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8/19)

05.

호스피스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차 내부는 숨 막히는 침묵에 휩싸였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 정적 속에서, 어떤 정보도 전달받지 못한 반은 운전 중인 엠마와 시선이 마주칠 때까지 빤히 바라봤다.

마침내 백미러 너머로 눈이 마주친 엠마에게 손짓과 표정으로 이유를 물었다. 엠마는 다급한 반의 눈짓을 무시하지 않고 급히 섬으로 복귀하는 이유를 간략히 알려 주었다.

“체마 님을 총으로 쏘셨습니다. 동족을 해친 경우에는 징계를….”

“조용히 해, 엠마.”

“여기서 웨인 님까지 쏘면 징계 기간이 늘어나겠죠.”

어린 도련님의 투정을 무시한 엠마가 꿋꿋이 말을 마무리했다. 엠마의 어조가 워낙 무신경해서 그렇지, 담긴 내용은 꽤 묵직했다.

“체마라면….”

순간 반의 머릿속에 제 무릎을 꿇리고 총을 들이밀던 젊은 남자가 떠올랐다. 그놈을 총으로 쐈다는 얘기에 크게 뜨인 눈이 곁으로 홱 돌아갔다. 설명을 바라는 눈빛을 쏘았지만 디아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딴청을 피웠다. 속 시원히 답해 줄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찝찝한 구석은 하나 더 있었다. 앞좌석을 짚은 반은 제 추측이 틀리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웨인… 님이요?”

“클라크 씨에게는 01이라고 하는 편이 더 익숙하겠네요.”

원치 않은 답을 듣자마자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은 반은 말을 잇지 못하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의심은 했지만 막상 진실을 확인하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보다 더한 배신감이 몰려들었다.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지도 모를뿐더러, 인제 와서 웨인의 정체 따위 무슨 상관이냐 싶겠지만…. 반은 신음하며 얼굴을 감쌌다.

첫 남자와 마지막 남자가 외계인이라니. 따지자면 디아의 가족 아닌 가족과 배를 맞춘 셈이 아닌가. 복잡다단한 일도 다 끝났겠다, 이제 물고 빨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더니 자유로웠던 과거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반은 침묵에 동참하여 차창 너머로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노려봤다. 문란한 과거를 후회하고, 새빨간 거짓말로 저를 속인 웨인을 마구잡이로 욕하던 때 의문이 찾아왔다. 웨인이 01이라면 머릿수가 맞지 않았다. 미셸의 연구소에서 생존한 개체는 총 넷이었다.

“그럼 그분은….”

호기심을 해소해 줄 의향이 없는 디아 대신 엠마에게 물으려던 반은 말을 내뱉자마자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깨달음의 탄식이 터졌다. 홀로 나이대가 다른 르네는 한때 웨인이 말했던, 이미 터를 잡고 연구소를 급습한 선대 외계인일 터다.

그렇다면 단기간에 쌓기 어려운 디아의 부가 이해됐다. 제 추리력에 감탄하며 만족스럽게 팔짱을 끼려다가 깁스에 가로막혔다. 깁스 위에 어정쩡하게 손을 얹은 반은 백미러로 눈이 마주친 엠마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사가 대단하십니다.”

엠마와의 대화는 그 길로 끊겼다. 반은 줄곧 말이 없는 디아를 흘끔흘끔 살폈다. 웨인이 01이라면 놈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길길이 날뛸 만도 했다. 보통 사람보다 외부의 자극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디아의 심정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제 잘못이 크다는 것쯤은 잘 알았다.

반은 거미가 기어가듯이 옆자리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꿈질꿈질 움직였다. 허벅지에 얹은 손등 위로 타고 오르자 움찔거리는 근육이 느껴졌다. 넘어져서 다친 것치고 깊은 상처를 입은 손바닥으로 파고들어 슬며시 손을 움켜쥐었다.

더러운 손 저리 치우라며 내쳐도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었건만, 디아는 차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단단히 토라진 와중에도 스킨십은 좋은 모양이었다. 따스한 손바닥에 폭 감싸인 손을 내려다본 반의 입매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반은 디아와 마주 잡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그의 패악질에 그럴싸한 이유를 붙이기 시작했다. 체마에게 한번 시달려 본 경험을 토대로 하자면, 놈은 언제 한 번 두들겨 맞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놈이었다. 아마 그 신경질적인 말투로 디아를 박박 긁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디아가 이유도 없이 총을 쐈을 리가 없으니, 결국 디아의 잘못은 없는 셈이었다. 어떤 징계를 내리는지 잘은 몰라도 끽해야 벌금 좀 내고 사과하는 정도이지 않겠나.

여차하면 디아에게 받을 급여를 반납하고 대신 머리 숙여 주면 그만이라고, 나름대로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반은 사랑스러운 남자의 손등을 엄지로 매만졌다.

***

만면에 떠 있던 미소는 보트에서 내리자마자 흔적도 없이 걷혔다. 으스스한 성에 입성한 순간 눈알이 사방으로 굴러갔다. 예상과 달리 초대하지 않은 손님의 수가 상당했다.

“르네 님과 면담 후 사용인과 함께 지체 없이 이동하셔야 하며, 불복 시 강제로 연행됨을….”

단정한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이 내리는 일방적인 통보가 귀에서 아득하게 멀어졌다. 휠체어에 앉아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반은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서서히 깨닫는 중이었다.

벌금과 사과는 무슨. 철없는 어린애 하나 혼쭐내겠다고 동물 잡는 마취총을 들고 왔는데 그딴 가벼운 벌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시선이 얼추 세어 봐도 열 명은 넘는 정장 무리와 보란 듯이 어깨에 멘 마취총 사이를 굴러다녔다.

대체 어린애한테 무슨 짓이냐고, 겁먹은 거 안 보이냐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정작 겁을 집어먹은 사람은 반 혼자뿐이었다. 하필이면 디아가 휠체어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있어서, 반은 졸지에 움직임을 주시하는 그들의 시선을 덤으로 받아 내야 했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멀쩡한 손으로 얼굴을 가릴 무렵, 묵묵히 듣던 디아가 이어지는 주의 사항을 썩둑 끊었다.

“알았어.”

“그럼 한 시간 뒤 모시겠습니다.”

휠체어가 매끄러운 미소를 띤 여성을 뒤로하고 나아갔다. 복도까지 지키고 선 그들 때문에 승강기 안에 들어설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던 반은 둘만 남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징계가 대체 뭡니까? 그… 그분이 막 때립니까?”

“아니. 섬에서 근신.”

꼭대기 층 버튼을 누른 디아는 휠체어 손잡이를 바투 잡으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섬이면 여기랑 똑같은 거 아닙니까?”

“…안 똑같아.”

“가 본 적 있어요?”

고개를 위로 휙 꺾어 쳐다보자 디아가 시선을 피했다. 옆얼굴에 새겨진 표정이 오묘했다. 문득 징계를 들먹이며 빈정거리던 체마를 떠올린 반은 얼른 실토하라는 눈빛으로 빤히 응시했다. 그다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지, 디아는 침묵으로 답했다. 별수 없다는 듯이 양 손바닥을 내보인 반은 디아의 무모함을 꼬집었다.

“한번 다녀오신 것 같은데, 그래 놓고 또 웨인을 찾아가려고 한 겁니까? 이미 한 명은 쐈고?”

“그러게. 그때 둘 다 죽였어야 했는데 괜히 살려 둬서….”

그러나 디아는 반의 말뜻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자신이야 징계 수위를 몰라서 태평했던 거지, 뻔히 알면서도 체마를 쏘고 그것으로 모자라 웨인까지 들쑤시려고 한 남자를 따끔하게 꾸짖을 요량으로 말을 꺼냈던 반이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얘기가 왜 그렇게 됩니까…. 저 웨인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체마야 속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넘겨도 웨인까지 건드릴 이유는 없었다. 그놈이 걱정스러워서가 아니라 동족 눈 밖에 날 짓을 사서 하는 디아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디아는 제 마음도 못 알아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너는 싫어하는 사람이랑 키스도 하나 보지.”

“그거는…. 그건 사람이 술에 취하면, 이제 정신이 좀 이상해지면서….”

웨인에 대한 앙금이 상상 이상인 디아가 허를 찔렀다. 그를 혼내려다가 오히려 제가 혼날 처지에 놓인 반은 더듬더듬 변명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거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죄인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반은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한 진심을 꺼냈다.

“기억도 안 납니다. 이제 도련님 생각밖에 안 해서.”

때마침 승강기가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지만 휠체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뒤를 흘끔 돌아보자 의심스러운 듯, 수줍은 듯, 미묘한 표정을 한 디아가 망설임이 묻어나는 물음을 던졌다.

“…진짜?”

“진짜.”

“그런데 왜 숨겼어?”

반은 감이 좋은 남자 앞에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핑계로 둘러대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를 걱정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이럴 것 같아서요. 도련님이 괜히 그놈 건드렸다가 밉보이면 좀…. 좀 그래요. 제 마음이.”

디아는 겨우 터놓은 진실을 듣고 나서야 휠체어를 밀어 승강기에서 내렸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햇살이 쏟아지는 복도를 가로지르자 바퀴가 돌돌 굴러가는 소리와 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섞였다. 반에 한해서는 모든 감정의 발화점이 낮은 디아는 짐짓 쌀쌀맞은 투로 이미 녹아내린 마음을 숨겼다.

“진짜 같으니까 용서해 줄게. 다시는 거짓말하지 마.”

“제가 이래서 도련님이 좋아요.”

그런 디아의 심정을 어렵지 않게 간파한 반은 손을 뒤로 뻗어 그의 손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 낸 디아가 손장난하듯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한 시간 뒤에 끌려갈 상황에 놓인 것치고 간지럽히는 손가락에는 침울함이 없었다.

키득거리며 웃던 반은 그의 손가락을 움켜쥔 채로 눈을 굴렸다. 제 급여를 반납해 벌금을 충당할 계획은 무산됐지만 마냥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반은 근신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떠올린 방도를 꺼냈다.

“근신이요. 저도 같이 가도 됩니까? 같이 가면 그렇게 나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너랑 떼어 놓으려고 저러는 거야. 내가 섬에 처박히면 넌 당연히….”

디아는 말을 흐렸지만 뜻은 분명히 전해졌다. 묵직한 깁스를 내려다본 반은 입꼬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위험하겠네요….”

하긴, 쉽게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디아를 배신했던 리암 역시도 배후가 있다는 식으로 말했으니 그들이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은 확실했다. 이 와중에 디아가 근신을 받아 제게서 떨어진다면 모가지를 지켜 주는 방패가 사라지는 것이다. 산을 넘어도 넘어도 또 다른 산이 나타나다니. 돈 많은 미인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 트렁크 안에 몸을 구겨 넣든, 비행기 화물칸에 숨어들든, 뭐든 디아가 처박힐 섬에 따라갈 방법을 고심하던 때였다. 머리 위에서 고민한 시간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간결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안 가.”

디아는 2주 넘도록 먹고 자고 생활했던 반의 방이 아닌 개인실 앞에 섰다. 반은 잠금을 푸는 디아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대책 없는 억지는 화만 부를 것이다.

“어떻게요? 총 들고 찾아왔는데? 지금 밑에서 기다리는데?”

“괜찮아.”

“저는 안 괜찮은데요….”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도련님을 꼬드겨 가족이 결사반대하는 사랑에 폭 빠뜨린 악역’이 현재 반이 맡은 역할이었다. 존재 자체가 무서운 가족들 손에 죽게 생긴 그의 심정을 헤아려 주면 좋을 텐데, 디아는 계획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대꾸 없이 휠체어를 밀었다.

평상시보다 깨끗한 상태를 유지 중인 개인실로 들어서자 문이 굳게 닫혔다. 고개를 들어 올린 반은 디아의 개인실에서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한동안 마주칠 일 없던 맥이 눈인사를 건넸다. 덩달아 인사를 건네자 맥은 자연스럽게 디아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보고를 올렸다.

“연락 취해 뒀습니다. 두 시간에서 세 시간가량 걸릴 예정입니다.”

