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6/19)

03.

마르세유행은 내일로 미뤄졌다. 기차 뒤처리를 겸해 차를 한 대 보내겠다고 보고한 엠마는 마을에 도착하기 직전 하루 묵을 장소를 알려 주었다. 어딘가 했더니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설마 이 시골까지 외계인이 퍼져 있는 건가 싶어 심각한 낯으로 디아를 돌아보자, 그는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가 옅은 동족과 연이 있는 노부부의 휴가용 숙소라는 것을 모르는 반은 깔끔하되 먼지가 살짝 앉은 집을 경계 가득한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UFO를 부르는 송신기를 찾아낼 기세로 집을 헤집는 반의 팔뚝을 그러쥔 디아에 의해 욕실로 밀려 들어가고 나서야 짧은 평화가 찾아왔다.

먼지투성이가 된 몸을 깨끗이 씻은 뒤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오자 그새 간단한 먹거리를 사 온 디아가 욕실로 들어갔다. 다친 팔이 신경 쓰여 돕겠다고 했으나 매정하게 거절당했다. 반은 닫힌 문을 몇 번 두드리다가 포기했다.

디아가 씻고 나오기 전에 주린 배를 채우고 구급상자를 찾아왔다. 침대에 드러누워 한참을 기다리자 이내 샤워 가운을 느슨하게 걸친 디아가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상체를 일으킨 반은 부엌을 뒤져 찾아낸 구급상자를 열며 침대를 툭툭 두드렸다.

“앉으세요, 여기.”

이번에도 거절하면 직접 끌고 올 생각이었는데, 디아는 순순히 가리키는 곳에 앉아 가운을 어깨 아래로 내렸다. 옷 안에 감춰 두었던 목걸이에 눈길이 닿았다. 여전히 하고 다니는구나 싶어 쓴웃음이 났다. 자꾸 목걸이에 머무는 시선을 내려 생각보다 깊지 않은 상처를 유심히 살핀 반은 바늘을 소독하며 빈정거렸다.

“저번에도 그런 식으로 굴다가 다치신 모양입니다.”

손수 꿰매 주었던 날개뼈 아래 상처는 또 하나의 흉터를 남기고 아물었다. 팔뚝의 상처도 새하얀 피부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길 거라고 생각하자 속이 배배 꼬였다. 덕분에 개죽음은 면했지만 거기서 냅다 뛰어들 것은 뭔가. 반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팔뚝을 공들여 꿰매며 잔소리했다.

“몸 막 굴리지 마세요. 속상하게.”

“네가 왜 속상해?”

“절반은… 제 거니까?”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에 농담으로 받아치자,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디아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다 네 마음대로야.”

투정 부리는 음성에는 어느덧 가시가 사라졌다. 뾰족뾰족한 모서리가 둥글게 갈려 나간 디아는 지겹도록 치근덕거린 보람을 느끼게 해 줬다. 봉합을 마친 부위에 반창고를 덧댄 반은 천연덕스럽게 지분을 주장했다.

“제가 키웠으니까 저도 지분은 있다고 봅니다.”

“제대로 키우기는 했고?”

“그래도 조금은, 요만큼은 열심히 키웠는데….”

양 손가락으로 아주 작은 범위를 묘사했다. 부화시켜 줘, 밥 챙겨 줘, 옷 물려줘, 글 알려 줘, 심지어 동정까지 떼 줬는데, 이 정도면 목숨 빼고 다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무리가 좋지 않아서 그렇지. 이 얘기까지 하자니 너무 구질구질한 것 같아 조용히 손을 물리고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팔꿈치로 떨어진 가운을 끌어 올려 살결을 가린 디아는 구급상자를 들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반의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서지도 못하던 때보다는 나았지만 살짝 저는 것이 보였다. 디아는 반이 침대에 철퍼덕 주저앉자마자 넌지시 물었다.

“…너는?”

무엇을 묻는지 몰라 눈썹을 들어 올린 반은 그의 시선이 닿은 허벅지를 내려다봤다. 이쯤이야 별것도 아닌데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내일이면 멍이 시퍼렇게 올라올 허벅지를 툭툭 털어 낸 반은 가벼운 투로 답했다.

“오랜만에 무리해서 그런 겁니다. 곧 괜찮아져요.”

본인 팔이나 걱정하라고 하려던 때, 새하얀 손이 가운 자락 사이로 밀려들어 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허벅지 근육이 움찔거렸다.

손등으로 가운 자락을 살며시 걷은 디아가 총상이 남은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조심스럽고 따스한 손길이 흉터를 스치자 허리가 반듯하게 펴졌다. 지저분하게 아문 총상을 오래도록 매만지던 디아가 일자로 다문 입술을 뗐다.

“…나 구하러 왔을 때 생긴 거야?”

“이제 믿어 주시는 겁니까?”

반색하며 물었더니 또 묵묵부답이었다. 반은 허벅지를 덮은 손을 쓸어내리며 그날의 일을 일부 꺼내 놓았다.

“저 그때 진짜 멋있었던 거 아십니까? 보셨어야 했어요. 총만 안 맞았어도 그때 딱 구하는 건데.”

디아에게 그날의 전말을 알 방법이 없으니 허세를 왕창 섞었다. 실상은 구르고 넘어지고 뛰어다닌 것이 전부였지만 과장하자면 신화를 만들어 낼 자신도 있었다. 어떻게 꾸며야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될까 고민하는데, 푹 가라앉은 음성이 정신을 일깨웠다.

“누가?”

곁을 돌아본 반은 디아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누가 이랬는데? 기억해?”

누가 제 허벅지를 꿰뚫었는지 선명히 기억하는 반이었지만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디아의 눈이 살짝 돌아간 것 같았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스르르 시선을 피하자 허벅지에 얹힌 손이 얼굴을 움켜쥐었다. 큼직한 손에 뺨이 눌려 입술이 툭 튀어나온 반은 강제로 디아와 눈을 맞추었다.

“어….”

한껏 예민해진 디아의 눈을 억지로 피하며 기억 저편으로 치워 버린 남자를 떠올렸다. 제게 총질을 한 웨인은 그날 이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이를 갈며 전 동료들에게 일일이 수소문했으나 웨인의 행방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보기보다 좁은 판이라 누가 어디로 이직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음에도 웨인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짚이는 건 있었다. 웨인 역시 그들이거나, 그들의 하수인이거나.

“반. 누군지 기억해?”

디아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절로 대답하고 싶어지는 감미로운 음성이었으나 반은 웨인의 이름을 대는 것을 주저했다.

솔직히 뭣 같았던 것도 옛날 일이고, 간혹 불편하기는 해도 제법 적응한 차였다. 마음에 담아 두기 싫은 것은 둘째 치고 괜히 불안정한 디아를 들쑤셔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웨인의 모가지를 따고도 남을 기세인데, 그건 제 손으로 해야 할 일이지 디아가 할 일은 아니었다.

“기억이 잘…. 딱 들어가니까 폭탄 터지고 건물 무너지고….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군인인지 누군지. 나중에 기억날 수도 있고요.”

하하 웃으며 답하자 눈살을 구긴 디아가 얼굴을 놓아주었다. 지금은 얼버무리지만 여차하면 일러바칠 심산으로 여지를 남겨 뒀다.

불만이 그득한 디아를 미소 지은 채로 흘끔거리다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침대가 널찍한 덕에 어젯밤 잠자리에 비해 한결 편안했다.

“오늘은 같이 자야겠네요. 침대가 하나라.”

능글맞게 웃으며 베개를 두드렸지만 디아는 요지부동이었다. 팔베개를 바라나 싶어 팔을 쭉 뻗었더니 고개를 휙 돌리고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어디 가십니까?”

“소파.”

당황한 반은 황급히 침대 끝으로 기어갔다. 방을 나가려는 디아의 손목을 가까스로 낚아채자 아직 짜증이 가시지 않은 눈빛이 얼굴에 꽂혔다. 어렸을 때는 밀어내고 도망쳐도 침대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던 놈이 지금 와서 내외라니. 반은 손을 뿌리치려는 디아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그, 오늘 잘 못 잘 것 같아서…. 같이 자요.”

손가락 끝에 방아쇠의 감촉이 감돌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농담을 던지고 웃어 보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만한 경험은 아니었다. 한참이나 어린 남자에게 매달려 징징거리고 싶지 않았으나 마음처럼 안 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무표정한 낯으로 내려다보는 디아와 눈을 맞추다가 소리 없이 히죽 웃었다.

“제발요.”

반 뼘 열어 둔 창 너머로 땅거미 지는 하늘과 소박한 정원이 보였다. 얇은 커튼이 바람결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반은 돌아누운 디아의 등을 응시하며 베갯잇을 만지작거렸다. 싱글 사이즈는 넘지만 고성의 침대보다는 좁은 탓에 베개에 흐트러진 황금빛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샴푸 향이 코끝을 스쳤다. 꽃향기가 콧속에서 진동하던 피 냄새를 뒤덮었다.

타인과 나란히 눕는 것만으로 설레었던 적이 있었던가. 까마득한 옛날, 어림잡아 열여섯 무렵에는 사소한 일로도 설렘을 느꼈을 것이다. 스물이 넘어가자 웬만해서는 설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반은 서른을 넘긴 나이에 사춘기 소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기차에서 떨어질 뻔한 몸을 끌어당겨 줬을 때일까.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와 저를 품에 안고 엎드렸을 때일까. 혹은 그 이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지금 디아의 눈을 보고 싶다는 것뿐이다.

마주 보면 큰일 나기라도 하는지, 디아는 침대에 누운 순간부터 등을 돌린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둥켜안고 자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반은 도려낸 듯한 흉터가 남은 목덜미를 가만 응시하다가 손을 뻗었다. 어깨를 잡아 돌리자 심신에 안정을 주는 곱상한 얼굴이 드러났다. 건너편 팔을 잡아당겨 제게로 완전히 돌려 눕혔더니 잠기운 없는 눈이 경계하듯 노려봤다. 다시 외면하지 못하도록 미동 없는 손을 꼭 움켜쥔 반은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 움직여 디아에게 바짝 붙었다.

디아가 벤 베개 끄트머리에 뺨을 얹고 선명한 녹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감정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찌르기만 해도 펑 터질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꿋꿋이 참아 내는 디아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했다.

반쯤은 충동적으로 도톰한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저의를 파헤치듯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당황한 표정이 귀여웠다.

다시금 고개를 가까이 한 반은 한 번 더 입술을 맞대었다. 빨지도 않고, 혀를 집어넣지도 않고 가만히 대고 있다가 떨어뜨리자 일렁이는 녹안이 시야 한가득 차올랐다. 반은 터지기 직전인 디아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잠이 안 와요, 도련님.”

바늘 같은 한마디가 디아의 자제력을 펑 터트렸다. 다급히 손을 뻗은 디아가 반의 목덜미와 뺨을 한데 감싸 쥐고 입술을 맞붙였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거칠게 덤벼들어 몸을 한껏 밀착했다.

“하아, 음….”

입술을 잠시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위로 올라탄 디아가 허리끈을 허겁지겁 풀었다. 허리를 들어 가운을 벗은 반은 디아의 가운을 벗겨 내고 그의 몸을 마음껏 만졌다. 손바닥에 짓눌리는 근육 하나하나가 미끈하고 부드러웠다.

적당히 단단한 가슴과 선명한 복근이 자리한 배를 쓸어내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꿇고 앉은 다리를 얽으며 아래로 손을 내리자 디아의 성기는 이미 꼿꼿하게 서 아랫배에 철썩 들러붙어 있었다. 반은 잡아먹을 듯한 키스를 받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어린 게 좋긴 좋았다.

“후으, 하아….”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뻐근하도록 발기한 성기를 흔들어 줬다. 제법 큰 손바닥에 빠듯하게 들어찬 성기가 금세 물기를 머금었다. 움찔거린 디아가 스치는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반….”

“언제부터 세운 거예요? 혼자 상상이라도 했나….”

장난기가 돋은 반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에 연거푸 입을 맞추며 그를 놀렸다. 무슨 소리냐고 새침하게 쏘아붙이거나 노려볼 줄 알았는데, 디아는 도리어 반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며 젖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계속 상상했어. 네가 같이 자자고 했을 때부터. 씻을 때도…. 어제도.”

