코앞인데도 활기찼다. 도로를 따라 늘어진 야자수가 맑은 하늘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마주하자 줄곧 갑갑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창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반은 운전 중인 디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선글라스를 써 눈에 띄는 흉터를 가린 디아가 능숙하게 핸들을 꺾었다. 새삼 4년간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며 꺅꺅거리던 아이가 실제 자동차를 운전하다니. 디아에게만 유독 빠른 세월이 야속했다.
잠시간 추억에 잠겼다가 깨어난 반은 핸들을 쥔 큼직한 손과 손목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뼈가 동글동글하니 예뻤다.
“도련님.”
“왜.”
막 섬을 떠나올 무렵에는 세 번 말을 걸면 한 번 대답해 주던 디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비행기에서 열심히 귀찮게 군 보람이 있었다. 반은 곧으면서 부드러운 옆선을 가만 들여다보며 감상을 내뱉었다.
“오늘따라 너무 예쁘세요.”
관광지의 분위기 탓인지 괜스레 기분이 좋아 흐흐 웃었다. 짙은 색 선글라스로 예쁜 눈을 가려, 지금은 번드르르하게 잘생긴 쪽에 가깝지만 아무튼.
뜬금없는 칭찬을 받은 디아는 잠시 말이 없다가 까칠까칠한 음성으로 빈정거렸다.
“지금 놀리는 거야?”
“예쁘다는 게 놀리는 겁니까?”
“이 얼굴을 보고도 예쁘다는 소리가 나와?”
반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의 흐름이 어딘지 모르게 어긋났다. 자신이 아는 디아는 예쁘다는 칭찬을 마다하거나 쑥스러워하는 놈이 아니었다. 본인이 예쁜 것을 잘 알고, 심지어는 이용까지 하는 얌체 같은 아이였다. 고민하던 반은 물음으로 답했다.
“…도련님이야말로 저 놀리시는 겁니까?”
“안 예쁘잖아. 하나도….”
단어 하나하나에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디아가 핸들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징그럽기만 해. 끔찍하게. 꼴도 보기 싫어.”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반은 손으로 입가를 덮었다가 주욱 쓸어내렸다. 말문이 턱 막혔다.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본인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작은 얼굴을 죄 가린 선글라스를 흘끔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흉터 때문에요?”
디아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당황한 반은 애먼 목덜미를 긁으며 적당한 답을 찾고자 머리를 굴렸다. 이목구비가 워낙 화려한 탓에 다른 곳으로 시선이 분산돼서 그렇지, 사실 디아의 흉터는 꽤 심한 편이었다.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온 힘을 다해 찢어 놓은 형태였다.
반은 저릿저릿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불안한 예감이 비껴가길 바라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것도… 미셸이 그랬습니까?”
“아니.”
짧은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져나갔다. 저것까지 미셸의 작품이었다면 이대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다. 사람이 염치가 있지, 아무렇지 않은 척 치근거리는 짓도 더는 이어 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범인이 미셸이 아니라고 해서 마음이 푹 놓이지는 않았다. 디아의 밉지 않은 예쁜 척을 앗아 간 놈을 향한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럼요? 누가 그랬어요?”
“알아서 어쩌려고.”
“죽여 버리려고요.”
망설임 없이 즉각 답하자 디아가 코웃음 쳤다. 비웃음도 웃음이라고, 반은 치솟은 짜증을 잊고 슬쩍 미소 지었다. 이렇게 차차 알아 가고 조금씩 풀어 가면 언젠가는 디아도 제 이야기를 들어 줄 거라는 기대가 피어났다.
일반인과는 사뭇 다른 심미안 때문에 지금은 풀이 죽어 있지만 살살 달랜다면 금방 예전의 모습을 찾을 테고. 반은 그럴싸한 미래를 그리면서 디아와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 갔다.
“힘도 약하면서.”
“저 힘 셉니다. 아시면서 그러신다.”
아기에서 어린이가 될 때까지 할 팔로 안고 다닌 게 누군데 힘이 약하다니. 기가 막혀 받아치자 쭉 뻗은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디아가 오른손을 뻗어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이거 풀 수 있어?”
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조금 컸다고 자기를 무시하는데, 양육자로서 본때를 보여 줘야 했다.
“당연히….”
붙잡힌 손목을 확 비틀려던 반이 멈칫했다. 손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슴 방향으로 툭툭 당겨 봐도, 반대쪽으로 밀어 봐도, 어깨에 힘을 줘 돌려 봐도 손목을 넉넉하게 감싼 길쭉한 손가락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디아는 힘을 준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분명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근력이 비등비등했던지라 당혹스러움이 물 밀듯 밀려왔다. 눈만 끔벅이던 반은 하하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은 피곤해서 그럽니다. 원래는 바로 푸는데….”
“거짓말. 못 풀면서.”
손목을 마구 비틀 때는 죽어도 풀리지 않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손바닥을 파고든 손가락이 제 손가락 사이사이로 밀려들어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길쭉한 손가락 끝이 손등뼈를 꾹 눌렀다.
“풀 수 있어?”
반은 얼기설기 얽힌 두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두 손 모두 상처가 많았지만 맞닿은 손바닥은 부드러웠다. 햇볕이 드리운 디아의 손끝, 약지 손톱에 새카만 멍이 들어 있었다. 많이 거칠어졌으나 여전히 따뜻한 손을 힘주어 잡고 가까이 당겼다. 긁힌 흉터가 무늬처럼 수놓아진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꼭 풀어야 합니까?”
조용히 속삭이자 직진하던 차가 머리를 틀었다. 예고 없이 핸들을 휙 꺾어 갓길에 정차한 디아는 도로가 펼쳐진 정면을 한참 노려보다가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선글라스에 가려져, 말없이 쳐다보는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눈을 내리깐 반은 하얀 손등에 다시금 입을 맞췄다. 디아는 짜증을 내지도, 손을 빼지도 않았다. 반은 핸들에 걸친 다른 손도 가져와 디아의 양 손등에 쪽쪽거리며 키스했다. 미동 없는 손을 뒤집어 손바닥에도 입술을 눌렀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키워 보드랍기만 했던 손바닥 군데군데 딱딱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런다고 피부 깊이 스민 흉터와 굳은살이 사라질 리는 없지만, 반은 얼굴을 감싸듯이 펼쳐진 손바닥에 입술을 부드럽게 비볐다. 입술을 벌려 딱딱한 살결을 살짝 물었다가 놓자 손가락이 움칠거리며 구부러들었다.
내어 줬던 양손을 홱 거둔 디아가 핸들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가 거칠게 액셀을 밟으면서 잠시 멈추었던 시간이 바퀴와 함께 굴러갔다. 시트에 뒤통수를 푹 기댄 반은 푸른 핏줄이 돋은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손잡을까요?”
“싫어.”
“…넵.”
예민한 남자는 역시 귀엽고 성가셨다.
공항에서부터 출발한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안가 앞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했다. 디아는 발레파킹을 맡기고 곧장 로비로 향했다. 신전 같은 호텔 외관을 마주하고 입을 떡 벌린 반은 화려한 내부 인테리어를 구경하면서 주춤주춤 디아를 따랐다.
로비 중앙에 우뚝 선 조각상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디아가 체크인하고 있었다. 이런 자잘한 것은 고용인인 자신이 처리해야 했음에도 디아가 워낙 손이 빨라 반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자꾸 떨어지지 마.”
카드 키를 챙긴 디아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더니 손을 휙 낚아챘다. 가까이 오라는 듯이 당기던 손은 그에게 찰싹 달라붙자마자 사르르 풀어졌다. 로비에 견줄 만큼 화려한 승강기에 올라타 문을 향해 돌아서자 서로의 손등이 스쳤다.
층수는 0층부터 5층까지 있었다. 5층 버튼을 누른 디아는 숫자가 올라가는 계기판에 눈길을 고정한 채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손등에 이어 손가락 끝이 조금씩 스쳤다. 마찬가지로 계기판에 시선을 준 반은 검지만 뻗어 길쭉한 손가락에 살짝 걸었고, 디아는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의 검지만 아슬아슬하게 잡은 상태로 5층에 도착했다.
승강기 문이 열리는 동시에 얽힌 손가락이 풀렸다. 반은 복도 끝 방으로 향하는 디아의 뒤를 따르며 간지러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마침내 쉴 곳에 도착한 반은 오묘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봤다. 예상보다 방이 작았다. 거기다가.
“침대가… 하나네요.”
장신의 남자 둘이 편히 눕기에 더블베드는 작은 감이 있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의심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자신을 소파에서 자게 할 셈은 아니겠지 싶어 디아를 흘끔거리는데, 포근한 침대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디아가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의아해진 반은 옷장 안을 들여다봤다가 희한한 것을 목격했다.
옷장 속 벽이 스르륵 열리고 있었다. 입을 쩍 벌린 반은 벽이어야 할 문을 손가락질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이거 옷장….”
“안 오고 뭐 해.”
또 다른 카드 키를 인식기에서 떼어 낸 디아가 문 너머로 발을 디디며 독촉했다. 어안이 벙벙한 낯으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방을 돌아본 반은 행거에 걸린 샤워 가운을 헤치고 디아에게로 향했다. 옷장과 다른 공간의 경계를 넘자마자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디아가 내부 인식기에 카드를 꽂자 어두컴컴한 공간의 조명이 한 번에 켜졌다. 환한 빛 아래 드러난 내부는 클래식한 호텔 외관과 딴판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미니멀리즘을 극한으로 추구했다고 할 수 있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황량했다.
