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오늘, 디아는 유달리 기분이 좋았다. 이런 날은 드물었다. 지금까지는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불안 때문에 방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면, 오늘은 기분 좋은 두근거림 때문에 방아쇠에 얹은 검지가 차가운 쇳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누군가 마음을 들쑤시고 간 바람에 도통 침착할 수가 없었다. 폐에 가득 찬 달큼한 숨을 깊게 내쉰 디아는 방방 날뛰는 심정을 가라앉히고 조준경을 들여다봤다.
주위 블록에는 개릿이 들어간 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는 탓에 맞은편 건물에서는 정확히 내부를 확인하는 게 불가능했다. 별수 없이 각도를 조정하자 꼭대기 층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하나씩 날리기에는 수가 꽤 됐고, 디아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개릿이 옥상에 있다는 무전을 받은 디아는 엎드려서 꼭대기 층을 조준했다.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겨 탄을 쏟아부었다. 길쭉한 경기관총 끄트머리에서 두두두 발포된 탄환이 유리창을 깨뜨리고 한 곳에 몰려 있는 경호원들의 팔다리를 관통했다.
디아는 이곳보다 살짝 높은 꼭대기 층을 대충 살피고는 빠르게 탄창을 갈았다. 탄창 넷이 텅 빌 때까지 연사한 디아는 반동으로 인해 저릿저릿한 손을 꾹 쥐었다가 풀었다.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난장판이 된 꼭대기 층이 엿보였다.
- 헬기 접근합니다.
“…확인했어.”
엠마의 무전에 답하며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아수라장 속에서 낯익은 뒤통수를 본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자 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 한둘이 충분히 숨을 만한 두께의 기둥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기분이 들뜬 탓에 잘못 본 것일 테다.
점검을 끝낸 로켓 런처에 탄두를 장전하는 동안 자꾸만 시선이 빌딩으로 향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개운하지 못한 느낌에 집중이 어려웠다. 리암에게 연락을 해 볼까, 고민하던 찰나 엠마의 무심한 목소리가 무선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 접근합니다.
잡생각을 관두고 장전을 마친 로켓 런처를 들어 올린 디아는 궂은 날씨를 헤치고 옥상으로 접근하는 헬기를 겨누었다. 시기를 기다리던 디아의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달아날 수단을 부수고 놈을 고립시킨 다음 붙잡으면 그만인 간단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바람이 강했다. 이대로 쐈다가는 엉뚱한 빌딩이나 날릴 판이었다. 각도를 살피는 사이 사정거리를 벗어난 헬기가 옥상에 착륙했다. 디아는 짧게 혀를 차며 로켓 런처를 어깨에 걸쳤다.
“기차 경로는?”
- 세 곳으로 좁혔습니다.
“그럼 죽여도 상관없지?”
잠시 말이 없던 엠마는 이내 마음대로 하시라며 간결한 답을 내놓았다. 디아는 곧장 옥상 상공을 향해 포구를 돌렸다. 빠른 마무리를 위해서는 개릿을 생포하는 편이 나았지만 조급한 마음은 계획을 뒤바꾸게 했다.
얼른 반을 만나고 싶었다. 그를 제 곁에 두면 불안이 해소될 줄 알았는데, 어째 그의 일상을 보고 받으며 살아갈 때보다 요즘이 더욱 초조했다. 수갑에 묶인 반이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욕을 내뱉고 있을까, 풀려고 갖은 힘을 쓰고 있을까, 아니면 얌전히 누워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
참, 식사를 챙겨 주지 못했다. 지금쯤이면 밥을 먹여야 하는데, 제가 잘 챙겨 먹지 않다 보니 때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처음으로 밖에서 식사를 같이 해 볼까 싶었다. 벌써 다 풀린 것은 절대 아니고, 그냥….
디아는 오는 길에 보았던 분위기 좋은 식당을 떠올리면서 무사히 날아오른 헬기를 목표로 탄을 발포했다. 포구에서 뻥, 소리를 내며 날아간 탄이 헬기 몸체에 정통으로 꽂혔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바닥으로 추락한 헬기가 박살 나는 광경을 지켜본 디아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어쩌다 보니 판을 크게 벌였지만 처리는 엠마 몫이니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건 캐리어에 총기를 집어넣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로맨틱한 저녁이 그려졌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 가 본 적이 없어서 영화의 한 장면에 저와 반을 끼워 맞추었다. 상상만으로도 절로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시원하게 웃는 법을 잊은 디아는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한순간 표정을 확 굳혔다. 아직은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반을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었다.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하는 인간이었으니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렇지만… 너무 좋아. 또다시 샐쭉 웃은 디아는 선글라스를 끼려다가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유리창에 비친 남자가 눈을 맞추었다. 반이 예쁘다고, 꼴린다고 한 얼굴이 흐리게 비쳤다. 디아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제 눈에는 여전히 끔찍한 얼굴이었다. 반의 눈이 잘못됐든가, 제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선글라스 다리를 만지작거리던 디아는 이따 저녁 먹으러 갈 때는 선글라스를 벗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반이 던진 빈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이 꼴이 되지 않았는가.
자리를 마저 정리한 디아는 건 캐리어를 어깨에 메고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리암에게 무전을 쳤다. 리암, 하고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미리 비운 건물 계단을 빠르게 내려온 디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다시금 리암을 불렀다.
답은 오지 않고, 뺨에 차가운 물기가 뚝 떨어졌다. 손바닥을 펼쳐 허공에 내밀자 조금의 텀을 두고 연약한 빗방울이 한 방울 떨어졌다.
물 자국이 남은 검은 가죽 장갑을 내려다보던 디아는 선명한 녹안을 천천히 굴렸다. 비 냄새 풍기는 바람이 선득하게 그를 스쳐 갔다. 새카만 연기로 얼룩진 하늘을 마주한 순간 자잘한 소름이 목덜미를 뒤덮었다.
“…엠마. 호텔 확인하라고 해, 당장.”
호텔에는 리암 외에도 개릿이 숙박한 방을 감시하는 인원이 있었다. 디아는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높다란 빌딩을 응시했다. 꼭대기 층을 향해 총알을 퍼부을 때 발생한 반동이 뒤늦게 어깨를 뻐근하게 했다. 건물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가벼웠던 건 캐리어가 몸을 짓누르는 듯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원망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 비었습니다. 리암을 추적하겠….
높은 이명이 엠마의 음성을 뒤덮었다. 핏발 선 눈이 폐허가 된 빌딩에서 독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는 골목으로 돌아갔다. 이성과 판단력을 이어 주는 실이 뚝 끊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건 캐리어를 떨어뜨린 디아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골목을 향해 튕기듯 달려 나갔다.
재와 연기로 자욱한 골목에 도착하자 처참한 몰골이 드러났다. 제 손으로 격추한 헬기는 꼬리가 부서지고 날개가 꺾여 커다란 고철 덩어리로 보였다. 엔진이 폭발하며 동체를 휘감은 불이 꺼지지 않아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뜨거운 화기가 피부를 익혔다. 디아는 열기에도 개의치 않고 시체와 고철이 널브러진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길을 막은 헬기 꼬리를 넘어 탑승석에 다가가자 부서진 문짝 사이로 팔 하나가 축 늘어져 있었다. 허겁지겁 동강 난 쇳덩이를 치우자 팔꿈치에서 잘린 팔이 툭 떨어졌다. 옷은 물론이고 피부까지 새까맣게 그을어 주인을 짐작할 수 없었다.
“반, 반….”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디아는 연신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뜨거운 쇳덩이를 마구 헤집었다. 가죽 장갑이 녹아내려 살결에 들러붙었지만 아픔을 느낄 새가 없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팔뚝을 베여 가며 형체를 분간하기 힘든 사체를 일일이 확인한 디아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반은 이곳에 없었다.
골목에서 빠져나가며 끈적하게 녹아내린 장갑을 벗자 표피가 뜯겨 나갔다. 삽시간에 피를 머금은 손바닥을 들여다볼 틈도 없이 빌딩으로 뛰었다. 시공이 덜 끝난 건물로 들어서자 다리를 절뚝거리며 홀을 가로지르던 경호원 하나가 황급히 총을 빼 들었다.
“누, 누구…!”
디아는 시선도 주지 않고 허리춤에서 꺼낸 권총으로 무차별적인 총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경호원의 머리통을 날렸다. 피를 뿜으며 쓰러진 경호원의 시체를 지난 디아는 계단으로 향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목구멍이 답답했다.
“하아…. 헉, 후으….”
마구 달려도 차지 않던 숨이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입을 가려도 헉헉 터져 나오는 호흡을 갈무리할 수 없었다. 들이마시는 숨보다 빠져나가는 숨이 많아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꼭대기 층으로 향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산소가 부족한 뇌가 쪼그라들어 종국에는 사라진 듯한 기분을 느낀 순간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천장과 벽, 계단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어디 있지? 반은 어디로 갔지?
몇 번을 자문해 봐도 반이 느껴지지 않았다. 새하얀 방에 있을 때처럼 어디에서도 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의 생사와 존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마다 찾아오는 무력감이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온몸을 짓눌렀다.
손에 잡히는 것들을 죄다 내던지고, 고래고래 고함치고 싶은 충동이 찾아왔다. 디아는 수십 번 짓씹어 피가 비치는 입술 새로 저를 진정시켜 줄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반. 반….”
옥상이 가까워지고, 피 냄새가 가까워지고, 반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시울이 후끈 달아올라 앞이 뿌옇게 흐려졌을 때, 총성이 들렸다. 곧이어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더는 놀라지 않을 만큼 너무나 익숙한 소리가 희한하게도, 정말 희한하게도 온 신경을 사로잡았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뒤엉킨 채로 빙글빙글 돌아가던 광경이 멈추었다. 숨을 들이켠 디아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내달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거꾸로 내려갔다.
이제는 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무엇 하나 느낄 수 없었지만 신경을 건드리는 예감을 믿었다. 예민하게 벼려져 사소한 자극에도 반응하는 성정이 걸음을 다시 한번 반에게로 이끌었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로비를 헤집은 디아는 골조가 다 드러난 홀을 지나 복도 끝에 위치한 방화문 앞에 다다랐다.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서자 흙먼지가 일었다. 공사에 필요한 자재와 쓰레기를 모아 둔 공간이 나타났다.
워커 밑창에 유리 조각이 밟혔다. 사방에 흩어진 유리 조각이 남긴 길을 따라 시선을 옮긴 디아는 하늘을 가리는 반투명한 돔을 발견했다. 무언가 떨어진 것처럼 정중앙이 깨진 지붕에서 시선을 찬찬히 떨어뜨렸다. 거무죽죽한 쓰레기 수거함이 있었다. 불길한 색을 띤 수거함 밖으로 누군가의 손목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또 한 번 부정하며 걸음을 뗐으나, 맥없이 늘어진 손목에 감긴 새파란 손수건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목구멍에서 벼락같은 비명이 터졌다.
