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8/28)

7장

오늘 밤만 지나면 배가 온다.

배가 여덟 시나 아홉 시쯤에 온다고 했으니 정우진이 내게 수갑을 채우기 전에 기절시켜야만 했다. 일곱 시쯤이면 괜찮을까? 솔직히 흉기가 될 만한 것들은 널리고 널렸다. 굳이 칼이 아니더라도 뭐든 손에 집히는 걸로 머리를 때리면 지가 어쩔 거야. 게다가 정우진은 날 경계하기는커녕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우진은 좀 이상했다. 내가 만약 누군가를 납치했으면 최소한 그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두긴 할 것 같은데, 정우진은 그런 게 없었다.

내가 말도 없이 밖에 나가서 바다를 구경해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내 뒤에 서서 날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곳이 도망갈 곳 없는 섬이라 그런 건가? 모르겠다. 이젠 뭐가 어떻게 돼도 좋으니 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선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뒷목에서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나는 감고 있는 눈을 떠 시커먼 허공을 쳐다봤다.

“선배.”

정우진은 고목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내 등에 딱 붙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내 등에 이마를 문지르며 자위를 하고 있다. 그가 조금씩 뒤척일 때마다 엉덩이 쪽에 딱딱한 게 닿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것도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차라리 정우진이 내 뒤에서 날 부르면서 자위를 하는 게 훨씬 나았다. 여기서 싫다고 하거나 도망가려고 하면 정우진은 또 내 다리를 억지로 벌려 날 강간할 테니까.

어서 빨리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축축한 손을 들어 내 허리를 휘감았다. 그는 날 꽉 껴안고 내 등에 이마를 비비면서 흐느꼈다.

엉덩이 사이로 뭔가가 뿌려졌다. 드디어 사정한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정우진이 끊어질 듯 얕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요.”

“…….”

“많이, 진짜 많이 사랑해요.”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직 사정의 여운이 남아 있는 듯했다. 코끝으로 비린 정액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정우진이 다시 뒤척였다.

하아, 길게 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움직인다. 사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딱딱한 성기가 내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을 스쳤다. 정우진은 추삽질을 하듯 날 붙잡고 허리를 놀렸다.

“선배.”

선배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무거운 눈꺼풀을 감는데 정우진이 느닷없이 내 몸을 돌려 마주하더니 내 다리를 들어 올렸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뜨자 정우진이 내 위로 올라왔다. 그는 땀에 젖은 얼굴로 날 내려다보며 헐떡였다.

“사랑해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짜증스레 내뱉은 한숨에 정우진이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말 좀 해 봐요.”

놓치면 죽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날 끌어안고 애원했다. 여전히 그의 성기는 위로 쳐들린 채였다.

“선배, 말 좀 해 봐요.”

“잠 좀 자자.”

이 씨발 새끼야.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키며 말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그러곤 차갑게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만져 줘.”

“…….”

“만져 주세요.”

차마 뭘 만져 달라는 거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혐오스러운 뭔가를 보듯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보면서도 정우진은 끈질겼다.

“자지 아파요.”

“…….”

“터질 거 같아. 선배가 만져 줘요.”

말간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조금만 더 지나면 눈물이 내 얼굴 위로 뚝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를 밀쳐 내고 등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눈깔이 뒤집힌 정우진이 날 강간할지도 몰랐다. 그럴 순 없다. 몇 시간 뒤면 배가 오는데 여기서 강간이라도 당하면 내 계획이 다 망가진다. 이를 사리무는 날 보며 정우진이 다시금 재촉했다.

“선배.”

정우진이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발갛게 물든 눈가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내 거시기 말고 자의로 다른 사람 건 만져 본 적도 없었다. 나는 한참 정우진을 노려보다가 손을 밑으로 내렸다.

“이것만 해 주면 자게 내버려 둘 거냐?”

내 나지막한 목소리에 정우진은 대답도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제 성기를 쥐게 했다. 내 손에 닿자마자 딱딱한 성기 끝에서 선액이 줄줄 흘렀다. 덜 잠근 수도꼭지에서 새는 끈적끈적한 수돗물 같았다. 제 성기를 잡고 있는 내 손등에 손을 겹친 채 정우진은 미친 것처럼 허리 짓을 했다.

“으, 하, 하윽! 흑, 아, 선배, 선배.”

“…….”

“흑…….”

성기에서 선액이 흐를 때마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내 손을 성인 기구처럼 쓰고 있는 게 좋은가 보다. 씨발 새끼.

“사랑해요, 선배 사랑해요.”

“…….”

“흑, 아, 가, 갈 거 같…….”