“알았어. 전화는 아래층으로 연결해.”

“알겠습니다.”

“뭐가요? 저만 모르는 것 같은데….”

이중 잠금을 건 디아는 실없이 웃으며 맥에게 설명을 구하는 반을 번쩍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달라지자 반은 놀라 손을 휘젓다가 디아의 어깨를 짚었다. 경악으로 인해 홉뜬 눈이 디아를 향했다.

“저기, 저 걸을 수 있습니다…. 맥도 있는데 이건 좀….”

“이게 더 빨라.”

“제 나이가 몇인데 진짜….”

“내가 어리니까 괜찮아.”

디아는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내려 주지 않았다. 그의 귀에 다급히 속삭이던 반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누군가 보는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번쩍 들려 옮겨지는 것은 낯짝 두꺼운 반에게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저 듣기 싫은 소리는 들은 척도 안 하는 디아는 보다 빠른 걸음으로 개인실을 가로질렀다. 다리가 긴 덕에 확실히 빠르기는 해서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침실과 이어지는 문 앞에서 반을 한 팔로 받쳐 든 디아가 열쇠를 집어넣었다. 대낮에도 한밤처럼 어두운 복도에 두 번째로 들어서게 된 반은 하는 수 없이 디아의 목을 끌어안고 주변을 둘러봤다.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거침없이 나아간 디아는 욕실을 지나쳐 복도 끝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눈가리개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없으니 이 방이 무슨 용도인지 유추할 길도 없었다.

반의 입가에 애매한 미소가 떠올랐다. 침실에 숨어서 저들이 포기할 때까지 버티는 것보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어야 할 텐데.

계획에 대한 기대치가 점점 낮아질 무렵, 무거운 쇳덩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이어 걸음을 옮기는 디아에게 꼭 붙은 반은 눈썹을 쑥 들어 올렸다.

“방에… 계단이 다 있네요.”

디아가 한 걸음씩 발을 디딜 때마다 허공에 뜬 발이 달랑거렸다. 성 구조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선형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한참 내려가자 발 딛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는 공간이 나타났다. 어둠에 잠긴 공간을 제 앞마당처럼 익숙하게 가로지른 디아가 푹신한 소파에 몸을 내려 주었다.

이곳까지 안아다 준 팔이 거두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한 백색 형광등이 미지의 공간을 밝혔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차례로 켜지면서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하는 공간이 서서히 드러났다.

“…와.”

시린 눈을 찌푸려 초점을 맞춘 반은 무심코 탄성을 토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널따란 공간에는 까마득한 높이의 원형 책장 수십 개가 줄지어 있었다.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책장은 서류 파일과 돌돌 만 지류, 비디오 케이스 따위로 빼곡하게 차 있었는데, 도서관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게 다 뭡니까?”

책장 숲 한가운데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난 반은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리는 디아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아무렇게 널브러진 종이를 밟지 않도록 겅중겅중 뛰어 책장 앞에 다다라, 알파벳 순서로 분류된 택을 만지며 물었다.

“그래서 여기 숨어 있을 겁니까? 언제까지?”

“연락 올 때까지.”

“음…. 그분들 무섭던데.”

결국 별다른 계획은 없는 모양이었다. 반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 아름 쌓인 두루마리 중 하나를 꺼내 펼쳤다.

얇은 종이 위에 수놓아진 것은 건물 설계도였다. 3층으로 된 저택 전체와 방 각각의 도면은 물론이고, 유사시 몸을 숨길 벙커까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반은 가방끈이 짧았지만 경험과 추측을 꿰맞추어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는 않았다.

흠, 하고 미묘한 감탄사를 흘린 반은 누군가를 죽이고자 마음먹었을 때 몹시 유용할 도면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래서 출입 금지였습니까?”

“…너한테만 금지한 건 아니야.”

한때 괴담 같은 매뉴얼로 사람을 놀라게 했던 디아는 반을 내려 주었던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몸만 컸지, 하는 짓은 영락없이 미움 살까 봐 눈치 살피는 어린아이였다. 그가 고성에 숨겨 놓은 공간은 귀여운 태도와 딴판으로 살벌했지만 말이다.

어깨를 으쓱이며 두루마리를 제자리에 돌려 둔 반은 딱딱한 서류 파일 모서리에 검지를 걸고 살짝 꺼내 봤다. 표지 이름표에 ‘US-E107’이라는 코멘트가 적혀 있었다.

파일을 꺼내 펼치자 예순 남짓 되어 보이는 백인 남성의 사진과 서류 수십 장이 나타났다. 깁스 위에 파일을 얹은 반은 종이를 휙휙 넘겨봤다. 첫 장에는 남성의 인적 사항이, 그 뒷장부터는 온갖 숫자와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반은 눈을 잔뜩 찌푸리고 그래프와 뒤섞인 깨알 같은 글씨를 읽었다.

“이백… 억, 육십억 달러….”

사실 쉬이 읽을 수 있는 것이 돈과 관련된 숫자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현실성 없어 일순 정신이 어찔했다. 심호흡하고 다시금 찬찬히 글을 읽어 내리던 반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 봐 문단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었다.

고개를 들고 눈알을 마구 굴리다가 페이지 수를 세어 봤다. 서른 장. 사진 속 노인이 3분기 당기 순이익을 허구로 발표하고 부채를 은닉하는 회계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이 서른 장에 걸친 서류의 요지였다. 작성 날짜는 작년이었다.

파일을 도로 집어넣은 반은 다른 파일을 뽑아냈다. 이번에는 젊은 여성이었다. 컬러 사진 속 얼굴이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고민하던 때 인터넷 기사가 떠올랐다. 최근 대체 식품 사업으로 억만장자 반열에 합류한 젊은 사업가였다.

인적 사항 뒤로 이어진 스무 장에 달하는 서류를 전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조세 포탈이라는 단어 하나면 설명됐다.

다른 파일도 결이 비슷했다. 횡령했거나, 조작했거나, 혹은 사생활에 엄청난 문제가 있거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약점들이 당사자의 인적 사항과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심지어 다른 책장에 꽂힌 파일은 모르는 언어라 읽을 수조차 없었다.

말문이 막혀 눈만 끔벅이던 반은 멋대로 꺼낸 파일들을 집어넣고 디아를 돌아봤다. 이것들을 보자 마취총을 든 동족을 마주하고서도 무신경하던 디아의 태도가 못 견디게 찜찜해졌다.

“아까 맥한테 뭐 부탁하신 겁니까? 세 시간, 그쯤 걸린다는 거.”

바닥만큼이나 어수선한 테이블에 길쭉한 다리를 올린 디아가 엇갈린 발목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책장을 헤집는 반에게 줄곧 꽂혀 있던 시선이 왼편으로 살짝 비껴갔다.

“그냥 기사.”

“무슨 기사?”

디아는 대답을 회피했다. 대신 널찍한 소파 곁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반은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며 낮은 테이블을 흘끔 살폈다. 기상천외한 전경에 정신이 팔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 가지로 분류해서 대충 쌓아 올린 서류 파일과 붉은빛 차가 반쯤 남은 찻잔. 어제도 이곳에 머무른 듯했다. 소파 가까이 다가가서 파일을 들여다보려고 하자 소리 없이 뻗어 온 팔이 골반과 어깨 부근을 끌어 주저앉혔다.

디아의 무릎에 걸터앉게 된 반은 주르륵 미끄러져 곁으로 옮겼다. 상체를 감싼 보호대 위로 팔을 두른 디아는 고개를 숙여 가면서까지 허리를 끌어안았다. 곱상하게 생겼다고 해서 체격까지 곱상한 것은 아닌 남자가 안겨 들자 제법 벅찼다. 힘겹게 멀쩡한 팔을 그의 어깨에 두른 반은 너른 등을 토닥이며 확신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의문을 드러냈다.

“제가 지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데… 협박 같은 짓 하실 건 아니죠?”

“나 그런 거 몰라.”

“모르긴 뭘 몰라요. 저거 다 뭡니까?”

테이블에 널브러진 파일을 턱짓으로 가리키자 디아가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턱 끝을 간지럽혔다. 마구 긁고 싶은 간지러움을 간신히 참은 반은 자꾸만 대화를 피하는 디아를 얼렀다.

“말하기 싫으면 제가 물을게요. ‘예, 아니요’로 대답하기.”

품에 파묻힌 고개가 위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까다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도련님에게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낸 반은 책장으로 가득 찬 공간을 둘러봤다. 가십거리도 되지 않을 스캔들부터 한동안 뉴스를 떠들썩하게 할 스캔들까지 차곡차곡 모인 공간은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이것들이 모두 까발려지면 세상에 어떤 변화가 올지 궁금하면서도 두려웠고, 정보를 관리하는 자가 디아라는 점은 새삼스러웠다. 어떤 질문부터 할지 고민하며 입술만 달싹이던 반은 가장 무난한 것부터 물었다.

“여기 있는 파일들… 다 도련님 가족은 아니죠? 저 같은 사람도 있고. 그렇죠?”

“응.”

“근데 도련님 가족 비리… 가 아니라, 약점도 있는 거죠?”

“응.”

“맥한테 시킨 기사는 도련님 가족 약점이에요?”

디아는 묵묵부답이었다. 정답인 모양이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터트리는 것인지,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이유가 자신이라면 마냥 달가워할 수 없었다.

동족과 척지려는 이유가 저 하나 때문이라면… 제 존재가 디아를 고립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침음을 삼킨 반은 커다란 덩치를 구깃구깃 구겨 억지로 안긴 디아를 밀어냈다.

“도련님, 잠시만요. 저 좀 봅시다.”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구는 디아의 어깨를 휙 떠민 반은 놀란 남자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맞추었다. 서운함을 느낄 틈 없이 매끄러운 뺨을 쓰다듬어 주자 디아는 얌전히 눈을 깜박이며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이렇게 보면 참 순하고 예쁜데, 하는 짓은 영 왈패 같았다. 옅은 미소를 띤 반은 잠시 눈을 뗐다고 왈패로 자란 남자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도련님이 밉보이는 것도 싫고….”

“이번 기사는 별거 아냐. 사람만 좀 자르면 끝나.”

“보니까 그게 시작인 것 같은데.”

냉큼 별것 아닌 양 포장하던 디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짐작을 사실로 만들어 주는 반응이었다. 고집스러운 남자의 뺨을 검지로 톡톡 건드리던 반은 가장 무난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냥 잘 말해 보면 안 됩니까? 제가 가서 빌까요? 저 그런 거 잘하는데.”

“네가 왜 빌어?”

하지만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이 남자의 화를 사고 말았다. 순식간에 눈빛이 냉랭해진 디아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힘이 들어간 눈과 쏟아지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억울함이 뚝뚝 떨어졌다.

“체마가 리암을 꼬드겼어. 그것 때문에 네가 죽을 뻔했고. 내가 여기서 너랑 떨어지면 너부터 죽일 거야. 지금 나 보고 그 꼴 보라는 거야? 대체 왜 그래, 반? 나는 네 편인데, 너는 왜 내 편이 아니야? 또 내가 잘못한 거야?”

“왜 또 말이 그렇게…. 저 도련님 편 맞는….”

“이게 시작 맞아. 근데 이거보다 더한 짓도 할 거야. 그래도 안 되면 다 죽일 거야….”

또 지뢰를 밟고 말았다. 반은 거듭 말실수하는 제 혀를 깊게 깨물며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대를 의심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남자가 성가시고 귀찮을 법도 한데, 기저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감정은 측은지심에 가까웠다.

작은 방에 갇혀 과거를 곱씹고, 상념을 곱씹고, 원망을 곱씹으면서 단단히 삐뚤어진 남자를 미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다가 단단히 삐뚤어진 이유가 저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면 더더욱이나.

“넌 네가 가볍다고 생각하지? 나한테는 안 그래. 나는 반이….”

