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영웅의 귀환 (2/13)

1장 영웅의 귀환

줄리안은 감색 트렌치코트를 맵시 있게 입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투란도트의 아리아가 울려 퍼졌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고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헤드뱅잉을 하고 있던 줄리안은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나 앞을 바라보았다. 매일 마주치는 노부인이 눈이 마주치자 온화한 미소를 보내왔다. 

“오늘도 저녁조인가 보지, 젊은이.”

“예, 그렇지요. 여사님도 그렇습니까?”

줄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부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노부인은 “난 이럴 만한 나이가 아니래도”라고 말하면서도 지하철 의자에 앉았다. 줄리안은 눈을 몇 번 깜빡여 졸음을 털어냈다.

“저녁조인데 제법 일찍 출근하네, 젊은이는.”

“혹시 몰라서요. 여사님은 오늘 힘드시겠습니다.”

“신년 연회니까 말이지. 자네도 힘들 텐데 표정이 즐거워 보이는군.”

“전 이 일을 좋아하니까요.”

줄리안은 싱긋 웃었다. 노부인이 “특이한 사람이야, 자네도”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창으로 시선을 돌리자 줄리안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덜컹, 덜컹. 전철은 조용히 레일 위를 달렸다.

「이번 정류장은 시슨타라 왕궁 앞입니다. 이번 정류장은 시슨타라 왕궁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가시죠.”

줄리안이 노부인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녀가 줄리안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고 둘은 나란히 전철에서 내렸다. 전철에서 내려 한 블록을 걷는 동안 노부인은 늘 그렇듯 줄리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왕실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직원이라고 해도 왕실의 거대한 주방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책임자였고, 왕실 가족의 특별 요청으로 퇴임할 나이가 훨씬 지났는데도 왕궁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오늘치 부축 비용이 되었을까?”

노부인은 언제나 이야기를 끝내고 그렇게 물었다. 줄리안은 “물론이죠”라고 대답하며 왕궁 직원용 셔틀 버스에 노부인이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셔틀 버스는 지정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부인의 자리는 앞쪽이었다. 그녀를 뒤따라 탄 줄리안은 안쪽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보고 있자니 휴대전화가 징, 진동했다.

『어디야?』

『버스 안. 넌 퇴근 중?』

『응. 오늘 끝내주는 일 있었어!』

줄리안은 눈을 빛냈다. 그는 주변의 기척을 살피며 재빨리 창에 기댔다. 몸을 구석에 구기듯이 앉아서는 『뭔데?』라고 상대에게 물었다. 상대가 한참 웃더니 오늘의 끝내주는 일에 대해 자세히 묘사해주었다.

『폐하께서 비전하 드레스 찢음.』

헉, 줄리안은 간신히 신음을 삼키고 주변을 흘낏거렸다. 그리고 재빨리 『진짜?』라고 되물었다.

『진짜로 찢었다니까. 기대해라, 줄스. 오늘 신년 연회는 진짜 재밌을걸.』

『비전하는 어쩌셨어?』

『울고불고 난리 났지, 뭐. 폐하께서 가위를 드시더니 휘청거리시는 척하면서 비전하 드레스를 북 찢는데, 육성으로 소리 지를 뻔했어.』

『맙소사. 며칠 전의 보복인가 보다.』

대외적으로는 사이가 좋은 국왕 부처지만 사실 그들은 개와 원숭이보다도 사이가 나빴다. 앞에서는 고상한 얼굴로 서로 날 세운 말들을 주고받고, 뒤로는 서로의 차에 약을 넣거나 하는 치사한 짓들을 계속했다. 며칠 전, 왕비는 왕의 홍차에 미약을 타는 데 성공했다. 왕은 미약을 먹고 뒤로 넘어갔고, 당시 왕의 옆에 있던 줄리안은 그를 업고 뛰어야 했다. 침실에 가자마자 왕은 정신을 차렸지만 이번에는 왕의 성기가 부풀었고, 왕은 미약을 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정부인 모 백작부인, 모 후작부인도 부르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의 몸을 위로해야 했다. 아주 오랜 시간 욕실에서 자위를 하며 이를 갈던 왕이 드디어 왕비에게 보복한 것이다.

『그런가 봐. 난리 나고 시녀들 뛰어다니고 시녀장이 스트레스 받아서 소리 지르고 시녀 하나 울고 비전하는 악을 쓰다 제풀에 뒤로 넘어가고 대단했다. 시발, 나 퇴근하는 거 너무 싫어어. 나랑 근무 바꿀래?』

『장난하냐. 내가 바꿔줄 것 같아?』

『아오, 원통해애애. 난 왜 나이트 근무가 아닌 거냐. 아오.』

친구의 괴로워하는 문자를 보며 줄리안은 킬킬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옆자리의 주인, 이안이 왔기 때문이었다.

“안녕, 줄스. 오늘도 기분이 좋아 보이네.”

“안녕, 이안. 넌 왜 이렇게 눈 밑이 새까매?”

“게임하다가. 아, 출근하기 진짜 싫다……. 신년 연회, 너무 싫어. 이번에도 귀족 나리들 수발들다가 밤을 꼬박 새우겠지. 생각만으로도 짜증 나.”

줄리안은 퇴근하는 게 너무 싫다고 울부짖는 문자를 흘끗 보았다. 누구는 출근하기 싫다고 불퉁하고 누구는 퇴근하기 싫다고 운다. 참 불공평한 세상이다.

이안은 바로 눈을 감고 잠들어버렸다. 줄리안은 그런 이안을 흘끗 보고는 다시 문자 메시지를 쳤다.

『잘 쉬고, 나머지는 이 형님이 두 눈으로 똑바로 봐주마.』

『오냐, 한 치의 놓침도 없이 잘 봐 오도록 하여라.』

키들거리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줄리안은 휴대전화를 껐다. 그리고 작게 속삭이듯 워드를 외워 마법으로 휴대전화를 잠갔다.

“그거, 워드라고 하는 거지?”

졸고 있을 줄 알았던 이안이 물었다. 줄리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워드를 끝까지 외운 다음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대답했다.

“응.”

“마법사가 시종은 왜 하냐? 다른 걸 하면 돈을 훨씬 많이 벌 텐데.”

“그만한 능력자는 못 돼.”

“마법사면 다 잘 버는 거 아니야?”

“잘 버는 사람도 있고 못 버는 사람도 있지.” 

“넌 못 버는 사람 쪽이야?”

“너랑 비슷하게 벌겠지. 우린 똑같은 직급이잖아.”

줄리안과 이안은 동기였다. 둘은 똑같은 7년차였고 명함에는 둘 다 과장 대리라는 직급을 달고 있었다. 줄리안의 말에 이안이 “그러니까 왜 귀족 집안 자제가 나 따위와 똑같은 일을 하냐고 묻는 거잖아”라고 짜증스럽게 물었다.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리자 이안이 칫 하고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왕립 아카데미를 나와서 고작 하는 게 시종이라니 아깝지도 않냐.”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그 말에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왕궁에 면접을 보러 왔던 날을 떠올렸다.

당시 줄리안은 열여덟 살,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한 지 고작 두 달이 넘은 시점이었다.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줄리안에게 시종 일을 해보라 권했다. 동화책을 좋아하고 이야기에 환장하는 줄리안이 아카데미 서고와 헤어지고 시름시름 앓는 꼴을 보다 못해 권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족들은 줄리안이 일종의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아르바이트라기보다는 산책에 가까운 것이었다. 가족들은 그가 바깥 공기를 좀 쐬고 나면 한 명의 마법사로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리라 여겼고 줄리안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운명의 날은 금요일이었다고 줄리안은 회상했다.

그날, 줄리안은 아버지의 차를 타고 입궁했다. 운전기사는 몹시 정중한 태도로 “도련님, 다 왔습니다”라고 말해주었지만 사실 줄리안은 아버지의 운전기사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예, 예. 줄리안은 귀족 집안 자제답지 않게 기사를 어색해하며 차에서 내렸다.

여기가 왕궁이구나.

줄리안은 고개를 들고 왕궁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시슨타라 왕궁.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아름다운 궁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런 데서 우리 아버지가 일하신단 말이지, 헤에, 신기하네. 줄리안은 휘파람을 불 뻔했으나 참아냈다.

하얀 새 한 마리가 줄리안의 앞에서 파닥파닥 날갯짓을 했다.

‘줄리안 일리드, 일리드 백작님의 세 번째 아드님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시종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법 새를 전령으로 쓰다니 왕궁이란 대단하군.

줄리안은 다시 한 번 휘파람을 참았다. 하얀 새를 따라 걸으면서 줄리안은 왕궁의 이곳저곳을 즐겁게 관람했다.

그가 아는 동화책의 궁과는 달랐다. 그 궁은 이렇게 현실적이지 않았다. 할로겐 등도 없었고 CCTV도 없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감시 시스템도 없이 그저 꿈의 장소로 존재할 뿐이었다.

현실의 궁은 좀 시시하구나.

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정원 한중간에서 마법 새를 놓치고 말았다.

줄리안은 ‘저기요?’라고 마법 새를 부르며 걸었다.

‘저기요? 저 안 보이세요?!’

정원은 미로 같았고 줄리안은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다. 마법을 쓰면 간단하겠지만 왕궁 내 마법 사용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다. 마법을 쓰면 다른 의미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위대가 한 무더기 달려와 총과 검을 들이대겠지.

줄리안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버지에게 전화라도 해봐야겠다 싶었다. 그가 전화기를 들어 아버지의 단축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흐아앙,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교성이 울려 퍼졌다.

줄리안은 본능적으로 휴대전화를 껐다. 그리고 천천히 발소리를 죽여 교성이 울려 퍼진 곳으로 걸어갔다. 나무 뒤에 착 달라붙어서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들어 저쪽을 비췄다. 차마 고개를 뺄 엄두는 나지 않았기 때문에 휴대전화의 각도를 조금 미묘하게 움직인 것으로 보았을 뿐이었다.

처음 보인 것은 하얀 다리였다. 그리고 끝까지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쭉 뻗은 다리가 흔들거렸고 어느 순간 손바닥만 한 분홍색 팬티가 발목에 걸려 나풀거렸다. 그것이 다였다.

‘잠깐, 자기, 흐응.’

‘잔뜩 젖었어. 좋아? 엉덩이 흔들지 말고 말로 해. 이 입으로 하라고.’

‘아응, 몰, 라, 아읏.’

‘좋으면서. 못된 입이야.’

줄리안은 입을 벌렸다. 그도 눈치가 있으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맙소사, 정말 자신이 그 상황을 보고 있단 말인가? 라이브로? 생으로? 진짜? 줄리안은 침을 삼키려다 목으로 넘기는 소리가 너무 클 것 같아서 몇 번에 나누어 조금씩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휴대전화 화면에서는 늘씬하게 빠진 다리가 위아래로 흔들리고만 있었다.

‘왜애. 아, 안 돼. 남기지는 마……!’

‘남편과 아직도 자?’

‘그건 아니지만, 흐응, 그래도 예의라는 게, 그리고 남편은 암 말 안 해도, 자기, 나한테 남자 있는 거 알면서, 읏.’

‘그럼 다리 벌려봐, 안쪽에 남겨주지. 내 낙인을.’

‘으으응―.’

불륜이다…….

말로만 듣던 그 불륜이 지금 눈앞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줄리안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덜덜 떨면서 다리가 훌떡훌떡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음란 토크 타임은 지나갔고 흐으응, 흣, 아흣, 이런 소리만이 난무하고 있었다.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제 입을 막았다. 이, 이, 이것이 말로만 듣던 포르노……!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리안은 성적으로 미숙했다. 성적인 어떤 자극에도 관심이 없었다. 남들이 자신을 이상한 놈, 미숙한 놈, 고자 같은 놈, 고자가 될 놈, 고자인 놈, 고자 놈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래봤자 섹스 아니냐고 쉽게 생각해왔다.

오, 마이, 갓.

이것이 어른들의 세상인가!

줄리안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떨리는 팔로 휴대전화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뭔가 다른 화면을 보고 싶었다. 얼굴이든 옷자락이든, 다리 말고 다른 화면을 보고 싶어서 화면을 움직이는 찰나에.

휴대전화에 글자가 떴다.

『아버지.』

안 돼애애애애애애.

