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31)

비는 안 왔는데, 비가 올 거라고 경고를 해 준 사람만 생각나는 밤이었다.

다행인 건 이로빈이 양반은 못 된다는 사실이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그럼 베개만이라도 줘!”

소란스러워진 밖에 문을 열자마자 자신의 방 앞에서 거의 애원하는 이로빈을 발견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더니, 곧 하얀 베개 하나가 나왔다. 그 틈으로 보인 얼굴은 아까 본 이로빈의 동생임이 분명했다.

상황 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이로빈은 오늘 동생한테 방을 내줄 모양인 듯했다.

“사춘기 한번 지독하다 지독해….”

투덜대며 베개를 주워드는 이로빈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깜박이길 잠시, 이로빈이 눈을 휘며 웃었다. 제 딴에는 반가움을 표시하려 그런 모양인데, 자세히 보니 목이며 얼굴이며 죄다 새빨갰다.

“이게 누구야. 산업디자인과의 아이돌 아냐.”

“…너 동생 데리고 술 마셨냐.”

“야, 날 어떻게 보는 거야.”

“…….”

“당연히 울 햄스터는 부엌에 맡기고 마셨지.”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말을 잃은 나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이로빈은 핸드폰까지 내밀어 보여 주기 바빴다.

“너 또 그렇게 자랑스러우면 부모님한테 찍어 보내라 할 거지?”

“…….”

“봐봐. 네가 그럴 줄 알고 엄마 아빠한테 인증 샷도 찍어 보냈어.”

“…어쩌라고.”

“내가 다 알고 있다고, 너 어떻게 행동할지.”

알긴 뭘 알아. 내가 지금 그 목덜미를 보고 뭘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 차마 그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난 언제나처럼 허탈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씻기나 해.”

“술 냄새 많이 나냐?”

“어.”

이로빈이 혼자 술을 먹진 않았을 건 뻔했지만, 정체도 모르는 향수 냄새가 뒤섞여 나는 건 좀 견디기가 힘들었다. 향수 냄새가 이렇게 옮아 오려면 어느 정도 붙어 있어야 하는 걸까. 주점에서 마신 걸까. 네가 맨날 카페에 같이 오는 그 후배 둘은 이렇게까지 강한 향수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가끔은 ‘내가 미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짧은 시간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마는 내가. 그래서 그걸 알아내면 어떡할 건데.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할 거면서.

난 이로빈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선사한 패배감을 들이마시며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익숙하기도 하고.

“아씨. 로운이도 난리더니 진짜 냄새 많이 나긴 하나 보네.”

“…….”

“알았어. 씻으면 되잖아, 씻으면.”

이로빈이 투덜대며 베개를 소파 위로 던졌다. 몸을 트는 방향을 보니 바로 씻을 모양이었다. 소파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있던 베개를 보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소파에서 자게?”

“엉. 로운이한테 방 뺏겼어.”

허리 아플 것 같은데.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한 걱정을 삼킬 때였다.

“야.”

돌아보니 진작 화장실에 들어간 줄 알았던 이로빈이 문가에 서 있었다. 윗옷을 벗다 말고 갑자기 뛰쳐나왔는지, 방금까지만 해도 얌전했던 머리가 온통 난리였다. 앞머리가 뻗쳐 있다는 것도 모르는 얼굴로 이로빈이 씩 웃었다. 표정을 보니 내 앞에서 벗으면 안 된다는 걸 기억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듯했다.

“받아.”

멍하니 그 얼굴을 보던 나는, 한 박자 늦게 방금 이로빈이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는 걸 깨달았다.

“자, 하나.”

반사적으로 물건은 잡았지만, 키득댄 이로빈이 계속 하나씩 물건을 던졌기에 그게 뭔지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받아 내기에 바빴다.

셋, 넷, 다섯….

공을 받는 것 같은 자세로 내가 마지막 물건을 잡고 나서야 이로빈이 설명을 해 줄 생각인지 내 얼굴을 보며 과장되게 헛기침했다. 생색이라도 내는 것처럼.

“형이 편의점 갔다가 네 생각이 나서 샀다.”

“…….”

“특별한 거니까 누구 주지 말고 혼자 다 먹어, 알았지.”

이로빈이 제 딴에는 늠름한 형같이 꾸며 낸 표정을 지었다. 아까 천막에서 여러 번 본 모습이기도 했다. 장난을 치는 게 뻔하니 받아쳐 줘야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난 멍청하게 내 손에 들어와 있는 다섯 개의 껌들을 내려다봤다.

“아, 은영이까지는 괜찮아. 그건 봐줄게.”

쾅. 드디어 화장실 문이 닫혔다. 이로빈은 사라졌는데, 난 오히려 고장 난 것처럼 멈춰 있었다. 방금 사람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는 것도 모르는 이로빈이 무책임하게 던지고 간 것들을 내려다보며.

노랑, 초록, 파랑, 하양, 그리고 빨강.

내가 네 얼굴에 그린 그림에서마저 구석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쓸데없는 하트를 연상시키는 색에 시선이 멎었다. 난 손끝에 힘을 줘 껌을 쥐어 보다 말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숨기지 못하고 나간 유치한 질투까지 기억해서 편의점에서 이걸 사 들고 온 것도, 얼굴이라고는 30분 본 게 다인 내 동기한테 그걸 나눠 줘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너무나도 너다워서.

이길 생각도 없었는데, 또 지고 말았다. 겨우 껌 따위에. 이게 뭐라고.

“…….”

결국 먹지도 못할 거면서.

***

03:04. 시계를 확인하고 방에서 나왔다. 거실로부터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에서부터 예상은 했지만, 완전히 곯아떨어진 이로빈은 내가 다가서는 것도, 스탠드의 불을 켜는 것도 모르고 자기 바빴다.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던 나는 이로빈의 볼에 남은 얼룩덜룩한 물감의 잔해를 발견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 이로빈이라면 얼룩이 제대로 지워졌건 말건 신경도 안 쓰고 이렇게 자고 있을 줄.

