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7)

<-- 박동 --> 

                                                

사전선포를 신선하게 때려준 남자는 무슨 뽕이라도 빤 건지 구태여 꼭, 병실에서 아들 병간호를 하고 자야겠다며 박박 우겼다. 그리곤 부득불 내 침대를 차지하고 드러누웠다. 이불까지 뺏고, 불편하지도 않은지 정장 바지에 셔츠를 그대로 입고 누운 꼴을 보니 기가 찼다. 덕분에 나는 병실에 있는 소파에 링거를 질질 끌고 가 누워야만 했다.

침대를 내줬으면 얌전히 쳐 자면 될 텐데, 새벽 내내 심심하다고 지랄을 하면서 내 잠을 깨웠다. 종국에는 내 귓가에 대고 자신의 잘난 영어 회화 솜씨를 뽐내던 남자는 새벽같이 일어나 나가버렸다.

퀭한 몰골로 침대에 앉아 삶을 회상했다. 내가 이딴 새끼를 새아빠로 들이자고 엄마한테 그렇게 잔소리를 퍼부어대며 살았던 게 아닌데… 군대에 있을 때 엄마가 전화로 또 남자를 잘못 만나 얻어맞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 삶에 회의적이지 않았다.

자기가 굶기고, 병원에 보내놓은 주제에 호사는 다 누리고 꺼지는군. 가다가 천재지변으로 사고라도 나서 죽었으면 좋겠다.

어제 남자가 만들어둔 담배 구멍을 본 간호사가 난리를 치며 병원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에 대해 줄줄 내뱉기 시작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살의라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악마였다. 아무래도 이근영이 아니고 근영이네 아버지가 있는 교회라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이근영은 짝퉁이라 글렀어. 이건 정말 어떻게 악마 퇴치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엎어져서 모자란 쪽잠을 시도했다.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느물느물 올라오는 걸 보며 하품을 쩍 하는데 포부도 당당하게 비서가 다시 등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출근 안 하세요?”

비서가 아주 자애로운 미소를 띠면서 웃었다.

“방금 사장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제 업무를 걱정해주시다니, 마음이 넓으시군요.”

“……네, 뭐.”

꿈보다 해몽이라니까 마음껏 떠들어라. 링거를 치우고 가벼워진 팔을 뻗어 이불을 다시 슬슬 끌어당겼다. 아주 자연스럽게 잠을 자려고 하는 나를 잡아 일으키며 비서가 옷을 건네주었다.

“…뭐에요?”

“퇴원하셔야죠.”

“전 아직 환자인데.”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매우 건강하다고 하시는군요.”

“어제 잠을 못 자서 어지러워요.”

누가 대본이라도 써줬는지 비서가 유창하게 줄줄 헛소리를 읊었다.

“환상적인 밤이라도 보내셨나 봅니다.”

눈 앞에 총이 있었다면 쏴버렸을 거다. 장담한다. 평생 감방에서 썩는게 낫지, 이런 미친놈들 사이에는 끼여있지도 못하겠다. 정말 범죄자가 될 것 같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서가 준 옷은 전부 가격표도 안 뗀 새옷이었다. 남자가 입는 것과 비슷한 정장을 들어서 펼쳤다. 이렇게 제대로 된 정장은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 처음 입는다. 물론 그 정장은 수재민 불우이웃 돕기 정장 떨이 한 벌 5만 원, 이런 도깨비 시장 같은 곳에서 산 거였지만.

환자복을 휙 벗어 던지고 바지를 입고 벨트를 채웠다. 등을 돌린 채 셔츠 단추를 채워 넣고 있으니 비서가 말했다.

“살이 좀 찌시는 게 좋겠군요.”

“어느 누가 쫄쫄 굶겨서.”

코웃음을 치면서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연녹색과 붉은색이 섞여 있는 격자무늬 넥타이였다. 넥타이를 어떻게 매더라. 고민하다 맞선을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대충 매듭을 잡아 꽉꽉 묶었다.

마지막으로 재킷을 걸치고 뒤를 돌아섰더니 비서가 자연스럽게 구두를 한 켤레 내밀었다. 어디 가는 건데 차려입게 하는 거지. 구두에 발을 밀어 넣고 허리를 펴자 칭찬이라고 비서가 혀를 놀렸다.

“옷이 날개라고,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뭐 혈연관계에요?”

“네?”

“아니, 그 사람… 아버지랑 비서님이랑 말투가 아주, 비슷해서요.”

나는 최대한 빈정거리는 거였는데 비서가 황송한 듯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혈연이라뇨, 아닙니다. 물론 사장님 밑에서 오래 일을 하긴 했죠.”

“아아.”

오래 일하면 나도 저딴 말버릇을 가지게 된다는 걸까. 벌써 내가 미래에 가지게 될 인격으로 우울했다. 비서는 내 등을 떠밀어 병실 바깥으로 나가며 주절주절 설명을 시작했다. 이제 곧 정식으로 남자의 아들이 될 나를 위해 특별 사회생활 교육을 시작하기로 했단다. 사회 교육이라니, 그런 건 남자가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세단에 올라탄 비서가 내게 손목시계를 건넸다. 대충 비싸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손목에 시계를 채웠다. 그다음 받은 것은 휴대폰이었다. 신형 스마트폰을 건네주며 비서가 몇 가지를 다시 설명했다.

“기본적인 연락처는 미리 저장해두었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한테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아아, 네.”

“사장님께서는 오늘 하시는 일과에 대한 보고서가 자필로 받아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놈의 자필.”

“원래 손으로 쓰면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죠.”

손목 인대가 나가겠지. 종이와 볼펜을 건네받으며 성의 없이 제목을 찍찍 그어 적었다. 초등학생 글씨로 보고서, 라고 적는 걸 보고 비서가 또 혀를 끌끌 찼다.

“보고서는 영어로 써오라고도 하셨습니다.”

“…뭐라고요?”

“어제 생생한 영어 교육을 해줬으니 그 정도는 하실 거라고…”

이 새끼가 장난하나. 힘을 과하게 줬는지 종이 한쪽이 구겨졌다. 그렇다고 힘을 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를 갈면서 남자에 대한 분노를 상기시켰다. 남자는 인성이 제대로 된 쓰레기였다. 폐기 처분도, 분리수거도 불가능한 핵폐기물 말이다.

비서는 나를 데리고 재미없는 미술관 관람을 시켰다. 나는 딱 한 마디를 썼다. I’m boring. 비서에게는 일부러 보여주지 않았다. 분명히 또 헛소리 잔소리를 퍼부을 것이 분명했다. 한통속인데 뭐. 클리어 파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불량하게 콘서트장으로 갔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걸 나 혼자 들어야만 했다.

옆에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고, 상을 몇 개를 타고 어쩌고 떠들었지만, 도저히 귀담아들을 수가 없었다. 쿵작거리는 평범한 댄스 노래나, 조용한 노래를 들어봐야 발라드에 방과 후 수업 종이 전부였던 나에게 클래식은 쥐약이었다. 그 넓은 홀에 하필 나만 있는 바람에 졸지도 못하고 억지로 허벅지를 찌르며 졸음을 참아야 했다. 이쯤 되니 남자가 어젯밤 일부러 나를 재우지 않은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끝나고 겨우겨우 기어 나와 차에 올라타서 떨리는 손으로 한 문장을 겨우 적어 넣었다. I’m Sleepy. 물론 이것도 비서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밥을 먹으라고 데려간 곳에서는 무슨 예절 교육가가 내 포크와 나이프 질을 1초에 한 번씩 지적했다. 밥을 먹으라는 거야 교육을 받으라는 거야. 짜증이 나서 포크를 내팽개치고 일어났더니 시선이 죄다 집중이 되었다. 얼마나 잘난 놈들만 오는 곳인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시선을 흘끔거리는데 민망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울하게 샐러드 포크를 잡는 나를 보고 교육가가 다시 손등을 때렸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보고서에는 ‘I’m so Hungry.'라고 적었다. 겨우 세 문장을 쓴 것뿐인데 갑자기 영어 천재가 된 느낌이 들었다. 허벅지 사이에 파일을 끼워 넣고 거드름을 부리듯 앉아 이래저래 시간을 보내자 비서가 물었다.

“벌써 다 쓰셨습니까?”

“네.”

“영어로요?”

“천재라서.”

비서는 내 보고서를 미심쩍은 눈으로 흘낏거렸다. 절대 보여줄 수 없어 파일을 품에 꼭 끌어안자 포기한 듯 고개를 돌렸다. 나도 반대편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창문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조금 굶었다고 창백해진 안색을 한 사람이 있다. 몸에 꼭 맞는 비싼 정장을 입었는데, 이상하게 오래된 티셔츠에 짝퉁 아디다스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을 때보다 기쁘지 않았다. 어릴 때는 삼선 슬리퍼만 신어도 삼디 다스라고 좋아했는데. 머리를 창문 한쪽에 기댔다. 딱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차 안이 불편하다. 이대로 나가 대충 옷을 입고 낮술이라도 하면서 아르바이트할 만한 곳이나 찾았으면 좋겠다.

입술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왔다. 처음 해보는 일들은 죄다 재미가 없었다. 미술도, 음악도, 비싼 코스 요리도. 맛도 없는 걸 왜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안달복달해가면서 먹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건 내가 아니고 좀 더 여유롭고, 문화에 투자하는 법을 어릴 때부터 배운 사람들이나 해야 하는데.

“피곤하시면 좀 주무셔도 됩니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봤는지 비서가 내게 말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차는 아직도 어디론가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짙어진 졸음을 겨우 꺼냈다. 친절한 척 꺼내주는 담요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어젯밤 남자가 내 목을 강제로 끌어안고 귓가에 떠들던 영어 단어가 빙빙 뇌를 맴돌았다.

꿈에는 친부가 나왔다. 친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팬다는 점에서는 남자와 비슷하다. 아니지, 남자가 친부와 비슷한 거다. 친부는 나이가 쉰이 넘었으니까. 그에 비해 남자는 우리 엄마랑 결혼을 한다면 머리가 돌은 게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젊다. 젊으나 야망은 없는 재력가…

친부의 집은 정신병이 심했다고, 나중에 엄마가 알려주었다. 내가 스무 살 때 이야기를 해줬나, 열아홉에 이야기를 해줬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냥 할머니도, 증조할머니도 엄마나 나와 비슷한 취급을 당하면서 사는 게 그 집의 오래된 세습이라고 말하며 가슴을 치던 내용도 생각났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야, 엄마는 세간의 진리를 몇 번이고 외우다가도 실패했다.

아마 이번에도 남자가 매끄럽게 내뱉는 모든 달콤한 말에 이성을 빼앗기고, 나는 괜찮을 거란 근본 없는 믿음을 가졌겠지.

사람의 외관은 첫인상을 크게 결정한다고 했다. 남자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력과, 아름다운 얼굴을 동원해서 달콤하게 엄마를 구슬렸을 것이다. 원하던 상대가 손바닥에 툭 떨어져 태엽 인형처럼 파닥파닥 뛰어다니니 얼마나 즐거웠을까. 그 성격에. 아슬아슬하게 출렁거리는 머그잔을 굳이 두들겨 커피를 넘쳐 흐르게 하는 그 악취미가 어디 갈 리가 없다.

꿈에서는 화난 친부와 남자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나와 나를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걷어찼다. 나는 샌드백이 아니야. 화를 냈더니 남자가 아름다운 얼굴로 속삭인다.

“……나.”

내게 화를 내기 전처럼 서늘하게 젖은 앞머리를 넘기며 나를 불렀다.

“…어나.”

입 모양을 제대로 읽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목소리가 아득하게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뒤통수에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일어나랬지.”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뒷좌석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나 보다. 머리를 흔들며 주변을 살폈다. 비서와 운전기사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없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보이는 곳에 주차된 차 주변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내가 갈긴 성의 없는 보고서를 둘둘 말아 쥐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니 내가 쓴 내용을 읽긴 한 모양이었다. 별로 보여주고 싶진 않았는데.

“이것도 보고서라고 써두고 잠을 자?”

“……”

“초등학생도 너보단 영어 잘해.”

조금 울컥했지만 찔리는 게 있으니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내 목덜미로 손을 뻗어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이건 또 뭐야. 넥타이도 못 매? 등신이니?”

“사지 멀쩡한데요.”

“멀쩡한 티가 나질 않으니 하는 말이지.”

남자가 종이를 박박 찢어 차 바깥에 내다 버렸다. 저 꼴이 날 걸 알아서 미련도 없었다. 턱을 한쪽에 괸 채로 퍼질러져 있자 남자가 내 목을 조를 듯 넥타이를 조이며 짜증을 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곳에 보내줘도 이따위라니… 앞길이 구만리라 한숨이 나온다.”

“그럼 지금이라도 새로운 여자를 찾아봐요.”

불편하게 잤더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자가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한테 공들인 시간이 있는데.”

“그럼 참으시던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텅 빈 주차장만 구경했다. 차 몇 대가 벽 쪽에 나란히 주차된 걸 빼면 귀신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에게 원한을 가진 처녀 귀신이라도 나오면 좋을 텐데. 옆으로 시선을 흘낏 줬다. 바쁘지도 않은지 내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품에서 뭘 하나 꺼내 내밀었다.

작은 카드였다. 오, 드라마처럼 한도 무한대의 카드라도 주는 걸까. 살짝 기대하면서 손바닥 위를 내려다보았다.

주민등록증이었다. 사진도 고등학생 때 사진이 아니라 지금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누가 이름 물어보면 양이소, 라고 예쁘게 대답해.”

나도 신청하지 않은 주민등록증을 왜 남자가 내미는지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돈과 권력이면 다 되는 세상이겠지 뭐.

“정이소가 좋은데.”

소심하게 말을 꺼냈더니 남자가 부드럽게 받아쳤다.

“양이소가 더 예뻐.”

“왜요?”

“일부러 물어보는 거지?”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위에 시켜뒀어.”

“……”

“양이소.”

단지 성이 변했을 뿐인데, 낯설어진 이름을 남자가 자연스럽게 부른다. 원래부터 내 이름이 이랬다고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안에 쥐고 있는 주민등록증이 뜨거웠다.

“아들.”

“왜요.”

“널 보면서 느낀 건데.”

“뭔데요.”

“너 같은 아들은 정말 있어도 괜찮은 것 같아.”

젊은 남자가 목을 울려 웃으면서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남자의 매끈한 얼굴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요, 나도 당신 같은 아버지가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아요.”

“정말?”

“네. 어디 가서 말로는 안 질 거 같아서.”

내 대답에 남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내 형편없는 영어 실력을 비웃는 것도, 주민등록증을 넘겨주는 것도 남자가 정말로 내 아버지가 된 느낌이 들었다. 내 성이 바뀌었다면 엄마와 혼인 신고도 끝이 났겠지. 언제부터 집에 들어가게 되려나. 재벌 집 입성이라니. 세상은 살고 볼 일이다.

“정말 안 질 거 같아요.”

응? 남자가 내 혼잣말을 듣고 반문한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위로, 위로 끝이 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수치를 바라보았다. 위로 높이 올라갈수록 사람은 추락할 텐데. 짧게 한숨이 나왔다.

모르겠다. 언제 내 인생이 내 것이긴 한 적이 있을까. 불편한 정장을 입은 몸을 좌우로 비틀었다. 내 어깨를 툭 치고 걸어나가는 남자를 따라 나갔다. 남자가 일하는 곳이 보였다.

결혼이라고 해도 결혼식을 치를 일은 없었다. 누구 좋자고 결혼식을 치르겠는가. 이제부터 너는 양이소야, 하는 통보도 받았으니 일이 속전속결로 처리가 된다고 해도 무서울 게 없었다.

이제는 정까지 든 호텔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뒤 이사를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가 나름 신경을 썼는지 고운 단장을 하고는 차에서 뛰어나와 나를 끌어안았다. 걱정을 많이 했는지 드물게 야윈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엄마를 달래주며 차에 올라탔다. 비서는 몇 번이나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우리를 다그치더니 납치라도 하는 것처럼 재빠르게 우리를 거대한 집 앞에 내려놓았다.

엄마는 긴장이 되는지 거의 기어가듯 떨면서 차에서 내렸다.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지만 비서도 운전기사도 웃지 않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둘 다 오늘따라 날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이미 다 아는 사이에 집에 입주한다고 뭐가 얼마나 변한다고. 나는 태평하게 굴었고 엄마는 점점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내 옆에 딱 달라붙었다.

몇 개 안 되는 짐을 사용인에게 넘겨준 비서가 앞장서서 집을 안내했다. 양옆으로 활짝 열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통로 끝에 거대한 거실이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비서는 두 팔을 벌리고 눈을 반짝이며 집안 구조에 관해 설명했다.

“1층은 여자들, 2층은 남자가 씁니다. 실질적으로 2층은 사장님 혼자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제 도련님도 쓰시게 되겠죠.”

1층은 여자, 2층은 남자. 엄마가 내 팔에 매달려 까먹으면 안 된다는 듯 비서의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사모님께서 이 집에서 하실 일은 두 가지입니다. 요리, 그리고 청소죠. 얼마 전까지 일을 해주던 가정부가 불미스러운 일로 나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군요.”

그걸 하라고 부른 거면서. 어이없는 말에 피식거렸다. 비서는 내 비웃음 소리를 듣고도 아주 말끔한 얼굴로 나와 엄마에게 서류철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각 서류에는 두 분이 이 집에서 하실 일에 대해 자세하게 써둔 겁니다. 하는 방법, 재료나 물건의 위치, 전부 적혀 있기 때문에 꼭 읽어주시면 감사하겠군요.”

종이 두께는 남자와의 첫 만남에 받았던 자료보다는 얇았다. 엄마도 읽어야 하니 봐줬나 보네. 이제 이 정도 분량은 익숙한지라 무심코 앞장을 넘겨보았다. 청소하는 방법에 대해서 결벽증 환자처럼 써둔 것이 보였다. 이걸 매일 하라고? 이 큰 집을 이런 식으로 청소하다간 젊은 장정도 골병이 들어 죽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비서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회를 보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유쾌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영양사가 매주 식단을 짜 드리면, 그 식단에 맞게 요리를 하시면 됩니다. 식재료도 전부 배달이 오기 때문에 편하게 요리만 하시면 되니 간단하시죠? 사모님?”

“아아, 네…”

엄마도 내용을 보고 충격받았는지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비서의 부름에 겨우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들고 있는 자료집을 들여다보았다. 요리를 식탁에 차리는 법부터 설거지 과정이 적혀 있었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하는데 왜 이렇게 편집증 환자처럼 써둔 거야?

“집에 계실 때는 꼭 같이 식사하셔야 합니다. 함께하는 저녁 식사는 다복한 가정의 상징이죠.”

다복한 가정이 멸망한 모양이었다. 질색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비서가 아차, 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음식을 한다고 냄새에 질리셔서 가족 식사에 참여하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엄마가 두 손까지 내저어가며 황급히 말을 잘랐다.

“아, 그건,”

“아침도, 점심도 마찬가지고요.”

벌어져 다 물릴 줄 모르던 엄마의 입이 꽉 닫혔다. 병신이 아닌 이상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집에서 가족인 양 행세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냉엄한 선고였다. 그게 가족이 될 사람도 아닌, 비서의 입에서 떨어진다. 그제야 이 집에서 우리가 가지게 될 위치가 자각되기 시작했다. 나는 거머리라도 밟은 사람처럼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이 끈적거린다.

“여가에는 무엇을 하셔도 좋습니다. 아, 참고로 남자인 사장님의 방은 도련님이 직접 청소해주셔야 합니다. 다른 곳은, 사모님께 부탁드리죠.”

이 집이 좀 엄격하죠. 비서는 나를 흘끗 쳐다보며 속삭였다. 그 작은 말에 맺혀있는 조소를 느꼈다.

“좀?”

내가 되묻자 비서는 난처하게 웃으면서 엄마와 나를 향해 인사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미꾸라지처럼 재빠른 퇴장이었다. 텅 빈 거실 중앙에 서서 나는 고개를 높이 들어 화려한 저택을 살펴보았다. 설명을 방금 들었지만, 어느 방이 누구의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엄마는 깨끔 발을 든 채, 불안한 얼굴로 집안 곳곳을 살피고 있었다. 뭐든지 사치품으로 보이는 물건을 차마 건드리지도 못하던 엄마는, 종이 뭉치를 넘기더니 이를 딱딱 부딪쳐가며 떨었다.

“이, 이소야.”

엄마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뺨을 씰룩거리다 탁 뱉었다.

“엄마가 선택했어. 나도 엄마도 이젠 도망 못 가.”

상처받은 표정을 보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남자가 몇 번이나 경고했지만 막막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공부도 해야 한다. 빌어먹을 경영학. 빌어먹을 영어. 남자가 어젯밤 데려가 보여주던 위용 넘치던 사무실과 빛나던 불빛.

“…일이나 해. 그러려고 들어온 거잖아.”

“이소야, 엄마는.”

“우는 척 하지 마, 나는 엄마보다 더 고생했어.”

샤워할 때마다 민둥산이 된 그곳을 보는 것도 수치스러웠다. 두 달 동안 남자가 내주는 친절에 놀아났다는 것도 이가 갈렸다. 매일 자다가 새벽에 악몽을 꾸고 일어난다. 엄마라고 천하태평으로 두 발 뻗은 건 아니겠지만… 엄마는, 적어도 나라는 보험을 쥐고 있지 않은가. 나는 더는 담보로 맡길 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더 힘들고, 내가 더 고생한 거다. 나는 냉정했다. 엄마가 내 말에 상처받은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밥이나 해. 나는 짐 정리할 테니까.”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엄마가 흐느끼는 소리를 내더니 부엌으로 달려갔다. 아마 저기서 눈물 반 콧물 반 흘리면서 요리를 하겠지. 원흉은 전부 엄마 탓이니까 혼 좀 나도 된다.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거실이라도 청소를 해둬야 엄마가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었다.

점심 준비는 평소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내가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 뒤에도 엄마는 부엌을 뒤적거리면서 요리를 한다고 바빴다. 아이보리색 대리석 식탁에 접시가 한참 올라간 뒤에야 엄마가 숨을 돌렸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고 냉장고를 뒤져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엄마가 찬물을 들이키며 가슴께를 꾹 눌렀다. 그러게 저렇게 콩알만 한 간을 가지고는 왜 이런 곳에 들어온다고 한 걸까. 빈 컵을 돌려받아 싱크대에 넣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내 팔을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직 점심때였다. 남자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다면 지금 들어온 사람은 분명히,

“뭐야, 이건.”

노인과 고모일 것이다.

머리가 하얀 노인과 마흔 남짓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부엌으로 들어와 우리를 보았다. 노인은 엄마가 차려둔 식탁을 보더니 불결한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몸서리를 쳤다. 노인이 위험하게 식탁 위에 올려둔 접시를 내리쳤다. 안에 담겨있던 백김치 국물이 흘렀다.

엄마는 허둥지둥 행주로 식탁을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부간의 첫 만남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제가, 점심 준비를 했는데…”

“내가 점심을 왜 먹어!”

노인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엄마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하다 하다 못해 쥐새끼를 이 집에 들이다니, 그놈은 완전히 미쳤어.”

남자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여자는 고모가 될 사람이다. 남자가 몇 번 이야기한 적도 있다.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고, 강아지를 아이 대신 키운다고 했다.

얼굴만 보고 애를 키웠다더니, 나이를 먹은 여자의 얼굴도 고운 편이었다.

“이태가 하는 게 그렇지요, 뭐.”

“감히 저런 씨부터 말라 비틀어진 것이랑 결혼을 해…”

노인은 분노에 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연극처럼 매끄럽게 연결이 된다. 둘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기 위해선 진짜 심장 마비라도 올 수 있을 만큼 열정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어머니, 심장도 조심하셔야 하는데. 이태도 정말 구제 불능이죠.”

맞장구를 치며 우는 척을 하는 여자는 엄마와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노인을 설득하듯 어깨를 붙잡았다.

“그래도 인사는 한 번 해야죠. 또 무슨 난리를 칠까.”

“그래, 쥐새끼 얼굴은 봐야지.”

“이태가 아들 칭찬이 자자하던데.”

“씨가 어딜 가.”

