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9/19)

<외전>

SUC-01: 웨인

화질이 좋지 않은 흑백 영화 속, 높은 콧대가 눈에 띄는 배우는 무려 5분 동안 분노에 찬 외침을 쏟아 냈다. 이마에 바짝 선 핏대로 보아 저 인물은 앞으로 5분은 더 소리 질러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실수라고?]

이제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상대 배우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카메라는 봉긋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인위적으로 클로즈업했다. 소파 깊이 파묻힌 웨인은 턱을 괴고 스크린을 응시했다. 과장된 음성이 귓속에서 윙윙 메아리쳤다.

[우리가 어떻게 실수일 수 있어….]

영화를 잘못 골랐다. 따지고, 묻고, 변명하고, 다투는 장면으로 장장 30분을 채우다니. 이 지루한 영화를 멈추고 다른 영화를 튼다고 해도 다음 영화를 고르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수고가 웨인에게는 너무나 귀찮은 일거리였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웨인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배우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상념에 잠겼다.

오래지 않아 배우의 형형한 눈동자에 색이 입혀졌다. 눈동자를 황금빛으로 덧칠한 색채는 서서히 화면 전체로 번져 나갔다. 곧이어 별장 지하의 홈 시어터 전경이 무너지고 우기에 접어든 칸쿤이 스크린 위로 펼쳐졌다. 무더운 열기가 몸을 휘감았다.

때는 6년 전, 5월.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위치한 칸쿤에 새로운 동료가 도착했다. 플라야 파라이소 해변과 근접한 펍에서 ‘그’ 동료를 맞이하는 시끌벅적한 환영식이 열렸다. 소란의 중심과 한 발짝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한 웨인은 맥주를 홀짝이며 바 근처를 응시했다.

오늘 합류한 ‘그’ 신입은 어느새 관광객까지 끌어들여 광란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야자수가 그려진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남자가 테킬라를 연속으로 들이켜자 귀 따가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턱을 뒤로 훅 젖힌 남자가 고개를 바로 하면서 새카만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나풀나풀 흐트러졌다. 기다란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남자는 입매를 시원하게 찢어 웃으며 아비게일이 입에 대 주는 술을 거절하지 않고 꿀떡꿀떡 받아 마셨다.

비틀거리면서도 연거푸 술잔을 비우는 호기로운 신입을 물끄러미 구경하는 사이 동료 하나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맞은편 의자에 주저앉은 동료가 빳빳하게 코팅한 메뉴판을 건넸다.

“됐다, 취했다. 자, 시켜.”

“난 이걸로 끝.”

웨인은 맥주가 반절 남은 맥주잔을 슬쩍 흔들었다.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기 위해 고개를 쭉 빼던 동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가볍게 웃었다.

“아, 둘이 모르지? 뭐… 지금은 좀 그렇고, 내일 인사해. 일단 더 시켜 봐.”

조금 전 배가 부르다며 더는 못 마시겠다고 손을 내저었던 동료는 코팅한 메뉴판에 코를 박고 뭐가 맛있었더라, 하며 식사를 골랐다. 주위를 둘러보자 펍에 모인 놈들 대부분이 다급히 주문을 넣고 있었다. 기현상에 대한 의문은 머지않아 깔끔하게 풀렸다.

“내가 쏜다! 내 환영회니까아. 어어, 시켜, 다 시켜.”

얼큰하게 취한 신입이 번쩍 손을 들고 자비를 베푼 것이다. 사방에서 요란한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예민한 청각 때문에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린 웨인은 남은 맥주를 조금씩 마시며 헤실헤실 웃는 신입을 훑어 내렸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꼴 한번 한심했다.

두어 시간쯤 지나자 후끈하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소강상태에 들었다. 멀쩡했던 놈들도 어느덧 나가떨어져 흐느적흐느적 늘어졌다. 줄곧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던 웨인은 텅 빈 맥주잔을 내려 두었다. 신입과 인사하는 일은 내일로 미루고 이쯤에서 들어가 볼 심산으로 자리를 정리하던 때였다. 시큼한 라임 향이 코끝을 스쳤다.

“와, 겨우 빠져나왔다….”

하와이안 셔츠를 걸친 남자가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소파가 좁은 탓에 허벅지가 빈틈없이 맞붙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새 테킬라 한 잔을 놓아두더니 숨을 후후 내쉬었다. 술을 깨고자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휘청거리는 상체와 금빛 눈동자를 반쯤 가린 힘이 풀린 눈꺼풀이 이미 그가 맛이 갔음을 증명했다. 웨인은 무릎을 당겨 남자와 맞닿은 허벅지를 떨어뜨렸다.

불현듯 남자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를 주시하던 웨인은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서도 밝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남자가 남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씩 웃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처음 보니까 모르겠지.”

“아. 아아. 그렇겠네. 그런데 되게….”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골몰하던 남자가 구부러진 검지로 삿대질했다.

“잘생겼다. 우리 같은 회사는 아니지? 내가 이런 얼굴을 모를 리가 없어서.”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한 양 혼자 킥킥거리던 남자가 손을 휘저어 테킬라 잔을 끌어왔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테이블을 더듬어 무언가를 찾는 시늉을 했다.

“나 소금…. 없으면 못 마시겠어.”

“그럼 그만 마시든가.”

“그거는… 안 되지.”

술이 없으면 안 마시겠지만 주어진 술을 안 마시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궤변을 늘어놓은 주정뱅이가 재차 테이블을 더듬었다. 라임은 있는데 소금이 없다느니, 나는 이걸 마셔야겠다느니, 오늘은 기분이 좋다느니…. 중얼중얼 술주정하는 남자가 성가셨다. 웨인은 손을 뻗어 테이블 모서리에 덩그러니 놓인 소금 통을 집어 들었다. 시종 나불거리는 남자의 입을 막을 소금 통을 건네주려는데, 성급히 다가온 손이 손등과 탁 부딪쳤다.

엎어진 소금 통이 테이블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소금 통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웨인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소금이 묻은 손바닥을 털어 내려던 그때, 술기운으로 인해 뜨끈뜨끈한 손아귀가 손목을 감싸 쥐었다.

검고 부드러운 머리칼이 쏟아졌다. 입술 새에서 빠져나온 붉은 혀가 손바닥을 가볍게 핥았다. 남자는 웨인의 손바닥에 흩뿌려진 소금을 혀에 머금은 뒤 곧장 테킬라를 들이켰다. 한 잔을 막힘없이 비우고는 라임 한 조각을 베어 문 채로 눈을 맞췄다.

멀뚱멀뚱 시선을 교환하다가 씩 웃은 남자가 하와이안 셔츠 자락을 당겼다. 그는 혀가 핥고 지나간 손바닥을 셔츠 자락으로 쓱쓱 닦아 주면서 웅얼거렸다.

“좀 돕고 삽시다.”

뻔뻔한 주정뱅이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침샘을 자극하는 라임 향이 풍겼다. 웨인은 말끔해진 손바닥을 흘끔 내려다보았다가 눈을 꾹 감았다. 손바닥은 뜨겁고 정신은 피곤했다.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간만에 열린 환영식으로 들뜬 동료들은 자정이 되기 전에 정리된 나약한 인원을 제외하고 2차로 향했다. 낙오자를 담당한다는 명분으로 술자리에서 빠져나온 웨인은 거의 곯아떨어진 신입을 둘러메다시피 부축해 숙소로 돌아왔다.

삐걱거리는 침대에 남자를 내던지고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자 긴 한숨이 터졌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침대에 대자로 뻗은 남자를 내려다봤다. 대외적으로는 오늘이 첫 만남이지만, 웨인은 누구보다 이 남자에 대해 잘 알았다.

반 클라크. 미셸 클라크의 하나뿐인 가족이자 손주. 멕시코시티에서의 계약이 만료되자마자 이곳 칸쿤으로 올 예정이었다는 것쯤, 이미 석 달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이곳으로 오게끔 만들었다. 턱을 괸 웨인은 쿨쿨 잘도 자는 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 미셸의 손주라기에 내심 기대했는데….

“실망스럽네.”

이 정도로 수준 떨어지는 놈일 줄이야. 웨인은 축축한 혀의 감촉이 감도는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지르고 일어섰다.

***

한때 복싱 선수로 이름 날렸던 의뢰인은 시류를 잘 탄 졸부였다.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여 경호를 맡는 인력조차 능력보다 외모를 중시했다. 특히 사교 목적이 강한 외부 일정이 있을 때 의뢰인의 허영심은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경호 인력 중 미끈한 편에 속하는 웨인은 한낮의 요트 파티에 차출되어 쏟아지는 뙤약볕을 맞는 중이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뒷짐 진 채로 새파란 바다 끝을 바라보던 웨인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함께 끌려 나온 반이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알은체했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얼음이 가득 든 유리컵을 내밀었다.

“어제 네가 나 데려다줬다며. 고맙다.”

“별걸 다.”

물방울이 맺힌 유리컵을 받아 든 웨인은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달짝지근한 맛이 나쁘지 않았다. 요트 난간에 양팔을 걸치고 축 늘어진 반은 뒤늦게 숙취가 올라오는지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죽겠다…. 아침부터 무슨 요트야.”

망망대해에서 경호가 필요할 일이 뭐가 있다고 여기까지 끌고 오는지 모르겠다느니, 그 돼지가 본인보다 셀 것 같다느니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던 남자가 겹친 팔에 뺨을 기대고 옆을 돌아봤다. 예고 없이 눈이 마주쳤다. 샛노란 눈알에 짙은 장난기가 스몄다.

“나 어제 지갑 다 털린 거 아냐? 좀 말려 주지.”

데려다준 걸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뻔뻔하게 남 탓을 한 남자가 뒷주머니를 더듬었다. 얇은 지갑을 꺼내 텅텅 빈 속을 보여 주더니 입꼬리를 뚝 떨어뜨렸다.

“봐 봐. 나 이제 점심 사 먹을 돈도 없어.”

눈여겨봤던 가게가 얼마나 많은데 한동안은 빌붙어 살게 생겼다며 한탄하는 남자는 성가신 면이 있었다. 웨인은 얼음만 남은 유리컵을 흔들었다. 얼음이 잘그락잘그락 뒤섞였다.

신기한 일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미셸에게서 어떻게 이런 놈이 나왔을까. 부모도 어디 모자라는 구석은 없던 걸로 아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돼야 저런 결과물이 나오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지만 경계심이 없다면 제게는 좋은 일이었다.

돌출된 난간 턱에 컵을 내려 둔 웨인은 슬쩍 웃으며 물었다.

“뭐 먹고 싶은데?”

“어? 사 주게?”

휙 돌아와 제게 꽂힌 황금빛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잘난 것은 외모 하나뿐인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웨인은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덧붙였다.

“내가 지갑 꺼내 줬거든.”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배신당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술값을 모조리 계산하겠다고 떵떵거린 사람이 누군지는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어제 일을 후회하는지 제 이마를 퍽퍽 내리치던 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근데 우리 인사했나? 이름이 뭐더라?”

“웨인.”

아하, 하며 웃은 반이 손을 내밀었다. 반반한 외모와 달리 그의 손은 투박했다.

“나는 반. 반 클라크.”

웨인은 유리컵을 쥐고 있느라 차갑게 식은 손을 내밀었다. 손을 덥석 잡은 반이 장난스럽게 힘을 주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한 철 인연을 대하는 가벼운 태도에서 진지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날 웨인은 반과 점심을 먹었다. 반은 굴과 새우를 잔뜩 얻어먹으며 적당한 톤으로, 적당히 조잘거려 분위기를 띄웠다. 그와의 대화는 재밌었지만 알맹이가 없었다. 반은 교묘하게 깊은 주제를 피해 갔다. 고향, 가족, 미래, 속마음을 배제하고 한 시간 뒤면 머릿속에서 휘발될 이야깃거리로 식사 시간을 채웠다. 자신이 이번 계약 기간이 끝나면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상대이기 때문인지, 의외로 본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성격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웨인이 반에게서 궁금한 것은 그가 말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조금 더 다가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갈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와 경호에 함께 차출되는 경우가 많아 내심 느긋한 마음을 품었는데, 반 클라크는 심히 바쁜 몸이셨다. 문제는 의뢰인이었다. 반의 외양을 흡족하게 여긴 의뢰인은 그를 제 옆구리에 딱 끼우고 잡일꾼으로 부려 먹었다. 통째로 빌린 클럽에서 파티를 열었을 때도, 쇼핑몰을 온종일 돌아다니면서도, 프라이빗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길 때도 의뢰인은 반을 콕 집어 이리저리 지시했다. 쇼핑백을 주렁주렁 매달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반에게 말을 붙일 틈은 없었다. 기껏 휴식이 주어지거나 다른 경호원과 교대한 후에는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개인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웠다. 간혹 인사하고 잡담하는 데면데면한 사이. 딱 그 정도였다. 두 달이 지나도록 말이다.

전환점은 7월 말쯤 찾아왔다. 소나기가 종종 내리는 시기였다. 신입의 환영식이 열렸던 펍이 또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오랜만에 푹 쉬려다가 끌려 나온 웨인은 기상천외한 술 대결을 구경하며 잘 익은 망고를 집어먹었다.

“이게 말이…. 말이 되냐?”

“여기 두 잔 더! 빨리!”

“야아….”

오늘의 주역은 반과 아비게일이었다. 따지자면 주연은 아비게일, 반은 들러리였다. 반은 먼저 나가떨어지는 놈이 술값을 계산하는 승산 없는 내기에 월급을 걸었다. 모두가 승패를 예상했지만 반만 몰랐다. 겁 없이 도전장을 내민 반은 두 시간 만에 입을 틀어막으며 백기를 들었다.

비웃음과 조롱을 한 몸에 받으며 내쳐진 반은 바 끝으로 비틀비틀 다가왔다. 끝자락에 자리한 웨인은 옆 스툴에 철퍼덕 주저앉은 남자를 흘긋거렸다. 얼큰하게 술이 오른 반은 굼뜬 움직임으로 지갑을 열어 거꾸로 털었다. 동전 한 닢 떨어지지 않았다.

“졌다….”

시무룩하게 눈썹을 늘어뜨린 남자는 이내 테이블에 이마를 쿵 박았다. 그 딱한 꼬락서니를 감상하다가 코웃음을 친 웨인은 새근새근 잠든 반을 곁에 두고 술잔을 기울였다.

반의 지갑을 탈탈 털어 낸 동료들은 시내의 클럽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권유를 물린 웨인은 매번 튕기는 죄로 짐짝을 하나 선물 받았다. 계산을 마친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고 사위가 고요해졌을 때, 바텐더에게 빈 잔을 건넨 웨인은 바에 엎어진 짐짝의 어깨를 흔들었다.

“클라크. 일어나.”

“어…. 응, 가야지…. 이따가….”

대답만 잘하지, 좀체 일어나지 못하는 남자의 팔을 가져와 목에 둘렀다. 겉으로 보는 것보다 가는 느낌이 있는 허리를 붙들고 일어서자 묵직한 무게가 매달려 왔다. 바텐더와 눈인사하고 펍을 나선 웨인은 흐느적거리는 반을 추어올리며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인사불성인 반을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술자리에서 빠진 적이 세 번쯤 되기에 그의 주정이 익숙해진 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소 귀찮았을 뿐, 별 감정은 없었다.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지기 전까지는.

“하….”

단 3초 만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웨인은 쏴아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짜증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칸쿤의 우기는 간혹 사람을 열받게 했다.

“으아악…. 비….”

술 취한 와중에도 비 맞는 건 싫은지, 다 죽어 가는 비명을 흘린 반이 꾸물꾸물 웨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한 손으로 젖은 눈가를 훔친 웨인은 저를 우산 삼으려는 남자의 허리를 단단히 안고 근처 불 꺼진 가게의 처마 밑으로 들어섰다. 질질 끌려온 반은 휘청거리다가 기어이 발목을 접질리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술에 취해 벽이 허물어지다 못해 소멸한 남자가 남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고 징징거렸다.

“으으, 다 젖었잖아….”

“똑바로 서. 그만 좀 붙고.”

“안 서지는 걸 어떡하라고…. 조금만 이러고 있자….”

어깨에서 스르르 미끄러진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와 타인의 살결이 빈틈없이 맞붙는 감각은 가히 끔찍했다. 사람을 착각했는지는 몰라도 직장 동료 사이에 할 법한 스킨십은 아니었다. 질색하다가 별도리 없이 반의 허리를 받쳐 준 웨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 처마를 투둑투둑 두드리는 빗소리가 거셌다. 이번 소나기는 제법 오래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웨인은 만사가 성가시고 귀찮았다. 연구소를 탈출하자마자 찾아든 지독한 권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원인이 모호한 회의감은 문득문득 찾아와 의지를 앗아 가고 짜증을 심어 두었다. 지금이 그러했다. 비 맞은 강아지 꼴로 끙끙거리면서 매달리는 반이 짜증스러웠다. 몇 달을 허비해서 감시할 가치도, 붙어 있을 가치도 없었다. 이 남자에게 공들이느라 버린 시간이 아까웠다. 이딴 별 볼 일 없는 놈을 손주로 둔 미셸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대화가 깊어지려고 하면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말솜씨도, 점심 식사 약속을 잡을 틈이 없을 정도로 꽉꽉 찬 스케줄도, 곁을 스쳐 지나가며 주먹으로 어깨를 툭 건드리고 가는 손버릇도, 그러다가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하면 달라붙어 오는 뻔뻔한 작태도… 모조리 짜증 났다. 뭐 하나 적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남자에게서 유일하게 볼만한 것은 고작….

“머리 아프다….”

웨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웅얼거리던 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코끝이 턱을 스쳤다. 초점이 흐려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남자는 눈꺼풀에 힘이 탁 풀려 있었다.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뺨과 날렵한 콧대가 눈에 띄었다. 웃을 때면 시원하게 찢어지는 도톰한 입술을 내려다보던 웨인은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참… 볼만한 건 얼굴밖에 없네.”

“그걸 이제 아셨다니…. 내 매력은 말이야. 이, 남자도 반하는 그런….”

뻔뻔하게 자화자찬하던 반이 길쭉한 눈꼬리를 접고 킥킥 웃었다. 술김에도 차마 그 이상은 못 하겠는지 실실거리는 남자에게서 술 냄새와 뒤섞인 라임 향이 풍겼다. 웨인은 수치를 모르는 남자가, 그가 내뱉는 향기가 짜증스러웠다. 동시에 이끌린 것 같다. 차라리 성가시고 귀찮기만 했으면 좋을 텐데, 소나기로 인해 터진 감정의 둑에서 묘한 욕망이 흘러나왔다.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밤늦은 시각, 가게는 문을 닫고 관광객은 숙소로 돌아가 온 사위가 빗소리로 가득했다. 맞닿은 살결은 불쾌했지만 뜨거웠고, 몸을 푹 적신 소나기는 피어나는 충동을 식히지 못했다. 웨인은 새큼한 향이 나는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순전히 놈이 짜증 나서, 마침 심심하니까. 그뿐이었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슬쩍 빨아들이면서 그의 허리를 바투 당겼다. 비에 젖은 아랫도리가 꾹 맞붙었다. 무슨 기분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반은 꿈쩍도 하지 않다가 한숨을 흘리며 입술을 벌렸다. 틈새로 혀를 밀어 넣자 어느덧 어깨를 타고 올라온 투박한 손이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고개가 기울고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웨인은 가늘게 뜬 채로 그를 바라보던 눈을 내리감았다. 이런 식으로 거리감을 줄일 필요는 전혀 없는데, 오랜만에 느끼는 폭신하면서도 뜨뜻한 감촉이 싫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칸쿤의 우기는 간혹 사람을 열받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여러 방면으로 말이다.

다음 날, 웨인은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간만에 푹 잠들었던지라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얼굴을 쓸어내리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웨인은 바닥에 떨어진 반을 발견했다. 침대에 다리 한 짝을 걸친 채로 나동그라진 반의 표정은 당황 그 자체였다. 그를 만난 이래 처음 본 표정이기도 했다. 그 낯이 하도 우스워 실소가 터졌다.

“뭐 해? 거기서.”

웨인은 안색이 창백해져 입술만 달싹이는 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헐벗은 남자가 얼빠진 표정으로 끌려오다가 다급히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내가 그, 좀 헷갈려서 묻는 건데….”

호박색 눈알이 바삐 굴러갔다. 한 침대, 헐벗은 몸뚱이 둘, 사방에 흩뿌려진 옷가지, 뜯긴 콘돔 껍질로 전후 상황이 모두 설명됐지만 정작 반은 믿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 잤냐?”

그렇게나 당당하던 남자가 어찌나 조심스럽게 묻는지.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웨인은 어깨를 주무르며 어젯밤 자신과 반이 무엇을 했는지 친히 알려 주었다.

“뒤는 처음인 것 같더라. 징징 우는 게 아주….”

그 순간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베개가 얼굴을 강타했다. 푹신한 솜덩이가 툭 떨어지자 황급히 옷을 주워 드는 반이 보였다. 덜 마른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가 내던진 남자가 허둥지둥 옷장을 열어젖혔다. 그는 남의 티셔츠와 바지를 멋대로 꺼내 입으며 쓰레기통에 처박힌 콘돔을 흘끔흘끔 살폈다. 못 볼 것을 본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반이 대뜸 삿대질했다.

“이건…. 이건 실수야. 실수라고. 잊어. 잊자. 어?”

홀로 결론 내리고 바지에 다리를 끼워 넣던 반이 미간을 팍 찌푸리며 신음했다. 웨인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침대를 툭툭 두드렸다.

“좀 쉬다 가지? 걷기 힘들 텐데.”

“미쳤냐? 뭘 쉬어? 뭔 개소리야….”

“뭐긴. 그냥 쉬었다가 가라는 거지.”

“아이 씨, 진짜….”

이 상황이 짜증 나 죽겠는지 옷장에 이마를 쿵 찧은 반이 젖은 옷가지를 낚아챘다. 그는 문을 열기 직전, 이를 갈며 경고했다.

“어디 가서 입 벙긋하면 진짜 죽인다.”