코끝을 비스듬히 마주한 채로 눈을 맞춘 디아가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반쯤 발기한 성기를 그러 잡힌 반은 조금 전의 디아처럼 탁한 신음을 흘렸다. 디아는 화가 난 사람처럼 거친 손길로 곧은 성기를 흔들었다.

“너 때문이야. 네가 자꾸 이러니까….”

“하아…. 살살….”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넌 아무것도 모르고.”

디아가 엄지로 귀두를 문지르자 허리가 움칠움칠 튀었다. 직접적으로 쏟아지는 자극 때문에 호흡이 가빠졌다. 디아는 가쁜 숨이 터져 나오는 입술을 빨고 깨물면서 턱턱 소리가 날 정도로 성기를 흔들었다.

“그거 알아, 반? 네 생각 하면서 매일 자위했어. 네가 가르쳐 준 대로. 네가 다른 놈이랑 뒹굴 때, 네 사진이나 보면서….”

“저도, 읏…. 그랬는데.”

“거짓말.”

“매일은, 아니지만….”

매일 자위하기에는 체력이 따라 주지 않았던 반은 실없이 웃으며 양손으로 디아의 성기를 자극했다. 손바닥으로 선홍빛 귀두를 비비면서 다른 손으로는 핏줄이 돋아난 기둥을 쓸어 올렸다.

이를 사리문 디아의 손길이 빨라질수록 반의 손길 역시 빨라졌다. 서로의 성기를 경쟁이라도 하듯 애무하면서 잠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열에 달뜬 눈과 발그스름해지는 얼굴이 고스란히 보이고 보였다. 눈을 내리깔았다가 들어 올린 반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헐떡이는 디아에게 가볍게 키스하며 물었다.

“자위할 때…. 저 가지고 무슨 상상했어요?”

디아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반을 응시했다. 머뭇거리다가 벌어진 입술 새로 발칙한 상상의 한 조각이 튀어나왔다.

“…너 키우는 상상.”

맑은 날이 없는 그린란드의 황량한 섬에서, 로켓 안을 들여다보며 밤새 만들고 부수었던 세계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지하실에 가두고, 하아…. 나만 만나고, 나만 보게 해서…. 그런 다음에 내가 이런 거 가르쳐 주는 상상.”

서로의 손바닥이 질척질척하게 젖어 들었다. 귀로 흘러 들어오는 적나라한 욕망에 반의 귓바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파렴치하게만 들리는 상상은 제가 디아에게 저지른 일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때는 트리 아래서 하고, 비 오면 테라스에서 하고…. 여기 안 다물릴 때까지.”

“흣….”

기둥뿌리까지 미끄러진 손이 고환을 감싸고 중지로 회음부 부근을 꾹 눌렀다. 뜨끈한 열을 머금은 반의 뺨에 키스한 디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상상을 하며 매일매일 스스로를 달랬다고.

반은 무겁게 느껴지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기껏 키워 줬더니 못된 상상으로 욕구를 푼 디아를 나무라야 하는 건지, 상상 속에서도 한정적인 장소와 상황을 슬퍼해야 하는 건지.

반은 어느새 손바닥을 푹 적신 것으로 모자라 침대로 뚝뚝 떨어지는 디아의 정액을 그러모았다. 일반적인 정액보다 점성이 높고 양이 많은 정액을 담은 손을 엉덩이 사이로 미끄러뜨렸다.

“제가 어려질 순 없지만… 다른 건 해 줄 수 있는데.”

이런 짓까지 제 손으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지라, 태연한 목소리와 달리 뺨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겸연쩍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지만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반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부위에 정액을 펴 바르며 제 성기를 쥔 디아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꼭 다물린 주름 안으로 검지를 밀어 넣자 불쾌한 감각이 꼬리뼈로 퍼졌다. 어느샌가 우뚝 멎은 디아의 손을 감싸 성기를 흔들도록 하면서 움직임에 맞춰 좁은 구멍을 풀었다.

“흡…. 느낌이, 읏….”

디아가 길쭉한 손가락으로 내벽을 만져 줬을 때는 분명 좋았는데, 제 손으로 하자니 영 꺼림칙하기만 했다. 억지로 중지까지 밀어 넣고 시선을 들어 올린 반은 눈이 돌아가기 일보 직전인 디아를 발견했다. 곱상한 선을 가진 눈가가 온통 새빨갰다.

그 표정과 안색을 보자 순간적으로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어영부영 내벽을 넓히는 데만 치중했던 손가락이 구부러들며 언뜻 야릇한 느낌이 허리를 스치고 갔다.

“하아…. 세게, 만져 주세요. 빨리.”

“반….”

반은 눈짓으로 발기한 성기를 가리켰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성기를 빠르고 강하게 흔들기 시작한 디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한 번 사정했음에도 시들지 않은 제 성기를 움켜쥐고 동시에 흔들었다.

“흣…. 아….”

앞과 뒤, 그리고 시선에서 느껴지는 자극이 지나칠 정도로 강렬했다. 서로가 자위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상황도 흥분을 끌어올리는 데 한몫했다. 마침내 손가락 두 개가 수월히 드나들 만큼 풀린 구멍 안이 디아의 끈적끈적한 정액으로 질척해졌다.

반은 새하얀 손에 감싸여 흔들리는 남자의 성기를 흐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물이 많아 투명하게까지 보였지만 두께와 길이가 괴물 같았다. 그의 정체만큼이나 비정상적인 형태였다. 저걸 몸 안에 넣으면 머리가 어떻게 될 정도로 기분 좋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반, 하아…. 빨리.”

재촉하는 목소리가 축축했다. 약지까지 집어넣으려던 반은 안달하는 디아의 손목을 잡아 다리 사이로 이끌었다. 직접 구멍을 넓히는 것은 손가락 두 개가 한계였다.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인내하던 남자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한 팔로 반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휘청거리며 무릎을 세운 반이 너른 어깨를 짚자마자 엉덩이 사이를 파고든 손이 녹진해진 주름을 짓이겼다.

“읏…!”

제 정액이 듬뿍 묻은 손가락을 구멍에 밀어 넣은 디아가 손목을 거칠게 움직였다. 두 개였던 손가락이 세 개로 늘어난 것조차 모를 만큼 반은 조급했다. 그는 반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도톰하게 솟은 유두를 강하게 빨아올렸다.

“아, 흡…! 디아….”

반은 허리를 둥글게 구부려 입술을 피했으나 등을 받친 손이 그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멀어진 상체를 당겨 빈틈없이 밀착한 디아는 번들거리는 유두를 앞니로 깨물면서 비좁은 내벽을 긁어내렸다. 숨을 들이켠 반은 너른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흠칫흠칫 떨었다. 직접 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아랫배를 뒤덮고 피어났다.

“아…! 디아, 그만. 이제 그만….”

침대를 딛고 선 무릎이 파들파들 떨렸다. 디아의 상체에 문질러지던 성기가 사정을 앞두고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제 슬슬 넣어 줬으면 하는데, 혀로 유두를 길게 핥은 디아가 연신 구멍을 괴롭히며 물었다.

“너는 무슨 상상 했는데? 내가 어떻게 했어?”

디아의 머리를 끌어안은 반은 황금빛 머리카락에 입술을 비비며 기억을 되짚었다. 섹스에 실패하고 혼자 성욕을 달랠 때마다 자꾸만 떠오르는 소년의 모습에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던가. 그러나 하루, 한 달, 일 년이 지나가는 동안 죄책감은 스러지고 소년을 상상하며 빼는 것이 버릇이 됐다.

반의 상상은 과거를 불러오는 것이었다. 장소는 초라했고, 상황은 막막했고, 원하지도 않았던 소년과의 첫 섹스. 어설프고 어리숙하고 억지뿐이었던 그날을 떠올리며 셀 수 없을 만큼 사정했다. 반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손길로 흥분을 일으키는 남자의 등을 쓸어내렸다. 내뱉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잔하게 깔렸다.

“처음, 읏…. 처음 했을 때처럼, 어설프게.”

가슴에 파묻은 고개를 든 디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노려봤다. 놀리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불만 가득한 표정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웃음을 참던 반은 디아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코끝에 쪽쪽 입을 맞췄다. 제 키를 훌쩍 추월할 정도로 장성한 남자가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생각 하면서 뺐어요. 우리 도련님 섹스 처음 할 때.”

“내가 어설펐어?”

아이 취급하는 반을 짜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키스를 피하지 않던 디아가 내벽을 손끝으로 꾹꾹 짓이겼다.

처음만 서툴렀지, 금세 능숙해져 잊지 못할 밤을 머릿속에 심어 둔 디아의 솜씨를 동정의 허접한 첫 섹스라고 비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능력 덕분인지 뭔지. 이런 방면에서만큼은 어떻게든 우위를 점하고 싶었던 반은 연상의 여유를 가장해 너른 등을 토닥여 줬다.

“그때는 처음이었잖습니까. 원래 처음에는 다…. 읏!”

여유롭고 능숙한 연상의 표정은 구멍을 넓히던 손가락이 단번에 빠져나간 순간 무너졌다. 정액으로 푹 젖은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떨리는 숨을 내뱉는 반의 엉덩이를 받친 팔이 적지 않은 무게를 번쩍 들어 올렸다.

허둥지둥 목을 끌어안는 반을 가뿐하게 들고 일어난 디아는 침대 곁에 자리한 화장대 위를 한 팔로 쓸어내렸다. 장식용 소품과 화장품들이 카펫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당황할 새도 없이 텅 빈 화장대로 떠밀린 반은 거울에 등을 쿵 부딪쳤다. 무어라 말할 틈을 주지 않고 허공에 뜬 두 다리 사이로 파고든 디아가 양손으로 오금을 붙잡아 올렸다.

“지금은?”

허벅지를 활짝 벌린 채 구멍을 내보인 반은 입꼬리를 어색하게 당겼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를 만큼 민망한 자세였다. 무표정하지만 욕망이 득시글거리는 눈으로 엉덩이 사이를 응시하는 디아 때문에 더더욱이나.

“지금은, 아…!”

맑은 액을 뚝뚝 떨어뜨리는 귀두가 주름을 누르고 파고들었다. 두꺼운 부분을 느리게 집어넣은 디아는 반이 대꾸하기도 전에 허리를 쳐올렸다. 버거운 크기의 성기가 장기를 때리듯 짓눌렀다.

“흡…!”

반의 고개가 뒤로 홱 넘어갔다. 화장대를 짚은 팔에 힘을 주는 반의 오금을 단단히 붙들고 디아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하아….”

뿌리까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를 남기고 모조리 집어삼킨 구멍 안은 언제나처럼 좁고 따뜻했다. 눈살을 찌푸린 디아는 옴죽거리며 살덩이를 무는 구멍을 빤히 바라봤다. 허리를 뒤로 뺐다가 도로 밀어붙이자 희부연 정액이 꿈질꿈질 밀려 나왔다. 반과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부위에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고였다. 더 들어가야만 했다. 쉽게 뽑히지 않을 때까지.

디아는 짧게 짧게 허리를 쳐올려서 남은 살덩이까지도 반의 몸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아, 아…. 읏, 도련님….”

“밀어 내지 마, 반…. 힘 빼, 빨리. 더….”

반이 반사적으로 힘을 주자 내벽이 성기를 꽉 조이다 못해 밀어 냈다. 이를 악문 디아는 거듭 중얼거리며 내벽을 억지로 벌려 길을 트고 제 모양을 새겼다. 이윽고 서로의 사타구니가 빈틈없이 맞붙으며 반의 고환이 아랫배에 짓눌렸다.

“하아…. 아….”

