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3권) (11/31)

“야. 내가 이번에 촬영 들어가는 주말 드라마의 주인공이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놈이거든? 근데 걔도 너 같이는 안 해, 인마.”

굳이 너까지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세 번은 말한 것 같은데, 하품을 찍찍하면서도 강현은 옆에 서서 자꾸 필요 없는 말들을 보탰다. 아주 가끔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서 줄 때도 있었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거슬리기만 했다. 방금도 그랬다. 난 강현이 침대 밑에서 주워 준 양말 한 쪽을 다시 강현의 침대로 던졌다.

하다 하다 자신의 양말이 뭔지도 모른다, 쟨.

“너 돈이 썩어 나서 연예인 안 하는 거냐?”

“…….”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당일 비행기를 그 가격에 끊는 놈이 어디 있냐? 그것도 애인도 아니고 좋아하는 놈 보러 간다고… 참 나….”

난 뒤에서 떠드는 강현을 무시한 채로 마지막 짐을 캐리어 안에 던져 넣었다. 카메라는 들고 다니는 가방에 넣어 뒀고, 여권도 챙겼다. 새로 끊은 비행기 표는 공항에서 발권받으면 되니까, 충동적으로 결정된 한국행이래도 딱히 문제 되는 건 없었다.

난 준비를 모두 마친 걸 확인하고 방을 한 번 둘러봤다.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시선이 꽂히는 침대맡이나, 침대와 벽 사이의 빈곳은 애써 무시한 채로 마음을 돌렸다. 이미 새벽에 두 번이나 더 뒤집어 본 곳이었다. 그때 절대 보이지 않던 사진이 이제야 나타날 리 없었다.

택시는 아래서 부르면 될 거 같고. 난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몸을 돌렸다. 강현에게는 대충 눈인사를 건넸다.

“야.”

캐리어를 끄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강현이 앞을 막아섰다.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는 얼굴이 입을 열 기미가 안 보이길래, 옆으로 발을 옮겼다. 강현이 또 앞을 막아섰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거야. 눈이 마주친 강현이 대놓고 딴청을 피웠다. 난 더는 참지 않고 강현의 발을 꾹 밟았다.

“아악!”

팔짝 뛴 강현은 그러면서도 앞에서 비키진 않았다. 난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했다.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나가는 거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여유까지는 없었다.

“비켜.”

“아씨, 가만 보면 성격 존나 더럽다니까. 걔도 네가 이런 성격인 거 아냐?”

“알면 뭐.”

이로빈은 오히려 잘했다고 손뼉을 칠 거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자신이 직접 강현의 발을 밟았을지도.

불쑥 떠오른 얼굴은 그래도 어제만큼 죽을 것 같은 감정을 선사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에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 걸지도.

충북 고현읍… 그새 외우고 만 목적지를 떠올리니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강현을 밀치려다가 멈칫했다.

“야야. 이거.”

밟힌 발을 쥐고 오버해서 깡충깡충 뛰던 강현은 두 발로 똑바로 선 채로 한쪽 눈썹을 긁으며 날 바라보았다. 난 강현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려 강현이 내 쪽으로 내민 것을 응시했다.

“…….”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강현은 뻘쭘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더니, 내 눈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내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듯 눈도 마주치지 않고 줄줄 늘어놓은 말들은 귓가로 닿았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새벽에 너, 그 티켓 다시 끊는다고 지랄할 때 담배 사러 잠시 내려갔었는데 올라오다가 집주인 만났어. 청소기 들고 있더라고.”

“…….”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까 어제 우리 방 청소했던 거 맞대서. 손짓, 발짓 다 해서 물어봤더니 쓰레기통 뒤져서… 그거 찾아 주더라.”

“…….”

“너 막 그림 그린 종이랑 섞여 있었던 데다가 엄청 꼬질꼬질하고 낡아서 중요한 거라고 생각을 못 한 모양이던데.”

“…….”

“뭐, 보니까 왜 그런지 알 것도 같고.”

강현이 가감 없이 뱉은 것처럼 말 그대로 꼬질꼬질한 사진은 손때가 묻어 있었다. 너무 자주 들여봐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손때 묻은 사진에는 때 묻지 않은 이로빈과 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둘 다 웃고 있는 몇 안 되는 사진이기도 했다.

난 한참을 사진의 귀퉁이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돌아올 것으로 생각지 못했던 것이 돌아왔다. 그것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뭐 해? 그렇게 찾았으면서.”

“…….”

“받아, 새끼야. 얼른.”

강현이 답답하다는 듯 내 손을 펴고는 그 위로 접힌 사진을 올려 뒀다.

뭐라 말을 해야 할까. 목 너머에서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말을 골랐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고맙다.”

