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등으로 턱에 맺힌 땀을 훔쳤다. 한때 몇 배가 되는 운동량을 소화했던 건 없었던 일처럼, 산책이라 봐도 무리 없을 이 행동조차 운동으로 여기고 땀을 내는 몸이 우스웠다. 당연하게도 축축한 등을 무시한 채로 걸음을 뗐다.
‘정상까지 이제 한 걸음!’
이름 모를 캐릭터 하나가 주먹을 꽉 쥐며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을 틀었다. 한 걸음이라기에는 멀었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탁 트인 시야가 눈에 가득 찼다. 산 아래의 풍경이 나무 사이로 갈래갈래 보였다.
고개를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의식하기도 전에, 절로 감탄사부터 튀어 나갔다.
“와씨….”
이건 정말….
“졸라 뿌옇네….”
순간 목욕탕에라도 온 줄 알았다.
하여간 이놈의 미세 먼지는 복학생이 개강 첫날 뒷산을 오른 보람도 없게 만든다. 당연하게도내가 왜 공기 청정기 잘 도는 집을 놔두고 이곳으로 올라와 폐부 한가득 미세 먼지를 흡입하고 있는지가 떠올랐다.
‘나랑 계속 살 거야?’
나오는 길에 확인한 남한결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조금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닫힌 문 너머로 어제 본 단호한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답을 미리 알고 묻는 것 같던 얼굴을 떠올리자 한숨부터 터졌다.
너는 왜….
기억을 거슬러 그 안에 파묻힌 남한결의 모습을 불러왔다. 언제나처럼 뿌옇다. 형체는 있지만 얼굴이 없다.
막역한 사이의 엄마들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던 서로의 집. 같은 유치원과 초등학교까지 나온 우리는 남한결이 초등학교 6학년 때 갑작스러운 이사를 하기 전까지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남은 나는 그 상실감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한결을 기억에서 지워 버린 모양이다. 부모님은 그게 내 덜렁거리는 성격 때문이라고 했고, 철딱서니 없는 동생은 그게 내가 운동선수이던 시절 헤드기어를 너무 꽉 죄어서 뇌세포가 사라진 것 때문이라고 했다.
결론은 내가 가지고 있는 남한결의 조각이 너무나도 작다는 거다. 남한결과 함께였던 유년기 시절의 기억을 아무리 쥐어짜 봐도 내게 남은 거라곤 손바닥 가득 들어차던 누군가의 온기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손을 포근히 감싸던 존재감,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필연적으로 부딪치고 말 정도로 가까이에서 걷던 누군가의 둥근 어깨 같은 것들이 전부였다.
그 또한 남한결의 것이라고 확신하기 어려웠다. 십이 년이란 세월 동안 난 수없이 많은 사람과 손을 잡았고, 어깨를 부딪쳤으며, 내 세계는 골백번도 더 뒤집어졌으니까.
그 사실에 역정이라도 내듯 십이 년 만에 만난 남한결이 내 세계를 또 뒤집으려 하고 있었다. 겨우 사흘 만에.
“…자고 있겠지.”
아니다, 깼으려나.
시간을 확인해 보려다 문득 손목시계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도 습관이었다. 운동할 때는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 이제는 그 어디에도 쓸데가 없는 습관이기도 했다. 난 무시하듯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손목을 털고는 아래로 걸음을 틀었다.
내려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시간이든, 오늘을 끝으로 더는 볼 일이 없어질지도 모를 룸메이트든.
나름대로 굳은 마음을 먹고 들어선 집인데, 들어서자마자 신경이 쏠린 곳은 예상과 달랐다.
“어…?”
코를 가득 채우는 냄새에 홀리듯 걸음을 옮겼다. 사는 인물이라고는 둘뿐인 집이니 예상은 했지만, 부엌에는 정말 남한결이 있었다. 프라이팬을 쥐고 흔드는 자세가 생각보다 자연스러워서 놀랐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기척을 느꼈는지 남한결이 서서히 뒤돌았다.
“…….”
“…….”
이어진 시선을 먼저 끊은 건 남한결이었다. 칼 같은 시선 처리에 문득 민망해졌다.
음식 냄새를 맡고 온 개처럼 부엌에 우두커니 서서는… 그러고 보니 뛰고 와서 땀 냄새도 날 텐데.
아까만 해도 신경조차 쓰이지 않던 것들이 미칠 듯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일단은 땀 냄새부터 제거해야겠다 싶었다. 옷부터 벗으려 아랫부분을 잡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흠칫하며 또 남한결의 눈치를 봤다.
쟤는… 그러니까 이런 것도 신경 쓰이려나? 막 내가 자기 앞에서 옷 벗고 그러는 것도?
남이 옷을 벗든 말든 인덕션 앞에서 꾸준히 움직이는 등을 보건대 딱히 내게 관심은 없어 보인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옷은 방 안에서 갈아입을까? 그래, 그게 낫겠다.
방 쪽으로 걸음을 떼려던 때였다.
“어디 가.”
“…어? 나?”
“그럼 너 말고 누구.”
“…….”
“앉아. 같이 먹게.”
인덕션을 끄고 뒤돌아선 남한결이 짧게 명령했다. 그 와중에도 나를 쳐다보지는 않고 있었다. 말은 같이 먹자고 하는데, 정작 태도는 별로 같이 먹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어딘가 엇갈린 듯한 남한결의 행동이 나를 헷갈리게 했다.
“싫음 말고.”
“안 싫어!”
식탁에 내 몫으로 내려놓은 것 같은 접시를 다시 집어 들려 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발이 움직였다. 재빠르게 식탁에 앉고는 남한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핏 남한결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스친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남한결은 곧 별말 없이 왕관을 받치듯 공손하게 위로 향한 내 두 손바닥 위로 접시를 내려놔 줬다. 의자를 빼 앉는 남한결을 확인하고서야 접시 위의 음식을 살폈다.
동그랗게 모양이 잡힌 팬케이크 두 개가 접시 위에 올라와 있었다. 접시가 움푹 파이는 부분에는 딸기잼으로 추정되는 것이 한 번 먹을 정도로만 덜어져 있었다.
옆의 수저통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골라낸 남한결은 그걸 내가 받아 드는 걸 확인하고서야 제 몫으로 덜어 놓은 팬케이크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팬케이크를 정확히 네 조각으로 자르고, 한 조각을 입에 넣는 행위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가지런했다.
그 모습을 너무 빤히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한결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퉁명스럽게 하는 말을 듣고서야 시선을 제 위치로 돌렸다.
“할 말 있으면 해. 사람 민망하게 뚫어져라 보지 말고.”
민망했구나. 그런 티가 안 나서 몰랐다. 한 박자 늦게 찾아온 뻘쭘함을 이겨 내고는 입을 뗐다.
“아니… 되게….”
“…….”
“잘 구웠길래 감탄하는 중이었어. 이야… 어쩜 잼의 양도 이렇게…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믿지 않는 눈초리이기에 일부러 보란 듯 팬케이크를 크게 썰어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처음엔 민망해서 한 소리였는데 먹어 보니 정말 맛있었다. 내 몫으로 놓여 있던 팬케이크 두 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난 조금 더 진심을 담아 남한결을 칭찬해 보기로 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맛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상자 뒷면에 쓰여 있던데.”
“상자?”
남한결이 대답 대신 자신의 어깨 너머를 턱짓했다. 방금 남한결이 쓴 게 뻔한 팬케이크 믹스 상자가 주둥이를 오픈한 채로 수줍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랬구나… 그래도 팬케이크도 종류가 꽤 많을 텐데 이렇게 맛있는 거로 잘 고른 걸 보니 네 안목이 대단….”
“그냥 제일 싼 거 샀는데. 마감 임박 세일 코너에서.”
“…아, 그래? 그래도 세일한다고 사람들 몰렸을 텐데 용케 잘 집어 왔….”
“별로. 재고가 한 백 개는 쌓여 있던데.”
이 새끼가… 순간 조금 울컥할 뻔했다.
내가 말문이 막히거나 말거나, 남한결은 아까처럼 남은 하나의 팬케이크를 정확히 사 등분으로 쪼개는 중이었다. 보면 볼수록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집에 들어온 후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게 겨우 두 번째인데, 두 번 다 식탁에 앉아 멀거니 얘 얼굴만 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러는지를 궁금해하면서.
남한결은 나처럼 두 개의 팬케이크를 깔끔히 해치운 후 고개를 들었다. 남한결이 언제 포크를 내려놓나 지켜보다가 빈 접시를 내 쪽으로 빠르게 끌어오려던 찰나이기도 했다.
“운동했어?”
나도 모르게 멈칫하며 남한결과 눈을 맞췄다. 몇 초가 지나고서야 남한결에게서 이 질문이 나온 게 내가 아침부터 땀범벅으로 집에 들어선 이유를 묻기 위해서라는 걸 깨달았다. 늘 그렇듯 머리로는 안다. 멍청한 몸이 몰라서 문제지.
멈췄던 손을 움직여 내 빈 접시 위로 남한결의 접시를 쌓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 어. 그냥 뒷산만 잠깐. 왜? 땀 냄새 나?”
“좀? 거슬릴 정도는 아니고.”
보통 이렇게 대놓고 물어봤을 때 웬만하면 아니라고 해 주지 않나. 겨우 삼 일 본 거긴 하지만 쟤도 참 입에 발린 소리 잘 못하는 타입인가 싶었다. 그러나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거슬리지 않는다는데, 뭐. 속 편하게 생각하는 건 내 특기다. 고무장갑을 끼며 남한결에게 통보하듯 말을 던졌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의자를 끄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남한결이 그대로 앉아 있겠거니 예측할 수 있었다. 난 그새 껄끄러워진 듯한 입 안을 혀로 훑고는 입을 열었다. 수도꼭지 아래로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내렸다.
팬케이크 믹스 내용물이 있었던 것 같은 볼 하나와, 방금 우리가 쓴 접시 둘. 닦을 건 겨우 셋인데 주방 세제를 생각보다 많이 짜버렸다. 축축한 수세미를 허탈하게 바라보며 고민했지만, 곧 그 수세미로 접시 위를 문질렀다. 방금 필요 이상으로 짜 버린 주방 세제처럼, 고백이 줄줄 입 밖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이건 괜히 찔려서 미리 말하는 건데… 나 운동 그만둔 지 꽤 됐어.”