줄리안은 육성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참아냈다. 그러나 전화기에서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꺄악. 여성의 비명과 함께 ‘누구야?!’라는 남자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줄리안은 휴대전화를 급히 옷 속에 집어넣었다. 당황해서 소리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한 행동이었다. 뱃가죽으로 휴대전화를 느끼면서 줄리안은 미친 듯이 달렸다.

‘야, 이 새끼야! 거기 안 서?!’

맙소사, 심지어 남자가 쫓아오고 있었다.

풀잎 미로를 되는대로 달렸다. 어딘가에 팔이 긁혔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줄리안은 온 힘을 쥐어짜 내 달리다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미로의 입구였다. 그리고 하얀 새가 눈앞에서 날개를 팔락거리고 있었다. 어……? 줄리안이 눈을 크게 뜨며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그를 쫓고 있던 남자가 풀 벽의 모퉁이를 돌았다.

‘이 쥐새끼, 잡았…….’

‘쥐새끼? 내 아들을 말하는 건가, 지금?’

하얀 새의 옆에는 크리스토퍼 일리드, 즉 줄리안의 부친이 서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줄리안이 당황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얼굴이 한껏 상기된 것을 본 아버지는 알 만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궁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차림이 엉망인지는 모르겠네만.’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흘끗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검은 머리에 약간은 비열하게 생긴 듯한 얼굴로 키가 컸다. 셔츠와 정장 바지만 입은 상태였는데 윗도리고 아랫도리고 잔뜩 구겨져 있었다. 줄리안이 바라보자 그도 이쪽을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줄리안은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그를 보는 순간 그가 여인과 나누었던 음탕한 대화가 생각난 탓이었다.

‘난 내 아들을 데려가야겠네.’

‘예, 각하. 실례했습니다.’

‘당연하지. 눈이 썩겠군.’

줄리안에게 크리스토퍼 일리드는 늘 상냥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자신이 괴상한 짓을 해도, 멋대로 굴어도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옆에 앉으실 뿐이었다. 줄리안이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줄리안을 부정하거나 비난하거나 윽박지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한숨을 쉬는 것처럼 웃으며 줄리안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는 했었다.

싸늘한 아버지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던 줄리안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가자.’

아버지의 말에 줄리안은 더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줄리안은 서둘러 아버지의 등을 좇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사이 심장 소리가 더욱 커졌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 같았다.

‘아버지. 저 사람은 누구예요?’

‘제비.’

‘제비? 그게 뭔데요?’

‘귀부인들의…… 즐거움 대상이 되어주고는 대신에 여러 지원을 받는 남자들을 말한단다. 대체로는 대단치 않은 귀족가의 아들들이지.’

즐거움 대상? 지원을 받아? 줄리안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뒤를 흘끔거렸다. 대단했다. 잠깐 사이에 겪은 일인데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포르노를 봐서가 아니었다. 불륜과 밀회를 눈앞에서 목격한 탓이었다. 남자의 몰골이 떠올랐다. 구겨진 옷차림. 얼굴에 드러난 그 수많은 감정. 희열의 잔재와 수치심, 분노가 뒤섞여 만들어내던 이상한 표정.

줄리안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까와는 달리 아무것도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왕궁의 아름다운 정원. 남자와 여자의 음탕한 속삭임. 불륜. 밀회.

어느 이야기에서도 이렇게 가슴 터질 듯한 스릴을 주지는 못했다. 이렇게 생명력이 넘치는 이야기 따위는 만난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친우이신 시종장 어르신을 만났을 때 줄리안은 ‘평생의 직업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아니. 평생의 직업으로 여기면 안 되지. 마법사 라이선스를, 그것도 S급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네가 그러면.’

‘정말, 꼭 하고 싶습니다.’

‘네 아버지는 잠깐 기분 전환이 되라고.’

‘전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제 평생의 직업입니다.’

‘줄리안?’

‘꼭 뽑아주십시오. 전 정말 이 직업에 열정과 영혼을 불태우겠습니다. 재가 되는 일 따위는 없이, 계속, 계속 불사르겠습니다!’

‘줄…….’

그날은 정말 아름다운 금요일이었다. 줄리안 일리드의 인생에 광명이 비친 날이었다.

시종장은 ‘애가 이렇게까지 하고 싶다는데 시키면 안 되지. 정말 이걸 평생의 직업으로 택하면 어떡해!’라며 반대했지만 아버지인 크리스토퍼 일리드는 ‘당장 침대에서도 안 나오려고 하는 애인데 뭐라도 시켜야 할 거 아니야. 괜찮아, 하다 보면 질리겠지. 잘하면 동화책에서 드디어 관심을 뗄지도 모르고’라며 시종직 하나 내어달라고 요구했다.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줄리안은 아버지에게 절을 하거나 양뺨에 키스를 하거나 몸이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싶어지고는 했다. 그리고 시종장 어르신은 늘 ‘내가 뭐랬어! 내가 뭐랬냐고!’라며 아버지에게 신경질을 내셨고, 아버지는 그때의 당신을 만난다면 목을 졸라버릴 거라고 하셨다. 어쨌거나 줄리안은 아버지의 혜안(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오로지 줄리안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아버지인 크리스토퍼 일리드의 입장에서는 일생일대의 실언)에 기대어 인생의 낙을 찾았다.

“아, 벌써 도착했네. 생각만 해도 끔찍한 하루가 시작되겠어.”

이안이 이를 갈았다.

줄리안은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씩 웃었다. 이안에게 오늘이 어떤 하루든 간에 줄리안에게는 정말 짜릿하고 즐거운 하루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들뜬 기분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줄리안은 생글거렸다.

사무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줄리안은 전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옷차림을 훑었다. 희미하게 내려온 셔츠 깃을 제대로 올린 다음 가볍게 뺨을 쳐서 들뜨고 행복한 기운을 멀리 내쫓았다. 고용주들의 사생활을 즐긴다는 걸 알게 되면 그들이 줄리안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아무리 재무장관의 막내라고 해도 그는 결국 이 즐겁고 신명나는 직업을 잃게 될 것이다.

후―.

안 좋은 일을 생각해보자. 가정교사가 그를 떠났을 때가 생각났다. 가슴이 무너졌다. 도서관과 헤어지던 날. 자신의 몸을 갈가리 찢어 수만 권의 장서 사이에 숨기고 싶었다. 그러면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우울해했다. 줄리안은 다소 극단적인 성격이었다.

좋아, 기분이 좀 가라앉는 듯하다.

줄리안은 그제야 사무실 문을 열었다. 줄리안의 부하들이 “안녕하십니까, 줄리안”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들어오면서 줄리안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막내 격인 팀원 제이크가 “오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시네요, 줄리안”이라고 말을 걸어왔다.

이런, 기분이 충분히 가라앉지는 못한 모양이다. 줄리안은 “그러게. 큰일을 앞두었기 때문인가. 의욕이 넘치네. 힘내자”고 대충 말하고는 가지고 있던 서류를 한 명 한 명에게 넘겨주었다. 줄리안은 힘찬 목소리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번 신년 연회에서 우리의 역할은 비전하의.”

따릉, 따릉.

그러나 줄리안의 한마디가 채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전화기에서 고전적인 벨소리가 울렸다. 줄리안은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의 휴대전화는 이미 궁으로 들어올 때 보안 부서에 넘겼고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업무용 휴대전화였다. 궁에서 일괄적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시종들은 종종 그 휴대전화를 목줄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목줄이 따릉, 따릉 울어서 줄리안은 휴대전화를 열었다.

“줄리안 일리드입니다.”

‘줄리안.’

시종장이었다. 응? 줄리안은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5시 20분. 저녁조의 모든 팀들이 업무 브리핑을 하는 시간대다. 이런 시각에 전화를 했다는 건 업무 분장에 변경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 시종장님.”

‘비전하의 시중에서 빠지고 너희 팀은 다른 일을 해주어야겠다.’

“예…….”

줄리안은 좀 시무룩해졌다.

그는 오늘 신년 연회에서 비전하의 파트를 맡은 걸 기뻐하고 있었다. 왕과 왕비의 사이는 극악이었고 줄리안은 그들의 전쟁을 보는 게 늘 재미있었다. 가뜩이나 오늘은 신년 연회,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행사이니만큼 둘이 보이지 않게 서로를 얼마나 공격하고 헐뜯을까. 그것을 옆에서 보지 못한다니 아쉬워서 힘이 빠졌다.

‘오늘 대공 전하께서 연회에 참석하신다는군. 한 시간 안에 도착하신다는데 곤란해졌어.’

“대공 전하라면, 아리스트 대공 전하 말씀이십니까?”

도살자, 드라큘라, 식인귀라고 불리는 아리스트 대공은 올해 스물아홉 살. 마니타인 왕국의 총사령관이었던 전대 아리스트 대공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 전쟁터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대공 부처가 전쟁터에서 암살당하자 고작 세 살의 나이에 아리스트 대공이 되었다. 아리스트 대공 작위를 가지고 있는 스토메어 가문은 그를 전쟁터에서 양육했고 그는 전쟁의 기계로 자랐다.

그 학대에 가까운 양육을 보다 못한 선왕이 동생의 아들인 아리스트 대공을 양아들로 입적하였을 때는 이미 그의 나이 열여덟.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권유를 거절한 그는 계속 전쟁터에 남아 싸웠다. 선왕이 붕어하고 하나밖에 없는 형이 즉위하였을 때도 돌아오지 않았다.

길고 긴 전쟁. 그러나 먼 곳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실감하지 못하는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대공이 더는 전쟁터에 남아 있을 명분이 없어져 돌아오는 길이었다. 네 명의 부모를 두었지만 친부모는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양부모도 한 분만 살아 계시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는 어머니인 대비가 제발 돌아오라고 애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돌아온다는 이야기에 궁정 사교계에는 은밀한 바람이 불었다. 아리스트 대공은 전쟁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만큼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피를 보아야만 잘 수 있다는 둥, 직업여성 다섯이서 그를 성적으로 달래야만 한다는 둥, 과격한 소문만 계속 나돌 뿐이었다. 그런 남자가 드디어 사교계에 데뷔하는 것이다. 전대 아리스트 대공 부처를 보건대 분명 잘생겼겠지. 그리고 전쟁터에서 태어나 평생을 전쟁과 함께하였으니 얼마나 위험한 매력을 가진 사내일까. 마초적 남성미가 풀풀 풍길 것이다. 불륜이 미덕인 궁정 사교계, 여인들은 기대에 차 있었다. 궁정 사교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사가 아니라 피 냄새가 날 것 같은 사내.

그가 사교계에 데뷔하는 즉시 궁정 사교계의 연애라인은 와장창 깨질 것이다. 숙녀들은 그를 두고 전쟁을 벌일 것이고 신사들은 그를 견제하며 음험한 음모들을 꾸밀 것이다.

한마디로, 줄리안에게는 엄청 재밌는 삶이 도래한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생 라이브로 펼쳐질 것인가. 줄리안은 가슴이 벅차서 잠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줄리안? 무리겠나?’

노인의 엄격한 목소리가 줄리안을 일깨웠다. 그는 서둘러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시종장님. 저희 팀이 하겠습니다.”

‘궁정 사교계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이네. 자네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챙기게.’

“예, 어르신.”

‘줄스.’

시종장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줄리안을 불렀다.

“예, 듣고 있습니다.”

‘무서운 소문이 도는 분이라는 건 알고 있지?’

“예.”

‘나와 약속한 건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

“언제나 명심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좋아. 이번 일도 잘해낼 거라 믿네. 열심히 하도록.’

전화가 끊겼다.

줄리안은 이제 더는 동화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동화책보다 훨씬 자극적인 이야기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동화에 무슨 관심이 가겠는가. 그는 매일 수많은 소문을 듣고 연애 사건을 목격한다. 애정과 증오, 우정과 배신, 음모와 기적. 감정과 욕망이 총천연색으로 넘실거리는 궁정 사교계를 가로지르며 줄리안은 늘 즐거워했다.