노인이 외투를 벗어 여자에게 건네며 웃었다. 쪼글쪼글한 입술에 바른 분홍색 립스틱은 세월을 따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괜히 젊은 사람인 척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아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주름진 손가락이 내 턱을 쥐었다. 나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뱀처럼 생긴 눈이 내 얼굴 구석구석을 훑고 떨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정신적 성희롱으로 고소라도 하고 싶었다.

“아주… 곱게 생겼구나, 얘.”

노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빈티는 나지만, 잘 닦아두면 쓸 만은 하겠어. 저런… 꼴도 보기 싫은 걸 닮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구나.”

엄마를 모욕적으로 지칭하며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엄마가 아니라 아빠를 닮은 외모는 내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엄마가 가끔 내 얼굴에서 그 괴물 같은 사람을 찾아내며 불안한 눈을 할 때, 또는 짜증을 낼 때 나는 얼굴을 강판에 갈아버리고 싶었다.

“쥐새끼면 쥐새끼답게 숨어서 찍찍거리렴, 어디 사람 행세할 생각 하지 말고.”

집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그렇게 말하는데, 동조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여자는 어머니도 참, 하고 팔짱을 끼며 소리 내 웃으며 사라졌다. 자박거리는 발소리도 없이 걸어 다니는 우아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나긋나긋한 말은 전부 갈퀴 같았다. 엄마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엄마의 손을 쳐내며 더러운 것이 묻은 것처럼 턱과 뺨을 박박 닦았다.

“…피곤하지. 청소는 내가 했으니까 엄마도 쉬어.”

“이소야, 밥은…”

“엄마도 먹고 싶지 않은 밥, 먹으라고 하지 마.”

엄마가 처음 만든 밥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음식물 건조기를 가득 채우는 밥과 반찬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이게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가진 소녀 같은 환상은 쓰레기였다. 말라 비틀어져 흔적도 없이 쏟아 내려져야 옮았다. 이것에 고통받는 게 벌써 몇 번째인가.

그래, 좋은 남편을 만나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팔자 피고 살고 싶었겠지. 하지만 엄마의 남자 보는 눈은 늘 최악이었다. 사기꾼에 인간쓰레기만 골라가며 만나는데 이제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용을 써도 인간 취급은 받지 못한다. 이 기형적인 탐미 의식을 추구하는 집안에서 엄마는 완전히 눈 밖에 난 생명체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빚 갚아주고 의식주를 해결해주는데, 쥐새끼 취급은 참을 만했다. 찍찍 울어보라면 네발로 기어 다니며 흉내를 내줄 각오도 되어 있었다. 엄마만 그럴 각오가 없었을 뿐이다.

나는 가장이다. 아버지와 고모와 할머니가 생겼지만, 그래도 나는 소년가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천애 고아다. 손바닥에 맺힌 땀을 꾹 눌러 닦았다. 남자가 오기 전에 방 청소를 하라는 말이 있었다. 등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엄마가 가느다랗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따끔거렸다.

2층에 처음으로 올라왔다. 내 방은 가장 구석에 있었다. 구석이라고 해서 좁지도 않았다. 옛날에 엄마와 살던 원룸보다 큰 방을 보며 검은 가방에 담긴 내 짐을 발로 잠깐 걷어찼다. 짐은 별로 많지도 않았다. 다 버렸다. 그걸 버리는 것이 마치 인격을 버리는 기분이었다. 22년간 쌓아온 인격.

“되게 넓네.”

남자의 방으로 보이는 곳은 2층 중앙 문이었다. 커다란 문 안에 있는 방은 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완벽한 인테리어를 자랑하고 있었다. 먼지 한 톨 없는 방에 더 무슨 청소를 해야 할까. 하면서도 받은 매뉴얼대로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을 청소기로 밀고, 스팀 청소기로 다시 한 번 닦은 다음 마른 걸레질을 한다. 욕실도 매일 한 번씩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일반 세제도 아니고, 무슨 허브향이 나는 약품을 욕실 곳곳에 뿌려두고 나왔다. 창가에 위치한 침대가 육중했다.

젖은 발을 러그 위에 문질러 닦는데 방문이 열렸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입장에 놀라 몸을 떨었다. 짙은 남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나를 보더니 입술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안녕.”

“……”

“인사 안 하니?”

여전히 놀랍도록 부드럽고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다정할수록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눈을 깔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짧게 소리 내서 웃었다.

“내 집에서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 청소는 할 만해?”

“그럭저럭요.”

“넓어서 힘들 텐데. 고생하겠어.”

“엄마만 하겠어요.”

정장을 벗어 던지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빌어먹게도 잘 웃는 남자였다.

어제 자신의 집무실에 나를 데려간 남자는 강제로 나를 자신의 책상 앞에 앉혔다. 고층을 전부 트기라도 한 것처럼 넓은 집무실 안은 고독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등 뒤로 넓게 트인 전면 창에서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남자는 내 목을 조를 것처럼 더듬으며 속삭였다.

‘여기가 이제 네 자리가 되겠지.’

내가 경영 같은 걸 맡았다간 한 달 안에 회사를 말아먹을지도 모르는데, 남자는 흔들림도 없고 죄책감도 없는 얼굴이었다. 짐짓 편안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남자는 내게 선물이라며 오지랖 부리듯 일찍 만든 명패도 보여주었다. 사장 양이소. 휘황찬란하게 만들어둔 명패를 보고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저런, 정혜 씨 걱정할 상황이 아닐 텐데. 효자네.”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갑자기 위협적으로 변한 몸짓에 당황하는 사이 그대로 머리채가 잡혔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버둥거리자 남자가 좀 더 손에 힘을 줬다. 두피에서 머리가 전부 다 뽑히는 느낌이었다.

“이거 봐.”

엄청난 악력으로 나를 질질 끌고 온 남자가 무릎 뒤를 걷어차더니 나를 꿇어 앉혔다.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머리카락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청소도 하나 똑바로 못하는데, 누굴 걱정하면 어쩌니?”

목소리를 듣자마자 공포가 밀려왔다. 남자의 음성은 폭력의 잔재도 남지 않은 다정하고 따뜻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욕실 청소도 제대로 안 해놓고.”

내 머리카락을 그대로 잡고 흔들며, 남자가 혀를 찬다. 쯧. 딱한 목소리에 굴욕감이 들었다.

“쥐새끼에서 버러지로 격하되기 싫으면 열심히 해. 응? 그래도 넌 예뻐서… 내가 마음에 들어 하잖아. 노력도 많이 했고.”

저놈에 예쁘다는 소리. 군대까지 다녀온 남자의 어디가 예쁘다고. 노인도 남자도 내게 예쁘다는 말을 했다. 나보단 남자의 얼굴이 더 예쁘다는 건 거울만 봐도 알 텐데. 그전에 예쁘다니, 남자로서 전혀 기쁘지 않은 칭찬이었다.

“이거, 놔요.”

“응?”

남자의 손가락을 억지로 머리카락에서 털어냈다. 남자가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린 내 아까운 머리카락 뭉치를 보고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푹 쉰다.

“잘 좀 하자, 아들. 그 아줌, 아차차. 정혜 씨보다 내가 예뻐해 줄게. 예쁘니까.”

됐어, 꺼져.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청소는 됐어, 나가 봐.”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자가 한다. 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자 남자가 다시 한 번 방문을 가리켰다.

“내일은 얼마나 멍청하게 청소를 해뒀을지 기대할게.”

쥐새끼의 지능은 기대 안 하니까. 남자가 웃으면서 나를 걷어차 내쫓았다. 이런 성격 파탄자 새끼. 기가 막혔다.

집에 들어온 날부터 남자의 감정 기복은 널을 뛰었다. 옛날에는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집구석에 꼬박꼬박 들어와 내 숙제를 검사했고, 더딘 학습 속도를 다그쳤으며 청소로 대여섯 번씩 나를 구박했다. 미친 결벽증. 나는 남자의 감시 아래에 방바닥을 박박 닦으면서 속으로 욕을 했다.

엄마가 푸대접을 받는 것도 똑같았다. 노인과 여자는 엄마의 요리 솜씨를 툭하면 비난했으며, 엄마는 가시 삼킨 얼굴로 서서 그 모욕을 받아야만 했다. 여자가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를 더 아끼는 걸 봐도 그랬다. 개새끼는 자기 방에서 똥오줌을 싸도 오구오구 내 새끼였으며, 엄마와 나는 하찮은 쥐새끼였다.

거실에 깔린 배변 시트를 치우며 한숨을 쉬었다. 여자가, 그러니까 고모가 키우는 강아지는 하얀 털을 날리며 늘 넓고 넓은 거실을 운동장처럼 깡깡거리며 뛰어다녔다. 하필이면 털도 많은 포메라니안을 키우는 바람에 엄마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청소기를 돌렸다. 털 뭉치 같은 강아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강아지는 인심도 좋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내 손바닥을 핥았다.

하루는 우울해서 강아지를 배 위에 얹어놓고 진한 공감대를 나누고 있었더니 여자가 나를 비웃었다. 뭐였지, 짐승답게 개랑 대화가 된다나 뭐라나.

대들 기운도 없었다. 커다란 집이 우울증을 가속했다. 엄마라도 도와주면서 함께 버텨보려고 했더니, 남자는 그럴 시간도 주지 않았다. 한 번 엄마를 도와주려고 거실에서 청소기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 뒤로 남자는 자신의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고속 엘리베이터에 내려 거북한 속을 잡고 웩웩거리면 멀미약 하나를 쥐여주고는 구석에 밥상을 깔아놓고 앉혀 공부를 시켰다. 과외 선생이라는 사람은 그 자리가 거북하지도 않은지 나를 붙잡고 뇌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론을 설명한다고 애를 썼다. 나는 어쨌든 간 투자 대비 효율이라고는 극도로 없는 돈 아까운 인간이었다.

남자는 높은 책상 위에 앉아. 바닥에 주저앉아 공부하는 나를 비웃었다. 하루하루 나를 괴롭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구박하는 남자 덕분에 매일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일이 없으면 남자와 함께 퇴근해서 집에 들어갔고, 엄마와 멀찍이 서서 그 집안 식구들이 이를 부딪치며 식사하는 걸 지켜봤다. 엄마와 나는 식탁을 전부 치우고 설거지까지 끝낸 뒤에 뒤늦은 식사를 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 더 고역이었다. 남자는 그 집에서 강력한 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남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히 식사하던 사람들은 둘만 있으면 시끄럽게 엄마와 나를 쥐어 잡고 구박했다.

엄마의 한숨이 나날로 깊어지는 건 당연했다.

“아들.”

“왜요.”

“오늘은 같이 들어가자.”

오후 다섯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남자가 책상에서 일어나더니 겉옷을 챙겼다. 나는 읽다가 만 영어 문제지를 내려보다 망설임 없이 책을 덮었다.

“챙길 거 없어?”

“없어요.”

완전히 한여름이었다. 늘 반팔에 바지 차림으로 다녔다. 돈을 쓸 일도 없어서 비상용 카드와 휴대폰이 소지품 전부였다. 빈 양손을 들어 보이자 남자가 씩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는 바깥에서는 옛날처럼 상냥했다. 집에서는 나를 쥐새끼처럼 대했다. 남자는 성격 파탄으로도 모자라 이중인격자였다. 그 이중인격이 가장 빛을 발할 때는 남자의 취미생활과 나를 접목할 때였다. 말도 말자. 남자를 따라 어기적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늘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으니 머리가 띵했다. 골이 울려서 한쪽으로 이마를 감싸고 있으니 남자가 물었다.

“아파?”

“아니요.”

본인이 괜찮다는데 남자는 계속 되지도 않는 걱정을 했다.

“여름이라 입맛이 없나. 식사하고 들어갈까.”

“집에 가서 먹을 거예요.”

그 집에 엄마만 남겨두고 있을 수가 없어 단박에 거절했다. 남자는 내 대답을 듣더니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꼬박꼬박 그 집구석에 들어가는 이유를 뻔히 알면서, 남자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

“저번에 갔던 한식집으로 가죠.”

“유정당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집에서 밥 먹을 거라니까요.”

“아빠는 구절판 먹고 싶어.”

구절판 좋아하지도 않잖아. 개새끼. 그리고 아빠라고 자칭하지 마, 속 터져. 용기가 없어 남자에게 말도 못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차에 올라탔다. 기사 아저씨가 식당을 예약하는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꾹 다물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짙게 선팅이 된 창문에 골이 난 표정을 한 내 얼굴이 보였다. 남자가 창문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며 작게 웃었다.

“열 받아?”

“……”

“말도 안 하네. 삐졌나, 귀엽긴.”

“안 삐졌어요.”

“진짜 귀엽네.”

“안 귀엽습니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을 떨쳐내자 남자가 한숨을 쉬면서 내 목을 잡았다. 엄지로 목울대를 눌릴 듯 말든 문지르며 남자가 말했다.

“말했잖아. 그 집에서 너랑 정혜 씨 위치는 딱 그 정도야.”

“…알아요.”

“네 엄마가 거기서 무슨 모욕을 당하든, 그건 상관없는 일 아니야?”

“알았으니까 그만 이야기해요.”

“나한테 화내지 마.”

남자는 달래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인하게 언어를 내리쳤다. 입술을 깨문 채 무뚝뚝하게 있자 남자의 손이 다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소리 내서 짜증을 부렸지만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다리를 접은 채 남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정면으로 남자의 얼굴과 마주했다. 남자는 종종 나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장난을 쳤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헤집고 속눈썹을 문지른다. 뺨과 턱과 귓불을 문지르는 손가락이 매우 찝찝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애완동물도 아니고, 엄연히 인간인데 왜 찰흙 인형처럼 주물러져야 하는 걸까. 한참 눈을 반쯤 뜨고 남자의 손에 얼굴을 내줬다. 남자가 내 얼굴을 짜부라트릴 듯 누를 때 차가 식당에 도착했다. 남자는 에이, 하면서 아쉬운 목소리로 나를 풀어줬다.

꼬집혀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남자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겉옷을 옆구리에 낀 채로 슬렁슬렁 걸어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앞에 튀어나와 있는 직원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그래요.”

“방을 준비해뒀습니다. 이쪽으로…”

전원주택처럼 예쁘게 꾸며둔 정원을 둘러보다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멈칫해서 뚱한 표정을 풀고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했다. 직원이 어, 하고 입을 벌리더니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뒤에 계신 일행분은…”

“아들.”

“네?”

“내 아들입니다. 자, 이소야.”

남자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다정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저 손을 잡지 않으면 또 오늘 구박을 하겠지. 고민하다 손을 마주 잡았다. 남자가 만족한 웃음을 보이더니 내 어깨를 잡고 걸었다. 남자의 요즘 취미 중 하나는 나를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것에도 있었다. 덕분에 남자의 집무실에 자주 올라오는 임원 몇 명과는 안면도 텄다.

안쪽 방은 조용했다. 한지로 싼 등불이 켜진 방에는 벌써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멈췄다. 방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던 남자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눈썹을 까딱했다. 나는 식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절판 먹는다면서요.”

“음, 그건 지금 준비가 안 된대.”

웃기고 있네. 식탁에 있는 반찬만으로도 구절판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음식들은 호화로웠다. 남자는 단순히, 가정식으로 평범하게 먹지 않는 메뉴를 들먹이며 나와 엄마를 동시에 엿먹이고 있는 것이다.

“올려다보는 거 안 좋아하니까 그만 앉지?”

어련하실까. 나는 볼을 부풀린 채 남자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남자가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수저를 들고 전투적으로 밥을 퍼먹었다. 대충 반찬을 밀어 넣고 우적우적 씹는 나를 보며 남자가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

남자가 이렇게 친절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유난히 이른 퇴근, 죄책감이 껌처럼 눌어붙은 편안한 저녁 식사 시간. 나는 입안에 든 음식을 꼭꼭 씹어 삼켰다. 사람이 한 두 번 난관에 부딪히고 나면 간이 커지기 마련이었다.

집에 귀가한 남자는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청소하라는 말도 없었다. 나도 방에 들어가 재빠르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예의도 존중도 없이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손짓했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걸어 남자의 앞에 다가갔다.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서재로 와.”

2층의 구조는 간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창고로 쓰였던 것 같은 내가 쓰는 방, 남자의 방. 그리고 서재. 남자의 서재는 독특했다. 책보다 다른 물건들이 벽에 있는 유리장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걸친 남자는 산뜻한 얼굴로 서재로 들어갔다. 며칠 전 하다 만 조립품이 그대로 책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남자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의자에 앉았다. 나는 문가에 서서 슬슬 집중하기 위해 부품을 만지작거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취향은 역겹게도 프라모델 조립이었다. 로봇이라도 조립하면 귀여워 보일까, 내 눈에는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전투기나 배 모형을 조립하고 앉아 있었다. 가끔은 나를 일부러 작업대 앞에 세워 넣고 몇 시간을 꼬박 앉아 조립품만 들여다보곤 했다. 조심스럽게 부품을 뜯어내고, 멸치 새끼보다도 작은 부품의 끝을 돛대의 위에 얹고 좋아하는 남자를 보면 짜증이 치밀었다.

내가 몸을 비틀며 힘든 티를 내면 남자는 아주 짜증을 냈다. 한 번은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주저앉았다 또 신나게 얻어맞았다. 그는 자신의 취미를 관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힘을 낸다고 주장하며 나를 계속 서 있게 했다.

몇 시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상당한 고문이었다. 남자는 그런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오랜 시간 앉아 취미에 열중했다.

남자는 광적인 프라모델 조립을 위해 도구까지 특별주문했다. 그것은 핀셋이었다. 유리를 세공해서 만든 핀셋은 그냥 보기에도 우아했다. 그의 손에 들리면 더 우아해 보였다. 잘 다듬은 손톱, 남자치고도 하얗고 가늘에 뻗은 손가락이 유리 핀셋을 들고 있으면 마치 잘 만든 예술품 같았다. 투명한 유리에 작은 부품이 달라붙었다 떨어져 나가길 반복했다. 그 작업은 두 시간, 세 시간씩 계속되었다.

지겹지도, 숙이고 있는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남자는 담배를 물고 자신이 만드는 배를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가끔 내 자세가 무너질 때면 남자는 일부러 소음을 내며 듣기 싫은 전함의 역사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뭔 줄 알아?”

“알면 하버드라도 갔죠.”

“멍청하긴.”

날카로운 유리의 끝이 내 심장을 긁었다. 뒷짐을 지고 서서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남자가 꽃잎이라도 어루만지는 것처럼 선박 모형을 만지며 떠들었다.

“러시아 발틱함대 중 주력 전함인 오슬라비야라고 하는데,”

“아아. 예에.”

남자는 러시아에서 나온 전함이나 전투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미친놈답게 미친놈 같은 역사와 나라를 좋아하다니, 노인과 여자는 엄마와 나 말고 남자를 짐승 새끼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았다.

“러일 전쟁을 종막으로 치닫게 한 해전의 마지막을 장식했지.”

“네에. 계속 조립하세요.”

벌써 밤 11시였다. 커피라도 한 잔 먹여주고 고문을 시키던가. 세게 틀어둔 에어컨 냉방으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머리카락도 다 말랐고, 빨리 따뜻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잠이나 자고 싶었다. 남자는 담배를 비벼 끄며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눈동자는 여전히 색소 옅은 갈색빛을 띄고 있었다. 저 신기한 색에 잡혀서 남자를 반도 파악하지 못했다.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물었다.

“아들.”

“왜 부르세요.”

“내일은 역사 시험 칠 거야.”

이런 씨발… 나는 일주일 전부터 포기한 근현대사 문제집을 생각하며 속으로 불을 뿜었다. 얼굴빛이 점점 시커멓게 변하는 거라도 보였을까, 남자가 활짝 웃으면서 좋아했다.

“이번에는 낙제를 하면 뭘 시킬까.”

전함의 붉은색 주장갑대를 살펴보며 남자가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최근 남자가 내게 시킨 괴상한 벌칙을 기억했다. 임원 회의 참석하기, 남자 앞에서 춤추기, 문제지 베끼기. 요령도 부리지 못하고 체력에 정신력 소모가 큰 일들을 시킨다.

“내일은 그럼, 네가 이거 조립해.”

남자는 이미 내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짓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핀셋을 들어 올리며 나를 보았다. 투명한 유리를 관통하고 남자의 시선이 나를 정확하게 훑었다.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취미 생활은 여기서 끝인 모양이다. 등을 돌려 문을 열자 등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날아와 꽂혔다.

“기대해볼까. 아들과 아빠의 합작품.”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고대하던 출근길, 요약 노트를 붙들고 졸고 있는 나를 보며 남자가 낄낄 웃었다. 담배에 불도 붙이지 않은 채 계속 웃음소리를 내는 걸 보니 시험을 퍽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시험 말아먹으면 인생도 말아먹은 김에 죽을까. 남자 앞에서 흐느적거리며 춤을 춘 이후로 모든 벌칙은 다 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프라모델 조립이라니, 그건 더 끔찍했다.

혹시 손이 삐끗해서 그 잘난 배 모형을 부수기라도 하면… 벌써 우울하다. 피곤해서 부어 터질 것 같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자 남자가 또 뒷목을 슬금슬금 매만져왔다. 최근 부쩍 는 스킨십때문에 심신이 지쳤다. 도리질을 쳐 남자의 손을 떼자 금세 눈이 매서워졌다.

“왜 자꾸 피해?”

“변태처럼 만지지 마요.”

“진짜 변태가 뭔지 보여줄까?”

“아니요.”

“그럼 내놔.”

이러다 조만간 못 줄 곳도 달라고 할 것 같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남자는 또 신이 나서 나를 더듬었다. 이런 싸이코 변태 새끼. 남자는 누가 쳐다보든 말든 내 등 뒤에 딱 붙어서는 계속 성희롱을 해댔다. 비서가 나와 인사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주물럭주물럭. 돼지 불고기가 된 느낌이라 표정을 완전히 구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사장, 님.”

첫 문장부터 말이 삐끗한다. 나는 남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무거운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몇 번 인사를 나눈 적 있는 임원이었다. 부사장이었나, 상무였나.

“차 부장이 무슨 일이야?”

부사장이 아니고 부장이었나 보다. 보험 쪽 계열사를 담당하고 있는 부장이 서류를 내밀었다. 남자는 내 목을 조르고 있어 바쁜 와중이라 내가 대신 서류를 넘겨받았다.

“…아침부터 실례했습니다. 어젯밤에 완성된 설계도입니다. 오늘 아침까지 사장님께 바로 올리라는 전달이 있으셔서…”

“아아, 그거구나. 요즘 자연재해도 잦으니까 자영업자들 등이나 쳐야지.”

남자가 내가 들고 있는 서류를 넘겨보며 투덜거렸다. 나는 남자가 무거워서 투덜거리고 싶었다. 계속 표정을 뚱하게 굳히고 있으니 차 부장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네에.”

“늘 인물이 훤해지시는군요.”

스트레스로 칙칙해지겠지. 나는 밤이라고 꼴딱 샜는지 나만큼 안색이 초췌한 차 부장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부장님도 아주 훤하세요.”

“그, 렇습니까.”

“네. 저랑 비슷하시네요. 저도 어젯밤에 좀.”

잠을 못 잤구나. 차 부장이 눈으로 말을 건넸다. 나는 짠한 공감대를 눈빛으로 공유했다. 뒤에 붙어있던 남자가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지 내 뺨을 잡아당기면서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떡처럼 뭉개지는 내 얼굴을 보며 차 부장이 얼른 아부를 떨었다.

“사장님께서도 이런 아드님이 계시니 마음이 든든하시겠습니다.”

“어련하겠어요.”

나와 남자의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 부장은 반질반질한 얼굴로 입을 털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면 저렇게 얼굴이 두꺼워지는 모양이다. 조만간 남자와 내가 하늘이 내린 부자지간이 될 기세라 못 참고 한마디 했다.

“사장 아버지랑 든든한 관계 지속하게 좀 나가주시면 안 될까요.”

부장이 하하, 하고 웃더니 유머 감각도 있다고 마지막까지 아부를 날리곤 사라졌다. 남자가 내 등 뒤에서 폴짝 내려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을 확 찔러버리고 싶었다.

“나랑 든든한 관계 가지고 싶었어?”

“성희롱하지 마세요.”

“그럼 시험 치자.”

남자가 내 손에 들린 요약집을 뺏었다. 복습할 시간도 안 준다. 나쁜 새끼. 남자는 내 등을 떠밀어 앉은뱅이 밥상 앞에 앉혔다. 느릿느릿 샤프를 들고 연습장을 펼쳤다. 남자가 구둣발로 내 등을 자근자근 짓누르며 건방을 떨었다.