대단히 무서운 협박을 던진 반은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잽싸게 도망가 버렸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방에 혼자 남은 웨인은 오래간만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반 클라크는 별 볼 일 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가끔 권태를 잊게 할 정도로 재밌는 면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한 번 몸을 섞은 후 그와의 관계는 상당히 묘해졌다. 복도를 지나치다가 맞닥뜨렸을 때 반은 더 이상 웃으면서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창백해져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피치 못할 때는 줄곧 시선을 피하며 불편한 티를 물씬 냈다. 동료들이 눈치챌 정도로 반은 웨인을 슬슬 피했지만 불행히도 그날의 실수는 몇 차례 반복됐다.

실수가 반복되면 고의라는 것도 모르는지, 반은 한 침대에서 눈을 뜰 때마다 오늘 일은 실수라며 매번 똑같은 변명을 던지고 허겁지겁 도망가고는 했다. 줄행랑치는 반의 뒤꽁무니를 보며 웃는 날이 반복되자 반을 주시해야 했던 본 목적을 잊는 날도 잦아졌다.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새로운 즐길 거리에 푹 빠져 있을 때쯤이었다.

“원래 저 새끼 술 취하면 주워 가는 놈이 임자야. 딱 돈 들어올 때를 노려야 돼.”

술만 들어가면 몸도 활짝, 마음도 활짝 열린다며 아비게일이 가슴 앞에서 양손을 쫙 펼쳤다. 웨인은 무엇이든 수용한다는 양 활짝 펼쳐진 손바닥에 시선을 두었다가 눈을 들어 올렸다.

노을이 지는 해변, 사방이 트인 퍼걸러에서 낯선 관광객 무리에 섞여 수다 떠는 반이 보였다. 나무판자를 덧대 만든 간이 바에 빈 술잔이 늘어져 있었다. 벌거벗은 채로 깨어날 때마다 이제 술은 입에도 안 댈 거라고 버럭버럭 소리 지르더니, 언제나처럼 말뿐이었다. 누군가 술을 권하면 구태여 거절하지 않는 반은 헤픈 웃음을 터트리며 낯선 이가 입가에 대어 주는 과일을 베어 물었다. 상대의 손목을 가볍게 그러쥔 채로 키득거리는 남자는 신기할 정도로 몸짓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웠다.

“…니까. 반은 원래 그래, 원래.”

잠시 파도 소리에 묻혔던 아비게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웨인은 반과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아비게일이 던진 한마디를 곱씹었다.

‘원래 그러는 반’이라. 세운 무릎에 얹은 팔을 떨어뜨린 웨인은 제 손등을 느리게 문질렀다. 일주일 전 반이 새긴 손톱자국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쩐지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대체 무엇을 기대했기에 이런 황당한 기분이 드는지.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런 것 같네.”

파도가 쳤다. 젖은 모래사장으로 눈길을 돌린 웨인은 깔끔하지 못한 머릿속을 정리하려다가 관뒀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정리하려고 해 봐야 더 어질러지기밖에 더 하겠는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반의 웃음소리를 흘려보내며 건조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턱 끝에서 손을 떨어뜨린 웨인은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감정의 동요가 없고 매사 삐딱한, 조금은 지루한 모습으로. 술에 취한 반을 그의 방에 데려다주거나 제 방에 데려오는 짓도 그만두었다. 사시사철 무더운 칸쿤이 지겨워질 무렵, 숙소 복도에서 반을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뜬 반은 미간을 구기더니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누구에게나 유들유들한 그로서는 굉장히 드문 태도였다. 웨인은 스쳐 가는 반을 잡는 대신 그의 차림새를 훑었다. 휴가를 맞아 외출하는 것치고 짐이 제법 많았다. 모퉁이를 도는 반을 응시하다가 때마침 다가온 아비게일에게 물었다.

“어디 가나 봐?”

“고향. 할머니가 연락 안 된대.”

흔쾌히 정보를 제공해 준 아비게일과 헤어진 웨인은 숙소를 빠져나가는 반을 창 너머로 지켜보며 통화를 이어 갔다. 시선을 눈치챈 건지, 문득 뒤를 돌아본 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잔뜩 찌푸려 이쪽을 확인하더니 기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인사할 틈도 없이 재빠르게 사라지는 반을 끝까지 눈에 담으며 입매를 비튼 웨인은 핸드폰을 반대쪽 귀로 옮기며 창을 등졌다.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알아봐.”

조만간 다시 만날 테니 못다 한 인사는 그때 가서 해도 될 것이다.

***

오븐을 열자 고약한 탄내가 코를 근지럽혔다. 타월을 겹쳐 잡고 오븐 팬을 끄집어내자 한때 옷가지와 신분증이었던 것들이 잿더미가 된 광경이 보였다. 언제 해도 하기 싫은 작업이었다. 이번 일은 홀로 진행해야 하는 탓에 번거로운 것투성이였다. 재를 버리는 과정에서 손가락 끝을 덴 웨인은 발간 자국이 난 살결을 문지르며 지하로 향했다.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책상 위에 두고 의자에 푹 기대앉았다. 핏자국이 점점이 튄 모니터를 닦을 기력 따위 없었다.

지저분한 모니터 세 대에는 각기 다른 화면이 떠 있었다. 수치를 띄운 모니터가 하나, 집 외부에 설치된 CCTV와 연결된 모니터가 하나, 아직은 새까만 공간을 보여 주는 모니터가 하나.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새까만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컴컴하기만 했던 화면이 파랗게 물들었다. 그때야 허리를 곧추세운 웨인은 이 지하실의 세 배쯤 되는 공간을 보여 주는 화면을 들여다보며 카메라를 조정했다.

아래를 향한 카메라 각도를 바꾸자 유리로 가로막힌 지하실이 보였다. 렌즈 끄트머리에 잡힌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폐 한 장을 빳빳하게 펴 형광등 아래 비추어 보는 반의 심각한 표정이 뜻밖의 웃음을 불렀다. 분주한 반을 턱을 괴고 구경하던 웨인은 헛기침으로 미소를 감추고 다른 모니터를 곁눈질했다.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입가에 스민 미소가 삽시간에 증발했다.

“이런….”

당황한 웨인은 턱을 괸 손을 떨어뜨리다가 커피 잔을 툭 치고 말았다. 고작 한 모금 마신 커피가 왈칵 엎어지며 잔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처참하게 깨진 커피 잔을 멍하니 응시하던 웨인은 시선을 들어 변화한 수치와 당황한 기색이 만연한 반을 찬찬히 번갈아 봤다. 화상을 입은 손가락 끝이 따끔거렸다. 이게 대체….

무심결에 주먹을 말아 쥔 그는 혼잡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구식 핸드폰을 열었다. 저장된 연락처는 하나였다. 낯선 연락처를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붉게 물든 손가락 끄트머리를 매만지는 사이 신호음이 뚝 멎었다. 짧게 숨을 들이켠 웨인은 호흡을 내뱉는 동시에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반 클라크?”

- 미셸?

의문과 의심을 품은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연히 연상되는 무더운 칸쿤을 머릿속에서 지운 웨인은 핏자국 묻은 노트를 뒤적여 지금은 숨이 멎은 채로 욕실에 처박혀 있는 조력자가 건네야 할 당부 사항을 대신 읊었다.

“대충 내용은 들었을 거야. 앞으로 연락은 일주일에 한 번. 핸드폰은 항시 들고 있도록.”

웨인은 설명을 이어 가면서 연구원의 유품이 된 노트를 신경질적으로 덮었다.

강렬한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도대체 반의 무엇이 ‘저것’을 자극했을까. 저 또한 숙주를 선택한 적 있었기에 더더욱이나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들은 무의식중 숙주를 선택하여 깨어난다. 색깔만 다른 공을 늘어 두고 하나를 고르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공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는가 하면, 개중 그나마 끌리는 공을 선택할 때도 있으며, 유독 매력적인 공이 눈길을 사로잡을 때도 있다. 마지막 개체에게 있어 반이 어떤 공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웨인은 아랫입술을 앞니로 질근거렸다.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인해 숙주가 되었다면 결말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제거. 그러나 당장 코앞에 닥친 문제는 아니었다. 잇자국이 난 입술을 놓아준 웨인은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마지막 개체가 반을 선택한 이상 웨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허탈한 나머지 치밀어 오른 웃음을 누르고 입을 뗐다.

“…건드렸구나.”

- 뭐? 뭘 건드려. 무슨 소리인지….

따끔거리는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잇자 모니터 속 반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아닌 척 발뺌할 때 눈썹을 들어 올리는 버릇은 칸쿤에 있을 적과 똑같았다.

웨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허둥지둥하는 반을 지켜봤다. 어쩐지 아까웠다. 물론 이 아쉬움 때문에 일을 그르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동족의 보전을 우선시하는 마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치 않을 것이다.

카메라를 조정한 웨인은 육안으로 확인될 만큼 변화한 마지막 개체를 가만 응시했다. 성장하는 데까지 얼마나 걸릴지 미지수지만 ‘저것’이 성장을 끝마칠 때까지만 아주 잠시, 조금쯤은 즐겨도 되지 않을까….

눈을 내리깐 웨인은 또다시 옅은 짜증을 느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짜증스러운 것은 반이 아니라 저 자신이었다.

***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푸르스름한 지하실의 풍경이 스러졌다.

꿈에서 깨듯 상념에서 빠져나온 웨인은 늘어진 자세를 바로 했다. 넋을 놓은 새 영화가 끝났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싸우던 커플의 결말은 알 길이 없었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뻑뻑한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힘껏 눌렀다.

적성에 맞기는커녕 성가시기만 한 직책을 디아에게 떠넘긴 후, 웨인은 ‘웨인’이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잊힐 때까지 긴 휴식기에 들었다. 새 신분을 만들어 다시 세상에 나가기까지 필요한 길디긴 시간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 위치한 그란카나리아섬은 홀연히 모습을 감춘 웨인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됐다.

3년짜리 보금자리는 제법 그의 마음에 들었다.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는 탓에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떠나야 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다만 무료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 죽이는 일이 의무가 되자 하등 쓸모없는 상념에 젖는 날이 잦았다. 갑작스럽게 웃기지도 않은 과거 일이 떠오른 것도 지루함 탓일 테다.

웨인은 엔딩 크레디트까지 끝이 나고 꺼멓게 죽은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눈썹을 긁적였다. 다음엔 어떤 영화를 볼까. 아니면 서핑이나 하러 갈까. 시간을 때우기 위해 다양한 취미를 섭렵했지만 둘 다 썩 끌리지 않았다. 저와 함께 이 평화로운 섬에 처박힌 쿠퍼를 불러 술이나 한잔 기울이는 편이 차라리 나을 듯했다. 고용인 신분이라 같이 마셔 주지는 않겠지만 대화 상대로는 괜찮은 놈이었다.

남은 하루를 보낼 일거리를 정한 웨인은 소파 팔걸이를 짚었다. 일어나기 위해 팔꿈치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탁, 소리가 나더니 옆얼굴에 빛이 얼룩졌다. 고개를 돌린 웨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쿠키 영상이 있을 만한 영화는 아니었는데, 어두운 허공을 가로지른 빛줄기가 스크린에 정체 모를 영상을 투영했다. 흑백 필름이 아닌, 캠코더로 촬영한 듯 색이 바랜 영상이었다. 손에서 힘을 뺀 웨인은 허리를 편히 기대지 못하고 그것을 응시했다.

영상은 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진 고풍스러운 문이 열리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달칵, 열린 문 너머로 낯선 방과 캐노피가 늘어진 침대가 나타났다. 캠코더를 든 사람이 걸음을 옮기자 캐노피에 가려진 침대 안쪽이 서서히 드러났다.

창을 투과한 햇볕이 불룩하게 솟은 이불 위로 쏟아졌다. 잠시 렌즈를 뒤덮은 햇살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상체를 헐벗은 남자가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굴곡진 어깨뼈, 베개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이불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허리선…. 그럴 리 없건만 영상 속 남자의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대체 이게 뭔가 싶어 미간을 찌푸렸을 때, 화면이 흔들리며 침구가 바스락바스락 구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잠이 덜 깨어 푹 가라앉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응…? 뭐 해….]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목소리마저 너무나 익숙했다. 어디서 들어 봤더라. 번뜩 떠오르는 것이 없어 이상야릇한 기분에 휩싸일 즈음, 구겨진 침구를 비추던 카메라 렌즈가 휙 올라가더니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은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 찍는 거야?]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럽게 웃는….

“…반?”

[이렇게 막 찍으시면 곤란한데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반이 눈두덩이를 비비며 실없이 웃었다. 웨인은 그즈음에서야 이 영상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홈 비디오였다. 그것도 반 클라크가 나오는. 영상의 정체를 눈치챈 것은 둘째 치고, 저딴 게 왜 제 별장 홈 시어터 스크린에 비치는 것인가. 웨인은 황당무계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야?”

“우리 웨딩 영상.”

혼잣말에 대한 답이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웨인은 낯선 인기척에 뒷좌석을 휙 돌아봤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분명 혼자였던 공간에 사람 그림자가 일렁였다. 어두웠던 영상이 다시 밝아지자 대각선에 위치한 좌석을 당당하게 차지한 불청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상의 정체에 이어 불청객의 정체 또한 웨인을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다.

귀신처럼 숨어든 놈은 다름 아닌 디아였다. 웨인은 제법 너른 방 뒤쪽에 위치한 문을 흘끔 살폈다. 딴생각을 얼마나 깊이 했으면 저 묵직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니. 당혹스러운 웨인의 심정과 달리 디아는 태연자약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필수로 찍는 거잖아. 우리도 찍었어. 준비 과정부터 전부 다 찍으려고.”

순간 제가 디아와 친분이 두터웠던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허물없는 말투였다. 얼어붙은 땅에서 헤어진 후로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 없던 놈이 연락도 없이 나타나 할 말은 단연코 아니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얼굴을 문지른 웨인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너…. 여긴 어떻게….”

“앉아. 너는 못 죽여도 얘는 죽여도 되니까.”

디아가 총구를 겨누었다. 제게 겨눈 것이 아니었다.

총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그의 발치에 강제로 꿇어앉혀진 쿠퍼가 보였다. 오래도록 제 곁을 지킨 중년의 남성이 눈을 맞추더니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귀하신 분의 협박을 못 이기고 질질 끌려온 쿠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반쯤 떼어 낸 엉덩이를 도로 붙였다.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직도 예의를 못 배웠나 봐. 숙주가 그따위라서 그런가.”

“반이 좀 자유롭기는 하지.”

“그놈은 자유로운 게 아니라….”

눈에 두꺼운 콩깍지가 씌어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는 디아의 실수를 짚어 주려다가 말았다.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디아와 입씨름해 봤자 목만 아플 뿐이다. 이쯤 되면 저 영상이 대체 무엇이기에 남의 별장까지 몰래 쳐들어와 보라고 강요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뭐… 별것 아니겠지만.

팔짱을 낀 웨인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새 장면이 넘어갔는지, 가봉한 슈트 재킷을 걸치고 낮은 단상 위에 선 반이 보였다. 사이즈를 확인하는 디자이너와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하는 남자 주위를 카메라가 빙그르르 돌았다.

[좋아요. 딱 맞는데… 이걸 뭐라고 하지. 다꼬흐?]

한쪽 눈을 찡그린 반이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 표시를 만들다가 카메라 렌즈가 있는 방향에 시선을 주었다. 그는 얼핏 웃으며 밉지 않게 힐난했다.

[뭐야. 왜 웃어.]

[그냥.]

[웃기나 본데, 내가 불어까지 잘하면 큰일 나지…. 아, 거기는 안 줄여도 돼요.]

어깨 부근을 매만지는 디자이너에게 고개를 돌린 반이 손가락 두 개를 엇갈려 엑스 표시를 했다. 만사태평하게 거울을 들여다보던 반이 옆을 흘끔거리더니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목소리로 설명됐다.

[왜 큰일이 나? 큰일 날 일이 뭐가 있는데?]

[또 그러신다…. 그냥 하는 말이지. 이리 와 봐.]

디자이너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팔을 뻗은 반이 손끝을 팔랑거렸다. 카메라의 위치는 미동이 없었다.

[싫어. 자세히 설명해.]

[아이, 자기야. 이리 와. 어?]

서운하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남자가 오른발을 가볍게 굴렀다. 나잇값 못 하는 행동거지는 여전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꼴 보기 싫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카메라를 든 놈 역시 마찬가지인지 화면 속 반이 점차 가까워졌다. 곧 화면이 크게 흔들리더니 쪽, 하고 입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우리 도련님이 또 반하실까 봐 그러죠. 내가 머리까지 좋으면 좀 그렇지 않을까? 불공평하고.]

[…난 또 반해도 괜찮은데.]

[내가 힘들어서 그런다, 왜.]

좋다고 입술을 비비는 소리가 고스란히 담긴 영상을 보던 웨인이 코웃음을 쳤다. 느물거리는 말을 안색 한번 안 바뀌고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능구렁이 같은 반의 손바닥 위에서 뛰노는 디아가 불쌍해지는 한편, 제가 왜 이딴 영상을 잠자코 보고 있는지 슬슬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짜증보다 회의감에 가까운 감정이 들 무렵, 이상한 단어가 고막을 긁었다.

[결혼식 한번 올리기 참 어렵다.]

웨인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뭐라고? 눈살을 찌푸리고 스크린을 바라보았지만 화면은 금세 전환됐다. 그는 짙은 갈색이 도는 눈알을 스르르 굴리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곱씹었다.

잠시만. 아까 디아가 뭐라고 했더라. 놈의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넘긴 말이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어느샌가 팔짱을 푼 웨인은 꼬이기 시작한 기억 회로를 풀어내려고 했으나 그보다 먼저 일자로 다물린 입술이 해답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결혼을 한다고.”

“맞아. 나랑 반이, 일주일 뒤에.”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온 대답은 웨인의 사고를 잠시 멈추게 했다. 그는 스크린 속에서 종류가 다른 꽃다발 두 묶음을 들고 고민하는 반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고집스럽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디아가 기어이 반을 제 곁에 묶어 두었다는 소식은 일라이를 통해 전해 들었다. 일라이는 체마처럼 타인의 소식을 가십거리 삼아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성격이 아니어서, 둘이 르네와 독대한 모양이라고 담백한 어조로 알려 주었다.

언뜻 놀랐던 것도 같다. 르네가 반을 내버려 둘 리 없을 텐데 무슨 수로 허락을 받아 냈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하지만 웨인은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혀를 세게 물었다가 속내와는 다른 대꾸를 했다. 관심 없어. 딱 그 한마디를 끝으로 둘에 대한 이야기를 차단한 결과가 ‘결혼’이라는 괴상한 소식으로 되돌아왔다.

‘그’ 반 클라크와 결혼이라니. 세상에 이토록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도 없을 것이다. 반이 디아를 남다르게 아낀다는 것만큼은 웨인도 인정하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정착이라는 개념을 모르고 헤프기 짝이 없는 남자가 결혼까지 승낙할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설마 또 제멋대로 만들어 낸 망상을 가지고 나불거리는 건가, 하는 의심은 영상이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힘을 잃었다.

영상 속 반은 놈의 자신만만한 발언대로 결혼식 준비에 매진했다. 테이블 위에 줄지어진 케이크를 한 입씩 먹어 보고 코코넛 케이크를 선택한다든가,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테이블 웨어를 고른다든가, 새하얀 구두를 디자인별로 하나씩 신어 본다든가. 결혼식을 앞두고 설레 하는 느낌은 그다지 없었지만, 하기 싫어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거 두 개 중에 골라 줘.]

[오…. 둘 다 예쁜데? 너는 뭐가 더 마음에 들어?]

[나는 이거.]

[그럼 나도 이거. 역시 안목이 있어?]

웨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길 반복하며 시시덕거리는 영상의 주인공들을 응시했다.

저들은 행복해 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아도 단번에 달큼한 분위기를 알아차릴 만큼. 그래, 그건 알겠는데…. 웨인은 황당한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이걸… 나더러 보라고?”

“네가 첫 관객이야. 처음 보여 주는 거니까 고맙게 생각해.”

저 영상 어디에서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말문이 막힌 사이 디아는 ‘너도 고마워해’하고 덧붙이며 쿠퍼의 어깨를 총구로 톡 건드렸다. 고래 싸움에 끼어 등이 터져 나가는 쿠퍼를 봐서라도 장난을 받아 주는 것은 이쯤하고 당장 이 섬에서 쫓아내야 하는데, 웨인의 시선은 스크린에 붙박여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글쎄… 이 또한 잘 모를 일이었다.

마감된 웨딩 슈트를 걸친 반이 재롱이라도 떨듯이 카메라 앞에서 빙그르르 돌 즈음이었다.

“있잖아. 반이 먼저 나한테 청혼했어.”

함께 영상을 감상하던 디아가 이거 봐, 하며 좌석 곁으로 손을 쑥 내밀었다. 길쭉한 약지에 자리한 스퀘어 다이아몬드가 눈부신 빛을 퍼뜨렸다.

반지를 곁눈질한 웨인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놀라서가 아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반이 다이아 반지를 샀다고….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 믿는 시늉이라도 하지, 과장이 심하면 도리어 우스울 따름이었다. 웨인은 눈가를 문지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그딴 얘길 왜….”

“반이 반지 끼워 주면서 뭐라고 했는지 네가 들었어야 했는데.”

어려서부터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디아가 말허리를 자르고는 제 할 말만 줄줄이 늘어 두었다.

“이제까지 만난 사람은 다 아무것도 아니었대. 나밖에 없다고, 나 아니면 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했어. 지금까지 아무나 만나고 다닌 게 너무 후회된다고….”

디아는 특히 ‘아무나’에 강세를 주었다. 마치 과거 반과 접점이 있었던 웨인에게 경고라도 하듯이.

졸지에 ‘아무나’로 전락한 웨인은 미동 없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그러니까 지금 대뜸 남의 집에 쳐들어와 낯간지러운 영상을 보여 주고 반지를 자랑하는 이유가…. 곰곰이 생각하던 웨인은 손톱자국이 남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설마 지금… 내가 저놈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은 반한테 관심이 있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든 대꾸가 튀어나왔다.

반 클라크는 그럭저럭 매력 있는 남자다. 제법 잘생겼고, 특별히 모난 성격도 아니고, 그와의 대화는 재밌는 축에 속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만.

“…클라크가 그 정도는 아닐 텐데.”

