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왕의 탄생연
왕의 탄생연 당일, 모든 시종들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조심하라고 했지, 줄리안 일리드.”
루시드가 지나가면서 속삭였다. 루시드의 팀원들도 줄리안의 팀원들에게 으르렁거렸다. 자신의 팀원들 또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줄리안이 “그쪽이야말로”라고 되받아쳤다. 하지만 루시드와 줄리안은 둘 다 진심이었다. 정말 조심하라는 뜻으로 오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경고였다.
줄리안은 사무실에 들어가 팀원들에게 오늘의 업무를 적은 프린트를 나눠주면서 “잠깐 좀 다녀올 테니까 보고들 있어”라고 말하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는 곧장 걸어서 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일리드 군, 어서 와.”
왕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중이었다. 그의 전용 헤어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그들의 어시스턴트들이 그의 집무실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왕의 양쪽에서 헤어 디자이너와 어시스턴트가 머리를 손보았고 스타일리스트는 왕의 옷에 걸 브로치를 계속 대보고 있는 사이에서 줄리안은 “격조하였습니다, 전하”라고 말하며 궁정 인사를 해 보였다.
“이제 보고를 들어볼까?”
왕이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줄리안은 흘끔 주변을 확인했다. 온갖 제3자들로 어지러운 곳이었다. 이런 데서 보고를 하라고?
“어떠한 보고를 하문하시는지요?”
“내 동생에게 붙은 날파리들에 대한 보고 말이야.”
왕이 피식 웃었다. 줄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 이야기를 이런 곳에서 하라는 왕의 명령이 진정인지 아니면 테스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줄리안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자 왕이 한 번 더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클로드를 견제하고 있다는 건 온 국민이 다 아는 이야기인데 뭘 그래.”
뭔지는 몰라도 왕의 예민한 기분을 거스른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줄리안은 왕에게 “송구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뿐, 그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왕은 그런 줄리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 단정하지만 흔한 외모의 시종이 좋았다. 어디가 좋으냐고 한다면 역시 그의 눈이 가장 좋았을까. 반짝거리는 눈은 아무런 욕심 없이 그저 빛나기만 한다. 왕은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도 생각했다. 필터 없이 투명하게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준다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처음 왕비 이샤와 줄리안이 불장난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왕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샤는 남자를 수집하는 여자였고 줄리안은 수집 대상이 되기 딱 좋은 타입이었으니까. 흔하지만 하나쯤 컬렉션에 채워 넣고 싶어지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둘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이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이샤는 줄리안을 인간적으로 아꼈다. 그 여자에게 인간적인 부분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줄리안의 존재였다. 이샤는 줄리안을 남자로 대하지 않았다. 도발도 없었고 오만함도, 교태도 없었다. 줄리안과 있을 때의 이샤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왕비로 길러져 어리광이 심하고 제멋대로인 아가씨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줄리안과 클로드의 염문설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왕은 그 염문설에 기분이 상했다. 줄리안은 자신의 시종이었다. 왕비를 돌보는 것은 자신의 시종이 할 일이었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동생을 돌보는 것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매일 싸우고 서로 저주를 퍼붓는다고 해도 왕비는 어쩔 수 없이 왕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왕과 싸울 뿐 왕의 반대편에 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생은 언제든지 반대편에 설 수 있었다.
유치하다는 건 안다. 그리고 클로드가 알면 또 경멸당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심 없이 어떻게 이 자리를 유지하겠는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일리드 군.”
“송구합니다.”
“일리드 군.”
줄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은 줄리안의 태도에서 고집을 읽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는 절대로 클로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왕은 일어났다.
“내가 곤란하게 만들었나?”
그 말에 줄리안이 “아닙니다, 전하”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줄리안의 태도가 너무나 어색해서 그가 매우 곤란했음을 알 수 있었다.
왕은 줄리안을 데리고 집무실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다음에 그는 줄리안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그 미소를 본 줄리안이 안심한 듯 미소를 돌려보내왔다.
귀여운 남자라니까. 난 참 죄가 많기도 하지.
이렇게 단둘이 있게 되었다고 안심하며 웃다니. 왕은 자신이 완벽한 이성애자라 아쉽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보고를 듣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줄리안이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정치적인 목적이 조금이라도 포함된 서신들은 모두 목록에 넣었습니다.”
왕은 봉투를 열어 목록을 확인했다. 받은 날짜, 보낸 사람, 그리고 내용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혀 있었다.
줄리안은 왕이 목록을 보는 걸 보며 속으로 안심했다. 왕의 첩자로 대공저에 다니는 동안 마음이 많이 불편했었다. 처음에는 괜찮았었는데 가면 갈수록 마음에 부담이 많이 되었다. 대공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피를 보지 못하면 미친다는 둥, 여자 다섯이서 그의 정욕을 달래야 한다는 둥, 거칠고 극단적인 소문이 돌던 것과는 달리 그는 좀 사납지만 멀쩡한 상식인이었다. 욕을 하고 때릴 것처럼 굴긴 했어도 결국 그는 줄리안의 뜻에 따라 하루에 너덧 시간씩 춤 연습을 했다. 차라리 적군 소굴에 혼자 들어가는 편이 낫겠다고 투덜거려도 제법 성실한 태도로 임했다. 요령을 부리거나 계급을 앞세워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서신을 본다고 하자 의심하지도 않고 내주기까지 했었다.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클로드는 어땠지?”
왕이 무심하게 물어 줄리안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예?”
“그 애의 성격이나 행동 같은 게 어땠냐고 물어보는 거야.”
“좋은 분이신 것 같았습니다.”
좋은 분.
왕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줄리안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래?”
“네. 하지만 정치에 대해 뜻이 있으신 분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치에 뜻이 없는 것 같으니 안심하라는 말인지, 아니면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이었다. 전자라면 불쾌하지만 후자라면 왕에게는 좋은 이야기였다.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말인가?”
“예. 그보다는 정말 군인이신 분이더군요. 성실하시고 직설적이셨습니다.”
흐음. 왕은 다시 목록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록에는 왕정에 반대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많이 보였다. 그는 가만히 목록을 바라보다 말했다.
“나가봐.”
“예, 전하.”
줄리안이 궁정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오자마자 집무실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왕의 말대로 그가 동생인 대공을 견제하고 있다는 건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줄리안을 보며 ‘아아, 네가 왕이 대공에게 보낸 첩자였구나’라는 눈을 했다. 줄리안은 불편한 마음에 빨라지려는 발걸음을 간신히 늦추며 평소처럼 걸어 집무실을 나왔다.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줄리안은 가능한 한 안도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집무실에서 나와 사무실로 걸었다.
“넌 여기 왜 있어, 저스틴.”
그리고 왕의 집무실 앞 복도 구석에서 저스틴과 마주쳤다. 줄리안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저스틴이 미소 지어 보였다.
“너무 안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줄리안.”
“그렇게 오래 지났어?”
줄리안은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20분이 지나 있었다.
“전하의 집무실에 가면 가신다고 이야기를 하지, 찾아다녔잖아요.”
저스틴이 투덜거렸다. 줄리안은 앞서 걸으면서 “있으라니까 왜 찾아다녀?”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온다는 사람이 안 오니까 그렇죠.”
“어련히 올까.”
“아까 루시드 놈들이랑 부딪쳤었잖아요.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하는 게 아닌가, 순간 걱정이 되더라고요.”
루시네 팀과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아진 거지?
줄리안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줄리안과 루시드는 사이가 안 좋은 척했던 게 아니었다. 친한 척을 하지 않았을 뿐 나름대로 무뚝뚝하게나마 서로를 챙기고는 했다. 조심해. 너도. 그렇게 서로 말하며 지나치고는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의미가 변질되었다. 밤길 조심해라. 너나 조심해. 이런 식의 뉘앙스로 바뀌어버렸고 그렇게 고착되었다. 대체 왜? 줄리안도 루시드도 의아한 부분이었지만 어쨌거나 친한 척을 해서 좋을 건 없으니 아예 원수 콘셉트를 유지하게 되었다.
“내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줄 알아?”
줄리안의 말에 저스틴이 허세 그만 떨라는 얼굴로 말했다.
“약하잖아요, 줄리안.”
“그래도 보통 남자만큼의 힘은 있어.”
“루시드는 키가 크고 덩치도 있는데 어떻게 줄리안이 루시드를 이기겠어요? 줄리안이 마법을 쓴다는 건 알지만 왕궁에서 마법 사용은 허가를 받아야 하잖아요.”
저스틴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줄리안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바쁜 하루가 시작되었다. 눈이 핑핑 돌았다. 왕의 탄생연이다. 신년 연회만큼 중요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다음으로 중요한 자리였으며 대비가 대공의 신붓감을 물색한다는 소문이 나서 온갖 미혼 여성들이 총출동하게 된 자리이기도 했다.
“대비 전하께서 마음에 두신 분이 있다던데요.”
록스가 줄리안에게 속삭였다. 줄리안이 식탁 위의 이름표를 확인하며 “누구?”라고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사실은 귀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대비가 대공의 신붓감을 이미 결정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최근 대공의 집을 오가며 본 수많은 서신들을 떠올리는데 록스가 말했다.
“에밀리 하신트요.”
하신트?!
줄리안은 깜짝 놀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에밀리 하신트? 하신트 공작의 무남독녀 말이야? 그리고 하신트 공작은 대공에게 딜도를 보낸 장본인이었다.
아, 혹시 그게 하신트 공작이 아니라 에밀리 하신트가 보낸 건가?
우와, 미혼 여성인데 딜도를 보냈다고? 진짜? 심지어 아버지 이름으로? 맙소사, 미친 거 아니야?
놀랍다…….
하신트 공작이 알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근엄한 공작이 자신의 이름으로 딜도가 보내졌다는 걸 알면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줄리안은 머릿속으로 공작이 기절하는 걸 상상해보며 키들거렸다.
“어? 왜 대공 전하의 이름이 없어?”
왕족의 테이블에 왕, 왕비, 대비의 이름만이 있어서 줄리안이 물었다. 그러자 조이가 줄리안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전하께서 아리스트 대공은 귀족들과 친해져야 하니 귀족 테이블로 보내라고 하셨대요.”
왕따네.
그 순간 줄리안은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 왕이 예민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욕 듣다 보니 정 들었나.
줄리안은 한숨을 참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럼 하신트 공작 옆에 있겠네.”
“네. 일부러 에밀리 하신트 양 바로 옆으로 했어요.”
“대비 전하께서 일부러 그렇게 노리신 것일 수도 있지.”
정말 에밀리 하신트를 원한다면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고 줄리안은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런 것이었으면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전쟁만 해온 아들인데, 아무리 피가 통하지 않은 아들이라지만 가족의 테이블에서 빼다니.
하하. 조이가 웃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닌 거 알잖아요, 줄리안.”
줄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대공의 이름표를 잡아 톡톡 턴 뒤 에밀리 하신트 옆에 잘 세워두었다. 이날을 위해서 몇 날 며칠을 너덧 시간씩 춤췄던 대공이었다. 지옥에 온 사람같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도 욕은 할지언정 요령을 부린 적은 없었는데.
줄리안은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만 후 하고 한숨을 뱉은 뒤 테이블을 뒤로했다. 아직도 점검해야 할 테이블이 산더미였다.
테이블의 이름표를 다 확인하자 입장 순서를 체크할 때가 왔다. 줄리안의 팀을 비롯해 의전을 맡은 일곱 팀이 모두 회의실에 들어섰다. 가장 연장자인 니콜라스가 “확인해주세요”라며 입장 순서를 읊기 시작했다. 이 백작부인은 저 공작부인보다 뒤에 입장해야 한다, 그 자작부인은 저 후작과 최근 헤어졌으므로 멀리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줄리안 또한 문제가 있어 보이는 부분을 지적했다. 며칠 동안 회의와 회의를 거듭해 결정된 입장 순서가 다시 한 번 정리되고 있었다. 그때 경비병 한 명이 들어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렇게 일찍?
니콜라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귀빈실로 모시세요. 귀빈실은……”이라고 말을 이으려 했다. 줄리안이 재빨리 손을 든 뒤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는 전하의 방이 있으십니다.”
“방? 본인의 방이 왕궁에 있으시다고?”
니콜라스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다시 한 번 물었다. 줄리안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서쪽 별관입니다.”
“심지어 로열이라고?”
서쪽 별관은 왕족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통칭 로열이라고 불렸다. 니콜라스가 의아한 듯 프린트를 펄럭거렸다. 어디를 보는지 알 만했다. 분명 식탁의 이름표를 보고 있으리라.
“일리드, 식탁의 배치는 확정인가요?”
니콜라스가 물었다. 이 배치도를 왕족들도 확인했냐는 뜻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줄리안은 망설였다. 그들이 대공을 따돌리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불편했다. 그러자 조이가 재빨리 줄리안의 뒤에서 대답했다.
“예, 확정입니다.”
왕족이 원했다, 는 대답이었다. 니콜라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면야.
“방으로 모셔주세요. 먼저 도착하셨지만 입장 순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니콜라스의 말에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을 나섰다.
다시 일이 계속되었다. 줄리안은 입장 순서를 확인하고 주방과 최종 회의를 끝냈다. 알레르기 부분을 철저하게 확인하고 기호성 부분 또한 놓치지 않았다. 주방도 큰 연회 때문에 초토화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줄리안의 팀과 셰프 팀이 마주 보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곧 입장이 시작되었다.
귀족들이 입장하고 있을 때 줄리안은 입장 순서를 조율하느라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귀족들이 입장을 끝냈을 때는 퇴장 때 원활하도록 그들의 자동차 위치를 바꾸고 스태프들을 접대하는 데 또 한참의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고 곧 교대 시간이 다가왔다. 줄리안의 팀원들은 녹초가 되어 탈의실로 향했다. 줄리안 또한 팔다리가 나무토막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사무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그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줄리안은 곱았던 등을 똑바로 펴며 대답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제이미 블레서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블레서 중령님.”
