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_02 야만의 대지 (11/13)

외전_02 야만의 대지

“줄리안, 각하께서 기침하셨다고 합니다.” 

마틴의 말에 줄리안은 먼 곳에 있는 아이들에게 한 번 더 손을 흔들어주고는 호텔로 돌아왔다. 찰칵, 갑자기 셔터 소리가 들려 줄리안과 마틴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자신의 셀카를 찍고 있었다.

“놀랐네요.”

마틴이 개구지게 웃으며 가슴을 쓸어내릴 때 줄리안은 남자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남자가 흘끔 줄리안을 보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마틴이 왜 그러냐며 줄리안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저 사람, 셀카 아니에요!”

줄리안이 그렇게 소리치자 마틴이 단숨에 튀어나갔다. 파파라치가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지만 경호를 맡고 있는 마틴과는 처음부터 속도가 달랐다. 마틴이 순식간에 그의 뒷덜미를 잡아 휴대전화를 빼앗았다. 그리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확인하며 지운 뒤 지나가는 헌병에게 남자를 맡기고 돌아왔다.

마틴은 험상궂게 얼굴을 구기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는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걸까요?”

이 호텔은 군인들을 위한 시설로 운영되고 있었다. 즉 군대 관계자가 아니라면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클로드를 비롯한 고위 장성들이 머물거나 출입하고 있어서 보안이 매우 엄중했다.

“파파라치는 바퀴벌레라잖아요. 어디에나 있대요.”

줄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사생활이 찍히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둘째 문제였다. 일이 너무 커졌다. 인터넷에 접속할 수가 없었다. 접속해서 포털 사이트에만 들어가도 클로드와 자신의 사진이 즐비했다. 온갖 곳에 쓰여 있는 줄리안 일리드라는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자신만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 편하게 인터넷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휴대전화도 3주 동안 네 번이나 바꿨다. 줄리안 자신의 명의일 때는 하루 만에 번호가 퍼져 온갖 사람들로부터 전화를 받아야 했고 클로드의 명의일 때는 이틀이었다. 결국 네 번째로 받은 전화는 군용 위성 전화였다. 그 전화기가 지금 징, 징, 진동했다.

“예, 줄리안 일리드입니다.”

줄리안이 전화를 받자 오퍼레이터가 ‘왕비 전하께서 연락하셨습니다. 지금 연결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비전하가? 줄리안이 “잠깐만 기―”라고 말했지만 오퍼레이터는 무정하게도 전화를 연결해버렸다.

‘줄리안! 줄스? 들려? 나야, 이샤!’

발랄한 목소리였다. 줄리안은 잠시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가 한숨 섞어 대답했다.

“예, 비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우, 야. 왜 존대해? 이제 우린 가족이 될 텐데! 편하게 불러!’

하, 하하…….

줄리안은 느릿하게 걸었다. 경호원인 마틴과 숀이 “줄리안”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방금 파파라치와 마주쳤으니 빨리 자신을 끌고 가고 싶은 경호원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에겐 빨리 가면 안 될 이유가 있었다.

클로드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할 게 분명했다. 괜히 기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줄리안의 걸음은 더 느려지기만 했다. 그의 곤란한 상황을 알지 못할 이샤는 작은 새처럼 조잘거렸다.

‘통화 한 번 더럽게 힘들다, 진짜. 잘 지내? 뭐 필요한 건 없어? 내가 보내줄게! 말만 해. 아니다, 잠깐만. 시녀장, 받아 적어.’

아니지, 작은 새는 이렇게 조잘거리지 않을 것이다. 이샤는 속사포로 말하고 있었다. 듣는 줄리안이 다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아, 아니, 다 있습니다.”

줄리안은 대답하면서도 의아해졌다. 이샤가 이렇게까지 기뻐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언제 와?’

이샤가 물어서 “예?” 하고 줄리안이 되물었다.

‘언제 오냐고! 빨리 수도에 와야 볼 수 있잖아! 결혼식 준비해야지! 아오, 어떤 미친년이 내 올케가 될지 만나면 인생을 꽈배기로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그게 너라잖아, 줄스.’

내 인생을 꽈배기로 만들어주겠다는 뜻인가?

줄리안이 이해하지 못하고 “예?” 하고 다시 한 번 되물었을 때였다.

‘어서 와서 결혼식 짜야지. 내가 다 준비해놓을게. 아, 나, 너무 신나! 올해 대박 터질 건가 봐! 로또를 살까?’

“왕족이 로또를 사시면 안 되죠. 로또의 정책에 위배되는데다…… 아니, 그보다도 결혼식이라니요, 비전하. 제가 아직 약혼에도 적응을 못해서요, 그―.”

줄리안이 중얼중얼 이샤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이샤가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정신이 나간 것 같아서 줄리안의 정신도 같이 가출하기 직전에, 몇 발짝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줄, 거기서 뭐해?”

줄리안은 흠칫 굳어 고개를 들었다. 클로드가 다가오고 있었다. 카키색 반팔 티셔츠에 군복 바지, 워커. 그의 반짝거리는 꽃 같은 미모와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지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필 여기서 만나냐.

‘줄스, 듣고 있어? 당장 해야지, 무슨 소리야. 어떤 쌍년이 채갈 줄 알고 네가 여기서 시간을 끌어? 물론 그놈이 좀 개새끼이긴 하지. 널 강간한 것도 그렇고, 하지만 계속 그런 건 아니잖아? 너도 대공이 마음에 좀 있는 거 아니야? 완전 강간이었어? 좀 강제긴 해도 너도 즐겼―.’

“강간이요?”

줄리안이 깜짝 놀라 왕비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이야, 이게.

“아닙니다. 전 강간당한 게 아니라, 앗.”

당황한 나머지 눈앞에 누가 있는지 순간 잊고 말았다. 줄리안이 지뢰를 밟았다는 눈으로 클로드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클로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고 있었다.

강간?

클로드는 입술을 올렸다. 저 소리가 나온다는 건 자신이 연관된 내용의 통화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클로드가 고개를 돌려 숀과 마틴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말 안 하면 대가리를 부숴버린다. 내 어여쁜 애인은 지금 어떤 놈이랑 통화 중이냐?

클로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을 숀과 마틴이 아니었다. 숀이 재빨리 말했다.

“왕비 전하이신 것 같습니다.”

저걸 말하면 어떡해!

줄리안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비전하, 죄송한데 제가 전화를 다시 드리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

아, 내 전화기. 나의 네 번째 전화기. 널 지켜주고 싶은데…….

클로드가 픽 웃으며 다가왔다. 클로드의 몸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크게 느껴졌다. 줄리안은 하하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다시 전화를 하다니! 내가 이 전화를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이샤는 끊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클로드가 가까이 올수록 줄리안은 더 뒤로 물러났다. 등과 벽이 운명적으로 만나는 순간 줄리안의 눈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클로드가 싱긋 웃었다. 줄리안이 재빨리 몸을 틀려고 했지만 역시나 클로드가 빨랐다. 그의 두 팔이 마치 감옥의 창살처럼 줄리안을 가뒀다.

하아…….

줄리안이 난처하게 웃자 클로드가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가까워졌다.

“왕비와 통화를 하고 있었어, 줄?”

목소리에 위험한 기운이 잔뜩 깔려 있었다.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생명줄처럼 전화기를 꽉 움켜쥐었다. 그 꼴을 본 클로드의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이 상황을 모르는 이샤는, 아니, 알더라도 코웃음도 치지 않을 그녀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줄스, 내 말 듣고 있어? 언제 올 거냐니까. 안 되면 화상 통화를 해야지, 이딴 걸로는 어림도 없어. 일단 대사제들부터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비전하.”

