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꿈에서 시커먼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이리 오라 손짓하는 웬 놈팡이 새끼가 보였다. 처음엔 저 미친놈이 뭔가 싶다가 곧 저승사자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개꿈이 아니야…….”
난 진짜 죽을 뻔했던 거야. 다 쉬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이라도 걸렸는지 아픈 목을 조금 돌려 슬쩍 옆을 보자 비록 표정은 울상이었으나 반들반들 광이 나는 얼굴로 손을 들고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
“…….”
저승사자를 만나고 온 나와는 달리 정우진은 하루 삼시 세끼 보양식만 처먹은 사람처럼 때깔이 고왔다. 정기 빨아먹는 괴물 같은 놈을 일그러진 얼굴로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 하냐, 너.”
목에서 칠판 긁는 소리가 나왔다. 내 목소리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몸도 정상이 아니고 목소리도 이상했으며, 언뜻언뜻 떠오르는 지난밤의 기억에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지랄 발광을 했는데 몸이 멀쩡하면 그게 신기한 일이었다.
민망하기도 하고 딱히 할 말도 없어서 그 뒤로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그건 정우진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니면 자기도 심했다는 걸 알긴 하는 건지 한동안 우리는 서로 말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멀뚱멀뚱 손을 들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내 시선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인지 정우진이 슬그머니 팔을 더욱 높이 올렸다. 나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쳐다본 것뿐인데 정우진은 그런 내 시선이 뒈지기 싫으면 알아서 똑바로 하라는 뜻으로 보였나 보다.
계속 이렇게 서로 눈으로만 대화할 수는 없어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거기 그러고 있지 말고 물이나 좀…….”
말을 하다 말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 목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소리를 낼 때마다 목 안이 갈고리 같은 걸로 긁히는 느낌이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움직였더니 허리도 너무 아팠고, 온몸의 근육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비명을 질렀다. 이불에 닿는 살갗까지 쓰리기 시작하자 나는 도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베개에 처박혀 눈을 감고 끙끙 앓고 있는데 어느새 물을 가져온 정우진이 내게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정우진의 도움을 받아 다시 허리를 세우는데 정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척추가 부러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환자처럼 정우진이 먹여 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잘못했어요.”
물을 다 마시고 자리에 천천히 눕고 있는데, 정우진이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가?”
“네?”
“네가 뭘……. 으, 씨발. 엎드려 누워야겠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되묻던 정우진이 내 말에 재빨리 내 몸을 돌렸다. 신속하지만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에 어렵지 않게 엎드릴 수 있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 베개에 얼굴을 댄 채 정우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우진은 협탁 위에 아슬아슬 놓여 떨어질 것 같은 컵을 안쪽으로 밀어 넣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생채기가 보였다. 백옥같이 하얀 뒷덜미 위에 마구잡이로 그어져 있는 시뻘건 상처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들어 올렸다.
“야, 너…….”
“미안해요, 많이 아파요?”
“어? 아니, 너 목에…….”
내 말에 정우진이 손을 들어 올려 제 목을 가볍게 훑으며 침대 밑에 앉았다. 그러곤 침대 위에 팔을 올리고 내 코앞에 머리를 눕혔다.
“아까 씻길 때 봤는데 다행히 상처는 안 났어요. 나중에 밥 먹고 근육 뭉친 데 마사지해 드릴게요. 그럼 저녁쯤엔 좀 나아질 거예요.”
“목은 뭐야?”
“…….”
“다쳤어? 언제?”
내 질문에도 정우진은 멀거니 날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손을 올려 어깨 쪽의 가운을 조금 내리고는 등이 보이게 슬쩍 몸을 틀었다. 반쯤 드러난 하얀 등엔 짐승에게 할퀸 것 같은 상처로 엉망진창이었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상처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이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한참을 내게 제 상처를 보여 주던 정우진이 다시 가운을 단정하게 여미고 침대 위로 엎드려 날 쳐다봤다.
“선배가 그랬잖아요.”
“…….”
“아, 여기도.”
나사가 이십 개쯤은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정우진이 다시 가운을 벌렸다. 판판한 가슴 왼쪽 부근에 정확히 손톱자국 네 개가 보였다. 그러나 이번엔 가운을 여미지 않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돌처럼 굳어 있는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정신이 번쩍 들어 내가 이상한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다시 바보처럼 웃었다.
“여기 잇자국.”
“…….”
“팔뚝에도 손톱자국 있는데.”
정우진은 무슨 훈장이라도 자랑하듯 내게 제 몸에 난 손톱자국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쇄골과 목이 이어지는 부근엔 선명하게 잇자국까지 나 있었다. 저러다가 가운을 전부 벗을 것 같아 말리려는데, 다행히 정우진이 벗는 걸 멈췄다. 그러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딴 곳을 쳐다보는 날 턱을 괸 채 구경했다.
싱글벙글 웃는 꼴이 여간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게 아니었다. 상처는 얼핏 봐도 피가 날 정도로 심했던 거 같은데, 저 새끼는 다쳐 놓고 왜 저렇게 웃는지 모르겠다.
“안 아프냐? 왜 웃어?”
“좋아서요.”
“뭐? 뭐가? 다친 게?”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묻자 정우진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웃었다. 어이가 없었다. 등신 팔푼이 새끼처럼 자꾸 웃기만 하는 정우진을 보면서 도대체 뭔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한 거니까 사과를 하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저렇게 좋아하니까 미안하다고 하기도 머쓱했다. 그리고 솔직히 왜 저렇게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것도 좀 이상했다.
아무튼 미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멀뚱멀뚱 눈만 깜박이고 있는데 정우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중에 여기 한 번만 더 물어 주면 안 돼요?”
“…….”
잇자국이 나 있는 반대쪽 목덜미를 가리키며 정우진이 수줍게 말했다. 시커먼 눈동자는 잔뜩 기대에 젖어 밤하늘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그런 정우진을 바라보며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물어 달라고?”
“네, 그리고 등에 상처 난 것도……. 없어지기 전에 다시 할퀴어 주면 안 돼요?”
“…….”
“피 나면 핥아 줘도 되고요.”
“…….”
“할퀴는 거 싫으면 멍들 때까지 빨아 주세요.”
정우진은 수줍어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당당한 변태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려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 궁금해져서 물었다.
“너 혹시 변태냐?”
“네, 저 변태예요. 나중에 반대쪽도 물어 주세요.”
“…….”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에 나는 또다시 당황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보통 변태들은 자기가 변태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마련인데, 정우진은 본인이 변태라는 게 자랑스럽기라도 한가 보다.
아무튼 변태라는 걸 들켰음에도 조금의 타격도 없어 보이는 정우진이 뺨을 발그레 물들이고 목을 쭉 뺐다. 기대감에 젖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점점 열기를 품기 시작했다.
아깐 그렇게 조심스럽던 손길도 조금씩 끈적거리기 시작했고, 내 살갗에 제 손이 닿을 때마다 숨결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마치 뭔가의 징조처럼 보여서 숨이 턱 막히려는 찰나, 문득 하루에 한 번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진심인데 여기서 더 하면 난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아까 나한테 이리 오라고 손짓하던 저승사자도 심상치 않았다. 내 손등에 입술을 문지르고 손바닥 깊숙이 입을 맞추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서 허리를 살짝 구부리며 고통에 젖은 소리를 냈다.
“윽.”
내 신음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정염으로 번들거렸던 눈동자가 금세 걱정스레 변하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해지긴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나부터 좀 살아야겠다.
“많이 아파요?”
“말 시키지 마, 씨발 새끼야.”
나는 연기를 했다는 사실에 지레 찔려서 일부러 더 험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계속 자제하려고 했는데 그때 선배가 자꾸만 이름 부르고 막…….”
정우진이 변명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왠지 저 뒤로 음담패설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나는 얼른 정우진의 말을 가로챘다.
“이젠 네 이름 안 불러.”
“…….”
“뭐, 씨발. 나가서 호두 파이나 구워 와.”
사실 막 일어났을 때보단 많이 괜찮아졌지만 계속 정우진이랑 이렇게 있으면 또 언제 발정 난 개처럼 달려들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아픈 척을 하면 좀 통하는 것 같기는 하니까 며칠은 이걸로 시간을 벌 수도 있었다. 아니, 며칠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어도 괜찮았다.