“…….”

그리고 이로빈이 그럴까 봐 잠도 못 잘 나도.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

깨우게 될까 봐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저 얼굴 그대로 잠들게 둘 수는 없었다. 몸에 좋은 물감도 아니고.

나는 방에서 들고나온 솜을 이로빈의 볼에 조심히 얹었다. 손에 묻은 물감을 지우라며 배은영이 챙겨 준 걸 안 버리고 들고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솜 위로 손가락을 얹어 살살 문지르자 얼룩들이 점차 희미해지고, 하얀 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동조차 없던 이로빈이 작게 뒤척였다.

“으음….”

다행히 소파 쪽으로 몸을 튼 탓에, 소파 바로 앞에 주저앉아 있는 나는 훨씬 작업하기 쉬웠다. 난 이로빈이 살짝 벌린 입 사이로 희미한 치약 향이 풍기는 걸 애써 무시하고는, 고집스럽게 볼에 시선을 박았다.

덕분에 순식간에 볼의 얼룩을 반이나 지울 수 있었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손은 마지막으로 남은 희미한 얼룩 앞에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

다른 큰 얼룩들은 잘 지워 놓고는, 괜히 이 티 나지도 않는 얼룩 앞에서 망설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 뭘 그렸는지 알고 있어서.

장미의 줄기 부분에 가시인 것처럼 그려진 하트는 볼로 눈을 가까이 해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니 이로빈은 몰랐을 거다. 그리고 아마… 평생 모르겠지.

근데 난 네가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내가 네 볼에 남긴 작은 흔적을 눈치챌 정도로 네게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되니까. 네가 하트를 그려 달랬는데 이상한 걸 그려 놨다고 다른 사람들한테 투덜거린대도, 그 말에 네 볼을 빤히 보며 그게 아님을 알아챌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너무 큰 소망이겠지. 겨우 그 작은 하트 하나 그리려고 땀이 차는 손을 말아 쥐어야 했던 사람이 갖기에는.

“이로빈.”

네 속눈썹 개수를 다 세어 보고서야 널 부를 수 있었다. 네가 듣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서야 나간 부름은 볼품이 없었다.

김재경이 언젠가 그랬는데. 좋아하는 것 자체가 죄책감을 일으키는 상대를 만나면 포기해야 한다고.

그 말을 들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잠든 널 보고 있으니 어떤 의미인지 알 것도 같다.

“…미안.”

네가 바라는 모습의 친구라면, 그림에 하트가 꼭꼭 숨겨져 있다는 걸 알 정도로 네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길 응원해야 하는데.

“…….”

그 일이 나한테는 너무 어려워. 가끔은 죽고 싶을 정도로.

***

방문을 열자마자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소파에서 이불을 얼굴까지 올려 덮고 자는 이로빈이 낸 소리가 아닌 건 분명했다.

난 잠시 생각하다 걸음을 옮겼다. 부엌에는 집주인 둘 대신 큰 소리를 낸 범인이 서 있었다.

“…….”

“…….”

또 누가 있겠냐마는, 이로빈 동생이었다.

어제 이로빈이랑 같이 다니는 모습을 봤음에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얼굴이 못내 낯설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이로빈의 옷자락 끝을 꼭 잡은 어린아이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훌쩍 큰 이로빈의 동생은 이제 형의 옷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술 냄새 풍기는 형을 방 밖으로 쫓아내고,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형을 깨우는 대신 부엌을 어슬렁거렸다. 뒤를 돌아봤지만, 소파에 있는 이로빈은 꿈쩍도 안 했다. 보아하니 보모 짓은 내가 해야 할 모양이다. 난 한숨을 쉬며 이로빈의 동생과 눈을 맞췄다.

“앉아 있어.”

돌아보는 얼굴이 경계심에 젖어 있었다. 이로빈이 왜 사춘기라는지 알만했다. 일단 무조건 의심하는 듯한 눈빛은 어제 천막에서 봤을 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난 식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밥 줄 테니까 앉아 있으라고.”

경계심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도 말없이 의자를 빼 앉는 걸 보니 정말 배고파서 아침부터 찬장이란 찬장은 다 열어 본 모양이었다.

난 이로빈이 좋아하는 시리얼을 꺼내 식탁 위로 밀어 주고는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며칠 전에 먹었던 팬케이크 반죽을 냉장고에 넣어 뒀던 게 생각났다. 별로 어렵지 않게 비닐봉지로 덮어 둔 반죽을 찾았다.

한 사람당 두 개 정도 구우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뒤에서 시리얼 상자를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어도 빈 박스인데, 미련을 못 버리겠는지 한참이나 더 그 소리가 이어졌다. 난 망설임 없이 남은 반죽을 다 프라이팬 위에 부었다.

난 이로빈의 동생 앞으로 팬케이크가 수북이 쌓인 접시를 밀어 주며 생각했다. 애를 키우는 기분이 이런 걸까. 뭐 그래도, 이로빈이 윌슨이라고 부르던 인형보다는 나았다. 무엇보다 말이 통했다.

“…이건 밥 아닌데.”

아쉬운 표정으로 팬케이크를 쿡 찌르는 얼굴을 보니 방금 했던 말을 취소하고 싶어졌다. 적어도 그 인형은 음식 투정은 안 했다.

“먹지 마, 그럼.”

손을 뻗어 접시를 가져오려 했지만, 뺏기지 않으려 접시를 꽉 붙들고 있는 손 때문에 불가능했다.

“안 먹는다고는 안 했는데요.”