불안을 머금은 녹안이 이리저리 굴러갔다. 하얀 뺨이 더욱 창백해지고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제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던 디아가 시선을 툭 떨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너무 무거워.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반은 지체 없이 하얗게 질린 뺨을 붙잡고 얼굴을 가져다 댔다. 밭은 숨이 터져 나오는 입술에 제 입술을 대고 숨을 조금 불어 넣자 놀란 디아가 입 안에 들어온 숨을 들이켰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반은 그의 입술을 막고 규칙적으로 숨을 불어 넣었다. 서로의 혀가 살짝씩 스쳤지만 진득하게 섞이지는 않았다.

반은 디아의 호흡이 진정됐을 무렵 천천히 입술을 뗐다. 붉은 입술이 촉촉하게 젖은 디아는 멍한 얼굴이었다. 반은 고작 표정 하나로도 외설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외모를 구경하다가 그와 이마를 툭 맞대고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안심이 안 되세요?”

“…응.”

“내가 사랑한다고 해도?”

“빈말 잘하잖아. 나중에 아니라고, 다 내 착각이었다고 하면 그러면 난….”

“그럼 우리 진짜 결혼하면?”

연거푸 불안을 토해 내던 입술과 사뿐사뿐 내려앉던 속눈썹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겨우 진정시킨 호흡도 자취를 감추었다. 숨도 쉬지 않는 디아에게 쪽 입을 맞춘 반은 배시시 웃으며 재촉했다.

“응? 여보.”

이대로 심장이 멎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미동 없던 디아가 숨을 탁 터트리며 제 이름을 중얼거렸다.

“…디아.”

너그러운 반은 분부를 받잡아 오랜만에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우리 결혼할까, 디아.”

한순간도 놓치기 싫다는 듯 깜박임을 멈춘 녹안에 습기가 차올랐다. 반은 피가 몰릴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디아를 살피며 장난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반지는 없지만….”

반지는 다음에 주겠다며 말하기도 전에 상체가 뒤로 홱 넘어갔다.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밀려난 반은 덮쳐드는 디아의 어깨를 짚었다. 팔을 뻗은 디아는 소파 팔걸이와 쿠션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비좁은 틈에서 튀어나온 것은 반지 케이스였다. 새카만 반지 케이스는 그의 등과 비슷한 상태였다. 내던지고 줍고, 또다시 던졌다가 줍는 짓을 수백 번 반복한 것처럼 흠집이 수두룩하게 새겨진 케이스를 양손으로 쥔 디아가 떨림이 가시지 않는 목소리를 냈다.

“5캐럿, 이거면 나랑 결혼한다고….”

달칵 열린 케이스 속에서 한 쌍의 다이아 반지가 휘황찬란한 자태를 드러냈다. 스퀘어로 커팅한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삽시간에 반의 정신을 앗아 가 버렸다. 반은 형광등 불빛을 어지럽게 반사하는 다이아 반지를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반지가 대뜸 등장할 장소는 아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언제 줄지 고민하다가….”

눈을 내리깐 디아가 드물게 수줍어했다. 태연한 척하려고 하지만 안절부절못하는 디아를 바라보던 반은 흠집투성이 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귀찮게 구는 소년을 놀릴 생각으로 알맹이 없이 던진 말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는 남자가 가여우면서도 애달파서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디아가 말을 꺼내고서야 그날의 대화를 떠올린 반은 울컥 치미는 죄책감을 삼키고 살며시 물었다.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2년 전부터.”

반은 말없이 케이스 겉면에 깊이 새겨진 흠집들을 더듬었다. 화가 날 때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집어 던지고, 그럼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나뒹구는 그것을 주워 드는 디아가 그려졌다. 무슨 심정으로 반지를 사고, 무슨 심정으로 보관했는지 그는 아마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밑바닥이 없는 사랑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조금씩 갚아 나갈 수는 있지 않을까.

사이즈가 같은 반지 하나를 꺼낸 반은 손을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깁스 때문에 양손으로 반지를 끼워 줄 수 없는 점이 아쉬웠지만 덜덜 떨리는 디아의 손을 발견하자 아쉬움이 증발했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린 반은 깁스한 팔로 디아의 손바닥을 받치고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손가락 두께만 한 다이아몬드가 옅은 흉터가 남은 약지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반은 디아의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정말 제 입으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잘생긴 나랑 결혼할까? 돈은 없지만… 보기에는 좋아.”

씨익 웃으며 시선을 드는 것과 동시에, 크게 뜨인 눈에서 뚝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새하얀 뺨을 갈랐다. 우는 모습조차 아름다운 남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입술을 한없이 달싹거리다가 품으로 뛰어들었다.

숨 못 쉴 정도로 허리를 끌어안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대신 제 팔을 억세게 움켜쥔 디아는 맑은 웃음을 터트리는 반의 목덜미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반의 향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반. 디아는 소리 없이 그를 불렀다. 아무리 들이마셔도 그리운 향기는 팔목에 손톱을 바짝 세우게끔 했다. 디아는 피부가 벗겨질 만큼 강하게 팔목을 긁어내렸다.

분명 아프고 따가운데도 모든 것이 꿈 같았다. 등을 토닥여 주는 손도, 미지근한 온도도, 약지에 매달린 무거운 반지도 모조리 꿈 같아서, 디아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사실 반은 몇 달 전 리암의 손에 죽었다거나, 단 한 순간도 저를 찾은 적이 없었다거나, 혹은 아예 섬에 온 적이 없었다거나…. 새하얀 방에 갇힌 채로 반을 그리워하다가 결국 미쳐 버린 걸까 봐, 그래서 환상을 보는 걸까 봐 죽을 만큼 두려웠다.

이것이 현실임을 확인받는 것조차 두려워 숨이 가빠질 즈음 몸이 뒤로 밀려났다. 꽉 막힌 귀로 반의 목소리가 조금씩 파고들었다.

“…아. 디아. 왜 그래.”

“…반.”

“왜 이렇게 심하게 울어? 뚝 해, 뚝. 다 커서는….”

투박하면서 다정한 손길이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물기로 얼룩진 시야가 걷히며 반의 모습이 얼핏얼핏 보였다. 소매까지 끌어와 뺨을 닦아 주던 반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팔은 왜 또 이래 놨어!”

기겁한 반이 피가 송골송골 맺힌 팔목을 잡아챘다. 환장하겠다며 고개를 뒤로 휙 젖히는 모습은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몇 번이고 본, 그리운 모습 그대로였다.

절로 뻗어 나간 손이 상처를 들여다보며 넌덜머리를 내는 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목 안쪽을 꾹 누르자 엄지를 통해 잔잔한 맥박이 느껴졌다. 꿈이라면 이렇게 작은 박동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의 손목을 수없이 매만지고 그의 모습을 원 없이 눈에 담던 디아는 젖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이제 배신하지 마.”

“배신이 문제야? 네 팔이 더 문제다.”

“이혼 절대 못 할 줄 알아.”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여기 뭐 연고 같은 거 없나?”

“사랑한다고 해. 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반의 손목을 툭툭 당기자 다른 곳에 빼앗긴 시선이 돌아왔다. 걱정을 품은 호박색 눈동자에 장난스러운 기색이 스며들었다. 살갗이 까진 팔목으로 향했던 시선을 떼어 낸 반은 헛기침하더니 오래도록 너무너무 듣고 싶었던 목소리로, 너무너무 듣고 싶었던 말을 속삭여 주었다.

“사랑해, 디아.”

그 순간, 반은 디아가 이곳에서 눈을 뜬 모든 이유가 되었다. 본능을 거스르는 강렬한 힘에 이끌린 디아는 다시 그에게로 뛰어들어 사랑을 속삭이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 이유는 미소 띤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따스한 숨결, 뺨을 쓸어 주는 손길… 마침내 반이라는 존재 자체로 확장됐다.

***

반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눌러 감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디아와 부둥켜안고 뒹굴뒹굴하다가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이 덜 깨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데 디아가 없었다. 비척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난 반은 소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장을 세 개쯤 넘어가자 귀에서 수화기를 한 뼘 떨어뜨린 디아가 보였다. 인기척을 눈치챈 디아가 붉게 물든 눈꼬리를 살짝 접어 인사를 건넸다.

“누구….”

미소를 머금은 반이 말을 꺼내자마자 수화기를 타고 넘어온 신경질적인 비명이 널따란 공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떨어뜨린 디아는 한마디를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에는 소송만 십 년은 걸릴 거야.”

하품을 쩍 하며 디아에게 다가간 반은 그의 어깨에 무너지듯 기대었다.

“누가 감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우리 디아한테.”

“체마.”

“…아. 그 기사?”

디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 고요하던 전화기가 또 한 번 울렸다. 디아는 몇 초 기다린 후 수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이번에는 비명 없이 조용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디아는 몇 번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수화기를 내려 두었다.

그는 궁금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반과 눈을 맞추더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불그스름한 입술이 둥글게 휘어지며 오래도록 자취를 감추었던 예쁜 미소가 피어났다.

***

반은 손을 쫙 펼치고 손날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약지 정중앙에 위치하던 다이아몬드가 스리슬쩍 아래로 기울었다. 감탄이 터졌다. 알이 크면 무거워서 아래로 처진다더니 정말이었다. 반지 사이즈가 헐렁한 것도 아닌데 이것 참 신기한 일이라며 다시 손바닥을 기울일 때였다.

“안부 묻자고 불렀어?”

멍하니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리던 반은 반짝 정신을 차렸다. 제 앞에 놓인 화려한 찻잔이 눈에 들어오고 몸을 감싼 불편한 정장이 느껴졌다. 반지 알이 무겁니 어떻니, 딴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르네와 면담이 잡혔다기에 고집을 피워 정장을 차려입은 반은 어깨에 걸친 재킷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살짝 잡아당겼다. 깁스 때문에 착장부터가 고역이었던 정장이 온몸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반은 런던으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기사를 확인했다. 현재 미국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기사는 유튜브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 스캔들 당사자의 얼굴까지 만천하에 공개된 상태였다. 예상보다 훨씬 예민한 내용이어서, 반은 디아가 건네준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최근 체마가 인수한 회사 인사 담당자의 소셜 네트워크 계정과 지인끼리 주고받은 메시지가 스캔들의 주체였다. 해당 직원은 소셜 네트워크 계정에 인종 차별적인 글을 수십 차례 업로드했으며, 지인과의 메시지에서 특정 인종을 승진 과정에서 누락시켰다고 수차례 언급했다.

기사가 뜨자마자 불이익을 받은 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뷰에 등장해 피해를 토로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병상에서 뉴스를 확인한 체마는 극심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깜박 기절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체마가 인수한 회사가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이미지로 브랜딩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였던지라, 인사 담당자를 즉각 해고했음에도 한동안 몸살을 앓을 것은 자명했다. 사람만 자르면 끝난다던 디아의 태평한 소리와 달리 사태가 잠잠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징계 철회해. 안 그럼 체마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거야.”

기절했다가 깨어난 체마가 전화로 한바탕 욕설을 퍼붓다가 다시 기절한 후, 소식을 전달받은 르네가 디아를 호출했다. 디아는 이동 중 강제 연행을 시도할 시 곧장 다음 기사를 터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체마를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고, 디아의 고집을 꺾지 못한 르네가 한발 물러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르네와의 면담을 위해 이곳 런던까지 오게 된 것이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답지 않게 긴장한 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 이십 년쯤 후에.”

몇 시간 전만 해도 프러포즈를 받고 눈물을 펑펑 쏟아 냈던 디아는 쓰러진 체마를 인질로 잡고 르네를 협박했다. 어찌나 강경하고 집요한지, 곁에서 듣기만 하는 제가 다 질렸다.

반은 얼굴에 새겨진 주름마저 고아한 르네를 흘끔거렸다. 두 번째 만남인 만큼 처음보다는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순 오산이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르네는 디아나 웨인과는 사뭇 다른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눈이 하나 더 달렸다거나 입에서 촉수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직시하기 힘들 정도로 기이한 압박감을 주었다. 저런 르네에게 또박또박 대드는 디아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반은 씁쓸한 차를 찬물인 양 벌컥벌컥 들이켰다. 웃는 건지, 마는 건지 오묘한 표정으로 디아를 바라보던 르네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 이쯤이면 진심으로 궁금한데.”

“우리 결혼해.”

“큽…!”