씨발, 하루에 한 번이 말이 되냐고…….
그때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이 또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호두 파이 먹고 싶어, 우진아. 이렇게 말해 주세요.”
“억, 내 허리.”
“선배, 우진이라고…….”
“씨발, 척추 끊어진 거 같아.”
자꾸 이름 불러 달라, 물어 달라, 빨아 달라, 귀찮게 하는 정우진을 무시한 채 나는 곧 죽을 사람처럼 반 꾀병을 부렸다.
* * *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뜨기도 전에 고소한 냄새가 났다. 침대가 묵직하게 가라앉아 눈을 뜨려는데 목덜미 쪽에서 손길이 느껴졌다.
“나중에 먹을래요?”
“아니…….”
눈을 반쯤 뜨고 웅얼거리는데 잠시 잊고 있던 고통이 느껴졌다. 과장 좀 더해서 누가 척추를 칼로 후벼 파고 있는 것 같았다. 일어서려고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먹기 좋게 자른 호두 파이를 앞접시에 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냥 몸을 뒤집어 엎드린 채 손을 뻗었다.
“그러다 체해요.”
“그냥 줘.”
빨리 달라고 손가락을 바르작거리자 정우진이 할 수 없다는 듯 내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고소한 냄새와 반들반들 윤이 나는 파이를 보고 있자니 허기가 져 얼른 손을 뻗어 파이 한 조각을 입에 욱여넣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그런 날 가만히 내려다보던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맛있어요?”
존나 맛있다. 그거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원래 부스러기 흘릴까 봐 이불 위에서는 뭘 먹은 적이 없는데, 그런 것도 다 잊을 정도로 너무 맛있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우적우적 씹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눈웃음을 치며 웃었다.
그 뒤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엎드린 채 호두 파이 한 판을 쉬지도 않고 다 먹었다. 신기한 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프던 허리가 배가 빵빵하게 부르니 덜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몸에 힘도 없었는데 그것도 괜찮아졌고, 뼈가 녹슨 것처럼 삐걱거리던 것도 괜찮아졌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는데 정우진이 내게 머그잔을 내밀었다.
“우유 데워서 꿀 넣었어요.”
“어, 고마워. 근데 너 요리사나 뭐 그런 거 준비 중이냐?”
왜 못하는 게 없지? 모락모락 김이 나는 머그잔을 받으며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시니 정말 여기가 천국인 듯했다. 깊게 숨을 내뱉으며 몸에 힘을 쭉 빼는데 정우진이 천천히 다가와 내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자격증은 땄어요.”
“뭐? 진짜?”
저리 꺼지라고 하려는데 자격증 얘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우진이 머그잔을 들고 있는 내 반대쪽 손을 자기 쪽으로 가져가 손끝에 남아 있던 파이의 부스러기를 핥아 먹었다. 이런 행동들이나 살갗에 닿는 혀가 거북해서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요리사도 안 할 거면서 자격증은 왜 땄어? 취미야?”
“지금처럼 일어나, 내가 해 준 걸 선배가 맛있게 먹어 주면 좋을 거 같아서요.”
“…….”
“아, 선배 자취방 팔아도 되죠?”
“어?”
저 씨발놈 버터를 처먹었나…….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순간 얼어 있는데 정우진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어차피 여기서 계속 살 거잖아요. 집이 두 개일 필요는 없으니까……. 싫으면 계속 사람 보내서 관리할게요.”
“어, 음. 전세 아니고 월세지? 한 달에 얼만데? 지금까지 그것도 다 네가 냈어?”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팔지 말까요? 그래도 거기서 꽤 오래 살았으니까……. 그냥 내버려 둘까요?”
나는 입을 다물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기억을 되찾으려면 집을 팔지 않는 게 더 나을 거 같긴 한데……. 하지만 저번에 갔을 땐 낯설기만 했고, 무엇보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기억 때문에 정우진한테 쓸데없이 돈을 쓰라고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매달 월세에 관리비까지 하면 꽤 나갈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팔아. 둬 봤자 뭐……. 어차피 여기 계속 있을 거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아. 근데 거기에 뭐 중요한 물건이나 그런 건…….”
“방에 있는 건 종이 한 장도 안 버리고 그대로 옮겨 놓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우진이 다시 내 손을 낚아채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꾹 눌린 입술이 벌어지면서 손등 위로 혀가 뱀처럼 기어 다녔다. 나는 탁 소리가 나게 손을 빼내고 인상을 썼다.
“아까부터 왜 자꾸 만지고 지랄이야?”
“너무 예뻐서요.”
“…….”
“그럼 집은 처분하라고 할게요. 아, 그리고 선배 핸드폰 샀는데.”
정우진이 말끝을 흐리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정우진이 나간 문 쪽을 보며 뭔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존경심이 일었다. 저 새끼도 진짜 존나 대단한 새끼다.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고 있는데 정우진이 종이 가방을 가져와 내게 건넸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바꿔 올게요.”
가방 안에는 네모반듯한 새카만 박스가 들어 있었다. 포장을 풀고 안을 확인하자 핸드폰이 보였다.
연락할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누가 나한테 연락이 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굳이 핸드폰이 필요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더 나을 듯했다.
“제 번호 저장시켜 뒀어요.”
나는 정우진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전원을 켰다.
“내 번호는 뭔데?”
“몰라도 돼요.”
“뭐?”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어차피 가르쳐 줄 사람도 없잖아요.”
“뭐, 인마?”
“다른 사람한테 번호 가르쳐 주지 마세요.”
황당해하고 있는 내게 정우진이 애원하듯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뭐라 대꾸할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아 코웃음만 쳤다.
“핸드폰 켜지면 내 번호 확인할 수 있거든?”
“010-1234-0000.”
“…….”
내 말에 정우진이 불퉁한 표정으로 번호를 불러 줬다. 어이없다는 듯한 내 표정에 정우진이 거듭 강조했다.
“다른 사람한테 절대 가르쳐 주면 안 돼요.”
“가르쳐 줄 사람도 없어.”
저 새끼는 나한테 딴 사람이랑 말하지 마라, 눈도 마주치지 마라, 노래를 부르더니 자기가 핸드폰 줘 놓고 이제는 번호도 가르쳐 주지 말란다.
기가 막혔다.
“두고 다니지 말고 꼭 들고 다니세요. 전화하면 반드시 받고.”
“알았어. 근데 이거 얼마짜리냐?”
“얼마면 왜요? 아, 그리고 시계도 샀는데…….”
정우진이 이번엔 주머니에서 시계를 하나 꺼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내 손목에 시계를 채워 줬다. 은색 메탈 시계였는데 정우진 손목에 있는 거랑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절대 벗지 마세요.”
“…….”
“그리고 선배, 이건 반지인데…….”
가운데 작은 큐빅만 박혀 있는 깔끔하고 심플한 반지를 내 약지에 자연스럽게 껴 주는데 반지 역시 자기 약지에 끼고 있는 거랑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순식간에 왼손이 무거워졌다. 내 손을 뿌듯한 표정으로 보던 정우진이 고개를 숙여 내 손바닥 깊이 입을 맞췄다.
“빼지 마세요.”
“야.”
“네?”
“목걸이는 안 사 왔냐?”
“목걸이요? 아, 그건 내일…….”
“죽을래?”
내가 험악한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웃으며 내 손에 들려 있는 머그잔을 협탁 위에 놓더니 그대로 내 위로 몸을 겹쳐 왔다. 빈틈없이 꽉 끌어 안겨 갑갑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해서 그냥 인상만 쓰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일 오전에 일찍 나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일?”
“네, 세 시쯤엔 끝날 거예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딱히 없는데…….”
익숙하지 않은 반지를 끼고 있자니 거치적거리고 불편해서 인상을 쓴 채 내 손을 보며 대충 말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조금 전 이마에 입을 맞췄던 것처럼 가볍게 입술에 입을 맞춘 뒤 물었다.
“내일 저녁은 밖에서 먹을까요?”
“……야, 너 근데 왜 아까부터 자꾸…….”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스쳤다. 또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슬그머니 몸을 빼려는데 정우진이 내 뒷목을 잡았다. 고개가 살짝 들리면서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 속으로 입술이 닿기도 전에 혀부터 들어왔다.