주변에서는 좀 이상하게 여겼는데, 귀족인 줄리안이 시종직을 선택했다는 것도 의외인데 심지어 그 본인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에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시종직은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이지 결코 즐거운 직업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퍼 일리드의 절친한 친구인 시종장은 줄리안이 어릴 때부터 그를 보아왔다. 동화책에 미쳐 있는 아이 때문에 크리스토퍼는 고민이 많았다. 지금이야 웃으며 넘길 추억이지만 그때 백작 부부는 아이가 자폐증일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여러 가지를 준비하기까지 했었다. 어쨌거나 줄리안은 좀 독특하긴 하지만 정상적인 아이로 자랐고 학업의 성취 면에서는 백작 부부를 자랑스럽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 아이가 왜 시종직을 원하는 것인가. 의아해하던 시종장은 어느 날 왕과 왕비의 싸움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줄리안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는 줄리안을 앞에 두고 꼬치꼬치 캐물었고 줄리안은 결국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보며 즐긴다는 것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시종장은 당장 줄리안을 내쫓으려고 했지만 의외로 그 결정을 막은 사람은 왕비였다. 왕비는 시종 중에서 줄리안을 제일 좋아했다. 줄리안은 적당히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백작가의 일원이었으며 마법사이기도 했다. 가끔 우울해하는 왕비는 그때마다 줄리안에게 마법을 써보라고 했다. 그녀가 원하는 마법은 하찮은 것들이었고 줄리안은 그때마다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주었다. 그녀의 허영심과 즐거움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시종은 흔치 않았다. 왕비는 품위 있는 지랄을 떨어 궁내부 장관의 혼이 가출하도록 해주었고 장관은 시종장의 말을 무시한 채 해고를 금했다.

결국 줄리안은 시종장에게 각서를 썼다. 왕궁에서의 모든 일을 유출하지 않겠으며 고용주 및 손님들에게 자신이 즐기고 있음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내용을 친필로 또박또박 적고 서명까지 했다. 처음에는 ‘즐기고 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정도가 아니라 ‘즐기지 않는다’였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밌는 걸 어떡해요?! 줄리안의 말에 시종장은 뒷목을 잡았지만 결국 각서의 문구를 수정해주었다.

시종 일을 한 지 7년차.

여전히 줄리안은 그렇게 생각한다. 재미있는 걸 어떡해?

“우리는 다른 일을 맡게 되었어.”

줄리안의 말에 팀의 시종들이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렸다. 통화 내용을 슬쩍 들은 것만으로도 알 만했다. 제이크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아리스트 대공 전하의 시중을 우리가 맡게 된 건 아니죠?”

“맞아, 그거야. 똑똑하네, 제이크.”

화사한 얼굴로 대답하는 줄리안을 보며 팀원들은 희게 질렸다. 뭐가 좋다고 자신들의 상사는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아리스트 대공이라고요, 그 아리스트 대공!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울상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적군을 먹은 적도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식인귀라는 소문은 그냥 ‘악마’ 같은 추상적인 소리가 아닙니다. 본 사람이 있대요!”

직급은 대리이며 이 팀의 부책임자이기도 한 조이가 창백한 얼굴로 낮은 고함을 쳤다. 그 말에 히이이익, 다른 시종들이 숨을 삼켰다. 뭐, 뭐, 뭘 먹어?!

“에이, 당연히 헛소문이지. 그걸 믿었어?”

줄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끽해야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헛소문을 믿다니 다들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설사 그가 식인을 했었다고 해도 이 왕궁에서 시종을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궁에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식인을 하겠는가. 사람을 죽여서 요리할 주방도 없고 요리되지 않은 살을 먹다니, 그게 무슨 맛이 있겠는가. 심지어는 세척도 안 되어 있잖아.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다고.

줄리안의 설명에 그건 그렇지, 라며 시종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위, 위생적으로는 별로겠네요, 확실히.”

“게다가 맛도 없을 거야. 고기를 날걸로 뜯어먹는 거라고. 가죽은 어디서 벗길 거야? 아님 안 벗기고 그냥 먹을 거야? 넌 돼지를 가죽째 뜯어먹을 수 있겠냐고. 그렇다고 가죽을 벗겨서 생고기를 먹는다면 어디서 벗길 건데? 여긴 왕궁이야.”

“그, 그렇죠.”

“불도 조미료도 조달할 수 없는데. 그럴 리가 없어. 설사 식인을 한다고 해도 우린 안전하다고.”

“듣고 보니 그건 그런데요, 그래도 무섭잖아요.”

조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호러 영화의 광팬인 조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겁이 많았다. 줄리안은 조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의 어깨에 무겁게 드리운 공포를 쫓아내는 것처럼 손짓한 줄리안이 컴퓨터로 파일을 불러왔다. 시종장의 팀이 보내온 파일을 프린트하면서 “다들 걱정 마.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내 팀에서 병가 나오는 거, 절대 없게 할 테니까. 알았지?”라고 말하자 시종들이 그나마 안도한 듯 짧은 한숨을 쉬었다.

왕궁이라고 해봐야 결국 거대한 기업체와 같다. 줄리안이 과장 대리이듯이, 조이가 대리이듯이, 모두는 직급을 가지고 있다. 상사에게 보고하고 승진하거나 좌천을 당하기도 하는 등, 결국 이곳도 평범한 직장이다. 휴가도 있고 시간 외 근무 수당도 있고 병가도 있다.

그러나 왕궁 시종들 사이에서 ‘병가’라고 하는 것은 평범한 병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귀한 귀족 나리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희생된 자들이 퇴출되는 것을 의미했다. 구타를 당한 시종도 있었고 살해당한 시종도 있었다. 죄를 뒤집어쓰거나 혹은 귀부인의 유혹에 놀아나 인생을 망친 시종도 있었다. 1년에 한두 명 정도는 꼭 병가로 궁을 떠나는 시종이 있었다. 기약 없는 병가를 맞은 시종이 생길 때마다 왕궁의 시종, 시녀들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졌다.

새로 프린트한 브리핑 자료를 하나씩 나눠주고 줄리안은 아리스트 대공에 대해 회의를 시작했다. 신년 연회. 겨울에 있는 행사 중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였다. 모든 귀족이 참석하여 공작새처럼 자신을 뽐내고 상대를 견제하는 파티. 시종들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잘났다고 지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귀족들에게는 1년 동안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확인받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평생 전쟁터에서만 머물렀던 양반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다. 궁정 예법 따위는 알지도 못하며 궁정에 발 한 번 들여놓지 않았던 인물이 비웃음을 사거나 좋지 않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준비하는 것이 줄리안의 팀에 떨어진 사명이었다.

“그런데 비전하께서 줄리안이 없어도 괜찮으시대요?”

제이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줄리안이 왕비가 가장 아끼는 시종이라는 건 이미 궁 안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람들은 줄리안과 왕비가 육체적으로도 친밀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줄리안의 팀원들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줄리안은 왕비를 비롯한 어떤 귀부인과도 관계가 없었다. 그는 아예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뭐, 괜찮겠지. 시종은 많잖아.”

줄리안은 무심히 대답했다. 평소의 그는 왕비를 지극정성으로 보필했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왕비는 궁정 사교계의 진정한 여왕벌이었다. 여성들과는 싸우거나 집단을 형성하기 일쑤였고 남성들과는 은밀한 줄다리기를 즐기고는 했다. 그녀의 주변은 끊임없이 시끄러웠으며 줄리안은 그 모든 가십을 사랑스럽게 지켜보고는 했다. 왕비는 줄리안의 인생이 유쾌해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줄리안은 한시도 왕비의 보필에 느슨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리스트 대공이다. 이 궁정 사교계의 연애 판도를 뒤집을 인물! 얼마나 시끄럽고 재밌을 것인가! 줄리안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왕비의 존재가 사라지고 없었다.

“자, 자. 다시 한 번 확인하자. 대공의 키는 190cm, 몸무게 83kg. 대비 전하께서 미리 만들어두신 턱시도가 오고 있지만 과연 얼마나 그 옷이 어울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 만약을 위해 각 브랜드에 연락을 넣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다행히도 체형이 좋으신 편이라 옷을 구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아. 그리고 금발에 청안, 흰 피부라 하시니 색을 고르는 데 있어서는 자유로운 편이지. 그러고 보니 제이크, 오늘 국왕 전하의 차림은 어떻게 되시지?”

“현재 확인 중입니다. 그쪽 팀에서 결정이 안 되었나 봐요.”

막내라 연락 담당이기도 한 제이크가 난처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직도 결정이 안 되었다고? 줄리안은 시간을 확인했다. 5시 57분. 파티는 8시부터 시작이니 한참 전에 결정이 되었어야 맞는데.

마침 저쪽에서 다른 팀과 전화를 하고 있던 조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비전하께서? 어, 알았어.”

전화를 끊은 그가 줄리안을 돌아보았다.

“비전하께서 드레스를 결정하지 않으셨답니다.”

팀원들 사이에서 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또! 드레스를 왜 결정하지 않으셔? 이미 다 만드셨잖아.”

“무슨 변덕이시래? 아, 진짜 이번에는 뭐가 마음에 안 드셔서 몇 천만짜리 드레스를 거부하셨대?!”

그 사이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건 줄리안뿐이었다. 조이는 보고를 하기 위해 줄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알고 계셨군요”라고 중얼거렸다. 

“들은 게 있었어. 드레스가 사고를 당했다더군.”

줄리안의 말에 조이가 “사고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필연적이던데요”라고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팀원들은 조이와 줄리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팀원들이 눈으로 묻는 질문에 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이가 정확히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입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

줄리안은 이 생활을 몹시 신중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빼앗겼다. 가정교사는 그를 버리고 결혼했고 아카데미의 도서관과는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시종직은 세 번째 사랑이었으며 앞선 사랑들보다 더 자극적이고 은밀했다. 줄리안은 시종직까지 빼앗길 생각이 없었기에 자신의 취미를 같은 취미를 가진 단 한 사람과만 공유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에게도 티를 내지 않았다. 티를 내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시종장은 정말 그를 해고할 게 분명했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었다. 절대로.

“전하께서 가위를 들고 계시다가 넘어지시면서 드레스가 찢겼대요. 다분히 의도적인 사고죠.”

결국 조이가 입을 열었다. 으아악. 시종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어!”

직급상으로는 세 번째, 연배상으로는 가장 높은 저스틴이 비명을 질렀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왕비가 왕에게 미약을 먹일 때부터 이런 보복이 있을 줄 알았다며 저스틴이 가슴을 퍽퍽 쳤다. 왕과 왕비는 고래이고 그들이 싸울 때마다 시종새우들의 등이 터져나가기 마련이었다. 저스틴이 미치려고 하는 것을 보며 줄리안은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걸 즐기지 못할까, 쟤는’이라고 생각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하긴 줄리안에게도 좀 곤란한 상황이었다. 왕비의 드레스가 정해져야 왕의 연미복이 정해진다. 그래야 줄리안도 대공에게 어떤 옷을 입힐지 정할 수 있다. 물론 대공이 옷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 옷이 왕의 것보다 더 화려하면 곤란하다.

“조금쯤은 화려해도 될 거야.”

그 무서운 대공의 시중을 맡게 되었다는 것부터 환장할 상황인데 일도 꼬였다. 팀원들이 벌써부터 미치려고 하자 줄리안이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듯 말했다. 그러나 조이는 줄리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전하보다 더 화려하면요?”

“전하는 워낙 미남이시잖아. 외모로 밀릴 테니 걱정 마. 이쪽은 군인이니까.”

줄리안의 말에 그건 또 그렇다며 제이크를 비롯한 평사원 시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리인 조이와 계장인 저스틴은 불안한 얼굴로 줄리안을 돌아보았다.

“선대 아리스트 대공 부처도 엄청 미남미녀던데요. 초상화만 봤지만요.”

“그 부인 때문에 대비 전하가 제법 속이 상하셨다던데. 워낙 미인이시라서요. 게다가 아리스트 대공 부처는 연애로 결혼한 커플이라 서로에게 정조를 지키시는 통에 대공비가 거의 절벽의 꽃처럼 되어서 인기가 아주 하늘 끝까지 닿을 지경이었다고…….”

“그때 대비 전하가 완전 묻히셨다면서요. 뭐, 30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요.”

“그런 거 보면 대비 전하께서는 확실히 성격이 순하세요. 지금 비전하셨다면 전쟁 발발인데.”

제이크의 전화가 울렸다. 제이크가 등을 돌리고 전화를 받는 사이 조이와 저스틴은 왕비 이샤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평사원 시종들은 아무 말 하지 않으면서도 피식거렸고 줄리안은 자신이 아는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자 무심해졌다. 그때, 제이크가 전화를 끊으며 소리쳤다.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줄리안과 조이가 동시에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이르네요.”