줄리안이 먼저 인사하자 제이미가 묵례했다.
“안녕하십니까, 일리드 시종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줄리안이 작은 소파를 가리켰다. 그러면서 차를 타 오려 했다. 그러나 제이미는 소파에 앉을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중령님?”
줄리안이 그를 부르자 제이미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줄리안은 문득 대공이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오늘 내내 한 생각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가족 테이블에서 쫓겨났다. 가뜩이나 대공은 양자였고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공을 테이블에서 쫓아내면 그는 왕족이 아니라고 온 세상에 공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각하께서…… 파티장에서 사고 칠까 봐 걱정이 돼서요.”
제이미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입이 좀 험하셔야죠. 전 들어가지 못하는데 개지랄 떠시면 곤란해지는 건 저희거든요. 각하의 참모로 살면서 별의별 꼴을 다 보긴 했지만 왕궁에서까지 그런 꼴을 보고 싶진 않아서 그러는데.”
거기까지 말한 제이미가 흘끔 줄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떻게 말할까,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줄리안이 이미 근무가 끝났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근무가 끝난 사람한테 자신의 상관을 좀 돌봐줄 수 있느냐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을 것이다. 대공은 내년에 서른 살이 되는 멀쩡한 성인이다. 그리고 줄리안은 대공보다 네 살 연하였다. 그런 줄리안에게 대공을 맡아달라는 말이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홀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제이미에게도 귀가 있었다. 클로드가 왕족 테이블이 아닌 귀족의 테이블에 앉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왜? 이렇게 노골적인 경계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전쟁이 끝났다 이건가?
안쪽의 상황을 알아야 했다. 혹시 클로드가 정말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모함이라도 받게 되면 클로드는 위험해진다. 클로드만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다. 클로드라는 거대한 함선이 침몰하고 클로드의 참모들 모두 수장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으셨겠지……?
클로드가 아무리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해도 그도 오래도록 대공이자 젊은 원수로 살아왔다. 수많은 일들을 겪었으니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분별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만 가족 일이잖아.
제이미가 걱정하는 것은 이 일이 가족이 관계된 일이라는 것이었다. 클로드는 가족에 대한 의리가 있었다. 의리만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큼의 기대치도 있었다. 평생 가족을 가까이에 둔 적이 없었기에 약간의 환상도 있는 것 같았다.
클로드는 강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소속감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군대라는 집단에 계속 적을 두고 있는 것도, 멀리 있는 왕족들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도 결국 그가 소속감을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제이미는 종종 생각해왔었다. 그래서 그는 클로드가 차라리 사랑을 했으면 했다. 연애, 사랑. 자신에게 속한 단 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클로드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클로드는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끽해야 부하들, 군대,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의 왕족들뿐이었는데 정작 가족들이 클로드를 배신하고 있었다.
제이미는 줄리안을 흘끔거리며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심했다. 좀 돌봐달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 되는 소리여야 입이라도 떼어보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줄리안이 말했다.
“제가 가볼까요?”
줄리안이 물었다. 그는 약간 지친 얼굴이었지만 미소 짓고 있었다. 제이미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잠깐 들러보는 것뿐이니까요.”
줄리안도 클로드에게 마음이 쓰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성실한 태도로 임해주었는데 자신은 가르치는 척하면서 그에게 접근하는 이들에 대해 왕과 왕비에게 보고했다. 평소라면 시종이란 원래 이런 거지, 라고 생각하며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클로드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줄리안이 평소 상대하던 귀족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 그가 왕실 시종은 왕족을 위해서라면 귀족들을 몇 번이고 배신하는 존재라는 걸 당연히 알 거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비무장으로 있던 사람을 총으로 쏜 양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클로드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왕실 시종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작고 한정되어 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해주어 이 죄책감을 떨치고 싶었다.
줄리안은 인터폰을 들었다. 그는 잠시 고민 끝에 시종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르신, 줄리안입니다.”
‘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니요, 딱히 일이 있는 것은 아니옵고……, 잠시 홀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어서 여쭤보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시종장이 말이 없었다. 줄리안은 창 밖을 보면서 시종장이 뭐라고 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물었다.
‘왜 들어가려는 건데?’
“제가 요 며칠 아리스트 대공 전하를 보필했었습니다. 퇴궁하기 전에 잠시 전하를 확인하고 가려고요. 턱시도나 이런 것도 전부 제가 체크했었기 때문에.”
‘줄스.’
역시 변명이 약했나.
줄리안도 말하면서 변명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종장이 말을 끊고 있었다. 줄리안이 혀를 차면서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제이미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이야기할까요? 제이미가 입만 벙긋거려 물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예, 어르신.”
‘대공 전하 상황이 지금 좋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자네 현재 상태는 어떻지?’
줄리안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는 잠시 생각 끝에 대답했다.
“일하는 데 지장 없습니다.”
‘그럼 전하의 시중을 들도록 해. 분위기가 아주 이상하거든.’
“얼마나……?”
‘제법 험악하다는 것만 알아둬. 당장 들어가도록 해.’
전화가 끊기고 줄리안이 일어났다. 제이미가 어떻게 되었냐고 눈으로 물었다.
“허가 받았습니다.”
그리고 줄리안이 사무실 문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제이미가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사무실 문이 잠기자 줄리안이 다시 움직였고 제이미가 빠른 속도로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갑자기 줄리안이 멈춰 섰다. 그는 지급받은 업무용 휴대전화를 들어 주소록을 열었다. 그리고 한참 스크롤을 내리더니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 줄리안? 거기서 뭐 하세요?’
줄리안의 팀에서 부팀장을 맡고 있는 조이였다.
“조이. 너 엘리엇 팀의 다니엘과 친하지?”
‘예, 뭐 궁에서는 제일 친하죠.’
“다니엘에게 연락 좀 해줘. 작은 문 뒤에서 보자고.”
‘예? 아니, 왜 거기 계시냐니까요. 퇴근 안 하신 거예요?’
“일이 좀 생겨서 못 했어. 미안한데 다니엘에게 바로 연락해줄 수 있어? 급한 일이야.”
험악?
줄리안은 속으로 험악하다는 게 무슨 뜻일지 생각했다. 무슨 일인가가 터진 게 아니고서는 험악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대공을 만나기 전에 전후 사정을 알아야 했다. 사정도 모르는 상태로 시중을 들 수는 없었다. 궁정 사교계에 익숙하지 못한 클로드의 시중을 들려면 자신은 자세하게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 클로드의 수습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일리드 시종님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파티가 열리는 홀과 복도 사이에는 홀만큼이나 거대한 스태프 룸이 있다. 거기서 시종들은 여러 가지를 준비한다. 스태프 룸으로 들어가려는데 경비병이 제이미를 저지했다. 제이미는 잠시 계급으로 찍어 누를까 고민하다 그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줄리안의 팔을 잡았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줄리안의 몸이 뒤로 딸려 나왔다.
“중령님?”
“잠시 저 좀 보십시오.”
제이미가 줄리안을 복도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투명한 플라스틱 박스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주사기가 조신하게 누워 있었다.
“마법학도셨으니 주사 정도는 놓으실 수 있으시겠죠?”
“……그렇긴 합니다만.”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꽂으십시오. 힘으로 상대할 생각은 버리세요. 상대는 투우보다 강력합니다.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입니다. 기회를 놓치기 전에 주사를 놓으세요.”
하늘같은 상관을 두고 소라는 둥 괴물이라는 둥 하고 있다. 줄리안은 주사와 제이미를 번갈아 바라보다 혀를 찼다.
“불법 아닙니까?”
줄리안이 미심쩍게 묻자 제이미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쳐 보였다.
“절 믿으십시오. 이 제이미 블레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퇴근하려는 사람을 붙잡고 상관이 사고 칠까 봐 걱정된다며 좀 가보라고 매달렸던 사람이 자신을 믿으라고 한다. 줄리안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제이미가 한 번 더 자신의 두툼한 가슴을 쳐 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이 건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제이미 블레서가.”
“예, 예. 잘 부탁드립니다.”
영혼 없는 어조로 대꾸한 줄리안이 제이미를 스쳐 지나가 스태프 룸으로 들어가버렸다. 어, 어 하는 사이였다. 제이미는 민망해진 얼굴로 줄리안이 사라진 문을 돌아보았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첩자라니, 세상 말세다, 진짜.
제이미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을 때 문 안쪽으로 들어간 줄리안은 재빨리 작은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작은 문 바로 옆에서 다니엘이 “줄리안, 여기예요!”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사이 작은 문이 텅,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카트를 미는 시종들이 “비켜, 비켜!”라고 소리치며 들어왔다. 카트가 줄줄이 들어오는 동안 줄리안과 다니엘은 그들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이윽고 카트들이 완전히 들어와 문이 닫히자 줄리안이 다니엘을 끌고 작은 문 근처 구석으로 끌고 갔다.
“내가 좀 바빠서 본론으로 들어갈게. 대공 전하, 무슨 일 있으셨어?”
다니엘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열었다.
“무슨 일인지 먼저 말씀해주시면 안 됩니까?”
“대니.”
“사람을 부르시고는 다짜고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시면서 왜인지는 말씀 안 해주시면……, 저도 이야기하기가.”
다니엘이 질질 끌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줄리안은 시간이 없었으므로 강수를 놓았다.
“마법, 한 번은 걸어줄게. 네가 필요로 하고 내가 구현할 수 있는 마법이라면 뭐든지.”
“우와, 진짜요?”
다니엘이 눈을 빛냈다. 시종들은 늘 줄리안이 마법을 거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왕궁 내에서 마법은 금지였고 줄리안도 마법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종들은 줄리안이 마법을 사용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빨리 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어?”
“아, 어디서부터 말씀드리지. 그러니까, 음.”
마법을 걸어준다는 말에 다니엘이 들뜬 목소리로 음, 음 하고 생각에 빠졌다. 그러자 줄리안이 다니엘의 팔을 붙잡았다.
“테이블이 다르셨다는 건 알아. 파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말해.”
“아, 그러면 거기서부터 이야기할까요. 전하의 생일에 건배를 하게 되었거든요. 선창을 대비 전하께서 하시는데.”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에드워드를 위하여.
대비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놀라 ‘아, 이런. 실수했네요’라고 말하며 클로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 말이 정말 실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비는 친아들인 왕을 위해서 공적으로 대공을 물 먹인 것이다. 한마디로 기어오르지 말라는 경고였다.
다니엘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줄리안은 재빨리 작은 문을 열고 홀로 들어섰다.
―내 작은아들 클로드의 형이자 군주인 에드워드를 위해서.
대비는 그렇게 말을 바꿨다고 했다. 들으라는 듯이.
음험한 동네이고 이 정도 일은 비일비재했다. 친아들인 왕을 상대로도 이런 수를 쓰는 대비였다. 딱히 대공이 양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원래 이 바닥이 이렇게 음모가 넘치는 동네였다. 그래서 줄리안은 이곳을 사랑했다. 비인간적이면서 정말 인간적이었다. 다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였고 그래서 모든 감정들은 생기를 띠었다. 구경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만큼 재미있는 곳도 드물었다.
그러나 클로드는 여기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교계의 생리를 알지 못했고 이런 일에 면역도 없었다.
―왕을 위하여.
클로드는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줄리안은 조심스럽게 클로드 쪽으로 다가갔다. 클로드는 대비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에밀리 하신트와 하신트 공작이 서 있었다. 아마 대비는 클로드에게 에밀리 하신트와 춤을 추라고 권하는 것 같았다. 줄리안은 그 근처까지 가서 걸음을 멈췄다. 클로드가 정말 곤란해지거나 혹은 그가 욕설을 줄줄이 내뱉기 시작하면 그를 데리고 빠질 생각이었으나 지금까지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괜히 왔나? 클로드도 대공이고 성인이고 왕족이다. 그 스스로 잘 컨트롤할 수 있었―.
“시발, 싫다고 말씀드리잖습니까. 대비 전하.”
그럴 리가 없지.
줄리안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대비는 클로드의 욕설에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클로드는 마음을 정한 듯 얼굴에 빈정거리는 웃음까지 띠고 있었다.
“그동안 일리드 군에게 사교술을 배웠다면서. 그 보람이 있어야지 않겠니? 하신트 양은 훌륭한 아가씨야. 엄격한 아버님께 배워서.”
“제가 버르장머리 없는 고아라서요, 전하.”
“클로드!”
대비가 클로드의 이름을 나지막이 외쳤다. 클로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담자, 그녀가 짐짓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그 말은 어미의 실수예요. 실수로 앙금을 갖는 것은 사나이답지 못해요.”
“사나이가 아닌가 보죠.”
클로드가 코웃음 쳤다.
클로드는 대비가 하나뿐인 아들 운운할 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러게. 클로드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과 당신은 확실히 피가 통하고 있군요. 거짓말을 하는 얼굴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클로드, 이 어미의 말을 좀 들어보세요.”
대비 클로디아는 초조하게 클로드를 불렀다. 기어오르지 말라는 경고를 할 셈이긴 했지만 아예 그를 놓을 생각은 아니었다. 클로디아에게는 왕인 친아들만큼이나 이 거칠고 사나운 양아들도 소중했다. 그들이 클로디아의 양날개가 되어 그녀의 지위를 확고하게 해주고 있었다.
아까 너무 심했나?
클로드가 조금 상처 입긴 해도 삐뚤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클로드는 이제까지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했었다. 그래서 이 정도도 괜찮으리라 여겼는데 의외로 반항이 거셌다. 대비는 하신트 공작 부녀에게서 떨어져 클로드를 데리고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아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아까 그 말은 정말 실수예요. 클로드가 내 아들이 아니라니. 내가 사시사철 걱정하고 챙긴 사람은 클로드, 내 멀리 계신 아드님밖에 없었어요. 어느 누구도, 이 나라의 왕이자 친아들인 에드워드도, 나는 그렇게 챙겨본 적이 없어요. 오로지 먼 곳에 있는 내 아드님뿐이었어요.”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린애를 달래듯 부드러웠다.