저번처럼 입술에 상처가 나고 이가 닿을 정도로 격렬하지는 않았다. 입 안을 핥는 혀도 따뜻하고 말랑했고 부드러웠다. 느리고 간지러운 키스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뺨이며 손등, 팔뚝이 찌릿찌릿해서 주먹을 꽉 쥐는데 정우진이 살짝 입술을 떼며 말했다.
“사랑해요.”
“…….”
“내일 저녁 뭐 먹을까요?”
“…….”
나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 내 뺨을 쓸었다. 조금 전 그렇게 찌릿거렸던 건 내 몸에서 소름이 돋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뭔가 한마디 말로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민망한 감정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정우진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웃기만 했다.
“선배는 왜 이렇게 예…….”
“거기서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주둥이 찢어 버린다.”
나는 정우진의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사납게 말했다. 이젠 다 듣지 않아도 정우진이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는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오징어가 되고 싶지 않아서 본능적으로 깨우친 능력이라고나 할까?
씨발…….
다행히 내 협박이 먹힌 건지 정우진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사랑해요.”
“그 소리도 하지 마.”
“목 물어 주세요.”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진짜…….”
사지를 뒤틀며 정우진의 팔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한참을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는데 정우진이 손가락 끝으로 내 입술을 건드렸다.
“키스하면 안 돼요?”
“뭐?”
“키스하고 싶어요.”
존나 어이가 없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네가 했던 건 뭔데?”
“그건 내가 한 거잖아요. 이번엔 선배가 해 주세요.”
“넌 꿈이 너무 커.”
“선배가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다면서요.”
“내가 언제? 기억 안 나.”
“치사해.”
“나가서 딸기나 사 와.”
내 말에 정우진이 울상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 삐쳤다고 온몸으로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애 같은 모습이 황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분명 정우진은 다 큰 성인 남자인데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딱히 어색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도 많이 봐서 익숙해진 건가? 아니면 정우진이 하는 이상한 헛소리와 개짓거리에 적응이 되기라도 한 건가?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정우진이 슬쩍 고개를 들어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문득.
“집은 언제 팔 거야?”
만약 기억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좀 이따 전화하면 바로 팔릴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새하얀 베개에 반쯤 얼굴이 파묻혀 볼이며 눈이며 다 눌려서 찌그러져도 이상해 보이지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이상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지금도 괜찮지 않나?
물론 기억이 돌아오면 좋겠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건 그거 나름대로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제 나한테 기억이라는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주 특별히 꼭 기억해야만 할 기억도 없었던 것 같고, 꼭 기억해야만 하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고, 잊어서는 안 될 것도 없었던 것 같고…….
내 인생에 그렇게 엄청나게 중요한 것도 없어 보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나를 찾는 사람도 없었고 정우진의 말대로라면 나에게는 가족도 없었으니까, 결국 그 말은 내가 기억을 되찾지 못해도 슬퍼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토라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정우진을 마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내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한 번만 해 주세요.”
“뭘? 키스?”
“네.”
“방금 네가 했잖아.”
“선배가 해 준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같은 키스인데 네가 하나 내가 하나 무슨 상관이지? 누가 하든 똑같은 건데 이런 거에 왜 의미를 두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저렇게 간절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처음도 아니고 그냥 한 번 해 주고 말자 싶기도 했지만 저놈은 키스 한 번에도 흥분하는 변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해 주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는데, 그 짧은 사이에 그런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한 건지 정우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키스해 주면 오늘 섹스는 안 할…….”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정우진을 덮쳤다. 너무 세게 돌진하는 바람에 이가 닿았지만 다행히 피가 나진 않았다. 벌어진 입 속으로 혀를 넣어 대충 쑤시고 핥다가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뜨고 날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물었다.
“됐지?”
“선배.”
“야, 너 이제 와서 딴말하면…….”
“목에 자국 남겨 주면 모레도 안 할게요.”
“뭐?”
정우진이 변태처럼 헉헉거리면서 말하다가 정신을 차린 건지 아차 싶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잠깐만요. 그건 내가 너무 손해…….”
“야! 너 말 바꾸지 마, 이 얍삽한 새끼야!”
“잠시만요, 그거 말고……. 선배, 잠깐, 그거 아니…….”
정우진은 자기 목을 물어뜯을 기세로 달려드는 날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결국 내 입술이 목덜미에 닿자 몸을 부르르 떨며 얌전해졌다.
* * *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소리는 금세 멎었지만 벌써 잠은 깼다.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뜨자 정우진이 핸드폰을 가리고 미안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미안해요, 깼어요?”
언제 준비를 다 한 건지 이미 머리며 옷차림이며 외출 준비가 끝나 있었다. 눈만 껌벅거리다가 부스스 일어나는데 정우진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이제 출발할 거예요. 정확히 세 시에 끝나는 거 맞죠?”
-우리가 언제 시간 정해 놓고 일했냐? 근데 너 다정 씨 병문안은 갔다 왔어? 안 갔지?
바로 지척에 있어서 그런지 핸드폰 너머로 소리가 다 들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였지만 아직도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머릿속이 몽롱하기만 했다. 길게 하품을 하는데 뺨에 붙어 있던 입술이 슬금슬금 내려와 내 목덜미에 닿았다.
“병문안이요? 제가 거길 왜 가요?”
-왜냐니, 너랑 같이 사고 난 건데. 아니, 됐다. 됐으니까 시간 맞춰서 오기나 해. 지금 바로 출발하면 오는 데 20분 정도 걸리지?
“아니요, 10분만 있다 출발할게요.”
-뭐? 아깐 지금 나온다며! 너 또 그러면서 안 오려고……!
아직 상대방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정우진은 귀가 먹기라도 했는지 핸드폰 전원을 껐다. 그리고 내 목에 입술을 대고 비비고 빨다가 이를 세우는데 별로 아프진 않아서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다가 하품을 하면서 물었다.
“누구 다쳤어?”
“그런가 봐요. 전화하면 받으세요.”
아까 다정 씨라고 한 거 같은데? 잘못 들었나? 너무 남 얘기처럼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빨리 가 봐, 늦은 거 아니야?”
“10분 있다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괜찮아요.”
괜찮기는 뭐가……. 아까 분명 안 된다고 하면서 소리 지른 거 같았는데.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다시 하품하는데 정우진이 어리광을 부리듯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옷이 구겨지는 걸보며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옷 다 구겨지잖아.”
“문자 보내면 답장해 주세요.”
“알았다니까. 일어나.”
“어제 선배 자취방 주인한테 전화했는데 방 바로 나갔대요. 빠르면 내일부터 다른 사람 들어와서 산대요.”
빠르네. 학교 근처라 그런가.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이다가 일어날 생각이 없는 정우진을 보며 결국 한숨을 내쉬곤 내가 먼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렇지 않으면 10분은 무슨,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 나한테 붙어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아침 지금 먹을래요? 차려 드릴까요?”
“너 일하러 안 가냐?”
“아직 괜찮아요.”
분명 나도 아까 통화하는 거 다 들었는데 정우진은 자꾸만 괜찮다고 하고 있었다. 내가 같이 일하는 사람이었다면 열불이 터져서 때려치워도 열두 번은 더 때려치웠을 것 같았다.
혀를 쯧쯧 차면서 거실로 나오는데 된장국 냄새가 났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봤다. 아침 일곱 시였다. 도대체 언제 일어나서 밥을 한 거야? 괜히 멋쩍어서 뒷목을 만지고 있는데 정우진이 이번엔 뒤에서 달라붙었다.
“세 시에 끝나서 시간이 좀 애매하긴 한데……. 저녁 먹기 전에 영화라도 볼까요?”
“영화?”
“영화 싫으면 다른 거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그런 건 딱히 없는데. 나는 정우진을 뒤에 붙이고 발을 질질 끌며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갔다. 방금 한 건지 가스레인지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가 보였다. 물기 하나 없이 멀끔한 싱크대도.
그런 것들을 멀뚱멀뚱 구경하다가 내 뒷목에 쪽쪽 입을 맞추고 있는 정우진을 떼어 내고 말했다.
“사람 많은 곳은 싫은데.”
“정말요? 사실 저도 되게 싫어요. 그냥 외식도 하지 말고 저녁도 집에서 먹을까요?”