넓은 공간을 벽으로 나누어 달리 문이 없었으며, 창문 또한 없었다. 천장에 설치된 공기 순환 장치가 고요하게 돌아가며 환기를 맡았다. 싱글 침대와 욕실이 방마다 하나씩 딸려 있었는데, 개중 한 공간은 호텔과 어울리지 않는 큼직한 철제 테이블이 차지하고 있었다. 휴식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확실한 목적이 있는 공간이었다.
“이게… 뭡니까?”
“방이지 뭐긴 뭐야.”
어떻게 봐도 수상한 공간이 익숙한 듯, 디아는 재킷을 벗으며 테이블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 벗은 코트를 팔에 걸친 반은 다시금 아득해졌다. 대체 이 외계인들은 어디까지 퍼져 있는 건가.
이쯤 되면 현 대통령이 외계인이라는 음모론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알고 보면 아비게일도 외계인이고 회사 사장도 외계인이었던 거지…. 의심증에 시달릴 바에야 이해하길 관두는 편이 나았다.
혀를 내두르며 두 손바닥을 내보인 반은 디아를 졸졸 쫓아가다가 벽에 가려져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공간을 맞닥뜨렸다. 놀라기에 앞서 할 말을 잃고 팔을 떨어뜨렸다.
벽 한 면이 무기류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권총부터 기관 단총, 소총에 이어 짧고 긴 나이프가 가지런하게 정리된 선반에서 권총 몇 자루를 골라낸 디아가 테이블로 돌아왔다.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 한구석에 놓아둔 그는 얇은 천을 깔고 권총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몇백 번, 몇천 번이나 해 본 것처럼 능숙한 손길이었다. 어쩌면 반 자신보다 더 많이 했을지도 모르겠다. 반은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는 광경을 복잡한 심경으로 응시했다. 디아가 연구와 관련된 인물을 하나씩 제거하는 중이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쯤은 있었나 보다. 굳은 뺨을 매만지며 눈을 돌렸다.
디아에게 실망했다거나 그가 두려워진 것은 아니다. 제 선택으로 인해 디아의 삶이 저렇게 됐다는 사실이 참담할 따름이었다. 제 탓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인과 관계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지금은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반이 한 걸음 물러났을 때, 분해를 끝내고 헝겊을 집어 든 디아가 쳐다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내 눈앞에 있어.”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가 도로 판판하게 편 반은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 두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엎드린 반은 포갠 팔에 턱을 얹었다. 총강 내부에 기름칠하는 디아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쇳덩이 냄새가 코로 밀려들었다.
따지자면 디아는 그들의 히트맨인 셈인가. 생각이 많아졌다. 용병 회사에서 구르는 동안 돈을 받고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는 놈을 가끔, 아니 꽤 많이 봤다. 사실 용병이란 그런 일을 주로 하는 집단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반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를 비난할 처지도 못 됐다. 그러나 총을 손질하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들여다보면서도 실감이 날 듯 말 듯 했다. 헝겊으로 기름을 닦아 내는 새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이 서글프게 다가왔다. 저런 건 가르쳐 준 적 없는데.
호텔까지 오는 길에 만났던 관광객들과 내일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총을 손질하는 디아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파렴치하게도 반은 연구소에서 도망친 디아가 새로운 환경에 들떠 웃음꽃을 틔우는 관광객처럼 살길 바랐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그를 버린 입장이니 참견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아래로 내리깐 눈을 들어 올린 반은 그리웠던 얼굴을 훑어 내렸다.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술도 예쁜데 시종 무표정했다. 근심거리라고는 내일은 무슨 영화를 볼지 고민하는 것이 전부였던 때처럼 디아가 환히, 편하게 웃어 줬으면 했다. 염치없는 바람이 혀를 움직이게 했다.
“저 프랑스 처음 와 봤습니다. 니스도 당연히 처음이고요.”
“그런데?”
“도련님이랑 같이 와 보고 싶었어요.”
손질을 끝낸 총에 소음기를 장착하던 디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거짓….”
“거짓말 아니고.”
말을 낚아챈 반은 팔 하나를 쭉 뻗어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디아의 손목뼈를 검지로 살살 긁었다.
“많이 후회했습니다. 왜 집에만 가둬 놨을까…. 몰래 나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유려한 손놀림으로 총신을 만지던 손가락이 굳었다. 디아는 조립을 끝낸 총을 천 위에 올려 두고 긴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와 눈을 맞춘 반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물었다.
“늦었지만… 같이 나가 보면 안 될까?”
무겁지만은 않은 침묵 속에서 눈을 굴리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요?”
***
호텔에서 마세나 광장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10분쯤 걸렸다. 전용기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은 덕에 허기지지 않아서 식사는 생략하고 찬찬히 산책하기로 했다. 반의 독단이었다.
불그스름한 건물과 밤을 밝히는 가로등이 어우러진 광장을 거닐자 유럽에 온 느낌이 물씬 났다. 싸늘하지 않아서 산책하기 적절한 날씨였다.
기껏 유럽까지 왔는데 관광 한번 제대로 못 하고 곧장 섬에 갇혔던 반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낯선 풍경을 눈에 담았다. 걸음마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핸드폰은 몇 달째 서랍 속에 잠들어 있었다. 여권과 지갑만 후다닥 챙기다가 핸드폰을 깜박했더랬다.
아쉽지만 한 번쯤은 핸드폰 없이 여행하는 것도 낭만이라고 여기며 곁을 흘끔거렸다. 오밤중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디아는 격자무늬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불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활개 치고 다녔으니 시력이 남다르긴 한 모양이었지만 예쁜 눈을 못 보는 것이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쉬움과는 별개로 입꼬리가 움찔움찔 올라갔다.
별 기대 없이 던져 본 것뿐인데 정말 함께 나와 줄 줄이야. 싫다고, 밉다고 치를 떠는 것치고 부탁하면 은근히 들어주는 디아가 귀여웠다. 이러니까 죽인다, 어쩐다 해도 전혀 걱정이 안 되지.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반은 나란히 걸어가는 디아의 팔에 제 팔뚝을 슬쩍슬쩍 부딪쳤다. 일부러 건드리는 것을 뻔히 알 텐데도 디아는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말만 삐뚜름하게 하지 피하지 않는 디아 덕분에 자신감이 샘솟은 반은 은근슬쩍 말을 붙였다.
“니스에 자주 와 보셨습니까? 혼자? 아니면 그… 친구들이랑?”
식스와 체마를 떠올리며 묻긴 했지만 그다지 친밀한 관계로는 보이지 않았다. 디아도 대꾸가 없었다. 눈치를 살핀 반은 주제를 휙 돌려 종알종알 떠들었다.
“파리 관광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더라고요. 근데 여기도 좋네요. 여름에 오면 진짜 예쁠 것 같아요. 여기 여름은 어때요? 와 보셨을 것 같은데.”
팔꿈치로 그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디아와 여름에 또다시 와 보고 싶다고 태평하게 생각하며 앞으로 슬렁슬렁 나아가던 반은 문득 곁이 허전해 뒤를 돌아봤다. 그 자리에 멈추어 선 디아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발길을 돌려 한 발짝 다가갔을 때였다.
“넌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여?”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디아의 음성은 무정하게까지 들렸다. 얌전히 따라 나올 때는 언제고, 또 손바닥 뒤집듯 기분이 바뀐 디아를 향해 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게 손대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을 뿐이지 장난이라고 여긴 적은 없었다.
무겁지 않게 다가가려는 태도가 디아에게는 기만으로 느껴졌는지, 그는 갑갑하다는 것처럼 윽박질에 가까운 질문을 쏟아 냈다.
“겁이 없어? 실망도 안 해? 내가 무슨 짓 하고 다녔는지 다 알았으면서 왜 자꾸 너만 아무 일 없는 척하는데?”
“그냥….”
입매에 남은 웃음기를 거둔 반은 디아가 줄곧 바라보던 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실망하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실망할 짓을 저질렀음에도 품어 주길 바라는 걸까.
디아의 행동은 상대를 상처 입히고 싶어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과 닮았다. 본인이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복수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반 역시 그런 시기를 겪어 봤다. 제 상대는 꿈쩍도 안 했지만 말이다.
반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럴싸한 말을 꺼내는 대신 솔직히 답했다.
“좋아서요.”
관심 한 톨 받고자 해괴한 짓이란 해괴한 짓은 다 저지르다가 이 지경이 된 자신과 달리 디아는 제법 성공했다. 디아가 행복이란 걸 모르는 사람처럼 굴 때마다, 평범과 거리가 먼 삶을 자연스럽게 영위할 때마다 반은 상처를 입었다.
대놓고 상처받으라고 내뱉는 모진 말들은 오히려 더 하라고 부추기고 싶을 정도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그가 살아온, 살아가는 삶은 이상하리만치 따가운 상처를 남겼다.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속내였다. 입꼬리를 끌어 올린 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던하게 답했다.
“도련님이랑 여기 올 거라고는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그래서 좋아요. 뭐가 됐든.”
“…뭐가 됐든 좋다고.”
거짓은 아니었으니 고개를 끄덕이자 디아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이게 아닌가 싶어 한 발짝 다가가기 무섭게 비웃음이 스민 힐난이 튀어나왔다.
“날 좋아한다고 해 놓고 버렸잖아. 나밖에 없다고 해 놓고 다른 놈들이랑 뒹굴었잖아.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이제 또 무슨 짓을 할까 봐 짜증부터 나.”
반은 신랄하게 몰아붙이는 디아를 망연히 바라봤는데, 그는 짜증스러운 것이 아니라 겁이 난 것처럼 보였다. 두려움을 숨기고자 가시를 바짝 세워 공격하는 아이 같았다.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실없이 굴 때가 아니라 오해부터 풀었어야 했나. 반은 다급히 디아의 팔을 붙잡았다.