“…….”
“어렸을 때 엄청 친했다며, 우리. 당연히 내가 태권도 선수 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햇수로만 치면 칠 년이 됐다. 생활복 같던 도복을 벗은 게. 집보다 더 자주 보던 도장을 떠나고, 참가 신청서에 인적사항을 적을 때 말고는 잡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펜을 다시 쥐고, 어린 날 내 꿈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길로 들어선 게.
그 과정이 생각만큼 아프거나 아주 고통스럽진 않았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괴로운 건 따로 있었다. 예를 들자면, 나보다 더 태권도 선수로서의 이로빈을 좋아했던 사람을 만났을 때나, 눈을 빛내던 도복 입은 소년을 응원하던 이들에게 왜 내가 그걸 그만뒀는지를 설명하는 일들이 그랬다.
몇 번 얼얼한 통증을 느끼고 나니 요령이 생겼다. 타인의 순수한 궁금증이 날 아프게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패를 까는 거다. 지금 내가 남한결이 끼어들 틈새도 주지 않고 줄줄 내뱉는 것처럼.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때랑은 너무 다르니까, 네 입장에서는 궁금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내가 상한 오렌지라 치면 가장 덜 상한 부분을 미리 보여 주며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거다. 이래서 그랬어, 더 알고 싶어?
“그만둔 이유는… 궁금하면 말해 줄 수는 있는데, 별로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라서.”
보통은 알고 싶다고 말한다. 이해한다. 나라도 궁금할 것이다.
그럼 난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해 둔 절단면을 꺼내 보여 준다. 썩어서 내가 긁어낸 부분들이다. 더러는 인상을 찌푸리고, 더러는 날 동정한다. 그래도 그렇게 한 번 하고 나면 다시 그 일이 화두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걸 바라고 하는 행동이었다.
알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여태껏 살아오면서는 그랬다.
“안 궁금해.”
“…어?”
“말해 줄 필요 없다고, 운동 그만둔 이유.”
근데 남한결이 기꺼이 그 처음을 자처했다.
난 수도꼭지를 잠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빨간 고무장갑을 낀 채로, 얼빠진 표정 그대로 뒤돌았다.
언제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
“…….”
방금 들었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하듯 덤덤한 눈빛이었다. 곧 남한결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옆 의자에 있던 가방을 들어 크로스로 매는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뻣뻣하게 굳은 내가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로.
“일 교시라 가야 해.”
“…….”
“오늘부터 알바라, 열 시 넘어서 집에 들어올 거고.”
“…어, 어.”
“계속 살 건지에 대한 답변은 그때 듣는 걸로 알고 있을게.”
일 교시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 남한결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부엌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음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느끼고서야 겨우 수도꼭지를 잠갔다.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확인한 곳에는 남한결이 없었다.
여전히 귓가에는 방금 들은 말이 맴돌고 있었다. 넓지 않은 부엌 안, 내 옆을 가까이 스쳐 지나간 남한결이 흘리듯 남긴 말이었다.
‘그리고….’
‘…….’
‘너 별로 안 변했어.’
왜 쟨 날 알고 있는 걸까. 나는 쟬 정말 하나도 모르겠는데.
***
개강 주 월요일의 학교 앞은 소란스러웠다. 먼저 들렀던 단골 백반집 두 군데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우린 마지막 보험인 돈가스집에 도착하고서야 엉덩이를 붙였다.
오전 수업을 들었다던 재균이나, 자칭 죽음의 통학러인 수진이나,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나나 배고파 죽을 것 같은 상태인 건 같았다. 우리는 앞에 접시가 놓이자마자 허겁지겁 음식부터 먹어 치웠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리던 테이블 위 침묵을 깬 건 재균이였다. 깔끔히 빈 앞접시를 밀며 말을 잇는 얼굴이 날 응시하고 있었다.
“형. 오늘 정 교수님 수업 왜 쨌어요?”
난 재균이를 흘끔 보고는 마지막 남은 돈가스 조각을 입 안에 넣었다.
“수강 정정 기간인데 뭐. 왜? 교수님이 나 찾았어?”
“아뇨. 근데 출석은 부름.”
“됐어. 그 교수님 어차피 나 좋아하셔서 앞으로만 안 빠지면 될걸.”
“하여간 저 오빠는….”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수진이가 혀를 찼다. 티슈를 빼 입을 훔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옆에 있던 재균이가 저도 티슈를 달라며 손을 뻗는 걸 보다가 수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한결같아서 좋다고요. 칭찬입니다, 칭찬.”
“고마워. 나도 너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참 좋아, 수진아.”
“헐….”
“아, 좀! 내가 오빠 그런 말 좀 하지 말라 했죠.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다니까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탄성을 내뱉는 척하는 재균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톡 쏘아붙이는 수진이야말로 한결같은 아이들이라서 웃겼다.
둘과는 지난해 복학한 첫 학기, 교양 수업에서 만났다. 교수님이 임의대로 짰다던 조로 묶여 어색하게 둘러앉은 우리는, 이름과 과 소개를 하는 첫대목부터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서로를 응시했다.
난생처음 본다고 생각했던 셋이 모두 같은 과라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수진이는 학생회에 속해 있기에 셋 중 가장 과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는데, 우리와 좀 친해진 후에 나와 재균이가 서로 낯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간단히 정의해주었다.
‘하긴. 둘은 우리 과 분위기랑 안 어울려요. 잘 튕겨 나왔네, 뭐.’
그 말을 들을 때는 웃고 말았으나, 내심 맞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튕겨 나온 이유는 각각 달랐지만. 나보다 한 학 번 아래인 재균이는 개강 첫 주 속된 말로 얼차려를 당하고는 혀를 내둘렀다고 했다.
‘체육 관련 과 기합 심하다는 말은 들었어도… 진짜 별 같지도 않은 걸로 신입생들 기죽이려고 지랄하는데, 진심 개짜증 나더라고요.’
결국 못 참고 기합을 받다가 중간에 벌떡 일어서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재균이의 말을 듣는 내내 난 갑자기 뻗대는 후배를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을 동기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웃었고, 수진이는 그 전설적인 미친놈이 너였냐며 기겁했다.
튕겨 나온 건 마찬가지인 내가 재균이랑 달랐던 점은 바로 뛰쳐나오기보단 과 생활을 약 일 년 동안 견뎠다는 거였다. 일 년에 그쳐야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속히 말하는 ‘선배 짓’이 싫었다. 내가 맞는 건 상관없는데, 후배들한테 내가 1년간 당했던 짓을 똑같이 하기는 싫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입대하는 걸로 과 생활을 내 멋대로 끊어 버렸다. 방구석에 조용히 잠든 핸드폰에 동기들의 연락이 쏟아지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과 생활로 꽉 찬 2년을 보낸 후 군대에 가는 암묵적인 규율이 있던 과라 그런지, 돌아온 캠퍼스에는 동기들이 없었다. 내가 알던 선배들은 졸업했고, 신입생들과는 서로 얼굴조차 몰랐다. 그들이 새내기일 때 난 논산에서 삽질이나 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 사실을 한 번도 아쉬워한 적은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만난 둘과 놀다 보면 후배가 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싶어 기분이 종종 묘했다.
그건 좋으면서도 멋쩍은 일이었다. 개강 첫 주, 집에서 뒹구는 선배를 이렇게 챙겨 주는 것도 고맙고.
“형, 오후에 수업 있어요?”
“어.”
“쨀 거죠?”
“왜, 또 잔소리하게?”
“아뇨. 저 오늘 오후 수업 없어서. 제우스에서 게임 콜?”
“콜.”
특히 이렇게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상대가 생기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오후에 있었던 수업 대신 재균이와 PC방에 갈 계획을 채워 넣으며 영수증을 들고 일어섰다. 따라서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던 수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오빠. 그 PC방 가게요?”
“응. 너 오후 수업 있대서 우리 둘만 가려 한 건데. 왜? 같이 갈래?”
“아니, 그거 말고. 괜찮겠어요?”
나름의 걱정스러운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수진이의 모습에 순간 덜컥 불안감부터 들었다. 뭐지,
나 뭐 잘못했나? 눈만 끔벅대는 나와 옆에서 궁금한 표정을 짓는 재균이를 번갈아 보던 수진이가 폭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고는 있었지만, 오빠는 진짜 관심 없는 거에는 얄짤도 없구나.”
“나 뭐 잘못했어?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알바생이 오빠한테 번호 줬잖아요.”
번호? 아….
“기억도 못 하는 거 보니 연락 안 한 건 뻔할 뻔 자고.”
“…아… 아냐. 네가 말하니까 기억난다.”
“가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쪽지 잃어버렸다는 구시대적 변명이나 하게요? 어유, 내 마음이 다 아파. 차라리 쪽지를 받지를 말든가. 얼마나 기다렸을 거야.”
듣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수강 신청 날이었지 아마. 수줍게 쪽지를 건네던 포니테일 알바생을 가까스로 떠올린 것과 동시에, 수진이가 ‘으휴 인간아’ 하는 얼굴을 지으며 내 손에 들린 계산서를 뺏어 갔다.
“이건 제가 낼게요. 저 어제 알바비 받았거든요.”
“야, 수진아, 됐어. 줘.”
“저번에 너무 거하게 얻어먹은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래요. 그때 한 오십 나왔죠? 그러니까 왜 겁도 없이 소고기를 쏜다 그래요.”
“그거야 너희가 우리 집 앞까지 왔으니까.”
“됐어요. 3월엔 저랑 강재균이 밥 다 사기로 이미 이야기 다 끝났으니까 그렇게 알고 오빠는 군말하기 없기예요.”
붙잡을 새도 없이 휙 테이블을 벗어나 버리는 뒷모습이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황급히 따라가려던 행위는 팔을 붙잡은 재균에게 가로막혔다.