형제면 뻔뻔한 것도 닮는 걸까. 내가 어이없어하든 말든, 내가 또 뺏을까 경계하는 눈빛으로 접시를 쥔 채 팬케이크를 우물대며 순식간에 반을 비웠다. 밥이 아니라고 투덜댈 때는 언제고.

결국엔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 엄청 먹는다, 진짜.”

누가 이로빈 동생 아니랄까 봐.

이렇게 자세히 보니 얼굴 곳곳이 이로빈과 닮았다. 특히 눈이. 그러고 보니 이로빈 가족들은 다 저런 눈을 가졌다. 따뜻하고, 다정하고, 결국엔 모든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눈. 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버릇처럼 시선이 멎은 곳은 거실 위 소파에 있는 이로빈이었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하얀 이불을 보니 여전히 잘 자는 것 같았다.

심상치 않은 술 냄새에서부터 눈치는 챘지만, 술을 많이 먹긴 한 모양이었다. 이로빈은 술을 좋아하긴 해도 평일에 이유 없이 술을 마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예뻐 죽는 동생까지 부엌에 맡기고.

잠시 망설였지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이 튀어 나갔다.

“왜 저렇게 마셨냐. 너네 형.”

부엌에 맡겼다 뭐다 했지만, 이로빈과 함께 집에 왔으니 대충은 상황을 알 듯 해서 물었다. 대답 대신 이로빈과 똑 닮은 눈이 날 훑었다. 습관과 같은 표정 관리를 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형제라서인지, 이로빈이나 이로빈 동생이나 허술한 가면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어제 어떤 형들이 시비 걸어서요. 눈썹에 귀… 피어싱한 형이랑 주택 청약 든 누나랑 우리 형이랑 못생긴 형들이랑 싸웠어요.”

얼핏 들어도 두 문장 안에 설명이 끝날 이야기는 아닌데, 대수롭잖게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팬케이크를 입에 넣는 얼굴이 평온하기만 했다. 마치 이런 일이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그나저나 시비를 걸 사람이라면, 저번의 그 새끼 같은 놈들인 걸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별 같잖은 짓을 했을 게 뻔했다. 이로빈은 웬만한 일로는 싸우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우리 형이 이겼어요.”

가만히 소파 쪽을 바라보는 내 얼굴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이로빈의 동생이 답지 않게 친절하게 덧붙였다.

“…알아.”

당연히 이겼겠지. 네 형이 진심으로 달려들면 누굴 못 이기겠냐.

난 또 나만 알고, 이로빈은 모르는 기억 속의 수많은 필름을 더듬었다. 씨근덕거리며 날 제 뒤로 숨기던 이로빈이 등장하는, 필름이 닳을 정도로 본 장면을 떠올렸다.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놈은 제가 먼저 내 코피를 터트린 것도 잊은 채로 방금 이로빈이 절 밀쳐 넘어뜨렸다는 사실에 엉엉 울기 바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로빈은 나부터 돌아봤다. 네 방 이불에서 풀풀 나던 향이 그대로 묻은 소맷자락이 더러워지든 말든, 내 코 밑을 닦아 내며 세상에서 제일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씨, 왜 이렇게 피가 많이 나.’

‘…….’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나는 O형이고 넌 B형이니까 네 피가 다 떨어지면 내가 피 나눠 줄 수 있어. 진짜야. 우린 음료수도 같은 캔에 입 대고 먹잖아.’

사실 난 그때도 네가 하는 말이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네가 그런 말을 해 줘서 좋았었다. 넌 항상 약한 사람을 위해 싸울 줄 아는 애였지만 그 대상이 나일 때는 유독 마음이 쓰이는 얼굴을 했으니까. 그 깃털 같은 무게마저 더 가져가고 싶어서.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로빈이 나한테 다정한 얼굴을 보여 준다는 이유만으로 걜 싸움판에 밀어 넣는 어린애가 아니고, 이로빈도 나로 인해 싸우지 않길 바랐다.

물론 그럴 일도 없겠지만.

난 고개를 들었다. 벌써 두 번째 우유갑을 비워 낸 무덤덤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저렇게 술 못 먹게 해.”

“…….”

“네가 그만 먹으라 하면 그만 먹을 거야. 너네 형.”

“…왜요?”

너희 형 취하면 웃잖아. 그리고 치대잖아.

이런 말을 하면 똑같은 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그게 왜요?’라고. 난 좀 더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서 뱉었다.

“술 냄새 나잖아.”

나처럼 이로빈에게로 고개를 돌린 얼굴이 굳어 가더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로빈의 동생이 심각하게 물었다.

“그래도… 자주 저러진 않죠?”

누가 동생이고 누가 형인지.

숙취에 절어 잠든 형을 심각한 표정으로 흘긋대며 묻는 얼굴에서는 선생님과 상담을 하러 온 학부모의 느낌마저 났다. 내가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길 기다리는 얼굴을 보던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이쯤 되니 이로빈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귀엽다. 너희 집 햄스터.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간 모양이었다. 머리를 만져 주려 했던 건데, 경계심 어린 눈빛만 마주하고는 손을 물렸다. 내 손을 흘끗 본 이로빈의 동생이 말했다.

“저 여자 친구 있는데요.”

“…근데?”

갑자기 축하라도 받으려고 그런 말 한 건 아닐 거고.

황당한 내 표정을 보고서도 이로빈의 동생은 꼿꼿했다. 똑바로 눈을 마주친 채로 또박또박 말하는 얼굴이 진지했다.

“아빠가 마음 없는 상대랑 스킨십 하면 안 된댔어요. 누군가를 오해하게 할 수 있다고.”

졸지에 고등학생에게 연애 강의를 들었다. 어이가 없길 잠시, 떠오른 것에 헛웃음이 났다. 눈을 돌린 보람도 없이, 이불 더미에 또 한 번 시선이 박혔다.