그럭저럭 매력적이지만 생을 송두리째 갖다 바칠 정도는 아닌 남자를 그려 볼 즈음이었다. 불현듯 스피커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4월 26일. 결혼식 열흘 전입니다. 오늘은 제가 한번 찍어 보려고요. 디아 몰래.]

허공을 부유하던 시선을 옮긴 웨인은 카메라 렌즈에 얼굴을 가까이 한 남자를 맞닥뜨렸다. 때로는 느슨한 인상을 주는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반이 손을 흔들더니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작게 속삭였다.

[내가 원래 이런 취미는 없는데… 뭐, 결혼 선물 겸.]

그는 콧잔등을 찌푸려 짓궂게 웃고는 카메라를 돌렸다. 욕실 풍경이 스쳐 지나간 후, 문틈 새로 살금살금 빠져나간 반이 볼록하게 솟은 침대를 촬영했다. 찍는 대상만 달라지고 첫 장면과 비슷한 구도였다. 하얀 베개 위에 황금빛 머리카락을 흩트린 채로 곤히 잠든 디아를 내려다보던 구도가 바뀌었다. 캠코더를 협탁에 올려 둔 반은 침대가 잘 보이도록 각도를 조정했다. 렌즈에 대고 한 번 더 손을 흔든 반이 침대 모서리에 무릎을 대더니 구겨진 이불을 들치어 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침구가 꿈틀거리더니 엎드린 반의 형태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침대에 누운 디아는 교묘하게 가려지고, 그 위로 올라탄 반의 모습만 중점적으로 담긴 영상이었다.

영상의 목적을 알아차린 웨인이 탄식을 뱉기 무섭게 동그랗게 솟은 덩어리가 슬쩍슬쩍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살덩이를 춥춥거리며 빨아올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만으로 이불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몇 번의 움직임 만에 움찔거리며 깨어난 디아가 손을 뻗어 이불을 거머쥐더니 휙 젖혔다.

[…반?]

[조흔 아힘.]

디아의 팔뚝과 펼쳐진 이불에 가리어 반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에 무언가를 문 탓에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인사하는 소리는 확실히 들렸다. 당황했는지 조용한 디아 대신 반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이불이 완전히 젖혀지며 디아의 허벅지에 올라탄 채로 허리를 세운 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지를 뻗어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콕콕 가리켰다.

[저기 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푸르스름한 녹안이 빼꼼 나타났다. 막 잠에서 깨어나 매무새가 흐트러진 디아는 카메라 렌즈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찍는 거야?]

[앞으로는 이거 보고 빼라고. 그 낡은 사진 좀 그만 보고.]

[반….]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디아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반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배시시 웃는 디아를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가운을 여민 허리끈을 쥐었다.

[좋아. 오늘은 내가….]

허리끈이 스르륵 풀리고 얇은 가운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기 직전, 음성이 뚝 끊기더니 스크린이 새카맣게 죽었다. 컴컴한 공간에 처참하게까지 느껴지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여기까지만 봐. 나머지는 우리 둘이서 볼 거거든…. 매일매일 이걸로 빼고 있는데, 봐도 봐도 안 질려. 넌 전혀 모르겠지만.”

디아는 그날을 회상하는 듯 몽롱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늘였다. 놈의 미묘한 말투가 신경을 긁었다. 단정하게 정돈한 손톱 끝을 부산스럽게 매만지며 스크린을 노려보던 웨인은 입매를 비틀었다. 어째 미소를 짓는 것이 유달리 힘겨웠다.

“뭐…. 그래서 고작 이거 보여 주려고 여기까지 오셨다? 죄 없는 사용인이나 괴롭히려고 납신 건 아닐 텐데.”

평이함을 가장했지만 목구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바람과 달리 살짝 잠겨 있었다. 낭패였다. 기민한 디아가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한참 말이 없다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닌 척해도 보여. 네가 반을 욕심내는 거.”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본데, 나는 그딴 놈한테….”

“있긴 했잖아. 솔직히.”

버르장머리 없는 개체가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웨인은 무의식중에 머뭇거렸다.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씁쓸함이 혀를 푹 적셨다. 휴식기를 가지며 긴장을 내려놓은 탓인지 건방지게 구는 디아를 엿 먹일 문장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저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정말 할 말이 없기 때문일까.

“네가 왜 반 허벅지에 구멍 낸 건지, 생각할수록 조금 이상해서. 만약 숙주를 제거할 계획이었다면 허벅지가 아니라 머리를 날렸겠지. 그랬다면 넌 나한테 죽었겠지만, 아무튼. 넌 계획을 바꿀 만큼은 반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야.”

“…….”

그럴싸한 추측에도 침묵을 고수하며 자신조차 의문스러웠던 선택을 되새기던 중이었다. 가죽으로 된 소파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상체를 기울인 디아의 기척이 바로 뒤에서 느껴졌다.

“그런데 어쩌지? 반은 날 사랑해.”

조곤조곤한 말씨로 내뱉는 조롱이 귀에 직격으로 꽂혔다. 집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놈은 그치지 않고 강조했다.

“내 얼굴이 이 지경이 돼도, 내가 아무리 성질내도, 반은 나만 사랑해.”

애먼 사람 견제하는 대신 네 애인 단속이나 잘하라고 되받아쳐야 하는데 왜 입이 떨어지지 않을까. 웨인은 저딴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는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어지간히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거겠지, 하고 생각해도 찜찜한 구석은 여전했다. 디아는 웨인이 혼란스러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거봐. 내 말이 맞았잖아. 우리는 다를 거라고.”

권총을 갈무리해 안주머니에 넣은 디아가 몸을 일으켰다. 놈은 허벅지 부근을 손등으로 툭툭 털어 내며 신경질적인, 그러나 가벼운 투로 짜증을 표출했다.

“너 때문에 시간만 낭비하고 이게 뭐야?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결혼식 초대 안 했으니까 올 생각 하지 마. 이제 남의 남편한테 눈독 들이지도 말고.”

놈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와 조사가 헛웃음을 불러일으켰다. 버릇없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놈이라는 것은 익히 알았지만 이는 정도가 과했다. 과하다 못해 흘러넘쳤다. 숫제 지끈거리기까지 하는 이마를 감싼 웨인의 입술 새로 실없는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반은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알아?”

디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깜박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야 해?”

반이 들었다면 심히 섭섭해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인 디아가 미련 없이 발을 틀었다. 비켜, 하며 나이 지긋한 쿠퍼에게 명령하고는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비켜났다가 몸을 일으킨 쿠퍼가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디아의 등에 대고 고개를 살짝 조아렸다.

웨인은 획기적인 방법으로 무료한 하루를 뒤바꾼 동족을 쳐다보지도, 배웅하지도 않았다. 그저 불 꺼진 공간에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스크린을 응시할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갑작스럽게 찾아오셔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안 괜찮을 것도 없지.”

웨인은 조심히 묻는 쿠퍼에게 무심하게 답했지만 ‘아무렇지 않다’라고는 하지 못했다.

과거를 반추한 날 때마침 찾아온 얄미운 불청객이 남기고 간 고민거리가 명치에 턱 얹혔다. 징그러운 놈들이 기어이 결혼식을 올리든 말든 제가 무슨 상관이냐고 빈정거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그냥… 영상 속, 디아를 대하는 반의 태도가 제게 보여 준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서, 아마 그래서 심란한 것일 테다. 웨인은 한 침대에서 눈을 뜨는 날이면 욕설을 퍼부으며 도망치던 반과 디아가 잠든 침대로 살금살금 기어들어 가던 반을 겹쳐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웨인은 반을 사랑한 적 없다. 몇 번을 자문해도 답은 같았다. 다만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 도중 아주 가끔, 스치듯 가정해 보기는 했다. 만약 반과 그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미셸의 손주가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디아의 숙주만이라도 아니었더라면… 하고 말이다. 당사자는 학을 떼고 욕부터 뱉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지 않나.

질색하는 반의 반응을 상상하다가 슬며시 미소 지은 웨인은 지금에 와서는 썩 탐나지 않는 남자를 머릿속에서 훌훌 털어 내고 일어났다. 오래도록 구겨져 있던 몸이 찌뿌둥했다. 팔을 뻗어 가볍게 스트레칭하면서 쿠퍼를 돌아볼 즈음이었다.

“쿠퍼. 오늘 술이나 한잔….”

귀청을 때리는 폭발음이 입을 틀어막았다. 흠칫 놀란 웨인은 곧장 천장을 올려다봤다. 충격으로 인해 방 모서리에 설치한 조명이 어지럽게 깜박거렸다.

“무슨….”

눈살을 찌푸리고 지하까지 진동이 전해질 정도로 강한 폭발의 원인을 추측하던 웨인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파 등받이를 붙든 쿠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주름진 눈매를 접으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확인… 해 보겠습니다.”

재빨리 빠져나가는 쿠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웨인은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화재경보기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대피할 것을 종용했지만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실없는 웃음을 픽픽 내뱉다가, 다음으로는 입을 가리고 허공을 노려보다가, 마지막으로는 짓씹는 듯한 욕설을 잇새로 흘려보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그날 웨인은 그답지 않은 유치한 소원을 하나 빌었다. 철없고 막무가내에, 저들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빌어먹을 커플의 결혼식 날, 예고 없이 비나 확 쏟아지라고.

***

디아는 큼직한 선글라스를 착용하며 웅성웅성 몰려든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등 뒤로 치솟는 불길은 따뜻하고, 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재 냄새는 향기로웠다.

꼴에 취미랍시고 온갖 경매에 관심이 많은 웨인은 귀한 서적과 복원한 영화 필름, 예술품 따위를 한 방에 몰아 두는 경향이 있었다. 방이라고 해도 한 층을 통째로 쓰는 탓에 폭발물을 여기저기 설치해야 했으나 결과는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웨인의 허벅지를 쏠 수 없다면 쿠퍼의 허벅지라도 잘라야 수지가 맞지만,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피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지만 제 남편 허벅지에 구멍을 낸 값은 이 정도만 받기로 했다.

최대한 온건하고 얄망궂은 방법으로 웨인에게 복수한 디아는 불길을 감상할 새 없이 얼른 공항으로 향했다. 징계만 철회했더라면 식을 앞두고 이리 급하게 처리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유감이었다. 그러나 복수에 대한 미련은 성에 도착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란카나리아까지 오가느라 상공에서 반나절을 허비한 디아는 성급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개인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활짝 열린 창문이 보였다. 인위적이지 않은 바람을 좋아하는 반은 날이 따뜻해진 후로 늘 창문을 열고 지냈다. 특히 솔솔 부는 바람을 맞으며 낮잠 자는 것을 즐겼다.

창가 근처로 옮긴 길쭉한 소파로 눈길이 갔다. 그곳에 웅크린 채로 잠든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냉큼 발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디아는 새근새근 잠든 반을 내려다보다가 바닥에 꿇어앉았다. 반은 요즘 부쩍 잠이 늘었다. 부러진 뼈는 무사히 붙었지만 아직 체력이 채 돌아오지 않은 탓에 틈만 나면 곯아떨어졌다. 눈을 감고 조용히 자는 것뿐인데도 멋있는 남자를 마음껏 구경하다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반. 반, 나 사랑해?”

“응…? 아, 다녀왔어?”

얕은 잠에서 깨어난 반이 잠결에 대답했다. 눈도 못 뜨고 반겨 주는 남자의 목덜미에 코를 폭 파묻은 디아는 익숙한 향을 깊게 빨아들이면서 거듭 졸랐다.

“응. 빨리 다녀왔어. 그래서 나 사랑해? 내가 이런 얼굴이어도? 못되게 굴어도?”

얼굴 곳곳에 키스하며 연신 묻자 반은 간지럽다는 듯이 웃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다정한 손길이 귓바퀴를 스치고 떨어졌다.

“사랑하지. 너어무 사랑해서 탈이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반은 불안정한 디아에게 안도감을 선사했다. 무엇 하나 웨인에게 지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마구 내뱉었던 디아는 쑥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의 목을 적당한 힘으로 끌어안았다. 이 남자와 일주일 뒤 식을 올린다는 것이 도통 믿기지 않았다. 날아갈 듯 들뜬 나머지 여린 목덜미 살갗을 질근질근 깨물자 영문도 모르고 등을 토닥여 주던 반이 언제나처럼 어르는 투로 물었다.

“요트 점검하고 온다며.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러실까. 뭐가 잘 안 돼?”

반의 토닥임에 흐물흐물 녹아내리던 디아는 속눈썹이 빼곡하게 돋아난 눈을 휙 내리깔았다. 요트 점검은 닷새 전에 끝마쳤고, 요트에서의 피로연은 완벽하게 열릴 예정이었다. 오늘따라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은 디아는 진심을 꺼내는 것으로 반을 향한 죄책감을 깔끔하게 청산했다.

“그냥. 얼른 식 올리고 싶어서.”

“싱겁기는.”

픽 웃음을 흘린 반이 깊은 흉이 진 관자놀이에 입 맞추었다. 턱을 들어 올린 디아는 그와 코끝을 맞비비면서 곱게 피어난 미소를 감추었다.

이제부터 좋은 것만 봐야 하는 반은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복수극의 전말을 알 필요 없었다. 나쁜 것들은 기억 저편으로 날려 버리고 마침내 행복해질 때였으니까.

철없는 부부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정도로 거센 눈발이 살벌한 칼바람 소리를 내며 몰아쳤다. 어젯밤 시작된 눈보라는 정오가 되도록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반은 밀대 손잡이 모서리를 감싼 손등에 턱을 괴고 멀뚱히 창밖 풍경을 응시했다. 날이 그나마, 정말 그나마 좋을 때는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바다가 보이는데, 오늘은 짙은 눈보라 때문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달콤한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공항에서 연행되어 이곳에 떨어졌을 때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른다. 외딴섬이라기에 여태껏 디아가 머물던 섬과 비슷한 분위기이겠거니 했지, 이토록 풀 한 포기 없는 땅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걸핏하면 눈이 정강이까지 쌓이는 섬에는 황량한 저택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한때 음산하다고 여겼던 고성을 동화 속 아름다운 성으로 탈바꿈시킬 만큼 으스스한 분위기로 점철된 저택을 처음 마주한 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한 갈색이 도는 고성과 달리 이 저택은 창백한 푸른빛을 띠었다. 한 달만 머물러도 제 낯빛까지 푸르스름해질 것 같은 저택에 발을 들이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정말 귀신을 볼지도 모르겠다고.

땔감에 불을 지피는 방식의 고전적인 벽난로가 난방 시설의 전부인 유배지는 그깟 추위, 별것도 아니라고 거들먹거렸던 반을 한 방 먹였다. 이곳의 혹독한 날씨는 그리 만만히 여길 환경이 아니었다. 눈보라 치는 날에 건물 밖으로 나갔다가 지옥을 맛본 적 있는 반은 몸을 부르르 떨며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풍경을 등졌다.

움직이면 덜 춥다. 이 저택에 머무는 석 달간 체득한 보편적 진리이다. 보이지 않는 계급 중 최하위, 잡일꾼 신분으로 동행을 허락받은 반은 밀대를 고쳐 쥐고 복도를 마저 닦았다. 걸레질하는 대로 물 자국이 남는 석재 복도를 조금씩 나아갈 즈음이었다.

등 뒤에서 기척 없이 뻗어 온 팔이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너른 가슴과 맞닿은 등이 따스해지면서 귓바퀴에 가느다란 숨결이 스쳤다.

“왜 이제 왔어?”

놀라 움츠러든 어깨에 날렵한 턱을 얹은 남자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런 거 하지 말고 나랑 놀자.”

남자는 차갑게 식어 발개진 귓등에 여러 번 키스하며 은근슬쩍 밀대를 가져가려고 했다. 손잡이를 꽉 쥐어 빼앗기는 참사를 막은 반은 큼, 하고 헛기침했다. 이어서 허리를 감은 팔 하나도 풀어낸 후 묵묵히 밀대를 밀었다. 말없이 복도에 물 자국을 내며 나아가자 한숨을 터트린 디아가 느릿느릿 따라왔다.

“혼자 자면 춥지 않아? 나는 추운데. 아침은 잘 먹었어? 커피는? 내가 간식 줄까? 내 방에 놀러 올래? 따뜻한데….”

몰아치는 질문 세례와 유혹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에 개의치 않고 졸졸 따라오며 퉁명스러운 투로 묻는 디아가 못내 귀여웠지만 안타깝게도 맘껏 귀여워해 줄 수 없었다.

징계랍시고 섬에 가두기에 우습게 봤는데, 괜히 징계가 아니었다. 디아를 따라 섬에 들어온 사용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엠마를 비롯한 디아 관할 사용인과 르네가 선별한 사용인. 디아 관할 사용인으로만 채우면 편의를 봐줄 것을 우려해 징계 시 감시할 인원을 따로 채워 넣는 것이 규정인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낯선 사용인들의 감시하에 근신 동안 사용인 전원 디아와 대화 금지였다. 명령은 따르되 대답은 금지, 묵례는 물론 눈인사도 금지, 심지어 눈빛 교환도 금지였다. 디아는 철저히 유령 취급받았다.

처음에는 황당했다. 사람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무슨 그따위 규칙이 다 있나 싶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던가. 반은 영 내키지 않았지만 그들의 규칙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디아에게 도움은 못 되더라도 밉보일 구실이 되지 말자는 일념 하나로 졸졸 쫓아오는 남자를 무시했다. 지금도 저기 복도 끝에서 사용인 하나가 창을 닦고 있었다. 이곳에 눈길도 주지 않지만 귀는 활짝 열어 두었을 것이다.

“남편한테 이렇게 매정해도 돼?”

결국 뾰로통한 표정으로 투정 부리는 디아 때문에 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떤 심정으로 무시하는 건데, 디아는 이런 상황이 몹시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귀여운 남자를 꿋꿋하게 모르는 체하며 복도 모퉁이에서 꺾은 반은 청소 도구를 보관하는 다용도실 문을 열었다. 창이 없는 다용도실은 좁고 어두컴컴했다. 난방이 되지 않아 싸늘한 공간으로 들어서자 디아가 조용히 뒤따라 들어왔다.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밀대를 벽에 기대어 두려던 때였다. 어깨가 붙잡혀 휙 끌려간 반은 다급히 입술을 맞부딪친 디아 때문에 밀대를 놓치고 말았다. 반은 밀어붙이는 디아의 작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발에 밟힌 밀대가 덜그럭거렸다.

“음, 후으….”

바삐 혀를 섞으며 벽까지 물러서자 디아가 허리를 잡아 서랍장 위에 앉혔다. 거친 움직임 때문에 벽에 걸린 청소 도구가 와르르 떨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입 맞추는 것에만 몰두했다. 줄곧 디아를 무시했던 반은 열성적인 키스를 흔쾌히 받아 주었다. 대화가 금지이지, 스킨십 금지라고는 안 했으니까.

반은 규칙의 허점을 기꺼이 이용해 종종 디아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미 눈치챈 사용인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이 밀회를 제지하는 자가 없었다. 신혼의 열정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냐마는.

“이래도 대답 안 해? 이래도?”

성에 찰 때까지 입술을 빨다가 고개를 떨어뜨린 디아가 목을 공격했다. 여린 살갗을 질근질근 깨물고 입 맞추는 것으로 모자라 옆구리를 간지럽히기까지 했다. 유치한 공격에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대꾸하지 않자 심기가 뒤틀린 디아가 곱상한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뺐다.

“서운해, 여보.”

내뱉는 말은 애교 그득한데 정작 표정은 오싹할 만큼 서늘했다. 더 서운하게 했다가는 가만히 놔두지 않을 기세였다. 반은 허공에 뜬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창백한 뺨을 검지로 쓱 훑었다. 예쁘고 성가신 점은 어릴 때와 판박이였지만 꼴에 장성했다고 사람을 긴장하게 할 줄 알았다. 유약함을 무기로 삼던 소년에서 탈피한 디아의 단단한 콧대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서운했어?”

“응.”

“얼마나.”

“다 짜증 나서 밖에 내쫓고 싶을 정도로.”

반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를?”

“너만 빼고 다.”

이것 참 독선적인 도련님이 따로 없구만. 반은 사용인들이 들었다면 배신감을 느낄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디아의 코끝을 가볍게 꼬집었다. 제법 깜찍한 소리를 하는 남자와 좀 더 놀고 싶었지만 할 일이 산더미였다.

“좀 더 서운해야겠는데.”

“뭐?”

높은 서랍장에서 훌쩍 뛰어내린 반은 바닥에 떨어진 밀대를 주워 들었다. 무심코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디아가 미간을 구겼다. 못마땅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당긴 반은 퉁퉁 부은 입술에 쪽, 하고 짧게 키스했다.

“저 복귀하겠습니다, 도련님.”

“…벌써?”

“밥값은 해야죠.”

씩 웃은 반은 아쉬운 티를 물씬 내며 들러붙는 디아를 적당히 달래 주고 다용도실을 빠져나갔다.

근무 중에 예쁜 남자와 노닥거린 효과는 상당했다. 아까는 밤새 또 얼마나 추울까 하는 걱정에 한숨이 절로 나더니, 지금은 창을 할퀴는 서슬 퍼런 바람 소리가 낭만적인 연주로 들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신혼의 재미인가….

“큰일이다, 큰일이야….”

반은 즐거운 한탄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내딛는 걸음이 경쾌했다.

***

밤이 깊어지며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온종일 복도와 접시를 닦고 정문을 막은 눈까지 치운 반은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지도 못하고 침대에 엎어졌다.

“으윽….”

옛날이었으면 거뜬했을 일과가 다소 힘에 부쳤다. 몸이 두 번이나 박살 난 후유증으로 한 뭉텅이나 사라진 체력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자의로 떠맡은 거라 달리 불평할 곳도 없었고, 디아에게 말해 봤자 호들갑 떨며 과보호하려고 들 테니 혼자 앓는 편이 나았다. 골골대는 노인네 취급은 싫은 데다가 몸이 조금 고되더라도 노동을 하고 싶었다.

경우 없는 상전을 모시는 죄로 함께 이곳에 처박힌 엠마는 반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결혼으로 인해 암묵적인 계급이 올라가 노동에서 제외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귀하신 도련님과 결혼하든 말든, 허구한 날 뒹굴든 말든 반은 여전히 계급 최하위였다. 사용인을 발끝으로 부리며 살고픈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다.