낮고도 달콤한 반의 신음이 귀를 적셨다. 이 목소리가 그리웠다. 상상 속에서, 꿈속에서 수십 수백 번 겁탈하는 동안 비명과 욕설만을 내지르던 반이 마침내 듣기 좋은 신음을 뱉으면 참기 힘든 사정감이 몰려오고는 했다. 지금도 그랬다. 디아는 반의 배 속을 제 정액으로 더럽히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아니지. 배 속만이 아니었다. 햇볕에 그을려 건강한 색을 띤 피부, 화가 날 정도로 반반한 얼굴, 웃을 때면 축 처지는 눈꼬리, 굳은살이 박인 발과 손에도 정액을 잔뜩 뿌리고 싶었다. 반을 더럽히는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상상 속의 반은 이마와 눈가를 타고 뚝뚝 떨어지는 정액을 손바닥으로 받아 내며 충격 어린 표정을 하고는 했다. 경멸스럽다는 듯이, 혐오스럽다는 듯이….

디아는 접합부에서 떼어 낸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상상이라고 해도 화를 불러일으키던 그 모습이 조금이라도 엿보인다면 반을 어떻게 다룰지, 자신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렵기도 하고, 생각만으로 화가 나기도 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반을 마주한 디아는 미미한 미소를 띤 입술을 발견했다. 불안이 스민 눈에 비친 것은 한껏 달뜬 얼굴이었다. 얼굴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인 반은 흥분이 감도는 눈으로 꼭 맞붙은 접합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순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감각이 일었다.

디아는 양손에 힘을 주어 반의 다리를 더욱 넓게 벌리고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쑥 빠져나갔던 성기가 길을 따라 깊이 처박혔다.

“읏! 흐읍…!”

“큭…! 반….”

디아는 느긋함도, 여유도 없는 허리 짓으로 좁고 우둘투둘한 내벽을 사정없이 때려 박았다. 귀두가 내벽을 찌르는 족족 반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움켜쥘 곳 없는 판판한 화장대를 손톱으로 긁었다. 화장대 끄트머리로 밀려난 스탠드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묵직한 원목 가구가 쉼 없이 덜컹거렸다.

“도, 도련님…. 아! 디아, 흑…!”

거울에 뒤통수를 기댄 반은 숨을 헐떡이며 조급하고 거친 허리 짓에 어울렸다. 그를 받아 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구멍은 징그러운 크기의 성기를 무리 없이 삼켰고, 구멍을 빼곡하게 채운 성기는 앞뒤로 움직이기만 해도 온 성감대를 긁어내리고 헤집었다.

몸속으로 들어온 살덩이를 제 눈으로 본 반은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 아프기는커녕 기분이 좋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후으…. 좁아…. 짜증 나, 반….”

“디아, 살살…. 아! 흐읏…!”

살덩이가 처박힐 때마다 정액이 튀고, 액체가 뒤섞여 찔꺽거리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허리를 숙인 디아가 턱과 목덜미, 어깨를 깨물고 빨아들였다. 레이스나 커튼 끈 따위로 가려지지 않은 눈에 밝은 금발이 스쳤다.

몸을 짓누르는 남자를 잠시 밀어 낸 반은 해가 떨어지기 직전, 어슴푸레한 빛 아래 드러난 얼굴을 마주했다. 이성을 잃고 저를 탐하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한 흐트러진 미인을 맞닥뜨린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왜.”

입 맞출 기회를 빼앗겼다고 여기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미간에 잡힌 주름과 불그스름한 눈가와 뺨, 새빨개진 입술까지 야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 항상 어둠 속에 이런 표정을 감추었던 남자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마를 맞대고서도 허리 짓을 멈추지 않는 디아 때문에 파들파들 떨리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린 반은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얼굴보다는 몸을 밝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홀린 듯이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춘 반은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며 붙잡힌 다리를 오므리고자 했다.

“하아, 흣…. 도련님, 저 쌀 것 같은…! 아…!”

디아의 얼굴을 마주한 것뿐인데 사정감은 쉽게도 찾아왔다. 규칙적으로 턱턱 부딪히는 사타구니와 안을 찌르는 성기 때문에 참아 보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발가락을 구부리고 허벅지에 힘을 주며 디아의 손을 뿌리치려던 반은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었다. 달아오른 구멍을 꽉 채운 성기가 주르륵 빠져나갔다.

“흐으….”

근육에서 힘이 빠져 아래로 미끄러질 뻔한 반을 붙잡은 디아가 무릎을 꿇었다. 뜨끈뜨끈한 얼굴을 가린 채로 가쁜 숨을 헐떡이던 반은 다음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화장대를 움켜쥐었다.

“도련…. 디아!”

붉은 입술을 크게 벌린 디아가 사정을 앞둔 성기를 한 번에 집어삼킨 탓이었다. 버둥거리는 허벅지를 양손으로 누른 디아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강하게 성기를 빨아올렸다.

“하읏, 윽…! 디아, 제발…. 아, 미쳤….”

허리를 숙인 반은 얼굴을 가렸다가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가, 진저리를 쳤다. 화장대에 가로막혀 도망칠 수도 없는 와중에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귀두를 파고들었다. 흡, 숨을 들이켠 반은 더는 참지 못하고 디아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로 허리를 움찔움찔 떨었다.

“읏…!”

볼을 홀쭉하게 만든 디아는 반의 성기에서 터져 나온 정액을 모조리 받아 마셨다. 목울대를 움직여 가며 정액 한 방울까지도 꿀꺽꿀꺽 삼킨 디아가 입술에 힘을 주고 기둥을 쭉 빨아올렸다. 귀두가 뽑혀 나오자 쪽, 하고 소름 돋는 소리가 났다.

탈력감에 늘어진 반은 아랫입술을 핥는 디아를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기분 좋은 것과는 별개로 너무나 민망한 짓거리였다.

“내가 미친다, 진짜…. 진짜 너는 왜 그러냐….”

“다른 놈들은 삼키는 거 안 해 줬나 봐?”

“그걸 왜 삼켜요….”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미끄러지는 반의 허리를 감싸 일으킨 디아가 몸을 휙 뒤집었다. 순식간에 화장대를 짚으며 엎어진 반은 뒤로 붙어서는 디아를 거울을 통해 발견했다. 그를 말리기 위해 뒤로 손을 뻗었다가 그대로 붙잡혔다. 허리 뒤에 반의 손을 고정한 디아는 엉덩이 살을 벌려 분홍빛으로 물든 구멍을 쓱쓱 매만졌다.

“이제 정액도 내 입에만 싸.”

“잠깐, 잠깐…!”

발랑 까진 소리를 하며 귀두를 집어넣은 디아가 퍽 소리가 날 정도로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말릴 틈이 없었다. 잠시 빠져나갔던 성기가 배 속을 도로 가득 채우며 숨이 턱 막혔다.

“허억…!”

발뒤꿈치가 바짝 서며 종아리가 긴장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허리를 양손으로 붙들어 벗어날 길을 차단한 디아는 반이 방금 사정했든 말든 빠른 속도로 안을 치대기 시작했다. 내장이 다 짓무를 정도로 강하게 몰아붙이는 것을 이기지 못한 반은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화장대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흣…! 도련, 도련님…! 쉬었다가…!”

사지를 버둥거리던 반은 남은 팔까지 붙잡혀 등 뒤에 붙였다. 저항할 수 없는 자세가 되자 폭력적이기까지 한 쾌감이 머릿속과 배 속을 쉼 없이 쾅쾅 때렸다. 귀두가 비좁은 내벽 입구를 찌를 때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디아와의 섹스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이 빠르고 강하며 짐승 같은 섹스. 반은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고 신경이 오싹오싹하게 곤두서는 감각이 미치도록 좋으면서도 괴로웠다.

금욕에 가까운 생활을 한 탓인지, 디아가 섹스를 지나치게 잘하는 탓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비명 같은 신음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터져 나오고, 바닥을 마구 박차고 싶은 감각이 허리를 달렸다.

“아…! 윽, 디아…! 제발, 좀!”

“그런데, 반….”

양팔을 묶은 것으로 모자라 등 뒤에 가슴을 바짝 붙인 디아가 거친 숨결이 섞인 목소리를 귀에 대고 흘렸다. 음절 하나하나가 또 다른 자극이었다. 숨결이 귓바퀴에 닿을 때마다 무릎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도 어설퍼?”

“아, 아니요…. 아뇨…! 도, 도련님…. 아! 흡! 좀, 천천히…!”

“아직도 어린애 같아?”

“아니, 아니니까…! 헉, 쌀 것, 또 쌀 것 같아요…! 디아, 제발! 아! 흐읍…!”

반은 정신없이 부정했다. 눈물샘이 제 역할을 방기하면서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었다. 괴로운 나머지 이마에 핏줄이 섰다. 누구는 어리고 창창한 나이라 쉴 새 없이 싸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가뜩이나 힘겨운 하루를 보낸 반은 다음 사정 전에 휴식이 필요했다.

배려라고는 일절 없는 디아의 허리 짓은 그렇다고 쳐도, 남은 손으로 반쯤 발기한 성기를 흔드는 짓에는 도무지 배길 수가 없었다. 과격한 쾌감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발을 동동 구르고 싶어도 발끝으로 간신히 바닥을 디딘 탓에 꼼짝하지 못했다.

디아가 쉴 새를 주지 않고 허리 짓 하면서 사타구니에 수십 번 부딪힌 엉덩이 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귀두를 후벼파는 엄지, 온통 성감대로 변한 내벽을 짓이기고 뭉개는 성기 때문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반의 귓바퀴를 깨문 디아는 시원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설퍼서 좋아할지 모르겠네….”

“조, 좋아요…. 좋으니까…! 헉!”

연상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치운 반은 어깨를 뒤틀며 비명에 가까운 부탁을 내질렀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반의 뒷덜미에 더운 숨을 내쉰 디아는 매끈한 귀두를 엄지로 뭉개며 웅얼거렸다.

“거짓말.”

“아, 제발…! 잘못, 잘못했어…. 죄송해요…! 손 좀 제발, 흡…!”

바짝 긴장한 무릎이 일순 쭉 펴졌다. 끔찍한 쾌감이 뒤통수를 후려치더니 눈앞이 컴컴하게 물들었다. 반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강제로 사정을 끌어낸 디아는 손바닥에 고인 정액을 반의 회음부에 펴 발랐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덜덜 떠는 반의 날개뼈에 깊게 입 맞춘 디아는 이제 막 해가 지는 창밖을 흐린 눈으로 훑었다. 시간도, 체력도 충분했다. 반은… 모르겠지만.

화장대에 엎드려 한참 시달린 후 침대에 널브러진 반은 손가락 끝을 흠칫흠칫 떨었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온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벌 떨렸다. 평소라면 버텼겠지만 잦은 이동과 총격전을 벌인 이후라면 얘기가 달랐다.

며칠 치 체력을 기차 안에서 전부 쏟아부었던 반은 분명 제 엉덩이 안에 사정해 놓고도 좆을 벌떡 세운 채로 올라타는 디아를 두려운 표정으로 응시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누구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데, 누구는 그렇게 싸고도 또 쌀 정액이 남아 있다라.

어린애 한번 잘못 놀렸다가 된통 당하게 생긴 반은 축축 늘어지는 손으로 가까이 붙어 오는 디아의 가슴을 밀어냈다. 할 거면 잠깐 쉬었다가 하자고, 그를 만류하려던 때 손목을 움켜쥔 디아가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짜증 나.”

땀에 젖은 손바닥에 닿아 웅얼거리는 음성이 반의 움직임을 묶었다. 디아는 손목과 팔목에도 연거푸 입을 맞추며 상반되는 감정을 털어놓았다.

“좋아해, 반. 싫어…. 사랑해. 죽을 것 같아. 너무 싫어….”

이어 목덜미와 가슴팍에도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는 가벼운 키스가 쏟아졌다. 녹초가 된 반의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디아는 말랑말랑하게 녹은 구멍 속으로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흐으….”

연거푸 허리를 쳐올린 덕에 녹진하게 풀어진 구멍은 더는 살덩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침대에 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 사지를 부들부들 떤 반은 포기하고 디아를 받아들였다.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고작 두 번 사정한 것 가지고 나가떨어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최후의 자존심 때문에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은 반은 이불을 꽉 쥐고 격한 움직임을 버텼다.

“흐읍…! 흑, 으…!”

