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잊힌 논문 속의 그 이름
제이미 블레서는 왕궁의 복도가 마치 트랙인 양 경보하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 속도인지 뛰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었는데도 옆에서 보면 걷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대단했다. 줄리안의 부하인 시종들은 군인인 제이미와 그 일행들을 쫓아가느라 헐떡대고 있었다.
시발, 벌써 사고 친 건 아니겠지?
제이미의 머릿속에서는 상관의 사고 목록들이 죽 나열되고 있었다. 그리고 스크롤을 아무리 굴려도,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듯 스크롤을 굴리고 또 굴려도 그 목록의 끝은 보이지도 않았다.
클로드 스토메어는 전쟁의 신이다.
이것만은 제이미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대단했으니까. 제이미는 클로드처럼 정확하고 신속하게 상황 판단을 내리고, 유연하게 작전을 짜고, 어떤 압박 속에서도 무게 중심을 잃지 않는 군인을 본 적이 없었다. 클로드는 그가 자고 있는 막사가 불타도 욕은 할지언정 냉정함을 잃지 않는 인물이었다. 전쟁을 할 때 클로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며 상관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클로드 스토메어의 유일한 장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클로드에게는 많은 조건들이 있었다. 그는 아름다웠고 부자였고 대공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조건들은 모두 클로드와 결혼하거나 연애할 여성들에게나 빛나는 것이지 부관인 제이미에게는 한 치 쓸모도 없는 것들이었다. 제이미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눈치 있는 상관. 배려 있는 상관. 욕 안 하는 상관. 사고 안 치는 상관.
또 사고 친 건 아니겠지?
제이미는 몇 달 전 자신이 폭발했을 때를 떠올렸다.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 빌어먹을 상관은 막사에 가만히 있으라는 당부에 따르기는커녕 오토바이를 몰고 전장에 나타났다. 오토바이를 타고 전쟁터를 이리저리 횡단하며 총질을 해대는데 환장할 노릇이었다. 오토바이가 폭발하지 않은 건 신의 은총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사라졌는데 나중에 막사에서 피투성이의 병사와 함께 발견되었다.
‘각하, 괜찮…… 맙소사. 뭐, 뭐를 하시는 겁니까?’
‘뭐 하는 것처럼 보여?’
피가 이리저리 튀어서 평소보다 더 야차 같아 보이는 상관이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사람 하나 때려 죽이시려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제이미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잘 봤네.’
클로드가 다시 병사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병사의 얼굴은 이미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인데 핵주먹으로 그걸 더 두들기고 있었다. 맙소사. 제이미는 놀라서 클로드의 팔을 붙잡았다.
‘각하, 그는 아군입니다. 우리 병사라고요. 대체 왜.’
탕―.
사람의 머리가 터지는 순간을 많이 보았지만 제이미는 지금 이 순간만큼 황당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클로드가 병사의 시체 위에서 내려왔다.
‘아군은 무슨.’
사지를 내달려 구해 온 병사였다. 고작 두들겨 패다가 쏴 죽이려고 데려왔단 말인가. 머리가 터지고 뇌수가 온 침대에 흩뿌려진 것을 보면서 제이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 물었다.
‘이러실 거면서 왜 구해 오신 겁니까?’
‘왜인지 몰라서 물어?’
클로드가 싸늘한 눈으로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제이미는 그 시선을 받다가 후 하고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제이미도 클로드가 왜 이러는지 알고는 있었다. 클로드가 끌고 온 병사는 자잘하게 군수품을 횡령해왔다. 고작 술값을 벌기 위해서였다. 병사는 자신이 영리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놈은 클로드의 직속 부대원이었다. 클로드의 직속 부대에서 왜 횡령이 없는지, 그리고 그런 ‘영리한 짓’이 왜 일어나지 않는지 놈은 다시 생각해봤어야 했다. 정말이지 멍청한 새끼였다.
‘언제 아셨습니까?’
제이미의 질문에 클로드가 피에 젖은 주먹을 시신의 옷에 무심히 닦으며 대답했다.
‘네가 알았을 때쯤.’
‘절 사찰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클로드가 픽 실소했다.
‘지랄한다. 내가 모르길 바라면 좀 조용히 말하든가. 다 들으라는 듯이 동네방네 떠들어놓고선.’
클로드의 말에 제이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그랬나? 그가 잠시 자신의 행동을 체크해보는 사이 클로드가 냉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으려고 환장한 새끼고 난 부하의 소원을 들어준 것일 뿐이야.’
그 말을 들은 제이미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의 눈에 병사의 시체가 보였다. 걸레짝이 된 시신을 보자 마음이 답답해졌다. 저 병사가 무엇을 했던가? 기밀이라도 팔아먹었나? 그는 단지 긴 전쟁을 겪으며 술이 필요했을 뿐이고 돈이 모자라 군수품을 빼돌렸을 뿐이다. 잘한 일은 아니지만 맞아 죽을 정도로 잘못한 일도 아니었다. 군법에 의해 영창에 가면 그만일 일이었다.
‘각하.’
제이미가 심각하게 불렀다. 클로드가 제이미를 돌아보았다.
‘각하,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혹시 욕구 불만 아니십니까?’
‘죽고 싶은가 보구나, 제이미 블레서.’
클로드가 으르렁거렸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도 무섭지만 상관이 으르렁거리는 건 더 무섭다. 제이미는 어깨를 움츠렸다. 같은 편인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적군 놈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제이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안 되는 일입니다. 술값 좀 벌겠다고 군수품 몇 개 팔아먹은 새끼를 패 죽이시다니요.’
‘말 똑바로 해. 쏴 죽인 거야. 패 죽이진 않았어.’
‘그게 그거죠!’
‘무장과 비무장이 어떻게 같아, 금붕어 똥.’
아오, 말을 말자. 제이미는 답답한 가슴을 퍽퍽 치지도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변태처럼 숨 쉬지 마, 더럽게.’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중생처럼 결벽한 반응이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데? 그게 누군데! 제이미는 고함을 지르고 싶었으나 계급이 깡패라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날 제이미 블레서는 술에 떡이 되도록 취해서 울부짖었다.
흐어엉, 그만둘 거야. 군대 따위 때려치울 거야. 허어어엉, 으허헝. 아직도 그때의 통곡 소리가 자신의 귓가를 맴도는 듯해서 제이미 블레서는 고개를 저어 환청을 날려 보냈다.
그때 자신은 왜 군을 그만두지 않았던가? 그만두었다면 지금 발 뻗고 소파 위에 앉아 텔레비전이나 보며 감자 칩이나 씹고 있었을 텐데.
시발, 그놈의 포상금.
이 일은 작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작년이면 전쟁의 막바지였고 곧 승리가 눈앞이었다. 그리고 승리한다면 엄청난 포상금이 따를 것이 분명하다며 동료들이 제이미를 뜯어말렸다. 개고생이라는 개고생은 다 해놓고서 포상금을 못 받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느냐며 도닥거리는 바람에 결국 사표를 쓰지 못했다.
그리고 그 포상금은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3년 뒤부터 순차적으로 지급될 거라고 했던가. 아, 시발. 언제 그만둬……. 지금 그만둬도 포상금을 줄 것 같긴 하지만 포상금이다. 정책이 변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존재.
“각하.”
제이미는 귀빈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들어오자마자 그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널브러진 놈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야 했다. 귀족 나리들은 클로드의 실체를 알지 못할 것이다. 괜히 저 더러운 성질머리를 건드렸다가 끌려 와 쥐어터진 놈이 있음 어떡하지? 머리끝의 심지가 다 타들어가는 듯이 아찔한 위기감이 들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보좌관들, 그리고 그 뒤를 헉헉거리며 쫓아온 자신의 부하들, 보좌관이 번들번들 눈을 빛내는 꼴을 보면서도 무심히 차를 마시는 대공. 그들에게 공평하게 한 번씩 시선을 준 줄리안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싱긋 웃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제이미는 줄리안 일리드라는 시종에게 시선을 주었다. 줄리안 일리드. 이름이 아른아른한데, 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일단 급한 것부터 물었다.
“아무 일 없습니까?”
“전하께서 출궁하시고자 할 뿐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자, 어서 말해봐. 왜, 뭔데? 대공은 어떤 사람이지? 너는 왜 이렇게 당황한 건데?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왜?
줄리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흐리며 물었다. 아오, 알고 싶어라.
“아니, 그게.”
눈이 참 예쁜 남자군. 제이미는 반짝거리는 눈이 부담스러워져 고개를 엉뚱한 쪽으로 빼면서 상관을 바라보았다. 마침 클로드가 일어서고 있었다.
“각하, 아무 일도 없으십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본뜻은 ‘아무 사고도 안 치셨습니까?’에 가까웠다. 클로드는 피식 실소했다.
“일단 나가지.”
아무 일도 없다고 안 하잖아?
제이미는 다시 한 번 귀빈실을 훑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귀빈실의 거실이었고 안쪽에는 침실과 욕실이 있었다. 설마. 제이미는 고개를 휙 돌려 줄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침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이 방 안에는……?”
“여러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전하와 저 둘뿐이었는데요.”
누가 있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줄리안은 머릿속으로 가늠해보면서 순진한 척 대답해주었다.
“가자.”
클로드의 말에 제이미가 “예, 각하”라고 말하면서 뒤를 흘끔거렸다. 줄리안 일리드. 뭔가 되게 걸리는 이름인데, 이거.
우리 만난 적 있나요?
제이미가 물어보려는 찰나 “가자고 했다”고 클로드가 재촉했다. 저 양반은 또 왜 저래? 제이미는 의아해졌지만 어쨌거나 클로드의 뒤에 따라붙었다. 클로드의 뒤로 그의 보좌관들이, 그리고 그 뒤로 줄리안을 앞세운 시종들이 일렬로 걸었다. 남관의 입구로 향하는 길, 많은 사람들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걸었다.
“전하,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가시는 길 편안하십시오.”
줄리안이 무릎과 허리와 머리를 숙이자 다른 시종들도 그와 똑같이 예를 갖췄다.
“안녕히 가십시오, 전하.”
클로드는 흘끗 줄리안을 한 번 보고는 차에 올랐다. 그러자 제이미가 따라 올라타며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라고 물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클로드가 픽 웃었다.
“내 걱정 하는 거야? 징그럽게.”
“소름 끼치는 소리는 삼가주시겠습니까, 각하?”
제이미가 온몸을 떨며 질색을 하자 클로드가 하하, 웃었다. 그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클로드가 담배를 물고 연기를 뱉자 제이미가 버튼을 눌러 차창을 내렸다. 클로드의 얼굴이 묘했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맹수의 얼굴. 사냥감을 앞둔 짐승의 무표정이었다.
저런 얼굴을 할 때치고 좋았던 일이 없었는데.
벌써부터 입맛이 썼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일 것 같은데. 얼굴만으로는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제이미는 가만히 클로드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금붕어 똥.”
“…….”
“왜 대답 안 하냐?”
“금붕어 똥에게는 입이 없으니까요, 각하.”
“그래, 그래. 부관 나리.”
“오늘 내내 기분이 좋지 못하시네요, 각하. 자리를 피해드릴까요?”
클로드가 또 하하, 웃었다.
“혀를 잘려본 적이 있던가, 제이미?”
제이미, 라고 정확하게 부르는 건 클로드가 정말 기분이 더럽다는 증거다. 제이미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없습니다, 각하.”
목소리에 기합이 팍 들어갔다. 클로드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계속 없었으면 좋겠군.”
“예, 각하. 계속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흐응, 클로드가 미소 지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럴 때 클로드가 짓는 미소를 보며 요염하다는 표현을 썼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남자라 미소에 요염함이 섞인다고 했지만 클로드를 아는 주위 사람들은 이 미소를 두고 성격이 나빠 보인다고 한다.
“제이미.”
“시정하겠습니다, 각하.”
“줄리안 일리드라는 이름 말이야.”
“예, 각하. 수하도 익숙한 이름입니다만 업무 파일을 보아도 딱히 생각나는 바가.”
“난 생각났어. 줄리안 일리드.”
“예?”
제이미가 눈을 크게 떴다.
“생각이 났다고. 줄리안 일리드라는 이름.”
“……어디서 만나셨던 겁니까?”
“만난 게 아니야.”
“통화라도?”
“전혀.”
“그럼…….”
클로드가 또 후, 담배 연기를 뱉었다. 달게 연기를 뱉은 남자는 느긋한 태도로 등받이에 기댔다.
“그 이름을 봤지. 한 졸업 논문에서 말이야.”
“졸업 논……, 아. 아아. 아아아!”
제이미가 깨달음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왕립 아카데미 수석이 시종을 한다고요? 그, 그, 그, 줄리안 일리드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줄리안 일리드야.”
“맙소사. 잘 알아보진 않았습니다만 A급 라이선스를 딴 마법사인 것 같았는데요. 그런 마법사가 시종 일을 한다고요? 아무리 엘리트라고 해봐야 마법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않습니까?”
클로드는 반쯤 열려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차창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시종 월급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마법사는 이 나라의 최고 엘리트들이지. 시종도 엘리트라면 엘리트겠지만 마법사에 비할 바는 절대 아닐걸.”
“그런데 왜…….”
“왜일까?”
“각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이미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금붕어 똥, 넌 어떻게 생각하지? 돈도 적고 명예도 없고 전문직도 아니며 남의 비위나 맞춰야 하는 직업을 굳이 선택해야 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줄리안 일리드는 훈련된 마법사야. 이미 학창 시절에 괴물 같은 논문을 써 냈지. 그런데 왜 시종이나 하고 있는 거지?”
그럴 만한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클로드가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껐다. 그리고 한 개비 더 입에 물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첩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남자가요?”
제이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보게 된 줄리안 일리드를 떠올렸다. 적당한 키에 적당한 몸. 동양계의 피가 섞인 것으로 보이는, 국적을 어디라고 말해도 그렇겠구나 싶은 얼굴. 흔하게 생긴 그 얼굴에서 눈만이 반짝거렸다. 그것이 그를 더 생기 있고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런 남자가, 첩자…….
“첩자같이 생기지는 않았다고 할 셈인가?”
클로드가 한껏 비웃어서 제이미가 칫, 혀를 찼다.
“설마요. 첩자 같은 생김새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한 것 같은데.”
“머저리 취급하지 말아주시겠습니까?”
클로드는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답이 없는 클로드를 노려보던 제이미가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첩자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눈알을 파내서 포르말린에 담그고 싶군.”
“각하, 농담하시지 마시고요.”
왜 농담도 하고 많은 것 중에 그렇게 살벌한 농담만 골라 하느냐고 제이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클로드는 흥 하고 웃었다. 제이미는 젊고 유능한데다 놀라울 정도로 모범적인 인간이었고 클로드는 그런 그를 놀리는 걸 즐겼다.
“제이미, 나와 결혼하지 않을래?”
사랑이라는 건 해본 적이 없지만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닐까. 오늘의 파티는 역겨웠고 그런 곳에서 배우자를 찾느니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이 부관과 결혼하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그는 배우자에게 헌신할 사람이었다.
상대의 취향에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는 클로드의 질문에 제이미의 얼굴이 구겨졌다.
“차라리 눈알 컬렉션을 만드십시오. 어떤 놈의 눈알을 원하십니까? 제가 당장 파 오죠.”
“나와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어?”
“말이라고 하십니까?”
“왜 싫은데?”
“왜 좋아야 합니까!”
내가 왜, 내가 왜, 내가 왜!
제이미가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의 앞에서 클로드가 귀를 쑤시는 척하며 대답했다.
“돈 많지, 잘생겼지, 능력 있지, 명예도 있지, 완벽하지.”
“됐습니다.”
“왜 됐는데?”
“제가 각하를 한두 해 모십니까? 전 싫습니다. 전 저를 사랑해주고 제가 사랑할 수 있는 순진하고 귀엽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과 결혼할 겁니다. 제가 왜 제 인생을 구렁텅이에 빠뜨립니까? 제가 뭐가 모자라서요!”
“내 어머니는 나보고 결혼을 하라고 하시던데.”
클로드의 뜬금없는 말에 당장에라도 고함을 지를 것같이 입을 크게 벌렸던 제이미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클로드가 세 번째 담배를 물면서 코웃음 쳤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이 만나자마자 결혼부터 하라고.”
클로드는 자신의 목소리에 쓸쓸한 바람이 감도는 걸 느끼며 피식거렸다. 대단한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아니, 조금은 기대를 했던가.