“그냥 이수진이 내게 놔둬요, 형. 쟤 돈 짱 많음. 제가 아까 지갑 봤어요.”
카운터에 서서 알바생이 내미는 카드를 받고 있던 수진이가 예고 없이 휙 뒤돌았다. 표정을 보니 방금 재균이 한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내 지갑을 네가 왜 봐?”
“만나자마자 네가 보여 줬잖아. 방학 동안 운전면허증 딴 거 보여 준다고.”
“운전면허증만 보랬지, 누가 현금 세랬냐? 뭐 ATM이세요? 이거 완전 무서운 새끼 아냐.”
“네가 더 무서운 새끼야….”
어째 오늘은 좀 안 싸운다 싶더라. 나를 가운데에 놓고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안 보면 섭섭할 정도였다. 수진이가 재수생이라는 것을 안 후 바로 말을 놓은 동갑내기는 오늘도 으르렁대기 바빴다.
“뭐라 했냐, 지금?”
“자자, 내려가자.”
수진이의 눈빛을 보니 중재할 때가 온 것 같았다. 2차전을 시작하려는 수진이의 어깨에 손을 얹은 나는 수진이가 재균이를 보지 못하도록 앞으로 끌었다. 주의를 돌려야 했다.
“수진이 너 수업 들어가기 전에 시간 좀 있지? 커피 마시자. 내가 살게.”
“헐, 우리 거기 가면 안 돼요? 새로 생긴 카페 있는데 알바생 잘생겼다고 오늘 에타에 글 올라오고 난리 났거든요. 여기서도 가까워요. 완전 학교 앞이에요.”
“그래, 어디든 너 원하는 데로 가자.”
“잘생기면 지가 어쩔 건데….”
“이 씨발놈이 진짜 개강 날부터! 아, 오빠 놔 봐요!”
***
수진이가 말한 카페는 말마따나 돈가스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만 장소가 좀 뜬금없긴 했다. 여기 원래 순댓국집 아니었나. 내 중얼거림을 들은 수진이가 카페 문손잡이를 돌리며 우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닥거렸다.
“순댓국집 가고 훈남 온다.”
재균이가 혀를 차면서도 수진이의 뒤를 따랐다. 나는 마지막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멈칫했다. 나올 타이밍을 놓친 듯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여자 둘을 보다가 나는 잠시 뒤로 물러서 문을 잡아 주었다. 고맙다는 눈짓이 돌아오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선 카페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한눈에 훑어보기에도 여성의 비율이 높아 보였다. 그게 수진이의 말처럼 잘생긴 알바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햇빛이 잘 드는 카페 안의 테이블과 신경 쓴 티가 나는 곳곳의 장식물을 대강 훑어보며 천천히 걷던 나는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문하기 위한 줄에 합류한 재균이와 수진이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걸음의 속도를 높여 뒤에 서자마자 재균이가 속닥대듯 물었다.
“형, 뒤에 오던 거 아니었어요?”
“아, 잠깐 문 좀 잡아 준다고. 주문 안 했지? 뭐 먹을래.”
“주문해도 오늘 안에나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재균이가 앞을 보라며 눈짓을 했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던 나는 머지않아 딱딱하게 굳었다.
“어….”
쟤가 왜 저기에 있지.
“뭐야. 형 아는 사람이에요?”
내 놀란 얼굴을 본 재균이가 묻는 데도,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한 채 앞만을 뚫어지게 응시해야 했다. 고개를 쭉 빼 확인해 본 결과, 카운터에 선 알바생은 정말 남한결이 맞았다.
카운터 너머에 무표정한 얼굴로 선 남한결은 한쪽 눈썹을 슬쩍 찌푸린 상태였다. 주문하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와중에도 손이 포스기 위를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줄 끝에 있는 나는 아직 보지 못한 눈치였다. 아니다. 지금 우리 둘의 어색한 분위기를 생각해 봤을 때,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걸 수도.
나는 뒤늦게 찾아온 뻘쭘함에 목덜미를 긁었다. 어쩜 이렇게 또 마주치게 되냐. 아침에 어색하게 팬케이크 나눠 먹은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어차피 주문도 안 했는데 애들한테는 딴 데 가자고 하고 나갈까?’
그 생각은 메뉴판을 보고 돌아온 수진이의 상기된 얼굴을 보니 사라졌다.
“전 딸기라테 먹을래요. 메뉴판 사진 보니까 맛있어 보여.”
“전 아메리카노요.”
…그래. 뭐. 지금 피해 봤자 어차피 저녁에 또 볼 텐데.
난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의 동태를 살폈다. 애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앞에 기다리던 사람이 두 명 정도 줄었다. 제일 앞에 선 두 명은 무리로 보였고, 그 뒤에 혼자 선 사람이 있으니 내가 세 번째로 주문할 것 같았다. 남한결은 여전히 카운터 뒤에서 주문을 받고 있었다. 커피는 옆에 선 머리꼭지만 보이는 사람이 만드는 듯했다.
난 한숨을 삼키고는 재균이와 수진이를 돌아봤다.
“알았어. 둘 다 아이스지?”
“네.”
“옙. 형 그러면 저희 자리 있나 보고 있을까요?”
“그래. 곧 따라갈게.”
남한결과는 정확히 오 분 후에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마실 메뉴를 정하고, 카운터 밑에 새겨진 카페의 이름을 외우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주문하시겠어요.”
언제부터 주문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한결은 좀 지친 것처럼 보였다.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고.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말한 바에 따르면 아르바이트 첫날일 텐데, 주문을 하려면 십 분을 넘게 기다려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으니 당황스러울 법 했다.
거기다 기다리는 동안 주문받는 남한결을 관찰한 결과, 유독 이 카페 손님들은 말이 많았다. 당장 바닐라라테와 헤이즐넛라테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남한결에게 물어보던 앞의 여자를 떠올렸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것 때문인지, 포스기를 보던 남한결의 시선이 돌아왔다.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남한결이 빠르게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제야 날 알아본 듯한 얼굴이었다. 표정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던 난 어색하게나마 먼저 입을 뗐다.
“그… 여기서 알바하는 줄 몰랐네.”
남한결은 대답 대신 날 빤히 보기만 했다. 마치 카운터 너머에 서 있는 게 정말 남한결인지 확인하려 보던 나처럼. 그 순간이 퍽 길게 느껴졌다. 난 결국 남한결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대신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야.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다른 데 갈 걸 그랬네.”
그제야 남한결이 내 얼굴에서 눈을 뗐다. 포스기에 시선을 박은 채로,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대답이 돌아왔다.
“…별로.”
별로 상관없다는 말이겠지.
무뚝뚝한 말투에서 대충이나마 의중을 읽어 낸 나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남한결의 머리 위에 있는 큰 칠판 같은 메뉴판에 시선을 박았다. 아까 재균이랑 수진이 둘 다 아이스로 먹는댔고….
“아메리카노 하나랑, 딸기라테 하나랑.”
“…….”
“넛츠라테 하나 줘. 아, 그리고 다 아이스로 부탁해.”
카드를 건넨 것과 동시에 남한결이 내 얼굴을 흘긋 확인했다. 찰나의 흘긋거림이기에 의미를 두기에도 이상했다. 역시나 별 의미 없는 행위임을 증명하듯, 남한결은 곧 카드를 영수증과 함께 돌려주었다. 받아 들려던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카드를 건네다 말고 갑자기 힘을 준 남한결 때문이었다. 남한결은 어딘가 망설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아냐.”
그러나 남한결은 금세 무표정해졌고, 다시 한번 카드를 건넸다. 카드를 지갑에 넣으며 슬쩍 고개를 돌려 테라스 안에 자리를 잡은 아이들을 발견했다. 아이들이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며 다가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번 뒤를 돌아 남한결의 얼굴을 확인했다. 남한결은 다음 사람에게 주문을 받고 있었다. 아까처럼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문하시겠어요.”
어쩐지 찝찝했지만, 본인이 아니라는데 더 묻기가 민망했다. 무엇보다 바빠 보이기도 했고.
찝찝함을 떨쳐 내고 걸음을 뗐다. 재균이와 수진이는 야외 정원같이 생긴 테라스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카페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곳이라, 안에 이런 테라스까지 있는 게 신기했다. 화이트 톤으로 내부와 비슷하게 인테리어한 테라스는, 바깥의 공기가 직접 와 닿는다는 점이 나름 신선했다.
테라스로 나가자마자 따뜻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쌀쌀한 봄 공기가 볼을 스쳤다.
“오래 걸렸네요, 형.”
“그러게.”
“어, 오빠. 뭐야, 진동 벨은요?”
“진동 벨?”
“안 줬어요? 옆 테이블들 다 들고 돌아오길래 당연히 주는 건 줄.”
나무 의자에 앉으려던 내가 멈칫하자, 수진이도 덩달아 당황한 얼굴로 옆 테이블을 보라며 눈짓했다. 얼굴이 익숙하다 했더니 나보다 앞서 주문을 한 무리가 앉아 있었다. 때마침 무리 중 한 명이 테이블 위에서 진동하는 진동 벨을 들고 일어섰다.
뭐지?
나도 모르게 남한결이 있던 카운터부터 확인했다.
“남은 진동 벨이 없었겠지, 뭐.”
나름의 해답을 내놓은 재균이가 그러지 말고 일단 앉으라며 팔을 당겼다. 일단 앉긴 했으나, 곱씹을수록 황당했다. 이 카페가 진동 벨로 음료가 나온 걸 알려 주는 시스템이라면, 왜 나한테는 진동 벨을 안 준 거지?
문득 아까 카드를 건네며 멈칫한 남한결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던 모습을 생각하니 더 이상했다. 진동 벨을 줄까 말까를 고민한 거였나. 아니, 왜?
“에이, 맞아요. 신경 쓰지 마요. 나올 때 되면 나오겠죠. 혹시 모르니까 제가 음료 나오는 곳 보고 있을게요.”
