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누가 보면 복분자주를 팔러 온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눈을 빛내던 이로빈의 말은 틀렸다. 숙취가 없긴 뭐가 없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있느라 오전이 다 지나갔다. 수업 내용은 귀에 닿지도 못했다. 차마 이 상태로 카페에서 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김재경한테 알바 뺀다는 문자를 보냈더니 아주 지랄을 한다고 답변이 왔다. 내가 봐도 지랄을 한 건 맞았기에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주말에 오전 오후 다 뛰겠다고, 미안하다고 답을 보내고는 핸드폰을 껐다.
수업 전날에 술을 그렇게 먹은 것부터 시작해서, 혼자 듣는 강의에서 필기는커녕 메슥거리는 속을 달랜다고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지랄 맞지 뭐.
다 필요 없으니 잠이나 좀 자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신발을 다 벗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잡아챘다.
“…왔냐.”
부엌의 식탁에 늘어져 있는 이로빈은 검은색 후드의 모자를 둘러쓴 상태였는데, 얼핏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전 수업을 듣던 내 모습이 사람들한테 저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누가 봐도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서 이로빈이 내 쪽을 향해 손을 두어 번 달랑달랑 흔들었다.
저런 얼굴로 저렇게 인사를 할 장난기가 남아 있다는 걸 신기해해야 할지.
대놓고 비밀을 파헤치겠다는 것처럼 구는 이로빈에게 휘말려 복분자주의 반 이상을 해치운 나야 그렇다 쳐도, 어제 마지막으로 본 이로빈은 이렇게까지 숙취에 시달릴 정도로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으어….”
어찌 됐든 테이블 위에 엎드리며 끙끙대는 소리를 내는 게 장난같이 보이진 않았다. 난 결국 한숨을 쉬면서도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메슥거리는 속은 무시했다. 어차피 이로빈이 이러고 있는 걸 본 이상 방에 들어가도 잠을 자긴 그른 걸 알아서였다.
일단은 거슬리는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난 이로빈이 열어 놓은 게 분명한 부엌 옆 큰 창문을 닫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로빈은 여전히 끙끙대고 있었다. 난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등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너 어제 나랑 술 먹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않냐.”
어젯밤, 소파에서 이로빈과 꽤 눈을 길게 마주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몸이 스칠까 봐 두려웠던 나와 달리 이로빈은 내내 멀쩡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속도부터 시작해서, 늘 하는 것처럼 장난기가 탑재된 말투까지도 그랬다. 겁 없이 남의 머리를 만지작대질 않나, 쓰는 샴푸가 뭐냐고 묻질 않나.
어쩌면 그게 좀 억울하게 느껴져서 게이니 뭐니 혼자 주절댔던 것도 같다. 더 있다가는 엄한 소리까지 할까 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다방면으로 날 괴롭히던 이로빈은 이렇게까지 취할 이유가 없었다. 같이 술 먹은 경험은 겨우 두 번이지만 어제 먹은 맥주 세 캔과 복분자주 몇 잔은 이로빈이 취할 정도의 술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쉽게 알 수 있었다.
내 추측을 뒷받침하듯 이로빈의 어깨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난 금방 답을 눈치챌 수 있었다.
“설마 그러고 또 혼자 술을 처먹었냐.”
“…….”
“심지어 술도 없었잖아.”
“편의점….”
할 말이 없어 대신 창문을 닫았다. 아직 이른 시간인 탓인지, 햇빛이 창을 뚫고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하필 그 햇빛이 집중된 곳이 이로빈이 머리를 대고 있는 식탁 위라서 괜히 신경이 쓰였다. 커튼을 달아 둘 걸 그랬다.
그래도 다행인 건 후드티 모자를 꽁꽁 뒤집어쓰고 있는 이로빈이 그런 햇빛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는 거다. 난 잠시 망설이다 걸음을 뗐다. 이로빈 건너편으로 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후드 바깥으로 갈색 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로빈이라면 만지고도 남았을 터지만 난 언제나처럼 엄두도 못 냈다. 머리카락을 만지면, 그다음에는 다른 걸 만지고 싶지 않을까. 어제도 이마를 부딪치는 그 작은 행위를 하려고 숨을 10초나 참았다.
허탈한 웃음을 숨기며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숙취는 어느새 날아가고 그보다 지독한 이로빈이 내 머릿속을 박박 긁어 대고 있었다.
그 사실만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다. 난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괜히 말을 돌렸다.
“수업은 없냐?”
“…엉.”
“구라 까지 말고.”
“자체 휴강이라고… 선진국에서는 이미 유명한 시스템인데… 잘 모르나 봐…?”
가만 보면 진짜 입만 살아서.
이로빈이 슬쩍 고개를 들어서 날 봤다. 아까만 해도 축 처져 있던 얼굴에 그새 장난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보니 자신이 뱉은 농담이 퍽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릴 수 있는 여유는 그게 끝인지 이로빈이 테이블에 다시 머리를 박았다. 억울함이 가득 담긴 투정이 식탁을 넘어왔다.
“그렇게 답 없다는 눈빛으로 보지 마라… 이게 누구 때문인데….”
누가 들으면 이로빈이 나 때문에 그렇게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인 줄 알겠다. 순간 쿵 내려앉을 뻔한 심장을 익숙하게 달랜 나는 이로빈의 머리꼭지를 응시했다.
“저 혼자만 비밀 있다 이거지… 사람 섭섭하게….”
봐봐. 내가 술을 먹는 이유와 쟤가 술을 먹는 이유는 다를 수밖에 없다. 억울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딘 기대를 품었는데도 난 왜 상처를 받는 걸까. 시선을 돌린 나는, 동시에 이로빈의 손에 쥐어진 펜을 발견했다.
“근데 펜은 왜 들고 있냐.”
“과제하려고….”
식탁에 엎드려서 신음을 뱉는 게 누가 봐도 과제를 하는 것 같진 않았으나, 펜까지 쥐고 그렇게 주장하니 그러려니 했다. 그러고 보니 이로빈이 얼굴을 뭉개고 있는 종이가 얼핏 익숙했다.
‘현대 사회와 가정 - 관찰 일지 day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