“주관식이야. 밤을 새워서 머리통을 굴렸을 아들을 위해 열 문제만 낼게. 좋지?”

“감동적이네요.”

“그럼 일 번 문제.”

나름 긴장해서 손바닥도 티셔츠에 비벼 닦았다. 등에 얹혀진 남자의 구둣발도 신경 쓰지 않고 연습장을 노려보았다. 남자가 문제를 냈다.

“이토 히로부미가 뒈진 날짜.”

“……”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서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눈썹을 까딱하더니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에요. 애국심이 대단하셔서.”

싱겁긴. 남자가 발로 내 뒤통수를 찼다. 답 대신 욕을 쓰면 얼마나 두들겨 맞을까 고민하다 숫자 2를 적었다.

“다음 문제. 정신 빠진 새끼들 때문에 한국이 처음으로 맺은 불공평 조약.”

남자는 측두엽과 전두엽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뒤로도 남자가 내는 문제는 전부 개판이었다. 꼭 이상하고 파괴적인 언어로 바꿔가며 문제를 내는 것도 그렇고, 마지막은 근현대사를 한자로 쓰라고 했다. 한자라니. 언제 내가 역사 공부를 했지 한자 공부를 했나. 내가 기가 막혀 하자 남자는 실실 웃으면서 내 멍청함을 비웃었다.

시험은 당연히 말아먹었다. 10문제 중에서 3문제 빼고 다 틀린 연습장을 보니 밤샘공부가 얼마나 뇌 순환에 악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게 되었다.

“이걸로 액자라도 만들어 줄까?”

내 멍청한 상식을 비웃던 남자가 연습장을 찢은 종이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말없이 남자 손에서 종이를 뺏어 들고 박박 찢었다. 내 히스테리를 보던 남자가 등을 또 걷어찼다.

“왜 자꾸 차요!”

소리를 왁 질렀더니 남자는 더 신이 나서 나를 발로 굴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밀었다. 대들 힘도 없어 푹 엎어져 있자 남자가 비서를 불러서는 명령했다.

“저거 오늘은 바로 집으로 보내.”

“네.”

“아들, 오늘 저녁에 보자?”

“……”

정말 그 병신같은 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남자가 조립하던 그 끔찍하게 난해하고 섬세한 군함 모형을 생각하니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비서가 무슨 말을 걸어도 입을 닥치고 있다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청소하던 중이었는지 청소기를 붙잡고 있던 엄마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소야, 이 시간엔 어쩐 일이야.”

엄마가 급하게 걸어와 내 얼굴을 감싸 쥐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나는 엄마 품 안을 파고들어 매달렸다. 내가 없는 집에서 엄마도 힘들겠지만, 나도 힘들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한다고 밤을 새우고.

피곤해. 머리 아파. 칭얼거리면서 매달리자 엄마가 내 이마를 짚어 오고, 등을 토닥거렸다. 거실 소파에 나를 앉혀놓고 엄마는 죽이라도 끓여주겠다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엄마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소파에 누웠다. 근처에 있던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어어, 이리와.”

“왕.”

꼭 자기처럼 작고 귀여운 울음소리를 낸다. 여전히 조막만 해서는 털을 내뿜으며 파닥파닥 달려오는 걸 안아 배 위에 올렸다. 내 배 위를 짚고 선 네 발이 좀 귀엽다.

“이름이 뭘까.”

“내 새끼.”

옆에서 불쾌한 목소리가 들린다. 눈만 돌려 흘끗 쳐다보자 팔짱을 끼고 떡하니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고모다.

“이름이 내 새끼야.”

“…거 말 못하는 짐승이라지만 이름 정도는 지어 줘요.”

“이름이 그거라니까. 내 새끼, 이리 온.”

이 더운 한낮에 어딜 갔다 왔는지 민소매 원피스 위에 선글라스를 찔러넣고 고모가 허리를 굽혔다. 주인 목소리를 알아듣는지 강아지가 벌떡 일어나 고모에게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어쩐지 패배한 느낌이다.

“이 시간에는 왜 집구석에 들어와 있어?”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요.”

“아버지는 무슨…”

고모는 불쾌한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욕을 했다. 고모와 내가 비슷한 점이 하나가 있다면, 남의 이목을 신경 쓴다는 것과 남자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였다.

“그놈이 내 동생이라니.”

“아들인 저는 어떻겠어요.”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고모는 나를 흘겨보곤 자리를 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강아지를 부여잡고 내 새끼, 엄마 보고 싶어서 울었어? 하면서 호들갑을 떤다. 자신이 없는 동안 강아지가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면서 즐겁게 노는 꼴을 봤으면 저 말이 쏙 들어갈 텐데.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엄마가 거실에 얼굴을 비쳤다. 괜히 이 집안사람들과 마주치면 좋은 말을 듣진 못하니, 피해있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떠준 죽을 삼키자 잠이 쏟아졌다. 따뜻하고 편안하고, 옆에서는 엄마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숟가락을 들고 졸다 엄마의 다그침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못 먹어?”

엄마가 화를 낸다. 짜증이 서린 음성에 잠이 확 깼다. 죽을 푸다 말고 숟가락을 놓았다. 버릇없는 행동을 보고 엄마가 한마디 더 했다.

“밥을 해주면 제대로 먹고 잠을 자든가. 먹다 졸면 어떡하니?”

“왜 짜증 내?”

참아야 하는데, 하룻밤을 새웠다고 신경이 예민해졌는지 성질이 튀어나왔다.

“엄마 짜증 난다고 나한테 짜증 내지 마.”

“뭐?”

“나도 엄마 못 보는 곳에서 고생해.”

입맛이 뚝 떨어졌다. 쟁반을 한쪽에 밀쳐놓고 일어났다. 엄마가 드물게 가시 박힌 음성을 냈다. 어릴 적 친아버지와 싸웠을 때 빼고 이런 목소리를 듣는 것은 또 오랜만이었다.

“너는 천지도 모르고…”

“뭘 모르는 게 누군데.”

엄마는 돈을 빌린 사람이 누구인지 잊은 것처럼 보였다.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엄마는 선천적으로 늘 부족한 사람이었고, 남편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부분에서 커다란 결핍을 느끼자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빈 곳을 메우려고 했다. 아들은, 음, 나는 아들이지만 엄마가 나로는 빈자리를 다 채워 넣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공허한 자체가 내 탓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를 키우려고, 너를 지키려고 엄마가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감내했다거나 하는 말을 들으면 솔직히 같잖다.

자식을 핑곗거리로 삼는 부모는 있으면 안 된다니까. 체력이 쭉쭉 깎였는지 피곤했다. 기지개를 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이소!”

“이젠 양이소야, 엄마.”

하품을 하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방까지 천근만근인 다리를 붙들고 기어가 이불을 덮었다. 전원 코드를 뽑은 기기가 팍 꺼지는 것처럼 잠이 들었다.

“자, 시작하자.”

나는 내 손에 잡힌 유리 핀셋을 보았다. 늘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도구가 내 손에 있으니 어색했다. 나는 자다 끌려 나와 퉁퉁 부어터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부품을 하나 집었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은 남자가 내 등 뒤로 돌아와 손을 잡았다. 내 손을 겹쳐 잡아오는 걸 보고 소름이 끼쳐 팔을 흔들었다.

“저리 좀 가요.”

“너무 어설퍼 보여서 도와주는 거잖니.”

친절한 컨셉은 언제 버리려나 모르겠다. 반항을 해보겠다고 남자를 떨쳐내려고 했지만, 무슨 힘이 그렇게 좋은지 남자는 내 손등을 꽉 잡은 채 내 팔을 움직였다. 목덜미에 남자의 넥타이 감촉이 느껴졌다.

남자는 내 손을 천천히 움직여 부품을 좌현에 놓았다. 새카만 연돌이 얹어진 배는 작고 육중해 보였다.

“오늘은 여기서부터, 이까지 할 거야. 거포, 좌현, 함재기…”

손가락으로 짚어주며 말해주는 위치는 전부 잡스러운 부품이 흘러넘치는 구역이었다. 이걸 다 하라고? 위에 올라간 주포의 개수만 해도 열 개가 넘는 것 같았다. 이쑤시개 같은 크기를 어떻게 다 일일이 조립하라는 거야.화를 내기도 전에 남자가 내 등 뒤를 덮치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날카로운 핀셋이 돈만 비싼 플라스틱을 잡았다.

“정혜 씨랑 싸웠다며?”

“집에 도청기라도 설치했어요?”

모르는게 없네. 남자의 손에 잡혀 반쯤 가려진 내 손을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남자는 대답없이 검은색 거포를 끼워넣었다.

“그거 알아?”

“뭘요.”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

남자가 내 손을 흔들어 주포 부분을 두들겼다. 유리가 플라스틱에 부딪히자 가벼운 소리가 났다.

“러시아는 군함이 전부 제각각이었거든. 규격화된 것도 없고, 외교 깡패였던 까닭에 좋은 물자를 공급받지 못하기도 했었고… 그에 비해 일본은 러시아랑 거포부터 차이가 났어. 전부 영국제에, 쓰는 포탄도 훨씬 좋은 거지.”

“아아.”

오타쿠의 전쟁 강의인가. 심드렁하게 위력적인 포구보단 이쑤시개로 보이는 포탑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여기서 감명을 좀 받았어.”

“통일이 최고다?”

“아니,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걸.”

여전히 내 등을 뒤에서 끌어안고, 남자는 고개를 숙여 내 뺨 위에 입을 맞췄다. 이 정도 성희롱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소름이 돋았다. 하여튼 변태 새끼. 왼손으로 뺨을 벅벅 문지르자 남자가 후욱, 하고 바람을 넣으며 짖궂게 웃었다.

“러시아의 군함들이 그렇게 강대했는데도 불구하고 해전의 이름은 쓰시마 해전이잖아. 일본이 이겨서.”

“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나도 딱 내 이름만 남기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

남자는 장대하고 위대한 꿈을 떠들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남자는 언어에 힘을 실을 줄 알았다. 박자와 발음이 정확하고, 맺고 끊는 게 확실했다. 완벽한 악센트, 중요한 순간 긴장감을 주는 어휘와 호흡법. 오랜만에 좋은 이미지를 느껴보려는데 남자가 폭탄 발언을 했다.

“나는 명함만 있는 대표 이사로 바꾸고 꼭 너를 사장 자리에 앉힐 거야. 실무는 전부 네가 보고, 나는 이사 회의만 참석하는 바지사장이 되는 거지.”

졸음이 확 깼다. 묘한 긴장감과 감동 따위는 카펫 먼지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되었다.

“무슨 개소리를…!”

몸을 휙 돌려 남자에게 성질을 내려고 했다. 남자가 아직 내 등 뒤에 달라 붙어있고, 내 오른팔이 붙잡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잊은 건 내 실수였다.

마음처럼 가볍지 못한 오른팔이 휘청거리더니 만들던 배 위에 떨어졌다. 실제 군함이 아니므로, 배는 금속이 아닌 허접한 플라스틱이 주재료였다.

“……”

“……”

아라비카였나 아라비아였나 하는 이름을 가진 군함이 두 동강이 났다. 수많은 부품의 잔해가 내 팔 밑에 깔려 울고 있었다. 남자가 탄식했다.

“나의 오슬라비야.”

등 뒤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떨리는 팔을 들어 올려 내가 만든 작품을 확인했다. 처참했다. 아예 깨진 부품도 있어서 복구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남자는, 자기가 잠자는 시간도 쪼개가며 이걸 만든다. 나는 지금 이 인간의 한 달 치 꿈과 희망을 부순 거야… 내 꿈과 희망도 사라진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 부품 조각을 긁어모으는데 남자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아 들었다. 이젠 팔을 꺾나? 부러지는 건가. 눈을 꽉 감고 폭력을 기다리는데 남자가 혀를 찼다.

“이게 뭐야.”

주먹이 날아오는 대신 낮은 어조의 말이 들린다. 나는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남자가 잡고 있는 내 손목을 보았다. 깨지면서 손바닥을 찔렀는지 오른손 아랫부분이 엉망이었다. 사실은 다친 줄도 몰랐다. 가는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뒤집어 보며 남자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배를 만들라고 했더니, 부수는 거로 모자라 자기 손까지 부술 셈이야?”

“…죄송해요.”

눈치를 보면서 사과하자 남자는 말없이 내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담배를 하나 입에 물며 남자가 말했다.

“기다려.”

엄청나게 화를 낼 줄 알았던 남자는 아무 제재 없이 방을 나갔다. 나는 피가 떨어지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부품을 입에 넣고 씹으라고 하거나 부서진 부품 수만큼 두들겨 맞을 줄 알았는데. 긁힌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책상에 있는 휴지를 뽑아 피를 닦았다. 아무래도 작은 부품이다 보니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부품 몇 개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병원에 가야 할까. 고민하는데 남자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 내밀어.”

남자는 프라모델 부품을 가볍게 치워버리곤 구급상자를 가져와 올렸다. 자신이 열광하던 취미생활이 바닥에 떨어지는데도 남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남자는 내 손을 잡고 들여다보았다. 엉망이 된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살살 훑자 통증이 느껴졌다.

“아파?”

“…아니요.”

“아파 보이는데.”

눈을 찌푸리며 남자는 핀셋으로 내 손바닥 옆부분에 박힌 부품을 빼냈다. 남자가 아끼던 유리 핀셋이 피에 젖어 더러워졌다.

“피 묻어요.”

“응? 괜찮아. 아들이 더 중요하지.”

조립하던 손으로 솜씨 좋게 소독을 한다. 내 피가 묻은 핀셋 위로 적갈색 소독약이 다시 엉겨 붙었다. 포비돈 요오드가 상처에 닿자 쓰라렸다. 손가락을 움찔거렸더니 남자가 나를 나무랐다.

“움찔거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상처에 거즈를 붙여주는 손짓이 간지러웠다. 서재의 은은한 불빛에 남자의 얼굴이 빛났다. 남자는 마치 성자처럼 내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박살 낸 배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는 것처럼. 나는 골몰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응?”

“진짜 아들을 낳고 싶단 생각은 안 해요?”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로 어깨를 떨며 웃었다. 싱겁고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태도였다.

“바보구나. 나는 너를 아들로 삼은 거 뿐이야.”

“왜요?”

“예쁘고, 눈치가 빠르니까.”

“여전히 그 소리네요.”

“담배나 하나 주렴.”

양손을 전부 내 손 치료에 쓰고 있는 남자가 말한다. 나는 남자의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려주었다. 라이터 앞으로 고개를 내밀고 깊게 숨을 빨아들이는 얼굴이 익숙하다. 타인의 시중이 익숙한 남자와, 서비스 직을 하며 시중을 팔았던 나는 근원부터 이렇게 달랐다.

아직도 내가 남자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자가 종종, 나에게 애정을 보여주면 가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색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타들어 가는 담배를 보다 재떨이를 남자의 앞에 내밀었다. 타이밍 좋게 재가 후드득 떨어진다. 남자가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핀셋, 더러워졌네요.”

투명하던 유리는 피와 소독약이 엉겨 붙어 더러워져 있었다. 남자는 물티슈를 뽑아 핀셋을 닦아냈다. 이미 굳은 소독약을 조용히 문지르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촘촘하고 미세한 눈빛이 내 영혼을 먹었다. 정성스럽고 우아한 손짓이 나를 희망을 핥게 했다. 벌겋게 눈을 뜨고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그렇게 나를 잡았다.

“앞으로 너는 점점 더 정혜 씨와 멀어지겠지.”

“……”

남자는 깨끗하게 닦은 유리핀셋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주며 길게 목소리를 끌었다.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는 어둑어둑한 조명 같았다.

“이 집에서, 내게, 누군가에게 특별 대우를 받는 그 순간부터 정혜 씨는 너를 미워할 거야.”

숨을 쉴 수 없었다. 배에 힘을 주고, 호흡을 들이킨 채 멈췄다. 남자가 내 턱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었다. 엄마와 나는 똑같은 타인인데, 똑같은 쥐새끼인데 어째서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할까.

“나도 엄마랑 똑같은 대접을 해줘요.”

“바보구나.”

사랑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남자가 부드럽게 눈을 접었다. 잘 접은 반달 같았다. 부드럽게 녹아 흐를 것 같은 꿀 같았다. 한 숟가락 가득 떠낸 꿀을 삼키면, 너무 달아서 입이 쓰다.

“사람이 아닌 걸 사장 자리에 앉힐 수는 없어.”

“……나도 쥐새끼잖아요.”

“그래서 내가 노력하고 있잖아.”

끈적거리는 내 입안을 휘젓는 것처럼 남자가 긴 숨을 쉬었다. 입에서 내뿜어진 흰 담배 연기에 코가 쓰렸다.

“내 오슬라비야보다 네 다친 손을 걱정해주고, 직접 치료를 해주고, 매일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

“내가 너한테 애정이 없어 보여?”

그렇다는 말을 하면 당장 목이라도 졸릴 것 같았다. 뇌가 순두부처럼 으깨질 것 같은 압박에 눈을 피했다. 남자는 강제로 내 턱을 잡아 치켜 들었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소리가 들렸다. 무소음 시계라서 초침 소리가 들릴 일이 없는데, 환청처럼 째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손목시계에 채워진 시곗바늘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용했다. 마른 침을 삼키고, 겨우 대답했다.

“…아니에요.”

“대가 없는 애정은 없어.”

남자가 말한다.

“…알아요.”

“대가 없이도 애정을 받고 싶으면, 열심히 해.”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 사랑받고 싶은 몸짓이라도 해야 귀엽게 보이는 법이거든.”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 집에 들어왔고, 남자의 법적인 아들이 되었다. 그는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그의 투자를 받고 교육해 뒤를 이어야 한다. 누군가는 내가 로또보다 더 대단한 일에 당첨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간결하게, 또는 무심하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도 타인의 영광 밑에 가려진 그늘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다는 생각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포기를 한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래서, 반성은?”

“네?”

“니가 산산이 조각낸 내 배는 갚아야지.”

이런 치사한 새끼. 아까부터 봐줄 것처럼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더니, 남자는 여전히 좀생이 같은 인간이었다.

나를 골릴 생각에 신이 났는지 남자는 손뼉까지 짝짝 쳐가며 고민을 시작했다. 좋은 머리 어지간히 굴리시는군. 팔짱을 끼고 남자를 구경했다. 볼까지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는 게 눈에 보였다. 점점 가늘어지는 눈동자 너머를 읽을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치울 텐데.

한참 생각하던 남자는 이내 입을 열었다. 지옥의 선고를 기다리며 나는 바지를 꽉 움켜잡았다.

“찜질방이라도 갈까?”

절대로 내 민둥산 같은 거시기를 남들 앞에 보여줄 수 없었다. 거세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남자가 회유하듯 다른 걸 꺼냈다.

“목욕탕?”

제기랄. 죽음이라도 달라는 기세로 고개를 저었다.

“수영장은 어때?”

“미리 바지 안에 수영복을 입고 간 다음 샤워를 안 해도 괜찮다면요.”

“더러워.”

“그럼 싫어요. 그전에 수영장 가는 게 왜 반성인데요.”

“네 반응을 보니 반성 같아.”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매만지는 느낌이 났다.

“뽀뽀해줄래?”

처음에는 헛것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로또를 해달라고요?”

“죽고 싶니.”

제대로 들은 것이 맞구나. 나는 사색이 되어서는 두 손을 내저었다.

“다, 다 큰 아들에게 반성문이나 요구하시죠.”

“허접한 영작을 나보고 받아 읽으라고?”

“한국어로 쓰면 되잖아요!”

“안돼. 그럼 벌이 아니잖아.”

남자의 머릿속에는 나를 엿먹이는 것과 반성이 귀결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삐진 척을 했다.

“좋아, 한 번쯤은 봐줄게. 다음에 몰아서 벌을 주는 거로 하자.”

다음에 몰아서 준다는 게 어째서 봐준다는 건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최소한 남자에게 뽀뽀라던가, 목욕탕에 같이 가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먼 미래의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목을 조르러 달려오는 환각이 보인다.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우울한 기색을 읽었는지 남자가 신나서 웃었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른 서재와 엉망으로 망가진 함선의 모형이 나와 똑같았다. 아, 정말 굿이라고 해야겠다. 굿을 하면 잡귀가 더 붙을 팔자 같지만.

남자가 장난을 치듯 자신의 발을 내 어깨 위에 올렸다. 발바닥 사이로 입고 있는 티셔츠가 구겨졌다. 남자가 이제 발로 내 머리나 뺨이나 등을 밟는 건 익숙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앉아있자 남자는 질리지도 않는지 발장난을 쳤다. 깨끗하고 단정한 발가락이 내 뺨을 찔렀다. 눈을 벽시계 쪽으로 두고 있으려니 몽롱해졌다.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조용하네.”

긴장을 너무 많이 했더니 졸렸다. 가물가물 눈이 감기는 걸 참고 초침이 움직이는 모습을 읽었다. 1초, 2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남자는 나를 자신의 다리 사이에 두고 그렇게 애완견처럼 비비고 놀았다.

책상 위에 걸터앉은 남자가 어리게 보인다. 나는 무심결에 물었다.

“나를 사장으로 두고, 물러나면 뭘 할 거예요?”

귓가를 엄지발가락으로 찌르던 남자가 몸을 멈춘다. 여전히 시선을 시계에 고정한 채로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자는 말했다.

“세계 일주를 할 거야.”

생각보다 건전한 노후 계획이었다.

“여행 안 해봤어요? 부자니까 많이 해봤을 줄 알았는데.”

“너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이 집에 들어와서, 죽을 정도로 공부만 했으니 못 해봤어.”

“헤에, 재벌가 2세도 힘든 직업이네요.”

“글쎄…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 노인이랑 나랑 둘 다 완벽주의자라서.”

장난치던 발을 걷으며 남자가 허리를 펴고 바로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멋진 책상 위에 앉은 남자가 눈을 감고는 중얼거렸다.

“세계를 떠돌 거야. 내 취미는 여행인데, 고등학교 때 간 수학여행이 전부였어… 아니면 출장. 그것 말고, 배낭여행을 갈 거야.”

“허름한 숙소에서 못 잘 텐데요.”

“나는 노숙도 해봤어.”

재벌치고는 대단한 경험이긴 하다. 나는 차비와 식비가 없어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숙했었던 과거를 생각했다. 그 뒤에는 술을 먹고 만취해 길바닥에서 자다 경찰에게 붙잡혀 간 적도 있었다.

“멋지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열심히 해줘.”

“제 미래는 신경 안 써주시나요.”

“열심히 하면 네 손자가 생기도록 고려해보지.”

“사기꾼.”

간 큰 내 대답에 남자가 픽 웃었다. 산처럼 크고 미친놈 같던 사람의 계획을 들으니 숨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남자라는, 양이태라는 사람이 말한 꿈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내 눈앞에 있는 것도 어쨌든 사람이라는, 막연한 감정을 느꼈다.

여전히 시계는 째깍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초침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남자는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나를 내버려 두고 손장난을 쳤다. 갑자기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 앞주머니가 무거워졌다. 축 처진 주머니를 내려다보다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냈다. 핀셋이었다. 손바닥에 그 투명한 유리 조각을 올려놓고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이야.”

“…이걸요?”

나는 다시 한 번 핀셋을 내려다보았다.

“응.”

경쾌한 대답에 나는 손가락으로 연약해 보이는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유리는 품질이 좋은지 왜곡도 없이 건너편에 있는 사물이 비쳐 보였다.

“…고마워요.”

어쩐지 나도 남자를 닮은 나태한 어조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내 대답이 성의 없다며 입술을 꼬집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상한 밤이었다. 어쩐지 남자와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는데, 착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남자는 나를 집에 남겨놓았다. 현관문에 나가 출근하는 남자를 배웅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다. 내 미묘한 표정을 보고 남자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그리면서 윙크를 보냈다. 얼이 빠진 기분이었다. 의무적으로 아침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어제 있었던 일은 전부 잊은 것처럼 엄마와 나는 말없이 일상적인 아침 인사를 주고받았다.

“국 많이 줄까.”

“뭔데?”

“콩나물국.”

“응, 고춧가루 넣어 주라.”

