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다가오는 그림자
밤새도록 클로드는 줄리안의 안에 자신의 정액을 들이부었다. 처음에는 제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던 줄리안이었지만 그다음에는 도망가려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도망갈 의지도 잃어버린 채 난파된 배처럼 떠밀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줄리안의 약 기운은 빠질 듯 빠지지 않았다. 그는 수초처럼 흔들리면서도 쾌감에 젖어 신음하고 울부짖었다. 클로드에게 매달리거나 그의 입가에 잔 키스를 하기도 했다. 제발, 조금만, 천천히. 줄리안이 그렇게 말하면 클로드는 잠시 허릿짓을 멈춰주었다. 그러나 곧 으르렁거렸다. 시발, 이렇게 맛있는데 어떻게 멈춰. 개소리. 그리고 더 거칠어졌다. 줄리안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천천히 하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클로드를 멈추게 한 대가는 복리 이자로 돌아온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을 애무하라든가 구음을 하라든가 이런 말 따위는 없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에게 바라는 게 없었지만 대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온몸을 빨아대고 엉덩이를 때리고 유두를 꼬집고 입술이 퉁퉁 부을 때까지 키스하고 귀를 깨물었다. 줄리안은 자신이 사람과 섹스를 하고 있는 건지 짐승에게 당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리고 현재.
“줄리안, 줄리안. 문 좀 열어봐. 줄리안?”
줄리안은 클로드 스토메어, 아리스트 대공을 인간이 아닌 자로 분류했다.
“꺼져주시겠습니까.”
상대는 인간이 아니니 험한 말 좀 써도 된다고 생각하며 줄리안은 변기 위에서 어금니를 악물었다. 배 속에서 뭔가가 나올 때마다 뒤가 열리고 끔찍한 고통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통보다 더 강렬한 것이 있었으니 수치심이었다. 섹스 끝에 내내 설사를 해야 하는 이 상황이 정말 괴로웠다. 시발, 난 첫 섹스였다고! 줄리안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첫 키스, 첫 애무, 첫 섹스, 첫 펠라, 시발, 모두 다 처음이었단 말이야!
딱히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줄리안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줄리안.”
문 건너편에서 클로드는 똑똑똑 줄리안, 똑똑똑 줄리안, 똑똑똑 줄리안을 무한 반복 중이었다. 질펀하게 섹스하고 만족스럽게 잠들었다. 클로드가 잠들면서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아, 이래서 섹스를 한 놈들이 다들 돈을 퍼다 주고 정보를 퍼다 주고 그러다 총살형을 당하는구나’였다. 알 것 같았다. 클로드도 줄리안이 다리를 벌리면서 뭔가를 요구한다면 다 해줄 것 같았다. 그래, 알 만하다. 시발. 클로드는 욕을 하면서 이미 기절한 줄리안을 끌어안고 잠에 빠졌다. 인생 최고의 단잠이었다.
그러나 단잠은 곧 깨지고 말았다.
줄리안이 그의 품에서 황급히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냐고 할 틈도 없이 줄리안은 욕실에 처박혔다. 정확히는 화장실이었다. 그제야 클로드는 직장에 사정을 하면 장에 무리를 준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당연히 생각 못 했지. 난 이게 첫 섹스라고! 난 네가 처음이란 말이야, 시발! 그러나 줄리안은 처박혔고 클로드는 그 앞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똑똑똑.
“줄리안.”
똑똑똑.
“줄리안.”
“꺼지시라고요!”
스무 번 부르면 한 번 대답이 돌아왔다. 절 좀 내버려둬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돌아온 대답이 이제는 ‘꺼지시라고요!’였다. 흠. 클로드는 욕실 문에 기댄 채 똑똑똑 노크를 하며 생각했다. ‘꺼지시라고요’ 쪽이 훨씬 마음에 드니 좀 더 불러야겠다고.
“줄리안, 문 좀 열어봐. 나도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으니 좀 보자고.”
“보긴 뭘 봅니까. 옷 입으시고 대공저로 사라져주시는 게 절 도우시는 길입니다.”
“야, 우리 사이인데 더러운 거 좀 보이면 어때? 소변이든 소변이 아닌 거든 다 괜찮으니까.”
“아, 시발, 개새끼야, 꺼지라고!”
줄리안이 쉬어터진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아마 줄리안이 움직일 수 있고 그의 손에 나이프가 있다면 단숨에 휘둘렀을 만한 분노였다. 그러나 클로드는 찔끔하는 대신 숨죽여 웃었다. 미안한데 좀 웃기기도 하고 줄리안이 귀엽기도 했다.
“줄리안, 약이라도 가져올까?”
“피임약이라도 가져오시렵니까?”
섹스를 심하게 한 끝에 먹는 약이라면 피임약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줄리안이 빈정거리자 문 뒤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클로드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 엉덩이 안에 자궁이라도 키우는 거야? 어쩐지 존나 쫄깃하더라.”
“아, 시발.”
“하지만 피임약은 안 되지. 애가 생겼으면 책임을 져야지, 피임은 무슨 피임. 날 닮은 애라고 생각해봐. 얼마나 예쁘겠어.”
저 주둥이를 따버리면 소원이 없겠네.
줄리안은 변기에서 일어났다. 이번에야말로 설사가 멈춘 듯했다. 배는 아직 싸르르 아팠지만 이만하면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종장에게 전화하고 하루 휴가를 내야겠다. 그리고 집에 처박혀서 잠이나 자야겠다. 이 악몽 같은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갈 수 있도록.
줄리안은 클로드가 뭐라고 지껄이든 간에 천천히 샤워를 하고 나왔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자 놀라울 정도로 퀭한 자신이 보였다. 시발, 시발, 시발. 줄리안은 욕을 참지 않았다. 화장실로 뛰어들어오긴 했지만 아까 슬쩍 본 클로드는 아주 반짝반짝 윤이 났다. 사람에게서 생기를 빼앗아도 유분수지. 덩치는 나보다 더 큰 게! 자신의 생각이 비이성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세상이 자신에게 비상식적으로 굴고 있는데 그라고 세상에 성실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오늘만은 삐뚤어지고 싶었다.
문을 열자 아주 반짝반짝 도자기 같은 피부의 클로드가 서 있었다. 여전히 나체였다. 그리고 아직 반쯤 서 있는 성기가 눈에 보였다. 그렇게 하고서 아직도 서 있냐. 욕을 하고 싶었지만 말을 섞는 것조차 귀찮았다. 아까부터 클로드는 어린 아가씨를 집적거리는 동네 불한당처럼 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열 마디는 섞어야 할 게 뻔했다.
“나왔네.”
클로드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 너야 기분 좋겠지. 줄리안은 딱딱한 얼굴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어서 거실로 나갔다. 성큼성큼 걷고 싶었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고 말할 수 없는 부분도 너무 쓰려서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엉거주춤 걷지 않는 것은 시종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어이, 줄리안. 화났어?”
“아닙니다, 전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이성이 돌아왔다. 줄리안은 냉랭하게 대답하고는 거실의 인터폰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줄리안 일리드입니다. 아리스트 대공 전하께 손님용 정장을 하나 보내주십시오. 175cm, 68kg입니다.”
‘줄리안? 오늘 주간조 아니에요? 왜 벌써 입궁했어요?’
입궁이 아니라 어제 퇴궁을 못 한 거지. 줄리안은 시니컬하게 웃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상대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전화를 끊은 줄리안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생글거리고 있는 클로드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클로드가 줄리안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아 보이는 모습에 줄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혀가 어디를 핥았는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몸이 오싹했다. 아직도 약기운이 안 빠졌나 생각하자 눈앞이 암담했다. 그래도 어제처럼 엉망이지는 않으니 괜찮겠지. 줄리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전하.”
“오늘 아침도 굉장히.”
“가운 입으십시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번만은 클로드가 정장을 받아다줘야 했다. 클로드가 흐음 하고 잠시 생각 끝에 물었다.
“시킨 건 네 옷이야?”
“예, 집에 가야 하니까요.”
“내 옷을 입고 가. 굳이 손님용 정장 따위를.”
“전하의 옷은 저에게 너무 큽니다.”
그런 옷을 입고 복도를 걸으면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손님용 정장을 입어도 모두가 알게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덜 꼴사나울 테니까.
“송구합니다만 옷을 좀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이 꼴로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라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꼴이 무슨 꼴.”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줄리안이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나이트가운을 아무렇게나 입고 나가서 정장을 받아왔다. 정장은 고급스러운 박스에 들어 있었다. 줄리안은 박스를 열었다가 장미꽃과 카드를 발견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손님에게 물건을 보낼 때는 늘 꽃과 카드를 넣는다. 궁의 방침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방침이 정말 옳은 것인지 의심이 되었다. 줄리안은 장미꽃과 카드를 집어 던지고 정장을 꺼냈다. 그때 클로드가 줄리안의 손목을 잡았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줄리안이 던진 장미꽃이 들려 있었다. 그는 줄리안의 귀에 장미를 꽂고 키들거렸다.
“잘 어울리는데.”
어제 하룻밤 자더니 미쳤나.
줄리안은 모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차마 대공에게 그런 험악한 언사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아까는 화가 나고 수치스러운데다 대공을 면전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험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지, 사람을 앞에 두고 말하는 건 또 달랐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왜 옷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야?”
클로드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줄리안은 왕궁 시종으로 철저히 훈련된 프로인데 그런 그가 대공인 자신에게 옷을 가져오라고 하다니 평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줄리안은 자신에게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평소와는 다른 상황이니 이해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 꼴이 도대체 어떤데?”
자신의 꼴로는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줄리안의 꼴이 도대체 어떻단 말인가. 클로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줄리안은 지금 이 상황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 궁에서, 이 빌어먹게 발정 난 궁에서, 줄리안과 클로드는 잠자리를 가졌다. 둘은 싱글이었으며 아무 거칠 것도 없었고 합의된 행위였다. 물론 한쪽은 좀 심신 미약 상태였지만 그래도 완전히 이성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피고용인이 고용주의 동생과 잤지요.”
줄리안의 말에 하 하고 클로드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나오기야?”
클로드의 얼굴에서 활짝 피었던 웃음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라 이런 겁니다, 전하.”
“네 말은 마치 내가 고용주의 동생이라는 걸 이용해서 널 강간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전하. 사죄드립니다.”
줄리안이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클로드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진심으로 그런 뜻이 아니었고 자신의 말에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줄리안은 자신과 관계를 맺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시발, 야, 난 처음이었다고! 처음 섹스를 했는데 상대가 자신과 섹스를 한 걸 후회한다, 이런 엿 같은 일이 있나. 클로드는 무섭게 입매를 굳혔다.
그사이 줄리안은 옷을 다 입고 거울을 향했다. 옷매무새를 고친 그는 왕실 시종인 줄리안 일리드였다. 어제 클로드와 여러 감정을 나누었던 줄리안 일리드가 아니었다. 클로드는 기가 막혀서 시발 하고 욕설을 뱉었다. 그 목소리에 줄리안이 눈에 띄게 어깨를 굳혔다.
하, 어이가 없네, 진짜. 클로드는 줄리안을 노려보았다. 어젯밤 내내 욕설을 뱉었었다. 처음 해보는 섹스는 미친 듯이 달았다. 아니지, 섹스라고 다 이렇게 달 리가 없었다. 줄리안 일리드가 너무나 맛있었다. 식욕과 성욕이 동시에 치솟고 정복욕이 들끓고 마지막에는 안도와 평화로 가득 차는 그 경험은 마약처럼 비정상적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너무 달아서 내내 욕을 했지만 줄리안은 한 번도 겁먹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줄리안은 몸을 굳혔다. 마치 클로드가 그를 위협이라도 한 것처럼.
“가보겠습니다, 전하.”
