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 번도 그 애의 눈동자 색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너도 갈래?’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눈을 마주친 순간 세상이 폭설처럼 쏟아져 내렸는데. 난 겁부터 먹었고, 그러나 뒤로 물러서진 못했다. 와르르 무너져 내린 세상 속에서 이로빈이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내가 물러섰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면 난.
‘가서 내 생각날 때마다 꼭 이메일 보내. 알았지.’
나는.
‘엄마가 그러는데 서울이랑 여기랑 별로 안 멀대. 진짜야. 세 시간밖에 안 걸린댔어. 그때 기억나? 우리 4학년 때 현장 학습 갔을 때, 길 잃어버려서 되게 무서웠잖아. 근데 계속, 계속 걷다 보니까 애들도 보이고, 선생님도 보이고 그랬잖아. 그때 사실 나도 되게 무서웠다? 네 앞이라서 안 그런 척한 거지. 하여간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그때 있잖아. 시간 되게 많이 걸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시계 보니까 세 시간밖에 안 지나 있었어. 그러니까….’
‘…….’
‘울지 마, 남한결.’
‘…….’
‘우린 꼭 다시 만날 거니까. 알았지?’
아니, 그래도 널 좋아했겠지.
***
김재경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던 건 순전한 충동이었다. 이로빈을 다시 만난 첫날, 나는 오랜만에 만난 이로빈이 여전히 내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 데 도가 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고 동시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3분에 한 번씩 김재경을 흘끔거리는 아르바이트생이 곧 그 자리를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아르바이트해, 시급 더 쳐줄게.’
카페를 오픈할 때 선심 쓰듯 말한 김재경의 말도 한 박자 늦게야 떠올랐다. 돈은 안 급한데, 이로빈을 잊을 수 있는 무언가가 급했다. 이로빈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힘들 때 대피할 곳도 필요했다.
결론적으로는, 하나도 소용없었다.
“형 때문에 갈 수 있는 PC방이 두 개나 줄었어요. 이러다 나중에는 도서관 컴퓨터로 게임 하는 거 아니냐고요.”
“도서관 컴퓨터 잘 돌아가냐?”
“돌아가겠냐고요.”
“새끼, 까칠하네 오늘.”
도망가도 누군가가 꾸준히 쫓아온다면 소용이 없다. 특히 그 누군가가 이로빈일 경우에는.
목소리로 먼저 알아챘음에도 고개를 돌려 확인하기엔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다. 두 번째 손님의 계산을 끝내고서야 흘끔 고개를 돌려 확인한 줄에는 정말 이로빈이 서 있었다. 옆에 선 놈의 볼을 잡고는 장난스레 흔드는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누가 자신을 보든지 말든지 상관도 안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난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애써 돌려 포스기에 시선을 박았다. 앞에 선 고객의 말이 귀에서 웅웅거렸다.
“저희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초코라테 한 잔이랑, 초코라테….”
이로빈은 오늘도 초코라테를 시킬까?
존나 답이 없다. 난 집중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는 아메리카노와 초코라테라고 적혀 있는 화면을 연달아 클릭했다.
이제 이로빈이 카운터 앞에 서기까지 남은 손님은 겨우 한 명이었다. 듣고 싶지 않다 한들 둘의 대화가 계속 들려오기 충분한 거리였다는 말이기도 했다.
난 포스기에 더 고집스럽게 시선을 박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이수진한테 이를 거예요. 나 오늘 정말 심각성을 느꼈어요. 형은 진짜 좀 혼나야 해.”
“그레텔 이러기야?”
“아, 근데 형 진심. 번호는 왜 줘요? 잘 될 생각도 없으면서.“
집중하자, 남한결. 꼴사납게 굴지 말고.
“초코라테 한 잔이요.”
“네? 저 초코라테 말고 바닐라라테 시켰는데요.”
“…죄송합니다. 4,000원 계산해 드릴게요.”
이쯤 되니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 혀를 깨물고 싶은 걸 꾹 참고 계산을 마친 카드를 진동 벨에 얹어 앞의 고객에게 돌려줬다.
김재경한테 잠시 카운터를 넘기기라도 할까 싶어서 옆을 봤건만 그는 꼭 이럴 때만 커피 내리기에 열심이다. 시선을 느꼈는지 ‘왜?’ 돌아오는 입 모양에 앞을 눈짓했다.