엄마는 내 입맛대로 얼큰한 콩나물국을 한 그릇 따로 끓여주었다. 뜨거운 국물 대신 잘 익은 콩나물을 먼저 씹고 있는데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왔다. 느지막하고 게으르게 슬리퍼를 끌고 방을 나오던 여자가 수저를 쥐고 식탁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아침식사시간 지났어요.”

“시끄러워.”

여자는 못 보던 밤사이 뭘 한 것인지 술 냄새를 풍기며 내 앞에 앉았다. 엄마가 허둥지둥 국과 밥을 떠서 내밀었다. 오늘 아침 국이 콩나물국인 이유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여자는 수저를 든 채 킁킁거리며 국그릇의 냄새를 맡더니 수저로 한 숟갈 떠먹었다.

“으, 어제 위스키를 너무 많이 마셨어.”

위스키는 와이키키, 위스키, 같은 괴팍한 미소 연습 용도로밖에 모른다. 양주는 독할 거고, 어련히 마셨겠거니 하면서 부드러운 반찬을 여자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여자는 뜨겁지도 않은지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엄마에게 다시 한 그릇 떠달라고 요구했다.

“회사 안 가니?”

“제가 회사에 왜 가요.”

“이태랑 늘 출근을 하더니.”

뜨거운 아침 햇살이 집을 밝힌다. 나는 거실 창을 통해 가득 내리쬐는 늦더위 불볕을 바라보았다.

“제가 회사에 가서 일하는 건 아니니까요.”

“말은 따박따박 대꾸하네. 독한 새끼.”

여자는 속이 메스꺼운지 숟가락을 든 채 진저리쳤다. 식탁에 앉아서 헛구역질하는 여자를 보자 입맛이 떨어졌다. 국만 겨우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부엌에 있던 엄마가 허둥지둥 모습을 보였다.

“이소야, 더 먹지.”

“아니야. 나중에 먹을게.”

“배고프면 바로 말해. 응?”

“알았어.”

무언의 관계 회복 뒤에 이어지는 친절은 어쩐지 거북하다. 눈을 깔고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여전히 헛구역질 중이었다. 소란스러운 거실 분위기에 깼는지 반쯤 눈을 뜬 강아지가 여자의 방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고개를 돌려 여전히 국그릇에 고개를 박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당분간은 계속 저러고 있지 싶었다.

쪼그리고 앉아 손바닥을 내밀자 강아지가 폴짝폴짝 뛰어온다. 품 안에 들어오는 강아지를 끌어안고 일어섰다.

“엄마, 나 정원에 나가 있을게.”

“더울 텐데.”

“아무거나 시원한 거 한 병만 챙겨 줘.”

냉장고를 뒤진 엄마는 이 집이 매달 배달시켜 마시는 착즙 주스 한 병을 꺼내주었다. 얼음까지 다른 컵에 가득 채워서 들려준다. 손이 부족해 강아지는 옆구리에 끼고 현관으로 나갔다. 불편한지 내 팔뚝과 옆구리 사이에 자리 잡은 강아지가 바둥거리며 왕왕 짖어댔다. 자신의 납치 현장을 보고 엄마가 달려와 구해줘야 할 텐데, 불행히도 얘 엄마도 숙취로 고생 중이라 끈 떨어진 뒤웅박이었다.

“야.”

사람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강아지인데, 하도 이 집에서 인간미만의 취급을 당했더니 개랑 대화가 정말 통할 것 같았다. 유순하고 반들반들한 눈동자를 한 강아지를 더운 정원에 풀어놓고 가든 벤치에 앉았다. 엄마가 챙겨준 착즙 주스를 얼음 컵에 따라 마시니 천국 같았다. 후덥지근한 정원과 습도와 온도가 늘 최적화되어 있는 집은 느낌부터 다르다.

사람 사는 곳 같아.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고, 얼굴이 금세 익어버릴 것처럼 뜨거웠지만, 기분이 좋았다. 머리 위로 이름 모를 나무가 그늘을 느긋하게 만들어줬다.

강아지가 짖는다. 시끄럽다기보단 올망졸망 귀여운 소리였다. 여전히 그 작은 동물은 네 발을 재빠르게 움직여가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무 둥치를 박박 긁고 잔디를 물어뜯고 내 발치를 뒹굴었다. 바둥바둥거리며 오랜만의 외출에 즐거워하던 강아지는 금방 어디론가 뛰어갔다.

희고 통통한 엉덩이가 사라진 근처가 막다른 길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벤츠에 누웠다. 이 시간 정원에는 처음 나와 있었다. 사실 정원 구경 자체가 처음이었다. 남자와 출퇴근 길에 급하게 보는 관목들이 전부였는데, 이렇게 꽃나무가 많고 덩굴이 많고 잔디가 가지런하다. 태양이 하늘 중앙에 오고, 온도가 가장 높아지기 전까지는 좀 더 이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고 싶었다.

벤치에 누워있는 동안 혼자서 미친 것처럼 돌아다니던 강아지가 내 밑에 와 머리를 비볐다. 얼마나 열심히 뛰었으면 흰 털에 흙과 풀이 엉켜서 난리였다. 손가락으로 털을 정리해주며 허벅지 위에 올리자 사이 사이로 발을 헛디뎌 몸이 푹푹 빠지면서 짖어댄다. 웃겨서 낄낄거리며 목을 어루만져주었다. 눈을 감고 헥헥거리는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켜다 얼음 하나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줬다. 목이 말랐는지 할짝거리며 핥다가 다시 혓바닥을 내밀고 끙끙 앓는다.

“귀엽다.”

애완동물을 왜 키우는지 알 것 같다.

“나랑 살래.”

좋다는 것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핵핵거린다. 얘 내가 키운다고 하면 여자가 분명 난리를 치겠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우울해져 빈 컵을 아무렇게나 버리고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토라도 했는지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나오던 여자가 나와 강아지를 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너, 너.”

“어… 잠깐 산책 좀 시켰어요.”

생기발랄해진 강아지를 두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려 보여줬다. 여자가 진저리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더러워, 당장 못 씻어?”

“지금 씻길…”

“그 꼴로 내 방에 들어오게 하면 가만 안둘 줄 알아!”

어떻게 신발도 신기지 않고, 목줄도 안 하고, 거지 같은 꼴로 애를 돌아다니게 할 수 있냐고 온갖 욕은 다 먹었다. 나는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욕을 다채롭게 하는 줄 알았는데, 여자도 만만치 않았다. 둘이 같이 마주 앉아 욕하는 시합이라도 한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할 의사도 있었다.

여자는 숙취도 잊었는지 강아지를 빡빡 씻기라고 욕에 욕을 퍼붓고는 내 등을 마구 떠밀었다. 1층 욕실은 남자 출입 금지구역인 까닭에 2층으로 올라왔다. 팔자에도 없이 강아지 목욕을 시작했다. 모든 일의 원흉이 물이 틀어지는 욕조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오늘 이거 좋은 일은 죄다 하고 있었다. 그렇게 뛰어다니고 질리지도 않는지 종국에는 물장난을 치며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개 때문에 쫄딱 젖었다.

강아지를 계속 욕조에 처박아놓고 나까지 샤워를 했다. 샤워 가운으로 몸을 둘둘 말고 말썽이 심한 강아지도 건져 수건으로 둘둘 말았다. 너무 오래 놀게 했는지 강아지가 기침을 한다. 에취.

“하여튼, 말은 안 듣는다니까.”

“네 이야기 하니.”

남자가 있었다. 너무 놀라서 딸꾹질했다.

어디서 뺨이라도 맞고 온 것처럼 불쾌한 안색으로 남자가 내 꼴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수영이라도 했니?”

“그건 아버지가 한 것 같은데요.”

남자는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에 물이 뚝뚝 떨어진다. 남자가 턱짓으로 2층 복도 끝을 가리켰다. 아까까지는 분명히 맑은 하늘이었는데, 얼마나 욕실에 있었던 건지 폭우가 쏟아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천둥번개가 치는 소리도 이제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무안함에 수건으로 둘둘 만 강아지를 끌어안고 턱을 긁적였다.

“골프 치다 쫄딱 젖고 짜증 나서 집에 왔어.”

“거기서 샤워하지 그랬어요.”

“더 짜증나.”

이런 시간에 집에서 남자를 보는 건 처음이다. 남자는 정말로 골프를 치다 왔는지 처음 보는 반소매 셔츠를 벗어 바닥에 던졌다. 물을 먹은 옷감이 바닥에 떨어지며 습한 소리를 냈다. 점점 무거워지는 공기에 당황해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 순간 타이밍도 좋게 강아지가 추운지 또 재채기를 한다. 감기 걸리겠네. 젖은 수건을 통 안에 던져넣고 다시 마른 수건으로 몸을 감아줬다. 내가 강아지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하자 남자가 발로 나를 걷어찼다.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

성격은 정말 최악이었다. 자기 방에 있는 소중한 욕실도 두고 왜 바깥 욕실에서 씻겠다는 건데? 약이 올라 남자가 들어간 화장실을 향해 발로 걷어차는 흉내를 내다 1층으로 내려갔다. 서류를 끼고 있던 비서가 나를 보고 반가운 척을 했다.

“도련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아버지라면 방금 봤어요.”

“아, 그게 아닙니다.”

비서가 손을 내저으며 웃는다. 그럼 뭐지. 나는 강아지를 바닥에 내려줬다.

“사장님 기분이 아마 좋지 않으실 겁니다. 잘 맞춰주세요.”

“이미 아까 발로 차였어요. 좀 젖었다고 그렇게 짜증을 내요?”

“큰 사모님께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으셔서요.”

뾰족하게 날이 선 물음에 돌아온 답변은 정신을 날서게 만들었다. 남자가 왜 지나치게 불쾌했는지, 골프를 치다가 갑자기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는지도 감이 왔다.

노인. 이 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여자. 남자의 피 섞이지 않은 어머니. 나와 엄마가 집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 노인은 심할 정도로 자주 여행을 떠났다. 불쾌한 것들과 같이 머물러 있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엄마는 집에 사람이 적을수록 반가워했지만, 나는 종종 노인의 빈자리를 노려보며 부유한 시위를 견뎌냈다. 깐깐하고 주름진 얼굴이 세계를 누비면 누빌수록 엄마와 나는 천한 것이 되니까.

“언제요? 오늘 저녁?”

“아니요. 한 시간 전 착륙하셨다고 합니다.”

“그럼….”

“네, 곧 도착한다고 하셔서 급하게 오셨습니다.”

“원래는 돌아와도 신경 안 쓰잖아요.”

남자는 바빴고, 노인이 귀국하시는 시간은 늘 불규칙적이었다. 남자가 이 시간 기꺼이 집으로 돌아올 만큼 효자도 아니었다.

“갑자기 일이……”

갑자기 현관이 소란스러웠다.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지 식은 머그잔을 쥔 엄마와, 소음 탓인지 여자도 방에서 나와 바깥을 둘러보았다. 망, 강아지가 발치에서 긴장을 쫓아내듯 짖었다.

“뭐야, 엄마 왔어?”

여자가 반색한다. 친근하게 포옹을 하고 뺨을 비비며 여자와 노인이 애정이 어린 스킨쉽을 나눴다.

“비가 오고 그러는구나. 랜딩을 못하는 줄 알고 한참 난리를 쳤지 뭐니.”

“어머니 온다고 하늘이 반겼나 보네.”

노인이 귀국했다. 몸을 차곡차곡 집어넣으면 들어가질 정도로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든 사용인이 노인의 뒤를 따랐다. 은색으로 번쩍이는 노인의 여행용 가방에 벌써부터 두통이 왔다. 엄마도 옆에서 가볍게 한숨을 쉰다. 노인은 지팡이를 짚은 채 여자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여자는 애교 있는 목소리로 노인의 여행 감상과 피곤을 물었다.

“고개 숙여.”

언제 왔는지 모를 남자가 등 뒤에서 내 뒷머리를 내리치며 속삭였다. 노인의 얼굴을 보는 건 나도 싫다. 이번 여행은 유난히 길어지기에 좀 더 있다 올 줄 알았는데. 가지런하게 발을 모으고 공손한 척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팡이를 놀리며 걷는 노인의 발걸음은 불규칙한 간격을 지니고 있었다. 금세 거실 가장 중앙으로 들어온 노인은 뱀이 기어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집안의 사람들을 모여 자신에게 인사를 한다. 노인은 고고한 여왕인 것처럼 귀향길을 누렸다.

노인은 매일 비행기에 올라타 하늘 중앙과 손톱만한 건물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누린다. 남자는 거대한 사무실에 틀어박혀 종일 서류를 검토하고 회의에 참가한다.

자식의 꿈을 대신 이루는 부모와, 부모의 꿈을 강요하는 기형적인 모습이 보인다. 나는 늘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집 안에서 서릿발같이 차가운 기분을 느꼈다. 손가락 끝을 문지르며 노인이 자신의 방 안에 얼른 들어가 버리길 기원했다.

노인은 지팡이로 캐리어를 툭 치면서 턱짓했다.

“저기 있는 건 다 버려. 선물은 따로 내 방으로 들고 와.”

엄마가 눈치를 보다 노인의 가방을 열어젖혔다. 반도 쓰지 않은 명품 화장품과 옷가지들이 사용을 다 했다고 쓰레기가 되었다. 노인이 나와 남자를 지팡이로 겨눴다. 총구를 갖다 대는 것처럼 정확한 조준이었다.

“너희는 이리 들어오고.”

나는 남자와 노인의 독대를 응원해주려고 했지, 내가 끼이길 바라진 않았다.

“말이 길어질 것 같으니 주영이는 돌려보내.”

뒤로 살짝 떨어져 있던 비서가 흠칫했다. 노인을 말리지도 못하고, 중간에 낀 비서가 작은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사장님 회의는 어떻게…”

“먼저 회사로 들어가서 오늘 회의 전부 녹화해서 준비해둬. 자료는 알아서 쓸데없는 거 다 빼고 올리라고 하고. 나는 오늘 참가 못 한다고 해.”

“알겠습니다.”

“운전은 내가 해서 갈 테니까 그 차 그대로 타고 가.”

“네.”

비서가 재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남자가 내 팔뚝을 잡고 노인의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기 싫어 몸을 비틀었다. 남자가 내 어깨를 짓누르고 귀에 빠르게 속삭였다.

“제대로 떠들지 않으면 그 입을 확 찢어버릴 거야.”

“협박도 참 우아하게 하시네.”

“경고했어. 나는 허튼소리 안 해, 양이소.”

남자와 나는 사이좋게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침에 우리가 잠시나마 기분이 좋았다는 사실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무서울 게 뭐 있다고요?”

“나는 경고했어.”

남자가 나를 지나쳐 노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길래 짜증 나서 다시 문고리를 비틀어 확 열어젖혔다. 노인이 거주하는 방은 화려하고 고풍스러웠다. 각종 대리석과 원목을 깎아 만든 가구로 채워진 방 벽면에는 커다란 동양화가 붙어있었다.

노인이 방 여백을 차지하는 티 테이블에 앉아 서류 봉투를 하나 꺼내 올렸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서류를 툭 쳤다. 고개를 비스듬하게 들고 서류를 내려다보는 꼴이 뭔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노인이 눈짓으로 의자와 나를 번갈아 봤다. 나는 재빠르게 남자와 노인 사이에 끼어 앉았다. 거북한 상황에 위장이 뒤집힐 것 같았다.

“여독도 안 풀리셨을 텐데, 왜 부르셨어요?”

“내가 아들과 손자를 보는 것도 문제가 있을까.”

“손자는 무슨.”

내가 해야 할 말을 남자가 대신 받아치며 가볍게 웃는다. 나를 지칭하는 불쾌한 웃음에 몸을 비틀어 가렸다. 남자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반쯤 누웠다. 담배까지 입에 물고 발장난을 치며 까딱거리는 몸짓을 본 노인이 역정을 냈다.

“경망스러운 놈.”

“본론이나 이야기하세요.”

“내가 뉴욕 가서 친구를 좀 만나고 왔다. 괜찮은 애들을 몇 명 추천받았어.”

노인이 봉투 안에 있는 서류를 직접 꺼내 내밀었다. 영어로 적혀있는 타인의 신상정보였다. 총 세 명이었고, 생년월일만 봤을 때는 전부 내 또래로 보였다.

“전부 한국에서 해외입양 된 아이들이다. 전부 내로라하는 수재들이야. 정 결혼을 하기 싫으면, 제대로 사람을 골라.”

“이런, 어머니 아들이 벌써 정년퇴직할 나이도 아닌데.”

남자가 입을 가리고 웃는 척 담배 연기를 뿜었다. 눈앞으로 훅 다가온 뿌연 연기에 노인이 눈을 매섭게 치떴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서늘한 기색이었다. 노인이 방 안에 준비된 물을 한잔 따라 마시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처럼 고요히 분노를 뿜던 노인이 눈을 돌렸다.

“아가야, 네가 한번 말해보렴.”

당사자였으니 질문이 돌아올 거라고는 예상했다. 노인이 쪼글쪼글한 입술과 어울리지 않는 얇은 담배를 하나 꺼내 들었다. 찰칵거리며 라이터 불빛이 흔들거린다.

“엄마랑 이 집에 들어와 살려니 힘들지? 갑자기 공부라니, 얼마나 분수에 안 맞아.”

이 집에서 엄마와 내 욕은 가장 많이 한 주제에 걱정을 해준다. 너무 웃기니 웃음이 나오지도 않았다. 얼굴을 굳히고 앉아있었다.

"이 넓은 집 청소하는 것도 힘들고, 늙은이 비위 맞춰주려니 힘들지?"

“어머니.”

노인의 말을 끊으며 남자가 험악한 목소리를 냈다. 대부분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딱딱하다. 노인은 남자가 무섭지도 않은지 폐가 끓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주마. 빚, 그까짓 돈은 우리에게 푼돈이다. 내 개인 자산을 융통할 것도 없어. 빚은 물론 앞으로 네 어미와 살 집, 학비, 전부 지원해주마.”

“어머니!”

“시끄러워. 대답은 저 애가 할 거니 너는 있어.”

“저는,”

“원한다면 직장도 구해주마. 편안하게 공무원이라도 하는 건 어떠니.”

걸음걸이만 뱀 같은가 했더니, 하는 말도 뱀의 목소리가 같았다. 간질간질한 회유책이 눈앞에 보란 듯이 던져졌다. 선악과를 알면서도 씹은 아담과 이브처럼,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제안이었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남자가 주먹을 쥐며 으르렁거렸다.

“아들, 대답 똑바로 해.”

“협박을 하면 대답할 것도 못 하지. 아가, 솔직하게 말해봐.”

남자와 노인은 번갈아가며 내게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종용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냉정해야 한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어젯밤 어두운 공기와 시간을 제쳐놓고 상처를 치료해주던 남자가 스쳐 지나갔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은 새카만 불길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 노인의 귀국에 남자가 귀가했는지, 그의 기분이 왜 엉망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남자는 자신의 계획을 망친 노인에게 분노하고 있었고, 나의 배신을 우려했다.

배신이라고 할 것도 있을까. 우리는 강압적인 이해관계로 만들어진 부자지간이 아닌가. 비록 남자가 나를 어느 정도는 귀애하고, 아들이라고 불러준다고 했더라도.

“공증으로,”

“양이소!”

재빠르게 눈을 테이블 위로 내렸다. 아직도 아들 후보들의 자료가 널려져 있었다. 짧은 영어로도 몇 개는 읽을 수 있었다. 옥스퍼드 졸업. 수많은 자격증, 화려한 인생…

“…깔끔하게 서류 정리도 해주신다면요.”

“물론 그런 건 당연하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손이 핏줄을 드러내며 꽉 움츠러든다. 온몸으로 말없이 분노를 표현하는 남자를 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배신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맴돌았다. 이건 배신이 아니다. 나는 실리와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노인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경영을 맡는 것도 맞다. 나는 재능도 노력도 부족했다.

이 집에서 구박받는 엄마를 위해서라도, 엄마와 내가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 동안 관계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노인의 조건은 현실적이었고 완벽했다.

“어머니.”

남자는 이제 노인을 회유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녹을 것처럼 달콤한 음성이 정중하게 노인을 불렀다.

“어머니를 그렇게 죽일 듯이 부르는 아들은 없어.”

승리를 차지한 노인이 만족스러운 숨을 쉬면서 물을 한 잔 더 따랐다. 남자가 고개를 숙여 노인의 얼굴을 밑에서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속삭인다고 해봤자 주변이 너무 조용해 나도 들을 수 있었다. 음성으로도 교살할 수 있을 정도로 쾌락적인 리듬이었다.

“쟤는 제 아들이에요.”

“네 아들이면 내 손자이니 나에게도 자격이 있지. 그리고 저 애는 네 아들이 하기 싫다는구나.”

노인이 젖은 입술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겨우 입술 만큼, 그 정도 넓이만큼 젖은 손수건이 바로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내일 아침 당장 일을 진행하자꾸나. 올라가 있어.”

“어머니, 자꾸 이러시면 곤란하죠.”

“아직까진 그래, 내가 네 어머니구나.”

굉음이 들렸다. 남자는 순식간에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발로 차 한쪽 구석에 처박았다. 얼마나 세게 던졌으면 의자 다리 한쪽이 떨어져 덜렁거렸다. 완전히 찌그러진 의자를 보던 남자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방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문이 부서질 듯 닫힌다.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아한 얼굴로 자신의 손톱을 다듬었다. 눈치를 보다 구석에 처박힌 의자의 파편을 주웠다.

“영리한 선택을 한 거야. 네 엄마보다 나아.”

“이게 칭찬받을 만한 일인가요?”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노인이 나를 보았다. 아들을 고르고, 새로운 손자를 고르기 위해 세계를 일주한 노인이.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조금 전 뛰쳐나갔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내 팔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이 팔뚝을 짓누르자 뼈까지 긁히는 느낌이었다. 몸을 비틀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무례한 남자는 말도 없이 나를 끌고 나갔다. 나는 끌려나가며 노인의 얼굴을 무심코 보았다. 노인이 입술을 쪼그리고 웃는다. 이겼다는 쾌감이 표정 전체에 만개해 있었다. 해당화보단 독초 같았다.

방 바깥으로 나오자 엄마가 보였다. 아직도 긴장한 얼굴로 앞치마를 꽉 쥐고 있다. 나는 왼팔을 엄마에게 뻗었다. 가끔은 아주 미운데, 지금은 갑자기 너무 외로워 엄마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엄마.”

“이소야, 괜찮아?”

엄마가 나를 잡기 위해 성큼 다가왔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 남자가 나를 자신의 등 뒤로 밀었다. 교묘하게 꺾인 팔이 따가웠다. 엄마는 남자가 가로막자 걸음을 멈췄다. 엄마의 얼굴에 피어난 공포에 남자를 노려봤다.

“놔요. 엄마랑 할 말 있어요.”

남자가 쥐고 있는 팔은 이제 얼얼할 정도였다.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남자는 놓아주지 않았다. 비틀린 얼굴로 말끔하게 웃고 있는 것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미안한데 할 말은 나랑 더 많을 것 같네.”

“갑자기 왜 그러는…”

“일이 많으니 우린 올라갑니다.”

엄마가 불안한 얼굴로 내게 팔을 뻗었다. 같은 집에서 억지로 떨어져 엄마는 그대로 1층에 남고,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남자와 내가 머무는 2층은 아예 격리된 공간 같았다. 싫어. 발버둥을 치자 남자가 웃으면서 내 배를 받쳐 들어 올렸다. 복부가 졸리는 압박감에 숨을 들이쉬었다.

짐짝처럼 나를 들어 올려 걸친 남자가 느릿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화도 없이, 말도 없이 가파른 2층 계단을 오르는데 눈앞이 아찔했다.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 같아 급하게 남자의 셔츠를 쥐었다. 사지가 휘청거린다. 죽은 인간처럼 실려 가 서재 안에 처박혔다. 단단한 바닥에 나를 그대로 던진 남자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뼈까지 그대로 부딪혀 온몸이 아팠다. 끙끙 앓으며 고통을 참았다. 그사이 남자는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사이에 깨진 재떨이, 바퀴가 날아간 의자, 종이와 필기구가 새롭게 바닥을 굴렀다.

남자가 책상을 짚고 섰다. 광란의 폭력에 엉망이 된 건 물건뿐만이 아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리고 내려온다. 여전히 저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새카만 머리카락이다.

“정말 나 화나는 꼴 보고 싶니?”

“……뭐가요?”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사뿐사뿐. 남자는 자신이 만든 잔해 사이를 걸어오면서 물었다.