이제는 비명을 지를 힘도 없었다. 목에 핏대만 세운 채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쾌락을 견디던 와중에 거친 숨을 터트리며 허리 짓 하던 디아가 입술을 집어삼켰다. 기어이 숨까지 빼앗아 간 디아는 괴로워하는 반의 혀를 집요하게 빨아들이며 몇 번째인지 모를 사정을 했다. 배 속이 그의 정액으로 가득 차고, 입 안은 그의 타액으로 흥건했다.

“반….”

“허억…! 하아, 후으….”

입술이 떨어진 순간 고개를 기울이며 밭은 숨을 내쉬던 반은 스르르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치떴다. 아랫배가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기절할 것 같았다. 더는 발기할 힘도 없는데 디아는 정액이 줄줄 흘러나오는 구멍에서 성기를 빼지 않고 상체를 낮췄다.

남자의 묵직한 무게가 가슴에 얹히자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최후의 자존심이고 자시고, 이제 작작 하고 놓아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입을 벙긋거리던 반의 귀로 축 가라앉은 음성이 스며들었다.

“만약에 반….”

“하아…. 디아….”

“만약에 네 말이 맞으면…. 네가 나 안 버렸던 거면.”

얼굴을 숨긴 디아의 잇새로 흘러나온 한마디는 까무룩 넘어가기 직전이던 반의 정신을 일깨웠다. 눈을 크게 뜬 반은 그의 팔뚝을 밀어내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와 반대로 상체를 옭아맨 디아의 양팔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막힐 만큼 강한 팔심과 묵직한 무게가 온몸을 조였다.

디아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않았다. 구멍에서 새어 나온 정액이 시트를 푹 적시고, 파들파들 떨리던 허벅지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에야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널 미워했던 난 뭐가 돼?”

디아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가르쳐 달라는 듯이 물었다. 복잡한 심경이 적나라하게 묻어나는 목소리가 수마를 물리쳤다. 반은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몇 번 움켜쥐었다가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손바닥으로 너른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볼품없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서운하지는 않았다. 디아로서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배신감에 치를 떨고 열렬히 미워한 세월이 몇 년인데, 지금 와서 진실이랍시고 모든 일의 전말을 알려 줘 봤자 당장은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 쏟아부은 감정은 물론이고 저 자신까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더군다나 디아는 아직 어렸다. 제 경험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고 해도 그것을 활용하고 체득할 시간은 없었을 테다.

“싫어하고 싶을 때까지 싫어하다가… 나중에. 나중에라도 좋아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반은 아직 어리숙한 디아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가볍게 마무리 짓고자 했다. 힘없는 웃음 탓에 씁쓸한 느낌이 나기는 했지만, 이는 순전히 놈의 괴물 같은 체력 때문이었다. 토닥이는 것도 슬슬 힘겨워질 즈음 고개를 들어 올린 디아가 이마를 맞대었다. 강압적으로 몰아붙일 때는 언제고 손바닥 뒤집듯 순순해진 남자가 고집스럽게 물었다.

“내가 안 미워? 안 무서워? 징그럽지도 않고?”

“밉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징그럽지도….”

하나하나 대꾸하던 반은 순간 머뭇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남자의 허리 아래로 상당히 징그러운 것이 있기는 했으나 애써 눈을 맞추고 웃었다.

“…징그럽지도 않고.”

디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반의 낯을 샅샅이 살폈다. 거짓을 찾아내기 위해 분주하게 오가던 시선은 끝내 황금빛을 띤 눈에 정착했다. 반은 감기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고 입술을 달싹이는 디아와 눈을 맞췄다.

“이번 일 다 끝내고….”

어렵사리 한마디를 꺼낸 디아는 결심한 듯이 속삭였다.

“돌아가면 들을게. 네 얘기.”

***

반은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어젯밤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드디어 끝났다 싶어 축 늘어지면 몸이 휙 뒤집히고, 이번에는 정말로 끝났겠지 싶어 눈을 감았더니 다리가 휙 올라갔다. 지난밤 반은 몸소 깨달았다. 섹스가 운동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이 세상에는 온갖 해괴망측한 체위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덤으로 어린애 함부로 놀리면 큰일 난다는 것도.

자존심이 팍 상했다. 영 맥을 못 추고 빌빌거린 원인은 결단코 제 정력 문제가 아니었다. 먼젓번에는 사흘 내내 뒹굴고도 멀쩡했으니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딱 섹스만 하면 솔직히 일주일도 가능하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제가 봐도 꼴사나운 짓이라 입을 꾹 다물었다.

반은 아직도 의식하지 않으면 부들부들 떨리는 허벅지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자존심 문제를 뒤로 치워 두고 솔직히 말하자면… 좋긴 좋았다. 내던지고 뒤집고 들어 올리는 다소 과격한 면과 체력적으로 고단한 것이 단점이었지만, 단점을 상회하는 장점이 어마어마했다. 기회가 있다면 정말 죽기 직전까지 해 보고 싶을 정도로.

언뜻 든 생각에 진저리를 치며 눈살을 찌푸린 반은 후들거리는 허벅지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차창 너머로 이국적인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새카만 가림막으로 막힌 운전석에 탑승한 운전수는 거침없이 액셀을 밟아 빠른 속도로 도심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운전수가 끌고 온 차의 뒷좌석에 오른 반은 곁을 흘끔거렸다. 아까부터 어깨가 묵직했다.

운전수와 간단한 인사조차 못 하게 막은 디아는 남의 어깨에 작은 머리통을 턱 하니 얹고 시종 비비적거렸다. 허벅지를 딱 붙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차에 오르자마자 그의 손을 가져가 양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손깍지를 꼈다가,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가, 손톱을 매만졌다가….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손바닥을 살살 긁는 손톱을 바라봤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거 갑자기 너무 풀어진 것 아닌가? 손이라도 닿으면 기겁하고 종일 틱틱거리며 까탈스럽게 굴던 남자는 어디로 갔는가. 말씨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으나 행동은 영 딴판이었다.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심경의 변화가 빠른 남자에게 손을 내어 주던 반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디아.”

호칭을 뚝 떼어 놓고 부르자 손바닥을 긁던 손가락이 멈췄다. 침묵이 차내를 감돌았다. 반은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호칭을 바꿨다.

“…도련님?”

굳었던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쉽지만은 않은 남자였다.

몸과 마음이 달라도 너무 다른 디아는 여태껏 만지지 못한 시간을 벌충하겠다는 양 손가락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간지러운 나머지 손을 탈탈 털고 싶었지만 차마 내칠 수가 있어야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반은 손가락을 확 오므려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잠시 움찔거린 디아가 지지 않고 손깍지를 꼈다.

“짜증 나. 빨리 돌아가고 싶어. 다 시끄럽고 다 성가셔.”

손가락을 단단하게 얽은 디아가 어리광을 부렸다. 보드라운 머리칼에 뺨을 비비던 반은 이때다 싶어 상체를 세웠다.

“시끄러우시구나. 그럼 재밌는 얘기 해 드릴까요?”

디아는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이 붙잡은 손을 흔들었다.

“제가 말입니다. 그때, 도련님이 딱 잠들었거든요. 갑자기 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나중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의 전말을 줄줄 내뱉으려던 반은 입을 합 다물었다.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서두만 듣고도 차단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저라면 속이 답답해서 당장 말해 달라고 떼를 쓸 텐데, 디아는 예민한 성정만큼이나 까다로운 구석이 있었다. 별도리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물었다.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하십니까?”

디아는 어깨에 기댄 머리를 두어 번 끄덕였다. 복잡한 마음을 제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이럴 때는 시간을 주는 편이 나았다.

“죄송합니다. 성질이 급해서.”

“너무 급해. 어제도 그렇고…. 나 바쁜데.”

대화 주제가 난데없이 이상향 방향으로 튀었다. 반은 어젯밤을 들먹이며 제 잘못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구는 디아의 작태에 기가 막혔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먼저 꼬드긴 사람은 자신이라지만 좋다고 달려든 쪽은 디아였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헛기침을 하는 사이 엉킨 손을 가져간 디아가 손등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췄다. 반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 다 된 것 같은데, 거참…. 여러모로 어려운 남자였다.

차창 너머로 스쳐 가는 풍경이 번잡한 도심으로 바뀌었다. 반은 어느새 허리를 바로 세운 디아를 흘긋거렸다. 정확히는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을 슬쩍슬쩍 살폈다. 개릿의 신상 정보가 액정에 떠 있었다.

미셸과 대학 동창이라고 들었는데, 그 나이치고는 상당히 정정했다. 돈을 처바르면 늙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입술을 삐죽거린 반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그의 외양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반이 개릿의 외양을 완벽히 외웠을 무렵, 이름 모를 운전수는 도시 중심에 위치한 호텔 앞에 두 사람을 내려 주고 떠났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듯 흐린 하늘을 올려다본 반은 디아를 따라 디귿 자 형태의 호텔 내부로 들어섰다. 예약한 방으로 안내받았지만 먼젓번과 같은 비밀의 공간은 없었다.

반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옷을 갈아입으려는 디아를 쫓아갔다.

“바로 나가는 겁니까?”

“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어. 빨리 끝내야지.”

“여기서 죽이려고요?”

“생포. 미셸 위치는 알아내야 하니까.”

운전수가 건넨 쇼핑백을 소파에 툭 던진 디아는 방까지 따라 들어온 반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가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반은 명령을 따르지 않고 꿋꿋이 버텼다.

“우리 서로 볼 건 다 보지 않았습니까? 전 어제 다 봤는데.”

실없이 웃으며 보다 편안한 감상을 위해 소파로 향할 때였다.

“몇 번 봐줬다고 멋대로 기어오르지 좀 마.”

신경질적인 것을 넘어 억압적이기까지 한 비난이 날아왔다. 물렁물렁하게 풀렸던 분위기에 얼음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밤새 물고 빨아 놓고 내외하는 꼴이 우스워 장난 좀 친 것뿐이었던 반은 뜻밖의 반응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짜증스러운 손길로 외투를 벗던 디아는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는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반은 당황한 티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남자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원하시는 대로 그에게서 등을 지고 축 늘어졌다.

“섭섭해요, 도련님.”

서운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어깨를 늘어뜨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의 서운한 행세에 깜박 속아 넘어간 디아는 먹구름이 드리운 뒤통수를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바삐 옷을 갈아입고 나가야 함에도 손톱 끝만 부산스럽게 매만지던 디아는 소파 등받이에 얼굴을 푹 파묻은 반을 흘끔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보여 주기 싫어. 징그럽잖아. 예쁘지도 않고.”

가시 돋친 말을 퍼붓는 입에서 본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반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누르고 뒤를 흘깃 살폈다. 방에서 내보내길 포기하고 본인이 뒤도는 것을 택한 디아가 상의를 벗었다.

무수한 흉터가 수놓아진 피부는 예쁘게 굴곡진 견갑골과 등의 생김새에 흠집을 내지 못했다. 소파 팔걸이에 기댄 반은 허리에서 골반으로 떨어지는 부분에 쏙 들어간 보조개를 발견했다. 저게 어렸을 때도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두 손가락으로 꾹 눌러 보고 싶은 아폴론 보조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은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안 예쁘대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해. 나도 징그러운 거 아니까.”

버릇처럼 자신을 깎아내린 디아는 상체에 착 달라붙는 검은 목폴라를 껴입었다. 이어 홀스터를 착용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비아냥을 쏟아 냈다.

“너도 대단해. 이런 몸 보고도 붙어먹을 생각을 하는 거 보면.”

어느새 턱을 괸 채로 디아를 감상하던 반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말버릇 한번 더럽게 예뻤다. 대체 4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성격이 저 모양 저 꼴이 됐는지, 언제 날 잡고 탈탈 털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검은색 점퍼를 걸친 디아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하고 밝은 금발을 쓸어 올리는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야한 구석이 있었다. 그를 추켜세울 칭찬거리를 고민하던 반은 눈가에 남은 흉터를 눈에 담은 순간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

“도련님 몸은… 꼴려요.”

의자에 걸터앉아 워커 끈을 꽉 조이던 디아가 고개를 휙 쳐들었다. 황당하다는 빛이 듬뿍 담긴 시선이 얼굴에 꽂혔다. 말실수를 한 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횡설수설 덧붙였다.

