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말할 수 없는
줄리안은 호텔의 셔틀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면서 침울해졌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휴대전화를 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내내 두근두근한 연애인 줄만 알았는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고 그래, 사람 싱숭생숭하게.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을 했다면 저쪽에서 했지. 섹스도 꼭 그렇게 짐승처럼 할 필요 없잖아. 아, 엉덩이 아파. 맨날 엉덩이 때리고, 내가 이런 변태적인 것도 다 받아주는데, 아니, 나도 좀 좋긴 했지만, 어쨌거나 남성 간의 섹스에서 더 힘든 게 받는 쪽이라는 건 상식 아니야?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날 밀다니. 그건 진심이었어, 진심이었다고! 너무하잖…….
『줄스, 보고 싶어.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제 괜찮지 않을까? 나와 데이트 언제 해줄 거야?』
시발, 이거였구나.
『대공은 우리 사이에 대해 모를 거야. 이제 만나도 될 것 같은데 언제 볼까? 난 언제든 좋아. 내가 시간을 맞춰볼게. 사랑해, 줄스. 너뿐이야. 안녕.』
줄리안은 드라이까지 완벽하게 한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고 싶어져서 주먹을 쥐었다. 보안 마법이 풀렸었던 모양이다. 하긴 요즘 마나를 너무 많이 사용했지. 게다가 기분이 좋고 평온해서 마구잡이로 사용했더니 걸어놓은 마법 쪽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아, 젠장. 클로드와 다니면서 그새 욕이 입에 붙은 모양이다. 아주 욕이 술술 나왔다.
괜히 오해하게 했네.
누가 봐도 오해할 메시지였다. 대공은 우리 사이를 모를 거라니, 클로드가 이 메시지를 보았으면 충격받을 만했다. 좀 심술궂고 야한 남자였지만 나름대로 성실한 성격이었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만큼 자신의 배신에도 크게 상처 입을 게 분명했다. 줄리안은 그런 게 아니라고 전화를 걸려다 멈칫했다.
그래서 루시가 누구냐고 물으면?
당연히 물을 것이다. 아는 여자라고 말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길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야단났네.
루시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행동해야 하는데 그럴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애인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과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 이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후, 솔로몬이여. 저에게 지혜를. 몇 천 년 전의 왕이자 마법사였던 남자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역시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왕궁에 도착해서도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줄리안은 어쩔 수 없이 속상해졌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니 마음이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그리고 그 밤, 클로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줄리안도 연락할 수 없었으니 둘은 아무 대화도 없이 밤을 흘려보냈다.
줄리안의 인생에서 이렇게 어둡고 괴로운 밤은 처음이었다. 가정교사와 헤어졌을 때도, 도서관과 헤어질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해 우울했지, 누군가의 마음을 걱정하며 밤을 지새운 것은 처음이었다. 이게 사랑인가. 줄리안은 동이 터오는 창을 보며 생각했다.
야간조인 줄리안이 퇴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줄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아무 연락도 없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가서 옷을 벗었다. 씻으려고 욕실에 들어갔더니 온몸에 클로드의 흔적이 도배되어 있었다.
이런 몸으로 만들고 연락이 없다니.
클로드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슬퍼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줄리안은 샤워기 밑에 서서 멍하니 클로드를 떠올리다 눈을 감았다. 어떡하지. 내내 그 네 글자가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러나 가슴은 자꾸 초조한데 머리는 아무런 대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할까. 루시드와 전 친구 사이예요. 무슨 친구 사이가 이러냐고 하면, 아니, 우리는 원래 그러고 노는데 네가 싫다면 안 할게요. 대공이 모른다고 하는 건 무슨 말인데, 라고 물어보면…….
커밍아웃인가.
원래는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향을 고백하는 데에 쓰는 말이지만 요즘처럼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구분이 없는 시대에는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행위에 전반적으로 쓰였다. 커밍아웃. 그런가, 그거밖에 없나.
줄리안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클로드가 이해해줄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이런 관음적인 취미를 이해해줄 리 없다. 사실 이 취미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루시드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 괜히 솔메이트가 아니었다. 그와 루시드는 정말 영혼의 짝이었다. 덕질의 신이 맺어준 영혼의 형제.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잖아.
줄리안은 샤워를 끝내고 나오며 무거운 생각에 빠져들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 반복되며 고리를 만들어내는 생각들이었다. 차라리 루시드에게 폐라도 안 된다면 클로드가 이해해주지 않더라도 고백해볼 텐데. 설사 클로드와 헤어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숨길 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이건 밝히는 즉시 루시드에게 폐가 된다. 이런 걸 즐기고 있다는 걸 알면, 그리고 클로드가 밝히면 즉시 시종직에서 쫓겨날 텐데, 루시드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난 연애나 했지, 걘 뭐야.
줄리안은 머리를 잡아 뜯었다. 말하느냐, 마느냐. 햄릿의 고뇌만큼이나 무거웠다.
“악, 네, 네, 저예요! 저, 맞아요!”
그러나 줄리안이 의리를 지키는 동안 루시드는 생각보다 쉽게 줄리안과의 사이를 고백하고 있었다.
클로드가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참모 중 한 명이 말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제이미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제이미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벙긋거렸다. 미친개는 지치게 둬야 돼요. 참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
“그래, 너였단 말이지?”
처음에는 루시라는 이름에 숨도 쉴 수 없었다. 줄리안이 루시라는 여자와 짜고 자신을 농락했다든가 하는 신파 같은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눈물까지 찔끔 날 뻔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이름이 있었다.
루시드 레플래스.
줄리안이 처음으로 감정을 보였던 이름. 키가 크고 남자다운 얼굴이라 ‘루시’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름이 루시드였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캐보자는 생각에 집으로 쳐들어갔다.
‘누, 누구세요? 여,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나름대로 잘생겼다고 할 수 있는 낯짝을 보자 분노가 들끓었다. 클로드는 일단 루시드의 머리채를 잡아 책상에 몇 번 박아주었다. 루시든 아니든 일단 몇 번 머리로 못질을 했더니 답답한 속이 손톱만큼 나아졌다.
그는 성급하게 묻지 않았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대신 몇 번 더 루시드의 머리를 책상에 박았다. 후. 가볍게 한숨을 쉰 클로드는 루시드의 머리채를 틀어쥐고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클로드는 자신이 이런 기분일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기분일 때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면 대체로 정직한 대답이 돌아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루시드 레플래스의 이마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클로드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줄리안 일리드의 휴대전화에 있는 루시가 너냐?’
클로드가 물었다. 참모들이 일제히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 현실을 외면했다. 상관이 질투에 미쳐서 멀쩡한 시종의 이마를 깨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아이가 마트에서 로봇을 사달라며 난리를 피우고 있을 때 그 옆에 서 있는 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심지어 아이여도 부끄러운데 상대는 상관이었다. 위협적인 체구를 가진 스물아홉 살짜리 상관이 ‘내 애인 휴대전화에 연락한 게 너냐’며 사람을 쥐어 패고 있는데 낯이 화끈거렸다.
“내가 너희 사이를 모를 줄 알았어?”
하, 누굴 핫바지로 봐도 유분수지.
여전히 무슨 사이인지 모르면서 클로드는 잘도 아는 척했다. 피가 흘러 시야가 안 보이는지 루시드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 얼굴이 ‘모르는 것 같은데?’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발, 이 좆같은 새끼가! 클로드가 다시 루시드의 머리를 책상에 박았다. 쾅, 쾅, 쾅. 그 소리를 들은 제이미가 참모에게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죽일 건 아니신가 봐요. 참모가 그러게요, 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새끼야, 줄리안이 누군 줄 알아?”
클로드가 물었다. 루시드는 반쯤 정신을 잃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온통 붉었다. 피 때문이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도 루시드는 “네, 아는데요”라고 중얼거렸다. 당연히 알았다. 자신의 친구인데 누구인지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래? 줄리안 일리드가 누군데?”
“시, 시종이요?”
쾅―. 루시드의 머리가 책상에 엄청난 속도로 떨어졌다. 그 뒤에서 제이미가 붕어처럼 또 벙긋거렸다.
아, 아니다. 죽이실 생각도 아예 없진 않으신가 보네요.
“오답이야. 다음에는 정답을 맞히는 게 좋을걸. ‘루시’, 이 상년아.”
“그, 무슨, 사이신데요? 주, 줄리안이 뭔가를 잘못했나요?”
그, 그런 애 아닌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아닐까요? 제 친구인데요, 애는 착해요, 정말입니다. 루시드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도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클로드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리고 쾅, 조금 전보다 더 큰 소리가 났다.
참모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 시발, 시체 처리 귀찮은데. 얘도 백작가 아들입니까? 제이미가 태블릿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루시드에게는 또 테스트의 시간이 다가왔다.
“루시, 잘 생각해봐. 슬슬 네 머리를 살살 박는 것도 힘들어지려고 하거든.”
“사, 살려주.”
“오답이야.”
클로드가 루시드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주 세게 박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제이미가 재빨리 움직였다. 제이미는 옆에 있던 쿠션을 들어 루시드의 머리 밑에 놓았다. 순식간이었다. 루시드의 머리는 푹신한 쿠션에 푹 파묻혔다.
“시발 새끼야, 이거 뭐야?”
클로드의 눈이 번들거렸다. 와, 맛이 갔네, 갔어. 제이미는 흘끔 루시드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길어야 두 번? 세 번? 연약해 보이는 대가리다. 오래 못 버틸 것이다.
“죽이실 거면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해서요. 시체 처리반도 불러야 하고요. 아, 맞다. 우린 여기에 쓸 만한 처리반이 없죠.”
여긴 수도니까요, 라고 제이미가 강조했다. 클로드의 눈이 더 가라앉았다. 제이미가 잠시 그 눈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리드 시종에게는 뭐라고 할 생각이세요?”
“…….”
“이놈이 죽는 순간 각하와 일리드 시종의 러브 스토리는 장르가 달라질 텐데, 괜찮으세요?”