만나고 싶은 가족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꼭 그들을 만나고 포옹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들을 만났고 포옹도 했는데, 그러나 단단히 안고 있어도 그들과 자신 사이에는 투명한 벽들이 견고하게 서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느 귀한 아가씨 인생을 잡으시려고.”
제이미가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상관을 흘끔거렸다. 클로드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또라이 같은 짓만 골라 할 때도 싫지만 이렇게 속상해하는 것도 마음이 좋지 못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새 정체불명의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뭐, 첩자나 잡지요, 각하.”
“…….”
“첩자면 이목구비가 사라질 때까지 패신 뒤 생으로 눈알을 파셔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충실한 부관이로군그래.”
키들거린 클로드가 한숨을 쉬며 창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의 얼굴엔 어느새 악동 같은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그래, 첩자나 잡자고. 인간 샌드백이 있어야 이 기분을 풀지.”
그런 클로드의 얼굴을 보고 제이미가 “그럼 당장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싱긋 웃었다.
그리하여 사흘 뒤, 클로드와 그의 보좌관들은 각자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손에 든 채 클로드의 대저택에 있는 회의실에서 만났다. 보좌관들은 클로드의 대저택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뭐가 이렇게 으리으리해. 상관은 평소 자신들과 똑같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음식을 먹었다. 군복이야 좀 달랐지만 그래봐야 지급품, 상급의 물건이어봤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상관이 귀족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실감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으로 상관이 대공임을 실감했다.
저택은 놀라울 정도로 호화스러웠다. 게다가 30년 가까이 비어 있던 저택 안이 얼마나 깨끗하고 세심하게 꾸며져 있는지, 집사와 메이드들은 또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지, 벌어진 입이 다물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적응한 건 저 사람 하나인가 보다.
보좌관들은 샤워 가운 차림으로 회의실에 들어오는 클로드를 흰 눈으로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드는 상석에 앉아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과 허벅지의 말 근육이 동시에 돋보이는 자세였다. 완벽한 동성애자도, 완벽한 이성애자도 전부 소수자 취급을 받는 양성애자의 세상에서 클로드의 그 모습은 매우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보좌관들은 모두 클로드의 나체에 익숙해져 있는데다 껍데기에 속기에는 그 알맹이에 휘둘린 전적이 너무 많아서 마치 나무토막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인님, 술은 그만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음…… 하지만 한 잔 더 마시고 싶은데.”
“어쩔 수 없지요. 그럼 딱 한 잔만 더 올리겠습니다.”
클로드와 집사의 대화를 들으며 보좌관 중 한 명인 레드가 제이미를 툭 쳤다.
“남이 보면 태어날 때부터 돌봐준 집사인 줄 알겠어요.”
“내 말이.”
제이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때 클로드가 “자, 이제 들어볼까. 눈이 유독 반짝거리는 쥐새끼에 대해서 말이야”라며 삐뚜름한 미소를 걸었다.
레드가 흘끗 제이미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줄리안 일리드. 현재 스물다섯 살. 일리드 백작 가문의 막내이며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클로드의 정면에 있는 벽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걸려 있었다. 스크린이 켜지더니 현재 줄리안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어릴 때 가족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 나타났다.
“전형적인 귀족 가문 삼남의 행보를 그대로 걸었습니다. 일곱 살부터 홈스쿨링을 시작했고 열한 살에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성적이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당시에는 마법학에 본인이 열의를 보이지 않아서 마나를 가지고 있는데도 인문학부로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1년간 본인이 미친 듯이 공부를 하더니 다음 해에는 마법학부로 편입했고요.”
“본인이 미친 듯이 공부하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건가?”
클로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아니요, 각하. 왕립 아카데미 역사상 편입에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입니다.”
“정말 똑똑하긴 하나 보네.”
“예.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이미 4개 국어를 했다는데요.”
“천재라는 건가?”
다른 쪽에 앉아 있는 보좌관이 일어났다.
“예, 천재긴 한데 좀 오락가락한 천재입니다. 학업 성적을 보면 천재성이 보일 정도의 성적은 아니고요, 단지 매우 성실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책에만 매달렸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는 데 비해서 딱히 마법학적으로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어낸 건 아닙니다. 시험 성적은 엄청 좋았습니다만 마법에 매진하는 마법사들의 경우 학창 시절부터 인상 깊은 물건이나 수식을 만들어내기 마련인데요, 딱히 만들어낸 게 없더라고요. 몇 가지가 있긴 한데 주로 문헌 분류에 관한 것들입니다. 책을 좋아하긴 정말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문헌 분류? 즉, 정보에 관한 거군.”
“예, 그렇습니다. 이상한 연구를 많이 했더라고요. 수천 권의 책 내용을 마법 스크롤 안에 담는 법이라든가, 책장에 마법을 걸어 저절로 정리되는 법이라든가. 쓸모없는 마법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졸업 논문도 지도 교수가 공격 마법에 관한 것만 인정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그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법은 여러 종류의 마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상위로 올라가면 결국 두 종류로 나뉘기 마련입니다. 생명을 창조하든지 말살하든지. 그 외의 마법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을 왜 마법으로 하겠습니까?”
마법사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보좌관이 참고하라는 듯 설명했다. 클로드가 제이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줄리안 일리드는 마법사 라이선스가 있던가?”
“예. 심지어 놀랍게도 S급 라이선스를 땄더군요.”
S급? S급 라이선스라는 게 있었어? 클로드를 비롯한 모두가 의아해하는 사이, 조금 전까지 마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던 보좌관이 벌떡 일어났다.
“S급 라이선스요?!”
말도 안 된다는 얼굴에 제이미는 가지고 있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줄리안 일리드의 자격증이 고운 자태로 복사되어 있었다.
“어, S급 맞는데.”
“말도 안 돼. 고작 스물다섯 살이라면서요?”
“7년 전에 딴 거니까 18세에 땄군.”
“열여덟 살짜리가 S급을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제이미가 서류를 휙 밀었다. 긴 탁자를 슬라이딩한 서류를 보좌관이 받아 넘겨보더니 “S급을 열여덟 살이……”라고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황망한 얼굴이었다.
“왜? 대단한 거야?”
“……예, 각하. 대단합니다.”
자존심이 상한 걸 겨우 참고 있는 듯한 얼굴이라 클로드는 흐음 하고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마침 졸업식 때의 사진이었다. 앳된 얼굴의 줄리안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보았던 반짝거리는 눈은 어디에도 없었다.
첩자라…….
위험한 사상에 감화되어 시종이 되었고, 그래서 그토록 열정적이 되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S급 라이선스 마법사들은 마법학으로 이름 높은 국내에도 몇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마법사라고 불린 시절도 있었지요. 옛날에는요.”
“오, 전설 속의 대마법사님들.”
누군가가 심드렁하게 한마디 했지만 보좌관은 들은 체도 않고 말을 이었다.
“대단한 겁니다. 고작 열여덟 살밖에 안 된 남자가 성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런데 S급 라이선스를 따고 시종이 되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뭔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S급 라이선스가 그렇게 대단한 거야? 시종을 할 수도 있지 않나? 피곤한 일을 지양하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마법사는 정신적인 노동에 시달리는 직업군이다. 다른 보좌관 한 명이 확대 해석하지 말라는 듯 선을 그으려 했다. 그러나 마법사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보좌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변호사 자격증과 의사 자격증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학교에서 선생도 아니고 행정직으로 일하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아, 그건 좀 그렇지.
이제야 모든 보좌관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법사가 대단하긴 하지만 시종도 대단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시가 충격적이었다. 저 정도면 확실히 뭔가 있는 거지. 클로드도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한 보좌관이 물었다.
“그런데 애초에 왜 줄리안 일리드가 눈에 띈 겁니까?”
클로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관인 제이미 블레서를 비롯한 여덟 명의 보좌관이 양쪽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 중 세 명 정도는 클로드가 줄리안 일리드의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 참모의 자리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군.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어. 클로드가 “블레서”라고 제이미를 불렀다.
제이미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보더니 “아아,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겠군요”라고 말하며 입을 열었다.
“3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3년 전.
그때만 하더라도 전쟁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승전국과 패전국을 점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클로드는 내내 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몇 천 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3만 명이 넘는 부상자가 나왔다. 막사로 돌아온 클로드는 너무 화가 나서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침상에 던지며 사나운 얼굴로 소리쳤다.
‘시발, 이게 말이 돼?! 이런 개 같은 경우가―.’
그는 육두문자로 고함을 질러댔고 그의 부관인 제이미도 무섭도록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연속 두 달째 적군의 마법전에 휘말려 있었다. 물론 적국에도 마법사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군에 비하면 댓 살짜리 어린이 수준의 마법사들밖에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고, 그 마법사들은 이런 대단한 마법을 구현해낼 수 없는 자들이었다. 날씨를 바꾸고 지진을 일으키고 거대한 화염으로 공격한다. 마법 공격의 가장 좋은 점은 아군에게 끼치는 부수적 피해가 최소화된다는 것이다. 적군은 열세에 몰렸었지만 마법 공격으로 인해 이제는 승기를 잡게 되었다. 병력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데도 지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열받은 클로드가 방 안을 뒤집어엎는 동안 제이미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한쪽 구석을 노려보며 상관의 분노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증폭기? 증폭기가 저쪽에 유출된 걸까?’
분을 못 이기고 욕을 질펀하게 싸지르던 클로드가 자리에 털썩 앉아서 제대로 한 첫마디였다. 제이미는 클로드의 얼굴에 묻어 있는 핏방울들을 바라보다 팔을 뻗어 티슈를 한 장 뽑았다. 티슈 끝만을 잡아 내미는 제이미의 손끝에는 클로드와 닿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클로드는 심술궂게도 제이미의 팔을 잡아 그 팔에 자신의 피와 땀, 오일과 기타 등등으로 더러워진 얼굴을 문댔다. 악 소리도 못 내고 제이미가 짜증을 참는 사이 클로드는 티슈를 아예 상자째로 가져와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제이미는 클로드를 위해 뽑았던 티슈로 자신의 얼굴을 닦으며 대답했다.
‘증폭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수 재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료들을 만들어내려면 A급 마법사들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쪽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밀수업자들을 통해서 유출된 것이라면?’
‘증폭기는 무기고에만 있는 물건입니다. 숫자를 확인해보겠습니다만 아마 증폭기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도대체 뭐지? 갑자기 놈들 사이에서 천재 마법사들이 떼로 나타난 이유가 대체 뭐냔 말이야.’
‘저쪽에서는 마법사들을 1회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날씨를 바꾸거나 지진을 일으키는 등의 마법을 쓴 마법사들은 죽습니다. 죽음은 엄청난 대미지입니다. 마법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지만 그만큼의 대미지 또한 감수해야 하는 만큼, 아마 마법사들은 모두 한 번의 마법에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쪽의 마법사들은 유능하나 그만큼의 각오는 없다는 뜻이 됩니다. 아군에서도 그만한 각오를 한 마법사가 있다면 그들의 마법을 되돌리고 그 이상의 타격을.’
‘아니.’
클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미 전술이 아니야, 금붕어 똥. 이후 다시는 그딴 소리를 입에 담지 마라. 전술이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군의 피해를 최대화하는 것이다. 희생을 담보로 한 전술은 이미 전술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러나, 각하, 이 이상 지는 것은 더욱 병력의 손실을.’
‘그리고 이건 각오 따위로 되는 수준이 아니야.’
클로드의 청회색 눈이 번들거렸다.
‘아니지, 아니야. 분명 뭔가가 있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생겼다.’
그래, 뭔가가 있다.
클로드는 미친놈처럼 막사 안을 뱅글뱅글 돌았다. 뭘까. 증폭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있는가. 놈들은 말도 안 되는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마법의 성취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움직이는 것이다. 오랜 세월 가끔씩 나타나는 천재들이 만들어낸 수식, 그리고 영재들의 비범한 응용, 몇 천 번이고 몇 만 번이고 훈련된 테크닉으로 인해서만 가능한 세심한 기술이다. 바위가 풍화하는 것처럼 느리게 발전하는 기술인데 갑자기 이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이 도대체 뭘까.
클로드는 전장에서 더러워진 몸을 씻으며 생각했다. 몸에서 오일과 먼지가 계속 흘러나왔다. 샤워기 아래에서 물을 맞으며 몸에서 나온 물이 회색에서 투명이 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마나 증폭. 대형 마법. 생각해내야 한다.
‘각하!’
아침에 들어온 제이미가 불렀을 때 그는 고개를 들고 시각을 확인했다.
‘오전 8시……, 열두 시간 정도 지난 건가?’
‘각하, 설마 여기에 계속 이렇게 앉아 계셨던 겁니까?’
제이미가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클로드는 나신이었다. 머리 위에 수건을 올린 모습이 씻고 나와서 내내 이렇게 앉아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열두 시간을 이 상태로 있었단 말인가.
아, 내 상관이지만 가끔 정말 미친놈 같다니까.
제이미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 클로드가 일어섰다. 그는 가볍게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치료사라도 부를까요?’
두 달간 패전을 겪으면서 클로드는 많이 초췌해졌다. 제이미가 보기에 그는 거의 강박증 수준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종종 미친놈이 되고는 했지만 이번은 정말 심각한 것 같아서 제이미는 조심스럽게 상관을 살폈다. 열두 시간 동안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다니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생각해봤는데 마법사 협회에 연락해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많이 심각하신 겁니까, 각하?’
당황해서 무거운 어조로 물어오는 제이미에게 클로드가 미간을 좁혀 보였다.
‘무슨 똥 같은 소리야, 금붕어 똥.’
‘예?’
‘마법 말이야, 마법. 대형 마법. 저 시발, 개 같은 것들이 쓰는 대형 공격 마법 말이다.’
‘아, 적군의 마법이요.’
어제 엄청난 손실을 보긴 했지만 자고 일어났더니 모든 것이 리셋된 제이미였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열두 시간이나 마법, 증폭, 대형 마법, 전투 마법 등을 중얼거리고 있었던 클로드의 안광은 어제보다 더 번들거렸다. 아, 우리 상관인데도 이렇게 무서운데 적군 새끼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제이미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증폭기가 없이 그런 마법을 쓴다는 건 있을 수가 없어. 증폭기가 있든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마법사에 길이 남을 만한 발전이 있었든가 둘 중에 하나야.’
‘증폭기는 아닙니다. 어제 확인했는데 단 한 대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마법사 협회에 연락해봐.’
‘예, 각하.’
그런다고 단서가 나올까. 제이미는 의심스러워하면서도 마법사 협회에 공문을 보내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 왕립 아카데미의 마법학부 교수로부터 의외의 메일이 도착했다. 그는 ‘대형 공격 마법에서의 실용적인 마나 소비와 자연적 조건으로 인한 증폭 가능성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첨부해 메일을 보내왔다.
논문은 천재와 영재의 중간쯤 있는 자의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수식을 발견한 것은 아니나 기존의 수식을 완전히 뒤집는 방식으로 수식을 응용했다. 그에 따르면 특정 조건에서 마나는 증폭된다. 자연적인 현상을 감지하여 증폭된 마나를 사용, 자연 현상을 극단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고 이것은 빛의 에너지 등을 이용한 직접적인 공격 마법이 아니어도 충분히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마나를 증폭하고 자연 현상을 심화시키려면 몇 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있으며 그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경우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기 때문에 환경의 변화가 심한 전쟁터에서는 사용이 어렵다는 부분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줄리안 일리드’라는 서명이 보였다.
“그런 일이…….”
뒤늦게 참모진에 합류했던 세 명의 보좌관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제이미 블레서를 바라보았다. 그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반역죄에 해당하는데 그걸 그냥 두셨단 말씀이십니까?”
제이미를 보면서 말하고 있지만 클로드에게 하는 말이었다. 제이미는 클로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가 대답할까요? 그렇게 묻는 눈을 보고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몇 가지가 있었어. 첫째, 마나를 증폭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들이 의외로 까다로운 것들이야.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충분히 그 조건이 성립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었지.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승승장구를 이어갔고. 둘째, 우리가 첫째와 같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줄리안 일리드가 논문에 그 조건들을 명시했기 때문이지. 그는 조건을 달리 적을 수도 있었고 다른 논문을 낼 수도 있었어. 그러나 그는 정직하게 적었고 그 논문을 냈지. 정말 적국에 협조하는 반역자였다면 그는 절대 논문을 내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우린 당시에 우연으로 결론을 내렸어. 우연일 가능성이 높은 일에 일일이 신경 쓸 정도로 한가롭지도 않은 몸이었거든.”
“그런데…….”