길게 터져 나온 정액이 내 배와 가슴, 그리고 턱까지 닿았다.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잡고 있는 성기에서 손을 떼려는데 정우진이 힘을 줬다. 조금 말랑해진 성기를 여전히 잡고 있게 한 채 정우진이 고개를 숙여 내 턱이며 가슴에 튀었던 정액을 죄다 핥았다.

“넣고 싶어.”

“…….”

“선배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울먹이며 말했지만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내 귓가로 끊임없이 음담패설을 내뱉을 뿐이었다.

“구멍 안쪽을 빨고 싶어요.”

“…….”

“넣고 흔들고 싶어. 쑤시고 박다가 선배 안에 싸고 싶어요.”

“…….”

“선배 정액 먹고 싶어요.”

이 새끼는 왜 항상 이딴 식으로 말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내가 정신병자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 개좆같은 말을 듣다가 더 들으면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서 손을 들었다.

내 손이 그의 머리에 닿자, 정우진이 눈에 띄게 몸을 움츠렸다. 고장 난 기계처럼 천박한 말을 쏟아 내던 정우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손에 머리를 비비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이제 이 짓도 오늘이면 끝난다.

* * *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정우진은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요 며칠 제대로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으니까.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이니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나는 힐끗 시선을 돌려 시계를 쳐다봤다. 시곗바늘은 5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빠르면 두 시간 뒤에 배가 들어온다. 그 전까지 정우진을 처리해야 한다.

마음 같아선 죽이고 싶었지만 나는 살인자도 되기 싫었고, 솔직히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간단하게 기절시킨 뒤에 끈 같은 걸로 묶어 둘 생각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몸을 일으켰다. 밧줄처럼 내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한참 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한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나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였다. 두어 발자국을 떼기도 힘들었다. 숨도 쉬지 않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다행히 소리는 나지 않았다.

시커먼 어둠을 헤치고 주방으로 갔다. 물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주방에서 칼을 찾았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큼지막한 식칼을 한 손에 쥐고 반대쪽 손엔 옅은 나무 색깔의 절굿공이를 쥐었다. 이걸로 정우진을 기절시킬 수 있을까? 길이가 너무 짧아 불안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절굿공이를 내려놓은 뒤에 다른 걸 찾았다. 하지만 딱히 무기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이리저리 어둠 속에서 무기가 될 만한 걸 찾고 있는데,

“선배?”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다리 밑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놀란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현관을 향해 뛰었다. 그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한 손으론 식칼을 꽉 쥔 채 문을 쾅 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사방이 어두웠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뛰었다. 무서워서 뒤를 돌아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이쪽으로 가면 안 되는데. 이쪽은 바다 쪽이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미친 것처럼 산을 뛰어올라 갔다.

한참을 뛰는데 그제야 뒤늦게 낭패감이 들었다. 내가 왜 도망치는 거지? 차라리 그때, 정우진이 날 불렀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방으로 들어가 물 한 잔 마시고 왔다고 하면 됐을 것을!

“씨발!”

나는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지르며 더욱 빠르게 뛰었다. 이대로 나오면 안 됐다. 정우진을 기절시키든 칼로 찔러서 죽이든 해결을 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나는 내 탈출이 실패했음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한참 산을 뛰어올라 가고 있는데 어슴푸레하게 해가 뜨기 시작했다. 칠흑 같던 주변이 서서히 드러났다. 자라난 나무와 새파란 풀 이파리, 그리고 눅눅하게 젖은 흙바닥.

나는 땀을 비 오듯 흘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잠시 허리를 굽히고 숨을 헐떡이다가 내가 신발도 신지 않고 나왔음을 알았다. 뭔가에 긁혔는지 발등에 핏방울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머리가 차가워졌다. 정우진이 멋대로 다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 내게 경고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잡히면 또 강간당하겠구만.

“하하.”

갑자기 터지는 웃음에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드디어 나도 정우진을 따라 미쳐 버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슬쩍 뒤를 돌아보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나무가 워낙 많아서 잘 모르겠다.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다시 위를 향해 뛰었다.

이미 탈출은 실패했다. 배가 들어와도 나는 그곳으로 가지 못할 거다. 어쩌면 이번엔 정말 정우진이 내 다리를 자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살을 도려내진 않더라도 묶어 두긴 하겠지. 족쇄를 발목에 채우려나. 그럼 난 침대 밑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거다.

상상만 해도 눈앞에 새카매졌다. 너무 조급했던 걸까? 조금 더 준비를 했어야 했나? 하지만 이런 고민을 지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 위로 올라가고 있는데 어느덧 끝이 보였다. 사실 이 섬엔 나무가 있긴 했지만 그리 많은 건 아니었다. 산도 산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높은 언덕에 불과했다. 나는 언덕의 끝에 다다랐을 때 숨이 탁 트이는 걸 느꼈다.