클로드가 칫, 혀를 찼다. 괜찮을 턱이 없지. 제이미가 속으로 코웃음 쳤다. 고작 이 정도로 이렇게 맛이 가는데 줄리안에게 본격적으로 미움이라도 받았다간 얼마나 미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클로드의 청회색 눈동자에 살기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걸 보면서 제이미는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퇴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창으로 뛰는 게 빠를까, 현관문으로 뛰는 게 빠를까. 그러나 어느 쪽이어도 잡히는 결말이 되리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냥 잡혀서 두세 군데 부러지는 것은 자존심이 상해서 싫었다. 도망은 한 번 쳐보고 부러져야지. 그게 사나이라고 제이미는 다소 어긋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루시드가 손가락을 딱 부딪쳤다.
“아, 알겠어요!”
클로드와 제이미는 동시에 루시드를 내려다보았다. 미친놈을 보는 눈길이었지만 루시드는 마음이 급했다. 한 번만 더 머리를 박으면 죽을지도 몰랐다.
“정답은 애인입니다!”
마치 백만 달러가 걸린 퀴즈쇼의 마지막 대답을 말하듯 비장한 목소리였다.
클로드는 그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하 하고 웃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시발, 이런 놈을 내가 라이벌이라고……. 이성이 돌아오자마자 기가 막혔다. 잠깐 자신이 얼마나 미쳤는지 알 만했다.
“각하.”
제이미가 클로드를 바라보았을 때 아 하고 루시드가 한 번 더 외쳤다.
“정답은 아리스트 대공 전하의 애인입니다!”
이게 진짜 미쳤나?
클로드가 루시드를 내려다보았다. 패는 동안은 몰랐는데 문득 정말 미친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끼리끼리 논다고 했는데 줄리안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인가 싶어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쨌거나 이렇게 순진발랄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줄리안과 루시드는 정말 그런 사이는 아닌 듯했다.
“각하.”
제이미가 질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클로드가 바라보자 제이미가 퉷, 침을 뱉었다.
“쪽팔립니다, 진짜.”
클로드도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탐탁잖은 얼굴로 루시드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분명 루시드와 줄리안 사이에는 뭔가가 있다.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클로드는 루시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루시드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저기, 정답은 맞습니까?”
정답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알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지, 너희들.”
헉, 루시드가 입을 다물었다. 얼굴은 피투성이인데 눈동자는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눈동자의 움직임이 줄리안을 생각나게 했다. 바늘도 안 들어갈 것같이 구는데도 줄리안은 눈을 도로록, 움직이고는 했다.
그게 또 존나 귀엽지.
그런데 눈앞의 이 새끼가 그 귀여운 짓을 따라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짝퉁 중의 짝퉁 같은 모습인가. 귀엽지도, 예쁘지도 않은 사내새끼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남자의 트레이드마크를 따라 하다니.
클로드의 머릿속에 매 이벤트마다 보게 되는 군인 놈들의 여장이 생각났다. 이 새끼들은 장기 자랑을 하라고 하면 무조건 미니스커트를 입고 근육질 다리를 쫙쫙 벌리며 여성 댄스 그룹의 춤을 추고는 했다.
시발, 내 주량이 는 건 다 그 새끼들 때문이야.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루시드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 제이미의 군복에 그 얼굴을 문질렀다.
“좀 닦아라.”
“아, 각하!”
제이미가 질색했지만 클로드는 아랑곳 않고 루시드의 얼굴을 몇 번 더 비볐다. 그러고 나서야 클로드는 루시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닦지 말 걸 그랬나. 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닦은 후였다. 이제 루시드의 얼굴이 더 더러워졌다. 왕자와 거지에서 왕자가 거지 분장을 하면 이랬을까 싶었다.
“지금 보안 점검 하는 거 알아, 몰라?”
“아, 압니다.”
“너 같은 새끼 열이고 백이고 잘못되는 건 내 알 바 아닌데, 그게 내 애인 일이 되면 달라지거든. 너네 뭐 하고 있는 거야?”
루시드가 또 눈알을 굴렸다. 결국 클로드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새끼야. 그건 귀여운 애한테나 어울리는 거야, 알았어?”
“귀여운 척 안 했습니다.”
“안 하기는, 시발.”
클로드가 코웃음 치는 사이 루시드는 피 때문에 뻑뻑한 눈을 파르르 떨었다. 이게 진짜 미쳤나, 클로드가 그 귀여운 척에 오한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떠는 사이 루시드가 물었다.
“애인이시면 줄리안에게 물어보시면 되잖습니까.”
아, 우리 말이 바로 그거라고!
모든 참모들이 일제히 입을 꽉 다물고 있는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입니다! 잘한다, 미친놈!
참모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드가 손을 들어 눈을 비벼 피 눈곱을 떼어내며 말을 이었다.
“줄스가 말씀드리지 않은 부분을 제가 말씀드릴 수는 없지요. 아니면.”
루시드의 어조가 조심스러워졌다.
“애인 사이가 아니신 겁니까?”
무슨 사이인가.
클로드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입장에서 줄리안은 애인이었다. 클로드는 줄리안과 매우 진지하게 사귀고 있었다. 줄리안을 만나면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았고, 자꾸 괴롭혀서 자신에게 더 강렬하게 반응했으면 좋겠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말하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연애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줄리안은 그렇게까지 강하게 자신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줄리안은 남들 눈을 신경 썼다. 클로드와 만나는 것을 상당히 조심하고 있었다. 웬만한 불륜 남녀는 뺨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심지어는 온갖 불륜 남녀가 판치는 궁정 사교계를 보면서 살았으면서도 그들 중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비밀스러웠다. 마치 남들이 알아서는 절대 안 되는 것처럼. 그의 애인이 클로드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그에게 치명타라도 되는 것처럼.
자꾸 손끝이 아프다.
클로드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자꾸 손이 저렸다. 심장이 덜컹덜컹했다. 벌써 며칠째 줄리안은 연락이 없고 클로드도 결국 연락하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전화를 받은 줄리안이 무슨 말을 할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발끝이 아슬아슬한 곳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벼랑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슴을 시리게 했다.
“대공 전하.”
루시드가 불렀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클로드는 물끄러미 놈을 바라보았다.
난 이 개새끼가 싫어. 널 닮은 구석이 있는 ‘루시’. 제일 엿 같은 게 뭔지 알아? 이 개새끼가 다 옳은 말만 하고 있고 내가 당당하게 네 애인이라고 한 번 더 말할 수 없는 현실이야. 나는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를 대하는 이놈이 싫어. 정말, 너무나 싫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네가 보고 싶어 미치겠다는 게 거지같아. 줄리안, 정말 난 지금 미친놈처럼 굴면서 진짜 미친놈 같은 네 친구를 보고 있어. 세상이 정상 같지가 않아.
널 만난 그 순간부터 세상이 내내 시소를 타고 있어. 어느 날은 하늘 위의 천국이다가 어느 날은 땅 아래의 지옥이지. 줄리안,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손끝이 너무 아파. 빌어먹을, 다 잘라내면 좀 덜 아파질까.
“각하.”
줄리안, 나는, 나는……. 나는…….
“각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클로드가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자 제이미가 태블릿을 들이밀었다.
“일리드 시종이 국가 반역죄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클로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재빨리 제이미의 태블릿을 낚아채서 내용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줄리안 일리드가 국가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그가 현재 왕궁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며 근위대에서 직접 그를 취조할 예정이다.
근위대?
클로드가 제이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근위대가 줄리안을 빼가다니, 이 새끼들이 이러는 동안 우리가 어떻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지, 제이미 블레서?”
클로드의 뺨이 굳었다. 정말 화가 난 모양이라 제이미는 등을 긴장시키며 대답했다.
“그나마 저희가 일리드 시종에게 정보 알람을 걸어놓았기 때문에 이런 연락이라도 온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아마 지금까지도 몰랐겠지요.”
“언제까지?”
“각하께서 일리드 시종에게 연락하시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각하, 송구하지만 각하께서는 일리드 시종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시잖습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탕, 소리가 1층에서 울렸다.
루시드가 다람쥐처럼 창으로 달려가더니 “그, 근위대잖아!”라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어, 어떡하지, 라고 중얼거리며 방 안을 마구 뱅뱅 돌더니 마음을 결정한 듯 부엌으로 달려갔다. 저 미친놈이 무슨 생각이지?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루시드가 부엌 창문을 열더니 그곳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클로드가 입술을 한쪽으로 올렸다.
“잡아와.”
그 말과 동시에 경호원 두 명이 달려가 루시드를 끌고 왔다.
“악, 놔주세요! 저, 전 주, 줄리안의 유지를 지켜야.”
콰앙, 소리가 엄청났다. 루시드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까 자신이 머리를 박히던 책상이 반으로 쪼개진 것을 보며 그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맨손으로 책상을 내려쳐 반으로 쪼개놓은 클로드가 “유지? 지금 줄리안이 죽었다는 거야, 뭐야?”라고 음산하게 물었다.
“아, 아니요. 줄스야 잘 살아 있죠, 물론.”
루시드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줄리안의 무사를 기원했다. 줄리안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자신부터 세상을 하직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경호원에게 잡힌 채 고개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때 밖에서 근위대가 문을 부수며 들어왔다.
“루시드 레플래스, 근위대다! 두 손을 들고 투항하라!”
비장하게 소리치며 총을 겨눈 채 근위병들이 뛰어들었다. 그 순간 클로드의 참모와 경호원들이 일제히 총을 꺼내서 그들에게 겨누었다.
그 모습을 본 근위병 뒤의 근위기사 두 명이 어, 어?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클로드의 부하들이 일제히 총을 겨눈 채 그들을 노려보았다.
“클로드 스토메어, 아리스트 대공이다.”
클로드의 말에 근위병들이 어쩔 줄 모르고 근위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어, 어떡하죠? 근위기사 두 명이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진짜 어떡하지? 몰라, 왜 나한테 물어……. 그때 클로드가 “총 내려”라고 여상하게 말했다. 근위병들이 어쩌지 하는 얼굴로 다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때.