‘응?’

“제가 지금 통화를 할 상황이 아니라서요. 그리고 결혼식은 아직 먼 이야기이니 벌써부터 대사제를 만난다든가 화상 통화를 한다든가 하는 일은…….”

갑자기 전화기를 빼앗겼다. 줄리안이 다시 손을 뻗었지만 클로드는 유연하게 그의 손을 피했다. 줄리안이 다시 달려들었다. 손을 아무리 뻗어도 클로드는 여유 있게 움직이며 그 손의 사정권에서 벗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비전하. 클로드입니다.”

줄리안이 입술을 깨물며 손을 다시 뻗어 클로드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으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클로드가 손을 움직였다. 휴대전화를 쥐지 않은 오른손이 마치 허공 위의 공깃돌을 낚아채듯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새 줄리안의 양손목이 교차된 채 클로드의 오른손에 잡혀 있었다. 줄리안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클로드는 벽으로 밀어붙였다.

‘……안녕하신가요, 대공.’

클로드가 몸을 바짝 들이댄 탓에 줄리안도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여쭙습니다. 결혼식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클로드의 말에 이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줄리안의 앞길을 망쳤으니 결혼은 당연하지 않나요? 약혼하셨다면서요.’

“그래서요?”

‘당장 결혼식을 준비하셔야죠. 이런 거 오래 끌어봐야 피곤해지기밖에 더 하겠어요. 아직 여론이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밀어붙여야 한답니다. 그건 이쪽 궁내부에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분위기가 좀 잠잠해졌으니 돌아오시죠. 대비 전하께서 이번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하시고 싶어하시더라고요.’

클로드는 물끄러미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줄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비가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 꾸지람을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분위기가 잠잠해지긴 뭐가 잠잠해졌단 말인가. 아직도 온 인터넷에 클로드와 자신의 러브 스토리가 퍼지고 있는데. 심지어 맞게 쓴 놈은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여장을 하고 클로드에게 접근한 살수였다는 둥, 자신이 다섯 살 때 벚꽃나무 아래에서 클로드를 만난 게 첫 인연이라는 둥, 심지어는 클로드가 비밀 작전을 진행할 때 그 모습을 보고 만 자신이 납치를 당한 게 첫 만남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미친놈들 아니야? 그냥 평범하게 시종과 대공이었다니까, 왜 이렇게 소설들을 써대는지……!

“결혼식이라…….”

클로드가 동하는 얼굴이라 줄리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안 돼요, 안 된다니까요! 줄리안은 왕과 왕비의 결혼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인물이었다. 왕족의 결혼은 무시무시한 규모와 스케줄 속에서 사람을 1초 단위로 괴롭히는 것이었다. 줄리안은 가능하다면 클로드와 소규모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줄리안이 고개를 마구 젓는 걸 보면서 클로드가 픽 웃었다.

“좋지요, 결혼식.”

줄리안의 고동색 눈이 크게 뜨이는 걸 보며 클로드는 심술궂게 말했다.

“당장 하고 싶네요. 가능한 한 빨리 가겠습니다.”

‘……진심이세요?’

이샤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줄리안이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돌렸다.

“진심이에요. 정말 당장 하고 싶어요, 결혼식.”

클로드가 조용히 말했다. 줄리안이 고개를 들고 천장을 노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망했어……. 완전 망했어……. 줄리안은 평범한 하얀 천장을 보다 눈을 감았다. 이제 죽었다.

‘좋아요, 그럼 내일부터 화상 회의를 해보지요. 대공 전하, 부디 이 형수의 낯을 세워주시길 바라요.’

“물론입니다, 비전하.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라도. 제 좆을 세우라고만 하시지 않으면 뭐든지 세워드리죠.”

클로드의 말에 이샤가 코웃음 쳤다.

‘이렇게 기쁘고 축복받을 일에 더러운 이야기 하지 마세요. 형수의 낯을 세워준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주의하죠.”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줄리안이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샤와 몇 마디를 나누고 전화를 끊는 중에도 줄리안은 눈을 뜨지 않았다.

죽었어, 이제 죽었어. 줄리안이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전화를 끊은 클로드가 옆에 서 있던 마틴에게 전화기를 건네주며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뭐가 죽었다는 거야?”

“왕실 결혼을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뭐?”

“전하께서는 법적으로는 왕족이 아니시잖아요. 전 전하와 그냥 조촐한 결혼을 할 생각이었단 말입니다. 그냥 저택에서요.”

“하면 되잖아.”

“대사제를 부른다잖아요! 저건 성당 결혼이죠! 장난하십니까!”

전화기는 지켰으나 나를 지키지 못했구나…….

클로드가 놔주자 줄리안은 벽을 타고 미끄러졌다. 쪼그리고 앉은 줄리안이 고개를 팔 사이에 묻은 채 아무 말도 없자 결국 클로드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으시잖아요. 저와 전하의 결혼은 왕족 최초의 동성 결혼이에요. 왕실에서 허가를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에디가 해준댔어.”

“그럼 아마 크게 하게 될 겁니다. 허락을 안 해준다면 모를까, 해주는 이상 왕실에서는 이런 홍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요.”

―기다려. 왕족으로서는 첫 번째 동성 결혼이니 잘 기다리고 있어. 넌 간단하게 말하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러니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문득 에드워드의 말이 떠올라 클로드는 얼굴을 구겼다. 그래,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했었다. 기다리고 있어라,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결혼이 왜 간단한 일이 아닐까. 대부분은 시청에 가서 신고하고 집에서 피로연을 여는 것이 전부지 않은가. 그때도 의아하긴 했었지만 워낙 바쁘고 중한 일이 많아 넘겼었는데. 그래, 그랬지.

뭘 기다리라고 하는가 했더니 이런 뜻이었나…….

“줄.”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결혼인데 정작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제대로 말해본 적도 없잖아요. 인제 다 글렀네요.”

“미안.”

클로드는 순순히 사과했다. 그러자 줄리안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로열 웨딩이라니. 돈도 엄청나게 많이 든다고요.”

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 지참금 어떡할 거야. 어쨌거나 전통을 수호하는 왕족의 특성상 엄청난 지참금을 요구하게 될 텐데 줄리안도, 그의 부친이나 형제들도 그만한 돈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 돈은 많은데.”

클로드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했다. 줄리안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전 없거든요.”

“집이 백작가잖아.”

“옛날처럼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요. 그냥 좀 잘사는 수준이지, 로열 웨딩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에요. 전하께서는 특별 케이스이시고요.”

귀족이었던 증조할아버지가 심지어 사업도 잘했던 케이스가 흔한가. 대부분은 귀족답게 품위 있게 재산을 말아먹지. 줄리안의 집은 그래도 잘 버틴 축에 속했다. 클로드의 증조부처럼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귀족 작위를 벗 삼아 온 세상 부를 누려보세 수준은 아니었지만 귀족이라고 해도 돈은 좀 중요하다며 가계를 잘 꾸려나간 케이스이긴 했다.

“줄, 화났어?”

응? 응? 응?

클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어처구니없이 귀여워서 줄리안이 손으로 그를 휙 밀었다. 평소라면 절대 밀리지 않았을 그가 미는 대로 밀려 엉덩방아를 찧어주었다. 그 모습이 가증스러워서 줄리안은 웃음이 픽 터지고 말았다.

“됐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죠.”

줄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클로드도 같이 일어났다.

“돈은 내 쪽에서 낼게.”