“아시잖아요. 저는 부족해요.”

“그래서 내가 노력하면 된다고 이야기했잖아.”

“노력해도 당신이 바라는 정도는 될 수 없어요.”

“말이 안 통하네. 언제부터 이렇게 고집이 셌지? 이번에도 방에 처박혀 굶으면 얌전해지나?”

나는 왜 남자가 나에게 집착하는지 모른다. 노인이 골랐으면 분명 그 사람들도 ‘예쁜’ 사람들일 텐데.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했고, 영어는 유치원생보다 못한 수준이었으며, 가정교사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덜떨어진 인간이었다.

어떤 부분에서 남자가 나에게 관대하게 굴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가 나를 아들로 부르며 즐거워한다는 것도 알았다. 친밀한 스킨십, 과한 애정과 폭력. 양비론을 삼키고 태어난 것 같은 남자.

남자는 입술 중앙에 담배를 사탕처럼 물었다.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담배 연기가 방 안에 차올렸다. 남자는 향을 즐기는 미학적 인간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어린 애들도 알아. 정성과 사랑을 준 애완동물이 늙고 힘이 없어도 여전히 예뻐하고, 어릴 때 끌고 잤던 곰 인형을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나는 곰 인형이 아니에요.”

“적어도 나에겐 그래.”

“……”

“내가 왜 화를 낼까?”

겨우 몇 달이 아닌가. 그전에 나는 키워지는 동물도 인형도 아니었다. 살아있고 숨 쉬는 인간이지. 처음으로 남자의 앞에 걸어가 정면을 마주 보았다. 남자의 입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담배를 빼내 입으로 가져다 댔다. 남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아랑곳하지 않고 젖은 담배 필터를 물고 빨았다. 하얀 연기를 자신의 방에서 당당하게 내뿜는 나를 보고 남자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더 예쁜 사람을 찾아요. 더 눈치 빠르고, 인형 취급해도 자존심 안 다칠 사람요.”

검지와 엄지를 튕겨 담배를 두들기자 재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고함과 폭력이 날아올 거라 생각하지만 남자는 인내심이 좋았다. 적어도 지금은.

“저는 치졸한 사람으로 살 거니까.”

“큽.”

남자가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 웃겨 죽겠다는 듯 한참을 낄낄거리던 남자는 눈물까지 훔쳐내며 고개를 들었다. 젖은 눈동자가 괴상하게 빛이 났다. 이 상황이 코미디로 느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제 우리가 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지난밤 유독 다정하던 남자.

“미친 노인네가 던지는 회유책 정도는 물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혹시 노인이 돌아와 내게 그런 제안을 할 걸 알았을까. 새로운 아들을 입양하기 위해 돌아다닌다는 것도 알고, 미리 나에게 잘해준 걸까.

도망가면 안 되니까. 매일 밤 끌어안고 귀여워해 주던 곰 인형을 엄마가 내다 버리면 안 되니까?

남자의 손가락이 바짝 다가왔다. 검지 끝이 내 속눈썹을 툭 건드리더니 어깨와 등을 쓸었다. 소름이 끼쳤다. 남자는 애무라도 하는 것처럼 내 상체를 가볍게 더듬었다. 걸음걸이처럼 부드럽게, 가볍게. 흔들리는 것처럼 움직이던 손가락이 내 멱살을 쥐어 들었다. 성인 남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기막힌 근력에 감탄도 잠시, 금방 목이 졸려 눈앞이 번쩍거렸다. 남자의 팔과 손목을 붙잡고 쿨럭거렸다. 내 뺨을 틀어쥔 남자가 정승처럼 웃기 시작했다.

목이 눌리자 반항할 힘이 없었다. 서재에서 내 목을 잡은 채 끌고 나온 남자가 계단 앞에 섰다. 방금 남자에게 들려 올라온 계단이 옆눈질로 겨우 보였다. 설마… 졸린 목으로 겨우 속삭였다.

“괜찮아. 깔끔하게 다리 정도만 부러질 수 있도록 던져줄게.”

“이거, 살…인.”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내 몸을 밀쳤다. 노인의 방에서 남자가 던져 망가트린 의자처럼 날아갔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막아줄 벽도 없이,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빌어먹게 높은 계단을 한 칸씩 몸으로 받아가며 떨어지는 사이 나도 모르게 기억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씩 충격을 받을 때마다 정신이 깨어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어렸을 때 철봉에서 떨어진 기억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지막에 머리를 박고 나서야 추락이 멈췄다. 강하게 부딪친 무릎을 덜덜 떨면서 붙잡았다. 고통으로 소리조차 웅크리고 숨을 내쉬었다. 아파.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흐릿한 시야에서 밝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사람을 계단 아래로 집어 던진 주제에 지나치게 깨끗한 웃음이었다. 조명조차 어두울 정도로 남자 혼자만 밝았다.

“나는 경고했어. 몇 번이나 말했고, 몇 번이나 너를 용서했지.”

“……”

“당장 어젯밤에도.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아들 같으니라고.”

나는 현실적이고, 가장 정당한 선택을 했다. 단순히 나뿐만 아니라,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최고의 선택이었다. 누구든 내 입장이라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만에 하나, 나와 다른 대답을 내놓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남자일 것이다.

“일단 너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병원에서 한숨 푹 자는 게 좋겠다.”

오로지 남자만 그의 정답을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참 구질구질했다. 부모복이 없으면 돈복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이상하게 가난하고, 일은 되다가 꼬이고, 군대에서는 정신병자 같은 선임을 만나 허구한 날 팬티 바람으로 굴렀다. 길가다 땡중이 날 붙잡고 얼굴에 빛이 없다는 기막힌 소리를 할 때 웃지 말고 쫓아가 부적이라도 써야 했던 거다.

이근영이 묵주를 준다고 할 때 받을 걸 그랬다. 목사의 아들인 주제에 개신교와 천주교를 구별도 못하는 무교 병신이라 무시했는데… 종교에 귀의하지 않아서 신이 나를 버린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세례나 받아볼까. 물이라도 뿌리면 잡귀는 떨어지지 않겠는가.

아니면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인연 다 끊고 혼자 살았거나. 하지만, 어쩐지 남자라면 고아인 나라도 찾아내서 아들을 시켰을 것 같다. 얼마나 독하면 사람 야멸차게 그렇게 계단에 집어 던질 수 있을까.

드라마라도 제대로 찍어보게 머리라도 망가졌으면 좋겠는데, 너무 멀쩡했다. 시력도 청력도 감각도 멀쩡하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멀쩡하고 발목이 부러졌다고 한다. 손목의 인대도 늘어났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반병신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데 의사 선생님은 젊어서 튼튼하다는 헛소리를 하곤 사라졌다. 누울 때마다 전신에 생긴 타박상 때문에 숨도 잘 못 쉬었다.

병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방은 호화스러웠다. 조명마저 익숙해 나는 대단한 악몽이라고 진저리치기만 했다. 깁스로 딱딱하게 묶여 고정된 팔과 다리만 아니었으면 정말로 믿었을 텐데. 불행하게도 멋진 현실이었다. 나는 커다란 병실에서 간병인도 없이 오도카니 눈만 깜박거리고 숨만 쉬는 것 말곤 할 것도 없었다.

남자의 뜻대로 나는 아주 실컷 잠만 잤다. 꿈은 순수한 악몽이었다. 강제성이 더해진 꿈에서 남자는 시시때때로 나왔다. 나를 괴롭히고, 짓궂게 웃다가 잘 해주는 척 화를 냈다. 나는 남자가 짜증을 내고 나면 텅 비어 사라진 곳에서 내가 망가트린 배의 파편을 보았다. 어지러운 방이 답답해서 청소를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팔과 다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접착제를 붙여놓은 것처럼 딱 달라붙어 나는 수많은 파편만 쳐다보며 애를 쓰다 깨어났다.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 엄마가 보낸 문자가 여러 통 도착해 있었다. 좀 괜찮냐는 문자 메시지에 별문제 없다고 말해주는 거로 대화를 끝냈다. 남자 성격에 엄마를 병원에 보내주지도 않을 게 뻔했다. 전치 4주라는데, 4주 동안 꼼짝없이 병원에 혼자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눈앞에 있는 티비나 켰다. 유치한 애니매이션과 어려운 뉴스를 반복해서 틀다 꺼버리고 큰 창에 가득 내려다보이는 서울시 전경을 보고 있는데 손님이 왔다. 눈을 뜨고 나서 처음 온 병문안 손님이었다. 입원 선물이라며 꽃을 들고 찾아온 비서가 내 옆에 앉아 숨도 쉬지 않고 비난을 쏟아부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어쩌자고 멍청하게 개겼냐는 거였다.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제가 사장님 기분 안 좋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기분이 안 좋다고 사람을 던져요?”

“멀쩡하시니 그래도 다행이지요. 많이 봐주신 겁니다.”

내 몸의 어느 부분이 멀쩡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누운 채 비서를 째려보자 슬쩍 시선을 피한다. 나쁜 놈. 저것도 이미 악마의 하수인이었다.

“한 번만 더 봐주면 아주 죽이겠네.”

“그러니 사장님 말씀은 그냥 잘 들으세요. 그 성격만 죽이시면 편할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십니까?”

“비서님이 그런 말 들어봐요. 누구든 다 나랑 똑같은 선택을 할 텐데.”

“비교 대상이 사장님이면 달라지죠.”

결국은 내 탓이란 말이구나. 듣기 싫어 불청객을 훠이훠이 내쫓았다. 비서는 아직 멀쩡한 내 한쪽 팔을 아쉽게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고 온 꽃을 잘 정리해 화병에 꽂는 것을 보며 물었다.

“화 많이 났어요?”

“음. 사장님을 말씀하시는 거면…”

비서가 드물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지만 직접 여쭤보라는 말밖에 못 드리겠군요. 아래 직원들이 오늘 다 죽어나고 있답니다.”

남자의 인간성이 대단히 나쁘다는 걸 알려주고는 비서가 겉옷을 집어 들었다.

“아마 밤에 찾아오실 겁니다.”

“여기 아버지 잘 곳은 없다고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기엔 여기가 좀 넓군요.”

비서가 병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도 고개를 까딱 들어 병실을 구경했다. 사실 병실은 병실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보단 호텔에 가까웠다. 남자와 내가 며칠 지냈던 호텔과 비슷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난 김에 기웃거리다 회의실을 봤을 때는 컬쳐쇼크마저 느꼈다. 왜 병실에 회의실을 처박아 둔 걸까. 하여튼 돈 있는 사람들의 뇌 구조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네,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비서가 자리를 떴다. 방이 넓어 가는 모습도 다 보지 못했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 한참 뒤에 숨을 토해냈다. 아직도 한 시였다. 세상에 시간이 이렇게 느리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이루어냈을지도 모른다. 체감 시간 36시간인 하루는 얼마나 길까.

간호사가 가져다주는 간식을 먹고, 또 저녁을 먹고,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고, 링거 수액을 바꾸는 게 오후 일과의 전부였다. 방은 너무 커서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뼈까지 멍이 든 것처럼 온몸이 쑤셨다. 점점 심해지는 진통에 결국 너스콜을 눌러 진통제를 처방받고 나서야 선잠이 들었다.

이번 꿈도 어김없이 남자와 관련한 꿈이었다. 꿈에서 남자는 엄마와 부정을 저지르고 있었다. 둘이 같은 방을 사용하고, 여보 당신하고 지칭했다. 서로 존중하는 부부관계였고, 흔한 부부 같았다. 나는 그걸 부정이라고 느꼈다. 불륜, 근친, 강간, 학대, 폭력. 뭐든 좋다. 최악의 범죄로 불렀다.

둘은 법적으로 완벽한 부부 사이인데, 이유 없이 토악질이 나왔다. 엄마와 남자의 앞에서 구토를 하자 남자는 내 사지를 벽에 매달고 드릴로 손가락을 박아넣었다. 꿈이라 고통도 없었다. 그냥 나사가 손가락을 파고들면서 드르륵, 하는 진동소리를 크게 냈다. 나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

심각하게 고아한 악몽의 원인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더듬거리며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휴대폰 액정에는 등록되지 않은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하지만 외우고는 있었다. 남자가 준 자료를 열심히 읽었으니까. 유쾌하지는 않은 연락이었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얼마나 잔 것인지 노을이 질락 말락 하던 하늘이 완전히 까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깨어났나 보구나.]

자는 사람을 깨운 게 자신이라는 생각은 못 하는 모양이다. 이기적인 유전자는 그 집안 내력인가 보지.

[아직 생각이 있나 싶어 전화해봤단다.]

그 제안 생각해보다 진짜 죽지 싶었다.

“네. 아직 있습니다.”

[무서워서 입이라도 다물 줄 알았더니.]

“원래 한 대 맞으면 더 개기는 취미가 있어서요.”

그 더러운 비위를 못 맞추거나, 그냥 배신을 했다고 죽나 똑같이 죽을 것도 같았다. 노인의 목소리를 듣는 내내 계속 역겨운 악몽이 생각나 헛구역질을 했다.

[몸이 아직 안 좋니?]

노인이 나를 걱정하는 척했다. 어지간히 달래서 내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만 하면 좋을 거 같은데요.”

[바로 그렇게 할 줄은 몰랐지. 미안하구나. 앞으로는…]

갑자기 하얀 손이 귀신처럼 나타나 내 휴대폰을 뺏어갔다. 귓가와 손을 스치고 지나간 냉랭한 한기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무뚝뚝하게 얼굴을 굳힌 남자가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하면, 걔도 별수 없을 거다.] 

휴대폰 너머 노인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린다. 씨발. 내가 욕을 입 밖으로 뱉는 걸 듣고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별수 없긴요, 어머니도 참 너무하시네.”

[……]

“이산가족 만들지 마시고 내 계획에서 손 떼세요. 내 아들에게서는 당연히 손 떼고.”

성의 없는 경고를 날린 남자가 전화를 뚝 끊었다. 까맣게 변한 액정을 들여다보더니 팔을 가볍게 휘두른다. 침대 발치의 모서리에 휴대폰을 내리치자 쩍, 액정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조만간 내 두개골도 저렇게 갈라지는 건 아닐까, 불안한 기분에 침을 삼켰다. 화가 나면 이번엔 계단이 아니라 창밖에 던져버릴 인간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깨뜨린 액정을 확인했다. 손톱에 액정 유리가 긁혀 나온다.

“미안하겐 생각해. 그렇지만 뭐, 거기서 몇 명 더 굴러봤는데 아직 죽은 사람은 없었거든.”

다짜고짜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한다. 거기다 하는 말은 추가적인 살인 미수 자랑이었다. 정말 잘했다는 걸까 싶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내 휴대폰을 창밖으로 던져버리더니 기분이 좋은 듯 기지개까지 쭉 켰다. 당장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해 보이는 얼굴로 남자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노인이 방 안에서 꺼내 들었던 서류를 왜 남자가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또 강제로 다른 사람의 신상정보를 구경해야겠다.

남자가 서류에 붙어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외모였다. 나쁘게 말해서 평범한 것인지 단정한 외모였다. 증명 사진이니 실물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남자가 서류를 두들기며 물었다.

“니가 봐봐. 이게 예뻐?”

“네.”

“……”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남자는 이번에는 다른 사진을 보여줬다. 이번에도 나쁘지 않게 생긴 사람이었다. 노인도 예쁜 걸 좋아한다더니, 외모도 어련히 선별해서 고르지 않았을까.

“이건?”

“예쁘네요.”

“너 눈 삐었어?”

정말 한심하다는 얼굴로 남자가 내 턱을 잡았다. 집요하게 내 눈을 살펴보며 그렇게 눈이 나쁘진 않던데, 하고 중얼거린다. 사람을 아주 병신 취급하는 태도에 손을 쳐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노인이 가져왔던 서류에 불을 붙였다. 종이는 쉽게 타들어 갔다. 하얀 병원 이불 위로 까만 재가 떨어져 엉망이 되었다. 간호사가 보면 또 화를 낼 텐데. 그러나 남자는 후폭풍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재가 묻은 손가락까지 침대에 닦아버렸다.

검은 재가 내려앉은 것도 아니고 아예 시커멓게 염색이 돼버린 이불을 망연자실해서 내려다보았다.

“내가 뭘 더 해줘야 하는데?”

나야말로 어디부터 설명을 해주면 남자 자신이 인간말종인 걸 알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언행에서 좋은 부분을 찾기도 힘든 주제에. 사람이 인간답게 이야기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긴 아는 건지, 남자는 혼자서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떠들었다.

“충분히 관심도 주고, 사랑도 주고, 밥도 사 먹이고 옷도 입히고. 예쁘게 꾸미고 관리하고.”

불경한 눈알로 나를 본다. 갈색 눈을 처음 봤을 때는 불쾌할 정도로 차갑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렌즈를 낀 것처럼 독특해서 시선을 뺏겼다. 남자가 여배우의 피를 받았다는 말에 연예인의 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지금 보니 그냥 짜증이 차오르는 색이었다.

“애 키우는 건 골치야…”

정작 아이를 키워본 적도 없으면서 남자가 미간을 쥐고 짜증을 낸다. 노인이 직접 양육을 한 건지, 다른 보모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를 키워준 사람도 분명 정상이 아닐 테다. 그러니 저딴 인간으로 자라서 사회의 비위를 망가트리지.

“그냥 내 아들 해주면 어때?”

“글쎄요. 내가 그랬잖아요, 다른 사람이 공부하고 사장이 되는 게 좋을 거 같다고요.”

“나는 공부만 하는 범생이들 안 좋아해.”

“성격도 좋은 사람으로 골라요.”

“아들이 아이스크림이야? 골라 먹게?”

짜증이 난다. 말꼬리를 붙잡고 질질 늘어지는 남자를 향해 짜증을 냈다.

“나도 아이스크림처럼 골라놓고 무슨 상관이에요?”

“골랐으면 끝이지.”

끝을 모르는 건 남자였다. 남자는 넥타이를 당겨서 풀어내며 내 옆에 풀썩 앉았다. 담배가 피우고 싶은 것인지 초조하게 무릎을 떨다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남자를 보다 물었다.

“그래도 내가 나간다면요?”

“글쎄.”

“뭘 할 거예요? 이제 감금이라도 하실 건가?”

“아니. 감금보단… 그래. 너네 엄마 목이라도 비틀까?”

하, 남자가 웃으면서 말을 정정했다. 너네 엄마 아니고 정혜 씨.

“정혜 씨 한테는 너를 두고 협박하면 더 좋겠지?”

“…나 협박해요?”

“응.”

협박과 이간질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 아들. 남자가 내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풍경만 보면 무엇보다 성스럽다. 남자는 특별히 아름다운 가면을 쓴 잔인한 인간이었다.

눈을 가볍게 깜박거린다. 속눈썹이 나풀거린다. 노인도 남자도 나더러 예쁘다고 하니 정말 내가 예쁜가 거울을 한참 보고 있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얼굴이지,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역시 예쁜 사람을 고르라면 나보다는 남자였다. 이렇게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있으면 사람보다는 어떤 예술적 형태 같았다. 체온이 차가워서 더 이질적인 기운을 띄고 있었다.

뺨도 손가락도 차갑다. 나는 고정해둔 발을 쳐다봤다. 오른발은 전진을 할 것처럼 뻗어 있었으나, 그대로 공중에 묶여 있었다. 내 꼴도 참.

남자의 뼘을 손가락으로 밀쳤다. 기분 좋은 꿈에서 벗어난 아이처럼 남자가 서글픈 낯빛을 했다. 내가 저 이중적인 얼굴에 속을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집이나 가세요.”

“여기서 잘 거야.”

“침대 없어요.”

“너 여기가 하루에 얼만지는 알아?”

안다. 여분의 침실이 두 개나 있는 것도 봤다. 나라면 하루 자달라고 빌어도 못 잘 곳이었는데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가장 좋은 곳만 골라 썼다.

“나라도 같이 자 줘야 네가 악몽을 꾸면 안아줄 수 있지 않겠니.”

“애 아니에요.”

“충분히 어려.”

울컥해서 쏘아붙였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원래 어린 애들은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 자라야 한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나를 병원에 입원시킨 패륜의 장본인은 장식장에 진열된 양주병을 꺼내 들었다. 저거 마셔도 되는 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정말 본전을 뽑으려는지 남자가 양철 바스켓과 집게까지 꺼냈다. 얼음 정수기에서 얼음이 쏟아지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얼얼한 소음에 귀를 틀어막고 있으려니 향긋한 향이 퍼졌다.

                                                

진한 색을 띤 알코올을 구경하다 물었다.

“위스키에요?”

“꼬냑.”

남자가 술을 한 모금 넘기며 대답했다. 위스키나 꼬냑이나 똑같은 양주인데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이것도 예절 수업 시간에 배웠는데. 그냥 그때 술을 몰래 찔끔찔끔 마시다 취했다. 그 사실을 들은 남자에게 두들겨 맞았고…

“꼬냑은 포도주를 증류한 거고, 위스키는 곡물 발효주를 증류 킨 거란다.”

“알아요.”

“모른다는 표정 짓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잘났으면 돗자리나 깔지. 입술을 씰룩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4주간 금주를 당한 사람을 앞에 두고 남자는 보란 듯이 술을 홀짝거리면서 웃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남자의 앞모습이 유리에 반사되어 보였다. 양주잔을 한 손에 잡고 우뚝 선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남자가 보고 있을 만한 위치를 어림짐작해 같이 내려다보았다. 밤인데도 세상이 밝았다.

서울의 야경을 이렇게 높은 곳에서 본 건 처음이다. 남산 타워에 올라가는 것도 비싸다고 가보지 않았는데, 남산 타워 입장료보다 몇십 배로 비싼 병실에서 숙박을 한다. 특실 비용만 하루에 백만 원이 가볍게 넘는데 침대가 너무 불편했다. 엄마 옆에서 요를 깔고 자던 과거가 그립기는 또 처음이었다.

이러다간 친아버지마저 그립지 않을까.

생각에 빠진 내 어깨를 두드린다. 고개를 돌리자 남자의 얼굴이 다가왔다. 하얗게 취한 얼굴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내 눈꺼풀 위로 내렸다. 알코올 냄새로 나까지 취할 것 같았다.

“너도 마실래?”

“마셔도 돼요?”

최근 못 마셨던 알코올에 허기가 졌다. 나도 몰래 입맛을 다셨다. 스무 살 때 동창들끼리 맥주에 양주를 말아 폭탄주를 마시고 훅 갔던 기억이 있었다.

“안돼.”

“왜 물어봤어요?”

“환자잖아. 정신 빠졌긴.”

김빠진다. 남자는 내가 보는 앞에서 꼬냑을 한 잔 더 따랐다. 저 인간이 사람을 놀리는 모양이다. 나는 술 대신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언젠가 나보다 더 마음에 드는 아들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컵을 입술에 붙이고 있던 남자가 눈썹을 휘었다. 짝짝이로 커져 있는 눈이 말없이 나를 보았다.

“그럼 그때 가서 선택하면 되잖아요.”

꿀꺽. 남자가 술을 넘기는 소리가 유난스럽게 들렸다. 들고 있던 잔을 내려둔 남자가 손가락으로 통통, 양철 바스켓을 치며 침묵에 빠졌다.

텅, 텅. 얼음이 채워진 금속 소리는 차갑고 빈 소리가 났다.

“이렇게 생각해봐.”

“……”

“네가 올림픽에 나가서 은메달을 땄어. 금메달을 놓친 게 너무 아까운 거야. 그런데 IOC에서 그러네, 지금 은메달을 포기한다면 다음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여하겠다고. 조건은 딱 하나, 메달권 안에 들기만 하면 되는 거지.”

저벅저벅 걸어오며 남자가 무거운 목소리를 냈다. 어려운 질문이라 제대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너라면 불확실한 금메달을 위해 은메달을 포기할 거야?”

“……”

“회사 경영은 오너마다 스타일이 달라. 우리는 늘 안전함과 변동 가능성 적은 꾸준함을 밀고 나가고.”

남자가 묻는다.

“술 마실래?”

대답 없이 남자를 바라봤다. 손가락이 내 입술을 쓸었다. 왠지 모르게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혀를 내밀어 살짝 핥아보았다. 독한 양주의 맛이 났다. 아주 쓰고, 이상한 향이 났다. 이런 향을 좋다고 사람들은 양주를 마시는 걸까. 내가 아랫입술을 훑는 것을 본 남자는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만졌다. 입술이 꼬냑과 남자의 손가락으로 흠뻑 젖었다.