“총 안 내려?! 명령에 불복하는 거냐!”
제이미 블레서가 고함을 쳤고 근위병들이 저도 모르게 재빨리 총을 내리고 경례를 했다. 근위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콧대 높은 근위대지만 상대는 대공이었다. 신분으로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이였고 전과를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각하께 승리를!”
절도 있는 경례와 함께 구호가 울려 퍼졌다. 클로드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장난하나? 소리가 작다. 다시 해!”
클로드의 얼굴에 서린 경멸을 보고 근위병과 근위기사가 긴장했다. 그들은 서둘러 경례를 다시 붙였다. 구호를 외치는 소리는 장엄하기까지 했다.
“각하께, 승리를!”
“근위대는 구호도 제대로 못 외치나? 다시!”
클로드의 성량이 무시무시했다.
제이미는 그 옆에 몹시 진중한 얼굴로 서 있었지만 클로드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하, 가면 갈수록 군인이 아니라 사기꾼이 되어가신다니깐. 그러나 그는 결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각하께, 승리를!”
어딜 봐도 완벽한 경례와 구호였지만 클로드는 코웃음을 쳤다.
“아, 시발. 뭐 이렇게 징징대는 목소리야? 제이미 블레서 중령, 앞으로.”
“앞으로!”
“시범.”
척, 제이미가 경례를 하더니 구호를 외쳤다.
“각하께 승리를!”
근위대의 얼굴에 의심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한 것도 비슷하지 않았어? 그러나 클로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바로 이렇게다, 제군들. 다시.”
상관이다. 군대의 원수. 그가 경례를 하라면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줄 때까지 경례를 해야 했다. 근위대는 몇 번이나 경례를 하며 곤란해졌다. 대공이 수도에 오기 전에는 살인광인 도살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게다가 섹스 중독이라고 했다. 그가 수도에 온 다음에는 소문이 더 붙었다. 왕의 연회에서 시종을 끌고 가 강간하는 사이코라는 소문이었다. 섹스 중독자라 하고 싶을 때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옆에 있는 자를 끌고 가 무자비하게 강간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각하께! 승리를!”
근위대는 사이코에게 찍힐까 봐 오들오들 떨면서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또라이 수준이 아니라 사이코라는데 잘못 찍히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근위대의 경례는 앞서의 것들보다 훨씬 엉망이었지만 클로드는 그제야 “좋다, 제군들” 하고 그들을 용서해주었다.
“피의자에게는 무슨 볼일이지?”
클로드의 말에 근위기사가 “피, 피의자요?”라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그래. 국가 반역죄의 혐의가 있어.”
“아, 그건 저희가 먼저.”
“먼저? 지금 누가 여기에 먼저 왔는지 보면 모르나? 아니면 제군의 눈은 단춧구멍인가? 하긴 크기는 비슷하게 생겼군.”
클로드의 말에 근위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클로드가 고갯짓을 하자 루시드를 결박하고 있던 경호원 둘이 움직였다. 그들에게 끌려오는 루시드를 본 근위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루시드가 하하 하고 힘없이 웃으려는데 클로드가 그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보이나, 누가 먼저 잡았는지?”
“예, 그런데 얼굴은 왜…….”
분명 자신들이 기억하기로 루시드 레플래스는 시종이지 길거리 파이터가 아니었는데 어쩌면 저렇게 얼굴이 가여워졌단 말인가. 지금은 얼굴이 부어오르고 있어 아까보다 좀 더 흉해져 있었다. 이목구비의 형태가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며 근위기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도 않은 시종의 얼굴을 누가 저렇게 만들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각하, 레플래스 시종은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입니다.”
물론 혐의가 확정된 피의자라고 해도 이렇게 제멋대로 두들겨 패면 안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말이 통하지도 않을 것 같으니 일단 이렇게 말한 근위기사였다. 그러나 클로드의 살벌한 시선을 받는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그랬다고 격렬하게 후회했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1초 전으로 돌아가서 입을 닥치고 있을 텐데.
기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클로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넘어가주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기사는 한 걸음씩 물러났다. 다리 길이 차이 때문이었을까. 곧 그들은 가까운 곳에서 멈추어 서게 되었다.
클로드가 싱긋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기사의 눈에 그 얼굴은 꽃 같은 미모를 가진 야차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새끼야, 말해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그게.”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인데? 그래서, 뭐? 무슨 할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해보라고.”
“아니, 그러니까.”
“남자답게 해보라고!”
“때, 때리시면 안 된다고 하려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클로드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금발이 사르르 내려와 얼굴을 가렸다. 근위기사는 흠칫했다. 마치 북유럽 남신처럼 고매한 외모인데 너무 요요한 탓일까? 언젠가 보았던 동양 귀신 영화에서 ‘넌 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이니?’라고 묻던 엄마 귀신같이 등골이 오싹했다.
“때려? 누가? 내가? 내가 누구를 때렸는데?”
나왔다.
클로드의 참모들은 마치 로마 시대 조각처럼 무표정하게 서 있었지만 속으로는 쓰게 웃고 있었다. 클로드의 트집 잡기는 정말 유명한 기술이었다. 클로드는 트집을 잡는 것으로 다섯 시간도 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클로드에게 트집 잡히다 울화통이 터져 운 적도 있는 제이미가 보증하는 마스터급 기술이었다.
“그, 그게.”
“응? 너 지금 날 모함하는 거야? 내가 누구를 때렸어? 어?”
모두의 시선이 누가 봐도 맞은 얼굴인 루시드 레플래스에게로 모였다. 루시드가 어, 어 하고 멍청한 얼굴로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때 클로드가 루시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얼굴에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했었던가?”
놀랍게도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손가락이 닿은 적은 없었다.
“그거야 대공 전하께서는 대공 전하이시고, 전하, 이,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
근위기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분위기가 요상해지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근위대 소속, 눈치를 보는 것에는 익숙하다.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클로드가 엄연히 분위기를 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면, 내 부하들이 너를 때렸나?”
클로드가 묻자 루시드가 “아닙니다, 전하”라고 진중하게 대답했다. 근위대가 눈앞에 있으니 시종의 목소리가 되었다.
클로드는 시종이라는 놈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줄리안도 그렇고, 사적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공적으로는 시종의 형태를 유지했다. 시종의 얼굴, 시종의 몸가짐, 시종의 목소리. 수백, 수천 명일 그들은 똑같은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훈련받는 것일 테다.
“루, 루시드 레플래스. 거짓말하지 마라.”
두 명의 근위기사 중 이제껏 무서워서 입 한 번 열지 못하고 있던 근위기사가 덜덜 떨면서 루시드를 책망했다. 그러나 루시드도 시종이었다. 아까는 머리를 너무 박혀서 미친 자의 영혼이 튀어나왔지만 평소에는 줄리안과 비슷하게 차분하고 조용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시류도 잘 읽었다.
지금의 시류는 당연히 클로드에게로 흐르고 있었다. 언제나 대세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시종답게 그는 재빨리 대답했다.
“정말입니다. 전하께옵서는 제 얼굴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셨고 다른 분들께서도 저를 폭행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근위병과 기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돼. 근위대가 루시드를 노려보았지만 루시드는 태연했다. 그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는 것을 느끼며 루시드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근위대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니, 누가 봐도 맞았는데, 얼굴이 피떡이 되어 있는데, 그 주제에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입을 맞췄으니 손쓸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매의 눈을 하고 루시드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조짐이라도 있는지 찾기 위해 눈에 힘을 줬지만 아무런 조짐도, 정확히는 아예 표정이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모질게 맞았는지 온 얼굴이 퉁퉁 부어서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 얼굴을 해가지고 안 맞았다고 하니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자.”
클로드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어떡할 거지?”
“전하, 송구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명예 훼손이라는 말, 알고 있나?”
근위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명예 훼손 요건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쳤지만, 상대는 대공이었다. 법적인 해석만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왕족 모독죄는?”
“…….”
“그리고 내 계급이 뭔지 기억은 하고들 있는 건가? 날 대공이라고 부르는 게 여기서 적절하다고 생각하나? 처음에는 그저 실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의심이 되는군. 근위대가 장수로서의 내 능력을 비꼬는 건가?”
끝났군.
클로드의 참모들 머릿속에 일제히 그 한 마디가 스쳐 지나갔다.
“아, 아닙니다, 전, 각하!”
“전, 각하? 날 모욕하는 거냐?”
“시정하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또 있어?
근위기사들이 질린 표정을 숨기며 속으로 미치고 환장하겠다고 악을 썼다. 진짜 왜 저러는 거야? 약 먹었나? 사이코라고 말은 들었는데 진짜 아들 결혼시키고 눈이 뒤집힌 시어머니처럼 트집을 잡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이 일은 이제부터 이쪽에서 주관한다.”
“이, 일이라니요, 각하.”
“첩자 색출은 내가 한다. 근위대는 빠지도록 해.”
말도 안 되는!
근위대 전원이 반발했다.
정확히는 얼굴로만 반발했다. 표정이 반발심을 잔뜩 드러냈지만 흉흉한 클로드와 그 뒤의 참모들을 보고 입을 열지는 못했다. 상명하복의 군대에서 상관에게 불복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심지어 그 상대가 왕족이면 더욱 어렵다. 거기에 사이코라는 옵션이 붙고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으면 불가능했다.
“대답은? 기사!”
클로드의 말에 기사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까지 모든 용기는 자신 혼자 쥐어짜 냈지만 사실 책임자는 자신만이 아니었다. 내내 뒤에 물러나 있는 기사도 같은 책임자였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이제까지 내가 다 말했잖아요!
그렇게 책망의 눈길을 보내자 뒤에 물러나 있던 기사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각하, 그것은 저희가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클로드가 하, 코웃음을 쳤다.
“너희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너희는 지금까지 결정권 하나 없는 주제에 내 시간을 낭비하게 했다는 건가?”