어떤 이유든 간에 휴식은 반길 만한 것이라, 섬에 도착한 반은 제게 주어진 작은 방에서 온종일 뒹굴뒹굴했다. 고성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방이었지만 전에 살던 아파트에 비하면 궁궐이 따로 없었다. 분명 좋았다…. 딱 사흘까지는. 반은 엠마가 어째서 제게 일거리를 주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휴식을 취하라는 배려인 줄 알았더니 원한이었다. 빌어먹을 사랑놀이에 휘말려 이 섬에 처박힌 것에 대한 원한이 틀림없었다.

인터넷 안 되지, 핸드폰 없지, 그렇다고 웨인에게 감금당했을 때처럼 보드게임이나 퍼즐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눈보라와 추위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안면 있는 사용인들은 고성에서와 매한가지로 반을 슬금슬금 피했다. 그나마 대화를 받아 주는 엠마는 바빴고, 반은 저 멀찍이서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사용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힐끔거리고는 했다. 거참 한 번만 끼워 주지….

결국 숨 막히는 무료함과 소외감을 이기지 못한 반은 근신 나흘째에 잡일꾼을 자처했다. 디아는 왜 사서 고생이냐고 만류했지만, 한 놈이 굽힐 줄 모른다면 다른 한 놈이라도 반성하는 시늉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반은 무급 노동을 통해 지루함도 덜고, 반성하는 척도 하기로 했다. 역시 자신은 어른스러우며 합리적이라고 자화자찬한 반은 엎어진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휴식은 이쯤 하고… 우리 이쁜이나 보러 갈까.

바닥난 체력을 회복한 반은 미리 준비해 둔 램프를 챙기고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고성에서보다 1시간 일찍 소등하는 탓에 복도는 온통 컴컴했다. 발뒤꿈치를 들어 올린 반은 복도를 따라 늘어진 방문 앞을 살금살금 지나쳐 써늘한 한기가 감도는 계단을 내려갔다. 본관과 이어진 통로 문과 별관 정문은 이미 잠겨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시간이었지만 반에게는 다 방법이 있었다.

별관 1층 주방 구석에는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석재로 사면을 마감한 저택의 지하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마치 중세 시대 고문실을 연상시켰다. 처음에는 발도 들이기 싫어 머뭇거렸으나 두 달간 이 오싹함에 완벽히 적응한 반은 램프로 발밑을 비추며 걸음을 옮겼다.

식량 창고를 지나쳐 커피 원두나 찻잎을 종류별로 보관하는 작은 창고 문을 열자 여타 창고와 다르지 않은 광경이 보였다. 달라진 곳은 없나, 하며 램프로 주위를 비추어 보다가 벽 한구석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묵직한 장식장 하나가 있었다. 램프를 바닥에 내려 둔 반은 장식장 옆면을 양손으로 짚고 옆으로 밀어 냈다. 바닥을 끼익 끼익 긁으며 밀려난 장식장에서 손을 떼고 시선을 내리자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개구멍이 나타났다.

반은 ‘디아를 만날 방법’인 시커먼 구멍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런 음침한 저택에 비상 통로 하나 없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샅샅이 뒤지고 다닌 끝에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이전에 머문 외계인도 사용인과 밀회를 즐겼는지, 아니면 식량을 몰래 빼먹으려고 파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후대가 유용하게 쓰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얼굴도 모르는 외계인에게 감사 인사를 올린 반은 냉큼 구멍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개구멍 이용자는 체구가 꽤 작았는지, 반에게는 여간 비좁은 것이 아니었다. 제게도 좁은 구멍이 디아에게는 어떻겠는가. 곱상하게 생겨서는 어깨가 어찌나 넓은지 머리 아래로는 진입조차 못 했다. 구멍을 폭파하겠다, 잠긴 문을 부수겠다, 반성의 기미 없이 길길이 날뛰는 디아를 간신히 타이른 반은 본인이 희생하기로 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그리하여 반은 매일 밤 본관과 별관을 잇는 좁은 굴을 포복으로 기어 다니는 중이었다.

“하아…. 내가, 참 어쩌다가….”

끙끙거리며 중간 지점을 지난 반은 조그맣게 한탄했다. 그놈 얼굴 한번 보자고 매번 이런 개고생을 하다니. 귀찮다는 생각도 안 드는 걸 보면 디아를 보통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남자를 떠올리며 힘을 얻고 꿈틀꿈틀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출구가 보였다. 램프 먼저 구멍 밖에 꺼내 둔 다음 고개를 쑥 내민 반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지하실을 차지한 장작더미는 보이는데, 기다리고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구멍 아래 도톰하게 깔아 둔 러그를 짚고 다리까지 끄집어낸 반은 손바닥에 묻은 먼지를 털며 툴툴거렸다.

“이제 마중도 안 나온다 이거지….”

이거야 원 섭섭해서 살겠나. 혀를 차며 어두운 저택에서 눈이 되어 주는 램프를 챙겨 든 반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시꺼먼 돌바닥에서 무언가 반짝거렸다. 반은 벽돌 틈새에 낀 것을 주워 들어 눈 가까이 가져왔다.

“…오.”

반지였다. 핏빛 루비가 박힌 두꺼운 금반지는 유물처럼 보일 만큼 예스러운 디자인이었다. 값이 제법 나갈 것 같은 반지를 유심히 살핀 반은 ‘이거 나 달라고 해야겠다’라며 그것을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슬슬 일어나야겠다 싶어 무릎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저 끝에 무언가 또 있었다. 반은 쪼그린 채로 슬금슬금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들었다. 금속이 서로 부딪치며 차르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목걸이였다. 그것도 푸른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사치스러운 목걸이. 박물관에 있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목걸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은 램프를 멀리 떨어뜨려 방을 비추었다. 살짝 열린 문 틈새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입꼬리가 움찔움찔 올라갔다. 탐욕스러운 성정에 부합하는 유인책에 완벽하게 걸려든 반은 헨젤과 그레텔이 뿌려 둔 빵 조각처럼 길을 표시하는 귀금속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열 걸음 거리를 두고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장신구는 디아의 침실이 자리한 복도로 반을 이끌었다. 눈을 멀게 하는 반짝거림에 홀린 반은 장신구를 줍느라 경로가 익숙하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외투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입이 귀까지 찢어졌을 무렵, 반은 저택 2층 복도 끝자락에 멈추어 섰다.

색이 진한 에메랄드가 박힌 브로치를 거머쥐고 뿌듯하게 웃으며 허리를 세웠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새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와 팔뚝을 낚아챘다.

“헉…!”

새된 비명이 튀어나오려던 입이 틀어막힌 반은 방심한 새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닫힌 문짝에 등을 쿵 부딪쳤다. 떨어뜨린 램프가 데구루루 굴러가다가 멈추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램프에서 흘러나온 노르스름한 빛이 큼직한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남자의 얼굴에 고였다. 숨도 쉬지 못하고 코앞에 위치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응시하던 반이 긴장한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람 놀라게 하는 데는 선수인 남자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야아…. 놀랐잖아.”

입을 막은 손을 떼어 내며 타박하자 디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늦었어. 어제보다 십 분이나.”

“내가 십 분이나 늦었다고? 우와…. 잘못했네.”

“대체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친구라도 만들었어?”

짐짓 놀란 척 묻자 뺨을 감싼 디아가 가벼운 키스와 투정을 쏟아부었다. 불만스러울 때마다 쌀쌀맞게 쏘아붙이는 말버릇이 미울 만도 한데 몇 시간 못 봤다고 안달 나 비비적거리는 행동 때문에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이마와 뺨에 스치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키득거리던 반은 턱을 들어 키스를 받아 주면서 사랑스러운 어리광에 어울렸다.

“친구는 무슨. 아무도 나랑 얘기 안 해 주던데. 밥도 혼자 먹고, 일도 혼자 하고, 말할 사람도 없고. 진짜 심심해.”

“나는 그거 다 해 줄 수 있는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틈을 타 턱 끝과 목울대에 입술을 비비던 디아가 단조로운 투로 살살 꾀어냈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꼬시려고 시도하는 점은 높이 사 줄 만했다. 그렇지만 놈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았다. 눈을 게슴츠레 뜬 반은 외투 속으로 은근슬쩍 손을 집어넣는 디아의 턱을 한 손으로 쥐고 가까이 당겼다.

“솔직히 말해. 네가 시켰지?”

금빛 속눈썹에 감싸인 눈이 두 번, 세 번 느리게 깜박였다. 시선을 피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고 멀뚱멀뚱 바라보는 디아의 뺨을 손끝으로 꾹 눌러 재촉했다. 대답 안 할래. 일부러 목소리를 착 깔자 녹안을 스르륵 굴린 디아가 뻔뻔하게 모른 체했다.

“그런 적 없어.”

딱 봐도 시켰구만. 아랫입술을 비죽 내민 반은 저를 외톨이로 만들기 위해 공작도 서슴지 않는 남자에게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는데 방법이 영 괴이쩍었다. 한 대 쥐어박고 싶기는커녕 뽀뽀나 해 주고 싶은 제 심리도 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만 디아에게 푹 빠진 자신을 인정하기로 하고 놀란 와중에도 손에서 놓치지 않은 브로치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이거는 나 달래 주려고?”

손바닥만 한 브로치는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났다. 짓궂게 웃은 반은 디아의 눈동자 색깔을 빼닮은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얼른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예의상 한 번 물어봤다.

“진짜 이거 다 내가 가져도 돼? 뭐라고 하는 거 아냐?”

새파랗게 어린 연인의 호주머니를 살살 털어먹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기껏 준 선물을 마다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부유하고 인심 후한 연인의 이점을 기꺼이 누릴 준비가 된 반은 뽀뽀나 잔뜩 해 줄 심산으로 실실 웃다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선뜻 가지라고, 네 거라고 말해야 할 디아가 조용했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면서 대답을 망설이는 남자의 낯에 일순 곤란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굳은 반은 눈을 끔벅거리며 깨끗한 뇌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숨을 들이켰다.

“아. 아아. 장난이구나. 돌려줘야지, 그치. 내가 봐도 좀 이상했어. 어디 보물 같아서…. 자. 혼나면 안 되지.”

부풀어 오른 기대가 푸시시 꺼지며 어깨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한 움큼 잡히는 장신구를 주머니에서 꺼낸 반은 디아의 손바닥 위에 주먹을 올렸다. 바닥에 떨어진 장신구를 싹싹 긁어모으며 잠깐이나마 행복했던 것으로 위안해도 좀처럼 허망함을 떨칠 수 없었다. 어서 달라는 듯이 손을 살짝 흔드는 디아를 흘끔거리다가 천천히, 그가 마음을 바꿀 충분한 시간을 준 후 손가락을 폈다.

손바닥에 차르륵 쏟아진 목걸이와 브로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디아가 순간 샐쭉 웃었다. 주먹을 움켜쥐어 장신구를 빼앗아 간 디아는 시무룩해진 반의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누가 누굴 혼내.”

그 한 마디와 함께 주머니가 도로 묵직해졌다. 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디아를 올려다봤다. 장난치는 일이 드문 디아의 눈꼬리에 웃음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반은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붙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난이야?”

“장난이야.”

“가져도 돼?”

“가져도 돼.”

아쉬운 마음이 컸던 만큼 감동은 두 배가 되어 돌아왔다. 농지거리할 때가 아니고서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낯간지러운 호칭이 애정을 흠뻑 머금고 튀어나왔다.

“여보….”

“이럴 때만….”

비소에 가깝지만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한 미소를 지은 디아가 손을 꽉 움켜쥐었다. 몸이 앞으로 확 당겨진 반은 휘청거렸다가 내달리는 디아와 발을 맞추었다. 덩그러니 놓인 램프를 챙길 여유 따위 없었다. 옷깃 새로 스며드는 매서운 한기마저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불 한 점 없는 캄캄한 복도를 딛는 발소리가 쥐새끼 한 마리 없는 본관에 울려 퍼졌다. 모두가 잠든 밤, 드디어 신혼부부의 시간이 왔다.

침실 문이 열리자 훈훈한 공기가 몸을 에워쌌다. 반과 밀회하는 밤이 오면 타오르는 벽난로에서 마른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다급히 입을 맞추며 서로의 옷가지를 벗겼다. 양쪽 주머니가 꽉 찬 외투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뒷걸음질로 두꺼운 외투를 짓밟은 반은 디아의 셔츠 단추를 풀다 말고 침대로 쓰러졌다. 그 위로 올라탄 디아는 차갑게 언 반의 귀와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매번 장난스러운 말을 내뱉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반의 입술을 쪽 빨아들인 디아는 도톰한 니트를 끌어 올리며 속닥거렸다.

“그 청소 계속해야 돼? 귀찮잖아. 나랑 여기서 매일 놀자.”

“하아….”

반은 숨을 헐떡이며 양팔을 들어 니트 벗기는 걸 도와주었다. 정전기 탓에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내버려 둔 채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계속 놀면? 온종일 이러고 있자고?”

“내 꿈이야.”

“꿈이 너무 야하신데….”

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디아를 흘겼다. 램프를 대신하여 화광을 퍼뜨리는 벽난로 덕에 디아의 섬세한 얼굴선에 불그림자가 일렁였다. 결혼식을 올린 후로 제법 순해진 남자가 ‘응. 나 야해’ 하며 귀여운 헛소리를 지껄였다.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트린 반은 한순간 몸을 휙 굴려 위아래를 바꾸었다. 디아를 깔고 앉아 못다 벗긴 셔츠를 어깨 너머로 끌어 내리며 뻔뻔하게 생색냈다.

“벌받는데 놀면 안 되지. 지금 이것도 원래는 안 되는 건데 내가 특별히 와 주는 거야.”

“전부 다 안 된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까는 디아는 그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켰다. 처연한 모습에 때아닌 장난기가 솟구친 반은 구겨진 셔츠를 침대 밖으로 던지며 디아를 골렸다.

“원래는 말이야. 난 시종으로 왔으니까 본분에 맞게 잡일이나 하면서…!”

말을 끝맺기도 전에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다. 겨우 우위를 차지하자마자 빙글 굴러 침대에 처박힌 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껌벅였다. 눈 깜짝할 새 허벅지를 타고 오른 디아가 반의 바지 버클을 빠르게 풀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럼 본분에 맞게 굴어.”

“본분이라고 하면…?”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해야지. 내가 주인이니까.”

웃는 법을 모르던 고운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수줍다기보다 언뜻 능글맞아 보이는 미소를 지은 디아가 골반에 걸린 바지를 허벅지 아래로 끌어 내렸다.

반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릴 적에는 예쁘장한 외모를 앞세워 동정심을 자극하더니 다 커서는 제법 혹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꼬드길 줄 알았다.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내심 이런 가벼운 역할극이 달갑기도 한 제 마음을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 아무렴 어떤가. 꼴리면 그만이지.

“…예, 도련님.”

반은 실실 웃으며 발목까지 내려간 바지를 휙 벗어 던졌다.

까마득하게 어린 애인에서 교만한 도련님으로 돌아간 디아는 삐뚜름한 말씨와 상반되는 태도로 반을 녹여 먹었다. 귀하신 도련님께 봉사 받는 입장이 된 반은 숨을 들이켜며 사타구니에 쏟아진 금빛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흐으…. 읏….”

입술을 꼭 깨물어도 흘러나오는 신음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잇자국이 남은 입술을 놓아준 반은 세운 무릎을 당기며 허리를 비틀었다. 뒤척임이 커지자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디아가 반의 골반을 양손으로 딱 쥐어 침대에 내리눌렀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반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한숨을 내쉬고는 아래를 힐끔 내려다봤다.

핏줄 돋은 채로 꼿꼿하게 선 성기는 평소보다 두 배는 붉었다. 얼마나 물고 빨고 만지작거려야 저 지경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반은 열이 올라 뜨끈해진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손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디아….”

무시하는 건지, 안 들리는 건지 몇 번을 불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속눈썹이 빽빽하게 돋은 눈을 착 내리깐 디아는 성기를 할짝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혀를 넓적하게 만들어 기둥을 핥았다가, 입술을 모아 귀두를 쪽 빨아 봤다가, 내친김에 목구멍까지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하다가도 사정이 가까워지려고 하면 귀신같이 입술을 물렸다. 사정을 코앞에 두고 멈춘 것만 해도 지금이 몇 번째인가. 족히 네 번은 될 것이다. 한두 번이면 서로 즐겁겠지만 그 이상은 괴로울 뿐이었다.

“읏, 디아…. 야, 조옴….”

장작을 때도 덥다고는 할 수 없는 기온임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까딱 이성을 잃었다가는 디아의 머리를 끌어안고 좁은 목구멍에 처박을 것 같았다. 아무리 애가 타도 사람이 경우가 있지, 디아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반은 별도리 없이 골반을 움켜쥔 디아의 손을 더듬더듬 붙잡고 감질나는 쾌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발끝에 힘을 주고 시트를 밀어 냈을 때, 감 하나는 좋은 디아가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움직이지 마….”

한때는 키스, 요즘은 오럴에 집착하는 디아가 도드라진 핏줄을 할짝대며 중얼거렸다. 뜨거운 숨결이 한계에 다다른 성기에 스치자 허벅지가 움찔 떨렸다. 무심결에 무릎을 확 오므린 반은 디아의 작은 머리를 허벅지로 조이며 간신히 사정감을 가라앉혔다.

“하아…. 그만 좀….”

은밀한 부위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부탁했지만 디아는 들은 체도 안 했다. 되레 오랜 키스로 인해 퉁퉁 부은 입술을 벌려 이미 침 범벅인 귀두를 쪽 빨았다가 도로 뱉으며 얄밉게 굴었다.

“흣…!”

“반항도 하네. 시종 주제에.”

매번 허겁지겁 몰아붙이는 데 급급했던 디아는 외딴섬에 갇힌 후 열에 여섯 번 정도는 여유롭게 굴었다. 화려하기가 여느 축제 못지않은 결혼식으로 반의 지인에게 눈도장을 쾅 찍은 것과 더불어 쇄빙선 없이는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 그의 마음가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모양이었다. 물론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애무로만 한 시간을 꼬박 채우고 본 게임이 끝나면 진이 다 빠져서 꿈쩍도 할 수 없지만 만족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 도련님…. 디아, 좀….”

다만 너무 괴로웠다. 남의 좆이 장난감도 아니고 대체 매일 밤 뭐 하는 짓인지 모를 일이었다. 자극은 계속해서 주어지는데 발산하지 못하니 열기가 한계까지 차오른 온몸이 벌벌 떨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시트를 마구 구기고, 뜨거운 눈두덩이를 꾹 누르고, 다리를 버둥거리며 안달복달하다가 마침내 결심했다. 미안하지만 더는 참기 힘들었다. 어린 애인에게 할 짓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애초에 반은 양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혀를 뾰족하게 세워 귀두 끝을 괴롭히는 디아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눈만 힐끔 올려 쳐다보는 디아와 시선을 맞춘 반은 달아오른 얼굴로 슬며시 웃었다.

“…이런 거 좋아하시죠?”

손에 힘을 주어 디아의 머리를, 정확히는 그의 입술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쿠퍼액과 타액이 흥건하게 묻은 귀두가 도톰한 입술을 꾹 눌렀다. 건방진 도련님과 힘없는 시종 역할극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

“…응.”

그러나 디아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반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거부 없이 입술을 벌렸다. 입술 새로 새빨간 혀와 시커먼 목구멍이 엿보였다. 나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스멀스멀 치밀었지만 허울뿐인 도덕심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 반은 그가 머리를 물리지 못하게 고정하고 허리를 살짝 쳐올렸다. 번들거리는 귀두가 디아의 입 속으로 깊이 밀려 들어가자 미미하게 남은 자책도 완전히 증발했다. 이제 희롱당하는 쪽은 도련님이었다.

“하아…. 후….”

눈을 가늘게 뜬 반은 턱을 젖히며 디아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것은 다분히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살덩이가 뜨겁고 좁은 목구멍으로 들어가면서 바짝 긴장한 아랫배가 경련했다.

“아, 흣…. 좋아….”

“커흑…. 큭!”

갑작스러운 진입에 숨통이 막힌 디아가 잔기침을 토했다. 목구멍이 확 조이며 아찔한 쾌감이 눈앞을 어지럽혔지만 마냥 달가워할 수는 없었다.

“어, 잠깐….”

놀란 반이 성욕을 뒤로하고 머리를 밀어 내려고 했으나 그는 고통을 주는 성기를 뱉는 대신 반의 허벅지를 팔뚝으로 옭아매고 도리어 고개를 파묻었다.

“흡…!”

얼마 남지 않은 기둥이 동굴 같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타구니에 윗입술이 닿자마자 전류와 비슷한 쾌감이 발끝까지 찌르르 울렸다. 어깨를 옹송그린 반은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강하게 붙들고 본격적으로 성기를 빨기 시작한 디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 읏, 디아, 헉…!”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뚝 떨어졌다. 황급히 이를 악물었으나 꼴사나운 신음이 잇새로 마구 튀어나왔다. 디아는 볼이 홀쭉해지도록 힘을 주고 젖은 성기를 정신없이 빨았다. 가랑이 사이에 자리한 작은 머리통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상스러운 소리가 장작 타는 소리와 뒤섞였다. 성기를 끊어 먹을 듯이 조이는 목구멍이 주는 쾌락에 완전히 잠식된 반은 목에 핏대를 세운 채로 욕설을 짓씹었다.

“하아…. 아…!”

끔찍할 만큼 기분 좋았다. 허리가 허공에 뜨고 엉덩이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날이 갈수록 봉사하는 실력이 쑥쑥 느는 디아에게 패배감을 느낄 틈도 없었다. 쾌락에 휩쓸려 안광이 흐려진 반은 디아의 머리를 붙잡고 허리를 툭툭 쳐올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은 디아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때아닌 헛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기가 막혀서 시트 위를 배회하던 손을 들어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손바닥마저 델 듯 뜨거웠다.

“야아….”

욕정 하나 조절 못 해 새파랗게 어린놈 목구멍에 좆을 처박는 저도 문제지만, 눈이 탁 풀린 채로 남의 성기를 게걸스럽게 빠는 디아도 만만치 않았다. 창백한 피부 덕에 붉어진 눈가와 뺨이 도드라진 디아는 금빛 속눈썹을 움찔움찔 떨면서 악착같이 목구멍을 열었다. 도톰한 입술에 희끄무레한 액체를 잔뜩 묻힌 디아가 위를 힐긋 올려다봤다.