디아의 거침없는 언사에 덜컥 사레가 들린 반은 기침을 토하며 찻잔을 내려놨다. 기침 소리가 들리자마자 상체를 휙 돌린 디아가 과한 걱정을 쏟아 내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반?”

소리가 새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은 반은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깁스한 팔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원래부터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저를 대하는 태도가 딴판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르네의 저 어처구니없다는 미소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을 디아만 몰랐다. 아니, 그에게는 알아보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반은 아예 제게로 돌아앉아 등을 토닥이는 디아의 무릎을 슬쩍 밀어 바르게 앉혔다.

금세 뚱한 표정으로 돌아간 디아는 르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반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 르네는 고삐 풀린 말처럼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디아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축약하여 확인했다.

“그러니까… 숙주와 결혼하겠다고 이런 일을 벌였다? 규칙까지 어겨 가면서.”

“응.”

디아는 깔끔하게 답했다. 결혼은 핑계고,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여겼던 르네의 의심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깔끔했다. 믿기 어려운 나머지 말을 잃은 르네는 손도 대지 않은 찻잔을 밀어냈다.

등골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눈알이 반을 훑고 갔다. 바짝 긴장한 반이 허리를 곧추세우자 테이블 위에 양팔을 겹쳐 올린 르네가 미묘한 말씨로 의사를 드러냈다.

“나라고 해서 네 선택에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지. 반 클라크가 숙주가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달리 말해 저들의 정체를 알기 때문에 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말뜻을 파악할 만큼의 눈치는 있는 반은 이 자리가 영 가시방석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을 사랑에 폭 빠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정식으로 교제 허가까지 받으러 온 몰상식한 남자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사실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다. 돈을 쥐여 주고 떼어 내려는 대신 죽이려 든다는 점이 다르기는 했지만.

“반이 너랑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택에 들어서기 전, 디아는 어떤 말도 할 필요 없고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고 그를 안심시켰지만 이래서는 진전이 없을 것이다. 숨을 얕게 들이마신 반은 디아를 대신해 나섰다.

“제 잘못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네 잘못이 어디….”

끼어들려는 디아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맞지 않은 옷처럼 어색한 설득에 나섰다.

“그렇지만 저는 제 할머니, 미셸과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었고…. 여러분… 께 해를 끼칠 능력도,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벌어 놓은 돈도 거의 없고, 머리도… 그렇게 좋지 않고, 능력도 없습니다. 디아가 위험할 일은 전혀 없을 겁니다. 디아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만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그…. 드리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르네에게 제 무능함을 미주알고주알 호소하고 있는가. 뒤 문장만 머릿속에 새긴 디아는 감격한 눈치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교제 허락을 받아 내러 온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제 존재가 그들에게 해롭지 않음을 필사적으로 증명하는 편이 좋았지만 자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돈 없고 머리 나쁘고 무능력한 도둑놈임을 제 입으로 인정한 반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마무리 지었다.

“저는 정말, 능력이… 없습니다.”

불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반은 지독한 회의감에 젖어 눈을 질끈 감았다.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고 싶었다. 디아의 눈알에 씐 콩깍지가 얼마나 두꺼운 건지 새삼 궁금해졌다. 아무리 제가 잘생겼기로서니 이런 말을 들으며 뺨을 붉히기란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반이 자책과 의문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릴 무렵, 검지로 팔목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 정리를 끝낸 르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미셸과 닮은 점이 조금도 없다는 건 잘 알겠어.”

탐색하는 시선이 반의 정수리를 지나 디아에게로 향했다. 제 숙주에게 푹 빠져 적과 아군을 분간 못 하는 어린 개체는 마치 반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날렵한 턱을 슬쩍 들어 올렸다.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 지은 르네는 굳이 걸러 낼 필요 없는 진실을 내뱉었다.

“숙주라는 걸 차치해도 받아들일 가치가 전혀 없어 보여.”

“좋아. 체마한테 마지막 인사나….”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양 벌떡 일어난 디아가 반의 손을 끌어당겼다.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인 반은 일어나지 않고 버티며 디아에게 다시 앉으라는 눈빛을 쏘았다.

“…반.”

눈썹을 구긴 디아는 꿋꿋하게 버티는 반과 눈싸움하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딱하게 꼰 다리와 흔들리는 발끝, 부루퉁한 표정에서 못마땅한 심기가 고스란히 배어났다.

최대한 부드럽게, 별 탈 없이 무난하게 해결하자고 디아를 어르고 달랬던 반은 제 언질을 모조리 잊은 남자의 손을 꼭 잡았다. 다 함께 죽어 보자는 디아의 계획은 최후의 보루였다. 반은 굳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믿음직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디아에 비해 많이 모자라지만…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피해 없이, 정말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허락 구하러 온 거 아니야. 죽은 듯이 살 필요도 없고.”

입 다물라는 의미로 투덜거리는 디아의 손을 꽉 쥐었다. 손을 맞잡은 채로 한숨을 폭 내쉬는 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르네가 손깍지를 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난처한 기색이 짙게 밴 푸른 눈이 디아에게 머물렀다.

“무슨 말을 하든 들을 의향이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갈라놓아 봤자 반감만 살 테고….”

“그럼 내가 여기 네 허락이나 받으러 왔겠어?”

“협박하러 온 거겠지. 체마가 불만이 많아. 일을 이렇게 벌였는데 수습할 방법은 있는지 궁금하네.”

“그래서 징계는?”

예의를 내다 버린 디아와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는 르네의 대화에는 반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다만 열심히 눈알을 굴려 상황을 살핀 결과, 일이 조금씩 풀리는 분위기였다.

르네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지만 디아의 고집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체마와 당신을 죽이고 결혼식을 올리고야 말겠다는 희한한 논리가 펼쳐졌다. 결혼 당사자인 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논리에 르네는 순간적으로 지친 표정을 보였다.

집요하기가 보통 수준이 아닌 디아에게 여러 차례 시달려 본 반은 르네의 고통을 진실로 절감했다. 곤란해하는 르네를 바라보는 눈에 슬며시 기대가 차오를 때였다. 푸른 눈과 딱 마주쳤다. 냉큼 미소 짓는 반을 쭉 훑어 내린 르네는 마침내 고대했던 답을 내놓았다.

“정 그렇다면… 당분간은 지켜보도록 하지. 내부 분열은 바람직하지 않으니까. 대신, 클라크가 문제를 일으키면 네가 책임져야 할 거야. 감시는 이쪽에서 하도록 하지.”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꺼림칙한 구석 없이 완벽한 허락은 바라지도 않았던 반은 긴장이 탁 풀린 몸을 늘어뜨렸다. 단지 디아의 감정을 수긍한 것뿐인 르네는 흐느적거리는 반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 그 감정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왜 반을 그딴 눈으로 봐?”

“디아….”

반은 이 악물고 디아를 진정시켰다. 아무리 의미가 모호해도 그렇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다가는 받은 것도 빼앗기는 수가 있었다. 일시적인 허락에 만족한 반은 르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자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면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징계는 물릴 수 없어. 규칙에 예외는 없어. 그게 누구라도.”

코웃음을 친 디아는 짜증이 담뿍 담긴 눈으로 르네를 노려봤다. 자신이 섬에 처박혀 있는 동안 그들이 반을 건드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오늘 런던까지 찾아온 이유는 그깟 허락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징계를 철회시키기 위함이었다.

“싫….”

“같이 가도 됩니까?”

곧장 거절하려던 때, 반이 냅다 끼어들었다. 고개가 곁으로 홱 돌아갔다. 의논한 적 없는 조건을 내민 반은 재차 헛소리를 지껄였다.

“제가 또 규칙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꼭 같이 가고 싶습니다.”

“반!”

반은 목청 좋은 디아의 손등을 살살 매만졌다.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뒤엎을 기세인 디아를 손 하나로 분주히 달래며 르네를 향해 뻔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히 그곳을 따라갈 생각이냐는 눈빛을 모르는 척하고 꺼낼 수 있는 패는 모조리 꺼내 놓았다. 제게는 낯간지러운 설득보다 뻔뻔한 억지가 차라리 잘 맞았다.

“제가 어디서 함부로 입 놀리고 다닐까 봐 불안하신 마음, 다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저 멀리 섬에 같이 처박아 두는 편이 여러모로 좋지 않겠습니까? 아, 이게 또 징계다 보니…. 그럼 저는 청소부 신분으로 가겠습니다. 도련님과 불순한 짓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하겠습니다. 참, 무급으로요. 함께 반성하는 심정으로 단 한 푼도 안 받고 청소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시키시는 일, 군말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노예로 대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다른 건 자신 없어도 체력과 성실함, 딱 두 가지만큼은 어디 가서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반은 제가 말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막힘 없이 늘어놓았다. 황당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디아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지었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디아가 반길 만한 조건을 슬쩍 끼워 넣었다.

“대신 결혼식과 신혼여행만 마칠 수 있게 해 주시면 정말,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는 낯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르네를 흘끔거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사랑에 눈이 먼 머저리처럼 보이길 바랄 뿐이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정도 수준일 줄은 미처 예상 못 했다는 듯이 눈을 스르륵 감았다가 뜬 르네가 이마를 손끝으로 짚었다. 부끄러움은 한순간이고 행복은 영원할 것이라고 속으로 수십 번 되새긴 반은 두 손을 모으고 다시금 중얼거렸다. 제발요.

***

섬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 길쭉한 소파에 널브러진 디아는 반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불평불만을 끊임없이 쏟아 냈다.

“말도 안 돼. 진짜 싫어. 다 짜증 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반은 무릎에 엎어져 어리광 부리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실없이 웃었다.

무슨 말을 한들 동행은 불가하다는 르네에게 빌고, 애원하고, 징계를 철회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네 머리부터 날려 버리겠다며 협박하는 디아를 달래서 타협점을 찾느라 진이 다 빠졌지만 애쓴 보람이 있는 결과를 얻었다. 끝내 동행을 허락받은 것이다.

대가로 디아가 순순히 징계 받도록 설득해야 했으며, 스캔들을 덮을 또 다른 스캔들을 터뜨려야 했고, 지속적인 감시에 동의해야 했지만 이만하면 만족스러웠다. 노발대발하는 디아를 말리느라 지쳤을 뿐이다.

반의 핸드폰 메시지는 왜 보느냐, 그건 나만 볼 거다, 하며 펄펄 날뛰던 디아는 둘만 남자마자 힘없이 늘어져서 지금 이 상태가 됐다. 본인이 꿈꾸던 신혼 생활이 제법 확고했는지 결혼식 준비 기간에다가 신혼여행 다녀올 시간까지 벌었음에도 내내 시무룩했다.

“그렇게 가기 싫어? 그래도 같이 가는 건데?”

고불고불한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묻자 디아는 품에 얼굴을 더더욱 깊이 파묻었다. 허리를 꼭 끌어안은 양팔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디아의 귓바퀴를 톡톡 건드리던 반은 장난스럽게 탄식했다.

“아, 알겠다. 나랑 가기 싫은가 보다….”

“그렇게 말하지 마.”

기분이 잔뜩 상한 디아는 불만이 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면 왜 이렇게 힘이 없냐, 당분간 두고 보겠다고 했으니 목적은 이룬 것 아니냐 물었더니 또 말이 없었다. 말하고 싶어지면 종알종알 알려 주겠지 싶어 그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손장난할 때였다. 무릎에 고개를 처박은 디아가 참았던 설움을 터트렸다.

“성에서 살고 싶다고 했잖아. 신혼은 성에서 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그딴 데서….”

황금빛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걸고 쭉 빗어 내리던 반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성? 웬 성. 내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디아의 고성은 다소 으스스해도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는 성이었지만, 여기서 살고 싶냐 묻는다면 솔직히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런 성은 관상용이지, 주거용은 아니었다. 값비싸면 마냥 좋아할 줄 아는 모양인데, 반도 취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제 취향이라고 하면 역시 말리부의….

“뭐?”

호화로운 별장을 채 머릿속에서 꺼내기도 전에 디아가 벌떡 일어났다. 단정하게 자른 금빛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남자는 싸늘한 낯으로 반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의 고성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목구비에서 으스스한 분위기가 피어났다. 허공에 뜬 손을 천천히 오므린 반은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머릿속을 헤집었다.