줄리안이 단정하게 인사했다. 그러나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구멍도 아플 줄리안의 몸은 평소와는 달리 인사가 어설펐다. 아마 예전이라면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안이 그동안 예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클로드도 줄리안의 인사가 어설프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줄리안이 방을 나가기 직전 클로드가 줄리안의 팔을 잡았다. 열리려던 문을 힘주어 닫고 거기에 줄리안을 밀어붙였다. 그가 눈을 크게 뜬 사이 클로드는 그의 입술을 삼켰다. 키스로 몰아붙였다. 감정을 쏟아부었다. 그러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었는지 잊어버렸다. 줄리안의 체액에 아직 약 기운이라도 남아 있는지 타액을 빼앗아 먹다 보니 기분이 누그러졌다.
줄리안은 클로드에게 잡힌 채 키스를 받았다. 셔츠, 구겨지는데. 잠깐 그 생각을 했는데 곧 모든 걸 잊어버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호흡이 가빠졌다. 숨이 막히면 쾌감을 느낀다고 했던가. 그건 정말인 듯했다. 줄리안은 클로드를 밀어내려다 말고 끌어당겼다. 클로드의 난폭했던 키스가 점차 부드러워졌다. 등골이 오싹했다. 아래가 더는 굳어지지 않기 때문인지 밤새도록 학대당한 안쪽이 부드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안을 조이면서 클로드의 혀를 빨았다.
“넌 어떤지 모르겠는데.”
키스가 끝난 후 클로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줄리안은 멍한 머리로 클로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난 좋았어. 시발, 넌 존나 완벽했어. 네가 이러는 거 보면 너에게 난 안 그랬던 것 같지만, 빌어먹을, 넌, 넌 완벽했어.”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속상한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클로드가 말했다. 줄리안은 고개를 들어 클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는 그저 맑은 겨울 하늘 같던 청회색 눈동자에 얽혀 있는 진득한 욕망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듯한 눈으로 클로드는 자신을 욕망하고 있었다.
클로드가 아쉬운 얼굴로 줄리안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줄리안이 밖으로 나갔지만 그는 문을 닫지 않았다. 보내기 싫은 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얼굴을 보며 줄리안은 이 얼굴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생각했다. 아니,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좀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보니 단단한 몸에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마치 신화에 나오는 남신 같았다. 마르스라든가 아폴론이라든가.
“전하는 별로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네 태도만 봐도 알겠다.”
클로드가 칫, 혀를 찼다. 그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며 할 말을 찾다가 고개를 들었다.
“난 네가 처음이야. 존나 환상적인 첫 경험이었고, 첫 경험이긴 하지만 첫 경험이라고 다 이렇게 멋진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시발, 난 네가 어떤 사람이든 이 경험을 후회하지 않을 거고, 시발, 내가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나도 모르겠는데.”
클로드가 시발, 시발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내리깐 눈을 보고 있었다. 긴 속눈썹과 그 밑에 드리운 그늘을, 이윽고 막이 올라가는 것처럼 나타나는 눈을. 아, 예뻐. 줄리안은 감탄했다.
“시발, 네가 좀 가르쳐도 되잖아. 난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한다고. 춤도 제법 잘 추게 되었잖아. 그러니까.”
클로드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그러니까, 네가.”
“그럴 수 없어요.”
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클로드가 입술을 깨물며 줄리안을 노려보았다. 무시무시한 눈인데도 억울하고 속상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무섭지 않았다. 줄리안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클로드가 손을 내밀어 그를 잡으려다 관두었다. 허공에서 돌아가는 쓸쓸한 손을 보다 줄리안이 말했다.
“저, 저도 처음이니까 못 그럽니다. 그,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전하.”
어……?
클로드가 부지불식간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하는 사이 줄리안이 고개를 돌리고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귀가 몹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클로드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지고 있었다. 그는 뭐라고 이상한 말을 소리쳐 내뱉을 것 같아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멀어지는 줄리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희미하게 다리를 절면서도 필사적으로 멀어지는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클로드는 입을 가린 손에 힘을 주어야 했다.
“줄리안!”
하루를 쉬고 입궁한 줄리안을 보자마자 이샤가 달려왔다. 그녀는 그에게 뛰어들려다가 멈칫하고는 대신 포옥 끌어안았다.
“괜찮아?”
후, 벌써 이 말을 몇 번째 듣는지. 줄리안은 이샤에게 안긴 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늘 출근하는 그 순간부터, 아니, 셔틀버스에 탄 순간부터 모두가 물어보았다. 심지어 셔틀버스 짝꿍인 이안조차 걱정스러운 얼굴로 ‘너 그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서? 괜찮아?’라고 걱정해줄 정도였다.
다들 걱정하면서도 줄리안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그들에게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괜찮아. 몸은 멀쩡해.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무 일도 없었어. 줄리안의 단순한 대답은 사람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었다. 대공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줄리안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의 상상은 더욱 가속화될 뿐이었다. 그 사실을 모를 줄리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사람들은 더 궁금해했다.
“예, 비전하. 괜찮습니다.”
“그제 좋지 않은 일이 있었지?”
“아니요.”
그건 좋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물론 최악에 최악을 거듭해 만난 악재였지만 마지막을 생각해보면……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줄리안의 말에 이샤가 그럴 리가 없는데, 라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보다 비전하, 어제는 아무 일도 없으셨습니까?”
이번에는 이샤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줄리안은 이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무슨 일입니까?”라고 소리 낮춰 물었다. 이샤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국 말문을 열었다.
“대비 전하께 혼났을 뿐이야.”
“왜 혼나셨습니까?”
“나쁜 새끼 방 앞에서 난동 부렸다고.”
나쁜 새끼가 누군지 알 만했다.
“왜 그러셨어요?”
“줄스 네가 잡혀 있으니까 그렇지.”
“비전하.”
“네가 그 무지막지한 놈에게 당하게 생겼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심지어 그 술을 먹었는데! 내가 세 배로 타라고 했단 말이야!”
세 배. 줄리안은 머리가 징 울리는 것을 느꼈다. 세 배. 세 배라고?
“그래서 화재경보기를 울리려고 하셨어요?”
줄리안의 말에 이샤가 입을 꽉 다물었다.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입술이 앵두처럼 예뻤다. 줄리안은 그 입술을 바라보다 대답을 듣기를 포기하고 물었다.
“대비 전하께 많이 혼나셨어요?”
“근신령이지, 뭐.”
어차피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데 근신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이샤가 이죽거렸다. 줄리안은 이샤를 보며 의아해졌다. 이샤와 자신은 그저 왕비와 시종의 사이일 뿐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입궁해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샤가 그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화재경보기를 내리려 했다는 이야기였다. 화재 경보가 울리면 대공도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 방을 나오게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왕실이 대외적으로 입게 되는 손해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과감한 행동이었다.
“에릭은 어디 있습니까?”
그제 술을 가져왔던 시종이 보이지 않아 묻자 이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갖다 버렸어.”
해고했거나 보직을 바꿨다는 이야기였다. 설마 해고까지는 아니었겠지, 라는 마음으로 시녀장을 바라보자 시녀장이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고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에릭에게는 강등된 것과 다름없다. 왕이나 왕비, 대비 등을 모시는 주요 자리야말로 시종들이 가장 원하는 자리니까.
“비전하, 에릭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이야. 나는 분명히 너에게 전하라고 했어. 그리고 그 본인은 전했다고 했다고!”
전하기는 했지. 너무 두루뭉술한 표현이라 전달이 안 되었을 뿐.
그래도 에릭은 어리다. 아직 1년차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실수였다. 그러나 줄리안은 더 말하지 않았다. 에릭이 아무리 어리고 1년차에 불과하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되는 실수들이 있다. 상사가 덮어줄 수 없는 실수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에릭은 그런 실수 중 하나를 범하고 말았다. 그 책임은 온전히 에릭이 져야 한다.
심지어 줄리안은 에릭의 상사가 아니며 에릭의 실수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였다. 한 번 감쌌으면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하며 줄리안이 이샤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짐승 같은 놈이 오늘 입궁한다는 것 같던데 아는 바 있어, 줄스?”
“전혀 없습니다.”
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제와 어제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수면과 함께 치료 마법을 병행했기 때문에 다친 곳은 전부 나았다. 그러나 아직도 몸에 남은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클로드가 허리를 조이던 손길, 끌어안던 팔, 성기에 닿았던 입술, 어깨를 깨물던 치아. 보이지 않는 감각들이 줄리안의 몸을 뒤덮은 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전하께서 호출하신 모양인데 분위기가 좀 어둡더라고.”
“그렇습니까…….”
“솔직히 탄생연에서도 좀 그랬잖아. 가족 테이블에서 뺀 것도 너무 노골적이고 말이야. 전하와 대공의 사이가 험악하다는 소문이 사교계를 위주로 퍼져가고 있어. 그건 왕실에 도움이 되는 길이 아니지.”
싸움닭이라고 불리는 이샤지만 그녀 또한 뼛속까지 왕족이었다. 평소에 수많은 사고를 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무조건 국왕을 지지할 사람이었다. 그것이 왕비라는 자리이고 이샤가 왕비가 되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실제로 왕이 콜걸과 잘못 놀아나 신문에 터졌을 때 이샤는 사흘이나 굶은 상태로 국민의 앞에 나타나 말했다.
‘여러분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군주로서가 아니라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그분을 봐주십시오. 그분이 얼마나 저를 사랑하고 아끼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만나 서약을 나누었는지 떠올려주십시오. 저는 사랑받고 있습니다. 제 세상을 모두 뒤덮는 거대한 사랑입니다. 저를 그렇게 사랑해주시는 그분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단호히 이 파렴치한 일들이 사실이 아님을 여러분의 앞에 밝힙니다.’
왕족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샤의 명연기는 여론을 뒤집어엎었다. 조작설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왕족은 뒤로 콜걸과 신문을 어르고 달래서 결국 그들이 포기하게 만들었다. 물론 거액의 돈이 들어갔지만 국왕의 외도를 덮을 수만 있다면 푼돈인 액수였다.
왕 또한 왕비와 매일 싸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왕비를 늘 완벽하게 에스코트해주었다. 둘은 빵 점짜리 부부였지만 백 점짜리 동지였다.
“하여간에 그릇이 밀알만 해가지고 어떻게 국정을 운영하는지 몰라.”
이샤가 빈정거렸다.
“비전하.”
시녀장이 경고하듯 불렀지만 이샤는 조심하기는커녕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이잖아. 동생이 좀 잘나가면 박수를 쳐주지는 못할망정 그새 꽁해가지고. 아주 지겨워 죽겠어.”
이샤가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손을 까딱까딱해 줄리안을 불렀다. 줄리안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었다. 그녀의 앞에 서자 이샤가 물었다.
“거기 앉아.”
이샤가 고갯짓으로 건너편 소파를 가리켰다. 줄리안이 단정하게 허리를 펴고 앉자 이샤가 생긋 웃었다.
“자, 이제 말씀해보실까? 대공의 섹스는 어땠어?”
줄리안의 얼굴에 난처한 미소가 떠올랐다.
줄리안이 이샤에게 대공과의 섹스를 보고하라는 닦달을 받을 무렵 클로드는 왕의 집무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그제부터 아주 기분이 좋았다. 아니, 기분이 좋은 가운데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어제 종일 줄리안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너무 빨리 전화하면 찐따처럼 보일까? 그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심지어 그가 알고 있는 전화번호는 줄리안이 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줄리안의 뒷조사를 하느라 알아냈을 뿐이었다. 그런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될까. 안 될 것 같았다. 슬쩍 제이미에게 물어보자 제이미가 ‘줄리안 일리드가 아직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건 기억하십니까?’라며 혀를 쯧쯧 찼다. 역시 안 되나 싶어 연락하지 않았지만 종일 줄리안의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어이, 짐승 같은 아우님. 내 귀여운 시종을 괴롭혔겠다?”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왕이 빈정거렸다. 클로드가 코웃음 쳤다.
“괴롭혀? 누가 누구를?”
“네가 줄리안 일리드를. 줄리안이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해.”
“뭐?”