앞을 확인한 김재경이 어깨를 으쓱한다.
“미안, 로빈훗이 나 싫어하잖아.”
“…….”
“오늘은 약간 날 싫어하는 얼굴을 견딜 수 있는 기분이 아니야.”
스팀 머신을 작동시키는 척 내 옆으로 와 속삭이는 소리에는 기가 찼다. 싫어할 만한 짓을 하니 싫어하지.
‘미쳤냐?’
‘아니, 난 그냥 겸사겸사 궁금하기도 하고, 좀 떠볼까 해서 물어본 건데.’
‘내가 형 그거 하지 말랬지.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기분 더럽다고.’
‘보호자 노릇 한 번 하려 했다가 쌍방으로 욕 처먹네. 나도 알아, 인마. 내가 과했던 거. 다음에 카페 오면 직접 사과할 거니까 표정 풀어.’
‘존나… 사과할 일을 왜 하냐고, 애초에. 짜증 나게.’
‘근데 로빈훗인가 뭔가 걔 성깔 있더라. 어디 가서 당하고 살진 않겠어.’
그날 이후로 김재경에게 이로빈은 로빈훗이 되어 버렸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파는 김재경에게 반응해 주면 오히려 참견을 부추기는 꼴이 되기에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로빈을 앞에 두고 있으니 그때 일이 괜히 신경 쓰여서 짜증 났다. 난 김재경한테 욕하는 것을 미루고 다시 포스기로 고개를 돌렸다.
“어, 우리 차례다.”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렸던 둘이 카운터로 성큼 다가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옆얼굴이 슬슬 따가웠다. 난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반짝이는 눈을 마주했다. 쓰고 있던 후드 모자까지 벗은 이로빈이 성큼 카운터 가까이 다가섰다.
“야. 너 오늘 아침 안 먹고 갔지.”
요새 이로빈 때문에 미치겠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내가 밥 먹었는지 여부를 체크한다는 거였다. 지금도 그랬다. 심각한 얼굴로 카운터 위에 팔을 얹으며 묻는 게 고작 내가 왜 아침을 안 먹었는지 여부라는 게 어이없었다.
그걸 굳이 이렇게 가깝게 붙어서 물어봐야 하는 이유는 뭔데.
노력은 내가 하기로 했는데 왜 쟤가 자꾸 엄한 데서 진 빼게 하는지 모르겠다. 난 황급히 포스기로 시선을 돌렸다.
“어. 수업 늦을 것 같아서.”
“늦었냐?”
“아니.”
“그럼 밥은?”
돌고 돌아 밥이다. 밥에 집착하는 이로빈의 질문이 이상하게 느껴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옆에 조용히 있던 놈도 이로빈을 툭 쳤다. 빼곡히 뒤로 선 줄을 눈짓하는 게 빨리 주문하자고 하는 듯한 눈치였다.
뒤를 확인한 이로빈이 몸을 일으켜 제자리에 똑바로 섰다. 잘된 일이었다. 난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이로빈 옆의 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 네.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 먹을 거고, 형은요? 뭐 먹는다고 했지?”
“나 바닐라라테랑… 저거. 샌드위치.”
이로빈의 손가락 끝이 유리창 안의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포스기 안의 ‘클럽 샌드위치’ 항목을 누르기 전 흘끔 이로빈의 얼굴을 확인했다.
배고픈가… 자기가 배고파서 나한테 계속 밥을 먹었냐고 물어본 건가 싶기도 하고.
진열창 안의 샌드위치의 크기를 대충이나마 가늠해 봤다. 간단히 먹기에는 괜찮은데, 한 끼 식사로는 애매해 보였다. 이로빈은 적게 먹는 편이 아니었다. 두 개는 먹어야 배가 찰 것 같았다. 두 개 줘 버릴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형, 방금 밥 먹어 놓고 또 무슨 샌드위치예요.”
어이없다는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고개가 홱 돌아갔다. 동시에 두 명의 시선을 받게 된 이로빈이 지갑을 꺼내다 말고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게 카드를 내밀었다. 별거 아니란 듯이 툭 붙인 말은 함께였다.
“내가 먹을 거 아닌데.”
“어? 그럼 누구.”