조이가 시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쁘지 않은 징조여야 할 텐데. 저스틴이 중얼거렸다. 줄리안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따라 조이, 저스틴 그리고 평사원들이 움직였다. 제이크를 비롯한 평사원들이 대공이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귀빈실을 잡고 다른 팀에 연락을 취하는 동안 줄리안은 조이에게 속삭였다.

“일단 의복이 정해지면 사진을 찍어서 대비 전하께 보내.”

대공의 마음에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비도 만족해야 한다. 줄리안 같은 시종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공보다는 대비의 만족이 우선이었다. 대공은 왕족이지만 시종들을 고용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저택에 돌아갈 입장이었고 줄리안과 시종들은 왕궁에서 대비, 그녀의 아들인 국왕, 그녀의 며느리인 왕비 등의 시중을 드는 것이 직업이었다.

“예.”

“그리고 저스틴, 전하의 팀에 미리 연락을 넣어줘. 의상이 정해지는 즉시 우리 쪽에도 알려달라고 해.”

줄리안의 뒤에 바짝 붙어 걸어오던 저스틴이 “예, 확실하게 말해두겠습니다”라고 속삭였다. 줄리안이 빠르게 걷는 동안 저스틴은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일행의 중간쯤에서 걸으며 저스틴은 왕을 시중드는 팀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도 알겠는데 우리 쪽도 곤란하다는 거지. 아니, 아니, 다 이해하지. 그럼. 내가 비전하를 모르겠어? 우리 과장이 줄리안이야. 비전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알지? 평소 우리가 주로 비전하의 시중을 들잖아. 잘 알지, 그럼.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 난 단지, 그렇지, 응, 그렇지. 전하의 의복이 정해지면 우리 쪽으로 연락을 달라는 거야. 좀 빨리, 부탁하자는 거지. 대공 전하께서 전하께 무례한 의상을 착용하시게 되면 곤란하잖아.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그래, 그렇지.”

쾌활하게 말하던 저스틴이 목소리를 확 낮췄다. 은밀한 거래를 제시하는 사람 같은 태도로 저스틴이 물었다.

“우리 쪽에 가장 먼저 연락을 줄 거지? 이 빚은 꼭 갚을 테니까.”

그사이 줄리안도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앞으로 10분, 알겠습니다. 어느 쪽으로 오십니까? 아니요, 저희 쪽은.”

줄리안이 전화를 받다 말고 조이를 바라보았다. 조이가 제이크를 돌아보았다.

“제이, 귀빈실 어디로 잡았어?”

“3이요!”

제이크가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다 말고 휴대전화를 손바닥으로 막더니 낮게 고함을 치며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였다. 조이가 줄리안에게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였다.

“……남관에서 마중을 준비하겠습니다. 남관으로 오시도록 연락을 넣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줄리안이 전화를 끊자마자 모퉁이를 확 꺾었다. 조이가 뒤로 가서 황망하게 통화를 하고 있는 제이크의 옆에서 속도를 맞추다가 제이크가 전화를 끊자마자 그 뒤통수를 후려쳤다.

“3호실이면 미리 말해줘야지!”

“예? 왜, 왜요?”

“우린 서관으로 가고 있었잖아!”

제이크가 고개를 들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어? 우리가 왜 여기에 있어요?”라며 송아지 같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 내가 미쳐. 조이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의 속도를 올려 줄리안의 옆에 붙었다.

8분이 지난 뒤, 그들은 거의 뛰다시피 한 끝에 남관 앞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멀리서 검은 리무진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줄리안은 흘끗 시선을 뒤로 돌렸다. 조이가 “준비되었습니다”라고 안심하라는 듯 속삭였다.

리무진이 눈앞에 멈췄다. 남자 한 명이 내렸다. 경호원. 그리고 두 번째 남자. 줄리안은 2미터에 가까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금발, 청안. 그런데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줄리안이 그에게 인사를 하려는 찰나 세 번째 남자가 내렸다.

한 명이 더 있었어?

주인공이 따로 있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금발인지 확인했다. 금발이었다. 그것도 결 좋은 금발이었다. 레몬을 녹여 만든 금실이 저럴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색이었다. 눈동자는 겨울 하늘 같은 청회색. 모든 색이 선명했다. 입술 또한 붉었다. 체리 색 입술이 조금 도톰했다. 새하얀 피부. 완벽한 콧날. 베일 듯한 턱선. 아름다운 외모의 남자였다.

안 돼…….

줄리안은 속으로 탄식했다.

“아리스트 대공 전하이십니까?”

혹시 두 번째로 내린 사람이 아리스트 대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줄리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발 아니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두 번째 남자는 그의 뒤에서 내린 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공 전하이십니다.”

싫어어어어.

마초계 사내의 등장, 사내를 가운데 둔 귀부인들의 전쟁, 그리고 신사들의 사내를 제거하려는 음모! 스펙터큘러 서스펜스 치정 로맨스! 줄리안이 기대했던 가십들이 순식간에 망각의 강을 떠내려가고 있었다.

“줄리안 일리드라 하옵니다, 전하. 오늘 하루 전하의 시중을 들 시종들이옵니다.”

밤길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어질어질했지만 일단 인사는 제대로 했다. 줄리안은 정중하게 허리와 무릎을 굽힌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재빨리 눈을 깜빡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왕비의 옆에 있는 게 나을 뻔했다. 너무 미인이잖아! 귀부인들이 자신보다 미인인 남자와 불장난을 쳐보려고 할까? 아아아, 고이다 못해 썩어가고 있는 궁정 사교계에 신선한 바람 한 줄기가 들어온다 싶었더니 바람은 개뿔이. 똑같이 썩은 물 한 방울이 더해질 뿐이다.

게다가 너무 미인이다. 조금만 잘못 입혀도 화려해질 거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줄리안은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앞서 걸었다. 그 뒤를 조이가 바짝 따라붙고, 대공 일행이 따라왔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시종들이 위치했다. 가장 앞서 걸으며 줄리안은 흘끗 조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무 미인이잖아.

줄리안의 시선에 조이가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더니 들리지 않게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우린 완전 망했어요.

줄리안은 다시 앞으로 시선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재미가 없을 듯해서 속상하기도 했지만 당장은 일도 문제가 되었다. 금발, 청안, 흰 피부는 대단히 매력적인 액세서리다. 사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안 해도 사람을 화려하게 만든다. 그런데 거기에 미모가 더해지면 넝마를 입혀도 화려해질 테니 곤란했다. 왕도 미남이지만 이 미인에 댈 바는 아니었다. 왕이 문제가 아니라 왕비조차 묻힐 가능성이 있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줄리안은 머리를 긁적이고 싶은 것을 참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어 이 미인을 어떻게 하면 수수하게 만들지 생각해봐야 했다.

귀빈실에 들어서자마자 시종들은 재빨리 제 위치를 찾았다.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받고 다른 팀과 연락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거실로 나갔다. 귀빈실이라고 해도 웬만한 호텔의 스위트룸보다 사치스러운 시설을 가진 곳에서 줄리안이 대공을 돌아보았다.

“탈의 시중을 들겠습니다, 전하.”

줄리안의 말에 아리스트 대공이 눈썹을 찌푸렸다.

“옷이라면 내가 벗을 수 있어.”

아아. 줄리안은 금세 대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왕족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 탈의와 착의 시중을 드는 것을 불편해할 수 있었다. 사실 줄리안 자신도 왕족들의 옷을 벗기고 입히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자신이 남들 앞에서 그렇게 옷을 입고 벗어야 한다면 편한 마음으로 시중을 즐기긴 어려울 것이다.

“전하, 저희는 전하의 의전을 맡은 팀입니다. 전하의 탈의 시중을 들며 전하의 컨디션을 확인하고 그에 맞는 의복 등을 정하게 됩니다. 부디 불편하시더라도 따라주셨으면 합니다.”

줄리안의 말에 대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인이라 얼굴을 구기는 것조차 그림이 되었다. 줄리안은 다시 한 번 실망했다. 이런 얼굴이라니. 이만한 미인은 찾기 힘들지만 이만큼은 못해도 그냥 미인들은 사교계에 널리고 깔렸다. 독특한 타입이 올 줄 알았는데. 줄리안은 시무룩해지려는 얼굴에 억지로 사무용 미소를 걸었다.

“그렇다면야.”

다행히 대공은 얼굴값을 하는 타입은 아닌지 어깨를 으쓱할 뿐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줄리안은 대공의 앞에 섰다. 줄리안에 비해 대공은 훨씬 컸고 앞에 서서 셔츠의 단추를 풀다 보니 육체도 보기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외로 어깨며 가슴도 넓었고 탄력 있는 근육으로 빈틈없이 짜인 육체였다. 차라리 옷을 벗기면 좀 야수처럼 보일까. 줄리안은 옷을 벗기며 흘끗 대공의 얼굴을 보았다. 아냐, 무리야. 세숫대야가 저런데 밑이 뭐든 무슨 상관이야.

줄리안은 대공의 셔츠를 벗긴 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때 조이도 대공의 바지를 벗기고 있었다. 그리고 팬티를 벗겼다. 줄리안은 모든 기대를 버린 채 팬티가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때만 해도 다리에 근육이 있네, 너무 달라붙는 옷은 흉하겠어 따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이가 잠시 멈칫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도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으나 방 안에는 기묘하고 불편한 공기가 가득 깔렸다.

모든 시종의 머릿속에 ‘말ㅈㅈ’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시, 실례했습니다.”

말에 달려야 할 것이 사람의 다리 사이에 늘어져 있는 것을 코앞에서 본 조이가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다. 줄리안 또한 시선을 피했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대공의 엄청난 성기만이 가득했다. 대단한 위용이었다. 시중을 드느라, 그리고 남의 이런저런 사건을 훔쳐보느라 여러 사람의 것을 많이 접해본 줄리안조차 처음 보는 거대한 물건이었다.

저런 걸 몸에 넣으면 죽지, 죽어.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귀부인들은 대놓고 성기의 크기를 따지고는 했다. 시녀들에게서 귀동냥을 한 것에 의하면 귀부인들은 누구의 성기가 더 큰지, 어느 성기가 더 단단하고 뜨거운지, 누가 더 섹스를 잘하며, 누구는 테크닉은 별로지만 힘은 세다는 등, 온갖 성적인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한다고 했다. 단, 그녀들만의 살롱에서. 남자들과 있을 때는 전혀 티를 내지 않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몇 배 더한 것이 바로 귀부인이라는 여자들이라며 시녀들이 비웃은 적이 있었다.

그녀들은 좋아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름대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저런 그림 같은 미인이 다리 사이에 괴물 하나를 잠재우고 있다는 것은 귀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할지도 모른다.

그래, 저것이라면 궁정 사교계에 새로운 바람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기대가 되었다. 줄리안은 대공의 성기를 흘끔거렸다. 귀부인들이 저 성기에 미쳐서 서로를 견제하고 전쟁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자 흉흉한 저 물건이 사랑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신사들은 대공의 물건을 보며 또 얼마나 자격지심을 느낄 것인가. 정말 재밌을 것이다.

시무룩하던 마음에 활짝 꽃이 피었다. 줄리안은 환하게 웃으며 “욕실로 모시겠습니다”라고 쾌활하게 말했다.

아리스트 대공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스물아홉 살의 남자, 클로드 스토메어는 요즘 기분이 좋지 못했다. 수도로 들어올 때쯤에는 기분이 더욱 나빠졌고 궁으로 들어왔을 때는 거의 바닥을 긁고 있었다.

그의 기분이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났다.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의 인생은 전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전쟁이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총도 없고 검도 없고 피도 없는 인생이라니, 그는 그런 인생을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다. 그렇게 회색인 인생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이내믹하면서 피가 마구잡이로 튀는 인생이어야 하는데.

두 번째는 하나밖에 없는 형이라는 인간 때문이었다.

‘미안한데, 네 개선식은 안 될 것 같아.’

클로드는 대공 부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부모가 죽자 선왕이 클로드를 양자로 입적하였고, 그에게는 한 명의 형제가 생겼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왕 스카드 3세, 에드워드 스카드였다.

클로드는 선왕의 양자가 되었지만 종교적으로 입적한 것이었고 그는 여전히 스토메어 가문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곳의 수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클로드는 에드워드를 친형처럼 생각했다. 에드워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드워드는 유능했지만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동생에게 매일 화상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는 했다. 아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둘의 우애는 매우 깊었다.