클로드의 눈이 싸늘해졌다. 에드워드는 그 눈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클로드는 화가 난 얼굴로 “어떤 개새끼가 그딴 헛소문을 퍼뜨려?”라고 으르렁거렸다. 당장에라도 사람 하나 죽일 얼굴이라 에드워드가 서둘러 클로드의 팔을 잡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들이야. 뭐 그런 거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
“아무것도 모르면 입을 닥치든가. 내가 줄리안을 강간했다니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될 건 뭐야. 강간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일어날 만한 일이지 않은가. 폭력, 사기, 살인, 그런 것들과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클로드는 자신이 폭력, 사기, 살인은 할 수 있어도, 설사 강간을 한다고 해도, 그 상대가 줄리안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줄리안에게 해를 끼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말투에 에드워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그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뭔가 있는데?
에드워드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클로드는 그제야 자신이 과하게 반응했다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클로드가 에드워드의 시선을 피하자 “어라, 이거 봐라”라며 에드워드가 집요하게 클로드의 시선이 있는 곳으로 쫓아다녔다.
“아, 하지 마.”
“클로드, 내 귀여운 동생. 나도 강간은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어. 넌 동정이니까 말이지. 그런데 아주 헛소문은 아니었나 봐?”
클로드의 사나운 눈이 에드워드를 향했다. 에드워드가 싱긋 웃었다.
“강제로는 아니어도, 응?”
클로드는 에드워드의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을 보다 혀를 찼다. 에드워드는 클로드의 눈에 어린 딱하다는 기색에,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클로드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게 사랑받고 싶냐?”
“뭐?”
“널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종이 나와 잔 것에 대해서 질투하고 있잖아.”
에드워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 그랬다. 그는 사실 질투했다. 줄리안 일리드를 성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반짝반짝 빛내는 눈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순수하게 열망되고 싶었다.
뭐, 나도 유치한 감정인 건 알고 있다고.
에드워드가 침을 뱉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는데, 그래도 그 눈이 좋은 걸 어쩌란 말인가. 이기적이고 말도 안 된다는 걸 아는데, 그래도 계속 자신만을 좋아하는 순수한 팬으로 남으라고 하고 싶은 것을.
“너무 억울해하지 마. 애초에 줄리안은 널 좋아한 게 아닌 것 같으니까.”
“뭐?”
“네가 말하는 그 반짝반짝한 눈이라면 말이지, 아무 데서나 반짝반짝 작은 별이야, 걘. 그러니까 괜한 착각 하지 마, 난 네 것을 빼앗은 게 아니니까.”
클로드의 말에 에드워드가 다시 클로드를 돌아보았다. 클로드의 옆모습이 보였다. 겸손 따위는 배워본 적 없는 듯한 얼굴은 오만하도록 아름답다.
넌 언젠가 큰코다칠 거야, 클로드.
사람이 감추고 싶은 마음을 굳이 끄집어내는 너의 행동은 결국 적을 만들 거고 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무너지게 될 거다.
에드워드가 무서운 얼굴로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분명 그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클로드는 그에게 시선을 되돌리지 않았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걘 내 거야.”
“한 번 잤다고 네 거? 너와는 달리 궁중 사교계에서 닳고 닳은 일리드 군이 그렇게 생각할 리 없지. 너야말로 착각하지 말도록 해. 여기서 섹스 따위는 쓰고 버린 휴지보다 못한 존재야. 순금처럼 굳건하고 아름다운 서약 같은 게 아니라고.”
클로드의 눈이 흘끔 움직였다. 에드워드를 보는 것도 아니면서 휴대전화 화면을 보는 것도 아닌, 시선을 이상한 곳에 둔 채 그가 우물거렸다.
“뭐, 나도 한 번 잤다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야.”
딱 보니 결혼은 아니어도 약혼쯤은 생각한 것 같은데?
에드워드가 입술을 비틀었다. 클로드 스토메어가 우물거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보니 심술이 슬슬 피어올랐다.
“그렇겠지, 넌 왕족인데 시종과 결혼을 생각할 리가.”
“걜 시종이라고 말하면 안 되지. 걘 귀족이잖아. 일리드 백작 가문의 막내아들. S급 라이선스를 가진 마법사. 왕립 아카데미 수석. 시종이라고 말하는 건 네가 너무하는 거지.”
“너무하긴 뭘 너무해, 시종을 시종이라고 하는 건데.”
“걘 그냥 평범한 시종이 아니니까.”
무슨 대단한 인생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저리 당당한지 알 수가 없다.
“평범한 시종 맞거든. 궁에서 발에 치이는 하고 많은 시종 중 하나야.”
그 말에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믿을 수 없게도 정말 기분이 상한 얼굴이었다. 에드워드는 클로드를 잡아끌어 소파에 앉혔다. 아끼던 팬을 빼앗긴 게 문제가 아니었다. 클로드의 상태가 이상했다. 얘가 왜 이래? 에드워드는 클로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눈을 크게 떴다.
“너, 고작 하룻밤 잤다고 빠졌냐?!”
“아니거든!”
에드워드가 기가 막혀 소리치자 클로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니긴 뭘 아냐, 이 새끼! 그새 빠졌냐? 시발, 그렇게 고결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섹스 한 번 하고 금세 넘어갔냐? 클로드 스토메어, 너,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섹스 한 번이면 나라라도 팔아먹을.”
“아니라니까.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시발,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걔가!”
클로드가 더는 못 참겠는지 으르렁거리다 멈칫했다. 뭔가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 혀에서 걸린 듯했다.
“걔가? 줄리안 일리드? 걔가 뭐?”
에드워드가 말해보라며 고개를 들었다.
“존나 이쁘잖아…….”
클로드가 힘없이 항복했다. 그래, 내가 존나 가볍다, 시발.
얘가 뭐래? 에드워드가 기막힌 얼굴로 픽 실소했다. 누가 예쁘다고? 줄리안 일리드?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솔직히 줄리안 일리드는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크리스토퍼 일리드도 핸섬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스칼렛도 그만하면 미인이었다.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보통 이상의 외모를 가졌다. 후계자인 윌리엄은 정석 미남이었으며, 둘째인 벤자민도 안색이 좋지 않고 날카로운 느낌이 있었지만 미모만 두고 말하자면 형 못지않았다. 그러나 셋째인 줄리안은 그냥 평범했다. 사교계에서는 스칼렛이 다른 데서 받아온 씨가 아니냐고 수군거리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클로드. 이건 진짜 내가 널 위해 하는 소리인데.”
에드워드가 클로드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랑 자봐. 내 귀부인들과 해볼래?”
클로드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더러운 소리 하지 마.”
“뭐가 더러워? 궁정 사교계란 다 이런 거야, 멍청아.”
“싫으니까 하지 마. 역겹게.”
역겹다는 말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궁정 사교계가 역겹다는 건가, 자신이 역겹다는 건가, 클로드의 말이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됐어.”
클로드는 에드워드의 손을 밀어내며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그 살쾡이 같은 왕비와 결혼한 에드워드에게 무슨 대단한 조언을 듣겠나. 불륜 벌레들이 자신에게 무슨 조언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쓸모없는 것들이지, 다. 그는 코웃음 쳤다.
에드워드가 클로드의 역겹다는 말에 얼굴을 확 굳혔지만 역겨운 건 역겨운 것이었다. 결혼 서약도 한 것들이 여기서 치근덕 저기서 치근덕, 죄다 지옥 불에 타 죽어 마땅한 것들 같으니. 딱히 기독교도 아니면서 이럴 때만 지옥 불 운운하던 클로드가 에드워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르신 용건이 뭐야?”
오늘 아침 에드워드는 클로드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서는 궁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클로드가 무슨 용건이냐고 물어도 전화상으로는 말할 수 없다고 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클로드는 입궁해야 했다.
어차피 입궁해야 하는 거니 지나가다 줄리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기대했지만 줄리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왕궁에서 우연으로라도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자신이 좀 바보 같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갈 때는 사무실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클로드가 에드워드의 용건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했을 때였다.
“아무래도 첩자가 있는 것 같아.”
한 귀로 흘릴 수 없는 용건이 눈앞에 떨어졌다.
클로드는 잠시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에는 아직도 줄리안의 피부가 닿은 것 같은 감각이 살아 있었다. 혀끝에도 그 맛이 남아 있었다.
“누구 의심되는 사람은 있어?”
클로드는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줄리안이 정말 첩자인가? 그럴 수도 있다. 줄리안의 이야기인가, 줄리안이 의심받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지금 자신이 호출당한 것인가.
“없어.”
에드워드가 고개를 저었다. 클로드는 에드워드의 얼굴을 보며 저 말이 사실인지 가늠했다. 그리고 사실이라고 결론 내렸다. 에드워드는 정말 짐작 가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하지만 첩자의 직업은 알 것 같아. 시종이지.”
순간 클로드의 머릿속은 줄리안의 얼굴로 가득 찼다. 차가운 얼굴, 사무적인 웃음을 머금던 얼굴,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반짝이던 눈동자, 그리고 자신을 걱정하던 얼굴,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미성년자 관람 불가 장면이었지만.
“시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지?”
“아니, 시종이야.”
“어떻게 확신해?”
“시녀들이 알 수 없는 디테일을 흘렸거든.”
“둘이 아는 범위가 달라?”
“다른 부분이 있지.”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시녀들은 가십에 더 가깝고 시종들은 정치에 더 가깝다. 둘은 서로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에드워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책상으로 걸어가 잡지를 하나 들고 왔다. 에드워드가 내민 잡지를 본 클로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왕정에 반대하는 놈들인가.”
왕정을 반대하는 쪽의 잡지였다. 에드워드가 고갯짓을 했다.
“표시한 부분을 읽어봐.”
『지난달 금요일 밤, J살롱에서 국영 기업 K의 회장 S는 금괴가 든 박스를 확인했다. 그 박스는 살롱 뒷문으로 들어온 시종에게 전달되었다. 시종이 그 금괴를 어디로 운반하였을 것인가? 세 살배기 어린애도 유추할 수 있다.』
“과연, 시녀가 알기는 어려운 정보군. 이 정도 정보면 시종들 사이에서도 범위가 좀 줄어들지 않나?”
클로드가 내용을 반복해 읽으며 물었다. 에드워드가 시가의 끝을 자르며 대답했다.
“시종들의 정보 공유는 상상 이상이야. 그래도 약간은 줄일 수 있는데 저 팀의 팀원이 아니라면 과장급 이상이지.”
“과장급 이상?”
“과장급부터는 알고 있다고 봐야 해. 걔들이 괜히 과장 직함을 달고 있는 게 아니니까.”
줄리안은 과장 대리이니 과장급에 속한다. 클로드는 속으로 젠장 하고 중얼거렸다. 에드워드가 시가를 내밀었다. 클로드는 시가를 받아 불을 붙였다. 에드워드가 느긋하게 시가 끝을 잘랐다. 에드워드의 시가 함에는 에드워드라고 쓰여 있었다. 에드워드의 필체는 아닌 것으로 보아 정부 중 한 명의 선물일 듯했다.
“왕궁 손님용과는 다른 거네?”
“난 왕이니까. 넌 내가 마치 동네 똥개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지만 말이지.”
“무슨 소리야. 난 개한테 친절한 사람이야.”
사람을 뭘로 보고,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오, 저걸, 콱. 에드워드가 속으로 주먹을 휘두르다 웃고 말았다. 감정이 복잡한 것은 사실이지만 클로드는 그에게 여전히 마음 편한 상대였다. 예전에는 멀리 있는 동생이라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현실에서 마주해도 클로드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아마 그가 자신을 정말 형 나부랭이로 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종 명단 전체가 필요해. 그리고 시종들의 관리자와도 연계해야 할 거고. 그게 누구야?”
“시종장. 시종장의 위를 물어보는 거면 궁내부 장관. 왕실부 쪽으로는 집사 장관.”
“궁내부가 아니라 왕실부 쪽도 의심스러운 거야? 그럼 그쪽부터 상대하지. 전체적으로 훑어볼게.”
클로드의 말에 에드워드가 웃으며 말했다.
“경비대도.”
“거기에도 의심스러운 놈들이 있어?”
“왕궁에는 어디에나 의심스러운 놈들이 있지. 경비대, 시종, 시녀, 메이드……. 의심스럽지 않은 사람은 글쎄, 이샤 정도일까.”