카드를 받으며 손이 스쳤다. 언제나처럼 그런 것 따위 신경도 안 쓰는 이로빈은 웃으며 옆에 선 놈의 말을 익숙하게 받아넘겼다.
“있어, 인마.”
손이 자꾸 멈칫했다. 결제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그 쉬운 행위를 하기가 힘들었다. 카드를 받은 내가 결제 대신 헛손질만 하는 게 둘의 눈에 안 띌 리가 없다. 차례대로 돌아온 시선에 난 입술을 깨물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야.”
“엉?”
“여기 샌드위치 맛없어.”
이로빈이 자신이 먹지도 않을 샌드위치를 누군가를 위해 사 준다는 게 싫다. 그게 친하게 지내는 것 같은 놈조차 모르는 ‘누군가’인 게 싫다.
그중 가장 싫은 건 나였다. ‘있다’는 말이 뜻하는 대상이 누구일지를 지금 이 순간부터 머리 터지게 생각할 나, 그게 누구인지 묻지도 못하면서 별 같지도 않은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질투를 하는 나.
슬쩍 보니 스팀 머신 앞에 선 김재경이 미쳤냐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샌드위치는 김재경이 카페를 운영하며 가장 공을 들인 메뉴 중 하나였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난 초조함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이로빈과 시선을 맞췄다. 미친 짓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도저히 이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먹지 말라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먹지 말라는 말은 못 하니까, 그렇게라도 말해야만 했다.
“…진짜 졸라 맛없나 봐요, 형.”
“…….”
“원래 알바생이 먹지 말라면 먹지 말아야 해요.”
이로빈한테 속닥거리는 놈의 말이 들렸다.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되는 말이니 못 들은 척 가만히 있었다. 이로빈이 곧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빼 주든가.”
샌드위치 메뉴는 처음부터 누르지 않았기에 빼기 위해 포스기를 누를 필요도 없었다. 계산을 끝낸 카드를 돌려받은 이로빈이 짧은 눈인사 후 곧 옆의 놈과 함께 사라졌다. 커피가 나오는 곳으로 가는 걸 보니 커피만 받고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손님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난 방금 일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내려고 노력하며 포스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로빈을 다시 본 건 몇 분이 지나서였다. 손님들 몇 명을 대하고 난 후 고개를 돌려 확인한 음료 픽업대에는 이로빈은커녕, 그 옆에 있던 놈의 얼굴도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갔으리라고 생각했다.
“챙겨 먹고 하라고.”
갑자기 이로빈이 다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금 이로빈이 내 앞에 내려놓은 비닐봉지에 적힌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지나가다 몇 번 본 브런치 카페의 이름이 필기체로 크게 적혀 있었다. 난 비닐봉지에서 시선을 올려 이로빈을 봤다.
뛰어온 모양인지 숨을 고르던 이로빈은 그 와중에도 눈이 마주친 날 향해 씩 웃었다.
“너네 카페 샌드위치는 맛없다며, 네가.”
“…….”
“야, 나 수업이라서 간다. 밤에 봐.”
깨달음은 늘 한 박자 늦다. 내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사실을 가까스로 이해했을 때에는, 이미 이로빈이 뒷모습을 보이며 카페를 나서고 있었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이로빈이 뛰기 시작했다. 방금 카페 안으로 뛰쳐 들어오던 순간보다는 덜한 속도로, 그러나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심장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크로스로 맨 가방이 이로빈의 허리께에서 통통 튀다가 이내 이로빈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
난 무기력하게 이로빈이 남긴 것들을 훑었다. 투명한 박스 안으로 보이는 샌드위치 네 조각, 냅킨, 포크 따위의 것들. 그리고 줍는 내가 비참해질 이로빈의 무책임한 다정함까지도.
문득 좀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걔 앞에서의 난 늘 그랬던 것 같다.
***
툭툭. 검지와 중지를 모아 책상을 두드리는 손이 보였고, 시선을 올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얼굴은 익숙한데 그 위로 덧그려진 표정은 낯설었다. 늘 여유 있어 보이는 인상을 만들던 미소까지 지운 채 어색하게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난 이어폰을 잡아 뺐다.
“바빠요?”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질문이 넘어왔다. 난 남자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카운터의 남한결을 확인하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무슨 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자가 냉큼 내 앞의 의자를 빼 앉았다.