화색을 띠는 정우진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외식하자는 소린 왜 했어?”
“선배 답답할까 봐요.”
별로 답답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내 생각해서 외식하자는 말을 해 줬다니 고맙긴 했다. 손을 들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머리를 두어 번 토닥거리자 정우진이 금세 얼굴 근육을 풀고 웃었다.
그러다 문득 시곗바늘이 보였다. 아까 정우진이 말한 10분은 벌써 지나 있었다. 나는 다시 달라붙으려고 하는 정우진을 떼어 내고 그의 손을 잡고 현관문까지 갔다.
“빨리 일하고 와.”
“핸드폰 어디 있어요?”
“침대에 있겠지. 빨리 나가.”
“전화 꼭 받으세요. 문자도.”
“알았다니까.”
아니, 말이 왜 이렇게 많아? 제발 좀 빨리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젓자 정우진이 미간을 좁혔다. 계속 나한테 붙어 몸을 비벼서 그런지 비싸 보이는 옷이 구겨져 있는 게 보였다. 속으로 혀를 차며 옷을 툭툭 털어 주고 구겨진 곳을 펴 주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녀올게요.”
“이러다가 인사만 한 시간 하겠다.”
“올 때 뭐 사 올까요?”
“됐으니까 빨리 일이나 하러 가, 제발.”
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이번엔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침 꼭 드세요. 굶지 말고.”
“알았어.”
“나중에 다 먹고 전화하세요. 먹기 전에도.”
“알았다고…….”
“선배, 면도도 해야겠…….”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턱을 매만졌다. 나는 결국 맨발로 현관까지 나가 직접 문을 열고 정우진을 밖으로 내쫓았다. 다행히 정우진은 반항하지 않고 쉽게 밖으로 떠밀렸다. 빨리 가라고 손을 흔드는데 정우진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벌어진 문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잘 다녀오라고 뽀뽀해 주세요.”
“네가 애냐?”
“빨리요.”
“해 주면 이번엔 진짜 갈 거지?”
어느새 일곱 시 십오 분을 넘고 있는 시곗바늘을 힐끗 보고 한숨을 내쉬며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우진은 이미 지각이었다. 무슨 애 학교 보내는 엄마도 아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잘 다녀와.”
“선배, 내 이름 붙여서 한 번만 더.”
“너 진짜 안 늦었냐?”
“빨리. 이번엔 진짜 갈게요.”
“아오, 이 씨발 진짜. 우진아, 잘 다녀와.”
내 말에 정우진이 그제야 활짝 웃었다. 그러더니 문을 한껏 열어젖히고 내 뒷목을 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더니 내 입술을 한입에 삼켰다. 벌어진 입 속으로 혀가 밀어닥쳤다. 금방 떨어질 줄 알았는데 정우진은 내가 버둥거릴 때까지 놔주지 않았다.
“아, 웁! 씹, 으읍!”
하지 말라는 짧은 말 하나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내 입술과 혀를 빨고 입 안을 핥던 정우진이 벌게진 제 입술을 핥으며 눈꼬리를 사르르 접어 웃었다.
“헉, 허윽.”
“다녀올게요.”
저 소리만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숨이 차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어 헐떡거리며 발길질을 했다.
“빨리 꺼져!”
“사랑해요.”
“제발 좀 가라, 씨발.”
“진짜 갔다 올게요.”
“알았다고 등신아, 가! 가라고, 좀!”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정우진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내 눈가에 입을 맞추고 드디어 문을 닫고 나갔다.
시곗바늘은 이미 일곱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겨우 정우진을 보내고 간단하게 씻은 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고 밥을 푸고 있는데,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얼른 침대로 가 핸드폰을 보자 액정에 ‘정우진’ 세 글자가 떴다.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자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물었다.
-뭐 해요?
“이제 밥 먹으려고.”
-문자 못 봤어요?
“못 봤어. 왜?”
-그냥 뭐 하나 싶어서요.
이 새낀 진짜 할 짓도 더럽게 없나 보다. 그리고 지금 운전 중 아니야? 전화에 문자까지.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저러나 모르겠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주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운전하는 거 아니야?”
-아니요, 방금 도착했어요.
“문자 보낼 땐 운전 중이었지?”
-네, 왜요?
주방에 도착하자 냄비가 끓고 있었다. 얼른 가스레인지를 끄고 국자로 휘휘 국을 저으며 말했다.
“운전할 땐 문자도 전화도 하지 마.”
-왜요?
“몰라서 묻냐?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래?”
-앞으로 매니저 부를까요? 그럼 이동할 때 문자하고 전화해도 되죠? 내가 운전하는 거 아니니까.
고작 20분 남짓 이동하는데 문자하고 전화하려고 매니저를 고용하겠다는 건가?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지만 또 생각해 보면 그러든가 말든가 나랑은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라 그냥 말을 돌렸다.
“끊어. 밥 먹을 거야.”
-밥 다 먹고 전화하세요.
“너 일 안 하냐?”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일할 땐 문자도 전화도 하지 마.”
-네? 선배, 잠……!
정우진의 다급한 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금방 다시 전화가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핸드폰은 조용했다. 잠시 정우진의 전화를 기다리다 결국 핸드폰을 식탁 위에 두고 국을 펐다.
시금치된장국이었는데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침이 가득 고였다. 식탁에 상을 차리고 국을 먹는데 역시나 식당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밥도 한 알, 한 알 살아 있는 듯했고, 흔한 배추김치 한 쪼가리도 아삭아삭 신선하고 맛있었다. 내가 차려 먹었던 집 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식당에서 사 먹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맛있었다.
진짜 미친 거 아닐까? 왜 이렇게 맛있지?
속으로 온갖 감탄을 쏟아 내며 결국 밥 한 그릇을 더 먹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핸드폰은 조용했다. 다행히 정우진이 내 말을 알아들었나 보다. 설거지를 할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나중에 하려고 하는데 핸드폰에서 문자 알림 소리가 났다.
역시나 정우진이었다.
[깜빡했는데 냉장고 두 번째 칸에 오징어 있으니까 그것도 드세요.]
이 새끼가 이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냉장고 문을 열어 정우진이 말한 두 번째 칸을 보니 아까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투명한 락앤락 통이 보였다.
뚜껑을 열어 안을 보니 새하얀 오징어에 뭔지 모를 초록색 나물이 돌돌 말려 있었다. 밥을 두 그릇이나 먹는 바람에 배가 불렀지만 이걸 보고 안 먹을 수가 없었다. 홀린 것처럼 하나 집어 입에 넣자마자 눈을 지그시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새낀 미쳤어…….”
향긋한 미나리 향과 부드러운 오징어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했다. 진짜 미쳤나 봐, 정우진 이 새끼는 도대체 왜 모델을 하고 있는 거야? 장사하면 안 되나? 그럼 내가 매일 가서 먹을 텐데.
두어 개 더 집어 먹다가 초고추장을 꺼내서 찍어 먹으니 더 맛있었다. 어쩐지 감격스러울 정도로 맛있어서 감동 받은 얼굴로 정우진에게 답장을 보냈다.
[맛있어.]
문자를 다 보내고 더 먹으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다. 정우진이었다. 나는 오징어 하나를 입에 넣으며 전화를 받았다.
-맛있어요?
“응.”
입에 있는 걸 삼키지도 않고 우물거리며 대답하자 정우진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조금 전 내가 잘 다녀오라고 입을 맞춰 줬을 때처럼 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 정도 요리 실력이면 내가 나가서 돈 벌고 얜 그냥 집에서 살림만 하면 안 되나?
-다른 거 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음, 갈비찜.”
-그럼 저녁엔 갈비찜 해 줄게요. 갈 때 딸기도 사 가고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신 나서 떠드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전염되는 것처럼 나까지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저 페이스에 말려서 나까지 바보처럼 웃을까 봐 속으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일은 안 해?”
-지금 화장하고 있어요.
“통화해도 되는 거야?”
-네, 선배는 뭐 해요? 아, 면도는 나중에 제가 해 드릴 테니까 선배가 하지 마세요. 또 다칠 수도 있으니까.