“그래, 그런데 그 줄리안 일리드가 시종을 하고 있더란 얘기지. 그럼 이야기가 달라져. 왜 줄리안 일리드가 시종을 선택했을까. 왜 적군은 하고 많은 논문 중 그의 논문에 적힌 내용을 참고하여 아군을 위협했는가. 한 번은 우연이어도 두 번이 우연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지. 알아볼 필요가 있어.”
당시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줄리안 일리드는 발상을 전환했던 것이지 새로운 수식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적국에도 줄리안 일리드 같은 생각을 해낸 자가 있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며칠 전에 만난 줄리안 일리드는 이상한 인간이었다. 계속 온갖 곳을 흘끔거리며 눈을 빛내는 남자는 충분히 수상했다.
“문밖을 쓸고 닦고 왔더니 집 안에 쥐새끼가 든 거지.”
클로드가 술잔에 남은 술을 끝까지 마시더니 아쉬운 듯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노회한 집사가 눈치 빠르게 술잔에 술을 반만 따라주며 속삭였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클로드는 키들거리며 그 술로 입술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집 안을 치워줄 생각은 없어.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쥐새끼는 잡아야지.”
“일리드 백작이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제이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겠지. 집사는 어떠십니까? 일리드 가문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음 말해주면 좋겠는데.”
클로드의 말에 시립해 있던 집사가 흐음 하고 웃었다. 인자한 얼굴로 웃은 그가 참모진을 한 번 죽 돌아보고는 다시 클로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가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잘 아는 것 같은데.
클로드를 비롯해 회의실에 앉아 있는 아홉 군인의 머릿속을 동시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잘 아는 사람의 말투였다. 클로드가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사이 집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줄리안 일리드라는 분이 백작가의 막내분을 말씀하신다면, 예, 백작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일리드 백작이 후계자인 첫째나 병약한 둘째보다 막내인 셋째를 더 애지중지하신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술잔을 비웠다.
메이드가 고풍스러운 카트를 끌고 왔다. 집사는 빈 술잔을 카트로 옮기고 카트 위의 다기 세트를 클로드의 앞에 세팅했다. 뜨거운 물이 이리저리 담기고 뿌려지길 반복하더니 어느새 하얀 자기 잔에 연녹색 물이 차 있었다. 집사의 태도는 몹시 경건했고 그의 행동거지는 우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클로드는 녹차를 내려다보며 “연못물?” 하고 미심쩍게 물었다.
“녹차이지 않습니까, 각하!”
제이미가 기가 막혀 고함을 질렀다.
누가 보면 군인은 녹차의 존재도 모르는 무지렁이인 줄 알겠네! 제이미가 버럭 하자 클로드는 피식 웃으며 녹차 잔을 들었다. 눈을 내리깔고 향을 맡더니 조금 입에 머금었다가 삼켰다.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맛없어.”
맥주, 라고 새로운 주문을 하는 주인을 집사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클로드의 참모들은 집사가 그의 상관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봐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여덟 명의 심장이 같은 리듬으로 콩닥콩닥 뛰고 있을 때.
“역시 그러십니까?”
집사는 온화하게 웃으며 카트 안쪽에 숨겨두었던 맥주를 꺼냈다. 매우 시원해 보이는 맥주였다.
“고마워, 집사. 집사밖에 없어.”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주인님. 집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여덟 명의 참모가 다 같이 실망한 것도 모른 채 주인과 집사는 서로에게 화사한 봄날처럼 웃어주었다.
신년 연회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줄리안은 여전히 시종으로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왕비와 왕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고 대비는 작은아들에게 무엇을 해줄까 고심하는 한편 작은아들의 존재가 큰아들, 즉 그녀의 친아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이런 걱정을 하는 자신에게 실망하면서 밤마다 와인 한두 잔을 마신 뒤 잠을 청하고는 했다.
역시 의붓아들과 친아들은 다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줄리안은 가볍게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책상을 치우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요즘 기분이 좋아 보여요, 줄리안.”
저스틴의 말에 줄리안이 싱긋 웃었다.
“평소와 똑같은데, 아마 신년이라서 기합이 좀 들어갔나 봐.”
똑같기는 개뿔이. 줄리안은 요즘 엄청나게 신이 나 있었다. 왕과 왕비는 서로를 미워하다 못해 엿 먹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대비는 고뇌에 빠져 있었다. 신년 연회를 기점으로 궁정 사교계 연애 관계는 크게 달라졌고, 그 와중에 치정 사건이 3건, 결투 1건이 있었다.
게다가 대공의 존재로 인해 귀부인들은 몹시 흥분했다. 그녀들은 어떻게 하면 대공의 첫 여인이 될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그것은 왕비도 마찬가지라 그녀는 며칠째 줄리안을 붙잡고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물어보고 있었다.
“비전하께서는 대공 전하를 마음에 두신 모양이던데요.”
제이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겠지.”
저스틴이 픽 웃었다.
“대공 전하께서 비전하를 거부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정말인가요, 줄리안?”
제이크의 질문에 조이가 쿡,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스틴도 눈살을 찌푸렸다.
“아, 죄송해요, 줄리안. 가십 싫어하시는 거 알면서 제가…….”
“괜찮아. 이제부터 주의하면 되지.”
줄리안은 선선히 웃으며 앞장서 사무실을 나왔다. 줄리안의 뒤에서 조이, 저스틴을 비롯 팀원들이 꼬리를 물고 나오는 길이었다. 줄리안이 멈춰 섰고 조이가 그의 뒤에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이런.”
그 뒤를 따라 나오던 저스틴이 고개를 슬쩍 빼더니 멀리서 오는 팀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루시드 팀이네요.”
“재수 없는 새끼들. 어디 가서 안 뒈지나.”
제이크 다음으로 어린 록스가 험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록스!”
줄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자 록스가 “잘못했어요, 줄리안”이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상사가 눈을 부라리니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인 게 분명했다.
줄리안은 천천히 걸었다. 루시드가 그를 보았는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걸었고 줄리안 또한 싸늘한 눈을 했다. 하, 시발. 루시드 팀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날씨가 얼어 죽게 좋네. 줄리안의 팀 중 누군가가 들으라는 듯이 씹어뱉었다. 팀과 팀이 스치던 순간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조심하도록 해, 줄리안.”
루시드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글쎄. 조심해야 할 건 내가 아닐 텐데, 루시드.”
줄리안이 나른하게 받아쳤다. 줄리안과 루시드가 서로에게 한마디씩을 날리며 스쳐 지나가고, 그 뒤의 시종들도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두 팀은 멀어졌다.
“왜 저렇게 재수가 없어요, 저 팀은?”
제이크가 날카롭게 화를 냈다. 줄리안은 “글쎄. 루시…… 드는 내가 싫은가 보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이가 고개를 저었다.
“루시드는 줄리안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보는 눈길이 끈적거려요.”
맞아, 끈적거려.
저스틴이 격렬하게 동의했고 팀원들 모두 루시드의 변태 같은 눈길에 대해서 한마디씩 해댔다.
“분명히 줄리안을 노리는 거예요. 개새끼.”
록스가 또 욕을 입에 담았다. 록스! 그를 부르는 줄리안의 목소리도 강경해졌다. 록스는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해요.”
줄리안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갑작스럽게 속도가 빨라지자 저스틴과 조이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동시에 뒤에 있는 록스를 돌아보았다. 조이가 고갯짓을 하자 록스는 조이와 저스틴의 앞쪽으로 와서 줄리안의 바로 뒤에 섰다. 그는 줄리안을 흘끗 바라보았다. 잘 웃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줄리안인데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정말 화났나?
록스가 조심스럽게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잘못했어요, 줄리안. 정말이에요.”
그러자 그제야 줄리안이 한숨을 쉬며 록스를 바라보았다. 키가 작은 록스를 내려다보는 줄리안의 고동색 눈동자가 어두웠다. 줄리안이 발걸음의 속도를 낮추었다. 왕비의 방으로 향하는 길, 눈앞에 화려한 로코코 장식으로 치장된 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줄리안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왕궁이고 넌 왕궁 시종이야. 비속어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걸 내가 굳이 말로 해야.”
그때.
“이 시발 새끼가!”
왕비의 앙칼진 욕설이 복도의 적막을 찢어놓았다.
록스는 저도 모르게 줄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고귀하신 비전하도 시발 새끼라고 욕하고 있는데 저 같은 비천한 시종 놈이 개새끼라고 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그런 눈이었다. 줄리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입을 달싹거렸다. 툭하면 욕을 내뱉는 록스의 입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장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이야기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줄리안이 록스에게 경고했다. 끝난 것 같은데, 라는 얼굴로 록스가 “예, 줄리안. 제가 다 잘못했어요”라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아까와는 달리 영혼 없는 목소리였다. 줄리안이 칫 하고 혀를 차며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아아악―. 왕비는 산발을 한 상태로 분에 못 이겨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가는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면서 줄리안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시녀에게 다가가 “안녕, 로라”라고 인사를 건넸다. 로라가 그를 돌아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안녕, 줄리안.”
“무슨 일인지 간단하게 한 140자 정도로 알려줄 수 있을까?”
줄리안의 말에 로라가 핏 웃었다.
“뭐야, 내가 인간 트위터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록스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제이크에게 속삭였다.
“남자가 저런 말 하면 대부분은 여자들이 재수 없다고 싫어하지 않냐?”
“줄리안은 남자가 아닌가 보지.”
“여자도 아니잖아.”
“제3의 성, 제3의 성.”
록스와 제이크가 싱거운 소리를 하고 있는 사이 줄리안은 로라의 곁에 바짝 서서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이쿠, 그러니까 대공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씹히셨다?”
“뜯어보지도 않은 것 같더라고.”
“아하하. 이런. ……이런, 정말 화가 많이 나셨겠는데…….”
줄리안이 중얼거리자 로라가 흘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줄리안의 턱 선을 가만히 바라보던 로라가 무심코 한마디 했다.
“별로 곤란해 보이지 않네.”
왕비를 보며 이번엔 어떻게 달랠까 고심하는 줄리안의 귀에 로라의 말은 뒤늦게야 닿았다. 줄리안이 “응?” 하고 로라를 내려다보았다.
“곤란해 보이지 않는다고. 넌 늘 곤란해 보이지 않아.”
“그럴 리가. 늘 곤란한데.”
줄리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표정 관리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요즘은 경계심이 좀 무너졌는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너무 빨리 알아채고는 했다. 곤란한 일이었다. 자신이 궁정 사교계의 가십에 미쳐서 매일 일기에 쓰고 꿈으로 꾸고 밥을 먹을 때도 그 생각, 양치를 할 때도 그 생각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는 바로 직업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지. 줄리안은 좀 더 얼굴을 굳혔다.
“정말 곤란해?”
로라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물었다.
“상전의 기분이 안 좋으면 곤란하지, 늘. 나라고…….”
줄리안이 억지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려고 했을 때.
“줄스!”
왕비가 줄리안을 발견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고 줄리안은 “가봐야겠다”라고 로라에게 속삭인 뒤 천천히 왕비에게로 걸어갔다.
너무 환하게 웃지는 말자고 생각했지만 줄리안의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왕비는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여성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왕비는 줄리안을 앉혀놓고 미주알고주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는 했다. 그리고 줄리안은 왕비를 달래면서 그 꿀 같은 정보들을 미친 듯이 머리로 흡수해왔다. 정보에도 맛이 있다면 왕비가 떠드는 정보들은 질 좋은 스테이크 맛일 것이다.
“왜 웃어.”
왕비가 시무룩해져서 줄리안을 툭 쳤다. 시녀들한테는 미친년처럼 굴었지만 정작 줄리안을 앞에 두자 한풀 꺾인 듯했다. 줄리안은 왕비를 조심스럽게 에스코트해서 거실 중간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둥근 등받이에 팔걸이가 달린 의자는 패브릭이었고, 하얀 실크에 작은 꽃들이 수 놓여 있었다. 줄리안은 이 의자를 볼 때마다 젊은 왕비에게 어울리는 의자라고 생각해 가능한 한 왕비를 거기에 앉혀서 수많은 동화책의 실사 버전을 즐겼다. 이샤는 입이 험하고 모든 남자를 제 발밑에 둬야 직성이 풀리는 여왕벌 성격에 백화점에서 단박에 블랙리스트에 오를 만한 진상 같은 짓을 하루에 열 번씩 하는 여자였지만 청순한 왕비의 비주얼을 가지고 있었다. 줄리안의 눈에 호사가 되는 여인이었다.
“차를 드릴까요, 비전하.”
“내가 지금 차로 되겠어!”
왕비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음, 그럼 와인으로 가져올까요. 아, 비전하의 입맛에 맞진 않으시겠지만 보졸레 누보를 가지고 왔어요. 혹시나 해서 가져왔는데 역시 싫으실까요?”
왕비는 온갖 사치를 해대곤 했지만 사실 그녀의 입맛은 좀 서민적이었다. 그녀는 보졸레 누보 와인을 좋아했다. 저렴한 와인을 차마 제 손으로는 사 먹지 못하고, 달라고도 못하고 줄리안이 눈치껏 바쳐야만 ‘네 성의를 생각해서 먹어준다’는 식으로 입에 대었지만 그날은 확실히 기분이 풀어져 있었다.
“넌 왜 꼭 그딴 싸구려 와인만 가져오는 거야.”
왕비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다리를 꼬았다.
“따라봐.”
줄리안은 웃지 않았다. 그가 여상한 태도로 손짓을 하자 제이크가 재빨리 와인을 내밀었다. 줄리안은 우아하게 와인 병의 마개를 열고 시녀가 건네주는 와인 잔에 따라서 왕비에게 내밀었다. 왕비는 잔을 들고 천천히 입술을 대더니 “맛없어”라고 말하며 홀짝거렸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모르는 체하지 마. 들었잖아.”
“대공 전하께서 서신을 안 받으셨다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줄리안을 휙 노려본 왕비가 이를 바득 갈았다.
“왕비를 무시하고도 지가 사교계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지 보자고.”
눈치 없는 촌놈이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똑똑히 알려주겠다며 왕비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줄리안은 왕비의 잔에 와인을 세 번 따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제풀에 좀 지친데다 와인을 마시고 풀어진 왕비를 바라보던 줄리안이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는 전쟁터에 내내 계셨던 분이라 그런지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으신 것 같았습니다. 아마 사교계 예의를 잘 모르시는 거겠지요.”
“그렇겠지. 소똥 냄새가 풀풀 풍기던데.”
그건 아닐 텐데.
줄리안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웃는 모습을 본 왕비가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줄리안의 팔짱을 끼고 2인용 소파에 앉았다. 줄리안도 어쩔 수 없이 왕비의 옆에 앉게 되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줄스.”
왕비가 줄리안에게 기댄 채 물었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감고 있는 왕비를 바라보며 줄리안이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 남자 말이야. 얼굴은 아름답고 몸은 단단한 내 시동생. 그 잘난 놈의 물건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질대로라면 놈의 것 따위 잡아 뜯어서 회를 쳐도 이 분이 풀리지 않아.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년이 놈의 첫 여자가 되는 건 더 용납할 수 없어.”
‘대공의 사교계 데뷔 후 첫 여인’ 타이틀은 자신의 것이라며 왕비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줄리안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대비 전하께서 대공 전하를 위한 연회를 명하셨습니다. 곧 파티가 열릴 텐데 그때 후회하실 겁니다.”
칫. 왕비가 이번에는 손가락을 씹기 시작했다. 줄리안도 손가락은 말리지 않았다. 그는 잠시 있다가 “비전하 말고 다른 분도 대공 전하께 마음이 있으신 겁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이라고 해?”
왕비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손타 그년이 벌써 초콜릿을 보냈다더군. 멍청한 년. 스물아홉 먹은 사내새끼에게 초콜릿을 보내서 무슨 이야기가 된다고.”
줄리안은 천천히 왕비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왕비의 몸이 더 내려갔다. 왕비는 줄리안의 허벅지에 머리를 댄 채 소파의 팔걸이에 다리를 걸고 품위 없이 흔들었다. 기분이 좋은 듯 목소리가 나른해지고 있었다. 줄리안은 마치 최면술사처럼 조용히 물었다.
“손타 후작부인께서 초콜릿을 보내셨군요. 저번 일 때문일까요?”
