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_0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줄리안과 클로드가 국경 지대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한 달, 세상은 봄의 기운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만물이 새로이 소생하고 계절이 다시 순환을 시작하는 이때, 클로드의 저택에도 새로운 계절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말씀해보세요.”
엄청난 서류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줄리안이 들고 있던 샤프로 톡톡 서류를 치며 집사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집사님?”
“……이 저택의 품위 유지를 위한 최소 비용일 뿐입니다.”
줄리안의 건너편에 앉은 집사의 표정이 몹시 불퉁했다. 칫, 혀를 차며 내놓은 그의 대답에 줄리안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품위 유지를 위해 전체 스태프분들에게 B사의 트렌치코트를 사드렸다고요?”
“…….”
“하인, 하녀분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정원사분까지 받으셨네요.”
줄리안이 서류를 팔락거리며 지적했다.
“정원사는 B사의 트렌치코트 입으면 안 됩니까? 정원사를 무시하는 발언이십니다. 정원사든 하인이든 다들 얼마나 잘해줬는데요. 그 정도는 받아도 됩니다.”
집사가 ‘돈 없는 사람은 B사의 트렌치코트를 입으면 안 되느냐’는 식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와, 님 좀 웃기시네요. 줄리안이 샤프를 내려놓았다.
“아니요, 그분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전 지금 유니폼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왜 유니폼이 명품이 되어야 합니까? 심지어는 그건 코트잖아요. 왜 저택의 유니폼에 코트가 포함되어야 합니까?”
“품위 유지를 위해서죠.”
“명품만이 품위를 유지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저 단정한 옷이었어도 충분했을 거고 저택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코트까지 받으시면서 일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분들이 잘해주셨다고 해도 포상을 결정하는 건 집사님의 권한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제가 이 저택을 책임지고 있는 대리권자였으니까요.”
“이제 권리를 가진 자가 바뀌었으니까요, 전 이 의상비를 깎겠습니다.”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 클로드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확인하게 된 스토메어 가문의 1년 예산안은 처참했다. 도대체 무슨 돈을 이렇게나 많이 쓰는 건가 싶어 일일이 영수증을 받아 대조해보니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임금이 많은 건 넘어갈 수 있었다. 돈을 많이 줘야 인재가 모이는 법이니까. 유니폼을 명품 숍에 의뢰한 것도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트렌치코트를 억 단위로 사서 유니폼이라고 나눠 가진 것을 보자 더는 이해해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유니폼을 2∼3년에 한 번씩 바꾸는 것을 보면 더욱 그랬다. 왜 명품 코트를 2∼3년에 한 번씩 대량 구매하는 겁니까, 예?
하지만 나이 든 분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꼬치꼬치 따지고 싶지 않아서 줄리안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집사는 줄리안처럼 젠틀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직은 권한이 없으시죠. 결혼하시지 않았으니까요!”
대놓고 결혼하지 않았으니 집어치우라는 말을 할 줄이야. 줄리안은 피식 웃었다.
“클로드가 저한테 맡겼으니 이제 권한이 있죠. 다 마음대로 하라던데요.”
이런 배신자…….
집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줄리안은 나이 든 남자의 절망하는 얼굴을 보며 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의상비는 예년의…….”
반으로 깎자는 말을 하려던 줄리안은 그 반액이 얼마인지를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반도 너무 많은데. 대체 왜 의상비라는 항목이 존재해야 하는 거지? 줄리안은 집사를 흘끔 바라보았다. 집사가 안절부절못하며 설마 많이 깎을 건 아니지, 라는 얼굴로 줄리안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줄리안은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일단 클로드에게 물어보죠. 의상이 바뀌길 원하는지.”
“…….”
“그다음에 의상비에 대해 의논해보아요, 집사님.”
아버지 연배의 분께 심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말해도 집사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줄리안은 후, 한숨을 쉬었다. 집사를 생각해서 한 말인데 사실 생각해보면 반으로 깎자는 말보다 더 심한 말이었다. 클로드는 이런 것들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같이 국경에 내려갔다 온 바에 의하면 클로드는 그 남신 같은 외모와는 달리 매우 잘 먹고 잘 잤다. 음식이든 잠자리든 가리는 법이 없었다. 키메라 고기를 한입에 넣었다가 다시 빼려고 했던 클로드의 얼굴이 떠올라 줄리안은 헤식은 웃음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클로드는 단번에 “2∼3년에 한 번씩 유니폼을 바꾼다고? 왜?”라고 되물었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옷을 받아주며 음 하고 애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아니, 진짜로 왜?”
“환기를 좀 시키고 싶으신가 봐요, 집사님은. 지겨우신가 봅니다.”
“뭐 얼마 안 한다면야 그렇게 하라고 해.”