“그때는 내가, 아니 제가 약 탄 거 맞아요. 도련님한테 먹인 것도 맞고. 그런데 잠든 거 보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지금 와서 들어 봤자 무슨 소용이야….”
변명은 듣기도 싫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디아가 손을 뿌리치고 스쳐 지나갔다. 반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저걸 어디 묶어라도 두고 지난 4년간의 이야기를 꽉 막힌 귀에 때려 박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디아가 이토록 대화를 회피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짐작은 갔다. 망할 놈의 외계인들이 제가 디아를 멋있게 구하러 간 일은 쏙 빼고 살짝 문란했던 시기만 부풀려서 전달한 탓이겠지. 뻔했다.
방해물이 너무나도 많은 현실이 속을 갑갑하게 했지만, 점차 발걸음을 늦추다가 뒤를 살짝 돌아보는 디아 때문에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매정하게 굴 거면 확실히 외면하기나 하든가. 상처받을 틈을 주지 않는 디아에게로 가볍게 뛰어간 반은 어깨를 스치며 붙어 섰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또 성질이 급해서…. 우리 도련님 이런 얘기 싫어하는 거 아는데, 저는….”
“그 얘기 하지 마. 생각하는 것도 싫으니까.”
“…그럴게요.”
당분간은 말이다.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였고, 디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고, 지금은 시간이 필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디아와 발을 맞춰 걸으며 다시 관광객 놀이에 푹 빠진 반은 골목 안에 자리한 가게 하나를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덩달아 발길을 멈춘 디아의 팔을 잡고 가게를 가리켰다.
“젤라또….”
씩 웃으며 대기 줄이 긴 젤라또 가게를 콕콕 가리키자 디아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세 스쿱이나 뜬 젤라또를 받아 든 반은 지갑을 여는 디아를 얼른 막으려 손을 내저었다. 코트 주머니에서 소중히 챙겨 온 지갑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애기가 무슨….”
“뭐?”
헛소리가 튀어나온 입을 헙 다문 반은 서둘러 환전해 온 현금으로 계산한 다음 뻔뻔하게 대응했다.
“예?”
“방금 뭐라고 했어.”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뭐라고 했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맹렬히 노려보는 시선이 짙은 선글라스를 뚫고 뺨을 찔렀다. 곧 죽어도 눈을 맞추지 않고 젤라또를 한 입 베어 물자 디아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한마디 툭 던졌다.
“넌 애기랑 섹스도 하나 보지.”
“큽….”
녹은 젤라또가 기도로 넘어갔다. 콜록콜록 기침을 뱉는 반의 귓바퀴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말버릇 참….”
남자의 모난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반은 버릇없는 말투를 꼬집지 못하고 허둥지둥 그를 따라갔다. 액세서리나 잡화를 파는 가게가 나오면 유독 눈길이 묶이는 디아에게 스푼을 내밀었다.
“아.”
디아가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딸기 맛 젤라또를 입 안에 넣어 주려던 반은 스푼을 뒤로 쏙 빼며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을 바라봤다.
“이거 먹으면 제 얘기 딱 한 시간 들어 주는 걸로. 안 되나…?”
염치없이 구는 데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반의 요구에 판판한 미간이 구겨졌다. 디아는 삐딱하게 기운 고개만큼 삐딱하게 답했다.
“귀여운 척하면 넘어가 줄 것 같아?”
“별로 귀여운 척 안 했는데…. 제가 막 귀엽게 보이시나 보다.”
디아는 실수했다는 듯 살짝 벌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또 팩 토라져 역정을 내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디아는 허공에 뜬 손을 덥석 잡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핏빛을 머금은 입술 새로 스푼이 사라졌다.
깔끔하게 젤라또를 훔쳐 먹은 디아는 휙 돌아 걸음을 옮겼다. 반은 뜨끈뜨끈한 그의 체온이 남은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갑자기 아주 옛날 일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제 손가락을 빨던 발칙한 소년이. 많은 것이 바뀌었음에도 달라지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반은 딱 한 번 짜증을 낸 후 얌전해진 디아를 끌고 골목골목을 쏘다녔다. 포기한 것 같기도 했고, 성질낸 것을 후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방향을 바꾸자며 팔짱을 끼거나 상점에서 파는 괴상한 머리띠 따위를 가져다 대도 순한 고양이처럼 고분고분했다.
관광지의 분위기에 젖은 반이 왈칵 웃음을 터트리면 굳게 다물린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바로 옆에서 스치는 반의 손을 잡을 듯이 팔을 뻗었다가 조용히 거두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됐다.
거대한 아치형 길을 통해 호텔로 돌아가는 길, 밤이 깊어 가게는 셔터를 내렸고 그 많던 관광객들도 자취를 감췄다.
혀에 젤라또의 단맛이 감돌았다. 어깨가 움츠러드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반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디아와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 새삼 믿기지 않았다.
디아를 잃은 후로 이만큼이나 편안하고 설렌 적이 있었던가.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 순간이 몹시도 소중했다. 디아는 묻지 않으면 먼저 말하는 법이 없고,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단답이나 비아냥이 대부분이었지만 대답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진전이 있다고 여기자 이 순간을 조금이나마 더 유지하고 싶어졌다. 반은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는 디아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놀랐는지 움찔거리는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엮고 멈추어 서자 디아의 걸음도 멎었다. 돌아보는 남자의 머리카락이 지중해에서 불어온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이국적인 풍경과 깊은 밤이라는 조건이 용기를 불러왔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거둔 반은 제 딴에 가장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저 많이 기다리셨어요?”
디아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가 놓았다. 이를 악물었는지 턱에 힘이 들어갔다. 가까이 다가간 반은 새카만 선글라스에 비치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을 보고 싶었다. 디아의 감정을 알고 싶었다.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선글라스를 위로 끌어 올리자 괴롭게 일그러진 두 눈이 드러났다. 가로등 불빛이 고인 녹안은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절로 이는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또다시 모진 말이 터져 나올까 봐 이를 악문 디아의 모습은 죄책감과 동정심을 쿡쿡 찔렀다. 떨어져서 자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반은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겼다. 흉터를 의식하고 고개를 트는 디아의 턱을 한 손으로 감싸고 불시에 입을 맞췄다. 정체를 밝히기 전에는 일에 매진하기 힘들 정도로 틈날 때마다 입을 맞춰 왔던 남자가 뒤로 물러서며 키스를 피했다.
“…하지 마.”
“싫어요.”
단호하게 속삭인 반은 고개를 기울여 디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정말 싫으면 밀어 내면 된다. 그러면 더 성가시게 굴지 않고 물러나 줄 생각이었지만 디아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 말라는 말도 없었다.
허락 아닌 허락을 받고 너른 어깨를 짚은 반은 보드라운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아프지 않게 빨아들였다. 어깨를 쓸어 올린 손을 목덜미로 옮기며 촉촉한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으려던 때, 큼직한 손바닥이 얼굴을 확 감싸 쥐었다.
“읏…!”
무심결에 뒷걸음질 칠 정도로 입술이 강하게 맞물렸다. 도톰한 혀가 다급하게 파고들어 반의 혀를 옭아맸다. 천장을 받친 기둥에 등을 부딪쳤다. 다리 사이로 단단한 허벅지가 밀려들어 와 퇴로를 막았다.
거친 숨결이 서로의 입 안으로 삼켜지며 헐떡이는 소리가 커졌다. 반은 지금껏 참았던 욕구를 퍼붓듯 거칠게 키스하는 디아의 목을 기꺼이 끌어안았다. 여행지의 낭만이 그를 조금이나마 녹여 주길 바라면서.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찬바람이 묻은 코트를 벗은 반은 성난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디아를 곁눈질했다. 차마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키스를 퍼부을 때는 언제고 갑자기 토라져서는 귀갓길 내내 입을 다문 남자가 욕실로 사라졌다. 쾅 닫히는 문이 그의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저 자신이 싫은 듯했다.
반은 그를 혼자 두기로 했다. 얼마나 물리고 빨렸는지 두 배로 두꺼워진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다른 욕실로 향했다. 겹겹이 껴입은 정장을 벗고 따뜻한 물로 피곤함에 절은 몸을 녹이자 가쁜 숨결이 오가던 키스가 떠올랐다.
디아가 아직도 정체를 숨기고 귀한 도련님 행세를 하는 중이었다면 승강기에서 허겁지겁 서로의 옷을 벗기며 돌아왔을 만큼 진득한 키스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섹스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몰상식한 성욕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토라진 남자를 몸으로 꾀어내는, 나잇값 못 하는 계획을 세우다가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내려쳤다. 특이한 부분에서 감성적인 디아를 고려하면 섹스로 화해하려는 시도는 접는 편이 좋을 듯했다.
이건 전부 디아가 끝내주는 섹스를 하는 탓이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은 물러설 곳도, 다가설 곳도 없이 갇힌 기분에 허덕이면서 샤워를 끝냈다.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온 반은 벽 너머로 고개를 스윽 내밀었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디아는 여태 씻고 있었다. 욕실로 다가가자 물줄기가 타일에 부딪치는 소리가 문 너머로 미미하게 들려왔다. 음흉한 의도 없이 손잡이를 돌려 보았으나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반은 문 틈새에 입술을 붙이고 잠정 퇴근을 알렸다.
“저 자러 가겠습니다. 저어기 구석 침대 쓸 건데 오셔도 되고, 안 오셔도 되고….”