그는 어머니인 대비 클로디아의 장단점을 모두 알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그렇듯이 클로디아 또한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장점은 다정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세상 그 어떤 어머니보다 자애로운 태도로 아들들을 대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단점은 사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아들들의 고통 따위는 무시할 사람이었다.
사실 이기적이라는 것이 대비만의 단점은 아니었다. 그건 상류층 라이프스타일의 핵심이었다. 클로드는 마뜩찮은 눈으로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대비가 클로드 하고 보드라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래, 모두 이렇게 사는 거지. 클로드가 입가를 누그러뜨리며 대답하려 했을 때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뒤로 요즘 매일 보았던 얼굴이 보였다.
줄리안 일리드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클로드는 줄리안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는 기분이 뒤틀렸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의 가족들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내 겪어왔던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줄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평소의 그 얄밉게까지 느껴지는 싱그러운 미소를 짓지 않았다.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고동색 눈동자. 반짝반짝하는 그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불쌍한가?
아니면 걱정이라도 되는 건가?
쓸데없는 걱정이다, 첩자 씨. 네 안구의 안위나 걱정하지그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클로드는 줄리안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몇 주 전 신년 연회에서는 자신의 시중을 들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흘끔거리던 눈이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춤을 추라 하셨나요, 어머니.”
클로드가 줄리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그런 클로드의 시선을 보지 못한 채 대비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잘못 당기는 바람에 잔뜩 뒤엉킨 작은아들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모양이었다. 대비는 조심스럽게 클로드의 재킷 칼라를 붙잡았다.
“이제 아드님도 전장이 아닌 사교계에서 지내시게 될 텐데 익숙해지셔야지요.”
“익숙해지라고요.”
“네. 내 뜻대로 아드님이 행동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요, 결혼도 아드님이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셔도 되지요. 그러나 사교계에 익숙해질 필요는 있으니까요.”
클로드의 입술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래요.”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그 말투가 의미심장해서 대비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클로드가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비가 클로드의 시선이 닿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 클로드가 말했다.
“익숙해져야겠지요.”
클로드는 대비를 그 자리에 두고 지나쳐 앞으로 걸었다.
줄리안이 의아해졌는지 흘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클로드가 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하는 얼굴이었다. 뭐가 있나? 주변을 본 줄리안이 클로드와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클로드가 바로 앞에 서자 줄리안이 궁정 인사를 했다.
“전하, 줄리안 일리드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손.”
머리 위에 간결한 한 마디가 떨어졌다. 응? 내가 이 말을 언제 들었더라. 마치 개를 조련하는 듯한 이 말투, 잠깐.
줄리안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들었다. 클로드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가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며 줄리안이 말을 잃자 클로드가 내민 손이 아닌 반대쪽 손을 움직였다. 줄리안의 손을 잡아 내밀고 있는 손 위에 올려놓았다.
“저, 전하.”
줄리안이 질색하는 얼굴로 나지막이 그를 질책했다. 그러자 클로드가 더 환하게 웃으며 벌꿀같이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개같이 더러운 파티에 나가야 한다며 나를 존나 굴린 게 바로 너야, 줄리안 일리드.”
줄리안이 난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하, 연회에서 욕하시면 안 됩―.”
“너한테 달렸어.”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속삭였다. 클로드가 줄리안을 잡아끌려고 했지만 줄리안이 양발에 힘을 주고 움직이지 않았다. 하, 이 비리비리한 게 힘쓰게 만드네. 클로드가 힘을 줘 당겼고 줄리안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클로드가 줄리안을 한 팔로 받치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순순히 한 곡 출래, 아니면 내가 개지랄을 떠는 걸 볼래?”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품속에 숨겨져 있는 주사기를 떠올렸다. 주사기로 확―, 아니, 그러기엔 눈이 너무 많다.
클로드가 말하는 개지랄이란 어떤 수준일까? 줄리안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클로드가 평소처럼 욕설을 지껄이기만 해도 궁정 연회에서는 충분히 개지랄로 간주될 수 있었다. 사실 아까 대비에게 욕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개지랄에 속했다. 그러나 클로드는 아직 개지랄의 ㄱ도 떨지 않았다는 태도였다. 줄리안은 난처한 얼굴로 클로드의 뒤에 있는 대비를 바라보았다.
대비는 클로드가 시종인 줄리안에게 춤을 청했을 때부터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줄리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줄리안이 눈으로 물어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줄리안을 외면했다.
대비가 자신을 외면했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줄리안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자신보다 훨씬 큰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주 상냥하게 웃고 있었는데 줄리안은 그 순간 주먹을 부르는 미소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잘, 부탁, 드립니다.”
줄리안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고 클로드가 키들거렸다. 클로드의 리드로 플로어에 나가자 악단이 다시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줄리안과 클로드는 매일 너덧 시간씩 연습했던 춤을 유려하게 선보였다.
어머, 의외로 시종이 춤을 잘 추네요.
모르세요? 일리드 백작 가문의 막내잖아요.
아, 어릴 때는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던 그 막내아드님이요?
온갖 말들이 귀에 꽂히고 있었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팔 아래에서 한 바퀴 돌면서 어금니를 악물었다.
걱정되어서 왔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내가 다시는 네 걱정을 해주나 봐라. 역시 사람은 하던 대로 살아야 돼. 괜히 남 걱정 했다가 내 꼴이 이게 뭐람.
윽. 하이힐에 밟힌 줄리안이 신음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허리를 안고 움직이면서 “왜?” 하고 속삭여 물었다.
“별거 아닙니다.”
손타 후작부인인가? 줄리안은 고개를 돌리며 범인을 확인했다. 범인은 눈이 마주치자 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군. 줄리안은 혀를 찼다. 오늘 진짜 재수가 더럽네. 줄리안이 속으로 중얼거렸을 때였다.
윽.
줄리안이 또 신음했다. 클로드는 주변을 흘끔 돌아보았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줄리안이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자는 마치 목을 그어 보이는 듯한 미소를 보냈고 줄리안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지? 클로드가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며 춤을 추고 있을 때 세 번째 하이힐이 다가왔다. 허공에 떠오른 하이힐이 마치 매처럼 타깃을 고정했다. 그리고 쏜살같이 꽂혔다.
아, 시발.
줄리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클로드가 줄리안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줄리안의 몸이 허공에 살짝 떴다. 그리고 목표물을 잃은 하이힐이 바닥에 잘못 내려왔다. 악. 여인의 억눌린 비명이 들려 줄리안이 눈을 뜨자 발목을 접질린 귀부인이 자신을 무시무시한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시발, 좆같아서 춤을 못 추겠네.”
클로드가 플로어에 멈춰 섰다. 줄리안이 깜짝 놀라 클로드를 잡아끌었다.
“전하, 욕 안 하신다면서요.”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클로드가 슬쩍 눈썹을 들었다. 그는 줄리안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코웃음 쳤다.
“내가 언제 욕을 안 한다고 했어? 개지랄을 안 떤다고 했지.”
“이것도 그, 그거에 들어갑니다.”
“그게 뭔데?”
“개…… 랄, 말입니다.”
“말을 정확히 해봐, 줄리안. 개지랄? 개부랄? 개…… 랄이 뭔데?”
우. 줄리안이 차마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냥 빨리 끝내고 싶은 기분으로 춤을 이어갔다. 확실히 가르친 보람이 있었는지 클로드의 더러운 입과는 달리 그의 움직임은 우아했다. 아름다운 외모에 우아한 춤사위. 그리고 개지랄과 소부랄. 아아, 그냥 땅으로 꺼지고 싶다. 줄리안은 속으로 이동 마법 수식을 수십 번 외우면서도 차마 워드로써 입 밖에 내놓지는 못한 채 클로드와 춤 한 곡을 끝까지 췄다.
이제 살았구나 싶은데 클로드가 뻔뻔하게도 플로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줄리안이 깜짝 놀라 클로드를 잡아끄는데 클로드가 물었다.
“아까 너 밟은 쌍년들은 누구야?”
“욕하지 마세요!”
줄리안이 파르르 떨었지만 클로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욕먹을 만하니까 욕하지. 어디 있어?”
“들어가세요, 제발.”
“그 두 년만 잡아서 족치고.”
“전 괜찮습니다, 전하. 제발 일단 들어가시고…….”
“난 안 괜찮거든. 미친년들은 지들이 뭘 타고 다니는지 머릿속에 없나? 하이힐은 잘못하면 발등 뼈를 부술 수도 있어.”
클로드가 이를 갈면서 웃었다. 워낙 얼굴이 아름다워 미소도 참 화사하고 고왔다. 그러나 그 미소는 한기가 샘솟는 우물 같았다. 줄리안은 그 미소를 보는 순간 클로드가 두 명의 귀부인을 작살낼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제발, 전하. 가시자고요, 제발요.”
줄리안이 거의 빌다시피 애원했다. 그러자 클로드는 선심 썼다는 듯이 플로어를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성큼성큼 발코니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이, 거긴 발코니잖아. 줄리안은 머리를 잡아 뜯고 싶어졌다. 그는 차마 클로드가 나간 발코니로 같이 나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왕이 다가왔다.
“일리드 군.”
“예, 전하.”
줄리안이 재빨리 왕에게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며 왕이 싱긋 웃었다.
“클로드와 사이가 많이 가까워졌나 보군?”
“전혀 아닙니다, 전하.”
내가 저런 놈을 걱정하다니. 시발, 차라리 세계 평화와 기후 온난화를 걱정하겠어! 그게 훨씬 실용적인 걱정이야! 줄리안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으나 겉으로는 무심히 대답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는 탓에 왕은 줄리안이 클로드에게 화가 났음을 바로 알 수가 있었다.
하긴 방금 일은 줄리안에게 계속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온갖 귀부인들이 줄리안을 물고 늘어지며 괴롭힐 테니 한동안 그의 인생은 진창에 빠진 것마냥 괴로워질 게 틀림없었다.
“미안, 내 동생이 그대를 괴롭힌 것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보상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군.”
“괜찮습니다, 전하.”
“곤란해졌다는 건 알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
……예?
줄리안의 눈에 설마 하는 빛이 서렸다.
“클로드가 기분이 많이 상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대는 며칠 동안이나 클로드와 같이 지내지 않았나. 그와 가장 친한 사람인 셈이니 그에게 가서 위로를 좀 부탁하고 싶은데.”
줄리안은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클로드가 나간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발코니들은 모두 커튼이 쳐져 있었기에 그가 무엇을 하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저, 저, 밀회의 상징 같은 발코니에 나가 단둘이 있으라고? 모두의 눈앞에서 같이 춤을 춘 다음에?
줄리안의 당황한 눈이 왕을 향했다. 그는 왕을 가만히 바라보다 흘끗 고개를 돌려 에밀리 하신트를 바라보았다. 아아. 줄리안은 알 것 같았다. 에밀리 하신트는 하신트 공작의 영애. 대비는 자신의 오른쪽 날개인 왕만큼이나 자신의 왼쪽 날개인 대공도 중요시했다. 왼쪽 날개가 오른쪽 날개에 기어오르는 건 용납하지 않지만, 그러나 왼쪽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비는 클로드의 부인으로 유력 가문의 영애인 에밀리 하신트를 골라놓았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 클로드가 에밀리 하신트와 결혼하는 것은 마음 불편한 일이 된다. 그는 가능한 한 클로드의 세력권을 좁히고 싶었으므로 에밀리 하신트와의 혼인을 깨버리고 싶었다. 대공이 에밀리 하신트를 소개받은 자리에서 시종과 춤을 추고 그와 발코니에 나갔다는 건 상당한 추문이다. 에밀리 하신트는 모든 귀족의 앞에서 모욕을 당한 셈이었다. 그러니 이 혼인은 깨질 수밖에 없다.
내가 어쩌다 스캔들 한중간에 들어오게 되었나…….
평소라면 눈을 빛내면서 보았을 텐데 정작 그 안으로 들어오자 거지같은 일들뿐이었다. 이래서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줄리안은 거듭 후회하면서 입을 열었다.
“예, 전하. 가보겠습니다.”
“그대는 정말이지 믿음직스러운 시종이야.”
왕이 줄리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퍽이나. 줄리안은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왕에게 절을 해 보인 뒤 물러났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난간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던 클로드는 의외라는 얼굴로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줄리안은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클로드는 겨우 살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좀 가여워졌다.
발코니 문을 닫은 줄리안이 클로드의 담배를 바라보다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이걸로 피워보세요, 전하.”
“시가네?”
“왕궁에서만 피우실 수 있는 시가입니다. 전속이거든요.”
줄리안의 말에 오 하고 클로드가 감탄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무심했다. 시가이거나 말거나 관심 없는 얼굴은 조금 우울해 보였다. 미인의 우울한 얼굴은 마치 노래하는 시인처럼 환상적이었다. 줄리안은 자신이 얼굴에 구애받는 타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클로드의 입가에 시가를 가까이 했다.
“오늘 서비스가 좋네, 일리드 시종.”
클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피우던 담배를 눈 위에 비벼 끄고 시가를 물었다. 그러자 줄리안이 워드를 외웠다. 줄리안의 손가락에서 불꽃이 일었다.
“왕궁에서 마법을 쓰면 안 되는 게 아니었나?”
클로드의 질문에 줄리안이 쓰게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클로드가 고개를 들었다. 함박눈이 송이송이, 소리 없이 내리는 것이 아름다웠다. 클로드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줄리안이 말을 이었다.
“마법으로 눈을 내리게 하고 있는 겁니다.”
“대규모 마법인데.”
“국왕 전하의 생신이니까요. 많은 마법들이 동원되지요.”
“왕의 탄생연과 눈이 무슨 상관이야?”
고작 생일 연회 때문에 날씨를 바꾸는 대규모 마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여전히 눈을 향해 있었다.
“성스러운 느낌이 드니까요. 일종의 마케팅인 셈입니다.”
“병신 같네.”
클로드가 피식 비웃으며 시가를 피우기 시작했다. 한 모금을 마시고 뱉은 그가 의외로운 얼굴로 시가를 내려다보았다.