클로드는 에드워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어떤 부분에 약한지, 어떻게 강한지, 그의 모든 부분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선식이 안 된다고 했을 때 확 기분이 상해서 물었다.

‘왜?’

개선식이라니,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의식을 누가 하고 싶어한단 말인가. 클로드는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는 것조차 싫어서 모든 매체와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공식 석상에 나서는 것도 거부했다. 그런데 개선식? 그딴 걸 내가 할 리 없잖아? 그러나 에드워드는 예전부터 전쟁이 최종 승전으로 끝나면 화려한 개선식을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또 약속했었다. 클로드가 싫다고 해도 꼭 개선식을 하자고, 네가 멀리서부터 꽃가루를 맞으며 오고 내가 궁에서 널 맞이해서 끌어안는 거야, 우린 그 누구보다 신의 있는 형제가 될 거야, 라고 속살거리고는 했다. 그건 클로드의 바람이 아니라 에드워드의 바람이었다. 클로드는 개선식 따위 원하지 않았지만 에드워드가 원한다면, 그가 정말로 간절히 소원한다면, 이 길고 긴 전쟁을 끝낸 동생의 충성을 만인 앞에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각오도 다지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 에드워드가 ‘네가 바라겠지만 난 해줄 수 없다. 미안’이라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으니 클로드의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상소가 올라왔.’

‘또 어떤 새끼야?’

클로드가 물었다.

‘아니, 새끼라니. 그는 장관이고, 그리고 그의 상소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도대체 넌 언제까지 그렇게 팔랑거릴래?’

클로드는 분통이 터져 물었다. 자신은 에드워드의 충실한 부하였다. 그는 에드워드를 위해서만 움직여왔고 그 누구도 자신을 에드워드에게서 떼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감히 그런 시도를 하는 자조차 없었다. 클로드는 완벽하게 에드워드의 신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달랐다. 그는 심심하면 클로드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의 의심을 아는 여러 인간들은 에드워드의 귀에 간사한 이야기들을 속삭였고 에드워드는 그때마다 클로드를 의심하고 시험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그 짓을 10년 동안 당해온 클로드는 이제 에드워드를 달래거나 그에게 자신의 충절을 확인시켜주는 것도 지겨웠다.

‘클로드, 나는 널 의심하는 게 아니야. 단지 상소가.’

‘개선식 따위는 나도 싫어. 내가 개선식을 한다면, 아니, 해준다면, 그건 오로지 널 위해서였을 거야, 에디. 수십억 명의 눈앞에서 네게 무릎을 꿇고 네 발등에 키스를 해주기 위해서였을 거다.’

‘클로드, 나는.’

‘하지만 됐어. 이제는 절대로 안 해줄 거니까 나중에 마음 바뀌었다고나 하지 마. 통신 종료.’

부하들이 잠시 클로드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통신 종료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클로드, 내 말 좀 들어봐, 클로.’

틱, 소리와 함께 화면이 꺼졌다.

클로드는 함장석에 앉아 혀를 찼다. 그는 도무지 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약한,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듯한 왕. 그러나 그 어떤 검보다도 날카롭고 예리한 인간. 그러면서도 늘 희미한 바람에도 휘청거린다.

어쨌거나 수도로 가긴 가야겠지.

어제도 어머니인 대비 전하께서는 클로드에게 화상 전화를 걸어 언제 돌아올 거냐고 눈물 섞인 얼굴로 물으셨다. 아마 그가 수도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전화를 해올 게 틀림없었다. 가족은 단둘, 어머니와 형. 둘 다 혈육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나마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실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돌아간다’는 표현조차 잘못된 것이었다. 클로드는 그곳의 무엇도 그립지 않았고 그는 단 한 번도 그곳에 소속된 적이 없었다.

수도로 오는 동안 뭔가 일이 하나라도 잘못되면 지체 없이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모든 것이 이곳으로 오라는 듯이 움직였다.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을 타고 비행기는 마치 깃털이 내려앉듯 부드럽게 착륙했고 왕궁으로 오는 내내 신호에도 거의 걸리지 않았다.

대비는 언젠가부터 계속 가정을 꾸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드님이 전쟁터에서 결혼도 못 한 채 나라를 위해 복무하고 있는데 이 어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마음에 짐이 더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딱히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외로웠던 적도 없다. 가끔은 누군가의 품이 그리웠고 또 가끔은 좀 더 안정된 삶이나 확고한 장소를 가지고 있으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의미 없이 사라지고는 했었다.

이번에도 대비는 자신의 혼처를 알아보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클로드는 대비가 결혼하라는 대로 적당히 결혼해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수도로 오는 내내 놀라울 정도로 운이 좋아서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나, 라는 쓸데없는 생각조차 들었었다.

그리고 현재.

성기에 자꾸 눈길이 닿고 있다.

클로드는 욕조에 앉은 채 자신의 성기를 흘끔거리는 남자를 탐탁잖게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생긋 웃으며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전하”라고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필요한 건 없고 궁금한 건 있어.”

“무엇입니까?”

넌 왜 자꾸 남의 거시기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거지?

클로드는 잠시 남자를 훑어보았다. 키가 적당하고 체구도 적당한 남자였다. 다갈색 머리카락에 고동색 눈동자. 아마 조상 중에 동양인이 섞여 있지 않을까 싶은, 적당히 흐릿한 이목구비. 그러나 이목구비의 구성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이 인상적이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 눈을 빗대어 밤하늘의 별이라고 많이들 표현하지만 관용구라고 여겼는데 이 남자의 눈은 정말이지 반짝거렸다.

“이름이 줄리안 일리드랬나?”

“예, 전하.”

“우리 만난 적이 있던가?”

클로드는 일단 성기에 대한 시선은 무시하고 물었다.

줄리안 일리드, 줄리안 일리드.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본 것 같기도 한 이름이었다. 분명한 것은 언젠가 이 이름이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수도에 있는 왕궁의 시종과 자신이 무엇 때문에 만났을까? 이 시종이 전쟁터에 무슨 용건으로 왔었을까? 그가 전쟁터에 온 게 아니라면 클로드는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없습니다, 전하.”

줄리안이 단호히 대답했다.

“확신하나?”

“예, 전하. 전하처럼 아름다운 분을 뵈었더라면 제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지요.”

줄리안의 시선이 또 성기에 닿았다. 클로드는 줄리안이 말하는 아름다운 분이라는 게 클로드 자신인지 아니면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처져 있는 검붉은 것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전쟁터에 온 적이 있나?”

“저는 수도에서 나가본 적도 없습니다, 전하.”

“그럼 만난 적이 없는 건 확실하군.”

“예, 전하.”

만난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이름이 익숙하지…….

클로드가 머릿속을 뒤적이는 사이 그의 목욕은 끝이 났다. 시종들이 이끄는 대로 일어나자 그들이 클로드의 온몸을 닦았다. 부드러운 속옷을 입혀주고 몇 개의 연미복을 그의 몸에 대보며 고심했다. 특히 줄리안이 그랬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몸에 옷을 계속 번갈아 대보더니 어디선가 온 연락을 받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그는 클로드를 향해 싱긋 웃었다.

“전하, 괜찮으시다면 이번에는 군복을 착의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뭐든 상관없다.”

“예, 전하. 지금 정복이 오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머리를 손질해드릴 테니 이쪽으로 앉아주시겠습니까?”

시종들은 싹싹하면서도 정중했다. 클로드는 의자에 앉아 그들의 손길을 즐겼다. 사무적이라 더 기분 좋은 손길들이었다.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남이 자신을 씻겨준 적이 없었다. 클로드는 내내 그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잠시 시종들을 물리고 부관을 불렀다.

“줄리안 일리드라는 이름, 기억나는 바가 있나?”

속삭여 묻는 말에 부관인 제이미 블레서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지 않아도 묘하게 익숙한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이미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확실히 기억 속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클로드가 눈짓하자 부관이 물러났고 시종들이 다시 다가왔다. 클로드는 그들의 손에 자신을 내맡긴 채로 눈을 가늘게 뜨고 줄리안 일리드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줄리안 일리드.

어디선가 분명 접한 이름인데. 남자의 성기를 보며 군침을 삼키는 저 시종을 도대체 어디서 보았을까.

성범죄자 명단에서 이름이라도 읽었나? 성범죄자가 시종이 되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런 게 아니고서는 저 남자를 도대체 어디서 만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줄리안 일리드는 아직도 그의 성기 부분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자꾸 자신의 것을 탐한다.

먹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먹고 싶다? 스스로 한 생각에 소름이 끼친 클로드가 한쪽 눈을 찡그렸을 때 착의 시중이 시작되었다.

평생 곁에 두었던 정복이었다. 그 옷을 스스로가 아닌 남의 손에 의해 입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클로드는 순순히 옷을 입으며 얼굴을 구기듯이 웃었다. 옷에 몸이 가려지자 드디어 줄리안 일리드가 자신의 몸을 흘끔거리는 짓을 멈췄다. 그게 마치 성추행당하다 겨우 안전지대로 도망쳐 온 아가씨 같은 기분을 들게 해서, ……잠깐.

나 지금 성추행당한 거야?

클로드는 그제야 자신이 성추행을 당하고 있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이게 성추행인가? 그리고 자신은 지금 성추행을 당한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전쟁터에서 살아온 전쟁 기계였다. 사람들은 그를 전쟁 기계, 흡혈귀, 기타 등등이라고 불렀다. 그런 자신이, 지금, 성추행을…….

설마.

클로드는 그제야 자신이 성범죄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콩만 한 새끼가 날 지금 성추행한 거야?! 클로드가 성깔대로 버럭 내지르려는 순간 줄리안 일리드가 그의 눈앞에 확 다가왔다.

“전하, 옷을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당황해서 입을 다물게 되다니 드문 일이었다. 클로드는 내키지 않는 시선으로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눈썹이 만들어낸 희미한 그늘이 보였다.

“궁정 연회는 보통의 연회와 많이 다른가?”

클로드의 질문에 줄리안이 싱긋 미소 지었다.

“다소 까다로운 예법들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기본은 비슷합니다.”

“다소 까다로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오늘은 제가 옆에서 보좌해드릴 예정입니다.”

성추행범과 파티 내내 같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줄리안이 뒤로 물러섰다.

“다 되었습니다, 전하. 가실까요.”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는 또 빈정거릴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지. 그는 혀를 차며 줄리안의 뒤를 따랐다.

줄리안 일리드, 줄리안 일리드. 저 성추행범의 이름을 도대체 어디서 접했지? 클로드가 기억을 뒤지는 사이 줄리안이 걸음을 멈췄고 클로드 또한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문 앞이었다. 청동문의 양쪽으로 시종들이 서 있었다. 줄리안이 고개를 돌려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파티장이 아니라 재판정이라도 되는 듯 엄숙한 목소리였다. 클로드는 실소했다.

“마음대로.”

이게 뭐라고.

그가 비웃는 사이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환한 빛이 눈을 찔렀다.

홀에 들어선 지 몇 분 만에 클로드는 딱딱한 얼굴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게 뭐하자는 수작들이지? 이해할 수 없는 추파들을 던지고 있었다. 남편인지 파트너인지 모를 남자의 팔짱을 낀 여인들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요염하게 미소 짓거나 눈을 찡긋해 윙크를 보내왔다. 여인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들조차도 구미가 당긴다는 듯 대놓고 눈으로 그를 탐하거나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곧 클로드의 앞에 긴 줄이 생겼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자 하는 귀족들의 줄이었다.

이 발정난 놈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 궁정 연회?

하. 클로드는 옆에서 “손타 후작 부처입니다”라고 속삭이는 줄리안 일리드의 머리통을 노려보았다. 시종이 변태에 성추행범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처음 뵙겠사와요, 전하.”

후작부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손을 들어 손등을 내미는 것을 보고 클로드는 하 하고 한 번 더 웃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타고나길 손톱만 하게 타고난 인내심이었다. 단숨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클로드는 더 거칠 것 없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때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국왕 전하, 왕비 전하이십니다!”

그리고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모두가 동시에 예를 갖췄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우아한 인사를 하는 가운데 왕은 클로드를 발견한 듯했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빠른 속도로 클로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클로드는 국가 원수인 왕에게 절도 있는 경례를 했다.

“우리의 왕께 승리를.”