수진이마저 귀찮다는 것처럼 손을 휘휘 저었기 때문에 더 파고들기는 애매했는데, 대화가 멈출 때마다 자꾸만 카운터 쪽을 흘끔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카운터의 남한결은 주문을 받는 중간중간 옆으로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느낌상 커피를 만드는 사람한테 말을 걸고 있는 듯했다. 그 사람의 얼굴은 스팀 머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방금 그 사람이 무언가 대답을 한 모양인지, 남한결이 슬쩍 인상을 쓰고는 고개를 저었다.
“…오빠?”
“어?”
얼떨떨하게 묻자, 수진이가 집중하라는 듯 짝 박수를 쳐 시선을 모았다.
“오늘 개총 뒤풀이 올 거냐니까요.”
“오늘 개총이야?”
“…됐다, 됐어. 개강총회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내가 뭘 물어본 거야. 강재균 너는?”
“가겠냐.”
“아, 왜! 좀 와 주라 둘도.”
미적지근한 우리의 반응을 확인한 수진이가 비명을 지르며 동그란 원목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얼마 전 염색했다던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걸 지켜보다, 수진이의 머리 아래로 손을 넣어 이마를 받쳐 줬다.
“너 그러다 쿵 받으면 이마에 혹 난다.”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 수진이가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투덜거리는 얼굴이 시무룩해 보였다.
“이놈의 학생회 얼른 나오든가 해야지.”
“그러니까. 우리가 가는 것보다 네가 학생회 나오는 게 더 빠를 듯.”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다고. 근데 내가 나가면 안 그래도 남자들만 천지인 이곳에 여자 임원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또 좆같은 일들만 생기겠지. 저희 실습 후에 씻고 옷 갈아입을 여자 탈의실 따로 만드는 데도 백만 년 걸린 거 알죠?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저번 회의 때 그거 비품실로 만들자는 안건 또 나와서 내가 눈 시퍼렇게 뜨고 얼마나 지랄해야 했는데요.”
“…….”
“…….”
“진짜 지겨워… 빡대가리 새끼들… 논리로 이해시키면 뭐 해.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듣고 있자니 마음이 안 좋아졌다. 학생회가 썩은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래도, 그 안에서 여학우들을 대표한다는 사명을 띠고 꿋꿋이 버티는 수진이마저 지치는 모습을 보는 건 즐겁지 않았다.
그건 재균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루 종일 게임을 하는 놈이 슬그머니 폰 게임을 종료하는 걸 보니. 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재균이와 시선을 교환했다. ‘너 오늘 개총 갈 수 있어?’ 입 모양으로 묻자 ‘아, 형… 아무리 그래도 개총은 좀….’ 하는 듯한 곤란한 얼굴이 돌아왔다.
하긴 신입생 때부터 위에 뻗대고 동기들이랑도 쌩까는 놈이니 과 사람들이 다 모이는 데에 가기는 어려울 테다.
이쯤 되니 남은 옵션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나라도 후배에게 힘을 실어 줄 수밖에.
저녁에 해야 할 일을 떠올려 본 나는 남한결과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파트에서 멈칫했다. 그래도 시무룩한 수진이의 얼굴이 먼저였다. 난 수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돌아보는 얼굴에 대고 웃어 보이기도 했다.
“수진아.”
“네….”
“나 오늘 개총 갈게.”
“…진짜요?”
“응. 대신 뒤풀이는 1차까지만 있다 가야 할지도 몰라. 나 밤엔 할 일이 좀 있어서.”
“헐 대박! 상관없어요! 오빠 진짜 와 줄 거에요? 그냥 하는 말 아니죠?”
다 죽어 가는 목소리를 낼 때는 언제고, 수진이가 내 손을 붙잡고 방방 뛰었다. 말 그대로 의자 위에서 들썩들썩 몸을 흔드는 게 귀여웠다.
“내가 너한테 왜 거짓말을 해.”
그래, 아끼는 동생을 위해서 이쯤이야 할 수 있다. 개총에서 마주칠 불편한 얼굴들이야 알아서 넘기면 그만이고. 남한결이랑 저녁에 얘기하기로 했던 건… 몇 시인지는 안 정했던 것 같은데. 알바 끝나고 이야기하자고 했으니까 밤이겠지? 오후 알바가 맞긴 한가?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남한결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습관처럼 카운터를 확인하려던 나는 미처 고개도 다 못 돌린 채 화들짝 놀라기부터 했다.
“어?! 너 언제….”
뭐, 뭐야. 얘 왜 갑자기 이렇게 가까워졌어.
주위를 둘러보니, 수진이와 재균이의 표정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건 우리 테이블 옆에 선 남한결뿐이었다.
햇빛이 남한결의 눈가로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눈가를 살포시 찡그린 채로, 남한결이 물었다.
“딸기라테 어느 분이신가요.”
“…….”
“…….”
“…아, 저! 저인데요….”
수진이의 멍한 대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남한결이 쟁반 위에 놓인 잔 하나를 수진이 앞에 내려놨다.
“아메리카노는요.”
“…악! 네, 저요.”
재균이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손을 번쩍 들었다. 슬쩍 보니 수진이가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재균이의 발을 밟은 모양이었다. 그 비명을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건만, 남한결은 별말 없이 잔을 재균이의 앞으로 내려놓기만 했다.
남은 건 나뿐이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재균이와 수진이도 마찬가지인 듯, 내게로 시선이 모였다.
당연한 수순처럼, 남한결이 날 봤다. 난 남한결이 앞의 둘처럼 음료를 건네주리라 생각하며 예의상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남한결은 내게 음료를 건네주지도, 넛츠라테를 받을 사람은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대신 생뚱맞은 말을 했다.
“넛츠라테에 아몬드가 들어간대.”
“…어?”
“너 아몬드 못 먹잖아.”
그 의미 모를 말을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남한결이 내 알레르기를 언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남한결이 어떻게 알지? 라는 당연한 의구심은 우리가 소꿉친구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에 사그라들었다. 아… 내가 멍청한 신음을 내뱉은 것과 동시에 남한결이 쟁반 위의 남은 한 잔을 내 앞으로 내려놨다. 바람 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남한결이 준 음료는 딱 봐도 내가 시킨 넛츠라테가 아니었다. 휘핑까지 잔뜩 올라간 코코아색의 음료를 한참 내려다보던 나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럼 이건….”
“초코라테.”
쟁반을 들고 서 있는 남한결의 얼굴은 여전히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냥 먹어. 그게 더 비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한결이 등을 돌렸다. 제멋대로 건넨 음료가 내가 시킨 음료보다 더 비싼지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고 말할 틈조차 주지 않은 채 말이다. 테라스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등을 바라보던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박여야만 했다.
쟤 뭐지, 진짜…?
***
개강 총회는 예상대로였다. 예상만큼 불쾌한 곳에서는 불쾌한 사람들을 여럿 마주쳐야만 했다.
“야, 이게 누구야. 이로빈 아냐? 너 엄청나게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그간 잘 지내셨죠?”
“뭐, 나야….”
적개심 가득한 눈빛을 웃어넘기고는 대신 안부를 물었다. 비꼬듯 말하던 선배 하나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도 말을 흐렸다. 가시를 묻어 뱉은 말에 기죽기는커녕 태연하게 안부를 묻는 말이 돌아오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야, 성욱아. 너 저번 학기에 강 교수 수업 들었댔냐?”
그 모습이 보기 퍽 안쓰러웠는지, 옆의 선배 하나가 그 선배에게 말을 걸며 시선을 뺏어 갔다. 웃어 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뒤풀이 장소로 낙점된 고깃집의 유일한 장점은 그런 사소한 기 싸움들을 소음으로 덮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 자! 학생회 공지하겠습니다!”
벌떡 일어서서 시선을 모으는 과 회장에 사방의 소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취업 준비하느라 바쁘신 와중에도 이곳을 찾아 자리를 빛내 주시는 선배님들. 우리 의리 넘치는 동기들.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데 자리 지키느라 힘드셨을 후배들. 모두 와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과 회장은 저런 말을 할 줄 아는 애들로 골라 뽑는 걸까. 신입생 시절 행사마다 앞에 서서 저런 말들을 뱉곤 하던 과거 과 회장의 얼굴이 휘청대면서도 소주병을 마이크인 척 든 현재 과 회장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확실히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과 회장 뒤에 서 있는 수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휘청대는 과 회장의 뒤에 서서 그를 마뜩잖은 눈길로 바라보던 수진이의 표정이 잠시나마 밝아졌다. 그도 잠시, 과 회장 쪽을 보란 듯 눈짓한 수진이가 질색한 표정으로 입을 벙긋댔다.
‘왜 저래요 진짜.’
장난을 걸어오는 표정을 보니 그래도 아까 카페에서 힘없이 중얼거리던 모습보다는 훨씬 기분이 나은 것 같아 안심됐다. 개강 총회에서도 현안을 제기할 때마다 종종 고개를 돌려 날 찾던 수진이가 떠올랐다. 총회를 위해 빌려 놓은 강당의 맨 마지막 줄에 앉아 있던 나를 발견하고서야 풀어지던 얼굴을 떠올린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드시고 또 많이 마시시고! 마지막으로 단체 샷 한 번만 하겠습니다. 다들 앞의 잔 채워 주시고요. 선배들은 후배의, 후배들은 선배의 잔을 채워 주는 이 풍경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수진이와 장난을 치느라 중간 부분을 반 정도 듣지 못했으나 과 회장의 공지 사항을 빙자한 입에 발린 언사도 얼추 끝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서로의 잔을 채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선배님. 제가 한 잔 드려도 될까… 아, 아니. 죄송합니다. 드려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돌리니 앳된 얼굴이 보였다. 일부러 사람들과 마주 앉지 않기 위해 끝 테이블에 앉은 내 옆에 굳이 서 있는 모습이, 내게 술을 권하러 온 것처럼 보였다.
소주병을 든 채 날 어색하게 응시하는 얼굴은 바짝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어눌한 말투나 초점을 잘 잡지 못하는 눈은 한눈에 보기에도 멀쩡하지 않았다. 본인도 그 사실을 의식하고는 있는지 고개를 홰홰 저으며 말투를 깍듯하게 고치려 노력하는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나한테 말을 걸었던 옆 테이블의 선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옆의 선배와 함께 킥킥대는 꼴을 보니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잡혔다.