“흐으…. 우윽….”

눈꺼풀에 반쯤 가려진 녹안은 평상시의 날선 기세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흐리멍덩하기만 했다. 디아는 듣기만 해도 제가 다 버거운 신음을 뱉으며 허벅지 근육이 뻐근해질 정도로 강하고 빠르게 성기를 빨았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꼴이었다.

이걸 밝힌다고 해야 할지, 맛이 갔다고 해야 할지…. 남의 성기를 빨면서 느끼는 놈은 난생처음이었다. 동시에 이렇게 야한 표정을 짓는 놈도 처음이었고.

궁지에 몰린 반은 방심할 때마다 기억 속에서 튀어나와 양심과 도덕성을 난도질하는 디아의 어린 시절을 지우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때마침 거부감과 비례하는 강한 사정감이 왈칵 덮쳐들었다.

“으읏…!”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이 사이사이 얽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사정을 예감한 디아는 반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터트릴 듯 쥐고는 사타구니에 코끝을 깊이 파묻었다. 허리를 띄운 반은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시트를 발끝으로 밀어 내며 흠칫흠칫 떨었다.

“하아…! 아, 으….”

시야가 꺼멓게 점멸했다. 사정을 코앞에 두고 몇 번이나 저지당한 여파가 강한 반동으로 돌아왔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수축한 근육이 한 번에 풀어지며 사지가 축 늘어졌지만 온갖 색이 뒤섞여 어지러운 시야는 좀체 걷히지 않았다. 반은 팔다리를 움칠움칠 떨며 쉬이 사라지지 않는 여운에 잠겼다.

뿜어져 나온 정액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꿀떡꿀떡 삼킨 디아가 머리를 물리면서 귀두 끝까지 조인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의 목구멍에서 천천히 빠져나온 성기는 온갖 액체로 범벅되어 탐스럽게 번들거렸다.

“으, 흣….”

“하아…. 좋은가 봐….”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 주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반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핥은 디아가 상체를 숙였다. 반은 몸을 겹치는 남자를 떨리는 팔로 끌어안으며 아직 모자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디아는 마찬가지로 거칠게 헐떡이며 제 배우자의 목과 뺨에 셀 수 없이 많은 키스를 남겼다. 반은 학을 떼지만 디아에게는 버릇과도 같은 자국을 수없이 새기던 중 뺨이 감싸였다.

아직 떨림이 가시지 않아 도리어 경직된 듯한 손아귀에 얼굴을 붙잡힌 디아는 이끄는 대로 끌려가 반을 마주했다. 맥이 풀려 여느 때보다 더욱 헤픈 분위기를 풍기는 반이 이마와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꺼운 손길에 자연스럽게 눈을 감은 디아의 귀로 살짝 쉰 듯 허스키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아.”

아랫입술을 슬며시 누르는 엄지에 맞추어 ‘아’ 소리 내며 입술을 벌렸다. 반은 벙긋 입술을 벌린 디아의 입 속으로 엄지를 밀어 넣고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고른 이와 두툼한 혀를 만지작거리며 샅샅이 살펴봤지만 입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반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미간을 슬쩍 구겼다.

“그걸 왜 자꾸 삼키는 거야? 맛있어?”

“내 거니까.”

뻔뻔하고 한결같은 답이 흘러나왔다. 집요한 펠라와 사정으로 인해 진이 빠진 반은 걸고넘어질 부분이 한둘이 아닌 디아의 주장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디아의 꾸준한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놈의 소유였다. 이유도 논리도 없었다. 이어지는 말은 더했다.

“전부 다 내 거니까 쌀 거면 내 입에다가 싸.”

가정 교육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었다. 디아의 허벅지에 다리를 비비적거리던 반이 실바람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따위 말버릇은 가르쳐 준 적 없었다. 이런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면 그때 성교육을 똑똑히 해 뒀어야 하는 건데 말이다.

“뭐… 원하신다면.”

이따금 양심을 후벼 파는 디아의 언행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만큼 염치없어진 반은 불그스름한 입꼬리에 쪽쪽 입 맞추며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드로어즈 한 장만 걸친 디아의 하체는 이미 끈적끈적한 액체로 범벅된 상태였다. 속옷의 기능을 잃은 젖은 드로어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꺼떡거리는 성기를 쥐었다.

“읏….”

“빨면서 대체 몇 번이나 싼 거야?”

“하아…. 모르겠어….”

기분 좋다는 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는 디아의 초승달 모양 흉터에 입술을 비비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얽은 채로 그의 위에 올라탄 반은 근육 모양이 선명한 배에도 키스를 남겼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배 근육이 움찔움찔 떨리고 미끄러운 귀두에서 정액이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정액량에 적응한 반은 별달리 놀라지도 않으며 꾸물꾸물 아래로 내려갔다.

보송보송한 상태가 있긴 했던가 싶을 정도로 항상 흥건한 귀두를 엄지로 쓱쓱 쓸어 보면서 디아의 눈치를 살폈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울 때를 노려야 성공 가능성이 올라갔다. 반은 그가 이성을 되찾기 전에 얼른 입술을 벌렸다. 붉은빛 귀두를 입에 머금기 직전, 겨드랑이로 큼직한 손이 파고들었다.

“어….”

귀두를 코앞에 두고 순식간에 끌려 올라간 반은 목에 쪽쪽 입 맞추는 디아의 품에 갇혔다.

“반 너무 좋아….”

좋아 죽겠다는 분위기를 발산하며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 힘껏 주무르던 디아가 정액을 듬뿍 떠낸 중지를 골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좀처럼 쉴 시간이 없는 주름을 세게 문지르는 손가락이 야릇한 감각을 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허탈했다. 반은 몰래 혀를 찼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우습게도 반은 디아의 좆을 마음껏 빨아 본 적이 없었다. 야한 짓이라면 환장하는 디아가 오럴만은 거부한 탓이었다. 남의 성기는 짓무를 때까지 쪽쪽 빠는 것으로 보아 오럴에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닌 듯한데 본인이 받는 것은 수상할 정도로 꺼렸다. 오기가 생긴 반은 디아가 잘 때를 노려 몇 번 빠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몽땅 실패했다. 정말 싫은가 보다, 하고 넘어가자니 괜히 열이 받았다. 매일 밤 자존심 버리고 애원하게 해 놓고 본인은 구렁이처럼 빠져나가시겠다…. 지기 싫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태도이지 않나.

곧 죽어도 오럴을 허락하지 않는 디아에게 안겨 또 한 번 빙그르르 구른 반은 오금을 붙잡고 다리 사이에 자리 잡는 남자를 내버려 두었다. 오늘은 넘어가지만 이번 주 내로 꼭 성공하고 말리라고 굳게 다짐하며 삽입을 시도하는 디아를 거들어 허리를 들어 주었다.

***

이곳의 새벽은 오한으로 알 수 있다. 밤새 장작을 남김없이 태운 벽난로가 꺼지면 창문 틈새로 스며든 한기와 따스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희미한 햇빛이 알람 시계 역할을 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동시에 눈을 뜬 반은 미적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눈보라는 그쳤지만 창을 할퀴는 칼바람은 여전했다. 푸르스름한 새벽하늘을 멍하니 응시하던 반은 느지막이 침대에서 빠져나와 여기저기 흩뿌려 둔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품에서 빠져나간 연인을 찾기 위해 텅 빈 매트리스를 손바닥으로 더듬던 디아가 덩달아 잠에서 깼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상태로 저를 찾는 디아를 발견한 반은 바지 버클을 채우며 하얀 이마에 키스를 남겼다.

“깼어? 잘 잤고?”

“…잘 자다가 말았어.”

“더 자면 되지.”

니트를 껴입으며 말하자 베개에 뺨을 파묻고 엎어진 디아가 미간을 구겼다. 소매를 정리한 후 미간에 잡힌 주름을 툭 건드렸더니 온기를 품은 손이 손목을 붙들었다. 어제도, 엊그제도 발목을 묶었던 억지가 당연한 수순으로 따라왔다.

“가지 마. 나랑 있자.”

붙든 손목을 좌우로 느리게 흔들며 보채는 미인은 마음을 녹이기 충분했으나 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릴 뿐이었다.

“에고…. 어떡하죠. 가야 하는데요.”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서도 잘난 외모를 자랑하는 반이 느슨하게 처진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더 질척거려 봤자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구 떼를 쓰고 싶어지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반은 다른 때는 못 이기는 척 디아의 의견을 따라 주면서 이 부분만큼은 제법 확고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한탄한 디아는 내키지 않는 티를 보란 듯이 내며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럼 난 밤까지 뭐 해? 너 없이 하루 종일 뭐 하지?”

서운하고 아쉬운 기색이 짙게 밴 투정은 애교에 가까웠다. 묵직한 외투를 주워 들던 반은 때로는 신기할 정도로 감정에 솔직한 디아를 웃음 스민 눈으로 바라봤다. 저렇게 예쁘게 구는데 하루쯤은 넘어가 줄까 싶다가도 저택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르네의 심복이 마음에 걸렸다. 징계받는 당사자가 제 처지를 쥐뿔도 생각하지 않으니 배우자 겸 양육자가 바른길로 이끌어 줘야 하지 않겠나. 디아가 고분고분 징계를 받도록 설득하는 조건으로 동행을 허락받은 반에게는 선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책 읽고 있어. 올 수 있으면 바로 올게.”

“올 수 있으면 오는 게 아니라 무조건 와.”

“여부가 있겠습니까. 좀 더 자.”

사랑스러운 남자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헤집고 방을 나서려던 반은 발뒤꿈치로 바닥을 찍고 빙글 돌아섰다. 침대에 훌쩍 뛰어든 반은 주머니 속 브로치를 꺼내 자랑하듯 흔들었다. 별말 없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디아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고 얼굴 곳곳에 쪽쪽거리며 뽀뽀했다.

“난 진짜 너밖에 없다. 어떻게 이렇게 예쁘지? 왜 자꾸 이쁜 짓만 하지?”

“그럼 가지 마….”

야한 짓만큼이나 귀염 받는 것을 좋아하는 디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손바닥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마음이 흐물흐물 녹는 모습이었으나 잠이 덜 깨 온순해진 남자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벗어나는 편이 좋았다.

“에이, 내가 아예 안 온다는 것도 아니고.”

허리를 껴안고 늘어지는 디아의 품에서 슬쩍 벗어난 반은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든 뒤 뒷걸음질로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 유들유들한 장난질에 디아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조용히 침실 문을 닫은 반은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발을 재게 놀렸다. 아침 식사 준비 시간과 맞물릴 위험은 피하는 편이 좋았다.

복도에 나뒹구는 램프를 옆구리에 끼고 개구멍을 빠져나온 반은 장식장을 원위치로 돌려 두고 주방으로 올라갔다. 낡은 문짝에 귀를 대고 집중했지만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주방을 담당하는 사용인들은 이제 막 깨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어슴푸레한 주방을 둘러본 반은 안심하고 발을 내디뎠다.

손가락 마디에 건 램프를 덜렁덜렁 흔들며 주방을 빠져나가는 반에게 긴장감은 엿보이지 않았다. 사용인 눈을 피해 개구멍을 들락날락하는 두 달 동안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았던 것이 악수로 작용했다. 방심한 반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주방 모퉁이를 돌았다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곳에는 예순 남짓으로 보이는 빼빼 마른 남자가 있었다. 새벽 댓바람부터 사용인에게 지급되는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노인은 ‘깐깐함’이라는 단어를 의인화한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인상이었다. 이름은 프레드, 르네가 심은 심복 중 하나였다.

좆 됐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반은 생각 없이 흔들던 램프를 고쳐 쥐고 멀끔한 미소로 프레드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기본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지만 간혹 도움을 주는 엠마와 달리, 조금도 인연이 없는 데다가 소속까지 다른 프레드는 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동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결혼으로는 그들의 커뮤니티에 속할 수 없다는 뜻을 프레드를 통해 보여 주는 듯했다. 평소 반을 없는 사람 취급 하는 프레드는 주머니가 불룩한 외투와 램프를 흘긋거리더니 예의 바른 말씨로 물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도 전, 상당히 이른 시간에 주방에서 나온 사람에게 던질 법한 질문이었다. 찔리는 것이 많은 반은 천연덕스럽게 선반으로 손을 뻗어 빳빳한 종이로 포장한 빵 한 덩이를 집어 들었다.

“배가 너무 고프더라고요. 참았어야 했는데, 제가 또 그러질 못해서.”

“식사량이 모자라시나요?”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어제 눈을 열심히 퍼 날랐더니 새벽부터 배가 고팠던 모양이라고 변명한 반은 슬그머니 발끝을 틀었다. 오래 붙잡혀 있을수록 불리했다.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반은 살살 눈웃음을 치며 냉큼 주방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프레드는 뒷덜미를 잡아 추궁하지 않았다.

모퉁이를 한 번 더 꺾어 프레드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반은 그때야 진저리를 치며 보폭을 키웠다. 저를 바퀴벌레 보듯 하는 고성의 사용인들이 천사로 보일 만큼 르네가 보낸 사용인들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미셸과 비슷한 연배의 노인을 껄끄러워하는 제 성질도 한몫했겠지만 프레드는 개중에서도 남달랐다. 수십 년에 걸쳐 진화한 엠마를 보는 것 같달까. 아무튼 기분 나쁜 노인네였다.

방으로 돌아온 반은 디아에게 받은 장신구를 옷장에 꼭꼭 숨기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경직된 목덜미를 주무르며 주방에서 훔쳐 온 빵을 으적으적 씹어 넘겼다. 아무래도 오늘 밤부터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성싶었다.

***

벽난로를 마주하고 놓인 소파는 장신인 두 남자를 넉넉히 포용할 정도로 길었지만 나란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넓지는 않았다. 늘어뜨린 몸뚱이를 겹친 두 남자는 털이 복슬복슬한 담요 한 장을 함께 덮은 채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반은 불씨가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을 멀거니 응시하며 소파 밖에 내놓은 발끝을 까딱거렸다. 답지 않게 깊이 고민하는 반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고리타분한 연애 소설을 읽던 디아가 고개를 돌렸다. 본디 성정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민한 디아는 제 배우자에 관해서는 유달리 날카로웠다. 물끄러미 바라보길 십여 초, 장작에 박혀 있던 시선이 스르륵 돌아왔다. 뒤늦게 디아의 시선을 눈치채고 눈을 살짝 크게 뜬 반이 능청스러운 미소로 당황한 심경을 감추었다.

반은 디아의 턱을 감싸 저를 향한 시선을 소설책으로 돌려 주었다. 얌전히 책을 읽는 남자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다가 고민의 주체와 연관된 서론을 넌지시 꺼냈다.

“혼자 있을 때 있잖아. 좀 어때?”

“심심해. 왜?”

“음…. 나 여기 오는 날 조금, 진짜 조금 줄여야 할 것 같은데.”

반은 두 손가락으로 티끌만 한 무언가를 표현하며 단어 하나에도 민감하게 구는 디아를 자극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가벼운 말투에 두루뭉술한 단어를 선택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디아는 반의 입에서 나오는 별것 아닌 단어에도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질려?”

빽빽한 활자에 눈을 고정한 디아가 듣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문장을 입에 올렸다. 누군가는 장난삼아 하는 말이지만 그걸 디아가 꺼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디아의 어조는 날씨를 묻듯 몹시 산뜻했으나 이는 함정이었다. 훈훈한 방 온도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반은 난처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여기서 한 발 삐끗했다가는 그대로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다. 추궁과 독촉, 의심이 득시글거리는….

“무슨 그런 소리를…. 우리 이쁜이는 매일매일 봐도 새롭지.”

반은 성가시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디아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귓바퀴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요새 들어 적당한 길이를 유지하는 머리카락은 손가락 사이에서 가지고 노는 재미는 덜했지만 뺨에 비비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제법 기분 좋았다. 달콤한 말로 디아의 예민한 기색을 누그러뜨린 반은 짧은 머리칼에 코를 비비적거리다가 슬쩍 손을 뻗었다.

“이런 거 그만 보고 나랑 놀자. 그게 더 재밌을걸.”

소설책을 빼앗아 바닥에 떨어뜨리자 디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누웠다. 몸을 뒤척여 디아가 돌아눕기 편하도록 도운 반은 얼굴을 마주한 남자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감고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두 손바닥에 얼굴을 폭 파묻은 디아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질린 게 아니면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데?”

“나야 당연히 매일 오고 싶지. 그런데 좀 조마조마해서. 안 들키게 만나는 날을 조율해 보자… 뭐 그런 거지.”

“들키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잠자코 듣던 디아의 잇새에서 삐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반의 손을 뿌리친 디아는 쿠션에 팔꿈치를 기대고 비스듬히 턱을 괬다.

빙빙 돌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까놓고 말하면 밀회를 줄이자는 뜻이었다. 반이 걱정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디아는 과하게 염려하는 그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들키든 말든, 동족의 눈 밖에 나든 말든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키는 대로 넙죽넙죽 따른다고 귀염받을 시기는 애초에 지났다. 아니, 온 적도 없었다. 제멋대로 굴어도 별달리 타격이 없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사용인을 입막음시키는 것도, 쇄빙선을 탈취해 섬을 빠져나가는 것도 디아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징계는 얌전히 받자는 반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뿐이지.

온 세상이, 온 우주가 반을 중심으로 도는 디아는 반이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싫었고, 제가 뒷전이 된 느낌도 싫었다.

“네가 그러고 싶다니까 놔두는 거지, 내가 진짜 아무것도 못 해서 손 놓고 있는 줄 알아?”

표정 하며 말씨가 다분히 신경질적이라 긴장할 법한데도 반은 눈을 끔벅거리다가 씩 웃기나 했다.

“오…. 너 되게 멋있다.”

반의 실없는 태도에 도리어 김이 빠진 디아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반은 킥킥 웃으며 예민함이 잔뜩 묻어나는 남자의 눈꼬리를 엄지로 쓸었다. 눈을 살포시 감았다가 뜨는 디아를 가만 들여다보며 흉터까지 매만졌다. 우둘투둘한 상처를 내어 주는 것에 거부감이 덜해진 디아가 순순히 얼굴을 맡겼다.

“왜. 스릴 있고 좋잖아. 만나면 안 되는 사람 만나는 것 같고. 안 그래?”

“변태 같아.”

“어쭈. 진짜 변태가 누군데.”

지금껏 다양한 상대와 만났지만 디아처럼 취향이 유별난 사람은 손에 꼽았다. 열정이 지나치다고 해야 할까, 간혹 사람을 식겁하게 하는 구석이 있는 주제에 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디아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한쪽 뺨이 쭉 늘어난 디아는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투로 변함없는 의사를 내비쳤다.

“어쨌든 난 싫어. 매일 와. 안 그러면 여기서 안 내보낼 거니까.”

“아, 이렇게 집착하면 곤란… 아! 알았어. 안 할게!”

순식간에 옆구리로 파고들어 아플 정도로 간지럽히는 손가락을 피해 허리를 뒤틀었다. 이제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 보니 백기를 드는 속도도 빨랐다. 장난 한번 못 치겠다고 투덜거렸다가 ‘나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는 핀잔을 얻어먹은 반은 얼얼한 옆구리를 손으로 감싸고 앓는 신음을 냈다. 이렇게 재밌는데 어떻게 장난을 안 칠 수 있단 말인가. 귀엽고 까다로운 놈….

옆구리를 쓱쓱 매만지며 디아를 흘겨보던 반은 잠시 머뭇거렸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앞서 밑밥을 한가득 깔았으니 이제 미끼를 던질 차례였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매일 와 볼게. 근데 그러려면 필요한 게 있어.”

“뭐 갖고 싶은데.”

턱을 괴지 않은 손을 들어 반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디아가 당연하다는 듯 되물었다. 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저었다.

“에이, 날 그렇게 속물로 보면 섭섭하지.”

살짝 혹했지만 당장 바라는 것은 금품이 아니었다. 금은보화로 주머니를 채울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의사를 물었다.

“들어줄 거야?”

“들어 보고.”

“들어준다고 약속하면 말할게.”

“…그건 싫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디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반은 그가 기묘한 상상력으로 기함할 상황을 만들어 내지 않도록 저지했다.

“이상한 거 아니니까. 어?”

어? 어? 하며 두어 번 더 조르자 디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때가 왔다. 반은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해 찌푸린 눈썹을 바르게 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조르나 싶어 덩달아 차분해진 디아가 귀를 기울였다. 반은 주변을 휘휘 살폈다가 큼 하고 헛기침한 후 본론을 꺼냈다.

“내 입에 한 번만 싸 주라.”

“…응?”

못 알아들은 듯이 눈살을 찌푸리는 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알면서.”

“반….”

비로소 반의 요구를 이해한 디아가 미간을 구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마뜩잖은 눈빛을 마주한 반은 얼른 일어나 앉아 디아의 팔뚝을 그러쥐었다.

“안 돼? 네가 열렬히 사랑하는 내 부탁인데?”

“그거 때문에 안 온다, 만다 얘기한 거였어?”

“아니, 들어 봐. 너는 매일매일 내 거 빨잖아. 나는 뭐, 뭐… 좀 몇 번 빨아 본 거 그게 다인데, 심지어 많이 빨지도 못했어. 와, 진짜 너무 불공평하지? 그렇게 생각 안 해?”

스스로 말하면서도 어린 애인이 싫다는 짓을 강제하려는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수 없었다. 솔직히 불공평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본인은 매일매일 한 시간 넘게 사탕처럼 빨면서 제게만 허락하지 않는 것은 순 억지였다. 더군다나 오럴을 시도할 때마다 디아는 내심 갈등하는 표정을 짓고는 했다. 학을 뗄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보일 만한 반응이 아니었다. 반은 언젠가부터 기묘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디아의 좆을 빨지 않는 이상 이 필사적인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디아는 반이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곤란한 표정으로 등받이에 뺨을 묻었다. 녹안을 굴리며 망설이던 디아가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왜 그렇게 빨고 싶은데?”

“너는 왜 맨날 쪽쪽 빠는데.”

“…좋으니까.”

“나도.”