클로드의 구호에 에드워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으며 경례를 풀지 않는 클로드를 끌어안았다. 클로드에 비해 10cm는 작은 왕이었기에 그가 클로드를 안았다기보다는 클로드의 품에 안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형제는 어느 쪽도 모양새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클로드,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에드워드의 감격한 목소리와 함께 모든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정의 왕이 활짝 웃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귀족들은 왕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대공을 다시 한 번 흘끔거렸다.

어지간히 우애가 좋으시나 보네…….

대공의 옆에 서서 그를 보필하는 임무를 맡은 줄리안도 의아한 얼굴을 했다. 원래 왕의 성격이 어떤지 줄리안은 시종으로서 잘 알고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렇게 환하게 웃는 왕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하긴 둘은 사이가 좋다 했다. 그러나 그 좋은 관계는 모두 화상으로 쌓은 것으로 실제로는 만난 적이 없다 하니 얼마나 반가울까. 여전히 경례를 하고 있는 절도 있는 모습의 아름다운 군인. 그리고 그를 끌어안은 세련된 연미복 차림의 왕. 정말 한 폭의 그림이었다. 줄리안은 동화책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아 호사스러운 만찬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황홀한 한숨을 삼켰다.

“……야.”

그러나 줄리안의 생각과는 달리 클로드는 지금 처음 만난 형에게 상당히 화가 난 상태였다. 이를 빠득 갈며 ‘야’라고 속삭여 부르는 클로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에드워드는 그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화났어?”

“내가, 지금, 화를, 안 내게, 생겼어?”

이를 악문 가운데 잇새로 한 단어씩 뱉고 있는 클로드를 보며 에드워드는 클로드를 안은 채 그의 등을 도닥거렸다.

“진짜 귀 팔랑거린 거 아니야. 그냥 상소가 좀.”

“닥쳐.”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해.

클로드가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난처해졌다. 그는 이 솔직한 동생을 좋아했지만 지금 이 자리는 동생이 이래서는 안 될 곳이었다.

아, 물론 내가 잘못하긴 했지.

에드워드도 인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귀여운 동생이라 하여도 그 동생이 친혈육이 아닌데다 군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라는 말을 내내 듣다 보니 어느 순간 살짝 혹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군의 지지만으로도 감당이 어려운데 온 국민의 지지까지 더해주실 셈이냐, 날개를 달아주지 마시라, 개선식은 안 된다, 그런 말들에 마음이 흔들렸다. 알긴 안다. 클로드가 정말 자신을 배신하려 했으면 벌써 배신했을 것이다. 에드워드의 강력한 왕권은 그 자신의 능력과 함께 그의 뒤에서 붉은 눈을 한 거품 문 도사견 클로드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클로드는 충직하다. 모르지 않지만.

그러나 또한 에드워드는 안다. 저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클로드는 양날의 검. 잘 쓰면 그를 지키나 잘못 쓰면 그를 해할 것이다. 군이 클로드에게 바치는 충성은 무시무시하고 클로드에게 일반 국민의 지지까지 더해줄 수는 없었다. 클로드의 아름다운 미모, 강력한 전과(戰果), 그 모든 것이 지금은 에드워드에게 보호막이 되어도 클로드가 변심하는 즉시 가장 위협적인 무기가 될 테니까.

“사랑해, 내 동생. 내가 널 의심하는 게 아니야. 정말이야. 난 너를 믿고 있어. 내게는 어머니와 너밖에 없어. 너도 알잖아.”

에드워드가 속삭였다. 갈라진 목소리를 들은 클로드는 칫, 혀를 찼다.

“됐어.”

클로드의 말에 에드워드는 그제야 클로드를 놓아주었다.

“쉬어도 좋다, 장군.”

에드워드의 말에 클로드가 그제야 편히 손을 내렸다. 그러자 왕비가 왕에게 요염하게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전하, 춤을 시작하셔야지요.”

“아아, 그래야지.”

왕과 왕비는 선남선녀로 유명했다. 그들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우아하게 댄스 플로어로 움직였다. 그 뒷모습을 보며 줄리안은 티 내지 않고 속으로 웃었다.

왕비의 드레스는 재작년 신년 연회에서 입었던 것이었다. 새파란 사파이어가 장식되어 있는 눈꽃처럼 아름다운 드레스. 저 드레스를 입은 왕비의 모습은 온갖 잡지에 장식되었다. 왕비의 콧대를 한없이 높여주었던 그 드레스.

아마 저 드레스일 것 같긴 했는데 정말 저 드레스를 입으셨군.

왕비의 드레스에 맞춰 왕의 연미복도 바뀌었다. 검푸른 연미복은 왕비의 드레스와 잘 어울렸다. 정말 멀리서만 보면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커플인데.

왕과 왕비의 춤이 한 곡 끝나자 다음에는 귀족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파트너와 춤을 추는 것이 의무였다. 유부남과 유부녀, 약혼자와 약혼녀, 공인된 커플들이 적당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고상한 태도로 춤추는 것을 줄리안은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나가야 하지?”

줄리안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줄리안의 얼굴에 쓰인 질문을 읽은 클로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변태는 귀도 나쁜가?

“나가고 싶다고.”

“전하, 아직 춤도 한 곡 안 추셨잖습니까…….”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가 그래서 뭐, 라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줄리안이 난처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작게 속삭였다.

“예법에 어긋납니다.”

시발.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줄리안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궁정 연회에서 욕하는 사람도 처음 보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클로드의 욕설이었다. 같은 욕이어도 박력이 달랐다. 마치 평생을 뒷골목에서 살아온 시정잡배가 씹다 내뱉은 껌 같은 욕이었다.

“전하, 욕하시면 안 됩니다.”

“안 돼?”

“예, 절대로 안 됩니다. 궁에서 욕하시면 안 됩니다.”

줄리안이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클로드는 ‘시발’ 한 마디에 당황하는 줄리안을 외계인 보듯 바라보았다. 쯧. 클로드는 혀를 찼다. 그는 우아한 행동거지를 흉내 낼 줄 알았는데 그것은 오로지 가정교사의 힘이었다. 그러나 흉내만 낼 뿐, 그는 우아함과는 태어날 때부터 담 쌓은 남자였다.

“안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전하.”

“그러니 너도 내가 나갈 수 있게 좀 해봐.”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아 하고 속삭였다.

“혹시 다리가 아프십니까? 조금만 참으시면 곧 식사.”

“난 군인이야. 내가 이따위 걸로 다리가 아프겠어?”

“그럼 왜……?”

“귀찮아.”

“어떤 부분이 귀찮으신지 알려주시면 제가 최대한.”

“우리 형.”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은 침묵했다. 클로드의 형이란 왕을 말하는데, 왕을 줄리안이 어떻게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나가시는 건 안 되는데요. 아직 대비 전하께서 오지 않으셨고, 또……. 줄리안이 클로드를 달래서 홀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전하.”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은 왕비였다. 왕은 다른 귀족들의 인사를 받는 중이었고 사실 그 인사는 왕비도 같이 받아야 하는데 그녀는 귀족들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줄리안은 왕비를 향해 예를 갖추며 왕비가 왜 이쪽으로 걸어왔는지 떠올려보았다. 첫째, 귀족들과 인사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재작년 드레스를 또 입고 귀부인들을 마주하는 것이 어지간히 자존심을 상하게 했으리라. 둘째, 이 아름다운 대공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오늘은 대공의 사교계 데뷔 날이니 대공이 사교계에 들어와 가장 처음 춤을 춘 상대가 되고 싶을 것이다.

“어머, 줄리안. 오늘은 전하의 시중을 드는 건가?”

왕비가 줄리안에게 아는 척을 했다.

“예, 비전하.”

“좋은 시종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공 전하.”

왕비가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좋은 시종? 클로드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왕비의 시선이 의아한 빛을 띠었지만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곧 시종에게서 관심을 떼고 클로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왕비 이샤입니다.”

꽃처럼 아름답고 젊은 왕비였지만 클로드는 심드렁했다.

“특이한 이름이시군요.”

“외조모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그분 나라의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좋아해요. 평범한 건 질색이니까요.”

왕비가 손등을 내밀었다.

클로드는 잠시 그 손등을 내려다보다 손을 잡아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그녀는 하나밖에 없는 형의 배우자, 즉 형수였다. 그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왕비가 덫을 놓는 사냥꾼처럼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두 번째 춤곡이네요.”

왕비가 손등에 키스를 받자 악단은 능란하게 춤곡을 연주했다. 클로드로 하여금 춤을 신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테크닉이었다.

“한 곡, 후, 추시겠습니까?”

후 하는 한숨 소리가 중간에 더해지기는 했지만 댄스 신청을 받았다. 왕비는 보드라운 손을 맡긴 채 미소 지었다.

“물론이지요, 전하. 제가 그 청을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네가 청해서 내가 춤을 춰주는 거다, 왕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생긴 건 꽃과 같으나 하는 짓은 뱀보다 더한 형수를 내려다보았다. 아, 관두자, 관둬. 그는 궁에 들어오기 전 ‘절대로 성질대로 행동하지 마세요’라는 잔소리를 수차 들었었다. 지금도 부관은 홀 밖에서 그가 성질대로 행동할까 봐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빨리 끝내고 가자. 클로드는 그 생각만으로 움직였다.

어머.

왕비가 눈을 크게 떴다. 그저 아름다운 미청년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시동생의 팔은 단단했다. 허리를 안은 팔에 기대어 있자니 순식간에 댄스 플로어였다. 춤곡이 다시 시작되었다.

줄리안은 왕비와 대공의 춤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이것도 그림이야, 그림. 그는 잠시 그 그림을 만끽하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신년 연회에 있으면 인간관계의 변화가 확 눈에 띄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애 관계의 변화였다. 궁정 사교계에서 결혼은 어디까지나 파트너의 의미이고 연애는 정글과 같았다. 유치원생들의 연애보다 더 즉물적이고 격렬했다. 근친이 아니라면 그 외의 장애는 없는 곳이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어떤 형태의 연애든 간에 그들은 온 열정을 불태우며 연애했다.

백작부인과 남작은 끝난 듯하고, 남작의 새 여자친구는 후작부인이고, 그리고 후작부인의 전 남친은…… 오, 약혼을 했나 보군. 그리고 저기에서 서로 다정하게 웃고 있는 백작부부가 보였다. 백작은 남들 몰래 백작부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때렸고 백작부인은 무기라고 할 수 있는 하이힐로 백작의 발등을 찍어버렸다. 백작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둘은 최근에 백작의 무리한 사업 확장 때문에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발등이 부러졌을 수도 있겠는데?

줄리안은 그쪽을 보지 않는 척하며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이지 재밌는 곳이었다. 어쩌면 다들 이렇게 제 감정을 밑바닥까지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을까. 어떤 책을 읽어도 이렇게 실감나는 이야기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왕비와 대공이 한 곡을 다 추고 플로어에서 나오고 있었다. 대공이 왕비를 에스코트 해주고 있었는데 왕비는 풍만한 가슴을 대공의 팔에 은근하게 문질러댔다.

의외로 미청년 타입도 인기가 있나 보네.

물론 대공은 놀라울 정도의 미남이긴 하지만 그래도 타입으로 말하자면 좀 흔하지 않은가. 역시 마초 사나이가 희귀성이 있어 더 인기 있었을 것 같은데.

줄리안의 앞까지 온 대공이 남들이 볼 수 없는 사각 지대에서 왕비의 팔을 야멸치게 떼어냈다. 줄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대공은 정말이지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왕비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고 왕비는 자존심이 상한 듯 예쁜 입술을 깨물었다.

둘이 싸울 건가?

줄리안은 무심한 척 둘을 번갈아 보았다. 왕비는 백합 같은 청초한 자태의 소유자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싸움닭이다. 시동생이고 뭐고 왕비는 봐주지 않을 것이다. 왕도 상당한 싸움꾼이지만 왕비를 상대로는 버거워하는 입장이었다. 그 상태에서 전쟁터 도살자가 사교계 여왕벌과 파이트? 완전 재밌겠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런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왕비와 대공은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예법을 공부하셔야겠네요. 제가 전하의 예법 선생을 수배해보지요.”

왕비가 독을 품은 미소를 지으며 선방을 날렸다.

“됐습니다.”

“제가 안 됩니다, 전하. 하나밖에 없는 대공 전하께서 예법에 능숙하지 못하시다면 이 형수의 낯이 서질 않으니까요.”

한 마디 한 마디에 악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러자 대공이 픽 웃었다.