“반!”
발이 바닥을 강하게 짓이기고 다리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한달음에 수거함 앞에 다다른 디아는 안을 내려다봤다가 잠시간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간 듯 사고 회로가 마비됐다. 크게 확장된 동공이 새파란 방수포 위에 죽은 듯이 누운 반을 담았다.
주름진 방수포 위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둥그렇게 고여 있었다. 모진 말을 내뱉어도 실없이 웃으며 농담을 건네던 입은 꾹 다물렸고, 마주했다가는 무너질 것을 예감하고 늘 가려 두었던 황금빛 눈은 창백한 눈꺼풀 아래로 숨었다. 코와 입가에 번진 핏자국, 축 늘어진 팔다리, 오르내리는지 알 수 없는 가슴….
숨도 쉬지 않고 끔찍한 광경을 바라보던 디아는 일순 허겁지겁 손을 뻗어 비에 젖은 반을 끌어안았다.
“반, 나 왔어. 나 왔으니까….”
방수포째로 그를 건져 내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 둔 디아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피가 번져 나오는 부위를 압박했다. 정신없는 속삭임이 잇새로 튀어나왔다.
“반. 반…. 이러지 마. 우리 예쁜 데서 저녁 먹어야 하는데, 네가 나한테 이러면….”
저들의 생존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의 목숨을 수없이 앗아 왔지만, 죽음이 이토록 직접적으로 다가온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야가 흐렸다. 반의 피가 함빡 묻은 손으로 눈을 마구 비빈 디아는 숨을 헐떡이며 상처를 살폈다.
이성적으로 보자. 가슴에 총상이 있지만 심장이나 폐가 있는 부위는 아니다. 처치만 잘한다면 충분히 살 수 있다. 하지만 반은 여렸다. 비실비실하고 연약해서 계단도 잘 오르지 못한다. 이미 죽었다면. 그러면 어떡하지?
디아는 숨을 흡 들이마시고 반의 목덜미로 손을 내렸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맥박을 짚자 희미한 파동이 느껴졌다.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터트린 디아는 다급히 상처를 압박하며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그의 정신을 붙잡아 둘 말을 우르르 꺼냈다.
“눈떠, 반. 내가…. 내가 잘못했어. 응? 얘기 들을, 아니, 그냥 네 말이 다 맞으니까…. 제발, 반.”
핏기 없는 뺨을 때리고 재차 맥박을 확인하면서 반을 불렀지만, 그가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이제껏 머릿속에 욱여넣은 상식과 대처법을 종잇조각으로 만들 만큼 미동 없는 반은 디아를 두렵게 했다. 제발 이러지 말라고 비는 디아의 귓가로 아득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끊긴 줄 알았던 무선이 섬뜩한 사이렌을 비집고 고막을 때렸다.
- 나오셔야 합니다, 도련님. 차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디아는 반의 가슴을 압박한 양 손등 위에 이마를 기대었다. 이성은 자리를 벗어날 것을 명령했다. 제 동족들이 그럴싸한 이유를 가져다 대 이곳에서 벌어진 사태를 묻을 테지만, 제 모습까지 노출하는 것은 위험했다. 벗어나야 했고, 당연히 그럴 것이다. 반을 고쳐야 했으니까.
따스한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디아는 흠뻑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뺨을 적신 눈물과 피가 뒤섞여 턱을 타고 흘렀다. 디아는 조용한 음성으로 엠마에게 전했다.
“리암을 데려와. 산 채로.”
디아는 모든 리암이 싫었다. 아주 유구하게.
***
주인의 취향을 한껏 반영해 세련된 형태로 빠진 저택 대문이 열렸다. 핏자국으로 검붉게 얼룩진 워커 밑창이 새하얀 대리석을 짓밟았다. 가벼운 가방을 어깨에 멘 디아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고용인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홀을 가로질렀다. 발소리를 죽이고 따라붙은 고용인 하나가 복도를 지나가는 디아에게 응접실을 알려 주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디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팔을 쭉 뻗어 응접실을 가리키는 고용인을 지나쳤다. 감히 길을 막아설 수 없는 고용인들을 무시한 채로 곧장 서재로 향했다. 노크 따위 없이 서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정면의 책상에서 일을 보던 체마가 고개를 들었다.
디아의 방문 소식을 1시간 전에 전달받은 체마는 그의 몰골을 쭉 훑어 내렸다. 그새를 못 기다리고 쳐들어온 것부터 못마땅한데, 단정하지 못한 차림새를 보자니 배알이 뒤틀렸다.
웬 섬에 틀어박혀 패악이라는 패악은 모조리 떨고 다닌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예의까지 없을 줄이야. 교양이라고는 없는 놈. 속으로 디아를 잔뜩 비난한 체마는 입꼬리를 올려 그럴싸한 미소를 지었다.
“시차 적응은 됐나?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 좀 쉬는 게 어때?”
기껏 친절을 베풀었으나 디아는 대꾸 없이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성이 바닥을 기는 놈이었다. 펜을 꽉 쥐었다가 내려 둔 체마는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며 빙글거렸다.
“개릿을 처리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웨인은 영 지지부진했는데, 이런 것도 적성을 타나 봐?”
너는 그런 일이나 하며 사는 게 어울린다는 의미의 비꼼을 던진 체마는 책상에 쿵 떨어진 가방을 흘깃 보고는 시선을 들었다. 앳된 티가 사라지고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멈춘 남자가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선물.”
“뭐?”
체마는 이상한 소리를 들은 양 미간을 구겼다. 어서 열어 보라는 듯이 눈썹을 까딱이는 디아의 녹안이 이채를 띠었다.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번들거리는 안광이 기분 더러웠다.
수년간 사람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그린란드의 섬에 처박혀 살면 정신이 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체마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고는 손잡이가 축 늘어진 더플백을 내려다봤다. 눈살이 구겨졌다. 남의 집에 들른다고 선물 따위를 챙겨 올 만큼 귀여운 놈이 아닌데. 가방 꼬락서니를 봐서는 정상적인 선물 같지도 않았지만 한번 확인은 해 주는 것이 예의였다.
쓰레기 같은 선물이면 웨인에게 보낼 요량으로 가방 지퍼를 끌어 내리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가 나왔다. 제법 묵직한 상자를 흔들어 보자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체마는 엉성하게 묶인 리본을 풀어내며 소파를 눈짓했다.
“일단 앉지. 차라도….”
리본을 풀고 상자 뚜껑을 연 체마는 내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벌떡 일어난 체마는 경기를 일으키며 상자를 내던졌다. 휙 날아간 상자 안에서 툭 튀어나온 잘린 손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소파 다리 아래 떨어진 성인 남성의 손은 날이 무딘 쇳덩이로 잘라 낸 것처럼 절단 부위가 우둘투둘했다.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듯 혈색이 가시지 않은 손을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체마는 황급히 얇은 손수건을 꺼내 손을 강박적으로 닦았다.
“저게, 이…!”
“난 리암이 싫어. 리암이란 리암은 다 찾아내서 죽이고 싶어.”
시선을 맞추고 있지만 다른 곳을 보는 듯한 디아는 이해하기 어려운 혼잣말을 나불거렸다. 온전한 시체라면 몰라도 저런 것에는 면역이 없는 체마가 연달아 헛구역질하다가 버럭 성을 냈다. 느닷없이 방문해서는 더러운 것을 선물이랍시고 주질 않나, 개소리를 지껄이질 않나.
“뭐라는 거야! 미쳤어? 제정신이야! 이 미친 새끼가…!”
“내가 말했지. 반 클라크는 내 관할이라고.”
디아는 드디어 그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이유를 말했지만, 이는 체마의 비웃음을 샀다. 하! 헛웃음을 터트린 체마가 손수건을 내던지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됐냐? 그 새끼가 널 팔아넘겼다고! 그렇게 싸고도는 이유가 뭔데? 백번 양보해서 배 좀 맞춘 거? 그래! 알겠다고! 그러니까 슬슬 처리하라는 거잖아! 그래서 내가…!”
넓은 서재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르던 체마는 문득 입가를 가리고 나동그라진 손을 응시했다.
아랫것들 수가 몇인데, 고작 손 하나로 신원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디아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곱씹어 보자 하나 짚이는 놈이 있었다. 회상하듯 눈을 느리게 굴린 체마는 허리에 양손을 얹고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안타깝다는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 리암이 성공했나 보지? 그러니까 여기까지 득달같이 날아왔지. 어때. 클라크는 잘 죽었냐? 곱게는 안 죽었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곧 죽나? 표정 보니까 그런 것 같네. 운 좋게 살아남아도 걱정 마라. 네가 못 하겠으면 내가 클라크 그걸….”
“네가 리암을 심었나 보네.”
체마는 꼭 몰랐던 것처럼 말하는 디아를 들여다보며 빈정거렸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심은 게 아니라 부탁한 거야. 우리를 위해 겸사겸사 처리하면 좋잖아? 고작 그거 때문에 이 난리를 피워?”
“웨인이랑 둘 중에 헷갈렸어. 그래서 두 개 준비했는데 잘됐네.”
“뭘…. 저걸?”
턱을 당긴 체마는 잘린 손을 곁눈질하며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리암은 직계가 아니었다. 인간의 피가 짙은지라 그에게 상해를 입혀 봤자 징계 거리도 되지 않았지만 그들 사회에서도 도의라는 것이 있었다. 동족 의식이 비교적 강한 놈들을 선별해 고용인으로 두는데, 리암은 개중에서도 충성심이 유별난 놈이었다. 설마 죽인 것은 아니겠지? 체마는 벌써부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동족이 장난감도 아니고, 수틀린다고 양손을 자르는 짓은 그만두는 편이 좋을 거라고 훈계하려던 때였다.
체마는 슬쩍 벌린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디아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재킷 안에서 총을 꺼낸 것이다.
들이밀어진 총구를 흘끔 살핀 체마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비웃음이 입매에 걸렸다.
“아…. 쏘시려고?”
쏘지 못할 걸 알고서 짓는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가 샐쭉 웃어 보였다. 그는 체마의 어깨를 향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를 장착하지 않은 총에서 커다란 총성이 울려 퍼지자마자 듣기 싫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아악!”
의자와 함께 뒤로 벌러덩 넘어간 체마가 어깨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어깨를 관통한 총상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손바닥과 값비싼 카펫을 더럽혔다.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는 체마의 꼴사나운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 서재 문이 벌컥 열리고 기겁한 낯의 고용인 두엇이 체마에게 달려들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비명을 토하는 체마의 어깨를 지혈하며 고용인은 디아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의사를 불렀다.