스킨십. 이로빈이랑 같이 있으면 열 번은 당하고, 아홉 번은 피하는데, 어쩌다 스친 한 번에 밤새워 뒤척이게 되는 것.

그 밤은 어제였고, 일주일 전이었고, 필름을 몇 번이나 돌린 과거였고….

분명히 웃은 것 같은데 말끝에는 내가 느낄 정도의 희미한 원망이 묻어나고 말았다. 씁쓸했다.

“같이 배웠는데 왜 너희 형은 몰라.”

아버님의 그런 가르침을 같이 들었을 게 뻔한 네 형은 오히려 누군가를 오해하게 하려고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구는데.

시선이 느껴지기에 고개를 돌렸다가 슬쩍 인상을 찌푸린 고등학생을 마주했다.

“…저희 형 욕하지 마요.”

“…….”

“저희 형이 비록 좀 쪽팔림을 몰라서 공공장소에서도 다 큰동생한테 입술 들이밀고, 술 먹으면 자꾸 이상한 질문 하고, 답장하라고 짜증 나게 굴어도.”

“…….”

“좋은 사람이에요.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도 잘하고.”

나보다 네가 더 욕하는 것 같은데. 감싸 주는 척하면서.

그래도 마지막 말을 들으니 툴툴대기 바쁜 사춘기 동생 역시 이로빈을 사랑한다는 건 잘 알겠다. 난 그 무해한 애정에 수저를 얹기로 했다.

“그럼 너도 내 친구 욕하지 마라.”

이로빈의 동생처럼 안 좋은 말을 붙여 보려 했는데 실패했다. 난 결국 고장 난 로봇처럼 결과값만 뱉었다.

“걔가 나한테 껌 줬단 말이야.”

비록 나눠 먹으라고 하긴 했어도. 슬쩍 인상을 찌푸린 이로빈의 동생이 눈을 깜박거리며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껌?

고개를 끄덕였더니 당연하게도 질문 하나가 더 넘어왔다.

“껌 좋아하세요?”

그 소리는 마치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날 혼내는 것 같았다. 어떻게 껌이 누군가를 더 좋아할 이유가 되겠냐며. 당연히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는지 목소리가 불퉁했다.

난 이로빈의 동생과 눈을 마주쳤다. 누군가와 꼭 닮은 눈을 마주한 채로, 누구나 보일 법한 그 정상적인 반응을 웃어넘기며, 난 오늘도 내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 환장해.”

***

“형.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괜찮다니까.”

“안 되겠다. 발목 다시 봐봐요.”

“강재균.”

이름을 부르고서야 재균이가 내 발목을 힐끔거리는 걸 멈췄다. 웬만하면 웃고 다니는 놈이 답지 않게 아까부터 표정이 심각했다. 정확히는 아까 실기 수업 때부터.

걱정과 속상함이 뒤죽박죽 섞인 얼굴을 한 재균이는 이미 내 가방까지 가져가 멨다. 그것까지만 해도 충분히 오버한 거였다. 좀 있으면 부축까지 하겠다고 할 기세라서 더 두고 보기가 그랬다. 난 웃으며 재균이의 앞머리를 흩뜨렸다.

“괜찮다니까, 인마. 춤이라도 춰야 믿을래?”

“…….”

“참고로 너처럼은 못 춘다. 그렇게 추려면 다시 태어나야 해.”

그제야 힘을 잔뜩 주고 있던 눈이 조금 순해지는 것도 같았다. 틈을 놓치지 않고 볼을 쿡 찌르자, 짜증을 낸 놈이 투덜거리며 나와 붙어 있던 몸을 떨어뜨렸다.

“아, 형은 진짜 웃음이 나와요?”

“응. 나 웃는 거 빼면 시체잖아.”

“…그 와중에 객관화 오지고 지랄이지.”

재균이가 속상해하는 게 싫어서 괜찮다고 하긴 했는데, 사실 오른쪽 발목이 아직도 좀 시큰거렸다. 그래도 그걸 티 내기는 싫어서 오른쪽 발목에 괜히 힘을 줬다. 당연히도 더 아팠다. 난 재균이가 앞을 보는 사이에 이를 한 번 악물고는 재빨리 입가에 웃음을 걸었다.

“너 방금 한 그거, 수진이 말투 아니야?”

“그런 게 어딨어요. 있으면 이수진이 저 따라 한 거겠죠. 제가 걜 왜 따라 해요.”

그래도 영혼의 단짝 이야기를 꺼내니까 굳어 있던 입이 좀 풀리는가 보다. 말이 나온 김에 왜 이렇게 안 오는지 알아봐야겠다며 핸드폰을 꺼내 드는 재균이를 보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걷던 재균이가 내가 걸음을 멈추자 이상함을 느끼고 돌아봤다. 재균이는 세 걸음 정도 앞서 있었다.

발목이 아파 멈춘 거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아래를 향하려는 시선을 이름을 부름으로 잡았다.

“재균아.”

“네.”

“너 오늘 일 수진이한테 말하지 마.”

“…왜요?”

“왜긴. 속상해할 게 뻔하니 그러지.”

주점 일이 있은 지 이제 겨우 일주일 정도 지났다. 카메라를 돌려주러 갔다가 김성욱을 비롯한 고학년 무리한테 붙들려 술을 먹은 날. 댄스부 뒤풀이에 다녀온 재균이는 주점 옆 나무에 기대 있는 우리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잔소리부터 했었다.

‘햄스터를 데리고. 미쳤어요?’

‘씨발, 강재균… 소리치지 마. 머리 울려.’

‘그래, 재균아… 조용히 얘기해도 우리 다 알아들어.’

세 번 토하고 온 수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오랜만에 주량을 넘겨서 마신 탓에 핑핑 도는 세상을 견뎌내야 했던 나도 예외는 없었다. 결국 술 깨기용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들고 편의점 앞에 앉았던 우리는 가장 술이 빨리 깬 수진이로부터 우울함 가득한 사과를 들어야 했다.