“됐다고 거절해드려야 하겠지만 그럴 수가 없네요. 저희 집은 진짜 로열 웨딩을 감당할 돈이 없어요.”

“내 돈이 네 돈인데 무슨 거절이야. 다 갖다 써.”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줄리안은 그의 옆에서 걸으며 또 한 번 웃었다.

사실 클로드는 어마어마한 거부였는데도 전장에서 커온 탓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부자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집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스토메어 가문의 대단한 재산의 한 자락을 엿본 기분이었다. 잘하면 왕궁도 찜 쪄 먹겠는데 싶은 수준이었다.

“저 돈 많이 드는 남자인데.”

줄리안이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클로드가 씩 웃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난 정액이 많이 드는 남자니까.”

“아, 됐습니다.”

소름 끼치는 우스갯소리에 줄리안이 얼굴을 구기자 클로드가 그의 어깨를 안으며 키들거렸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팔에 안긴 채 주변을 흘끔 바라보았다. 숀과 마틴이 ‘아, 또 저 바퀴벌레 커플이 더듬이질을 하고 있네’라는 얼굴로 그들을 따사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민망해진 줄리안이 클로드에게 은근슬쩍 좀 더 붙었다. 그러자 클로드가 한 번 더 웃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클로드가 줄리안을 안은 채 움직인 곳은 룸이 아니라 로비 쪽이었다. 줄리안이 묻자 클로드가 그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기지.”

“기지에 가시는데 왜 저도…….”

“방금 파파라치와 만났다며? 어떻게 혼자 두겠어.”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방에 처박히면 되니까 괜찮아요.”

“바람도 쐴 겸 가자. 드라이브 하고 오면 좋잖아. 군용차로 하는 드라이브는 재밌을 거야.”

하, 하하, 하…….

숀과 마틴이 힘없이 웃었다. 클로드가 눈을 부라리자 둘은 금세 웃지 않은 척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미 줄리안은 클로드가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클로드를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어떤 재미인지 두고 보죠.”

줄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클로드의 팔에 슬쩍 머리를 기댔다. 단단한 팔이었다. 매일 팔베개를 해주고도 멀쩡한 팔은 겉으로 보기엔 그저 매끈하게만 보였었다. 그러나 반팔 티셔츠를 입자 어쩔 수 없이 근육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런 근육은 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대공인 클로드가 아니라 군인인 클로드를 밖에서 보는 것이라 생각하자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줄리안은 밝게 웃었다.

몇 분 되지 않아 줄리안의 얼굴에는 웃음 한 조각 남지 않게 되었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코트를 덮고 얼굴을 아예 묻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이 빌어먹을 황무지는 흙먼지가 엄청나게 날렸다. 군용 험비는 승차감이 최악이었다. 몸이 위로 통통 튀면서 머리를 미친 듯이 박았다.

이 모든 것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줄리안이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줄리안을 놀리려고 했던 클로드는 2분도 안 되어서 코트를 벗어주었고 5분 뒤에는 아예 줄리안을 끌어안고 있었다.

“괜찮아, 줄? 줄리안?”

클로드가 속삭였다. 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토할 것 같았다. 클로드에게 머리를 단단히 끌어안겨 있으니 좀 낫긴 했지만 구토감은 여전했다. 줄리안? 클로드가 부르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이런, 시발. 야, 세워봐. 애가 죽어가잖아.”

클로드가 험악하게 말했다. 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클로드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20분은 더 가야 하는데 이렇게 갈 수는 없잖아. 줄리안, 나 좀 봐.”

줄리안은 또 고개만 저었다. 그러자 앞에 앉은 마틴이 그를 돌아보았다.

“각하, 그냥 빨리 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괜히 여기서 지체해봐야 더 속이 안 좋아지실 거고, 여기는 좀 위험합니다. 아직 게릴라 군이.”

클로드가 마틴에게 차가운 시선을 주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 냉랭한 눈에 마틴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다시 정면을 향해 앉았다. 줄리안이 클로드에게 달라붙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틴 말이 옳아요. 그냥 가요.”

“아무리 그래도.”

“아, 제발 좀 가라고요!”

줄리안이 신경질을 냈다. 목소리가 꽉 막힌 게 제법 괴로운 듯해서 클로드는 줄리안을 더 끌어안았다. 그때 갑자기 줄리안이 “세워보세요”라고 속삭였다. 클로드가 고개를 돌리자 뒤쪽의 기척에 신경 쓰고 있던 마틴이 고개를 돌렸다.

“각하?”

“세워봐.”

차가 황무지 한중간에 오도카니 멈춰 섰다. 줄리안은 잠시 클로드의 품 안에서 쿨럭거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멀미라는 게 단계가 있구나. 1단계에서 10단계까지 있다면 줄리안은 1단계도 밟지 않은 채 10단계를 경험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줄리안? 얼굴이 하얘.”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염려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럴 바에는 처음부터 놀리지 말지. 줄리안은 미간을 좁히며 클로드에게 외투를 입혔다.

“난 됐어. 괜찮으니까.”

“추운데 반팔이라니요, 전하. 입으세요.”

“아니, 괜찮다니까.”

줄리안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자 죄책감이 든 클로드가 외투를 거절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클로드에게 부득불 코트를 입혔다. 클로드는 제 코트를 입으면서도 줄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지독하게 하얗고 생기라고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게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줄리안, 여기서 좀 쉬다가.”

안절부절못하며 클로드가 줄리안을 달랬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코트를 터프하게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이제 가십시다.”

“줄.”

“아, 제발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 어서 가자고요.”

줄리안이 속삭였다. 클로드는 어쩔 수 없이 혀를 차며 줄리안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마틴(27, 싱글, 모태솔로)을 향해 말했다.

“차, 살살 몰고 빨리 몰아라, 응?”

살살 빨리 모는 건 어떻게 모는 것인가…….

마틴의 얼굴이 구겨지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까마득한 상관이었다. 그리고 지금 애인에게 목줄을 잡혀 얌전할 뿐 사실은 세상 광견 중의 제일이라는 소리를 듣던 인물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각하!”

일단 큰 소리로 대답은 하고 봤다. 그리고 정면으로 몸을 돌리자 차를 몰아야 하는 숀이 ‘이 새끼가 지가 모는 거 아니라고……’라는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틴은 몸을 반쯤 구기듯 차창에 달라붙어 숀의 시선을 외면했다.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줄리안, 내가 일부러 이 차를 탄 게 아니야.”

클로드는 줄리안을 안은 채 본격적으로 변명을 시작했다.

“여긴 경사가 너무 심해서 험비가 아님 다닐 수가 없거든? 더 좋은 차도 있긴 한데 아직 우리 기지에는 배당이 안 됐어. 그래서 우린 험비밖에 없어.”

“……저기.”

“널 놀리려고 일부러 이 차를 탄 건 아니야. 네가 이럴 줄 알았다면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 텐데, 미안해. 줄, 화났어?”

아까 결혼식을 제멋대로 승낙한 것만도 화가 날 만한 일이었을 텐데 이렇게 괴로운 드라이브를 하게 되면 더욱 화가 나지 않을까. 클로드는 난처하게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욱욱거리면서 품에 파고드는 줄리안을 안고 있자니 이 와중에 좀 뿌듯한 기분이 들어서 큰일이었다.

줄리안이 손을 들어 클로드의 입을 막았다. 고개를 젓는 품이 정신 사나우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해서 클로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차는 살살, 빨리 달려서 기지에 도착했다.