소파까지 걸어간 디아는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리암의 손을 뻥 걷어찼다. 주저앉은 체마의 앞까지 굴러간 손이 절단 부위를 훤히 드러낸 채로 멈추어 섰다. 고통으로 인해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체마는 자신이 리암의 손을 걷어차는 줄도 모르고 발버둥을 쳤다. 디아는 삽시간에 분주해진 저택과 동떨어진 목소리로 제 의사를 전했다.
“리암은 실패했어. 너도 실패할 거고. 나랑 반은… 우리는 가족이 될 거야.”
“미쳐, 미쳤어! 돌았어? 뭔 개소리야!”
“한 번만 더 그딴 거 내 밑에 숨겨 두면 네 손을 르네한테 선물할 거야. 그다음은 웨인이고, 그다음은 일라이야.”
체마는 같은 세대의 이름을 줄줄이 읊는 디아를 핏발이 시뻘겋게 선 눈으로 노려봤다. 그는 총을 갈무리해 재킷 안에 집어넣는 디아를 향해 온갖 짜증과 울분이 듬뿍 담긴 고함을 내질렀다.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그리고 반이 죽으면 너도 죽일 거야.”
들은 척도 안 하고 얼굴 절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낀 디아가 볼 장 다 본 것처럼 발길을 돌렸다. 체마는 일순 고통이 사라질 정도로 기가 막혔다. 속에서 천불이 올라와 말문이 틀어막힌 와중에, 열린 문 너머로 발을 디딘 디아가 뒤를 살짝 돌아봤다.
“청첩장 보낼게….”
제정신이 아닌 소리를 마지막으로, 디아는 난장판이 된 서재를 홀가분하게 떠나갔다. 놈을 잡으라는 말도 못 할 정도로 넋이 나간 체마는 복도로 사라지는 디아의 뒷모습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다가 악! 비명을 내질렀다.
“르네! 르네에게 연락해, 당장!”
깔끔하게 손질해 넘긴 머리카락이 엉망이 될 정도로 버둥거리는 체마를 뒤로한 디아는 정적이 내려앉은 홀을 가로질렀다. 차마 막아서지는 못하고, 이대로 보내도 되나 갈등하는 고용인들의 시선이 뺨을 찔렀다. 문 앞에 멈추어 선 디아는 머뭇거리는 고용인을 내려다봤다.
“뭘 봐? 문 열어.”
이윽고 우렁찬 비명이 쩌렁쩌렁 울리는 저택 문이 스르르 열렸다. 차고에 대어 둔 차에 올라탄 디아는 이곳에 올 때보다 더욱 빠르게 저택을 벗어났다. 물론 저택을 떠나기 전 체마가 공들여 수집한 스포츠카 옆구리를 한 번씩 박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범퍼가 움푹 우그러진 차를 몰고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짜증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엄포를 놓고 놈의 사람과 물건을 망가뜨리는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가 종국에는 불안이 찾아왔다. 무슨 정신으로 체마의 저택까지 찾아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로 틈만 나면 이런 상태였다. 파란 방수포 위에서 죽은 듯이 눈을 감은 반과 손목에 감긴 파란 손수건이 시시때때로 눈앞을 스쳐 갔다. 제 손으로 반을 죽일 뻔한 순간들이 가슴에 돌덩이처럼 얹혀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조금만 어긋났더라면. 꼭대기 층 복도에 서성거리던 그림자가 반이었다면, 반이 개릿과 함께 헬기에 탔더라면….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망상 때문에 차라리 죽고 싶었다.
떨리는 호흡을 내쉰 디아는 신경질적으로 선글라스를 벗고 막무가내로 눈을 문질렀다. 눈알이 새빨개질 때까지 반의 처참한 모습이 어린 눈꺼풀을 비비다가 엠마에게 연락했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 끝과 달리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침착했다.
“엠마. 반을 성으로 옮겨야겠어.”
반을 한시도 제 시야에서 떼어 두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방심하고 잠시 눈을 감을 때마다, 잠시 자리를 비울 때마다 반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불안을 되돌려 줬다. 이는 단 한 순간도 반을 제게서 떨어뜨리면 안 된다는 계시였다.
반이 눈을 뜰 때까지 할 일이 많았다. 리암은 시작일 뿐이다. 동족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놈들을 죄다 걸러 내고 안전한 가옥을 만들어야 했다. 그 누구도 함부로 저들을 해칠 수 없는 공간을 만들 것이다. 디아는 제 계획과 불안을 입 밖으로 중얼중얼 내뱉었다.
안전한 곳, 반, 반은 괜찮을 거야, 나는 괜찮아, 우리는 행복할 거야….
***
반은 오래도록 무의식을 부유했다. 길고도 무료한 시간이었지만 내심 이런 시간이 그리웠다. 스산한 섬에 고립된 후로 오만 가지 일이 폭풍처럼 몰아친 탓에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만… 아니다. 이 평화로운 시간은 휴식 시간이 아니라 죽음 전의 주마등일지도 몰랐다. 방수포 위에 떨어진 몸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가는 중이고, 아직 남은 정신만이 허접한 일생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은 것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두 번이나 총을 맞고 살아나는 기적을 바랄 만큼 성실한 삶을 산 적은 없으니까.
반은 허탈한 심정으로 눈앞을 쓱쓱 스쳐 가는 장면을 멀뚱히 구경했다.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과 죽을 때가 되어 머리가 어떻게 된 미셸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갔다. 친구들, 직장 동료, 상사, 친하게 지냈던 단골과 학창 시절 선생님의 얼굴까지 휙휙 지나가더니 화면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방황하던 무의식이 도착한 곳은 푸른빛이 도는 지하실이었다.
‘야. 너 글씨는 지인짜 못 쓴다.’
어디선가 제 목소리가 흐릿흐릿하게 들려왔다. 곧이어 제 시선을 따라 캠코더로 촬영한 듯한 과거의 어느 날이 펼쳐지면서,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잘 쓰는 편은 아닌데, 넌 진짜….’
‘으우….’
아직 또박또박 말하지 못하는 아이가 무어라 웅얼거렸다. 억울함과 분함이 잔뜩 섞인 맑은 목소리가 웃음을 불러왔다. 낄낄거리며 머리를 받치고 모로 눕자 손에 힘을 바짝 주는 아이의 동그란 뺨이 눈에 띄었다.
엎드린 탓에 아래로 쏠린 볼살이 오동통했다. 저 볼살 때문에 코끝과 속눈썹만 간신히 보이는 모습이 못 견디게 귀여웠다. 히죽거리며 뺨을 검지로 톡 건드려 본 반은 아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펜을 움직이는 광경을 잠자코 응시했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은 손에 힘이 없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듯 단어를 그토록 잘 외우던 아이는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로 종이를 더럽혔다. 저렇게 얇은 펜이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툭툭 놓치는 일은 예사였다. 해도 해도 안 되니 꼴에 화가 나는 모양인지 주먹만 한 머리통을 좌우로 흔들었다. 움직임을 따라 고불고불한 금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반은 하는 수 없이 아이의 작달막한 손을 감싸고 펜을 반듯하게 세웠다. 날렵하게 선 펜촉으로 종이 위를 느리게 가로질렀다.
‘디아. 디이아. D. I. A, 디아.’
‘디이….’
‘디아.’
‘디이아.’
세 번쯤 반복해서 써 주고 손을 떼어 내려고 하자 바닥에 답삭 엎드려 있던 아이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팔뚝에 머리를 톡 기댄 아이는 대뜸 펜을 놓더니 남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손가락 두 개를 간신히 움켜쥘 만큼 작은 손바닥이 열심히 손을 뒤집으려고 했다. 의아해하며 손바닥을 보여 주자 짤막한 검지를 세운 아이가 살결에 무언가를 적었다.
‘뭔데? 디….’
눈을 찌푸리고 아이가 쓰는 글씨를 알아채고자 신경을 기울이던 반은 이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귀엽게 생겨서 귀여운 건지, 귀여운 짓을 해서 귀여운 건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배시시 웃는 아이를 번쩍 들어 배 위에 올려 두자 짧은 다리를 동동거리며 기쁨을 표현했다. 아주 무겁지도 않고, 걱정스러울 만큼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글씨는 이따가 연습하고. 낮잠이나 자자. 머리 써서 힘들다.’
식욕은 물론이고 잠도 없는 아이를 억지로 엎드리게 한 다음 눈을 감았다. 손바닥으로 등을 토닥여 주는데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꼬물꼬물 기어 올라온 아이가 쇄골에 이마를 폭 파묻었다. 따뜻했다. 토닥이는 손이 느려지다가 완전히 멈추었다. 잠이 올 듯 말 듯 할 때 아이의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바안.’
‘어, 왜.’
‘반.’
‘왜애….’
‘반, 바안.’
‘어….’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대답이 점차 늘어졌다. 이름을 부른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건만, 계속해서 저를 부르는 아이를 내버려 둔 채로 깜박 잠이 들었다.
한 시간 후, 낮잠에서 깬 반은 끼니를 챙기기 위해 사다리를 기어 올라갔다가 뒤꿈치로 바닥을 쿵쿵 내려찍으며 지하실로 돌아왔다. 나뭇조각을 나열해 문장을 만들던 아이가 반갑다는 듯이 방긋 웃었지만 반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냐?’
제 뺨을 가리키며 묻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가 입을 벙긋 벌리더니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반, 디아!’
조그마한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냥 외운 단어를 냅다 던지는 게 분명했다. 반은 혼낸다고 해도 이해조차 못 할 아이를 다그치는 짓을 포기하고 유리 벽에 비치는 제 꼬락서니를 피곤한 표정으로 훑어 내렸다.
뺨, 이마, 목은 물론이고 팔뚝과 손등까지도 괴발개발 적힌 글씨가 눈에 콕 박혔다. DIA, 디아.
‘내가 네 거냐? 무슨 이름을 사방에 적어 놨어….’
말도 잘 못 알아듣는 주제에, 아이는 까르륵 웃으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졸지에 아이의 이름표를 덕지덕지 붙인 반은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다가 멈칫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거… 수성 펜 맞지?
허망하게 손바닥에 얼룩진 검은 잉크를 바라보고 있는데, 순식간에 화면이 뒤바뀌었다. 이번에는 한때 유행했던 스파이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제 방이었다.
책상을 차지한 소년이 책을 펼쳐 두고 빈 종이에 문장을 옮겨 쓰고 있었다. 유려한 글씨체가 종이에 수놓아지는 광경을 감탄하며 구경하는데, 우중충한 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밝은 녹안이 도르르 굴러왔다.
무표정한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한 손으로 턱을 괸 반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싸움을 이어 갔다. 길쭉한 속눈썹에 감싸인 눈이 참 예쁘게도 생겼다고 생각할 무렵, 좋은 생각이 난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린 소년이 책상에 겹쳐 둔 팔 하나를 가져갔다.