그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친 것과 동시에 비꼬는 말이 몇 마디 넘어왔다.
“야야~ 우리 신입생 팔 떨어지겠다. 받아 주라, 좀!”
“…….”
“옛날 옛적에 도망갔던 선배한테 굳이 찾아가 술 주는 후배가 또 어딨다고. 얼른 받아, 인마.”
주위에 있는 누구든 들으라는 듯 지껄이는 말들은 이제 더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이 거침없었다.
하여간 세월이 흘러도 바뀐 게 없는 인간들이었다. 얼굴 오래 안 비춘 후배를 괴롭히는 방법이 술에 취한 다른 후배를 보내 술을 주는 거라니.
절로 나는 한숨을 삼키고는 웃어 보였다. 일단은 옆에 서서 휘청대는 후배를 옆 빈자리에 앉혔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놈에게서 소주병을 뺏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게로 시선이 몰린 틈을 타 내 앞에 있던 맥주 잔을 옆에 앉은 후배 쪽으로 밀어 줬다.
“이거 먹어요.”
스치듯 건넨 말은 후배만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역시나 들은 모양인지, 입까지 벌린 채 멍청히 바라보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이 마주친 선배의 표정이 보란 듯 구겨졌다. 난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전 후배들한테 술 받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
“그래서 도망도 간 거, 누구보다 잘 아시잖습니까 선배님들.”
“…야. 이로빈.”
“그렇지만 저도 선배님들한테 술 올리는 건 무지하게 좋아합니다. 그것 말고는 배운 게 없어서요.”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맥주잔 세 개를 집어 들었다. 소주병을 기울여 맥주잔을 채웠다. 부글부글 끓는 얼굴을 하는 선배 쪽으로 맥주잔 하나를 내밀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선배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쳤다.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둘을 대신해 그 앞에 맥주잔을 내려놨다. 남은 맥주잔 하나는 내가 가져왔다. 허공으로 잔을 들어 올린 후 둘이 손조차 대지 않은 맥주잔 쪽으로 가져다 댔다.
“짠- 해 주셔야죠.”
“…….”
“…….”
“안 해 주시면, 저 또 도망갑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도망친다는 말을 농담처럼 써먹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내가 말을 이어 나갈 때마다 굳어지는 얼굴을 보니 우스웠다.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안면 근육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워낙 테이블마다 부어라 마셔라 정신없이 놀고 있어서인지, 엉겁결에 이 광경을 지켜봐야 했던 신입생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우리 쪽에 특별히 쏠린 관심은 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타이밍 좋게 과 회장의 방정맞은 소리가 귀를 울렸다.
“자, 잔들 다 채우셨으면 허공에 드시고! 제가 ‘체교과를’ 하면 ‘위하여!’ 해 주시는 겁니다. 아셨죠?”
사방에서 잔을 드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이를 갈던 둘도 결국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고 내가 채운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난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눈을 휘어 웃었다.
“체교과를!”
잠깐의 정적. 곧이어 식당을 꽉 채울 우렁찬 함성에 묻어가기 위해, 난 입 모양을 대충이나마 연습했다. 그러고는 잔을 부딪쳤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껄끄러운 눈빛을 미지근한 소주와 함께 목 뒤로 넘기는 순간이 되어서야 경련이라도 날 듯 웃고 있던 입매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신입생 시절, 맞을 이유가 없으면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맞던 때가 있었다. 하루는 인사를 삼 초 늦게 했다고 맞았고, 하루는 싸가지 없게 선배들보다 비싼 시계를 차고 다닌다는 이유로 맞았고, 그 어느 날은 동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밥을 먹으러 간 의리 없는 새끼라고 맞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가 많이 지적받았던 부분은 웃는 얼굴이었다. 앞에 앉은 두 선배를 비롯한 우리 과 남자 선배들은 내 웃는 얼굴을 유독 싫어했다. 재수 없게 뭘 웃냐고 이유 없이 맞기도 참 많이 맞았다.
내가 오늘 저녁 내내 기를 쓰고 웃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
- 어, 아들.
“응. 전화하셨던데 못 받아서요. 왜?”
- 택배 받았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지.
“아, 받았다고 문자 남긴다는 게 깜빡했나 보다. 잘 받았어요. 엄마 부친다고 고생했겠더라.”
- 고생은 무슨.
“반찬은 뭘 또 그렇게 많이 보냈어요. 엄마야말로 요새 강의 때문에 밥도 잘 못 챙겨 먹는다면서. 반찬 부칠 시간에 더 자고 맛있는 것 먹고 그러지.”
- 반찬은 몇 개 빼고는 그냥 너 좋아하는 반찬 가게에서 샀어. 택배 부치는 거야 로운이가 했고.
“우리 햄스터가 그런 귀찮은 일을?”
- 그러게. 나도 사실 시켜 놓고도 반신반의했는데 보냈더라고. 근데 우리 집에 이제 로운이 햄스터라고 부르기 금지령 내려졌어, 아들. 저번 주 너희 아빠 왔을 때 한 번 그렇게 불렀더니 삐쳐서 주말 내내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더라고. 이제 그렇게 안 부르기로 약속하고는 겨우 달랬어. 형한테도 꼭 말해 달라고 거듭 당부를 하던데.
“사춘기인가.”
- 올 때 됐지. 엄마가 그랬잖아. 고추에 털 나는 순간부터 남자로 대우해 줘야 한다고.
통화 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주위부터 살펴야 했다. 다행히도 골목길에는 나뿐이었다. 그 사실에 안심하며, 난 다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애매한 취기가 오른 볼이 뜨거워졌다. 실없는 사람처럼 피실 웃음이 새는 입가를 꾹 눌러야 했다.
엄마랑 고추 털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이야기하는 건 전국에 우리 형제밖에 없을 거다.
“아, 엄마 진짜. 저 밖이라니까요.”
- 밖이면 왜. 말이 나와서 그런데, 엄마가 함께 넣어 둔 콘돔도 봤지?
“봤지.”
- 엄마 아빠가 뭐랬지? 성생활은 책임질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안전하게. 상대방의 동의하에.”
- 옳지. 잘한다, 내 아들.
“엄마, 아들이야 그렇다 쳐도, 강의할 때도 학생들한테 이런 이야기 하는 건 아니지?”
- 이 엄마를 뭘로 보고. 엄마 인싸야. 학생들 분위기 맞춰서 잘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그 와중에 인싸라는 단어는 언제 또 배웠대.
우리 엄마지만 정말 대단하다. 엄마가 저 단어를 알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지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엄마의 친화력에 압도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유행어를 내놓았을 대학원생 형 누나들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도 같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목 부근을 꽉 누르는 것 같던 갑갑한 느낌은 사라지고 가슴속은 어느덧 맑은 하늘처럼 개었다.
난 통화 내내 입에 한 번 물지 못해 홀로 타들어 가던 담배 한 개비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그 위를 운동화로 꾹 밟아 껐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 넘어온 것도 그때였다.
- 아, 참. 한결이랑 사는 건 좀 어때?
“어? 아….”
- 예전에 너네 붙어 다니던 모습 생각해 보면 잘 지낼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커서는 서로 본 적도 없고. 오랜만이긴 할 테니까.
서울로 오기 전 짐을 쌀 때도 느꼈지만, 엄마는 나와 남한결의 만남에 우리보다 더 들뜬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어쩌면 그 시절 우리의 우정은 정말 우리 둘만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들에게는 그 시절을 추억하기 위한 무언가 단단한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십이 년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남한결과 내가 뜬금없이 같이 살게 된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내가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했다.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할 정도로. 망설이던 나는 결국 선택지 중 가장 무난한 대답을 택했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사실 잘 모르겠어요. 둘 다 바빠서 그런지 대화를 많이 해 보지도 못했고.”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대답이었다. 거짓말을 하지도 않고 동시에 엄마를 실망시키지도 않을 만한 문장을 고르고 골라 뱉었다. 그리고 남한결이 커밍아웃했다는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도 우리의 어색한 현재 상황을 그럭저럭 설명해 낼 만한 이유였다.
다행히도 먹혀들었는지, 손쉬운 수긍이 잇따랐다.
- 하긴, 학기 초니까.
“뭐, 그렇죠.”
- 주말에 시간 나면, 엄마가 보낸 사진이라도 보여 주면서 대화하고 그래.
“아….”
- 뭐야, 그 애매한 대답은? 어, 잠깐만. 내가 안 부쳤나? 저번에 앨범 정리하다 발견하고 신나서 챙겨 놓고는.
“아니, 그게 아니라. 봤어요.”
- …….
“저랑 남한결 어릴 때 찍은 사진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전공 책들, 봄여름에 입을 수 있는 외투 몇 벌이 다였던 상자 안에서 하얀 액자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액자 안에선 지금 내 허리께나 올 법한 남자아이 둘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파트를 배경으로 서 있는 둘은 기억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퍽 친해 보였는데, 우선 자세부터가 그랬다. 한 치의 틈조차 없이 꽉 붙어 있는 어깨나, 그런 포즈가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둘의 웃는 얼굴이나.
기분이 이상했다. 특히나 앳된 남한결의 얼굴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낯설기도 했다. 내 옆에 서 있는 남한결은 딱 한 뼘 정도 나보다 키가 작았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한 어깨동무가 약간은 벅차 보였다. 그럼에도 남한결은 기꺼이 어깨를 내준 채 웃고 있었다.
마치 그 사진 안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자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남한결과 다시 마주한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들이기도 했다.
비록 가까이서 재 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봐도 나보다는 키가 큰 것 같았고. 저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은 본 적도 없고. 행복은… 모르겠다. 걔가 행복할까?
문득 내게 커밍아웃을 하던 날, 건너편에서 날 보던 남한결의 표정이 떠올랐다.
‘나랑 계속 살 거야?’
경계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웃는 어린 남한결을 보고서야, 난 어쩌면 커밍아웃을 하던 순간조차 무표정하던 걔가 마음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두려워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때는 서로의 세상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친구에게 깊은 비밀을 꺼내는 그 순간이 즐겁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사실도 감히 추측했다.