정확히는 나를 향한 사과였지만.

‘오빠. 죄송해요.’

‘그래. 나도 하나 남은 스크루 바 먹고 싶긴 했는데… 그래도 너한테는 양보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

‘장난치지 말구요 오빠. 제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잖아요.’

‘…….’

‘아무리 생각해도 김성욱 저 새끼 저렇게 집요하게 구는 거, 개강총회 뒤풀이 이후부터예요. 그전까지는 오빠한테 열등감 느껴도 표출도 못 하던 것들이 갑자기 저렇게 나대는 거 저도 꼴 보기 싫어 죽겠는데, 오빠야말로 오죽하겠어요. 원래처럼 과 행사 참여도 안 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데. 내가 그때 괜히 땅 파 가지고….’

‘그게 왜 네 잘못이야. 그 사람들이 나대는 데는 이유가 없어. 그냥 그 사람이 딱 거기까지인 거지. 원래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던 선배였으니 말 그대로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인 거고.’

‘아, 차라리 욕을 해요 오빠. 죄책감 들게 진짜.’

가로등 밑,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며 푸- 푸- 한숨을 쉬던 수진이의 우울한 얼굴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단순히 술에 취해 뱉은 말이 아닌지, 그 이후로 내 앞에서는 학생회 이야기도 잘 안 했다.

그런데 오늘도 그 연장선으로 김성욱이랑 또 부딪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난 고개를 저었다. 김성욱이 하는 저열한 서열 싸움에 괜히 죄 없는 후배를 끼우기 싫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사실 오늘도 수업 중에 일어난 일만 아니었다면 재균이도 모르게 했을 거다.

하여간 김성욱 미친 새끼. 2학년 때 다 떼는 실습수업 재수강해서 듣는 걸 쪽팔려 할 줄 알아야지, 후배들 앞에서 대련을 걸고 자빠졌다.

‘그래도 명색이 태권도 선수였잖아 너. 유도랑 태권도랑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닌데 왜 못 하겠다는 건데? 혹시 쫄리기라도 하냐?’

말 전체에 촘촘히 박혀 있던 가시를 생각하자 속이 거북했다. 유도도, 태권도도, 나도 모조리 무시한 말에 대련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나로서도 기분이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험악해진 분위기에 우리를 멈춘 강사가 아니었다면 김성욱의 얼굴을 한 대 쳤을지도 모른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된다. 운동을 그만뒀대도, 그런 식으로 운동했다는 걸 이용하면 결국에는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질 거다. 폭력이 무언가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배우기까지 해 놓고.

때마침 재균이가 날 불렀다. 내가 듣고 있는지 확인하는 듯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형?”

“어? 아, 미안. 어쨌든 내 말은 수진이한테 이야기하지 말자고. 잘 끝났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이야기 중이었는데, 중간에 딴생각한다고 듣지 않았다. 미안함에 황급히 말을 이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사람을 불러 놓고, 재균이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저기 한결이 형 아니에요?”

“어?”

재균이의 손가락을 따라가니 정말 남한결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기숙사관 라운지 테이블에 앉은 남한결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집중할 때 짓는 그 예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룸메이트 수칙을 정할 때 봤던 얼굴이기도 했다.

새삼 느끼지만, 남한결은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정말 차가워 보인다. 아마 사람들은 저런 남한결의 얼굴을 보고 말을 걸기 힘든 인상이라고 평가하는 모양이었다.

겪어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

“한결이 형!”

멀리 갈 것도 없다. 동아리에서 몇 번 보며 말을 놓기 시작했다던 재균이도 저렇게 인사할 정도니 말 다 했지. 혹시나 남한결과 같이 있던 사람을 방해할까 봐 말리려던 나는 때마침 일어서는 남한결 옆자리 사람을 보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마 뭘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한 모양이다. 나가자는 제스처를 하는 옆 사람을 향해 고개를 저은 남한결이 다가서는 재균이를 올려다봤다.

“어. 안녕.”

눈 부근을 꾹꾹 누르며 대답하는 얼굴이 나른했다. 재균이가 걸음을 빨리해서 뛰어간 것이기에 여전히 나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 덕분인지 남한결이 아직 날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난 내 앞을 우르르 지나가는 신입생 무리에 숨어 걸음을 옮기다가 남한결이 날 보지 못할 각도에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남한결을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다. 눈치챈 듯 내 쪽을 힐끔 보는 재균이에게 말하지 말라고 입술 위에 검지를 대어 보이자, 재균이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남한결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남한결은 내가 뒤에서 다가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재균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재균이의 말에 느리게나마 템포를 맞춰 답하는 목소리를 듣던 나는 발걸음의 소리를 더 죽였다.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남한결의 잘생긴 뒤통수가 가까워졌다. 이젠 극적인 마무리가 필요했다. 남한결의 어깨로 두 손을 뻗으며 일부러 두 발을 허공에 띄워 과장된 착지음을 내려던 나는,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그래서는 안 됐다는 걸 알았다.

“아아….”

“형! 미쳤어요?”

고대하던 남한결의 놀란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 뛰어오는 재균이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이건 좀 미친 거 같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친구 놀란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안 그래도 시큰거리던 발목을 무게까지 실어 바닥에 내려찍겠냐고. 아까 김성욱이랑 대련할 때 몸 닿았다고 멍청함이 옮은 걸까?

스스로 충격을 받을 만큼 멍청하게 군 덕분에 시큰하던 발목은 이제 화끈거렸다. 이거 잘못하면 병원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라고 생각할 때였다. 서늘한 온도가 발목에 달라붙은 건.

“어… 야!”

남한결이었다. 놀라서 작게 흘린 신음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발목을 쥐는 것에 그쳤던 손은 이제 발목을 주물러왔다. 그에 놀라기도 잠시, 나는 가까운 거리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남한결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파?”