그의 손을 손쉽게 뒤집은 소년이 펜을 반듯하게 세웠다. 무슨 짓을 하나, 잠자코 지켜보자 손목에 무언가를 한 자 한 자 공들여 적기 시작했다.
펜촉이 떨어져 나간 후 손목을 들여다본 반은 픽 웃었다. DIA, 디아. 상품에 붙이는 바코드 같았다. 남의 피부에 제 이름을 새긴 소년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당당하게 선언했다.
‘나는 반 거고, 반은 내 거야.’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정해졌어.’
‘그걸 누가 정하는데?’
소년은 말문이 막힌 것처럼 멀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시선을 맞추었다. 심통이 난 건지, 고민하는 건지. 젖살이 내리며 턱이 날렵해진 소년은 곧이어 도톰한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예쁜 미소로 때우려는 것처럼 논리라고는 없는 대꾸를 하면서.
‘…내가.’
저대로만 크면 사람 여럿 울리겠다 싶은 얼굴이 아득하게 멀어지며 평화로웠던 순간에서 튕겨져 나왔다. 바닥이 없는 공간으로 떨어진 반은 또다시 무의식을 떠다녔다.
죽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과거를 엿본 것은 만족스러웠으나 극심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양심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쩌다가 그렇게 조그마했던 아이를 사랑하게 됐을까. 불투명한 막을 칼로 가르고 아이를 꺼낼 때만 해도 이런 미래는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다. 개릿이 던지고 간 돌멩이는 회의에 젖은 반을 상념 속으로 빠트렸다.
링크가 감정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기생체를 최우선으로 하는 숙주의 본능이 거부감을 줄이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될 수 없었다.
반은 디아를 사랑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다만 인정하기 부끄러운 나머지 애써 모르는 체했을 뿐이다.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대려면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의식의 밑바닥까지 잠수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이곳은 죽기 전에 거쳐 가는 무의식의 세계였다. 쪽팔릴 일도, 손가락질당할 일도 없었다. 반은 의식의 기저에 깔린 감정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라하고 추한 감정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오래전 저를 떠난 부모, 손주는 안중에도 없는 하나뿐인 혈육, 매번 바뀌는 근무지, 시기가 되면 헤어지는 동료들,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떠나는 연인들…. 모두가 저를 떠나는 와중에, 디아만은 그들과 달랐다.
반은 언젠가부터 확신했다. 디아라면 저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돈 없고, 직업은 변변찮고,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성정에, 겁은 많아서 툭하면 회피하질 않나… 결국 가진 것은 잘난 몸뚱이밖에 없는 자신을, 디아만은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제 머릿속을 낱낱이 들여다보고도, 제 추한 욕망 때문에 버려지고서도, 길고도 지독한 시간을 홀로 버티고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디아를 마주한 순간 확신이 생겼다. 몰아치는 감정을 받아들인 이유는 개릿이 말한 돌연변이가 만든 링크 따위가 아니었다. 반은 디아의 맹목적인 사랑을 거부하기에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한평생 가라앉혀 둔 감정이 모조리 떠올랐을 때, 반은 뒷덜미를 잡혀 끌려갔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무의식에서 벗어나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대비할 새도 없이 숨이 탁 터지더니 움찔거리던 눈꺼풀이 스르르 말려 올라갔다.
“헉….”
눈을 수 번 깜박여 눈알을 덮은 희부연 막을 없앴다. 제 취향과 거리가 멀디먼 화려한 천장과 침대에 매달린 캐노피가 흐린 시야에 들어왔다. 섬에서 떠난 순간부터 그리워한 천장이다. 처음 봤을 때는 취향 참 독특하다고 욕했던 천장을 애달픈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눈알을 굴렸다.
침대 위에 늘어진 길쭉한 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역시나 그리웠던 하늘하늘한 셔츠 자락이 보였다. 도련님이라는 칭호와 걸맞은 셔츠에 감싸인 상체는 어릴 적처럼 따스한 온기를 내뿜었다.
감각이 찬찬히 돌아오면서 목 언저리를 누르는 적당한 무게가 느껴졌다. 곁에 웅크린 채로 목을 꼭 끌어안은 남자가 색색 내뱉는 숨이 귀로 들려온 순간 평온이 물밀듯 밀려왔다.
지긋지긋하게도 살아남았다. 가진 건 튼튼한 몸뚱이와 질긴 목숨밖에 없는 제게 더없는 찬사를 보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주어진 포상이 아니기만을 바라면서 눈을 깜박거리는데, 기쁨을 만끽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꼭 붙은 디아의 숨소리가 다소 이상했다. 그는 꿈자리가 나쁜지 연신 끙끙거리면서 남의 목을 졸랐다.
숨이 막힌 반은 악몽으로 괴로워하는 디아를 깨우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침대에 눌어붙은 몸이 꿈쩍도 안 했다. 다리를 세울 수조차 없었다. 감각 자체가 없었다. 설마 다리가 잘린 것은 아니겠지, 하며 눈알을 굴리다가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입 안이 말라 쉭쉭거리는 소리만 났다.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소리 없이 애를 쓰다가 일어나기를 포기한 반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근육과 뼈가 녹아내린 것처럼 흐물흐물한 손을 조심스럽게 가슴까지 옮겼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픽 떨어진 손을 다시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 4년 전, 왕창 깨진 채로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손목에 힘을 주려다가 관둔 반은 하는 수 없이 검지를 세웠다. 쇄골과 목을 한데 감은 디아의 팔목에 부들거리는 검지 끝을 톡 가져다 댔다. 한 번 더 톡 건드렸지만 깊게 잠든 모양인지 반응이 없었다.
몽롱한 머리로 그를 깨울 방법을 생각하던 반은 검지를 주르륵 미끄러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장난칠 생각을 하는 저도 참 한심했지만, 종이를 더럽히던 아이의 모습이 워낙 인상 깊어야지 말이다.
PAN, 판.
아이가 수십, 수백 번은 틀렸던 철자를 완성하고 점을 콕 찍자마자 목이 조여들었다.
“큭….”
잠결에 목을 더욱 끌어안은 디아가 끙끙 소리를 뚝 멈추었다. 드디어 깬 모양이었다. 숨통을 갑갑하게 조이던 팔이 사라지더니 벌떡 일어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반?”
아직은 흐리멍덩한 시야가 맑게 갤 만큼 푸른 녹안이 불쑥 나타났다. 눈을 살짝 찌푸려 인사를 건네자 크게 확장된 녹안이 삽시간에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물기를 머금은 풀잎 같은 눈동자를 마주한 반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어떤 꼴을 보여도,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떠나지 않을 존재라면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든, 나이 차가 어마어마한 어린놈이든 하등 상관없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피하고 밀어 내려던 노력이 무상하게도, 결국 디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디아와 회포를 푸는 일은 잠시 미뤄졌다. 독한 진통제 탓에 눈을 떴다고 해도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반은 감정을 받아들이자마자 숨이 넘어가는 신파 중의 신파가 아니길 바라며 대부분의 시간을 잠든 채로 보냈다. 고집스러운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반은 종종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뜰 때마다 디아는 항상 제 곁에 있었다. 그는 침대 곁의 의자에 앉아 숨결 하나, 움직임 하나조차 놓치지 않을 기세로 반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수화기를 들어 누군가를 호출했고, 머지않아 의사로 추정되는 사람이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왔다.
정신을 차리는 족족 같은 상황이 반복된 것으로 보아 디아는 정말 단 한 순간도 침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신이 들고, 디아가 의사를 호출하고, 다시 정신을 잃는 일을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한 반은 여섯 번째로 눈을 뜨자마자 손가락을 살짝 내저었다. 의사 표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몸짓을 용케 알아본 디아가 수화기를 조심스럽게 내려 두더니 서둘러 손을 뻗었다.
“몸은? 괜찮아? 의사 부를까? 물 마실래? 더 잘래?”
그는 초조한 낯으로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살결을 쓰다듬으며 질문을 쏟아 냈다.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반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눈치 빠르게 벌떡 일어난 디아가 물을 한 잔 따라왔다.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디아의 가슴에 등을 기댄 반은 그가 흘려 주는 물로 건조한 목을 적셨다. 갑자기 많이 마시면 안 된다는 디아의 만류에도 컵을 반쯤 비우자 드디어 목소리가 나왔다. 듣기만 해도 맥이 빠지는 목소리였지만 제 의사를 직접 전달한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도련님….”
“응.”
한 팔로 어깨를 감싼 디아가 입술 앞에 귀를 가져다 댔다. 반은 모양이 예쁜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 씹새끼….”
“걱정하지 마. 다시는 너한테 손 못 대.”
저를 이 꼴로 만든 놈이 누구인지 낱낱이 폭로할 요량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디아는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 단호하게 답했다. 그는 리암을 멀리 보냈으며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고 확답했다. 반은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이며 중얼거렸다.
“죽여야 하는데….”
뺨을 마주 대고 안심시켜 주던 디아가 가만히 침묵하더니, 대뜸 대꾸했다. 앞서 한 말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죽였어.”
“…예?”
“손을 잘랐는데 피가 안 멈춰서 빨리 지혈해 줬거든. 그런데 톱날이 너무 더러웠나 봐. 손목이 괴사해서, 여기가 새카맣게….”
반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문 과정을 줄줄이 설명하는 디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눈을 끔벅였다. 도톰한 입술을 쉬지 않고 벙긋거리던 디아는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깜박깜박. 저를 마주 보며 함께 눈을 깜박이던 디아는 스리슬쩍 시선을 피하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앞서 한 말과 전혀 달랐다.
“리암은 멀리 보냈어. 저기 소말리아로….”
“거기 멀어요?”
“응. 그래서 못 돌아올 거야. 너무 머니까….”
어떤 말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반은 여기서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제 가슴팍에 총알구멍을 낸 리암이 고문당하다가 죽었든, 얼마나 먼지도 모르는 소말리아로 좌천당했든, 합당한 벌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화풀이는 한 셈이었다. 솔직히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제 육아가 처참히 실패했다는 것을 몇 차례나 확인받아 봤자 회의감만 들 뿐이다.
짧은 정적이 지나간 후, 디아는 갑자기 벅차오른 것처럼 그의 상체를 꼭 끌어안았다. 어깨에 코를 묻고 마구 비비적거리는 통에 때아닌 웃음이 터졌다. 많이 놀라고 많이 안심한 모양인지, 새침한 척을 집어치운 남자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가슴을 들썩거리며 웃던 반은 칼로 냅다 후비는 듯한 가슴의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윽….”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미약한 신음에도 소스라치게 놀란 디아가 얼른 팔을 풀고 침대에 뉘어 주었다. 조심조심 숨을 고르던 반은 안색이 창백해져 수화기로 손을 뻗는 남자의 손목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고작 신음 한 번 가지고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디아가 시선을 주었다. 반은 별일 아니라는 의미로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얘기 좀 해요. 오랜만에 봤는데.”