“맛있잖아?”
자신이 피워온 모든 담배를 통틀어 가장 맛있었다. 물론 클로드가 피우는 담배의 대부분은 싸구려였다. 사실 그도 몇 번 시가를 피워본 적이 있었다. 본인이 돈을 주고 산 적도 있었고 남이 피우라고 준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담배며 시가도 이렇게 맛있었던 적은 없었다.
“왕궁의 자랑이지요.”
“시발, 올 때마다 피울걸. 아니, 아예 몇 박스 가져가야겠어.”
“유출 금지라서요, 안 될 겁니다.”
“난 대공이야. 좆같이 피를 흘려가면서 이 나라를 지키고 왕명으로 전쟁을 하고 또 해서 이 나라에 엄청난 이득을 안겨준 장본인이지. 그런 나한테 시가 정도도 못 준단 말이야?”
“…….”
“아들이라며. 동생이라며. ……이 정도는 주겠지, 시발.”
줄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클로드가 음산하게 키들거렸다. 그 순간 줄리안이 콜록, 기침했다. 날이 너무 추웠다. 이렇게 눈 오는 날, 시종 유니폼만 입고 실외에 나와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콜록, 콜록, 콜록. 줄리안의 기침이 계속되었다. 가까스로 기침이 멈추자 줄리안이 “죄송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클로드가 재킷을 벗더니 줄리안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입고 있어.”
“아, 아닙니다, 전하. 이건.”
“입고 있어. 아깐 미안했어.”
걱정해주고 있던 줄리안에게 화풀이를 한 셈이었다. 줄리안이 곤란해졌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줄리안은 그동안 클로드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 대가로 줄리안은 하이힐에 두 번이나 밟혀야 했다.
클로드는 그렇게 넘어가고 싶었지만 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줄리안이 재킷을 다시 클로드에게 돌려주려 하며 말했다.
“전하, 저는 시종이고 제가 어떻게 전하의.”
“아, 시발. 그냥 좀 입어라.”
줄리안이 돌려주는 재킷을 빼앗듯 받아 다시 줄리안의 머리 위에 씌워주며 클로드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줄리안은 결국 “감사합니다”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클로드의 재킷을 입었다. 클로드는 보기보다 근육이 있고 뼈대도 굵은 편이라 줄리안에게 클로드의 옷은 한참 컸다. 마치 꼬맹이가 큰형의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재킷도 옷이라고 조금 더 따뜻해졌다.
“예쁘다.”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줄리안이 시선을 들었다. 클로드가 난간에 양팔꿈치를 올려놓고 시가를 문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줄리안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캐럴의 어느 구절이 생각나는, 눈 오는 밤.
줄리안은 눈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워드를 외웠다. 수식과 수식을 이어서 하나의 마침표를 찍었다.
“어…….”
클로드가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너인가?”
안개꽃이 하늘에서 팔랑팔랑 내리고 있었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뒤로 내리는 꽃을 바라보았다. 클로드와 하얀 꽃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줄리안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클로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 하얀 꽃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꽃이 소복하게 쌓였다. 세상이 멈춘 듯한 신비로운 광경. 꽃이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꽃이 떨어지는 것인지 자신이 꽃 속으로 떠오르는 것인지, 감각이 혼란을 일으킨다.
어느새 춥지 않아졌다. 클로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줄리안이 아마 보온 마법을 건 듯했다.
“서비스가 정말 후한데. ……형이 보낸 건가?”
클로드가 묻는 말에 줄리안이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예.”
“아아, 어쩐지.”
마법을 계속 쓸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클로드가 피식피식 웃는데 줄리안이 조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마법 사용 허가는 받지 않았기 때문에 걸리면 시말서감입니다.”
“…….”
“그러니 부디 모르는 척해주셨으면 합니다.”
클로드가 난간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줄리안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줄리안의 고동색 눈동자가 반짝거리지 않는다. 클로드는 그 사실에 조금 초조한 기분을 맛보았다. 평소에는 온갖 것들을 보며 반짝거리던 눈이 왜 자신을 보면서는 우울하게 가라앉았는가.
“왜 이렇게 해주는 거야, 줄리안 일리드?”
“딱히 해드린 건 없습니다.”
“내가 불쌍해?”
줄리안은 그 말에 잠시 동안 자신이 클로드를 불쌍하게 여긴 걸까 생각해보았다. 불쌍해? 아니, 클로드가 뭐가 불쌍한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굶어가는 애들이 불쌍하지 클로드는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그는 대공이었고 부자였고 권력자였고 미인이었다. 뭐가 문제인가. 하나도 가엾지 않았다.
그러나 클로드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자니 조금 마음이 움직였다. 원래라면 마법 따위 필요하지 않은 한 절대 쓰지 않는데 오늘은 쓰고 싶어졌다. 클로드의 얼굴에서 우울한 회색기를 가시게 할 수 있다면 시말서를 쓰게 되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마법을 써보고 싶었다.
“전하가 불쌍하다기보다는…….”
줄리안이 말을 멈추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클로드도 같이 줄리안의 시선이 멈춘 곳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희미한 불빛에 비친 그림자만이 쓸쓸하게 갇혀 있을 뿐이었다. 클로드도 그 의미 없는 것을 마치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보고 있었다. 줄리안과 클로드는 거무스름한 것에 불과한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윽고 줄리안이 말했다.
“전 그냥 제가 불쌍합니다, 전하.”
푸하하, 클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 와. 같이 술이나 마시자.”
클로드가 줄리안을 지나쳐 발코니 문을 열었다. 줄리안은 재빨리 워드를 읊어 마법을 취소하면서 클로드의 재킷을 벗어 팔에 걸었다. 그리고 문 안으로 들어오자 클로드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아, 나는 그냥 퇴근이나 하고 싶은데!
오늘 같은 날은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이나 담그는 게 최고인데 저 제멋대로인 대공은 알아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일단 대공을 쫓아가야 했다. 대공은 작은 문이 아닌 큰 문으로 걷고 있었다. 열어주려나? 줄리안은 경보하듯 걸으면서 생각했다. 대비는 대공이 안에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경비병들이 과연 열까 싶었다. 줄리안이 거의 클로드를 따라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클로드는 경비병들에게 제지당하고 있었다.
“전하, 송구하옵니다만 아직 퇴장은.”
“열라고 했다, 시발 새끼들아.”
“전하, 송구하―.”
“전하? 이 새끼들이 단체로 쥐약을 먹었나. 내가 누군지 몰라? 근위대장부터 다 같이 좆 잡고 뺑뺑이 한 번 돌게 해줄까? 내 계급이 뭐라고, 새끼야?”
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탕― 열렸다.
군인에게 최고가 누구라고 물으신다면 역시 장군이리라. 왕이고 대비고 다 무슨 소용인가. 계급장이 최고인 것을.
줄리안은 차마 뒤에 서서 노여움을 억누르고 있을 대비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줄리안이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드는 귀찮다는 듯이 “빨리 와, 줄리안” 하고 재촉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먹은 독이니 원샷!
줄리안은 절벽에서 다이빙하는 기분으로 홀에서 나왔고 그 순간 뒤에서 문이 닫혔다. 줄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건 옆에서 보는 게 최고인데 어쩌다 내가 여기에 서 있나.
줄리안은 대공의 뒤를 따라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공의 방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군데군데 이해할 수 없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대공의 명령으로 주방에 전화를 걸어 술을 부탁한 줄리안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는 권총을 발견했다.
“전하, 이게 웬 총입니까?”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호신용.”
“총기가 반입이 되었다니 신기한 일이네요.”
“뭐, 에드워드가 허락해준 건 아니야.”
그 말에 줄리안이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목소리로 클로드를 불렀다.
“전하…….”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줄리안의 눈에 탈의 중인 그가 보였다. 클로드는 이미 드레스셔츠를 벗고 있었다. 답답하셨나 보지. 거기까지는 이해하려고 했던 줄리안도 클로드가 바지를 벗기 시작하자 대경실색해 외쳤다.
“전하!”
“왜?”
“옷을 왜 여기서 벗으십니까? 드레스 룸으로 가셔서.”
침실로 들어가면 드레스 룸과 이어지고 드레스 룸은 욕실과 연결된다. 그런데 왜 거실에서 옷을 벗는단 말인가. 줄리안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클로드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더러워서 말이야.”
그리고 클로드가 속옷까지 내렸다. 위로 올라붙은 엉덩이가 노출되었다. 줄리안은 말을 잃고 클로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왕궁에만 계셨던 게 아니십니까?”
“맞아.”
“그런데 뭐가 그렇게 더러워서…….”
“시발 것들이 자꾸 문질러대서 말이야. 술에 약이라도 탔어? 다들 왜 미친년놈처럼 사람을 더듬고 지랄들이야, 지랄들이.”
클로드가 질렸다는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줄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클로드의 나신은 몹시 아름답다 못해 관능적이었지만 줄리안은 가십이 아닌 인간 조각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클로드의 뒤를 쫓아갔다. 자신이 들고 와 소파에 걸어놓았던 재킷부터 하나씩 집어 들었다. 바닥에 구겨져 있는 드레스셔츠와 바지, 그리고.
손바닥보다는 조금 더 큰 카키색 팬티.
“씻고 올 테니까 기다려.”
클로드가 침실로 향하며 말했다.
“전하, 저는 집에.”
줄리안이 급히 그에게 말했지만 침실 문은 무정하게 닫혔다. 줄리안은 닫힌 문을 보며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뱉고는 허리를 숙여 클로드의 팬티를 집었다. 제법 작은 것 같은데 코끼리 가운뎃다리 같은 물건을 다 가릴 수 있다니 자연의 신비로구나. 아니면 패브릭의 기적이든지. 줄리안은 한숨을 쉬며 그것들을 세탁물 가방에 집어넣었다.
마침 노크 소리가 똑똑 울렸다. 줄리안은 세탁물 가방을 든 채 문을 열었다.
“어? 역시 줄리안이었군요.”
안면이 익은 시종이 들어왔다. 올해 채용된 시종으로 아직 평사원이었지만 왕비의 시녀장이 일을 시키는 시종 중 한 명이었다. 대부분의 시종들은 시종장에게 소속되지만 이성 고용인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해 시종장도 시녀 몇 명을 데리고 있었고 시녀장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종은 시녀장이 데리고 있는 시종이었다. 왕비의 곁에 자주 있는 줄리안과는 마주칠 때마다 눈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응.”
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의아한 듯 물었다.
“주간조 아니셨어요?”
“맞아.”
“그런데 왜……?”
거기에는 아주 긴 우여곡절이 있거든. 줄리안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시종이 알 만하다는 듯 혀를 차며 술병과 술잔 등이 세팅되어 있는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하나하나 세팅하며 실실 웃었다. 그러고는 줄리안의 손에서 세탁물 가방을 빼앗아 들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수고하세요.”
의미심장한 어조였다. 응? 줄리안이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시종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지금 좀 예민한가.
줄리안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좀 예민해질 만한 날이었다. 시종 인생 7년 만에 이렇게 거대한 똥을 밟은 적도 없었다. 평소에도 좋지 않은 것을 밟은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평소 안 좋았던 날들이 개미 똥을 밟은 수준이라면 이번에 밟은 똥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거인의 대변 수준이었다.
똥, 똥 거렸더니 이 상황이 더 암울하군.
줄리안은 한숨을 쉬며 빈 소파를 내려다보았다. 앉아서 퍼질러 잤으면 좋겠다. 종일 파티를 준비하느라 고생한 몸도, 그 이후 이런저런 일에 휘말린 정신도 피곤함에 찌들었다. 줄리안은 서 있는 채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차근차근 따져보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일단 귀부인들을 적으로 돌렸으니 당분간은 숨도 조심스럽게 쉬어야 할 것이고 왕비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그녀에게 무심했던 남자가 자신과 같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잔인하게 나올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 경우 줄리안의 평화롭고 즐거운 직장 생활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게다가 클로드에게 무시당한 대비도 가만있지 않을 거고 왕의 분위기도 묘했다. 유럽의 화약고가 발칸 반도라면 이 궁의 화약고는 바로 아리스트 대공이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화약고 안에서 지뢰를 밟은 상황이었다.
차근히 생각하니까 더 안 좋잖아.
내 두근두근 시종 생활을 돌려줘. 줄리안은 절규하고 싶어졌다. 난 이런 걸 겪고 싶지 않다고. 그저 보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야!
아아아, 주저앉고 싶다, 진짜.
줄리안이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을 때 뒤에서 문소리가 났다.
“이런, 너 우냐?”
클로드의 얼굴이 갑자기 다가오는 바람에 줄리안은 깜짝 놀라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줄리안의 뒤통수에 손을 대고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돌려 줄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던 클로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뭐야, 왜 놀라?”
“예?”
“사람이 좀 쳐다봤기로서니 왜 놀라냐고. 죄 지은 거라도 있어?”
클로드가 물었다. 죄 지은 거 있느냐는 말에 줄리안은 쓰게 웃었다. 약간 있었던 죄책감은 이미 하늘 위로 날아가버린 지 오래였다. 클로드가 자신의 행복한 삶을 망쳐놓은 걸 생각하면 죄책감은 무슨 얼어 죽을 죄책감인가.
“죄송합니다, 전하. 생각보다 가까이 계셔서요.”
“우울한 얼굴 하지 마. 술맛 떨어져.”
“전하, 저는 집에.”
클로드가 잔에 술을 따라 건넸다.
“마셔.”
줄리안은 손으로 살며시 그 잔을 밀어냈다.
“전하, 저는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만 퇴궁하게 해주십시오.”
“야.”
클로드가 픽 웃었다. 줄리안이 “예?” 하고 대답하자 클로드가 술잔을 들었다.
“목구멍 열고 붓는다?”
줄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런 짓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라 클로드가 잔을 흔들었다. 잔 속의 술이 찰랑찰랑 움직였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진짜로? 그런 얼굴을 본 줄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절 고문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런 건 고문이 아니야, 줄리안. 고문은 전혀 다른 거라고. 내 말을 믿어, 고문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나니까.”