먼저 내린 클로드의 뒤에 줄리안이 휘청거리며 차에서 내리려 했다. 그러자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줄리안을 받아주었다. 웩, 줄리안이 헛구역질을 했다. 미리 와 있었던 제이미가 “아, 여기가 좀 지랄 맞죠. 줄리안, 괜찮습니까?”라고 아는 척을 해주었다.

“신경 꺼.”

클로드가 뾰족하게 대꾸했다.

자기 애인에게 신경 써도 지랄이야, 제이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클로드는 지금 자신이 줄리안에게 잘못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줄리안에게 다정한 척 구는 게 눈꼴사나웠다. 줄리안에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은 자신이어야 했다. 그는 줄리안을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차라리 안아 올릴까 했지만 더 울렁거릴까 봐 그럴 수 없었다.

줄리안이 조심스럽게 허리를 펴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들었다.

“전하.”

클로드는 그 얼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얼굴이 아주 반쪽이 됐네.”

“원래 줄리안의 얼굴 크기가 얼마나 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이미가 비웃었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의 두 배 크기만큼 대본 뒤 “이만큼?” 하고 덧붙였다. 그러자 주변 군인들이 키들키들 웃었다.

줄리안은 신기해져서 미간을 약간 좁힌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인들이 대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바라보는 듯해서 불편한 마음으로 저기 하고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중령님,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고함이 들리더니 전 기지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사이렌 소리에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고통과는 별도로 줄리안은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황을 알 수 없었다. 클로드가 줄리안을 품 안에 숨겼다. 그러고는 흘끗 제이미에게 시선을 보냈다.

“뭐야?”

“이셀란의 잔당들입니다.”

“이셀란?”

이셀란? 줄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이셀란이라면 세실의 고국인 거기 말인가. 저스틴이 자신과 왕궁을 배신하고 첩자 노릇을 했던 그 나라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품에서 나가려 했지만 클로드는 흐음 하고 내키지 않는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셀란이라…….”

이셀란 때문에 줄리안을 고문한 적도 있는 클로드는 줄리안이 그 나라의 이름을 듣고 괜히 예민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냥 데리고 들어갈까. 잔당이야 부하들이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이셀란의 잔당이면 게릴라군인가요?”

그런데 정작 줄리안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 게릴라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애들…….”

줄리안의 멀미에 아직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클로드가 순순히 대답해주다 말을 멈췄다.

줄리안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궁금한 모양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있으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은 게 애인 마음이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구경 갈래?”

“저 차를 타고요?”

방금 내렸는데?

줄리안의 얼굴이 흐려졌다. 저 지옥 같은 차를 또 타자고? 그러자 클로드가 기다리라며 사라지더니 곧 오토바이를 끌고 왔다. 초롱초롱하던 눈이 단숨에 흐려졌다. 차도 힘들었는데 오토바이를 타자니, 이 남자가 제정신인가 했던 것이다. 그때 클로드가 줄리안의 머리에 헬멧을 씌웠다.

“의외로 오토바이는 기분 좋을 거야. 멀미도 덜할걸.”

“그 거짓말, 믿으라고 하시는 거 맞죠?”

조금이라도 성의가 있어야 믿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며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클로드가 피식피식 웃었다.

“남편을 좀 믿어봐라.”

“왜 전하가 남편이십니까. 제가 남편이죠.”

“네가 시집오는 거니까.”

“데릴사위라는 것도 있잖습니까?”

“그럼 내가 부인 할까. 내 얼굴과 덩치를 본 다음에 말해봐. 내가 부인이었으면 좋겠어?”

클로드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위풍당당하게 섰다. 그래? 내가 부인이었으면 좋겠어? 그 당당한 얼굴을 보고 얼굴보다 더 당당한 몸을 본 뒤 줄리안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댁 같은 부인은 싫습니다. 사람들이 내 눈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조금 전 호텔에서 ‘난 정액이 많이 드는 남자’ 운운했던 게 떠오르자 고개를 좀 더 열렬하게 저을 수 있었다. 클로드는 제가 말한 주제에 정작 거절당하자 울컥한 얼굴이었다.

줄리안은 헬멧을 쓴 채 클로드의 뒤에 올라탔다. 클로드는 고글에 스카프를 두른 채였는데 아마 자신이 쓰고 있는 게 클로드의 헬멧 같았다.

와, 나보다 키는 10cm 넘게 크면서 헬멧이 꽉 끼네?

줄리안이 쯧 혀를 찼을 때 클로드의 손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클로드의 허리를 꽉 끌어안게 했다.

“꽉 잡아.”

그리고 오토바이가 부앙, 소리를 내며 튀어나갔다.

윽, 이게 뭐야. 줄리안은 클로드에게 달라붙었다. 바람이 아까보다 훨씬 강했다. 이 거짓말쟁이야. 속이 확 뒤집어져서 줄리안은 화를 못 참고 클로드의 등을 퍽 후려쳤다. 푸하하하하. 클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목소리가 소년처럼 싱그러웠다.

어……?

줄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멀미가 덜했다. 얼굴로 바람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몸으로는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것 같았다. 자욱한 흙먼지조차 기분 나쁘게 다가오지 않았다. 줄리안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야호―.”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 줄리안은 고개를 돌렸다. 클로드의 오토바이 뒤로 수십 대의 군용 험비가 달리고 있었다. 흙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해졌다.

“아싸, 특식이다!”

다들 흙먼지는 상관도 없는지 차창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 신이 나 있었다. 뭐가 신나는 거야? 줄리안은 이해할 수가 없어 두꺼비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갑자기 누군가가 줄리안을 상대로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갑자기 일제히 줄리안에게 휘파람을 불고 함성을 질러댔다. 행복하세요―. 뇌 맑은 남자들의 합창이 인상 깊었다.

예에에……. 아무도 듣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줄리안은 헬멧 속에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오토바이를 몰던 클로드가 자신의 병사들 중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흘끗 노려보았다. 그러자 병사들이 냉큼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이제 클로드가 아닌 정면을 보며 떠들기 시작했다.

“야, 저거 고릴라야, 사자야?”

“멍청아, 고자, 고자!”

정액 많이 드는 남자 개그가 어디서 왔나 했더니 여기서 왔구나……? 부대 전통인 모양이다. 줄리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앞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고릴라니 사자니 하는 소리가 뭔지 깨닫게 되었다.

사자의 얼굴을 한 고릴라와 그 이상으로 흉측한 동물들이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줄리안은 헬멧 속에서 눈을 크게 떴다.

키메라다. 연금술로 만들어진 두 종류 이상의 혼합 동물.

이런 빌어먹을, 여기서 왜 키메라가 나와?! 줄리안은 당황했다. 어떡하지, 여긴 사람이 너무 많은데. 심지어 키메라도 많았다.

줄리안은 일단 워드를 외웠다. 무엇부터 외워야 할지 알 수 없지만 클로드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클로드와 공간 이동이라도 할까. 여기는 수도가 아니니 좌표를 정확하게 찍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클로드는 지휘관인데 그 혼자 살린다고 될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불을 지를까?

불이 질러질 만한 조건이 되는지 줄리안이 빠르게 계산하며 수식을 계속 바꿔 워드를 외우고 있을 때였다. 탕―, 총소리가 들렸다.

“야호! 내 거야, 시발아!”

“이 개새끼가, 내가 겨눈 거 안 보이냐!”

줄리안은 고개를 돌렸다. 군인들이 매우 신이 나 있었다. 차들이 끼이익, 끼이익―, 이리저리 꺾이며 움직였다. 한창 외우던 수식을 잊어버렸고 워드의 기운은 피시식 식어버렸다.