난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게 필요하다면야.
클로드는 입술을 한 번 한쪽으로 올리는 것으로 혀를 차는 것을 대신했다. 줄리안은 클로드의 옷을 든 채 그의 등짝을 바라보다 등짝에 손가락을 대었다. 옷을 벗기 전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근육이 생성되어 있는 등에 대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클로드가 흠칫 놀라 줄리안을 돌아보았다.
“뭐, 뭐 해?”
간지러운 건지 아니면 자극이라도 되는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등 근육이 움직이는 게 예뻤다. 줄리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썼는지 맞혀보세요.”
클로드가 흠칫 몸을 굳히며 물었다.
“……사랑해?”
“전혀 아니거든요.”
때려 맞히기는!
줄리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쓰기 시작했다.
“1.”
클로드가 대답했다.
“네. 그리고.”
“0.”
“0. 0.”
0, 0, 0, 0, 0……. 너 뭐 하냐는 얼굴로 클로드가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등을 쿡 찔렀다.
“대공저의 한 해 의상비 예산입니다.”
가만히 있던 클로드가 휙 고개를 돌렸다. 방금 0이 여덟 개였잖아!
“1억이라고?!”
“적게 쓰면요.”
“1억이 한 해 예산이라고? 고작 옷 따위에 1억을?”
“옷 따위라니요. 옷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의식주 중 첫 번째에 오는 게 옷입니다.”
줄리안이 정색했다. 고작 옷은 아니지. 옷이 얼마나 중요한데. 줄리안의 말에 클로드가 얼굴을 더 구겼다.
“방탄복도 아니잖아.”
“……마음의 방탄이죠.”
클로드가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진심이야……? 그런 눈을 한 클로드가 줄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곧 픽 웃었다.
“뭐 사실 상관없어. 네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 1억이든 10억이든 마음대로 써.”
다 네 돈이니까 마음대로 해.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옷을 마저 벗었다. 참 옷을 잘 벗는 남자다. 훌렁훌렁 옷을 벗은 클로드가 거대한 분신을 드러낸 채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줄리안은 자연스럽게 클로드가 벗은 옷을 주웠다. 하나씩 주워서 제대로 펴며 확인했다. 하얀 와이셔츠 위에 붙은 금발을 보고는 흐음 하고 웃으며 주머니에 넣은 줄리안은 모든 옷을 확인한 뒤 그 옷들을 드레스 룸 한쪽 구석에 치워두었다.
“치우지 마.”
군인답게 빨리 먹고 빨리 씻는 클로드가 어느새 나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옷을 벗겨주거나 머리를 만져주는 건 좋지만 옷을 치우거나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한 해에 의상비로만 1억을 들이는 하인들이 있으니 그들의 일일 뿐, 굳이 줄리안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줄리안이 싱그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뭐.”
클로드가 가볍게 혀를 찼다. 애인에게 잡일 따위 시키고 싶지 않은데 애인이 자신의 옷을 치워줬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겪어오지 못해서일까. 줄리안이 챙겨주는 게 늘 기분 좋았다. 얜 정말 천사인가 봐. 클로드는 허리를 숙여 줄리안에게 입을 맞췄다.
“줄, 오늘은 뭐 했어? 심심하지 않아?”
“하나도요. 평소에도 공방에서 노느라 바쁘고요, 오늘은 스토메어 가문의 몇 년치 회계 자료를 보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회계 자료는 회계사에게 줘.”
그걸 또 네가 왜 봐? 클로드는 줄리안이 일을 한다는 게 탐탁잖았다. 아니, 물론 줄리안이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한다면 대환영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을 챙긴다든가 자신도 관심이 없는 회계 자료를 보며 골머리를 썩일 필요는 없었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일이나 하면서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클로드를 보며 줄리안은 생글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회계사 좀 바꿔도 될까요? 사람이 너무 무르시더라고요.”
내내 집사에게 휘둘리며 그가 원하는 만큼의 재력 행사를 하게 해준 꼴을 보아하니 더 맡기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괜찮은 사람을 알아보라 할 테니까.”
‘금붕어 똥에게’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줄리안은 피식 웃었다.
“제가 알아볼게요.”
“그냥, 넌.”
“알아볼게요. 그래도 괜찮으시죠?”
상류층 후계자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악몽은 무엇일까. 선조가 돈 잘 벌어놓았는데 부모님이 다 까먹고 자신에게 빚만 남겨주는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신물 나게 들은 이야기였건만 언제 들어도 새롭고 안타깝고 무서운 이야기. 대체 왜 재산을 까먹는 것인가. 없는 재산을 불리는 사람도 그렇게 많은데, 라고 생각해왔는데 줄리안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하는가. 클로드처럼 이런 식으로 돈을 관리하면 망하는 게 당연했다.