디아는 걱정이 지나쳐 숫제 짜증까지 난다는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아픈 거는?”
“제가 무슨 노인도 아니고…. 이 정도로는 안 죽습니다.”
“그런 말을 왜 해?”
수화기를 내려놓은 디아가 뾰족뾰족 가시가 선 어조로 쏘아붙였다. 죽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안 죽는다고 못을 박아 줘도 난리였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행태가 싫지만은 않았던 반은 빙글빙글 웃으며 의자를 눈짓했다.
“아이, 안 할게요. 안 할 거니까 거기 좀 앉으세요.”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그러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은 디아는 말을 하다 말고 얼버무렸다. 턱을 괴고 시선을 피하는 디아 때문에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침대 모서리를 노려보는 남자의 낯은 여전히 창백했다. 깨어날 때마다 눈이 마주쳤으니, 그간 제대로 잤을 리가 없다.
사랑스럽기도 하고, 미련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분위기를 환기할 만한 대화거리를 골라내려고 했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꼭 필요할 때마다 파업하는 혀가 원망스러워질 즈음, 디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꾸 그 모습이 생각나.”
툭 터져 나온 한마디에 담긴 우울감이 짙었다. 떨리는 숨을 내쉰 디아는 여전히 침대 어딘가를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죽었으면, 잘못됐으면… 난 어떻게 살아?”
진심으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묻는 디아가 유독 여려 보였다. 마음 여린 사람이 빌딩을 향해 기관총을 갈기지는 않겠지만… 어쩌겠는가. 제 손으로 먹이고 입혀 키운 아이지 않나. 반은 속상한 소리를 거리낌 없이 내뱉는 디아를 장난스럽게 얼렀다.
“언제는 죽일 거라고 하시더니.”
“거짓말이야. 처음부터 다.”
침대를 노려보던 눈을 들어 올린 디아가 황급히 부정했다. 혹여라도 반이 그 말을 믿고 있을까 봐 두려운 것처럼. 그는 턱을 괸 손까지 내리고 더듬더듬 변명했다.
“그냥 나는 화나서, 네가 기다려도 안 왔으니까. 그래서 짜증 난 건데 싫은 건 정말 아니었어. 정말로, 나는 계속…. 계속 반이 보고 싶었어. 계속 사랑했어.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속내를 털어놓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이 탄식했다. 어느새 빽빽한 속눈썹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창백한 뺨을 적셨다. 얼른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려고 했지만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꿈틀거리다가 축 늘어진 반은 힘없이 웃었다. 어릴 때는 이상할 정도로 안 울더니 다 커서는 어찌나 쉽게 우는지, 이러다가는 디아가 쏟아 낸 눈물에 잠기고도 남을 것이다.
“왜 또 울고 그러십니까….”
“그런데 네가 그렇게 되니까, 나는…. 난 그냥 살기가 싫었어….”
뺨을 타고 턱 끝에 맺혔다가 뚝뚝 떨어지는 눈물보다 저 입에서 나오는 나쁜 말이 더욱 속상했다. 그러나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을 때는 아닌 듯싶었다. 반은 불안정한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팔을 들지는 못하고 침대 끝에 손을 툭 떨어뜨리는 것뿐이었지만, 뜻을 알아들은 디아가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살며시 걸었다.
“저한테는 안 죽는다는 말도 못 하게 해 놓고, 본인은 엄청 그러시네…. 듣는 사람 속상하게.”
반은 얽힌 검지를 살짝 잡아당겼다.
“저 못 움직이겠으니까 옆에 누워 주세요, 빨리.”
젖은 눈을 일그러뜨린 디아는 갈등하는 기색이었다. 곁에 눕고 싶기는 한데 잘못 건드렸다가 상처가 덧날까 봐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망설이는 남자의 손가락을 한 번 더 잡아당겼다. 유혹을 이기지 못한 디아가 반의 곁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반은 어깨에 꼭 붙은 디아의 뺨을 쓱 쓸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붙잡고 꼼꼼히 닦아 주고 싶었지만 이런 몸 상태로는 여기까지가 최선이었다.
눈물로 젖은 손을 늘어뜨린 반은 디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보드라워야 할 손바닥이 거칠었다. 꼭 살갗이 까진 것 같았지만, 디아가 손을 덥석 움켜쥔 탓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손이 왜 이럽니까?”
“그냥….”
“그냥이 아닌데?”
“넘어졌어. 미끄러져서.”
디아는 묻지 말라는 듯이 둘러대며 손을 꼭 쥐었다. 그마저도 세게 잡지는 못하고 손끝으로 만지작거릴 뿐이라, 반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진위를 파헤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늘어진 캐노피에 새겨진 무늬를 들여다봤다.
디아도 준비가 된 듯하니 슬슬 얘기를 꺼낼 때였다. 반은 그나마 자유로운 눈을 데구루루 굴리면서 고민하다가 첫마디를 꺼냈다.
“제가 너무 늦게 갔어요. 바로 찾아가도 모자랄 판에….”
약을 탄 차를 건넨 때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4년 전의 일을 풀어놓았다. 잠든 디아와 돈 가방을 둘러업고 도망가려다가 들켰을 때, 피를 말리는 누명과 조사 과정, 기자를 사칭해 톰슨을 만나고 연구소에 잠입하기까지의 고생, 결국 구출에 실패하기까지.
미셸과 웨인에 대한 이야기는 감추었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물론 살짝 과장하기는 했다. 예를 들면 연구원이 아니라 세 명의 군인을 상대한 후 잠입했다거나, 열 명쯤 되는 부대에 쫓겼다거나, 벽을 맨손으로 기어올랐다거나. 체감하기로는 그만큼 힘들었으니 이 정도 과장쯤은 지탄받을 일이 아니었다. 반은 떳떳했다.
“눈떠 보니까 병원이었고…. 그 뒤로 여기저기 얹혀살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디아는 모든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궁금한 점을 묻지도 않고, 늦은 것을 원망하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귀 기울이는 남자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달한 반은 눈꺼풀을 더디게 깜박였다.
말없이 어깨에 얼굴을 묻은 디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약 기운이 강하게 돌았다.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은 반은 지난 4년, 아니, 평생을 통틀어 가장 편안한 상태로 잠이 들었다.
***
진통제 투여를 중단한 날 반은 제 상태를 듣고 입을 떡 벌렸다. 몸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다쳤겠거니 했는데, 지난 상황이 제법 심각했다.
디아의 말에 따르자면 쓰레기 수거함에 추락한 후 무려 3주나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총에 맞기 전 몸을 힘껏 비튼 덕분에 총알은 급소를 비껴 빠져나갔고, 덕분에 장기는 무사했지만 추락으로 인해 갈비뼈가 수 대나 골절됐다. 이로써 학창 시절에 농구 하다가 다친 것, 연구소에서 다친 것까지 합해 세 번이나 갈비뼈가 부러진 셈이다.
총알이 장기를 비껴갔다고 해서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완전 관통이 아니라 몸속에 남은 총알 파편을 제거하느라 수술대에 올랐고, 수술 도중 심정지가 왔다고 말하면서 디아는 피가 비칠 만큼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반은 그때는 정말로 죽고 싶었다며 혼잣말하는 디아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천만다행으로 수술은 무사히 끝났으나 앞서 말한 갈비뼈 골절에 더해 어깨는 탈구, 팔꿈치는 골절, 골반에는 금이 간 데다가 뒤통수까지 찢어져서 거의 죽은 사람의 몰골이었다고 한다.
수술 후 회복 중에 잠시 눈을 떴다고는 하는데, 이는 반의 기억에 없었다. 수술 경과를 지켜보다가 의사를 구해 성으로 옮긴 지 닷새째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는 이야기에 디아가 대뜸 눈물을 쏟은 이유를 이해했다.
참고로 의사는 디아의 동족이 아니었다. 외계인이 득시글거리는 성에서 유일한 제 동족을 만난 반은 은근슬쩍 친밀감을 내보였지만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돈을 몹시 좋아하게 생긴 의사는 환자인 반보다 디아를 보며 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불어는 친목을 강제로 차단하는 힘이 있었다.
자산가에게만 친절한 의사가 경과를 확인하는 날이면 디아는 종일 침대 곁을 서성거리며 온몸으로 불안을 표현했다. 반은 목과 허리를 안 다친 게 어디냐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마냥 태평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이나 몸이 박살 났으니 나중에 생길 후유증이 내심 두려웠다. 나이 들면 아주 골골거리겠다고 속으로 한탄했지만 당장은 살아난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이 세상과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거울을 맞닥뜨리자마자 슬그머니 사그라들었다. 침대 아니면 휠체어 신세를 지다가 오랜만에 욕실에 들어선 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울 속, 병색이 짙은 남자가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뺨은 푹 꺼지고, 눈 밑은 검고, 피부가 생채기와 멍으로 뒤덮인 남자는 참, 뭐랄까…. 디아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런데 또 병약한 모습이 아주 꼴 보기 싫지는 않아서, 역시 본판이 중요하긴 한 모양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반이 애써 자기 합리화 하는 동안 디아는 담백한 손길로 얇은 가운을 벗겨 주었다. 붕대와 깁스로 무장한 몸뚱이를 휠체어에서 안아 올려 욕조 안으로 조심스럽게 옮긴 디아가 말했다.
“아프면 말해.”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물이 닿으면 안 되는 부위가 있기도 하고,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탓에 몸을 맡긴 반은 깨질까 두려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감겨 주는 디아를 빤히 바라봤다.
고용인이 그토록 많은데도 욕심 많은 디아는 손수 병시중을 들었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식사를 먹여 주는 것은 당연했고 침대맡에서 책을 읽어 주지를 않나, 화장실까지 모셔다 주지를 않나. 볼일을 보고자 할 때도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해서 곤란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탓에 적정선에서 타협을 봤다. 어찌 됐든 입장이 완전히 반대가 된 것은 변치 않았다.
순전히 반의 추측일 뿐이지만, 디아는 제 수발을 드는 것을 내심 기꺼워했다. 본인은 티 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본데, 먹기 좋게 조각낸 음식을 입 안에 넣어 줄 때 움찔거리던 입꼬리를 똑똑히 목격했다.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보호자 노릇을 하려고 드는 남자가 괘씸했지만 별수 있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깟 비위쯤 얼마든지 맞춰 주고 싶어졌다.
조심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상당히 즐겁게 머리카락을 감겨 준 뒤, 부드러운 스펀지로 발끝에서부터 비누칠하던 디아가 대뜸 입을 열었다.
“그 얘기 또 해 줘. 나 구하러 온 얘기.”
“…또?”