클로드가 앞에 있는 기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앞에 나섰던 기사와 뒤에 물러나 있던 기사의 얼굴에 희비가 갈렸다.
“그것은 각하께옵서.”
“변명을 하겠다? 좋아, 제군. 어디 들어보지.”
변명하면 죽여버리겠다는 어조로 말은 잘했다. 기사는 클로드의 목소리에 서린 협박을 알아듣고 난처한 얼굴로 앞에 서 있는 기사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뒤를 돌아보고 자신을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자신은 그를 도와줬는데, 정작 그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나쁜 놈! 기사는 그 머리를 노려보다 클로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정하겠습니다.”
“부관, 근위대장과 연결해.”
클로드의 말에 제이미가 “예, 각하”라고 말하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거는 사이 클로드가 다시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레플래스는 우리 쪽에서 확보한다. 이의 없겠지?”
근위대 모두가 이의가 있었지만 그 이의 있음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클로드가 눈을 부라리자 기사가 “예, 각하”라고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왕궁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클로드는 분주해졌다. 클로드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리무진을 타고 있는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줄리안이 언제 잡혀갔는가, 어떤 혐의인가, 그 혐의의 근거는 무엇인가, 상부는 어디까지 이 일을 알고 있는가, 일리드 가문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현재 줄리안의 상태는 어떤가. 이런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모두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일리드 시종님, 무사하다고 합니다.”
옆에 앉아 전화를 하고 있던 제이미가 통화구를 막더니 다른 쪽과 통화 중이던 클로드에게 말했다. 클로드가 뚝, 전화를 끊었다.
“무사하다는 게 어느 수준인 거냐? 목숨만 붙어 있다는 거야, 사지는 붙어 있다는 거야, 아니면.”
클로드가 빠른 속도로 물었다. 그 다급한 어조에 제이미가 진정하라는 듯 클로드의 팔을 두드렸다.
“여긴 전장이 아닙니다, 각하. 의사 요청이 없었다는 걸로 보건대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클로드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가 고갯짓을 하자 제이미는 다시 통화를 이어나갔다. 클로드는 자신이 멋대로 끊은 전화를 걸기 위해서 휴대전화를 열었다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에 다시 닫았다.
다 죽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줄리안이 끌려갔는데 자신이 아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현실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시발, 이런 기분이라니.
클로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떨리고 있지 않았다. 멀쩡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 안쪽의 근육이 떨리고 있었다. 피가 뜨거웠다. 혈관이 수축했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표면이 따끔거렸다. 뭔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그저 느낄 수만 있는 것이.
줄리안, 줄리안, 줄리안.
클로드는 줄리안을 불렀다. 마음으로 부른다고 해서 그가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마법사지 초능력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클로드는 그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답답해서 주문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엿 같게도, 클로드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것은 줄리안의 기분이었다. 그것이 그의 안위보다, 그의 상황보다 그 어떤 것들보다 걱정스러웠다. 아니, 다른 것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다. 언제나 인생의 결정권을 쥐는 쪽은 심장이었다. 치열하든 치열하지 않든 목표한 깃발을 먼저 낚아채는 쪽은 심장이었다.
줄리안이 구속되었다.
그 순간 심장은 모든 것을 결정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어디까지 감수할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그는 줄리안을 구해낼 것이다. 줄리안이 첩자든 첩자가 아니든, 일단 구속된 시점에서 그 점이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클로드는 배신당하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배신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군수품을 빼돌려 술을 사 마신 병사를 죽였었다. 다들 미쳤다는 눈으로 봤지만 클로드는 개의치 않았었다.
병사는 자신을 배신했다.
전장에서 배신은 죽음을 의미한다.
클로드는 신념을 관철했을 뿐이다. 날 배신하려면 목숨을 거는 게 좋아. 클로드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무의식적으로 모두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작든 크든 배신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는 배신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줄리안을 상대로도 마찬가지였다. 줄리안이 그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배신당하지 않는 것이다.
줄리안, 내게 말해봐. 무엇을 할 셈이었어?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네 편에 서겠다.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면 나는 몇 십 번이고 너와 싸우겠다. 그러나 너와 싸우는 사람은 나 하나뿐, 그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
클로드도 남들이 자신을 비웃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 맛본 섹스의 맛에 빠졌다든가 사이코라든가 다들 지껄이고 싶은 대로 지껄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사이코가 되는 것도, 섹스의 맛에 빠져 애인에게 목숨까지 쥐여주는 것도 클로드만의 자유이듯이.
줄리안, 등을 돌리려고 했어?
그렇다면 나는 그 등을 끌어안겠다. 너는 나를 배신하지 못해. 내가 배신당하지 않을 테니까.
“각하, 일리드 가문이 입궁했다고 합니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참모 한 명이 전화를 끊으며 클로드에게 말했다. 클로드가 눈을 들었다.
“가문 중 누구? 재무장관?”
줄리안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의 가족들과 긴밀히 연계할 필요가 있다. 가능하면 줄리안의 부친이자 요직에 앉아 있는 크리스토퍼 일리드가 좋을 것이다. 클로드의 질문에 참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무장관도 왔다고 합니다.”
“재무장관‘도’?”
“부모님과 두 형, 그리고 일리드 백작 가문의 일원이 모두 입궁했습니다. 다들 표정이 매우 험악한 것이 왕궁에 폭탄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분위기라고 합니다.”
“형수들까지 왔다고?”
클로드가 아는 궁정 사교계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부부의 헌신이라는 게 땅바닥에 떨어져 뭉개진 바나나만도 못해 보이는 세계였는데.
“예.”
“구하기 위해서가 확실한가?”
의외로 가족이 구성원 하나를 잘라내는 일은 흔치 않게 일어난다. 줄리안이 일리드 가문에서 제외된 것인가? 클로드가 묻자 참모가 대답했다.
“일리드 가문은 상당히 사이가 좋은 가문입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들도 그렇습니다. 이미 가문의 변호사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을 때 그 옆에 있던 참모도 전화를 끊었다. 그가 클로드에게 시선을 보냈다.
“각하, 줄리안 일리드가 반역죄로 체포된 것은 밀고 때문이라고 합니다.”
“밀고자는?”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밀고에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다고 판단된 것은 밀고자가 일리드 시종과 상당히 가깝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클로드가 옆에 앉은 제이미에게 시선을 주었다.
“알아보고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상당히 가깝다?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백작 가문의 아들을 고작 그 정도 근거로 구속했다고? 그게 가능한가?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배후를 염두에 둔 움직임인가? 왕실부도 아니고 궁내부 소속의 시종이니 왕의 허가가 있었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예민하고 소심하고 팔랑귀이긴 해도 정치를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다. 아무 계산도 없이 첩자라는 말 한 마디에 백작 가문의 아들을 구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뭐가 있었을까? 어쩌면 줄리안의 아버지인 크리스토퍼 일리드나 일리드 가문 전체를 겨눈 한 수였을 수도 있다.
아니, 반대일 수도 있지. 줄리안이 그저 잘못된 곳에 서 있었을 수도 있다. 클로드의 눈동자가 뱀처럼 스륵, 움직였다. 에드워드는 첩자를 잡아내는 일에 날카롭게 굴었다. 줄리안이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은 아닐까? 아니면.
머릿속에 몇 가지 가능성이 후루룩 스쳐 지나갔다. 줄리안이 첩자일지도 모르는데도 클로드는 내내 줄리안이 첩자가 아닌데 이런 일에 휘말렸을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인간의 어리석음인가. 클로드는 도무지 줄리안이 첩자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첩자가 어떻게 자신과 섹스를 하고 연애를 하겠는가. 클로드도 눈치가 있었다. 줄리안이 양다리를 걸쳤을 수는 있어도 그를 아예 좋아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었다. 줄리안은 처음이었다. 그는 잘 느꼈고 섹스 때마다 울고 애원하고 클로드를 밀어내길 반복했다. 그런 남자가 섹스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줄리안은 첩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금붕어 똥.”
클로드가 부르자 제이미가 “예, 각하”라고 대답하며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레플래스가 줄리안과 무엇을 했는지 캐낼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제이미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하다면 가능하겠습니다만 이미 뒤에서 근위대가 쫓아오고 있는 와중에 5분, 10분 정도 따돌려서 캐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여간 미친놈이 아니던데요.”
루시드가 정답을 외치던 꼴을 떠올린 클로드는 칫, 혀를 찼다.
결국 미친놈도 맞으면 불게 되어 있다. 하지만 미친놈들은 통각이 좀 둔한 듯 한두 대 때려서는 어림도 없었다.
루시드에게서 미리 캐냈어야 했는데 시간이 없었다. 까딱 잘못하면 루시드 레플래스도 근위대에게 뺏길 뻔했던 차였다. 만약 루시드 레플래스가 근위대의 손아귀에 들어간 뒤였다면 줄리안을 구하기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떠올렸다. 첩자인지 아닌지 모를, 아니, 천사인지 사람인지도 모를 그의 줄리안이었다. 그렇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것이었다.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클로드가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냈을 때 자동차는 왕궁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근위대장 로드 블릭센은 아침에 줄리안 일리드를 체포하는 순간부터 생각했었다.
오늘은 재수가 더럽게 없겠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장을 들고 체포하러 갔을 때 줄리안 일리드는 멍한 얼굴로 아침을 먹던 중이었다. 그가 ‘국가 반역죄 혐의로 체포한다’고 말했을 때 줄리안은 너무 놀라 먹던 수프를 로드의 얼굴에 뱉었다. 시발. 로드는 속으로 욕하며 줄리안의 팔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먹던 수프를 얼굴에 뒤집어썼는데 기분이 좋았겠는가. 그사이 살짝 팔을 돌릴 때 힘이 가해졌는지 줄리안이 아야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같이 밥을 먹고 있던 크리스토퍼 일리드 재무장관이 도끼눈을 떴다.
‘왜 애를 괴롭힙니까? 아프게 하지 마시오! 아직 혐의일 뿐이잖습니까!’