어느덧 해가 떠 하늘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떠다니는 새파란 하늘 너머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그게 마치 내 마음 같았다.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점점 절벽으로 다가갔다.

하늘을 보며,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날 불렀다. 슬쩍 뒤를 돌자 정우진이 조금 흐트러진 모습으로 날 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창백하게 질린 얼굴,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신발을 신지 않아 여기저기 상처가 난 새하얀 발등. 정우진의 시선이 날 보다가 밑으로 향했다. 칼을 쥐고 있는 내 손이었다.

“위험하니까 칼은 만지지 마세요.”

“…….”

정우진이 한 걸음씩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거리가 점점 좁아진다. 나는 들고 있던 칼을 멀거니 내려다봤다.

그냥 찌를까? 어차피 돌아가도 난 강간당하고 감금당해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럴 바엔 그냥 여기서 정우진을 찌르고 들어오는 배를 타고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살인자가 되더라도 전후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은 될 것이다. 물론 내 인생에 그어진 빨간 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겠지만, 이곳에서 강간당하며 사느니 차라리 살인자가 되는 게 나았다.

나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정우진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날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다가 다시 칼을 주시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파도가 치고 있는 절벽의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배.”

표정이 없던 얼굴에 점차 불안감이 스미기 시작했다. 변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나는 이것이 정답임을 깨달았다.

“선…….”

“오지 마.”

내가 절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자 정우진은 걸음을 멈추는 것도 모자라 두 발자국이나 내게서 멀어졌다. 그는 양손을 든 채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너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내 지긋지긋한 질문에 정우진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날 사랑해서?”

“네.”

“네가 저지르는 이 좆같은 범행들이 그냥 단순히 날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내 말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할게요. 뭐라고 하지도 않고, 이제 선배가 싫다고 하면 건드리지도 않을 테니까 일단 이리 오세요.”

“대답해.”

“선배, 일단 집에 가서…….”

“대답하라고!”

내 고함 소리에 정우진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는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초조함과 불안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네가 날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쳐. 그럼 나는?”

“…….”

“그럼 나는 어쩌는데? 네 사랑에 내가 희생해야 되는 이유가 뭔데? 내가 왜 네 장단에 놀아나야 되는 거지? 네가 지껄이는 사랑한다는 그 지긋지긋하고 좆같은 말을 왜 매일 들어야 하는데? 날 사랑하는 거면 사랑해. 누가 뭐라고 했냐? 사랑하는 건 네 마음인데 네 사랑을 씨발, 나한테 강요하는 이유가 뭐냐고!”

처참한 심정으로 온 힘을 다해 소리쳤는데 정우진은 날 똑바로 보다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말했다.

“일단 이리 오세요.”

내 말을 조금도 듣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

“선배, 이리 오세요.”

“하하하.”

웃음이 나와서 웃다가 나는 들고 있던 칼을 정우진 쪽으로 던져 버렸다. 자기 쪽으로 날아오는 칼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걸 피하지도 않았다. 다만 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제 발밑으로 떨어진 칼은 보지도 않은 채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선배, 제발.”

정우진이 손을 뻗었다. 하얗게 질린 손끝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새파란 하늘을 쳐다봤다.

언제 다가온 건지, 시커먼 먹구름이 가까이서 보였다. 나는 한참 하늘을 보다가 슬쩍 시선을 내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이상했지만 단호하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정우진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지껄이는 사랑한다는 말을 영원히 들어야만 하는 걸까?

가끔 강간당하고, 가끔 이렇게 탈출도 하고, 영원히 이렇게?

“선배.”

정우진이 다시 날 불렀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선배.”

그의 눈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피눈물이라도 흐를 것처럼 보였다. 내가 다시 한 걸음 물러서자 정우진이 이를 갈며 말했다.

“잡히면 진짜 다릴 분질러 버릴 거예요.”

정우진은 눈가를 빨갛게 물들이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선배가 싫어할까 봐 묶어 두지도 않고,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잖아요. 근데 왜 이래요? 선배가 자꾸 이러면 내가 참는 이유가 없잖아. 정말 다리 끊어지기 싫으면 지금, 씨발! 움직이지 마!”

내가 뒤로 한 번 더 물러서자 정우진이 미친 것처럼 악을 썼다. 날 설득시키려는 듯 조곤조곤 말하는 말투도 사라졌다. 그는 이젠 되는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씨발, 진짜 발목 끊어지고 싶어? 움직여 봐, 씨발. 거기서 한 걸음만 더 움직여 봐. 그땐 정말 무릎 밑으로 다 씹어 먹을 거야!”

정우진은 겁에 질린 것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내가 노력하고 있잖아요. 계속 노력하고 있는데 왜 자꾸 그래, 선배가 싫다고 해서 내가 노력하고 있잖아!”