냉큼 대꾸한 반은 눈꼬리를 휘어 씨익 웃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물론이고 디아 역시 사랑해 마지않는 미소를 짓자 팽팽한 분위기가 몽글몽글하게 풀렸다. 반에 한해서는 늘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보이는 디아는 수줍음을 이기지 못하고 시선을 휙 피했다. 창백한 뺨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반은 거리를 한 뼘 좁혀 디아에게 바짝 붙었다. 어때? 순진한 소년을 꼬드기듯 묻자 가시가 완전히 제거된 무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조금 그런데….”

“뭐가?”

됐다. 거의 다 됐다. 반은 거듭 시선을 피하는 디아와 마주하기 위해 얼굴을 이리저리 가져다 대며 그를 회유했다.

“응? 말해 봐. 내가 다 맞춰 줄게.”

“힘들잖아. 다칠 수도 있고.”

“너는 그 힘든 거 좋다고 하잖아. 안 다치게 잘할게. 기분 좋을 거야.”

아, 정말 쓰레기 같다. 고민하는 디아의 옆얼굴이 유독 청초해 보여 더더욱 죄스러웠다. 그렇지만 반은 이 고고한 낯짝을 가진 남자가 제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것에 환장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뻔뻔함으로 무장했다. 부드러운 가운 천에 감싸인 놈의 팔뚝을 은근하게 주무르며 재차 조르려던 때, 아래로 내리깐 눈을 스르륵 돌린 디아가 시선을 맞추고 입을 뗐다.

“나는 크잖아. 굵고, 길고. 반 목구멍보다 더.”

“나도 큰데?”

훌륭한 좆을 가졌으니 자신만만할 만했지만 그것을 자랑하기에는 타이밍이 다소 뜬금없었다. 눈썹을 찌푸린 반은 멀뚱히 바라보는 디아와 눈싸움했다. 1초, 2초, 3초…. 침묵 속에서 서로 끔벅끔벅 쳐다만 보는데, 그 순간 반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의문이 있었다.

어? 이거 지금… 무시하는 건가?

뒤통수를 맞은 듯 넋이 나간 반은 아무 말 없이 디아를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시라니. 어디 가서 성기 사이즈로 무시당한 적 없는 반에게 디아의 발언은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심지어 디아도 처음에는 꽤 버거워하지 않았는가. 디아보다 살짝, 아주 약간 작았지만 그야 종족이 다르니 동일 선상에 놓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저를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취급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무시하려고 드는 디아에게 한 소리하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어찌 된 일인지 나오는 말은 형편없었다.

“와, 이게 어디서 어른을…. 어른을….”

공허한 헛웃음만 터트리며 더듬거리고 있자 디아가 ‘그게 아니라’하며 손목을 가져갔다. 순순히 손을 내어 주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서 고집스럽게 버티면 모양새가 볼품없을 것 같아 내어 주기는 했다. 대신 엄한 눈초리로 쏘아보자 손바닥으로 턱을 감싼 디아가 고개를 가까이 했다.

“아 해 봐.”

반은 입을 쩍 벌려서 드나들기 충분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었다. 디아는 반의 입술과 입 안을 가늠하듯 관찰하다가 턱을 잡아 입을 닫아 주었다. 합, 입술을 다문 반은 양손 엄지로 입꼬리를 매만지는 남자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입술에서 뺨으로, 뺨에서 목으로 손을 미끄러뜨린 디아가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입 찢어지고 싶어?”

“어.”

오기로 똘똘 뭉쳐 고개를 주억거리는 반에게 의미 모를 시선을 두던 디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웃을 때 시원하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에 쪽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난 싫어.”

***

괘종시계 속 짧은 바늘이 1시를 가리켰다. 시계가 정면으로 보이는 소파에 걸터앉은 디아는 꼰 다리 끝을 초조하게 까딱거리며 시곗바늘을 노려봤다.

큼직한 시계를 보고 있으면 종종 어릴 적이 떠오르고는 했다. 사방이 막힌 지하실이 자신이 아는 세상의 전부이던 시절, 굼벵이처럼 더디게 기어가는 시곗바늘을 들여다보며 반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기억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나쁜 습관을 만들었다. 디아는 지상으로 올라간 숙주가 돌아오는 시각인 1시와 8시가 되면 무의식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반이 제 곁에 없을 때 유독 심해지는 증상은 현재 나쁜 쪽으로 극에 달했다.

긴 바늘이 한 칸씩 움직일 때마다 조바심이 부풀었다. 반대쪽 다리를 꼬았다가 풀고, 낮은 테이블을 툭 걷어차고, 쿠션을 내던져도 진정되기는커녕 초조해지기만 했다. 이토록 신경이 곤두선 이유는 명확했다.

어제 하루 반이 오지 않았다.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잡일꾼을 자처한 반은 주로 본관 청소 업무를 도맡았지만, 별관이나 정원에 손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곳으로 쪼르르 달려가기도 했다. 뺀들뺀들하면서도 은근히 성실한 남자 때문에 낮에는 만나지 못한 날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밤은 아니었다.

소등을 한 후에 한두 시간 내로, 부득이한 경우라면 세 시간쯤 늦었지만 들르지 않은 적은 없었다. 반은 매일 밤 본관 침실에 들러 신혼부부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다. 장애물 같은 사용인을 피해 개구멍을 드나드는 번거로운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매일 디아를 찾았던 반이 어제 하루, 무려 24시간이나 얼굴을 비추지 않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찾아가면 싫어하니까 조금만 더,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정오가 넘도록 기다렸으나 반은 나타나지 않았다. 디아는 어느새 입가로 가져온 손톱을 질근질근 씹었다. 반이 손수 손질해 준 손톱이 엉망진창이 됐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 안 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지만 그런다고 없는 반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가 오지 않는 이유 수십 개를 멋대로 가정해 줄 세워 보다가 불현듯 눈살을 찌푸렸다. 엊그제, 반의 부탁을 거절했던 밤이 떠오른 탓이었다.

반은 그날따라 집요하고 노골적이게 ‘그 짓’을 요구했다. 싫다고 거절했음에도 나잇값 못하는 생떼로 몇 차례 더 조르더니 결국 포기한 듯 두 손을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어깨를 으쓱이며 마무리 짓고 벌러덩 드러눕던 남자에게서 화가 나거나 토라진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일로 화낼 만큼 속 좁은 남자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오지 않은 걸까. 벌이라도 주는 것처럼.

긴 시곗바늘이 한 바퀴를 돌았다. 2시였다. 초조감을 견디다 못해 소파에서 일어난 디아는 혹여 반이 슬그머니 찾아올까 봐 줄곧 지키고 있던 침실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반이 쪼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시기가 맞물리다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일로도 싸우는 것이 연인이고 부부라는 것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한 디아의 불안감은 점차 커졌다.

디아가 알기로 반은 펠라를 썩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지금은 오기가 치밀어 억지를 부리는 것뿐이었다. 사실 그렇게 하고 싶다면야 못 들어줄 부탁은 아니었다. 솔직히, 거짓 한 톨 없이 답하자면 디아는 상상 속 반에게 안 해 본 짓이 없었다. 입에 싸는 것쯤이야 심한 축에 들지도 않았다. 언젠가 반을 만나면 더러운 상상을 실현하리라고 이를 갈며 다짐한 때도 있었다. 반이 말을 걸 때, 혼잣말할 때, 씩 웃을 때 달싹이는 입술을 바라보며 그의 입 안을 상상한 적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렇기에 싫었다. 반을 두고 한 망상이 얼마나 더럽고 강압적이었던가. 한번 물꼬를 트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가능성이 크니 아예 시도도 안 하는 편이 나았다. 무난한 체위로도 간혹 버거워하는 반에게 부담을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잖아도 반은 작고 약한 데다가 크게 다친 후로 더더욱 쇠약해졌으니 조심조심 대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반은 제 마음도 모르고 자꾸만 그런 식으로….

“짜증 나게….”

디아는 황급히 눈을 깜박여 제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괴로워하는 반을 지워 냈다. 반이 눈물 콧물 흘리며 빌빌거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것은 다 옛날 일이니까. 상냥하고 부유하며 어린 남편이 된 이상 그 시절의 욕구는 버리는 것이 마땅했다.

오랜 상념 끝에 결론을 내리지 못한 디아는 시계를 흘끔 살피고는 발길을 틀었다. 2시 반. 반을 보지 못한 지 33시간째였다. 불안이 뇌를 좀먹자 청혼받았을 때 들었던 비현실적인 감각이 발밑부터 차올랐다. 이 모든 행복은 망가진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감각.

디아는 왼손 약지를 두른 심플한 웨딩 링을 만지작거렸다. 반과 결혼한 것은 결코 제 망상이 아니라고 거듭 중얼거리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반을 찾으러 가야겠다. 별관에 있더라도, 규칙을 어기더라도 지금은 그를 만나야 했다. 결국 조급해진 발걸음이 인내심이 바닥난 디아를 침실 밖으로 이끌었다.

저택 본관은 총 3층으로, 디아는 주로 침실이 위치한 2층에 머물렀다. 별관과 연결된 1층은 홀과 응접실, 식당으로 이루어져 구태여 들를 일 없었고, 3층은 서고와 보관실이 있어 무료한 시간을 때울 흥밋거리를 찾는 목적으로 간혹 들르고는 했다.

무턱대고 별관에 쳐들어가기에 앞서 본관 1층부터 샅샅이 뒤졌다. 대화가 금지되어 반의 행방을 물어 봤자 답을 얻을 수 없는 사용인을 지나친 디아는 어떤 모습이든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남자를 찾아 저택을 탐험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정원을 내다보고, 밤새 성에꽃이 하얗게 핀 창문 너머를 확인하고, 아무도 쓰지 않아 텅 빈 방문을 일일이 열어 보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폭발하기 직전의 초조함을 안고 3층에 도착한 디아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남자를 기적처럼 발견했다. 복도 끝, 서고 앞 복도를 빗자루로 쓰는 남자의 뒷모습이 각막에 콕 박혔다.

단정하게 손질해 흐트러짐 없이 고정한 검은 머리칼, 흰 셔츠 깃에 감싸인 매끈한 목덜미, 도톰한 외투로도 감출 수 없는 곧은 등을 맞닥뜨리자 가슴이 속수무책으로 일렁거렸다. 숨을 짧게 들이켠 디아는 그를 부른다는 선택지를 떠올리지 못하고 달음박질쳤다.

눈 깜짝할 새 복도 끝에 다다른 디아는 등을 보이는 반을 와락 끌어안았다. 반동에 의해 크게 휘청거린 남자를 양팔로 단단히 옭아매고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불안감을 가라앉히는 향을 들이마시자 얇은 살가죽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반이 놀랐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다급한 마음은 상냥한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이성을 배반하고 못된 말을 내뱉게 했다.

“어제는 왜 안 왔어? 매일 오라고 한 말 기억 안 나?”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말씨에 제가 더 놀란 디아는 머뭇거리다가 반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사과의 표시였으나 반은 놓칠 뻔한 빗자루를 고쳐 잡을 뿐, 평소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장난을 걸어오지 않았다. 당혹스러워진 디아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가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행동을 제한하는 팔이 사라지자 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복도를 삭삭 쓸었다. 하루 한 번씩 쓸어 먼지가 쌓일 틈이 없는 바닥이 뭐가 그리 더럽다고 성실히 빗자루를 놀리는 반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곁을 돌아보자 반에게 신경이 쏠려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용인 하나가 창을 닦고 있었다.

반이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 이유가 설명됐다. 보는 눈이 있을 때는 규칙을 철저히 따르는 반은 이번에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그대로 디아를 지나쳐 서고로 들어갔다.

소리 없이 닫히는 서고 문을 바라보던 디아가 판판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반이 저러는 까닭을 알고 있는 데다가 몇 번이나 겪어 이미 익숙해진 냉대였건만 오늘따라 말 못 하게 속상했다. 제게는 벽에 붙은 파리나 다름없는 사용인을 힐긋 살피고 반이 들어간 서고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달칵 열린 문 너머로 책장이 빼곡하게 들어찬 서고가 드러났다. 서적을 보관하는 공간인 만큼 해가 잘 들지 않는 꼭대기 방은 섬의 흐리멍덩한 날씨에 힘입어 낮임에도 불구하고 폭풍우 치는 날처럼 우중충했다. 침침한 방 안으로 들어선 디아는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문고리를 잠그고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닐 수 있는 공간을 두고 배열된 책장 사이로 흐린 하늘을 비추는 창이 언뜻 보였다. 그새 어디로 갔는지 반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펫이 깔린 바닥이 그의 발소리를 집어삼켰다. 발길을 돌린 디아는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공간을 천천히 나아가며 책장 사이를 들여다봤다.

책장과 좁은 복도가 번갈아 보이다가 이윽고 검은 구두를 신은 발뒤꿈치가 얼핏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는 발과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말해도 돼. 어제 왜 안 왔어?”

짜증 난 기색을 숨기고 나긋나긋하게 말하고자 노력했는데 반은 알까 모르겠다. 이대로 반이 사과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머릿속으로 구상하던 디아는 제 예상과 다르게 굴러가는 상황에 콧잔등을 찌푸렸다. 반이 묵묵부답이었다. 제 배우자는 장난치는 것을 즐겼으나 오늘은 타이밍이 나빴다.

순간 뜨거운 감정이 목구멍 부근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아마도 분노인 것 같다. 혹은 서러움이든가.

그럼 나도 말 안 해.

사랑 앞에서 밑도 끝도 없이 치졸해진 디아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휙 돌아섰다. 서고 구석에는 책상과 의자 따위의 간단한 가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서고를 박차고 나가지는 못하고 투박한 의자에 주저앉은 디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고작 하루다. 일정이 꼬이거나 사용인을 맞닥뜨리는 불상사가 있으면 못 올 수도 있었다. 반 없이 4년도 버텨 봤는데 그깟 하루 건너뛰는 것쯤이야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양육자의 부재로 인해 가장 불안정한 시기에 삐딱선을 탄 디아에게는 상당히 미성숙한 면이 있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여야 함을 머리로는 인지해도 치기 어린 감정이 앞섰다. 제 마음을 몰라주는 반이 야속했다. 어렵사리 결혼식까지 올렸는데 계속 붙어 있고 싶고 수시로 입 맞추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반은 남들 눈치나 보고 있으니 속이 배배 꼬였다.

모르지는 않았다. 제가 억지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이렇게 속 좁고 성가신 사춘기 소년처럼 굴고 싶지 않은데 반의 앞에서는 하염없이 유치해지고 만다. 기분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고, 지나가는 한마디에 안달복달하고, 그를 마주하면 여유라고는 없이 몰아세우기만 하는 자신이 한심할 때도 더러 있었다.

“…….”

머리끝까지 차오른 원망은 어느덧 불안으로 뒤바뀌었다. 턱을 괸 손을 떨어뜨린 디아는 책상 상판에 난 흠집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혹시, 정말 만약에 말이다. 반이 어린아이 같은 제게 질리면 어떡해야 할까. 곁으로 눈길을 돌리자 책상 모퉁이에 위치한 탁상 거울에 제 얼굴이 비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하게도 초승달 모양 흉터였다. 시간이 흘러도 옅어질 낌새가 없는 흉측한 상처가 제법 볼만하던 얼굴을 망쳐 놓았다. 반은 틈날 때마다 예쁘다, 귀엽다, 듣기 좋은 꽃노래를 부르지만 콩깍지가 벗겨지면 눈에 띄는 흉터부터 단점으로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지저분한 책상 상판과 제 상판의 공통점을 찾자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반이 과거 연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별일 아닌 것처럼 웃으며 ‘그만하고, 이제 친구로 지내자’라고 한다면 저도 모르게 그를 기절시켜 저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에 가둘지도 몰랐다. 반과 눈이 맞은 놈은 겁박 정도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감히 배우자가 있는 남자와 놀아난 죄를 톡톡히 갚게 할 생각이니 처음에는….

“잘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반의 내연 상대를 만들어 최악의 결말까지 치달은 망상은 인기척을 알아차린 순간 안개처럼 흩어졌다. 중얼거림을 멈추고 눈을 들자 어깨 너머로 다가온 인영이 작은 거울 속에 비쳤다.

어느새 장갑을 벗어 희미하게 착색된 상처가 많은 살결을 드러낸 양손이 어깨에 살포시 얹혔다. 살짝 힘을 주어 어깨를 짚은 두 손은 쇄골을 타고 느리게 내려와 가슴을 매만졌다. 의도를 가진 듯 은근하게 상체를 쓸어내린 손이 교차하며 단단한 팔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신보다 살짝 낮은 체온이 몸을 휘감으면서 온종일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참을성이 없네. 여기까지 쫓아오고.”

잘 훈련된 개처럼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반을 끌어안고, 키스하고, 맨살에 닿고자 하는 욕구가 감당키 힘들 만큼 펄펄 끓었지만 디아는 무표정한 낯 아래 감정을 숨겼다. 대답하지 않자 부드러운 입술이 귓불에 닿았다. 반은 칼바람이 몰아쳐도 쉬이 붉어지지 않는 귀에 키스하며 물었다.

“속상했어? 어제 안 와서?”

잘 알면서 묻기는 뭘 묻는지. 디아는 줄곧 저를 무시한 반에게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가는 또 투정이나 부리게 될까 봐 억지로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자 가까이 가면 멀어지고, 한발 물러나면 다가오는 반이 목덜미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사정이 있어서 못 왔어.”

살결에 닿은 입술이 촉, 소리 내며 떨어지자 굳은 어깨가 움칠 튀었다. 그놈의 사정, 그쪽 사정 뻔한데 핑계 대지 말라고 쏘아붙일 수도 있었지만 혀에 돋은 가시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아무리 반이 저를 달래는 법을 잘 안다고 해도 입맞춤 몇 번에 서운함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것은 심했다. 줏대 없는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도 반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디아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하나뿐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창백하기만 하던 귓바퀴가 스리슬쩍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책상에 올려 둔 손이 자석에 이끌리듯 어깨를 감싼 반의 팔로 올라가던 때, 웃음이 미미하게 깔린 음성이 고막을 두드렸다.

“그래서 내가 좋은 거 해 주려고 하는데.”

“…응?”

무심코 곁을 돌아보자 까슬까슬한 감촉이 콧대에 스쳤다. 흐려진 초점이 한곳에 모이면서 제 콧대를 간지럽힌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디아는 답지 않게 얼빠진 물음을 흘렸다.

“…그거 뭐야?”

“뒤져 보니까 있더라고. 내가 또 뭘 잘 찾아.”

어깨를 끌어안은 팔을 풀고 의자를 빙 둘러 온 반이 낡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약한 바람이 일자 하얀색 레이스 끄트머리가 나풀거렸다. 디아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반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반을 향한 섭섭함, 그를 두고 했던 못된 망상이 새카맣게 잊혔다.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을 가린 상태였다. 황금빛 눈을 마주했다가 다짐이 무너져 내릴까 봐 검은 레이스로 그의 눈을 가렸던 때와 동일한 차림이었다. 다만 색이 달랐다. 반은 때가 탈까 두려울 정도로 새하얀 레이스를 눈가에 두른 채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려 짓는, 시원하면서 의뭉스러운 미소는 반의 버릇이었다. 금방이라도 시답잖은 농담을 던질 것 같은 미소는 디아가 끔찍이 좋아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말문이 턱 막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검은 구두를 신은 발을 뻗은 반이 의자 다리를 딛고 뒤로 쭉 밀어 냈다. 디아가 앉은 의자가 끼익 밀려나면서 생긴 틈으로 천천히 몸을 숙인 반이 그의 발아래 무릎 꿇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무릎을 짚은 반이 손등에 뺨을 기댔다.

디아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다리 사이를 내려다봤다. 하얀 레이스를 두른 반은 너무나도 외설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썹 뼈와 콧대에 얹혀 뒤통수에서 매듭지은 새하얀 레이스가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칼과 대비를 이루었고, 높은 콧대 탓에 살짝 벌어진 레이스 틈새는 묘한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언젠가 한 번 상상해 본 적 있는 모습이 실제로 펼쳐지자 손끝에서 맥박이 쿵쿵 뛰었다.

제 속을 알 길이 없는 반은 무릎을 만지작거리던 손바닥을 쫙 펼쳐 바지 천이 팽팽하게 당겨진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머지않아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웃음기 어린 책망이 들려왔다.

“벌써 세우시면 곤란한데요, 도련님.”

“…네가 그렇게 생기질 말든가.”

“어떡합니까…. 이렇게 태어났는데.”

실실 웃으면서 말대답하는 남자가 못 견디게 얄미웠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발기한 것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불룩해진 허벅지 부근을 매만지던 반이 조용히 속삭였다.

“문은 잠갔어?”

“응. 확실히….”

“수상한 티는 있는 대로 내네.”

“반도 이러고 싶었던 거 아냐?”

“아니…. 난 여기서 할 생각 없었는데.”

진심 같지도, 농담 같지도 않은 한마디를 던진 반이 짙은 미소를 띠었다. 시치미 떼는 태도와 달리 어느덧 바지 허리춤에 닿은 손가락이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풀린 버클 안쪽으로 슬며시 들어온 손이 드로어즈 밴드를 당겼다. 언제나 그의 속옷을 허겁지겁 벗기기 바쁜 저와 달리 반의 손길은 느긋하기만 해서 애가 바싹바싹 탔다. 가뜩이나 어젯밤 단 하루, 체감상 까마득한 시간을 수절한 디아는 여유로움을 가장할 여력 따위 없었다.

“빨리….”

바닥을 디딘 뒤꿈치를 들썩이며 재촉하자 얇은 천 위로 드러난 굴곡을 매만지던 반이 드로어즈를 마저 끌어 내렸다. 밴드를 내리자마자 탄력 있게 퉁겨져 나온 살덩이가 반의 코끝을 스치고 곧추섰다. 달리 손대지 않았음에도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를 앞두고 움찔 놀란 반이 그것을 한 손으로 거머쥐었다.

“읏….”

신음을 삼킨 디아가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앞으로 다가올 쾌감에 대한 기대감이 무럭무럭 차올랐지만 반은 여전히 느릿느릿한 손길로 성기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눈을 힐긋 내리깐 디아는 여느 사용인처럼 단정한 차림인 반을 훑어 내렸다. 검은 머리칼을 잔머리 한 올 흘러내리지 않도록 넘겨 고정하고, 목 끝까지 채운 새하얀 셔츠와 스웨이드 재질의 검은 외투를 걸치고 꿇어앉은 남자는 정숙하지 못한 알맹이를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금욕적으로 보였다. 그에 반해 음심을 자극하는 새하얀 레이스 끄트머리를 손가락 사이에 걸고 당기자 반이 다리 사이에 고개를 가져다 댔다. 꺼떡거리며 솟은 성기가 그의 얼굴에 흉흉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렇게 보니까 더 크네….”