그 아드님이 제 얼굴에 수프를 토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일언반구도 없으십니까. 로드는 불평하려다 그만두었다. 근위대 기사가 딱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손수건이나 휴지를 꺼내진 않았다.
‘근거가 뭡니까?’
하필 일리드 가문의 한 달에 한 번 있는 아침 식사가 오늘일 필요가 무엇이었는가. 줄리안 일리드 한 명만 있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혼자 있기는 개뿔이, 두 형과 두 형수까지 같이 있었다. 재무청에서 일하는 벤자민 일리드가 날카롭게 물었다.
‘줄스, 아무 말도 하지 마.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해. 그리고 누구도 널 때리거나 할 수 없다는 건 알지?’
큰형 윌리엄 일리드의 부인인 재클린이 옆에서 속삭였다. 그녀는 변호사였다.
‘알아요.’
‘마법은 쓰면 안 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우리가 곧 갈 거니까.’
‘맞아요, 줄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가져갈게요. 재수 없게 왜 아침 식사 때 쳐들어오고.’
둘째 형수 드류가 말했다. 가정주부인 그녀는 요리가 특기였다. 줄리안은 새둥지처럼 엉망인 머리 스타일과 늘어진 운동복 차림의 자신을 의식하고 ‘저기 좀 씻고 가면 안 되겠죠?’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로드가 수프를 뒤집어쓴 더러운 얼굴로 ‘저도 못 씻고 가야 하는데 그게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줄리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아, 저기 전화 한 통화만’ 하고 중얼거렸다.
‘무슨 전화?’
물어본 사람은 근위대가 아니라 작은형 벤자민 일리드였다.
‘응? 아니, 그냥.’
‘누구한테 걸게? 식구들 여기 다 있잖아.’
‘아니, 뭐. ……아냐, 그냥 갈게.’
그리고 로드는 줄리안 일리드를 연행해 왔다. 차 안에서 줄리안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저기, 현실감이 안 나서 그러는데, 제가 진짜 국가 반역죄로 연행되는 겁니까?’
‘그렇다.’
로드의 반말에 줄리안이 ‘이젠 좀 실감이 나네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들켰다는 얼굴이 아니라 갑자기 어딘가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로드는 그 얼굴을 보며 아침에 자신을 불렀던 왕의 명령을 떠올렸다.
‘줄리안 일리드를 잡아오되 해는 끼치지 마. 그는 무죄야.’
‘무죄인데 잡아오는 겁니까?’
‘원래 물고기를 잡으려면 미끼를 풀어야 하거든. 첩자는 분명히 있어.’
왕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 코웃음을 쳤다.
‘요즘 좀 서운한 일도 있었고 말이지. 언제는 내가 좋다더니 그렇게 금세 넘어갈 줄이야. 그 녀석도 마찬가지지. 언제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더니 고새 연애에 빠져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형제는 보는 둥 마는 둥, 둘 다 눈꼴시어서 원.’
‘국왕 전하……?’
‘난 지엄한 국왕이라고. 삐지면 무섭다는 걸 보여주겠어.’
이 말을 들은 순간, 일이 꼬이겠다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흔한 작전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안 일리드를 체포하러 가서 일리드 가문 전체와 마주하는 순간 올해의 가장 재수 없는 날 1위에 빛나는 하루가 되리라는 예감이 콱 왔었다.
그리고 현재.
“아직 면회는 안 되십니다.”
“제가 변호사라고요, 이봐요, 변호사 모릅니까?”
회색 스리피스 정장을 입은 재클린 일리드가 쾅, 책상을 내리쳤다. 판사 출신인 그녀의 얼굴에 시베리아 북풍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는 남편인 윌리엄이 양손을 옹골지게 쥐고 있었다. 잘한다, 내 부인. 훌륭하다, 내 와이프. 이런 얼굴이었다.
“이건 그냥 죄가 아닙니다. 국가 반역죄라고요.”
윌리엄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에 선 드류 일리드도 ‘잘한다, 우리 형님!’이라는 얼굴이었다. 잘한다, 우리 형수. 잘한다, 내 며느리! 일리드 가문의 지지를 등에 업은 재클린의 기세는 가히 토네이도급이었다.
“국가 반역죄는 변호사 못 쓴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법전 가져와서 펼쳐보세요!”
물론 그딴 법은 없었다. 그러나 왕은 절대로 줄리안의 면회를 허가할 수 없다고 못 박았었다. 그러나 재클린 일리드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왕이 시켰다고?
“일리드 판사님, 아니, 변호사님, 이렇게 난동 피우시지 마시고요”
“난동? 지금 내가 난동을 피웠다고 했어요? 왜 줄리안을 면회하지 못하냐고요. 내가 줄리안의 변호사인데! 모든 국민은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지금 근위대가 하시는 행동이야말로 인권 탄압이에요.”
“아, 아빠에게 전화해야겠다! 그지, 자기야?”
드류 일리드가 벤자민을 보며 물었다. 드류 일리드로 말할 것 같으면 언론사 재벌의 고명딸로 왕립 아카데미에서 벤자민을 보고 한눈에 반해 3년이나 쫓아다닌 끝에 사귄 여자였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여인은 궁정 사교계 여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조금만 이따가.”
벤자민이 드류의 얼굴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아빠, 인권 탄압이라는 말 완전 좋아하는데. 신문이 백만 부씩 더 팔린댔어!”
드류 일리드, 별명은 백치미인. 왕립 아카데미에서도 내내 낙제만 해대서 나중에 벤자민이 아예 품에 끼고 가르쳤던 아가씨였다. 하나밖에 모르는 이 여자는 남편이 넌 궁중 사교계 파티에 가지 마, 라고 하자 한 번도 가지 않은 의지의 귀부인이 되었다.
“이따 나랑 같이 아예 찾아뵙자. 장인어른께는 죄송하지만 줄스를 위한 일이니까 의논 드려보자, 응?”
아, 시발. 언론이 나서면 진짜 안 되는데.
로드는 잠시 망설였다. 그냥 장관에게라도 이야기해서 며칠만 모르는 척해달라고 해볼까 고민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비밀 작전이었고 이게 미끼라는 걸 알아챈 진짜 첩자가 도망가면 큰일이었다.
“줄스가 추우면 어떡하지? 여기 감옥은 난방 돼요?”
드류 일리드가 말간 얼굴로 떠드는 것이 얼마나 얄미운지 로드는 재클린 일리드가 부르짖고 있는 법전을 가져와 드류 일리드의 입에 쑤셔 넣으면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았다.
“안 됩니다.”
근위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드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어떡해. 그녀는 잠시 체리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전기 매트는 있겠죠?”
“없습니다.”
“어머, 웬일이야. 우리 도련님이 얼마나 귀하게 컸는데요. 당장 사다줘야겠다.”
“안 됩니다.”
“왜요? 사람을 얼려 죽일 셈이에요?!”
드류가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해맑던 얼굴이 갑자기 미친 것처럼 날카로워지자 근위기사는 당황해서 조그맣게 우물거렸다.
“가, 감옥은 전기 코드를 꽂을 곳이 없…….”
“그럼 코트는 넣어줘도 되겠죠?!”
갑자기 서슬이 퍼런 얼굴로 고함을 치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드류가 자신이 입고 있던 밍크코트를 벗어 건넸다. 얼굴이 얼마나 도도한지 기사는 엉겁결에 받아주고 말았다.
“우리 도련님께 주세요. 춥지 않게.”
“…….”
“우리 도련님, 지금은 시종이나 하고 계시지만 마법사예요. 마법사들은 늘 마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몸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마법학에 대한 기본 이론은 배우셨을 거 아니에요?”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드류에게 시선을 주었다. 드류는 이해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특히 약했던 것이 바로 마법학 기본 이론 편으로 그녀는 도저히 이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벤자민은 그녀에게 이론서를 통째로 외우게 해서 겨우 패스시켰는데 마치 자기가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배, 우기는 했습니다만.”
“우리 도련님, 폐렴이라도 걸리면 그쪽에서 책임지나요?”
첩자인데 폐렴 좀 걸려도 뭐가 어떤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텐데. 기사는 억울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그 코트를 받아 들었다. 그 순간, 다시 책상이 쾅 하고 울렸다.
“면회, 해야겠어요.”
“안 됩니다.”
“왜 안 되냐고요. 말을 해봐요. 국가 반역죄고 나발이고, 내가 변호사라고요.”
“지금은 안 되지만 곧 면회가 가능해질 겁니다, 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일단 댁으로 돌아가셔서 기다리십시오. 여기서 이렇게 난동을 피우신다고 일이 되는 게 아닙.”
콰앙, 소리가 났다. 앗, 깜짝이야! 드류가 작게 비명을 질렀을 때 엄청난 소리를 내며 열린 문이 흔들흔들하다가 앞으로 툭 떨어졌다. 한 번 더 쾅, 소리가 났다. 다들 부서진 문짝을 본 다음 범인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범인은 상당히 장신이었고 단정하게 손질된 금발 커트머리를 하고 있었다. 군인의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 달린 엄청난 훈장들이 눈길을 끌었다.
아리스트 대공.
줄리안의 가족들의 머릿속에 똑같은 이름이 스쳤다. 그리고 여러 생각들이 중구난방으로 피어올랐다. 가족들도 귀가 있으니 줄리안이 아리스트 대공에게 강간당했다는 소문은 익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소문이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최근 줄리안의 기분은 더 좋았다. 구름을 밟는 것처럼 경쾌해 보였다. 어디를 봐도 성범죄 피해자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또 헛소문이군. 모든 가족이 그렇게 생각했다. 줄리안은 은근 헛소문에 잘 휘말렸다. 워낙 상전들이 총애하는 시종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소문들이 다 무지몽매한 것들의 헛소리라는 걸 알지만, 그와는 별도로 그런 소문이 돌도록 처신한 아리스트 대공에게 감정이 좋지는 않았다. 확실히 줄리안을 대하는 대공의 태도는 묘했고 그것이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분명했다. 모두가 그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대공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가볍게 목례했다.