“이 동네의 예법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희 동네의 예법은 형수의 발정을 시동생이 책임질 필요는 없어서요.”

발정…….

줄리안은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발정, 발정이라니. 와, 진짜 세다. 왕비를 상대로 발정이라고 말했어.

왕비도 처음 당해보는 공격에 넋이 나간 듯했다. 줄리안은 멍한 얼굴을 한 왕비와 주변을 보며 “비전하”라고 작게 속삭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왕비가 활짝 웃었다. 여기서 얼굴을 굳히기라도 하면 대공에게 거절당했다는 것이 들통 나기 때문이었다.

“촌사람답게 어법이 엉망이시군요.”

왕비의 말에 후, 대공이 한숨을 쉬었다.

“도시 사람은 어법은 어떤지 몰라도 후안무치하군요. 도시에는 세련된 자위 기구도 많을 텐데 그쪽과 좀 노시겠습니까? 솔직히 못생긴 얼굴 보면서 말 섞는 것도 스트레스라서요.”

왕비의 얼굴이 모욕감에 확 붉어졌다. 줄리안은 슬쩍 왕비를 다른 사람의 시야에서 가리면서 “비전하, 잠시 쉬시겠습니까?”라고 속삭여 물었다. 그러자 왕비는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화가 난 듯 짧게 숨을 몰아쉬더니 곧 흥, 코웃음을 치며 자리를 떠났다.

줄리안은 왕비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을 벌렸다. 전쟁터에서는 총과 대포로 싸우는 게 아니라 세 치 혀로 싸우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는데 기가 확 빨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줄리안은 이 기분을 사랑했다. 아, 어쩜 이렇게 짜릿하냐. 줄리안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대공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하,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줄리안이 물었을 때 대공이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쑥 다가와서 줄리안은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대공의 얼굴이 줄리안의 가까이에서 멈췄다. 숨결이 공유될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민 대공 때문에 그의 얼굴도,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름다운 청회색 눈동자뿐이었다. 북극의 하늘 같은 시린 푸른색이었다.

수많은 동화책에서 나오던 왕자들은 아마 이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맑고 서늘한 색.

줄리안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뭐가 그렇게 재밌지?”

“예?”

“눈이 반짝거리고 있는데.”

줄리안의 눈이 도로록 움직였다. 별처럼 보이기도 하고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하는 눈. 클로드는 그 눈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도로록, 도로록 하고.

“제 눈이 원래 좀 잘 반짝거립니다, 전하.”

줄리안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장난기 어린 대꾸였지만 대공은 웃지 않았다. 그는 마치 키스를 할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줄리안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긴장한 탓에 또 눈이 고장 난 것처럼 깜빡거리려 했다. 줄리안은 눈에 힘을 주었다.

“이제 눈이 얼었어.”

대공이 허리를 폈다. 순식간에 그가 멀어졌고 줄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다행히도 파들거리는 눈꺼풀도 진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형이 오고 있고.”

형?

줄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형이라고? 물론 대공에게는 형이 한 명 있다. 국왕 전하. 그러나 그는 대공이 형이라고 부를 상대가 아니었다. 전하, 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그는 국왕이니까. 만약 대공의 직위가 대공이 아니라 국왕이었다면, 그리고 그의 형이 대공이었다면, 그의 형도 동생에게 전하라고 불렀을 것이다.

“곤란하게 되었군. 이래서 나가고 싶었는데.”

대공이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곤란할 만한 일은 없었는데. 줄리안이 걱정스러워져 물었다. 윗사람이 곤란하면 아랫사람은 아주 곤란해지는 것이 이 업계의 생리, 줄리안의 질문에 클로드가 “형수가 형한테 이를 테니까 말이야”라고 대답했다.

줄리안은 멍하니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남자였다. 마치 북유럽 신화에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남자. 걸어 다니는 그림이 평범한 사람처럼 말하는 게 의외로웠다.

괜찮으실 겁니다, 라고 말하려던 줄리안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괜찮다니? 대공은 왕비를 모욕했다. 그러나 왕은 왕비의 모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시종인 자신이 국왕 부처의 불화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데도 왠지 모르게 그렇게 말할 뻔했다.

큰일 날 뻔했다.

줄리안은 자신답지 않은 실수에 당황했다. 자신이 왜 이렇게 순진하게 입을 놀리려 했을까. 잠시 고민한 줄리안은 왕족에 전쟁 영웅인, 한마디로 우러러 보려면 목이 꺾일 것같이 높은 사람인 대공이 그의 직위답지 않게 너무 솔직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상대가 지나치게 솔직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의 빗장을 내려놓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안 될 일이다.

클로드, 라고 대공을 부르며 다가온 왕이 줄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리드 군, 클로드를 도와주는 일을 맡아줘서 고맙네. 자네가 가장 잘해줄 것 같아 내가 직접 시종장에게 지시했었네.”

줄리안은 “과찬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며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하지만 속으로는 어쩐지 하고 중얼거렸다.

왕비는 줄리안을 총애했다. 왕비와 줄리안의 밀회설은 한두 번 돈 게 아니다. 줄리안이 그렇지 않다는 걸 시종장은 잘 알고 있었지만―그는 도리어 줄리안이 성적으로 불능일지도 모른다 여겼다. 그것은 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줄리안의 부친, 즉 크리스토퍼 일리드의 걱정이었다. 친구인 그는 크리스토퍼의 걱정을 잘 알고 있었다―남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시종장은 왕비와 줄리안을 떼어놓으려 애써왔었다.

그러나 왕비는 줄리안을 좋아해서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줄리안 또한 왕비를 좋아했다. 이 궁정 사교계에서 왕비는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였다. 줄리안은 왕비의 자존심을 잘 세워주고 그녀를 기쁘게 해주면서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그런 태도는 그가 왕비의 정부라는 소문에 박차를 가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그저 왕비의 옆에서 온갖 스캔들을 주워 담을 수만 있으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왕비와 줄리안은 참 잘 맞았고, 별일이 없는 이상 줄리안은 늘 왕비의 시중을 들었다. 왕비에게는 세 팀의 시녀들과 한 팀의 시종들이 붙었는데 시종은 거의 줄리안의 팀이 전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오늘 줄리안이 대공을 보필하게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왕비가 이런 날 줄리안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왕명 때문이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왕명이 아니라면 왕비는 자신의 드레스가 망가진 오늘 같은 날, 줄리안을 놓았을 턱이 없었다. 줄리안은 궁정에서 왕비를 잘 달래기로 소문이 난 시종이었으니까.

“참 귀엽지? 일리드 백작가의 삼남이야. 막내지. 시종이나 할 사람은 아닌데 이상하게 시종 일을 좋아해서 벌써…… 몇 년째였지, 줄리안?”

마치 자신을 잘 안다는 듯 말하는 왕의 모습에 줄리안은 웃음을 머금었다.

“7년째입니다.”

“7년이나 시종을 하는 별난 친구지. 줄리안, 자리 좀 비켜주겠나?”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줄리안은 누구에게라고 말할 것 없이 고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에드워드는 물러나는 줄리안을 흘끗 눈으로 가리켰다. 에드워드의 눈짓에 클로드도 곁눈질로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에드워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상냥했다. 자신의 부인인 왕비를 보는 눈보다 몇 배 더 포근한 시선이었다.

둘이 불륜 관계인가?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가 그렇게나 사교계 데뷔를 부르짖으셔서 오긴 왔는데 이런 난장판에서 결혼을 하라니, 여기엔 서로에게 정조를 지킬 것을 선언할 만한 사람이 있긴 한 것인가. 한 시간도 채 안 되었는데 벌써 질릴 지경이었다.

“귀엽지?”

에드워드가 물었다.

“뭐가?”

클로드는 팔짱을 끼려다 한쪽 눈을 찌푸리며 참았다. 눈앞의 남자는 그의 형이면서 왕이었고 그는 남자의 신하였다. 눈에 띄는 짓은 지양하고 싶었다.

“일리드 군 말이야. 눈이 초롱초롱한 게 귀엽지 않아?”

“확실히 눈이 인상적이긴 하더군. 같이 자는 사이야?”

“무슨 소리야.”

에드워드가 코웃음을 쳤다. 클로드가 아니냐는 듯 미간을 좁히자 에드워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클로드의 단단한 팔을 툭 쳤다.

“내가 어떻게 시종과 자겠어.”

“왕비에게보다 다정한 눈을 하고 있으면 자는 사이로밖에 안 보이니까 말이야.”

“난 진흙에 핀 꽃에도 이샤에게보단 다정한 눈을 할 거야, 동생아.”

아아, 사이가 좋지 않군.

그제야 클로드는 왜 왕비가 자신에게 그렇게 요염을 떨어댔는지, 그리고 왕비가 고자질을 하면 곤란하다는 말에 줄리안이 왜 입을 달싹거렸는지 알 수 있었다. 클로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에드워드가 웃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클로드. 어차피 상류층 결혼 생활이라는 게 다 이런 거니까.”

“…….”

“너도 이렇게 될 거야, 곧. 운명이거든.”

에드워드의 차가운 목소리에 클로드가 피식 웃었다.

“두고 보도록 하지, 형님.”

“너만은 이렇게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해. 이렇게밖에 될 수 없어. 결국은.”

에드워드의 자조적인 어조에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으니까 말이야.”

“어머니께서는 네 결혼을 추진하고 계시는데?”

“나도 어머니를 몹시 존중하지만, 내 결혼은 그와는 별도야.”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을 거야. 네가 평생 전쟁터에 있어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던 분인데. 넌 아마 올해 안에 결혼하게 될 거야.”

“난 내 아내가 바람을 피우면 아내를 때리고 그 상대는 죽여버릴 거야. 맨손으로. 그래도 나한테 결혼을 강요하실까?”

“농담이지?”

“그렇게 보여?”

클로드가 고개를 조금 옆으로 기울였다. 그의 청회색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것에 에드워드는 무심코 뒤로 물러날 뻔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는 대신 미소를 걸었다. 왕으로서, 그리고 같은 남자로서 클로드는 종종 에드워드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그 부정적인 감정만큼이나 에드워드는 이 동생이 좋았다. 클로드의 청회색 눈동자는 깨끗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숨기지 않았다.

“네 결혼은 좀 생각해보자, 클로드. 그나저나 일리드 군 귀엽지 않아?”

“진심으로 대답해주길 바란다면, 전혀 귀엽지 않아. 예쁜 눈을 가지고 있더군. 하지만 눈깔을 너무 함부로 내돌리던데.”

“원래 시종들은 곁눈질을 할 수밖에 없어. 그게 그들의 일인걸.”

“그래도 저 남자는 좀 조심하는 게 좋겠던데.”

한 번만 더 내 성기를 보며 군침을 삼킨다면 그 예쁜 눈알을 파내 터뜨려버릴 테니까. 클로드는 속으로만 덧붙였다. 에드워드는 클로드가 대체 왜 줄리안 일리드에게 이토록 부정적인지 알 수가 없어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옆에 있으면 눈이 더 초롱초롱해지긴 하지. 내 팬이거든.”

“팬?”

“귀엽게도 저 시종은 좋아하고 있어.”

에드워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클로드가 “너를?” 하고 되물었다.

“응. 그래서 내가 이샤와 싸우면 더욱 눈이 예뻐지지. 기대라도 하는 건지, 귀엽기 짝이 없어. 아, 물론 그 마음에 보답해줄 수는 없어서 그 점이 안타깝지만 말이지.”

그래……?

클로드는 다시 시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딘가 낯이 익은 이름의 소유자인 시종은 다른 곳을 흘끔, 곁눈질하고 있었다. 눈이 반짝반짝, 물 먹은 것처럼 빛났다. 클로드도 보지 않는 척 시종이 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웬 남자 둘이서 소곤거리고 있었다. 남들 몰래 하는 것 같긴 했지만 둘의 손이 서로의 육체의 중요 부위를 스치고 있었다.

클로드는 다시 시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그가 보고 눈을 빛낸 것은 남자 둘이 서로를 지분거리는 광경이었다.

“그래? 쟤가 널 좋아한다고?”

아무리 봐도 너한테는 관심 쪼가리도 없는 것 같은데.

“이샤와 있을 때마다 눈을 피하고, 슬금슬금 보지. 그리고 그녀와 싸우면 눈이 반짝거려. 요즘 고민이야, 고백이라도 해오면 어떻게 거절하나.”