여지를 남기고 물러나자 욕실 안에서 물건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눈썹을 쓱 들어 올린 반은 젖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넓은 공간 구석에 자리한 침대로 향했다. 싱글 침대 위로 철퍼덕 엎어지자 절로 끙끙거리는 신음이 흘렀다.
“윽…. 내 허리….”
디아에게는 생각 있으면 오라고 꼬드겼지만, 솔직히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새벽에는 이리저리 뛰어다녔지, 잠 한숨 못 잤지, 헬기에 전용기까지 타며 이동했지, 게다가 몇 시간이나 걸어 다니며 관광에 몰두한 탓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슬슬 저리기 시작하는 허벅지를 주무르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관뒀다. 무거운 눈꺼풀이 뚝 떨어지며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정신을 놓듯 까무룩 잠든 반은 동이 트지 않은 새벽에 눈을 번쩍 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침대를 짚고 상체를 세웠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곯아떨어져서 그런지 목과 어깨가 뻐근하게 결렸다. 좁은 침대에 주저앉아 목덜미를 주무르며 하품을 쩍 했다. 눈이 자꾸 감겼지만 짧고 깊은 숙면 덕에 피로는 제법 가신 상태였다.
스탠드를 켜고 잠기운이 그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디아는 보이지 않았다. 말 몇 마디에 홀라당 넘어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기왕 일어난 김에 아이가 잘 자고 있나 확인이나 할 심산으로 침대에서 내려섰다.
멀찍이 떨어진 방으로 실내화를 직직 끌며 다가간 반은 벽을 사이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실내화 밑창이 바닥을 스윽스윽 스치는 소리와 소곤거림이 들렸다. 이 시간에 통화를 하나 싶어 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흠칫 놀랐다.
검은 덩어리가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멀리 위치한 스탠드 조명에서 뻗어 나온 빛은 어둑어둑한 공간을 환히 밝히지 못해서, 반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흐리멍덩하게나마 사물이 분간 가기 시작하자 덩달아 무뎌졌던 청각이 서서히 돌아왔다. 쫑긋 세운 귀로 조그마한 속삭임이 흘러 들어왔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이야. 전부 거짓말이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안을 들여다본 순간 숨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디아는 핸드폰이 아니라 목걸이를 움켜쥐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반은 이곳까지 걸음 한 이유를 잊고 그를 멍하니 응시했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방을 빙빙 돌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남자는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작은 문제가 생긴 듯하다고 짐작한 적은 더러 있었으나 이 정도로 비정상적인 모습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순 섬뜩해져 그를 공연히 바라보기만 할 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디아는 침대 뒤로 뻗은 널찍한 공간을 외면하고 아주 협소한 범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방이 가로막힌 작은 공간을 돌아다니는 모양새였다. 그 광경이 의아할 무렵 뇌리를 스치고 가는 광경이 있었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 작은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작은 방, 새하얀 벽에 얼룩지던 붉은 경광등….
온몸의 피가 빠져나갔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넋이 나가며 입이 바싹 말랐다. 디아는 아직도 그 작은 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섬뜩함이 안타까움으로,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당장 뛰어들고 싶은 마음으로 뒤바뀌었다. 더 지체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디아의 팔을 붙잡아 제게로 돌려세운 반은 고운 이마와 뺨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너 괜찮아? 왜 그래. 숨 쉬어 봐, 어?”
꿈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넋이 나간 디아는 순순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반은 양손으로 그의 뺨을 따끔하게 내리치고 고개를 받쳐 올렸다.
“디아. 나 봐.”
초점이 흐린 눈을 들어 올리자, 증오로 똘똘 뭉쳐 모진 말을 쏟아 냈던 지난 새벽과 전혀 다른 낯이 드러났다. 골격이 자라고, 경험이 쌓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동안 실은 전혀 성장하지 못한 그의 민낯이었다.
반이 이십 년 넘도록 쌓아 온 모든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가고도 성장하지 못한 소년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언제나 목구멍에 걸려 있는 이름을 아주 힘겹게 토해 냈다.
“…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얼굴 근육을 움직일 여력이 없어 풀어진 표정, 가운 소매를 붙드는 손길을 포함해 디아를 이루는 모든 요소는 숨결만 스쳐도 깨어질 듯 연약했다.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명백했다. 죄책감이 울컥 치밀어 오른 반은 양팔을 벌려 디아를 부족한 품에 끌어안았다. 어깨에 뜨끈한 이마를 떨어뜨린 디아가 밭은 숨을 터트렸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응?”
반은 너른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툭툭 던지는 몇 마디와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손길에 겉으로 드러냈던 것보다 훨씬 더 흔들리고 있던 디아가 품에 안겨 들었다.
두꺼운 팔이 허리를 족쇄처럼 조이고 식은땀이 배어난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다 자라 놓고 어릴 때보다 더욱 애달프게 구는 남자를 강하게 안은 반은 빈말만 내뱉던 가벼운 입을 벌렸다.
“나 이제 어디 안 가. 네가 가라고 해도 안 갈게. 정말로.”
이번만큼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심이었다. 반은 제 잘못을 시인하며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고작 2년 남짓 그리워하다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디아를 냅다 인생에서 도려낸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혼자 잘 먹고 잘 살면서 디아도 잘 지낼 거라고 합리화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으니까. 정작 디아는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는데.
반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디아를 침대에 누이고 품을 내어 주었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디아와 다리를 얽고 몸을 빈틈없이 붙였다. 4년 전, 이렇게 비좁은 침대에 누워 노닥거렸던 때처럼.
디아가 안정을 찾고 잠들 수 있도록 한참이나 뒤통수와 등을 토닥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허리를 감은 손에 목걸이를 꼭 움켜쥔 디아가 몽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나 찾으러 왔어?”
“갔지, 당연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넌데.”
“언제?”
“바로… 는 아니고 몇 달 뒤에.”
“왜 일찍 안 왔어?”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차근차근 답하던 반은 머뭇거리다가 당시 제 심리를 포괄하는 감정의 이름을 꺼냈다.
“무서워서.”
누명을 뒤집어써 경찰서를 들락날락하고, 온갖 어려운 법률 용어를 들이미는 변호사의 겁박을 겪으며 내심 겁을 집어먹었던 것 같다. 안팎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며 디아는 뭣도 없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덜컥 찾아든 두려움은 고향을 떠나게 했으며, 담요를 뒤집어쓰고 숨게끔 했다. 그렇게 겁쟁이처럼 군 결과, 디아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말았다.
“미안해.”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무려 4년이다. 디아의 시간으로 따지면 수십 년이나 다름없었다. 몇 달 분노하다가 나중에는 감정을 쏟는 것조차 아깝다며 저를 새카맣게 잊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여태껏 저를 떠난 다른 사람들처럼.
반은 디아의 비대하고 깊은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말도 안 되는 충만감을 느꼈다. 양면적인 감정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때, 어리광 부리듯 파묻은 이마를 비비적거린 디아가 중얼거렸다.
“기다렸어, 오래오래. 아프고 힘들었는데…. 그래도 기다렸어.”
“…미안해.”
“믿고 싶은데… 그게 힘들어.”
눈가와 마찬가지로 우둘투둘한 흉이 새겨진 그의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잠꼬대처럼 조그맣던 속삭임이 더더욱 줄어들었다.
“너무 오래 미워했나 봐.”
스쳐 지나가는 한마디에 담긴 설움이 어찌나 깊은지, 반은 감히 제 고난을 토로하지 못했다. 못지않게 팍팍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디아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참 하잘것없이 느껴졌다. 말을 잃은 반의 허리를 힘주어 껴안은 디아는 반에게 두 번 다시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심어 줬다.
“나 버리지 마. 내가 잠깐 못되게 굴어도… 떠나면 안 돼. 부탁이야, 반.”
그 한마디를 남긴 디아는 마침내 지쳐 잠들었다. 반은 가슴에서 번지는 저릿저릿한 통증을 무시하며 죽은 듯이 잠든 디아를 토닥여 줬다.
참… 이래서야 모진 말을 폭격기처럼 퍼붓는다고 해도 미워할 수가 없지 않나. 애당초 디아의 말 하나하나는 투정으로 느껴져 상처받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반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 무서울 정도로 거대한 감정을 받아 본 적 없는 나머지 요란스럽게 뛰어 대는 심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다음 날, 반은 좁은 침대 위에서 홀로 눈떴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 한 사람 몫 식사가 있었고 디아는 보이지 않았다.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을 다듬을 새도 없이 남자를 찾았다. 다행히 디아는 어디 가지 않고 무기가 그득한 방에서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통화 중이었다. 욕실로 후다닥 달려가 꼼꼼히 세수한 다음 트레이를 챙겨 옆방으로 향했다.
널찍한 테이블에 트레이를 올려 두고 맞은편에 앉은 반은 헛기침을 하며 디아를 흘긋거렸다. 상체에 딱 달라붙는 검은 목폴라를 입은 디아가 통화를 종료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뭘 그렇게 봐?”
예상외로 새침한 대꾸가 돌아왔지만 반은 굴하지 않았다.
“오늘도 예쁘십니다. 아침에 예쁘기 쉽지 않은데.”
트레이를 덮은 돔을 곁으로 치우며 일단은 칭찬으로 시작했다. 여전히 저를 놀린다고 생각하는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흉터를 비스듬하게 가리는 디아를 불렀다.
“어제 말인데….”