“실례.”
그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일리드 가족들 사이를 걸어오더니 재클린 일리드를 슬쩍 제치고는 멍하게 정신을 놓은 채 앉아 있는 근위대장을 내려다보았다.
“경례는?”
“예?”
로드는 정신이 없었다. 일리드 가족들에게 넋이라도 있고 없고 영혼까지 탈탈 털렸는데 이제는 대공이 나타났다. 그가 냉막한 얼굴로 말했다.
“경례.”
사실 로드 블릭센은 저혈압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늘 한두 시간 정도는 침대에 누워서 잠이 깨기를 기다려야만 하루가 순조로운 남자였다. 그런 그가 비몽사몽한 채로 궁에 불려와 비밀 작전을 듣고 줄리안 일리드를 체포하고 일리드 가문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정신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었다.
“아, 예, 예. 전하, 죄송합니다. 오늘 일이 너무 많―.”
로드가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으며 일어났을 때 갑자기 대공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날 똑바로 봐.”
멱살을 잡혔는데 왜 목이 졸리는 걸까. 로드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누구지?”
“대공 전, 아, 아니, 각하시죠.”
“시발, 이것들이 단체로 쥐약을 먹었나? 근위대는 장군한테 경례를 하면 손목이 부러져?”
“예?”
“근위대라는 것들은 왜 하나같이 경례를 안 하고 처지랄들이냐고?!”
목이 더 졸렸다. 켁, 켁. 눈앞이 새카맣게 변하려 했다. 로드는 급하게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대공과 팔 길이 차이가 많이 나서 대공의 몸에 닿지가 않았다. 폐에 공기가 거의 남지 않았을 때 갑자기 로드는 내팽개쳐졌다. 쿠당탕 소리가 멀리 들렸다. 쿨럭, 기침을 하는 건지 토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로드가 구석에 처박혀 있는 사이 클로드는 흘끔 줄리안의 가족들을 보았다.
아, 첫인상이 별로였겠는데.
지금이라도 이미지 관리를 해야 되는 게 아닐까 싶어진 그는 제이미에게 말했다.
“금붕, 아니, 블레서 중령.”
제이미 블레서는 이 급박한 와중에 애인 가족들에게 잘 보이겠다고 내숭을 떨기 시작한 상관을 흰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각하.”
“근위대장님 모셔와. 내 방에서 얘기하지.”
하, 하. 모셔와? 제이미는 마른 웃음을 내며 구겨져 있는 근위대장을 내려다보았다. 하, 하. 모셔오라니, 얠 어떻게 모셔와? 다 늦은 이미지 관리를 하겠답시고 웃기지도 않게 구는 상관을 흘끔 보고는 “예에, 각하”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근위대장의 팔을 잡아 단숨에 일으켰다. 키가 작고 체구도 왜소한 편인 근위대장이 강제로 일어나면서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숨이 모자란지 얼굴이 새빨갰다.
“각하께서 부르시네요. 갑시다.”
“왜, 대체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음 하고 제이미는 잠시 생각 끝에 대답해주었다.
“업무상 상담입니다. 그리고 경례는 하셨어야죠.”
사실 제이미도 근위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좀 덜한데 근위병들은 얼굴에 ‘나 근위기사 될 몸’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봤자 제이미가 보기엔 다 같은 병사인데 경비병을 무시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고 근위기사들은 한 수 더 떴다. 주먹을 부르는 몰골들이었다. 자신이 때릴 수야 없겠지만 상관이 패겠다면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거, 거짓말 마시오.”
로드가 눈을 부라렸다. 남친 가족들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재빨리 근위대장 집무실을 나가는 상관의 등을 보던 제이미가 픽 웃었다. 그는 로드를 질질 끌고 상관의 뒤를 따르며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치가 없으시네요, 근위대장님.”
“…….”
“그러니까 이런 모습이 되시죠. 딱하십니다.”
“난 자네보다 계급이 높네, 지금 나한테 너무 무례하다고 생―.”
“그러니까 이렇게 정중히 모시고 있잖습니까.”
네가 계급이 높았으니까 내가 이 정도로 대해주는 거지, 계급만 낮았어봐. 넌 한 주먹감이야.
제이미의 숨겨진 말을 알아들은 로드가 희게 질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 이런 천한 놈들. 로드는 속으로 분개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대공도 저 천한 놈들 사이에서 자랐고 왕족으로서의 예법은 교육받지 못했다. 그러니 다 똑같이 천할 수밖에!
귀족인 로드 블릭센은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곧 대공의 방으로 들어온 그는 다시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는 분노하며 제이미에게 고함을 치려고 했지만 그의 앞에는 클로드가 서 있었다.
“소장.”
근위대장인 로드 블릭센의 계급은 소장. 원수인 클로드의 계급은 물론 대장이었다.
“예, 각하.”
어쩔 수 없이 로드는 일어나 절도 있게 경례했다. 클로드는 로드의 목에 난 자국에 흘낏 시선을 준 다음에 말을 이었다.
“첩자 색출 중이라고 들었는데.”
“예, 그렇습니다!”
“그거 나도 하고 있었거든. 형이 시켜서.”
클로드에게 형이란 단 한 명밖에 없다. 로드는 클로드의 형을 떠올렸다. 분명 왕은 새벽에 싱글거리면서 자신에게 작전을 명했는데 대공에게 시킬 틈이 어디 있었을까. 로드가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을 눈치챘는지 클로드가 픽 웃었다.
“그러니까 이쪽에서 루시드 레플래스를 잡았지. 혐의가 있었으니까 쳐들어가서 잡은 거 아니겠어? 아니면, 내가 무슨 원한을 졌다고 놈의 집에 가겠냐고.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설마 치정 관계라고는 상상도 못 한 로드가 고건 고렇네요, 라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클로드가 다정하게 로드의 어깨를 감쌌다.
“형과 내 사이가 좀 그래. 자네도 알겠지만 우린 피가 안 통하는 형제잖아.”
“그, 그러시죠.”
“실제로 만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그래서 둘이 서먹서먹해. 또 우리 둘 사이에는 이런저런 상황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나는 형에게 좀 잘 보이고 싶달까. 내 충성을 형에게 증명해주고 싶달까. 뭐 그런 마음이 좀 있거든. 이해하지?”
제이미와 참모들이 속으로 픽 실소했다. 그들의 상관은 참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개소리를 지껄이는지 원.
그러나 로드는 알아들었는지 그러시겠습니다, 라는 얼굴로 클로드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일은 내가 해야겠어. 왜냐면 우리 형을 엿 먹이려는 놈들을 깨부수는 건 내 역할이 돼야 하거든. 이해했지?”
조곤조곤한 어조로 클로드가 말했다. 인간적인 고뇌도 보이고 젊은 남자의 치기도 보이는 내용이었다. 로드는 조금 마음을 놓고 가만가만 클로드를 이해시키려 했다.
“그, 그래도 이건 왕명이라서요. 각하께서도 이해해주셔야.”
“지랄한다. 내가 널 왜 이해해?”
“각하, 이것은.”
“이해는 너만 하는 거야.”
그 말에 로드 블릭센은 자신의 어깨를 안고 있는 왕족이 사이코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사이코, 강간범, 그리고―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잡힌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파왔다.
“블릭센?”
클로드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불렀다.
“각, 하, 어깨, 가, 어깨가, 아아, 아…….”
“죽어도 안 되겠어?”
“각하, 그, 건 저희의 임무, 와, 왕명이라서, 각하, 제발, 윽.”
후. 클로드가 한숨을 쉬었다.
“야.”
으, 으윽. 로드가 너무 아픈지 이제 대답도 못 하고 끙끙거렸다. 클로드가 킬킬거렸다. 로드는 어깨보다도 그 웃음이 더 무서웠다. 정말 미친놈이 분명했다. 로드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통을 이겨냈다.
“그럼 내가 취조를 할게. 줄리안 일리드가 첩자인지 아닌지만 알아내면 되잖아, 그지?”
윽, 윽, 아윽―.
“내가 고문은 좀 하거든. 산 채로 가죽을 다 벗겨내서라도 자백을 받아낼 테니까, 내가 한다?”
으으윽―, 아악―.
“로드 블릭센, 대답하는 게 좋아. 이 어깨를 안 부러뜨리기 위해 힘을 주고 있는데 슬슬 힘이 빠지려고 그래.”
“하, 하십시오, 하십시오!”
로드가 결국 비명을 질렀고 다음 순간 다시 바닥을 굴러야 했다. 클로드는 바닥에 구르는 로드 따위에게는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가자.”
클로드의 말에 그의 참모들이 줄줄이 뒤를 따라 나가자 호화로운 방에는 로드만이 남았다. 그는 어깨를 움켜쥐고 끙끙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엄청나게 아픈데 뼈가 부러지지 않았다. 그게 더 억울했다. 뼈가 부러졌어도 이렇게 아프진 않았을 텐데. 심지어는 어깨가 붓지도 않았다. 아마 멍도 안 들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 눈알이 빠지게 뇌가 뭉개지듯이 아팠다.
‘내가 고문은 좀 하거든.’
그제야 그 말이 누구를 두고 한 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크으윽. 로드는 이를 갈았다. 시발, 이건 언제쯤 안 아파지는 거야……? 그가 당장 알고 싶은 유일한 한 가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줄리안은 그때 감옥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춥네. 그는 근위기사가 갖다준 형수의 모피 코트를 입고 있었다. 형수 드류는 언론 재벌의 무남독녀인데도 백치미가 철철 넘쳤고 그러면서도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인조 모피만을 입었다. 그래도 눈으로 보기에는 모피와 똑같았다.
아, 모피란 따뜻하구나.
줄리안은 코트를 여민 채 생각에 빠졌다.
내 사이트가 걸렸나?
줄리안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게 국가 반역까지 갈 만한 문제인가? 줄리안은 내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스캔들이 되긴 할 것 같았다. 엄청난 치정 관계가 펼쳐져 있으니까. 무려 3년치.