“어디서 그러던데. 흉터는 훈장이라고. 저도 지금 제가 제정신 아닌 것 같긴 한데…. 그, 제가 이 나이 먹고 한참 어린 도련님한테 이러면 안 되지만, 진짜로.”

홧김에 던지고 변명을 덕지덕지 붙이던 반은 혈기 왕성한 남자에게는 어쩌면 가장 큰 칭찬이 될 수도 있는 한마디로 마무리 지었다.

“도련님이랑 자고 싶어요.”

이를 드러내고 씩 웃자 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신발 끈을 단단히 조인 디아가 의자에서 훌쩍 일어났다. 평소의 무표정한 낯으로 돌아간 남자는 방을 가로지르다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버티지도 못해 놓고 말은 잘해.”

“무슨 말씀이신지….”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태연하게 시치미 뗀 반은 디아를 따라 방을 벗어났다. 쇼핑백을 침대 근처에 던져둔 디아는 가방을 뒤적이며 건조한 투로 몰아붙였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데.”

“잘못… 보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잘 걷는데요.”

“그래? 내가 잘못 본 거야?”

여태 뻐근함이 가시지 않은 다리를 질질 끌던 반은 냉큼 똑바로 발을 디뎠다. 척추가 엇나간 듯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흘깃 돌아보는 디아에게 미소로 화답하자 묘한 표정으로 눈길을 돌린 디아가 가볍게 빈정거렸다.

“죄송하다고 우는 꼴도 내가 잘못 본 건가 봐.”

“…아마도요.”

입꼬리가 어색하게 비틀렸지만 반은 끝까지 자존심을 세웠다. 어려도 한참은 어린 남자 때문에 죽다 살아난 것을 인정하기에는 화려한 과거를 보유한 제게 면목이 서지 않았다. 머리 좀 컸다고 어른을 놀리려고 드는 디아의 뒤통수를 흘끔흘끔 노려보는데, 가방을 뒤적이던 남자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손.”

반사적으로 큼직한 손바닥에 손을 얹은 반은 제 손목에 감기는 손수건과 그 위로 달칵 채워진 익숙한 쇳덩이를 멀뚱히 바라봤다. 의문을 구체화할 틈을 주지 않고 수갑 반대쪽을 침대 헤드에 채운 디아는 체인을 흔들어 잘 고정된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떼어 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입을 떡 벌린 반은 홀로 나가려는 디아를 다급히 붙잡았다.

“이게 뭡니까? 도련님? 이게 무슨…?”

“같이 다니는 건 안 되겠어. 자꾸 신경 쓰여.”

“아니, 아니…. 신경 안 쓰이게 하겠습니다. 저 그래도 조금은 도움 됐잖습니까. 맞죠? 아니에요?”

팔을 잡은 손을 떨어뜨린 디아가 멀어졌다. 그를 쫓아 걷다가 침대와 연결된 수갑 때문에 발을 헛디딘 반은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아무리 당겨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수갑을 연거푸 흔들면서 디아를 돌아봤다.

“혼자 뭘 어떻게 하려고요. 도련님은 아직 어리고….”

거리를 멀찍이 벌리고 얼굴 절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낀 디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반은 무심결에 내뱉은 속내를 황급히 정정했다. 나이에 유독 예민한 남자를 자극할 때는 아니었다.

“아니, 어리지는 않지만….”

“오늘은 혼자 가는 거 아니야. 네가 걱정할 만큼 약하지도 않고.”

디아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고, 반은 그 근거를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의 말을 뒷받침하듯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길쭉한 건 캐리어가 방문 앞에 놓여 있었다. 지원 인력의 존재가 확실함에도 반은 좀처럼 안심할 수 없었다. 손을 휘저어 그의 시선을 끌어당긴 반은 말도 안 되는 떼를 쓰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도련님, 이거 엄청 불안한 거 압니까? 우리 영화 많이 봤잖아요? 이렇게 갔다가 안 돌아오고, 그러면 안 되지만 하여튼…! 아. 우리 대화. 대화 그거 지금 하면 안 됩니까? 저 대화하고 싶어요, 네?”

디아는 안절부절못하는 반을 빤히 바라보며 건 캐리어 끈을 어깨에 멨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흘러나온 대꾸는 반의 바람과 훌쩍 동떨어져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게 맞나 봐.”

“예?”

“체력 좋네, 반? 빌빌거리길래 봐줬더니.”

반은 수갑을 쭉 당기다가 얼어붙었다. 제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지금 디아는 망발을 뱉은 셈이었다. 되바라진 디아를 멍하니 응시하던 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논리적으로 쏴붙여야 하는데,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라고는 넋 나간 탄성이 전부였다.

‘와, 아니, 저게…’ 하며 더듬더듬 중얼거리던 반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태연한 척, 아닌 척도 이제 한계였다. 점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디아는 연락을 확인하며 반을 미치고 팔짝 뛰게 하는 소리를 이어 갔다.

“힘 아껴 놨다가 이따 섹스할 때 쓰자. 난 힘 좀 빼고 올게.”

“와, 진짜 뭐라는 거야….”

기가 막혀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반은 기함할 소리를 내뱉고 휙 뒤돌아 나가는 디아를 향해 목소리를 키웠다.

“도련님! 디아! 이거 안 풀어? 야!”

새파랗게 어린 남자는 윽박지르는 반을 무시하고는 복도로 사라졌다. 묵직한 문이 매정하게 닫히며 조용한 호텔 방에 홀로 남은 반은 복도를 향해 마구 발길질하다가 성질을 못 이기고 침대로 쓰러졌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턱턱 막혔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수갑까지 채워진 이상 별도리 없었다. 침대에 드러누운 반은 금의환향하는 디아를 맞아 주는 상상으로 불안을 달랬다. 당연히 얼마 가지 않았다. 주먹으로 베개를 때리고 매트리스를 뒤꿈치로 퍽퍽 내려찍으며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 봐도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자기보다 키도, 완력도 월등한 놈이 뭐가 그리 걱정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놈을 업어 키웠다고 생각해 보라.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기분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슬슬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여기서 싸라는 거야 뭐야….”

꿈지럭거리며 몸을 일으킨 반은 헤드와 연결된 수갑을 당겨 봤다. 그 난리를 쳤는데도 꿈쩍도 안 하는 꼴을 보아서는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야무지게 묶인 손수건을 매만진 반은 참다가, 참다가 결국 바닥으로 내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디아가 내버려 두고 간 쇼핑백이 보였다. 저거다 싶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리다시피 해 다리를 쭉 뻗었다. 그러잖아도 삐걱거리는 관절이 동강 나는 고통을 견디며 발끝으로 쇼핑백 손잡이를 콕 밟았다. 끙끙거리며 사력을 기울인 결과 쇼핑백을 손에 넣은 반은 가벼운 쇼핑백을 뒤집어 탈탈 털었다. 디아가 새 옷에서 떼어 낸 태그가 후드득 떨어졌다.

반은 태그와 연결된 옷핀을 집어 날카로운 부분을 수갑 구멍 안에 쑤셔 넣었다. 땀 냄새 나는 놈들과 데굴데굴 구른 세월이 얼만데, 수갑 하나 못 풀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날 너무 쉽게 봤어….”

이죽거리며 수갑을 풀어낸 반은 손수건까지 풀려다가 그만뒀다. 새파란 손수건과 앙증맞은 매듭이 마음에 걸렸다. 이것까지 푸는 것은 디아의 정성을 무시하는 짓처럼 느껴져서, 손수건은 그대로 두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빠르게 볼일을 보고 손을 꼼꼼하게 씻은 반은 넓은 방을 지나쳐 침실과 연결된 발코니로 나갔다.

의자를 비스듬히 돌려 창가에 자리 잡자 시꺼먼 구름이 낀 하늘이 보였다. 공기가 습했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돌아와야 할 텐데.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반은 하염없이 디아를 걱정하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낮은 층에 위치한 방이라 호텔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호텔이 도심에 위치한 덕에 이용객이 꽤 많았다.

이런 곳에서 기차 때와 같은 난장판을 벌일 만큼 무모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이번에야말로 쏙 들어가서 쓱 처리하고 나오기를 바라며 북적거리는 인파를 멍하니 구경하던 중이었다.

“…어?”

탄성을 뱉은 반은 눈을 찌푸리고 호텔 입구와 연결된 정원을 유심히 바라봤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호텔을 빠져나가는 노인의 뒷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평범한 행색에 중절모를 푹 눌러써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옆얼굴을 언뜻 보았던 반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인을 가운데 두고 걷는 듬직한 남자 둘의 태도를 눈여겨본 순간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느 관광객이 저토록 주위를 경계하며 걷겠는가.

벌떡 일어난 반은 황급히 주머니를 뒤지다가 탄식했다. 핸드폰이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디아의 연락처를 모르는 이상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개릿으로 추정되는, 아니. 개릿은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에도 착실히 호텔을 벗어나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마구 쓸어 넘기던 반은 더는 고민할 겨를 없이 방을 가로질렀다. 일단 발을 묶어 놓기라도 할 심산으로 문을 벌컥 열었으나 곧장 뛰쳐나가지는 못했다. 누군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문을 등진 채 방을 지키던 남자가 인기척을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갈색에 가까운 금발을 단정하게 넘긴 남자가 시선을 맞추었다. 반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또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남자의 이름이 벙긋 벌어진 입에서 튀어나왔다.

“리암?”

“안녕하십니까, 반 클라크 씨.”

리암은 여느 때처럼 교육받은 듯한 미소로 반을 응대하면서 간결히 덧붙였다.

“나오시면 안 됩니다.”

반은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저도 나올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아까 개릿이 호텔에서 나간 것 같습니다. 도련님께 알리고 싶은데 전화 좀 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핸드폰이….”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전달하기는 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반은 복도를 돌아보며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아, 놓칠 것 같은데….”

디아가 가뜩이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개릿이 마르세유를 떠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디아는 제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기차 습격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반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개릿의 발만 묶어 둘 요량으로 뻔뻔하게 웃으며 리암을 슬쩍 지나쳤다.

“도련님 오실 거니까 괜찮죠?”

“…….”

몸을 휙 돌린 반이 잡을 새도 없이 복도를 내달렸다. 리암은 승강기가 있는 방향으로 뛰다시피 나아가는 반을 막아서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때,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 엠마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 타깃 포착. 이동합니다.

상체에 꼭 맞게 제작한 정장 재킷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리암은 승강기를 기다리며 발을 툭툭 구르는 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구둣발이 복도를 디딘 순간 다른 자의 목소리가 무전을 통해 넘어왔다.

- 리암. 클라크 상황 보고해.

리암은 도착한 승강기에 냉큼 올라탄 반을 눈에 담으며 대답했다.

“얌전히 계십니다.”

- 못 나오게 해. 대화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무전이 끊기고, 승강기 앞에 도착한 리암은 닫히는 문 틈새로 손을 끼워 넣었다. 초조하게 닫힘 버튼을 누르던 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리암은 스르르 열린 문을 지나 승강기에 올라타며 평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행하겠습니다.”

“아, 혼자 가는 것보단 낫겠네요.”

개릿을 붙들 방법을 고안 중이었던 반은 언제 봐도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리암을 위해 한발 물러났다.

반은 손목에 감긴 새파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리암의 등을 흘끔거렸다. 리암도 함께 가겠다, 개릿도 발견했겠다, 이 정도면 디아에게 혼날 일은 없을 듯했다.

새파랗게 어린 놈에게 혼날 걱정부터 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솔직히 디아는 가끔 무서운 면이 있으니까. 결단코 지레 겁먹은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헛기침을 한 반은 긴장이 묻어나는 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만 잘 넘기면 된다. 그 한 가지 목적만 생각하기로 했다.

호텔에서 빠져나온 반은 서둘러 정원을 가로질렀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개릿이 향한 방향을 살폈다. 벌써 떠났으면 어쩌나 했는데, 저 멀리 새카맣게 선팅된 차에 올라타는 개릿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를 놓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마냥 즐거워할 때는 아니었다.