내가 무슨 애냐고 말하려다가 그냥 내버려 뒀다. 정우진은 나한테 뭔가를 해 주면서 행복을 찾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날 애 취급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어차피 지금 싫다고 해 봤자 정우진이 순순히 네, 그럼 안 할게요, 라고 대답할 리도 없었다.
-아, 이제 끊어야겠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바쁘면 안 해도 돼.”
-싫어요. 나중에 할 거니까 전화 받으세요.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내가 피식 웃자 정우진이 핸드폰에 대고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정우진이 나간 지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저 새끼는 무슨 키스를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나, 틈만 나면 저 지랄이었다.
괜히 낯간지러워서 목을 벅벅 긁으며 전화를 끊었다.
남은 오징어는 다시 뚜껑을 덮어 냉장고에 넣어 뒀다. 초고추장을 담았던 작은 접시도 싱크대에 넣어 두곤 한참을 고민했다. 설거지해야 되는데 귀찮아. 그냥 나중에 할까. 어차피 정우진이 오기 전에만 하면 되니까……. 나는 싱크대를 한참 노려보다가 다시 냉장고를 열었다. 뭐 마실 거 없나. 우유가 보였다. 어제 정우진이 우유를 데워 꿀을 타 줬던 게 생각나 우유를 데웠다. 거기에 꿀을 타려는데 꿀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다. 냉장고에도 없고 싱크대에도 없고. 결국 찬장을 죄다 열어 꿀을 찾아냈다. 얼마나 넣어야 할지를 몰라서 밥숟가락으로 퍽퍽 퍼서 넣었다. 몇 번 휘휘 저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우유를 한 모금 먹는데 혀가 떨어질 뻔했다.
“씨발.”
존나 달아……. 나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머그잔을 노려봤다. 이걸 버릴 수도 없고. 결국 나는 버리지도 먹지도 못할 우유를 들고 이리저리 집을 구경했다.
여기 온 지도 꽤 됐다. 하지만 집을 구석구석 구경한 적은 없었다. 항상 거실이나 화장실, 안방, 주방 같은 곳만 다녀서.
집 구경 같은 건 처음 왔을 때 해야 했는데 시기를 놓치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좀 뭣해서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방도 있었다. 그렇다고 남의 집 방문을 벌컥벌컥 열어 보기도 좀 그렇고…….
사실 지금도 정우진에게 연락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일을 하고 있어서 당장 전화나 문자를 보내기도 좀 그랬다. 그리고 같이 산 게 적은 시간이 아닌데 만약 보여 주기 싫은 게 있다면 어느 방은 가지 말라고 미리 말해 줬을 거다.
뭐 뒤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구경만 좀 할 거니까…….
나는 한 번도 열어 본 적 없는, 안방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자 1인용 침대 하나와 옷장, 그리고 책상이 전부인 심심하다 못해 휑한 방이 보였다. 여긴 손님방인가. 별로 구경할 것도 없어서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안쪽에 문이 하나 더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묵직한 머그잔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맞은편에 있는 문을 열자 방과는 달리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마치 도서관처럼 벽면을 빼곡하게 메운 책장과 세 대의 컴퓨터, 그리고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보다 훨씬 큰 모니터까지.
이 집에 그래도 꽤 있었는데 설마 집 안에 도서관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정우진이 독서를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책을 읽는 걸 좋아하나 싶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훑어보며 점점 안쪽으로 들어가자 시커먼 원목 책상이 보였다. 책상 위엔 그렇게 특별히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얇은 노트북 한 대가 전부였다.
도대체 컴퓨터가 몇 대나 있는 거야. 나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배도 부르고 조용하고 편해서 이대로 눈만 감으면 잠이 들 것 같았다.
편하게 기대어 의자를 왼쪽으로 돌렸다가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멍하게 있는데 컴퓨터를 봐서 그런지 문득 예전에 쓰던 아이디랑 비밀번호가 별안간 떠올랐다.
벌떡 허리를 세우고 노트북을 열어 전원을 켰다. 이게 뭐였지? 메일이었나? 게임 아이디인가? 아니, 생각해 보니까 나는 모든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동일하게 썼던 것 같았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으면 정우진에게 연락해 보려고 했는데, 다행히 바로 바탕 화면이 나왔다. 인터넷을 켜 로그인 버튼을 누르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별것도 아닌데 갑자기 긴장이 되어서 잠깐 숨을 고른 다음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rkdtjwn08
**Tjwnrkd12
다 입력하고 엔터를 치자 로그인이 됐다.
“……맞네.”
좀 얼떨떨해서 멀뚱멀뚱 화면을 보고 있는데 비밀번호를 바꾸던 때의 일까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저렇게 어렵고 복잡한 비밀번호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자꾸 대문자를 넣으라고 하고 특수 기호를 넣으라고 하고 몇 자 이상으로 설정하라고 하고…….
아무튼 바꾸고 바꿔도 다시 바꾸라고 해서 욕을 엄청 하면서 바꾸다가 저런 비밀번호를 만들게 됐다.
처음 비밀번호는 그냥 tjwnrkd12 이거였던 거 같은데…….
아무튼 오늘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불현듯 조금씩 기억이 나려나 보다. 나중에 정우진이 돌아오면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인터넷 창을 껐다.
그리고 노트북의 전원도 끄려고 했는데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어떤 동영상 파일들이 보였다. 제목도 딱히 없고……. 그냥 구분하기 위해 숫자만 넣어 둔 것 같은 그런 파일들 말이다.
안 봤으면 모르겠는데 눈에 보이니까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지? 야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놓고 있어서 그것도 아닌 거 같고…….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가장 첫 번째 파일을 클릭했다.
-아흑, 헉……. 아, 아으아! 아응, 힉!
“…….”
소리가 들리자마자 스페이스 바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화면은 다른 곳을 찍고 있는 건지 초점이 나가 흐려서 뭐가 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입을 벌리고 멍하게 뭘 찍고 있는지도 모를 화면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씨발, 이 새끼……. 안전 불감증인가? 어떻게 이런 걸 이렇게 대놓고……. 아니, 좀 숨겨 둬야 하는 거 아닌가?
나라면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를 행동에 잠깐 감탄하고 있는데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우왕좌왕하다가 주방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배?
“어?”
내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게 이상한지 정우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뭐 했어요?
“아, 나……. 아까 밥 다 먹고 우유 데웠는데…….”
-우유를 뛰면서 데웠어요? 왜 그렇게 숨을 헐떡거려요?
무슨 우유를 뛰면서 데워. 어처구니없는 말에 내가 피식 웃자 정우진도 덩달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 두 시쯤에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아. 어, 그래.”
-그래서요?
“뭐가?”
-우유 데웠는데, 왜요?
그 말에 나는 내가 어떻게 우유를 데웠고 밥숟가락으로 꿀을 얼마나 퍽퍽 퍼서 넣었는지 구구절절하게 말했다.
“야, 근데 우유는 왜 데우면 위에 막 같은 게 생기냐?”
말을 하다 말고 궁금해서 묻는데 멀리서 정우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우진이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
“일단 끊고 나중에 집에 와서 얘기하자.”
-우유 먹지 말고 버리세요. 나중에 제가 다시 타서 드릴게요. 덜 달게. 그리고 우유 끓이면 왜 막 같은 거 생기는지도 말해 줄게요.
마치 엄청난 비밀 이야기를 해 주기로 약속하는 것 같은 진지한 말투였다. 그게 또 웃겨서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끊어.”
-네, 선배. 사랑해요.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아, 진짜. 깜짝 놀랐네. 하필 이 타이밍에 전화가 오냐.”
아무튼 그냥 뭐 끄고 모른 척이라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뭔가 희미하게 소리 같은 게 들리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빠르게 노트북이 있던 방으로 달려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조금 전 놀라서 뛰쳐나오다가 나도 모르게 노트북 키보드를 건드리기라도 했는지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나마 소리가 작아서 다행이었다.
왠지 간담이 서늘해지고 좀 질려서 화면은 보지도 않고 끄려 하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여기 봐요.
그 말에 나는 영상을 끄려던 손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화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헉, 으, 시, 싫……. 아흐, 으, 으읏!
-싫다면서 엉덩이는 왜 흔들고 있어요.
-흑, 흐엉……. 이, 이상해, 안쪽, 흑, 끄, 아, 우진아, 우진, 히익!
-숨넘어가겠네. 뒤에 비어 있는 게 그렇게 싫어요?