클로드의 눈에 의외의 빛이 스쳤다.
“이샤? 왕비 말하는 거야?”
“그래, 네 형수님, 이 자식아. 네가 내 마누라를 박대했다고 소문이 자자해.”
네 마누라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아는 거냐.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에드워드는 아마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는 그 정도 일은 궁정 사교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감수하지 못한 클로드가 문제라고 둘러말하고 있을 뿐이다.
“왕비와 사이가 나쁜 줄 알았는데.”
“나빠.”
“그럼 왕비부터 의심해야 하지 않아?”
“거기서부터는 복잡한 어른의 사정이 있어.”
“퍽이나.”
“이샤는 내 앞에서 날 때리고 욕하고 엿 먹여도 다른 사람에게 날 팔아먹지는 않아. 그 여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서 있을 유일한 사람이야.”
절대로, 라고 말하는 에드워드의 얼굴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클로드는 그 얼굴을 보며 이샤를 떠올렸다. 그 앙칼진 얼굴과 음탕한 차림새와 비열한 수단 등을 떠올리며 그 모습 어디가 에드워드에게 신뢰를 주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졌다. 에드워드는 의심이 많다.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어릴 때는 좀 덜했는데 요즘은 더 심해졌고 그때마다 클로드는 짜증이 났다. 자신이 짜증을 내면 에드워드는 상처 입고 더 자기 방어가 심해진다는 걸 알지만 그를 위해서 어디까지 해줘야 믿어주겠다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 에드워드가 왕비를 믿는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에 서 있을 사람에 나를 넣지 않는 건 그렇다 치지만 어머니는 넣어야 하지 않아?”
“아니.”
에드워드가 활짝 웃었다.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는 클로드를 보며 그가 말했다.
“차라리 너를 넣겠어.”
이게 무슨 일타이피 대화법인가.
차라리 나를 넣겠다고?
클로드는 어지간히 고맙다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왕이라서 그런가, 에드워드는 대화법이 엉망이다. 그는 잡지를 내려놓으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난 정말 어머니도, 너도 모르겠다, 형님.”
사람을 밀어냈다가 당겼다가, 온 귀족들 앞에서 가족이 아니라는 듯 가족 테이블에서 빼놓고선 금세 또 가족인 게 당연하다는 듯이 구니, 하여간 복잡한 사람들이다. 클로드는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탄생연 때는 마음이 좀 쓰렸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거기까지 신경이 미치지 않았다.
첩자라.
클로드는 생각에 빠졌다. 줄리안인가? 줄리안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첩자라고 보기에는 또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그도 그동안 줄리안을 두고 봤고 미행도 했고 수백 가지 서류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첩자라고 규정지을 만한 어떤 근거도 보이지 않았다.
줄리안은 왕립 아카데미 시절 친구가 없었다. 아예, 없었다. 사상적으로 오염이 되려면 급격히 친해진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한 명도 없었다. 종종 왕래하는 학생이라면 몇 명 있긴 했고 그중에는 적국에서 온 유학생도 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유학생과는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도, 정원을 같이 거닌 적도 없는 사이였다. 보안을 위해서 방에서만 만났다고? 처음부터 보안을 지켜야 하는 사이가 될 턱이 있나. 사상이 맞는 동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친구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친구처럼 보이는 상대는 없었다.
도서관 대출 내역을 살펴보면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지만 정치적인 책은 열 권도 채 안 되었고 그중 일곱 권은 과제 때문에 빌린 것이었으며 나머지는 저자가 크리스토퍼 일리드, 즉 본인의 부친이었다. 줄리안이 정치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
시종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줄리안은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인기가 높았으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일에 열정적이었으며 그 외엔 집에 박혀 있었다. 마법사 협회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한 번도 응하지 않았고 궁에서도 몇 번 이직을 권했지만 본인이 거절했다. 시종으로 사는 게 몹시 행복한 것처럼 그는 잘 살고 있었다. 이 직업이 도대체 뭐가 좋을까, 클로드는 의심스러웠지만 어쨌거나 줄리안이 잘 살고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첩자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또 수상한 점이 많았다. S급 라이선스를 가진 마법사가 왕실 시종으로 살고 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고 그는 가끔씩 비밀스러운 외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출 때 그는 미행을 신경 썼고 따돌렸다. 능숙한 솜씨였다. 그러나 왜? 그렇게까지 해서 누구를 만나고 있단 말인가?
“외부로 정보를 흘리는 놈들은 전부 첩자야. 적국에 흘렸든 가십지에 흘렸든 상관 안 해. 다 잡아내도록 해.”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클로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일어났다.
“그래. 용건은 끝났지?”
“끝나긴 했는데 바빠?”
왕인 나보다 네가 바빠? 에드워드가 그렇게 묻고 있었다. 하여간 제멋대로라니깐. 클로드는 쓰게 웃으며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거울 앞으로 가서는 매무새를 손보았다. 형이 뒤에서 괴상한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너, 설마.”
에드워드가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거울로 그를 흘끗 보며 클로드가 물었다.
“흠, 흠. 그냥 묻는 건데…… 시종들은 점심시간이 언제야?”
“점심시간에 시종들은 밖에 못 나가.”
이게 미쳤나? 에드워드가 눈살을 찌푸리자 클로드가 코웃음 쳤다.
“내가 안에서 먹으면 되지. 난 왕족인데.”
“왕족이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냐?”
“뭐 어때. 다 같은 왕궁인데.”
“야!”
에드워드가 미치겠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클로드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차림새를 단정하게 다듬은 다음 거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하지 마, 좀. 동정남 대공이 시종과 하룻밤 자더니 거기에 뻑이 가서 스토킹하고 있다는 기사 보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어떤 시발 새끼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는지 얼굴이나 보고 싶네.”
클로드의 말에 에드워드는 그럴싸하다고 생각해버렸다. 클로드의 무시무시한 소문은 전국에 퍼져 있다. 감히 클로드의 성질을 건드리려고 하는 신문사가 있을까 의심스럽기는 했다. 소문에 의하면 클로드는 신문사 전체를 참수시키고도 남을 놈이었다. 현대에 그게 가능한가? 이 세상에는 법이라는 게 있는데? 물론 의심스러울 테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어 그 소문이 사실인지 어떤지 확인하고자 할 인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동정인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야. 이 궁에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흘러나갈 가능성이, 없지.”
흘러나갈 가능성이, 까지 말한 다음에 클로드는 이 궁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딱 한 명, 있기는 있었다. 줄리안 본인이었다. 그러나 클로드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자신이 줄리안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에드워드가 알게 되면 매우 곤란했다.
“색에 미친 대공이 고위 귀족의 아들인 시종을 강간하고 스토킹하고 있다는 게 더 나빠.”
“시발, 강간 아니라니깐!”
“난 아는데 남들은 모르잖아!”
알려진 바와는 달리 클로드는 매우 상식적인 인물이다. 강간을 할 수 있을 만한 인간이 못 된다는 걸 다른 사람보다 에드워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딴 소리 하는 놈 있으면 산 채로 목을 뽑아버릴 줄 알아! 처음에는 손톱부터 시작해서 손가락, 발가락, 팔, 다리, 좆, 전부 뽑은 다음에 목을 뽑아줄 거야, 알았어?”
물론 클로드의 상식에 고문이나 살인 등을 하면 안 된다는 부분은 없었다. 상식적이긴 한데 참 유연하게 한쪽으로 휘어 있는 상식을 가진 클로드였다.
에드워드는 ‘뽑겠다’는 말을 듣고 상상을 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람의 신체를 어떻게 뽑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클로드는 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했다.
“날 협박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
“아, 됐어. 개소리하는 것들은 개로 만들어주면 그만이지. 그건 됐고, 나 좀 봐봐. 나 오늘 괜찮아?”
“그냥 평범한 너지.”
반짝반짝 빛나고 오만할 정도로 완벽한 너. 에드워드는 사실 클로드의 외모에 조금 콤플렉스가 있었다. 저런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면 궁정 사교계에 완벽하게 군림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늘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외모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의 바람이라는 건 끝이 없기 마련이었다.
“그래? 평범해? 아, 시발. 금붕어 똥 이 새끼, 지가 드라이 잘한다더니.”
드라이 탓을 하기 시작하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에드워드는 머리가 다 아파왔다. 이렇게 쉬운 남자일 줄 알았으면 섹스의 달인인 모 후작부인을 붙여줄 걸 그랬다. 미약을 먹여서라도 한 번만 함락시켰으면 그다음부터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을 텐데. 아니, 아직 늦지 않았지. 콜걸 몇 불러서 아예…….
“줄리안의 눈에 안 차려나. 형, 전속 미용사 있지?”
에드워드는 자신의 인내심이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뚝.
“닥치고 나가라.”
“시발, 평범하다며? 내가 어떻게 이 꼴로 줄리안을 봐?”
“형 입에서 험한 소리 나오려고 하니까 나가라, 좀.”
“야, 네 옷도 좀, 아, 네 옷은 작아서 나한텐 안 맞―.”
“나가라고, 개새끼야!”
에드워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경비병이 쫓아왔다. 각하. 경비병들의 나지막한 부름에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지, 원. 국왕 전하, 그럼 물러갑니다.”
“당장 꺼져!”
클로드가 나가자마자 에드워드가 그가 나간 문을 노려보았고 경비병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왕의 진노가 대단하다. 대공과 왕이 드디어 불화의 길을 걷는 것인가. 그들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을 때 에드워드가 “자네들도 나가게!”라고 소리쳤다. 경비병들은 왕의 예민한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재빨리 방을 나갔고 에드워드는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에드워드는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헐떡거리며 웃었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뺨이 당기도록 우스워서 그는 주저앉아 웃었다. 너무 웃겨서 배가 아팠다. 한참을 웃은 다음에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계속 실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머리 한구석은 클로드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계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머릿속 계산기의 전원을 내려버리고 이 시원함을 만끽하기로 했다.
왕이 되고 나서 누군가를 앞에 두고 막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 속이 다 시원했다. 개새끼, 당장 꺼져. 아, 좋았다, 진짜. 에드워드는 “클로드, 이 빌어먹을 시발 새끼”라고 중얼거렸다가 또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에드워드에게 욕의 신세계를 열어준 클로드는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고 있었다. 며칠 전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매우 따가웠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의 시선 따위 한두 번 받는 것도 아니고 그 시선이 부드럽든 열렬하든 따갑든 자신의 알 바가 아니었다. 남의 시선이란 금붕어 똥만도 못하다는 것이 클로드의 지론이었다.
그는 재빠르게 줄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줄리안과 헤어지고 나서 그는 줄리안의 모든 정보를 가져오게 했다. 그의 부하들은 이미 첩자 혐의를 받고 있는 줄리안의 모든 정보를 모아둔 상태였기에 그저 받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정보의 본질이 바뀌었다. 클로드는 애인(이라고 일단 그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썸남)의 스토킹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왕궁의 건축 도면을 받아서 줄리안의 집무실을 확인하고 점심을 먹으려면 이렇게, 왕비에게 가려면 저렇게 가겠구나, 라며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고작 애인(이라고 그는 생각…… 이하 생략)의 스토킹을 위해 거대한 왕궁의 도면을 외운 클로드는 마치 왕궁이 제집인 양 움직였다.
줄리안의 집무실에 간 그는 문이 닫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달칵, 달칵. 고풍스러운 문고리를 돌려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흠. 클로드는 이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방법을 취했다가 보안 마법에라도 걸리면 곤란하니 관두기로 했다. 대신에 그는 서쪽 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인터폰을 들었다.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인터폰을 들자마자 어딘가로 연결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대공 전하.’ 그 말에 대고 클로드가 말했다.
“줄리안 일리드, 내 방으로 보내.”
흠, 제법 사무적으로 말했다고 클로드는 자화자찬하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걔가 좋아하는 음식도 좀 보내줘. 한 서너 가지쯤?”
‘걔…… 라고 하심은 일리드 시종 말씀이십니까?’
“그래, 걔. 급한 일이니까 당장 보내. 걔도, 음식도.”