돈을 잘 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있는 돈을 사기라도 당해서 잃게 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줄리안은 진짜 재산 관리를 자신이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마법이나 좀 할 줄 알지 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역시 벤에게서 도움을 좀 받아야 하나…….
벤자민은 재산을 불리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왕립 아카데미 시절에도 학생들 사이에서 왕으로 군림하던 벤자민이었다. 도박을 유행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여러 전통을 만들어내서, 줄리안이 입학했을 때 벤자민은 이미 졸업한 뒤였는데도 사람들은 모두 줄리안을 보며 ‘벤자민 선배의 동생’이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줄리안이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도 1학년이 줄리안을 보며 ‘벤자민 선배의 동생’이라고 말했으니 알 만했다. 심지어는 형인 윌리엄조차 ‘벤자민의 형’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재무청의 사신이라고 불리는 벤자민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떡할까,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회계사는 마음대로 해. 근데, 줄리안.”
클로드가 줄리안의 뺨에 입 맞추며 말을 걸었다.
“응?”
“공방으로 쓸 방을 달라고 해서 주긴 했는데…… 공방에서 뭐 하고 있어? 뭔가를 만들었다든가 하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네.”
줄리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냥 마법사의 일들이죠.”
클로드가 잠시 줄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줄리안의 입술에 입 맞췄다. 빗방울이 호수에 떨어지듯 키스가 뒤섞였다. 줄리안이 클로드의 목에 팔을 감았다.
“분명 뭔가 하고 있어.”
클로드가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보안 점검도 완전히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4개월에 걸친 강도 높은 보안 체크로 왕궁은 진통을 겪었지만 이제 안정화되었다. 궁내부 장관까지 갈아치운 끝에 왕궁은 청정 지역이 되었다. 아주 잠깐 유지되고 말겠지만 그래도 왕이 그것을 원하니 어쩔 수 없었다.
클로드와 그 참모들은 이제 왕궁에서 철수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참모들도 제 짐을 쌌고 클로드도 마찬가지였다. 클로드가 물건을 박스에 척척 넣다 말고 생각에 잠기자 제이미가 그를 바라보았다.
“뭐, 국왕 전하께서 무엇을 하시든 저희가 알 바는 아니죠.”
이번에 국왕의 행보가 매우 의아하기는 했다.
처음에 국왕은 첩자를 잡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보여준 것이 바로 잡지 기사였다. 뭐 그것도 첩자라면 첩자겠지만 보안 점검을 하고 보니 국왕이 노리는 상대는 그 잡지에 기삿감을 팔아먹은 놈이 아니었다. 국왕은 적국의 첩자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잡아내기 위해서 줄리안을 미끼로 삼기까지 했다. 뭘 노리고 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의도가 있을 것 같긴 한데, 라는 얼굴로 제이미가 고개를 들자 해밀턴이 어깨를 으쓱했다.
“절대로 흘러나가서는 안 되는 일이 있으셨던 것 같긴 한데……. 어쨌거나 요 몇 달은 왕실이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았네요. 보안 점검도 그렇고, 각하의 결혼도 그렇고.”
“결혼은 아직도 진행 중이잖아. 파파라치 놈들도 득시글거리고.”
둘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사이좋게 물건을 챙기고 있는데 클로드가 한 번 더 말했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뒤통수가 아릿아릿한 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짐을 싸고 있던 클로드의 손이 멈추자 제이미가 신경이 쓰이는지 슬쩍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알아볼까요, 각하?”
이용당했다는 건 알고 있고 억울하지도 않다. 그러나 어디에 어떻게 이용당했는지 정도는 제이미도 궁금하던 차였다. 제이미의 말에 클로드가 “뭘?” 하고 물었다.
“국왕 전하의 의도요.”
에드워드의 의도?
클로드가 코웃음을 치며 상자에 물건을 던지듯 집어넣었다.
“무슨 헛소리야. 난 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줄? 줄리안이요?”
“그래, 내 줄리안. 분명 그 작은 머리통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데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분명 뭔가 있는데, 라고 클로드가 혀를 찼다. 제이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국왕 전하 얘기가 아니셨어요?”
또 애인 얘기였습니까? 공과 사를 좀 구분해주심 안 되시겠습니까…….
제이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국왕의 이야기가 아니었냐는 뜻이라기보다는 국왕이 왜 그랬는지는 안 궁금하냐는 뜻으로 물은 것이었다.
“에디야 정치적인 거겠지. 알 게 뭐야.”