언제지? 대체 언제 이 예민한 남자에게 그런 말을 했지? 자문하고 또 자문하다가 마침내 까마득한 과거의 한 장면을 끄집어낸 반은 방금 눈치챈 티가 나지 않도록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게. 신혼은 성에서 보내야 하는데 너무 아쉽다.”

“방금 기억 못 한 것 같은데.”

“에이, 그럴 리가요….”

눈을 찡긋거리며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디아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피가 마르는 상황이었지만, 반은 이럴 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법을 잘 알았다. 냉큼 고개를 기울여 일자로 다물린 입술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놀란 듯 눈을 깜박이는 디아의 무릎 위에 다리를 은근슬쩍 얹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성에 살고 있었다고?”

무릎에 걸쳐진 반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쓰다듬던 디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뾰족하게 날 선 눈빛은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반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입꼬리를 내버려 둔 채로 순진한 남자의 온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턱부터 시작해 입술, 코끝, 양 뺨과 눈가에 입 맞추고 흉터 위에 입술을 누를 때였다. 뺨을 발그스름하게 붉히고 얌전히 키스를 받던 디아가 가슴을 밀어 냈다.

“…거기는 하지 마.”

손바닥에 실린 미미한 힘은 꼭 더 해 달라는 것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짓궂게 웃은 반은 흉터가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리는 디아를 소파로 넘어뜨렸다.

“하지 말라니까 더 하고 싶은데.”

그의 몸을 덮치듯 올라타서 흉터 위에 거듭 입을 맞추자 당황한 디아가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힘이 쭉 빠져 나풀거리는 손으로는 달려드는 반을 저지할 수 없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징그럽고 흉측한 흉터에 한 번, 두 번 닿을 때마다 새하얀 미간에 잡힌 주름이 사라지고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초승달 모양 흉터에 입술을 비비적거리던 반은 이내 작은 웃음을 터트리는 디아를 따라 킥킥 웃었다. 앞으로 살아야 할 곳이 취향에서 억만년 떨어져 있으면 어떠한가. 디아가 저를 위해 준비했다면 그곳이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더라도 한동안은 살아 줄 의향이 다분했다.

딱 한 가지, 인터넷만 된다면 말이다. 인터넷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기로 다짐한 반은 달콤하게 녹아내린 남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대체 어디 있는 섬이길래 이렇게 싫어하실까.”

“…그린란드.”

“그린란드? 어디 있는데?”

“조금 추운 곳에.”

디아는 그곳이 영 못마땅한 듯 한쪽 눈을 살포시 찌푸렸다. 반은 한 번쯤 들어 봤으나 자세히 알지 못하는 그린란드를 상상하다가 금방 관뒀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추워 봤자 얼마나 춥다고. 이래 봬도 춥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지역에서 자란 몸이었다. 만사태평한 반은 빙글빙글 웃으며 디아의 가슴을 깁스한 팔로 쓸어내렸다.

“그렇게 추우면 매일 붙어 있어야겠네. 르네 몰래.”

반이 의도를 담고 던진 문장은 디아의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분해되어 보다 음란한 것으로 재조립됐다. 아직 원하는 만큼 반을 만지고 파헤치지 못했던 디아는 은은하게 상기된 낯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싫지만….”

디아를 천박한 공상에 푹 빠뜨린 반은 지금 무슨 상상 하냐고 그를 놀리려다가 앞으로 덜컥 기울었다. 반사적으로 소파를 짚자 다리 사이로 두꺼운 허벅지가 밀려들어 왔다.

양팔로 반의 허리를 감아 일어나지 못하도록 옭아맨 디아는 욕망으로 인해 나지막해진 목소리로 반, 하고 불렀다. 무심결에 대답하자 턱을 들어 올린 남자가 입가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나 이제 이런 거 해도 돼?”

“어떤 거.”

디아는 대꾸 없이 목에 입을 맞추었다. 작은 점이 있는 목덜미에 입술을 슬쩍슬쩍 비비다가 쪽 소리 나게 빨아올린 남자가 허리에 얹은 손을 미끄러뜨렸다. 팽팽한 정장 바지에 감싸인 엉덩이를 가볍게 쓸어내리더니 허벅지 뒤쪽을 한 손으로 거머쥐었다. 그는 탄탄한 살점을 여유로운 손길로 주무르면서 셔츠 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이런 거는? 이런 거도 마음대로 해도 돼?”

디아의 품에 갇혀 일어날 수도, 엎어질 수도 없는 반은 간지러움을 못 이기고 키득거리며 입맞춤과 손길을 받아 냈다. 이러다가는 팔에서 힘이 빠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반은 정신없이 비비적거리는 디아의 이마에 키스를 되돌려 주고 팔꿈치를 바로 세웠다.

“전부 다 도련님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이것저것… 다.”

보통 끈질긴 것이 아닌 디아가 뻔뻔하게 꺼낼 요구가 뭘지 심히 걱정스러웠지만, 까짓거 이 한 몸 희생하자는 마음으로 어린 애인에게 위험한 말을 던졌다. 얼굴 근육 하나하나를 눈에 새길 것처럼 빤히 바라보던 디아가 턱을 들어 넥타이 매듭을 이로 물었다. 헐렁한 매듭이 풀리고, 흘러내린 넥타이가 디아의 가슴으로 떨어졌다.

“빨리 나아. 진짜 내 마음대로 할 거니까.”

셔츠 깃 사이에 코를 묻은 디아가 애달픈 목소리로 속삭인 순간, 반의 파렴치한 욕망에 불이 붙었다. 뼈 몇 개가 조금 박살 났다고 섹스 한 번 못 할 만큼 사람의 몸이 약할 리 없었다. 빠른 속도로 합리화를 끝낸 반은 승무원이 있는 갤리를 흘끔거린 뒤 몸을 바짝 낮추었다.

“이쁜아. 나 비행기에서 해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기색이 드리운 디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속삭이자, 말뜻을 이해한 녹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하지만 평소처럼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다. 많이 호전되었다고 한들 아직 보호대도 벗지 못한 반과 이러면 안 된다는 마음이 절반, 그럼에도 반과 몸을 겹치고 서로를 느끼고 싶은 마음이 절반씩 섞여 혼란스러운 감정이 대놓고 드러났다.

반은 조금만 더 찌르면 넘어올 기미가 엿보이는 남자의 허벅지에 제 하체를 문지르며 장난스럽게 애원했다.

“살짝만. 어?”

“…다 너 때문이야.”

완전히 넘어오기 직전, 귀여운 원망을 토해 낸 디아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의 무릎에 올라앉은 반은 덮쳐드는 입술을 받아 내며 디아의 재킷을 벗겼다. 허겁지겁 넥타이를 풀고, 셔츠를 벗겨 내는 디아에게는 언제나처럼 여유 따위 없었다. 반은 디아의 벨트를 끄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미안하지만, 이런 놈을 선택한 디아의 잘못이 컸다.

***

미셸의 부고가 들려왔다. 호스피스에 들르고 딱 열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대면할 날만을 기다렸던 듯 미셸은 수면 중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가 저지른 실험의 실체에 비해 자비로운 죽음이었다. 호스피스에 연락처를 맡겨 두었던 반은 소식을 받자마자 디아와 상의했고, 고민 끝에 시신을 수습해 미국으로 향했다.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미셸을 추모할 만한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거나, 죽기 전의 미셸처럼 잠적한 상태였다. 안면이 있는 고향 사람 몇몇과 예배를 드리고 하관식을 치렀다. 마지막까지 가족보다 연구가 우선이었던 미셸의 인생은 쓸쓸하게 마무리됐다. 본인은 죽음 후에 어떤 평가를 받든, 시신이 어떻게 되든 안중에도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조문객을 배웅하고 뒷정리를 얼추 끝낸 반은 일정을 조정해 장례식에 참석해 준 잭과 발맞추어 공동묘지를 나섰다. 미셸의 부고를 전하면서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잭과 전화로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래도 편하게 가셔서 다행이다. 그런데 어떻게 집이 불타냐?”

“그러게나 말이다….”

“원인이 가스 폭발이라고 했나?”

반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셸이 지하실을 은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방화를 저질렀다고는 할 수 없으니 가스 폭발이 가장 무난했다. 그동안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다, 요즘은 뭐 하고 사느냐, 팔은 어쩌다가 그렇게 됐느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며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잭이 뒤를 힐끔 돌아보고는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분은 누구셔?”

“…아.”

그때야 잭의 시선을 따라 뒤를 슬쩍 돌아본 반은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햇빛 아래서는 더더욱 환한 금빛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겨 이마를 드러낸 디아가 시선을 달가워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예배 때와 달리 표정이 밝았다. 정답게 웃어 준 반은 잭에게로 고개를 기울이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 결혼한다.”

뜻밖의 소식에 놀란 잭이 입 모양으로 ‘누구랑?’ 하며 물었다. 반은 고갯짓으로 디아를 가리켰다. 쟤랑.

경악한 잭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레 뜨였다. 그러잖아도 툭 튀어나온 눈알이 금방이라도 데구루루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잭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디아와 반을 번갈아 봤다.

“너 게이였어?”

“사람 인생은 알 수가 없더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 반은 손짓으로 디아를 불렀다. 줄곧 반의 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반을 지켜보았던 디아가 보폭을 넓혀 금세 다가왔다.

얼떨결에 단골의 장례식에서 친구의 예비 남편을 소개받게 된 잭은 디아를 코앞에서 마주하고 내심 놀랐다.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도 계속 눈길이 갔는데, 가까이서 보자 ‘그’ 반이 왜 난데없이 남자와 결혼한다고 선언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여기가 장례식장인지 영화 시상식인지 헷갈리게 만들 만큼 정장 핏이 훌륭한 몸매에, 짙은 선글라스로 얼굴 절반을 가려도 숨겨지지 않는 미모가 잭의 넋을 앗아 갔다.

도시에는 이런 남자들이 널렸나, 하며 샛길로 샌 잭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잭 스미스입니다. 이야, 키가…. 모델이신 줄 알았어요.”

무표정한 남자는 내민 손을 한 번 쳐다보더니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손을 스르르 내밀어 가볍게 악수했다. 아주아주 간결한 자기소개를 곁들여서.

“디아.”

“네?”

당황한 잭이 되묻기 무섭게 반이 끼어들었다.

“아, 이 친구가 외국인이라 영어가 살짝 서툴러.”

“오…. 어디서 오셨는데요?”

“프랑스.”

“선글라스는 왜….”

“햇빛에 약해.”

잭은 디아를 향해 질문했지만, 대답은 모조리 반이 대신했다. 잭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반은 웃으며 재차 답했다. 이 친구가 영어를 못해. 그럼 둘은 어떻게 대화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잭은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친구가 모델 같은 예비 남편과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 봤자 속만 시끄러울 테다.

잭과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진 반은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장례 절차며 사소한 것들까지 디아가 처리해 주었기에 사실 피곤할 일은 없었다. 다만 이제 고향에 올 이유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을 뿐이다.

새카만 세단이 앞으로 나아가며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공동묘지와 고향이 멀어져 갔다. 운전대를 잡은 디아가 핸들을 부드럽게 꺾으며 물었다.

“슬퍼?”

“전혀. 속 시원해.”

“나도.”

운전석을 돌아보며 웃음을 흘린 반은 품에서 반지를 꺼내 약지에 끼웠다. 워낙 알이 크고 화려해서 장례식 중에는 잠시 빼 두었더랬다.

“청첩장 보낼래.”

“응? 청첩장?”

“결혼식 청첩장.”

언제 봐도 영롱한 다이아몬드를 햇살에 비추며 디아와 말을 주고받던 반이 눈을 끔벅였다. 뻣뻣한 고개가 삐걱거리며 옆으로 돌아갔다. 반은 어딘지 모르게 들뜬 디아를 곁눈질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이서 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할 거야. 사람들 많이 불러서 전부 다 우리 축하하게 할 거야.”