멍한 기분으로 병사들이 하는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오토바이는 언덕에 멈춰 섰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내리게 했다. 줄리안이 스스로 헬멧을 벗지 못하자 도와주고는 추울까 봐 걱정이 되는지 코트를 열어 줄리안을 끌어당겼다. 클로드에게 뒤에서 코트째 끌어안기자 줄리안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지금 저분들 뭐 하시는 거예요?”

줄리안이 말하는 저분들은, 이얏호― 라고 함성을 지르며 키메라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엄청난 힘과 야수성을 가진 키메라들을 대상으로 파이프를 휘두르며 약을 먹은 것처럼 신이 나 있었다. 키메라였다. 전투를 위해 만들어지는 합성 생물. 마법학에서는 금단의 술법으로 치부된다. S급 마법사인 줄리안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냥?”

클로드가 줄리안에게 말하며 그의 귀를 입술로 문질렀다. 줄리안이 고개를 이리저리 뺐지만 클로드도 끈질겼다. 클로드의 혀가 줄리안의 귀로 들어왔다. 질척한 소리에 줄리안이 몸을 떨었다.

“하, 하지 마세요.”

“왜, 벌써 섰어?”

“안 섰거든요.”

“하긴, 넌 여기를.”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옷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손에 등골이 오싹해진 것도 잠깐, 그 손이 차가워서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줄리안이 고개를 돌려 클로드의 외투 안으로 묻었다. 클로드의 손이 줄리안의 유두에 닿았다.

“여기를 바짝 세운 다음에 밑을 세우지. 존나 야하신 주제에 절차는 또 착실하게 밟으세요, 응?”

“하지 마시라니까요.”

“위를 세우고, 아래를 세우고, 밑을 적시고. 그러고 보니 너 요즘 밑이 알아서 젖더라. 아, 아래도 섰구나?”

“아니거든요.”

“선 얼굴인데.”

클로드가 뻥치지 말라는 얼굴로 속삭였다. 줄리안이 고개를 젓자 클로드가 킥킥 웃었다.

“너 여기 완전 귀여운 거 알아? 평소에는 납작한 땅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게, 흥분하면 지도 가슴이라고 언덕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니까? 아, 섰네, 섰어.”

“전, 하――!”

줄리안이 몸을 비틀어도 클로드는 놓아주지 않았다. 클로드의 손가락이 줄리안의 유두를 빙글빙글 돌렸다. 줄리안이 허리를 덜덜 떨었다. 벌써 떨기는. 클로드가 속삭이자 줄리안이 뒤로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러자 클로드가 귀엽다는 듯이 줄리안의 유두를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그 순간 찌릿한 느낌에 줄리안의 무릎이 후들거리며 꺾였다.

“어이쿠. 벌써?”

“진짜, 매일, 사람을 안 놀리면, 입안에.”

“입안에 가시가 돋지. 좆만 한 걸로.”

아아, 저 주둥이에 좆만 한 가시를 틀어넣고 싶다. 아주 확 찢어버리고 싶다. 줄리안이 부들부들 떨었을 때였다. 클로드가 줄리안의 차갑고 질척한 귀를 빨며 속삭였다.

“클로드, 라고 불러봐. 줄.”

“……여긴, 기지잖아요.”

“넌 집에서도, 호텔에서도, 왕궁에서도, 레스토랑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날 전하라고 부르잖아. 기지가 무슨 상관이야.”

클로드의 목소리에서 쌩쌩 바람이 불었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하지만 이 손을 떼어낸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괜히 힘을 빼지 않았다. 줄리안은 그 손을 잡고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클로드.”

줄리안의 체념한 목소리에 클로드는 손을 빼내었다. 줄리안의 유두가 바짝 선 게 위험했다. 줄리안은 가슴을 잘 느꼈고, 가슴을 느끼는 줄리안을 보면 클로드 자신도 흥분이 높아지고는 했다. 이쯤에서 멈추는 게 맞았다. 온 병사들 앞에서 줄리안의 엉덩이를 벌릴 게 아니라면.

“사랑해, 도?”

줄리안의 엉덩이를 보는 새끼들은 다 죽어야 마땅한데, 아군 수십 명을 갑자기 죽이는 건 아무리 클로드라도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여기서 멈춰야 한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손을 뺐다. 힉. 줄리안이 허리를 숙이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가 피식 웃자 줄리안이 이를 갈았다.

“이러다 나한테 언젠가 칼 맞을 거예요.”

“아냐, 넌 천사라서 칼을 아이스크림으로 바꿔줄걸?”

“아오, 그때 찔러봤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대줄 용의가 있는데.”

말이나 못 하면!

줄리안이 말을 말자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병사들은 여전히 신이 나서 키메라를 때려죽이고 있었다.

저건 분명 키메라인데……. 야수성을 한계까지 높인, 전투 생물.

……은 지금 매타작을 당하고 있었다. 어찌나 강렬하게 때려잡는지 키메라가 끼잉, 끼잉 소리까지 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줄리안은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키메라가 도망을 가네…….”

야수성밖에 남지 않았다던 그 키메라가 얼마나 처맞았는지 도망을 가고 있었고.

“특식이 도망간다!”

“아, 새끼야, 뭐해! 막으라고!”

“잘한다, 뛰어!”

“야, 내 파이프 좀 던져줘!”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이 다섯 살짜리 어린애들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떠드는 건 꺄아꺄아 하는 어린애들 같아도 뜀박질은 또 엄청 빨랐다.

와, 키메라보다 빠르잖아…….

도대체 이 부대는 뭘 하는 곳인가. 줄리안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사이, 결국 키메라를 때려잡은 병사들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돌아오고 있었다. 거대한 키메라를 질질 끌고 오던 남자들은 줄리안을 발견하자 농촌 총각처럼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댔다. 그 순간 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같이 손을 흔들고 말았다. 앗. 줄리안이 당황해서 손을 내리자 또 휘익휘익, 난리가 났다.

그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클로드와 줄리안이 오토바이를 타고 기지로 돌아가는 길, 병사들은 짓궂게도 그들을 둘러싸고 달렸다. 차들이 제멋대로 질주했다. 대각선으로 멀어졌다가 교차하면서 가까워지길 반복하는 차들을 보며 줄리안은 저 사람들이 다들 약을 먹었나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이 뭘 하는지 깨닫고야 말았다. 그들은 차로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얼레리꼴레리. 줄리안, 클로드, 사귄 지 1일.

1학년 교실 칠판 한구석에 적는 것처럼 황무지에 차로 하트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줄리안은 부끄럽기에 앞서 어이가 가출하고 말았다. 내 어이. 다른 이름 어처구니. 이렇게 이렇게 생긴 제 어처구니 못 보셨나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봐야 할 참인데 그가 자신의 어이를 찾기도 전에 기지로 돌아오고 말았다.

더 기가 막힌 풍경은 그 이후에 나타났다.

“……설마.”

잠시 클로드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줄리안은 멍한 얼굴로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연병장 내에는 화형대같이 높이 쌓은 장작들이 있었고 하나같이 불타고 있었으며 그 위에서는 거대한 동물이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저거, 저거 설마……. 줄리안이 마른침을 삼켰을 때였다.

“줄리안, 배고파요?”

지나가던 제이미가 배고픈 줄 몰랐다며 고기가 담긴 그릇을 건넸다. 으악, 키메라다. 줄리안은 놀라서 돌려주려고 했지만 제이미는 “난 괜찮아요. 또 가져오면 되니까 이거 먹어요. 아깐 웃었지만 진짜 얼굴이 반쪽이에요, 요즘”이라고 말하며 부득불 그의 손에 접시를 올려주었다.