클로드가 냉랭히 대꾸했다.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 일의 경우에는 군사적인 목적이 아니었고 그렇다면 클로드가 알 바 아니었다. 물론 군대에도 미친놈처럼 온갖 세상의 정보를 모으는 인간들이 있지만 클로드는 군대의 정보전만으로도 학을 떼서 수도의 정치 문제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관심 없어. 그보다는 내 애인 말이야. 내 약혼자, 내 마누라. 얘가 분명 뭔가를 하고 있는데, 그게 뭔지 좀 알아봐야겠어.”
벌써부터 의처증이십니까?
아오, 눈꼴시어라. 제이미가 대꾸도 하지 않으려다가 멈칫했다.
줄리안, 줄리안이란 말이지…….
다른 사람이라면 유난 떤다고 생각할 일이었는데 상대가 줄리안이라고 생각하자 멈칫하게 되었다. 줄리안이라면 동화를 듣기 위해 동급생에게 졸업 논문을 보여줬던 전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참 차분하고 조신한데 미치면 진짜 한정이 없이 막 나가는 남자. 고문실에서의 줄리안을 떠올리자 제이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작 가시는 부분이 전혀 없으십니까?”
“없어.”
“……큰일이네요…….”
“큰일은 아니고.”
철없는 상관은 애인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제이미도 어떤 면에서는 줄리안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손톱의 때만큼도 신용할 수 없었다.
클로드는 이래 봬도 상식인이었다. 좀 또라이 같은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건 전장에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생긴 기질이었다. 남보다 더 극단적으로 행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지 일단 상식의 틀을 벗어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줄리안은 상식인처럼 보이는 또라이였다. 그냥 또라이도 아니고 진정 처음 보는 또라이였다. 평소 무심하고 차분하던 모습은 사기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위해서라면 뭘 해서라도 가질 남자였다. 논문 사건도 그렇지만 가십에 미친 것만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가 가십을 관리한 사이트를 자세히 읽어보았는데 정말 놀라운 수준이었다. 제이미는 온갖 보고서들을 읽지만 그만큼 자세한 보고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줄리안은 평범한 커플들 사이트에 한 세계를 기록해두었다. 놀라울 정도의 집요함으로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궁정 사교계는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그 줄리안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어떤 부분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셨어요?”
상관의 의처증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확인을 일단 해보자. 제이미가 기둥에 기대서서 상관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꾸 사진을 찍어.”
“예? 그거야 뭐 각하께서는 워낙 외모가 뛰어나시니까요.”
알맹이와는 다르게, 라는 말은 삼키며 제이미가 말을 이었다.
“애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요?”
제이미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빠졌던 클로드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매일 아침 찍어. 일어나자마자 잠에서 깨지 않은 내 사진을 한 장씩 꼭 찍더라고. 처음엔 몰랐는데…….”
“매일 아침이요?”
매일 아침 똑같은 사진을 찍는다고? 심지어는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을?
그건 확실히 좀 이상했다. 제이미가 얼굴을 굳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클로드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뿐만이 아니야. 옷을 골라주는 건 둘째치고 손톱 발톱까지 깎아준다고.”
“…….”
“처음에는 시종이니까 몸에 익어서 이렇게 잘해주나 보다 했는데 점점 이상하단 말이야.”
평범한 자랑 같기도 하면서 묘하기도 하고…….
제이미가 머리를 갸웃했을 때 클로드는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을 하나 보고 얼굴을 굳혔다. 맞아, 이게 있었지. 그는 손을 뻗어 고전적인 디자인의 노트를 들었다. 색만 다르지 똑같이 생긴 노트는 커플의 교환 일기용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잠금 장치가 풀려 있는 노트는 평범한 노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클로드는 노트를 펼쳤다.
『사랑하는 줄스.』
『사랑하는 루시.』
어디를 펼쳐도 언제나 일기는 사랑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문구가 클로드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지랄 중에 상지랄.”
클로드가 냉랭한 비웃음을 던지며 종이를 팔랑팔랑 넘겼다. 내내 사교계 이야기였다. 어느 후작부인이 어느 백작을 꼬드겼네. 왕비가 후작부인의 정부인 공작과 보란 듯이 잤네. 후작부인은 왕비의 생일에 케이크에 실수인 척 물을 뿌렸네. 왕비와 후작부인의 전쟁 같은 나날들을 기록한 페이지들을 읽은 클로드는 칫, 혀를 찼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루시. 늘 써주는 거 잘 읽고 있어. 내 사랑을 함께 보낼게. 언제나 건강해. 내 영혼이 너와 함께하고 있어.』
“루시드 레플래스, 요즘 뭐 하냐?”
클로드가 물었다. 제이미가 클로드의 어깨 너머로 흘끔 일기를 훔쳐본 뒤 대답했다.
“사람을 죽여도 심신 미약으로 풀려날 것 같은 상태로 폐인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왜?”