“아, 씨….”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반은 막 승객이 내린 택시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별말 없이 따라온 리암과 택시에 오른 반은 개릿의 차를 다급히 손가락질했다.

“따라가 주세요. 저 차. 까만색!”

운전석을 꼭 붙들고 택시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지만 운전수는 알 수 없는 말을 쏟아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야 이곳이 유럽임을 깨달은 반은 이마를 턱 짚었다가 리암의 옆구리를 찔렀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리암은 유창한 불어로 뒤늦게 반의 요구를 통역해 주었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운전수는 리암에게서 팁을 건네받은 후에야 액셀을 밟았다.

초조하게 다리를 떠는 사이, 도심으로 파고든 개릿의 차는 점차 인적이 드문 구역으로 향했다.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낯선 도시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한들 개릿의 행선지를 추측할 능력은 없었다. 입술을 질근거리던 반은 조용한 리암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련님은 언제 오신답니까?”

“출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빨리 와야 하는데….”

개릿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한 반과 평온한 미소를 띤 리암을 태운 택시는 머지않아 어둑어둑한 골목에 멈추어 섰다. 개릿의 차가 들어간 건물과 동떨어진 골목에 내린 반은 값을 지불하는 리암을 등지고 하수도 냄새가 올라오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골목 끝에서 고개를 내밀고 두 블록 떨어진 고층 빌딩을 응시했다. 시공이 덜 끝나 창이며 섀시 따위 없이 휑한 빌딩은 우중충한 하늘과 어우러져 불길한 기운을 물씬 풍겼다. 주의 깊게 동태를 살폈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낌새는 없었다. 눈살을 찌푸린 반은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공사가 한창인 빌딩 아래에는 중장비가 방치되어 있었다. 방수포로 덮어 둔 건물 자재를 피해 빌딩 입구로 접근하면서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여기는 왜 온 걸까요?”

“헬기를 타려는 모양입니다.”

막힘없이 튀어나온 답변에 놀란 반이 뒤를 돌아봤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리암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손길로 공사 안내판을 가리켰다. 고개를 쭉 빼고 설계도를 살피자 옥상에 헬기 이착륙장이 있었다. 거참 관찰력이 좋으시다고 실없는 소리를 던진 반은 발밑에서 부스러지는 자갈을 밟으며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더더욱 조급해졌다. 개릿이 헬기를 타고 떠날 심산이라면 디아를 기다릴 때가 아니었다.

창호 설치 작업 중인 빌딩 안은 황폐했다. 불투명한 비닐이 붙은 승강기를 지나친 반은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한 칸 한 칸 오를 때마다 혹사한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지만 잠시도 쉴 수 없었다.

섬에 들어간 후로 다시 운동을 게을리한 탓에 금세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계단이 끝나는 층에 발을 디뎠다. 여기서부터는 중앙 계단이 아니라 비상구를 이용해야 옥상으로 갈 수 있었다. 황급히 모퉁이를 꺾자 까마득하게 긴 복도가 펼쳐졌다. 통으로 이루어진 복도 창 너머로 한층 가까워진 먹구름이 보였으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

그러면 그렇지, 개릿에게로 향하는 길이 평탄할 리가 없었다. 덩치가 산만 한 경호원이 복도를 지키고 있다가 재빨리 돌아서서 반을 막아섰다. 경계 가득한 눈빛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누구십니까? 이곳은 출입 불가입니다.”

아직은 잘못 들어온 현지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또박또박하고 단호한 영어로 접근을 제한한 남자의 손이 재킷 안으로 느릿하게 들어갔다. 여차하면 총을 꺼내 들 태세를 취하는 남자와 그의 뒤로 펼쳐진 복도 끝 비상구를 빠르게 살핀 반은 능청스럽게 눈을 접어 웃었다.

“봉쥬흐. 싸 바?”

경호원의 낯에 난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반은 그에게 슬금슬금 다가가며 아는 불어를 몽땅 끌어다가 내뱉었다.

“익스퀴제 무아. 멕씨 보꾸, 쎄 꽁비앙?”

“이곳은 출입 불가이니 돌아가십….”

“…보나 베띠?”

“…….”

코앞에서 마주한 경호원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바보 같은 미소를 거둔 반은 내심 한탄했다. 아무래도 저는 불어에 재능이 없는 모양이었다. 재킷 안에서 빠져나오는 총기를 발견하자마자 냅다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제게 겨누어지는 총구를 쥐고 위로 치켜올렸다. 단발의 총성이 울리자마자 총열을 쥔 손바닥이 불붙은 듯 화끈거렸다.

이를 악문 반은 주먹을 쥐고 남자의 턱을 날렸다. 제법 세게 후려쳤다고 생각했는데 체급 차가 상당한 경호원은 꿈쩍도 하지 않고 도리어 반의 멱살을 잡아 내팽개쳤다. 먼지가 피어나는 복도를 나뒹굴자 뼈가 조각조각 나는 듯한 고통이 덮쳤다.

“큭…!”

“침입자다. C 구역…!”

총구를 겨눈 채 무전을 치는 경호원의 허벅지를 다리로 감아 중심을 무너뜨렸다. 방심하여 틈을 보인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주먹이 제대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뻐할 새는 없었다. 신음을 짓씹으며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한 남자가 반의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치고는 목덜미를 잡아 옆으로 또 한 번 내동댕이쳤다.

“읏…!”

콧대에서 후끈한 열이 끼쳤다. 혈관이 터지며 흐른 피가 인중을 적셨다. 혀를 씹을 뻔한 반은 무릎에 힘을 주었다. 체계 없이 어깨너머로 배운 주먹질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경호원을 때려눕힐 수 없었으나 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무릎을 짚고 일어서는 남자의 손을 온 힘을 다해 걷어찼다. 손아귀에서 떨어진 총이 미끄러운 복도를 타고 멀리 밀려나면서 조금의 시간을 벌어 주었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 기둥에 뒤통수를 기댄 반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씨….”

컨디션이 최상일 때 맞붙어도 승산이 없을 판인데 이딴 몸 상태로는 1분도 버티기 힘들었다. 벌써 얻어맞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반면 경호원은 입술만 찢어졌을 뿐 허탈할 정도로 멀쩡했다.

총은 멀리 있는 데다가 시야는 흐렸다.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총을 줍기 위해 걸음을 떼는 경호원이 둘, 셋으로 쪼개질 무렵 반의 잇새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저 복도 끝에서 우르르 내려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봐도 제 편으로 보이지 않았다.

“와, 진짜….”

개릿이 나가든 말든 호텔에 있을 걸 그랬나. 가끔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해 일을 벌이고 마는 자신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주르륵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는 사이 개릿의 경호원으로 보이는 무리가 얼굴이 확인되는 거리로 들어왔다. 약에 취해 난동을 부린 현지인인 척해 볼까. 죽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제 임기응변에 감탄하며 시나리오를 짜 맞출 즈음이었다.

한 발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벽에 퍽 박힌 총알에 경호원들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휙 돌아갔다. 우중충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유리창에 금이 쩍 가 있었다.

“옆 건물이다!”

“숙여!”

모두가 총을 꺼내 드는 것과 동시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굉음이 온 사방을 울렸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복도 통창이 모조리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소음에 기겁한 반은 허둥지둥 몸을 구겨 기둥 뒤에 숨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뭐야…. 뭐야, 이거….”

식겁한 목소리가 쉼 없이 쏟아지는 총성에 묻혔다. 바짝 끌어모은 발 옆으로 깨진 유리창이 와르르 쏟아지고 사방으로 튀어오른 유리 조각이 뺨에 생채기를 냈다.

누군가 맞은편 건물에서 이쪽 복도를 난사하고 있었다. 흘끔 곁을 돌아보자 침입자를 처리하기 위해 내려온 경호원 대부분은 저격을 피하지 못한 듯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나머지는 기둥 뒤에 숨었으나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반도 다를 바 없었다. 반은 유리 조각에 뒤덮인 시체들을 경악한 눈으로 보다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모퉁이를 돌아봤다. 휙 튀어나와 기둥 뒤에 숨은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리암이었다. 아래층에서 경호원을 처리하고 온 듯 셔츠 깃에 핏방울이 묻어 있었다.

“리암!”

반은 끊이지 않는 총성에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도련님 아는 거 맞아요? 저 여기 있는 거?”

죽다 살아난 덕에 한순간 판단력이 흐려졌지만 이리 미친 듯이 총알을 퍼부을 만한 놈은 디아밖에 없었다. 한꺼번에 처리할 계획이라면 그럴 만도 했으나 다소 이상했다.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 냅다 난사를 할 놈이 아니었다.

도대체 디아가 왜 저러냐고 물으려던 입은 발치에 총알이 박히자마자 꾹 다물렸다. 징그러울 정도로 무수히 수놓아진 총알 자국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바닥에 상처를 내고, 또 냈다.

마침내 섬뜩한 총성이 멎었을 때, 복도는 난장판이 되었고 귀는 먹먹하게 막혔다. 후들거리는 손을 떨어뜨린 반은 널브러진 시체가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일어섰다.

힘이 풀린 다리가 휘청거렸다. 가끔 저 못지않게 큰일을 벌이는 디아 때문에 제 명에 못 죽지 싶었다. 리암에게 무어라 할 말이 있었는데 기억도 나지 않고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미치겠네, 진짜….”

설치한 보람 없이 깨져 나간 복도 통창은 기차 차창을 연상시켰다. 어제의 울분을 여기다가 푼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저린 허벅지를 툭툭 두드린 반은 기둥 뒤에 숨어 맞은편 건물을 흘끔거렸다. 한시바삐 비상구로 가야 하는데, 경호원으로 오인당하면 벌집이 되고 말 것이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철컥.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반은 제게 들이밀어진 시커먼 총구를 발견했다. 반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리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창백한 검지가 방아쇠를 당겼다. 눈을 질끈 감은 반의 어깨 너머로 날아간 총알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던 경호원의 머리를 날렸다. 묵직한 것이 털썩 쓰러지는 소리에 슬그머니 뒤를 돌아본 반은 짜증스러운 탄식을 뱉으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말은 좀 해 주시지….”

말도 없이 총을 들이미는데 안 놀라고 배기겠나. 반은 이 남자에게는 도무지 정이 안 붙는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권총 한 정을 주워 들었다. 방아쇠 한 번 당겨 볼 기회 없이 총알 세례를 받은 탓에 탄창은 꽉 차 있었다.

총격이 멎은 건너편 건물을 흘깃흘깃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상체를 낮추고 시체 더미를 넘어가는 동안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쓴 반은 무사히 복도를 가로질러 비상구로 들어섰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비상구의 벽에는 창문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창틀 너머로 꿉꿉한 바람이 몰아쳤다. 비 냄새가 났다.

반은 형태만 완성된 계단을 오르며 권총 손잡이를 바투 잡았다. 한시바삐 개릿을 처리하고 고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한편으로는 디아보다 먼저 개릿을 독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그놈의 혈연. 애정 한 톨 주지 않은 할머니도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개같은 혈연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 좀체 넘어가질 않았다.

치열하게 부딪치는 마음을 안고 옥상으로 향하는 통로 앞에 도착한 반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문은 없었지만 멋대로 들어갔다가는 목표물을 목전에 두고 머리가 날아갈 것이다. 미안하지만 리암을 앞세울 생각으로 뒤를 돌아봤는데, 그새 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툴툴거린 반은 발소리를 죽이고 문가에 붙어 섰다. 고요한 것으로 보아 아직 헬기는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마자 총성이 빗발쳤다.

“헉…!”

옥상 엄폐물을 끼고 경계 태세를 갖춘 경호원 두엇이 그림자를 보자마자 총을 쏜 것이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도로 벽에 붙어 선 반은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부서진 문틀에서 부스스 떨어진 돌가루가 어깨를 더럽혔다.

지금 달려든다고 해 봤자 한 명도 아닌 무장 경호원을 상대하는 것은 제 능력 밖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이 천천히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개릿을 만나는 것보다 조금 전 수명을 달리한 경호원들과 저세상에서 만나는 편이 빠를 듯했다. 여러모로 막막한 상황이었다.