그러나 그게 정말 반역? 반역이라고? 사실 그 치정 관계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줄리안처럼 3년치를 연대순으로 갖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겠지만 다들 아는 부분과 몇몇 사람만 아는 부분이 섞여 있을 뿐, 아무도 모르는 일은 줄리안도 알지 못했다.
내가 뭔가 알아서는 안 될 일을 알았나?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으니 마음이 답답했다. 국가 반역죄? 그렇게 대단한 정보를 아는 시종이 어디 있어. 아니, 뭐 아는 게 몇 개 있긴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시종으로 살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 중 하나고, 그런 걸 안다고 시종을 다 죽일 수는 없다. 천일야화를 찍을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을 텐데.
정보를 아는 것만으로는 죽지 않는다. 그것을 발설하지만 않는다면.
……역시 사이트인가? 아니면 교환 일기?
그 외에는 없는데. 줄리안은 3년간 자신의 행적을 꼼꼼하게 되새겨보았지만 역시 짚이는 것은 단둘뿐이었다. 아, 시발, 모르겠다.
줄리안은 모피 코트에 얼굴을 묻었다. 향수 냄새가 났다. 꽃냄새인지 뭔지 모를 달콤한 냄새였다. 아아, 진짜 드류는 대단하구나. 벤자민의 취향에 정확히 부합할 향수였다. 하긴, 드류는 벤자민 스토커로 이름이 높았다. 줄리안이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때도 마주치는 선배들마다 벤자민이 드류와 아직도 사귀는지 물어보고는 했었다. 헤어졌지? 둘이 이제 헤어졌지? 다들 그렇게 물어보고는 했다.
벤자민은 학교의 아이돌이었고 드류는 낙제생이었다. 둘은 어울리지 않았다. 최소한 남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그들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벤자민은 몸이 약하고 예민했다. 드류는 건강하고 낙천적이었다. 드류가 낙제할 때마다 벤자민은 그녀를 끼고서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나 벤자민이 아프거나 신경질적이 되면 드류가 반드시 그의 곁에 있었다. 드류는 늘 벤자민의 편이었다. 형인 윌리엄보다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막내인 줄리안만큼 손이 가지도 않아서 벤자민은 부모님의 시야에서 가장 멀리 있는 아들이었다. 드류는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그를 세상 모두와도 바꾸지 않을 사람이었다. 벤자민은 늘 강한 척했지만 사실 심리적으로 더 기대고 있는 쪽은 그였고, 독점욕도 대단했다. 지금도 드류가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 절대 궁정 사교계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는 벤자민이었다.
그에 비해 윌리엄과 재클린은 보통의 귀족 집안 부부였다. 둘은 적당히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서로에게는 연애 감정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둘은 가장 모범적인 귀족 커플이었다. 언제나 서로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완벽한 팀을 이루고 있었다.
줄리안은 자신은 어느 쪽이 될까 생각했었다. 궁정 사교계에서는 윌리엄과 재클린 같은 커플을 선호했다. 벤자민은 그 특유의 매력으로 궁정 사교계에서 무시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손해 보는 면은 분명히 있었다. 그는 드류 외의 누구와도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궁정 사교계에서 섹스는 쾌락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범들의 관계다. 그들은 서로 공범이 되어간다. 밀접해진다. 그러나 벤자민은 그 부분에 있어 선을 그었기 때문에 중심부까지 파고들지 못했다.
줄리안은 어느 밤 응접실을 지나다 형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드류를 사교계에 넣지 않는 건 좋아. 하지만 넌 사교계의 일원이 돼야 해.’
‘…….’
‘아니면 넌 영원히 요직에 오를 수 없어, 벤.’
‘난 어차피 백작이 될 것도 아니고 요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백작가의 차남으로서 해야 할 만큼 하고 있고 그 이상은 해줄 마음 없어. 귀족답지 못하다고, 고상하지 못하다고 해도 좋아. 난 천박하게 내 마누라나 끌어안고 살 테니까 관심 꺼.’
‘다른 사람과 자는 거, 별거 아니야. 많이 자라는 것도 아니야. 남들이 널 배척하지 않을 정도로만 하라는 거야. 1년에 한두 번이면 돼.’
‘드류가 울 거야.’
‘벤자민.’
‘난 드류가 우는 게 정말 싫어.’
벤자민은 술을 거의 마시지 못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윌리엄이었고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심했던 벤자민은 술잔을 앞에 두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벤자민은 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드류가 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형. 다른 놈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떠들든 그건 진짜 아무래도 좋아. 그런데 드류가 울면.’
‘…….’
‘온몸이 저려.’
‘…….’
‘심지어 걘 엄청나게 자주 운다고.’
‘벤, 술 한 모금에 맛이 간 거야? 스스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벤? 벤자민?’
‘드류에 관한 이야기지. 늘 그렇듯이.’
거기까지 듣고 줄리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구나. 그때 줄리안은 벤자민이 정말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내 책에서 보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조금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줄리안은 자신이 벤자민보다는 윌리엄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되어도 윌리엄과 재클린처럼 살게 되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자신은 벤자민 쪽이었던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자꾸 클로드의 생각이 나는 게 그랬다.
클로드에게 말해줄 걸 그랬다.
그는 아직도 화를 내고 있을까 생각하자 줄리안은 속상해졌다. 국가 반역죄라는 죄를 지어본 적도 없고 지을 생각을 해본 적도 없어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두려움보다는 클로드가 자꾸 걱정되었다. 그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그가 밀어내던 게 아직도 생생했다.
전화라도 한 통화 하고 싶었는데.
통화를 했다면, 그럼 자신은 뭐라고 말을 하게 되었을까. 걱정하지 말라든가, 미안하다든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든가.
보고 싶다든가……?
줄리안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고 싶었다. 고작 며칠 못 보았을 뿐인데도 클로드가 몹시 보고 싶었다. 그의 짓궂은 언사도, 자신이 아픈 것 같으면 금세 시무룩해지는 얼굴도 모두 그리웠다. 눈부신 것을 보는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사실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보고 싶지만 허락되지 않는다면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는 것이 어렵다면 그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저벅, 저벅.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줄리안이 앉아 있는 감옥 앞에서 멈췄다.
“줄리안 일리드, 나와.”
감옥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왕궁의 경비병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훨씬 무서워 보였고 표정도 딱딱했다. 줄리안은 “수고하십니다”라고 말하며 감옥에서 나왔다.
긴 복도를 지나는 내내 줄리안은 낯익은 경비병과 마주치지 못했다. 7년이나 궁에서 일했는데 낯익은 경비병을 한 명도 못 만난다는 것은 이쪽의 경비병들은 왕궁과는 전혀 다른 부서라는 이야기였다.
“들어가.”
어느 방 앞에서 경비병이 문을 열고 고갯짓을 했다. 줄리안은 엉겁결에 들어갔다가 어깨를 움츠렸다. 거기에는 중앙에 의자 하나가 있고 구석에 책상과 걸상이 있었다. 중앙에 있는 의자에는 앉은 이를 구속할 수 있는 벨트가 장치되어 있었다.
이거, 이거 설마……?
줄리안은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고문실이야? 내가 지금 고문실에 들어온 거야? 나 고문당하는 거야? 심장이 확 조여들었다. 줄리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의자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앉으면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이쪽에서는 거울로 보이지만 저쪽에서는 창문으로 보일 것이다.
줄리안은 천천히 그쪽으로 걸었다. 잠시 거울을 보던 줄리안이 손을 들어 똑똑똑, 노크했다.
줄리안의 예상대로 그 반대편에서는 고문실 안을 지켜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클로드는 가만히 줄리안을 보고 있었다. 줄리안은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똑똑똑, 똑똑똑, 계속 노크했다.
“저기요.”
똑똑똑, 똑똑똑.
“저기, 죄송한데 전화 한 통화만 하면 안 될까요.”
똑똑똑.
“여기서 못 나가는 거면 전화 한 통화만 할게요. 저기, 여기서 뭘 할지는 모르겠는데.”
줄리안의 얼굴이 좀 흐려졌다. 그는 멍청이가 아니다.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직감했을 것이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얼굴을 쓸어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는 당장에라도 건너편 방에 가서 줄리안을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줄리안을 그 방에서 데리고 나올 구실이 없었다.
“화나게 한 사람이 있어요. 제가 잘못되기 전에 사과해야 됩니다. 저한테 좋지 않은 일을 하실 거라면 제게 전화 한 통화만 하게 해주세요. 꼭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이 있어요.”
클로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줄리안이 전화 통화를 하겠다고 한 상대는 자신이었다. 줄리안은 고문실에 들어와서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화 통화를 할 사람으로 자신을 말하고 있었다.
“각하.”
클로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문관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참모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문실 안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녹화된다. 고문을 하지 않고 데려갈 수는 없다. 고문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결과를 내야 했다. 줄리안이 첩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나온다면 가장 좋다. 만약 줄리안이 첩자라면…….
그때는 줄리안의 존재를 이용해 상대를 부수는 것으로 의견을 몰아가야 할 것이다.
“바늘로 해.”
클로드는 유리창 너머의 줄리안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고문실에 들어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인데, 저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줄리안을 당장 데리고 나올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바라보며 달뜬 슬픔을 느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바늘로 찌르는 곳은 정해져 있다.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고문인데 그것을 저 시종이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왜 바늘을? 참모가 얼굴을 찌푸리자 클로드가 손가락을 들었다. 손톱 근처의 굳은살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외에는 아무 데도 건들지 마. 알았어?”
“각하!”
그게 무슨 고문입니까!
참모가 기가 막혀 그를 바라보았지만 클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면 화면에서는 고문하는 걸로 보일 거야. 그래도 겁은 조금 주도록 해. 루시드 레플래스와 도대체 무슨 지랄을 하고 있었기에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는 들어야겠어.”
심지어 자백받을 정보가 있다고?