그러니까 난 어렸을 때의 우리가 친했음을 보여 주는 사진을 보고서야 비로소 남한결이 내 친구였고, 그 사실만은 결코 부정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인 거였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보여 주려고 했어요. 남한결한테.”
남한결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들어 봐야겠지만. 적어도 난 그랬다.
“보여 줄게요, 꼭.”
그건 마치 나한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네, 네. 들어가세요.”
엄마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수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 자리가 파할 것 같다며, 어디냐고 묻는 목소리가 평소보다는 한 톤이 높았다. 주위의 소음이 워낙 커서 일부러 크게 말하는 것 같았다. 신입생들을 챙길 의무가 있는 학생회 임원이라서인지, 2차 끝까지 남아 있던 것 치고는 멀쩡한 목소리였다. 건물 바로 아래에 있다고 말하자, 자기도 곧 그쪽으로 내려가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2차 뒤풀이를 연 술집은 2층에 있었다. 곧 수진이가 내려올 계단 보이는 곳에 서서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취한 건 아닌데, 피곤하긴 했다. 오랜만이었다. 소주를 경쟁이라도 한 것처럼 들이켠 것도, 쓸데없는 사람들과 기 싸움을 하는 일도.
더 피곤한 건 견뎌야 할 밤이 아직도 남았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시계는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같지도 않은 신경전으로 인해 1차 뒤풀이만 참여하겠다는 계획은 진작에 무산됐다. 지금 서 있는 곳도 2차로 간 술집 옆의 작은 골목길이었다. 나오기 전 둘러본 테이블에는 이미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때만 해도 곧 파할 자리라고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마주친 한 선배가 한 말이 아니었다면.
‘이로빈, 너 우리랑 이야기 좀 하자.’
‘하세요.’
‘지금 말고, 새끼야. 이 자리 끝나고.’
자세히 보니 아까 보란 듯 시비를 걸던 선배의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선배였다. 가지가지 한다, 존나. 술기운이 오른 건 나도 마찬가지라, 헛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들었는지 휙 돌아보는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방금 씻은 손을 건성으로 털었다.
‘그러세요.’
‘야, 너….’
‘도망가지 말라고 경고까지 해 주시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당장이라도 덤빌 것 같은 얼굴을 하던 선배는 화장실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는 것으로 이 대화가 당장은 끝나지 않을 것을 암시했다.
안 봐도 뻔했다. 쪽수로 밀어붙이겠지. 몇 대 맞아 주면 끝날 일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개긴 이상, 그 정도 각오도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오빠!”
“어.”
“취했어요?”
팔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뜨니 수진이가 서 있었다. 아까 술집에서는 몰랐는데 볼이 평소에 비해 불그스름했다. 난 똑바로 서서 수진이와 눈을 맞췄다.
“아니. 넌? 목소리는 괜찮아 보였는데, 이렇게 보니까 볼이 좀 빨갛네.”
“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오빠. 저 방금 좀 미친 소리를 들은 것 같거든요? 오빠 2차 끝나고 김성욱 무리랑 3차 가기로 했다면서요. 사실이에요?”
“아….”
김성욱? 갑작스러운 이름에 인상을 찡그렸다가, 한 박자 늦게나마 이해를 마쳤다. 아까 시비를 걸던 선배 중 한 명의 이름인 듯했다. 이름까지 듣고 보니까 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근데 그걸 또 떠들고 다니냐. 후배 갈구는 게 뭐 자랑이라고.
수진이가 알면 신경 쓸 것 같기에 숨기려 했는데, 입만 싼 인간들 때문에 허사가 됐다. 민망한 건 이 나이 먹고 선배랑 기 싸움 하는 나뿐이다. 난 괜히 코 밑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뭐, 3차라면 3차지. 신경 쓰지 말고 너도 얼른 후배들이랑 같이 집에나 가. 차 끊길 시간 다 돼….”
“미쳤어요?! 오빠가 거길 왜 가요!”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른 수진이 덕에 지나가던 오토바이가 비틀댔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멍하니 수진이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펄펄 뛰기 시작한 수진이는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게 할 정도였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 줄은 알아요?”
“어… 아니, 수진아.”
“그 새끼들 자기들끼리 놀기 심심하다고 꼭 후배 한 명씩 끼워서 술자리 하는 거 우리 과 사람들 다 알아요. 시비 걸고, 후배가 참다 참다 화내면 그거 빌미 삼아서 괴롭히는 것도 유명하다고요! 제 동기도 멋모르고 갔다가 맞고 온 적도 있어요. 다 알아요, 다! 알아도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근데 오빠가 거길 왜 가요? 혹시 오늘 걔들이 오빠한테 시비 걸기라도 했어요?”
“시비라기보다는… 나도 개겼는데.”
“걸었네, 걸었어. 씨발놈들… 이제 이로빈까지 건드린다 이거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 위기 - 절정 - 결말까지 순조롭게 나아가는 데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얼빠진 나를 앞에 둔 채로 수진이가 이를 갈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한번 두고 보자 했는데… 그래, 오늘이 그날이다.”
“야, 수진아. 너 어딜 끼려고 그래.”
“됐고, 오빠 무조건 저랑 같이 가요.”
“…어딜?”
“어디긴 어디예요, 3차지. 아, 오빠 잠시만 기다려요. 저 이 주위 사는 친구한테 오늘 재워 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올게요.”
말리기도 전에 옆의 골목으로 쏙 들어간 수진이가 전투적으로 통화에 돌입했다.
“어, 난데. 나 오늘만 너네 집 신세 좀 지자. 어. 맞아. 말해 뭐 해. 여차하면 경찰 부를 거야. 어, 어어.”
말리기 위해 뻗었던 팔이 허공에 민망하게 떴다. 조각나 들리는 단어들만 조합해 봐도 그녀의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 일인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내려다본 시계는 9시 3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부터 알바라, 열 시 넘어서 집 들어올 거고.’
남한결이 알바를 끝내고 돌아오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혹시나 해서 쳐다본 핸드폰은 잠잠했다. 연락을 먼저 할까 고민하며 화면에 손을 올린 난 이내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헐….”
그러고 보니 난 남한결의 번호조차 몰랐다.
“큰일 났네….”
번호를 모르면 연락은 어떻게 하지?
***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남한결과는 열 시 전에 마주칠 수 있었다.
“아….”
“씨발! 너 뭐야? 미쳤어?!”
나는 방금 눈으로 똑똑히 본 광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남한결을 멍하니 응시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날벼락을 맞은 김성욱 외에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두가 넋을 놓고 남한결을 보고 있었다.
그럴 만한 이유로는 첫 번째, 남한결이 방금 김성욱의 셔츠 위로 음료를 쏟아 버렸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김성욱에게 멱살을 잡혔기에 어떻게 보면 연결되어 있던 내 쪽으로는 음료 한 방울도 튀지 않은 걸 보았을 때 남한결의 실수라 부를 만한 행위는 눈에 보일 정도로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사실을 앉은 모두가 눈치챘기 때문이었으며.
세 번째로는.
“미친 건 그쪽이겠지.”
“뭐…?”
“그걸 피하지도 않고 맞고 앉아 있어.”
그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남한결의 태도였다. 아무리 봐도 방금 손님에게 음료를 엎어 버린 알바생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상당히 발칙한 면이 있었다.
너무 황당해서인지 입조차 떼지 못하는 김성욱을 노려보던 남한결이 앞머리를 거친 손길로 쓸어 올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던 시선을 끊고 남한결의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김성욱에게 잡혔던 내 목 부근을 훑는 눈길이 재빨랐다. 남자치고는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을 꾹 문 채로, 남한결이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짜증 나게. 씨발.”
***
수진이를 친구네 집 앞까지 데려다준 후 카페로 돌아왔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방문하는 카페는 이젠 집만큼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카페는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의 큰 창은 가리개로 가려져 있었지만, 틈 사이로 어슴푸레한 빛이 흘러나왔다. 가끔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보니 남한결도 아직은 저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난 슬쩍 걸음을 물려 카페 옆 담벼락에 섰다. 분리수거를 하는 공간인지, 꽉 찬 종량제 봉투부터 플라스틱 병이 가득 담긴 하얀 비닐 봉투까지 나름의 질서를 갖춘 채 놓여 있었다.
저 중 하나는 남한결이 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시야에 길 건너 경찰서가 들어왔다. 경찰서를 목전에 둔 카페라니. 새삼 카페 주인도 보통 사람은 아니겠다 싶었다.
‘수진아, 여긴 좀….’
‘오빠 안 친한 룸메가 알바생으로 일하는 곳이라 저도 좀 그렇긴 한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일단 바로 앞에 경찰서가 있잖아요.’
유달리 길게 느껴진 오늘 하루의 화려한 마무리는 뒤에 따라오는 선배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이던 수진이의 리드로 시작됐다. 갑자기 3차에 끼워 달라며 나서는 학생회 후배를 거절하지 못한 선배 둘은 떨떠름한 얼굴로나마 고개를 끄덕였고, ‘왜요? 3차를 꼭 술집에서 하란 법 있어요?’라는 당돌한 말에 그들이 애초에 계획했을 후배 기합과는 거리가 먼 카페에 들어서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는 기합받는 것보다 더한 꼴을 보인 것 같긴 하다만.
아비규환의 현장이나 다름없던 아까의 광경을 떠올리자 어처구니가 없어 한숨이 샜다. 한편으로는 웃겼다.
‘짜증 나게. 씨발.’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다. 음료를 뒤집어쓴 놈도 아니고, 그 옆에 선 친한 놈도 아니고, 음료를 쏟은 놈이 그 상황에서 성질을 낼 건 뭐란 말인가.
성질을 내는 얼굴이 얼마나 진심 같아 보이던지, 순간 난 이 카페에 ‘알바생이 음료를 쏟을 것 같으면 피하시오’라는 룰이라도 있는 건지 고민했다.
친구의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 눈을 빛내며 거듭 묻던 수진이의 말이 떠올랐다.
‘오빠, 룸메랑 안 친한 거 맞아요? 아무리 봐도 안 친한 사람 위해서 그런 일까지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던데.’