“씨발, 진짜 죽여 버릴 거야. 팔다리 다 잘라서 나 없이는 물도 한 모금 못 마시게 만들 거야, 내가 못할 거 같아?”

“선배, 그러지 마세요. 다 거짓말이야. 내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이리 오세요.”

“뭐라고 안 할게요. 이제 건드리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이쪽으로 오라고, 좀!”

정우진은 정신병자처럼 떠들었다. 날 어르다가 다시 욕을 하고 다시 다정함을 가장한 채 조곤조곤 말하는 게 꼭 다중 인격자 같았다.

“아, 알았어. 알았어요. 나 집에 가 있을 테니까 좀 진정되면 오세요. 안 건드릴게, 진짜예요. 나 진짜 지금 내려갈게요.”

정우진은 이내 방법을 바꾼 듯 정말 등을 돌렸다. 눈동자는 내 쪽으로 고정시킨 채 한 걸음씩 멀어지는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고 있자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 꼴을 좀 봐라.

꼭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우진.”

내 부름에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던 그의 표정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넌 내가 그렇게 좋냐?”

눈물을 뚝뚝 흘리는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때까지 커다래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냥, 내 인생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근데 난 네가 싫어.”

“…….”

“네가 날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널 싫어하는 게 훨씬 더 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그러니까 난 네가 매일 지껄이는 그 사랑한다는 말이 존나 지겹고 지긋지긋하거든? 소름 돋아. 끔찍하고 좆같아서 숨이 막힌다고.”

정우진은 숨도 쉬지 않은 채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넌 내가 여기 갇혀서 너랑 계속 있으면 내가 널 사랑이라도 할 것 같았냐? 지랄하지 마, 누가 날 감금하고 강간한 씨발놈을 사랑하겠어.”

나는 커다랗게 숨을 내쉬며 화를 삭였다.

“제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난 여기서 나갈 거야.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나가도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두 번 다시. 알겠냐?”

내 말이 끝났음에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석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곧, 멈춘 것 같던 눈물이 다시금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

“…….”

정우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혹시나 싶어 덧붙였다.

“내가 여기서 떨어져 뒈지는 꼴 보기 싫으면 알겠다고 하는 게 좋을 거다.”

진작 이럴걸. 나는 의외로 움직이지 못하는 정우진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정우진이라면 내가 떨어지든 말든 날 잡으러 올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채를 질질 끌고 집으로 가서 날 강간할 줄 알았다. 내가 바다에 빠졌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우진은 정말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건 굉장히 이상하고 또 신기한 일이었다.

저렇게까지 내가 죽는 게 싫으면 왜 날 묶어 두지 않았을까. 왜 주방에 식칼을 그렇게 덩그러니 내버려 뒀을까. 왜 저렇게 허술했지? 문이라도 내가 열 수 없게 무슨 조치를 취해 놨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아까 정우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싫어할까 봐 묶어 두지도 않은 거라고.

내가 싫어할까 봐 문도 잠그지 않고, 날 묶어 두지도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했다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노력인가? 그게 정우진이 말하는 노력이라는 건가? 내가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참고 날 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둔 게?

“선배.”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있던 정우진이 날 불렀다.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눈물로 젖은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못 하겠어요.”

“뭐?”

“못 하겠어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못 하겠어요. 진짜 못 하겠어.”

정우진은 거대한 파도에 덮쳐진 연약한 무언가처럼 허물어졌다. 바닥에 쓰러져 주먹을 꾹 쥐는 그의 손에서 피가 줄줄 나고 있었다.

“못 해요. 진짜 못 하겠어. 선배,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다른 걸로……. 계속……. 계속 그러려고 했는데……. 나 진짜 못 하는데…….”

정우진은 다섯 살 난 애처럼 혼란스러워하며 울고 있었다. 순간,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서랍에서 봤던 누런 종잇조각이 떠올랐다.

“그거 말고요, 선배. 그것만 빼고 다 할게요, 제발 나 좀…….”

[여기서 기다려. 꼭 기다려야 돼.]

“제발 나 좀 살려 주세요.”

-형아, 살려 줘.

“선배, 나 좀 살려 줘……. 그거 진짜 못 하겠단 말이에요.”

-형아, 살려 줘.

[여기서 기다려. 꼭 기다려야 돼.]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졌다. 기울어지는 시야 사이로 정우진이 내 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눈물로 젖은 얼굴이 앳된 얼굴과 겹쳤다.

나는 저 얼굴을 안다. 필사적으로 날 부르며 서럽게 우는 아이를 알고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선배!”

내가 죽였던 김우진.

한없이 추락하는 내게 손을 뻗으며 정우진이, 아니 김우진이 으스러뜨릴 듯 나를 끌어안았다.

『유실』 1부 完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