‘예, 알겠습니다. 단지 일리드 시종은 현재 비전하의 시중을 맡고 있으므로 저희 쪽에서는 바로 전달하겠으나 일리드 시종이 움직일 수 있을지는 확신 드리기 어렵습니다, 대공 전하. 부디 이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왕비?
며칠 전 왕비가 바락바락 악을 썼던 것이 떠올랐다. 둘이 무슨 사이지? 기분을 조금 잡쳤다. 클로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계급이 딸리는군. 아쉬운 일이었다. 왕비를 밀치고 줄리안이 자신에게 올 가능성이 커 보이지는 않았다. 그 왕비가 자신에게 가려는 줄리안을 놓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왕비와 줄리안이 범상치 않은 사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그때는 그냥 넘겼지만 지금은 거슬렸다. 술잔에 미약을 넣어 남자를 범하려고 든 여자다. 줄리안에게는 위험했다.
“그래, 알았어. 음식은 지금 당장 보내줘.”
그렇게 말한 클로드는 잠시 생각 끝에 픽 웃었다. 줄리안을 당장 부르려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클로드가 다시 인터폰을 들 때, 줄리안은 왕비의 옆에 있었다. 시녀장, 왕비, 줄리안은 셋이서 왕비의 스케줄을 수정 중이었다. 근신령이 떨어졌으니 잡지 인터뷰나 자선 행사 등의 공식 스케줄을 조율해야 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대부분의 스케줄은 미루거나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 싫다고. 내가 왜 대비에게 가서 근신 중이지만 일은 하게 해달라고 빌어야 하냔 말이야. 싫어, 싫다고!”
“비전하, 제발…….”
시녀장이 애가 끓는 목소리로 빌었지만 왕비는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모두에게 대비가 왕비를 감금했다고 말하도록 해. 난 감금당한 피해자야. 내가 뭘 어쩌겠어?”
“비전하아.”
“아, 싫어. 못 해. 근신령을 받았으면 최소한 쉴 수는 있어야지, 일은 무슨 얼어 죽을 일.”
왕비와 시녀장은 40분째 이 일로 실랑이 중이었다. 줄리안은 입을 다문 채 추이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사실 이 일은 그의 업무가 아니었다. 시녀장이 도저히 왕비를 못 달래겠으니 옆에 앉아라도 있으라 해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시녀장이 줄리안에게 눈치를 주었다. 뭐라고 말 좀 하라는 그 눈에 줄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뭘 어떻게 합니까. 줄리안의 그 태도에 시녀장의 눈이 뾰족해졌다. 네 보신만 찾을 생각이냐는 질책의 시선이 돌아왔지만 줄리안은 꿋꿋했다.
아 재수 없는 놈 같으니!
시녀장이 마음속으로 분노를 터뜨리고 있을 때 조이가 다가와서 줄리안에게 속삭였다. 턱을 괴고 있던 왕비가 “뭔데?” 하고 물었다.
“잠시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뭐, 그래. 왕비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줄리안은 그대로 자리를 물러나 조이의 휴대전화를 들었다. 물론 왕궁 내에서만 쓰는 업무용이었다. 줄리안은 왕비를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돌려놓았었다.
“네, 줄리안 일리드입니다.”
‘일리드 시종님?’
“네, 줄리안 일리드인데요.”
‘뭘 좋아하십니까?’
줄리안은 의아해져 자신의 귀에 댄 수화기를 향해 시선을 흘끔 움직였다. 뭐래는 거야, 얘?
“예?”
‘무슨 음식 좋아하십니까?’
“왜 물어보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이런. 모르셨군요.’
아, 이런. 모르셨군요. 이렇게 말하는 어조가 어찌나 작위적인지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싸우자는 건가? 줄리안은 조이에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얘 누구야? 조이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되물었다. 알아볼까요?
아냐, 됐어, 라고 줄리안이 말했을 때 전화기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 일리드 시종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대령하라고 하시는데 저희는 잘 몰라서요.’
“전하요?”
‘대공 전하께서요.’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제야 왜 상대가 이렇게나 실실거리며 비아냥대는지 알 만해졌다. 아, 아아, 아아아. 줄리안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어버버, 입을 달싹거렸고 그 모습을 조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다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줄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조이를 밀어냈다. 그리고 반대편 구석으로 걸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기, 대공 전하께서, 그러셨어요?”
평소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줄리안이 가진 본연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줄리안은 휴대전화를 잡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얼굴이 뜨거웠다.
‘네, 그러시더라고요. 서너 가지를 가져오라 하시니 이왕이면 만들기 쉬운 것으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냥 절 놀리시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부끄러움 때문이었지만 상대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 어 하고 중얼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곤란한 상황입니까? 저희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저희 쪽에서 도와드릴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강간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한 어조였다. 줄리안은 당황했다. 붉어졌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그는 입을 달싹거렸다. 아니, 강간은 아니지. 그는 다정했었다. 아오, 이렇게 소문 돌면 안 되는데! 줄리안은 붕어처럼 벙긋거렸지만 그렇다고 ‘아니, 나도 좋았는데’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줄리안, 힘내요. 일단 음식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우리가 아무거나 챙겨 갈게요. 그리고 줄리안, 정말 미안한데, 대공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어떡해요……, 라고 남자가 덧붙였다. 줄리안은 당황해서 고개까지 저어가며 말했다.
“아, 아니, 정말, 괜찮―.”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그 얼굴을 또 보려면 힘드실 텐데 말씀해보세요. 가능하면 다 챙겨 갈 테니까.’
“아, 아니.”
‘식사는 했어요?’
목소리가 너무나 상냥해졌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야, 아니라니까. 줄리안은 결국 철판을 깔고 말하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이 잔 사람을 강간범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그, 그런 거 아닙니다.”
‘네?’
“저와 전하……,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닙니다. 전하께서 저한테 안 좋은 일을 하시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내가 다 알아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죠.
이런 어조라 줄리안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줄리안은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상대는 ‘줄리안, 힘내요. 저희가 다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어떡하지.
줄리안은 끊긴 휴대전화를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재다이얼을 눌러서 설명을 해야 하나. 하지만 뭐라고 할 것인가. 정색하고서 ‘우린 좋아서 잤어’라고 말하나? 그리고 좋아서 잤다고 하기에는 계기가 좋지 못했다. 미약을 먹어서 헐떡대고 있는 상태에서 잔 건데 뭐가 좋아서 잤다, 냐.
아, 모르겠다.
줄리안은 후, 한숨을 쉬었다. 그는 왕비에게 다가가며 조이에게 휴대전화를 전해주려 했다. 왕비가 저쪽에서 줄리안을 보며 “누구야?”라고 묻고 있었다. 왕비는 절대 그를 대공에게 보내주지 않겠지만 일단은 보고는 해야겠다 싶어서 말하려는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조이가 재빨리 전화를 받으며 등을 돌렸다.
“줄리안?”
왕비의 부름에 줄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예, 비전하.”
“누구냐니까?”
아, 그게, 라고 줄리안이 입을 열려는데 조이가 다시 전화를 건넸다.
“줄리안 전화예요.”
“아, 누구냐고!”
왕비가 앙칼지게 고함을 질렀고 조이가 먼저 대답했다.
“시종장입니다.”
“시종장?”
왕비가 의아한 얼굴로도 받으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줄리안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전화를 받았다.
“예, 줄리안 일리드입니다.”
‘줄리안, 너 지금 대공 전하께 바로 가라.’
“예?”
이젠 시종장까지 동원한 거야? 줄리안이 아연한 얼굴을 했을 때 시종장의 굳은 목소리가 들렸다.
‘보안 체크다.’
“……예? 잠시만요, 어르신.”
줄리안은 재빨리 모두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아까 얼굴이 새빨개져 도망치듯 파고들었던 구석으로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줄리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보안 체크라니요, 연례 점검일은 아직 안 되지 않았습니까?”
해가 바뀐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보안 체크라니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줄리안이 당황하며 묻자 시종장도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아직 멀었지.’
“무슨 일입니까?”
‘모르겠어. 이쪽에도 정확하게 대답해주지 않는군. 장관님과 통화해본 결과로는 그 잡지 기사 때문이 아닐까 싶긴 하다.’
“아아, 그거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보안 체크를 저부터 실시한다고요?”
그 잡지 기사는 줄리안도 읽었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팀이 어디인지도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 팀이었다. 니콜라스는 과장 중에서도 연륜이 높은 과장이었다. 줄리안이든 제이크든 내부에서야 과장 대리, 평사원으로 나뉘지 외부에서는 똑같은 ‘시종’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명함에 시종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 그의 명함에는 서기관, 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하 말씀으로는 친한 시종부터 만나고 싶으시다는군. 그분과 친한 시종은 너밖에 없잖아.’
줄리안은 말없이 침음만 흘렸다. 아니, 친한 건 아닌데요……. 그러나 안 친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묘한 이 상황, 줄리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가봐. 그리고 어떤 체크를 하는지 내게 말해줘.’
“타깃이 있는 점검일까요?”
‘차라리 그래야 할 텐데 말이다.’
시종장은 궁내부이고 니콜라스는 왕실부였다. 둘은 부서가 달랐기 때문에 시종장은 니콜라스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아니, 니콜라스나 빨리 망해버리고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대공은 궁내부인 줄리안을 불렀다. 그것은 보안 체크에서 궁내부 또한 자유롭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어쨌든 가보겠습니다.”
‘그래. 잘하고. 뭘 조심해야 하는지 알지?’
“예, 어르신.”
‘넌 특히, 특히 조심해야 할 게 있다는 것도 알지?’
그 말에 줄리안은 헤헤헤, 웃어버렸다. 시종장은 그 웃음에 ‘조심하라고, 녀석아’라고 타박하더니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줄리안은 웃으면서 휴대전화를 껐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보안 점검이라.
비정기적 보안 점검이라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종 생활을 7년이나 한 줄리안조차도 거의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줄리안은 왕비에게로 걸어가 “비전하, 시종장이 업무상으로 급히 불렀습니다. 잠시 다녀와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왕비는 줄리안의 진중한 목소리에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다녀오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줄리안? 무슨 일입니까?”
팀원들이 조심스럽게 물어서 줄리안은 그들을 안심시켰다.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줄리안이 나와서 복도를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줄리안, 잠깐만요!”
뒤를 돌아보자 저스틴이 당황한 얼굴로 따라오고 있었다.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위치를 제멋대로 벗어나다니 시종이 할 일이 아니었다. 줄리안의 표정을 본 저스틴은 무슨 말인지 안다는 듯 “죄송해요. 죄송해요”라면서도 그에게로 다가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스틴?”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보안 체크라는 단어를 들은 직후라 이런 거 하나 묻는 것에도 예민해졌다. 줄리안은 얼음장 같은 얼굴로 “그런 건 왜 묻는데?”라고 되물었다.
“얼굴이 안 좋아서요.”
“…….”
“줄리안은 어제 휴무여서 몰라요. 소문이 얼마나 악질적으로 돌고 있는지.”
줄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대공은 강간범이 되었고 자신은 성 상납을 한 시종이 되었을 것이다. 여러 종류의 소문이 동시에 퍼졌고 사람들은 동시에 향유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줄리안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궁정 사교계의 가십 팬이었다. 그러니 자신과 대공에 관한 소문이 어디까지 갈지, 어떻게 진화할지 뻔히 알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소멸할지도.
이보다 더 재밌는 내용이 나오기 전에는 끝나지 않겠지.
“걱정해준 건 고마워.”
줄리안은 별로 고맙지 않았지만 일단 사회인으로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걱정했다는데 그 말 외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이런 식으로 자꾸 자리 비우지 마.”
“죄송해요.”
“그럼.”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저한테만 말해줘요.”
저스틴이 경비병의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줄리안은 저스틴을 탐탁잖은 눈으로 보았다. 그는 보안 점검을 시작한다는 말을 할까 잠시 생각했다. 저스틴은 연륜이 있기 때문인지 입이 무겁고 처세도 좋으니 별 문제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보안 점검이다. 사안이 너무 무거웠다. 보안 점검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는 일개 시종에 불과한 줄리안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나도 호출받았을 뿐이야.”
