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렇게 빨리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사실인 것 같았다. 말끝에 붙은 작은 한숨이 그를 증명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소화되지 못한 단어들이 아직도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폭탄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머리뿐만이 아니었는지, 위장 부근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당황하거나 화났을 때면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였다.
남한결의 시선을 피한 나는 기침을 하는 척 손가락 두 개로 가슴 아래를 꾹 눌렀다. 그러다가 어느새 내가 다리도 떨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긴장하면 나오는 습관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덜덜 떨고 있던 왼 다리를 꾹 쥐어 잡았다. 고개를 들자 나처럼 아래를 보던 눈이 천천히 위로 향한다.
“오늘 너랑 같이 지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
식탁에 앉은 이후로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나를 뚫어보듯 응시했다. 불현듯 깨달았다. 눈동자가 어떤 색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 마주 본 적이 없던 사람이 내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사실을.
“미리 말 안 하면 불편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정작 그런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치고는 모순되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다만 앞머리를 한 번 쓸어 올렸을 뿐이다. 하얀 얼굴에 언뜻 피곤함이 비쳤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그 아이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멍하니 지켜보다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과 또 한 번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표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애는 초연한 표정이었다. 마치 내게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처럼. 같은 상황을 몇 번이고 겪은 사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어떠한 질책보다 더 강한 효과가 있어서, 난 떠듬거리면서도 입을 열어야 했다.
“…난, 그러니까, 딱히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어.”
“…….”
“아니, 없을 거 같… 같은데?”
룸메이트, 그러니까 방금 내게 커밍아웃을 한 남한결은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사실 믿지 않는다고 한들 남한결을 탓하기는 어려웠다.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말을 하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난 불편했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소꿉친구가 다짜고짜 커밍아웃한 것도 벅찬데, 어떤 답을 내놓아야 남한결이 상처받지 않을까 고민까지 하려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사를 준비하며 내가 했던 걱정의 범위 중에는 단언하건대 이런 역경이 없었다. 기껏해야 ‘엄청 오랜만에 봐서 어색하면 어쩌지.’, ‘친한 친구들끼리도 같이 살면 싸운다던데, 우린 며칠 살지도 못하고 싸워서 엄마들끼리의 좋은 관계에 흠집이라도 내면 어쩌지.’ 하는 걱정들이 다였다. 그것도 고민이라고 내 딴에는 심각한 얼굴로 해결책을 생각해 내던 어제의 내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그런데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불편함을 티 내고 있는 내가 남한결에게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말을 한 건.
“…….”
“…….”
그렇다고 대답하면 내 앞에 있는 남한결이 혹시 상처받을까 봐.
오랜만에 봤어도 남한결은 내 친구였다. 비록 그 시절의 우리가 아주 어렸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과거의 한 부분일지언정 남한결과 내가 친구임은 변함없었다. 나라고 쉽지는 않았다. 그동안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오늘 하루 종일 얘 앞에서 철판을 몇 겹 깔고 친한 척을 했으니까.
결론은, 남한결의 커밍아웃이 갑작스럽대도 그 때문에 침묵을 길게 끌며 어릴 적 친구를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괜히 무릎에 있던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손바닥이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말없이 날 보던 남한결이 웃었다. 뜬금없는 웃음에 눈치를 보던 나는 남한결이 방금 흘린 게 비웃음에 가까웠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왜지? 의아함이 가시기 전에 남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건조한 얼굴에는 전과 같은 웃음기가 없었다.
어쩐지 아까보다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남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단호했다.
“너 말고.”
“…….”
“내가 불편하다고.”
어?
“그러니까 여기서 정하자.”
“…어…?”
“…….”
“아니, 그러니까. 뭘…?”
“나랑 계속 살 거야?”
“어!?”
얼마나 놀랐던지 음 이탈까지 했다. 뻔히 들었을 남한결은 실소 한번 없이 말을 이었다.
“내가 게이라고 방금 말했잖아. 그 말 때문에 네 입장이 바뀔지 모르니까. 나랑 살기 싫을 수도 있고.”
“…….”
“설령 네가 그렇다 해도 존중해. 너한테 그 책임 물을 생각도 없고.”
“…….”
“애초에 같이 살게 된 것도 어머님들이 임의로 결정하셨던 거니까. 우리가 도저히 못 살겠다고 말하면 이해하실 거야. 설득이 필요하겠지만, 불편함을 참으며 1년 넘게 같이 지내는 것보다야 낫겠지.”
“…….”
“네가 말하기 불편한 거라면 내가 먼저 두 분께 말씀드릴 수도 있고. 적당히 잘 둘러댈게.”
차분하게 말을 잇던 남한결이 입을 다물었다. 부엌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손바닥을 대고 있던 트레이닝팬츠의 무릎 부분은 이제 축축했다.
“…….”
“…….”
아무래도 내가 대답하기 전까지는 이 숨 막힐 정도의 침묵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할 수 있는 말을 찾아야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