줄리안이 말을 잃고 입을 벙긋거리자 클로드가 싱그럽게 웃었다.
“이건 고문이 아니라 회식이야, 회식.”
“이게 무슨 회식입니까!”
“원래 군대 놈들은 다 이렇게 회식해.”
이러다 갑자기 빡쳐서 연병장도 돌고 그런 게 회식이지. 클로드가 악마처럼 웃었고 줄리안은 신을 찾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클로드가 흐음 하고 천천히 손을 뻗어왔다. 줄리안이 뒤로 물러났다. 클로드가 실소와 함께 말했다.
“직접 먹여주는 게 좋다면야.”
줄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왜? 먹여줄 수 있는데.”
“제가 먹겠습니다. 그러니까 주십시오.”
그러나 클로드의 손은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억지로 목구멍을 열고 술을 받아 마셔야 하는 건가? 줄리안은 그게 뭔지도 몰랐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윽. 줄리안이 온몸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박박 흩뜨리는 통에 줄리안은 눈을 살며시 떴다.
“좀 생기 있네. 너무 얼굴 구기지 마. 별로 잘생긴 얼굴도 아닌데.”
“별로 못생긴 얼굴도 아닙니다.”
줄리안이 불퉁하게 말하며 클로드가 내민 잔을 받았다. 그리고 꿀꺽, 한 번에 잔을 비웠다. 줄리안이 한 손으로 술이 묻은 입술을 죽 닦자 클로드가 웃었다.
“오늘 내 기분이 별로니까 상대 좀 해줘.”
“블레서 중령님이나…….”
“우리 금붕어 똥은 저번 술자리에서 나와는 절대 술 안 마시겠다고 천명했거든.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을걸. 내 장례식 자리에서도 술은 안 마셔줄 놈이야.”
저번 술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줄리안이 알 만하다는 눈으로 클로드를 보았다. 클로드는 청바지 하나만 간신히 입고 있었다. 상체는 나신이었고 젖은 머리에서 뚝뚝 떨어진 물로 어깨가 젖어 있었다.
“머리 좀 말리고 있을 테니까 술 마시고 있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클로드가 줄리안의 머리를 한 번 더 헝클고 사라졌다. 줄리안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궁정 사교계의 신사분들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긴 하네…….
줄리안은 한숨을 쉬며 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술을 즐기지 않았다. 와인 몇 잔 정도야 당연히 마셨지만 그것도 마셔야 하는 자리에서나 마시지 스스로 술을 선택해서 마시는 경우는 드물었다. 술보다는 커피나 차 쪽을 더 즐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마셔야 되는 날인 모양이다.
줄리안은 연거푸 잔을 비웠다. 차라리 취하고 싶었다. 그는 취하면 곱게 잠드는 편이었다. 잠이 들면 클로드도 자신을 어쩔 수 없으리라. 그래, 취하자. 그리고 빨리 자자. 줄리안은 그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순식간에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했다.
술병을 반 정도 비웠을 때, 줄리안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술기운이 오르는 기분이 평소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한데? 줄리안은 술잔을 내려놓고 눈을 깜빡거렸다.
손끝이 따끔했다. 줄리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왜 따끔하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끔, 따끔. 손끝에서 손가락 한 마디로 따끔함이 번졌다. 그리고 갑자기 귀 뒤가 따끔했다. 응? 다음에는 어깨였다. 뭐지? 줄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늘에 찔린 것처럼 온몸이 따끔거렸다. 마치 전기가 튀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전기가 다리 사이에서 튀었다. 그리고 줄리안은 깜짝 놀라 자신의 바지춤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거?
―수고하세요.
아까 술을 두고 나간 시종이 윙크를 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설마, 설마. 줄리안은 책상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중간에서 다리가 꼬였다. 그리고 히익 하는 소리가 자신의 목에서 샜다. 성기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줄리안은 인어공주처럼 절뚝절뚝 걸어서 책상 위로 걸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이미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흐읏. 소리가 절로 샜다. 그는 경련하는 손가락으로 주방을 호출했다.
“주, 줄리안 일리드입니다.”
‘어머, 줄리안. 아직 안 갔어요?’
“지금 아리스트 대공 전하 방인데요, 흣, 저기.”
‘줄리안? 괜찮아요?’
히잇. 이상한 소리가 목에서 계속 새어나왔다. 참을 수 없는 감각이 성기에 몰아쳤다. 줄리안은 다리를 꼬면서 주먹을 쥐었다.
“괘, 괜찮, 저기, 방금 올라온 술, 비, 비전하께서.”
설마, 설마.
‘네, 네. 넣으라는 대로 넣었어요. 좀 많이 넣어서 우리도 걱정되긴 하는데 괜찮겠죠, 줄리안?’
눈앞이 캄캄해졌다. 줄리안은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전화를 끊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성기가 바짝 섰다. 시발, 이거 어떡해. 줄리안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몽정은 해봤어도 자위는 아직 해본 적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남들이 말하기를 그걸 잡고 흔들면 된다는데 줄리안은 내키지 않아서 아직 해보지 못했다.
흣. 줄리안은 신음을 참으며 허리를 숙인 채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어, 어떡해야 하지? 일단 사무실로 가야 한다. 사무실에 가서 옷 갈아입고, 코트로 어떻게든 숨기고, 택시를 불러서 타고 집에 가자. 줄리안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사이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일단, 집에 가자. 모든 것은 그다음에 생각하자. 줄리안은 목으로 앓는 신음을 내며 걸었지만 문 앞에 멈춰 서고야 말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미 딱딱하게 굳은 자신의 신체 부위가 도드라져 보였다. 이 꼴을 하고 복도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아찔했다. 어떡하지.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머리가 열로 끓어올라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잡고 싶어.
자신이 한 생각에 놀라 줄리안은 주저앉았다. 하지만 곧바로 문지르고 싶다, 고 생각하고 말았다.
흐읏―.
줄리안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어떡하지. 눈이 젖어들었다. 울음이 나는 게 아니라 생리적으로 그냥 눈이 젖고 있었다. 미약이라는 것들의 기본적인 효과를 떠올려보려고 했다. 체온 상승. 혈압 상승. 통각이 예민해지고 강제로 아드레날린 분비, 그리고……, 시발, 생각 안 나.
그냥 울고 싶다. 아니, 그냥 그걸 주무르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주물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걸 조금이라도 가라앉히지 않으면 복도를 걷는 것조차 불가능할 테니까.
“소파에 앉아 있으라니까 왜 거기서 이러고 있어?”
머리를 대충 말리고 온 클로드가 다가왔다. 성큼, 성큼, 걸어오는 발자국이 마치 심장까지 들어올 듯했다. 예민하게 느껴졌다. 줄리안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공을 상대로 성적인 흥분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죽고 싶어졌다. 아아, 하느님. 그냥 제 목을 좀 쳐주세요. 뎅강 하고.
그러나 하느님은 바쁘셔서 줄리안의 소원 따위에 화답해주실 그런 분이 아니었다. 소원이 이루어질 기척은 보이지 않는데 클로드는 이미 지척에 서 있었다.
“아, 진짜 손 가는 애네. 왜 거기에.”
“전하.”
클로드는 고개를 한 번 기울였다. 줄리안의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있었다. 좀 전까지 좀 괴로워하는 듯은 했지만 그래도 멀쩡했었는데 왜 갑자기 목소리가 완전히 간 건가? 클로드는 줄리안을 일으키려다 손을 거뒀다. 쪼그리고 앉은 줄리안이 제 무릎을 양팔로 끌어안고 있었는데 그 꼴이 제법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긴 나 때문에 좀 곤란해지긴 했겠지.
클로드는 순순히 대답했다.
“응.”
“죄송한데.”
흣, 줄리안이 어깨를 떨었다. 억눌린 신음에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아?”
“죄송한데.”
괜찮으냐는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줄리안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어.”
“남은 술 좀 당장 버려, 흣, 버려주시겠습니까?”
“남은 술?”
술을 아깝게 왜 버리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줄리안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했다. 클로드는 두말하지 않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커피 테이블로 다가가 술병을 집어 들었다. 술병에는 술이 아직 반이나 차 있었다. 술을 반이나 마셨군. 술병에는 라벨이 없었다. 궁에서는 술을 다른 병에 담아서 내는 모양이었다.
무슨 술이지.
클로드는 술을 가져가 세면대에 부었다. 한참을 붓던 그는 콸콸 쏟아지는 술 줄기에 손가락을 가져가서 혀에 대보았다. 맥주는 아니고 와인이었다. 익숙한 술맛은 아니었다. 도리어.
이거, 약 같은데?
약 맛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무슨 약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약 맛이 희미하게 났다. 이런, 약을 먹었군. 그래서 버리라고 한 모양이다. 클로드는 술병을 완전히 비운 뒤에 다시 줄리안에게로 다가갔다.
“이봐, 줄리안 일리드. 괜찮아?”
줄리안은 이제 클로드를 보지도 않았다. 고개를 파묻은 상태로 그는 거세게 도리질만 쳐댔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야, 얼굴 좀 보여봐. 괜찮아? 시발, 넌 약 맛도 모르냐. 저걸 반병이나 처먹게.”
클로드는 괜히 초조해져 신경질을 냈다. 사실 줄리안에겐 고마운 감정이 있었다. 줄리안이 첩자든 아니든 간에 줄리안은 오늘 그에게 상당히 잘해줬다. 부모도 형제도 자신을 버린 것 같은 밤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상당히 곤란해졌지만 원망 한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줄리안이 이렇게 된 건 자신이 술을 마시라고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야, 얼굴 좀 보여보라니까.”
“제발……….”
줄리안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개미만 한 목소리라 클로드가 귀를 가까이 댔다.
“어?”
“제발, 그냥, 좀 놔둬주세요…….”
“약을 반병이나 처먹었는데 어떻게 그냥 둬? 얼굴 좀 보여봐. 의사를 부르든 해야 할 거 아니야. 동공 체크 좀 하게.”
클로드가 줄리안의 턱을 잡아 억지로 들어 올리려 했다. 반항이 거셌다. 아, 이 새끼가 힘쓰게 만드네. 클로드는 한 팔로 줄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손으로 턱을 잡아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숨 쉬는 걸 잠깐 잊고 말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었다.
“우는 거야?”
“좀 놔두시라고요.”
홱, 줄리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줄리안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진짜 우는 거야? 클로드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우는 남자라면 수천 번도 넘게 본 듯했다. 눈물도 가지가지. 악어의 눈물도 있고 피눈물도 있다. 클로드는 모든 눈물의 종류를 만났었다. 하지만 이런 눈물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흣, 흐으읏. 줄리안의 목에서 신음이 새었다. 줄리안은 신음을 억누르려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클로드는 난처해졌다. 그는 아, 시발, 시발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줄리안의 앞에서 일어나 미친놈처럼 방 안을 맴돌다가 화분을 하나 걷어찼다가 결국 쪼르르 걸어와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줄리안.”
이제 줄리안은 대답도 안 할 생각인 듯했다.
“줄리안. 일리드 가문의 줄리안. 어이, 줄리안.”
“…….”
“아, 시발,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고개 좀 들어봐. 이봐.”
흐으읏, 흑, 으읏. 줄리안의 목에서 앓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클로드는 아, 시발 하고 중얼거렸다. 줄리안, 줄리안, 줄리안. 클로드가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줄리안은 고개를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줄리안의 다갈색 머리칼이 작게 흔들렸다. 미풍에 흔들리는 밀밭 같았다. 클로드가 한숨을 쉬었다.
“이봐, 난 안개꽃 눈은 내려줄 수 없다고.”
“됐습, 흣, 흐읏…….”
“줄리안. 야, 줄리안. 제발, 얼굴 좀 들어봐.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말해봐. 아, 시발, 아까 네 발 밟은 년들 목이라도 따다 줄까? 야, 제발 얼굴 좀, 아, 시발.”
더 못 참고 클로드가 줄리안의 얼굴을 다시 들려고 했다. 줄리안이 아까보다 더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흐읏, 읏. 줄리안의 목에서는 울음이 계속 새어나왔다. 클로드는 힘을 주다 빼고 말았다. 그러자 거칠게 반항하던 줄리안의 몸이 옆으로 넘어갔다.
“읏, 차. 야, 조심해야지.”
클로드가 줄리안을 끌어안듯이 잡으며 타박했다.
“놔, 놔, 흣, 놔 주, 흐으읏, 읏…….”
문득 이 신음이 울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줄리안을 놔주는 척하면서 둘 사이의 공간을 내려다보았다. 넘어질 때 벌어진 다리 사이가 보였다. 마치 오줌을 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바지 색이 짙어져 있었다. 그 순간 줄리안이 클로드를 밀어냈다. 클로드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멍하니 그 부분을 보고 있었다. 줄리안이 다시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아. 아.”
클로드는 백치처럼 아, 아아, 라고 중얼거리다 소리를 질렀다.
“어떤 시발 것들이 남의 술에 약을 타?! 이 개새끼들이 진짜!”
클로드가 벌떡 일어났다.
줄리안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클로드는 정말 화가 나 보였고 궁을 뒤집어엎을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이 상태가 온 궁에 알려진다는 뜻이었다. 줄리안이 팔을 뻗어 클로드의 다리를 잡았다. 당장 휴대전화를 가지러 가던 클로드가 엉거주춤 멈춰 섰다.
“저, 전하께서, 흣, 전하께서 그러시면, 제 상태가 알려, 지니까.”
클로드는 그래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줄리안은 서러워졌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 시발, 알았으니까 울지 마.”
클로드가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그가 줄리안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 순간 줄리안이 흐읏 하고 신음했다. 클로드가 재빨리 손을 떼었다. 줄리안은 정말 죽고 싶었다. 하느님, 지금 당장 제 목 좀, 뎅강, 뎅강, 플리즈. 그렇게 외치는데 클로드의 손이 다시 다가왔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셈이야. 일단 침실에라도 가자.”