불편할 수 있는 주제를 꺼내자 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젯밤이 기억나지 않는 건지, 기억 안 나는 척을 하겠다는 건지. 디아는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시선을 스르륵 돌렸다. 반은 쓰게 웃었다. 모르는 척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가 준비될 때까지 조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한 반은 무난한 조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고성에서 매끼 황홀한 식사를 챙겨 먹었더니 입맛이 까다로워진 듯했다. 딱히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빵을 찢어 우물거리다가 무언가를 먹은 흔적이 없는 테이블을 쭉 훑었다.
“식사는요. 아직도 조금만 먹습니까? 요만큼?”
손을 옹졸하게 모아 흔들자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디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많이 안 먹어도 돼.”
“그래도요. 이건 잘 먹었잖아요. 아.”
알록달록한 과일이 담긴 컵에서 포도 한 알을 골라내 내밀었다. 싱그러운 청포도 한 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가 먹여 달라는 듯이 입술을 벌렸다.
빨간 속살이 얼핏 보이는 입술 새로 포도를 밀어 넣자 말캉한 혀에 손가락 끝이 스쳤다. 반은 오므라들며 살점을 살짝 무는 입술에서 손가락을 더디게 빼냈다. 입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손가락 끝에서 맥박이 뛰었다.
정적이 흘렀다. 눈을 내리깔았다가 들어 올리자 벌어진 가운 새에 시선을 꽂은 디아가 보였다. 허리를 조인 끈만 풀면 드러날 알몸을 상상하는지 눈빛이 평소보다 흐렸다. 그러나 디아는 반의 바람과는 달리 금세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떼어 냈다.
“다 먹었으면 옷 입어. 벗고 있지 말고.”
“아직 안 벗었는데, 벗는 게 좋으시면….”
어깨에 걸친 가운을 슬쩍 내리자마자 디아가 미간을 왈칵 구겼다.
“그런 짓 하지 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태블릿을 탁 소리 나게 내려 두기까지 했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 반은 어깨를 으쓱여 가운을 제대로 여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레이를 챙겨 들면서 이쪽은 언제든 준비가 됐다는 의사를 밝혔다.
“생각 있으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
“…다른 놈들한테도 그렇게 말했어? 옷 벗으면서?”
“몇 번 말합니까. 도련님한테만 이런다고.”
이렇게까지 갖은 수작을 부릴 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지난 4년간 없었다고 자신했다.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직전, 뒤를 돌아본 반은 싸늘해진 남자에게 제 치부를 넌지시 알려 줬다.
“사실 저요. 도련님 아니면 안 서거든요. 이렇게 된 지 오래됐습니다.”
자위는 가능하다는 말로 자존심을 세울까 고민했으나 순간적으로 멍해진 디아를 맞닥뜨리자 그깟 자존심, 좀 버리기로 했다. 그래도 민망함은 어쩔 수 없어서 서둘러 걸음을 떼어 낸 반은 휙 몸을 돌려 벽 너머로 고개만 쑥 내밀었다.
“아. 또 이상한 생각 할까 봐 그러는데, 도련님이랑 했을 때 선 거. 그거 진짜 오랜만이었습니다. 도련님이랑 마지막으로 했을 때 이후로 진짜로 처음.”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해야겠어?”
제 과거를 파헤쳤다면 못 믿는 것이 당연했다. 반은 기분이 확 상한 듯 눈살을 구기는 디아에게 씩 웃으며 답했다.
“제가 제 몸 두고 발기 부전이라는데 도련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뭐, 정 못 믿겠으면 그 뒷조사한 사람들한테 물어보시든가요.”
제가 발기 부전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는 맥스만 만나 봐도 알 것이다. 믿을지 말지는 디아에게 달렸지만. 반은 예민한 도련님이 또 성을 내기 전에 방 앞을 벗어났다. 약점 중의 약점을 제 입으로 까발렸지만 어쩐지 속이 다 후련했다.
미지의 공간에는 무기류 외에도 옷 몇 벌이 구비되어 있었다. 빈손으로 온 이유가 있었다. 반은 소름 돋을 만큼 사이즈가 딱 맞는 옷가지를 걸치고 몸을 살펴봤다. 허리에서 끝나는 적당한 길이의 점퍼와 짙은 색 청바지가 꽤 마음에 들었다. 새 운동화를 신은 발을 작게 굴러 봤는데, 운동화 또한 불편한 느낌이 없었다.
오랜만에 왁스를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이마에 가뿐하게 흩트린 반은 가죽 재킷을 걸친 디아의 뒤를 쫓으며 늘씬한 몸을 훑어 내렸다. 체형이 예뻐서 그런지 뭘 입어도 태가 났다.
발기 부전이니 뭐니 제 입으로 줄줄 늘어놓은 치부를 믿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누그러진 듯했다. 어려운 듯하면서도 쉽고,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남자와 기차역으로 들어섰다.
척 보기에도 묵직한 가방을 든 디아는 여행객이 바글바글한 기차역을 빠르게 가로지르며 수시로 반의 동태를 살폈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도망갈까 봐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으로 보였다면, 새벽의 속삭임을 떠올리자 그가 달리 보였다. 여행객을 막지 않으려고 딱 한 걸음 떨어져 걷는 것뿐인데도 심히 불안해하는 기색이 눈에 띄었다. 하는 수 없었다.
냉큼 거리를 좁힌 반은 허벅지 부근에서 흔들리는 디아의 손을 그러쥐었다. 놀란 듯 아래를 내려다보는 디아의 손바닥을 파고들어 정답게 손을 맞잡고 웃었다.
“길 잃을까 봐. 제가 여기 잘 모르잖습니까.”
“…수작인 거 다 알아.”
디아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손을 꼭 움켜쥐고 걸음을 옮겼다. 디아가 조그만 머리통으로 온갖 망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모르는 반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서 그저 만족스러울 따름이었다.
디아는 개표구나 대기실로 가지 않고 인적이 드문 복도로 향했다. 멀어지는 인파를 돌아본 반은 비상구 문을 여는 디아에게 물었다.
“기차 안 탑니까?”
“탈 거야.”
“타러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
“그쪽에서 기차를 통째로 빌렸어. 우리는 몰래 탈 거고.”
“…몰래요.”
반은 허탈하게 웃었다. 무임승차라니. 황당했지만 개릿이 탑승한 기차를 통째로 날려 버리겠다고 선전 포고하는 것보다는 아무렴 낫겠지 싶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또 다른 복도로, 복도 끝에 위치한 비상구로 가는 동안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마치 미리 길을 비워 둔 것 같았다. 반은 어느새 선글라스를 벗은 디아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흘끔거리다가 생각하기를 관뒀다. 대통령도 외계인일지 모르는 마당에 기차역 비밀의 통로를 출입 통제하는 일쯤이야.
인파가 사라졌음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는 디아에게 붙어 선 반은 때마침 떠오른 궁금증을 꺼냈다.
“도착지에서 기다리면 안 됩니까? 그게 더 편할 것 같은데.”
“어디서 세울지 모르니까. 기차 안에서 처리하는 게 편해.”
“아하….”
외계인이라고 만능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입매를 일자로 만든 반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디아의 등에 코를 부딪쳤다. 얼얼한 코끝을 매만지며 말은 하고 멈추라고 툴툴거리려던 찰나, 뒤를 돌아본 디아가 제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벌린 입을 조용히 다물자 묵직한 가방을 건넨 디아가 비상구 문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열린 문 틈새로 햇빛이 쏟아졌다. 눈가를 찌푸리기 무섭게 손을 뻗은 디아가 누군가를 확 낚아챘다.
“큭…!”
체구가 상당한 경호원의 목을 단번에 꺾은 디아가 축 늘어진 몸뚱이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일이 워낙 순식간에 벌어져, 반은 바닥에 쓰러진 경호원과 가방을 가져가는 디아를 입 떡 벌리고 번갈아 볼 뿐이었다. 눈이 마주친 디아는 치부를 들킨 듯 움칠하더니 곧장 시선을 돌렸다.
“…지금 타야 돼.”
“아, 예….”
얼떨떨하게 답한 반은 엎어진 경호원을 껑충 뛰어넘어 문 너머로 나섰다. 지금은 마냥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동태를 살피자 승강장의 전경과 출발을 앞둔 기차가 보였다. 출입문은 아직 열려 있었지만 닫히기 직전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경호원 서넛이 승강장을 거닐며 주변을 살피고 있어 기차까지 접근하기가 녹록하지 않았다. 기차역이라는 장소 특성상 총을 꺼내 드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이를 어쩐다, 고민하기 무섭게 디아가 기둥 앞을 지나가는 경호원을 조금 전과 동일한 방법으로 깔끔하게 처리했다. 목뼈 꺾이는 소리가 살벌했다.
몸뚱이를 기둥 뒤편에 숨긴 즉시 디아는 얼빠진 반의 팔을 움켜쥐고 닫히기 시작한 기차 출입문으로 뛰어들었다. 반의 운동화 밑창이 기차 칸 바닥을 딛자마자 아슬아슬하게 문이 닫혔다.
디아는 곧장 반을 화장실 칸에 밀어 넣고 자신도 들어섰다. 화장실 문을 밀어 닫는 것과 동시에 모든 창에 빠짐없이 커튼을 드리운 기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거들어 줄 틈도 없이 이리저리 휩쓸린 반은 바투 붙어 선 남자의 어깨에 코를 박은 채로 줄곧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하아….”
맞닿은 가슴으로 전해지는 디아의 심장 박동은 심장이 입으로 쏟아질 것 같은 자신과 정반대로 느리고 규칙적이었다. 변기 커버를 한쪽 발로 디딘 디아는 속눈썹이 돋보이는 눈을 내리깔고 귀를 기울였다. 하얀 손에는 어느샌가 소음기를 장착한 총이 들려 있었다.