그렇게 묻는 남한결의 얼굴이 더 아파 보였다. 방금까지도 얼굴 곳곳에 옅게 남아 있던 예민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얼굴로 남한결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난 얼떨떨한 상태로 일단 고개를 저었다.

“아프긴 한데, 심각한 건 아니고 잠깐 놀라서 그런 거야. 아까 수업하다 삐끗했거든.”

거짓말을 하나 확인하려는 것처럼, 남한결이 내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다행히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나 보다. 남한결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진짜야?”

“…네? 아, 네. 맞아요. 혹시 몰라서 의무실도 다녀오는 길이에요.”

재균이한테 한 번 더 확인을 마치고서야 남한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일어나기 위해 힘을 주던 나는 갑자기 코끝을 맴도는 향 때문에 멈칫해야만 했다. 내 팔꿈치를 잡아당겨 위로 끌어 올린 거로도 모자라서, 남한결이 내 오른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렀기 때문이다. 몸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놀랐다. 특히 남한결이 이런 스킨십에 질색하는 걸 알고 있어서 더더욱. 그러나 남한결은 지금 자신이 나랑 스킨십을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어 보였다. 거침없는 태도가 그랬고, 내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꼭 붙잡고 있는 몸이 그랬다.

“…너 뭐 하냐?”

“…….”

“야. 남한결.”

“집 안 갈 거야?”

무뚝뚝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 와중에도 남한결은 내 허리를 잡지 않은 손으로 가방을 챙기기 바빴다. 챙기기보다는 쓸어 담는 것에 가까운 손짓은 답지 않게 서두르고 있었다. 늘 깔끔하고 단정한 남한결의 가방 안으로 방금까지 남한결이 들여다보고 있던 노트와 펜, 노트북이 마구 쏟아졌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말리지 못한 나는, 옆에서 우리를 번갈아 지켜보던 재균이가 방금 남한결의 가방에서 떨어진 펜을 주워 주는 걸 보고서야 입을 다급히 열었다.

“아니, 집이야 당연히 가야지. 근데 네 부축 없이도 갈 수 있다고. 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나….”

재균이한테서 건네받은 펜을 가방 안으로 쑤셔 넣던 남한결이 멈칫했다. 고개가 휙 내 쪽으로 돌아왔다. 자못 사나운 기세였음에 놀라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신경 쓰지 말라고?”

적대적인 말투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난 가만히 남한결을 보고 있어야 했다.

“너야말로 신경 쓰지 마.”

“…….”

“내가 하던 일 그만하고 집에 가고 싶어졌다는데 네가 왜 하라 말라야.”

그러니까 남한결이 처음으로 내게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일그러뜨려 가며.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종류의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남한결. 너 오늘 야간작업… 뭐야. 가게?”

남한결의 이름을 부르며 테이블로 다가온 사람이 우리 사이에 흐르던 정체 모를 긴장감을 깼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날 확인한 은영이가 반가운 표정으로 눈인사를 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난 어색하게 눈인사를 돌려주고는 침을 삼켰다.

“어.”

남한결이 나와 시선을 끊고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가방을 거칠게 챙겨 들었다. 드디어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것처럼 은영이가 나와 남한결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한결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취합해서 PPT 만들 거니까 최상훈이랑 김민영 오면 모아서 보내라고 해.”

“…뭐? 그걸 너 혼자 어떻게 다 해. 오늘 야간작업하면서 같이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은영이의 황당한 목소리가 넘어오고서야 남한결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망설임 없이 말했다.

“나 오늘 야간작업 못 해.”

입고 있는 후드 집업 허리 부근의 천이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남한결이 잡은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해. 밤새우든 뭘 하든 문제없이 만들 테니까.”

“…….”

“난 상관없어.”

얼떨떨한 얼굴의 은영이에게서 그렇게 하겠다는 답이 나오자마자, 남한결이 걸음을 옮겼다.

***

어중간하게 끼어 있던 재균이를 보내고, 남한결과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단단히 잡혀 있어서인지 걷다 보니 남한결의 몸과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방금도 골반이 남한결의 허벅지에 부딪혔다.

학교에서 나올 때만 해도 부딪침을 의식하듯이 몸을 움찔거리던 남한결은 이제 그런 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야. 앞에 봐.”

가끔 코너를 도는 등 조심해야 할 때나 나한테 주의를 줄 때만 빼고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남한결 때문에 애가 타는 건 정작 내 쪽이었다.

더는 못 참겠다. 세 걸음에 한 번씩 남한결을 힐긋거리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야. 내가 진짜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보는 건데.”

“…….”

“너 왜 나한테 화내는데?”

스스로 한 바보짓 때문에 남한결의 놀란 얼굴도 못 봐서 억울한 건 나인데. 남한결이 화를 내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갔다. 물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긴 하지만.

“…….”

“…….”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이런 건 바로바로 풀어야 한다. 난 아까 남한결의 화난 얼굴을 불러오고는, 그 얼굴이 어느 부분에서 나타났는지를 떠올리며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던 거, 그런 뜻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아니야?”

남한결이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내 허리를 단단히 쥐고 있던 손의 힘이 느슨해졌다. 힘만 약해진 것뿐인데도, 남한결의 떨리는 손끝은 어렵사리 붙들고 있던 것을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앞을 본 채로 남한결이 입을 열었다. 남한결이 목울대가 힘겹게 넘어가는 게 보였다. 겨우 침을 삼키는 행위임에도 이상하게 무거워 보이는 행위였다. 남한결의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이로빈.”

“어.”

“알아.”

‘신경 쓰지 말라’는 내 말에 화를 내던 순간에도, 그런 뜻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는 말 같았다. 근데 그걸 알았다면 왜 화를 낸 걸까?