“그래도.”

운을 뗐다. 독한 술맛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이건 아니라는 생각은 든다. 나는 한 번도 틀렸다는 걸 옳다고 해본 적은 없었다. 삶은 자신이 선택해서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누구나 다 다른 인생을 산다. 선택지가 같지 않으니까.

“그래도 나는, 은메달을 포기할 거예요.”

남자의 아들이지만 남자는 아니니까.

“아버지가 아니니까.”

허탈하게 웃는다.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그대로 던지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 말은 알아들었어.”

날카롭게 부서진 크리스털 파편을 보았다. 길게 찢어진 잔에 들어있던 꼬냑이 바닥을 타고 흐르면서 독한 향을 뿜어냈다.

“이젠 정말 전쟁이야.”

함선과 전투기 모델에 환장하는 전쟁광 남자의 선포를 웃으면서 넘겼다. 어디 한 번 또 굶겨 보라지. 그런 마음이었다. 끽 해봐야 감금이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남자가 포로를 대하는 태도는 일관성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감금. 말 그대로 병실 안에 감금당했다. 휴대폰은 남자가 20층 아래로 던져버렸고, 병문안을 오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매시간 간호사와 의사가 들어와 수시로 몸 상태를 체크하고, 링거 팩을 갈아주고, 주사를 놔주었지만 말을 시키지는 않았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더니 내 질문도 못 들은 척하는 걸 보고 분통이 터졌다. 남자에게 언질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니 환장을 할 노릇이었다. 언제 퇴원을 할 수 있냐고 물어도 묵묵부답. 전화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해도 반응이 없었다.

남자의 전쟁은 강대국이 약소국에 하는 일방적인 침략이었다. 자기 기분을 못 맞춘 내게 주는 벌. 저번에 준 혹독한 벌이 감금 및 기아난민 체험이었다면 이번에는 감금에 침묵 수행인 모양이다.

티비도 틀어지지 않았다. 입원했을 때는 이런저런 읽을 만한 책에, 잡지에 신문까지 꼬박꼬박 주더니 글자 읽을 거라고는 에어컨 버튼과 티비 리모컨뿐이었다. 거기에 저녁 9시만 되면 방에 불까지 꺼졌다. 나는 하루의 절반 이상은 침대에 누워만 있고, 가끔 심심하면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는 거로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방에 불이 꺼지면 밤새도록 야경 불빛이 하나둘 꺼지는 걸 밤새도록 지켜보다가 잠을 잤다.

시계 째깍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곳이었다. 늘 창가에 목발을 짚고 서서 자동차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하거나, 환자들이 돌아다니며 산책을 하는 걸 부럽게 구경했다.

병실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금지당했다. 방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장정을 보며 말없이 문을 닫았다. 나한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샤워를 도와주는 남자 간호사뿐이었다. 그 사람도 하는 말은 눈 감으세요, 눈 뜨세요. 끝났습니다. 이 세 마디였다. 그렇다고 칙칙하고 외롭게 지내는 병실에 남자가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 왔으면 말로 물어 뜯어가며 싸우기라도 했을 텐데, 어찌나 바쁘신지 연락도 한 통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니까 미칠 것 같았다. 아침밥에 나온 고등어 토막 구이를 보고 말을 거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녕, 너는 제주도 산이니 러시아 산이니…로 시작하는 슬픈 내 대사를 듣고 간호사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젓가락에는 너는 어느 공장 출신이니를 물어보다 아침밥이 다 식고 나서야 밥을 먹었다. 점심에는 후식으로 나온 과일에게 안부를 물었고, 저녁에는 그냥 밥알을 셌다.

언어와 사회성을 잊지 않기 위한 내 노력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남자가 나타났다. 나를 가둬두니 기분이 좋은지 평상시처럼 잘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깐죽거리는 인상이라 바로 목발을 집어 던졌다. 피하는 바람에 바로 뒤에 있던 액자 유리가 그대로 깨졌다.

망할. 더러워진 이불을 보고 간호사가 온종일 화를 냈는데, 저 꼴을 보곤 뭐라고 할까.

“인사가 과한걸.”

내 다정한 첫인사를 남자가 그런 식으로 깔아뭉갰다. 억울한 얼굴을 지으니 남자가 말을 바꿨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하던데.”

“오해…”

오해에요,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몇 번 겪었다고 약은 생각이 났다. 나는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지었다.

“후회하고 있어요.”

“연기력을 좀 기르렴.”

대놓고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본 남자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늘 샤워는 하고 있으니 머리는 보송보송했다. 하도 많이 자서 뒤통수가 눌렸다며 남자가 가만가만 내 뒷머리를 매만졌다.

“내일 정혜 씨가 올 거야.”

“엄마가요?”

“응. 엄마도 좀 보고 살아야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한 남자가 방긋방긋 웃는다.

“뭐라고 했어요?”

“이젠 요점만 파악할 줄도 알고.”

남자는 유난히 말을 돌리며 웃기만 했다. 남자가 나를 보러 오기는 했지만, 그게 전쟁이 끝났다는 표시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남자는 나와 대화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냥 괴롭히기 위해 온 거다. 내일은 더 힘들 테니 기대하라는 사소한 폭력.

더럽게 재수 없이 잘 웃는다. 졸린다며 이불을 확 덮고 누웠다.

“벌써 자려고? 더 이야기 안 하고?”

무시하고 잠을 자는 척했다. 사실 온종일 너무 많이 자서 잠도 오지 않았는데, 괜히 고집을 부리고 이불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숨이 막혀 갑갑했다.

“잘 자, 아들.”

그놈의 아들 집착 증세가 대단히 심한 남자가 인사했다.

남자는 비정상적인 싸이코였지만 허언증은 없는지 정말로 엄마가 병문안을 왔다. 못 본 사이에 핼쑥해진 엄마가 내 부러진 다리를 보자마자 울음부터 터트렸다. 하여튼 엄마들은 다 눈물이 너무 많다. 며칠 사이 익숙해진 목발을 짚고 성큼성큼 걸어가 엄마의 어깨를 안았다. 많이 야위었다.

“전부 엄마 때문에, 엄마 때문이지.”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지는데 엄마 탓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이 엄마한테 다 이야기해줬어. 엄마 때문에 네가 그 꼴이 났다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우는 엄마를 보며 나는 남자 욕을 수천 번을 했다. 어떻게 말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남자는 엄마에게 죄책감을 쥐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 모양이었다.

엄마는 흐느끼면서 더듬더듬 내 팔과 등을 어루만지며 또 왜 이렇게 말랐느냐고 울었다. 사실 마른 건 내가 아니고 엄마인데. 엄마는 내가 세 끼 잘 먹고 뒹굴뒹굴하는 사이에, 내가 구른 계단을 닦고, 내가 흘린 피를 치우고 잠도 자지 못했을 텐데.

너무 오랫동안 엄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 엄마는 그냥, 늘 외롭고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뿐인데.

그냥 그게 늘 남자들이 되었던 것뿐인데, 이해하려고 해도 나는 엄마가 아니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애인이 없어도 잘 버텼으니까.

“엄마가 엄마 힘든 거만 생각했어. 늘 우리 아들밖에 없는데. 이소야, 엄마 진짜 괜찮아. 그 집에서 일 하는 거 하나도 안 힘들어.”

힘든 건 크고 작음의 차이뿐이지, 늘 힘들다. 좋은 사람과 행복해도 가끔은 힘든데 엄마는 불행하지만 덜 불행하므로 힘들지 않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때까지 잘 버틴 것도 아니었다. 크고 나서는 아버지와 손가락질을 하며 싸우고, 집기가 부서지고 욕설이 오가기도 했다. 엄마는 그 뒷정리를 전부 혼자 했다. 아버지가 외박을 하던 날 밤에 혼자 소주를 마시고 취해 부엌 바닥을 구르며 주사를 부리던 엄마를 기억한다. 나는 엄마를 위로하지도 못했고, 같이 외로운 집을 청소해주지도 않았다.

힘들지, 엄마. 그 글자 다섯 개가 왜 말하기 어려웠지.

“부잣집에 들어가면 너는 잘 될 줄 알았어. 아르바이트도 안 하고, 다들 부자는 좋다 좋다 그러니까…. 엄마는 성벽이라도 있는 돈푼 있는 사람인 줄 알고…”

숨이 막혔다. 왜 어머니는 헌신적이어야 하는가. 어머니라는 존재만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질까. 아빠들은 나가서 돈을 벌어 오니까? 엄마는 내가 철들기 전부터 늘 일을 하고 있었다. 맞벌이 부부도 많아졌다고 한다. 그럼 이건 그냥 사회적인 썩은 악취였다. 이미 썩은 걸 맛있다고 씹어먹고 있으니 제대로 소화가 될 수도 없다.

상한 이념을 먹고 탈이 난 사람이 바로 엄마다.

“엄마, 엄마는 소모품이 아니야.”

내 대답에 엄마가 굉장히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엄마의 말에 나는 더 상처받았다. 엄마의 자존감은, 언제부터 없어졌을까. 첫 선택에 실패했다는 좌절감?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나 그 인생에 동참했다는 수치심? 나는 엄마의 손을 끌어다 잡고 어루만졌다. 더 어렸을 때 이렇게 해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학대는 견디는 거 아니야. 왜 자신을 학대시켜. 왜 스스로 실험당하는 쥐를 자처해. 엄마가 그럼 엄마 아들인 나는 뭐야? 응? 나도 소모품이잖아.”

“그 사람이, 그래도 너 아들이라고 예뻐하니까…”

“엄마.”

돈을 주고 예쁘다고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건 친아버지도 했던 짓이다. 용돈을 달라면 용돈을 주었다. 기분이 나쁠 때는 눈앞에서 설설 기어도 등신이며 병신이라고 화를 냈다.

“…엄마 그건 예뻐하는 게 아니야.”

엄마가 입술을 꽉 깨문다. 나는 차근차근 말을 했다. 엄마가 더 나쁜 사고에 빠지지 않도록, 더 악한 연민에 길들지 않도록.

“아빠가, 자기 기분 좋을 때는 너그러웠다 기분이 나쁘면 늘 폭언을 퍼부었잖아. 그럼 엄마는, 그 사람 잠깐 기분 좋을 때는 인격적으로 보였어?”

“…이소야……”

“나는 그게 더 소름 끼쳤어.”

남자는 친아버지보다 우아한 언어로 폭력을 사용했다. 늘 좋은 옷을 입고 잘 꾸민 얼굴로 폭력을 행사하였다. 그건 등신과 병신이 붙지 않은 가해였다.

“엄마, 예뻐해 준다고 행복한 거 아니야.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해도 그거 정상 아니야. 누가 13살 아래인 사람을 부성애를 가지고 사랑해.”

그거 사랑 아냐.

나는 되뇌었다.

“그거 엄마가 생각하는 사랑 아니야.”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렸다.

머릿속에 그 단어가 빙글빙글 맴돌았다. 나를 좋아한다고, 예쁘다고 말해주던 남자의 얼굴이 언뜻 떠올랐다. 불안한 감각이, 폭력의 잔재가 팽이처럼 돌았다.

“이소야?”

엄마가 불안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주름졌지만 크고 따뜻한 엄마의 손을 잡고 품에 안기며 수십번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엄마가 나한테 주는 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지.”

가끔 서로 모진 말을 하고, 투닥거리고 상처를 주지만 결국 조건 없는 사랑 아래에 갇혀있잖아. 이걸 엄마, 세간에서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고 해.

그러니 그건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야.

엄마는 내가 불안했는지 부득불 우겨 같이 자고 갔다. 남자가 쓰던 방 말고 간병인용 침실이 더 있었는데도,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한다며 불편하게 소파에서 잤다.

소파는 크고 무거워 엄마를 삼켰다. 피곤했는지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엄마가 원망스럽고, 미울 때도 잦았다. 왜 나를 낳았는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자식 때문에 맞고 살았다거나, 나 때문에 이혼을 못 했다는 말도 듣기 싫었다.

하지만… 조금 더 크고 나니 엄마를 종종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오긴 했다. 엄마는 그냥 어쩔 수 없었던 거다. 모든 성인이 옳은 선택과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엄마와 나는 같은 사람에게 폭력을 당했지만, 엄마가 받는 폭력과 내가 받는 폭력은 또 달랐을 것이다.

모든 여성이 주도적이고 깨어있는 생각을 하지는 못한다. 누군가는 가정이 있다는 것 자체로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겠지. 수많은 폭력 가정이 그렇듯.

엄마 손을 몰래 만졌다. 결혼반지는 이미 팔아치우고 없었다. 허전한 약지를 매만지며 엄마가 가끔 금은방을 뒤적거린다는 걸 알았다. 금가락지 살 만한 돈은 없었다.

누군가 한 명쯤은 엄마에게 쌈짓돈을 털어 반지를 사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뭐, 사람 팔자가 그렇게 흔하게 바뀌는 건 아니더라. 남자도 돈이라면 넘칠 만큼 있었지만 엄마의 빈 손가락을 감싸주진 못했다.

입구 쪽이 불이 켜졌다.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나를 향해 손짓하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일어났다. 엄마가 깰까 봐 목발을 들고 살살 걸어 나왔다. 내 느릿느릿한 걸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남자가 바닥을 탁탁 쳤다. 엄마가 뒤척거린다. 속으로 욕을 하면서 문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나와.”

어차피 나갈 거였다. 남자가 나를 끌어당기고 문을 닫았다. 복도에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명 서 있는 것 빼고는 조용했다. 밤이니 잘 시간은 맞다. 남자가 등을 돌려 앞서 걸었다. 여전히 바른 걸음걸이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라면 남자는 분명 술을 마셨을 것이다.

걸어가는 남자의 몸에서는 흠뻑 젖은 술 냄새가 났다. 어디 술 공장에 파견 체험이라도 나갔다가 왔는지, 걸을 때마다 내가 술 냄새로만 취할 지경이었다. 남자는 손잡이를 열고 어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절뚝거리면서 목발을 들고 따라갔다.

남자는 불도 켜지 않고 소파에 벌렁 누웠다.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방은 넓었고 소파와 테이블 몇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 닫고, 앞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문을 등지고 서서 물었다.

“당신 취했어?”

“어쭈, 아빠라고 제대로 불러.”

호칭 지적할 정신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한숨을 쉬면서 남자가 시키는 대로 맞은편에 가 앉았다. 바깥으로 난 창문으로 희미하게 빚이 들어온다. 남자의 윤곽이 대충 보일 정도였다.

“불 켜지 마. 머리 아파.”

“안 켜요.”

환하고 밝은 곳에서 남자를 볼 마음도 없었다. 남자는 이마에 손을 올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기분 나빠서 좀 마셨더니… 아, 다 너 때문이야.”

“왜 저 때문이에요.”

“네가 속상하게 하니까 그렇지.”

다짜고짜 밤에 사람을 불러내서 하는 말이 내 탓이란다. 왜 이 사람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람 속을 뒤집을까. 얼마나 책을 잡을지 궁금해서 팔짱을 꼈다. 그래 봐야 한쪽 팔은 깁스를 한 상태라 우스꽝스러웠지만.

남자는 건달처럼 비스듬하게 앉은 나를 욕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술을 많이 마신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다 차곡차곡 벌 적립일지는 모르겠다. 턱을 괸 채 남자의 눈을 보았다. 남자는 정말로 머리가 아픈지 반쯤 눈을 감고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가슴팍이 오르내릴 때마다 입에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났다.

“물 줘.”

“어딨는데요?”

“냉장고…”

남자가 몸을 뒤척거리며 우는 소리를 한다. 주정뱅이는 이기는게 아니라는 지론으로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찾았다. 어둠속에 더듬더듬 손을 짚어가며 전자기기 불빛과 소음을 찾아냈다. 왜 병원 복도에 있는 만남의 장소 같은 곳에 양문형 냉장고가 있는 걸까.

의문을 깊게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는 주스와 물이 종류별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누가 마시나 했던 에비앙을 한 병 꺼내 들고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남자는 일어나 물을 깔끔하게 비우더니 다시 소파 위로 누웠다.

“일어나서 집에 가요.”

“안 가.”

“엄마 괴롭히고, 나 괴롭히면 된 거지 왜 자꾸 이럽니까.”

골난 소리를 하자 남자가 눈을 빠끔 뜨고 나를 본다.

“안 괴롭혀.”

“그럼 뭔데요, 예뻐해 주는 거예요?”

“응.”

저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머리를 쪼개서 뇌를 기부하는 게 그나마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남자는 숨을 몇 번 크게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구겨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정말 많이 취하긴 한 모양이었다.

“왜 사람 성의를 곡해해?”

“뭘요?”

“정혜 씨 앞에서까지 나를 엿 먹여야겠어?”

엿이라니. 남자는 한국어를 잘못 배운게 분명하다.

“그럼 제가 한 말 중에 틀린 게 뭐가 있어요?”

“다 틀렸지. 내가 널 예뻐하고, 널 사랑하는 게 아니면 뭔데.”

갑자기 걸리는 게 있었다.

“엄마랑 대화한 내용은 어떻게 아세요?”

“내가 그 정도로 느슨한 인간으로 보여?”

남자는 당당했다. 그 뻔뻔한 얼굴을 보다 인권을 주장했다.

“도청은 불법이에요.”

“넌 내 아들이지.”

그리고 내가 도청만 할 거 같아? 남자가 아주 당당하게 내뱉는 말에 기가 찼다. 그래, 도청도 하니 휴대폰으로 하는 연락도 전부 감시하겠지. 이동 장소, 하는 말, 이러다가 입었던 속옷 색깔까지 검사하겠어. 어디서부터 남자의 도덕성을 지적해야 할지 몰라서 한숨만 쉬었다.

“다 들은 김에 말해볼까요.”

“뭘?”

“아들이 뭐예요?”

“아들이지.”

“당신한테 내가 사람으로 느껴지긴 해요?”

저녁 어스름도 물러간 지 오래된 시간이었다. 지금이 몇 시쯤 되었을까, 밤 귀가 얕은 엄마가 혹시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남자와 엮이면서 오랫동안 연락을 못 했던 사람들도 보고 싶었다.

비슷하게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업 걱정을 하는 놈이나, 전문대에 다니는 놈이나, 여자친구와의 불화에 시달리는 놈들이나, 뭐든 좋았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 비슷한 이야기를 하며 떠들고 웃고 싶었다. 매일 남자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비슷한 내용으로 입씨름하고, 거북하고 음습한 집에 들어가 잠을 자는 하루가 싫었다.

남자는 나를 가둬놓고 지켜보길 좋아했다. 햄스터를 상자 안에 놓고, 해바라기 씨 몇 개를 까먹고 하루에 몇 번 쳇바퀴를 돌리는가 관찰하는 주인의 태도였다.

내 행동, 내 말투 하나 남자의 비위와 이상에 맞춰주지 않으면 화를 낸다.

나는 사람이긴 한가?

“글쎄.”

기대도 예상도 저버리지 않고 남자가 말한다. 허무하다거나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남자의 태도 전부 아들보단 동물을 다루는 포악한 행동이었으니까.

“잘 모르겠는데.”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었다. 남자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는 것이 되었다. 이 정도로 내가 남자를 싫어하고 미워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키우던 동물이 갑자기 손가락이라도 물어오면 서럽죠?”

“…흠?”

“그렇다고 술까지 마시진 마세요. 걔가 원래 기분이 널을 뛰어서.”

힘 빠진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을 내저었다.

“모르겠지만 네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알겠어. 그냥 방에 돌아가.”

“아버지는요.”

“알아서 잘 거야.”

눈을 감은 채 성의 없이 말하는데, 저걸 저렇게 둬도 괜찮은가 싶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남자를 보다 방을 빠져나왔다. 서 있던 경호원 한 명이 나를 병실까지 데려다줬다. 부축을 해준 덕분에 한결 편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고 조용하게 자고 있었다. 흘러내린 이불을 조심조심 다시 덮어주고 나도 침대 위에 누웠다. 이불에서는 락스 냄새가 났다. 희고 밝은 냄새.

그제야 눈물이 조금 나왔다.

다친 자존심이 미세하게 균열이 가더니 찔끔찔끔 아프다고 호소를 한다. 남자는 말끔하고, 순수한 얼굴로 사람을 망가트리는 멋진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남자의 애정을 부정했다고 술을 마시지만, 사람인지는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이중적인 태도.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 위주로 이루어진 선택.

은메달이나, 금메달이나 남자가 그런 걸 논할 수준이 아니었다. 올림픽 메달은 값진 것이 아닌가. 운동 선수들에게 더없는 영광을 주는 메달이 인간 이하의 흥미와 비교 가능할 수 없었다. 남자와 내가 서로 이소라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니까, 그의 충고도 분노도 나를 설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 이건 전쟁이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주체인데 대화를 해봐야 말이 통할 리가 없다.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남은 건 무장과 폭력이었다. 전쟁은 한참 전에 시작된 건데, 내가 너무 늦게 알았다. 오래 부정한 자존심이 욱신거렸다.

엄마는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를 마중 나온 비서가 선물이라며 책을 잔뜩 쥐여주고 갔다. 간호사와 의사는 여전히 묵언 수행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멍청하게 있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아침부터 책을 펼쳤다. 타인과 대화하는 게 금지된 상황이다 보니 책 내용이 쏙쏙 들어왔다. 혹시나 남자가 공부 효과를 노린 거라면 성공적인 고문법이었다.

가져다준 책 대부분은 세계사 같은 역사와 부모와 자식 간의 심리학이라는 쓸모없는 내용이었다. 역사를 제외한 개떡 같은 책들을 어떻게 버릴까 고민하다 냉동실에 집어처넣었다. 마음마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들과 인간과 인간미만을 따로 뚝뚝 떼놓고 생각하는 미친놈에게는 뭘 추천해주는 게 좋을까 고민도 했다. 읽은 책이 없어서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선물해야지 싶었다.

그날 저녁에 혹시라도 찾아와 책을 냉동실에 왜 넣었냐고 날뛰는 게 아닐까 걱정도 했지만 남자는 오지 않았다. 외롭게 저녁을 먹고, 어김없이 9시가 되면 불을 꺼버리는 악랄한 행동에 이를 갈며 잠을 잤다. 덕분에 새벽 5시만 돼도 눈이 반짝 떠졌다.

새벽에 눈을 뜨고 느낀 건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밤이 길어지면서 새벽 5시는 이제 환하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창밖을 졸음을 끼워 보고 있다 보면 점점 하늘이 밝아지고 아침 회진을 온 간호사가 들어왔다.

남자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찾아오지 않았다. 비서를 통해 종종 읽을만한 책들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상한 전쟁 역사책도 있더니, 마지막에는 심리학책만 쌓아주는 바람에 억지로 부모와 자식 간의 정신 교류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읽어야 하는 사람은 아버지 같은데요.”

아침에 비서가 준 책 제목을 읽자마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비서는 어깨를 움찔 떨더니 하하하, 하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양심에 찔리는 모양이었다.

다정한 아빠가 되는 방법.'이라는 개 같은 제목을 한 책을 당장 침대 밑에 내던지고 한숨을 푹 쉬었다.

“바라시는 게 도대체 뭐래요?”

“음…. 깊으신 사랑을…”

“애완동물 두 번 깊게 사랑하다간 이성을 잃으시겠군요.”

“동물이라뇨, 아닙니다.”

“아니면 뭐, 그냥 움파룸파 족?”

“……”

“그냥 가세요.”

더 말 해봐야 유익한 일도 없을 것 같아 축객령을 내렸다. 비서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가방을 챙겨 들고 눈인사를 건넸다.

“최 선생님께서 회복이 빠르다고, 조만간 퇴원해도 될 것 같다 하시더군요.”

“아아.”

최 선생님은 담당 주치의다. 남자와도 관계가 꽤 오래된 것 같은 나이 있는 양반이었다. 물론 그 사람도 나를 엿먹이기 위한 침묵에 동참했다.

“깁스만 푸시면 퇴원하도록 보고해드릴까요? 아니면 끝까지 계시겠습니까.”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에 냉큼 대답했다.

“퇴원할게요.”

“네. 그렇게 알려두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유익한 독서시간 되십시오.”