“그럼 다녀와서 무슨 일인지 알려줄 건가요?”
“글쎄. 여하간 들어가. 자리 비우지 말고.”
줄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스틴이 줄리안 하고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저스틴은 평소보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줄리안은 그런 그를 상대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으니 이 대화에 마침표를 찍으려면 그가 찍어야 했다.
빠른 속도로 걸으면서 줄리안은 괜히 뺨을 문질렀다. 그날 이후 클로드를 처음 보는 셈이었다. 괜히 긴장되었다. 줄리안은 걸으면서 시선을 흘끔흘끔 돌려 벽이나 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는 시종이었으니 완벽한 차림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이, 그래도 내가 가진 옷 중에서는 이게 제일 낫잖아.
줄리안의 옷 대부분은 티셔츠들이었다. 사실 줄리안이 클로드를 만나러 갔을 때 입었던 옷들은 줄리안의 옷 중에서는 매우 드문 것들이었다. 그의 형수가 보다 못해 사준 옷들이었다. 물론 줄리안도 형수가 사준 옷들이 더 예쁘고 잘 어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안목이 높은 편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쇼핑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언제나 대충 티셔츠나 집다 보니 티셔츠 부자가 된 상황이었다. 평소에 입기 나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데이트에 입을 만한 차림은 아니었다.
이게 데이트는 아니지만.
줄리안은 빠르게 걸으며 클로드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이니까 가르쳐줄 수 없다고 했을 때 클로드는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 달콤했다. 그 얼굴을 뒤로하고 걸어오는 내내 세상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물건이 쿵쾅쿵쾅하는 듯해서 귀가 뜨거웠었다.
나, 얼굴 괜찮나?
얼굴이 이상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사이 이미 문 앞이었다. 줄리안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노크했다.
똑똑. 그리고 한 번 더 노크하려는데 문이 갑자기 확 열리더니 클로드가 나타났다. 얼마나 번개같이 문을 열었는지 줄리안은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든 채로 그와 마주하게 되었다. 눈이 마주치자 클로드가 현실감이 없는 것처럼 이상한 눈으로 줄리안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안…… 녕하십니까, 대공 전하. 줄리안 일리드, 부르심을 받아 지금 도착했, 읏.”
갑자기 클로드가 잡아끄는 바람에 줄리안은 안쪽으로 끌려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지만 보지는 못했다. 클로드가 줄리안을 문으로 밀어붙인 채 다짜고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틀어막혔다. 눈을 크게 떴을 때 클로드가 한 손으로 그의 눈을 감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상태로 클로드가 느껴졌다. 옷을 입은 그의 몸은 나체였던 그의 몸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서로 옷을 입고 있어 애가 탔다. 아무도 모르는 그에게 닿으려면 키스밖에 없었다. 줄리안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성급하게 들어오는 그의 혀를 받아 빨았다. 엉망으로 움직이는 그의 혀를 따라갔다. 흐읏. 누구의 목에서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이 샜다. 누구의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야, 시발, 너 이러고 궁을 쏘다닌 거야?”
한참의 키스 끝에 클로드가 으르렁거렸다.
“이, 이러고, 라니요?”
키스 때문에 머리가 멍한 줄리안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존나 야한 얼굴이야.”
“…….”
“시발, 이렇게 예쁜 얼굴로 그년 옆에 있었냐? 걔랑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지?”
클로드의 입술이 줄리안의 얼굴에 아무렇게나 닿았다. 엉망진창으로 쏟아지는 키스를 피하며 줄리안이 나지막하게 항의했다.
“저 그렇게 아무하고나 막 자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알지, 아는데, 그년은 아무하고나 막 자잖아. 생긴 것도 못생긴 게 식성도 거지라. 그런 년이 너같이 이쁜 놈을 그냥 두겠어?”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셔츠 단추를 풀며 속삭였다. 줄리안은 하하 하고 힘없이 웃었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왕비는 유럽 왕족 제일의 미녀라는 소리를 듣는데, 까지 생각하다 관두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얘 눈에는 내가 좀 예쁘다는데 관두지, 뭐. 내 눈에도 얘가 좀 이쁘니까.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아니어도 그런 사이가 되는 게 그 바닥 같던데. 왕비가 주는 거 함부로 받아먹지 마.”
클로드는 진심이었다. 줄리안이 그의 얼굴을 보고 키들거렸다.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클로드의 얼굴을 보아하니 씨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전하야말로 아무거나 드시지 마세요.”
“시발, 이런 얼굴도 하지 마.”
클로드가 또 이를 갈았다.
“제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요?”
“존나 야하고 예쁘다고 했잖아.”
푸핫, 줄리안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클로드의 양뺨을 감싸고 끌어당겼다.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줄리안의 키스는 부드러웠다. 닿을 듯 말 듯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클로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난폭하게 굴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다정한 입맞춤을 즐기고 싶었다.
줄리안이 한참의 키스 끝에 입술을 떼었다. 둘 사이에 긴 은실이 생겼다가 끊겼다. 그리고 클로드가 줄리안의 셔츠를 완전히 벗겼다.
“전 근무 시간인데요.”
“하고 있네, 대공 의전.”
클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줄리안의 티셔츠도 벗겼다. 그리고 부은 유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남자가 자신의 가슴을 보며 저런 얼굴을 하게 되리라고 사흘 전에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긴, 소문에도 제가 성 상납을 했다고.”
“어떤 개새끼야?”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가 목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화가 난 목소리라 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클로드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다 줄리안은 피식 웃었다.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걱정해주다니,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줄리안, 말해.”
“별거 아니에요.”
“별거가 아니긴. 말하기 어렵다면 이름만 말해봐.”
이름 하나면 돼. 자, 어서.
클로드가 줄리안의 귀를 빨았다. 귀가 간지러웠다. 줄리안이 어깨를 움츠렸다. 어서, 응? 클로드가 속삭였고 줄리안이 웃었다. 클로드가 재촉했다. 아, 줄리안이 웃고 있던 눈을 찡그렸다.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가랑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줄리안은 이래도 되나, 잠시 생각했다. 근무 시간에 클로드와 뒹군다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알려지면 이번에야말로 악질적인 소문이 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시종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그럼 궁정 사교계와는 영원히 바이바이였다. 아무리 자신이 귀족 가문의 일원이라고 해도 고작 삼남이다. 궁정 사교계의 핵심까지 갈 수 있는 배경은 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만둬야 하는데 클로드가 너무 달콤했다.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줄리안은 눈을 감은 채 클로드의 애무를 받았다. 근무 시간, 시종 자리, 가십, 이런 단어들이 머리를 휙휙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머리가 완전히 비었을 때 줄리안은 클로드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서로 나신이 되어 키스하는 것은 옷을 입었을 때보다 만족감을 준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키스에 화답하며 매달렸다. 이미 침대였다. 클로드는 조심스럽게 줄리안을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멀쩡한 남자인 자신을 클로드는 마치 병약한 귀부인이라도 대하는 듯했다. 쓸모없는 배려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눕히고 더 밑으로 내려갔다. 입술이 피부를 타고 미끄러지는 감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저린 손끝으로 클로드의 피부를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피부와 단단한 근육. 그리고 그것을 만지며 가볍게 흥분하는 자신. 모든 것을 믿기 어려워서 줄리안은 눈을 감았다. 며칠 전에 먹은 약 기운이 아직도 몸에 남은 듯했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몸이 들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클로드가 당연한 듯이 줄리안의 성기를 입에 머금었다. 일부러 좁힌 입안에 빨리는 감각이 대단했다.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쾌락이었다. 줄리안은 흐윽, 신음하며 허벅지로 클로드의 머리를 조이려 했다. 그것을 클로드가 양손으로 벌렸다. 다리가 억지로 벌어졌다.
순식간에 절정으로 올라갔다. 처음이라더니, 거짓말……! 줄리안은 속으로 항의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오로지 신음뿐이었다. 강제로 벌어진 허벅지가 달달 떨렸다. 경련하는 피부에 클로드가 손톱을 박았다. 줄리안의 허리가 튀었다. 절정이 눈앞에 있었다. 토정하려는 순간, 클로드가 입술을 떼었다.
“조, 조금만 더……!”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의 얼굴을 본 클로드가 “미안” 하고 속삭였다. 그리고 그는 위로 올라왔다. 줄리안의 얼굴 위로 올라온 클로드가 그에게 자신의 것을 내밀었다.
“다음에는 젤을 가져올게. 오늘은 네가 좀 해줄래?”
이, 이걸 넣겠다고?
줄리안은 아연한 얼굴로 클로드의 것을 바라보았다. 입에 넣을 수 없을 게 뻔했다. 줄리안이 입을 벌리지 않자 클로드의 손이 다가왔다. 그가 턱을 틀어쥔 순간 줄리안은 억지로 입을 벌리게 되었다. 뒤에 다가올 충격을 예상하며 줄리안이 눈을 감았지만 입안으로 들어온 것은 클로드의 성기가 아니라 손가락이었다. 손가락은 줄리안의 혀를 잡고 끌어냈다.
“이걸로 좀 적셔봐. 빨라고는 안 할 테니까.”
클로드도 줄리안의 입을 보면서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 입에 자신의 것을 넣으면 입술이 찢어질 것이다. 그것도 재수가 좋은 경우에 한하고 운이 나쁘면 턱이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턱을 잘 맞춰줄 수 있지만 그래도 턱이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서 구음을 시키고 싶진 않았다.
줄리안이 혀를 내밀어 클로드의 성기를 핥았다. 처음에는 어색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적극적으로 변했다. 입에서 타액을 모아 성기에 흘렸을 때 클로드는 흣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예민한 곳에 느껴지는 감각만으로도 미치겠는데 심지어 시각까지 자극적이었다. 줄리안이 혀를 내밀어 그의 것에 문지르고 입술을 오므려 타액에 적시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미칠 노릇이었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클로드가 줄리안의 얼굴에서 내려왔다. 밑으로 내려오던 그는 줄리안의 성기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 바짝 선 채 선액을 흘리고 있는 성기에 촉, 버드 키스를 하며 더 내려왔다. 줄리안의 다리를 활짝 열고 그 안쪽의 입구를 빨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아―.
줄리안이 울부짖었다. 아, 야한데. 클로드는 천천히 그 안쪽으로 혀를 집어넣어보았다. 싫다는 비명과는 달리 안쪽은 혀를 잔뜩 옥죄었다. 줄리안이 허리를 비틀었다. 미치겠다는 듯이 엉덩이를 시트에 비벼댔다. 하고 싶어서 발정이 난 듯한 몸이었다. 클로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것을 갖다 댔다. 뭉툭한 끝을 입구에 몇 번 문지르며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줄리안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삽입이 느렸다. 줄리안은 흐윽, 흐윽, 숨이 넘어갈 것처럼 신음했다. 몸에 말뚝을 집어넣는 기분이었다. 느리게, 천천히, 말뚝이 자신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아픔보다도 무서움이 더 컸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팔로 시트를 움켜잡았다. 아프다든가 무섭다는 말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굳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손을 잡았다. 깍지 껴서 잡은 손이 움직였다. 허공을 움직여 도착한 곳은 클로드의 입술 위였다. 줄리안, 줄리안, 줄리안.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열에 들뜬 헛소리처럼 멍했다. 줄리안은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의 전부였다.
“한 번에 해줄게.”
클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단숨에 들어왔다. 줄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입구부터 점막까지 단숨에 벌어진 곳이 화끈거렸다. 억지로 벌어져 숨도 쉴 수 없었다. 줄리안이 부들부들 떨자 클로드가 몸을 뒤로 물렸다. 잠시 닫히는 듯했던 내벽이 다시 콱, 벌어졌다. 그리고 거칠게 쑤셔졌다. 클로드가 몸을 한계까지 빼고, 한계까지 넣기를 반복했다. 거친 움직임이었다. 거대한 것으로 쓸린 내벽이 홧홧했다. 아픈 건지 뜨거운 건지도 알 수 없다. 아파, 아파. 줄리안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클로드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 지금 하고 있는데?”