몹시도 단호한 대답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튀어나왔다. 녹안에 비치는 감정은 설렘보다는 집념에 가까워서 감히 말을 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르네를 설득할 때 시간을 벌고자 결혼식을 올리겠다고는 했지만 정말 식을 올릴 거라고는 전혀, 조금도 생각 못 했다. 혹여나 진행한다고 해도 교회에서 반지를 교환하거나, 정원을 꾸미고 결혼식 흉내나 낼 줄 알았는데 디아는 그런 간소한 결혼식을 꿈꾸는 눈이 아니었다.

그가 어릴 때 함께 본 숱한 로맨스 영화에 나왔던, 징그러울 정도로 화려한 결혼식이 눈앞을 스치며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낯빛이 차차 창백하게 질렸다. 반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공허한 감탄을 흘렸다.

“와, 너무 기대된다….”

“나도 그래. 준비할 시간만 많았으면 더 완벽했을 텐데….”

아직 식을 올리지도 않았으면서 아쉬워하는 디아의 발언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대체 저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결혼식을 꿈꾸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지만 제발, 제발 자신의 상식 안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

활짝 열어 둔 창 너머에서 바다를 건넌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만개한 꽃향기를 머금은 봄바람이 피팅 룸으로 변한 응접실을 한차례 휩쓸었다.

날씨가 완벽한 5월의 봄, 반은 결혼식 당일을 맞아 위아래로 새하얀 슈트를 걸치고 몸을 단장하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흰색 웨딩 슈트를 입어야 한다는 디아의 고집하에 디자인부터 재봉까지 몇 차례나 확인을 마친 슈트는 불편한 곳 없이 몸에 꼭 맞았다. 간단한 영어 몇 마디만 할 줄 아는 디자이너에게 아주 완벽하다고 손짓할 때였다.

“이야…. 일자리 꽂아 줬더니 고용주 꼬시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걸레 청산을 이런 식으로 하네.”

“몇 개월 만났다고 벌써 결혼이에요? 여기 사람들은 다 이러나? 대단해요, 클라크 씨.”

“네 부자 약혼자는 아냐? 너의 그 화려한 과거를.”

들러리를 해 달라고 불렀더니, 아비게일과 제인은 각자의 말투로 이 상황을 옹골차게 비꼬았다. 처음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부터 사기를 의심한 두 사람다웠다. 반은 거울을 통해 소파를 차지한 두 사람을 훑었다. 프랑스의 외딴섬에 도착한 지금까지도 의심을 내려놓지 못한 티가 물씬 났다. 반은 머리 손질을 한 번 더 받으며 거만하게 대꾸했다.

“과거는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 자기는 다 너그럽게 이해해 준다고.”

너그러운 이해는 무슨, 말만 나올라치면 온종일 성질을 부리고 침대에 엎어져 우울해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이유는 없었다. 반의 거짓 자랑에 탄식한 아비게일이 고개를 내저었다.

“난 처음에 사긴가 했어. 근데 보니까 네가 사기를 쳤네. 야, 불쌍해서 어떡하냐? 이런 성까지 빌려서 결혼하는데, 심지어 일곱 살이나 많은 놈이랑. 와…. 내 가슴이 막 찢어진다.”

“아까 잠깐 봤는데 어디 모자라는 데가 없던데요…. 어쩌다가 반이랑….”

“뭐 하는 사람이랬지?”

“피아니스트. 상속받은 재산이 어마어마하대요.”

“…이거 진짜 사기 아니냐? 내가 진짜 걱정돼서 이런다.”

반은 하하 웃으며 아비게일과 제인이 나누는 대화에 추임새만 보탰다. 정확히는 7살 연하가 아니라 28살 연하고, 피아노 치는 모습은 본 적도 없고, 결혼식을 위해 빌린 성이 아니라 실제로 거주하는 성이고, 딱 하나 맞는 것이 있다면 막대한 부를 상속받았다는 것뿐이지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결혼 소식을 알릴 때 걸림돌이 되었던 것도 이것이었다. 디아는 반이 직접 지어 준 ‘아르카디아’라는 이름으로 식을 올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새로운 신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 르네는 여기까지 징계를 미룬 것도 특혜라며 더는 시간을 내어 줄 수 없다고 단호히 못 박았다.

누군가의 목숨을 건 협박이 오갔지만 이번만큼은 르네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결국 디아는 그가 가진 일곱 개의 신분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선택된 신분이 제인에게 의뢰할 때 사용한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은 피아니스트’였다. 참고로 피아니스트는 형식상의 직업일 뿐 부잣집 도련님이 취미로 뚱땅거리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어서 첫 만남과 연애사도 모조리 꾸며 내야 했는데, 이때는 머리를 쥐어짜 낼 필요가 없었다. 디아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의 일에 조미료를 살짝 섞으면 그만이었다.

주인공은 대인 기피증이 있는 예민한 도련님과 타국에서 온 고용인. 적극적이고 쾌활한 고용인이 굳게 닫힌 도련님의 마음을 두드렸고 언어와 국적을 초월해 결국 사랑에 빠졌다는, 그럭저럭 로맨틱하고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반은 디아를 가엽게 여기는 두 사람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며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

미셸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자마자 웨딩 플래너를 만났다. 이 분야에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라고는 하는데, 외국의 유명 웨딩 플래너까지 꿸 만큼 결혼에 관심이 지대하지 않았던 반은 대부분의 결정을 디아에게 맡겼다.

반의 성정을 잘 아는 디아는 그에게 참여를 요구하지 않았다. 배려한 것은 아니고, 방해 없이 꿈의 결혼식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컸을 것이다. 결혼식 준비에 한창이던 어느 날, 반의 무릎에 엎어진 디아가 불만을 토로했다.

‘시간이 너무 모자라….’

‘넉넉하지 않나? 5월에 하고 싶다며.’

‘고작 4개월밖에 없어.’

‘4개월이 고작이야?’

‘고작이지. 보통 1년 이상 잡아. 원래 내년 5월에 올리려고 했는데 개같은 징계 때문에….’

말버릇이 제법 험해진 디아가 이를 갈았다. 성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섬 해변에서 식을 진행할 예정이라 식장을 따로 알아볼 필요가 없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반은 얼마나 대단한 결혼식을 꿈꾸기에 이러나 싶어 픽 웃으며 디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은 전혀 몰랐다. 그때 디아를 말려야 했다고 땅을 치고 후회하는 미래가 다가올 줄은.

디아가 눈코 뜰 새 없이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반에게 주어진 일거리는 단순했다. 슈트 가봉 때 몸을 대 주거나, 12개의 케이크 중 세 가지를 고르거나, 식사를 맛보고 마음에 드는 메뉴를 고르는 것이 전부였다. 결혼식 준비도 꽤 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느긋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대망의 그날이 다가왔다.

‘명단 작성만 해 줘. 내가 청첩장 보낼게.’

‘아, 명단…. 그렇지. 그런데 여기가 멀어서 올지 잘 모르겠다.’

‘경비는 내가 부담할 거야. 동반 참석도 상관없으니까, 자.’

디아는 핸드폰을 건네주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객들에게 대접할 디저트를 맛보던 반은 목구멍에 걸린 마카롱을 억지로 삼키고 뒤를 쫓았지만, 어찌나 바쁜지 그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다디달아서 쓰기까지 한 입 안과 비슷한 기분을 안고 방으로 돌아온 반은 오랜만에 펜을 들었다. 충전이 끝난 핸드폰을 곁에 두고 하객 명단을 작성하려고 했지만 첫 줄부터 막혔다. 하객 초대에 동반되는 문제를 새카맣게 잊고 있던 반에게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경비를 전액 부담한다니. 자신이 디아의 재산을 축내는 건 상관없지만, 남이 디아의 재산을 축내는 꼴은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거기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전부 불러 모아 요란한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꺼려졌다.

딴마음이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니고, 살짝 부끄러웠다. 새하얀 웨딩 슈트를 입고 경건하게 혼인 서약을 읊는 제 모습을 상상하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괜찮았다.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지.

밤새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한 반은 딱 여섯 명을 골라 명단을 작성했다. 기왕 부른다면 진심으로 이 결혼을 축하해 줄 소수의 지인만 부르고 싶었다.

디아를 만나게 해 준 아비게일과 제인, 장례식에 참석해 준 잭, 펍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준 줄리아와 드류, 링크 후유증으로 고생할 때 가장 오래 거처를 제공해 준 다니엘. 사실 그간 도움 받은 사람들이 한 트럭이었지만 하나둘 끼워 넣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아 여섯 명만 부르기로 했다.

다음 날, 명단을 넘겨받은 디아는 여섯 줄을 읽고 또 읽다가 넌지시 물었다.

‘이게 끝이야?’

‘어. 한번 물어봐야겠지만 대부분 온다고 할걸?’

간밤 머리를 하도 굴린 탓에 눈치를 깜빡한 반이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고작 여섯 명밖에 없는 하객 명단에서 시선을 떨어뜨린 디아의 표정을 마주하고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나랑 결혼하는 거 알리기 싫어?’

음산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성이 흘러나오자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식 준비에 매진하는 동안 기분이 오락가락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 들떠 있던 디아의 심기가 완전히 뒤틀렸다. 화사한 낯에 시꺼먼 먹구름이 드리우는 광경을 목격한 반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리야!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비행깃값이 얼만데 그걸 네가 다 부담하면 내가 좀 그렇잖아. 미안하고. 응?’

‘핑계 대지 마. 알리기 싫은 거지? 사실 나랑 결혼하기 싫은 거지?’

이토록 황당한 소리가 또 있을까.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린 반은 한 소리 하려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디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릴 기세인 남자를 이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반은 시무룩한 디아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얼른 제 실수를 사과했다.

‘아냐. 미안해. 다시 짤게. 줘.’

‘적어도 서른 명은 불러. 그래야 네가 유부남이라고 소문나지.’

손바닥 뒤집듯 안색을 싹 바꾼 디아가 명단을 돌려주었다. 디아의 서럽고 불쌍한 척에 홀라당 속아 넘어간 반은 허리에 손을 얹고 가증스러운 남자를 노려봤다. 이제 불쌍한 척도 자유자재로 하느냐며 빈정거리려는데, 머릿속에 입력된 그의 한마디가 뒤늦게 뒤통수를 때렸다.

‘잠깐만, 디아. 한 명당 천 달러로 잡아도 서른 명이면 돈이 얼만데….’

심지어 천 달러도 최소로 잡은 금액이니 결혼식에 막대한 기대를 품은 디아가 인당 천 달러로 끝낼 리가 없었다. 반은 절대 안 된다며 딱 10명으로 합의하자고 주장했으나 디아는 확고했다. 무표정일 때는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쌀쌀맞은 인상의 미인이 조곤조곤한 어조로 몰아붙였다.

‘반이 고를래, 내가 고를까?’

이건 협박이었다. 제 뒷조사를 한 것이 틀림없는 디아가 누구를, 또 몇 명을 부를지 감도 잡히지 않았던 반은 마지못해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고를게. 서른 명….’

원하는 답을 갈취한 디아는 그때야 표정을 풀더니 키스 세례를 퍼붓고 떠났다. 방을 나서는 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반은 디아의 중력을 죄다 떠맡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마른세수했다.

반은 무려 사흘간 지인 목록을 추리고 추려 섬에 초대할 서른 명을 골라냈다. 하객 조건은 까다로웠다. 개방적이고,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성격에, 저와 과거에 어떠한 기류도 없던 사람이어야 했고, 무엇보다 쓸데없는 입방정을 떨지 않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지인을 대거 걸러 낸 반은 마침내 하객 명단을 완성해 디아에게 제출했다.

만족한 디아가 명단을 접수한 지 대략 한 달 뒤, 반은 문자와 전화 폭탄으로 마비된 핸드폰을 뒤집어 두어야 했다. 제 방에서는 신호가 안 잡히길 천만다행이었다. 지인들의 질문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막막해진 반은 침대로 뛰어들어 발을 동동 굴렀다. 동반 1인까지 참석 가능하다고 고지한 디아 때문에 하객이 두 배로 불어난 것을 모를 때였다.