먹을 엄두는 나지도 않아서 줄리안이 들고만 있는데 손가락이 다가왔다. 하얗고 예쁜 손가락은 줄리안의 접시에서 홀랑 고기를 가져가버렸다.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클로드가 스테이크 정도 되는 크기의 고기를 한입에 앙 넣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니 그가 다시 고기를 입에서 빼주려 했다. 먹을 거였어……? 줄리안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먹을 것도 아니었지만 클로드의 입에 반절 이상 들어갔던 고기를 자신의 입에 굳이 넣을 생각은 없었다.

줄리안은 7년간 환락의 끝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는 왕실 시종이었고 왕실은 타락의 장이었으니까. 그러나 왕실은 타락하되 기품을 잃지 않는 곳이었고 이곳은 그냥 짐승들의 보호 구역이었다. 섹스하는 남자들, 술에 취한 남자, 그리고.

“이거 봐라, 이거 봐라.”

누군가의 목소리에 줄리안은 엉겁결에 고개를 돌렸다. 멀쩡하게 훈훈한 외모의 남자가 송곳을 들고 있었다. 잠깐 까불거리며 장난을 치더니 갑자기 자기 뺨에 송곳을 꽂아 넣었다. 줄리안은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이, 약혼자. 어디를 보는 거야?”

클로드가 줄리안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줄리안은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클로드에게로 시선을 주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줄리안의 멍한 눈을 본 클로드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저게 뭐?”

“아무렇지도 않아요?”

줄리안이 설마 하는 얼굴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나도 저거 할 수 있는데. 해줄까?”

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애새끼들이 저 짓을 하느라고 송곳이 씨가 말라서……. 클로드가 중얼거리며 “야, 그거 가져와”라고 소리쳤다. 줄리안은 깜짝 놀라 클로드의 손목을 붙잡았다.

“절대 안 돼요.”

“왜, 나도 잘해.”

“안 돼요, 전 전하께서 저러시는 거 보면 기절할 거예요. 정말입니다.”

줄리안의 얼굴이 멀미를 할 때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클로드는 주변의 야만적인 놈들을 한 번 바라보고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줄리안은 오늘도 완벽하고 단정했다. 집에 내내 있을 것이 아니라면 그는 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깔끔하게 손질하고는 했다. 직업 덕분에 생긴 버릇일 테지만 클로드는 그런 줄리안이 좋았다. 기품이 있으면서도 너무 날이 서 있지는 않아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지도, 숙이지도 않는 태도가 언제나 인상 깊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살아온 줄리안은 뼛속까지 우아했고 이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

그래도 내가 내내 살아온 세계를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클로드는 줄리안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줄리안은 당황한 것 같았고 조금 무서운 것도 같았다. 괜히 데려왔군. 클로드는 후회했다.

“미안해, 줄리안.”

클로드의 목소리에 줄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클로드가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줄리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아, 생각이 났다. 고문실에서였다.

사방의 시끌벅적하던 것이 멀어지고 세상에 단둘이 남은 것 같았다. 줄리안은 클로드를 올려다보며 그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미안해, 줄리안.

그때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시종 일을 못 하게 된 자신을 두고 미안하다고 말한 사람은 클로드 한 명뿐이었다. 그는 정말로 미안해했다. 유감이라고, 미안하다고, 성심성의껏 말했다. 그 사과를 들은 이후에도 줄리안은 클로드에게 몹시 화를 냈었지만 사실 그 목소리는 줄리안의 심장을 뚫고 들어왔었다. 미안해. 네가 겪은 모든 일에 대해서, 미안해. 클로드는 그때 그렇게 말했었다.

줄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병사들이 키메라를 때려 죽여서 불에 태워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고작 여흥으로 사람들은 커다란 송곳을 들어 한쪽 뺨을 꿰뚫었다. 섹스는 애무도 없이 짐승처럼 서로를 박고 박힐 뿐이다. 클로드는 이런 곳에서 살아왔다.

……그랬겠구나.

줄리안은 그때 클로드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클로드는 널 고문하려던 게 아니었다고 소리 질렀었다. 차라리 날 찔러! 그때 클로드는 진심이었고 줄리안은 덜덜 떨었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찌를 수 있는가.

줄리안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알게 되었다.

클로드의 생에서는 그럴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랬구나, 그랬어.

클로드로서는 자신이 고문을 당했다는 게,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무섭고 절망스럽게 하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줄리안은 가만히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줄리안의 침묵이 길어지자 클로드가 팔을 뻗었다. 줄리안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당겨 이마를 대었다.

“정말 화났어?”

“…….”

“헤어지자고 할 거 아니지? 저 새끼들 다 못 하게 해줄까? 무서워?”

흥청망청 신이 난 부하들에게 당장에라도 고함을 지를 것 같은 얼굴을 한 클로드가 부하들과 줄리안을 번갈아 보며 초조해했다. 그 얼굴이 예뻤다. 노을이 진 뒤라 세상은 차츰 어두워지고 있었다. 클로드의 얼굴 위로 불빛이 울렁거렸다.

“클로드.”

“응?”

“고문실에 저 넣었을 때, 무슨 생각이셨어요?”

왜 갑자기 그때 이야기가 나와? 클로드는 잠시 얼굴을 뒤로 물렸다. 줄리안의 표정을 더 명확하게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널 고문실에 넣은 건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근위대에 잡혀 있었기 때문인데…….”

줄리안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길이 불길했다. 클로드는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궁에 갔을 때 넌 이미 근위대에서 데려간 뒤였어.”

클로드의 커다란 손이 줄리안의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난 뭐든 해야 하는 상황인데 솔직히 넌 처음부터 첩자로 의심받고 있었어. 첩자든 아니든 난 널 구했을 거야, 줄. 하지만 네가 정말 첩자냐 아니냐에 따라 방법이 달라져야 할 문제였어.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 넌 제법 위험한 다리 위에 서 있었거든.”

“…….”

“널 고문하는 조건으로 근위대에서 널 빼낸 거야. 고문하는 척도 필요했고, 그리고 시발, 네가 그 빌어먹을 레플래스 새끼와 연애하는 척을 했었잖아.”

“질투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당연하지.”

장난해? 아주 죽이려다 참았어.

클로드의 말에 줄리안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줄리안의 얼굴을 본 클로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왕궁 내에서는 둘 사이가 별로였다며? 그리고 왕궁 밖에서는 애인인 척하고. 정말 애인 사이가 아니라면 첩자와 핸들러 사이일 수도 있었어. 미안하지만 난 알아야 했어, 줄. 그러지 않으면 난 널 구할 수가 없었어.”

클로드가 난처한 듯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줄리안도 그런 그를 직시했다. 말없이 올려다보자 클로드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난 널 구하려고 한 거야. 네가 첩자든 아니든 널 구하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어. 그러니까 그런 얼굴로 보지 마.”

“그런 얼굴?”

“속을 모르겠잖아. 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난 종종 미칠 것 같아.”

클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의 뒤로 병사들이 보였다. 정말 미친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섹스와 술과 오락. 의미를 알 수 없는 자기학대 쇼와 떠들썩한 목소리.

클로드는 저 사람들 사이에 속해 있었다. 줄리안은 확신했다. 자신은 영원히 클로드의 어떤 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과 클로드는 아주 가깝게 있기도, 우주의 끝과 끝에 있기도 했다. 클로드는 자신에게 속을 모르겠어서 미칠 것 같다 말하지만 그의 속을 모르겠는 건 줄리안도 마찬가지였다.