“시종 일을 되게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사랑 운운에 화가 나 더 때려주러 갈까 싶은 모양인데 제이미가 보기에 루시드는 충분히 괴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가십에 미친 줄리안과 영혼의 친구였던 루시드 레플래스였다. 줄리안은 취미 생활을 대체할 연애나 건졌지, 루시드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다.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평생 직장일 줄 알았던 시종직과 영혼을 바친 취미를 동시에 잃었으니. 살맛이 안 날 텐데 거기 가서 클로드가 굳이 재를 뿌릴 것까지야 있겠는가. 직장과 취미 생활을 동시에 잃게 한 장본인인데.
사실 제이미는 루시드를 한 번 만나러 갔었다. 그날은 안개비가 내렸고 루시드는 또 근처 마켓에서 잔뜩 술을 사 오는 길이었다. 수염이 덕지덕지 나 있는 노숙자의 몰골을 한 루시드에게 제이미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하신 거 없으시잖아요.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루시드가 물었고 제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피해 보시게 해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자신은 군인이었다. 그리고 루시드는 분명 위태로운 일을 했다. 보안 체크에 걸릴 만한 행동이었고 징계 해고감이었다. 사실 루시드의 상황은 그 본인이 자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이미는 사과하고 싶었다. 고문실에서 줄리안은 울었다. 평생 하고 싶었던 일, 자신이 사랑스러워하던 일을 빼앗겨 울음을 터뜨렸다. 줄리안에게는 클로드가 있었다. 미안해, 줄리안. 온 마음으로 안타까워해주던 연인이 있는 줄리안과는 달리 루시드는 혼자였다.
‘그 이야기를 하러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죄송합니다.’
‘한가하시네요.’
루시드가 집으로 들어갔고 제이미는 한숨을 쉬며 돌아왔었다. 그때 생각이 나자 제발 상관이 그 불쌍한 사람을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이미가 한 번 더 루시드의 불쌍한 상황을 말해주려 했을 때였다.
“루시드 레플래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데?”
해밀턴이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뭐? 클로드와 제이미가 동시에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잘 살고 있다고? 클로드보다는 제이미가 더 당황했다. 그때 그 처연한 얼굴이 아직도 떠오르는데 잘 살고 있다고?
……뭐, 잘된 일이긴 한데 이 떨떠름한 기분은 뭘까. 제이미가 불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을 때였다.
“요즘 줄리안하고 연락하면서 잘 지내는 것 같던데요. 저택에도 종종 놀러 오고요.”
다른 참모인 로빈이 말했다. 그 순간 모두의 눈이 그에게로 몰렸다. 뭐가 어째? 저택에 놀러 왔어? 클로드는 기가 막혀 눈을 크게 떴다. 줄리안에게 사랑한다고 수천 번을 말한 외간 남자가 내 집에 드나들고 있다고?
“언제부터?”
제이미가 물었다. 언제부터 둘이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거의 헐떡거리는 수준으로 다급하게 묻자 로빈이 참모들을 흘끔 둘러본 뒤 어 하고 중얼거렸다.
“모르셨어요?”
“언제부터 둘이 다시 만났느냐고 묻잖아!”
멀쩡하게 잘 지낸다는 말을 할 때는 무심하기만 했던 해밀턴이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줄리안 일리드와 루시드 레플래스가 만나다니 느낌이 좋지 못했다. 심지어 종종이라니, 정기적으로 만났단 말이야? 그 둘은 만나서는 안 될 조합이었다.
해밀턴이 루시드 레플래스를 취조하며 알게 된 게 하나 있다면 루시드와 줄리안의 사이는 보통의 친구 사이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루시드는 줄리안에게 관심이 없었다. 줄리안이 무엇을 하는지, 누구와 이야기하고 어떤 것에 감명을 받고 건강 상태는 어떻고…… 이딴 것에 루시드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루시드가 관심을 가진 대상은 줄리안이 아니라 가십이었고 줄리안은 같이 가십을 좇은 동료에 불과했다. ‘줄리안 일리드’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가십을 사랑하는 줄리안’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취미 생활이 끝장났으면 둘은 당연히 갈라져야 했다.
그런데 둘이 정기적으로 만난다?
나중에 고문실에서가 아닌 멀쩡한 곳에서 줄리안을 취조해본 바로는 줄리안도 똑같았다. 인간 루시드 레플래스에게는 관심도 없이 가십 사냥꾼 동료로나 인식하고 있는 줄리안이었다. 어떻게 보면 독하다 싶을 정도로 건조한 관계였고 어떻게 보면 진정 영혼으로 맺어진 사이다 싶은 우정이었다.
세상 사람들처럼 수다 떨고 술 마시려고 만날 사이는 아니었다. 용건 없이는 서로 전화도 한 통 안 할, 그런 관계였다.