반의 수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식이 2주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식장이 완성되어 간다는 소식에 마무리가 한창인 해변에 얼굴을 내민 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부들이 몇 달간 섬에 들락날락하는 것은 알았지만 웨딩 아치 정도 설치하겠거니 했지, 고개를 꺾어서 올려다봐야 하는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반은 넋을 놓고 새하얀 건축물을 바라봤다. 신전을 연상케 하는 여섯 개의 대리석 기둥이 돔 형태의 지붕을 떠받치고, 기둥 사이로 보이는 푸른 바다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름다웠다. 분명 아름답기는 한데….

‘엄청… 화려하다….’

‘시간이 없어서 적당히 했어.’

‘적당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과했다. 솔직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지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특히 아비게일의 시선을 받으며 저 성스러운 기둥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상상을 하자 숨이 턱 막혔다. 평생의 놀림감이 되고도 남았다. 입을 틀어막았다가 건조한 얼굴을 쓸어내린 반은 성을 가리키며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정원도 좀 바뀐 것 같은데….’

‘손봤어. 간단히.’

디아에게 ‘간단히’라는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졌다면 얼마나 성대한 결혼식을 만들려고 했던 걸까. 반은 이 성대한 분위기를 아주 살짝 덜어 내 보자고 애원하려다가 디아의 표정을 보고 포기했다.

디아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한없이 반짝이는 녹안이 행복한 감정을 한껏 표출하고 있었다. 곁을 돌아본 디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반은 한숨을 내쉬며 웃어 주었다. 예쁘네, 하고 감상을 전하자 피할 틈 없는 키스가 쏟아졌다. 이마를 마주 댄 디아는 코끝을 비비며 속삭였다.

‘정말 예쁠 거야.’

이렇게 좋아하는데 별수 있나. 다 맞춰 주는 수밖에. 반은 다 포기했다. 쓸모없는 수치심과 자존심을 내려놓자 이윽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

그렇게 다사다난한 4개월을 보내고, 비로소 결혼식 당일이 밝았다. 모든 준비를 끝낸 반은 시간을 확인한 후 아비게일과 제인을 내보냈다. 실컷 떠들었으니 이제 일할 시간이었다. 이 결혼에 지대한 의문을 품은 들러리들을 내보낸 반은 사탕을 하나 집어 먹었다. 이른 오전부터 속속들이 도착한 지인을 맞이하느라 바닥난 체력을 보충하고 방을 나섰다.

발소리가 울리는 홀로 나가자 같은 디자인의 새하얀 웨딩 슈트를 걸친 남자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을 끄는 몸매를 가진 남자는 약지에 걸린 다이아 반지를 매만지며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반은 깊은 상념에 빠져 저를 발견하지 못한 디아를 향해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등 뒤까지 다가갔음에도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하는 남자의 귓가에 슬며시 속삭였다.

“마엘 푸생 씨. 준비됐어요?”

어깨를 움칠거린 디아가 뒤를 돌아봤다. 저를 부른 사람을 확인한 디아의 표정이 금세 퉁명스러워졌다.

“그렇게 부르지 마. 내 이름 아냐.”

“왜요? 이름 예쁜데요, 마엘 푸생 씨.”

“반.”

“알았어, 디아.”

재미없는 장난을 그만둔 반은 곱게 단장한 디아를 쭉 훑어 내렸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넘겨 고운 이마를 드러낸 디아의 눈가에는 흉터가 없었다. 초승달 모양 흉터를 화장으로 가린 남자는 눈을 떼기 힘들 만큼 화사한 미모를 자랑했다. 예비 남편을 슬쩍 보고 온 지인들이 감탄을 쏟아 내고 갈 만했다. 반은 새삼 뿌듯해져 제가 키운 남자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와…. 내가 이렇게 예쁜 남자랑 결혼해도 되나.”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어깨를 툭툭 털어 주며 칭찬하자 디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부끄러워하는 모양새였다. 어릴 때는 뻔뻔하기가 양육자 못지않더니, 지금은 흉터를 가리고서도 칭찬이 낯선 듯했다. 어떻게 그를 뻔뻔한 남자로 되돌릴지 고민하는 새, 디아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게 접은 종이를 꺼냈다.

“예식 때는 이런 얘기 못 하니까… 지금 할게.”

“뭔데?”

“…편지.”

디아는 얼마나 세게 눌러썼는지 뒷장이 우둘투둘한 편지를 펼쳤다. 슬슬 입장할 때였지만 반은 영어에 서툰 프랑스인을 연기해야 하는 디아를 위해 시간을 주기로 했다. 하객들의 기다림이야, 공짜로 해외여행 왔으면 온종일 기다려도 됐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펼쳐진 화려한 정원을 흘끔 살핀 반은 옷매무새를 다듬은 다음 디아를 마주하고 섰다.

“좋아. 나 준비됐어.”

기특하게 편지까지 써 온 디아를 향해 장난스럽게 고갯짓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목을 가다듬은 디아가 첫마디를 뱉었다.

“반에게. 난 우리가 결혼하는 날이 올 줄 알았어.”

반은 첫마디에 웃음을 왈칵 터트렸다. 뻔뻔한 면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듯했다. 디아의 날카로운 눈빛에 가까스로 웃음을 가라앉힌 반은 얼른 말해 달라는 뜻을 담아 손을 까딱거렸다. 다시 눈을 내리깐 디아는 차분하게 편지를 읽어 내렸다.

“오래 꿈꿨어. 네가 나를 깨웠을 때부터…. 함께 영화 보고, 샌드위치를 만들고, 같이 잠들고 아침에 같이 일어날 때, 난 이런 하루하루가 끝나지 않았으면 했어.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내가 나아갈 길이 어떤 방향인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너와 함께하고 싶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았어.”

디아는 다음 문장을 앞두고 숨을 들이마셨다.

“네가 엉덩이 가벼운 거, 나도 잘 알아. 심심할 때마다 사람 갈아 치우는 것도 잘 알고, 가볍게 굴다가 중요할 때 회피하는 것도 잘 알아.”

“큼….”

반은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했다. 첫마디와 달리 제법 감동을 준다 싶더니 따끔한 공격이 날아왔다. 흘깃 눈을 들어 시선을 맞춘 디아가 낭독을 이어 갔다.

“그렇지만, 반. 너는 처음부터 내 전부였고, 끝까지 전부일 거야. 내가 말했지. 네가 슬프면 바로 가서 안아 줄 수 있고, 외로우면 같이 있어 줄 수 있다고. 지금은… 어려워. 난 이제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몰라. 그래서 가끔은 죽고 싶지만….”

귀를 기울이고 낭독을 듣던 반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다물었다. 앳된 티가 물씬 나는 소년의 설렘 가득한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소년의 고운 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남자는 구깃구깃한 편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반으로 접고 눈을 맞추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절을 연상시키는 푸르스름한 녹안은 어느 때보다 강한 확신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달라.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어. 맹세할게. 나는 널 슬프게 하지도, 외롭게 하지도 않아. 우리가 함께 있으면…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못해.”

어느새 미소를 걷어 낸 반은 부유하는 삶을 살았던 제게 확실한 미래를 약속하는 디아를 응시했다. 일순 수십 년간 저를 불안하게 했던 것들, 외롭게 했던 것들, 괴롭게 했던 것들이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겪은 고난처럼 느껴졌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익숙해진 그가, 제 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수상한 생명체가 무거운 맹세를 입에 올렸다.

“맹세해.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학을 떼고 도망가야 할 무거운 맹세가 로맨틱한 고백으로 들리는 걸 보면 저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반은 시선을 떨어뜨리며 자그마한 웃음을 터트렸다. 혼인 서약을 식장에 들어서기 전에 하게 될 줄이야.

반은 한 걸음 만에 거리를 좁히고 디아의 뺨을 감싸 쥐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고개를 기울여 선물처럼 찾아온 수상한 생명체에게 입을 맞추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충만한 애정이 입술을 통해 몸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감았던 눈을 뜨며 입술을 떨어뜨린 반은 긴장이 엿보이는 남자에게 거짓 없는 진심을 던졌다.

“맹세할게, 디아.”

디아의 곧은 눈썹이 움찔거리더니 서서히 일그러졌다. 반은 또 눈물을 쏟아 내려고 하는 감성적인 남자의 손을 낚아채고 몸을 틀었다. 아직 식도 올리지 못했는데 예쁜 얼굴이 부으면 안 될 일이었다.

“가실까요?”

“…응.”

맞잡은 손을 이끌어 성 밖으로 나오자 식장까지 이어진 길이 펼쳐졌다. 본인의 결혼식에 지각하게 생긴 반은 디아와 함께 드넓은 정원을 내달렸다.

새하얀 꽃으로 장식한 가든 아치를 통과해 해변으로 달려가자 따스한 바닷바람이 뺨을 스쳤다. 공들여 단장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새하얀 구두에 흙이 묻었지만 다리는 날듯이 가벼웠다. 숨이 가빠도 즐거운 웃음은 멎지 않았다.

어디선가 입장곡으로 고른 음악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드디어 주례와 하객이 기다리는 야외 식장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천과 그보다 더 하얀 꽃으로 성대하게 장식한 돔이 새파란 하늘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같은 곡을 반복하면서 두 신랑을 기다리던 하객들이 꽃잎이 뿌려진 길 끝에 도착한 주인공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준비된 꽃잎이 사방에서 흩날리며 요란한 환호가 쏟아졌다.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잭, 갑자기 웬 결혼이냐며 섬에 도착하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온 줄리아와 드류,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라며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리는 다니엘, 축하하는 마음만을 안고 이곳까지 온 수많은 지인에게 손을 흔들어 준 반은 디아와 동시에 한 발을 내디뎠다.

반대쪽 하객석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를 슬금슬금 피하던 고용인들이 본뜬 듯한 미소를 띠고 손뼉 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줄에는 흐릿한 금발을 단정하게 넘긴 일라이가 고상한 미소로 축하를 건넸다. 상반되는 하객들을 보며 시원한 웃음을 터트린 반은 디아와 함께 또 한 발자국 나아갔다.

돔에 가까워질수록 들러리를 맡은 아비게일의 지친 표정이 또렷하게 보였다. 1분이라도 늦었으면 반지 케이스를 내던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짜증을 꾹 참고 기계적으로 환호하는 아비게일과 마냥 즐거운 제인, 은은한 미소를 띠고 반기는 엠마와 맥에게 차례로 시선을 준 반은 마지막으로 곁을 돌아봤다.

너무나 고대했던 순간을 맞닥뜨린 탓인지, 정작 이 결혼의 주인공은 살짝 굳어 있었다. 반은 계단을 오르기 전 고개를 기울여 작게 소곤거렸다.

“웃어 줘. 좋은 날이잖아.”

시선이 마주친 디아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웃지 않아도 아름다운 남자이지만 웃으면 더더욱 아름다운 남자를 향해 애교스럽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응? 이쁜아.”

“…사랑한다고 해 줘.”

찌푸려졌다가 펴지는 콧잔등을 바라보던 디아는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불안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긴장과 고백이 무슨 상관인지 영 모르겠지만, 반은 사랑스러운 남자에게 애정 어린 고백을 속삭였다.

“사랑해, 디아.”

그 한 마디는 마법과도 같았다. 불안을 머금은 눈꼬리가 아주 서서히 가늘게 휘었다. 겨우 편안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게 된 입매가 벌어지며 고른 이가 드러났다. 새하얀 뺨이 봉긋 솟아오르고 온 정신을 앗아 가는 맑은 웃음소리가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그와 헤어지기 전, 호수에서 보았던 그때 그 미소가 다시금 활짝 피어났다. 긴 시간을 거슬러 싱그러운 소년으로 돌아간 디아는 불안 따위 없는 낯으로 환히 웃었다.

서로에게 영원을 맹세한 디아와 반은 손을 단단하게 맞잡고 마지막 걸음을 옮겼다.

***

“…그쪽에 청첩장을 돌렸다고?”

“응. 일라이만 왔지만.”

“체마한테도?”