왕비가 손타 후작부인의 제비를 가로챈 적이 있었다. 그때 왕비는 가로채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살롱에서 후작부인의 콧대를 꺾어놓았다. 당시 후작부인은 다이어트에 성공해 갑자기 미모에 물이 올랐었다. 물론 가지고 있는 미모에 한계가 있어 왕비보다 아름답지는 못했다. 왕비는 인간성은 어찌 되었든 미모만은 최상급이었으니까. 그러나 매일 보는 아름다운 꽃보다 갑자기 나타난 예쁘장한 꽃이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당연했다. 후작부인은 왕비보다 무려 스무 살이 연상이었는데 온갖 남자들이 치근덕거렸고 후작부인 또한 그 유혹을 기분 좋게 즐겼다. 그래도 왕비의 눈치는 보았어야 했는데, 왕비 라인이면서도 후작부인은 그 상황을 너무 즐겼고 대가는 혹독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현재 후작부인은 왕비의 반대 세력에 들어가 그녀를 씹어대고 있었다.
“미친년. 호박에 줄 좀 그었다고 수박인 줄 아는 년 같으니.”
“고인 물인 사교계에서야 갑작스럽게 외모가 달라진 후작부인께서 눈길을 끄실 수 있으셨다지만 대공 전하의 경우는 다르지요. 비전하께 비할 분은 아니 계실 텐데요. 후작부인 한 분만이라면 비전하께서 이렇게 노여우실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여인을 모르시는 분께 친절을 베푸셔서 알려주시면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혀에 기름칠을 한 것처럼 말하면서 줄리안은 속으로 대공을 떠올렸다. 대공의 아름다운 청회색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에 가득 담기던 경멸. 형수의 발정을 시동생이 풀어줘야 하냐고 말하던 냉랭한 목소리.
무리였다. 그 남자는 차라리 손타 후작부인에게 넘어가면 넘어갔지 왕비에게는 일절 눈길도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은데. 줄리안은 딱한 눈으로 왕비를 내려다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왕비의 성질을 오랫동안 받아주었던 탓에 나름대로 정이 들어 있었다. 왕비가 분한 나머지 미친 것처럼 날뛸 미래가 눈에 선하자 줄리안의 손길은 더 다정해졌다.
“손타뿐만이 아니야. 별 미친년들이 다 달려들고 있어.”
자신도 그 미친년 중 하나면서 자신만은 다르다는 듯 당당하게 말하는 게 보기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비보다 그녀가 흘리는 콩고물에 더 관심이 많은 줄리안은 왕비를 조심스럽게 만져주며 속삭였다.
“다른 분들도 계십니까?”
“조피아도 끼어 있어. 그 간악스러운 계집이 뭘 보낸 줄 알아? 인삼이래. 미친 거 아니야? 스물아홉 살짜리가 인삼 먹게 생겼냐고? 남자면 다 보신에 미치는 줄 아나 보지. 하긴 늙은이들과 자다 보니 머리가 늙어갈 수밖에.”
“슬래그란 백작부인께서 인삼을 보내셨다고요?”
굉장히 노골적인 방식이다. 정력을 키워서 자신과 놀아보자는 뜻인데 이렇게 대담한 방식을? 심지어 조피아는 왕비의 측근 중 한 명이다. 그녀도 인삼을 보낼 때 왕비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왕비의 눈에 거슬려 좋을 것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여인이었다. 손타 후작부인이 왕비에게 잘근잘근 밟힌 것이 고작 여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시도한 것이다.
그렇게나 가지고 싶단 말이야?
줄리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보는 대공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기생오라비 스타일이었고, 몸이 좀, 아니, 대단히 좋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얼굴이 좋은 몸을 다 해치고 있었다. 아우, 난 그런 얼굴은 좀. ‘형님!’ 소리가 절로 나올 만한 외모를 기대했건만 귀부인들의 취향은 좀 다른 모양이다.
내 예상이 틀리다니.
줄리안의 가슴속에 있는 덕후의 마음이 시무룩해졌다. 아, 혹시 다들 대공의 성기 크기를 알게 된 건가? 귀부인들은 앞에서는 ‘여인은 남자의 성기에 관심을 두지 않아요. 남자의 사랑과 손길을 바라지요’라고 말하지만 뒤에서는 남자의 성기는 역시 큰 게 최고라는 둥, 어린애 팔뚝만 했으면 좋겠다는 둥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의 성기 크기를 알게 되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줄스.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대공은 얼마나 컸어?”
줄리안은 깜짝 놀라 왕비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왕비는 아직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생각을 하다 말고 입 밖으로 중얼거린 건 아니겠지?
줄리안이 가만히 내려다보자 왕비가 눈을 떴다.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줄스?”
“아, 예, 죄송합니다, 비전하. 아, 대공 전하 말씀이십니까? ……키를 하문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당연하지. 내가 눈깔이 삐었어? 이미 본 키를 왜 물어?”
흥, 왕비가 고개를 팽 돌렸다.
“뭐, 음…… 놀라운 수준으로 크긴 했습니다.”
왕비가 벌떡 일어났다.
“컸다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대공의 성기가 크다는 소문이 도는 게 아니라 작다는 소문이라도 돌고 있는 것처럼. 줄리안은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굴이 그렇게 잘생기고 키도 크면 거기는 작아야 정상 아니야? 컸어? 얼마나? 놀랍다고? 그게 얼마만큼인데?”
왕비가 속사포로 물었다. 멀찌감치 선 시녀장이 미치고 환장해서 팔짝 뛰겠다는 얼굴로 머리를 짚고 있었다. 줄리안은 시녀장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대답했다.
“얼마만큼이냐고 물어보셔도…….”
“국왕 전하에 비하면 어때?”
“그리 물으시면 제가 대답할 수가 없지요, 비전하.”
단지 하고 줄리안은 말을 조금 끌다가 대답했다.
“그런 크기는 처음 보았습니다.”
왕비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나도 인삼을 보내야겠어. 당장 알아봐. 조피아 그년보다 훨씬 좋은 걸로 보낼 거니까!”
줄리안은 예, 예, 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왕비와 손타 후작부인과 슬래그란 백작부인의 삼파전인가? 줄리안이 조심스럽게 생각했을 때 왕비가 “아니야, 넌 나랑 얘기 좀 더 해. 시녀장! 알아봐, 당장!”이라고 소리쳤다.
시녀장이 인삼을 알아보고 구입하고 시녀들이 사 와서 포장을 하고 대공저로 보내는 긴 시간 동안 왕비는 줄리안을 붙잡고 온갖 귀부인들을 흉보면서 대공을 넘어뜨릴 작전을 짰다. 그리고 줄리안은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한 마디씩을 던지며 현재 귀부인들의 상황과 그에 따른 가십을 모두 들어내고야 말았다.
더는 나올 것이 없겠다 싶을 때쯤에는 이미 창 밖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오전 조였던 줄리안의 퇴근 시간이 눈앞이었다.
“비전하, 줄리안도 퇴궁할 시각입니다.”
시종들보다 한 시간 일찍 교대 시간을 갖는 시녀들 중 한 명이 왕비에게 다가와 시각을 주지시켰다. 왕비가 시계를 보더니 짜증스러운 얼굴로 “시간이 벌써 뭐 이렇게 많이 흘렀어? 젠장할. 일단 가고 내일 다시 이야기해”라며 일어났다. 왕비가 침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시녀들 몇몇이 서둘러 왕비의 뒤를 쫓았다.
“아우, 고생하셨어요.”
왕비에게 시각을 알려주었던 시녀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줄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은요, 무슨. 덕분에 편하게 잘 앉아 있었죠.”
“편하긴요. 여자인 저도 힘들던데 오죽하셨겠어요. 하여간 대단하시다니까요, 우리 비전하께서는 말이죠.”
왜 힘들지?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세상에 어디 있어? 와, 여자들이 기 빨리게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처럼 재밌는 게 어디 있을까. 나도 시녀면 좋을 텐데. 줄리안은 부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시녀를 바라보았다. 시녀의 유니폼을 입고 시녀가 되어서 왕비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왕비가 온갖 이야기를 다 해줄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시녀들은 시종보다 훨씬 가십에 접근하기 쉽다. 후, 부러워. 왜 시녀는 여자만 뽑는 걸까? 남녀 차별이야. 속으로 불평을 중얼거리면서도 줄리안은 겉으로 웃어 보였다.
“속상하셔서 그러신 거죠.”
“줄리안은 참 마음도 넓어요.”
시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정말 왕비에게 질린 듯했다.
“마음이 넓긴요. 본래 비전하께서는 기분을 잘 숨기지 못하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줄리안.”
“네?”
“조심하는 게 좋아요. 궁내부에 줄리안과 비전하의 관계에 대한 투서가 계속 날아들고 있대요.”
시녀가 충고했다. 줄리안은 그런 시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함께 심술궂은 기색도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아, 그런가. 줄리안은 이해했다. 이 시녀가 싫어하는 사람은 왕비가 아니라 자신이다. 왕비가 달라붙는 대로 가만두면서 그녀의 투정을 끝없이 받아주는 자신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척하면서 마음에 걸릴 만한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주의할게요, 고마워요.”
궁내부에 투서가 날아든 건 1∼2년 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왕비와 자신이 정말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외부로 흘러나가 일반 국민에게 노출된다면 대단한 스캔들이 될 테지만 궁정 사교계에서는 왕비가 맛본 수많은 남자 중 한 명이 될 뿐이었다.
“이만 퇴근해야겠네요.”
“조심히 가요.”
연달아 조심하라는 소리를 들어서인가, 조심히 가라는 말 또한 곱게 들리지 않았다. 줄리안은 “일 열심히 해요. 조심하고”라고 말을 되돌려주었다. 그러자 시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 역시 내가 예민했던 게 아니었군. 밤길에 뒤통수 조심해라, 라고 할 때 쓰는 그 ‘조심’이었던 모양이다. 줄리안이 입술을 가만히 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퇴근을 하긴 해야지. 줄리안이 시계를 흘끗 내려다보며 등을 돌리려고 했을 때였다.
“줄스!”
갑자기 왕비가 불러서 등을 돌렸다. 왕비가 달려와 줄리안의 양팔을 붙잡았다. 왕비의 파란 눈이 반짝거렸다.
“아주, 좋은 생각이 났어!”
하, 난 천재인가 봐! 왕비가 자화자찬하며 줄리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왕비가 이런 눈을 할 때 대부분의 일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줄리안은 불안해졌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왕비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숙였다. 귀를 가져다대자 왕비가 빠른 속도로 자신의 계획을 속삭였다.
“아,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
저스틴이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며 조이에게 중얼거렸다.
“걱정된다, 걱정돼.”
조이도 입가를 가린 채 대답했다.
줄리안의 팀원들은 긴장한 채 줄리안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줄리안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응? 으음……, 아. 음, 오. 오오, 으음……. 줄리안의 표정이 바뀔 때마다 팀원들의 심장도 펄떡펄떡 뛰었다. 상사가 잘못되면 부하도 엿 먹는 것이 바로 시종의 세계였다. 줄리안의 일은 곧 모두의 일이었다.
“어때?”
모든 것을 설명한 왕비가 줄리안에게서 떨어져 그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물었다. 줄리안은 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잠시 왕비가 속삭인 계획들을 떠올려보았다.
이윽고 줄리안이 씩 웃었다.
“괜찮은데요.”
“그렇지?!”
왕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시종과 왕비가 씩, 서로를 바라보며 공범의 미소를 교환했다. 그사이 그들을 바라보던 시녀와 시종들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떨며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창 밖의 하늘에는 불길한 노을이 넓게 퍼져나갔다.
열흘 만에 다시 궁을 찾은 클로드 스토메어는 궁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의 남자를 보며 씩 웃었다. 남자가 궁정 인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저는.”
“줄리안 일리드. 평범한 시종이지.”
클로드가 여상하게 말했다.
평범한 시종이라는 단어는 흔히 듣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줄리안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뿐,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 대공은 국왕 부처와 대비, 즉 형과 형수, 그리고 어머니와 오찬을 함께 하기 위해 들렀다. 그리고 그 대공에게 왕, 왕비, 대비는 각자 바라는 바가 있었다. 과연 어떻게 되려나. 줄리안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정중한 무표정을 가장했다. 그러나 너무 궁금한 탓에 무표정을 유지하기가 죽을 맛이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흘끔 보았다. 며칠 전보다 더 반짝거리는 눈을 한 시종은 어서 가시자는 듯 웃었다. 웃지 않으면 몹시 사무적인 무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조금만 웃어도 달처럼 환했다.
“식사는 얼마나 걸릴까?”
클로드가 물어서 줄리안이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현재 시각이 11시 38분이고요, 전하. 12시에 정확히 시작해서 1시 20분쯤에는 디저트를 드실 겁니다. 그리고 티타임을 위해서 자리를 옮기시게 될 겁니다.”
오로지 식사를 위해 1시간 20분을 쓰겠다고.
클로드는 질린 얼굴을 했지만 말을 하진 않았다. 그는 불평을 하는 대신 줄리안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국적도 나이도 가늠하기 어려운, 단정하나 특색 없는 얼굴. 이런 얼굴이 첩자로 쓰기엔 그만이다. 게다가 줄리안 일리드는 백작가 아들이라는 엄청난 배경이 있었다. 그 배경이면 줄리안 일리드가 못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전하?”
클로드가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자 줄리안이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뭐라도 묻었나 하는 손짓이었다.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예? 아, 오늘 전하를 뵈어서 그런 얼굴인가 봅니다.”
줄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겉으로 웃고 속으로는 한숨을 쉬었다. 요즘 내 표정 관리 스킬이 가면 갈수록 허접해지나? 오늘 밤부터 거울을 보고 연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클로드가 물었다.
“왕립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한 것으로 아는데 시종 일보다 더 좋은 직업을 선택하지 그랬나?”
줄리안은 도로록 눈동자를 굴려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앞을 보며 성큼성큼 걸을 뿐이었다. 활을 메면 엘프라고 해도 될 만한 미모에는 무심한 표정만 감돌고 있었다. 줄리안의 마음속에 고슴도치처럼 돋았던 경계심의 가시가 누그러졌다.
“시종도 좋은 직업입니다, 전하.”
“돈을 많이 주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다른 직업이 수입은 더 좋겠지요.”
수입이 좋은 직업이라면 많았다. 비록 공부가 좋아서는 아니었지만 줄리안은 공부를 잘했고 여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요직에 있었고 형들도 유망했다. 그러니 돈을 벌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충분히 더 좋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줄리안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없다. 왕과 왕비, 귀족들. 그들의 사랑과 전쟁. 증오와 배신과 우정과 기적.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었다.
“마법학부 출신이라며? 라이선스를 취득하지 못한 건가?”
클로드는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성의 없는 어조로 묻고 있었다. 잠시 또 가시를 세웠던 줄리안이 천천히 경계심을 버리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라이선스는 취득했습니다.”
“그런데?”
“즐거운 직업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마법사는 이름과는 달리 너무 칙칙한 직업이라서요, 전하.”
“시종은 총천연색 직업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칙칙하긴 시종이 더 칙칙하지 않나.”
다른 직업이 흑백 사진이라면 시종은 3D 안경이지! 자신의 직업을 모욕당한 기분에 줄리안은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무슨 소리야, 이 직업이 얼마나 꿈으로 가득한 직업인데! 모여라 꿈동산 같은 직업을 두고 칙칙하다 못해 거무스름한 군인 나부랭이가 뭐라고 지껄이는 건가. 숫제 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줄리안은 썩어가는 미소를 간신히 입에 걸었다.
“저는 제 직업을 사랑합니다.”
퍽이나.
시종 같은 직업을 사랑하는 새끼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클로드는 속으로 비웃었다.
이야기는 끊겼다. 줄리안의 얼굴에는 웃음 한 자락 돌지 않는 무표정만 자리했고 클로드는 클로드대로 생각 중이었다. 줄리안 일리드는 딱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시종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음을 인정했고 라이선스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도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나 클로드는 그에게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10분만 고문하면 줄줄 불 텐데.
그러나 여기는 전쟁터가 아니다. 백작가의 막내아들을 고문실에 무작정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가 이제부터 대공 전하께서 사용하실 방입니다.”
어떤 문에 다다라 줄리안이 말했다.
사용? 내가 궁 안의 방을 왜 사용하지? 넓고 편하며 완벽한 집사와 메이드가 있는 내 집을 놔두고? 클로드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묻지는 않았다.
제이크와 록스가 양쪽에서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클로드의 뒤에 있던 부하들 사이에서 희미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방은 완벽했다. 귀빈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넓고 완벽하고 아름다운 방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웃음을 눌러 죽이는 소리가 났다.
“저 좆같은 건 뭐야?”