“처음에 군인 쳐들어온 거부터.”
욕조 턱에 뒤통수를 기댄 반은 숨을 적당히 들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었다. 지나치게 과장한 탓일까. 실상은 도망치고 얻어맞은 것이 전부였던 그날의 일이 눈 깜짝할 새 용사의 영웅담으로 탈바꿈했다. 처음 말할 때는 분명히 떳떳했는데, 이제는 조금 부끄러웠다.
무표정하지만 기대하는 티가 물씬 나는 디아를 흘끔거리던 반은 솔직히 지겨운 이야기를 다시금 시작했다. 한 장면이라도 빼놓으면 귀신같이 알아채기 때문에 돌덩이 같은 머리를 팽팽 돌려야 했다.
“…그렇게 4년 뒤에 제가 도련님을 만나게 된 거죠. 크…. 얼마나 긴박했던지. 도련님도 보셨어야 합니다.”
구연동화에 버금가는 목소리 톤과 손짓으로 4번째 연극을 마친 반은 말없이 종아리를 문지르는 디아를 응시했다. 부끄러움만 무릅쓰면 이야기해 주는 것쯤이야 어렵지도 않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믿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하나도 빼놓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이는 듯 보이다가도, 반복적으로 들음으로써 억지로 받아들이려는 것 같기도 했다. 의심스러운 눈빛을 한 반은 멍이 빠지지 않은 무릎을 조심히 문지르는 디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제 얘기 믿는 거 맞습니까?”
눈을 맞춘 디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저 예쁘장한 얼굴에 껌벅 속아 넘어갈지 몰라도 반은 달랐다. 늘어진 다리를 꿈틀거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진짜? 좀 찝찝하신 것 같은데?”
“안 찝찝해.”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연거푸 부정하는 사람을 찌르고 또 찌르자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 디아가 속내를 실토했다.
“숨기는 거 있잖아.”
“제가요?”
“허벅지, 누가 그렇게 했는지.”
예민한 탓인지 사람이 아닌 탓인지, 신묘한 육감을 가진 디아에게 거짓을 간파당한 반은 결백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그때 당시 총을 맞은 일은 최후의 보루였다. 복수하고 싶은데 정 복수할 길이 없을 때 슬며시 꺼내 놓을 계획이지, 당장 놈의 이름을 말해서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망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이걸 말하면 웨인도 소말리아행인가? 소말리아가 저승의 다른 이름이지 않길 바라며, 이번에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겼다.
“진짜 기억이 안 난다니까 그러네…. 얼마나 난리였는지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다.”
“내가 너 거짓말하는 것도 못 알아볼 것 같나 봐.”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신다….”
반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얼버무렸다. 눈을 내리깐 디아는 의심스러운 점을 굳이 캐내려고 하지 않고 허벅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또한 괜히 트집을 잡아 평화를 망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이내 하얀 비누 거품이 멍투성이 다리를 뒤덮었다.
누군가에게 목욕을 맡긴 적 없었던 반은 기분 좋은 손길을 즐기다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언젠가부터 스펀지가 같은 곳만 계속해서 문지르는 기분이었다. 이상함을 알아차리자마자 시간을 재 본 결과, 이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반은 다리 사이를 유독 진득하게 문지르는 디아를 흘깃 살폈다. 통이 넓은 셔츠 소매를 말아 올린 디아는 물방울이 튀어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로 열심히, 아주 열심히 허벅지 안쪽부터 아랫배 부근을 문지르는 중이었다. 진득하고 집요한 손길과 눈빛이 음흉한 미소를 불러왔다. 반은 집중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쉽죠?”
“뭐가.”
“지금 딱 그럴 땐데 몸 상태가 이래서.”
“내가 그런 생각만 하는 줄 알아….”
디아는 난봉꾼 취급이 싫다는 양 쌀쌀맞게 답하고는 같은 부위를 거듭 은밀한 손길로 문질렀다. 어느 틈에 스펀지를 떨어뜨렸는지 무려 맨손으로 말이다. 말과 행동이 이토록 다를 수가 있나. 소리 없이 웃은 반은 다리를 슬쩍 벌려 주었다.
“저는 그런 생각만 하는데요.”
아직은 순진한 어린애를 놀릴 생각으로 농담을 던졌는데, 다리 사이에 시선을 고정한 남자가 고개를 휙 쳐들었다. 마주친 녹안이 반짝이더니 예기치 못한 발언이 고막을 때렸다.
“사실은 나도 매일 자위하고 있어.”
“헙….”
웃음을 터뜨릴 뻔한 반은 황급히 숨을 참았다. 또 한 번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목을 가다듬으며 웃음을 삼켰다.
“저 잘 때요?”
“응. 네 얼굴 보면서.”
정말 혈기 왕성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초췌한 꼬락서니를 보고 거기를 세우는 디아는 신기했고, 매일 혼자 달래야 할 만큼 들끓는 혈기는 다소 두려웠다. 몸이 낫자마자 허리가 부러지는 것은 아닌가, 사서 걱정하던 반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그렸다.
“손은 좀 힘들어도 입은 빌려줄 수 있는데.”
“싫어.”
냉큼 좋다고 할 줄 알았던 디아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거부했다. 심지어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 미간을 구기기까지 했다. 반은 의아해졌다. 이제까지의 섹스를 되돌아봤을 때, 디아는 오럴에 집착하는 면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요? 도련님은 제 거를 아주 막… 그렇게 빨아 놓고는.”
“더럽잖아.”
“…제 입이?”
“내가.”
뭐가 더럽다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디아의 표정이 하도 심각했기에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는 마치 올바르고 교과서적인 성관계를 선호하는 사람처럼 고지식하게 말했다.
“그런 거 시키기 싫어. 그냥…. 나만 할래.”
“뭐…. 도련님이 그러고 싶으시다면.”
디아의 희한한 태도는 정말,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빨아 보고 싶게 만들었다. 반은 흔쾌히 수긍하는 척 입으로 해 볼 기회를 엿보기로 다짐했다. 희한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결국 맨손으로 상체까지 모조리 비누칠한 디아는 샤워기를 들기에 앞서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눈썹을 들어 올리자 되바라진 말이 돌아왔다.
“…빨아 줄까?”
하, 웃음을 터트린 반은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 준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거기서 만족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저 그러면 하고 싶어져서 안 돼요.”
솔직히 답하자 디아는 언뜻 시무룩한 표정으로 샤워기를 끌어왔다. 기대를 무너뜨린 것은 미안하지만 골리는 재미가 있었다.
발끝부터 조심조심 비누 거품을 헹구어 내는 디아에게 몸을 맡긴 반은 감각이 돌아오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분위기도 풀렸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반은 깨어나자마자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피하고 피했지만 이제 물어봐야 할 때였다. 더 늦으면 묻는 이유가 없어질 테니까.
피딱지가 떨어진 입술을 질근거리던 반은 발을 꼼꼼히 닦는 디아를 불렀다. 잠시 샤워기를 내린 디아가 눈을 맞췄다. 반은 계속 씻어도 괜찮다는 눈짓을 하고는 마지막으로 정리해야 할 문제들을 꺼냈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그, 링크 말인데… 우리 헤어진 뒤로 끊어진 거죠? 완전히.”
시종 불안해하는 디아의 태도로 보아 결론이 난 셈이었지만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언젠가 그에게 품은 감정을 의심하는 날이 오지 않도록 지금 진실을 듣고 싶었다. 디아는 흘러가는 물줄기로 눈을 돌렸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응. 처음에는 멀어져서 반이 안 느껴지는 줄 알았는데… 끊긴 거였어.”
“다 커서?”
“다 커서.”
성장한 개체가 어느 때에 다다르면 링크가 끊기는 것은 돌연변이 같은 디아도 벗어날 수 없는 그들만의 특성인 듯했다. 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다 중요한 것을 확인했다.
“이제 제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는 거죠?”
“왜? 무슨 생각할 건데?”
시무룩하던 표정이 삽시간에 뒤바뀐 디아가 맹렬하게 쏘아붙였다.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반은 빙글빙글 웃으며 또다시 의심병이 도진 남자의 손을 발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뭐…. 아무 생각 안 하는데?”
“…마음에 안 들어.”
링크가 끊긴 현실이 진심으로 불만족스러운지, 디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샤워기를 고쳐 들었다. 반은 저를 너무나도 궁금해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거두었다. 웃을 수 없는 질문이 남아있었다.
“명함 받으셨습니까? 리암한테 줬거든요.”
깁스를 피해 살결을 씻어 내는 디아의 손길이 느려졌다. 그는 딱히 고민하거나 진실을 숨기려는 기색 없이 답했다.
“받았어. 소재지도 파악했고.”
“…아직 살아 있대요?”
“아직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은 오늘내일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장난스러운 농담과 애정 어린 대화가 메아리치던 욕실에 마냥 무겁지만은 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반은 망설였다. 제게는 하나뿐인 혈육이라지만, 디아에게 있어 미셸은 죽여 마땅한 존재였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디아 개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런데 이 상황에서 미셸을 한번 만나고 싶다고 부탁해도 괜찮을까.
당연하지만 미셸을 옹호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개릿이 전한 미셸의 소식은 그 인간이 죽기 전에 딱 한 번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 보고 싶게끔 했다.
이 마음을 디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는데, 모든 거품을 헹구어 내고 샤워기를 제자리에 돌려 둔 디아가 간결한 투로 고민을 해결해 줬다.
“마지막이니까 만나게 해 줄게.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타월을 펼쳐 든 남자의 양 뺨을 잡아챈 반은 그대로 입술을 맞추었다. 쪽 소리 나게 키스하고 고개를 떨어뜨린 반은 눈썹을 찌푸린 채로 웃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대견한 것은 대견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컸지?”
갑작스러운 키스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디아가 황급히 반의 어깨를 감싸 쥐고 욕조에 기대게 했다.
“아파? 그러니까 왜 갑자기 움직여. 아프잖아, 짜증 나게….”
반은 뻐근한 옆구리를 손으로 감싸고 실없이 웃었다. 약한 신음에도 호들갑을 떨고, 걱정을 짜증으로 표현하고, 말하지 않아도 제 심정을 알아주는 디아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몸이 멀쩡했다면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이 감정을 온몸으로 즐기고 싶었다.
입매에 미소를 건 반은 더욱 조심스러운 손길로 물기를 닦아 주는 디아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우리 빠는 거는 다음에 하고… 침대 누워서 뽀뽀해요. 많이.”
타월로 어깨를 감싸 주던 디아가 손끝을 움찔 떨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서는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던 미간이 판판하게 펴지더니 조그마한 답변이 돌아왔다.
“응…. 많이 하자.”