“앉으란 말 안 할 것 같아서 그냥 내가 앉았어요.”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으며 덧붙이는 말이 뻔뻔했다. 어이없는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포크가 쑥 넘어왔다.
“이거 줄 테니까 표정 좀 풀어 주면 안 돼요?”
치즈 케이크를 조금 잘라서 콕 찍어 내미는 얼굴엔 어느새 그 특유의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난 포크를 받는 대신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제가 왜요.”
가만 보니 진짜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미루는 게 습관인 사람 같다. 어떻게 보면 나와는 반대였다. 난 저렇게 숨기는 데에는 재주도 없고 흥미도 없는 사람이니까.
숨길 생각 없이 나간 짜증에 남자가 날 빤히 본다. 한숨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웃음이 사라진 곤란한 얼굴을 보고는 난 남한결이 부르던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야… 사과하러 온 건데 그렇게 나 싫어하는 티 대놓고 내면 뻘쭘하니까?”
이름이 김재경이랬지. 우리보다는 네 살이 많고, 남한결과는 열일곱 때부터 알았고, 왜인지는 몰라도 나를 경계하던 사람. 그리고 웬만해서는 그대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내 반응을 보고서야 가면처럼 쓰고 있던 웃는 얼굴을 벗는 이.
그는 그래도 자신을 껄끄러워하는 티를 내는 사람과 눈을 마주칠 줄 알았다. 새삼 그가 우리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느끼며 나 역시 그와 눈을 맞췄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그날.”
“뭐가요.”
“남한결 이야기 그쪽한테 떠보듯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둘이 제대로 인사한 적도 없는데, 아는 척 끝장나게 하면서.”
“…….”
“생각해 보니 내가 과했어요. 기분 나빴을 만해요. 사과할게요.”
담백한 사과였다. 마주친 눈과 표정 모두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난 그제야 김재경과 이야기를 할 마음이 좀 생겼다. 사실 여기 올 때마다 신경이 좀 쓰이기도 했었고.
“알았어요.”
“…사과 받아 준다는 거예요?”
“네, 뭐. 쌤쌤?”
“…….”
“저도 좀 싸가지 없게 굴었으니까. 남한결 친한 형인 거 아는데도.”
손을 내밀자 김재경이 멈칫하다가 내 손을 잡았다. 얼떨결에 맞잡은 손을 내려보던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손을 내팽개치며 말했다.
“…포크 달라는 거였는데요.”
“…아, 알지. 알지.”
알긴 뭘 알아. 존나 어이없네.
민망한 표정을 순식간에 지운 김재경이 황급히 포크를 건넸다. 난 김재경이 내려놓은 접시 중 하나에 올라와 있는 샌드위치를 포크로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근데 이거 남한결이 맛없다고 한 건데.”
먹지 말라고 굳이 말려 주기까지 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남한결은 나보다 입이 짧지만, 순댓국처럼 향이 강하지만 않으면 음식을 심하게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걔가 맛없다고 하면 진짜 못 먹을 정도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도 일하는 곳의 음식인데.
남한결이 한 말을 전해 준 것뿐인데, 순간 김재경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이마에 핏줄이 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곧 김재경이 웃으며 접시를 한 번 더 내밀었다.
“그러지 말고 일단 먹어 봐요.”
“…….”
“안 그러면 나 억울해서 잠을 못 잘 것 같아.”
이를 악물고 말하는 듯한 건 착각이겠지.
카페가 커피 맛있으면 됐지, 샌드위치 맛없다고 억울할 것까지야 있나. 그러나 김재경의 얼굴이 간절해 보이기에 난 샌드위치 반쪽을 들어 입에 넣었다.
“어때요?”
솔직히 맛있었다. 난 반짝거리는 눈에 대답하기 전 카운터에 서 있는 남한결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이런 샌드위치도 맛없어하는 애한테 어제 내가 해 준 김치볶음밥은 고문이나 다름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김치와 볶음과 밥이 따로 놀고 있는 접시를 한참 내려다보다 사약이라도 받듯 결연하게 수저를 들던 얼굴이 떠올랐다.
포크로 밥을 한 번 떠먹고 오랫동안 그걸 씹던 남한결은 침착하게 입을 닦으며 말했었다.
‘소금 좀 넣고 김치 좀 더 넣고 밥을 좀 더 넣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차라리 그냥 맛없다고 말을 하지 그러냐….’