참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해도 어려울 부위였다. 바늘로 굳은살을 찌르면 뭐? 한 2∼3센티미터쯤 넣어도 된다는 건가? 명령을 멋대로 호도하고 싶은 마음이 불끈 생겼다. 그러나 정말 그런 짓을 했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각하, 아무리 그래도 거기를 찔러서 어떻게 자백을 받습니까. 손톱 밑까지는 용서해주세요.”
“안 돼.”
“각하, 제가 아무리 경험 많은 고문관이어도 통각이 없는 데를 찔러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도 손톱 밑은 찔러야 따끔이라도 하죠.”
클로드가 칫, 혀를 찼다. 줄리안은 지금 심각한 상황이고 가능한 한 빨리 숨기는 게 뭔지를 들어내긴 해야 했다. 차라리 내가 직접 들어가서 좋은 말로 물을까, 클로드는 잠시 고민했다. 그는 유리 건너편의 줄리안을 바라보다 후,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만나면 감정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지금도 당장 유리 건너의 줄리안을 보면서 심장이 술렁거리고 있지 않은가.
냉정해져야 한다.
줄리안이 서 있는 다리는 소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어딘가에서 물 한 바가지만 쏟아져도 그 다리는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줄리안의 몸은 악어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늪으로 떨어지게 된다.
“여기까지만 넣어.”
클로드는 바늘의 끝 부분을 가리켰다. 바늘의 첨단까지만 넣으라고 하는 팔불출 상관을 보며 참모는 더 이상의 타협을 포기했다. 뾰족한 부분까지만 넣으라고 하는 주제에 마치 연인을 배신하는 양 비장한 표정을 짓는 상관과는 아무런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아오, 더러운 커플들. 다 죽어버려라, 시발 것들.
본인이 유부남인데도 불구하고 참모는 솔로 천국 커플 지옥을 외치며 방을 나왔다. 그리고 옆방인 고문실로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바늘이 들려 있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앉아.”
고문관은 고문실에 들어가자마자 냉기를 풀풀 풍기며 기세를 제압하려 했다. 바늘, 그것도 재봉용 작은 바늘 하나 가지고 자신이 뭘 해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자신이 없었다. 어쨌거나 쓸 수 있는 수단이 한정되어 있으니 심리적으로 파고들 셈이었다.
‘존대해, 시발아.’
그러나 이 기특한 마음을 몰라주는 상관이 단숨에 이를 갈았다. 누가 고문을 하면서 존대를 해요, 진짜 미친 사이코 고문관이 아니면! 참모는 어이가 없었지만.
“앉으세요, 일리드 씨.”
계급이 깡패였다. 시발, 시발. 여보, 내가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 당신 남편이 이렇게 힘들게 일한다고, 엉엉.
줄리안은 잠시 그 참모를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멍한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이 내내 바라보며 전화 한 통화만 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면서 두드리던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 있어요?”
“일리드 씨.”
“거기 있는 거야?!”
줄리안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문을 당한 사람은 이지를 잃는다고 했다. 자신은 지금 이 상태에서, 자신이 아직 세상에 버림받지 않은 사람인 상태에서 이별 인사를 하기 위해 계속 애원했는데 정작 그 사람은 거울 안쪽에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고문하려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줄리안은 거울에 매달렸다. 주먹으로 거울을 쾅쾅 내리치기 시작했다.
“거기 있어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데 당신이 거기에 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이것 봐요, 대공 전하. 야, 클로드 스토메어! 말을 해보라고!”
저 참모의 얼굴은 몇 번이나 봤었다. 줄리안은 왕실 시종이었다. 그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데 있어 틀린 적이 없었다. 클로드가 건너편에 있었다. 자신을 여기에 넣은 게 클로드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자신은 단 한 번도 클로드가 이 일에 개입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네 눈깔은 동태눈이냐? 당장 쟤 떼어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클로드가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참모에게 으르렁거렸다. 참모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여보를 찾았다. 여보, 상관이 날 괴롭혀, 엉엉. 그는 그러면서도 줄리안의 팔을 잡아 조심스럽게 내렸다. 줄리안이 몸을 뒤틀었다.
“이거 놔!”
줄리안이 고함을 질렀다.
“난 저쪽에 할 말이 있어!”
“불행히도, 일리드 씨, 당신의 담당관은 저라서요. 저와 이야기하셔야 합니다. 가시죠.”
줄리안이 몸부림치거나 말거나 참모는 줄리안을 질질 끌었다. 힘으로 되지 않자 줄리안이 핏대를 세우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너 같은 새끼를, 내가 좋아하다니!”
줄리안이 피를 토할 것 같은 처절함으로 고함을 질렀다.
“시발, 내 몸에 있는 네 흔적을 다 지워버리고 싶어! 너 같은 새끼를 내가 좋아하다니! 믿을 수 없어! 너 같은 놈 때문에 내가 마나가 다 바닥날 때까지 마법을 쓰다니! 너 같은 놈과 섹스 따위를 하려고 내가 마나를 다 쓰다 이런 꼴을 당하다니! 미친, 차라리 돼지랑 하겠다! 개새끼! 죽어버려!”
잘한다, 잘해. 더 해라!
참모는 일부러 천천히 줄리안을 끌고 갔다. 줄리안이 이 재수 없는 상관을 계속, 계속 욕해줬으면 좋겠다. 아우, 속이 다 시원했다. 특히 너랑 섹스하느니 돼지랑 하겠다는 부분이 마음에 쏙 들었다.
‘아, 시발…….’
귓가에서 클로드가 아프게 중얼거렸다. 애인을 구하겠답시고 난리를 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애인은 오해를 하고 욕을 퍼붓고 있으니 마음이 아픈 모양이었다. 아우, 쌤통.
참모는 줄리안을 정중하게 의자에 앉혔다. 구속구로 팔을 결박하는 순간에도 줄리안은 거울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있죠?”
“예, 계십니다.”
오해해라, 오해해라!
어차피 곧 끝날 오해이니 할 때만이라도 차지게 해다오! 참모는 정중한 태도로 줄리안의 반대쪽 팔도 벨트로 구속했다. 남이 보면 고문을 하려는 게 아니라 시중이라도 드는 것 같은 태도였다.
“어떻게.”
결박당한 줄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널 얼마나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너를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런 현실이 내게 생길 수가 있어.
줄리안은 눈물이 흐르는 순간 고개를 숙였다. 눈물 따위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아팠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죽어버렸으면 했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발, 야. 애가 울잖아. 살살 못 해?!’
거울의 건너편에서 클로드는 어쩔 줄 모르고 닦달했다. 참모는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줄리안은 어깨를 떨며 울고 있었고 귓가에서 상관은 계속 그를 다그쳤다. 참모는 한숨을 쉬었다.
“첩자도 아니신 분이 뭘 숨기셔서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드십니까.”
“…….”
“숨기시는 게 뭡니까? 레플래스 시종과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
“말씀을 하십시오. 전 고문관 출신입니다. 일리드 시종님 같은 분은 10분도 견디시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그냥 말씀하세요. 저도 진짜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만, 전쟁이 끝났어도 아직은 전시입니다. 점령국들의 반발은 엄청나게 심하고 국내에서도 반 왕정파들이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죠. 저희는 국가 보안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국가를 더 강하게,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저희는 무엇이든 합니다.”
참모는 줄리안이 첩자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것을 확신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줄리안이 첩자였다면 이 순간 다른 말을 해야 했다. 왕족인 대공을 저주하든지 아니면 모르는 체하든지 했어야 했다. 줄리안이 첩자라면 배신한 쪽은 그이니 클로드에게 이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할 리 없었다. 그러니 줄리안은 희생양이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줄리안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배신감이 상당한 듯 그의 고동색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참모는 한숨을 쉬었다.
“어리석은 판단이십니다.”
“저 남자에게는, 그리고 저 남자의 부하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줄리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뺨에는 붉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고 숨결은 거칠었다. 평소 담담하고 속내를 알 수 없어 보이던 남자가 온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좀 섹시하긴 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 각하가 이렇게 미쳤나. 참모는 잠시 혀를 차다가 줄리안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는 줄리안의 눈 위로 바늘을 드리웠다. 바늘 끝이 줄리안의 안구 위에서 눈동자를 겨누고 있었다.
“이건 그냥 바늘이지요.”
줄리안이 두려운 눈으로 바늘을 보고 있었다. 눈이 미친 듯이 깜빡이는 것을 보며 참모는 쓴웃음을 입에 걸었다.
“이게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확인해볼까요, 일리드 시종님.”
‘내 아들에게서 당장 손 떼지 못해――!’
갑자기 귓가에서 큰 소리가 났다. 참모는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가늘게 좁혔다.
진짜 개판 되는군.
참모는 줄리안의 눈으로 바늘을 가까이 했다. 줄리안의 눈이 고장 난 것처럼 깜빡이는 것을 보며 그는 적당한 곳에서 바늘을 멈추었다. 잘못하면 눈꺼풀에 닿아서 상처가 날 것 같았다.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의 상관은 정확히 손톱 근처의 굳은살과 손톱 아래에만 바늘 사용을 허가했다. 깊이까지 정확히 지정해주었다.
“눈 안에 바늘을 넣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줄리안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참모를 올려다보았다. 괴물을 보는 시선이었다. 참모에게는 익숙한 눈이었다. 그런데도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줄리안이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이 아닌 자를 상대로 이런 언사를 뱉어야 하는 것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내 아들에게서 손 떼, 그 애한테서 손 떼란 말이다, 개자식아―!’
나이 든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내 아들한테 손대면 죽여버리겠다, 반드시 네놈들 다 죽여버리겠어! 그 비명을 들으며 참모는 줄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줄리안의 눈에 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클로드가 자신에게 이런 짓을 시켰다는 걸 믿을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참모는 말없이 그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계속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참모가 흘끔 거울을 돌아보자 귓가에 명령이 떨어졌다.
‘시간이 없어. 계속해.’
애인을 구하려 했을 뿐인데 애인과 애인 가족들에게 모두 죽일 놈이 된 상관의 목소리가 우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