클로드가 안 되겠는지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사과했다.

“줄, 그때는 내가 잘못.”

“기뻤습니다.”

“어?”

사과하다 말고 클로드가 의아해했다. 줄리안은 손을 들어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뒤에서 휘익, 휘파람이 터졌다.

“잠깐만, 줄.”

클로드가 줄리안의 손 위로 손을 겹치고 속삭였다. 그리고 그가 그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줄리안의 손에서 클로드의 뺨이 멀어졌다. 그것이 아쉽다고 생각했을 때 클로드가 웃으면서 이를 갈았다.

“눈깔 안 돌리냐?”

재빨리 병사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클로드가 다시 줄리안을 바라보면서 제 뺨을 내주었다. 순간 줄리안은 키메라가 떠올랐다. 아주 예쁜 청년과 식인 사자를 섞으면 딱 이렇지 않을까. 엄청나게 잘 섞여야겠지만.

식인 사자 하니까 문득 세실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식인 사자가 신부로 변화했던 이야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껍질 위에 서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일 테다.

“뭐가 기뻤다는 거야?”

클로드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마치 좋게 들리는 듯한 이 말 뒤에 함정이 숨어 있을까 경계하는 어조였다.

“구해주셔서요.”

당신은 달려왔다.

“그때, 고맙다는 말 못 했었죠. 고마웠어요. 정말이에요.”

마치 경주마처럼, 눈앞의 나만을 보고 질주했다. 오늘처럼 바람을 가르며 왔었겠지.

“지금 이렇게 얘기하면 좀 기회주의적인 것 같지만.”

어둠의 성에 갇힌 연인을 구하러 당신은 모든 것을 동원했을 것이다.

“좋…….”

클로드의 눈이 커지는 걸 보고 줄리안은 말을 바꿨다.

“사랑합니다.”

아직 한 번도 이야기해보지 않았다. 클로드는 줄리안에게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줄리안은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다. 결혼을 약속한 그 순간에도 그는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좋아한다. 하지만 그 감정이 넘쳐흐를 정도로 불어난 적은 없었다. 언제나 마음속에 잘 고여 있었을 뿐이었다.

“사랑해요.”

한 번 더 말했을 때 갑자기 몸이 휙 들렸다. 순식간에 줄리안은 클로드의 어깨에 짐짝처럼 걸쳐졌다. 어, 어라? 줄리안이 당황했을 때 누군가가 탄성을 지르려고 했다. 아까처럼 휘파람 소리와 야유를 각오하고 줄리안이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소리 지르는 새끼들, 혀를 다 뽑아버린다.”

클로드가 저벅저벅 걸어가며 한마디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치 클로드와 줄리안이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분위기가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모두들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못 본 척하는 것이 느껴져 줄리안은 더 민망해졌다.

클로드는 가장 가까운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 안에서 키스를 하고 있던 두 명의 병사가 어 하고 까마득한 상관을 향해 멍청히 시선을 되돌렸다.

“꺼져.”

클로드가 으르렁거렸다.

“예, 알겠습니다!”

병사 둘이 재빨리 경례를 붙이고는 서둘러 뛰쳐나갔다. 둘 다 옷이 반쯤 벗겨진 상태였는데 이 추운 초봄에 외투도 없이 튀어나간 것이다. 줄리안이 저 병사들이 괜찮을지 걱정하는데, 클로드가 그를 내려주었다. 침대에 내던지듯 내려져서 줄리안이 얼굴을 구기며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 읏―.”

클로드가 성급하게 입을 맞췄다. 누구의 침대인지도 모르는 곳에 눕혀진 줄리안은 당황했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클로드의 혀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 키스는 질척하고 난폭했다. 여유라고는 한 톨도 없는 키스였다. 줄리안이 밀어내려고 했지만 클로드는 당연히 밀리지 않았다. 귀찮은지 클로드가 줄리안의 팔을 잡았다. 모포로 팔을 묶더니 그 상태로 줄리안의 위에 올라탔다.

“여기가 어딘지나 알고 이러시는 거예요?!”

줄리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르게 속삭였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몰라서 비명도 못 지르겠는데 정작 클로드는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시발, 알 게 뭐야.”

클로드가 헐떡거리며 윗옷을 벗고 있었다. 잔뜩 눈이 붉어져 있는 게 어지간히 위험해 보여서 줄리안은 엉덩이를 빼려 했다. 그러나 클로드는 줄리안의 턱을 잡아 다시 깊게 키스했다. 다급하게 온 타액을 마시더니 혀가 얼얼할 때까지 빨아댔다. 줄리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클로드는 너무 빨랐고, 그리고 너무 잘했다. 그는 줄리안의 몸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듯 어디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숙지하고 있는 혀였다. 그 혀에 농락당해서 줄리안의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줄리안은 멀어지려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클로드를 뿌리쳤다.

“클로드!”

“안 돼, 안 돼. 부르지 마. 나 머리 터질 것 같으니까 시발, 그 전하든 뭐든, 마음대로 불러. 이름은 안 돼.”

클로드가 중얼거리며 바지를 내렸다. 지퍼를 내리자 흉흉한 것이 드러났다. 평소보다 더 커진 것을 보며 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요.”

경고하듯 한 말에 클로드가 “너야말로 하지 마”라고 응수했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날 사랑한다고, 지금 그렇게 말했잖아. 온몸에 피가 돌아 미치겠는데 사랑은 하지만 이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난 지금 너랑 안 자면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전하!”

줄리안이 반쯤 울음이 끓는 소리로 부르자 클로드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아, 시발, 식을 줄 알았는데 존나 목소리 야해서.”

더 섰어, 라는 말에 줄리안이 다시 고개를 내렸다. 클로드의 것에 이제 핏줄까지 서 있었다.

“제, 젤도 없잖아요.”

클로드가 줄리안의 바지를 내리기 시작했다. 줄리안은 바지를 잡고 버텼다. 제발 이 짐승 같은 남자가 이성을 찾아주길 바라면서. 그러자 클로드가 씩 웃었다.

“빨아줄게.”

“싫―.”

옷이 부욱 찢기는 소리가 났다. 솔기가 뜯어지는 소리에 줄리안이 놀라자 클로드가 “잘됐네”라고 말하며 옷을 본격적으로 찢어버렸다. 그러고는 줄리안의 다리를 잡아 아래로 입술을 묻었다.

아래를 빨리는 건 역시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평소에도 더러운 곳을 빨리고 있다는 데에 대한 수치심과 흥분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치심보다도 아픔이 더 강했다. 클로드는 무작정 입구를 빨아들이는 것으로 모자라 이까지 박았다.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혀가 들어올 때는 어쩔 줄 모르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아아읏. 줄리안은 신음성을 지르며 울었다. 거친 피스톤질에 미칠 것 같았다. 뾰족이 세운 혀가 몸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입구가 풀렸다. 몸이 클로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클로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줄리안의 턱을 잡아 제 성기를 들이밀었다.

“침, 뱉어봐.”

줄리안이 그를 억울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클로드가 어서, 라고 초조하게 재촉했다. 결국 줄리안은 천천히 입을 벌리고 타액을 모아 떨어뜨렸다.

그게 지독하게 음탕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입에 박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그의 다리를 벌렸다. 줄리안의 타액을 제 손으로 펴 바른 그는 줄리안의 발목을 잡고 자신의 것을 쑤셔 넣었다.