“각하, 이상합니다!”
해밀턴이 소리쳤고 제이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가시죠, 각하. 뭔가 있습니다.”
클로드는 흘끔 일기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보고 싶어, 루시. 사랑해.』
“나한테는 그렇게 아끼더니, 시발.”
무슨 놈의 일기가 매 장마다 사랑해, 보고 싶어가 있는지. 이런 놈과 다시 만난다고? 나 몰래?
클로드는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줄리안은 늘 클로드에게 잘 지냈느냐, 무슨 일이 있었느냐, 라고 물었었다. 그랬기 때문에 클로드도 줄리안에게 물었었다. 오늘은 뭐 했는가. 잘 지냈는가. 단 한 번도 줄리안은 친구가 놀러 왔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부하들의 생각처럼 줄리안과 루시드가 무슨 일을 벌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십을 좇을 때도 그들은 3년이나 둘만의 비밀로 일을 진행해왔다. 둘은 분명 요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성적이고 끈질긴 사람들이었다. 3년이나 그런 자료를 만들었으면 인터넷 등에 공개하고 싶었을 법도 한데 그들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둘이서 한 세계를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이다. 설사 둘이 새로운 취미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들은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공개하기는커녕 더욱더 음침하게 숨길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클로드는 혀를 찼다. 줄리안은 자신의 것이었다. 자신이 줄리안의 것으로 자각하고 언제나 그에게 일상을 말해주는 만큼 줄리안도 그렇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줄리안은 감쪽같이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짓거리들을 하는지 내가 이 눈으로 똑똑히 봐주지.
클로드가 전투적으로 웃었다.
어느새 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집사와 하인들이 마중을 나와 인사를 했지만 클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차에서 내려 바로 본관으로 들어가려다 잠시 방향을 꺾었다. 정원사들이 쓰다 잠시 내려놓은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전지가위를 들었다.
“가, 각하. 집사님께 열쇠가 있을 겁니다.”
또 험악하게 왜 이러십니까. 제이미가 말리려고 했을 때였다.
“아냐, 없을걸.”
클로드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클로드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그 뒤를 따르는 집사가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며 물었다.
“무슨 열쇠 말이십니까?”
“줄리안의 공방 열쇠.”
클로드의 말에 집사가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제가 한 번 열어봤었는데…… 열쇠가 안 맞더라고요.”
하도 줄리안이 저택 예산을 가지고 달달 볶기에 홧김에 한번 열어보려 했었다. 공방에서 뭘 하느라고 매일 반나절씩 처박히는지 궁금했다. 혹시 뭔가 위험한 일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마법사들이 금지된 일을 한다는 이야기는 도시 괴담으로 많이 떠돌고 있었다. 약점이라도 잡아보자. 내 의상비! 집사는 부들부들 떨며 줄리안의 공방 문을 열기 위해 온갖 열쇠들을 동원했지만 어느 열쇠도 맞지 않았다.
“그랬겠지.”
뻔하지. 줄리안은 이런 점에서는 철두철미했다. 아마 열쇠를 빼돌렸든지 아니면 열쇠 구멍을 아예 망가뜨리고 마법으로 잠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열쇠 구멍에 건 마법은 문을 부숴버리면 그만이었다.
클로드는 재빨리 줄리안의 공방으로 걸으며 물었다.
“줄리안은 어디에?”
“지금은 서재에 계십니다.”
요즘 저택의 지출 내역을 본다며 늘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리고 반나절 틀어박힐 때마다 집사가 쓸 수 있는 돈은 반, 반의반, 반의반의 반으로 뚝뚝 떨어졌다. 집사는 줄리안을 어떻게든 서재에서 끌어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럼 됐어.”
공방에 없는 편이 나았다. 줄리안이 마법을 써서 방해하면 곤란하니까.
클로드는 줄리안의 공방 앞으로 가서는 씩 웃었다. 대체 무슨 지랄을 하는지 한번 보자고, 줄. 그는 단숨에 전지가위를 휘둘렀다.
가위는 자르라고 있는 것일 텐데 웬만한 해머 못지않았다. 단 한 번에 문에 구멍이 났다. 하인과 하녀가 동시에 클로드의 팔을 바라보았다. 아직 코트를 입고 있는 팔은 근육이 도드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공포였다. 멀쩡해 보이는 팔로 원 스윙에 문을 격파하다니.
클로드가 전지가위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구멍으로 손을 넣어 안쪽에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복도 끝에서 줄리안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애인 단속?”
클로드가 픽 웃으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줄리안이 성큼성큼 다가왔고 곧 고용주가 될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하인과 하녀들이 뒤로 물러났다. 집사는 잠시 망설였지만 예산안을 떠올리고는 그도 하인과 하녀 옆으로 뒷걸음질했다.