“싫다고 하면 되잖아.”

별게 다 고민이라고 클로드가 코웃음 치자 그래도 어떻게 그러냐며 에드워드가 눈을 휘었다.

“시종이 널 좋아하는 게 그렇게나 좋아?”

클로드가 물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상대를 좋아한다면 모를까,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건가. 쓸데없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일방적인 애정을 받아온 클로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당연히 기쁘지. 너도 기쁘지 않겠어?”

“전혀.”

사랑을 받아봤자 자신이 좋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사랑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람은 스토커가 되거나 안티가 되거나 혹은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잃은 어색한 사이가 된다. 좋은 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바로 일방적 사랑이다.

“……전혀?”

“어, 전혀. 난 싫어.”

“클로드, 넌 진짜 인간적인 감정이 부족해.”

에드워드의 말에 클로드는 한쪽 입술을 올렸다.

“내 몫까지 네가 인간적이잖아.”

언제나 의심하고 언제나 조심하고. 가진 걸 잃을까 봐 벌벌 떨면서 가시를 세우는 네가.

클로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에드워드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클로드는 그가 무슨 변명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기다렸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네가 그럼 그렇지. 클로드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클로드” 하고 부르며 팔을 잡으려 했다.

“대비 전하이십니다!”

갑자기 음악이 멈추더니 시종이 외쳤다. 대비 클로디아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친아들인 에드워드에게 시선을 주었고 그 옆에 서 있는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에드워드가 클로드를 툭 쳐서 앞으로 밀었다. 클로드는 걸음을 내디뎠다. 모두가 길을 비켰다. 사람의 바다가 둘로 나뉘어 만들어진 길을 클로드가 성큼성큼 걸었다.

대공이 걷는 것을 줄리안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림이 되는 남자였다. 단정하게 자른 레몬 색 머리칼이 미풍에 흔들리는 풀 같았다. 대공은 허리를 곧게 펴고 절도 있게 걸었다. 그 끝에는 곱게 나이 든 대비가 여왕처럼 서 있었다. 대공은 대비에게 다가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대비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녀는 양손을 뻗어 자신의 아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어서 오세요, 내 아드님.”

샹들리에가 반짝거렸다. 홀은 온통 빛으로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은밀하게 손끝을 스치며 지나가고 발코니마다 커튼이 쳐졌다. 커튼이 닫힌 발코니에는 밀회를 즐기는 커플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어느 발코니에 어느 커플이 들어갔는지 눈짓으로, 그리고 무난하게 돌린 몇 마디 말로 확인하려 들었다. 파티의 중반, 의무감으로 참석한 사람들은 유령처럼 조용히 빠져나가고 본격적인 사교계 인사들의 사교가 펼쳐지고 있었다.

사교계의 본격적인 선수들만이 남은 자리, 신인 중의 신인인 클로드 스토메어, 아리스트 대공의 얼굴은 점차 차가워지고 있었다. 줄리안은 그의 안색을 살피며 “하사리크 백작입니다. 환경부 장관입니다”라고 속삭였다. 귀족들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대공을 대신해 그에게 상대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가운데 가면 갈수록 대공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실례.”

결국 대공은 못 참겠는지 인사 온 귀족들을 무시하고 걷기 시작했다. 무시당한 귀족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줄리안은 귀족에게 “전하께서 연회가 처음이시다 보니 심신에 벅차신 부분이 있으신 듯합니다. 각하께서는 부디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며 가볍게 묵례해 보이고 재빨리 대공의 뒤에 따라붙었다.

“전하,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시발, 더는 안 되겠어.”

여긴 도무지 못 있겠다며 대공이 성큼성큼 걸었다. 줄리안은 대공의 뒤를 조급하게 쫓아가며 주변을 흘끔거렸다. 왕과 왕비, 그리고 대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셋의 눈만 봐도 그들이 뭘 바라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왕과 대비는 클로드가 홀에 있길 바랐고 왕비는 당장 죽어버리라고 저주라도 내리는 것 같았다.

뭐, 실제로 저주는 못 내리시겠지만…….

이샤도 왕립 아카데미 출신이긴 하지만 마법학부는 아니었다. 마법학부는 왕립 아카데미에서도 소수만 들어올 수 있는 학과였다. 딱히 인원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 자체가 타고난 재능을 필요로 하는 학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법학부 출신은 주요 자리에 앉아 있는 선배들을 전부 꿰고 있었다. 줄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이 빌어먹을 곳에서 좀 나가자고.”

대공이 으르렁거렸다.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을 것 같은 태도라서 줄리안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대비 전하께서.”

“하, 이놈의 미친 발정 난 것들 사이에서 배우자를 찾으라고? 시발, 차라리 전쟁터에서 탄피를 찾겠어. 이런 좆같은 것들 사이에서 평생 함께할 파트너를 찾으라니, 모두 돌았군그래.”

대비와 대공의 첫 만남은 이야기 속의 한 장면과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나 대비는 거의 피에타의 성모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10분 뒤 대공은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대비는 내내 대공에게 어떤 아가씨가 좋으냐며 눈에 든 아가씨라도 있느냐고 캐물었다. 어떤 타입이 좋으냐며 계속 물어보자 대공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그리고 결국.

‘어머니, 전 제 부인이 바람을 피우면 상대를 죽일 겁니다. 아주 잔인하게요. 어머니께서 어떤 상상을 하시든 제가 할 짓보다는 인간적일 겁니다.’

줄리안은 대공의 말에 기가 막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었다. 대공의 얼굴은 몹시 진지했다. 그는 진심이었다. 줄리안은 대공을 쫓아가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공의 저 말이 진심이라면 그는 아마도 영원히 결혼하지 못할 것이다.

“전하, 욕하시면 안 됩니다.”

줄리안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싫으면 날 당장 이 홀에서 내보내라고.”

대공이 짜증을 내며 커튼이 쳐져 있는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줄리안은 급히 대공의 앞을 막았다.

“전하, 그쪽은 안 됩니다.”

“날 여기에 계속 머물게 하고 싶으면 갑바를 좀 키워 오는 게 좋을 거야, 일리드.”

대공이 마치 어린애를 끌어내듯 가볍게 줄리안을 끄집어내더니 커튼을 열려고 했다. 아슬아슬하게 줄리안이 손을 뻗었다. 대공이 커튼을 열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커튼이 아닌 대공의 손을 붙잡게 되었다. 대공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줄리안은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미 먼저 오신 분이 계시는 곳이에요.”

“그런데?”

발코니에 먼저 온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왜 나가면 안 되는데? 대공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정말, 정말 평범한 사람이구나. 줄리안은 새삼 실감했다. 이 외모며 이 스펙에도 대공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욕을 지나치게 잘하고 바람을 피운 부인은 때리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히 하는 남자지만 사고의 흐름 자체는 평민의 것과 비슷했다. 아니, 평민이라기보다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동자와 더 닮은 것 같았다.

“밀회의 장소입니다.”

“아, 진짜 엿 같네. 도대체 왜 왕궁에서 이 지랄들이야? 구멍을 찢어놓든, 막대기를 분지르든, 집에 가서 하라고. 아님 호텔도 많잖아. 왜 여기서 더럽게 개같이 구냐고. 시발, 개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는데 사람이라는 것들이 떡을 아무 데서나 처치고 지랄들이냐고.”

클로드는 머리끝까지 짜증이 솟았다. 그의 상식으로는 왜 왕궁의 발코니에서, 그것도 이 추운 겨울에 굳이 실외에서 몸뚱어리를 비벼댄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더러웠다.

“전하, 소리 좀 낮춰서, 제발…….”

줄리안이 애원조로 속삭였다. 거의 빌다시피 하는 시종을 보고 있자니 클로드도 차마 커튼을 확 열어젖힐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줄리안을 내려다보다 “아, 개 같네, 진짜”라고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줄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였다.

“시종들이 드나드는 문이 저거지?”

클로드의 고갯짓에 줄리안이 그쪽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전하! 안 됩니다.”

줄리안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왕족인 클로드가 고용인들이 시중을 들기 위해 만들어둔 작은 문을 통해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이라도 나지 않는 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앞문으로 나가십시오.”

나도 그러고 싶지만 하고 클로드가 흘끗 그쪽을 바라보았다. 왕과 대비는 둘 다 그 근처에 있었다. 왕은 창가 근처에 서 있었고 대비는 몇몇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니와 형이 둘 다 그 근처에 있잖아. 붙잡힐 게 뻔하지.”

평소라면 당연히 가장 안쪽에 있어야 할 두 사람이지만 노린 듯이 앞문 근처에 있었다.

줄리안은 그 모습을 보고 “어차피 인사를 하시고 가셔야 합니다. 바로 나가실 수는 없어요”라고 속삭였다. 클로드는 잠시 어머니와 형을 흘끔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됐어.”

“정말 인사도 안 하시게요?”

“오늘은.”

클로드는 피식 웃었다. 어머니도 형도 실제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친밀한 척하고 있었지만 서로가 낯설다고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형은 그를 경계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를 빨리 정략결혼시키고 싶어했다. 도란도란 앉아서 가족애를 나누는 일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뭐,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쨌거나 오늘은 그만 가고 싶었다.

“전하.”

“따라올 필요는 없어.”

클로드가 걸음을 옮기자 줄리안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는 대공을 따라가야 했다. 어쨌거나 자신이 보좌하기로 한 손님이다. 그가 나갈 때까지는 그의 품행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었다.

줄리안은 클로드를 따라가며 난감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왕과 시선이 마주쳤다. 왕은 보일 듯 말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안 또한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완전히 왕에게 완전히 등을 돌려 클로드의 뒤를 쫓아 나왔다.

“전하, 날이 춥습니다. 외투라도 가져올 테니 잠시 기다려주세요.”

“택배로 보내도록 해.”

“전하, 잠시만. 정 그러시면 다시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전하.”

아우, 난 나가기 싫은데.

줄리안은 작은 문을 나서며 남몰래 얼굴을 찌푸렸다. 신년 연회는 줄리안에게 있어 최고의 만찬이었다. 궁정 사교계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자리는 많지 않았다. 궁정 사교계 덕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줄리안으로서는 홀에서 한 발 한 발 멀어지는 것이 마치 인어공주의 걸음처럼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대공의 걸음은 무심히 홀을 벗어나고 있었다. 성큼성큼 걷는 그 걸음은 흔들림 없이 단정하면서도 무척 빨랐고 줄리안은 어쩔 수 없이 그와 보폭을 맞춰야 했다.

“전하,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일행분들도 모셔오겠습니다.”

“…….”

“타고 오신 차도 준비해야 하니 부디 귀빈실로 모시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전하.”

클로드가 복도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천천히 줄리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금발이 조금 흔들렸고 곧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남자의 청회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뭘 잘못 말했지?

줄리안은 재빨리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되새김질했다. 차를 준비하겠다? 귀빈실에서 기다려달라? 일행을 데려오겠다? 이중에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저렇게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 있단 말인가.

설마 내 팀에서 처음 나오는 병가가, 내 병가는 아니겠지?

줄리안이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를 움직이는데 갑자기 클로드가 미소 지었다.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화사한 미소였지만 어딘가 위험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어 줄리안의 어깨는 더욱 굳어갔다.

“줄리안 일리드.”

클로드가 물어서 줄리안이 굳은 어깨를 움츠렸다.

“예, 전하.”

“어느 학교 출신이지?”

줄리안은 갑자기 학교를 물어보는 클로드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다 의식적으로 경계심을 내리누르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왕립 아카데미입니다.”

“학부는?”

“마법학부입니다만…….”

“왕립 아카데미, 마법학부, 줄리안 일리드.”

하나씩 꼽아보던 클로드가 씩 웃었다.

“만나서 반가워, 줄리안 일리드.”

클로드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클로드의 손짓에 줄리안은 당황했다. 그는 왕족이고 자신은 시종이다. 아무리 헌법상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고 해도 왕궁은 중세의 법이 우선시되는 곳이었다. 시종이 왕족과 악수를 할 수는 없었다.

줄리안은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전하.”

줄리안의 다갈색 머리칼이 쓸쓸한 가을의 밀처럼 흔들렸다. 하얀 머리 가마를 보며 클로드는 냉소를 지었다. 맹수가 사냥감을 보는 듯한 눈이었으나 고개를 숙인 줄리안은 그 눈을 보지 못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