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1)

끼익.

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이 뻑뻑한 걸 보니 그 잠깐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큰일 날 뻔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방 밖에서부터 익히 알고 있는 단정한 발소리가 들렸다. 내게 별로 남은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다행히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 가방을 챙겨 두고, 옷도 챙겨 입었다. 난 가방을 집어 들고는 뛰듯이 방을 가로질러 황급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어….”

“…….”

굿 타이밍.

발소리가 멎었고, 대신 시선이 느껴졌다. 신발장으로 가기 위해 내 방 앞을 지나고 있던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흰색의 차이나 칼라 셔츠에 남색 슬랙스. 옷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드러난 목선을 따라 시선을 내리던 나는 하얀 가슴팍으로 시선이 미끄러지기 전에 헛기침하며 시선을 틀었다.

“수업 가?”

멈칫한 남한결에게서 대답이 넘어왔다.

“어.”

슬쩍 확인한 시계는 8시 20분이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집에서 학교까지는 겨우 10분이 걸리는데, 빨라 봐야 15분 전에 집을 나서는 나와 달리 남한결은 여유를 두고 출발하는 편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혹시나 해서 준비했지만 정말 남한결은 개강 첫날부터 1교시 수업을 들으러 가는 성실한 학생의 모습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난 등 뒤로 문을 닫으며 남한결에게 다가섰다.

“같이 가자.”

“…같이?”

“어. 나도 1교시야.”

나처럼 시계를 확인한 남한결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한 학기 동안 같이 지내며 생활 패턴을 파악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남한결의 1학기 생활 패턴을 아는 것처럼, 남한결도 1학기의 나를 알고 있기에 이렇게 이르게 집을 나서는 내가 낯선 거겠지.

그러고 보니 1학기에는 아침에 같이 등교한 적이 없었다. 등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생쇼를 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고. 당연하게 건너오는 남한결의 의아한 시선을 모른 척하며 난 먼저 신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자. 이러다 수업 늦겠다.”

아, 오버했다. 방금 말은 하지 말걸. 존나 수상해 보였을 것 같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열심히 학교에 다닐 걸 그랬다. 그러면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 할 법한 평범한 말을 하면서 이렇게 찔릴 일은 없을 텐데.

나도 모르게 흘끔 남한결 쪽을 한 번 확인했다. 다행히도 남한결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옆으로 다가와서 로퍼를 신는 남한결에게 샴푸 향이 훅 풍겼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 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항상 완벽하게 갖춰진 모습만 봐서 월요일 아침에는 남한결도 이렇게 조금 흐트러진 모습으로 등교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물론 그게 가까이 다가서야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빈틈이라고는 해도.

“이로빈?”

나도 모르게 너무 뚫어져라 쳐다봤던 모양이다. 문을 잡은 채 날 기다리고 있던 남한결의 목소리를 듣고는 정신을 차렸다. 깜짝 놀라 시선부터 끊은 나는 잘 묶여 있는 운동화 끈을 괜히 한 번 더 매만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어…미안. 가자.”

그나저나 이번 학기 월요일에는 1교시를 듣는구나. 기억해 둬야지.

고작 평소보다 20분 정도 빨리 출발한 것뿐인데 기분이 색달랐다. 물론 그건 옆에서 걷고 있는 남한결의 존재 때문인 게 컸지만.

이 시간대는 아니더라도 이 길을 같이 걸었던 적은 있을 텐데,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그때에 비해서, 지금은 우리가 걷는 이 길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직 여름을 채 떨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가로수들이나, 남자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에는 좁은 인도나, 그 덕분에 바로 옆에 선 남한결에게서 선명하게 풍겨 오는 향이나.

난 방금 내가 무심결에 흔든 왼손이 남한결의 손등을 스칠 뻔했다는 걸 알고 어색하게 왼손을 말아 쥐었다. 손끝이 찌릿했다.

그 찌릿함은 내가 학교까지 오는 내내 남한결한테 묻고 싶었던 질문을 떠올리게 하기에도 충분했다. 난 슬쩍 옆에 선 남한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운을 뗐다.

“저기… 남한결.”

앞을 보고 걷던 남한결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서서히 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횡단보도만 건너면 학교 정문이었다. 우리처럼 신호를 기다리며 드문드문 서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남한결만이 시야를 꽉 메웠다. 난 어색하게 머리를 긁으며 남한결과 눈을 맞췄다.

“오늘 바빠?”

“…….”