민망한 기억에 목덜미를 긁던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남한결의 사장님한테 답했다.
“뭐, 괜찮네요.”
“그럴 줄 알았어.”
만족스럽게 웃는 김재경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여유로움을 회복했다.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팔을 거는 모습이 얼핏 거만해도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꿈틀거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얼굴은 퍽 능글맞았다.
이 사람은 저러는 게 익숙한 사람이다. 한두 해 쌓여서 만든 가면이 아님은 진작에 눈치챘다. 그런 사람이 가면을 벗었다는 건 이 사람에게 있어 남한결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되는 걸까.
어쩐지 좀 다행이었다. 남한결의 주위에 이렇게 그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사과하는 거 보니까 생각했던 것처럼 재수 없는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남은 치즈 케이크를 입에 쑤셔 넣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곧 남한결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다. 금요일 아침부터 카페를 찾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이유를 기억해 낸 나는 일어나려다 말고 김재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왕 생각난 김에 할 말이 있어서였다.
요새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남한결을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남한결 밥 좀 잘 챙겨 주세요. 쟤 입 짧아서 뭐 안 먹이면 계속 굶잖아요.”
집에서 아침은 잘 챙겨 먹길래, 당연히 점심이랑 저녁도 잘 챙겨 먹는 줄 알았는데 저번에 이야기를 나누다 그게 아님을 알고 놀랐다.
야, 밥을 먹어야 사람이 일하지. 타박하듯 나간 내 말을 별말 없이 넘기던 남한결이 떠올랐다. 난 혀를 찼다.
내가 왜 어젯밤에 김치볶음밥을 했는데. 요리도 더럽게 못 하는 주제에.
내 요리 실력을 아는 가족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뒤로 넘어갈 거다.
“아,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말고, 방학 동안 학원 알바를 했다던 수진이가 투덜대며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난 김재경의 시선을 붙들고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주휴 수당? 그것도 꼭 챙겨 줘야 해요.”
남자가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길래, 자그마한 협박도 덧붙였다.
“제 친구의 이모의 친구의 아버지가 노동부 장관이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 정도면 남 아니니….”
남이야 남이지.
할 말 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장님에게서 시선을 돌려 남한결 쪽을 봤다. 마침 이쪽을 보고 있었던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난 남한결을 향해 손목의 시계를 가리켜 보았다. 남한결이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에 두른 앞치마를 푸는 게 보였다.
저번에도 본 것 같은 화려한 머리의 알바생이 카운터로 향하고, 남한결은 스태프 룸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가방을 들고 카운터 옆 쪽문을 여는 남한결을 보며, 난 마지막으로 남한결의 사장님을 향해 씩 웃었다.
“사장님이랑 제가 더 남인데요.”
그리고 남한결은 남이 아니지. 내 친구니까. 지금은 룸메이트까지 겸하고 있고.
내가 느끼기에도 선을 과하게 그었다 싶었는데, 알아챈 것처럼 김재경이 웃었다. 다가오던 남한결이 갑자기 뒤돌아 카운터 쪽으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뭐지? 나는 그 와중에 따가운 볼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김재경이 날 빤히 보고 있었다.
“저번에도 느꼈는데, 너 내가 알던 사람이랑 되게 많이 닮았다.”
“누구랑요?”
“있어.”
웬일로 안 웃는다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김재경 눈이 반달로 접혔다.
“어떤 개새끼 하나.”
개새끼?
카운터에서 몸을 틀어 이쪽으로 오기 시작한 남한결의 손에 못 보던 음료가 들려 있었다. 난 그걸 흘끔 보자마자 다시 김재경에게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찝찝함 때문이었다.
개새끼랑 내가 닮았다니. 설마 진짜 개는 아닐 거 아냐.
내 시선을 느낀 것처럼, 앞의 접시를 치우던 김재경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덤덤하게 덧붙였다.
“아… 내가 좋아했었거든. 걔도 남자였고.”
별거인 얘기를 되게 별것 아닌 것처럼 하네. 방금 들은 게 커밍아웃이라는 사실을 미처 다 깨닫기 전에, 남한결이 테이블 옆에 섰다. 김재경과 날 번갈아 보던 시선이 이내 김재경한테 꽂혔다.
“뭐야?”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김재경이 씩 웃으며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네 친구가 모르는 흑역사 얘기 좀 했지.”