클로드가 물었을 때 결국 참모진 사이에서 웃음이 크게 터져 나오고 말았다.
클로드가 가리킨 것은 그의 초상화였다.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그려놓은 초상화가 거실 한구석에 기대어져 있었다. 인테리어에 화룡점정을 찍은 듯한 초상화는 우아한 거실과 잘 어울렸다. 그러나 다소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림은 확실히 보통 남자인 클로드에게 반가운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비 전하의 선물이십니다.”
황공해하라는 뜻으로 줄리안이 경건하고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미친.”
돌아온 대답은 불온하고 간결했다.
“역시 뗄까요?”
줄리안의 뒤에 서 있던 저스틴이 하하하 웃으며 재빨리 물었다. 비굴한 질문에 클로드는 “당장”이라고 으르렁거렸다.
막내인 죄로 제이크가 초상화를 들고 나갔고 줄리안의 팀은 어깨를 잔뜩 긴장시켰다. 상대는 도살자였고 그들은 언제든지 목이 뎅겅 잘릴 수 있는 가련한 양들이었다.
클로드가 거실에 서서 담배를 문 사이 참모들은 방을 샅샅이 확인하고 있었다. 여인의 섹시한 등을 만지는 것 같은 손짓으로 무생물들을 어루만지며 체크했다. 도청기, 전파 탐지기, 기타 등등을 찾는 것이리라. 줄리안은 무서운 눈을 하고 장소를 체크하는 남자들을 지켜보았다. 사실 그는 워드 하나로 이곳에 아무런 감시 장치가 없음을 증명해줄 수 있었지만 늘 그렇듯 남들이 하게 두었다. 자신은 시종이지 마법사가 아니었고 굳이 워드까지 외울 필요는 없었다.
마법을 쓰면 정년을 채우게 해준다든가 시종장을 시켜준다면 줄리안은 매일 마나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마법을 쓸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왕립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따돌려지고 있었다. 상전이 요구해서 마술사처럼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줄리안은 거의 마법을 쓰지 않았다. 왕궁 내라 어차피 쓸 수 없기도 했지만 쓸 수 있다고 해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실속도 없이 눈에 띄는 건 질색이었다. 시종은 모름지기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 미덕인 직업이었다.
“전하.”
참모들이 거실과 침실들을 애무하거나 말거나 줄리안은 정확한 시각이 되자 입을 열었다.
“오찬에 참석하실 시각입니다.”
클로드가 “가지”라고 말하며 움직였다. 참모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클로드가 픽 입술을 올렸다.
“하던 일들 하셔.”
그러자 참모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입을 열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각하.”
영혼이라고는 1mg도 담겨 있지 않은 인사였다. 클로드는 입술을 비스듬히 올렸지만 그뿐으로 부하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줄리안을 따라 방을 나온 클로드가 복도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뭘 조심하라는 건지, 원.”
“…….”
“쟤들이 나한테 조심하라고 한 게 뭔 것 같아?”
클로드는 줄리안의 얼굴을 관찰하며 물었다.
무슨 말이든 좋으니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줄리안의 얼굴색을 살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줄리안은 생각에 빠진 채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걷더니 “아” 하고 깨달음의 탄성을 냈다.
“길을 잃으실까 봐 걱정하신 게 아닐까요? 왕궁은 거대하고 복잡한 곳이니까요.”
졸지에 미아 취급을 받은 클로드가 기가 막혀 하 하고 소리를 냈을 때였다.
“다 왔습니다.”
안심하라는 듯 줄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의 뒤로 굳게 닫힌 문 한 쌍이 보였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아님 간덩이가 남들의 40배는 되나? 클로드가 줄리안의 어깨를 잡아 문으로 밀어붙였다. 쾅, 소리가 났고 줄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 눈을 보고 클로드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봐, 일리드 백작 가문 막내아드님.”
“…….”
“네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건.”
줄리안이 어 하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클로드도 줄리안의 몸이 뒤로 밀리는 것을 느꼈다. 문이 닫혀 있지 않았다. 줄리안이 양팔로 이상한 원을 그리며 허우적거렸고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클로드는 어쩔 수 없이 팔을 내밀었다. 그의 팔에 잡혀 뒤로 넘어지던 줄리안이 그의 품으로 고꾸라졌다.
줄리안의 얼굴이 클로드의 단단한 가슴에 처박혔다. 윽. 얼굴을 정통으로 갖다 박은 줄리안이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언젠가 벽에 얼굴을 박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딱 이렇게 아팠던 것 같다.
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콧등이 붉은 것이 잘못 부딪친 모양이다. 클로드는 흥, 코웃음 쳤다.
“자업자득이다.”
한 손으로 콧등을 누르고 있는 줄리안을 보며 클로드가 심술궂게 말했다. 자업자득? 내가 뭘 어쨌는데?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 클로드는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식당 안쪽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를 본 줄리안이 서둘러 움직였다. 간신히 클로드보다 먼저 안쪽 문 앞에 도착한 줄리안이 한쪽 손으로 콧등을 누른 채 문을 열어주었다.
“클로드, 어서 오렴.”
문이 열리자마자 새하얀 테이블보를 뒤집어쓴 긴 식탁이 나타났다.
식당은 전체적으로 파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중해 어딘가를 생각나게 할 만큼 깨끗하면서도 정갈한 분위기였다. 동서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는 곳에서 왕은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고 왼쪽에는 대비가, 오른쪽에는 왕비가 앉아 있었다. 클로드는 식탁에 다가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분위기로 보면 왕비나 대비 중 한 명의 곁에 앉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둘 다 내키지 않았다.
“대비 전하의 곁으로 가십시오.”
클로드의 뒤에서 줄리안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줄리안의 말을 들은 클로드가 대비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뒤에서 문이 닫히는 기척이 났다.
클로드는 대비를 향해 걸으며 흘끔 왕비에게 시선을 주었다. 왕비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땋아 올렸고 화장은 청순해서 저번 연회에서 보았을 때와는 다른 인상을 주었다.
클로드와 눈이 마주치자 왕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추파가 아닌 친절하기만 한 미소였다.
그러나 클로드는 왕비에게 웃어주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대비에게 다가가 어머니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머니.”
그러자 대비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입맞춤을 되돌려주었다.
“어서 와, 클로드. 왕명으로 부르지 않으면 입궁도 하지 않는 무정한 동생이 드디어 왔구나.”
에드워드가 투덜거렸다. 클로드는 대비의 옆에 앉으면서 한쪽 눈을 찡그렸다. 자신이 자주 입궁했으면 그건 그것대로 에드워드를 압박했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클로드를 사랑하면서도 자신보다 더 인기가 높은 왕족의 존재를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안 왔다고 타박을 하니 도무지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주 오셔요. 형님께서 늘 보고 싶어하셨답니다.”
왕비가 마치 왕에게 충실한 배우자라도 되는 것 같은 말투로 말을 걸었다. 누가 보면 왕과 왕비가 서로 진실한 사랑을 나누는 커플처럼 보일 것이다. 클로드는 왕비의 가식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픽 실소했다. 어머니도 형도 형수도 다 한통속으로 보였다. 그리고 자신도 그 한통속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들자 아직 식사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회의가 들었다. 그가 회의감에 젖거나 말거나 식탁 위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해졌고 부드러운 대화들이 오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끝에 대비가 물었다.
“클로드, 왜 너는 아무 말도 없니.”
식사를 하는 내내 클로드는 지루한 영화를 억지로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형은 늠름했고 어머니는 자애로웠으며 형수는 상냥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형은 예민한데다 의심으로 가득했고 어머니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들의 건강보다도 결혼을 우선시했으며 형수는 시동생을 유혹하려고 한 여자였다. 그런데 그들 모두 진심을 감춘 채 하하호호 웃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가족들의 목소리를 실제로 듣는 게 좋아서요.”
아무렇게나 대답하자 대비가 웃으며 클로드의 팔을 툭 건드렸다.
“얘는.”
마침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가 앞에 놓였다. 딸기 타르트를 보며 클로드는 드디어 식사 시간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했다. 정말이지 길고 지치는 식사 시간이었다. 클로드는 식사의 중반부부터 포크도 나이프도 들지 않았다. 먹을 의지가 사라질 정도로 연극 같은 점심시간이었다. 타르트라도 먹어볼까 하는 기분에 클로드가 포크를 들었을 때였다.
“참, 네 혼사 말인데.”
클로드는 식탁 위에 포크를 내팽개쳤다. 아, 또, 뭐!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그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어머니였기 때문에 차마 입을 열어 그녀를 타박하지는 못하고 상한 타르트라도 씹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터프하기 이를 데 없는 작은아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지자 대비는 흘끗 며느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건 네 형수의 생각인데 네가 사교계 법도에 좀 약하잖니. 그런데 혼사를 치르려면 기본적인 법도는 알아야 하니까 네 형수 생각으로는 지금부터 법도를 배우는 게 좋겠다고 하는구나.”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며느리의 생각이라고 대비는 여러 번 강조했다. 왕비는 시어머니의 비겁한 언사에 모난 눈을 했지만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늠름하신 영웅이십니다. 그런 분이 사교계 법도 따위를 모르셔서 곤란에 처하시면 안 될 일이지요.”
곤란에 처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텐데 말은 청산유수였다. 클로드는 왕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왕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정순한 여인인 척하는 얼굴에 보란 듯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클로드는 왕비가 저번 연회에서 예법 선생을 구해주겠다며 독설을 뱉었던 걸 기억해냈다. 아, 그 이야기의 연장인가. 클로드는 고작 이런 걸로 의기양양해지는 왕비를 보며 어이없어하다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예법 선생까지는 좀……, 저도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사교계 법도를 모르면 가족에게 누를 끼칠지도 모르고 하니 도우미 정도는 괜찮겠네요.”
그 정도라면 자신도 시간을 낼 수 있겠다며 클로드가 나른하게 웃었다. 대비가 그런 그와 같이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도우미?”
두 개가 다른 건가? 아니면 도움을 받는 건 괜찮아도 지도를 받는 건 불쾌하다는 의미인가? 대비는 작은아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클로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예. 그러나 저는 낯을 좀 가리는 편이니.”
에드워드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낯을 가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는 걸까 의심스러웠다. 그것은 왕비와 대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왕비는 초면의 자신에게 발정이 어쩌고 했던 시동생이 낯을 가린다고 말하는 걸 보며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가족들이 모두 어이없어하는데도 클로드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아는 얼굴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시종 중에는 일리드 군이 있겠군요.”
대놓고 지목하고 있다. 대비는 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 아이가 왜 이러는 걸까? 어머니의 표정을 본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라고 알겠습니까, 어머니. 모자가 눈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왕비가 활짝 웃으며 손뼉 쳤다.
“잘됐네요. 저도 줄리안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왕비의 말에 클로드의 눈썹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왕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해보려 했지만 왕비는 그저 고운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 줄리안 일리드는 대공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30분 일찍 대공저에 도착해서 우아한 철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 너머로 청회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저택이 멀리 보였다.
음, 내가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사가 차로 가는 시간이 5분? 6분? 일단 5분이라고 치고. 저택에서 차가 마중 나오면 5분은 걸릴 테고 내가 가는 데 5분. 그럼 여기까지 15분. 혹시나 생각지 못한 이유로 시간을 쓰게 될 수도 있으니 예비로 3분을 더 두자. 그럼 18분. 5분 일찍 도착해야 하니까, 23분. 그럼 7분 뒤에 초인종을 누르고…….
“누구십니까?”
철문 옆에 있는 경비실에서 젊은 남자가 고개를 쑥 내미는 바람에 줄리안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저기요, 누구시냐고요.”
“줄리안 일리드라고 합니다. 오늘 대공 전하께 오기로 한.”
“아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죠?”
그리고 왜 안쪽을 흘끔거리고 있는 건데?
경비병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줄리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 훑어보았다. 줄리안은 자신이 무례하고 이상한 방문객이 되었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양손을 저어 보였다.
“그,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게 뭔데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이상한 사람이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겠는가. 경비병이 메고 있는 자동 소총을 손으로 쓸어 보였다. 이상한 사람 맞는 것 같은데? 쏴버린다? 그런 태도라 줄리안은 더 당황했다. 그가 상대한 총 든 사람들은 모두 왕궁의 경비병들이었다. 그들은 줄리안을 비롯한 시종 대부분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언제나 ‘안녕하세요, 줄리안’이라고 인사를 건네주는 사람들이었다. 줄리안이 아는 총잡이 중에 이렇게 적대적인 사람은 없었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셔서 정찰하시고 계시는 건데요?”
“아, 아니, 정찰이 아니라…….”
“예, 집사님. 일리드 씨께서 오셨는데 너무 일찍 오셨고 문 안쪽을 노골적으로 정찰하고 계셔서요.”
줄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경비병이 자신의 귀에 걸린 것을 톡톡 두드려 무선 이어폰을 쓰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집사와 통화 중인 듯했다.
“걱정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예, 알겠습니다.”
집사가 경비병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경비병은 탐탁잖은 얼굴로 혀를 차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통화가 끝나고 경비병이 투박스럽게 말했다.
“차가 온다니 기다리십쇼.”
“예.”
줄리안은 재빨리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상류층 사이에서는 정확한 시각에 도착하는 게 예의지만 줄리안은 고용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5분 일찍 오려고 했다. 그러려면 클로드의 집에 도착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버려야 정원을 주파해 집 앞에 도착하는지 알아야 했고 그래서 일부러 30분 전에 도착해 정원의 크기 등을 살핀 것이었는데 이상한 사람 취급이나 받고 말았다. 줄리안은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차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집사가 있었어?
집사가 있었다면 그저 전화를 해보면 끝날 일이었다. 저택에 몇 시까지 도착해야 할까요, 라고 물었으면 집사가 시간을 조정해주었을 텐데. 집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30년 가까이 비어 있던 저택이었다. 관리인이 있을 수는 있다고 여겼지만 설마 집사라니.
도착한 리무진에 타려다 줄리안은 멈칫했다. 리무진에 집사로 보이는 연장자가 타고 있었다. 딱 봐도 몹시 까다로워 보이는 상대였다.
“안녕하십니까, 집사님. 줄리안 일리드입니다. 당분간 대공 전하의 보필을 맡게 되었습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네, 일리드 님. 집, 사, 입니다.”
너는 날 무시하고 남의 집을 흘끔거리는 결례를 저질렀지. 내가 바로 집, 사, 라고! 집사가 있다고! 집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줄리안은 한숨을 쉬며 “예, 집사님.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다시 한 번 정중히 사과했다.
내가 바로 집사다, 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집사의 건너편에 앉아 줄리안은 불편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정원이 아주 아름답네요.”
“왕궁만 하겠습니까?”
“왕궁은 수십 명의 전문 관리사들이 따로 붙어 있습니다. 이 정원도 그런가요?”
관리사란 정원사와는 다른 개념이다. 관리사는 정원사를 고용하고 그들을 이용해 정원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집사가 무심히 대답했다.
“관리인은 저 혼자입니다.”
이게 어디서 서비스 토킹으로 내 마음을 달래려고 해. 집사는 눈을 부라렸지만 그럼에도 그의 입가는 무너지고 있었다. 일리드 백작 가문의 막내인데다 왕립 아카데미 출신, 그리고 지금은 왕궁 시종인 줄리안 일리드의 안목은 상당한 수준일 게 분명했다.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았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눈이 오면 더 아름답겠습니다.”
“과연 왕궁 시종이시라 안목이 높으십니다.”
“직업이니까요.”
줄리안은 안목이 높지 않다는 식의 겸손은 떨지 않았다. 그는 왕궁 시종이었고 당연히 안목이 높았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기껏 다른 사람을 칭찬한 다음에 자신의 안목이 낮다며 겸손을 떠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정원을 좀 더 보여드리죠.”
집사가 인터폰을 들어 기사에게 정원을 한 바퀴 돌라고 지시했다. 줄리안은 흘끗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미묘하게 남아 있었다. 집사는 줄리안이 5분 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일부러 정원을 한 바퀴 돌아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줄리안이 인사하는 사이 차는 한 번 더 정원을 돌았다.
정원을 돈 차가 저택 앞에 섰을 때는 정확히 5분 전이었다. 줄리안은 다시 한 번 집사에게 묵례로 감사를 표하고 집사의 뒤를 따라 저택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클로드는 화면을 통해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선 제이미가 “정말 이상한 남자군요”라고 중얼거렸다. 약속 시각보다 30분이나 일찍 와서 주변 정찰이라니, 평범한 시종이 할 짓이 아니었다.