-주그, 죽을 거, 아윽, 아, 나, 아픈, 으응, 읏. 우진아, 우진아, 아파, 흐엉, 엉덩이, 아흐!
카메라를 조정하고 있는 건지 화면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또렷했다. 그래서 나는 이걸 찍고 있는 사람이 정우진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어떤 다른 생각을 한다든지 놀란다든지 그럴 틈도 없이 화면에 초점이 잡혔다. 그리고 보이는 적나라한 광경에 나는 눈을 깜빡거리지도 못했다.
-많이 아파요?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 뒤로 마치 배경 음악처럼 우는 소리가 깔렸다. 계속, 끊임없이 울고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거리고 울고, 울고, 또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왜 자꾸 싫다 그래요. 한 번만 하려고 했는데 선배가 자꾸 싫다고 해서 화났잖아요.
낯익은 말투에 질끈 눈을 감았다 뜨자 뻑뻑했던 눈이 차갑게 시려 왔다. 잠깐, 이게 도대체 뭔지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생각을 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철퍽거리면서 물이 튀는 소리와 축축하게 젖어서 살이 부딪치는 소리, 질척거리고 끈적거리는 소리와 비명에 가까운 울음, 이름을 부르면서 애원하는 소리, 난잡하고 천박한 말투, 우진아, 우진아, 제발 그만해, 사랑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이 그저 나오는 대로 뱉어 내는 이상한 소리…….
-울지 마세요. 많이 아프면 약 하나 더 먹을래요? 약 싫으면 뒤에 발라 줄까요?
섹스를 하고 있는 건지, 고문을 하고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강간을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영상을 못이 박힌 듯 보다가.
-선배.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그제야 숨을 들이켰다.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선배?
“…….”
-선배, 왜 그래요? 제 목소리 안 들려요?
마치 나에게 묻는 것 같은 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기절한 것처럼 늘어져 있는 사람이 보였다. 정우진이 계속 그 사람을 불렀다. 그러니까 화면 속에 있는 나를.
“…….”
나다.
저 화면 속에 있는 게.
저렇게 벌거벗고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게.
-여기 좋아요? 좆으로 문질러 주니까 좋아요?
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진저리를 치며 영상을 정지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꺼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씨발…….”
손이, 아니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정우진이랑 섹스 영상을 찍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방금 영상에서 봤던 건……. 그러니까 정우진이 나한테 했던 짓이 아무리 좋게 봐도……. 서로 합의를 하고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도대체……. 아니, 왜?
나는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다시 영상을 재생할 수밖에 없었다.
-씨발, 또 싫다 그러네. 내가 싫단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 아니면 나랑 섹스 하는 게 싫어?
하지만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떠는 내 모습과 달리 당장에라도 날 찢어 죽일 듯 차가워진 정우진의 낯빛을 보다가 결국 영상을 꺼 버렸다.
더 이상 볼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건 확인하고 말 것도 없었다.
저건 그냥 누가 봐도 강간이었기 때문이다.
“…….”
나는 잠깐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다 식은 우유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또 그렇게 잠자코 있다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전에는 혀가 떨어질 것처럼 달기는 했지만 역하지는 않았는데, 우유가 식어서 그런지 비리고 역겨워서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욕실로 가서 입 안에 조금 남아 있던 우유를 뱉어 냈다. 뱉어 내고 또 뱉어 내고, 더 이상 입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계속 뱉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서 입 속을 헹구면서 정우진이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하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우진이 날 보는 눈빛이나 날 부르는 목소리, 날 만지는 손길을 생각해 보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이 먼 사람도 알 것이다. 귀가 먹은 사람도 알 것이다.
“…….”
얼마나 좋아하는지.
발작적으로 입 안을 헹구다가 눈앞이 핑 돌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세면대에 손을 짚고 잠시 가만히 있자 어지럼증이 멎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별안간 발밑이 축축했다.
고개를 숙이자 세면대에서 콸콸 쏟아지던 물이 발밑을 적시고 있었다. 얼음물처럼 차가운 물이 계속 흘러서 발을 적시고 그 한기가 다리를 타고 얼굴까지 올라왔다.
이대로 얼어 죽는 건 아닌지 별안간 불쑥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
분명 사라지고 없었는데 무서운 건 여전했다. 나는 계속 언젠가부터 무서워하고 있었다.
영상을 보고 난 다음부터인지, 아니면 역겨운 우유를 마시고 난 다음부터인지, 그것도 아니면 욕실에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인지 모르겠다.
정우진이 나를 강간하는 영상을 찍어서 그런 걸까? 그런 주제에 사랑한다고 해서? 거짓말을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정우진에게 어떤 사정이라도 있는 게 아닌지 물어보고 싶어서?
나는 목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욕실을 나왔다. 온몸을 뒤덮는 한기는 물을 끈 지 오래인데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 핸드폰을 챙겨 바깥으로 나왔다.
며칠 전에 정우진이랑 같이 가 봤던 원룸에 다시 한번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학교를 가야겠다. 그다음에는…….
“…….”
그다음에는…….
나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갈 곳이 없었다.
가 봐야 할 곳도 없었다.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저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이제는 팔려서 없는 낯설던 원룸과 다니던 학교 말고는 내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택시를 탈 돈도, 밖으로 나와서 갈 만한 곳도, 심지어는 핸드폰마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멍청하게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정우진이었다.
“여보세요.”
-선배, 지금 밖이에요?
“…….”
나는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떼고 액정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다. 주택지가 모여 있는 곳이긴 했지만 사람은 없었다. 원래 처음부터 그랬다. 이 동네는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가끔 사람이 보여도 다들 걷는 게 아니라 차를 타고 있었다.
핸드폰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대고 말했다.
“밖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정우진은 말이 없었다. 그러자 문득 머릿속으로 GPS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갑자기 떠올랐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제가 갈 때 사 갈게요. 길도 잘 모르잖아요.
정우진은 내가 궁금한 건 하나도 대답해 주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그 영상에 대해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선배.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정우진이 다시 나를 불렀다. 원래는 그래도 조금은 기다려 주는데 이번에는 별로 기다려 줄 마음이 없는지 정우진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말했다.
-거기 있어요. 내가 갈 때까지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요.
“…….”
-선배, 듣고 있어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어떻게? 내 말에 핸드폰 너머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정우진을 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뭔가가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정우진이 헐떡거리는 소리.
-지금 갈 테니까……. 선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아무 일도 없어. 근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와?”
-선배, 전화 끊지 말고…….
정우진이 계속 내 말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냥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대답도 안 해 주고 계속 자기 말만 했다.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액정이 꺼지면서 로고가 뜨는 걸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
꺼진 핸드폰을 가만히 보다가 바로 옆에 보이는 높은 담벼락에 떨어지지 않게 핸드폰을 올리고 조금 빠르게 걸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서 앞으로, 조금만 더 나가면 도로가 나온다. 거기서 택시를 잡아서…….
“헉, 헉…….”
나는 어느새 뛰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마치 쫓기는 짐승처럼 도망쳐 도로까지 나왔다. 허리를 굽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멀리서 빈 택시가 보였다. 손을 흔들자 택시가 바로 앞에서 섰다. 나는 한 번 뒤를 돌아 정우진이 있나 없나 확인한 뒤 택시 문을 열며 말했다.
“새마을 원룸으로 가 주세요.”
허름한 외벽에 희미하게 쓰여 있던 이름을 떠올리며 택시 문을 쾅 닫았다.
* * *
택시가 새마을 원룸 앞에서 섰다. 이 근처는 기억이 났다. 택시에서 내리려는데 택시 기사가 허리를 틀어 날 불렀다.
“돈 안 줍니까?”
나는 택시 기사를 보다가 시선을 내려 미터기를 봤다. 15,200원.
“……돈 없어요?”
“…….”
큰일 났다. 빨리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만 급급해서 돈에 대한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정우진이 내게 줬던 시계와 반지를 내려다봤다. 반지라도 빼서 줘야 하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정우진이 좋다고 웃는 얼굴이 떠올라서 멈칫했다.
이 와중에도 말이다.
“…….”
기가 막혀서 잠깐 입 안으로 혀를 세게 깨물었다가 주먹을 쥐었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
“돈이 없다고요?”