살짝 질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남자가 내쉬는 숨결이 예민한 부위를 간지럽혔다. 한두 번 본 것 아닌 성기를 레이스 무늬 사이사이로 난 구멍을 통해 자세히 관찰하는 반의 모습에서 이상야릇한 흥분기를 느낀 디아는 얌전히 기다리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건너뛴 밤을 보상받기 위해 반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반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반?”

“네가 싫다는 짓 안 해.”

사타구니와 가까운 허벅지 안쪽에 뺨을 기댄 반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디아의 걱정을 입 밖으로 냈다. 핏줄이 얼기설기 선 성기를 한 손으로 감싸는 반을 저지하려다가 손을 거둔 디아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싫은 건 아냐.”

“그럼? 말이 다른데.”

“힘들잖아. 봐. 안 들어가잖아.”

디아는 반의 턱을 쥐고 샅 가까이 당겼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기둥에 짓눌렸다. 반의 입이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성기를 몽땅 집어삼키기에는 얼핏 봐도 무리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 양육자를 연약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 디아는 ‘봐, 안 들어가….’하고 중얼거리면서도 날렵한 턱에서 손을 물리지 못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귀두에 스칠 때마다 못된 충동이 일렁일렁 밀려들었다.

“아, 뭐어….”

때마침 빈정거리듯 성의 없이 대꾸한 반이 입술에 비벼지는 귀두 부분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말릴 새도 없이 혀를 내어 기둥을 싸악 핥았다. 면적이 좁은 물컹한 살덩이가 핥고 지나가는 느낌은 가히 자극적이었다. 턱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왈칵 들어갔다.

“아야.”

일부러 내는 것이 분명한 신음에도 움찔한 손이 턱에서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도로 팔걸이를 움켜쥔 디아는 눈썹을 구겨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반….”

“핥는 건 괜찮잖아. 안 그래?”

안 괜찮았다. 반이 입도 대지 못하도록 번번이 밀어 낸 이유는 불씨가 들불이 되어 번지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었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편이 참기에는 한결 편했다. 그러나 작정한 듯 남은 팔로 다리를 옭아맨 반이 핏줄 돋은 살갗에 입술을 대고 웅얼거렸다.

“도련님은 너무 예민해요.”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장난기가 듬뿍 스민 눈동자가 보이는 듯했다. 꿍꿍이가 있나. 눈살을 찌푸리고 제멋대로 구는 남자를 부르려던 때, 벙긋 벌어진 입술이 귀두를 머금었다.

“읏…!”

축축한 점막이 귀두를 쪽 빨아올리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바닥을 짓밟은 구두 밑창이 카펫 위를 미끄러졌다.

“흐읏, 아….”

반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작은 짐승이 입 안에 들어온 것을 무작정 빠는 것처럼 열이 올라 뜨끈한 귀두를 쪽쪽 소리 내며 빨았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초점이 흐려지며 금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무심코 허리를 숙인 디아는 삽시간에 달아오른 눈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망할…. 입 모양만으로 소리 없는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살며시 손가락을 벌렸다. 손가락 틈새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새하얀 레이스가 엿보였다. 조금 더 시선을 내리자 침이 묻어 번들거리는 입술이 나타났고, 그대로 귀를 기울이자 젖은 살덩이를 빠는 소리가 기민한 귀로 흘러 들어왔다.

반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제 귀두를 빨았다. 아랫배 근육이 바싹 죄어들자 목덜미부터 감당키 힘든 열이 확 번졌다. 나지막한 음성이 앙다문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핥기만 한다며.”

“하아…. 전부 다 넣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뻔뻔하게 말을 바꾼 반이 고개를 뒤로 물리자 미끌미끌해진 귀두가 입술을 밀어 올리며 휙 튕기어 나왔다. 딱딱하게 발기해 꺼떡꺼떡 흔들리는 성기가 우스운지 반은 몇 번 더 입술로 물었다가 놓는 몹쓸 짓을 반복했다. 약한 자극이 주어질 때마다 주먹을 꽉 쥐면서 이성 끄트머리를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디아가 억눌린 목소리를 냈다.

“하지 말라고 하잖아….”

날이 선 말씨로 불안정한 속내를 감추던 세월이 길었던 만큼, 거절을 내뱉는 디아의 말투에는 괴팍한 짜증이 배어 있었다. 제 입으로 내뱉고서도 지레 놀라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자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요도구를 문질렀다. 꼭 달래는 것처럼 말이다. 디아의 역정과 투정을 구분할 줄 아는 반은 웃는 낯이었다.

“진짜 하지 마?”

“하지, 읏….”

“여기서 그만두면 아쉬울 텐데….”

혀로 귀두를 받친 탓에 발음이 뭉개진 반은 어린 애인을 놀리는 것이 재밌어 죽겠는지 실실 웃으며 물었다. 도발에 껌벅 넘어간 디아는 발끈해서 손을 뻗었다. 자꾸만 어린애 취급 하고 놀리려고 드는 반에게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으나 곧장 저지당했다. 그에게 닿기도 전에 손목을 거머쥔 반이 엄격한 목소리로 으름장 놓았다.

“가만히 있어. 혼나기 싫으면.”

“…….”

기껏 뻗은 손이 팔걸이에 도로 얹혔다. 다리 사이에 꿇어앉은 남자가 하는 말 따위 무서울 리가 없었으나 디아는 얌전히 팔걸이를 쥐었다. 가슴 언저리가 수선스러웠다. 당혹스럽다고 해야 할지, 설레서 죽을 것 같다고 해야 할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오냐오냐 달래 주는 반이 드물게 혼낼 때면 지금과 같은 모호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디아는 밤새 깨물어 성치 않은 손톱을 앞니로 잘근거렸다. 나중에 혼내도 괜찮으니까 뭐든, 어떻게든 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반을 한 시간 동안 애태우며 즐겼던 지난밤과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제가 받은 수모를 되돌려 주고야 말겠다는 듯이 혀끝으로 깔짝깔짝 핥기만 하는 반 때문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벌써 묽은 액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성기를 반의 엉덩이 사이에 밀어 넣는 상상을 하자 괴롭기까지 한 조바심이 치밀었다.

“읏, 그만….”

지금 반에게 넣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제 심정을 입 밖으로 내면 반은 제발 극단적인 말 좀 하지 말라고 나무랐으나 진실을 거짓으로 꾸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이 이럴 때마다 딱 죽고 싶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을 때였다.

핏줄 돋은 살갗을 입술로 쪽 빨던 반이 배시시 웃었다. 눈이 가려진 채로 입술만 보이는 탓에 더더욱 음란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턱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보다 폭이 좁은 레이스에 예민해진 살덩이가 스쳤다. 반이 고개를 돌려 은근히 비비자 까슬까슬한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쁜 느낌은 아니었지만 간질간질 애만 태우는 자극으로는 열기를 해소할 수 없었다.

“하아…. 이거 말고….”

“그럼….”

사타구니에 딱 붙어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반이 입꼬리를 둥글게 말았다.

“다른 데 넣어 볼래?”

레이스 안쪽으로 엄지를 밀어 넣은 반이 끝을 살짝 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넣을 곳이 어디 있다고, 하며 그를 찬찬히 살피던 디아가 일순 헛웃음을 터트렸다. 높은 콧대와 뺨 사이, 레이스가 붕 뜬 빈틈이 제법 넉넉했다. 반의 차선책은 정말이지….

“…진짜 변태 같은 거 알아?”

“해 보고 싶으면서.”

이번에도 디아의 속내를 꿰뚫어 본 반이 뜨끈한 성기를 쥐어 레이스 빈틈으로 이끌었다. 미사포 밑자락을 뚝 떼 온 것처럼 덩굴 문양이 새겨진 레이스 아래로 귀두가 밀려 들어갔다. 디아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그 광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반을 향한 원망이 앞서 그를 괴롭혔을 때, 검은 레이스와 감춰진 황금빛 눈 사이에 성기를 밀어 넣고 싶은 욕망을 느낀 적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아주 잠시 상상만 해 본 것에 그쳤지만 말이다. 그 후로 새카맣게 잊고 있던 상상이 하얀 레이스에 이어 또 한 번 눈앞에 실제로 펼쳐졌다. 그것도 반이 먼저 시작함으로써.

귀두 끝에 반의 콧방울이 스치고, 이어서 말랑한 살결 아래 감추어진 광대뼈가, 그다음으로 간지러운 속눈썹이 차례차례 닿았다. 굴곡진 얼굴과 레이스 사이 바듯한 빈틈에 성기를 완전히 끼우자 반의 눈썹 뼈를 스친 귀두가 레이스 위로 비죽 튀어나왔다. 레이스가 주름 한 줄 없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은근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후으….”

“어때? 좋아?”

눈을 감은 반이 물었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저를 믿고 온전히 맡긴 얼굴에 성기를 비빈다는 것이 이토록 자극적일 줄 몰랐던 디아는 손가락 끝을 움칠움칠 떨다가 반의 뺨을 감쌌다.

“기분… 이상해. 읏….”

반이 건드리기만 해도, 아니, 쳐다보기만 해도 정액을 질질 흘리는 디아에게 이런 상황을 버틸 재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것은 반이 원해서 시작한 짓이고, 문지르는 것만으로 다칠 일은 없을 거라는 판단이 순간 머리를 지배했다. 달리 말해 합리화였다. 디아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느리게 움직였다. 마음껏 이용해도 된다는 양 목에서 힘을 뺀 반이 벌어진 허벅지를 짚었다.

“하아, 윽…. 반, 야해….”

디아는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고 앞뒤로 움직이게 했다. 몇 번 왕복하지도 않았는데 귀두 끝에서 희부연 정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얇은 레이스가 축축하게 젖으며 살덩이에 착 달라붙자 조그맣게 찌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각도를 바꾸어 눈 아래를 찌르듯이 밀어 올리자 어깨를 움찔 떤 반이 작게 신음했다.

“읏….”

반이 숨을 잠시 참았다가 몰아쉴 때마다 잇새에서 나오는 밭은 숨결이 팽팽한 고환을 간지럽혔다. 소름이 팔뚝을 뒤덮을 정도로 온몸이 달떴다. 성기에 직접적으로 닿는 자극보다 입술을 감쳐물고 불쾌감을 견디는 듯한 반의 모습이 진정하기 힘든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으로는 모자랐다. 조금 더 꽉 조이는 곳에, 정확히는 반의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얼굴에 비비적거릴 때마다 고환과 기둥에 거듭 닿아 뭉개지는 입술에 문득 눈길이 갔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하얀 정액이 점점이 묻은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도톰한 아랫입술에 맺힌 정액이 뚝 떨어진 찰나 디아는 반이 촘촘히 쳐 둔 덫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알아차린다고 한들 피할 수 없는 덫이었다.

미끄덩해진 성기를 레이스 아래에서 끄집어낸 디아는 번들번들한 귀두로 반의 입술을 꾹 눌러 봤다. 이러면 안 되는데, 참아야 하는데…. 온갖 잡념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켰지만 눈가를 뒤덮은 열기가 그것들을 몽땅 태워 버렸다. 이런 쪽으로는 비상한 반은 디아가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입을 벙긋 벌린 반은 망설이는 디아의 성기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바짝 긴장해 근육이 부풀어 오른 허벅지를 양손으로 짚고 고개를 쭉 내렸다. 좁은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은 디아는 반의 두피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이를 악물었다.

“큭…!”

“커흑….”

기둥을 반쯤 삼키다 말고 멈춘 반이 숨 막힌 소리를 냈다.

“바안….”

이마에 핏대가 선 디아가 음산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만하자는 뜻이었으나 이 순간만을 노렸던 반은 고집스럽게 남은 살덩이를 죄다 삼키려고 했다.

캑캑대며 거북해하는 신음이 귓가로 들려왔다. 디아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질끈 감았던 눈을 게슴츠레 떴다. 싫다는데 자꾸만 고집부리는 반을 밀어 내려던 다짐은 그를 힐끔 내려다보자마자 바람 앞의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우읍, 큽….”

강제로 비집고 들어가 늘어난 레이스가 콧대로 흘러내려 내도록 가려져 있던 반의 눈이 드러났다. 머리를 잡고 흔든 탓에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반은 한쪽 눈을 간신히 뜬 채였다. 제가 귀두를 마구잡이로 비볐던 눈두덩이와 속눈썹에 허연 정액이 엉겨 붙어 미처 뜨지 못한 것이다. 반은 그 상태로도 꿋꿋이 성기를 물고 귀두를 목구멍 안으로 넘기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디아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무 많은 정보가, 그것도 아주 자극적인 정보만 골라 입력된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난 듯했다. 왁스를 발라 평소처럼 부드러운 기미가 없는 검은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이 깊이 파고들었다. 반이 꽉 막힌 비음을 흘린 순간 힘이 들어간 손이 그의 머리를 사타구니로 짓눌렀다.

“욱…!”

“하아…. 헉….”

반의 목젖을 찌른 귀두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입 안 점막이 기둥에 쩍 들러붙었다. 호흡이 가빠질 만큼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내달리자 초점 흐린 녹안이 파들파들 떨리는 눈꺼풀에 반절 가려졌다. 반의 귓가와 뒤통수를 양손으로 감싼 디아는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몇 번 더 귀두를 찔러 넣었다.

“후으, 반…. 좁아….”

음식물을 삼키는 구멍은 그의 엉덩이 사이만큼 따뜻하거나 부드럽지 않았지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꽉꽉 조이는 느낌이 남달랐다. 반의 몸 곳곳에, 모든 구멍에 성기를 문지르거나 집어넣고 싶었던 그 옛날의 열망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반의 목구멍을 제멋대로 유린하는 나쁜 짓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온종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헛구역질이 일어 괴로워하는 신음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헉…!”

그제야 제가 저지른 짓에 소스라치게 놀란 디아는 지체 없이 반의 머리를 뒤로 당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가 아니라 반이 문제였다. 레이스가 떨어지며 드러난 눈가가 시뻘겋게 물든 반이 정강이를 강하게 끌어안더니 스스로 목구멍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반, 그만해….”

“우윽, 큽….”

반이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반듯한 이마로 떨어졌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디아는 제 성기를 한 마디 남기고 모조리 집어삼킨 반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가렸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함부로 그를 만졌다가 또 이성을 잃을까 봐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것을 택한 디아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 마, 큭…! 그만해….”

말뿐인 만류로는 반을 저지할 수 없었다. 제가 듣기에도 더 해 달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반은 어떻겠는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런 방면으로는 각별한 재능이 있는 반은 몇 번의 고갯짓 만에 이가 닿지 않도록 입술로 감싸는 법, 목구멍을 여는 법을 얼추 터득하고 여유를 되찾았다.

반은 일부러 살덩이 빠는 소리를 적나라하게 내면서 양손으로 경직된 허벅지를 길게 쓸어 올렸다. 어깨가 움찔 튀어 오른 디아가 앞으로 허리를 숙이며 헐떡였다. 놀리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한 손길이 부푼 허벅지와 정강이를 더디게 매만지자 가뜩이나 반의 앞에서는 조절이 되지 않는 사정감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반…. 너무, 읏…! 그만….”

디아는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손을 들어 사타구니에 들러붙은 머리를 밀어 냈다. 눈가와 이마를 덮고 뒤로 미는 순간 스르륵 뻗어 온 손이 창백한 손가락과 얽혔다. 양손을 단단히 깍지 껴 밀어 내지 못하도록 한 반이 고개를 모로 비틀고 목구멍을 넓혔다. 반의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아귀힘을 준 디아가 이내 흠칫흠칫 떨었다.

“읏…!”

“큽, 우흡….”

강렬한 사정감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갔다. 귀두를 목구멍으로 넘긴 탓에 뿜어져 나오는 정액을 속수무책으로 삼키게 된 반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성기를 문 채로 빠듯하게 벌어진 입술 새로 미처 삼키지 못한 정액이 주룩주룩 샜다. 기어이 정액까지 전부 다 삼키는가 싶던 반은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뒤로 확 물러났다.

“큽! 커흑…!”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은 반이 격렬한 기침을 토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기겁한 디아는 여운에 잠길 새도 없이 반의 입 앞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괜찮아? 뱉어, 얼른. 그러니까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입 안에 고이고 턱 끝에 맺힌 정액이 손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잔기침을 뱉는 반 때문에 잔뜩 당황한 디아는 투정인지 힐난인지 모를 말을 마구 내뱉으며 너덜거리는 레이스를 벗기고 지저분한 얼굴을 닦아 주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으으…. 찝찝해….”

이마부터 턱까지 빠짐없이 묻은 정액 때문에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얼굴을 맡긴 반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와 딴판으로 흐트러진 채였다. 디아는 그의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확인해 봤다. 입꼬리가 불그스름했지만 다행히 찢어지지는 않은 듯했다.

닦아도 닦아도 찝찝함이 남는 희멀건 액체로 젖은 반은 허둥지둥하는 디아의 태도를 즐기다가 씩 웃었다.

“양이, 큽…. 다 삼키지는 못하겠다.”

안절부절못하던 디아는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누구는 미안하고 후회돼 죽겠는데, 반은 이거 잘못하면 코로 나오겠다며 실없는 소리나 해 대고 있었다. 섹스 후 매번 뒤처리로 고생해 놓고서 그걸 이제야 알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를 일으켜 제 허벅지 위에 앉힌 디아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걱정 어린 눈빛으로 가만 들여다봤다. 성기를 조심성 없이 문지른 눈 한쪽이 충혈되어 있었다.

“눈 빨개….”

“아, 조금 들어가서. 어쨌든… 좋았어?”

충혈쯤이야 별것 아니라는 양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돌린 반이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었다. 속이 상해 대답하지 않자 응? 하고 물으며 코끝에 쪽쪽 입을 맞췄다.

좋았냐고. 반과 한 번이라도 데이트한 놈들을 일일이 찾아가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반은 거듭 시치미 떼지만 제게만 이렇게 좋은 것을 해 줬을 리가 없단 걸 디아는 알고 있었다. 반의 연애사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과대망상이었지만 아무튼 그럴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질투를 솔직히 털어놓았다가 반이 지긋지긋하다고 느낄까 겁이 난 디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음엔 더 잘해 줄게.”

“싫어. 하지 마.”

“싫어. 할 건데.”

유치하게 나오는 반 때문에 부글부글 끓던 질투심이 맥을 추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나머지는 이따 밤에 하고….”

기어이 디아의 좆을 제대로 빨아 본 반은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외투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본 계획에서 살짝 달라지기는 했으나 성공했으면 그만이다. 오럴도 꽤 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흥건한 사타구니를 정리해 주기 위해 아래로 손을 뻗을 때였다.

“이따가?”

의아한 기색이 물씬 피어나는 물음이 말을 끊었다. 때마침 디아의 하체에 시선이 꽂힌 반은 손수건을 가져다 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

분명 몇 발 뺐는데 왜 또 서 있는 걸까. 반은 골똘히 생각했다. 한 번 사정할 때마다 그 정도 양의 정액을 싸면 발기 횟수에 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너무 인간 중심적인 사고일까? 아무리 번식 본능이 강해도 그렇지, 쉬지 않고 발기하고 싸는 과정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이따금 있었다.

“응?”

괴상한 잡념에 푹 빠진 반이 디아가 하루 동안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액의 양을 가늠하고 있을 무렵, 새하얀 이마가 턱에 콩 부딪혔다. 살짝 휘청이며 고개를 들자 양팔로 허리를 끌어안은 디아와 눈이 마주쳤다. 다리 사이에 달린 망측한 살덩이와 연관시키기 힘든 낯짝이 시야를 뒤덮었다. 음란하고 더러운 짓을 무엇보다 경멸할 것처럼 생긴 남자가 빽빽한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푸른 숲 같은 녹안이 무언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지금 하자고?”

디아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파묻고 열심히 빨던 도중에 자연히 흥분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가라앉은 상태였다. 하자면 못 할 것도 없었으나 내친김에 끝까지 가기에는 상황이 여의찮았다.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디아와 노닥거리느라 30분은 족히 낭비한 탓에 지금 달려 나가 청소하는 시늉을 한다고 해도 의심을 살 여지가 다분했다. 뒷일을 생각한다면 지금쯤 슬그머니 빠져나가야 하는데….

“나 이렇게 두고 갈 거야?”

허리를 감은 팔에 은근히 힘을 준 디아가 눈꼬리가 곱게 빠진 눈을 슴벅슴벅 감았다 떴다. 교만한 도련님은 어디로 가고 시무룩한 표정이 안쓰러움을 자아내는 어린 애인이 몸을 바투 붙였다. 두툼한 외투 자락에 흉흉한 성기가 들러붙었다.

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영악한 놈…. 평소처럼 가지 말라고 떼를 쓰면 장난으로 때우고 빠져나갈 텐데, 꼭 어린 시절처럼 순진한 척을 하니 냉정하게 굴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디아에게서 어린 시절의 면모가 엿보일 때마다 반은 불가항력적으로 마음이 약해지고는 했다. 아마 부채감 탓이겠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고 고민하다가 구겨진 손수건을 어깨 너머로 휙 던졌다. 더 고민해 봤자 시간 낭비였다.

“빨리할 수 있어?”

“…응.”

느지막한 대답이 영 시원찮았지만 드물게 배시시 웃는 디아를 거부하는 건 반의 능력 밖이었다.

고요해야 할 서고 구석에서 투박한 책상다리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의만 살짝 내린 채로 나뭇결이 군데군데 벗겨진 책상 상판에 엎드린 반이 밭은 숨을 터트릴 때마다 희미한 입김이 일었다.

“읏, 후으….”

“하아…. 사랑해, 좋아해, 반….”

등에 가슴을 꼭 붙이고 상체를 양팔로 다부지게 끌어안은 디아가 허릿심만으로 연거푸 쳐올렸다. 일부만 드러낸 엉덩이와 디아의 고간이 빠르게 부딪치며 불투명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질퍽질퍽한 소리가 어깨에 얼굴을 묻은 디아의 거친 숨소리와 섞여 귓속을 한가득 메웠다.