“첩자라면 어느 나라일까요?”
“글쎄. 우리나라일 수도 있지.”
“예?”
“왕정을 반대하는 단체는 많으니까 말이야. 적국이 아닐 수도 있어.”
내란인가…….
제이미가 불길하게 중얼거렸다. 클로드는 화면 속의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줄리안은 감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맵시 있게 허리끈을 맨 모습이 그의 단정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모든 시종들은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고 줄리안 또한 그랬다. 깔끔한 커트 머리에 깨끗한 피부. 흐릿한 이목구비는 줄리안을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
“당분간은 같이 놀아줘야겠지. 집안이 워낙 좋아서 함부로 건드리기가 어려울 테니까 말이야.”
“정말 첩자라면 큰일이 되겠지요?”
제이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클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리드 장관은 사임해야겠지. 그리고 그의 주변인들도 보안 체크를 다시 받아야 할 거고.”
클로드는 완전히 나신인 상태였다. 그의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클로드는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는 자주 씻었고 자신의 나신을 온 부하들에게 노출했다. 제이미는 클로드의 거대한 성기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좀 가리시면 안 됩니까?”
“네가 보지 마.”
“너무 눈에 띄지 않습니까? 각하께서 좀 가려주시면 제 눈이 편안해질 텐데요.”
클로드의 부관이 되었던 초기에는 악 소리도 많이 냈었다. 내 눈! 내 소중한 눈! 그러나 제이미도 어쩔 수 없이 클로드의 나신에 익숙해졌다. 클로드는 아무 데서나 옷을 벗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 주제에 아무 데서나 씻지는 않는다는 점이 참 특이했다.
“네가 고개만 돌려도 간단하게 해결되는 걸 내가 왜?”
클로드가 코웃음 쳤다. 그러나 그는 곧 의자에 걸어둔 청바지에 손을 뻗었다. 어쨌거나 줄리안이 올라오고 있는데 나신으로 맞을 수는 없었다. 아니, 맞고 싶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줄리안 일리드가 자신의 성기를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 클로드는 매우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고 집사가 나타났다.
“주인님, 일리드 시종님이 도착했습니다. 데려올까요?”
집사의 말에 “내가 가지”라고 말하며 클로드는 셔츠에 손을 뻗었다. 셔츠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클로드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집사가 제이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래도 되냐는 얼굴이라 제이미가 어깨를 으쓱였다.
“옷 벗고 돌아다니시는 게 취미시라서요.”
“정말입니까?”
집사의 희끗희끗한 눈썹이 움직였다. 그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보며 제이미가 “그냥 대충 그런 걸로 해주십시오”라고 애원조로 중얼거렸다. 집사가 가볍게 웃는 사이 클로드는 이미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클로드는 응접실로 걸으면서 줄리안 일리드에 대해 생각했다.
―저도 줄리안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왕비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왜 그녀가 줄리안을 자신에게 보내려고 했었을까. 자신은 그녀를 모욕했고 그녀는 모욕을 쉬이 넘길 것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나중에 왕비에 대해 좀 알아보니 싸움닭도 이런 싸움닭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오로지 클로드의 예법을 위해서 줄리안을 보냈을 리가 없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일까.
“전하, 안녕하십니까?”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줄리안이 우아하게 인사했다. 클로드는 팔짱을 끼고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트렌치코트를 벗은 줄리안은 브이넥의 분홍색 털실로 짠 성긴 니트에 회색 줄무늬 모직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성용 의복을 입은 듯한 모습이었는데도 줄리안에게는 그 옷들이 무척 잘 어울렸다.
“예쁘군.”
그렇게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줄리안이 “예?” 하고 되물었다.
“예쁘다고.”
“뭐가요?”
“자네 말이야, 일리드 군.”
그 말에 줄리안이 괴상한 얼굴을 했다. 나한테 수작 거는 건가? 이런 표정을 한 줄리안의 얼굴을 보자 클로드는 순간 어이가 없어 욕이 나왔다.
“시발, 좆같은 생각 하지 말아주겠어? 사내새끼가 분홍색 옷을 입다니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나름대로 어울려서 한 소리니까.”
이 새끼, 내 거시기를 핫도그 보듯이 한 네가 이럴 수 있냐?! 당장에라도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차마 그 소리는 못 하고 입을 다문 클로드를 보며 줄리안이 생긋 웃었다.
“아, 형수가 사주셨어요. 딱히 제 취향은 아닙니다.”
안도한 듯한 줄리안의 얼굴을 보자 확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클로드는 간신히 참았다.
“형수님의 안목이 높군.”
“백작부인이 되실 분이니까요.”
무뚝뚝한 클로드의 말에 되는대로 대꾸한 줄리안이 생글거리면서 “그럼 시작할까요, 전하”라고 물었다. 1분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클로드가 셔츠에 팔을 꿰자 줄리안이 다가와 단추를 채워주었다. 몇 번이고 칼라의 위치를 재조정한 뒤에 이제 진짜 시작해도 되냐는 듯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하지.”
그때까지만 해도 왕궁 시종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독종인지 알지 못했던 클로드는 무심한 얼굴로 지옥문을 열어 젖혔다.
“시발, 너 미쳤냐?!”
네 시간 뒤, 클로드는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줄리안은 음 하고 애매하게 미소 지으면서 소파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댄스 교습 네 시간째. 한 시간이 지나자 애매하게 존대어가 섞이던 말이 완전한 반말로 돌아섰다. 두 시간이 지나자 줄리안은 일리드 군이 아닌 너, 가 되었다. 세 시간이 지났을 때 클로드는 욕을 하기 시작했고, 네 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악을 쓰고 있었다.
“제 정신은 멀쩡합니다, 전하.”
줄리안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클로드는 완전히 지친 상태로 줄리안을 노려보았다. 미친놈이었다. 네 시간 동안 거의 쉬지 않은 채 춤만 추었는데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놈이라니, 시발, 네가 사람이냐! 처음 한두 시간 정도는 오기로 참아봤는데 네 시간쯤 되자 미칠 것 같았다. 무슨 춤을 네 시간씩 춰?!
“그리고 전하께서는 매일 댄스 연습을 하셔야 하고요.”
“내가 춤을 못 추는 것도 아니고.”
“못 추십니다.”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말하는 줄리안을 보자 클로드는 그 조그만 얼굴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야!”
“로봇도 프로그래밍을 하면 그 정도는 출 수 있을 겁니다, 전하. 사교계에서는 그 이상을 요구하고요.”
한마디로 넌 로봇처럼 뻣뻣해, 라는 말이었다. 클로드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유연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온갖 운동을 소화한 몸이라고 말하자 줄리안이 “그게 문제인가 봅니다”라고 얄밉게 대꾸했다. 아, 저 주둥이를 찢을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클로드는 그러나 네 시간이 넘는 댄스 교육 끝에 정신이 마모될 대로 마모되어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조금 쉬시고 저는 전하께 들어오는 선물과 편지 등을 좀 보겠습니다.”
줄리안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 말에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왜. 나한테도 집사가 있어. 나와는 달리 사교계에 통달한 사람이지.”
“사교계에 통달하려면 주인께서 사교계에 오래 계셔야 가능합니다. 사교계라는 곳은 유행이 봄과 가을처럼 오가는 곳이니까요.”
“…….”
“답례 편지와 선물에도 유행이 있습니다, 전하. 저는 전하의 사교계 매너를 위해 이곳에 왔으니 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부디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빨리 꺼져버리라는 손이었다. 줄리안은 우아하고 세련된 인사를 건네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한 시간 전부터 댄스 교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이미가 혀를 차며 다가왔다. 클로드가 왕실 시종이자 백작가의 귀한 아들을 때려 죽일까 봐 걱정되어 내내 그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오는 길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 클로드에게 내밀었다.
“시발, 쟤 왜 저렇게 독하냐? 생긴 건 말랑말랑하게 생긴 게.”
춤추다 사망하겠다고 클로드가 투덜거렸다.
“그러게요. 수하도 질렸습니다.”
제이미가 진심 무섭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가 보기에 클로드의 춤은 나쁘지 않았다. 처음 한 시간 동안 종종 순서를 틀린 모양이지만 자신이 왔을 때는 완벽하게 추고 있었다. 워낙 외모가 끝내주는지라 춤을 추는 클로드는 아름다웠다.
물론 수준 차이가 있긴 했지.
클로드의 팔에 안긴 줄리안은 한 떨기 꽃 같은 자태로 춤을 췄다. 흐릿한 이목구비에 딱히 잘난 얼굴이 아닌데다 분홍색 니트이기는 해도 엄연히 남자가 남자 옷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꽃은 고사하고 여장 남자처럼 징그럽게 보여야 하는데 줄리안은 완벽했다. 손끝 하나하나가 세련되었다. 그런 줄리안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보니 클로드의 춤 솜씨는 어쩔 수 없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외모가 덮어주고 있어 볼만했는데 왕실 시종의 눈에는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같은 턴을 한 번, 열 번, 백 번. 클로드가 죽고 싶으냐고 윽박지르면 이번에는 같은 스텝을 두 번, 스무 번, 2백 번. 한 시간 동안 보았던 광경을 떠올린 제이미가 어우 하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질렸다.
클로드와 제이미가 마치 귀신을 본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 줄리안은 집사에게로 내려가고 있었다.
‘어느 년이 추파를 던지고 있는지 알아 오는 거야.’
왕비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방해하도록 해. 너무 눈에 띄게 하지는 말고 적당히. 그러려면 줄스 네가 직접 가야 해. 할 수 있겠어?’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금 대공은 사교계의 핫이슈였다. 여인들은 그의 첫 여인이 되기 위해 싸우고 있었고 남자들 또한 전쟁 영웅인 대공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왕의 하나뿐인 동생. 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전쟁 영웅의 등에 업히려는 인간들은 많았다. 온갖 인간 군상이 대공에게로 모이고 있었다. 그런 대공의 바로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데 줄리안이 그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내 눈과 귀가 되도록 해, 줄스.’
왕비가 상기된 얼굴로 하는 말에 줄리안은 최대한 노력하겠다며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었었다. 그러나 그는 왕비가 하자는 대로 할 생각은 없었다. 왕비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금세 이 저택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 뻔했다. 가능한 한 죽은 듯이 지내야 이 재미있는 자리가 유지될 것이다.
‘줄리안 일리드.’
게다가 줄리안에게 첩자가 되기를 종용한 사람은 왕비뿐만이 아니었다.
줄리안은 오늘 새벽 왕에게 불려갔었다. 왕이 보낸 리무진을 타고 아주 조용히 입궁한 줄리안은 왕에게 대공을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다.
‘나는 내 동생을 믿지만 클로드는 전쟁에 대해서나 잘 알지, 사교계 물정은 전혀 몰라. 누군가가 클로드의 순진한 면을 이용해 나를 배신하게 만들 수도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일리드 군?’
자신이 동생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다른 놈들이 동생을 이용할까 봐 걱정이 된다는 뜻이지만 줄리안은 그 말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도록 왕실 시종 일을 해와서 왕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의 의심 많은 성격에 대해 의외로 줄리안은 긍정적인 편이었다. 왕이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게 더 문제지 않겠는가. 그러나 왕은 자신이 동생을 의심한다는 게 수치스러운 듯 몇 번이나 그런 게 아니라고 줄리안에게 강조했다. 줄리안은 왕이 동생을 의심하든 사랑하든 자신이 알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왕의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 여러 번 ‘예, 전하.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주었다.
몹시 드물게도 왕과 왕비가 원하는 것이 일치하는 가운데 줄리안은 더블 스파이, 아니, 1.5 스파이가 되어 대공에게 온 선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초콜릿이나 인삼은 가벼운 축이었다. 호텔 키를 보낸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는.
“이건…….”
줄리안은 흉측하게 생긴 딜도를 두 손가락으로 달랑달랑하게 잡은 채 말을 잃었다. 감히 왕족에게 이런 걸 보내다니, 도대체 어떤 놈인가. 줄리안은 카드를 보았다.
『당신을 위해 내 몸을 열어두었습니다. 하신트.』
헉, 줄리안은 신음을 삼켰다. 하신트라면 하신트 공작이었다. 나이가 있는 편이었지만 워낙 몸을 잘 관리해서 3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40대 중반의 공작님께서 20대 후반의 왕족에게 딜도를 보낸 것이다. 자신의 몸에 넣었던 것으로!
생각보다 훨씬 심한데? 줄리안은 선물과 카드를 하나하나 보고 분류한 뒤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줄리안이 생각하기에 클로드는 너무 예쁘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인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의 인기는 폭발하고 있었다. 그를 공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사람과 사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대부분은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다. 어찌나 욕망으로 뒤덮여 있는지 사생활을 보는 데 익숙하고 또 좋아하는 줄리안조차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런 카드에는 뭐라 답변해야 합니까?”
집사가 잘됐다는 듯이 물었다.
『어젯밤의 뜨거운 연인을 기억하시나요? 샌드맨의 가루가 없이도 당신을 만났으면 합니다.』
한마디로 너랑 꿈에서 뒹굴었고 이젠 현실에서 뒹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우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기냐. 줄리안은 만년필을 들었다.
『조만간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부디 건강하시기를.』
“뵈다니? 주인님은 이런 분들을 질색하십니다.”
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 마음대로 곧 본단 말인가, 곧 보기를. 집사가 줄리안의 카드를 찢으려 했을 때였다. 줄리안이 달력을 가리켰다.
“곧 국왕 전하의 탄생연이 열립니다. 그때 또 모든 귀족들이 올 테니까 보긴 보게 되겠죠.”
“아.”
“만나는 거야 뭘 못 만나겠습니까? 저쪽에서 원하시는 형태가 아닐 뿐이죠.”
“그래도 괜한 오해를 사게 되는 일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건 매우 진부한 거절 문구이니까요.”
줄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포스트잇에 수첩, 이라고 적어 카드 위에 붙였다.
“수첩?”
“네.”
“수첩을 보내자고요?”
“저쪽에서 보내온 대로 장미꽃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수첩은 공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너와는 자지 않겠다는 뜻이죠.”
줄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다음 카드를 들었다.
왕비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이 인삼을 보내기 시작하자 수많은 귀부인들이 질세라 일제히 인삼들을 보내서 테이블에는 인삼이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최근에 온 인삼 선물일수록 더 크고 더 화려하고 포장은 모조리 금색이었다.
“인삼에는 전부 비타민을 보내십시오. 『선물 감사합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기를. 당신의 빛나는 호의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감사를 전합니다.』 이런 문구면 됩니다.”
“너무 성의 없지 않을까요?”
“성의가 너무 있어도 곤란한 상황이니까요.”
“그건 그렇죠.”
집사의 말에 그 옆에 있던 하인이 재빨리 받아 적었다. 그사이 줄리안은 몇몇 귀부인들이 보낸 음탕한 선물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새하얀 레이스 팬티, 진주 끈이 달린 브래지어, 뒷모습을 그린 누드화……. 그래도 공작의 딜도만 한 스케일은 보이지 않았다. 와, 역시 공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줄리안은 깊은 깨달음을 얻으며 남들이 보낸 카드를 정중하게 다뤘다.
“왕실 시종이란 대단하군요. 솔직히 저희는 처음 봤을 때 다 웃었는데.”
하인 하나가 속삭였다. 제법 건장한 몸에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예. 아우, 닭살 돋고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매일 오니까 약간 소름 끼치는 것이…….”
어느 순간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며 하인이 불편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줄리안은 그에게 아무런 대답 없이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아아, 과연. 줄리안은 하인과 하녀 전부 상당히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들만이 모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수도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대공이 얼굴을 봐가며 하인들을 고용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집사의 취향인 듯했다.
대단하군.
줄리안은 음 하고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상당히 화려했다. 아까 그 정원만 해도 몹시 아름다웠다. 그런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돈이 들었을 것이다. 이 호사스러운 집만 해도 그렇다. 수많은 미술품 중 현대 작가들이 눈에 띄었다. 30년 전에는 무명이거나 어린애였을 작가들의 그림. 과연 저 그림은 누가 산 걸까.
집사는 이 집안의 재산 행사에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거지? 잠시 생각에 빠졌던 줄리안은 속으로만 혀를 날름 내밀었다. 조금 알아볼까. 와, 알고 보면 대공의 재산을 집사가 빼돌리고 있는 걸지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일리드 님?”
줄리안의 태도가 이상했는지 하인이 불렀다. 줄리안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예”라고 단정히 대답했다.
“괜찮으십니까?”