안 친한 사람을 위해서….
안 친한 사람….
“뭐 하냐?”
“아씨! 깜짝이야!”
거짓말 안 하고 심장이 굴러떨어지는 줄 알았다. 심장이 제 위치에 있는지 가슴을 더듬어 확인해 보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방금까지도 머리가 터져 나갈 정도로 생각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
“…….”
냉정하게도 휙 시선을 거둔 남한결이 터벅터벅 걸어 내 옆에 섰다. 손에 들려 있는 종량제 봉투를 보니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모양이었다. 검은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아까와는 달리 베이지색 니트에 청바지만 입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걸 봐서는 퇴근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하긴, 카페 불도 다 꺼져 있었고 뭐.
슬쩍 본 시계는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에 남한결이 말했던 퇴근 시간에 비해 늦은 시간이었다. 퇴근이 늦어진 이유에 카페 안에서 벌어진 난동에 기여한 내 잘못도 있는 것 같아 괜히 머쓱했다.
그 와중에 남한결은 분리수거를 참 열심히도 했다. 묵묵히 움직이는 등은 불과 몇십 분 전 일어난 일에 대해 먼저 언급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난 망설임을 접고 대화의 물꼬를 텄다.
“퇴근은 언제 해?”
잠깐 멈칫하는 것처럼 보였던 등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에 알맞는 니트가 남한결의 움직임에 따라 굴곡져 흐르는 걸 보던 나는 콧등을 긁었다.
“그건 왜?”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온 답이었다. 분리수거를 끝낸 모양인지, 숙이고 있던 상체를 일으킨 남한결이 내 쪽을 돌아보며 조용히 물었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에서는 아까 보았던 호전적인 태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냥.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
남한결이 대답 없이 눈을 깜박였다. 그 이야기란 게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도 잠깐, 남한결이 들고 있던 종량제 봉투 하나를 일반 쓰레기 상자 옆으로 휙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해.”
“어?”
“늦을 것 같아서 그래. 할 일 남았거든. 청소도 덜 했고.”
무뚝뚝하게 카페 쪽을 눈짓한 남한결은 그대로 입을 닫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음….”
여기선 좀 민망한데.
하긴 민망한 걸로 치면 십이 년 만에 만난 소꿉친구 지키겠다고 엄한 손님 옷에 아메리카노를 부어 버린 남한결이 더할 테다. 물론 당사자는 별로 민망해 보이지 않았다만.
결심하듯 숨을 들이쉬고는 남한결과 시선을 맞췄다. 나도 남자치고는 작은 키는 아닌데, 남한결의 얼굴을 똑바로 보려면 시선을 위로 올려야만 했다.
“오늘 고맙다고 말하려고.”
“…….”
“오후에 라테 바꿔 준 것도 고맙고. 아까 나 도와준 것도.”
“…….”
“사실 생각도 못 했는데. 너한테 안 좋은 꼴 보일까 봐 두렵기도 했고. 근데.”
“…됐어. 그만해.”
“어? 아니, 감사 인사는 해야지.”
“너 도와준 거 아니니까 그만하라고.”
응?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넌.”
…그게 그 말 아닌가?
헷갈려 하는 나를 보고도 남한결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 할 말이란 게 고작 감사 인사에서 끝날 줄 안 모양이었다. 난 남한결이 멀어지는 걸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뒤를 따라 뛰었다. 팔을 낚아챈 것과 동시에 남한결의 향이 훅 코를 스쳤다.
난 숨을 고르며 급하게 말을 이었다. 또 놓치기라도 할까 봐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 너는, 애가 사람 말을 다 듣고 가야지. 가만 보니까 아주 습관이다? 첫날에도 그러더니.”
“…….”
남한결은 대답하지 않고 대신 잡힌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봤다. 난 내 얼굴로 올라온 남한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가까이서 보니 남한결의 눈은 완전히 까맣지는 않았다. 까만 동공 옆에는 그보다는 조금 더 옅은 색의 홍채가 있었다. 그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기시감을 느끼고는 멈칫했다.
잠깐. 이거 어딘가 익숙한….
“할 말 있으면 놓고 해.”
“어? 아, 미안.”
어색하게 팔을 놓아준 것과 동시에 남한결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손을 내렸다.
“…….”
“…….”
침묵을 견디며 입 안으로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을 해야 남한결한테 내 의사가 효과적으로 전달될지를 고민하면서.
“음….”
결론은 ‘모르겠다’다. 어차피 말을 이렇게 고르고 고르는 건 내 성격도 아니다. 앞으로도 남한결과 마주칠 일은 많을 텐데, 매번 이렇게 말할 때마다 속으로 백번 고민할 수는 없을 거였다.
한 번쯤은 내 페이스대로 나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 중 한 장면에서 자전거를 가르쳐 주던 아빠가 그랬다. 원래 모를 땐 직진이라고. 무모한 조언이긴 해도, 그런 아빠한테 배운 난 어린 시절 내내 자전거를 잘 타고 다녔다. 그럼 됐지 뭐.
이상한 데서 얻은 용기를 바탕으로 입을 열었다.
“나 너랑 계속 친구 하고 싶어.”
“…뭐?”
“우리 친구였잖아. 그것도 되게 오래. 그거 계속 이어서 하고 싶다고.”
말없이 날 보는 남한결의 얼굴에서 어깨를 내주던 소년을 보았다. 어깨를 내주던 그 소년은 내 과거의 적잖은 비중을 가지고 있을 터다. 씁쓸한 그 사실을 되새기며, 난 작게 웃었다.
“나 사실 그 시절 잘 기억 못 해. 미안. 근데… 가족들이 하도 말해 줘서 대충 알기는 하거든. 너랑 나랑 얼마나 친했었는지.”
“…….”
“사실 그게 막 와닿지는 않았다? 사람이 그렇잖아. 뭐든 겪어 봐야 이게 내 일이구나 싶고.”
남한결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게 부디 나쁜 신호가 아니길 빌며, 난 말을 이었다.
“오늘 너 보니까 와 닿더라.”
“…….”
“우리가 얼마나 친한 친구였는지.”
“…….”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서도 내가 아몬드에 알레르기 증상 있는 거 아는 친구들 몇 없어. 멱살 잡힌 친구 구한다고 손님한테 음료 들이붓는 미친놈은 더더욱 없고.”
말끝에 또 웃음이 붙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본 그 장면만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웃음을 삼키며 남한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악수를 청하듯이.
“그런 친구를 놓치는 거야말로 정말 미친놈이 할 만한 짓 아니냐?”
“…….”
“계속 친구 하자, 우리. 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지금처럼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내 손을 잡아 주지 않고 빤히 쳐다만 보던 남한결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내가 게이인 건.”
“…….”
“상관없어?”
어쩌면 그게 남한결이 가장 하고 싶은 질문이었다는 건 그 말을 하는 남한결의 얼굴이 잠깐 흐트러지는 찰나의 순간에 알았다. 남한결이 이 순간을 두려워한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반쯤은 맞아 든 셈이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
“나중에 집에서 보여 줄 거긴 한데, 엄마가 너랑 나랑 어릴 적에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 주셨거든. 이번에 택배 보내면서.”
“…….”
“그 사진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
“내가 네가 게이란 이유로 못 살겠다고 하면, 사진 속의 이로빈이 날 죽어라 팰 것 같더라고. 신발주머니로 퍽퍽 때리고, 미쳤냐? 욕하면서.”
남한결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인다 싶더니, 피식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에 힘입어 난 아까부터 내밀고 있던 손을 재촉하듯 남한결 쪽으로 한 번 더 내밀었다.
“잡아 주지 좀? 슬슬 민망해지려 그러는데.”
“유치하게 악수는 무슨.”
“와… 너 어렵사리 쌓은 감동을 한순간에 없애는 재주가 있다?”
“집에나 가. 더 사고 치지 말고.”
고작 삼 일 만에 사고뭉치 취급을 받는 걸 억울해해야 할지, 커밍아웃해서 남의 머리를 백지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걸 억울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간다.”
그새를 못 참고 몸을 돌린 성격 급한 룸메이트는 또 멀어지기 바쁘다. 일정한 속도로 멀어지는 등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야.”
그래도 부르면 재깍재깍 돌아보긴 했다. 비록 그 태도가 불량하대도.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꼴이 빨리 말하라는 것 같았다. 난 이 카페로 오는 길 내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시리얼 상자를 남한결에게 보이도록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나도 샀다! 시리얼!”
이해하지 못한 듯 인상을 찌푸린 남한결에게 한 번 더 소리쳤다.
“내일은 내가 대접하겠다고! 아침!”
미묘해지는 표정을 보니 대충이나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너처럼 마감 세일 하던 코너에서 싸게 건졌다는 얘기는 내일 아침에 밥을 먹으며 해 주면 될 테다. 남한결이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생각하며, 나는 남한결을 따라 하듯이 미련 없이 뒤돌았다.
아, 잠깐만.
“야!”
따라 해 보려 했지만, 역시 이렇게 뒤도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고작 세 걸음도 떼지 못한 채 되돌아 남한결을 불렀다.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해 뒤 돈 남한결의 얼굴이 멀리서 보기에도 찌푸려져 있었다. 짜증을 내는 얼굴을 보자 장난기가 비죽 솟아올랐다.
“너 어렸을 때 별명 내 껌딱지였다더라?”
멈칫하는 남한결이 보였다. 꽤 거리가 있는데도, 날 향해 쭉 뻗어 오는 못마땅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
어깨를 으쓱하는 날 본 남한결이 서서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길쭉길쭉한 중지를 허공에 치켜든 채로, 남한결이 또박또박 입 모양으로 말했다.
‘꺼. 져.’
원래의 얌전한 걸음걸이마저 버린 채 성나서 성큼성큼 멀어진 남한결이 카페 안으로 들어간 것까지 보고서야, 후련해진 마음으로 뒤돌 수 있었다.
“새끼, 귀엽기는.”
집으로 가는 내내 입 밖으로 웃음이 샜다.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다.