“죄송합니다. 올라가서 금방…….”
“집이 어딘데요? 아니, 돈도 없으면서 택시는 왜…….”
택시 기사는 재수 옴 붙었다며 짜증을 냈다. 사실 올라가도 돈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아니, 없겠지. 이제는 남의 집이라 들어갈 수도 없는데…….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냥 이런 모든 상황들이 너무 막막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가 내게 하는 말이 점점 귀에서 멀어져 이제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못 알아들을 것 같던 그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우진인가 싶어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는 말도 없이 차 문을 벌컥 열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이 동네는 웬일이야?”
나는 남자를 가만히 보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갑돌이…….”
내 말에 갑돌이가 발끈하면서 소리쳤다.
“아 씨, 내가 갑돌이라고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 이 새끼야!”
“거기, 학생. 혹시 둘이 친구예요?”
“예?”
“친구면 대신 돈 좀 내 줘요. 이 사람이 택시비가 없다네.”
“예?”
택시 기사의 말에 갑돌이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갑자기 머쓱해져서 시선을 피하자 택시 기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택시 타 놓고 가자고 하는 대로 왔더니 돈 없다고 저기 앉아서 가지도 않고 뭐 어떻게 하지도 않고 계속 가만히 있기만 하고……. 친구면 돈 좀 대신 내 줘요.”
택시 기사의 말에 갑돌이는 당황하는 것 같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미터기를 보더니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도 받지 않았다.
나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머쓱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가 멀어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갑돌이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 왜 때려!”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갑돌이가 몸을 부풀려 위협하는 짐승처럼 어깨를 쫙 펴더니 도끼눈을 떴다.
“넌 돈도 없는 새끼가 택시는 왜 타고 지랄이야? 그리고 연락은 왜 안 돼? 휴학은 왜 했는데? 번호는 왜 없는 번호야, 이 새끼야!”
우다다 쏟아지는 질문에 귀가 따가워서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야, 김갑돌. 일단…….”
“아, 썅! 씨팔! 갑돌이 아니라고!”
갑돌이가 진저리를 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신기한 얼굴로 보다가 물었다.
“네 이름 갑돌이 아니야? 갑수였나?”
“죽을래, 이 씨발 새끼야? 아, 그동안 뭐 했냐고! 왜 연락이 안 돼!”
갑돌이가 땡깡 부리는 애처럼 대답을 재촉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내가 그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 알아챌 것만 같이 목소리가 컸다. 나는 갑돌인지 갑수인지, 아무튼 저 목청 큰 새끼의 이름이 갑진이었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떠올라 귀를 막으며 말했다.
“네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 기억 상실증에 걸려서 네가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 그러니까 자꾸 씨발씨발 하지 마, 이 씨팔 새끼야.”
“…….”
귀를 막은 손을 떼자 갑돌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그러더니 미끈한 미간을 와작 구기며 되물었다.
“기억 상실증?”
“그래.”
정우진이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건 되도록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갑돌이는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좀 시끄럽긴 해도.
아무튼 택시비까지 계산해 줬고, 날 잘 아는 사람 같아서 사실을 말했는데도 갑돌이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낮술 처먹었냐?”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우리 집이 몇 혼지 혹시 아냐?”
“뭐?”
새마을 원룸이라는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몇 층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말에 갑돌이가 아까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보던 갑돌이가 이내 고개를 돌려 새마을 원룸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다시 날 보며 말했다.
“여기?”
“그래. 아, 근데 어제였나? 팔려서 내 집은 아니지만……. 아무튼 얼마 전에 내가 살던 곳.”
“뭔 헛소리야, 이 또라이가.”
갑돌이가 커다란 손으로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썼다. 조금 전까진 그래도 장난기가 있었는데 이젠 완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네 원룸이 왜 어제 팔려, 딴 사람 들어와 산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뭐?”
“학교에서 만났을 때 말했잖아. 네 새끼가 내 노트북 들고 토껴서 찾으러 갔는데, 딴 사람 있었다고.”
“…….”
“그리고 네 집을 왜 여기서 찾는데?”
갑돌이가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멀뚱멀뚱 갑돌이를 보면서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데 그가 손을 들어 칠이 다 벗겨져 낡은 원룸의 외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새마을 원룸.”
“…….”
“네가 살던 원룸은 목련빌.”
갑돌이 말을 듣고 있자니 마치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긴 우리 동네라고, 멍청아. 뭘 자꾸 되물어? 지금 딴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는 네 집은 학교 밑에 목련빌이었다고. 301호.”
귀가 먹먹해졌다. 누군가가 내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목 뒤가 서늘했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안 갑돌이가 당황하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곤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야, 너 괜찮냐? 기억 상실인지 지랄인지 그거 진짜 걸린 거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병원…….”
그때 끼이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익숙한 까만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유리창 너머로 창백하게 질린 정우진이 보였다.
“씨팔, 뭐야?”
제 앞에 선 차를 보며 갑돌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씨팔, 진짜 뭐지?
“핸드폰, 담벼락에 버리고 왔는데.”
내가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달칵, 문이 열리면서 정우진이 차에서 내렸다.
어지러운 머리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닫는 정우진을 보면서 차분히 가라앉았다. 창백하게 질려 허옇게 뜬 얼굴은 갑돌이를 보자마자 살인자처럼 섬뜩해졌다.
순간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나는 정우진이 내게 뭐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네 핸드폰 줘 봐.”
“…….”
“어서.”
내 핸드폰은 담벼락에 버리고 와서 없었다. 내 말에 정우진이 떨리는 손으로 내게 제 핸드폰을 넘겼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정우진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는 갑돌이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네 번호 찍어. 나중에 연락할게.”
“선배.”
“넌 입 닥쳐, 씨발 새끼야.”
내가 도끼눈을 뜨고 욕하자 정우진이 멈칫했다. 내게 닿지 못한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춰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야,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인데?”
갑돌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우진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핸드폰을 받아 제 번호를 찍었다. 나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곧 갑돌이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전화를 끊고 정우진에게 말했다.
“가자.”
“강서주!”
갑돌이가 내 이름을 부르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우진이 살벌한 눈으로 시선을 올렸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김갑진은 벌써 열 번도 더 죽었을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우진을 붙잡고 말했다.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
“잠깐만, 씨발. 너 도대체…….”
갑돌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을 차에 태우고 나도 옆에 탔다. 곧 시동이 걸렸다. 창밖으로 갑돌이가 당황하고 있는 게 보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열심히 손짓, 몸짓하며 뭔가를 묻고 있었는데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괴상한 몸짓을 잠시 구경하고 있는데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 차가 도로에 들어서 신호에 걸려 멈출 때까지 우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정우진이었다.
“핸드폰 들고 다니라고 했잖아요.”
정우진이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담벼락에 버리고 왔던 그 핸드폰이었다. 나는 멍하게 핸드폰을 보다가 그걸 받았다. 그리고 갑돌이 번호를 내 핸드폰에 저장시키며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잠시 대답을 기다렸지만 역시나 정우진은 말이 없었다. 조금 더 기다렸지만 역시나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핸드폰도 버리고 왔는데, GPS로 찾아온 게 아닌가? 대답하지 않는 정우진의 옆얼굴을 빤히 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데 떠올랐다. 정우진이 내게 핸드폰을 주면서 줬던 반지와 시계가.
나는 시선을 내려 정우진이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반지와 시계를 내려다봤다.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빼자 정우진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나는 반지를 빼고 시계까지 풀었다. 정우진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날 봤다. 나는 정우진을 보면서 잠시 시계와 반지를 들고 있다가 그걸 그대로 창문을 열어 밖으로 던져 버렸다.
왜 그러냐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정우진은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신호가 바뀌자 의문 한마디 없이, 미련도 없다는 듯 차를 출발시켰다.
“화났어요?”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저거다.
화났냐고? 존나 어이가 없었다. 핸드폰이 아니라 반지나 시계에 무슨 짓거리를 해 둔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정우진은 내가 반지랑 시계를 버릴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핸드폰도 다른 걸로 바꿔 줄게요.”
아니면 셋 다일 수도 있고.
짜증이 나서 고개를 돌리는데 정우진이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워낙 소리가 작아서 무슨 말인지 듣지도 못했다.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앞만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다른 걸로 바꿔 줄게요. 못 믿겠으면 선배가 골라요.”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목소리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나는 정우진이 울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걸 알아챘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걸까? 씨발.