“진짜야? 죽는다, 진짜.”
남한결의 시선이 싸늘해져도, 보란 듯이 빙글빙글 웃는 김재경은 아까 보았던 표정을 감쪽같이 감추고 있었다. 시선 처리나 말투 같은 것을 보니 둘에게는 이런 식의 말다툼이 꽤 익숙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묘해졌다.
김재경의 얼굴에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던 남한결이 나를 봤다. 내 얼굴을 살피는 시선이 마치 김재경한테서 자신의 흑역사를 들었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에, 난 묘한 기분을 털어 내고 남한결의 어깨를 툭 쳤다.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앞으로는 내가 올 때마다 쿠폰 세 개씩이나 찍어 주신다고 하네. 자주 와 줘서 고맙다고.”
‘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는 김재경을 향해서 웃어 보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씁쓸해 보이는 표정을 짓게 만든 개새끼를 나랑 닮았다고 하다니. 복수다.
“…저기요, 손님.”
“손님이라뇨. 방금까지 편하게 개새끼라 불러 놓으시고는.”
“야, 그건!”
“감사합니다. 제 후배가 여기 쿠폰 모으는데, 모아서 줄 수 있겠어요. 너 참 좋은 사장님을 뒀다, 남한결.”
남한결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길래, 웃으며 가자는 눈짓을 했다. 마지막으로 김재경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일 쿠폰 찍으러 올 때 또 뵐게요.”
“가만히 보니 로빈훗이 아니라 순 도적이다, 너.”
헛웃음을 치던 김재경도 결국 웃었다. 돌아온 말장난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언제 적 로빈훗이야. 학창 시절에나 몇 번 들어 본 별명에 어깨를 으쓱한 난 남한결의 등을 밀며 대꾸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도적은 왕자님 훔쳐서 이만 갑니다.”
멈칫한 남한결이 걷다 말고 돌아봤다. 난 인심 썼다는 듯 덧붙였다.
“왕자 싫으면 공주 할래?”
남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카페 문을 열고 앞장섰다. 그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근데 로빈훗이 공주를 만나긴 하나? 헷갈리네.
카페를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한결이 손에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잔을 내게 건넸다.
“이거.”
“내 거야?”
“어.”
문득 아까 남한결이 카운터로 돌아가 무언가를 가져오던 게 떠올랐다. 이걸 가져오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테이크아웃 잔을 받아 든 나는 혹시 몰라 잔을 살펴봤지만 아까 매장에서 받아 들었던 잔과 큰 차이가 없었다. 남한결이 별 이유 없이 내게 커피를 무료로 줬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얘는 내가 진짜 커피만 먹으러 카페에 가는 줄 아나. 지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가는 건데.
“왜?”
“아냐.”
그래도 카페에서 일하는 룸메이트 덕분에 이번 주 내내 호강한다.
요 며칠 소파 옆 테이블 위에 꾸준히 올라와 있던 간식들이 떠올랐다. 복숭아 모양의 열쇠고리 옆에 놓인 것들은 쿠키일 때도, 샌드위치일 때도 있었다. 처음엔 자신이 먹기 위해 가지고 온 줄 알았는데 하루가 지나도 그대로기에 물어봤더니 ‘너 먹든가’라는 무뚝뚝한 답변이 돌아왔던 걸 떠올린 나는 커피잔을 받아 들며 남한결을 향해 웃어 보였다.
“고맙다, 야. 잘 먹을게.”
“…어.”
내 웃는 얼굴을 보는 둥 마는 둥 시선을 돌려 걸음의 속도까지 높이는 놈이 큰 의미를 가지고 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
“…….”
그러고 보니 남한결과 같이 학교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집에서 보거나, 카페에서 보는 게 다였는데. 저번 주 금요일에 같이 수업을 들은 것 외에는 잘 마주치지도 못했다.
아마 전공 수업을 듣는 건물이 달라서겠지. 남한결이 주로 다닐 미대 건물은 내가 일주일 중 네 번은 들러야 하는 사범대 건물과 꽤 거리가 있었다. 거의 끝과 끝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우리가 교양을 듣는 곳은 그 두 건물의 사이에 있었다. 말이 사이에 위치한 거지, 꽤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남한결과 내가 카페에서 시간을 넉넉히 두고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남한결이 준 음료를 한입 마시다 말고 옆을 돌아봤다. 목 너머로 넘어가는 달콤한 초코 향과 함께, 남한결의 질문이 넘어왔다.