내 궁금증을 눈치챈 남한결이 말을 이었다.

“너무 잘 알아서… 가끔은 모르고 싶어.”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남한결에게 또 한 번 묻지는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슬프고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걔가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든 게 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날 망설이게 했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증상이었다. 정확히는 남한결이 그 앨범을 보여 준 뒤부터였다. 내가 어떤 사진을 짚어도 남한결은 그와 관련된 기억을 턱턱 말했다. 마치 그 어떤 것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사진과 그 안의 기억을 곱씹어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미안한 감정부터 드는 깨달음이었다. 남한결과 내가 같은 과거를 지나왔음에도 그 과거를 곱씹는 무게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우리가 떨어져 있던 시간에도 남한결은 혼자 열심히 그 기억을 곱씹었겠지. 내가 남한결을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순간들조차도.

“남한결.”

“그러니까 내 말은.”

남한결이 못 들은 양 말을 가로챘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신경 쓸 필요 없게 몸 관리 잘하라고.”

“…….”

“네 몸인데 별일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고.”

그제야 남한결이 날 응시했다. 아까의 사나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소와 같은 담담한 눈빛이었다. 난 입을 열려다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음을 깨닫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럴게.”

남한결은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고, 난 남한결의 어깨를 조금 더 힘을 줘서 그러쥐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집에 들어오고서야 남한결이 어깨에 두르고 있던 내 손을 조심스레 풀어냈다. 오는 내내 맴돌던 남한결의 향이 멀어졌다. 난 소파에 앉으며 내 옆에 선 남한결을 확인했다. 남한결이 방금 내팽개치듯 내려놓은 가방들이 발치에 뒹굴었다.

갑자기 몸을 낮춘다 싶더니,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소파 아래에 앉은 남한결이 조심스럽게 내 발목을 쥐었다. 발등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올라오던 하얗고 긴 손은 아까 통증을 느낀 부분을 꾹 짚었다. 아! 예고 없이 터진 신음에 내가 이를 악물자, 남한결이 방금 짚었던 부분에서 손을 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붕대 있어?”

“어?”

“붕대 있냐고. 뭐라도 감아 놔야 할 거 아냐. 병원은 죽어도 안 가겠다며.”

“…죽어도 안 가겠다는 말은 한 적 없는데. 그래도 사람이 죽으면 병원에 가야지.”

남한결이 웃어 주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얼굴로 쳐다보길래, 결국은 포기하고 구급상자가 있는 곳을 알려 줘야만 했다. 직접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더니 무시무시한 눈빛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남한결이 구급상자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구급상자를 건네받은 나는 다행히도 아래에 처박혀 있던 스포츠 테이프를 발견해 냈다. 버렸다고 생각해서 찾으면서도 자신이 없었는데, 엄마나 아빠가 넣어 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운동할 때는 달고 살던 물품인데, 이제는 있을지 없을지 확신하지 못하며 구급상자를 뒤진 게 웃기기도 했다. 씁쓸하게 웃길 잠시, 난 남한결에게 스포츠 테이프를 내밀었다.

내가 붕대를 감는지 안 감는지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던 남한결이 멈칫하더니 이내 테이프를 받아 들었다.

“나 발에 테이핑 좀 해 줘.”

“…….”

“어차피 하나 안 하나 지켜보다가 잔소리할 거잖아. 예방하는 셈 치고 그냥 너 시킬래. 안 그러면 다음에는 업어서 집에 데려다 놓을까 봐 겁난다, 야.”

장황한 말이었지만, 결론은 몸에 신경 쓰라는 남한결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는 걸 뜻하는 나 나름의 티 내기였다. 내 눈을 바라보던 남한결이 별말 없이 테이프를 뜯었다. 아까처럼 바닥에 앉아서 하려는 모양인지, 영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남한결이 몸을 숙였다. 지켜보던 난 소파 옆자리를 툭툭 쳤다.

“야, 옆에 앉아서 해. 뭐 하러 굳이 그 바닥에 앉아서 그러고 있냐.”

“…소파에 공간 없어.”

“공간이야 내면 되는 거고.”

뱉은 즉시 실행에 옮겼다. 소파 끝으로 몸을 당겨 앉은 내가 가까스로 만든 공간을 눈짓하자 남한결이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반대편 끝에 가 앉았다. 난 무릎을 세우고 발 한쪽을 들고는, 구급 키트에서 의료용 가위를 찾아낸 남한결이 길게 푼 테이프 끝을 자르는 모습을 구경했다.

남한결의 손이 발바닥에 닿았다. 갓 떼어 낸 테이프가 더 차가운지, 남한결의 손이 더 차가운지 알 수 없었다. 남한결은 꼼꼼하게도 테이프를 이리저리 움직여 발바닥과 발등을 감쌌다. 그렇게까지 조심할 필요 없는데도, 다친 부위에 힘을 주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내 발에 머리라도 박을 기세로 숙어진 까만 머리통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거실을 훑었다. 어느덧 시간은 5월 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3주 후면 기말고사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너 유럽 가는 거.”

남한결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난 그 눈을 맞춘 채로 질문했다.

“출발 날짜가 어떻게 된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한결이 다시 고개를 내렸다. 무덤덤한 대꾸가 함께 넘어왔다.

“6월 12일.”

“그렇게나 빨리? 시험 끝나는 주 아냐? 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바쁠 텐데?”

“어차피 이번 학기 수업이 좀 빨리 끝나서.”

“아, 리포트로 수업 대체하거나 그래서?”

“어.”

“아… 그러면 준비 걱정은 없겠네. 확실히.”