아까부터 이상했다. 단정하고 조용한 시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카드를 하나하나 보면서 어딘가 모르게 생기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태도는 정중하고 무심했으며 표정은 그저 사무적이었다. 그런데도 전체적으로 생기가 느껴지니 기묘한 일이었다.
줄리안이 조용히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대공 전하의 존재가 궁정 사교계를 몹시 애태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하아, 그래요……? 하인은 줄리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솔직히 하인은 이런 선물을 처음 보았을 때 기가 막혔고 몇 날 며칠 동안 귀족들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경멸과 혐오라고 해도 제법 즐거웠다. 심술궂은 즐거움.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조금씩 무서워졌다. 다들 미친 것 같았다. 색욕으로 미친 사람들처럼, 남녀 가릴 것 없이 클로드에게 음탕한 선물들을 보내왔다. 솔직히 광기가 느껴지는 선물들도 있었다. 수십 명의 스토커를 동시에 만난 것처럼 온몸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왕실 시종이라는 남자는 마치 자신이 받은 선물이 찻잔 세트라도 되는 양 정중하고 무심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인은 줄리안도 무서워졌다. 줄리안이 고개를 돌려 하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기분을 안다는 듯이 줄리안의 고동색 눈이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궁정 사교계는 매우 화려하지만 그만큼 많은 일들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사교계라고 해도 사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안건들이 논의되고 잔인한 결정들이 내려지지요. 그러다 보니 종종 일탈된 취미를 가지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들 모두 중요한 분들이지요.”
그러니까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하인이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하인을 보던 줄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 통화 가능해?’
“어? 퇴근 중이야?”
줄리안은 실례합니다, 라고 하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방을 나왔다. 약간 쌀쌀한 복도에 서서 그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상대와 통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서 CCTV 카메라가 지잉, 움직였다.
줄리안이 웃으면서 통화를 하는 동안 그 장면은 전선을 타고 클로드의 앞에 있는 스크린에 나타나 있었다. 클로드는 여전히 구겨져 있는 상태로 그 화면을 보고 있었다. 뭐야. 아니라니까. 응, 나도 보고 싶어. 줄리안은 마치 소년처럼 웃으면서 통화 중이었다. 눈이 반짝반짝했다.
“애인인가?”
클로드가 ‘저렇게 독한 놈에게 애인도 있나’라는 어조로 물었다.
“설마요.”
‘저한테도 없는 애인이 저렇게 독한 놈에게 있을 리가요’라는 말을 세 글자로 축약한 대답이었다. 제이미의 대답에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줄리안을 지켜보았다. 어떡해. 진짜? 맙소사, 최고야. 줄리안은 방방 뛰면서 즐거워했다. 하얀 뺨이 발긋해졌다. 뭐가 저렇게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약간 헐렁한 분홍색 니트. 단정하게 자른 머리칼 아래로 쭉 뻗어 있는 목선이 제법 길었다. 시계를 조금 헐렁하게 찬 손목과 깨끗한 손톱, 그리고 휴대전화를 쥐고 있는 손가락.
“처음 보는 타입이야.”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제이미가 화면 속의 줄리안을 지켜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흔한 얼굴인데요.”
“그런가…….”
표정이 다양한 남자. 분홍색 니트도 잘 어울리는 남자. 눈을 반짝반짝 빛내다가도 금세 무표정한 가면을 뒤집어쓰는, 이상한 남자. 첩자일지도 모르고 반란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속 모를 인간.
“역시 눈알은 가져야겠어.”
따뜻한 고동색 눈이 반짝거릴 때마다 언젠가 키웠던 강아지가 떠올랐다. 빛을 받으면 그 털이 저렇게 부드럽고 따뜻하게 반짝거렸다. 결국 전쟁 중에 죽고 말았지만 클로드에게 그 강아지는 언제나 유년 시절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포르말린, 미리 준비해놔.”
“예, 각하.”
제이미가 가볍게 대답했다. 클로드의 말은 농담이 아니다. 그는 줄리안 일리드가 첩자로 판명 나는 즉시 저 눈알을 파버릴 게 틀림없었다. 왜 눈알 따위를 탐내지? 제이미는 클로드의 괴상한 취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랜 시간 철저하게 배웠기 때문에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품을 참으며 스크린에 시선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줄리안 일리드는 어느새 전화를 끊고서 흠, 흠,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무적인 표정을 하고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첩자든 아니든 간에 참 미심쩍은 인물임은 분명했다.
“줄스, 오늘도 친구 만나러 가니?”
일요일 아침 식사 시간, 식구들은 줄리안을 보자마자 물었다.
“예.”
줄리안이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평소의 상큼한 왕실 시종은 어디에도 없었다. 까치집이 된 머리, 하늘색 후드 티셔츠, 촌스러운 청바지, 멍하니 졸린 얼굴. 휴일의 줄리안 일리드는 늘 그렇듯 엉망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쯤 조느라 식사를 입으로 하는지 코로 하는지도 분간을 못 하고 있는 줄리안을 보며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궁에서 널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줄스.”
줄리안이 수프를 퍼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예?”
“아빠가 널 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고.”
“왜요?”
줄리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껌뻑거렸다.
“우리 아들 안 같아서. 아니 그렇습니까, 부인?”
크리스토퍼가 부인인 스칼렛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식탁 위의 꽃이 마음에 안 드는지 화병의 꽃을 만지던 스칼렛이 고개를 들었다.
“말이라고 하십니까. 파티에서 아들을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컹덜컹 뛰는 어미는 저밖에 없을 겁니다.”
농담이 아니라 스칼렛은 줄리안을 만날 때마다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는 했다. 우리 아들이랑 판박이로 닮은 쟤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직후에는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지만 여러 날이 흐른 뒤 다시 보면 또 저게 누구야,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들의 도플갱어를 만난 것처럼 등골이 오싹해지고는 하는데 여름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지경이었다.
궁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돌아오면 구멍 난 체육복을 입고 슬리퍼를 찍찍 끌며 다니는 줄리안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마다 마치 궁에서의 만남은 꿈에서의 만남인 양 아스라해졌다.
그래도 오늘은 체육복 차림이 아니라 멀쩡한 티셔츠에 멀쩡한 바지인 걸 보니 약속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체육복이거나 잠옷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여름보다는 나았다. 여름에는 트렁크인지 반바지인지 구분도 안 가는 반바지를 입고 식탁에 앉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 친구는 누구니?”
“그냥 친구예요.”
“도대체 누구기에 부모한테도 숨기고……. 아빠는 괜찮아. 네가 남자와 연애를 한다고 해도 아빠는 말릴 생각 없다.”
책이 아닌 사람과 연애를 한다는데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생각이었다. 말리긴 뭘 말리는가. 매주 주말마다 만나러 가는 사람이면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하든 좋으니 재빨리 결혼시키고 싶었다.
세상은 양성애자가 더 많아졌고 이성 결혼만큼이나 동성 결혼도 흔해졌다. 그러나 귀족 세계에서는 여전히 이성 결혼이 대세를 이루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 귀족 세계는 전통을 중요시하는 곳이었고 둘째, 결혼은 어차피 훈장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불륜이 당연한 세계에서 결혼은 철저하게 비즈니스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니 굳이 동성 결혼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동성 결혼을 한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정말 드물게도 연애결혼을 한 케이스이거나, 계급이 맞는 결혼을 해야 하는데 이성으로서는 마땅한 상대가 없었던 경우, 혹은 집안끼리의 결합이 간절해서 다른 상대를 염두에 둘 수 없었던 때 동성 결혼이 이루어졌다.
“엄마도 말릴 생각 없다. 법적으로 문제만 없으면 된단다. 줄스, 네가 좋아하는 사람 누구든 좋으니 데려오려무나.”
그러나 일리드 백작 부처는 막내아들 줄리안에게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귀족 사회의 전통을 따르며 충실한 일원으로 사는 것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으니 그저 사람답게 살기나 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책이나 가십에 목매지 말고 좀 더 현실적인 것, 구체적인 것에 눈을 돌려주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줄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 의자에 걸어둔 패딩 점퍼를 입고 가방을 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애타는 부모 마음 따위는 자기 알 바 아니라는 듯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사라져버린 줄리안의 뒤에서 크리스토퍼와 스칼렛은 마주 보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부부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부는 아이를 참 사랑했다.
그 사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줄리안은 금세 저택을 벗어났다. 일리드 가문에는 차가 많았지만 면허가 없는 줄리안은 그 차를 운전할 수 없었다. 운전기사도 있었지만 줄리안은 걷는 쪽을 택했다. 운전기사가 딸린 차를 타는 즉시 줄리안이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모두 부모에게 보고될 것이 분명했다. 줄리안은 그것이 싫었기에 일부러 전철을 탔다.
아아, 또인가.
뒤를 밟는 자가 있었다. 줄리안은 지하철 창을 통해 미행하는 사람을 확인했다. 모르는 얼굴이다. 누가 시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부모님일 수도 있고 왕이나 왕비일 수도 있었다. 다른 귀족일 수도 있었다. 줄리안은 왕비의 총애를 받는 시종이기 때문에 종종 이렇게 미행당했다.
안 되지, 안 돼.
다른 날은 다 괜찮지만 오늘 외출은 곤란했다. 줄리안은 천천히 워드를 외웠다. 천천히 유도한다. 희미한 마법들을 하나하나 덧씌웠다. 지하철 안에서 바람을 느끼게 하고 빛을 본인만 느낄 수 있도록 반사시키고 작은 목소리가 들리게 했다. 이윽고 미행자가 어? 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줄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문이 닫히고 있었다. 그리고 줄리안은 이미 내린 뒤였다.
뒤에서 후다닥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문은 닫히는 중이었고 미행자는 지하철에 갇히고 말았다. 줄리안은 미행을 눈치채지 못한 척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과 같이 움직였다. 지하철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면서도 굳이 남들과 같이 개찰구 쪽으로 올라갔던 줄리안은 개찰구 앞에서 등을 돌려 다시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그다음 지하철이 왔을 때 줄리안은 타지 않았다. 지하철을 세 번 이상 떠나보내며 플랫폼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다음 네 번째 지하철을 타고 움직였다. 그사이 시간이 좀 지났기 때문에 그는 휴대전화를 열어 약속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미안. 지하철을 놓쳤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조심히 와. 난 계속 기다릴 수 있으니까.』
상대는 줄리안을 잘 알고 있기에 지하철을 놓쳤다는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줄리안은 왕실 시종이고, 왕실 시종들은 모두 시간에 엄격했다. 시간에 엄격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직업이었다.
『미안. 차는 내가 살게.』
『밥을 사야지. 하지만 됐어. 이야기나 잔뜩 해줘.』
『넌 정말 좋은 놈이다.』
『너야말로.』
줄리안은 피식 웃었다. 정말 좋은 친구를 두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포근해졌다.
『물론이지, 기다려.』
지하철은 곧 목표한 역에 닿았다.
줄리안은 남들과 같이 개찰구를 올라왔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보며 개찰구를 통과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루시!”
줄리안이 그의 애칭을 부르자 루시라고 불린 남자, 루시드가 양팔을 벌려 보였다. 줄리안은 스스럼없이 루시드의 품에 파고들었다.
“보고 싶었어!”
“나도야, 줄스. 얼마 만이지?”
루시드가 줄리안을 꽉 끌어안으며 물었다.
“3주 만이지. 요즘 우리가 휴일을 못 맞췄잖아.”
키가 큰 루시드는 당연한 듯이 줄리안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줄리안도 루시드의 허리를 안았다. 루시드는 모자를 깊게 눌러 썼고 줄리안도 점퍼에 달린 후드를 썼다. 그리고 둘은 서둘러 지하철역을 벗어났다. 누가 보면 연예인 둘이서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은밀한 태도였다.
둘이 간 곳은 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카페였다.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어 언제나 손님이 없는 카페에 들어간 둘은 구석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오랜만의 데이트인가요.”
주인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오며 인사했다. 루시드가 보란 듯이 줄리안을 끌어안았고 줄리안이 키들거렸다.
“참 보기 좋아요.”
주인이 웃는 사이 루시드와 줄리안이 메뉴를 정했고 그 메뉴는 곧 둘의 앞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앞에 둔 둘이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아, 3주치네. 오늘은 밤새워야겠다.”
줄리안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루시드가 민망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난 별거 없어.”
줄리안에게 노트를 준 루시드가 줄리안에게서 받은 노트를 열어 눈으로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러는 사이 줄리안은 자신이 받은 노트를 곱게 가방에 넣고 대신 노트북 컴퓨터를 꺼냈다.
“왜 없어. 너 그동안 의전팀이었다며. 아, 진짜 재밌는 이야기 많았을 텐데. 나 완전 기대가 커.”
줄리안이 노트북을 켜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루시드도 헤실헤실 웃으며 들고 있던 노트를 가방에 넣고 줄리안에게 딱 달라붙어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공식적으로 앙숙 관계라 할 수 있는 줄리안과 루시드이지만 둘은 사실 절친 중의 절친이요, 솔메이트로서 서로의 휴대전화에 1번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둘이 친구가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달이 구름에 가린 밤, 줄리안은 당시 핫이슈였던 백작부인과 왕의 밀회를 보기 위해 미행을 감행했다가 루시드와 마주치고 말았다. 루시드는 심지어 그 밀회를 보겠답시고 퇴궁도 하지 않고 잠복하고 있었던 차였다. 실로 운명적인 만남이라 할 수 있었다.
이후 둘은 피보다 진한 가십으로 뭉쳤고 벌써 3년째 남들에게는 커플인 척하면서 가십 덕질을 이어가고 있었다.
『J와 R 러브 스토리.』
노트북 화면에 장미로 꾸며진 유치찬란한 화면이 나타났다. 루시드와 줄리안이 에헤헤헤, 이상한 목소리로 웃었다. 줄리안이 먼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루시드에게 노트북을 밀어주자 루시드도 자신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줄리안이 워드를 외웠다.
줄리안과 루시드의 커플 홈페이지는 커플 홈페이지를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만들었다. 자동으로 생성되는 그 홈페이지는 유출이 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홈페이지를 모두 보기 위해서는 커플의 비밀번호가 양쪽 다 제공되어야 했다. 그리고 로그인 기록이 남아 언제 어떤 페이지를 열었는지 확인하게 해준다. 한쪽 비밀번호만 제공되는 경우 볼 수 있는 페이지와 양쪽의 비밀번호가 다 제공되어야 볼 수 있는 페이지는 서로 달랐다. 각 페이지마다 보안 설정을 할 수 있는 홈페이지는 최근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줄리안은 이 홈페이지에 워드로 마법 보안까지 걸어둔 상태였다. 왜냐하면.
『J와 R의 친구들』
이 페이지 때문이었다.
원래 이 페이지는 자신과 친구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해 관계도를 보여주는 페이지였다. 물론 회사 측에서는 커플들에게 재미로 하라고 만들어준 것이었다. 커플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다른 친구들과의 사이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기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시드와 줄리안은 이 페이지로 궁정 사교계의 인간관계를 빼곡히 저장해왔다.
“오랜만에 새 인물 설정이네.”
줄리안의 말에 루시드가 그러게, 라고 대답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줄리안이 새 인물 설정 화면을 열어 A대공, 이라고 입력했다. A대공에게서 왕비로 향하는 화살표에 ‘마음에 안 듦’, 왕비에게서 A대공으로 향하는 화살표에는 ‘마음에 안 듦. 성적으로 끌림’을 선택했다.
“요즘 장난 아니더라.”
루시드가 그걸 보며 속삭였다.
“응, 장난 아니야. 전쟁이지.”
줄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손타 후작부인에게서 화살표를 끌어왔다. A대공에게 향하는 화살표에는 ‘성적으로 끌림’, 왕비에게 향하는 화살표에는 ‘미움’을 선택하자 루시드가 키들거렸다.
“미움이라기보다는 엿 먹이고 싶음, 에 가까울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선택지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미움은 너무 마일드한 느낌인데. 차라리 증오가 낫지 않겠어?”
“그런가?”
줄리안이 손타 후작부인에게서 왕비로 향하는 화살표의 이름표를 수정했다. 증오. 그리고 왕비에게서 손타 후작부인에게로 향하는 화살표를 클릭했다.
해가 질 때까지 줄리안과 루시드는 궁정 사교계 인간 관계도를 수정했다. 둘은 진지한 얼굴로 이 사람과 저 사람의 관계를 정의하고 둘 사이의 히스토리도 적어놓았다. 그러면서 서로 알고 있는 정보를 교환했다.