“김재경이 너한테 진짜 개새끼라 했어?”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한결을 발견했다. 생각해 보니 상황을 잘 모르는 남한결이라면 걱정될 만도 했다.
뭐라 대답해야 할까. 난 잠시 고민하다 음료를 한 번 더 들이켰다.
‘아, 내가 좋아했었거든. 걔도 남자였고.’
예상치 못한 커밍아웃이 오늘로 벌써 두 번째였다. 남한결도 그랬고, 남한결과 열일곱 때부터 알아 왔다던 김재경도 그랬다. 시간도, 공간도 달랐지만 눈빛은 얼추 비슷했던 것도 같다. 딱히 내게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던 표정들.
특히 그 말을 하던 순간, 김재경은 정말 나한테서 누군가를 겹쳐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마 그 개새끼라는 사람이겠지. 남자고, 김재경이 좋아했고, 나랑 닮았다는.
나는 대답하는 것 대신 남한결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너는 그 형이랑 어떻게 알게 된 거야?”
“…….”
“둘이 열일곱 때 만났다며. 들었어.”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남한결의 걸음이 좀 느려졌다. 내게로 힐끔 닿아 오는 시선도 느껴졌다. 그러나 시선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남한결이 고개를 돌렸다.
“그냥.”
“그냥?”
“…힘들 때 김재경이 도와줬어.”
“…….”
“많이.”
남한결이 곱씹듯 덧붙인 마지막 말은 유독 크게 들렸다. 남한결이 힘들었을 때. 그러니까 나와 남한결 사이가 벌어졌던 시간에 있었던 일일 터다. 난 남한결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고마운 분이네.”
남한결 입을 통해 들으니 새삼 둘이 함께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까 들은 김재경의 목소리가 한 번 더 귓가에 맴돌았다.
‘있어.’
‘어떤 개새끼 하나.’
열일곱 살부터 알아 온 사이라면 남한결도 그 개새끼가 누구인지 알지도 몰랐다.
“걔한테는 내가 이런 말 했다고 하지 마. 엄청 우쭐대.”
황급히 말을 덧붙이는 남한결은 진짜 김재경이 그럴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난 대답 대신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으니, 내가 답을 해 줄 차례였다.
“내가 옛날에 좋아하던 남자랑 닮았다고 하시던데.”
“…….”
“그 남자를 개새끼라고 부르시더라고. 나한테 개새끼라 한 건 아니었어. 그건 그냥 내가 장난친 거야.”
남한결은 대답이 없었다. 딱히 대답이 돌아올 만한 답이 아니었기에 나도 말없이 걸었다.
금요일, 오후 세 시에 가까운 시간의 학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까 비가 왔기에 더 그랬다. 보행로 옆에 쭉 깔린 잔디는 아직도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남한결과 내가 거의 전세를 낸 것 같은 보행로를 걷던 나는 문득 발밑에 무언가가 걸린 것을 느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른쪽 운동화의 끈이 풀려서 걸음을 뗄 때마다 발을 괴롭히고 있었다.
또 시작이네. 그러고 보니 유독 이 운동화를 신을 때마다 말썽이다.
“…잠깐 짐 들어 줘?”
덩달아 걸음을 멈춘 남한결이 아래를 보고는 물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내 양손에 물건이 들려 있긴 했다. 남한결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패드다 전공 책이다 뭐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 더 짐이 많은 것 같다. 대체 나 줄 커피는 어떻게 들고 온 건지 의아할 정도로.
잠시 고민하던 난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됐어. 강의실 가서 묶지 뭐.”
축축한 바닥에 괜히 주저앉아서 묶기도 찝찝하고. 어차피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강의실이 있는 건물이 나왔다.
“뭐 해? 가자.”
남한결의 걸음 소리가 안 들려서 뒤를 돌아봐야 했다. 남한결이 어딘가 석연찮은 얼굴로 가만히 내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니 이미 젖은 흙으로 더럽혀진 내 운동화가 보였다.
“어! 야! 너 바지!”
말릴 틈조차 없었다.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음을 옮긴 남한결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채 앉았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라 남한결의 어깨를 부여잡았지만 발이 휙 앞으로 당겨지기만 했다.