생각했던 것보다 날짜가 일렀다. 충격을 받은 것과 동시에 괜히 아쉬웠다. 어쩌면 룸메이트란 존재를 가져 본 게 처음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매일같이 얼굴 보던 사람을 못 만난다는 것만으로 벌써 그리움이 생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난 남한결의 얼굴을 한 번 더 흘끔거렸다. 남한결이 잘라 놓은 테이프는 적절하게 발을 감쌌고, 이제 마지막 마무리 작업만 하면 깔끔하게 끝날 것이다. 마치 이번 학기가 끝나는 순간 남한결이 떠나고, 우리가 한동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참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난 결국 그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뱉어내고 말았다.

“야, 한결아. 너 그냥 안 가면 안 되냐?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은데.”

정말 그러길 바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왕복 비행깃값이며, 숙소며, 그 외 잡아 놓았을 계획이 보고 싶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투정으로 엎어질 거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

근데 테이프를 붙이던 행위마저 멈춘 채 날 보는 남한결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내 농담을 한없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웃으면서라도 부연 설명을 덧붙여야만 했다.

“안 되는 거 아니까 표정 풀어, 인마. 농담도 못 하겠네.”

“…….”

“보고 싶은 건 참아 보지 뭐. 어차피 두 달인데. 대신 연락은 가끔 하기다. 자주는 못 해도 생각날 때만이라도. 방학 됐다고 쌩까기 없어. 알지?”

이번엔 나름대로 진지하게 한 말이었는데 남한결은 대답 없이 눈을 내리깔기만 했다. 아까부터 꾹 다물려 있기만 한 입술을 바라보던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이 새끼, 여행 가면 아예 연락 안 할 예정이었던 거 아냐?

그러고 보면 학기 초에 내 연락이란 연락은 다 씹은 전적이 있는 놈이었다. 같이 사는데도 그랬는데, 얼굴도 오래 못 볼 외국에서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더할 수도 있겠지.

딱히 친구와의 연락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두 달 동안 남한결로부터 답장 한 번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 기분이 별로였다. 연락이 두절되면 남한결이 외국에서 빵 따위로 하루를 버티지는 않는지, 친구는 잘 사귀고 있는지 따위를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난 결국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남한결의 어깨부터 잡아챘다.

“야. 왜 대답을 안 해. 너 진짜 방학 동안 나 쌩까려고 했냐?”

내 입에서 결국 그 말이 나가고서야 남한결이 내게 잡힌 어깨를 비틀어 빼냈다. 한숨이 묻은 무뚝뚝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말이 왜 안 돼. 너라면 못 할 것도 없지.”

“…….”

“하다못해 축제 때 페이스페인팅 하는 것도 말 안 해 줬으면서.”

남한결은 대답 없이 방금 붙인 테이프 끝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테이핑이 끝났음에도 손이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넌….”

“…….”

“그런 게 왜 궁금해, 대체.”

얼핏 원망스러움마저 느껴지는 말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내가 멈칫한 사이, 남한결이 한 번 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내 시선, 그리고 더 나아가 내 대답까지 피하려는 것처럼.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얼음 가져올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부엌으로 사라진 남한결은 곧 얼음으로 가득 채운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남한결의 말을 곱씹느라 정말 가만히 있어야 했던 나는, 발목에 닿는 시리도록 차가운 느낌에 인상부터 찡그렸다.

“으….”

화장실 쪽으로 가는 듯하던 남한결은 수건을 들고 와서 그걸로 얼음 봉지를 감쌌다. 확실히 아까보다 자극이 덜한 냉기가 다시 내 발목에 닿았다.

난 수건을 댄 채로 가만히 있는 남한결의 얼굴을 확인했다.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함부로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은 반칙이었다. 특히나 도대체 왜 그런 사소한 것들이 궁금하냐는 질문을 할 거라면.

난 남한결의 눈치를 살피며 수건의 끝을 잡아당겼다. 결국 나는 남한결이 애써 피한 보람이 없는 대답을 해야만 했다. 비록 남한결은 원치 않을지언정,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다.

“그, 사실 내가 원래 이렇게 집요하게 굴진 않거든. 근데 나한테 이렇게 잘하니까 네가 자꾸 더 궁금해지나 봐. 나도 너에 대해 좀 더 알아서 그만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알다시피… 내가 너랑 관련된 기억도 잊고 좀… 그랬잖아.”

“…….”

“부담스러웠으면 미안.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생각해 보니 네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네.”

동시에 손을 뻗었다. 언제까지고 남한결이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수고를 덜어 줘야겠다 싶어서였다.

“줘. 이제 내가 할게.”

수건을 넘겨받으려고 한 건데, 생각에 잠겨 아래로 눈을 내리깔고 있던 남한결은 내가 손을 뻗을 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손끝이 스친 것과 동시에 남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

“…….”

지금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냐고 물어보면 남한결이 또 부담스러워할까. 조금 붉어진 눈가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남한결이 시선을 끊었다. 들고 있던 파란 수건이 곧 내 손으로 건너왔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남한결이 허탈하다는 듯 말했다.

“너야말로 뭔 말을 못 하게 하네.”

아까 내 발목을 테이핑한 테이프와 가위를 응급 키트에 다시 넣어 두고서야 남한결의 시선이 돌아왔다. 입가에는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걸렸는데, 이상하게도 그 얼굴이 더 씁쓸해 보였다.

“부담스러운 거 아냐.”

“…….”

“그냥… 대답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어서 그래.”

그건 왜일까. 내가 모르는 게 많아서? 그러나 차마 소리 내어 묻기도 전에 남한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대화의 종료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까 현관문 앞에 내려놓았던 내 가방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일어서려는 나를 눈으로 제지한 남한결이 대신 걸음을 옮겼다.

남한결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낼 때까지도 진동은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전화가 온 것 같았다. 내게 핸드폰을 건네기 전 남한결이 화면을 짧게나마 응시했다. 찰나라고 불릴 만한 시간이었다. 화면에서 눈을 뗀 남한결이 내게 핸드폰을 건넸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세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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