정우진이 또 울 것 같아서 나는 화도 내지 않고 반쯤 포기한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핸드폰에 뭔 짓을 하긴 했구만.”
“잘못했어요.”
“반지랑 시계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묻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던 정우진이 다시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지만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정우진이 한 손으론 핸들을 잡고 반대쪽 손으론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을 꾹 눌렀다. 그래도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혹시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랬어요. 정말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선배한테 말하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오늘 저녁 먹으면서 말하려고 했는데…….”
“야.”
“거짓말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내가…….”
혹시 울기라도 할까 싶어 별로 화를 내지도 않았는데 정우진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다. 벌벌 떨고 있는 손을 멀거니 보고 있는데 정우진은 살이 짓무를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정우진은 내가 핸드폰과 시계, 그리고 반지에 무슨 짓을 해 놔서 이렇게 화가 났다고 생각하나 보다. 물론 그것도 어처구니가 없기는 했지만 지금 내가 정말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정우진 말대로, 그래.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 난 기억 상실증에 걸렸으니 정우진이 불안할 만도 했다. GPS, 그까짓 거 늘, 매일, 지나치게 불안해하는 정우진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 영상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잘못했어요.”
다시 정지 신호에 차가 멈췄다. 정우진은 여전히 날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떨면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울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일단 울고 보는 정우진이 울지도 않고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입술만 짓씹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물었다.
“내가 화난 거 같아?”
내 말에 정우진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하지만 신호가 다시 바뀌었다. 뒤에서 차가 빵빵거렸다.
“차 잠깐만 세워 봐.”
내 말에 정우진이 핸들을 돌렸다. 차를 세울 곳이 마땅히 없어 1분 정도 도로를 더 달렸다. 정우진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
“화내도 되는데……. 선배, 나한테 욕해도 되는데 집에서 나가지 마세요.”
새카만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아슬아슬하게 걸린 물방울이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았다.
“안 그럴 거예요. 이제 정말 안 그럴게요. 혹시 그러더라도 선배한테 꼭 말할게요. 허락받고……. 안 된다고 하면 안 할게요. 집에서 나가지 마세요.”
조금 전보다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입술에서는 피가 비쳤다. 나는 차가운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이 돌아가자 정우진의 숨이 빨라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나 싫어해도 되는데 집에서…….”
“…….”
“아니, 싫어하는 건 싫은데……. 아니, 그러니까……. 선배, 잘못했어요. 집에서 나가지 마세요. 싫어하지 마세요. 내가 잘못했어요.”
정우진이 횡설수설하면서 핸들에 얼굴을 박았다. 얼마나 심하게 떨고 있는지 가느다란 머리카락까지도 파들파들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정우진을 빤히 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입술을 달싹였다.
노트북에 그건 뭐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그걸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간임이 분명한 그 영상은 지금 핸드폰의 GPS나 시계, 반지에 뭘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도 정우진이 지금처럼 이렇게 벌벌 떨면서 내게 용서를 구할까?
나는 영상 속의 정우진을 떠올렸다. 그때 표정과 나를 바라보던 눈빛과 목소리, 말투, 행동……. 모든 게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물론 그간 정우진과 했던 섹스도 죽을 만큼 힘들고 아프기도 했지만 영상 속의 그런 것과는 꽤 달랐다.
그건 말 그대로 강간이었다.
“…….”
떠올리자 머릿속으로 파노라마처럼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 영상에서 본 건지, 아니면 내 머릿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기억인지,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어떤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하나같이 다 그런 것들이었다. 울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름을 부르고,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하고…….
가슴과 목구멍이 뭔가로 꽉 막혀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낯선 기억에 당황하고 있는 그때 귓가로 끊어질 듯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 버리지 마요…….”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리자 정우진이 핸들 위에 엎드린 채 덜덜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애처로운 그 목소리에 수백, 수천 마리의 벌레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우글우글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
정우진은 날 보면 웃었다.
내가 ‘아’ 하고 의미 없는 소리를 내뱉어도 웃었고, 내 손짓 하나하나에도 눈꼬리를 휘며 좋아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웃었고, 울어도 내가 손을 뻗으면 다시 웃었다.
화를 내다가도 내가 인상을 쓰면 금세 쩔쩔매고, 장난이라도 내가 싫다는 소리를 하면 어깨를 떨면서 필사적으로 나를 살폈다.
그건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반려동물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우진의 행동들은 그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개도 아니고 사람을 이렇게 좋아한다고?
우리가 부모 자식 사이도 아니고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십년지기 친구도 아닌데.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그렇게 위한다는 건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마치 꿈인 듯 정우진은 그렇게나 내게 현실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나 나를 좋아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그런데 왜?
대체 왜? 도대체 왜 그런 거지?
왜 그런 걸까.
나한테 왜?
* * *
집에 도착한 뒤에도 정우진과 나는 한참을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앞만 봤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정우진이 가끔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면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 같은 정우진이 보였다. 나는 핸드폰 액정을 손가락 끝으로 슬슬 쓸다가 차 문을 열었다. 정우진이 다급하게 내 손목을 낚아챘다.
“선배.”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웃을 때도, 울 때도, 심지어는 화를 낼 때도 늘 예뻤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문득 나는 너무나도 두려워졌다.
“핸드폰 안 바꿔도 돼.”
기억을 되찾기가 무서워졌다. 노트북에 그건 뭐냐고 물어보기도 두려웠다. 왠지 내가 알게 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그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정우진은 다시 내게 저런 표정 같은 건 보여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영상 속의 정우진은 너무 차가웠고, 어떻게 보면 무심해 보이기도 했고, 소름 끼칠 정도로 너무 다른 사람 같아서…….
“네 말대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세상이 흉흉하잖아. 뉴스만 틀어도 또라이들 많은데.”
뼈를 부러뜨릴 것처럼 억세던 손아귀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꾸역꾸역 눈물을 참으며 겨우 버티고 있던 정우진이 그제야 안심하기라도 한 듯 무너져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안 나갈 거예요?”
“갈 데가 없어.”
“나 싫어요? 소름 끼치고 징그러워요?”
그런 말은 한 적도 없는데 정우진은 마치 내가 자기를 그런 취급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그렇게 느껴지기라도 했다면 나도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정우진의 얼굴은 여전히 괴물처럼 일그러져 있었지만, 영상 속의 그 얼굴보다는 백 배, 천 배는 나았다.
“손 놔. 들어갈 거야.”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는데 강한 햇빛이 눈을 찔렀다. 잔뜩 인상을 쓰는데 차에서 내린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내게 손을 뻗어 날 품에 안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살갗 위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내가 잘못했어요.”
정우진은 어눌한 발음으로 안심한 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크게 우는지, 나는 다 큰 남자가 이렇게 우는 건 살면서 처음 봤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본 적이 있긴 한데 어차피 그것도 정우진이었다.
아무튼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말릴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황당한 새끼였다. 지금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지가 울고 지랄이야? 씨발, 그딴 건 도대체 왜 찍어 가지고…….
왜 날 그렇게 대하고……. 도대체 왜…….
속으로 정우진을 욕하고 있는데 눈이 따가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뺨 위로 물이 주르륵 흘렀다. 진짜 열불이 나서 살 수가 없었다. 씨발.
나는 어차피 이 집에서 나가 봤자 갈 곳도 없었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도, 나를 찾는 사람도, 내가 찾아야 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정우진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내가 정우진에게 유독 약한 걸까?
얜 툭하면 우니까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우는 얼굴을 때릴 수도 없고, 미안하다고 하는데 욕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걸까? 그런 영상을 보고도 모른 척하면서 계속 같이 살고 싶을 만큼?
잘 모르겠다. 나도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나는 다만 정우진이 걱정한 것처럼 이 새끼가 소름 끼치도록 징그럽고 싫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놀란 것도 사실이고 크게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음부터 그러지 마.”
그래도…….
나는 손을 들어 정우진을 마주 안았다. 그러자 정우진이 더욱 내 품으로 파고들며 크게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었는데 아직도 더 울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정우진의 어깨에 덩달아 몸을 기대며 아까부터 자꾸 시큰거리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