난 조용히 말하며 강현과 눈을 맞췄다. 강현이 헛기침을 하며 머리를 긁었다. 좋은 일을 해 놓고 민망해하는 얼굴을 보니 쟤한테 이런 일이 흔치는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상처럼 어색한 표정을 짓던 강현이 등을 떠밀었다.

“가기나 해, 새끼야.”

“…….”

“걔 앞에서는 어제처럼 질질 짜지 말고.”

지는 일주일 내내 질질 짜 놓고선, 고작 하루 질질 짠 날 아주 울보 취급하고 취급했다. 그 뻔뻔함에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잠시, 문고리를 잡던 나는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야.”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강현의 뚱한 시선이 돌아왔다. 안 하려던 짓을 하니 민망했지만 꿋꿋이 입을 열었다.

“…….”

그래도 쟤가 사진을 찾아 줬으니까 나도 뭐 하나쯤은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비록 쓸모없는 충고처럼 여겨질 수는 있대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죽고 싶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있으니까.

난 오른손에 쥔 사진의 귀퉁이를 매만지며 말을 꺼냈다. 반질반질하게 닳은 귀퉁이는 언제나 그렇듯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난 한 번도 걔를 질투해 본 적이 없어.”

“…….”

“그게 뭐든, 걔가 가져서 당연한 거로 생각했고.”

“…….”

“내가 더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게 슬펐지.”

그 슬픔이란 것이 목을 꽉 죄어 올 때는 도망쳐야만 했다. 지금처럼. 근데 참 웃기지. 도망치게 하는 사람이 다시 달려가게 하는 사람과 같다는 사실이.

난 고개를 들어 강현을 응시했다.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동요하는 강현의 눈이 벌써 빨갰다.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데.”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는 눈빛은 이미 답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강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걸 어떻게든 부정하려 들었다. 난 지난 일주일간 지겹도록 들은 레퍼토리를 생각했다.

‘내가 좋은 드라마에 들어가는 게 왜 네가 자신을 한심하게 느끼는 일이 되냐고.’

- …….

‘그게 내 잘못이야? 씨발… 난 진짜 네가 이럴 거라고는 생각도… 상상도 못 했어…. 축하한다는 말은 못 해도 이러는 건… 이러는 건 아니잖아.’

- …….

‘내가… 내가 잘 되는 걸 못 보겠으니 헤어지자는 말이 지금 3년 넘게 사귄 애인한테 할 말이냐고. 개새끼야.’

- …….

‘말해 봐.’

- …….

‘아냐 말하지 마… 말하지 말라고, 제발….’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다툼은 늘 강현의 흐느낌으로 끝났고, 제가 패배자인 척을 했을 건너편의 남자는 그런 강현을 내버려 뒀다. 그가 3년간 사귄 애인에게 할 수 있었던 배려는 겨우 그쯤인 모양이었다. 자신을 어떻게든 잊어 보려 파리까지 날아간 애인이 거는 전화를 무시하지 못하고 그 애원을 들어 줄 정도. 딱 거기까지.

가끔은 새벽에 깨어 벽을 보면서 걔의 잦아드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삐뚠 생각이지만, 사실 어떨 때는 걔가 부러웠다.

적어도 쟨 솔직하기라도 하니까.

내가 이로빈한테 전화를 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여보세요?” 하는 흔하디흔한 인사말을 듣고는, 잠시간의 정적 뒤에 넘어오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마저 듣고 싶어 숨을 죽이겠지.

전화가 끊어지고 건너편에 이로빈은커녕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울 수 있을 것이다. 걜 향한 내 마음은 늘 그랬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살다 보면 몰라서 할 수 없는 일보다는 아는데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 강현에게는 이 일이 그런 것이다. 쟨 애인이 개새끼인 걸 몰라서 헤어질 수가 없는 게 아니라, 아는데도 헤어질 수가 없는 거다.

난 고개를 떨구는 강현을 모른 체하며, 새벽부터 환하게 켜져 있어야만 했던 방의 불을 꺼 주기로 했다. 달칵. 스위치가 내려갔고, 강현이 코를 훌쩍였다.

“간다.”

쟬 도망치게 만든 사람은 부디 쟤를 또 달리게 할 사람이 아니길.

비록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

출국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이 되자, 내가 12시간도 되지 않아 이 모든 일을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내일 보기로 한 미술관도, 그다음 날 들르기로 했던 고등학교 때 친구의 집조차도 순식간에 등진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그래 놓고는 한국에 도착하면 몇 시일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가장 빠르게 이로빈을 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생각하면서.

“…미친놈.”

자조하듯 웃다가 핸드폰을 힘주어 쥐었다. 멈칫하던 손가락은 그래도 결국 제가 가장 가고 싶은 길로 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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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빈: 나도 파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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