서고에는 벽난로가 없었다. 이가 딱딱거릴 만큼 추워야 정상일 텐데 반은 끔찍한 더위를 느끼며 열이 오른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덥고 숨 막혔다. 꼭 두꺼운 외투와 디아 사이에 갇혀 압사당하는 기분이었다. 땀이 삐질삐질 나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다가도 머릿속이 혼탁해지는 느낌을 계속 이어 가고픈 상반된 감정이 들었다. 최대한 신음을 삼키며 덜컹거리는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자 연신 허리 짓하던 디아가 속도를 올렸다.

“반…. 사랑해. 사랑한다고 해….”

“흡…!”

빗장뼈 부근을 손바닥으로 힘껏 누른 디아가 귓바퀴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반은 한계까지 늘어난 구멍에서 새어 나온 점성 있는 액체가 회음부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습기 머금은 책상에 이마를 비볐다. 복도에 누가 돌아다닐지 모르는 까닭에 입을 꼭 다물었지만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신음은 어쩌지 못했다.

“사, 사랑해…. 잠깐, 읏!”

이윽고 종아리 근육이 경련했다. 디아가 마지막이라는 양 세게 치받자 책상이 넘어갈 듯 덜컹거리며 시야가 희부옇게 흐려졌다. 줄곧 허공에서 애처롭게 흔들리던 성기가 사정하며 무언가 발밑으로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반은 디아가 팔뚝에서 힘을 풀자마자 책상 밑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지탱해 주는 듯하더니 덩달아 주저앉은 디아를 엎드린 채로 받아 낸 반은 가빠진 숨을 고르며 여운을 즐겼다. 몽롱하게 취해 현실감이 무뎌진 느낌, 빈틈없이 밀착한 타인의 온기가 주는 안정감이 묵직한 무게마저 달갑게 했다.

“하아, 하아….”

함께 싸지른 정액으로 심히 더러워진 카펫을 망연히 바라보며 저걸 어떡하나, 고민할 때였다. 배 속에 사정해 놓고도 성기를 빼지 않고 미적거리던 디아가 넌지시 물었다.

“답 못 들었어. 어제 왜 안 왔어?”

“아, 그거….”

노곤한 몸을 축 늘어뜨린 반은 간 떨어지는 줄 알았던 어젯밤을 회고했다. 쾌감이 뇌를 한차례 휘저은 탓에 기억을 떠올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낮에는 배로 도착한 생필품 운반을 돕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밤에는 복도를 서성이는 프레드 때문에 꼼짝도 못 했던 어제 일을 어렴풋이 떠올린 반은 싱겁게 웃었다.

“그냥 뭐, 애 좀 타라고.”

“…일부러 안 왔다고?”

잘 익은 과일처럼 물러진 디아가 단 한마디 만에 태도를 바꾸었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 반응에 키득거리며 웃었더니 디아가 몸을 짓누르며 똑바로 대답하라고 재촉했다. 힘들어 죽겠는데 무게로 짓이기지, 숨 못 쉬게 끌어안는 통에 반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어제 일을 대강 뭉뚱그려 알려 주자 ‘그냥 우리 둘만 있었으면 좋겠어’하고 볼멘소리를 한 디아가 뒷덜미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어리광 부릴 때마다 오냐오냐 받아 줬더니 아주 버릇이 된 남자와 계속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슬슬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저를 게으르게 만드는 유혹을 간신히 물리친 반은 가슴팍을 가로지른 팔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 가야 돼. 그만 놔주라….”

“키스해 줘. 어제오늘 안 해 줬잖아.”

마무리 키스쯤이야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좋지, 하고 흔쾌히 받아들이자 엎어진 몸이 빙글 돌아갔다. 동시에 장기를 밀어 내고 자리 잡았던 놈의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내벽이 딸려 나가는 느낌은 몇 번을 겪어도 낯설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으….”

확장된 구멍이 서서히 닫히는 감각은 꺼림칙했지만 징그러운 살덩이가 구멍에서 빠져나간 덕에 좀 살 것 같았다. 역시 내내 품고 있기 알맞은 크기는 아니었다. 적응하려야 할 수가 없는 사이즈에 미미한 회의감이 들 무렵, 기다리던 입술이 아닌 방금 빼낸 귀두가 들이밀어졌다.

잡아챌 새도 없이 홀라당 벗겨진 바지가 저 멀리 날아갔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맨다리에 돋은 자잘한 소름을 손바닥으로 뭉개며 다리 사이를 차지한 디아가 자연스럽게 삽입을 시도했다. ‘옷을 제대로 입혀 주려는 모양이구나, 착하긴 착하다니까’ 하며 방심하고 있다가 봉변당한 반이 황급히 너른 어깨를 짚었다.

“야, 잠시만…. 흣!”

겨우겨우 닫히는가 싶던 구멍이 늘어나며 단단한 살덩이를 머금었다. 익숙하지만 버거운 그것을 또다시 품게 된 반은 황당한 심경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주제에 추울까 걱정은 되는지 맨다리를 뜨거운 손바닥으로 쓱쓱 쓸어내리던 디아가 목구멍에는 넣지 못한 뿌리 부분까지 느리게 삽입했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띄우자 덩어리진 정액이 카펫으로 뚝뚝 떨어졌다.

“장난… 그만 치고, 어?”

그러잖아도 쉽게 끓어오르는 몸뚱이에 기름을 마구 쏟아붓는 디아를 얼렀지만 돌아온 것은 쪼는 듯한 키스였다. 그는 밀어 내는 손, 입꼬리, 광대뼈, 코끝을 포함해 온갖 곳에 쪽쪽거리면서 반이 유달리 약한 부분을 느릿느릿 찔렀다.

“반은 나랑 이러는 거 싫어? 난 밥 먹다가도 하고 싶고, 자다 깨서도 하고 싶고, 씻으면서도 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눈만 맞으면 한다는 그런 거.”

“당연히, 하아…. 하고 싶지…. 그런데 지금은 좀….”

어떤 로망을 품고 있는지 얼추 감이 잡혔다. 조기 교육을 로맨스 영화로 한 디아는 신혼부부라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별반 틀린 말도 아니었고 그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간 다친 몸을 회복하느라,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또 여행지를 쏘다니느라 로망을 실현할 틈 없다가 졸지에 로미오와 줄리엣 신세가 됐으니 속이 상할 만도 했다. 그리고 아쉬운 사람은 디아만이 아니었다.

제 처지를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는데, 한 명이라도 제정신을 붙들어야 하는데, 하며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자 했지만 디아를 밀어 내는 손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결정타는 서로의 이마를 콕 맞댄 디아가 속눈썹 짙은 눈을 깜박이며 내뱉은 속삭임이었다.

“…진짜 신혼부부처럼.”

이미 축제 버금가는 결혼식을 올려 놓고 조심조심 말하는 모습은 마치 부정당할까 봐 눈치를 살피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반의 어리고 미숙한 연인은 이따금 믿기 힘들 정도로 자신감 없는 태도로 양심의 가책을 얹어 주었다. 그의 혼란한 성격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반은 생때같은 남자를 도무지 거절할 수 없었다.

반은 자문했다. 한평생 진실하고 성실했던가. 답은 금방 나왔다. 전혀.

“우리도 진짜 신혼부부 맞는데.”

어깨를 움켜쥔 손을 미끄러뜨려 목을 감고 끌어당기자 반짝거리는 녹안에 기대가 일렁였다. 입술을 벌린 디아가 정말? 하고 물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확답받고 싶어 묻는 것이었다. 그가 이토록 불안해하는 원인을 넘치도록 제공한 반은 정말, 하고 대답하며 늘씬한 허리를 다리로 감았다. 아무리 만 하루 만에 만난 디아가 반가웠기로서니 대낮에 좆을 빨려고 덤벼든 제 잘못이 컸다.

***

다음 날, 어김없이 호출당한 반은 엠마와 독대했다. 고성에 비해 허름하기 짝이 없는 응접실 의자에 반듯한 자세로 앉은 반은 불을 지핀 벽난로를 흘끔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 한 번은 들킬 거라 예상했으나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불려 올 줄은 미처 몰랐다. 난감한 상황은 늘 예고 없이 닥쳐서 식은땀을 자아내고는 했다.

“자리를 자주 비우신다던데요.”

“아니, 누가 그런 소리를….”

“소등 후에 저택을 그렇게 돌아다니신다고.”

“제가요? 그럴 리가요. 저는 해 떨어지면 바로 곯아떨어집니다.”

엠마의 추궁에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머지않아 밑천이 드러났다.

“건물이 오래돼서 보수가 필요한 곳이 많더군요. 오늘 중으로 처리할 겁니다.”

“지하실이요? 그거 막습니까?”

중견 배우도 울고 갈 표정 연기를 펼치던 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엠마는 말없이 반을 응시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그가 지하실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레 발이 저려 밀회를 제 입으로 시인한 꼴이 된 반은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허구한 날 디아와 야한 짓만 해 댔더니 뚝뚝 떨어진 지능이 기어이 바닥을 친 모양이었다.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시치미 떼 봤자 보기 흉하기만 할 테다. 실수 수습을 위해 깨끗한 뇌를 쥐어짠 반은 큼, 헛기침하고 품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호출받자마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한 것이 있었다.

“그… 별건 아니지만.”

안주머니에 고이 넣어 온 목걸이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자 엠마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디아의 눈 색을 빼닮은 보석이 박힌 브로치는 차마 넘겨줄 수 없어서 짙푸른 보석으로 촘촘하게 장식된 목걸이를 뇌물용으로 가져왔더랬다. 얼마 전 제 것이 된, 디아가 과자 부스러기처럼 복도에 흩뿌려 두었던 패물 중 하나였다. 반은 그것을 앞으로 쭉 내밀며 한쪽 눈을 연거푸 찡긋거렸다.

엠마는 이거 받고 눈감아 달라는 경박한 뜻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 치의 변화가 없는 무표정에도 반은 기죽지 않고 상체를 숙였다. 은밀한 거래를 제안하듯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프레드 것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두 분이 대장이시니까. 이게 또 팔면 값이 꽤….”

“자중하세요.”

부정 청탁 시도는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서기도 전에 좌절됐다. ‘어쩌다 이런 게 굴러 들어와서는’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엠마의 시선에 위축된 반은 풀이 죽어 손을 뻗었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목걸이를 스윽 끌어다가 도로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정말 청렴결백하십니다.”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외계인 피가 섞여서 그런지 앞뒤 꽉꽉 막힌 게 디아와 판박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린 반은 이어지는 엠마의 훈계에 잠자코 고개만 주억거렸다. 규칙을 수십 번 어겨 놓고 뻔뻔하게 응수할 정도로 얼굴 가죽이 두껍지는 않았다.

“저는 두 분이 어디서 뭘 하든 관여하지 않겠지만 보는 눈이 많습니다. 조심하셔야겠죠?”

“네….”

“근무 중에 이탈하는 것도 삼가셔야겠고요.”

“네….”

“프레드에게는 이런 짓 하지 마시고요. 아시겠습니까?”

“…넵.”

뇌물 수수는 묘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목걸이를 챙길 때까지만 해도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자신감을 몽땅 잃은 반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시도가 가로막히자 도리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쉬워졌다.

“디아가 좀 불안정한 면이 있다 보니까 자꾸 걱정돼서요. 보고 싶기도 하고….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외따로 떨어진 시간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디아에 비해 담백할 뿐, 반 역시도 알콩달콩한 신혼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 상당했다. 제 손으로 키운 놈을 옆구리에 꿰찬 인면수심의 입장에서 대놓고 말하기 겸연쩍어 그렇지. 고개를 푹 숙이고 멋쩍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사과하자 잠시 뜸 들인 엠마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두 분 다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시고요.”

“네….”

맥없이 대답하던 반은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 끝났는지 엠마는 나가도 좋다는 듯이 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반은 의아한 표정으로 묵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 문을 닫은 후에야 왜 엠마와의 대화가 찝찝한 여운을 남겼는지 깨달았다.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잠깐만…. 이거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묵인해 주겠다는 뜻인가? 프레드만 조심하고?

반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리고 응접실 문을 힐끔거렸다. 주의를 줄 뿐, 단호하지 않았던 엠마의 잔소리는 분명 눈감아 주겠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들뜬다고 해야 하나. 정식 허가까지는 아니었으나 매일 밤 디아와 밀회하며 차곡차곡 쌓인 염려를 해소할 정도는 되었다.

역시 엠마는 아군이었다. 그저 청렴할 뿐이었던 엠마에게 무한한 감사를 올린 반은 홀가분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소식을 디아에게 몰래 전달하려면 오늘 청소 동선을 되짚어 봐야 했다.

***

디아는 토라졌다. 본인은 화가 났다고 주장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완전히 토라진 모습이었다.

널찍한 침대에 엎어진 디아는 반의 향기가 사라진 침구를 두 손 가득 움켜쥐었다. 소등 시간이 지난 지 꽤 되었건만 반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안감이 덜한 이유는 충분한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청소를 위해 본관으로 온 반이 은근슬쩍 외진 곳으로 유인하기에 좋다고 쫓아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개구멍을 들켰고, 프레드가 주시하고 있으니 우리 한동안 조심하는 편이 좋겠다고 어찌나 덤덤하게 말하는지 그 자리에서 프레드라는 사용인을 찾아갈 뻔했다. 황급히 앞을 막아선 반은 좋은 수를 생각 중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온갖 감언이설로 살살 달랬고, 그를 사랑하는 디아는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좋은 수 같은 소리 하네….”

혹시라도 찾아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탓에 그를 마주할 기회는 사용인들이 본관을 청소하는 낮뿐이었다. 얼굴을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눈앞에 두고 손 한번 못 잡아 보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개구멍이 막힌 지 사흘 차, 매일매일 따먹겠다는 다짐이 산산이 조각난 후에야 디아는 드디어 르네가 바라 마지않던 반성을 했다. ‘체마를 해치는 것이 아니었는데’ 보다는 ‘조용히 처리했어야 했는데’에 가까웠지만 그것도 반성이라면 반성이었다.

디아는 빙글 돌아누워 까마득히 높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반이 곁에 없는 침대는 눈을 감기 두려울 정도로 넓었다. 홀로 잠든 수백의 밤을 까맣게 잊은 디아는 차가운 시트를 손바닥으로 툭툭 내리치며 다른 손으로 목걸이 로켓을 만지작거렸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입술 새로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외로워. 쓸쓸해. 짜증 나. 우울해. 무기력해. 보고 싶어.

어른스럽게 굴고 싶은데 방법을 도통 모르겠다. 반처럼 여유롭게, 모든 일을 장난처럼 넘기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어느샌가 과도하게 비대해진 감정은 장난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일 수 없을 만큼 무거워서 가끔은 숨이 막혔다. 제 감정에 짓눌려 죽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했다. 행복할 때는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고, 불행할 때는 불행해서 죽을 것 같았다. 반은 저를 구름 위로 띄웠다가 진창에 처박는 짓을 반복했고, 그래서 사랑했다.

반은 앞으로도 제 곁에 있을 테니 그만 불안해하고, 늘 여유로운 반이 제게 안달 내는 날이 오도록 어른스러워지자고 다짐할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퍽, 하고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뛰어난 청각이 잡아챈 소리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종류였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소리가 들려온 창가를 돌아봤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잘못 들었을 리가 없어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또다시 퍽, 창을 때린 물체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닫힌 창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침대에서 일어난 디아는 한기가 스며드는 창가로 다가가 잠긴 창을 활짝 열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다. 푸르스름한 어둠으로 뒤덮인 정원을 내려다보는데 희미한 불빛이 시야에 어룽졌다. 누가 감히 이 시간에 불을 켰나 싶어 짜증이 차오른 시선을 옮긴 디아가 그대로 호흡을 멈추었다.

눈 쌓인 발치에 램프를 둔 반이 머리 위로 치켜든 양팔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외출용 외투를 꼭 껴입은 반이 반갑다는 듯이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보고 싶어서, 만지고 싶어서 끙끙 앓던 것을 어떻게 알고 제 앞에 불쑥 나타난 남자를 중심으로 연분홍빛 색채가 피어났다. 겨우 숨을 들이켠 디아는 속으로 서너 번 되뇌었다. 어른스럽게, 어른스럽게….

“반!”

그러나 너무 벅찬 나머지 어른스러운 것과 거리가 멀찍이 떨어진 외침이 튀어나왔다. 기겁한 반이 다급히 입술 앞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신호를 받고 뒤늦게 입을 다물자 내려오라는 듯한 손짓이 이어졌다. 디아는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창틀을 밟고 몸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아니, 아니!’

놀라 팔을 내저은 반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머리 위로 엑스 자를 그렸다. 곧장 뛰어내리려던 디아는 몰상식한 행동을 멈추고 반을 바라봤다.

‘문으로! 옷 입고!’

반은 제자리에서 옷 입는 시늉, 뛰는 시늉, 문 여는 시늉을 했다. 찍소리도 내지 않고 몸짓만으로 분주히 뜻을 전달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가운 한 장 걸친 차림으로도 추위를 느낄 수 없는 몸이었지만 디아는 반이 시킨 대로 허둥지둥 옷을 챙겨 입고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시커먼 굴 같은 복도가 펼쳐졌다. 한때 그의 환청을 듣고 내달렸던 검은 복도는 그때와 전혀 다른 감상을 일으켰다. 반이 저를 부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차가운 숨을 집어삼킨 디아는 황급히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 쥐 죽은 듯 고요한 저택을 달려 나갔다.

불빛 한 점 없는 복도를 지나, 어둠이 내려앉은 계단을 내려가, 구색만 갖춘 수많은 방을 지나쳐 저택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몰아치며 반의 향기를 싣고 왔다.

본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반이 고개를 들더니 마치 반겨 주듯 씩 웃었다. 발목까지 쌓인 눈을 거리낌 없이 짓밟고 달려간 디아가 반을 끌어안고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발이 지면에서 떨어진 반이 엇, 하며 당황하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민망하니까 제발 내려놓으라고 어깨를 두드리는 반을 눈밭 위에 내려 주자 두툼한 장갑을 낀 손이 양쪽 귀를 살포시 덮었다.

“뭐야. 옷을 왜 이거만 입고 왔어. 안 추워?”

“안 추워.”

“추워, 추워. 엄청 추워.”

추위를 안 타는 걸 알면서도 반은 제 귀마개를 벗어 씌워 주고는 팔뚝을 손바닥으로 쓱쓱 쓸어내렸다. 대충 걸치고 나온 외투를 사이에 두고 반의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다. 울컥한 디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나왔어? 별관 문 잠겼을 텐데.”

“너 보려고 창 좀 넘었지.”

“그게 좋은 수야?”

“이 정도면 좋은 수 아니야? 안 들키고 나왔으면 그만이지.”

지하가 막혔다면 지상을 택한다는 단순한 결론을 내린 반이 시원하게 웃었다. 기껏 택한 방법이 창을 넘는 것이라면 제가 가는 편이 나았을 텐데, 반은 그 선택지를 염두에 두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따금 저를 어리게만 보는 반이 밉다가도 설레어서 그의 손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밤에 나오는 건 또 처음이네…. 좀 걸을까? 눈도 안 오고.”

손목을 비틀어 손을 마주 잡은 반이 바다 방향으로 살짝 당겼다. 디아는 잠시 망설였다. 저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지만 가뜩이나 체력이 떨어진 반이 감기에 걸린다면 그만한 불상사가 없었다. 머뭇거리며 그의 옷차림을 살피자 속마음을 파악한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다. 뛰자. 뛰면 안 춥겠지.”

타당한 걱정을 모르는 체한 반이 걸음을 빨리했다. 그를 말리지 못하고 덩달아 뛰게 된 디아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잘도 달리는 반에게 이끌려 가다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빙이 떠다니는 시커먼 바다 끝에서 눈이 시리도록 싸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말라 죽은 나무와 기분 나쁠 정도로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황폐한 땅이 낭만적인 영화 속 무대로 변모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걱정이 날아가고 설렘이 피어오르자 남은 것은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뿐이었다.

머리카락을 헤집는 바람을 맞으며 한때 저를 가로막았던 바다 앞에 도착한 디아는 숨을 고르는 반을 불렀다.

“반….”

“어, 왜?”

“여보.”

“어어. 왜, 여보.”

한 걸음 다가온 반이 흐트러진 귀마개를 바로 해 주며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찬바람에 발개진 뺨과 아래로 휜 눈꼬리를 마주하자 도무지 일렁이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디아는 반의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때때로 저를 숨 막히게 하는 감정을 게워 냈다.

“너무 사랑해서 죽고 싶어.”

눈썹을 찌푸리고 바람 빠지듯 웃은 반이 ‘죽지는 말자…’하고 핀잔을 줬지만 그것조차 달가웠다. 하지만 만족하기에는 일렀다. 디아는 그의 손목을 붙들고 살짝 당겼다. 얼른 제가 원하는 답을 내놓으라는 뜻을 알아차린 반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빈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툭툭 던지면서 정작 중요한 말을 할 때는 몹시 쑥스러워하는 남자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뭘 또 그런 걸 묻고 그러냐.”

“사랑해?”

반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어 올려 먼바다를 응시했다. 디아는 ‘음….’하고 뜸 들이는 음성과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새를 머릿속에 새기며 답을 기다렸다. 머지않아 시선을 맞춘 반은 기다림이 무색할 만큼 흔쾌하게 답했다.

“응. 사랑해.”

꺼림칙한 기색도, 마지못해 하는 기색도 없이 깔끔히 고백한 반이 배시시 웃었다. 그 장난스럽고 소년 같은 미소에, 디아의 입매에도 똑 닮은 미소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디아는 양팔을 뻗어 제 짧은 생을 독차지한 남자를 숨 막히도록 끌어안았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웃음을 터트린 반이 팔을 들어 엇비슷한 힘으로 안아 주었다. 디아는 한때 너르게만 보였던 그의 어깨에 이마를 떨어뜨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반은 믿을 만한 구석이 조금도 없는 연약하고 비겁한 남자였지만 그의 품에 안긴 순간만큼은 그 무엇도 두렵지 않고, 그 무엇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마치 그의 등을 방패로 삼고, 그의 품을 요람으로 삼아 잠이 들었던 어릴 적처럼….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