그러는 가운데 종종 언쟁도 생겼다.
“둘이 싸웠다니까.”
커피를 리필해 온 루시드가 화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관계도를 설정하던 줄리안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아니라니까. 둘이 같이 발코니에 들어갔어.”
“발코니에 들어가면 대부분은 그 짓을 하긴 하지만 아닌 사람들도 있잖아. 둘이 싸웠어, 줄스. 포크로 손등을 찍어버렸는데 뭐가 ‘성적으로 끌림’이야! 강간 욕구도 아니고.”
“싸우면서 섹스로 화해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마조냐.”
루시드가 코웃음 쳤다.
“어쨌거나 둘은 현재 사이가 좋다고.”
“좋아, 사이좋다고 해. 그래도 히스토리에 싸운 건 넣어.”
“딜.”
줄리안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진지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줄리안을 지켜보던 루시드가 줄리안의 귀에 바짝 붙어 속삭여 물었다.
“대공 전하는 어떤 분이야?”
“얼굴 봤어?”
탁탁탁, 줄리안의 노트북 컴퓨터에서 자판 소리가 났다.
“끝내주더라. 조각인 줄 알았어.”
“그 얼굴로 욕 무지 잘해.”
“욕을 해?”
“어. 궁정 연회에서 욕하는데 깜짝 놀랐어. 국왕 전하께도 말 함부로 하는 것 같더라고. 비전하께도, 진짜, 와…….”
“왜? 왜? 비전하께 뭐라고 했는데?”
줄리안이 자판을 치다 말고 고개를 돌리더니 얼굴을 딱 굳히고는 목소리까지 낮춰서 대공 흉내를 내며 말했다.
“이 동네 예법은 어떤지 몰라도 저희 동네에서는 시동생이 형수의 발정을 책임지는 예법은 없어서요.”
으아아, 루시드가 입을 틀어막았다. 줄리안이 척 엄지를 들어 올렸다.
“끝내주지?”
“정말, 정말, 정말 그렇게 말했어?”
“어. 궁정 연회에서!”
줄리안의 말에 루시드가 헐떡거렸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루시드와 줄리안은 서로를 끌어안고 좋아 죽었다. 그 모습을 카페 주인이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한중간에 떴을 때에야 둘은 카페를 나왔다. 한창때의 남자들인지라 커피, 코코아, 과일 주스, 파이, 샌드위치 등을 먹은 뒤였다. 카페 주인은 이렇게 외진 카페에 와서 오후 내내 먹어대는 커플에게 또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둘은 지하철역 앞에서 한 번 더 서로를 끌어안았다.
“우린 또 언제 만나지?”
루시드가 절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음에 휴일 잘 맞춰 보자. 늘 보고 싶을 거야, 루시.”
루시드의 등을 끌어안은 줄리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루시드도 힘을 주어 꽉 끌어안았다.
“나도야, 줄스. 늘, 늘, 언제나 보고 싶어. 내 마음 알지?”
“그럼, 그럼. 너도 내 마음 알지?”
“물론이지! 참, 나 휴대전화 워드 바꿔줘.”
루시드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둘은 휴대전화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줄리안은 매우 복잡한 보안 마법을 서로의 휴대전화에 걸어놓았다. 줄리안이 조용히 워드를 외웠다. 복잡한 수식을 외우는 줄리안의 목소리는 마치 노래하는 것 같았다. 루시드는 고개를 들었다.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패스워드.”
줄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루시드의 입가에 휴대전화를 대었다. 루시드가 속삭였다.
“사랑한다, 친구야.”
“설정.”
줄리안이 또 한참 워드를 외는 동안 루시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줄리안이 휴대전화를 돌려주자 루시드가 휴대전화를 받아 속삭였다.
“사랑한다, 친구야.”
그 순간 루시드의 휴대전화 화면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잠금 마법을 써온 루시드는 바로 확인했다. 줄리안의 전화번호와 메시지가 열리는 것을 확인한 루시드가 “사랑한다, 친구야”라고 한 번 더 말했다. 그러자 주소록에서도, 메시지에서도 줄리안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갈게.”
루시드가 줄리안을 바라보다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다음에 봐, 줄스. 보고 싶을 거야.”
“응, 응.”
줄리안이 또 루시드를 안으며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마치 바퀴벌레 커플들처럼 몇 번이고 그 짓을 반복한 다음에야 헤어질 수 있었다.
왕의 탄생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줄리안은 클로드를 붙잡고 계속 댄스 연습을 시키며 화법을 주의시키고 귀족들의 이름과 작위를 외우게 했다. 첫날 의기양양했던 클로드는 점차 줄리안에게 질려갔고 마지막 날에는 학을 뗀 얼굴로 헐떡거리고 있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제이미가 옆에서 안쓰러운 얼굴로 물었다. 클로드 스토메어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엄청난 체력을 가진 인물로 36시간씩 자지 않은 채 전장을 누빌 수 있는 강철 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손끝 하나하나를 신경 쓰라고 요구하는 왕실 시종의 깐깐함 앞에서는 그의 놀라운 체력도 소용없는 듯했다. 제이미가 그렇게 말하자 클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시발,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력에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기분이야.”
“저런.”
제이미는 클로드의 말에 혀를 찼다. 알 만했다. 줄리안은 내내 턴을 우아하게 하라든가, 등을 세우라든가, 파트너를 너무 세게도 약하게도 끌어당기지 말라든가 하며 잔소리를 해댔다. 손으로 쥐어 터뜨릴 수는 있어도, 잡은 듯 만 듯 부드럽게 감싸라는 것은 클로드에겐 쥐약 같은 요구였다.
어쨌거나 끝났으니 됐지, 시발. 클로드가 몸을 일으켰을 때 줄리안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전하.”
“또 뭐가 있는데.”
클로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제이미는 슬쩍 앞으로 나섰다. 클로드가 왕실 시종을 죽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아무래도 오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일리드 백작과 척을 질 수는 없지. 제이미가 긴장한 눈으로 클로드와 줄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오늘은 턱시도를 입고 춤추셔야 합니다. 옷을 실제로 입었을 때 어떤 느낌인지 아셔야 하니까요.”
클로드가 이를 갈았다. 제이미가 클로드의 앞을 완전히 막아서려고 했을 때 클로드가 손을 뻗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줄리안의 목으로 향하다 허공에 멈췄다. 응? 제이미가 의아하게 바라보았을 때 클로드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심술궂게 웃었다.
“그래?”
“예.”
“꼭 그 짓을 해야겠어?”
클로드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제이미가 상관을 돌아보았다. 뭔가 밑밥을 깐 말투였다.
“예. 꼭 하셔야 합니다.”
줄리안은 밑밥을 느끼지 못했는지 여상하게 대답했다. 그는 까다롭고 고집 센 상전들을 많이 만났었다. 왕, 왕비, 대비, 그리고 왕궁에 초대된 귀족들. 다들 요구도 많고 싫은 것도 많아서 어느 순간에는 결국 선을 그어야 했고 그때마다 저주와 욕설을 들어야 했다. 하도 익숙해져서 이런 밑밥 까는 듯한 말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 가만두지 않겠다. 이런 말을 들어도 이제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그럼 너도 갈아입고 오도록 해.”
클로드가 고갯짓을 했다.
“……예?”
줄리안이 의아한 듯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너도 갈아입으라고. 내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거면 파트너도 제대로 입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째서? 드레스 자락을 밟을지도 모르잖아? 사실 내 옷 때문에 불편한 것보다는 파트너의 옷 때문에 불편한 게 더 많지 않나?”
그럴싸한데?
제이미는 흘끔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멀쩡한 남자였다. 175cm 정도의 남자는 약간 마르긴 했지만 평범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여장을 하면 매우 우스꽝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럼 대충 아래에 뭔가를 두르도록 하지요. 숄이라든가.”
줄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집사에게 부탁하려고 했다. 이렇게 커다란 저택이니 뭔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에 기대어 있는 클로드의 뒤쪽, 책상 위 인터폰으로 팔을 뻗었을 때였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손목을 잡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나도 대충 붙는 옷만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
“전하, 턱시도를 입어보시라 말씀드리는 것은 그 옷의 매무새와 전하의 모습, 그리고 많은 것들을 체크하기 위해서.”
“그래서 드레스를 밟아서 파트너가 넘어지는 건 괜찮다고?”
줄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넘어져도 된다고 말하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네가 입지 않으면 나도 입지 않겠어.”
클로드가 심술궂은 얼굴로 선언했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제가 입으면 입으시겠다고요?”
“당연하지.”
“그럼 입겠습니다.”
클로드의 조금 커진 눈이 줄리안을 향했다.
“뭐?”
“입겠습니다, 전하. 여성용 드레스는 가지고 계십니까?”
“…….”
“아, 집사가 알고 있겠군요.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옷을 갈아입고 뵙겠습니다.”
뭐?
클로드가 한 번 더 물어보려 했지만 줄리안은 가벼운 걸음으로 움직였다. 힘이 빠진 클로드의 손에서 줄리안의 손목이 빠져나갔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뒷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다 제이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드레스를 입겠다고 말한 거야, 쟤?”
클로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각하께서 입으라 하셨잖습니까.”
175cm나 되는 남자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제이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입는다고 할 줄 몰랐지. 이쯤 되면 턱시도는 넘어가자고 할 줄 알았다고, 난.”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각하께서 그렇게 무섭게 구셔도 네 시간씩 춤을 추게 하고야 마는 독종인걸요. 차라리 완전 군장으로 40km를 뛰면 뛰었지, 춤을 네 시간이나 추다니.”
독종 중의 개독종입니다, 라고 제이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클로드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줄리안을 상대로는 일이 계속 어긋난다. 백작이 애지중지하는 아들이라고 해봤자 귀족 가문의 삼남이고 왕실 시종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휘둘리게 되는 걸까. 쯧, 클로드는 혀를 차며 일어났다. 어쨌거나 남자에게 드레스를 입도록 강요했으니 자신도 턱시도를 입어야 했다.
클로드가 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제이미는 계속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클로드가 바지를 갈아입고 드레스셔츠에 팔을 꿰었을 때 제이미가 물었다.
“각하, 오늘 미행조를 다시 보낼까요?”
며칠 전 군인 몇 명이 줄리안을 미행했다. 정찰과 미행의 프로들이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놓치고 말았다. 줄리안을 놓친 남자는 갑자기 산만해졌다며 계속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산만해질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제이미를 비롯한 참모들과 클로드는 줄리안이 미행을 눈치챘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행이 발각되어서 줄리안이 어떤 마법을 사용해 미행자를 따돌린 것이다.
“아니, 당분간은 붙이지 마. 눈치를 챘다면 물러서야지.”
“어떻게 눈치를 챘을까요?”
제이미가 클로드의 재킷을 가져와 입혀주며 물었다.
“글쎄. 그건 모르겠군.”
프로의 미행을 눈치챘다는 건 평소에도 뒤를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왜 미행을 신경 써야 하는가? 줄리안이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이라면 왜 미행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첩자라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줄리안 일리드는 첩자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몸정이 들었나.”
“예?”
몸정? 깜짝 놀란 제이미가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몸정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놀란 얼굴을 본 클로드가 쓰게 웃었다.
“춤바람일지도 모르겠군.”
며칠 춤 좀 췄다고 줄리안이 첩자라는 데 기분이 조금 찝찝해졌다.
“각하, 몸정은 그런 데 쓰는 말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다른 데서 그런 단어 쓰지 마십시오.”
“몸정이 별거인가? 몸 부대껴서 생긴 정이면 몸정이지.”
“각하!”
춤 몇 번 췄다고 몸정 운운하면 뺨 맞기 딱 좋다. 드레스 룸을 나서는 클로드의 뒤에 바짝 붙은 제이미가 절대 안 된다며 잔소리를 해댔다. 클로드는 코웃음을 쳤고 애가 단 제이미가 “몸정이라는 단어 안 쓰시겠다고 해주십시오. 적어도 왕궁에서는 절대 안 쓰시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각하, 제발”이라며 애원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전하, 오셨습니까.”
클로드는 걸음을 멈췄다. 응접실 안의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반짝반짝 빛났고 그 아래에서 줄리안이 드레스를 입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클로드를 보자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오라는 듯한 그 미소는 보드랍고 순수하였지만.
“역하네요…….”
차마 클로드가 하지 못한 말을 그의 뒤에 있던 제이미가 대신 중얼거렸다.
“이 집에 있는 드레스가 그거밖에 없었어?”
클로드가 물었다. 그러자 줄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선대 대공비께서 워낙 늘씬하셔서요. 입을 수 있는 게 이 옷밖에 없었습니다. 산달에 입으셨다고 하더군요.”
줄리안이 입은 분홍색 드레스는 슬립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줄리안은 맨 어깨를 드러낸 채 슬립을 입고 서 있었다. 맙소사. 보통 남자인 줄리안이 입은 그 슬립은 매끄러운 실크로 만들어져 몸 위를 흘러내리며 굴곡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즉, 가랑이 사이의 굴곡도 보인다는 뜻이었다. 분홍색 슬립 드레스를 입은 남자. 다리 사이에 뭔가를 숨긴 듯한 불룩함.
“다리 사이에 새끼 다이너마이트라도 넣었냐?”
클로드가 질린 어조로 물었고 제이미가 그제야 그쪽을 보았는지 웩 하고 한 번 더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도리어 한쪽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본격적이 되었으니 에스코트부터 점검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에스코트 말입니다, 각하.”
클로드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후, 내쉰 뒤 다시 줄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한테 핑크 슬립을 입은 변태를 에스코트하라는 말인가, 지금?”
“각하께서 시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화장이라도 할까요?”
“그랬다간 죽는다, 너.”
줄리안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진짜 환장하겠네. 클로드는 팔짱을 낀 채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줄리안은 이상한 옷을 입고, 뒤꿈치가 한참 삐져나온 샌들을 신고 서 있었다. 가슴은 납작하고 납작해야 하는 다리 사이는 불룩했다. 각진 어깨 밑으로 조금 근육이 붙어 있는 팔뚝이 보였다.
누가 봐도 여장 남자였다. 아니, 이건 매우 못생긴 여장 남자였다. 그냥 여장 남자라고 하는 건 다른 여장 남자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았다. 군대에서는 종종 장기자랑을 여는데 그러면 꼭 보게 되는 게 여장 남자들이었다. 그중 이렇게 성의 없고 못생긴 여장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최소한 거시기는 다들 감춰주었었다.
“야, 그냥 옷 입고.”
“전하,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이행하였으니 이제 에스코트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클로드는 이를 악물었다. 네가 하라고 했잖아? 줄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줄리안의 그 말이 클로드의 내면에 있는 쓸데없는 호승심에 불을 붙였다. 클로드가 성큼성큼 걸어가 줄리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해보자, 새끼야.”
클로드가 이를 가는 걸 보면서 줄리안은 속으로만 피식 웃었다. 그러게 왜 여자 옷을 입으라고 해? 못 입는다며 주뼛거릴 줄 알았나 보지? 사실 줄리안은 이것보다 더 심한 옷도 입을 수 있었다. 여자 옷 좀 입는 게 대수인가? 상전을 얌전하게 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와인이 묻었다며 난리 치는 귀족을 달래기 위해 땅바닥에서 절을 해본 적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줄리안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았다. 그게 뭐? 궁정 사교계의 가십을 보는 대가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에스코트부터 틀리셨습니다. 다시 해주십시오, 전하.”
“가, 각하.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멀쩡한 남자가 분홍 슬립 드레스를 입고 있는 꼴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는 제이미가 그렇게 말하고 도망치려 했지만.
“도망가면 죽는다, 제이미 블레서.”
클로드가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제이미는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금붕어 똥이라고만 했어도 도망갔을 텐데 풀 네임을 부르는 걸 보니 진심인 듯했다. 후, 어쩔 수 없지. 제이미가 한숨을 쉬며 책상에 기댔다.
클로드가 이를 악물고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청회색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줄리안은 순진한 척 미소 지었지만 클로드가 이를 갈며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이 요망한 새끼야”라고 말하는 통에 어색하게 굳어졌다. 줄리안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클로드가 소리쳤다.
“손!”
줄리안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클로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마치 에스코트라기보다는 개 조련…… 그러나 줄리안은 클로드의 얼굴을 보고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더 지적했다가는 왕실 시종이고 나발이고 걸어서 이 저택을 나갈 수 없을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줄리안은 그 손을 잡았다. 클로드의 손을 잡기 위해 움직이는 줄리안의 손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우아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