클로드의 힘에 줄리안은 강제로 일으켜졌다. 그러나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클로드의 품 안으로 고꾸라졌다.
클로드는 재빨리 줄리안을 잡았다. 그러나 잡았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나비를 손바닥 안에 가둔 것 같았다. 힘을 줘도 안 되고 안 줘도 안 되는 그런 미묘한 상태에서 클로드는 줄리안의 떨리는 어깨와 흔들리는 머리칼을 보고 있었다. 흐읏. 줄리안이 이를 악물고 억누르고 있는 신음이 들렸다. 문득 손끝이 저릿했다.
“야, 미안한데 들어야겠다. 넌 도저히 못 걸을 것 같아.”
“하, 하지 마세……!”
클로드는 줄리안을 단번에 들어 올렸다. 마치 어린애처럼 엉덩이를 받친 자세였고 줄리안은 클로드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흐하아앗. 놀란 탓인지 신음성이 날카롭게 거실 안을 울렸다.
줄리안이 매달렸다. 손톱이 피부에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클로드는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갑자기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아, 시발. 그는 곤란한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가 천천히 걸었다.
줄리안이 우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흐읏 하는 신음이 귓가에서 울렸다. 손톱 끝이 아슬아슬하게 파고들었다. 줄리안이 흐느낄 때마다 신음이 몸속까지 울렸다. 어깨가 젖고 있었다. 눈물은 아까 닦아낸 물과는 전혀 달랐다. 끈적거렸다.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었다. 몸이 바짝 닿았다. 줄리안은 힉,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클로드는 상체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피부가 짓뭉개지듯이 닿아 있었다.
“놔, 흐으으, 주세요…….”
줄리안이 헐떡이며 애원했다. 줄리안의 딱딱해진 성기가 배에 닿아 있었다. 그 부분이 젖어서 질척거렸다. 움직일 때마다 진동 때문인지 아니면 줄리안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부분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선액을 펴 바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줄리안은 우는 목소리로 놔달라고 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머리끝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을 느꼈다. 놔달라는 건지, 끌어안아달라는 건지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놔달라는 게 맞다. 하지만 잔뜩 신음하고 허리를 움직이면서 달라붙은 채로 놔달라고 하면…….
“차라리 입을 다물어, 줄리안.”
클로드의 싸늘한 목소리에 줄리안은 정신을 차려보려 애썼다. 그러나 몸이 뜨거웠다. 클로드와 닿자 바싹 마른 몸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몸을 문지르고 싶었다. 옷을 벗고 싶었다. 나체로 이 단단한 몸에 자신을 문질러 남자를 더럽히고 싶었다. 파티에서 스친 정도로도 불쾌하다며 씻었던 남자를 자신의 더러운 것들로 엉망진창이 되게 해주고 싶었다.
클로드가 줄리안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푹신한 침대에 몸이 잠기자 줄리안이 신음하며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 한쪽 손을 다른 손으로 잡고 있었다. 성기를 문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다.
“나가줄 테니까.”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줄리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야해도 정도가 있지. 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손끝의 저릿함이 더욱 심해졌다. 줄리안의 팔을 잡고 싶었다. 움츠린 다리를 벌리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을 때려 넣고 싶었다.
첩자, 첩자, 첩자!
클로드는 속으로 자신에게 소리쳤다. 쟤는 첩자라고, 첩자! 첩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단 말이야! 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클로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그는 성적으로 담백한 편이었고 사실 이제까지 경험도 없었다. 누군가와 섹스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본능적으로 당기는 부분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혼자 욕구를 해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쟁터에서는 그런 게 당연하기도 해서 클로드는 이렇게 강렬한 욕구를 느껴본 적이 처음이었다.
눈앞이 자꾸 날아가려고 했다. 클로드는 머리를 저었다. 어떤 씹새끼인지 잡히기만 해봐라, 인생을 조져놓을 테니까. 그는 이를 갈면서 “진정 좀 해봐. 이불은 더럽혀도 되니까 진정만 해둬. 그럼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라고 중얼거렸다.
자신이 듣기에도 목소리가 냉랭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굳은 채로 한 마디씩 내뱉지 않으면 정염의 둑이 무너질 것 같았다.
“간다.”
클로드가 나가려고 등을 돌렸을 때였다. 전하. 줄리안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클로드가 뭘 하라고 하는 건지는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이불을 더럽혀도 된다는 뜻이 뭐겠는가. 그러나 줄리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남의 침실에서 그게 되겠는가. 차라리 집에 가고 싶었다. 클로드에게 코트를 빌려서 그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자신의 방에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위를 해서 이 흥분을 가라앉히든, 아니면 마법을 써서 잠들든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왕궁만 아니면.
클로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줄리안은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줬으면 했다.
“……도, 와주…….”
클로드의 눈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표정이 날아가고 무표정만이 남았다. 왕족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건 너무한 일이었을까? 도와달라고 해도 될 것 같았는데, 라고 생각하며 줄리안이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클로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와주는구나 싶어 안도하는 순간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줄리안의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줄리안이 눈을 크게 떴을 때 클로드는 눈을 감고 있었다. 혀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인간의 혀라는 게 이토록 존재감 있는 살덩이라는 것을 줄리안은 처음 알았다. 줄리안의 크게 뜨인 눈에서 눈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져 둘 사이의 입술에 떨어졌다. 짠맛이 잠시 났다가 사라졌다. 타액에 뒤덮인 것인지, 누군가가 먹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줄리안은 클로드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팔에 힘이 없었다. 클로드의 혀가 줄리안의 온 입안을 헤집었다. 마치 내장이 핥아지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뜨겁게 갈라진 곳들을 클로드의 혀가 핥아 촉촉하게 해주고 있었다. 아, 아. 줄리안은 클로드를 붙잡았다. 끌어안았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양뺨을 감싸 안은 채 계속 키스했다. 더 들어오고 싶은 것처럼 그는 몇 번이고 각도를 바꿔서 입을 맞췄다. 파고들어왔다. 흐읏, 으으읏. 줄리안이 목으로 울었다. 폭력적인 키스가 계속되었다. 줄리안은 입을 벌린 채 클로드의 혀에 유린당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아, 시발.”
클로드가 입술을 떼며 으르렁거렸다.
“시발, 존나 야해. 시발, 존나 맛있어.”
시발, 시발, 시발.
클로드가 욕설을 계속 지껄였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그의 청회색 눈이 줄리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집중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한 눈이었다. 줄리안은 그 눈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도와달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줄리안은 천천히 입술을 열어 혀를 내밀었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머리채를 잡은 채 다시 그의 입술을 삼켰다.
너무 거칠어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줄리안은 팔을 내밀어 클로드의 목에 감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 클로드 또한 그러고 있었다. 줄리안도 클로드의 입안을 맛보았다. 치아 하나하나, 그의 혀뿌리, 입천장. 모든 곳을 문질러댔다. 마치 전력을 다해 섹스하는 것 같은 키스였다.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셔츠를 양쪽으로 갈랐다. 어딘가 찢어진 것 같았다. 단추가 이리저리 튀어나갔다.
클로드가 입술을 뗐다. 줄리안이 혀를 내밀었다. 더 키스해줘. 직접적인 요구에 클로드가 사납게 웃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줄리안의 가슴에 입술을 눌렀다. 읏. 으응. 줄리안이 가슴에 닿은 입술에 흠칫했다가 키스를 조르듯이 신음하자 클로드의 손가락이 줄리안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손가락과 키스했다. 혀와 손가락이 얽혔다. 손가락이 혀를 잡고 위아래를 문질러댔다. 줄리안의 목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가슴을 깨물었다. 마치 고양이처럼. 아니, 육식수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줄리안은 당장에라도 클로드가 자신의 가슴에 송곳니를 박을 것 같았다. 피가 흐를 것처럼 강하게 물어뜯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쁘지 않았다. 아파도, 상처가 나도 좋을 것 같았다. 이 미칠 것 같은 욕정을 달랠 수 있다면.
“저, 전하, 흐읏. 읏, 더…….”
줄리안이 이지를 잃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클로드가 그의 요청에 화답하듯 이를 세웠다. 천천히 유두를 짓눌렀다가 이를 떼어주자 줄리안이 몸부림쳤다. 줄리안의 손이 클로드의 뒤통수를 잡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눌렀다. 클로드는 줄리안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었다. 한쪽 가슴을 깨물고 빨아들였다. 흔적이 남았다. 클로드 인생에 남겨본 첫 흔적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새빨간 멍은 마치 지문 같았다.
클로드는 다시 줄리안의 위로 올라왔다. 줄리안, 줄리안. 줄리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흐으읏, 줄리안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신음만 토해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귀를 깨물었다. 연골을 깨물며 아예 먹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줄리안이 울음을 토하면서 눈을 떴다. 희미하게 이지가 돌아온 눈을 보고 클로드가 말했다.
“아프게 하면 말해.”
해본 적이 없으니 힘의 가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뺨을 쓸어내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에 흐릿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예뻤다. 얼굴을 보고 있자니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심장을 쿵쿵 얻어맞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프, 흣, 아프지 않아요. 빨리, 전하…….”
줄리안이 팔을 내밀어 그를 끌어안았다. 어서, 어서……. 줄리안이 애를 태웠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허리를 잡아 자신 쪽으로 당기며 그의 뺨을 핥았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존나 달다, 진짜. 미친, 사람 뺨이 달다는 게 말이 돼?”
전하, 전하, 어서, 어서. 줄리안이 그를 재촉했다. 클로드는 잠시 그런 그를 바라보다 손을 내렸다. 가슴을 비틀자 줄리안의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이미 질척질척해진 속옷이 보였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허리에서 손을 빼냈다. 그리고 줄리안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잡아 내렸다. 젖은 옷이 피부를 스치는 것만으로도 미치겠는지 줄리안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싫어. 줄리안이 중얼거렸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옷을 벗긴 다음 집어 던지고 다시 줄리안의 위로 올라왔다.
싫어―!
줄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손도 닿지 않았던 곳에 타인의 손이 닿아 있었다. 질척한 성기를 클로드가 문지르고 있었다. 줄리안이 몸을 뒤틀었다. 클로드가 한 팔을 줄리안의 머리 아래로 넣었다. 줄리안의 어깨를 잡아 고정하고 성기를 애무했지만 팽팽하게 서 있던 성기는 더는 힘을 받지 못했다. 토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라앉지도 못한 채 바짝 서 있기만 했다. 줄리안의 숨이 당장에라도 넘어갈 것 같았다.
아, 아, 줄리안이 가늘게 비명을 질었다. 못 하겠어……! 그 말에 클로드가 줄리안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줄리안의 성기가 푸른빛을 살짝 띠는 게 보기에도 괴로운 걸 알겠는데 줄리안이 토정하지 못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줄리안, 혼자 하는 거라고 생각해.”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클로드는 혀를 찼다. 실제로 그는 마음이 급했다. 줄리안이 빨리 토정했으면 했다. 꽤 오랫동안 서 있었으니 불편할 것이다. 좀 더 편안하게 몸을 이완시켰으면 했다. 그리고 빨리 이 몸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줄리안, 차라리 스스로 할래? 응?”
클로드가 줄리안의 손을 잡아 성기에 대주려 했다. 그러나 성기에 닿는 순간 줄리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떼버렸다. 흐으읏……. 줄리안이 힘겹게 신음하면서도 클로드의 품을 벗어나려 했다. 클로드는 그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줄리안?”
줄리안, 왜 그러지? 응? 뭐가 문제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건 그냥 자위에 불과해. 기분이 좋지 않아?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말을 해봐. 그렇게 해줄게. 줄리안?
클로드가 애원하듯 속삭이자 줄리안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클로드가 혀를 내밀어 줄리안의 이 아래에서 학대받고 있는 입술을 구해주었다. 그러나 줄리안은 클로드가 아무리 달콤한 목소리로 달래도 도저히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자위를 해본 적이 없어 내 손으로 잡는 것도 불편하고 남의 손에 토해내는 것도 안 된다고.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되고 있는 거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클로드가 줄리안에게서 떨어졌다. 줄리안은 아쉬워 입술을 깨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키스할 때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이성이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성은 가느다란 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당장 산산조각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집으로 가야 했다. 몸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줄리안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갑자기 다리가 노골적으로 벌어졌다. 줄리안은 그제야 자신에게서 떨어졌던 클로드의 존재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가 보이지 않게 되고 그의 머리 가마만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성기가 축축한 것으로 둘러싸였다.
하아, 아아아―.
줄리안이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떨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클로드가 움직이라는 듯 줄리안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 움직였다. 강제로 허리가 움직였다. 클로드의 입안에 박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흐릿한 시야에 클로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보였다가 보이지 않기를 반복했다.
“전, 하, 잠깐, 흐읏, 읏, 안 돼, 잠깐, 잠깐, 아아아!”
아름다운 얼굴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입안으로 자신의 더러운 성기가 들락거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클로드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움직이고 있었다. 뜨겁고 축축한 곳을 마음껏 드나들었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머리를 잡고 미친 듯이 자신을 박아 넣었다. 허리를 잡은 클로드의 손가락이 톡톡 움직였다. 마치 경주마를 재촉하는 것처럼.
흐아아아―. 아, 아, 아, 나와―!
줄리안이 허리를 뒤로 휘며 비명을 질렀다. 본능적으로 그는 자신의 성기를 클로드의 목구멍 안쪽까지 처박았다. 눈을 가볍게 찌푸렸지만 그뿐, 클로드는 줄리안을 밀어내기는커녕 더 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부드러워진 성기를 목구멍이 가볍게 조였다가 풀었다. 그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다. 줄리안은 멍하니 클로드가 자신의 정액을 먹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줄리안의 몸이 뒤로 떨어졌다. 침대 위에 널브러진 줄리안을 보며 클로드가 옷을 벗었다. 청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어서 집어 던졌다. 줄리안의 젖은 옷 위에 클로드의 옷이 떨어졌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위로 올라왔다.