욕조 안으로 팔을 집어넣은 디아가 깨끗해진 몸을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휠체어를 지나쳐 곧장 침대로 향하면서 입꼬리를 살며시 올린 디아의 뺨이 서서히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귀엽기 짝이 없는 모습에 반은 억지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미셸에게 고마운 점은 딱 한 가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제게 준 것. 지금에 와서는 그뿐이다.
***
2주 하고 사흘 뒤, 반은 디아와 함께 섬에서 빠져나왔다. 반은 2주 내내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얼른 미셸을 보러 가자고 졸랐고, 디아는 어떤 술수에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반의 고집이 이겼다. 이미 두 달 가까이 시간을 끌었으니 더 미루었다가는 미셸 숨이 넘어갈 것이라는 강한 주장이 끝내 먹힌 것이다.
거동이 불편하다고는 해도 충분히 몸을 가눌 수 있는 반은 디아의 과보호를 받으며 구겨진 명함에 적힌 장소로 향했다.
미셸은 기차가 멈추었던 곳과 인접한 호스피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셸과 개릿을 한꺼번에 잡을 기회를 코앞에 두고 놓친 셈이었다.
지중해와 암석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짧은 여생을 편히 보내기에 훌륭한 곳이었다. 근처에서 섬뜩한 총격전이 일어난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한 시골은 미셸의 삶과 견주어 볼 때 지나치게 평화로운 면이 없지 않았다.
디아가 밀어 주는 휠체어에 몸을 푹 파묻은 반은 밝은 원목으로 마감한 복도를 가로질러 끄트머리에 자리한 방에 도착했다. 호실 표시판 밑에 이름표가 꽂혀 있었지만 미셸의 이름은 아니었다.
손을 뻗은 디아가 다른 이름으로 신원을 감춘 미셸의 방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열린 문 너머로 병원이라기보다 포근한 숙소에 가까운 내부가 드러났다.
따뜻한 색감의 카펫과 작은 테이블, 1인용 소파 두 개, 그리고 침대로 이루어진 소박한 방이었다. 어디에서도 방문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방을 나아간 휠체어 바퀴가 침대 앞에 멈추어 섰다. 휠체어를 밀어 준 디아는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앉아 비치된 잡지를 펼쳤다. 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딴청 피우는 디아에게서 시선을 거둔 반은 침대를 내려다봤다.
비쩍 마른 노인의 나뭇가지 같은 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배 위에 가지런히 얹은 늙은 손을 들여다보는 사이 잠든 줄 알았던 미셸이 눈을 떴다. 그는 죽음이 드리운 눈으로 타국의 시골에서 다시 만난 손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반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외로움을 알려 준 할머니를 마주했다.
미셸에게는 목숨을 위협할 만한 특별한 병이 없었다. 다만 노쇠했을 뿐이다. 불규칙한 생활과 잦은 과로로 생명력이 꺼져 가는 몸에 폭발 당시 흡입한 연기는 결정타를 날렸다. 미셸은 반을 살리겠다고 결정함으로써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제 손으로 갉아먹었다.
본인답지 않은 결정을 한 것치고 미셸은 제가 살린 손주를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예고도 없이 나타났는데 놀라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누군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예감한 눈빛이었다.
반은 깁스하지 않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의미 없는 손짓이었다. 4년 만에 가족을 만나 놓고 이토록 할 말이 없기도 힘들 테다. 어색한 표정으로 침대와 가까운 창문틀을 노려보던 반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사실 멀쩡한 거 아냐? 숨는다고 아픈 척한 거고.”
“…그랬으면 좋겠네.”
미셸이 느린 어조로 답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과 맥없는 목소리가 믿기지 않아 일부러 모진 말을 뱉었던 반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혼탁한 눈알을 천천히 돌린 미셸은 소파를 차지한 낯선 이를 훑어 내렸다. 모든 실험체의 정보를 낱낱이 왼 미셸은 훌쩍 성장한 남자를 한눈에 알아봤다.
“왜 07과 같이 있지? 네 꼴은 왜 그러고.”
“뭐…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누가 나쁜 짓 하고 그대로 튀는 바람에.”
미셸의 앞에서는 꼭 반항기 청소년처럼 투덜거리게 되는 반은 멀쩡한 손으로 손장난을 쳤다. 정적이 이어졌고, 뒤통수가 따가웠다. 무언의 압력을 주는 디아의 눈빛을 이기지 못한 반은 저와 디아의 관계를 대뜸 밝혔다.
“나 쟤랑 사귀어.”
수치스러운 나머지 도리어 뻔뻔하게 공표했다. 멋모르는 디아가 저와 성관계했다고 폭로한 이상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귓바퀴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잡지에 시선을 떨어뜨리는 디아와 머쓱하게 바지를 쥐어뜯는 반을 번갈아 응시한 미셸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가지가지….”
제 할머니만큼이나 비양심적인 선택을 한 반은 무안한 낯으로 헛기침했다. 잘 보호하라고 세포를 맡겼더니 잘 키운 것으로 모자라 홀라당 잡아먹었다는 소식이 얼마나 충격적일지 짐작은 갔다. 하지만 억울한 점도 더러 있어서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만 좋다고 한 거 아닌데. 디아도 나 좋다고 했고….”
그러게 왜 저 같은 놈에게 맡겼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디아가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예민하고 종잡을 수 없는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수준으로만 억울함을 토로한 반은 눈을 감고 감정을 다스리는 미셸을 잠시간 내버려 두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애인을 소개시켜 주기 위함이 아니다. 저와 디아의 관계는 여기까지만 설명하기로 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할머니 죽기 전에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얇은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린 미셸이 고개를 바로 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고됨이 묻어났다. 반은 나약한 병자로 전락한 미셸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그의 발끝을 응시하며 물었다.
“…날 싫어한 이유가 뭐야?”
생각보다 감정적인 질문을 입에 올리면서 소름이 오스스 돋았지만 평생의 의문으로 남길 바에는 지금 묻는 게 나았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을 달가워하는 성향이 아닌 미셸은 차가울 정도로 담백하게 대답했다.
“싫어하지는 않았어. 관심이 없었지.”
“차라리 싫어하는 게 낫겠네…. 왜 관심이 없었는데?”
“바빴으니까.”
“그럼 그때 날 구한 건, 그건 왜 그랬는데.”
미셸은 말없이 검지 끝으로 제 손등을 두드렸다.
“개릿을 만났나?”
고개를 주억이자 핏기 없이 창백한 입술 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담담한 표정의 미셸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얘기를 전하듯 성의 없이 말했다.
“…그놈 자식들이 남기고 간 짐이었지. 끝까지 어미 괴롭히는 놈들이 남기고 간.”
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미셸을 똑바로 마주했다. 미셸은 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널 보면 그놈들 얼굴이 생각나. 그만 잊고 싶은데 말이야.”
비교적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반이 미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제 자식과 며느리가 남기고 간 하나뿐인 손주를 어화둥둥 싸고돌지는 못할망정 아예 보지 않기를 택하는 꼬인 성격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부모의 죽음이 제 탓도 아닌데 갑자기 죄인이 된 듯했다.
눈썹 뼈를 긁적거리던 반은 단 한마디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탁월한 미셸에게 삐뚤어진 질문을 던졌다.
“후회는 안 해? 나 구한 거. 내버려 뒀으면 몇 년 더 살았을지도 모르잖아.”
“그것들이 또 찾아온 이상 어차피 죽을 목숨이야. 네 눈에는 벗어날 곳이 있어 보이든?”
주름진 입매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들의 습격으로 두 번이나 연구소와 동료를 잃은 미셸은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탐구욕으로 시작했고, 오기로 끌어갔으며, 절망으로 막을 내린 연구는 원동력을 앗아 가 버렸다. 죽음을 앞둔 미셸은 허심탄회하게 시인했다.
“저것들이 그렇게 오래전에, 그것도 깊숙이 섞여 든 걸 몰랐던 게 화근이었어. 어떻게 보면 우리가 저것들 집에 구둣발로 쳐들어간 셈이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는 걸 말년에서야 알게 된 미셸의 탁한 눈알에 미련이 감돌았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알고자 하는 욕구가 깃든 눈빛이 디아를 향했다. 반은 밑바닥까지 캐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미셸의 성정이 대단한 한편 사람 같지 않게 느껴졌다. 정작 사람이 아닌 디아보다 더더욱.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미안하지는 않아? 죄책감 같은 거나. 막 미안하다는 감정, 그런 게 할머니한테는 없어?”
“누구한테.”
다른 별에서 온 생명체 같은 미셸은 어렴풋이 예상했던 태도를 보였다. 반은 여기서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을 실감했다. 개릿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무심한 눈빛이 말문을 턱 막았지만 애써 혀를 움직였다.
“나나 디아나. 그…. 그쪽. 외계인들이나.”
‘외계인’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마다 현실감이 뭉텅이로 사라지는 기분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제 고정 관념 속 외계인은 디아처럼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에 두 가지 대상을 접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를 꺼냈지만 미셸은 말이 없었다. 반이 미셸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 또한 반의 감정을 이해하기 힘든 듯했다.
미셸은 노르스름한 페인트로 색을 입힌 천장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또렷해진 시선은 반을 지나쳐 잡지를 읽는 디아에게 머물렀다. 이어서 입을 연 미셸은 누구에게 전하는지 모호한 답변을 꺼냈다.
“네게 너만의 할 일이 있다면…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거야. 후회는 없어. 조금도.”
“…그래.”
반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미셸이 달가웠다. 죽음을 불사하고 손주를 구해 낸 노인보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스러운 노인이 제가 아는 미셸이었다. 이 나이가 되어 눈물 콧물 짜며 가족의 사랑을 깨닫고, 미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짐처럼 안고 살아가기는 싫었다.
미셸은 미셸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살면 그만이다. 기껏 대화 자리를 마련한 것치고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이만하면 만족했다.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한 반은 자유로운 손으로 미셸의 손등을 두드렸다.
“오래오래 사시라는 말은 못 하겠다. 너무 아프지는 마.”
“너도 너무 한심하게 살지는 말고.”
건조한 관계만큼이나 건조한 인사를 건넨 반은 디아를 돌아봤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던 디아가 잡지를 휙 던지고 다가왔다. 휠체어 손잡이를 붙들고 방을 빠져나가려던 디아의 등 뒤에서 부름이 들려왔다.
“너는 잠시 남지.”
“싫어.”
망설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꾸한 디아가 휠체어를 밀었다. 디아의 경우 없는 말버릇에 헛웃음을 터트린 반은 문을 열려는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저 엠마랑 같이 있겠습니다. 오래 찾으셨는데, 화도 좀 내 보시고 그러세요.”
“별로 그러기 싫은데.”
“정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말끝을 흐린 반은 뜻대로 하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디아에게도 나쁘지 않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건넨 말이지, 싫다는 남자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맞아, 싫어’ 하며 냉큼 방을 떠날 줄 알았던 디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변덕스럽게 의사를 바꾸어 휠체어만 밖으로 내보냈다.