세면대와 변기 틈새에 낀 데다 그의 품에 쏙 안긴 반은 뒤엉킨 자세를 인식할 겨를도 없이 긴장한 낯으로 화장실 문을 바라봤다.
“17번 차량 점검 중.”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척이었다. 반은 마른침을 삼켰고, 디아는 문을 향해 총구를 가져다 댔다. 걸음이 점차 가까워지더니 잠그지 않은 문 앞에서 소리가 뚝 멎었다. 화장실 문이 살짝 열렸을 때, 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통이 터져 나가는 광경을 맨눈으로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방아쇠에 얹은 검지가 구부러지기 직전 다른 사람의 음성이 섞였다.
“그쪽은 확인했다. 18번으로 가 봐.”
조금만 더 열었다면 총구를 맞닥뜨렸을 남자가 문을 도로 닫으며 물러났다.
“17번 차량 이상 없음.”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반은 소리 없이 축 늘어져 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반은 짐을 들어 주고 의뢰인의 대화 상대나 해 주는 경호원이었기에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연구소에 쳐들어갔을 때야 정신이 반쯤 돌아 있던 시기였고.
반은 한동안 경계 태세를 유지하다가 서서히 총을 거두는 디아의 허리춤을 톡톡 건드렸다. 총을 집어넣으며 돌아보는 남자에게 입 모양만으로 제 심정을 알렸다.
‘떨려서 죽을 것 같아요.’
디아는 알아듣지 못한 듯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늘어진 상체를 일으켜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댄 반이 조용히 속삭였다.
“떨린다고.”
“…….”
귀를 대어 준 채로 얼어붙었다가 더디게 뒤로 물러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반은 생각보다 더욱 가까운 거리에 언뜻 놀랐다.
옅은 회색 가운데 뒤섞인 진한 녹색이 만개한 꽃잎처럼 펼쳐진 홍채 무늬가 보였다. 거리를 인지하자 이번에는 다른 방면으로 긴장됐다. 아직 부기가 빠지지 않은 입술에 디아의 숨결이 스쳤다. 키스할 상황은 절대 아닌데 분위기가 지나치게 야릇했다.
반은 별수 없이 디아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기차까지 올라탄 이상 한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고, 디아의 계획을 엉뚱한 방식으로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반은 남자의 어깨에 뺨을 비비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질 즈음에는 평온하던 디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어림잡아 20분쯤 지났을까. 디아가 팔꿈치를 쥐어 신호를 줬다. 고개를 든 반은 동향을 살핀 후 밖으로 나가는 디아를 뒤따랐다. 비좁은 화장실에서 기차 칸의 연결부로 빠져나오자 그런대로 살 것 같았다. 아쉽게도 바닥에 주저앉아 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칸마다 경호원이 문을 등지고 자리를 지키는 탓에 찍소리도 낼 수 없었다.
사각지대에 몸을 숨긴 반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잠시 눈길을 두었다. 그새 화려한 관광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화롭기만 한 자연이 펼쳐졌다. 디아는 아름다운 풍경을 등지고 총을 점검했다.
덜컹거리는 기차에 몸을 실은 이유가 여행이 아니라 누군가를 제거하기 위함이라니. 반은 이런 상황에 너무나 익숙한 디아를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때아닌 죄책감이 밀려들기 직전, 고개를 든 디아가 앉으라는 듯이 손짓했다. 얼결에 명령을 따라 쪼그려 앉았다. 양손을 펼쳐 의문을 표하려던 찰나, 디아가 18번 차량 문을 확 열어젖히고 들어섰다.
미약한 총성은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리에 묻혔다. 마지막 칸을 지키던 경호원의 머리를 순식간에 날려 버린 디아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반을 지나쳐 17번 차량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돌아본 경호원이 침입자에 대해 알릴 새도 없이 이마 한가운데 총알을 박아 넣었다.
무너지는 몸을 좌석에 누이는 디아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반은 엉거주춤 일어나 17번 차량으로 넘어갔다.
축 늘어진 두 다리를 보자 드디어 디아의 직업 아닌 직업과 그가 지금껏 걸어온 길이 실감 났다. 이런 일 하는 사람을 본 적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유난이냐고,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하라고 스스로를 다잡아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통로에 비죽 튀어나온 다리를 발로 밀어 넣다가 고개를 들자 숨을 죽이고 제 반응을 살피던 디아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디아의 냉정한 표정 위로 금이 갔다. 잘못을 저지르고 혼나기를 기다리는 아이 같은 표정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역시 디아는 겁을 내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반은 허리를 숙여 경호원의 귀에 꽂힌 이어폰과 무전기를 거두었다. 평이한 척 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쁜 사람이죠? 개릿.”
“…응.”
“무슨 짓 했습니까? 연구소에 돈 대 주고, 또….”
“신약 실험.”
반은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그를 돌아봤다. 낯설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도련님한테요?”
디아는 혼나기 싫은 아이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흡사한 신체 구조를 가진 생명체에게 신약 실험이라. 죄 없는 짐승에게도 주삿바늘을 찔러 대는 판국이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문득 디아의 피부 군데군데 남은 붉은 반점과 흉이 떠올라 표정이 굳다 못해 일그러졌다. 반은 혀를 차며 경호원의 총을 가로챘다. 탄창을 확인하는 와중에 디아의 시선이 뺨을 찔렀다. 그를 힐끔 살핀 반은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왜요? 안 됩니까?”
디아는 팔을 쭉쭉 뻗으며 만반의 준비를 하는 반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눈을 스르르 피했다. 몸풀기에 바쁜 반은 물론이고 당사자도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묵직한 가방을 빈 좌석에 올려 둔 디아는 본격적으로 돌격할 준비에 나섰다. 그는 한쪽 귀에 조그만 무선 이어폰을 끼우고 커튼을 살짝 걷어 위치를 확인했다.
“경로가 바뀌었어. 종착지는…. 알았어.”
누군가와 몇 마디 주고받은 뒤 가죽 재킷 자락을 걷자 재킷 사이로 가슴을 두르고 어깨와 연결된 홀스터가 엿보였다. 홀스터에 권총을 끼워 넣은 디아는 양손을 뒤로 돌려 허리춤에도 권총 한 자루를 챙겼는데, 너른 어깨가 펴지며 검은 목폴라가 착 달라붙은 상체가 부각됐다. 반은 권총 안전장치를 딸깍거리며 제법 두툼한 가슴과 늘씬한 허리를 곁눈질했다.
배우 얼굴만 믿고 캐스팅한 액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배우의 외모 자랑으로 시작해, 외모를 부각하는 액션 신 몇 장면이 이어지고, 악당과 대비되는 외모로 승리를 거머쥐고, 석양을 등지고는 외모 자랑으로 막을 내리는 액션 영화 말이다.
복면이라도 쓰지, 외모 자랑을 너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상념에 빠져 있을 무렵 디아가 홀쭉해진 가방에서 수갑을 꺼냈다.
저것으로 개릿을 잡을 심산이겠거니 싶어 슬슬 좌석에서 일어나려는데, 차가운 쇳덩이가 제 손목에 걸렸다.
“끝내고 올 때까지 여기 얌전히 있어.”
“예? 저요?”
디아는 남은 수갑 고리를 좌석 팔걸이에 채우려고 했다. 당황한 반은 황급히 어깨에 힘을 주고 버티며 그의 재킷을 움켜쥐었다.
“혼자 간다고? 나만 두고?”
“이 칸에는 아무도 안 올 거야.”
가까이서 시선을 마주한 디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도 이 칸에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뜻인 모양인데, 반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가 아니었다. 자존심이 있지, 업어 키운 아이에게 보호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잠깐! 잠깐만요. 진정하시고….”
반은 더는 악력으로 이길 수 없는 남자와 실랑이하다가 냉큼 통로에 주저앉았다. 좌석을 발로 딛고 밀어 내며 여기에 묶여 있기 싫다는 의사를 유치하게 드러냈다.
“아뇨, 아뇨. 싫어요. 같이 가요. 혼자는 못 갑니다.”
“금방 끝나. 떼쓰지 마, 반.”
“아! 아파요…!”
손목을 당기자 그를 옭아맨 쇳덩이가 손등의 살결을 파고들었다.
“힘 빼. 안 빼니까 아픈 거잖아.”
수갑을 당기던 힘을 줄인 디아는 반의 손을 감싸 쥐고 남은 고리를 팔걸이에 걸고자 했다. 당연히 반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 틈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면서 고집을 부렸다.
“혼자 가면 저 도망갑니다. 뛰어내릴 거예요, 진짜로? 저 도망가면 아무도 못 찾아요, 예?”
어떻게 적진에 혼자 보내겠는가. 생판 남이라도 신경 쓰일 마당에, 하물며 디아를. 어젯밤 품을 파고들던 어린아이를 목격한 이상 떼를 쓸 수밖에 없었다. 끙끙거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던 반은 불현듯 디아의 낯을 확인했다가 아차 싶었다.
이를 악문 디아가 따가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알 만했다. 다급한 나머지 꺼내면 안 될 협박을 내지른 반은 서둘러 말실수를 수습했다.
“진짜 도망간다는 건 아니고…. 안 가요. 안 가는데….”
말끝을 흐린 반은 디아의 손을 양손으로 덥석 붙잡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 도련니임….”
눈물 한 방울 맺히지 않았으면서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지은 반을 노려보던 디아가 한숨을 지으며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수갑을 풀어 준 남자는 표정이 확 밝아진 반의 손가락을 움켜쥐고 내키지 않는 당부를 전했다.
“내 뒤에 있어. 따로 행동하지 말고.”