내 발을 제대로 고정해 놓은 남한결이 양쪽 끈 길이를 동일하게 맞추고 기본 매듭으로 한 번 묶었다.
“이러다 또 넘어지려고.”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핀잔까지 던지니까 나도 모르게 멍해졌다. 뭐? 묻는 말에도 남한결은 묵묵부답이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운동화 끈 사이를 일정한 질서로 넘나들었다. 아래에 둔 끈으로 고리를 만들어 고정한 후, 위쪽 끈으로 아래 끈을 앞에서 뒤로 한 바퀴 감싸 매듭을 짓는 행위가 가지런했다.
민망함에 발을 오므리려던 나는 멈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안 닮았어.”
“어?”
“그 개새끼랑 너. 하나도 안 닮았다고.”
진작 넘어갔다고 생각한 이야기인데, 남한결한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감싼 운동화 끈을 고리 뒤의 틈 사이로 넣고 리본 묶듯 양 끝을 잡아당겨 모양을 잡은 남한결이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여전히 말하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잘빠진 뒤통수만 보였다.
“널 몰라서 하는 이야기야. 김재경이.”
“…….”
“넌 누구한테든 그런 취급 받은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어.”
조용하고도 단호한 목소리였다. 난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남한결이 하는 양을 지켜봐야만 했다. 갈 곳 잃은 시선은 남한결이 내게 무방비하게 드러낸 목덜미에 멎었다. 오늘도 남한결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연하늘색 셔츠 사이로 보이는 목이 새하얬다.
‘이러면 넘어지잖아.’
어?
“됐다.”
발이 단단하게 고정된 느낌이 든 것과 동시에 남한결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내 신발 끈을 묶어 주기 위해 옆에 내려놓았던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다. 축축한 바닥에 팽개쳐져 있던 가방과 접이식 우산, 그리고 전공 책 같은 것들을 주워 툭툭 터는 얼굴은 그 어떤 거리낌조차 없어 보여서, 이상하게도 말문이 막혔다.
“가자. 시간 다 됐네.”
“…어? 어.”
이번에는 남한결이 먼저였다. 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등을 보던 나는 한 박자 늦게야 그 뒤를 따라 걸음을 뗄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 봐. 내가 묶어 줄게.’
여전히 귀에서는 누구 것인지 모를 음성이 울리고 있었다. 다정하고 어린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
‘으아아아아앙-!’
“…….”
“…….”
이제는 익숙한 미키마우스 수저를 들던 남한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런데도 움직이진 않는 걸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눈치 게임을 하듯 서로 바라보길 잠시,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차례야.”
“네 차례….”
공교롭게도 오디오가 맞물렸다.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남한결을 보니 내 얼굴에도 비슷한 표정이 걸려 있으리란 건 안 물어봐도 비디오였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지. 난 수저를 내려놓자마자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밥 줬어.”
“트림은 내가 시켰잖아.”
눈썹을 한 번 꿈틀거린 남한결에게서 곧장 반박이 넘어왔다. 질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어쭈. 난 뻑뻑한 눈을 감았다 뜨며 남한결과 눈을 맞췄다.
“기저귀는? 내가 카드 꽂았잖아.”
반박할 말이 없을 남한결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겼다. 내심 우쭐해 수저를 다시 들려는데, 남한결의 부름이 식탁 위를 건너왔다.
“야.”
고개를 들자마자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의 나처럼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댄 남한결은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게 더 불안했다. 이상하게 쟤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내가 말리더라. 그것도 이 식탁에서는 유독 그랬던 것 같다.
불안한 느낌을 입증하듯, 남한결이 조용하고도 간결하게 핵심을 찔렀다.
“이 수업 누가 듣자 했냐.”
“…내가 건방졌다.”
기권패였다. 흰 수건 대신 수저를 얌전히 내려놓은 나는 곧장 내 방으로 향했다. 아까 침대에 내려놓았던 아기 인형이 기계음을 뱉고 있었다. 사람 소리로 프로그래밍해 놨다더니 들을수록 생생했다. 난 얼른 인형을 안아 어깨에 기대 놓은 채로 옆에 있는 카드 더미를 들었다. 하얀 팻말이 여러 개 달린 카드 더미에서 인형이 우는 이유를 찾아 카드를 꽂아야만 지금 이 울음이 멈출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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