병실 앞에서 대기하던 엠마에게 반을 잘 감시하라고, 혼자서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하라고 단단히 경고하고는 문을 닫았다.
의자를 가져와 침대 곁에 앉은 디아는 늘씬한 다리를 꼬고 허공에 뜬 발끝을 까딱거렸다. 이곳에 남은 것이 몹시 불만스럽다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순전히 반의 개운하지 못한 표정 때문에 부탁을 받아들인 디아는 미셸이 말을 건네는 족족 성의 없이 받아쳤다.
“부고를 그렇게 짧은 주기로 들은 건 처음이야. 남은 건 이제 나뿐인 것 같네.”
“앞으로도 많이 남았어. 친구들 많이 보내 줄게.”
“날 죽일 셈인가?”
“곧 죽을 건데 뭐 하러.”
매사 비협조적으로 구는 디아 때문에 고생깨나 한 미셸은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를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와중에 디아를 불러 세운 이유는 하나였다.
“난 죽을 처지고, 연구를 아는 놈들도 차례로 죽을 테고….”
미셸은 절망적인 상황을 담백하게 정리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일렬로 늘어진 방과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벽, 그리고 방의 주인들을.
북극해에서 폐쇄된 연구소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광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보호하듯 주위를 두른 광물을 깨뜨리고 숨겨진 세포를 꺼냈을 때만 해도 모두가 새로운 생명체의 발견에 들떴다. 그것이 비극의 씨앗인 줄도 모르고.
그들에게는 숙주와 링크라는 무기를 비롯해 눈에 띄는 특이점이 있었다. 이는 인간과 확연히, 혹은 미세하게 달랐다. 그들의 고향을 짐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 방의 대기를 조정하면서 그들이 어떤 환경까지 적응해 내는지 실험했다. 질소를 줄이고, 산소를 높이고, 이산화탄소를 높이고, 수소와 암모니아를 집어넣었다. 기압을 올렸다가 낮추고 온도와 습도를 조정하기도 했다.
결과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보편적인 인간보다 다양한 환경을 견뎠지만, 지구 외의 행성에서 살아남을 만한 신체는 아니었다. 새로운 가설이 생겼다. 그들의 신체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실험은 계속됐다. 지구상의 모든 병원체를 차례로 주입했다. 놀라운 점은 이때 발견됐다. 그들은 치사율과 관계없이 단기간에 항체를 만들어 냈다. 치명상이 아닌 경우, 손상된 신체는 말끔하게 재생되지는 않아도 월등히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그들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는 세포가 그들의 신체를 보호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생존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로 보였다.
미셸은 그들의 정체와 목적을 조사하는 실험에 말년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생존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조차 입을 열지 않았고, 밝혀낸 것은 생존에 유리한 신체적 특성뿐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미셸은 슬슬 알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제 말해 봐. 목적이 뭐지?”
새하얀 방에 갇혀 수십 번도 더 들은 질문은 디아를 즐겁게 하지 못했다. 몸은 침대 곁에 있지만 정신은 온통 문밖에 쏠린 디아는 바지에 묻은 티끌만 한 먼지를 떼어 냈다. 소중한 세포를 미덥지 못한 손주에게 맡기면서까지 연구에 집착했던 미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복수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것일 테다.
“말해 주기 싫은데.”
디아는 불친절한 대꾸로 미셸에게 복수했지만 정작 본인도 답을 몰랐다. 아마 르네도 모를 테고, 그 전 세대도 모를 테다. 유전자에 새겨진 메시지는 끈질기게 살아남으라는 것 딱 하나였으니.
저들이 시초가 될지, 여기서 끝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주어진 긴 세월 속에서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디아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존재의 의미라고 하면 엠마와 노닥거리고 있을 잘생긴 남자뿐이었다.
“고집하고는….”
반과 닮은 눈매를 가진 노인은 탐탁지 않다는 듯이 혀를 찼다. 연구의 실패를 직감한 노인의 무기력한 태도는 디아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람들과 어울려 본 경험은 없지만 수많은 매체로 세상을 배운 입장에서 볼 때, 지금 미셸의 태도는 손주의 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줄 알고 기분 나쁜 방에 남았던 디아는 짜증 나는 노인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이제 네 손자는 내 거야. 네가 못 해 준 거 내가 다 해 줄 거야. 예쁜 옷도 입히고, 여행도 다니고, 반지도 주고, 매일매일 따먹을 거야.”
“…하.”
미셸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남보다 못한 손주와 실험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고지식한 성정이었기에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기자기한 화단으로 구성한 정원에 시선을 둔 미셸은 숨을 얕게 들이마셨다.
열패감과 거부감이 사그라들자, 텅 빈 아들의 방에서 목 놓아 울던 사내아이가 기억 회로에서 슬그머니 떠올랐다. 작은 등을 쓰다듬어 주는 대신 문을 닫았던 그날 이후로 미셸은 아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아이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미셸은 퍽퍽하게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잘 부탁한다고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네.”
“반은 내가 알아서 해.”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미미한 회한은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묻혔다. 더는 미셸에게 허비할 시간이 없는 디아는 곧장 등을 돌렸다. 아무리 믿을 만한 엠마에게 맡겼다고는 하지만 반과 떨어진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졌다. 그러나 한 걸음 떼기도 전에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반, 그놈도 어지간히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야. 너 같은 걸 빼돌리겠다고….”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한탄이었지만 디아의 귀를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약간 크게 뜨인 눈을 미셸에게로 돌린 디아는 살가죽이 뼈대에 빈틈없이 들러붙은 그의 목을 바라봤다.
“그때 죽이려던 걸 보면 그쪽에서 가만히 두진 않을 텐데.”
믿고자 했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 반의 이야기. 오로지 그의 말에만 의존해야 했던 과거사가 미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뺨에 열이 올랐다. 발길을 도로 돌린 디아는 큼직한 보폭으로 침대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계속 말해.”
기력이 쇠해 숨을 고르던 미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눈에 뵈는 게 없는 디아는 침대 난간을 흔들어 쇠약한 노인을 독촉했다. 맑은 녹안에 이채가 감돌았다.
“빨리.”
***
“저 깁스는 언제쯤 풀까요?”
“한 달은 더 해야죠.”
“여름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저 사실 걸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굳이….”
휠체어 바퀴를 툭툭 건드리며 엠마와 시시한 잡담을 나누던 반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곁을 돌아봤다. 방에서 나온 디아는 반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엠마에게 명령했다.
“웨인 위치 알려 줘. 바로 가게.”
반은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유를 묻는 대신 가방 속에서 태블릿을 꺼내 든 엠마가 웨인의 위치를 파악하는 동안 디아는 성큼성큼 걸어와 반의 앞에 섰다.
휠체어에 앉아 있다 보니 눈높이가 확연히 차이 났다. 고개를 꺾어 디아를 마주 본 반은 눈을 찡긋거렸다. 디아는 속 시원하기는커녕 감정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자 입을 꾹 다물고 쏘아보던 디아가 넌지시 말했다.
“여기 오길 잘했나 봐.”
“어, 잘됐네요…?”
어쩐지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여서 반은 얼떨떨하게 답했다. 미셸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달콤한 공기를 폴폴 풍기던 남자가 확 뒤바뀌었을까.
이유를 짐작하기 위해 머리에 열이 날 정도로 뇌를 괴롭혔지만 양심에 걸리는 문제는 없었다. 디아의 눈알이 갑자기 돌 만한, 그러니까 제 연애사 같은 걸 미셸이 알 리도 없었고,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인간도 아니었다. 눈에 의문을 가득 띄우고 디아를 바라보는데 불그스름한 입술이 벌어지더니 폭격이 쏟아졌다.
“왜 웨인을 감싸? 이제 나는 못생겨서?”
“…미셸이 도련님 못생겼대요?”
반은 난데없이 본인을 깎아내리는 디아가 당혹스러워, 그 사이에 섞여 나온 익숙한 이름을 놓치고 말았다. 감정이 격양되면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 디아는 혼란스러움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반을 몰아붙였다.
“네 말이 맞았어. 나 구하러 온 거… 그게 진짜라서 너무 좋은데, 그런데 왜 웨인은 숨겼어? 왜 계속 거짓말해? 사실 나보다 그게 더 좋은 거지? 그게 네 다리 그따위로 만들었는데도, 아직도 설마 둘이….”
설움이 듬뿍 묻어나는 디아의 말이 길어질수록 반의 입은 한계를 모르고 벌어졌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마침내 퍼즐이 맞춰졌을 때, 반은 미셸에 대한 평가를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시…. 잠시만.”
다 잘 되어 가는 와중에 냅다 재를 뿌린 미셸이 원망스러워서 눈물이 다 날 정도였다. 웨인이 사라진 뒤 곧장 미셸이 나타났으니, 범인을 목격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걸 왜 하필 민감하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디아에게 말한 건가. 환장할 노릇이었다.
얼굴을 마구 쓸어내리며 변명거리를 긁어모으던 반은 문득 미간을 구겼다. 미셸이 웨인을 알았던가?
“미셸이… 웨인을 압니까?”
“그럼 모르겠어? 왜. 나중에 소개라도 시켜 주게?”
궁금해서 물은 것뿐인데, 질문은 디아의 머릿속에서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잘못 답하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마른침을 삼킨 반은 등 뒤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딱 잡아뗐다.
“제가 왜요…. 그리고 무슨 소리세요. 난 그냥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게 웨인인지 군인인지 뭐, 알 수가 있어야지…. 아, 그럼 그놈이 웨인이었나 보다. 와! 나쁜 새끼. 제가 그 새끼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주 첫인상부터가….”
“지금 와서 모르는 척하지 마. 다 티 나니까….”
하지만 예민의 극치를 달리는 디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구며 원망할 기세로 변명의 싹을 잘랐다. 반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사이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엠마가 디아를 불렀다.
“도련님.”
“나 예쁘다고 한 거 거짓말이지. 그렇지? 나 좋아하는 척한 것도….”
“에이, 말씀을 왜 그렇게 하세요. 도련님 예쁜 거 맞고, 저 도련님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까 미셸한테 도련님 소개했잖아요. 제 애인이라고. 기억 안 나십니까?”
“거짓말하지 마….”
온몸으로 불안한 정서를 드러내는 디아와 기를 쓰고 그를 진정시키려는 반은 엠마의 부름을 미처 듣지 못했다. 엠마는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호스피스 복도에서 사랑싸움 중인 디아를 재차 불렀다.
“도련님.”
“왜?”
감정을 다스리는 데 서툰 디아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엠마는 질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은 어린 도련님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액정에 떠 있는 것은 웨인의 위치 정보가 아니었다.
“섬에 가 보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