“줄리안?”
줄리안은 희미한 눈으로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여전히 단정하고 아름다웠지만 입술 끝에 하얀 정액이 묻어 있었다. 줄리안은 혀를 내밀어 끝에 묻은 정액을 핥아주었다. 마치 더러워진 짝을 핥아주는 동물처럼.
“더워…….”
줄리안이 중얼거렸다. 한 번 토정했을 뿐 몸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아니,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 음식의 맛을 알게 된 아귀가 탐욕스럽게 입을 열어 길고 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더 하고 싶었다. 저 단단한 몸에 자신의 몸을 얽고 싶었다. 마구 문지르고 싶었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뜨겁다고 중얼거리는 줄리안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얄미울 정도로 차분했던 표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멍한 얼굴로 줄리안은 클로드를 갈구하고 있었다.
“시발, 나도야.”
클로드 또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줄리안의 성기를 입에 담기 직전 그는 조금 망설였었다. 그러나 한 번 입에 넣자 정신이 없었다. 목구멍이 열리는 그 느낌조차 좋았다. 더, 더. 그 행위에 더 몸이 단 것은 줄리안이 아니라 클로드였다. 더 해봐. 내게 더 달라붙어와. 네 욕망을 가라앉혀달라고, 삼켜달라고 몰아붙여봐. 시발, 더 하라고. 더, 더. 클로드가 도리어 줄리안을 뒤흔들었다.
아, 아아. 줄리안이 중얼거렸다. 다시 아파.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가 고개를 내렸다. 그는 줄리안의 성기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맛있어 보였다.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다.
“더 빨아줄까?”
클로드가 다정하게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줄리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생겼었던가. 단정할 뿐 아무런 개성도 없는 얼굴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다채로운 얼굴을 할 수 있었던가.
안개꽃 눈이 날리는 가운데 보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려고 하는 듯했지만 걱정스러운 듯 굳어 있던 얼굴. 내가 너한테 뭐라고 너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어?
“줄리안, 대답해봐. 내 입에 넣고 싶어? 응?”
줄리안은 멍하니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사나움이 좀 가신 얼굴은 꿈속에서 만난 사람처럼 아름다웠다. 선명하고 깨끗한 청회색은 북극 하늘처럼 서늘한데도 그 눈은 뜨거운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뚫어질 것처럼 바라본다는 게 무슨 말인지 줄리안은 지금 깨닫고 있었다. 클로드는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흑백의 세상 속에 선명한 색을 지닌 하나의 존재를 보는 것처럼.
마치 사랑 고백을 하는 것 같은 눈이다. 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었다. 클로드의 머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미약한 힘으로 당겨도 클로드는 끌려왔다. 줄리안의 힘이 그에게만은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전하는 뭘 하시고 싶으세요.”
갈라터진 목소리로 줄리안이 물었다. 자신이 받았으니 그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자신은 지금 힘이 없어서 그가 올라와 자신의 입에 박아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빨아줄 수 있을 것이다. 뭐든 좋으니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비웃음당해 마땅한 상황에서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었다. 고개를 파묻고 있는 내내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달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대공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의 성기를 물고 애무했다. 심지어는 정액을 먹었다. 자신 또한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클로드의 눈이 잠시 움직였다. 말을 해도 되나. 눈을 잠시 움직이더니 그가 이윽고 속삭였다.
“넣게 해줘.”
한숨 같은 청원. 줄리안은 클로드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분명 머리 한쪽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몸이 미친 듯이 뜨겁고 술 같은 독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클로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자신의 몸만큼이나 그의 몸이 뜨거웠다. 약을 먹은 자신만큼이나 클로드는 흥분해 있었다. 줄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때 쾅, 쾅,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왕비 이샤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향수를 가만가만 뿌리고 전체 마무리. 슬립 드레스로 갈아입은 이샤는 고혹적이었다.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금색 샌들을 신은 그녀는 머리를 풀어 흘러내리게 했다. 그리고 유모를 돌아보았다.
“어때?”
“완벽하십니다, 비전하.”
흥, 그렇겠지. 이샤는 가볍게 이마를 툭툭 털었다. 하이라이트가 살짝 많이 묻은 듯해서 손으로 슬쩍 고치고는 “가자” 하고 말하며 싱긋 미소 지었다.
“지시한 대로 했겠지?”
이샤의 질문에 시녀장이 돌아보자 시종이 헤헤 하고 웃었다.
“그럼요, 비전하. 평소보다 훨씬 많이 넣었습니다.”
“아무리 그 목석이라도 어쩔 수 없겠지. 흥, 어디 그 약을 먹고도 무사한지, 그렇게 오만하게 굴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이샤가 코웃음 쳤다. 그녀는 또각또각 걷다 말고 아 하고 시종에게 시선을 주었다.
“거기에 줄리안이 있었다고 했지?”
“예, 예.”
“내 이야기는 잘 전했느냐?”
“그럼요.”
시종이 힘주어 대답했다. 그러자 이샤가 흥, 한 번 더 웃고는 모델 워킹으로 걸으며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말했다.
“줄스가 가여워 죽겠어. 나야 그 남자의 가운데라도 얻을 수 있다지만 줄스는 그런 데 관심도 없으니 그 남자와 엮여서 무슨 득이 있겠어?”
“그렇죠.”
시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안 일리드가 성적인 데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왕비가 아무리 달라붙어도 약간의 관심도 가져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왕비가 발가벗고 달려들어도 무심하게 안아 들어 소파나 침대에 내려놓아줄 사람이었다. 시녀장은 줄리안이 불능일 수도 있겠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시녀장뿐만 아니라 왕비의 시녀들은 모두 의심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환관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에 비해 실이 많기도 하지. 사교계 년들이 줄스를 노려보는 거 봤어? 제 부모의 원수도 아닌데 살벌한 꼬락서니 하고는.”
“그러게 말입니다. 일리드 시종이 곤란해지겠습니다.”
“가엾게도. 가능하면 내 옆으로 많이 배치하도록 해야겠어. 상어 년들의 세 치 혀에 갈기갈기 찢기기 전에 말이야.”
“관대하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 대공의 방에 도착했다. 왕족들의 생활공간인 서쪽 별관 안에 있는지라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왕비가 문을 보고 한쪽 입술을 올렸다. 문에는 늑대가 조각되어 있었다. 사자를 결코 이길 수 없는 동물이다.
“원래는 이 조각이 아니었잖아.”
“포도 넝쿨이었는데 대비 전하께서 용맹하신 대공 전하께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바꾸라 하셔서요.”
하여간 음흉한 노인네라니까.
이샤는 비릿하게 웃었다. 노크해. 그녀가 고갯짓을 하자 시녀장이 같이 따라온 시종에게 눈짓을 했다. 시종이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지. 미약을 그렇게 처먹었는데 소리가 날 리가. 분명 끙끙 앓고 있을 것이다.
형수의 발정이 뭐가 어째? 싸가지 없는 시동생 같으니. 하지만 이 형수는 자애로우니 시동생의 발정을 도와주기로 하지요. 원시 시대에 그랬듯이.
이샤는 자신의 턱을 한 번 쓸었다. 줄리안이 말하기를 대공의 성기는 처음 보는 수준의 것이라고 했다. 대단하겠지. 춤을 출 때 보니 키도 크고 몸도 단단했다. 핏줄 솟은 팔이 아주 섹시했다. 그 팔에 안기면 자신은 늑대에게 잡힌 흰토끼 같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짜릿했다.
시종이 왕비와 시녀장을 번갈아 보았다. 문을 두드렸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진 탓이었다.
“그걸로 되겠느냐? 다시 노크해.”
“예? 예…….”
똑, 똑, 똑.
시종이 다시 노크했다. 그러자 이샤가 눈살을 찌푸렸고 시녀장이 시종에게 속삭였다.
“더 크게 노크해야지.”
시종이 좀 더 강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샤는 마음에 안 드는 듯 시종을 노려보았다.
“너무 노크 소리가 작지 않느냐?”
그 말에야 시종은 왕비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해했다. 시종은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문을 마구 때렸다. 쾅, 쾅, 쾅, 쾅, 쾅. 주먹이 빨개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왕비의 치켜 올라갔던 눈초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이윽고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시발, 뭐야?!”
그리고 대공이 나타났다.
나이트가운 하나만 걸친 차림이었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가슴 근육과 복근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샤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조각 같은 몸이었다.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건 줄 알았더니 여기에 이런 몸이 있을 줄이야. 이샤의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남자의 가운은 거의 다 벌어져 다리 사이가 보였다. 성기가 끄트머리나마 조금 보였다.
저게, 사람의 물건이라고?
이샤는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시동생의 물건이 무시무시했다. 잠깐, 들어가도 되나? 저걸 받아들여도 괜찮나? 러브젤이라도 들고 왔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 이건 섹스라기보다는 도전에 가깝잖아. 이샤는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며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냐고 묻잖아.”
당장 욕하고 싶지만 네가 형수라 참는다, 고 노골적으로 쓰여 있는 얼굴이었다. 이글이글 타는 눈이 대답을 잘못 하면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눈이었다. 이샤는 어깨를 움츠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시발, 왕비 전하, 귀가 멀었어? 지금 무슨 일이기에 이 개지랄을 떨면서 남의 중요한 일을 방해하느냐고 묻잖아.”
쌍년아, 라는 욕이 어딘가에 괄호를 치고 들어가 있을 듯한 험악한 말투였다. 이샤는 대공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멀쩡하잖아?
이샤는 이 약을 여러 번 사용했다. 그녀는 지위, 매력, 재력 등으로 남자를 유혹했지만 다 안 통하는 남자가 가끔 나타나면 약을 사용했다. 어차피 그 남자를 누가 먼저 따먹느냐의 스포츠일 뿐이다. 남자에게 진심도 아니고 그의 사랑을 딱히 받아야 할 필요도 없으니 약 같은 거야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약에 취한 남자가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약을 먹었을 리가 없어, 그런 눈이 아니야.
그런데 대공에게는 섹스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잘못 맡았을 리가 없는 섹스의 냄새들. 체향, 땀 냄새, 그리고 밤꽃 냄새. 약도 먹지 않은 이 고고하고 재수 없는 새끼가 누구와……, 설마.
“너 지금 누구랑 떡치고 있는 거야?”
이샤가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대공이 그녀를 내려다보다 입술을 한쪽으로 올렸다.
“너 완전 돌았냐? 남이 누구랑 떡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지, 상관없어. 그게 줄리안 일리드만 아니면.”
그 순간 대공의 얼굴이 굳었다. 이런 시발, 개 같은 일이 있나! 이샤는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알 것 같았다. 약을 먹은 건 대공이 아니다. 약을 먹은 사람은 바로 줄리안이었다. 그리고 그 줄리안을, 자신에게는 단 한 명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줄리안을 대공이 따먹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준 약에 취한 줄리안을.
“비켜.”
이샤가 밀어내려고 했지만 대공은 밀리지 않았다. 밀리기는커녕 이를 드러냈다.
“미친년아, 너 진짜 죽는다?”
“미친년? 내가 왕비라는 걸 모르는 모양인데, 네가 아무리 대공이라 해도 날 모욕한 죄로 법정에 설 수도 있어. 그리고 무력한 시종을 강간하는 것 또한 그렇지.”
“그러는 왕비는 남의 술에 약 넣어도 되냐? 왕비라고 해도 약 먹여 강간하려고 한 건 죄일 텐데? 강간 미수죄로 잡혀 들어가셔도 되겠어, 비전하?”
클로드의 눈이 번들거렸다. 허세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이샤가 그 눈을 바라보았지만 허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도리어 광기가 가득했다. 이샤가 어깨를 움츠렸다.
“내,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방금 네가 그랬잖아, 무력한 시종을 강간하려고 한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줄리안은 보통 남자야. 왜 그가 무력하다고 생각했는데?”
“줄리안은 원래 약하니까!”
“퍽이나. S급 마법사가 뭐가 약해. 지랄하지 말고 꺼져. 그리고 강간 미수범아, 내가 경고하는데.”
클로드가 쾅 하고 문을 쳤다. 엄청난 소리에 모두가 흠칫 떨었다. 이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이 겁에 질린 걸 보고 클로드가 입술을 올렸다.
“다시 한 번 방해하면 죽여버린다.”
그리고 클로드는 한 발짝 물러서며 왕비의 시녀며 시종, 심지어는 경비병들까지 바라보았다. 냉랭한 눈을 하고 덧붙였다.
“니들도 다 죽인다.”
그리고 클로드가 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렸다.
이샤는 멍하니 서 있다가 문이 닫힌 걸 깨닫고는 문으로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시녀장과 시녀들이 재빨리 그녀에게 매달렸고 시종이 문 앞을 막아섰다.
“이 새끼야, 안 비켜?!”
이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공은 진심이었다. 누가 봐도 그 눈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방해하면 다 죽일 생각인 게 분명했다. 머리가 현실적으로 그건 말이 안 돼, 라고 말했지만 시종의 가슴은 확신했다. 아냐, 쟨 진심이야. 저건 듣도 보도 못 한 또라이다.
이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광기 어린 눈으로 좌우를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시녀들을 뿌리치고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유리 케이스를 주먹으로 깨려고 들었다. 그 유리 케이스 안쪽에는 화재경보기가 잠들어 있었다.
시녀장이 몸을 날려 왕비를 잡았고 시녀들도 재빨리 매달려 같이 뒤로 끌어냈다. 놔, 놓으라고! 왕비가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는 문 안쪽에 있는 클로드의 귀에도 들렸지만 무시하고 침실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보인 것은 몸을 웅크리고 있는 줄리안이었다. 피부가 발긋하게 달아오른 그는 스스로 제 몸을 더듬고 있었다. 애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처럼 더듬거리는 손길이었다. 그게 뭐라고 클로드는 순간 목이 바짝 말랐다.
하, 시발.
어지럽고 뜨겁고 미칠 것 같았다. 계속 욕이 나왔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는 줄리안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줄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한 시야 속에서 클로드가 다가왔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촉, 촉. 도닥도닥하는 듯한 다정한 소리가 곧 사나워졌다.