줄리안과 눈이 마주친 해밀턴의 머릿속에 트라우마처럼 박힌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법사한테 저주받아본 적 있습니까, 풀코스로?
해밀턴은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그를 필두로 줄리안에게 저주를 받고 싶지 않은 참모들이 다들 문에서 멀어졌다. 줄리안이 공방으로 들어가기 전 모두를 돌아보았다.
“차라도 드시고 계셔주지 않으실래요?”
거절하면 죽여버린다, 는 환청이 말 뒤에 따라붙었다. 싱긋, 줄리안이 웃었다. 클로드의 참모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줄리안의 이런 얼굴을 그들은 이미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 지랄 맞던 줄리안과 조우하고 싶은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아, 맞다. 목이 마르네요. 목이 너무 말라서 뭐라도 좀 마셔야겠습니다.”
특히 심하게 겪었던 해밀턴이 간절히 차를 갈구하며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 아! 저희가 차를 드릴게요! 아주, 맛있는 차가 있어요!”
줄리안의 분노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만은 알아챈 하인과 하녀들이 서둘러 해밀턴을 쫓아갔고 그 뒤로 참모들도 재빨리 움직였다. 사람들이 마치 물소 떼처럼 사라지고 나서 남은 것은 줄리안과 클로드뿐이었다.
줄리안의 공방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법사의 공방과는 달랐다. 비커나 플라스크 따위가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클로드의 서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클로드는 흘끗 주변을 둘러보고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앨범을 꺼내 들었다.
“내려놓으시라고요!”
줄리안이 험악하게 소리 지르는 순간 클로드는 내려놓기는커녕 앨범을 펼치고 있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지 어디 한번 보자. 도대체 나한테는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 빌어먹을 루시인지 루시퍼인지에게만 말할 수 있는 게 뭔지.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며 클로드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4월 27일, 아침.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진 속에서 자신은 자고 있었다. 그 옆에는 코팅되어 있는 머리카락이 있었다. 이거, 내 머리카락이야, 설마? 클로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왜……. 그 옆에는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사진이 있었다. 옆모습이었고 누가 봐도 도촬이었다. 마법으로 한 게 분명했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 도촬을 당했는데 마법이 아니라면 몰랐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날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황무지에서 찍힌 사진. 기지로 돌아와서 찍힌 사진.
클로드는 설마 하는 얼굴로 다음 장을 넘겼다. 4월 28일, 아침. 그리고 어제와 별다를 바 없는 자신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4월 29일, 아침. 4월 30일, 아침. 5월 1일, 아침……. 클로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냥 취미예요.”
칫, 줄리안이 혀를 찼다. 그 얼굴을 보다 잠깐 하고 클로드는 다시 앨범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보니 4월 28일에 찍은 사진 중 일부는 무슨 잡지에 실린 사진이었다. 그래, 어떤 놈이 이렇게 가까이서 도촬을 했나 했더니…… 그놈이 바로.
마치 ‘내가 아직도 네 엄마로 보이니?’와 마주한 것 같은 눈으로 클로드가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줄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사랑해서 그랬어요.”
“개수작 부리지 마!”
이게 무슨 사랑이야, 이게! 지금 그 말투 어디에 사랑이 있었냐!
클로드의 고함에 줄리안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이렇게 금세 들킬 줄은 몰랐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줄리안은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얼굴을 들었다. 그는 껄렁하게 웃었다.
“딱히 나쁜 일도 아니잖아요. 제가 전하를 이렇게 좋아한다는데.”
“야, 이게 뭐가 좋아하는 거야? 사람을 아이템으로 삼아 갖고 노는 거지!”
“그렇다고 제가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러면 싫으실 거 아니에요.”
줄리안이 천천히 걸었다. 그는 나지막이 워드를 외웠다. 그러자 하늘에서 안개꽃과 장미꽃이 같이 어우러져 팔랑팔랑 내려왔다.
“때려치워!”
클로드가 손으로 허공을 휘갈겼다. 장미꽃과 안개꽃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녹아 사라졌다.
아, 요거 요거 안 먹히네……. 씁, 어쩐다.
줄리안은 내가 좀 매너리즘이 있었나, 라고 생각하며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상식적인 남자는 자신의 삶이 몰래 기록되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앨범을 몇 장 넘기더니 고함을 질렀다.
“시발, 누드도 있잖아!”
“제가 벗으라고 한 거 아니고, 전하께서 훌렁훌렁 벗고 다니셨잖아요.”
줄리안이 억울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클로드는 줄리안의 책장의 앨범들을 샅샅이 뒤졌다. 전부 다 자신에 대한 것들이었다. 머리카락이나 영수증 같은 것들도 보였다. 줄리안의 메모도 있었다. 자신이 뭘 했는지 말해주면 거기에 메모를 해둔 것이다. 싫어하는 음식, 좋아하는 음식……. 그 모든 것이 메모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설마!