우린 다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
남한결은 정확히 8시가 되어서야 방에서 나왔다. 틀어 놓은 텔레비전을 보는 둥 마는 둥 남한결의 닫힌 방문을 오매불망 쳐다보고 있던 나는 기다리고 있던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손잡이를 잡은 남한결의 눈이 잠깐 크게 뜨였다가 이내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남한결 방 안을 한 번도 못 본 것 같다. 문이 있는 의미가 없게끔 훤히 열고 다니는 나와는 정반대로, 남한결은 안에 보물이라도 감춘 듯 문을 꼭 닫고 다녔다. 지금도 그랬다. 방 안을 힐끔대는 나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남한결이 등 뒤로 문을 닫고는 거실로 나왔다.
아쉽다. 방 구경하고 싶다고 하면 싫어하려나? 좀 더 친해지면 물어봐야지.
아쉬움을 애써 털어 내고는 남한결을 향해 손짓했다.
“…뭐야.”
“기다리고 있었어.”
“나?”
“그럼 누구. 자, 일로 와서 앉아.”
하고 보니 어제 남한결과 나한테 한 말이랑 비슷했다. 청자와 화자가 뒤바뀌긴 했지만.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본 남한결이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남한결이 앉을 의자를 빼 놓은 나는 반대편 의자에 가 앉았다.
식탁 위를 살펴본 남한결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와 박혔다. 난 한 번 더 앉으란 눈짓을 했다.
“내가 대접한댔잖아.”
“시리얼을?”
“팬케이크는 되고 시리얼은 안 된다?”
“…됐다.”
말은 퉁명스러워도, 어차피 앉아서 먹어 줄 거 다 안다. 삼 초가 흐른 뒤, 예상했던 것처럼 남한결이 자리에 앉았다.
“스푼은 거기 뒀어.”
시리얼이 담긴 그릇 옆 수저를 집던 남한결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유명한 캐릭터의 얼굴이 달린 시리얼용 스푼이 남한결의 하얗고 긴 손가락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남한결이 설명을 바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뭐긴 뭐야, 사은품이지. 난 시리얼 한 입을 푹 떠 입에 넣으며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시리얼 사니까 사은품으로 끼워 주더라고.”
“…….”
“내 건 미니 마우스인데. 이게 더 좋으면 바꿔 줄까?”
내가 들고 있던 스푼을 남한결 쪽으로 가져가 바꿔 주려고 시늉하자 남한결이 질색을 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느라 조금 전까지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수저를 꼭 쥐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됐어, 놔둬.”
“엉.”
이런 거 부끄러워하는구나.
남한결에 대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 하나를 머릿속에 입력하며, 난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남한결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 어제 우리 싸움 날 뻔한 거 말려 주신 분 있잖아.”
“…김재경?”
“아, 성함이 김재경이셔?”
“어.”
“카페 사장님이신 거지?”
어제 사건이 더 커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팔 할이 남한결의 사장님 덕분이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는 순식간에 혼란스러운 현장으로 뛰어들어 남한결을 제 뒤로 숨기기부터 했다. 그러고는 김성욱의 앞을 막아섰다.
‘저희 직원이 오늘 첫날이라 실수를 한 모양인데… 저랑 말씀 나누시죠.’
날이 선 분위기에서는 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말투였는데, 이상하게도 물러 보이지는 않았다. 웃으면서도 김성욱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눈빛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게 된 남한결은 짜증 가득한 표정을 여전히 숨기지 못했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낮에 카페를 방문했을 때 스팀 머신 뒤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문을 받던 남한결이 중간중간 대화를 나누던, 머리꼭지만 보이던 사람.
“어.”
무뚝뚝하게 긍정한 남한결은 어느새 익숙하게 스푼을 놀리고 있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남한결은 주어진 질문에 대해서만 답변을 내놓는 경향이 있었다. 알아서 줄줄 뱉어 줄 거라 생각했던 정보들은 남한결의 입 너머에 꽁꽁 숨었다. 난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질문했다.
“어제 그 일 때문에 안 혼났어?”
어제부터 줄곧 묻고 싶었다. 퇴근 시간이 갑자기 늦어진 데다가, 나 때문에 혼나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돼서 잠도 안 자고 기다렸는데 잠깐 씻는 그사이에 남한결이 집에 들어왔다. 황급히 수건을 두르고 나갔을 때는, 남한결 대신 방문 닫히는 소리가 나를 반겼다.
문을 두드릴까 하다가 말았다. 안 그래도 피곤한 애를 더 피곤하게 하는 걸까 봐.
그렇게 생각해 놓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남한결 방문 앞에서 티브이 보는 척이나 하고 있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왜 혼나, 내가. 걔한테.”
남은 걱정돼서 잠까지 설쳤는데, 남한결은 콧방귀를 뀌는 것으로 간단히도 그 사실을 부정했다. 사장이 젊긴 했어도 우리랑 동갑일 리는 없는데 걔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는 게 퍽 친근해 보였다.
덕분에 갖고 있던 궁금증이 두 배로 늘어났다. 일단은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묻기로 했다.
“근데 너네 사장님이랑 김성욱은 무슨 관계야?”
“김성욱?”
“왜, 네가 어제 음료 쏟은 사람.”
“걔 이름이 김성욱이야?”
“어.”
“이름도 좆같네.”
어제도 느꼈지만 남한결은 은근히 욕을 잘하는 것 같다. 욕을 하기는커녕, 듣는 것도 싫어하게 생겼는데 의외였다. 청량하게 웃던 아홉 살의 남한결에게서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제 카페에서 김성욱을 집요하게 노려보던 남한결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던 얼굴은 내가 남한결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르긴 했다.
나도 모르게 또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남한결이 무뚝뚝하게 뭘 보냐고 물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그래서’라고 아까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종용했다.
잠깐 생각하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던 남한결이 관심 없다는 투로 답을 내놨다.
“뭐. 옛날에 같은 동아리 했었대.”
“동아리? 무슨 동아리?”
“몰라. 거기까진 관심 없어서 안 물어봤어.”
“…어? 잠시만, 너희 사장님도 우리 학교야?”
“다니면 큰일이지. 나이가 몇인데.”
“그럼?”
“졸업생.”
이제야 퍼즐들이 좀 맞춰지는 것도 같다.
남한결 카페 사장님을 당장이라도 메다꽂을 것 같이 소리를 지르던 김성욱이 ‘어, 선배님.’ 하며 갑자기 순한 양이 되던 모습이나, 의외로 별로 놀라지도 않은 모습으로 김성욱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성욱이었구나. 오랜만이라 못 알아봤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밖에 나가서 이야기할까?’라고 웃으며 묻던 카페 사장님의 얼굴 같은 것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온 건지, 밖에서 돌아온 김성욱은 ‘일단 오늘은 가라, 너네.’라는 말만 남기고 나가 버렸다. 나가면서 남한결이 서 있는 카운터 쪽을 흘기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전처럼 덤벼들려는 제스처는 하지 않았다. 졸지에 우리처럼 중간에 붕 떠버린다른 선배 하나가 황당한 얼굴로 김성욱을 쫓아 나가는 걸 보니 애초부터 예고된 일은 아닌 듯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오빠?’
정신을 차린 수진이가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지만, 나라고 해 줄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방금 남한결한테서 대충이나마 정황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된 거란 말이지….”
남한결에게 질문하느라 소홀했던 시리얼에 스푼을 박던 나는 불현듯 생각난 질문에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 보니 남은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앞의 것보다는 확실히 난이도가 있는 질문이었다.
큼큼. 짧게 헛기침을 한 나는 남한결의 눈치를 봤다.
물어봐도 되겠지? 우리 이제 친구 하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어제 남한결이 상관없냐는 질문에 내가 대답했으니까?
“너 그 사장님이랑 친해?”
“어.”
“그렇구나… 그럼…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그 사장님이랑….”
“…….”
“그렇고 그런….”
남한결이 휙 고개를 들었다. 곧장 뻗어 온 눈빛을 마주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뒤져, 진짜.”
“어, 그래….”
아닌가 보다.
알겠다고 미안하다고 꼬박 두 번을 말하고 나서야 남한결이 눈알 빠지게 날 노려보던 시선을 거뒀다. 어제 김성욱을 보던 살벌한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던 눈빛을 생각하며 난 남한결의 한층 거칠어진 수저질을 감상했다.
잘못했으면 오늘은 내가 음료 세례를 받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시리얼 박스 옆에 있는 우유를 옆으로 치우다 말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넌.”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 뭐?”
남한결이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덤덤한 말투였다.
“그 여자애랑 어떤 사이인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가, 문득 남한결이 ‘그 여자애’라고 칭할 정도면 어제 낮과 밤, 카페에서 내 옆에 있던 수진이밖에 없으리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해냈다.
“혹시 수진이 말하는 거야?”
“…….”
“에이, 그런 거 아냐. 수진이는 그냥 친한 동생이지.”
남한결한테까지 이런 질문을 받으니 여태껏 수진이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어 기분이 묘했다. 나를 대신하여 우리가 사귀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던 수진이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얼굴도 떠올리고 나니 피식 웃음이 흘렀다.
“수진이가 그 얘기 나올 때마다 진짜 질색하는데.”
“…….”
“그냥 친한 오빠로는 몰라도, 애인으로는 절대 나 같은 사람 사귀기 싫대. 너무 흘리고 다닌다고.”
“…….”
“애들이 그걸로 말장난도 했는데. <헨젤과 그레텔>이냐면서.”
‘형이 헨젤 해요, 제가 그레텔 해서 형이 흘린 빵 다 주워 먹을게요.’
하필 그 이야기가 나온 게 빵집이어서, 제 몫의 멜론 빵을 우걱우걱 해치우던 재균이가 그런 농담을 쳤었다. 누나만 셋인 집에서 막내로 자라서인지, 알게 모르게 애교가 몸에 밴 놈이 웃으며 장난을 치는 게 퍽 귀여웠던 기억도 난다.
아, 그러고 보니 재균이가 오늘 만나자고 했는데.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재균이의 메시지가 날 반겼다.
강재균:ㅎ ㄱㅇ 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