“안 바쁘면 수업 끝나고 같이 점심이나 먹으면 어떨까 해서.”

남한결이 대답 대신 날 빤히 봤다. 난 황급히 말을 보태며 남한결의 눈치를 봤다.

“개강 첫날이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그때 시골에서 헤어진 다음에 처음 보는 거잖아. 너 어젯밤에야 도착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고….”

지난 목요일, 남한결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근데 같이 집에 오진 못했다. 터미널에 도착한 남한결이 친형의 집에 들렀다 오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옆자리에 앉은 남한결을 의식하느라 넋을 놓았던 당시에는 그러려니 하고 헤어졌는데, 막상 혼자 집에 돌아가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이 월요일이니 생각해 보면 고작 삼 일이었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좋아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것들은 참 별게 된다. 마치 내가 지금 밥 먹자는 그 흔한 제안에 수많은 이유와 단서를 붙여야 하는 것처럼. 어떻게 해야 이게 데이트 신청같이 안 들리면서 동시에 네가 정말 이걸 단순히 룸메이트와의 한 끼 식사로만 여기지 않을지 피 터지게 고민해야 했다.

우리 앞의 신호가 바뀔 때까지도 남한결은 딱히 대답이 없었다. 난 초록빛을 내뿜는 신호등을 초조하게 응시하다가 남한결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쁘면 꼭 오늘이 아니어도….”

“저녁.”

“어?”

“점심 말고 저녁 먹자고.”

“…진짜?”

분명 들었음에도 다시 한번 물어야만 했다. 그 정도로 믿기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인 남한결이 횡단보도를 눈짓했다. 신호가 바뀌기 전에 건너자는 신호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신호가 바뀌기 전까지 겨우 13초가 남아 있었다. 난 정신을 차리고 얼른 걸음을 옮겼다.

정문을 통과한 남한결이 멈칫하더니 이내 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수업 어디서 들어?”

난 대충 미대 쪽에 있는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남한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난 남한결의 옆으로 따라붙어 확인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한 번 더 물었다.

“너 근데 진짜 나랑 저녁 먹어도 괜찮은 거야?”

“…왜. 너 저녁에는 시간 안 돼?”

“어? 아니, 아니, 돼. 완전 되는데….”

부담스러워 할까 봐 무난하게 점심 먹자고 한 건데 먼저 저녁을 먹자고 제안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횡설수설하는 내 말에도 딱히 별말 없이 기다리는 남한결을 보니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뱃속부터 간질거림이 퍼지는 것만 같았다. 난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날 흘깃 돌아보는 남한결의 시선이 느껴졌다. 난 어색하게 목덜미를 매만졌다.

“좋아서 그러지. 안 믿겨서….”

왜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확인한 나는 짧은 헛기침 후 쑥스럽게나마 입을 열었다.

“저녁 먹자고 해 줄 줄은 몰랐거든.”

몇 초 후, 남한결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멎은 것도 동시였다. 난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몰랐는데, 어느새 우리는 미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 속도를 보니 어느새 1교시 수업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난 남한결과 시선을 맞췄다.

슬쩍 내 눈을 피한 남한결이 내 뒤에 있는 건물을 눈짓했다.

“들어가.”

“어? 어….”

먼저 들어가라고 해 놓고 남한결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마치 내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서야 가려는 것처럼. 뒤의 건물을 돌아본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너 먼저 들어가.”

“…….”

“나 수업 전에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들어가려고.”

주머니에 있는 담뱃갑을 슬쩍 들어 흔들어 보이자 남한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았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단정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갑자기 떠오른 것에 다급하게 남한결을 불렀다.

“남한결!”

꽤 거리가 벌어졌는데도 미대 옆문으로 들어서던 남한결이 금세 뒤돌았다. 난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

“일곱 시에 볼까?”

방금 돌아본 속도를 보았을 때는 잘 들리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비언어적인 표현도 곁들였다. 두 손을 다 동원해 일곱 개의 손가락을 펴서는 흔들었다.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눈가를 찡그리던 남한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입꼬리가 얼핏 올라간 것도 같았다. 그도 잠깐, 남한결이 곧 내게만 보일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았다.

난 남한결이 문을 통해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서야 들고 있던 손가락을 내렸다.

“…….”

남한결이 더는 날 볼 수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긴장감에 잊고 있던 피로가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랐다. 난 하품을 하며 뒤돌았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언덕을 내려오며 확인한 핸드폰에는 방금 도착한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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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균: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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