하으아아아―. 줄리안은 비명을 질렀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성기가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고 조금 아팠다. 그리고 눈앞이 날아갔다. 아픈 것 같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클로드가 말이 없었다. 평소에 말없이 섹스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아무 말도 없이 짐승처럼 헐떡이며 몰아붙이기만 했다. 끼익, 끼익. 철제 침대가 부서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줄리안도 정신이 없었다. 클로드의 육체는 지독하게 난폭했고 줄리안은 마치 공격에 부서지는 성처럼 허물어졌다. 절정이 계속 줄리안을 덮쳤다. 아직 절정이 물러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절정이 그 위를 덮치고 또 새로운 절정이 달려들었다. 감각이 부서지고 뒤섞이고 역류했다. 미칠 것 같아서 비명을 질렀다. 그만해, 살려줘, 하지 마, 제발, 싫어. 뭐라고 외친 것 같은데 자신의 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허우적거리며 소리 지르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물속에서처럼 답답하고 멀게 느껴졌다. 밀어내고 끌어당기고 때리고 감싸 안는 동안 클로드는 계속 말이 없었다. 그저 숨을 거칠게 쉴 뿐이었다. 그는 발정제에 당한 짐승처럼 줄리안을 먹어치웠다. 자세를 바꾸며 계속 헤집었다. 그리고 앉은 채 아래에서 위로 박히고 있던 줄리안은 결국 거대한 절정과 함께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클로드가 완전히 뒤로 쓰러지는 줄리안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다음 날, 클로드는 줄리안의 눈치를 한껏 보며 서 있었다. 줄리안은 바지가 없어 잘 맞지 않는 군복 바지와 질질 끌리는 군화 차림으로 서 있었다. 아침부터 그의 기분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어제의 멀미에 놀란 것에 거친 섹스의 후유증까지 겹쳐 컨디션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각하!”

한 병사가 절도 있게 인사를 건넸다. 줄리안은 무심한 눈으로 그에게 인사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병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제 ‘이거 봐라, 이거 봐라’라며 제 뺨을 송곳으로 뚫었던 그 남자였다.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확인하자 뺨에 큰 상처가 나 있었다.

“어제, 송곳…….”

줄리안의 말에 병사가 척, 경례를 붙였다.

“예, 그렇습니다. 어제는 못 볼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에 빛 아래에서 보니 어쩌면 이렇게 멀쩡해 보인단 말인가. 줄리안은 그 사실에 더 충격을 받았다.

각하. 누가 클로드를 불렀다. 클로드가 “잠깐만 다녀올게”라며 줄리안을 두고 멀어졌다. 그사이 줄리안은 다시 병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진짜 어제 그 사람……? 줄리안의 아연한 시선을 받은 병사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어제는 제가 살짝 들떠서…….”

병사의 얼굴이 민망한 듯 조금 붉어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 얼굴은 심지어 키메라를 때려죽일 때도 보았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어제는 그렇게 미쳐 있었을까? 줄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병사가 안 되겠는지 슬며시 줄리안의 시선을 외면했다. 줄리안이 고개를 움직이면서까지 그의 얼굴을 확인했고 병사는 또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뭐하시는 겁니까?”

제이미 블레서가 다가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병사가 다시 경례와 함께 구호를 외쳤다.

“승리를!”

“승리를. ……뭐하시는 거예요, 줄리안.”

“아니, 어제 이분이 자기 뺨에 송곳을…….”

줄리안이 중얼거리자 제이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 그 짓 했냐.”

아니, 그게……. 병사가 변명하려 했을 때였다. 줄리안이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멀쩡하셔서요.”

“뭐 매일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하루 만에 이렇게…….”

쯧, 제이미가 혀를 찼다. 그는 ‘좀 작작 하지 그랬냐?’라는 눈길로 병사를 한 번 바라봐준 다음 줄리안에게 대답해주었다.

“어제 전군에 포상금이 내려왔거든요. 일부긴 하지만요.”

쿨하게 대답하려고 한 것 같은데 제이미의 입술 끝도 풀려 있었고 병사의 얼굴도 흐물흐물해졌다. 포상금, 포상금, 포상금. 그 단어가 나올 때 주변에 있던 병사들의 얼굴도 노곤노곤해져서 줄리안은 포상금이라는 게 군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 지루한 상황이었는데 포상금이 나오니까 애들이 다들 미쳐서…… 좀 불편하셨죠?”

제이미의 말에 줄리안이 아니요, 뭐 하고 애매하게 대답하더니 병사의 팔을 살짝 잡았다.

“괜찮으시면 제가 힐링 좀 걸어드릴게요.”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제이미가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클로드가 그를 불렀다. 금붕어 똥! 그 목소리에 제이미는 잠시 다녀온다며 자리를 떠났고 이제 병사와 줄리안 둘만이 남았다. 줄리안이 잡은 팔을 살짝 당겼다. 그러자 병사가 아 하고 깨달은 것처럼 줄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예, 예? 아, 맞다, 마법사시라고.”

병사가 중얼거려서 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니까 좀 걸어드릴게요. 저 보세요.”

줄리안은 워드를 외우기 시작했다.

병사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 눈을 크게 떴다. 욱신거리던 뺨의 아픔이 진정되더니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줄리안 일리드. 병사도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클로드의 스캔들은 수도만큼이나 여기서도 주목받고 있었다. 둘이 사귀었다더라, 결혼한다더라. 그 소문 중심에서는 줄리안이 억지로 클로드와 결혼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사실 클로드는 여러모로 무시무시한 부분이 있었지만 누군가와 강제로 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의외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부분도 많았다. 그런 클로드가 누군가에게 지위나 돈을 빌미로 삼아 결혼을 강요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게다가 클로드 스토메어는 부자에 권력자였다. 그런 남자가 자기 싫다는 사람을 왜 그렇게까지 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는가? 깨끗이 안 보고 말지.

―히, 잇. 하, 하지 마요, 흐아, 싫어어. 거기, 그러지 마, 안 돼, 싫, 흣, 흐으읏, 그러지 마, 하읏, 싫어, 싫어어.

어젯밤에 그 비명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이 기지 내에서 클로드가 강제로 줄리안과 결혼한다는 걸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었다. 하지만 어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이 단정한 외모의 남자는 정말 결혼을 강요받고 있는 걸까? 이렇게 상냥한데?

병사는 힐링을 받던 중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기, 일리드 씨. 혹시 각하께 억지로 안기시는 거라면 제가 군사 재판에 증언.”

퍼억.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병사가 고꾸라졌다. 어느새 병사의 뒤에 클로드가 서 있었다. 삐딱한 웃음을 지은 그가 줄리안을 보더니 부드럽게 어깨를 잡아 등을 돌리게 했다.

“사랑하는 줄, 뒤돌아보지 마.”

뭐, 뭐 하려고……. 줄리안이 물어보려 했을 때 이미 클로드는 줄리안의 어깨를 놓아준 뒤였다. 그리고 뒤에서 살벌한 구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줄리안은 깜짝 놀라 어깨를 굳혔지만 소용없었다. 자리라도 뜨고 싶었지만 못에라도 박힌 듯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퍼억, 퍽―. 그 강렬한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있자니 어느새 다가온 제이미가 한마디 했다.

“불쌍한 자식, 포상금 받은 다음 날 병원에 실려 가게 생겼네요.”

“그, 그만두시라고 좀.”

줄리안이 말려보라고 하자 제이미가 고개를 저었다.

“속이 시원해지실 때까지 때리게 두는 게 저 병사를 위해서 나아요.”

퍽, 퍽. 소리가 엄청나게 나는 동안 줄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꽤 오래도록 구타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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