그 말에 줄리안은 얼굴로 올린 팔을 내리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하얀 것이 흐르고 있었다.
“아픈 게 좋아, 줄리안?”
“그, 그렇지, 흣, 않, 흐아아!”
클로드가 줄리안이 느끼는 곳을 꽝꽝 찧었다. 줄리안은 눈앞이 번쩍거리는 것을 느끼며 토정했다. 계속 새고 있었던 탓에 절정은 어딘가 아쉬웠다.
“약 기운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웬걸.”
클로드가 사납게 웃으며 계속 몸을 움직였다. 줄리안의 다리가 허공에서 제멋대로 흔들렸다. 클로드가 그의 어깨에 걸치라며 몸을 숙여주었지만 몇 번 움직이기만 하면 다시 다리가 떨어졌다. 줄리안이 헐떡거렸다.
“아프, 아프, 니까, 흣, 조금, 만.”
“아픈데 읏, 왜 싸고 있어?”
“아니, 아흐읏, 아니, 그거 아니.”
“맞는데? 더 짜내볼까?”
클로드가 줄리안의 성기를 잡았다. 성기를 잡히지 않은 채 뒤의 감각만으로 도달했던 줄리안이었다. 그는 성기에 클로드의 손이 닿자 흐아아, 소리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클로드가 놔주지 않자 줄리안이 아까 얼굴을 가렸던 손으로 이번엔 클로드의 손을 잡았다. 떼어내려는 듯 손가락이 힘겹게 클로드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 절박하면서도 무력한 움직임이 클로드를 자극했다.
“알았어, 흣, 놔, 줄게.”
클로드는 순순히 줄리안의 성기를 놔주었다. 그러면서 줄리안의 안쪽을 찍어 내렸다. 몇 번 찍어 내리자 교성을 지르며 고개를 젓던 줄리안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토하며 사정했다.
줄리안의 얼굴은 눈물이며 타액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이성이라고는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클로드는 다른 사람과 해본 적이 없었지만 줄리안이 굉장히 예민한 편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더 움직였다. 사정 직전의 예민한 몸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범했다. 줄리안이 울었다. 그만, 그만. 조, 조금만 쉬게, 해, 흣, 싫, 싫어, 제발. 줄리안이 애원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얼굴로 비는 모습이 클로드를 동하게 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가장 안쪽까지 퍽퍽 박아 넣은 끝에 절정에 올랐다.
안쪽 끝까지 왔다, 고 줄리안이 느꼈을 때 클로드가 신음했다.
“시발, 좋아…….”
줄리안은 눈물이 가득한 눈을 떴다. 눈물이 주르륵 넘쳐흐르고 클로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몸을 가볍게 떨고 있었다. 안쪽으로 뜨거운 것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줄리안은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의 안에서 황홀경을 느끼는 남자의 얼굴은 의외로 무표정이었다. 온 신경을 한 곳으로 집중한 채 그는 아랫입술을 가만히 깨물었다. 그 모습에 줄리안은 손을 뻗었다. 클로드의 머리를 끌어안고 당기자 클로드가 한 템포 늦게 딸려왔다.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몇 번 촉, 촉, 닿았다. 그리고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줄리안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온 입안을 헤집고 숨결까지 삼킨 그가 “미친, 너 조이고 있, 읏” 하고 신음했다.
“안, 조이, 흣, 으으, 잠깐, 저, 더는 안 돼.”
“그럼 조이지를 말았어야지.”
“진짜로, 흣, 흐으으, 읏, 아아.”
“난 못 참아. 젠장, 빨리 쌀 테니까.”
클로드가 줄리안을 일으켜 자신의 위에 앉혔다. 그 순간 성기가 그나마 닫혀 있던 점막 안쪽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줄리안이 온몸을 굳히고 벌벌 떨었다. 줄리안이 적응할 틈도 없이 클로드가 위로 쳐올렸다. 흐아아. 줄리안이 울부짖었지만 클로드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줄리안의 입술을 다시 막았다. 목소리가 야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입을 틀어막자 줄리안이 목을 떨며 둘만 알 수 있는 신음성을 질렀다. 안쪽을 꽉꽉 조이는 줄리안 때문에 클로드도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다. 사람의 안이 아니었다. 이렇게 뜨거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섹스가 아니었다. 보통의 섹스가 이렇게 성기를 쥐어짜다 못해 심장까지 움켜쥘 수 있을 리 없었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그의 젖은 울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괜찮아, 조금만 더.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줄리안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클로드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 해줬으면 좋겠다. 쾌락에 뜨거워진 머리로 생각했다. 싫다고 하든가 좋다고 하든가. 안쪽으로 빨아 당기면서 머리는 흔들다니 어느 쪽에 맞춰야 하는가. 아, 몰라. 난 내가 좋은 쪽으로 맞추면 되지.
“좋아, 듣고 있어?”
클로드가 물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들었지만 못 들은 체하고 싶었다. 클로드가 헐떡이며 다시 물었다.
“시발, 좋아. 너, 진짜 너무 좋아. 좋아해, 야, 난 진짜 이런 거, 처음, 읏, 조이지, 마, 아, 너무 좋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줄리안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줄리안, 줄리안, 흣, 넌, 어때? 난, 너무 좋아, 좋아, 아, 흣, 미칠 것 같, 응? 아, 싸줄까? 안에서 너무, 빨아 당겨……. 미친, 음탕, 한 게, 안에, 읏, 아, 시발.”
클로드가 난폭하게 위로 박아 올렸다. 그때마다 자세 때문에 밑으로 내려왔던 내장이 위로 쳐올려졌다. 토할 것 같았다. 속이 아팠다. 그런데도 좋았다. 내벽 안쪽이 후들후들 떨렸다. 젖고 싶어. 더 해줘. 뜨거운 걸로 더. 줄리안은 애원할 것만 같았다. 그게 싫어서 그는 클로드의 목에 이를 박았다. 그 순간 클로드가 줄리안의 몸을 거칠게 내리누르면서 허리를 쳐올렸다. 퍼억,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고 그대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들어왔다. 줄리안은 더 이를 세웠다. 그리고 클로드가 몸을 떨면서 “좁아터져, 시발……” 하고 중얼거렸다. 절정은 마치 죽음의 바다처럼 고요하게 지속되었다.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클로드가 힘을 빼자 줄리안은 클로드의 것을 머금은 채로 뒤로 넘어가려 했다. 클로드가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자신의 것을 빼고 천천히 눕혀주었다.
“전하.”
줄리안이 속삭였다. 목이 부은 듯 줄리안이 콜록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일단 좀 있어봐.”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고 욕실로 갔다. 일단 자신의 몸을 대충 씻었다. 군인인 클로드는 1분 안에 샤워를 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다. 그는 그 1분 동안 머리를 감고 양치를 하고 샤워까지 끝낸 다음 목욕 가운을 입고 머리를 대충 닦았다. 그리고 새 수건을 꺼내 물을 묻혔다. 가볍게 짠 다음 마른 수건 하나와 함께 욕실을 나가려다 ‘응?’ 하고 다시 들어왔다. 목에 잇자국이 선명했다. 붉은 흔적이었지만 곧 푸르게 변할 듯했다. 그는 왼쪽으로 돌아 거울에 한 번 비추어 보고 오른쪽으로 돌아 한 번 더 비추어 본 뒤 손가락으로 멍을 쿡 찔러보았다. 약간 따끔한 게 기분 좋았다. 이런 게 후희인가? 클로드는 다소 잘못된 생각을 하며 욕실을 나왔다.
줄리안은 부끄러운지 시트로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시트는 실크였고 몸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존나 맛있게 생겼네.”
가린다기보다 이건 포장이지, 포장. 존나 맛있게 포장했네.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이 미간을 좁혔다.
“전하…….”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려던 줄리안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와, 자기만 씻었네. 줄리안은 말끔하게 씻고 와서 비누 냄새까지 풍기고 있는 클로드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몸은 온갖 체액에 발효되고 있는데 상대의 저렇게 상큼한 모습을 보자 기분이 상하려 했다. 심지어 클로드는 줄리안의 앞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아아, 상쾌하겠다. 부러운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줄리안은 혀를 차며 섹스 상대가 홀로 깨끗해지는 것을 모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서비스할 테니까.”
서비스?
줄리안이 의아한 눈을 하자 클로드가 즐겁게 웃었다. 그의 웃음이 너무나 유쾌해서 그 서비스가 자신을 위한 건지 아니면 그를 위한 건지 알 수 없어진 줄리안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몸을 가린 시트를 걷어냈다. 그러고는 제 머리를 닦은 수건으로 줄리안을 닦기 시작했다. 흐으읏. 클로드는 줄리안의 성기며 가랑이 사이까지 닦았고 줄리안은 예민한 곳에 수건이 닿을 때마다 흠칫 떨면서 신음했다. 그는 관두라고 하고 싶었다. 시트를 돌려달라고도 하고 싶었고 욕실에 데려다만 주면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너무 지쳐서 말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아, 엉덩이에 자국 남았었네.”
줄리안을 뒤집고 뒤를 닦아주던 클로드가 즐겁다는 듯 말했다.
“예.”
“오늘도 때리고 싶었는데 체위가 마땅치 않아서.”
“왜 섹스 때 사람을 때립니까?”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정하게 해주면 되잖아.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가 “정확히 하자면 때린 건 아니지”라고 정색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까지 닦았던 수건을 줄리안의 다리 아래 펼쳐놓았다.
“엉덩이에 멍이 심하게 들었던데 때린 게 아니면 그게 뭡니까?”
“박자 좀 맞춘 거지.”
헐, 대공씩이나 되셔서 이분이 약을 파시네.
줄리안이 기막혀할 때였다. 갑자기 클로드가 줄리안의 엉덩이를 벌렸다. 줄리안은 깜짝 놀라 몸을 뒤틀었지만 짝, 소리와 함께 엉덩이를 맞고 말았다.
“왜 때리십니까!”
“넌 무조건 때렸다고 말하는데 다 다르거든.”
“이건 또 뭡니까?”
“주의를 주는 거지. 간호사가 주사 놓을 때 엉덩이를 치면 넌 그것도 맞은 거라고 하겠다?”
둘은 다르지! 아니, 그것도 맞은 건 맞지! 줄리안이 뭐라고 하려 했을 때 클로드는 다시 줄리안의 엉덩이를 벌리고 있었다. 부은 입구에 바람이 닿았다. 줄리안은 뒤로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클로드에게는 닿지도 않았다.
“하지 마세요!”
“가만 좀 있어봐. 아, 시발, 먹음직스럽게도 생겼네. 이 구멍을 가지고 똥이나 싸라고 만들어놓다니, 신이라는 새끼가 지금 제정신이야?”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베개에 파묻고 말았다. 그래, 관두자. 어차피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줄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클로드가 씩 웃었다. 그는 잠시 줄리안의 퉁퉁 부은 입구를 보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손가락 두 개를 충실히 빠는 사이 줄리안의 귀가 붉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줄리안은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은 듯했다. 사람을 벗기고 씻기고 성기를 빤히 쳐다볼 때는 부끄러움의 ‘부’도 모르는 것 같더니만.
흐으읏. 줄리안이 신음했다. 손가락 하나를 넣는 것만으로도 아픈지 마른 등이 잔뜩 긴장해 있었다. 클로드는 고개를 내려 줄리안의 등에 입을 맞췄다. 달래듯이 키스를 내리며 손가락으로 안쪽을 휘저었다. 젤처럼 고인 정액이 느껴졌다.
“하나만 더, 알겠지?”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입구에 닿은 순간 줄리안이 양손으로 베개를 움켜쥐며 흐으으윽, 신음을 삼켰다. 클로드는 줄리안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성기는 줄리안이 전혀 안타깝지 않은 듯 반쯤 일어서 있었다.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자 조금 전까지 거대한 것을 받았던 점막이 스르르 풀렸다. 더 대단한 것을 달라는 듯 달라붙어왔다.
“안쪽이 존나 쫀득거린다. 넣어달라고 애교 부리고 있어.”