마지막에 찬물을 확 끼얹고 사라지는 비서를 보고는 욕할 기운도 잃었다. 침대에 벌렁 누워 가져온 책을 성의 없이 뒤적거렸다. 어떤 책은 새 책이었고, 어떤 책은 남자가 읽은 책인지 익숙한 필체로 간단한 메모와 밑줄이 그어져 있기도 했다.

나는 남자가 공부만 하는 인성 병신이라는 걸 느끼며 남자가 쓴 메모를 찾는 일로 온종일 시간을 때웠다. 사실 때웠다기 보다는 아주 열정적이었다. 남자의 메모라는 건 지랄 맞고 독특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무리에서 이탈하다 다시 사회화 학습을 시작한 동물 같았다. 

         

남자가 준 책을 읽는 거로도 이틀이 금방 지났다. 바쁜 것인지 철이 든 건지 방해하러 오지도 않는 덕분에 편안하게 남자의 헛된 공부에 대해 파악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게 그렇게 유익한 시간인 것도 아니긴 했다. 

형광펜과 빨간 볼펜. 간간이 적힌 의문점.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자상해야 한다. 라는 문구에는 무슨 헛소리야, 하는 글이 적혀있기도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눌 대화에 적힌 수많은 물음표는 남자가 전혀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게 보였다. 남자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도대체 뭐였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았다. 

남자의 친부는 오래전에 죽었고 실질적인 경영은 남자가 크기 전까지 노인이 했다고 들었다. 남자는 종종 노인은 독하고 아주 엄격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왔지만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피를 나눈 가족은 아버지가 전부일 텐데도. 배운 게 없으니 나에게도 이런 식인가. 

전형적으로 평범한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두 명이 이제 와서 좋은 가정을 구성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남자는 무슨 집착이 있는지 마지막에 쪽지를 끼워놨었다. 

-감상문- 

간결한 단어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남자는 그냥 자신이 공부한 만큼 나도 공부를 하고 똑같이 하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설마 자기가 노력한 걸 알아 달라거나… 갑자기 코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책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좋다. 과격한 언행이 중요하다. 라는 맥락의 내용은 없었으니까. 남자는 책을 아주 대충 읽었거나, 열심히 읽고 이해는 못 했거나, 이해했어도 실행할 마음은 전혀 없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냥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잘하라, 라는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것일 게 뻔했다. 시시하고 재미없는 내용만 써둔 책을 펄럭펄럭 넘기다가 목차를 노트에 한마디 썼다. 글씨가 삐뚤삐뚤했다. 

-좋은 아버지가 아니다.-

이걸 본 남자가 또 분노하든 말든 내가 알 바가 아녔다. 자신이 좋은 아버지라는 걸 강요하는 아버지가 세상천지 어디 있냐는 말이다. 내가 좋은 아들이 될 수 없듯, 남자도 같다. 

우리는 어머니라는 득과 실의 관계를 떼어놓으면 길거리를 스쳐 지나가도 몰랐을 사이니까. 

책 몇 권을 집어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쓸모없이 시간을 보냈다. 남자가 형광펜으로 그어둔 문장을 한참 보고 있기도 했다.

읽을수록 남자의 의도가 느껴진다는 생각은 들었다. 쌓여있는 책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가져다준 식사도 물리고 소파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밑에서 누가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귀신인가. 대낮에 귀신이 나올 수 있나. 낑낑거리는 소리가 이상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내 환자복에 침질을 하고 있는 불청객을 보았다. 하얀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깁스 위로 혀를 할짝거리더니 맛이 없는 듯 고개를 도리질 쳤다. 깡깡. 또 귀여운 강아지 특유의 소리를 냈다.

"니가 왜 여기 있어."

강아지를 잡아서 번쩍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 잡아서 바둥바둥거리면 위험할 텐데 손바닥 위에서 다리를 흔들어댄다. 왕왕 짖으며 까만 눈동자를 반들반들,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표정을 보니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너는 남이 들어와도 모르니?" 

뜻밖의 목소리도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끼고 떡하니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강아지가 뛰어내리더니 폴짝폴짝 여자의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떨었다.

"고모가 어쩐 일이세요?"

"엄마가 가보라고 성화라서."

어떻게 보면 이번 입원의 큰 원인이 되어준 노인을 생각했다. 양심도 없이 나를 관찰하러 가보라고 한 모양이었다.

"얘도 데려 와줬는데, 표정이 떨떠름하다?"

" 아…"

그건 좀 감사한 일이지만. 일어나서 강아지를 불렀다. 그래도 같이 좀 살았다고 익숙해졌는지 다시 강아지가 살갑게 걸어와 안겼다. 

"그런데 동물 데려와도 되나요?"

"알게뭐야. 내가 데려오겠다는데."

"병원은 원래 동물 출입 금지니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지."

재벌가의 마인드는 보통 이런 식이다.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라. 한국의 기형적인 수직 세상에 불만을 가지며 강아지의 턱을 살살 긁었다. 한참을 예뻐해주고 있는데 여자가 내 앞으로 누런 서류 봉투 하나를 던졌다. 강아지를 무릎에 앉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냈다. 서류 한 묶음과 카드가 두 장 나왔다.

"한도 넉넉한 신용카드, 그리고 오피스텔 현관 카드키야."

"……"

"어머니가 가져다 주라 그러시더라."

"아버지는 아시고요?"

"이태? 언젠간 알겠지." 

남은 다리 한쪽이 부러질만한 소리를 태평하게 하면서 여자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담배까지 꺼내 드는 몸짓이 날치기 협상가 같았다. 

"이 대화도 듣고 있을 텐데요."

"도청장치 방해 전파 흘려뒀어."

"……"

남매는 남매구나 싶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전혀 닮지 않았지만, 성격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나도 네 엄마나 니가 우리 집에서 살다가 사업 꿰차는 거 싫어. 아예 내가 혼외자식을 두고 말지."

"그거 잘됐네요. 서로 이해가 맞아서."

"이태가 널 너무 좋아해서 문제야."

그 애정을 거절하고 싶은 건 나였다. 구역질 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여자가 짜증을 냈다.

"원래라면 한 달도 안 돼서 파양했을 애가 너를 붙들고 놓칠 않으니 환장하는 거 아냐."

"옆에서 뜯어말리시던가."

"그렇게 한마디도 안 지고 바락바락 달려드니 이태는 더 미치지."

내 성격이 거지 같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신선했다. 여자와 대화를 더 나누는 것을 포기하고 종이를 노려보았다.

서류 내용은 간단했다. 남자의 아들로서 가지는 모든 법적인 권리를 포기하고 집을 나가겠다는 각서. 한 달에 2천만 원 한도 내로 사용이 가능한 신용카드, 고급 오피스텔 제공.

"네 얼굴이 조금만 덜 예쁘장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어쩜 그렇게 네 엄마는 안 닮았어?"

예쁘다는 말도 20년 넘게 살면서 이 집 식구들에게 다 듣는다. 이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라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남자인데 뭐가 예뻐요."

"남자도 예쁠 수는 있지. 넌 예쁘기보단 잘생긴 편이긴 해. 친아버지 닮았니?"

"……네."

"흠."

강아지는 어느 순간 무릎에 턱을 얹고 사근사근 잠이 들어 있었다. 쌕쌕 내뱉는 숨에 맞춰 등을 살살 쓰다듬어주며 서류를 보았다. 지장을 찍는 건 쉽다.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것보다 편한 일은 맞았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반만 알고 몰랐다. 남자는 내가 예쁘고, 성격이 지랄 맞아서 아들로 삼은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남자가 말하는 아들은 아들이 아니었다. 다들 남자가 준 책을 조금만 읽으면 알 수 있을 텐데. 쌓여있는 책을 흘끔 보다 물었다.

"아버지가 왜 하필 엄마를 골랐을까요."

"네 엄마가 그냥 처음이었어.다음 타자는 보지도 않았고."

사정을 알고는 있었는지 여자가 대신 대답했다.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고 여자를 보았다. 나이를 먹었어도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로 여자는 담배 필터를 쭉 빨았다.

"귀찮았는데 잘 걸렸고, 그게 너야. 이태는 이 집에 들어올 때도 다른 선택지는 듣지도 않았으니까."

"…되게 재수 없네요."

"선택지를 모르면 틀린 것도 모른다. 이게 걔가 하는 주장이지."

"가서 제대로 틀렸다고 전해주세요."

"네가 하렴."

쳇. 투덜거리면서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입원을 한 달씩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을 선다는 병원은 오늘도 차와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가장 높은 층에서 거주하고, 병원이 질색하는 동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데려와 무릎에 얹어두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나는 동네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평범 이하의 인간이었다.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친아버지도 그랬다. 일반적으로는 다 그렇다.

꿈도 적당히 꿔야 현실성이 있었고, 감격과 기적이라는 부르짖음도 생긴다. 너무 거대하면 혼미하다. 기쁨보다 불안으로 인한 거부감이 먼저 느껴진다. 이번에도 설마,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만나버리는 엄마처럼. 

나는 이번에는 해결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카드를 구경했다. 앞뒤로 까만색 카드를 보고 있으니 여자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신경 좀 써주실 거야. 서류에 사인만 하면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줄게."

"서류는요?"

"마음이 있으면 작성해서 돌려줘."

"다음 아들은 누구로 하시려고요?"

"스위스계 혼혈에 예일대 졸업생."

"아아."

정말 다른 세상 이야기다. 여자는 미련 없이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여자의 구두 굽 소리가 크게 바닥을 울렸다. 땅땅 부딪치는 소리에 강아지도 잠에서 깨어 폴짝 바닥으로 뛰어 내려갔다. 저렇게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들어가세요."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내 비서를 통해서 연락할 거야."

"그러세요."

서류를 잘 챙기라고 잔소리를 한참 한 여자가 마지막 눈인사를 건넸다. 어깨쯤에서 동그랗게 말린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자는 재벌 집 여자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병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애완동물을 데리고 오는 게 어떻냐는 것처럼, 몸을 비벼오는 강아지를 사랑스럽게 쳐다본다. 

문을 닫고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다 방금 내가 쓴 노트를 펼쳤다. 읽은 책 감상이 드문드문 적혀 있었다. 친부의 옛날 행동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고, 내 행동은 몇 점짜리 아들이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남자의 학습법을 고민하기도 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역시 쓸모는 없었다.

노트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넣었다. 텅텅 빈 쓰레기통에 노트가 들어가자 꽉 찬다.

나는 남자가 원하는 답변을 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남자도 나를 아들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여자가 강아지를 품에 끌어안고 내 새끼, 라고 외치며 마음으로 강아지를 낳은 것이라 말하는 수준보다 악했다. 책에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부분이 있었다. 애완동물이 아이의 정서 발달에 끼치는 영향. 책은 친절하게, 애완동물을 어떻게 훈련하고 길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얼마나 자주 읽었는지 아무렇게나 펼쳐도 그 페이지가 바로 드러났다.

유일하게 형광펜이 그어져 있는 문장이기도 했다. 애완동물은 버릇을 그때그때 고쳐야 하며, 훈계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같이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결국, 남자가 읽고 이해한 문장은 저것뿐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야 할 수많은 행동 중에서 남자가 하는 건 웃기게도 동물을 길들이는 법이었다.

그러면서 책을 내게 주고, 읽으라고 하다니. 결국 남자는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서류를 집어 들었다. 망설이지 않고 서류를 세로로 쭉 찢었다. 두 조각이 난 서류를 보자 오히려 후련했다. 휴짓조각이 된 서류를 다시 테이블 위에 집어 던졌다. 여자가 돌아갔으니 아마 남자는 다시 내 목소리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좋아요, 갈 때까지 가봐요. 아버지."

물러섬은 없다. 내가 남자의 아들이라면 남자 또한 인간 이하의 짐승이어야 했고, 아니면 나 역시도 인간으로 불려야 했다. 고모의 귀여운 강아지, 그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도 없었다.

여자에게도, 엄마에게도 미안한 일이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1년에 1억이 넘는 돈과 집을 그대로 날렸지만 돈이 중요해지지가 않아졌다. 그냥 전쟁 개막을 위한 고함과 박수가 중요했다. 흥분, 교감. 분노. 수치. 이런 불쾌한 감정들이 격렬하게 심장을 때렸다.

"나도 한다면 하는 편이라서요."

군대에 있을 때 허구한 날 성기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성희롱을 하는 변태 선임이 있었다. 기회를 노리고 노렸다 9개월 만에 그 새끼를 영창으로 보냈다. 제대를 3일 두고 영창에 박혔을 때 그놈의 절규를 잊을 수가 없다. 남자도 그 꼴로 만들어줄 계획이었다.

남자의 사회적 지위나, 재력이나, 아이큐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남자가 나를 아들로, 사람인 아들로 인정하는 그 순간 내가 이길 전쟁인데.

입술을 오므리고 숨을 뱉었다. 파랗게 핀 나뭇잎 사이에서 눈치 없는 몇몇이 벌써 노랗게 색을 입고 있었다.

그걸 보자 담배를 피워야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흡연이 처음도 아니었다. 담배 맛이 어땠더라, 결심한 김에 바로 간호사에게 담배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부탁은 처음이었는데, 간호사는 놀랍게도 아무 잔소리 없이 담배를 내밀었다.

하얀 담뱃갑을 바라보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랜만에 담배를 피웠더니 목구멍이 쓰라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내뱉고 있으니 의사가 들어왔다. 오늘 깁스를 풀기로 이야기를 마친 상황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담배를 물고 있는 나를 보더니 해괴한 낯빛을 했다.

"담배를 피웠나요?"

"음, 아주 가끔요. 누가 빌려주면 종종."

"그렇군요,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는데 이태랑 똑같아 놀랐네요."

남자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의사는 나를 볼 때마다 정말 남자의 아들을 대하는 것처럼 상냥한 태도를 취했다. 담배나 찍찍 피우는 불량한 환자인데. 남자와 닮았다는 폭언과 이상한 불쾌함에 몸을 비틀며 다리를 내밀었다. 의사는 다리를 고정하고 있는 석고를 자르면서 조심해야 할 점을 세 번, 네 번씩 거듭 설명했다.

"당분간은 조심해야 합니다. 뛰는 것도 조심하고요."

"네."

"계단도 조심해서 내려오고요."

"누가 던지지만 않는다면요."

"하하, 누가 그러겠습니까."

당신 VIP환자요. 패륜을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어 그냥 유머라도 한 척 같이 하하 웃고 말았다. 무거운 석고를 뗀 팔과 다리가 가벼워지자 기분이 이상했다. 오래 못 썼던 탓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렸다. 간호사가 부축을 해 나를 눕혔다.

"주영이가 오늘 좀 늦는다 연락이 왔더군요."

비서와도 친한지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의사 선생님은 멍이 남아있는 내 다리에 약을 발라주고는 일어났다.

"붕대는 이틀 뒤에 와서 한 번 더 바꿉시다. 고생이 많았어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침대에서 팔과 다리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한 달 가까이 갑갑하게 갇혀 있었던 탓에 털이 빼꼼 자라 있었다. 또 제모를 하러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얼굴을 찡그리다 이불을 덮었다. 

오랜만에 사지 멀쩡하게 뻗고 자려니 기분이 좋았다. 밤 11시가 넘어야 데리러 올 수 있다는 연락은 아침에도 진작 받았다. 편안하고 게으르게 낮잠이나 잘 계획이었다.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복잡한 마음과 고요한 마음이 동시에 방망이질 쳤다. 쿵쿵, 박동에 귀가 시끄럽다.

마음이 심란했는지 꿈이 요란했다. 아직도 얼굴이 생생한 친부가 나와 나를 씨발놈이라고 불렀다. 엄마가 화장실에서 뛰어나와 걸레 빤 물을 아버지에게 뒤집어 씌웠다. 엄마는 그래도 친부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았다. 사실 기억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중에 엄마가 말해준 이야기였고, 나는 정말 기억에도 없어 한참 엄마의 원성을 사야 했었다.

끔찍한 기억은 뇌가 일부러 잊어버린다고 하니까. 하지만 곱씹을수록 묻혀 있던 장면이 희미하게 되살아날 때가 있었다. 타인의 삶을 찍어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불쾌한 꿈에서 깨어나겠다고 생각이 들 무렵 지나치게 많이 잤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바깥이 어두웠다. 가위에 울린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한참 눈을 감은 채 졸음과 싸우다 눈을 떴다. 창가에 누가 서 있었다.

시간이 지금, 몇 시지…?

아무리 오래 잤다고 해도 제시간에 자는 수면이 아닌 낮잠이었다. 6시간이 넘도록 잠만 잤을 리가 없다. 비틀거리다 침대 아래로 겨우 내려왔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서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다시 부러질 것만 같은 공포를 이기며 슬쩍 한 걸음을 걸었다.

“깨우지 그러셨어요.”

뻗친 머리를 정리하며 형식적인 말을 했다. 창틀에 손을 올린 채 바깥을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깨우려고 했지.”

라이터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남자가 숨을 들이쉬었다.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손가락 끝부터 작은 라이터의 불꽃, 빛이 스민 옆모습은 조화로웠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도시의 야경에 젖은 모습은 흘러가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대사 없이 배경음에 의지해서 흘러가는 그런 순간.

저런 외모를 하고 머리통에 든 생각한 하염없는 쓰레기 같은 생각이라니. 아들 대신 개를 훈련하는 법을 배운 남자를 생각하니 다시 웃음이 나왔다. 핏, 웃자 남자도 날 따라 웃는다.

“성격 나쁘긴.”

“저한테 하시는 말씀은 아니죠?”

설마 당신만큼 성격이 나쁠까. 그런 의미를 담고 대꾸했더니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전부터 이런 스킨쉽이 묘하게 신경 쓰인다 했더니 정말 개처럼 여기고 쓰다듬고 뽀뽀도 했던 건가 싶다.

“돌아가자.”

“어디로요?”

“집이지.”

“거기가 집이긴 한가.”

“점점 더 반항적으로 변하네. 사춘기니?”

남자가 성질을 슬슬 긁는다. 사춘기라니. 미련도 없이 떠나보낸 시기를 읊길래 한번 헛웃음을 지어주고 환자복을 벗어 던졌다. 탁자 위에 갈아입을 옷이 놓여 있었다. 얇은 니트를 집어 들고는 한참 맨몸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벌써 날씨가 이 정도 니트를 입을 정도로 쌀쌀해졌나.

새 옷 냄새가 나는 니트를 껴입고 바지를 입었다. 벨트 없이도 치수가 딱 맞았다. 어쩐지 기분 나쁜 체험에 등 언저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부드러운 니트는 맨살 위에 입어도 까끌까끌한 느낌이 없었다.

“어이, 사춘기 아들.”

“왜요.”

남자를 돌아보며 뚱하니 대꾸했다. 남자가 검은색 물건을 하나 내밀었다. 휴대폰이었다. 저번에 남자가 창 바깥으로 집어 던진 것과는 다른 기종이었다.

“또 실시간 감시하시려고요?”

“당연하지.”

“뻔뻔하시긴.”

“특기야.”

휴대폰 안에는 기본적으로 자주 쓰는 어플이 전부 깔려 있었다. 전화번호까지 예전에 쓰던 휴대폰 그대로 저장이 되어 있었다.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해주는 걸까. 이상한 관심이라고 생각하며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자신의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방과 남자는 잘 어울렸다. 불을 잘 켜지 않는 건 습관일지도 모른다. 남자의 방도 그다지 밝지는 않았으니까. 서재는 더 어두웠고.

남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준비 다 했어?”

“네.?“나가자. 주영이 도착했대.”

“11시에 오신다더니.”

“미뤘어.”

사장이 그렇게 자주 일을 미뤄도 되는 건가 싶다. 하긴, 남자의 회사가 망하는 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정말 사장이 된다면 더 망할 회사인데, 일찌감치 끝나면 남자도 내게 미련을 좀 버리지 않을까.

입었던 옷은 다 버리라는 말에 미련 없이 물건을 그대로 놔두고 몸만 차에 실었다. 비서가 퇴원을 축하한다고 이런저런 농담을 걸었지만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남자와 함께 나란히 입을 닥치고 있자 비서도 입을 닥쳤다. 턱을 괴고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만 보았다.

집에 도착했다. 다들 잠이 들었는지 벌써 조용했다. 아니면 각자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거나.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익숙한 듯 비서에게서 가방을 넘겨받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남자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굴렀던 계단을 다시 올라갈 때마다 다시 넘어져 뼈가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이상하게 샘솟았다.

2층 복도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내가 없을 동안 2층을 청소한 건 엄마였을까. 이 집안사람들의 이상한 결벽증에 맞추려면 힘들었을 텐데.

“아 참.”

말도 없이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서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내 방으로 와.”

“왜요.”

사람이 물어보는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황당했지만 내가 져주는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좋게 생각하자. 좋게. 남자의 저 변덕스럽고 재수 없는 성격에 일일이 반응하다간 제 명에 살지 못살게 분명했다.

또 무슨 일을 시킬지도 모르니 편하게 티셔츠에 잠옷 바지를 주워 입고 남자의 방으로 건너갔다. 거울 앞에 서서 시계를 풀고 있던 남자가 턱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누워.”

“미쳤어요?”

생각도 거치지 않고 육성으로 삐딱한 언어가 튀어나왔다. 셔츠 단추를 풀던 남자가 얼굴을 구기고 나를 쳐다봤다. 눈썹 한쪽이 삐쭉 위로 올라간 게 내 대답에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거로 치면 마찬가지였다. 팔짱을 끼고 남자의 거대한 침대를 쳐다봤다.

“내가 왜 저기 누워요?”

“원래 아들과 아버지는 같이 자는 거야.”

실소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늘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를 사람이었지만 가지가지 한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언제부터 애견인이셨다고?”

“해인이 누나를 보면 답이 나오지.”

해인은 고모의 이름이었다. 강아지가 제 자식이라 말하는 여자와 비교하는 뻔뻔한 남자를 보고 정말 웃어버렸다. 이젠 숨기지도 않고 나를 개 취급 하는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같이 잘 거야. 누워.”

“싫은데요.”

“끝까지 가보자며?”

병실 안에서 혼자 열 채서 떠들어댄 말이 왜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들으라고 한 말은 맞았지만, 남자가 내게 응대할 언어는 아니었는데.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 어디가 그렇게 재밌는지 남자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 오른쪽 뺨을 꼬집었다. 아릿한 통증이 들었다.

“끝까지 가자니까, 같이 자야지.”

“끝까지 가보는 거랑 같이 자는 게 왜…”

남자의 말을 반박하려고 말을 따라 하다 숨을 멈췄다. 설마 이 사람이. 묘한 불쾌함이 마음을 긁는다.

“끝까지 가야지.”

“정신 나갔어요?”

“아버지한테 말이 심하네.”

“허.”

폭언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게 낫지. 이런 식으로 말장난을 시키면서 사람 엿 먹이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건가 싶었다. 아직도 내 뺨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등을 때렸다. 아야, 남자가 아픈 척 엄살을 부리며 손을 떼어냈다.

나는 끝까지 가보자, 라는 선전포고를 끝까지 진도를 빼봐요, 라는 야시시한 대사로 치환해 들을 수 있는 남자의 사고에 놀라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내 방으로 돌아갈게요.”

“가긴 어딜 가?”

“그럼 진짜같이 잡니까.”

“얘가 뭘 모르네.”

남자가 한숨을 쉬더니 내 복부를 강하게 쳤다. 한 달쯤 편하게 지냈다고 고통을 잊었던 몸이 새삼스럽게 움츠러들었다. 정확하게 명치 아래를 때린 남자 덕분에 숨도 못 쉬고 쿨럭거렸다. 남자는 반항할 기력을 상실한 내 몸을 가볍게 들어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의사가 당분간은 조심하라고 했는데. 이를 갈면서 상체를 일으키기도 전에 남자가 내 몸 위를 올라탔다.

후우, 숨을 내쉬며 남자가 셔츠의 팔을 걷었다. 단추를 풀다 말아 아직도 헐렁해진 셔츠 아랫자락이 내 배 위로 떨어졌다. 갑자기 침대 아래에 떨어진 넥타이가 보였다. 왜 이상하게 저런 게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꽉 닫힌 방문과 거대한 집 크기를 생각했다. 여기서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각자 방문을 닫고 들어간 사람들이 들을 수는 있을까. 듣는다고 해도 올라올 생각은 할까.

정말 남자한테 무슨 짓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구역질과 공포로 이루어진 남자가 내 목덜미를 쓸었다.

“말을 뱉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섹스하자는 말 아니었다고요.”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어. 야하기도 하지, 그런 식으로 발정이 나나?”