디아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하면서, 심지어 모가지를 틀어쥐고 협박했던 상대에게까지 청첩장을 돌린 디아의 사고방식을 반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올 줄 알았던 걸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한 웨인에게까지 생각이 닿았다. 설마 그놈에게도 돌렸냐고 묻고 싶었지만, 놈의 이름은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화만 부르는 호기심을 눌러 앉힌 반은 내심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지금 살아 있는 그… 너같이 높은 사람, 그분들은 몇 명이야?”

“일곱 명. 원래 여덟이었는데 나 근신할 때 하나 죽었다고 들었어.”

반은 손가락을 꼽으며 머릿수를 셌다. 디아, 웨인, 일라이, 체마, 르네. 제가 모르는 얼굴은 둘이었다. 그들이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얼굴을 알아 봤자 죽을 이유만 늘어나는 셈이기에 괜한 호기심은 품지 않는 편이 좋았다. 팔짱을 끼고 짧게 고민한 반은 팔걸이 너머로 고개를 기울였다.

“일라이랑 친하게 지내. 착한 것 같더라.”

결혼식에 참석한 것뿐만 아니라 따로 찾아와 축하한다는 인사까지 건네는 성품이라면 디아의 친구로 두기 딱 좋았다. 그러나 브로슈어를 들여다보던 디아는 권유를 냉정하게 잘라 냈다.

“싫어. 너랑만 친할래.”

“아직 애기야? 응?”

함박웃음을 지은 반은 냉큼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꼬집었다. 어릴 때만큼 손에 한 움큼 잡히는 느낌이 없어 아쉬웠지만 볼이 쭉 늘어난 모습은 충분히 귀여웠다. 양손으로 그의 뺨을 꼬집고 얼굴을 살살 흔들자 뾰족한 시선이 꽂혔다. 눈을 가늘게 좁힌 디아가 예고도 없이 되바라진 발언을 터트렸다.

“너는 잘도 그 애기랑….”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은 반은 통로로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어색한 눈인사를 건넸다. 친절한 미소를 띤 승무원이 지나가고 나서야 디아를 홱 돌아봤다. 밖에서 그런 말은 조심하라는 눈빛을 보내고 손을 떼어 내자 디아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조용히 속삭였다.

“애기랑 하는 것치고 매번 너무 좋아하시던데.”

반은 사람 곤란하게 하는 말솜씨가 남다른 디아를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릴 때부터 기미가 있었지만 최종의 최종을 거친 지금은 시시때때로 반의 말문을 턱턱 막고는 했다. 받아칠 말을 찾지 못하고 신음한 반은 그의 턱을 검지로 툭 건드렸다.

“…왜 이렇게 자랐지?”

“네가 이렇게 키웠으니까.”

“그렇기는 하지.”

그렇게 말한다면 또 할 말이 없었다. 디아의 되바라진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반은 주위를 힐끔 둘러보고 손을 뻗었다. 남자의 탄탄한 허벅지에 턱 손을 얹고 선명한 근육을 주무르듯 매만졌다. 손가락 끝이 닿자마자 바짝 긴장해 힘을 머금은 허벅지를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비행기가 좋긴 좋았는데….”

그 한마디에 전용기의 이점을 이용해 가졌던 즐거운 한때를 떠올린 디아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무엇을 상상하는지 반의 손등을 손바닥으로 덮고 한참 주무르던 디아가 부루퉁한 표정이 되어 속내를 털어놨다.

“짜증 나. 도착할 때까지 계속할 수 있었는데, 이딴….”

“‘이딴’이라니. 난 좋아 죽겠는데.”

반은 실실 웃으며 골이 잔뜩 난 디아를 놀렸다. 잔뜩 찌푸린 눈으로 노려보더니 허벅지에 얹은 손을 휙 가져간 디아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짜증을 억눌렀다. 디아가 이토록 불만스러워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결혼식이 끝나는 즉시 르네가 소소한 제재를 가했다. 잠적을 대비하기 위해 전용기 사용과 엠마를 비롯한 사용인과의 연락을 금지한 것이다. 서로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그들이었지만 규칙을 어긴 개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당시 결혼식 준비로 마냥 들떠 있던 디아는 르네의 경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버렸다. 디아가 따져 묻지 않음으로써 제재는 착착 진행되어 신혼여행지로 갈 때는 국적기를 이용하고, 열흘간의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공항에서 연행될 예정이었다.

전용기는 금지에, 목적지까지 가는 항공편에 일등석이 없어 비즈니스를 이용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딱딱하게 굳던 디아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비즈니스도 감지덕지하는 반은 못 본 새 어마어마한 도련님이 된 디아가 신기해서 한참 웃었더랬다.

“그래도 결혼식 진짜 재밌었어. 다들 엄청 좋았다고 연락 많이 왔거든. 봐.”

반은 미처 답장 못 한 문자가 한가득 쌓인 핸드폰을 흔들었다. 디아의 바람대로, 이 정도 결혼식이라면 소문이 안 나고는 못 배겼다. 하지만 디아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지 시무룩한 낯으로 돌아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더 크고 예쁘게 할 수 있었어.”

“결혼식이 이거보다 더 크면 그게 축제지. 고생 많았다, 우리 이쁜이.”

보드라운 머리칼에 뺨을 비비며 서운해하는 남자를 달래자 새하얀 손가락이 꾸물꾸물 올라와 손을 꼭 붙잡았다. 왼손 약지를 두른 심플한 웨딩 링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에게 손을 맡긴 반은 피로에 전 몸을 좌석에 늘어뜨렸다.

디아가 심혈을 기울인 결혼식은 성황리에 끝났다. 새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얼룩이 묻을까 봐 겁날 정도로 새하얀 천이 나풀나풀 휘날리고, 화원 열 몇 군데는 거덜 낸 듯 해변을 빼곡하게 장식한 하얀 꽃이 짙은 향기를 퍼뜨리는 야외 식장은 언뜻 천국을 연상시켰다. 웨딩 슈트부터 시작해 하객 드레스 코드까지 화이트였으니 말 다 했다.

아비게일은 이딴 환상적인 결혼식은 끔찍하다며 몸서리쳤지만, 하객들의 만족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개개인 맞춤으로 서빙된 끝내주는 요리, 끝없이 펼쳐진 바다 한가운데서 즐기는 선상 파티, 별처럼 수놓아진 작은 조명 아래서 즐기는 왁자지껄한 피로연,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고성에서의 하룻밤을 맘껏 즐긴 하객들은 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디아에게 납작 엎드리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하고 갔다.

그리고 디아는 영어에 서툰 사회성 없는 도련님 연기를 완벽하게 해냈다. 실은 연기라고 할 것도 없이 본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의 재력이 까칠한 성격을 매력으로 포장했다. 영어에 서툰 설정이었으니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아도 어색하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덤으로 디아의 하객 역할을 맡은 사용인들도 죄다 영어에 서툰 척을 해서, 그들과 대화하고자 쩔쩔매는 지인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상당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멀리서 찾아온 하객을 배웅하는 날, 아비게일은 상시 사기를 조심하고 가급적 재산을 많이 빼돌려 두라며 당부했고, 줄리아와 드류는 영상 통화 자주 걸겠다며 행복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전했고, 다니엘은 장하다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온전한 축하를 받는 날은 반의 생에 거의 없다시피 해서, 피로를 까맣게 잊을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기대는커녕 걱정만 그득했던 결혼식에서 많은 것을 얻은 반은 곧 출발한다는 기내 방송을 듣고 디아의 안전벨트를 점검했다. 제 안전벨트를 조인 후 다시 손을 그러쥐자 따뜻한 체온이 온몸으로 퍼졌다. 옅은 상처가 남은 디아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며 이륙을 기다리던 반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비행기 모드로 돌리기 직전, 액정 위를 빙글빙글 맴돌던 엄지가 검색창으로 향했다.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해소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공백 안에 알파벳을 입력하자 자동 검색어가 주르륵 떴다. 그중 제일 상단에 위치한 것을 누른 반은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는 정보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한 페이지당 글자가 너무 빼곡해서 굵게 표시된 단어만 쏙쏙 뽑아냈다. 반은 두루뭉술하게 느껴지는 단어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지금껏 아무런 생각 없이 불렀던 남자의 이름을 색다르게 만드는 단어였다.

아르카디아. 이상향 혹은 낙원.

단어를 곱씹던 반은 비행기 모드로 돌린 핸드폰을 집어넣고 곁을 돌아봤다. 브로슈어를 마저 읽던 디아가 곧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신기할 정도로 예민한 남자였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화자찬했다.

“내가 이름 하나는 잘 지은 것 같아서. 이런 데 재능 있나 봐.”

정확히는 미셸이 지은 작전명을 훔쳐다가 붙인 셈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디아가 맞잡은 손등에 입을 맞추며 뭐가, 하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뺨에 쪽쪽 키스하며 거듭 캐묻는 디아에게 웃음으로 대꾸한 반은 그를 따라 하얀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 한없이 들떴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상향이라. 미셸에게 디아라는 존재는 이상향으로 향하는 열쇠였을까. 디아를 통해, 그들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엿보고 싶어 했던 미셸은 결국 이상향에 다다르지 못했다. 우스운 운명이었다. 미셸이 다다르지 못한 덕분에 제가 이상향을 선물 받았으니.

반은 복잡 미묘한 감정을 안고 창 너머로 스쳐 가는 공항을 응시했다.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허무한 한숨을 내쉬는데, 앞 좌석에서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아직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가 귀로 파고들었다.

“엄마, 이거 봐.”

“이제 비행기 모드로 돌려야지.”

“잠깐만. 이거 봐 봐. 이 사람 렙틸리언이야.”

“응? 뭐라고?”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동동거리는 아이에게 눈길이 갔다. 가족 여행을 가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이륙을 앞두고 분주한 엄마의 눈앞에 계속해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어, 외계인인데 파충류야. 사람으로 위장하는데, 이거 봐. 혀가 두 개야.”

반은 지레 놀라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단란한 가족을 지켜봤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여자는 아이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외계인이 지구에 왜 왔을까…. 자기야, 앤디 기저귀.”

“얘네들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어. 미국 대통령도 렙틸리언이래.”

“그래? 그거 큰일이네…. 자기야, 손수건 한 장만 더 꺼내 줘. 앤디 이리 주고.”

남편에게 가방을 넘긴 여자는 이제 막 옹알이를 하는 갓난아기를 안아 들고 둥둥 얼렀다. 제게 관심을 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한지, 심통이 난 아이가 동영상이 재생되는 핸드폰을 코앞까지 들이댔다.

“봐 봐, 엄마. 진짜 혀가 두 개야.”

“어머, 정말이네. 이제 핸드폰 끄자. 출발한다.”

“비행기 내리면 다시 볼까? 핸드폰 아빠한테 줘.”

슬쩍 동영상을 보는 척한 부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핸드폰을 가져갔다. 실제처럼 교묘하게 합성한 영상을 끄고 핸드폰을 종료해 가방에 집어넣은 부부는 고개를 맞대고 속닥거렸다.

“유튜브는 금지 못 하나?”

“그러니까.”

단란한 가족이 화제를 전환할 때까지 숨죽이고 지켜보던 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고개를 돌린 디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는데, 눈꼬리를 가늘게 접은 디아가 입술을 벌리더니 혀를 빼꼼 내밀었다.

“큽….”

반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입술만큼이나 붉은 혀는 유달리 도톰할 뿐 뾰족하지도, 두 갈래로 갈라지지도 않았다. 끝이 동글동글한 혀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반은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재빨리 고개를 기울였다.

말캉한 혀를 쪽 빨아들이고 냉큼 상체를 물리자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디아가 머지않아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소년처럼 웃는 디아와 얼굴을 맞대고 키득거리는 사이 타히티로 향하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최고 속도로 내달렸다. 제 몫을 다한 바퀴가 지상에서 떠오르며 날아오르는 감각이 등허리부터 번져 나갔다.

이제 순탄한 비행을 시작할 때였다. 남몰래 이상향을 찾아 헤맸던 지난한 날들을 뒤로하고,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속적인 낙원을 향해.

<‘아르카디아’ 끝, 외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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