반은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음기가 장착된 총을 넘겨준 디아는 짧은 기관 단총을 들고 선두 칸으로 향하는 문 곁에 섰다. 외모와 정반대로 살벌한 총을 든 남자를 흘끔거린 반은 촉촉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죽지 않기만을 바라며 총 손잡이를 바투 잡았다.
문이 열린 순간, 통로 끝에 서 있던 경호원의 머리가 디아가 쏜 총탄에 의해 날아갔다.
“뭐…!”
반은 칸을 넘어가는 문가에서 몸을 틀고, 당황해서는 무전을 치려는 경호원의 무릎을 쐈다. 사격 솜씨는 녹이 슬 대로 슬어 살을 스친 수준이었지만, 놈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 잡아챈 뒤통수를 팔걸이에 세게 갖다 박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한 경호원이 주르륵 미끄러지며 총을 떨어뜨렸다. 총을 멀리 걷어찬 반은 황당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는 디아를 돌아보며 쓰러진 경호원을 손가락질했다.
“몸통에 두 발, 머리에 한 발. 저도 압니다.”
머리는 물론이고 몸통에도 쏘지 못했지만 당당하게 나갔다. 손바닥에 얼굴을 턱 묻은 디아는 반의 팔을 움켜쥐어 제 뒤로 보냈다.
“위험하잖아. 하지 마.”
“혹시 제가 노인으로 보이십니까?”
“그냥 약해 보여.”
디아는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이 대화를 차단했다. 남부끄럽지 않은 체격을 가진 반은 도대체 디아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골골거리는 노인으로 보이는 건지, 피죽도 못 얻어먹은 병자로 보이는 건지. 이래서야 누가 도련님인지 모르겠다며 속으로 빈정거리던 반의 귀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 16호. 이상 있나?
반은 디아의 팔을 툭툭 치고 귀에 꽂은 이어폰을 가리켰다. 눈치 빠른 디아가 발소리를 죽이며 15번 차량과 이어진 문으로 다가갔다. 화장실과 보관함이 있는 칸을 사이에 두고 있어 재정비까지 약간의 틈이 있었다.
반은 그의 뒤로 가지 않고 맞은편 문가에 꼭 붙어 섰다. 눈이 마주친 디아가 얼굴색을 싹 바꾸며 정색했지만 꿋꿋이 총을 움켜쥐었다. 여기까지 와서 짐짝이 될 수는 없지 않나.
- 16호. 응답하라.
무전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16번에 이어 17, 18번 차량에 탄 경호원까지 응답이 없으니 이상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무전기를 몸에서 떼어 낸 반은 바짝 긴장한 채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통로 한가운데 쓰러진 시체를 발견한 경호원이 황급히 총을 빼 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총구를 단번에 움켜쥔 디아가 경호원의 팔을 끌어 내리면서 복부에 총을 갈겼다.
“커헉!”
“침입자가 있다! 의뢰인을…!”
사방으로 튄 피가 창을 더럽혔다. 복도로 쿵 넘어간 경호원의 시체를 신호탄으로 총격전이 시작됐다.
한쪽 무릎을 꿇어 몸집을 줄인 반은 문가에 숨어 두어 발을 쏘았다. 정강이에 총을 맞은 남자가 휘청이더니 반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벽에 꼭 붙어 타이밍을 살피는 사이 커버가 씌워진 좌석이 빗나간 총알에 찢어지고 꿰뚫렸다. 제 쪽의 경호원을 처리한 디아가 재빨리 다친 남자의 머리통을 날렸다.
기회를 얻은 반은 다시금 총을 겨누어 곳곳에 몸을 감춘 경호원들의 다리 부근을 쏘고 다시 문가에 숨길 반복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경호원의 머리를 날려 버리는 역할은 디아가 맡았다. 이윽고 귀청을 때리는 총성이 멎고 정적이 찾아왔다.
한숨 돌린 반은 먼저 걸어가는 디아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반은 총구를 겨눈 채로 구석구석을 살피는 디아의 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널브러진 몸뚱이와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간을 한 발 한 발 나아갈수록 새 운동화 밑창이 피로 얼룩졌다. 방아쇠에 얹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참혹한 광경 대신 황금빛 머리카락을 응시하며 13번 차량에 도착했을 무렵 앞서가던 디아가 물었다.
“다친 데는?”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비리비리하지는 않습니다.”
“아니야. 약해.”
말투가 워낙 확고해서 상황에 걸맞지 않은 웃음이 샜다. 그토록 걱정스러우시다면 이쯤에서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도련님만 믿겠습니다.”
“튀어 나가지만 마.”
언제 이렇게 컸는지, 참 든든하기도 했다. 반은 착잡하게 웃으며 기차 어딘가에 있을 개릿을 찾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또다시 차량 연결부에 도착하자마자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 차체에 총알이 후두두 박히고 탄피가 튀었다. 디아와 함께 간신히 몸을 숨겼지만 이래서야 전진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어떻게….”
계획을 물어보기 위해 곁을 슬쩍 살핀 반은 그 어느 때보다 무표정한 디아를 발견했다. 숨죽인 채로 정면을 응시하는 남자의 눈빛은 저를 바라볼 때와 확연히 달랐다. 감정은 사라지고 목적의식만 남은 눈이었다.
디아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을 응시하며 손을 뻗었다. 큼직한 손이 반의 무릎을 꾹 누르듯이 움켜쥐었다가 떨어졌다. 그러고는 막을 새도 없이 뛰쳐나갔다.
“디아!”
잠시 멈추었던 총성이 쉼 없이 터지며 부름을 묻었다. 경악스러워서 손이 다 떨렸다.
“저 미친놈, 미친놈….”
피부가 총알을 튕겨 내는 것도 아니면서 이 무슨 무모한 짓인지. 울상이 된 반은 디아를 보조하기 위해 상체를 낮추고 접근했다. 기차 기물을 엄폐물로 이용하며 총을 연사하는 디아가 경호원들의 이목을 끌어모은 덕에 접근하기는 수월했다. 놈들의 다리를 쏘아 가며 손을 거드는데, 하필이면 이런 급박한 때 탄이 떨어지고 말았다.
“아, 씨….”
반은 디아가 챙겨 준 총을 허리춤에 꽂고 경호원에게서 빼앗은 권총으로 바꿔 들었다. 장전하기 위해 눈을 내리깐 찰나 디아의 연사를 가까스로 피한 경호원 하나가 달려들었다.
식은땀이 배어난 손에서 미끄러진 권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빨리 일어선 반은 총을 겨누는 경호원의 손목을 잡아 위로 쳐들었다. 탕! 굉음을 내며 발포된 총알이 기차 출입문과 이어진 천장 부근을 빗맞혔다. 잇따른 총격에 센서가 고장 나기라도 했는지 굳건히 닫힌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큭…!”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경호원을 막아섰으나 힘을 겨루며 실랑이하기에는 체격 차이가 상당했다. 더군다나 현역도 아닌 반은 버티고자 했으나 주춤주춤 밀려나 활짝 열린 출입문을 등 뒤에 두었다. 문 너머에서 몰아친 매서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곁을 흘깃 돌아본 반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기차는 바다와 맞닿은 절벽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최고 속도로. 떨어졌다가는 철도에 갈려 고깃덩이가 된 다음 바다로 추락할 것이다. 차라리 헬기 추락으로 죽는 것이 나을 만큼 끔찍한 죽음이었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벗어나려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경호원의 손목을 비틀어 총을 떨어뜨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틈새를 노린 경호원이 옆구리에 주먹을 날렸다. 급히 팔을 올려 옆구리를 방어했지만 직후에 날아든 매서운 구둣발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가끔 애를 먹이는 허벅지를 정통으로 걷어차였다.
“윽!”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며 무릎을 꿇은 반은 멱살을 틀어 잡혀 출입문 밖으로 떠밀렸다. 반사적으로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면 머리부터 떨어졌을 터다. 난투극과 어울리지 않는 따사로운 햇볕이 기차에서 반쯤 빠져나간 상체 위에 쏟아졌다. 경호원은 겨우 버티고 선 다리를 걷어차며 떠미는 팔에 힘을 줬다.
“헉, 큭…!”
거센 바닷바람이 몰아쳐 눈을 뜨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반은 목숨 줄 같은 손잡이를 더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반대쪽 손으로 경호원의 재킷을 그러쥐었다. 잘만 하면 반동으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잘만 하면’이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졌다.
“하, 씨…. 큽…!”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핏줄이 선 손등과 피가 몰려 빨개진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직전, 출입문을 막아선 경호원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놈의 셔츠 앞섶이 붉게 물들더니 밀어내는 힘이 사라졌다.
무너지는 경호원의 뒤에서 등장한 디아가 놈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붙들고 기차 밖으로 홱 내던졌다. 숨이 끊어진 장정이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뻗어 온 손이 반의 팔목을 단단히 붙들고 안으로 당겼다.
“허억, 하아…!”
기차 안으로 빨려 들어오자마자 가쁜 호흡이 터졌다. 뺨을 후려치던 바람결과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던 순간의 감각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정말 죽을 뻔했다. 그것도 기차에서 떨어져서.
“다리는? 괜찮아?”
서둘러 무릎을 꿇은 디아가 구둣발 자국이 선명한 허벅지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반은 벌집이 되어 기차 통로에 널브러진 경호원들과 몇 번 걷어차인 것이 전부인 다리를 붙들고 안절부절못하는 디아를 번갈아 봤다. 누가 보면 다리가 통으로 썰려 나간 줄 알겠다.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예, 뭐. 도련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저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지금 농담이 나와?”