클로드는 앨범을 집어 던지고 줄리안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기세가 흉흉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목숨을 위협받는 것처럼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안은 클로드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았다. 에에이. 줄리안이 클로드의 대리석 같은 뺨을 쿡 찔렀다. 그러자 클로드가 그 손목을 아프게 잡았다.
“너, 이걸 설마 루시드 레플래스와 같이 본 건 아니겠지?”
클로드가 으르렁거렸다.
“에이, 설마요. 우리 아리따운 애인님 몸을 어떻게 남과 같이 봅니까.”
시발, 도대체 이 능글맞은 새끼는 누구야?
클로드는 사기 결혼을 당한 심정으로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아우, 이걸 콱.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줄리안이 “아야”라고 한 마디 하자마자 손에서 힘을 풀고 말았다. 손을 놔주자 줄리안이 제 손을 가져가 가볍게 주물렀다. 진짜 아팠나 싶어서 클로드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럼 레플래스와는 뭘 한 건데?”
꼴을 보아하니 사랑한다 보고 싶다 지랄했을 것 같진 않은데, 뭘 하느라고 둘이 그렇게 비밀 회동을 가지셨나? 이딴 걸 보니 잠시 끓어올랐던 질투심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아직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이 둘은.
“루시가 새 직업을 가졌더라고요.”
“새 직업?”
직업이 잘 맞았나 보지? 제이미가 봤을 때는 다 죽어가고 있었다는데 정작 해밀턴이 봤을 때는 멀쩡하다고 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시종직을 그만두고 차선으로 택한 직업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엿 같은 취향을 만족시킬 만한 직업이 세상에 많지 않을 텐데.
“음, 사진가…… 같은 거랄까?”
“사진가.”
미심쩍은 얼굴로 클로드가 줄리안의 말을 따라했다. 사진가.
“예, 그 길거리 풍경 사진 같은 건데, 풍경에 사람이 들어가요. 좀, 유명한 사람들.”
“파파라치란 얘기잖아! 내 사진을 걔한테 판 거야?!”
클로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지만 네가 나에게 이럴 줄이야. 클로드는 아연한 눈으로 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줄리안이 살포시 손을 클로드의 목에 감았다.
“불쌍하잖아요. 저 때문에 직장도 잃고, 전하께서 두들겨 팼다면서요. 하마터면 실명할 뻔했었대요. 후유증이 남았을지도 몰라요.”
“지랄. 후유증이 남았을지도 모를 놈이 파파라치를 해?”
“위자료로 준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
“맞아요, 전하의 예쁜 모습이 잡지에 실렸으면 했어요. 그 잡지에 실리는 누구보다도 예쁜데,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잡지를 제가 갖고 싶었어요.”
예쁜 네 얼굴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예쁜 네 사진을 갖고 싶었어. 예쁜, 예쁜……. 줄리안의 예쁜 애인은 줄리안이 말하는 예쁘다는 말에 한없이 약했다. 줄리안은 뒤꿈치를 들고 클로드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서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줄리안이 폭, 클로드의 품에 들어왔다. 클로드는 줄리안을 안지도, 뿌리치지도 못한 채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시발. 클로드가 한 번 욕을 하더니 줄리안을 확 끌어안았다. 너무 세게 끌어안아서 숨이 컥 막혔지만 줄리안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내가 너 때문에 미쳐…….”
클로드가 앓는 소리를 내서 줄리안이 키들거렸다.
“저도요. 저도 전하 때문에 미치고 있어요.”
“웃기지 마. 넌 원래 이랬어.”
어디서 약을 팔아? 클로드가 중얼거렸고 줄리안은 그의 품에서 생글거렸다.
“그래도 전하를 정말 좋아해서 이래요.”
“…….”
“사람을 이렇게 좋아해본 건 처음이에요. 제가 좀 정상이 아니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전하께서 책임을 져주셔야죠.”
줄리안은 클로드의 어깨에 붙은 머리칼을 하나 발견하고는 자연스럽게 떼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클로드가 줄리안을 놔주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줄리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을 보는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고동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고 반짝거리며 행복해한다. 클로드는 그 눈을 바라보다 체념하듯 속삭였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머리칼이 반짝거렸다. 오늘의 드라이도 참 잘되었군. 줄리안은 흐뭇하게 여기며 마주 웃었다.
“다, 사랑해서 그래요.”
세뇌하듯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줄리안을 바라보다 클로드는 천천히 줄리안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았다. 키스는 길고 보드라웠다. 달콤하고 뜨거웠다.
확실히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