“거짓말, 흣, 하지 마세요.”
“진짠데.”
클로드는 쓰게 웃었지만 굳이 더 우기지 않았다. 이 창녀 같은 구멍에 대해서는 줄리안도 알 필요가 없었다. 이 구멍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나만을 기다리며 젖어 있는 아가씨. 클로드는 소리 없이 킥킥거렸다.
“휘젓지 마, 아아, 나올 것 같…….”
“나오라고 하는 거야.”
“싫어, 싫습니다, 제가, 흣, 아, 싫어, 흐으으.”
줄리안이 팔을 휘저었다. 아래로 떨어진 시트로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보여주기가 어지간히 싫은 듯했다. 그렇게 싫다면 가려줄까 싶어서 클로드도 손을 뻗는데 줄리안이 더 참지 못하고 뒤로 쏟아냈다. 정액이 뒤에서 뭉근하게 흘러나왔다.
아아, 싫어, 보지 마, 싫어, 흣, 읏, 싫어. 줄리안이 계속 싫다고 말했다. 열 때문에 헛소리를 하는 어린애처럼 현실감이 없는 목소리였다. 클로드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줄리안의 입구를 보고 있었다. 퉁퉁 부은 채로 조그맣게 벌어졌다가 자신의 정액을 조금씩 토해내고 다시 쌕쌕 숨을 쉬며 다물리는 구멍이었다. 절로 욕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음탕한 것도 정도가 있지. 시발, 너 이거 잘 숨기고 다녀라.”
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클로드도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줄리안의 안을 휘저으며 입구를 벌렸다. 줄리안이 허리를 떨면서 자신의 정액을 토해낼 때마다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줄리안의 등이 떨리는 것이 보기 좋았다. 클로드는 그 등에 입을 맞추며 끝까지 줄리안의 안을 비우고 더는 흘러나오지 않자 긁어냈다. 줄리안이 다급하게 울며 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퉁퉁 부은 내벽이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서 우는데 그게 또 아래를 자극했다. 얜 대체 뭘 먹고 커서 이렇게 야하지?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래는 이미 뻣뻣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줄리안이 힘이 든지 클로드의 손을 피해 엉덩이를 움직였다.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조금씩 띄웠다. 베개에 매달린 채 엉덩이를 들어 올리는 모습에 클로드의 이성이 다시 날아갔다.
단숨에 들어오는 성기에 줄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안에는 안 쌀게, 그러니까, 시발, 야, 넌 태어나서 흣, 지금까지 그 약만 먹었냐?”
왕비가 준 약이 처음이었을 리가 없다. 그 약이 무슨 페로몬 증강제도 아니고 끽해야 미약일 텐데 그 정도로 사람이 이렇게 음란하고 귀여울 수 있을 턱이 있나. 분명 어릴 때부터 물 대신 약을 처마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리가 없었다. 퍽, 퍽, 퍽. 클로드는 무작정 박아댔다. 눈앞이 흔들렸다. 신경줄 위에서 쾌락의 불이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흐읏, 읏. 클로드가 거칠게 숨을 쉬며 투우처럼 줄리안을 들이박았다.
줄리안은 죽을 것 같았다. 쾌락도 있었지만 옆구리가 결렸고 심장까지 아팠다. 그는 안 될 것임을 알면서도 앞으로 기었다가 끌려오길 반복했다. 끌려올 때마다 그 반동으로 더 세게 박혔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건 버릇인가 봐. 줄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좋은 것도 있는데 아팠다. 줄리안이 엉덩이를 흔들어 그 손바닥을 피하려 하자 클로드의 허릿짓이 더 심해졌다. 그리고 클로드가 줄리안의 허리를 잡고 몇 번 미친 듯이 쑤시더니 갑자기 빼냈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비비기 시작했다. 줄리안은 비명을 질렀다. 퉁퉁 부은 회음부에 예민한 부분이 문질러졌다. 아아, 난, 진짜, 이젠, 아읏, 사람을, 하읏, 뭘로, 아, 안 돼―! 줄리안이 비명을 질렀을 때 클로드가 한 손을 앞으로 돌려 둘의 성기를 같이 잡았다. 짜부라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절정이 찾아왔다.
클로드가 다시 씻고 나왔을 때 줄리안은 또 뻗어 있었다. 그가 줄리안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줄리안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튕겨 올랐다.
“내가 닦아줄 테니까.”
“꿈도 꾸지 마십시오.”
줄리안이 이를 갈 듯 말하며 욕실로 걸어갔다. 절뚝이는 줄리안을 보며 클로드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줄리안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 번만 더 하고 싶었다. 안쪽이 워낙 요물이어야 말이지. 클로드는 줄리안의 안을 탓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얌전히 옷을 입었다. 한 번만 더 하면 줄리안에게 차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뭐든 적당한 게 좋지. 초반이니까 서로 맞추는 것도 필요하고.
줄리안이 알게 되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클로드가 옷을 입었을 때 줄리안이 나왔다. 긴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머리 스타일링이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줄리.”
“손대지 마십시오.”
줄리안이 으르렁거렸다. 클로드는 반갑게 그를 잡으려던 손을 내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마치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거절당한 듯한 얼굴이라 거울 앞에 섰던 줄리안이 당장 매서운 눈초리를 했다.
“그딴 표정 짓지 마세요.”
칫, 클로드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줄리안은 자신의 헤어스타일과 얼굴을 주의 깊게 살핀 다음 클로드가 가져온 옷을 입었다. 다행히 옷을 금세 벗었던지라 많이 구겨지진 않았다. 그는 옷을 하나씩 입고 자신의 매무새를 완벽하게 정돈한 다음 한숨을 쉬었다.
“이리 오세요, 전하.”
클로드가 천천히 다가오자 줄리안은 손을 들어 그의 옷차림도 정돈해주었다. 손길이 단정했다. 아까의 그 음탕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옴므 파탈.”
“뭐라십니까.”
아까부터 자기가 발정해놓고 남 탓이다. 줄리안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그러자 클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나쁜 뜻 아니야.”
줄리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섹스 직후 애인이 화를 낸다는 건 역시 섹스 테크닉이 별로라는 뜻이었을까. 클로드는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올리며 오늘의 섹스를 잠시 돌이켜보았다. 음, 역시 마지막에 한 번 더 한 게 문제였을까. 그는 사실 오늘의 섹스가 아주 좋았기에 어디서 마이너스 점수를 찾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번의 줄리안도 완벽했다. 저번보다 더 완벽해질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약 기운이 없으니 온전한 줄리안 자체로만 섹스를 해야 할 거고, 초짜인 자신과 역시 처음인 줄리안이 만났으니 섹스는 엉망이 되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줄리안은 위대했다. 그와의 섹스는 모두 언빌리버블 스펙터클 판타스틱이었다. 시발, 내가 좀 딸리는 것 같은데. 클로드는 줄리안이 하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생각했다. 그는 할 때마다 미칠 것같이 좋은데 줄리안은 미간에 힘이 빡 들어가 있었다.
“줄리안.”
“…….”
“화났어?”
줄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클로드는 또 피부에 윤기가 돌고 있었다. 청회색 눈동자에도, 붉은 입술에도 만족이 그득그득했다. 남의 생기를 빨아먹는 악마 같으니. 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가가 느슨해졌다. 자신과 섹스할 때마다 좋아서 이성을 잃고 미치는 상대다. 섹스를 하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섹시한 인간이 된 기분마저 드는데 불쾌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냥 너무 힘드니 적당히 해주었으면 좋겠다 싶을 뿐이지.
“앉아보세요. 머리 다시 말려드릴 테니까.”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가 자리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느슨하게 앉은 그는 위험한 남자의 관능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줄리안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얼굴에 이 몸을 해가지고 초짜라니. 할 때마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니 곤란했다.
“전하.”
“응?”
“다음에는 횟수를 미리 정하고 시작하죠.”
“…….”
“그리고 싫은 것도 서로 미리 말해봅시다.”
“난 다 좋은데?”
클로드가 눈을 감고 나른하게 말했다. 머리를 만져주는 게 좋은 듯했다. 귀여워. 줄리안은 천천히 머리를 쓸어내려주었다. 그러자 클로드가 조금 웃었다. 하, 참, 나도 눈에 뭐가 씌었지. 줄리안은 클로드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클로드가 아야 하고 눈썹을 움직였다.
뭐가 씌었어, 줄리안 일리드. 네 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용서 없이 헤집은 남자가 뭐가 좋다고.
줄리안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뒤가 쓰리고 아프고 안쪽은 부은데다 아직도 벌어져 있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저번처럼 배가 아플까 봐 욕조에 쪼그리고 앉아 스스로 뒤를 열어야 했다. 그런 민망한 짓을 하게 만든 남자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 기분이 사르르 녹아내리는지 알 수가 없다.
“전하.”
“응.”
“보안 점검이 시작된다고 들었는데요.”
줄리안이 마지막으로 클로드의 헤어스타일을 마무리하면서 말했다. 클로드가 눈을 떴다. 거울을 사이에 두고 줄리안과 클로드의 눈이 마주쳤다.
“그래.”
“제가 첫 타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오늘 늦어지는 거면 미리 팀에 이야기해도 될까요?”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가 피식 웃었다.
“이미 늦지 않았어? 나와 뒹구느라 두 시간이나 흘려보냈는데.”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이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며 빗과 헤어드라이어를 내려놓았다.
“두 시간이나 지났으니 훨씬 더 길어질 거라면 팀에 얘기하고 싶습니다.”
“아냐, 됐어. 오늘의 점검은 끝이거든.”
“오늘의 점검이라니요?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습니까?”
“몸수색을 했지.”
줄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클로드는 거울 속의 줄리안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손을 뻗어 줄리안의 뒤통수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줄리안의 얼굴이 다가왔다. 천천히 거울 속의 줄리안이 가려지고 진짜 줄리안이 클로드의 앞에 나타났다.
“보안 점검은 정말 시작될 거야, 줄리안. 혹시.”
“…….”
“혹시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
줄리안이 의아한 듯 고개를 조금 기울여 보였다.
“할 말이라니요.”
줄리안의 눈은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반짝거렸다. 요즘 그의 눈은 그렇게 빛나지 않았지만 더 다정하고 상냥한 빛을 띠고 있었다. 클로드는 그 빛이 좋았다. 이 눈이 언제나 이렇게 빛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이 이 눈을 뽑지 않아도 줄리안이 첩자면 이 눈을 뽑으려는 놈들이 많을 것이다.
“줄리안, 하나만 기억해.”
클로드는 줄리안의 눈에 입을 맞췄다. 줄리안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썹과 눈꺼풀이 모두 입술에 닿았다.
“너는 언제든 내게 연락해도 좋아. 무슨 내용이든 괜찮고 어느 때라도 상관없어. 내가 필요할 때 반드시 연락하도록 해.”
“휴대전화 번호 안 가르쳐주셨잖습니까.”
“가르쳐줄게.”
클로드의 입술이 멀어졌다. 그가 놓아줘서 줄리안은 허리를 똑바로 폈다. 그는 클로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클로드의 목소리에는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
혹시 내가 첩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에이, 그럴 리가. 줄리안은 금세 그럴 리가 없다며 그 생각을 부정했다. 클로드는 딱 봐도 첩자 따위와 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대공인데다 섹스도 처음이라는데 첩자 혐의가 있는 자와 잠자리를 가질 리가 없었다. 다른 뜻일 것이다.
묘해지는 기분을 뒤로 밀어놓고 줄리안은 클로드의 뺨을 쓸어내렸다. 클로드가 눈을 감았다. 여러 선명한 색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얼굴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목구비는 참 단정했다. 이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내내 자신에게 예쁘다고, 미치겠다고 말했었다. 때를 잘못 찾은 봄바람이 가슴에서 살랑거렸다. 줄리안은 뺨을 쓸어내리다 말했다.
“전하도 예뻐요.”
클로드가 눈을 떴다. 그는 의외라는 듯 줄리안을 바라보다 환하게 웃었다. 세상이 환해지는 미소였다. 줄리안도 그 미소를 보며 같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