“몇 대 맞은 게 다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반은 부축해 주는 디아의 어깨를 둘러 안고 천천히 일어섰다. 중심을 딛자마자 무릎이 팩 꺾였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뻐근하게 땅겨 곧게 걸을 수가 없었다.
“으….”
“아파?”
“살짝이요. 좀 쉬면 금방 낫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거기 있으라고 했잖아. 속상해. 짜증 나게….”
시체 더미를 건너 좌석에 앉혀 준 디아가 연신 짜증을 호소했다. 순간적으로 본심을 터놓은 걸 모르는 모양인지 노려보는 눈빛이 제법 무시무시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입꼬리가 쑥 올라갔다. 지금이 웃을 때냐며 타박하는 디아의 어깨에서 팔을 거두던 반은 불현듯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에 피가 묻어 있었다.
“잠시만요.”
급히 디아의 손목을 잡고 몸 곳곳을 살피자 재킷 팔 부분이 찢겨 나가 있었다. 총알이 스친 듯했다. 찢어진 가죽 틈새로 흘러나온 피는 손목까지 푹 적실 정도로 양이 상당했다. 상처 깊이가 만만치 않은 것이 확실했다. 표정이 굳은 반은 그의 팔을 더듬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지혈할 거리를 찾았다.
“아니, 팔이 이런데…. 괜찮습니까? 이거 지혈….”
“나중에. 잠깐만.”
혼비백산한 반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꾹 누른 디아가 통로로 고개를 돌렸다. 반은 한 텀 늦게 이상을 감지했다. 기차가 속도를 낮추고 있었다.
탄창이 떨어진 기관 단총을 내려 둔 디아는 옆구리에서 권총을 빼 들었다. 그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반이 마음에 걸리는지 뒤를 돌아봤다. 좌석 아래로 비집고 들어간 반은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워 들어 흔들어 보였다.
“천천히 따라가겠습니다.”
“…숨어 있어.”
“넵.”
시원히 대답하는 반을 미덥지 못한 눈으로 바라본 디아가 통로를 빠져나가 문 옆에 붙어 섰다. 폭풍의 눈처럼 고요한 시간이 짧게 지나간 뒤, 또 한 번 총격전이 일었다.
반은 명령을 받자와 좌석 뒤에 숨은 채로 몇 발 쏘았지만 이번에는 돌파가 어려웠다. 남은 경호원들은 그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총력을 기울였고, 쏟아지는 총성 세례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디아가 총을 한 번 더 바꾸어 들었을 무렵, 바퀴와 철도가 마찰하는 소름 돋는 굉음이 울리더니 이윽고 기차가 완전히 멈추었다. 건너편 칸에서 쏟아지는 총격은 기차가 멈추어도 계속됐다.
벽에 기대어 동태를 살피던 디아의 시선이 핏자국 튄 커튼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눈치챈 듯 크게 뜨인 녹안이 곧장 반에게로 향했다. 지체할 틈 없이 바닥을 박찬 디아는 좌석을 건너뛰어 반을 품에 안고 엎드렸다.
바닥으로 무너진 반은 왜 그러시냐고 묻지도 못했다. 큼직한 양손이 귀를 뒤덮자마자 창이 모조리 깨져 나갔다. 반을 감싼 디아의 등으로 산산이 조각난 유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기차 밖에서 마구잡이로 쏘아 대는 총격에 기겁한 반은 목이 콱 졸린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
오늘 하루는 전체적으로 미친 하루였지만, 이만큼이나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마무리를 맞을 줄이야.
수 분이나 지속되는 총격에 창이 남김없이 깨진 후 엎드린 좌석 양옆에서 단발의 총성이 들렸다. 디아는 오른쪽 통로를 향해,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반은 왼쪽 통로를 향해 총알을 쏟아부었다. 1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긴박한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침묵이 찾아왔다.
탄창이 텅 빈 권총 방아쇠를 기계적으로 당기던 반은 기진맥진하여 팔을 축 늘어뜨렸다. 쏙 들어가서 슉 처리하고 끝날 줄 알았더니….
“개같은….”
“괜찮아? 다리는.”
“…다 괜찮습니다.”
반은 이 와중에도 저를 보호하고자 제 한 몸 던진 디아가 사랑스럽기도, 밉기도 했다. 위험을 알아차렸으면 얼른 피할 것이지, 총알이 날아올 통로로 뛰어들 건 뭐람. 바닥을 짚은 손을 휙 가져가 유리 조각에 스친 구석은 없나 꼼꼼히 살피는 디아가 안쓰럽고, 간질간질하고… 마구 날뛰는 감정을 딱 잘라 무어라고 정의하기 어려웠다.
반이 괴로워하는 동안 무선 이어폰으로 엠마와 몇 마디 나눈 디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정없이 깨져 나간 창 너머로 상황을 살피고는 반을 일으켰다. 정적이 감도는 기차를 끝까지 거슬러 가 봤지만 역시 개릿은 도주하고 없었다.
텅 빈 운전석까지 훑고 기차에서 내리자 한쪽에는 새파란 바다가, 반대쪽에는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가려면 갈대밭을 가로질러 제법 걸어야 했다.
반은 디아를 따라 경사진 갈대밭을 내려갔다. 허리 부근에서 살랑거리는 갈대를 손으로 휘휘 치워 가며 걷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어떡합니까?”
“엠마가 차를 쫓고 있어. 상황 보고 그쪽으로 가야지.”
“엠마가요? 엠마가 그런 일도 합니까?”
놀라 묻자 앞서가던 디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엠마는 안 어울리고 나는 어울리나 보지.”
“…두 분 다 안 어울리셔서 그럽니다.”
희한한 방향으로 질투하는 디아를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둘 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일은 질색할 것처럼 생겨서 추적과 제거를 맡는다는 점이 색달랐을 뿐이다.
반은 갈대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느리게 나아갔다. 절뚝이는 다리를 수시로 흘끔거리는 디아는 손을 잡고 싶은지 시종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눈치챈 지 꽤 됐음에도 못 본 체하는 이유는 시시했다.
반은 왠지 제가 계획을 망친 것만 같았다. 기차에서 떨어질 뻔한 저를 잡지 않았다면, 제 쪽에 거듭 주의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개릿에게 도달하고도 남았을 만큼 디아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완전히 성장하기도 전에 웨인의 뱃가죽을 찢어 놓은 담력과 괴력이 어디 가지 않았다.
그래도 저 역시 한때는 날아다녔는데 이제는 퇴물인가 싶어 우울한 낯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때, 흘깃 돌아본 디아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기차 밖으로 꺼내려고 했어.”
“예?”
니스로 올 때까지만 해도 수십 번 물어야 한 번 답해 주던 디아가 묻지도 않은 것들을 차분하게 알려 주었다.
“기차 출발하자마자 차가 따라왔거든.”
연구와 관련된 사람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인해 개릿의 경계는 심해졌는데, 출입만 막으면 비교적 안전한 기차를 택하고 차 몇 대를 따라오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경계당하는 와중에 헬기를 띄우기는 여의찮아 엠마가 그 차를 미행하여 현재 마르세유로 향하는 중이라는 설명이었다.
기차는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마르세유로 가는 최단 경로를 벗어났으니, 아마 개릿은 일정을 취소하고 마르세유로 대피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럼 기차의 경유지나 도착지에 미셸이 있었겠네요.”
“아마도. 여기일 수도 있고.”
반은 낮은 건물이 띄엄띄엄 자리한 작은 마을을 바라봤다. 자연과 어우러진 평화로운 곳이었다. 미셸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괜찮을까요. 개릿이 숨으면….”
“차라리 잘됐어. 마르세유면 지원받기도 편하니까.”
반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떠올랐다. 개릿을 기차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플랜 B였을 터다. 개릿과 미셸을 한 번에 잡을 기회를 아슬아슬하게 놓친 탓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도 저를 먼저 위로하려고 하는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어느새 다 커서 위로까지 해 주다니. 뭉클해진 반은 그의 등을 와락 껴안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점퍼를 벗었다.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를 벗자 나란히 걷던 디아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디아는 난처하다는 듯이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노르스름한 노을빛이 어린 맨가슴에 진득한 시선이 착 달라붙었다.
“아직… 그럴 때 아닌데.”
“아, 뭐…. 들판에서 하시려고요?”
웃음을 터트린 반은 벗은 티셔츠 자락을 이로 물고 찢었다. 손에 두어 번 감을 만큼 길게 찢은 티셔츠를 들고 손짓했다.
“팔 주세요.”
“…옷이나 입어. 빨리.”
“팔 주시면 입겠습니다.”
한숨을 푹 내쉰 디아가 터덜터덜 다가왔다. 그가 또 도망치기 전에 얼른 손을 뻗어 상처 난 부위를 둘둘 감고 꽉 조였다. 끄트머리를 예쁘게 매듭지어 주고 잠시 내려 두었던 점퍼를 껴입었다. 목 끝까지 지퍼를 올리면서 복잡한 표정의 디아를 지나쳤다.
“옛날이랑 똑같으시네요.”
“뭐가.”
“앞서 나가는 거.”
보지 않아도 부루퉁한 표정이 훤히 그려졌다. 입꼬리를 올리고 절뚝절뚝 걸어가던 반은 불시에 돌아서서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 주세요. 다리 아픕니다.”
“…반, 진짜 뻔뻔한 거 알아?”
“잡고 싶어서 그래요. 잡아 주세요, 빨리.”
손가락을 마구 팔랑거리며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자, 기가 찬다는 듯이 코웃음을 흘린 디아가 마지못해 발을 뗐다. 피로 물든 손이 반의 손을 슬며시, 그러나 단단하게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