반은 쓴 지 오래되어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황급히 굴렸다. 경호원은 한 발 한 발 가까워지고, 그럴싸한 묘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디아가 오고 있을 테고, 제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마른침을 삼킨 반은 대뜸 목청을 키웠다.

“잠시만요! 총 쏘지 마세요!”

“신원 먼저 밝혀라!”

걸걸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화할 의지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반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제 신원을 낱낱이 밝혔다.

“저 반 클라크입니다! 미셸 클라크 손주! 미셸이 제 할머니예요!”

개릿은 미셸과 친분이 있고, 그와의 만남을 위해 칩거 생활까지 접은 사람이다. 혈연과 지연에 호소하면 안 될 것도 된다는 믿음 아래 반은 무고한 피해자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혼자 있습니다! 혼자 왔으니까 쏘지 마세요. 총 주웠는데… 이거도 드릴게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옥상 바닥에 권총을 미끄러뜨렸다. 유일한 무기를 제 손으로 내어 준 셈인지라 불안했다. 다행히도 더 이상의 총격은 없었다. 아마도 개릿이 사격을 중지시킨 모양이었다.

이제부터가 관건이었다. 숨을 들이켠 반은 양 손바닥을 펼쳐 들고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이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빠르게 훑어보자 호텔 발코니에서 목격한 경호원 둘이 옥상을 지키고 있었다. 총구를 물리지 않은 경호원은 반을 향해 고갯짓했다. 눈치를 살피며 옥상으로 들어서자마자 한 명이 다가와 몸을 수색했고, 다른 하나는 옥상과 이어지는 통로를 점검했다. 더듬어 내려가는 손에 몸을 맡긴 반은 헬리패드 근처에서 이곳을 바라보는 노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상 없습니다.”

수색을 마친 반은 곧장 개릿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경호원은 경계심 가득한 눈길을 보낼 뿐 앞을 막아서지는 않았다.

헬리패드 앞까지 다다른 반은 태블릿을 통해 외운 노인의 낯짝을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묵례했다. 정답게 인사나 나눌 상황은 아니었다. 미셸 못지않게 인정머리라고는 없어 뵈는 인상의 노인은 감정이 읽히지 않는 눈으로 반을 마주 봤다.

“…반 클라크.”

주름진 입매가 씰룩거리더니 노화로 인해 볼품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쉬어 송곳으로 칠판을 긁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아직 귀를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미셸에게 얘기는 들었다. 그런데 자네가 왜 여기에 있나?”

죽음이 뒤꽁무니까지 따라붙었는데도 초조한 기색이 없는 노인의 눈이 반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친우의 손주를 맞이하는 눈빛은 결단코 아니었다. 의심과 불신이 바탕에 깔린 시선을 마주한 반은 막 지어낸 이유를 댔다.

“잡혔습니다. 얼마 전에.”

진실은 아니지만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디아가 저를 붙잡은 것은 사실이었다.

“저를 가지고 미셸을 잡으려는 모양인데, 뭐…. 아시다시피 전 아무것도 모르잖습니까. 잠깐 틈이 생겨서 도망쳤는데….”

하지만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던 반은 쇳내가 진동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차피 믿는 눈치도 아니었다. 난처한 표정을 지운 반은 대놓고 물었다.

“미셸이 어디 있는지 아신다고 들었습니다. 알려 주세요.”

“알려 주면? 그놈들에게 흘릴 생각인가?”

개릿은 느긋한 투로 허를 찔렀다. 반은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손을 의미 없이 휘저었다.

“제가 왜 그럽니까. 미셸이 좀…. 좀 그래도 제 할머닌데.”

“자네가 연구소에 침입했다는 건 알고 있다. 개체를 빼돌리려고 했다지.”

“…그건.”

반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말문이 막혔다. 연구소의 자금줄이었던 만큼 4년 전 사태의 전말을 꿰고 있는 것이 당연한데, 이를 간과하고 말았다. 멋쩍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반을 가만 바라보던 개릿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것이 숙주인 자네를 가지고 노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그때도 지금도.”

질책하는 투는 아니었다. 디아를 빼돌리는 데 실패한 데다가 더한 일이 덮쳤으니 연구소 침입쯤이야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반은 비위를 맞추는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노인의 어감이 묘했다.

“…제가 아직도 숙주 노릇 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때도 지금도’라니. 그때는 숙주가 맞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링크가 끊어진 것까지도 보고받았을 개릿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가설을 내놓았다.

“07은 자네에게 애착이 유독 깊었다고 들었다. 링크가 끊길 시기가 한참 넘었는데 말이야. 그놈들 사이에서는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자네도 기존 숙주들과 다를 확률이 높아.”

듣다 못한 반은 노인의 가설에 대고 코웃음을 쳤다. 링크는 끊어진 지 오래다. 죽을 것 같은 아픔을,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떠오를 기미가 없는 우울을 1년에 걸쳐 겪으며 디아와의 연결 고리를 끊어 냈다. 더군다나 다시 만난 디아의 서러운 낯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괴롭다고.

고로 디아를 떠올릴 때 느껴지는 감정은 오롯이 제 것이었다. 애틋하고 죄스럽고 사랑스러운 감정이 외계 돌연변이에 의한 영향일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나 개릿은 예상조차 못 한 이야기를 꺼냈다.

“일방적인 주장인지는 모르겠지만 07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기록이 있던데. 사실인가?”

“와, 진짜….”

순간적으로 기가 막힌 반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쭈글쭈글한 노인에게, 그것도 할머니의 지인에게 듣고 싶은 질문은 전혀 아니었다. 멋모르는 디아가 그 빤빤한 얼굴로 저와의 관계를 미셸에게 조곤조곤 늘어놨을 거라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그게 뭐, 뭐…. 중요합니까?”

반은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되레 성을 냈다. 그 반응에서 답을 얻은 개릿은 아직 헬기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하늘을 돌아보며 멋대로 결론지었다.

“그것들이 숙주를 대상으로 생식 욕구를 느낀 사례가 없었으니, 07은 확실히 돌연변이라고 봐야지. 성관계가 변수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적나라한 단어 선택에 미간을 구긴 반은 입술을 짓씹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망상을 구구절절 펼쳐 놓나 싶었지만, 불쾌감이라는 표층 아래에서 또 다른 감정이 피어올랐다. 머릿속이 점차 복잡해질 즈음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자네가 의심스러워.”

반은 헛소리하지 말라고 혀를 놀릴 수가 없었다. 디아는 돌연변이가 맞을지 몰라도 자신은 숙주 노릇을 때려치운 지 오래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문득 떠오른 것은 지난 4년의 잔상이었다. 몇 달 살 맞대고 산 것이 고작이었던 소년을 몇 년이나 그리워하며 타인에게서 소년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썼던 나날. 아름다운 소년을 상상하며 욕구를 풀었던 숱한 밤.

얼굴도 모르는 도련님에게 강렬하게 끌렸던 순간, 눈물을 떨어뜨리는 남자에게 무엇이든 다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던 새벽…. 그것들이 온전한 제 감정이 아니라면.

순전히 개릿의 망상, 가설일 뿐인데도 머릿속이 표백된 것처럼 이다음 취해야 할 행동이 떠오르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일깨운 것은 개릿의 목소리였다.

“언제 도착하나?”

“곧 도착합니다. 준비하시면 됩니다.”

반은 경호원과 대화를 나누며 헬리패드를 향해 돌아서는 개릿을 찌푸린 눈으로 응시하다가 입을 뗐다.

“제가 잘못됐습니까?”

개릿의 시선을 삐딱하게 마주 본 반은 비웃음을 머금고 빈정거렸다.

“아니…. 어린애 가두고 실험하고 두들겨 패 놓고 제가 잘못된 것처럼 말씀하시네?”

“예상 못 했나?”

“당연히…!”

“의뢰받았을 때, 선금 확인했을 때, 07을 키울 때, 넘겨줄 때. 아무리 자네가 미셸과 닮은 구석이 없더라도 그 정도는 알았을 텐데? 알았으니까 빼돌리려고 했을 테고. 아닌가?”

되로 주려다 말로 받은 반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디아가 아무리 못된 말을 퍼붓고 차갑게 굴어도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주름진 입에서 우수수 튀어나왔다. 개릿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웅크린 죄책감을 쿡쿡 찔렀다. 그들의 입장에서, 디아의 입장에서 반은 가담자였다.

책임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또 한 번 확인받은 반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죄책감이든 말도 안 되는 가설이든, 그딴 것들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 개릿을 디아보다 먼저 만나고자 한 목적부터 해결해야 했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고…. 저 다른 거 묻는 거 아닙니다. 저 할머니 만나야 해요. 아시잖습니까? 저 개고생한 거. 대체 저한테 왜 이딴 일 떠맡겼는지, 이제 어떻게 할 건지 물어라도 봐야겠습니다. 지금 다들 미셸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데, 하다못해 장소라도 옮겨야죠. 안전한 데로. 말해 주세요. 미셸 어딨어요?”

답을 듣기도 전에 헬기 로터가 빠르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쳐든 반은 컴컴한 구름을 가르고 날아오는 검은 헬기를 발견했다. 시간이 없었다. 코트 매무새를 다듬는 개릿의 팔을 잡으려다가 경호원에게 제지당했다. 강건한 팔에 가로막힌 반은 예의 따위 집어치우고 목청을 키웠다.

“미셸 어디 있냐고 묻잖아요!”

“미셸은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이동 못 하는 상황이 대체 뭔데요? 그것도 비밀입니까?”

마구 비아냥을 쏟아 내는 사이 헬기가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헬리패드 위에 착륙했다. 여차하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릴 요량으로 어깨를 붙든 경호원의 손을 뿌리치는데, 뒤로 돌아선 개릿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연구소 폭발 때, 자네가 천장에 깔릴 뻔했다지.”

저지하는 경호원과 힘겨루기하던 반의 손에서 일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밀어 내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린 반은 굳은 표정으로 개릿을 바라봤다. 불안감이 넘실넘실 차올랐다.

불현듯 과거의 파편이 의식 속에서 떠올랐다. 반쯤 가라앉은 천장과 몸 위로 떨어지던 건물 잔해, 그 사이로 언뜻 스쳐 가던 하얀 가운 자락.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는 한계 상황에 본 헛것이었을 거라 여겼던 그날의 자그마한 파편. 더 구겨질 수 없을 만큼 인상을 쓴 반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길 바라며 내뱉는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미셸이 그럼….”

“그 이유만은 아니다. 우리 나이쯤 되면 성한 곳이 없으니까.”

개릿은 완전히 착륙한 헬기로 한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그것들은 다르지. 세포 분열 속도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다가 어느 때가 되면 스스로 조절할 줄 알아. 자네는 직접 봤을 테고.”

헬기에 탑승하기 전, 긴 한숨을 내쉰 개릿은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품에서 빳빳한 명함 한 장을 꺼내 경호원에게 건네주고는 뒤돌아섰다.

“미셸은 그것들 손에는 죽지 않을 거다. 마지막 가는 길 배웅은 못 해 주게 됐어.”

“그게 무슨….”

경호원은 반에게 작은 명함을 전해 주었다. 얼떨떨한 상태로 명함을 받아 든 반은 정갈한 불어 아래 작게 적힌 영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철로 만들어진 인간처럼 언제나 굳건했던 미셸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몇 번이고 읽는 사이 개릿과 경호원 한 명은 이륙 준비를 마쳤다. 무거운 고개를 들어 올린 반은 안전벨트를 점검하는 개릿을 눈에 담았다.

오로지 목적만을 바라보고 한평생을 살아온 노인의 생존 본능은 그들을 닮아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 치는 꼴이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다. 부질없다고 생각될 뿐이지.

당장은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개릿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추적할 것이다. 집요한 추적에서 달아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반은 허탈하게 웃었다.

“벌 받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하십니까?”

헤드셋을 쓰려던 개릿은 반과 말없이 눈을 맞추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는 느리지만 분명한 어조로 반이 착각하는 것을 짚어 주었다.

“자네가 헷갈리는 모양인데…. 자네는 그들이 아니야. 우리지.”