읏……, 으응.
줄리안이 몸을 내맡긴 채 신음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입안을 핥았다. 시발, 좋잖아. 남의 침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 머리가 쾌감으로 쾅쾅 울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맛볼 만큼 맛보지 못했지만 밤새도록 맛보아도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아 아쉽게 놓아주었다. 그러자 줄리안의 몸이 천천히 침대에 파묻혔다.
“줄리안.”
“응……?”
그 줄리안 일리드가 반말이다. 클로드는 키들거렸다.
“줄리안.”
“응.”
다시 한 번 불러봐도 줄리안은 응, 응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약으로 잔뜩 달아오른 몸을 한 줄리안은 조그만 접촉으로도 힛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줄리안, 줄리안, 줄리안.
클로드의 목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머리를 뒤섞어 혼탁하게 만들었다. 응, 응, 응. 줄리안은 대답했다. 먼 곳에 있는 악마의 속삭임에 대답하는 것 같았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클로드가 잘했다는 듯이 뺨을 맞대고 비볐다. 부드러운 감촉에 줄리안은 소스라쳤다. 응, 응. 아래가 바짝 섰다. 줄리안은 다리로 클로드의 허리를 당겼다. 그리고 허리를 움직였다. 단단해진 성기가 클로드의 복근에 비벼졌다. 하하, 귀여워. 클로드가 속삭였다. 귀여워? 클로드가 누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는 이미 이상야릇한 색의 안개로 뒤덮였다.
줄리안은 끙끙 앓으면서 클로드의 배에 자신의 것을 문질렀다. 괴로웠다. 토정하고 싶었다. 응, 으읏. 문지르면 문지르지 않는 것보다 조금 나았다. 그러나 새로운 욕심이 치솟았다. 더 대단한 쾌감을 얻고 싶었다. 아까 얻었던 그 쾌감을.
차마 말할 수 없어 앓기만 하는 줄리안을 내려다보며 클로드가 다시 한 번 키스했다. 입술이, 혀가 삼켜졌다. 타액을 모두 빼앗겼다. 강제로 그의 타액을 마셨다. 악마의 혓바닥이 줄리안의 온 입안에 쾌락을 부여하고 있었다. 입안을 애무당하며 줄리안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뿐이 아니라 그의 성기도 선액으로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줄리안, 아래가 질질 새.”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심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뺨이 붉어졌다. 그러나 줄리안은 클로드를 밀어내지 않았다. 밀어내기는커녕 더욱 끌어당겼다. 더 닿아줘. 이 뜨거운 열을 조금이라도 가져가줘. 피부와 피부가 닿으면 열이 옮겨 가는 착각이 들었다. 자신의 열이 옮겨 가 클로드의 피부는 더욱 뜨거워지기만 했다. 클로드가 떨어지려고 해서 줄리안은 더 매달렸다. 사라지지 마. 네가 아니면 이 열을 옮길 수 있는 데가 아무 데도 없어. 가지 마, 제발.
줄리안이 달라붙어서 클로드가 목 안쪽이 긁히는 듯한 웃음을 냈다. 줄리안은 그의 웃음 끝에 매달린 장난기를 눈치챘지만 그뿐이었다. 다행히 그는 줄리안을 떼어내지 않고 안아주었다.
“다리 벌려.”
클로드가 말하자 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클로드가 “아님 내가 벌릴 수밖에 없어. 그랬으면 좋겠어?”라고 묻자 스스로 다리를 벌렸다. 클로드가 다리를 벌리는 것보다 그가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게 싫었다. 천천히 다리를 벌리자 클로드가 줄리안의 입술에, 코에, 뺨에 키스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하는 듯한 다정한 버드 키스. 그러나 그는 촉, 촉, 입을 맞추면서 요구했다. 더 벌려. 더. 더. 줄리안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벌리자, 다리를 침대에서 띄우고 무릎을 굽혀가면서까지 벌리자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성기로 내려왔다. 성기를 만져주는 걸까? 줄리안이 기대했을 때 클로드는 손을 그의 성기에 비비더니 더 아래로 내렸다. 회음부에 손이 닿는 순간 줄리안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 무슨.”
“너 여기만 통통하네. ……시발, 뭐가 이렇게 야하냐.”
클로드가 줄리안의 회음부를 누르고 만지더니 문질렀다. 거칠었다. 성기도, 배 속도 미칠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거기, ……아, 아아!”
순식간에 줄리안은 쏟아냈다. 크게 한 번 쏟아내고는 흣, 흣, 숨을 몰아쉬면서 잔해를 토해내고 있는 줄리안의 입구에 클로드의 손가락이 닿았다. 줄리안이 숨을 내쉬며 토정했을 때 클로드의 질척한 손가락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싫어, 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줄리안은 간신히 참아냈다. 머릿속의 안개는 희미하게 흩어졌고 줄리안의 눈에 클로드가 선명하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클로드의 입술이 내려왔다. 입술과 입술이 닿은 상태로 그가 물었다.
“아파?”
절정에 오른 직후라 줄리안의 이성은 잠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벅…… 차서.”
클로드의 얼굴에 난처한 미소가 걸렸다. 그 얼굴 어디에도 그만두자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줄리안도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자신은 두 번이나 쏟았는데 클로드는 아직이었다. 자신도 했으니 클로드도 하는 게 당연하지. 당연하지만, 안쪽으로 들어온 것이 손가락 한 개라는 걸 감안했을 때 그의 성기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 개만으로도 입에서 손가락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입으로 하자니 그 물건이 자신의 입에 들어가기는 할지 의심스럽고, 그렇다고 여기서 내뺄 수도 없고, 하지만 이제 슬슬 약 기운이 떨어져가는.
“흐아앗! 아, 싫, 으, 으응!”
갑자기 눈앞에 전기가 튀었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어깨를 잡은 채 몸을 떨었다. 안쪽 어딘가가 뜨거워졌다. 손가락이 어딘가를 문지르고 있는데 미칠 것 같았다. 점막이 벌어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는 그저 빠듯했을 뿐인데 지금은 그곳이 달궈지고 있었다. 안타깝고 초조한 쾌락이 열과 함께 더럽고 은밀한 부분을 괴롭혔다.
“하읏, 전, 하, 제발, 싫, 으으읏, 안 돼, 그렇게, 흣, 너무, 거칠, 하읏!”
손가락이 더 거칠어졌다.
줄리안이 울면서 매달렸다. 하지 마. 미칠 것 같으니까 하지 마. 제발, 싫어, 거기, 그렇게 하지 마. 신음으로 엉망이 되어서도 어떻게든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어내는 줄리안의 애원을 들으며 클로드는 머리가 맛이 가는 걸 느꼈다. 시발, 여기까지 내가 버틴 게 용하다고. 그는 자신을 칭찬하며 미사일처럼 튀어나가려는 이성을 보내주었다. 더는 무리였다.
“미친. 너 신음에 약 탔냐?”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줄리안의 몸을 뒤집었다. 손가락을 꽂은 채 뒤집는 바람에 줄리안이 히이이이익 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점막이 긁히는 느낌이 선명했다. 점막이 부었다. 간지러웠다. 미칠 것 같았다. 줄리안은 허리를 움직였다. 남자의 손가락이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왔으면 했다. 아아, 닿지 않아. 그는 대신에 점막을 긁어보려 했다. 허리를 움직였다. 더, 더 쑤셔지고 싶었다.
벅차다고 한 입은 누구의 입인지, 줄리안이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힘이 없는지 뺨은 시트에 댄 채 개처럼 엉덩이만 들고 있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등에 입술을 대었다가 이를 박았다. 크앗. 줄리안의 입에서 이상한 신음이 샜다. 침대 옆의 거울에 줄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타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얼굴이 백치 같았다. 지나친 쾌락에 머리가 지끈지끈해서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열을 풀지 않으면 당장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클로드는 손가락을 더 넣어보았다. 줄리안의 입구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조그만 구멍이었고 주름져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머금은 것만으로도 주름이 거의 다 펴져 있었는데 두 번째 손가락도, 세 번째 손가락도 잘도 집어 삼켰다. 아래쪽에서 줄리안의 울음이 더 커져갔다.
“싫어, 힛, 제, 흐으읏, 발, 아흣, 빼줘어, 아, 아아, 거기, 좋, 아니, 싫, 아아아, 나, 미칠, 아!”
빼라는 소리로는 요만큼도 들리지 않았다. 요망한 새끼. 클로드는 눈알이 빠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에 힘을 풀지 못한 채 줄리안의 구멍을 바라보았다. 주인하고 똑같은 구멍 같으니. 한 개를 넣으면 당장에라도 찢어질 것처럼 구는 주제에 세 개를 넣으면 더 달라고 탐욕스럽게 입을 벌린다. 미친놈의 구멍 같으니.
빡빡한 건지, 아니면 충분하게 느슨해졌는지. 이대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프거나, 아, 시발. 몰라.
클로드는 줄리안의 안에서 손가락을 빼고 양손으로 엉덩이를 갈랐다. 줄리안이 허리를 움직였다. 어서 줘, 어서 줘. 그 몸이 그렇게 애원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단숨에 들어갔다.
아아아아아아―.
줄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마치 짐승 같은 비명이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등을 입술로 더듬었다. 다친 건가?
“줄리안, 줄리안.”
자신의 귀로 듣는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욕망만이 가득했다. 클로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줄리안의 안이 지나치게 조였다. 이게 타인의 안인가? 지독히 뜨겁고 미칠 것처럼 야했다. 사방에서 점막이 달라붙었다. 움직여. 점막들이 요사스럽게 보챘다. 클로드는 머리를 흔들었다.
“줄리안?”
그때 줄리안이 허리를 흔들었다. 흐아아, 으읏. 귀에 들리는 신음에는 이성이라고는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줄리안이 엉덩이를 움직였다. 안을 무작정 조였다. 빨리, 빨리, 빨리. 재촉이 선명했다.
아, 시발, 재촉이 아니어도 난 몰라. 모른다고!
클로드가 허리를 콱 들이밀었다. 흐으읏. 줄리안이 신음성을 질렀다. 클로드는 침대 옆에 있는 거울로 줄리안의 얼굴을 확인했다. 엉망진창이었다. 눈물과 침으로 젖은 얼굴은 백치처럼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도 엉덩이는 바짝 들고 흔들어댔다. 마치 남자의 성기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클로드는 미친 듯이 움직였다. 줄리안의 허리를 조였다. 열이 머리든 성기든 한쪽을 터뜨릴 것 같았다. 줄리안이 소리 질렀다. 아, 아아, 죽어, 죽을 거야, 흐아아! 죽여주고 싶었다. 클로드는 사양하지 않았다. 줄리안의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유린했다. 그나마 살집이 좀 있는 편인 엉덩이를 벌렸다가 모으면서 안쪽을 쑤시자 줄리안이 사람의 것이 아닌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엉덩이를 때려주었더니 안쪽을 더 조여왔다.
클로드의 머릿속은 완전히 날아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만을 몰아쉬며 절정으로 곧장 달려갔다. 엉덩이를 때릴 때마다 줄리안이 이상한 소리로 울음을 토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줄리안의 몸이 단숨에 굳었다. 안쪽이 비틀리듯 조여들었다.
흐으읏.
줄리안의 절정이었다. 클로드도 줄리안에게 이끌리듯이 절정 위로 당겨졌다. 몇 번의 피스톤질 끝에 클로드는 마지막으로 줄리안의 가장 안쪽까지 자신을 쑤셔 넣었다. 몸을 바짝 붙였다. 어깨가 눈앞에 있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줄리안이 길게 울음을 내뱉으며 풀어지려는 안쪽을 다시 조였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나서야 줄리안의 머릿속 안개가 다시 흩어졌다.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차라리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되기를 바라게 되는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무게를 느끼면서 눈을 깜빡였다. 어디서부터 놀라고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아득했다.
“전하.”
일단 클로드를 불러보자. 줄리안은 입을 열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클로드라고 불러.”
줄리안은 정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클로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섹스 한 번에 전하가 어떻게 클로드가 됩니까? 물론 자신에게는 첫 섹스였지만 클로드에게는 아닐 것이었다. 여자 다섯 명이 가라앉힌다는 소문이 도는 남자인데 그 소문은 과장된 것이라고 해도 밤 생활이 상당히 방탕할 것이라는 건 안 봐도 비디오였다. 처음인 자신을 이렇게까지 만드는 솜씨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전하.”
팡, 엉덩이를 맞았다. 아픈 것보다도 소리가 컸다. 아니, 소리가 커서 놀랐지만 아픔도 있었다. 제법 멍이 들었을 것 같았다. 하긴, 아까 계속 맞았지. 하지만 항의를 하기엔 맞을 당시에는 자신도 좋아했었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전, 흐읏!”
클로드가 안쪽에 고인 정액을 뒤섞었다. 엉덩이 안이 질척한 것이 낯설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다시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다. 클로드의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강제로 벌어진 곳이 잠깐 어색하게 굳어 있다가 다시 흐물거리는 게 느껴졌다. 줄리안은 머리를 흔들었다. 벌써 네 번째였다. 이제 정신이 돌아와야 맞는데 다시 머릿속이 진탕이 되고 있었다.
“하지 마세요.”
“뭘?”
“그, 안쪽에, 아읏, 하지 마, 흣!”
“안쪽, 뭐? 안쪽을 내가 어떻게 했는데?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네가 벌름거리고 있을 뿐이지.”
젖은 안쪽을 쑤시며 클로드가 줄리안의 목을 진득하게 빨아 당겼다. 줄리안은 고개를 저었지만 클로드는 놓아주지 않았다. 놓을 수가 없었다. 줄리안이 몸에 뭘 처바른 건지는 몰라도 땀과 뒤섞여 음탕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꿀에 빠져 죽는 벌레의 기분이 이런 거려나. 분명 최고의 죽음일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밤은 길었다. 클로드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