“당장 내려와요!”

들어주지도 못할 변태 같은 발언에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아래에서 발작하든 말든 남자는 태연하게 내 어깨와 허벅지를 짓누른 채 앉아 있었다. 답지 않게 예쁘다고 생각한 손가락이 내 티셔츠를 열어젖힌다. 만진다는 걸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부분을 건드리는 손길에 목 안에서 비명이 나오다가 사그라들었다.

“당신 게이야?”

“아니.”

너무 시원하게 대답이 떨어지는 게 미심쩍었다. 남자를 노려보자 내 유두를 매만지며 성희롱을 시도하던 남자가 씩 웃었다.

“물론 남자랑 자보긴 했지.”

“당장 떨어져.”

“너무하네, 먼저 꼬신 게 누군데.”

“개 취급을 한 건 누구신데.”

사내자식한테 순결을 위협당하는 마당에 입만 살았는지 꼬박꼬박 말대꾸가 튀어나갔다. 정말 억울했다. 누가 들어도 평범한 대사를 혼자 오해해서 듣고, 강제로 강간을 시도하는 주제에 나를 매도하다니. 억울하게 계단도 구르고, 팔다리 부러져서 깁스를 한 채 한 달이나 병실에 처박혀 있고, 법적 아버지라는 놈은 나를 개 다루듯 다뤘고.

여기서 내가 선택해서 엿을 먹은 게 몇 개나 있단 말인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눈물이 났다. 남자의 앞에서 쪽팔리게 엉엉 울기 싫어서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 사내자식 가오가 있는데, 이상하게 서러워서 눈물이 차올랐다. 가득 찬 눈물이 출렁거렸다.

남자가 위에서 멈칫하는 게 느껴진다. 태연하게 남의 가슴이나 만지던 손이 빠져나와 내 눈물을 훑어 내렸다. 시야가 맑아지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코를 훌쩍거리며 욕을 했다.

“내려와요.”

“싫은데.”

“강간이야.”

“하하.”

아주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남자가 씩 웃었다.

“남자끼리는 강간이 성립되기가 힘들어.”

“씨발.”

“남자끼리 어떻게 하는지 알아?”

짓궂은 표정으로 남자가 엉덩이를 주물렀다. 안다. 군대에서 그런 이야기가 종종 나왔고 나도 성희롱 피해자의 대상이었으니까. 배출구인 항문으로 성기를 삽입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알아도 하고 싶지 않아요.”

“왜? 잘해줄게.”

남자가 미쳐도 당당히 미친 모양이다. 아들, 아들 꼬박꼬박 불러주며 개새끼 다루듯 열심히 다루더니 이제는 강간 시도. 내 팔자도 남자만큼 꼬이긴 한 것 같았다. 정말 변태처럼 손가락을 움직이며 슬슬 엉덩이를 매만지는 남자를 보니 반항할 힘도 없었다. 앵무새처럼 지껄였다.

“하기만 해봐요. 죽어버릴 테니까.”

“정혜 씨 두고?”

“엄마보다 내가 더 중요하거든요.”

“별소릴.”

정말이다. 이렇게 남자 손에 인간의 존엄성이 마저 아작이 나면 죽는 게 낫다. 남자가 일에 미쳐 사는 집무실 창문에서 뛰어내릴 각오라도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신나게 매스컴을 타는 거지. 잡생각이 들자마자 눈물이 또 터졌다.

“진짜 빈소리 아니니까 당장 내려와요.”

“왜 울어?”

헛소리만 해대는 남자의 말을 들을 때마다 더 속이 뒤집어졌다. 결국 자존심도 다 잊고 남자의 밑에 깔려서 엉엉 울었다. 내 가슴 위를 짓누르고 엉덩이나 만지던 남자가 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개라면서, 씨발놈아. 당신은 개랑 떡 쳐?”

눈물 콧물 흘러가며 펑펑 울었더니 또 남자가 달래는 것처럼 가만가만 뺨을 만져온다. 힘겹게 눈을 뜨고 남자를 보았다. 전등을 등으로 가리고 있던 남자가 어색하게 자신의 입을 가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우니까 괴롭히기도 힘드네.”

“씨발, 내려오라고.”

하는 말 하나하나 들어주기도 짜증이 났다. 다시 몸을 바둥거리자 남자가 순순히 내 몸 아래에서 내려왔다. 그제야 숨이 탁 풀렸다. 침대 위에 있는 이불로 몸을 가리고 펑펑 울어대자 남자가 내 몸을 끌어다 안았다. 남자의 손길만 닿아도 소름이 돋아 발버둥을 쳤더니 팔다리로 몸을 꽁꽁 결박한다.

“놔!”

“손 안 댈 테니까 그냥 자.”

“놓으라니까!”

“잠만 잔다고.”

“변태 호로새끼야!”

욕을 펑펑 날리는 내 입술 위로 남자의 입술이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내게 뽀뽀를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장난스럽고 자연스러운 접촉이었는 데다 남자의 태도가 늘 태평했던지라 짜증을 내면서 넘기곤 했다.

이번에도 성질을 내는 내게 장난처럼 입을 맞춘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숨도 참고 있는 나를 보고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내 뺨을 만졌다.

“정말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기 전에 자.”

“……”

“개 취급을 하는 것도 싫으면 자고.”

“나한테 왜 이래요?”

남자한테 속삭이듯 물었다.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빤히 남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 웃으면서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 위에 가져다 댔다. 뺨을 만져오는 손가락과는 달리 따뜻했다.

“네가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나오니까 재밌잖아.”

전부 내 탓이라는 말이다. 거 참. 헛웃음을 흘리자 남자가 다시 내 윗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붙여왔다.

“널 정말 잘 골랐어.”

“미친놈…”

입술에 바짝 붙어 남자의 숨결이 호흡할 때마다 섞여 들어왔다. 이불을 둘둘 만 채로 남자의 성화에 눈을 감았다. 끔찍한 기분이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생에 최악의 하루를 매일 갱신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밤새도록 잠을 설치고 새벽에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사람을 밤에 그렇게 괴롭히고는 잘도 자는 걸 보니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살의를 불태우며 살금살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제 남자가 두들긴 배가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렸다. 단단히 멍이 든 것 같았다. 어찌 된 게 몸이 성할 날이 없다. 이를 득득 갈면서 복수를 결심했다.

발꿈치를 들고 걸으면서 방안을 눈으로 살피다 남자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수면이 부족해 몽롱한 머릿속이 느릿느릿 회전했다. 어디 아침에 헐레벌떡 지각이나 해보라는 심정으로 휴대폰을 들고 방 바깥으로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변기에 침수라도 시키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참았다.

용의주도하게 지문까지 입고 있던 티셔츠로 쓱쓱 닦고 복도 끝에 휴대폰을 처박았다. 이 정도로 떨어트려 놓으면 남자는 분명 알람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 잘난 얼굴이 아침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오늘 중요한 회의라도 있어서 대참사라도 일어나면 좋겠다.

점점 머릿속으로 재생되는 갖가지 시나리오에 유치하게 히죽히죽 웃으면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어나서 열 받은 남자가 방에 들어와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랐으니까.

한 달 만에 돌아온 방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어젯밤 있었던 끔찍한 악몽도 여기서 자고 일어나면 말끔하게 없어질 것 같았다. 강간 미수범 호모 새끼. 엿이나 먹으라지. 기지개를 쭉 펴고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새벽 내내 순결의 위협을 걱정한다고 설쳤던 잠이 몰려왔다. 조금 눈을 붙이고 느긋하게 일어나서 남자의 불행한 아침을 구경해야겠다.

이렇게 큰 결심과 마음을 먹고 즐기기로 했다. 홀로 이불을 말고 자는 단잠을 즐겁기 그지없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양옆 주변에 지켜보는 사람도 없다. 문 바깥은 텅 비어 있고, 나는 자유로웠다. 몇 달 살지도 않은 이 집이 편하게 느껴진다니 신기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자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방문을 누가 쾅쾅 두드리지 않았다면.

소란스러워 눈을 떴다. 복도가 시끄러웠다. 정확하게는 복도와 내 방문 앞에 시끄러웠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잠이 덜 깨 어질어질한 머리로 문을 쳐다봤다.

“사장님, 참으세요!”

이건 비서 씨 목소리다.

“이거 놔.”

남자의 목소리도 들린다. 중간중간 엄마 목소리도 섞여서 들렸다. 슬슬 불안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 방 앞에서 왜 이러지?

문을 열려고 침대 밑으로 내려가 서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다리 하나를 들고 선 남자가 쿵,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방문을 밟고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와 메다 만 넥타이. 셔츠와 정장 팬츠만 차려입은 남자가 고개를 거만하게 쳐들고 나를 노려봤다. 사람 한 명 죽일 것 같은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온 비서가 나를 보자마자 입 모양으로 뭔가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떠벌떠벌. 사정없이 공기만 터트리며 움직이는 입 모양을 읽었다.

빌…빌라고? 왜?

어안이 벙벙해서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남자가 내 앞에 뭔가를 불쑥 내민다. 손바닥 안을 보았다. 휴대폰이 있었다. 내 휴대폰은 아니었으니 아마 남자의 휴대폰인 모양이었다.

“이걸 왜…”

아. 새벽 잠결에 한 행동이 갑자기 기억이 생각났다. 복수심에 불타서 남자의 휴대폰을 방에서 빼내 복도에 처박아놓고 잠을 잤지.

다시 남자의 옷차림을 훑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완전 엉망인 모습을 보다 머리를 긁었다. 정말로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오늘 중역급 회의가 있었어.”

“……”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갔다. 등 뒤로 식은땀도 쭉쭉 나왔다. 불안한 얼굴을 한 엄마와 무슨 일인가 2층을 기웃거리는 여자의 얼굴까지 부서진 방문 너머로 보였다.

“아주, 아주 중요한 회의였지.”

“……”

“덧붙이자면 회의 시간은 아침 7시 30분이었고, 나는 7시에 일어났지.”

“음…”

“아침에 확인할 보고서도 있었는데 너 때문에 벌써 7시 27분이야.”

남자가 친절하게 휴대폰 액정을 켜주기까지 했다. 다섯 번쯤 반복된 알람 화면과 시간이 떠 있었다. 째깍째깍. 야멸찬 시간이 28분으로 막 변하고 있었다.

“오늘 내가 헛되게 소비한 시간을 금액으로 환산해볼까?”

내가 왜 무심코 그런 행동을 한 건지, 후폭풍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고민해볼 상황도 아니었다. 잠에 취해서 그랬거나, 분노로 눈이 뒤집혀서 그랬거나. 아주 원인을 따져보자면 남자의 잘못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이 상황에서 남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봐야 쓸모가 없을 것도 확실했다.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늘 생글생글 잘 웃는 척하던 얼굴이 살기등등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다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림자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옆에서 사태를 관전하던 비서가 슬쩍 의견을 건넸다.

“사장님, 곧 회의 시간입니다. 일단 미뤘으니 지금 출발하시면…”

“닥쳐.”

“죄송합니다.”

이소야. 엄마가 우는 목소리를 조그맣게 냈다. 아주 살짝, 아주 살짝 엿을 먹인 것밖에 없는데 왜 이 난리가 났을까. 정신은 공황상태였다. 이게 꿈인가, 아니면 새벽에 내가 친 사고가 꿈인가. 남자가 대대적으로 온 힘을 다해 나를 놀리는 연기를 하는 건 아닐까 어설픈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그 전에 숨이 막혔다. 눈에서 불꽃이 툭툭 튀는 남자를 보았다.

“다 나가.”

“사장님!”

비서 대신 엄마가 남자를 날카롭게 불렀다.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강아지나 껴안고 관전하던 여자가 놀랄 정도로. 남자가 서슬 퍼런 안색으로 엄마를 보았다.

“뭡니까.”

“한, 한 번만 봐 주세요. 아직 어린 애예요.”

“어린 애라고 하기엔 벌써 스물이 넘었죠.”

“제발, 애가 철이 없어서 한 짓이에요.”

엄마가 남자와 대화를 섞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남자는 엄마가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질 때마다 얼굴을 악마처럼 일그러트렸다. 저러다 엄마를 두들겨 패면 어떡하지. 엄마는 연약하고, 여자다. 불안한 긴장감이 초 단위로 뛰더니 남자가 손등에 힘을 불끈 주는 걸 봤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 안돼요!”

온 힘을 다해 붙잡고 매달리자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한 대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눈을 꽉 감았다. 남자가 힘을 줘서 내 손을 자신의 허리춤에서 뗐다. 곧바로 멱살이 잡혀 들어 올려졌다. 방문을 부순 괴력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남자가 나를 가볍게 끌어올려 질질 끌었다. 티셔츠에 목이 졸려 컥컥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방문을 타넘고 남자가 복도로 나왔다.

목적지가 분명하게 보였다. 문이 제대로 달린 남자의 방이다. 살인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살풍경한 풍경에 비서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서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여자의 품에 안긴 강아지는 미친 것처럼 왈왈 짖어댔다. 여자가 황급히 강아지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다 내려가.”

“사장님, 안됩니다. 그냥 저를 때리세요.”

엄마가 또다시 남자의 앞을 막고 섰다. 나는 남자에게 멱살을 잡힌 채로 엄마를 향해 미친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저 아줌마가 뭘 잘못 먹었나. 왜 갑자기 겁도 없이 이래. 눈물이 핑 돌아서 엄마를 말리려고 애썼지만, 성대가 꽉 눌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잘못 가르친 제 잘못입니다. 저를 혼내세요.”

“허, 참.”

엄마를 못마땅하게 보며 남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기가 막히는 모자지간이군.”

나는 왕따를 시키고 말이야. 이죽거리며 성의껏 비꼬던 남자가 내 멱살을 풀었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쿵 바닥에 떨어졌다. 졸렸던 목을 손으로 감싸고 쿨럭거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남자는 엄마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내 손목을 잡았다. 주저앉은 채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일어나.”

“……”

“네가 책임져야지. 일어나.”

따라 들어가지 않으면 엄마를 해코지하겠다는 엄포에 겨우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완전히 풀렸는지 부들부들 떨렸다. 제대로 허리도 펴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휘청거렸다. 남자는 여전히 손목을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여는 남자를 보고 엄마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내 이름을 쩌렁쩌렁하게 불렀다. 엄마의 작은 체구 어디서 저런 큰 소리가 숨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복도를 울리다 못해 유리창이라도 깰 것 같은 고성에 남자는 관자놀이를 짚더니,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안 죽이니까 다들 1층으로 내려가세요. 주영아, 데리고 내려가.”

“알겠습니다.”

비서가 엄마와 여자의 등을 떠밀었다. 엄마는 손목을 잡힌 채 남자의 방에 질질 끌려들어 가는 나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이소야, 이소야. 내 이름이 따갑게 엄마의 입에서 쏟아진다. 얼굴을 푹 숙인 채 남자에게 떠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문을 잠그고 선 남자가 내 머리카락을 쥐었다. 두피가 뜯기는 익숙한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쑥날쑥, 사고를 쳤다, 설설 기었다, 또 사고를 치고, 반항하고, 비굴하게 숙이고. 원래 성격이 그래?”

남자의 목에 어설프게 걸려있던 넥타이가 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코와 입을 덮은 실크를 얼굴을 흔들어 치워냈다.

“먼저 시작한 건 그쪽이잖아요.”

“그쪽?”

쓰게 웃는 남자를 보고 욱해서 말을 뱉어냈다. 갈 때까지 가보자고 선전포고도 했고, 사고도 제대로 쳤으니 이제 두려울 것도 없었다.

“계단 위에서 집어 던지고, 두들겨 패고, 어제는 강간을 하려고 하지 않나.”

“하아.”

“내가 이렇게 안 하면 안 될 이유가 뭔데요?”

후우, 남자가 입술을 깨물며 숨을 쉬었다. 짜증이 감당이 안 가는 얼굴을 하더니 내 뺨을 눌렀다. 입술이 붕어처럼 쭉 튀어나왔다. 손으로 남의 얼굴을 쪼갤 듯 짓누르며 남자가 화를 냈다.

“그래서 네 행동이 옳아?”

“……”

“알려나 모르겠지만 오늘은 내년 상반기 목표 실적 브리핑이 있는 날이었으며, 이것 때문에 꽤 야근을 많이 했거든? 거기다 나는 사장이야.”

남자가 그렇게 회사 일에 애착을 가진지는 몰랐다. 허구한 날 바지사장을 하고 놀 거라고 떠들어 대더니. 조롱이라도 같이 주고받고 싶었는데 얼굴이 잡혀 말도 못했다. 입안으로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자 남자가 비웃는 것처럼 혀를 찼다.

“다시 변명해볼까?”

얼굴 근육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참았던 숨을 훅 뱉어냈다. 뱃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지자마자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 그래, 백번 양보해서 내가 잘못했어요. 그렇다고 당신이 잘 한 건 아니잖아!”

“아직도 기가 안 죽었군.”

“뭐, 남자에게 강간이라도 당할 뻔하면 기가 죽어야 하나?”

지치지도 않는군. 남자가 중얼거리며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또 어디 한군데 두들겨 맞겠구나, 하며 눈을 감고 대비하는데 남자가 위에서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얼굴 쪽에 있던 남자의 손이 내 가슴팍으로 방향을 옮기더니 뭔갈 집어 들었다. 묵직하던 가슴팍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남자의 손에 들린 물체에 눈이 부셨다.

“……내가 줬던 거네.”

발을 다쳤을 적 남자가 줬던 유리 핀셋이다. 주머니 속에 그대로 넣어뒀던 게 입고 있던 티셔츠였던 모양이다. 용케 주머니에서 빠지지도 않고 잘 들어있나 보다.

남자는 예술 작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핀셋을 쳐다보는 것에 골몰했다. 나는 남자에게 손목이 전부 잡힌 채로 남자의 황홀한 감상을 견뎌야만 했다.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흐른 뒤에 남자가 날카로운 핀셋의 끝을 내 얼굴 위로 갖다 댔다.

“이걸 네게 줄 때만 해도, 어떻게든 아들로 생각해볼 마음이 있었는데 말이야…”

느릿느릿, 햇빛처럼 기어가는 음성이 살점 위를 긁었다.

“하는 행동이 어쩜 그렇게 나를 미치게 하는지 모르겠군.”

“……”

세공된 유리가 저렇게 날카로울 수 있을까. 위협적인 유리 날의 끝이 내 눈 위를 당장에라도 찔러버릴 것처럼 아른거리다 치워졌다. 그 뒤로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동공을 메꿔 넣었다. 고요하고 섬뜩한 얼굴이었다.

“개새끼도 너보단 말을 잘 듣고, 복종하겠지.”

“나는 개가 아니에요.”

“그래, 아들이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아들.”

“나쁜 새끼.”

울컥해서 욕을 뱉었다. 그러자 남자가 낄낄 웃는다.

“사람 시켜줘?”

“됐어요.”

“왜? 죽는소리를 내며 발광을 하더니?”

“필요 없거든요.”

이 손목이나 놓으라고 발버둥을 치며 지랄을 했다. 그럴수록 남자의 표정이 귀신처럼 변했다. 정확하게는 장난을 치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을 변했다.

“이 핀셋, 만들 때 고생을 좀 했거든. 사실 유리라는 게 핀셋을 만들기 좋은 재료는 아니잖아? 휘어지지도 않고, 탄성도 부족하고.”

남자가 핀셋을 흔들며 또 재미없는 설명을 시작했다.

“고민하다가 여기, 중간을 아크릴로 이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

유리와는 이질적인 촉감을 가진 중간 다리 부분을 보여주며 남자가 웃었다.

“제구실을 못하는 재료를 끌어다 사용하기 위해 아크릴을 넣었지. 그럼 너는 제구실을 하려면 뭘 끌어다 써야 할까?”

“글쎄요.”

남자가 아무 말 없이 핀셋을 내 입안에 집어넣었다. 날카로운 도구가 입 안을 파고들자 본능적으로 턱에 힘을 줬다. 남자가 내 혓바닥을 눌렀다. 살점을 찢어버릴 것처럼 힘을 주는 손등을 보자 침이 고였다. 한참 남의 입안에 위험한 도구를 넣고 찌를 듯 손장난을 치더니 엄지가 기습적으로 아랫입술을 눌렀다. 안에 한참 동안 고였던 침이 흘렀다. 더러워. 짜증을 내며 혓바닥을 움직였다. 고였던 침을 어렵게 삼키자마자 핀셋이 빠져나갔다.

변태 새끼라고 소리를 치려고 배에 힘을 주는 순간 다른 게 입 안을 점령했다. 축축하고 뜨거웠다. 방금까지 내 입안에 들어있던 유리 핀셋은 차갑고 한참 안에서 호흡을 불어 넣어도 미지근해지는 게 고작이었는데, 이번의 불청객은 불같이 뜨거웠다. 열기를 덩어리째 묶어놓은 것 같은 것이 내 혀와 아랫니를 핥았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대로 빨렸다.

입안이 축축했다. 뭔가가 아랫입술을 핥고 깨물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탕을 일부러 소리 내서 빨아먹을 때 같은 소리였다. 200원짜리 딸기 맛 츄파춥스를 한참 볼 안쪽에 넣고 있다 당분을 혀로 문질러 핥아내면 볼 안쪽이 얼얼했다. 그때처럼 남자는 내 입 안쪽을 혀끝으로 문지르고 핥아왔다.

어깨가 눌렸다. 핀셋 끝부분이 눈 옆을 위험하게 찌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공포도 아니었다. 위액이 당장에라도 역류할 것처럼 위험하게 가슴팍 안을 두들겼다.

남자가 키스에 집중할 수록 내 어깨를 쥔 손의 힘이 점점 강해졌다. 그는 집요하게 내 아랫입술을 빨았다. 얼얼할 정도로 소리 내서 빨고 나서는 다시 혀를 밀어 넣고 입안 구석구석을 문질렀다. 혀뿌리 안쪽을 긁을 때 손가락이 저절로 꿈틀거렸다.

마지막으로 입술을 치아로 살짝 깨물고 남자가 얼굴을 들었다. 입술이 붉었다.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누구의 타액인지 모를 것이 남자의 입가에 흘러 있었다.

“……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멍청하게 눈을 홉뜬 채로 누워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쥐고 있던 핀셋을 흘끗 보더니 옆으로 밀쳐두며 어깨를 으쓱했다.

“끝까지 가기로 했었잖아?”

“……미, 친.”

“섹스가 그러면 키스부터 한 번 해보지 뭐. 궁금하네. 네가 인간으로의 존엄성을 포기할지, 내 아래에 깔려 버둥거리는 인간이 될지.”

“당신 미쳤어.”

“음, 그런 평가를 종종 듣곤 하지.”

“미친놈.”

“나는 자신을 매우 지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평가해.”

뻔뻔한 남자의 말에 실소가 터졌다. 하하, 소리 내서 헛웃음을 짓자 남자가 뭐가 재밌다고 나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자, 이제 내일은 뭘 할 거지, 아들? 또 나를 지각쟁이로 만들 건가? 아니면 뭐, 천하의 패륜아로?”

내 목과 심장 위로 손을 가져다 대며 남자가 사랑스러운 천사처럼 웃었다.

“나는 네 존엄성을 부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어린아이를 귀여워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뺨을 툭 치며 남자가 눈을 접는다. 반달처럼 접힌 눈에서 빛이 반짝거리며 반사된다.

“나한테 왜 이래?”

정말로 궁금했다. 어제는 강간 미수, 오늘은 강제로 키스.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내 질문에 남자가 당황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것마저도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보통 악마가, 사람을 현혹하기 위해 저런 얼굴을 가진다던데.

“그건 나도 묻고 싶은데. 나한테 왜 이래?”

“몰라, 개자식아.”

남자가 소리 내서 웃었다.

인간의 계기는 뭐든지 사소했다. 이유가 없는 부당한 일은 훨씬 많다.

인과관계를 어렵게 따질 필요가 없었다. 나는 약자였다. 갑과 을에서 을이었다. 그게 이유라고, 남자가 말한다. 웃음이 말했다.

남자의 검지와 중지에 걸린 핀셋이 위태롭게 흔들거리다 내 티셔츠 위로 떨어졌다. 정확하게 심장을 찔렀다. 소리 없는 피가 안에서 흘러넘쳤다. 하루도 제대로 흘러가는 적이 없는 하루가, 시작부터 고통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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