날개가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반을 자신과 같은 범주에 넣은 개릿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먹구름 낀 하늘로 눈을 돌렸다. 짧은 고민을 끝낸 노인이 반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정부는 이 연구를 은폐하고 있어. 어디서도 도움은 못 받을 게다. 자네 링크가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숨겨 줄 수는 있어. 감금이겠지만.”

예전이라면 덥석 물었을 제안이었음에도 반은 명함을 움켜쥔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로터가 회전 속도를 올렸다. 거센 바람이 얻어맞고 굴러 만신창이가 된 몸을 할퀴었다. 개릿은 헤드셋을 쓰며 다시금 물었다.

“안 탈 건가? 곧 죽을 텐데도?”

“…안 죽을 것 같아서요.”

똑바로 서 있기 힘들 만큼 매서운 바람 탓에 상체를 낮춘 반은 담담히 대꾸했다. 친우의 손주에게 베푸는 자비는 거기까지였다는 양 개릿이 시선을 거두었다. 경호원은 떠오르기 시작하는 헬기 문을 닫았다. 이윽고 동체가 바람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흐린 하늘로 떠올랐다.

눈도 뜰 수 없는 강풍을 일으킨 헬기가 얼추 거리를 벌렸을 때, 반은 옥상 바닥에 나뒹구는 벽돌을 주워 들고 허리를 세웠다. 헬기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옥상 입구를 지키는 경호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가 돌아보기도 전에 벽돌로 머리를 내리찍었다. 신음도 내지 못하고 기절한 경호원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 들었다.

총을 들어 개릿이 탄 헬기를 겨누었다. 방아쇠에 얹은 손가락과 손잡이를 쥔 양손이 덜덜 떨렸다. 화가 났다가, 허무했다가, 짜증이 나기도 했으며, 주저앉아 한탄이나 하고 싶기도 했다. 잘 살고 있다가 폭풍에 휘말린 가로수가 된 기분이었다. 잘못이라면 그 자리에 서 있던 것이 전부인 가로수.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싶고.

개릿은 제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못 견디게 억울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반은 멀어지는 헬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헬기 꼬리를 겨누고 탄창이 떨어질 때까지 쏘고, 또 쏘았지만 헬기는 권총 따위에 타격을 입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망할….”

황급히 경호원의 재킷을 뒤졌다. 다른 권총을 찾아내 여러 발 발사했지만 개릿을 태운 헬기는 사정거리를 벗어나 점차 멀어져 갔다. 짜증스러운 나머지 바닥을 콱콱 짓밟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디아를 괴롭힌 원흉이 저 멀리 떠나는 광경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하늘이 찢어지는 소음이 났다. 압축된 공기가 한 번에 폭발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인지함과 동시에 헬기 동체에 탄두가 박혔다. 반은 사태를 파악하지도 못했으면서 냅다 앞으로 엎어져 몸을 낮추었다.

꽝! 폭발음이 먹구름 낀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면서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경악한 낯을 들어 올린 반은 불붙은 헬기가 맥없이 휘청거리다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선을 그리며 떨어진 헬기는 옆 건물에 부딪쳐 꼬리가 꺾였고, 마침내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감각이 사라진 듯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난 반은 옥상 난간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갔다. 난간 손잡이를 움켜쥐자마자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다. 택시에서 내렸던 그 블록, 여기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시꺼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뭐야….”

벌어진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누가 저런 해괴한 짓을 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반은 황급히 빌딩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지면과의 거리가 상당한 탓에 확인이 어려웠다.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개릿이 탄 헬기가 활활 타오르는 광경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반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뒤로 돌았다. 이상야릇한 감상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났다. 미셸의 거처를 알아냈고, 개릿을 처리했으니 홀가분해해도 되는 순간이었다.

옥상 입구로 걸음을 옮기자 잿가루를 실은 바람이 서늘하게 식은 목덜미를 스쳤다. 어째 현실성이 없었다. 아직 젤라또의 맛이 입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달콤하기는커녕 텁텁해서 숨이 막히는 냄새가 콧속을 침범했다. 주머니에서 구겨진 명함을 꺼낸 반은 전혀 홀가분하지 않은 표정으로 빳빳한 종이를 내려다봤다.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는 동안 명함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반은 계단참에 서 있던 리암을 발견했다. 인기척을 느끼고 바짝 긴장했던 근육이 풀어졌다. 위급할 때마다 홀연히 사라졌던 남자에게 힘없는 미소를 지어 준 반은 계단을 마저 내려가려 했다.

“안 가셨네요.”

리암은 말없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속 모를 시선이 손으로 떨어졌다. 구겨진 명함에 닿은 눈길을 알아챈 반은 무심코 손으로 명함을 가렸다.

“아, 이거….”

얼버무리며 계단을 한 칸, 두 칸 내려갔다. 유리창 없이 뻥 뚫린 창틀 너머 연기가 피어오르는 골목을 바라보며 상처가 잔뜩 난 입술을 깨물었다.

개릿과 대화를 하고자 한 건 미셸 때문이었다. 어쩌면 디아보다 먼저 미셸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가 죽기 전에 대면할 수 있다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아니, 사실은 뭘 묻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도 아니고, ‘나한테 왜 그랬어요’ 따위의 원망을 쏟아붓자니 미셸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깊지 않았다. 그렇다고 약 올리며 죽음을 축하할 정도로 미셸을 증오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몇 마디 말이나 좀 할 생각이었다.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꼬였는지 알기나 하냐고. 그뿐이다.

그렇게 간단하고 시원하게 끝마쳐야 하는데, 개릿의 폭탄 같은 한마디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4년 전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반은 제가 생존한 연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우연히 천장에 깔리지 않은 채로 발견됐겠거니 했지, 미셸이 자신을 구하러 왔을 거라는 허황한 망상은 손톱만큼도 하지도 않았다.

그 노인네는 타인이 아니라 손주라고 해도 죽음을 무릅쓰고 구해 낼 인간이 아니었다. 개릿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셸은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복잡했다. 지금 와서 미셸의 희생으로 인해 가족의 사랑을 깨닫거나 감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짜증스러웠다. 나쁠 거면 차라리 아예 나쁘지, 왜 사람 발목 잡는 짓을 해서 이토록 망설이게 만드는 건가.

반은 구겨진 명함 끄트머리를 매만지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디아가 있는 곳으로 향하며 울컥 치미는 분을 삼켰다. 리암을 쳐다보지 않고 명함을 휙 내밀었다.

“…미셸 여기 있답니다. 도련님께 전해 주세요.”

리암은 별말 없이 명함을 가져갔다. 반은 발끝으로 바닥을 짓이기듯 계단을 밟았다. 이런 얘기를 꺼낼 상대는 따로 있지만, 당장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펑 터질 것 같았다. 정리되지 않은 문장이 입 밖으로 줄줄 흘러나왔다.

“그런데… 저도 같이 만나는 건 어렵겠죠? 뭐, 나쁜 짓 한 건 맞는데…. 가족이 뭐라고 이런 게 또 신경 쓰이네요. 아. 아시는 거 맞죠? 미셸이 제 할머니인 거.”

“알고 있습니다.”

하긴, 모를 리가 없었다. 드넓은 홀에서 체마가 그 난리를 떨었으니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제가 고성에 도착하기 전부터 알았을 가능성도 있고. 마른침을 삼킨 반은 되도록 가볍게 들리도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리암도 가족, 그런 거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그… 동족이라고 해야 하나. 맞으시죠? 가족.”

“예.”

망설임 없이 답한 리암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동족의 보존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

반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웃음으로 때웠다. 디아는 딱히 동족 의식이 없어 보여서 독특한 반응을 보이는 리암이 낯설었다. 불편할 정도로 충직한 리암을 곁눈질하며 디아가 돌연변이는 맞는 모양이라고 결론 낼 무렵, 문득 새카맣게 잊고 있던 의문이 떠올랐다. 순간 등허리가 서늘해져 반은 발걸음을 늦추며 평이한 투로 말을 꺼냈다.

“도련님 말입니다.”

계단참에 발을 디디자 층수가 보였다. 2층이었다. 1층을 0층으로 표기하는 나라인 만큼, 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기까지 내려가야 할 계단이 꽤 남아 있었다. 반은 뻥 뚫린 창호 너머로 내다보이는 옆 건물을 흘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거 아시는 거 맞습니까?”

건네준 명함을 품에 넣은 리암이 즉각 답했다.

“모르십니다.”

미적미적 나아가던 걸음이 멈추었다. 골목을 헤집고 온 바람이 창틀 너머로 들이쳤다. 바람을 등진 반은 어느새 제 머리에 총구를 겨눈 리암을 마주했다. 크게 뜨인 눈에 무표정한 리암의 얼굴이 한가득 담겼다. 반은 식은땀이 나는 손바닥을 움켜쥐며 뻣뻣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장난치지 마세요. 두 번은 안 속습니다.”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장난이 아니면, 그럼 왜 이러시는데요….”

반은 말을 더듬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불행히도 피할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벽 한 면을 통으로 뚫어 둔 창구멍에 발을 얹었다. 리암은 총을 거둘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의지가 엿보이는 눈이 섬뜩했다. 반은 여차하면 뛰어내릴 심산으로 제 유일한 패를 내보였다.

“이러시면… 도련님이 안 좋아하실 텐데요.”

“그래서 곤란하다고 생각하십니다. 반 클라크 씨의 존재가요.”

“아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본인의 견해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순간 리암의 단정한 이목구비 위로 그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 같지 않은 눈빛을 한, 사람이 아닌 것들.

“명함은 전해 드리겠습니다.”

탄창이 비어 있지만 않았어도 제 머리가 날아갔을 그날이 떠오르자마자 반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틈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발보다 빠른 총알을 피할 수는 없었다.

탕!

단발의 총성이 밀폐된 공간에 메아리쳤다. 반은 왼쪽 가슴 부근의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뼈와 근육, 살점이 통째로 도려져 나갔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고통이 신경을 타고 흘렀다. 그다음으로는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감각이 느껴졌다.

하늘이 뒤집히며 거센 바람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반동으로 하늘을 보고 누운 반은 끝없이 추락하는 감각을 맛보았다. 장기가 모조리 딸려 나가고 휘날리는 사지를 주체할 수 없는 감각.

영원할 것 같던 부유감은 눈 깜짝할 새 끝났다. 반은 지상에 설치된 얇은 유리 천장 위로 떨어졌다. 위에서 떨어진 무게를 견디지 못한 유리가 사정없이 깨지면서 또 한 번의 추락이 이어졌다. 새파란 방수포가 덮인 쓰레기 수거함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나서야 끝없을 것 같던 추락이 끝이 났다.

“컥…!”

등으로 무게를 받아 낸 충격이 가슴을 꿰뚫은 고통을 뛰어넘었다. 반은 쿨럭거리며 피 맛이 감도는 기침을 토했지만 그것이 움직임의 전부였다.

새파란 방수포 위에 쏟아진 유리 조각이 살결을 찔러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각이 일었다. 비명을 지를 수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을 호소할 수도 없었다. 신경이 끊어진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큭, 윽…. 흐으….”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 폐에 구멍이 난 듯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 구멍으로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 드는데, 마냥 기분만은 아닐 것이다.

반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구멍이 생긴 유리 천장을 바라봤다. 거무죽죽한 구름이 낮아지더니 이내 구멍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뺨을 두드린 빗방울은 가느다란 빗줄기가 되어 얼굴과 옷가지를 적셨다. 반은 기어이 비를 뿌리는 하늘을 멍하니 응시하며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이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때그때 해야 하는 것이다. 디아는 그날 제 얘기를 듣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테다. 그때 대화를 나누었어야 하는데, 하면서 말이다. 웃음이 났다. 죽기 직전에 다른 사람도 아닌 디아를 떠올리다니. 정말로 그를 사랑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반!

종국에는 환청까지 들렸다. 저를 부르짖는 디아의 목소리는 냉큼 일어나 달래 주고 싶을 만큼 애처로웠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눈꺼풀은 추를 매단 것처럼 초 단위로 무거워졌다. 비에 젖은 속눈썹을 내리감은 반은 꺼져 가는 의식으로 빈정거렸다.

이런 신파,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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